12월 1일 갑인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3일 병진
풍릉 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발인(發靷) 때 빈궁(嬪宮)이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하관(下棺)할 때에도 망곡(望哭)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23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경기와 삼남(三南)의 재상(災傷)이 우심(尤甚)한 고을에는 환곡(還穀)의 봉납을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호서(湖西)는 지차(之次)의 고을도 봉납을 정지시킬 것을 명하였다.
12월 4일 정사
윤유(尹游)를 병조 판서로,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정언으로, 김취로(金取魯)를 판돈녕으로 삼았다.
어사(御史) 조한위(趙漢緯)를 보내어 함경도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12월 6일 기미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12월 7일 경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순(尹淳)을 함경 감사로 삼았다.
헌부 【장령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해미 현감(海美縣監) 황응수(黃應洙)는 백성의 재물을 긁어들여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만을 힘쓰고 있습니다. 경내(境內)의 백성이 떠돌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서로 따라 생기는데도 곡식을 모아 돈으로 바꾸어 본가(本家)로 수송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먼 외방의 풍문은 반드시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인신(印信)을 위조(僞造)한 죄인 박태준(朴太俊)을 감사(減死)시키라는 명은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에서 나온 조처이기는 합니다만, 선조(先朝)에서 법을 세운 뜻이 지엄하니, 청컨대,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율에 의거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정언 이주진(李周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충주(忠州)의 영장(營將) 구희(具僖)는 도적을 다스리는 정사(政事)에 전혀 힘을 써서 거행하지 않았던 탓으로 도적이 나그네를 칼로 베어 시체가 길가에 널려 있는데도 끝내 기포(譏捕)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살옥 죄인(殺獄罪人) 설경신(薛京信)은 직접 자기 딸을 칼로 베었고 간부(姦夫)를 때려 죽였으니, 감사(減死)하라는 명을 정지시키고 율에 의거해 정법(正法)에 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8일 신유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하였다. 상진미(常賑米) 8백 석(石)을 해서(海西)에 획급하도록 명하였는데, 황해 감사 박사수(朴師洙)의 청을 따른 것이다.
우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여현(礪峴)에 토성(土城)을 축조하여 금천(金川)의 읍치(邑治)를 그리로 옮기자는 의논을 진달하고, 또 대흥 산성(大興山城)의 수비가 허술함과 백치진(白峙鎭)의 관애(關阨)에 농토를 일군 폐단에 대해 진달하면서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직접 형편을 살펴 장문(狀聞)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송도 교수(松都敎授)를 혁파(革罷)하고 분교관(分敎官) 1원(員)을 설치하되 만 60개월이 된 뒤에 능관(陵官)으로 승천(陞遷)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개성 유수(開城留守) 박사익(朴師益)이 장계하기를,
"근래 송도의 문무과(文武科)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청직(淸職)에 통의(通擬)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사인(士人)들도 수용(收用)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우의정 서명균도 거듭 청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12월 10일 계해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에서 굶주린 백성이 사람의 시체를 구워서 먹은 변고가 있었다. 감사(監司) 유엄(柳儼)이 아뢰어 그 현감(縣監) 임철(任轍)을 파직시켰다.
도승지 조명익(趙明翼) 등이 강진현에서 굶주린 사람이 시체를 구워 먹은 변고를 인하여 진계(陣戒)하기를,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는 방도로는 수령을 신중히 가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이어 삼사(三司)의 신하들을 재읍(災邑)의 수령으로 차견(差遣)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임금이 강진현의 변고로 인해 특별히 자책(自責)하는 교서(敎書)를 내리고, 이어 감선(減膳)하라고 명하였다. 또 호남에서 진상(進上)하는 물선(物膳)은 맥추(麥秋)까지 한도로 봉진을 정지토록 하였다. 이어 곧 대신(大臣)과 진청 당상(賑廳堂上)·탁지 장관(度支長官)을 불러 접견하고 진제책(賑濟策)을 상의하여 강구하느라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이광덕(李匡德)을 호남 위유 감진사(湖南慰諭監賑使)로, 김상익(金尙翼)을 호서 감진 어사(湖西監賑御史)로, 이종백(李宗白)을 영남 감진 어사(嶺南監賑御史)로 삼았다. 이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삼남(三南)과 경기(京畿)의 우심(尤甚)한 고을은 금년의 대동미(大同米)를 특별히 2두(斗)씩 감하게 하고 기보포(騎保布)281) 도 작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견감(蠲減)하게 하였다.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을 감하게 하였다. 이때 경비를 크게 줄였는데 연신(筵臣)이 을사년282) ·병오년283) 의 전례를 인용하여 감할 것을 청했기 때문에 따른 것이다. 1품은 감할 것이 쌀 3두(斗)에 콩 2두, 종2품 이상은 쌀 2두에 콩 2두, 정3품은 쌀 2두에 콩 1두, 6품 이상은 쌀 1두에 콩 1두였다. 참하(參下)와 잡직(雜職)은 감하지 않았다. 이어 내궁방(內弓房)과 상방(尙方)의 별조(別造)를 일체 아울러 정지하게 하였다.
특별히 응교 이흡(李潝)을 파견하여 남양(南陽)·교하(交河) 두 고을을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12월 11일 갑자
반궁(泮宮)에 감귤(柑橘)을 반하(頒下)하고 나서 이어 선비들을 시험보였다.
민응수(閔應洙)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수찬 한현모(韓顯謨)가 강진(康津)에서의 변고로 인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주자(朱子)의 말에 ‘구황(救荒)에는 끝내 좋은 방책이 없는 것이고 오직 하늘을 감동시켜 화기(和氣)를 불러들임으로써 풍양(豐穰)을 이루게 하는 것이 제일가는 급무이다.’ 했는데, 신은 주자의 말을 외어 헌근지성(獻芹之誠)284) 으로 바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12월 12일 을축
감제(柑製)에서 으뜸을 차지한 사람 서명신(徐命臣)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제주(濟州)는 먼 바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식량은 단지 조정의 구획(區劃)에만 달려 있을 뿐이다. 방금 진상물(進上物)을 가지고 온 사람의 말을 듣고 또 본주(本州)의 장문(狀聞)을 살펴보니, 매우 참혹하다고 할 만하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제때에 즉시 구획하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호남의 대동미 2천 석과 저치미 3천 석을 배로 운반하여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고, 또 부교리 심성희(沈聖希)를 본주(本州)의 어사(御史)로 차견하여 운송을 독책하고 진구(賑救)를 감독하게 하였다.
12월 13일 병인
사헌부 【장령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원성 현감(原城縣監) 이우하(李宇夏)는 늙은데다 고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얼굴을 볼 수가 없고 아전들은 이를 기화로 간사한 짓을 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원 【정언 이주진(李周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기(京畿) 연변 고을의 군보미(軍保米)285) 를 세선(稅船)에 더 실어 상납하게 함으로써 군인(軍人)들이 스스로 바치는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경기(京畿) 재읍(災邑)에 이전(移轉)할 곡식 가운데 이미 받아들인 것은 그대로 본고을에 유치시키게 하고,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특별히 그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특지(特旨)로 좌윤(左尹) 유척기(兪拓基)를 출척(黜斥)시켜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보임시키게 하였다. 누차 소명(召命)을 어기고 사진(仕進)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월 15일 무진
김취로(金取魯)를 예조 판서로, 조현명(趙顯命)을 한성 좌윤(漢城左尹)으로, 황정(黃晸)을 승지로, 윤혜교(尹惠敎)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유최기(兪最基)를 지평으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로, 심성희(沈聖希)를 부교리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7일 경오
사은 겸 진하 정사(謝恩兼陳賀正使) 이의현(李宜顯), 부사(副使) 조최수(趙最壽), 서장관(書狀官) 한덕후(韓德厚)가 청국(淸國)에서 돌아왔다.
12월 18일 신미
심명열(沈命說)을 정언으로, 민사연(閔思淵)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전옥(典獄)의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는데, 날씨가 몹시 추웠기 때문이다.
병조 당상(兵曹堂上)은 중추(重推)하고 경조 낭청(京兆郞廳)은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도성의 문밖에서 떠돌며 걸식하다가 얼어죽은 사람의 숫자가 1백 명이 넘었고, 궐내(闕內)에서 수직(守直)하는 향군(鄕軍) 가운데도 굶주리다가 얼어죽은 사람이 또한 16명이나 되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수찬 한현모(韓顯謨)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대신(臺臣)들의 피사(避辭)를 살펴보건대, 대개 박문수(朴文秀)가 연석(筵席)에서 공척한 데서 말미암았는데, 이른바 ‘노예(奴隷)’라고 운운한 것은 놀랍고 패려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저 훈재(勳宰)가 전후의 연석에서 주달한 것은 광란(狂亂)한 잠꼬대에다가 속되고 패려스러운 말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존엄한 자리에서는 저절로 근신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인데 어찌하여 박문수는 유독 이런 본성이 없단 말입니까? 속으로는 궤휼(詭譎)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우직함을 가탁하고 있으니, 무거운 견책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상소에 청한 것은 너무 지나침을 면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앞서 박문수가 대신들 가운데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논척(論斥)하면서 ‘당로자(當路者)를 아첨해 섬기는 데는 마치 노예와 같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었다. 이리하여 대신인 이주진(李周鎭)·민정(閔珽)·유건기(兪健基) 등이 서로 잇따라 피혐했기 때문에 한현모의 말이 이러했던 것이다. 그뒤 지평 유최기(兪最基)도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아! 저 훈재(勳宰)가 멋대로 분노를 내뿜어 진신(搢紳)들을 능멸하고 짓밟고 있습니다. 자신이 동방삭(東方朔)286) 도 아니면서 해학(諧謔)하는 기교를 부리고 우맹(優孟)287) 의 태도를 모방하여 광변(狂辯)을 가탁하여 기만하는 술책을 마구 부리고 있으니, 보고 듣는 사람으로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의당 엄한 질책을 가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경계할 줄 알게 하소서."
하였다. 박문수가 상소하여 대변(對辨)하기를,
"신은 기(氣)가 거칠고 말이 거칠어서 법도 속에 들어가지 못하나 지난번 연석(筵席)에서의 실언(失言)은 사유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호남에서 사람이 사람을 구워먹은 변고로 인하여 성상께서 잠을 편안히 못주무시고 깊은 밤 침전(寢殿)에서 대신(大臣)을 불러 접견하시고는 어선(御膳)을 감손시키고 방공(方貢)을 정지시켰는데도, 자칭 유신(儒臣)이라 하면서 높은 자세로 금직(禁直)하되 코를 골며 양(羊)처럼 잠만 잘 뿐 끝내 구대(求對)하지 않았고, 스스로 간신(諫臣)이라 이름하는 사람은 사실(私室)에 누운 채 굶주린 까마귀처럼 입을 다물고 있되 또한 대각(臺閣)에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신이 과연 이로 인해 통렬히 공척하다 보니 결국 실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경(卿)의 소사(疏辭)도 또한 부드러운 면이 부족하다. 사기(辭氣)를 허비하는 것이 경의 병통인 것이다."
하였다.
병조 참의 홍호인(洪好人)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상번 향군(上番鄕軍)이 춥고 굶주린 끝에 엎어져 사망했다는 보고가 도착하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한 번 강진(康津)에서 사람의 시체를 구워먹은 변고가 발생하자 성상께서 놀라고 슬퍼하시어 설시(設施)와 구획(區劃)을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금문(禁門)을 지키는 군졸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전부터 상번한 군졸에게 혹 마른 양식을 백급(白給)했던 전례가 있었으니, 의당 특별히 밝은 명령을 내려 제때에 구활(救活)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에서 진달한 것이 지극히 참혹한 일이다. 이미 처분을 내렸다."
하였다.
호서 어사(湖西御史) 김상익(金尙翼)이 사폐(辭陛)하자, 임금이 특별히 유문(諭文)을 지어서 내렸는데, 일도(一道)의 인민들에게 그 본토(本土)에 자리잡고 살기에 힘쓰고 친척이 서로 보호하고 이웃간에 서로 구제하는 의리에 힘쓰도록 유시한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먼 시골에서 상번(上番)하는 군사들이 식량을 싸가지고 올라오는 것이 창을 메고 변방을 지키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의 부모 처자가 각기 마을문에 의지하여 구름을 바라보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도중(道中)에 굶어서 죽어도 시체를 거두어줄 사람이 없다. 말이 여기에 미치면 측은하고 상통(傷痛)함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경조(京兆)에 분부(分付)하여 즉시 시체를 거두어서 묻어 주게 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들의 집을 돌보아 구휼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하우(夏禹)가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288) 은 스스로 반성하는 뜻이었다. 추조(秋曹)289) 에 적체된 죄수가 근일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않았는데 안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들은 상민(常民)들과 다르다’ 하여 굶어 죽는 것을 구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추조로 하여금 구활(救活)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19일 임신
영남 어사(嶺南御史) 이종백(李宗白)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특별히 유문(諭文)을 지어 내려 일도(一道)의 인민들에게 유시하게 하였다. 이어 이종백에게 명하여 진정(賑政)을 감독하는 여가에 인재(人才)를 수소문하여 찾아내게 하였다.
12월 21일 갑술
사간원 【정언 심명열(沈命說)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대신(臺臣)을 헐뜯고 공척하면서 가리지 않은 말이 많았고, 질욕(叱辱)을 가해 매도함으로써 대각(臺閣)에 수욕(羞辱)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법전(法殿)은 사체가 지극히 엄하고도 존귀한 자리인데 번독(煩瀆)스러운 말로 마구 떠들었으니, 유달리 엄숙히 하고 경건히 하는 의범(儀範)이 부족했습니다. 박문수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지평 유최기(兪最基)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기근이 거듭 혹독하게 들어 인심(人心)이 메말라 없어지고 윤리(倫理)가 장차 멸절(滅絶)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성(結城) 땅의 품관(品官)으로 김씨(金氏) 성을 가진 사람이 춥고 배고파서 구걸하다가 자기 아들의 집에 갔는데, 거기에 몇 말의 곡식이 있는 것을 보고서 가지고 가 그의 아들이 아비를 밀어 넘어뜨려 즉사(卽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족(隣族)이 관(官)에 고발하여 체포해서 수금(囚禁)하니, 변명없이 자복(自服)했다고 합니다.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변고이니, 바라건대, 조속히 명지(明旨)를 내려 즉시 경옥(京獄)으로 잡아다가 속히 왕법에 의한 주참(誅斬)을 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세도(世道)가 날로 어긋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그가 이미 자복했으나 이는 삼성 추국(三省推鞫)290) 에 관계되는 것이다.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어사(御史)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진청 당상(賑廳堂上)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조사(朝士)로서 시종(侍從)을 역임했던 사람이 만일 굶어 죽는다면 더욱 참담스러운 일이니, 특별히 초출(抄出)하게 하여 매달 한 번 곤궁함을 돕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시종뿐이겠는가? 문관(文官)·남행(南行)291) ·무신(武臣)을 막론하고 그들의 호소에 따라 진청 당상이 넉넉히 돌보아 주도록 하라. 그리고 일찍이 시종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은 군함(軍銜)에 붙이는 것을 허용하라."
하였다.
12월 22일 을해
충원(忠原)의 유학(幼學) 권집(權輯) 등 1백여 인이 대궐에 나아가 진소(陳疏)하고 전 현감(縣監) 정익하(鄭益河)를 위하여 억울함을 송변(訟辨)하니, 임금이 엄지(嚴旨)를 내려 소두(疏頭)를 북도(北道)에 도배(徒配)시켰다.
호남 감진 어사(湖南監賑御史) 이광덕(李匡德)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이광덕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바로 급선무이고, 감진(監賑)은 오히려 이차적인 일이다."
하고, 이어 특별히 유문(諭文)을 지어서 내리고 호남의 인민들에게 유시하게 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백성이란 나라가 의지하는 바인데 해마다 기근이 들어 삼남(三南)이 더욱 극심하니, 장문(狀聞)을 살펴볼 적마다 잠자리가 어찌 편안하겠는가? 더구나 강진(康津)의 사람이 서로 먹은 변고는 근고에 드문 일이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아! 사람의 본성(本性)은 본디 선한 것인데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찌 참혹한 일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방백(方伯)을 역임한 신하로 하여금 그대들을 위로하게 하고 진사(賑事)를 잘 살피도록 명하였으니, 그대 인민들은 임금과 백성 사이가 멀고 먼 것이라고 말하지 말고 본토(本土)에 자리를 잡고 살라. 내가 비록 능하지는 못하지만 결단코 우리 조종(祖宗)께서 사랑하며 돌보던 백성들이 장차 구렁텅이에 죽어 나뒹구는 것을 그대로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아! 춥고 배고픔이 비록 절박하다 하여도 의리 또한 중한 것이니, 친척이 서로 보호하고 이웃이 서로 도와서 구제하도록 그대들은 스스로 힘쓰라."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유문(諭文)을 지어서 관북 어사(關北御史) 조한위(趙漢緯)에게 내려 도내(道內)의 인민들에게 유시하게 하고, 이어 조한위에게 인재(人才)를 수소문하여 찾아보도록 명하였다.
12월 26일 기묘
판부사(判府事) 심수현(沈壽賢)을 영의정 겸 공조 판서(領議政兼工曹判書)로, 김흥경(金興慶)을 우의정으로, 서명균(徐命均)을 승진시켜 좌의정으로, 조진세(趙鎭世)를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28일 신사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황응수(黃應洙)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12월 29일 임오
한덕후(韓德厚)를 집의로, 신만(申晩)을 정언으로, 김용경(金龍慶)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대신(臺臣) 박규문(朴奎文)의 상소로 인해 상소하여 대변(代辨)하기를,
"대신(臺臣)의 말에는 내력이 있습니다. 정미년292) 7월 이후로 흉역배(凶逆輩)들이 이 말을 지어내어 진신(搢紳)들 사이에 전파시켰으므로, 신은 이미 필경 화(禍)의 근본이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뒤 흉역배들이 복주(伏誅)되고 나서 이와 같은 이야기가 들리지 않더니, 어찌 다시 박규문이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중신(重臣)이 해학(諧謔)을 한 말이 어떤 것인 줄 모르겠습니다만, 대소(臺疏)의 정신은 실제로 중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제주 어사(濟州御史) 심성희(沈聖希)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특별히 유문(諭文)을 지어 내려 주면서 도중(島中)의 인민들을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이어 심성희에게 이르기를,
"흉년을 당하기는 했으나 군무(軍務)를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도중(島中)의 군정(軍情)도 마땅히 위로하여 열복(悅服)하게 해야 하니, 진구(賑救)하는 여가에 시사(試射)하여 격려하여 권장시키고 우등(優等)하여 만점을 받은 사람은 치계(馳啓)하여 아뢰라.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 가운데 재주를 지니고도 하료에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아뢰라. 도중에는 본디 노인(老人)이 많다고 일컬어 왔으니, 만 1백 세가 된 사람은 장문(狀聞)하게 하고, 70세 이상은 본주(本州)로 하여금 쌀을 내리게 하라."
하니, 심성희가 아뢰기를,
"해도(海島)가 너무 멀어서 품청(稟請)할 일이 있어도 왕복하는 즈음에 늦어져 제때에 미치지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편의한 대로 종사(從事)하게 하였다. 심성희가 또 벽온약(辟瘟藥)293) 을 가지고 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 해에 경중(京中) 오부(五部)의 원호(元戶)가 3만 5천 7백 68호이고, 인구(人口)는 20만 7천 7백 33인이었다. 【남자가 9만 8천 9백 77구(口)이고, 여자가 10만 8천 7백 56구였다.】 팔도(八道)의 원호(元戶)는 1백 67만 8천 81호이고, 인구는 7백 6만 5천 7백 13인이었다. 【남자가 3백 49만 6천 3백 51구이고 여자가 3백 56만 9천 3백 62구였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2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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