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3권, 영조 9년 1733년 1월

싸라리리 2025. 9. 1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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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계미

하교(下敎)하기를,
"동자(董子)001)  가 이른바, ‘조정(朝廷)의 잘못부터 바로잡고 백성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은 진실로 만고에 바꿀 수 없는 일정한 법이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정신을 모으고 올바른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聚精會神惟才是用]’는 이 여덟 글자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날 여러 신하들을 위해 옛 습관을 버리고 공평한 도리를 넓히며, 다만 백성과 나라만을 알고 시상(時象)002)  을 생각하지 말고서 새해와 함께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하였다.

 

또 농사를 권장하여 백성의 고난을 구제하라는 내용으로 팔도(八道)와 양도(兩都)003)  에 계칙(戒飭)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

 

1월 2일 갑신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동조(東朝)004)  에 올릴 환약(丸藥)을 더 만들자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만든 것도 아직 남아 있으니, 조금 큰 제사를 지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재료를 취하여 넣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그 약에 염소의 간(肝)이 들어가므로 이런 짐승 잡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는 곧 인자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가 상소하여, 사욕(私慾)을 극복하고 덕을 닦는 도리를 경계하고 겸하여 휴치(休致)005)  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간곡한 비답으로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여, 지난해의 망측(罔測)했던 죄명(罪名)을 진달하고 겸하여 휴치(休致)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간곡한 비답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1월 3일 을유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현도(縣道)를 통해 상소하여 사직하고 물러날 것을 거듭 청하였는데, 임금이 손수 쓴 교서(敎書)로 위유(慰諭)하였다.

 

1월 4일 병술

사직(司直) 이세근(李世瑾)이 늙고 병든 것을 이유로 상소하여 은퇴하기를 원했는데, 무릇 아홉 차례에 걸쳐 상소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영남(嶺南)에 남겨 둔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보낼 쌀 1천 섬을 제주(濟州)에 추가로 획정(劃定)하여 진휼(賑恤)에 필요한 물자를 돕게 하였다. 어사(御史) 심성희(沈聖希)가 장계(狀啓)로 청한 것을 따른 것이다.

 

전 한림(翰林) 홍창한(洪昌漢)·조명리(趙命履)를 6품직(六品職)으로 승진시켰으니, 이는 예문관(藝文館)의 법규를 따른 것이다.

 

재신(宰臣) 이만선(李萬選)·이기익(李箕翊)과 무신(武臣) 오중주(吳重周)를 가의 대부(嘉義大夫)의 품계(品階)에 승진시켰으니, 나이가 80이 된 이에게는 으레 가자(加資)하기 때문이었다.

 

1월 5일 정해

정언(正言) 심명열(沈命說)이 상소하여 실효(實効)가 없는 열 가지 경계에 대해 말하기를,
"탕평(蕩平)의 정책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실제의 효과는 까마득하고, 진휼(賑恤)의 정책이 근실(勤實)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실제의 혜택은 적고, 수령(守令)을 뽑고 처음 벼슬하는 자를 선발하였으나 신중하게 선택하는 실상이 없고, 인재(人才)를 찾아내고 숨어 있는 이를 방문했으나 선발·등용하는 실적(實績)이 없고, 간신(諫臣)이 비록 갖추어졌으나 허물을 바로잡은 실상이 나타나지 않았고, 경연(經筵)을 비록 설치하였으나 계옥(啓沃)006)  의 실적(實績)을 듣지 못하고, 사치가 날로 번성하나 절약하고 검소하는 실적이 없고, 사정(私情)에 치우친 것이 제거되지 아니하여 공도(公道)를 넓힐 실효가 멀어졌고, 장오(贓汚)를 금하는 법이 비록 엄격하여도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실적은 없고, 묘유(卯酉)007)  의 법은 형식적일 뿐이고 종합적으로 밝히는 실적이 없습니다. 이는 다만 전하께서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이 앞서고 실적을 힘쓰는 성의가 얕기 때문입니다.
신이 삼가 성상께서 사람을 등용하는 방법을 살펴보건대, 그 사람의 어질거나 어리석음은 헤아리지 않고 오직 작록(爵祿)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만 채용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옳고 그른 것은 묻지도 않고 오직 직명(職名)을 공손하게 받드는 자에게만 맡기십니다. 그래서 경수(涇水)008)  ·위수(渭水)009)  가 합류(合流)하고 얼음과 숯불이 같은 그릇에 담긴 꼴이 되었습니다. 관원들의 기강(紀綱)이 이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워지고 명예와 절개가 이로 인해 무너졌으니, 이는 위에서 탕평(蕩平)의 실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묘당(廟堂)의 추천과 전조(銓曹)의 주의(注擬)에 있어서 이쪽의 한 사람을 등용하려고 하면 반드시 저쪽의 한 사람을 등용하며 재능이 있고 없는 것은 헤아리지 않고 오직 서로 대거리가 되게 하는 일을 아주 공평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각(臺閣)에서 사람을 탄핵함에 있어서도 저쪽의 한 가지 일을 논핵하려고 하면 반드시 이쪽의 한 가지 일을 논핵하여 반드시 양쪽 것을 다 논핵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으니, 비록 논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 상대가 될 만한 일을 얻지 못하면 감히 한쪽만을 논핵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공의(公議)가 시행되지 못하고 정직한 말이 들리지 못하는 것인데, 이는 아래에서 탕평(蕩平)의 실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검소함을 숭상하시는 교화는 다만 전하의 한 몸에만 행해질 뿐이고 전하를 모시는 사람과 노복(奴僕)과 비첩(婢妾)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옹주(翁主)의 결혼 때 혼수품의 화려함과 호화로운 연회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전해 말하고 있는데, 그것도 전하께서 낭비를 걱정하시고 재물을 아끼시던 처음의 마음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부마(駙馬)의 띠[帶]를 장사하는 사람이 백금(白金)으로 사서 바쳤다.’고 하는데, 한 개의 서대(犀帶)가 비록 매우 중요한 보물(寶物)이라고는 하더라도 어찌 백금이란 많은 값이 나가겠습니까? 한 개의 띠가 이와 같다면 다른 물품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액정서(掖庭署)의 하례(下隷)가 구타를 당한 것에 대하여 갑자기 장교(將校)를 엄중하게 형벌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장교가 주먹으로 임금의 하례를 구타한 것은 진실로 매우 망령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액정서의 하례가 함부로 날뛰면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도 당연히 엄중하게 금해야 하는 것인데, 유독 장교에게만 형장(刑杖)을 치면서 신문하게 하였으니, 신은 전하의 죄인을 다스리는 정책에 사심(私心)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끝부분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 신방(申昉)을 재신(宰臣)들이 경연(經筵)에서 배척한 것의 공평하지 못한 점과 대신(大臣)이 정리(政吏)를 구속하고서도 한마디의 상소로 인책(引責)하지 않고 의기양양하게 정무에 임하는 것을 논핵하면서 마땅히 견책(譴責)하고 파직(罷職)시킬 것을 명하게 하고, 또 이기헌(李箕獻)이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임에도 갑자기 정언(正言)으로 의망(擬望)된 것과 박규문(朴奎文)은 교활하고 자질구레한 자임에도 외람되게 헌납(獻納)의 임무를 준 것과 권해(權賅)는 북도(北道)의 감영(監營)에 비장(裨將)으로 있을 적에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를 올려 파직시켰던 자인데 갑자기 청환(淸宦)의 의망(擬望)에 오르게 된 것과 이자(李滋)는 윤리를 무시하고 의리에 어긋났으므로 향리(鄕里)에서 버림받은 자인데 오히려 대망(臺望)에 주의(注擬)된 것을 논핵하면서 모두 개정(改正)해야 한다고 하였고, 거창 부사(居昌府使) 박동추(朴東樞)는 백성을 침해 학대하여 죄없는 자를 함부로 죽였으니 잡아다가 사실을 밝히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비답하기를,
"상소 중에 경계하도록 한 것에서 간혹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고 아직 세속적인 습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러나 말한 것이 모두 절실하니 매우 칭찬할 만하다. 신방의 일은 그대의 말이 지나치다. 이기헌 등의 일은 모두 말한 대로 시행하겠다. 박동수의 일은 먼 곳의 풍문을 어찌 다 믿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후 경연의 신하 중에 이기헌과 이자의 일을 아뢴 자가 있었는데, 벼슬길을 막지 말라고 명하였다.

 

1월 5일 정해

임금이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스스로 요(堯)·순(舜)이 될 것을 목표를 삼으셨고 한(漢)·당(唐)의 임금 수준에 머무는 것을 수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즉위하신 지 10년 동안에 분발하시는 뜻이 점점 처음 같지 않으신 것은 바로 사의(私意)가 죄다 제거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은 성상께서는 학문에 힘쓰시어 지기(志氣)가 쇠약해지지 않게 하시고, 좋아하고 미워함이 중도(中道)에 맞아 한 몸의 사심(私心)이 없게 하시며, 궁액(宮掖)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도 엄숙하게 경계해야 할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서명균이 이어 조신(朝臣) 중에서 오랫동안 지색(枳塞)된 자에게 하자를 씻고 등용하기를 청하면서 신처수(申處洙)·이만유(李萬維)·권혁(權爀)·이양신(李亮臣)의 이름을 차례로 열거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막 심명열(沈命說)의 상소를 보았는데 취할 만한 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서로 대거리로 비난하여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서로 대거리하는 정책을 폐지할 수가 있겠는가? 겉보기에는 비록 구간(苟簡)한 것 같지만 현재의 형편으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오로지 올바른 인재(人才)라면 등용해야 하는 데 있다. 친척 중에 비록 역적이 있을지라도 어찌 다 버릴 수야 있겠는가? 왕돈(王敦)이 왕도(王導)에게,010) 석후(石厚)가 석작(石碏)에게011)   한 일에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신축년012)  ·임인년013)  의 일로 말하자면 김성행(金省行)·이기지(李器之)는 일찍이 승복(承服)한 적이 없었는데도 교문(敎文)에 몰아넣었으니, 그 친족을 어찌 다 버릴 수가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하자와 흠을 씻어내고 새해와 함께 새로워지도록 신칙(申飭)하여 등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비록 무신년014)  의 역도(逆徒) 중에 든 가까운 친족일지라도 만약 죄를 범한 사실이 없으면 진실로 마땅히 거기에 구애되지 말고 등용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서명균이 임금께서 친히 조참(朝參)에 임한 것은 오랫동안 중지되었던 뒤에 행해진 것이므로 백성의 마음은 반드시 임금의 은혜를 바라고 있을 것이므로 기유년015)   이전의 신포(身布)와 신공(身貢)으로 아직까지 거두지 못한 것을 탕감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 이정제(李廷濟)와 판윤(判尹) 장붕익(張鵬翼)을 명소(命召)하여 마음을 다해 구제토록 하고 굶주린 사람을 정밀하게 조사하라고 유시(諭示)하였다. 그리고 어영 대장(御營大將) 어유귀(魚有龜)와 병조 판서 윤유(尹游)를 불러 묻기를,
"삼영(三營)의 병사(兵士)에게도 건량(乾糧)이 들어가는데 기병(騎兵)에게는 어떻게 하는가?"
하니, 장붕익은 훈국(訓局)의 병사는 일정한 급료가 있다고 대답하고, 윤유는 기병 중에서 가장 많이 굶주린 자는 진휼청(賑恤廳)에 이문(移文)하여 구제하고 있다고 대답하였으며, 어유귀는 향군(鄕軍)의 처자(妻子)로서 따라온 자에게는 쌀과 된장 등을 주고 있다고 말했는데, 임금이 옳게 여겼다.

 

1월 6일 무자

강화 유수(江華留守) 민응수(閔應洙)를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내보냈다. 이보다 앞서 민응수가 출사(出仕)하지 않으므로 지방 고을에 보임(補任)시켰다가 곧 이어 강화 유수로 옮기게 했으나 또다시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엄중하게 하교(下敎)하기를,
"시상(時象)을 본받고자 하면서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고, 마침내 이 명을 내렸다. 뒤에 호조 판서 김재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옛날에 조석윤(趙錫胤)이 그 고을에 귀양갔다가 풍토병(風土病)이 들었다고 하는데, 민응수 같은 자는 애석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변방의 백성이 왕화(王化)016)  에 젖지 못하였으므로, 이 사람을 보낸 것이다."
하였다.

 

1월 7일 기축

사헌부 【집의(執義) 한덕후(韓德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또다시 아뢰기를,
"정언 심명열(沈命說)이 아전(亞銓)을 논핵(論劾)한 것은 아주 공평하지 못합니다. 훈신(勳臣)의 패악스러운 말은 진실로 마땅히 엄중하게 배격해야 할 것인데 이에 도리어 동조하고, 대료(大僚)017)  가 관리를 구속시키는 일은 체례(體例)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이에 도리어 권위를 빙자하여 문제로 삼으며, 상소에 대해 비답을 받은 자를 가리켜 ‘마침내 한 통의 상소도 없었다.’고 하고, 여러 날 인책(引責)하고 들어가 있는 자를 가리켜 ‘의기양양하게 정사에 임한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그의 말은 사건을 들추어 흔들기에 급급하여 오로지 남을 욕하는 것만을 일삼는 것입니까? 청컨대 파직시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면서 정승을 뽑아 새로 임명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백성들을 함께 협력하여 구제하자는 뜻으로 간곡한 비답을 내려 돈독하게 개유하였다.

 

1월 8일 경인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1월 9일 신묘

임금이 사직단에서 기곡제(祈糓祭)018)  를 친히 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고 봄추위도 아직 매섭다는 이유로 기곡제를 친히 행한다는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면서 경연(經筵)에서 아뢰고 차자(箚子)로도 아뢰었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고 이때에 와서 재계·목욕하고 친히 제사를 행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헌관(獻官)이 잔을 드린 후에는 마땅히 협문(挾門)으로 나와야 하겠지만, 제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잔을 드릴 때이므로 마땅히 정로(正路)를 지나 올라와야 할 것인데, 반드시 협문으로 다니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하니, 승지가 수복(守僕)에게 물어서 전부터 내려오는 규정이 그러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천조관(薦俎官)은 모두 정로(正路)로 들어가는데,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은 어찌하여 정로로 들어갈 수가 없는가? 이 뒤에는 정로를 지나 올라가게 하라."
하였다.

 

1월 10일 임진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민치룡(閔致龍)을 장령으로, 신방(申昉)을 우윤(右尹)으로, 최명상(崔命相)과 권영(權瑩)을 지평으로, 이주진(李周鎭)과 정희보(鄭熙普)를 정언으로, 이흡(李潝)을 응교로, 윤휘정(尹彙貞)을 부교리로, 이진순(李眞淳)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중국 남경(南京) 사람이 전광도(全光道) 진도군(珍島郡)에 표류(漂流)해 왔다. 자문(咨文)을 갖추어 북경(北京)으로 호송(護送)하도록 명하였다.

 

금주령(禁酒令)을 거듭 내렸다. 이때 도성(都城)의 쌀값이 뛰면서 품귀 현상이 일어났는데, 비국 당상(備局堂上) 김동필(金東弼)이 ‘곡식을 소비시키는 것으로 술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엄중하게 금지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1월 12일 갑오

임금이 태묘(太廟)를 배알(拜謁)하였다.

 

1월 13일 을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했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는 흉년이 거듭 들어 백성이 굶주린다는 이유로 조정에 품하지도 않고 군향(軍餉)과 안흥(安興)의 공진미(貢津米)를 마음대로 중지시켰으니,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산부(理山府)의 잠상(潛商)으로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서 타국으로 건너간 장세찬(張世贊) 등을 효시(梟示)하고, 파수(把守)한 장졸(將卒)들을 엄중하게 곤장(棍杖)을 치도록 하였으며, 부사(府使) 우하형(禹夏亨)은 죄인을 잡은 공으로 속죄(贖罪)했다 하여 다만 추고(推考)만을 명하였다.

 

영남의 감진 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이 도신(道臣)과 연명(聯名)으로 아뢰기를,
"바다 연안 지역 아홉 고을이 재해(災害)를 더욱 많이 입었으니, 청컨대 조정의 명령으로 대동미(大同米)를 매결(每結)마다 두 말씩, 그리고 기병(騎兵)·보병(步兵)의 군포(軍布)를 3분의 1을 감하게 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영남 지방은 예로부터 유현(儒賢)의 대가(大家)가 많았는데 갑술년019)                   이후로 금고(禁錮)된 자가 많으며, 더구나 무신년020)                  을 겪고 나서는 사대부들의 인심이 크게 변하였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영남 지방의 풍속은 다른 곳과 다릅니다. 한 마을 가운데 반드시 장자(長者)가 있어 거기에 나아가 모든 일의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면 모두가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리고 영남 사람은 본래부터 고집이 많아서 자기의 소견을 한번 정하면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만약에 그들을 감복(感服)하게 할 수만 있다면 뒷날 반드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지금까지 버려둔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명현(名賢)의 후손일지라도 농부가 되는 데 만족하여 모두가 말하기를, ‘치우친 의논을 하면 역적으로 여기고 과거를 보면 조정에서 버림받으니, 차라리 내가 농사를 짓고 내가 우물을 파서 먹고 사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김성탁(金聖鐸)·성이홍(成爾鴻)·이만부(李萬敷) 세 사람을 조정에 추천한 적이 있는데, 김성탁은 얼마 전에 상경(上京)하였으나 성상께서 불러 보시지도 아니하셨으니, 아마도 장려하여 분발하게 하는 방법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것은 시작만 있고 끝맺음은 없습니다. 윤동원(尹東源)·박필주(朴弼周)는 아직까지도 명령을 받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또 다시 나오도록 권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유신에게는 대개 한가롭게 있도록 사정을 보아주려 하므로, 다시 부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전광 감사(全光監司) 유엄(柳儼)과 평안 감사 송진명(宋眞明)을 파직(罷職)시켰다. 감사가 가속(家屬)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가는 금령(禁令)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죽을 받아 먹으러 가는 기민(飢民) 중에 무뢰배(無賴輩)도 있어 한편으로는 받아서 팔아먹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건량을 받기도 하는데, 또 죽을 받으러 나가니 많은 기민들이 서울에 돌아다니면서 구걸을 하고 있으므로, 주인과 나그네가 모두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전염병이 점점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명부에 기록되어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죽을 받아 먹으러 가는 자들을 모두 규합하여 해부(該部)에서 그 대상자를 뽑아 책으로 만들어 두 진휼소(賑恤所)에 보고하고 10명 단위로 패장(牌將) 한 사람을 정하여 그가 인솔하고 죽을 받으러 가게 합니다. 그리고 죽을 타 먹는 곳은 별도로 두 진휼소에 설치하여 남부(南部)·서부(西部)의 두 부(部)는 제1의 장소에 배속시키고 동부(東部)·중부(中部)·북부(北部)의 세 부(部)는 제2의 장소에 배속시켜, 해당 부(部)의 관원이 매일 같이 부(部)에 다니면서, 사방의 유민(流民)이 들어오게 되면 해당 마을의 이임(里任)으로 하여금 진휼소에 데려다 주게 하고, 그 부(部)의 관원이 만약 부지런하게 거행하지 않으면 진휼청에서 낭청(郞廳)을 보내어 부정한 사실을 적발하여 논죄(論罪)하게 하며,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기민(飢民)으로 죽을 받으러 가면 당연히 진휼소의 뜻을 봉행(奉行)하도록 분부하되, 만약에 혹시 떼를 지어 소란스런 짓을 한다면 추조(秋曹)021)  에 이송(移送)시켜 엄중한 형벌로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활인서(活人署)와 진휼소(賑恤所)가 너무 멀리 있으니, 청컨대 선공(繕工)으로 하여금 홍제원(弘濟院) 근처에다가 터를 골라 막사를 짓고, 진휼청으로부터 장교(將校)를 정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도록 하고 그 병든 백성을 많이 살린 자는 진휼(賑恤) 사무가 끝나기를 기다려 관직을 임명하여 공로에 보상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굶주린 백성이 병에 전염될 경우 활인서에 이송(移送)한 뒤에는 진휼소에서 다시는 맡아 관리하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에 진휼소 근처에다가 병든 자를 구제하는 막사를 별도로 설치해 놓고 역시 진휼소로 하여금 맡아 관리하게 한다면, 이는 이미 전에 시행하던 규정이 아니며 진휼소의 사무도 많아 번거롭게 되니, 처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한결같이 활인서의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거행하고 진휼소에서는 맡아 관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주청(奏請)을 옳게 여겨 말하기를,
"전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되 상이 있으면 당연히 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때때로 점검하고 살피게 하여 만약에 연척(捐瘠)022)  된 자가 있으면 별제(別提)와 참봉(參奉)은 지금까지의 출사(出仕)를 삭제하고 심한 자는 논죄(論罪)토록 하라."
하였다.

 

지평 최명상(崔命相)이 상소하여, 심명열(沈命說)이 이자(李滋)와 권해(權賅)를 비난하여 배척한 것이 잘못임을 논핵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한덕후(韓德厚)를 조처한 것에 대해 이번에 그대의 상소는 모두가 속투(俗套)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였다.

 

1월 14일 병신

지평 권영(權瑩)을 대정현(大靜縣)에 귀양보냈다. 상소하여 일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 상소의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신하를 부리는 것은 마치 종을 부리는 것과 같아 조금만 거역함이 있으면 곧 꾸짖으며, 다만 그를 내보내고 싶으면 그 정상(情狀)과 염우(廉隅)가 어떠한지 묻지도 않고 반드시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下敎)를 내리시니, 신하가 된 자들은 조정을 위해 명절(名節)을 아낄 줄은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겁만을 내면서 염치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이것을 가지고 신하를 핍박하여 내보내는 묘한 관건(關鍵)으로 삼고 계시므로, 일을 맡겨 부릴 수 있는 자는 대다수가 명령만을 따르고 확정된 주관이 없이 구차하게 지내는 무리일 뿐입니다. 대체로 이와 같으므로 크고 작은 관료들이 서로 본받으면서 풍조를 이루어 오로지 두루 용납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 한두 가지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으면 전하께서는 처음 보시고 놀라시며 말한 자를 꾸짖으시니, 남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만이 아니라 마침내는 현명하고 우매한 자를 막론하고 뒤섞어 마구 등용하면서 그것을 편당을 없앤 효과라고 인정하시니, 쇠퇴한 세상의 형상을 모두 다 보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적에는 맨먼저 경연관(經筵官)을 선발하여 장차 유학(儒學)에 뜻을 두실 것 같았는데, 지금은 처음의 정신이 이어지지 아니하여 다시는 경연관을 초빙하지 않으십니다. 이재(李縡)·한원진(韓元震)·채지홍(蔡之洪)·윤봉구(尹鳳九) 같은 여러 신하는 모두가 산림(山林)에서 경학(經學)을 연구하여 한때의 중망(重望)을 지고 있으니, 만약 경연에 초치(招致)하여 계옥(啓沃)하기를 구하신다면 성상의 학문에 도움이 되고 성상의 교화를 빛나게 하는 것이 어찌 오늘의 조정 신하들처럼 용렬하고 무능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번에 전하께서 한원진과 이재를 대우하신 것은 정실(情實)에서 아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앙과 지방의 기대를 잃게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만약 전후의 중도(中道)에 지나친 하교(下敎)를 뒤좇아 거두어들이시고 깊이 후회하시는 뜻을 보이셔서 이에 채지홍·윤봉구도 함께 특별히 간곡하게 부르셔서 좌우에 두시고 성상의 다스림을 돕게 하신다면 일식(日食)·월식(月食)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니, 누가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아! 네 신하의 일에 대해서는 전후의 여러 신하들이 상소로 계청(啓請)하고 경연에서 아뢰어 이미 남김없이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함께 참여하여 차자(箚子)에 연명한 자들이 다같이 참혹한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죄가 있고 없음은 마땅히 차이가 없을 것인데, 어떤 자는 신원(伸冤)되고 어떤 자는 신원되지 못하여 반쯤 공중에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비록 이미 신원된 두 신하로 말하더라도 단지 그 벼슬만 돌려주고 으레 내리는 시호(諡號)를 아직도 아끼고 계시니, 이는 죄인으로 대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신원시켜 밝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네 신하의 굽힘과 폄[屈伸]은 사실상 의리(義理)가 세상에 나타나느냐 나타나지 않느냐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신하들이 마음을 다해 힘껏 경위를 진달하면서 반드시 자기의 거취(去就)를 걸고 다투는 것은 다만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처음에는 여러 신하들이 다 이르기를 기다려서 조처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정에 나온 다음에는 경연에서의 하교와 상소에 대한 비답이 전날에 비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애당초 꼭 신원시킬 뜻이 없으면서도 다만 여러 신하들을 대우하시는 것이 너무나도 성실하지 못하신 것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나오게 한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이미 그 일에 대해 매우 억울하다는 것을 깊이 살펴보시고 애처로워하고 가엾게 여기심에 있어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정도로 하셨고, 장차 처분하겠다는 하교를 경연에 여러 번 내리셨는데, 다만 여러 신하들의 강력한 청에 격동·고심(苦心)하여 심지어는 그것이 아래에 있는 자로서 청할 것이 못된다는 하교까지 하셨습니다. 진실로 할 만한 일이라면 그 청에 의하여 윤허하실 것인데, 도리어 무엇 때문에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덕을 손상시키시는 것입니까? 요즈음 인심(人心)이 관망(觀望)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제방(隄防)이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거원(李巨源)·이보욱(李普昱)은 모두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아비처럼 섬겼다고 세상의 조목을 받았는데, 이거원은 남태징(南泰徵)의 처남으로서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칭찬한 말의 내용이 지극히 흉악하고 패리(悖理)한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신은 아마도 이 제방이 한번 무너진다면 난적(亂賊)들이 딴 마음을 내게 될까 걱정입니다. 이명언(李明彦) 부자(父子)의 죄악은 이루 다 처벌할 수가 없을 정도이므로,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하게 신문해야 한다는 계청(啓請)이 매일같이 양사(兩司)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이하택(李夏宅)이 경련(京輦)023)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 자취가 비밀스러우므로 사람들이 많은 의혹을 품고 있다 합니다. 비록 즉시 왕법(王法)으로 빨리 바로잡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선 먼 변방에 귀양보내어 화근(禍根)을 끊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를 명하며 연달아 재촉하였다. 권영(權瑩)이 들어가 숙배(肅拜)하니, 밤이 벌써 3경(三更)이 되었다. 임금이 불러보고 묻기를,
"신하의 임금 섬기는 도리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하니, 권영이 대답하기를,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
하면서 일어나고 엎드릴 때에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보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조금이라도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나를 우러러 쳐다볼 수가 있는가?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권영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어리석고 용렬하지만, 전하께서 대신(臺臣)을 이렇게 대우하실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일을 말하는 관직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충성을 바칠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대의 종제(從弟)인 권혁(權爀)과 더불어 시상(時象)에 충성을 바치려고 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선왕(先王) 때에 박필몽(朴弼夢)이 경성부(鏡城府)에 보임(補任)되었을 적에 그의 말씨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기절(氣節)이 있다고 여겼는데, 마침내 역적이 되었다. 그대가 네 신하의 일에 대해 내가 신하를 속인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그런 말을 차마 하는 자라면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한원진이 지난번 상소에 한 말 가운데는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에게 걸리는 것이 있었으므로 내가 그때부터 유신(儒臣)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재와 윤봉구 등의 학문은 나도 알고 있다. 그대가 만약에 조용히 아뢰었다면 옳지 않을 것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당(黨)을 두호하기에 급급하여 조정에 출사(出仕)하는 사람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더욱 형편없는 짓이다. 이거원은 비록 남태징의 처남이지만 또 갑진년024)  에 옥당(玉堂)의 차자(箚子)를 올린 일도 있는데 어찌하여 곧바로 역적으로 몰아넣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권영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신은 마땅히 차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원진은 지난번에 전파된 사실과 틀린 말을 듣고는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어 경계하는 말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어찌 존주(尊周)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이재는 비록 과거(科擧) 출신이기는 하나 산림(山林)에서 글을 읽은 지 이미 30년이 되어 학문이 고명합니다. 지난번 소환소(召還疏)에 대해 전하께서는 그것이 이재의 문인(門人)에게서 나온 것으로 의심하셨는데, 이는 사실 밖의 일입니다. 이거원과 이보욱은 온 세상이 모두 김일경·이사상(李師尙)의 가자(假子)라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항상 통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거원이 목호룡의 글을 지어 김일경의 도당이 된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다시는 청환(淸宦)에 의망(擬望)하지 않은 것이다. 권혁(權爀)이 이미 이거원을 배척했는데, 그대는 권혁의 종형(從兄)으로서 또다시 잇따라 배척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일이 진실로 거론할 만한 것이면 부자(父子)의 사이라도 또한 사피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종형제 사이이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네 신하의 일을 신이 마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말을 겨우 시작하려고 하자, 임금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이 일을 가지고 임금을 조종하려고 하는가? 내가 마땅히 태아검(太阿劍)으로 그대를 베어 죽일 것이다."
하고는, 우선 체직(遞職)부터 시키라고 명하였다. 권영이 빠른 걸음으로 나가니, 임금이 책상을 치면서 말하기를,
"이는 시상(時象)의 충신(忠臣)이고 조정의 난신(亂臣)이다. 5명의 난적(亂賊)이 모두 당론(黨論)에 손상되었으나 나는 박필몽에게 가장 속았다. 그 이후로는 시상에 고질(痼疾)이 된 자는 비록 와룡(臥龍)025)   같은 재주가 있을지라도 결코 오늘의 조정에 쓰지 않을 것인데, 내가 어찌 한 명의 권영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권영은 시상에만 마음을 쏟고 임금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방의 극변으로 귀양보내야 할 자가 권영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대정현(大靜縣)의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여 즉시 보내되, 이달 안으로 바다를 건너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심명열(沈命說)이 전조(銓曹)를 공격하니 한덕후(韓德厚)가 심명열을 공박하고 최명상(崔命相)이 한덕후를 비호한 일이 앞뒤로 번갈아 나와 감히 옛버릇을 저지르고 있다. 일은 비록 중대하지 않지만 버릇은 키울 수 없으니, 모두 파직시켜 제방(隄防)을 엄중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시상(時像)이 일어난 것은 본래 미세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재(李縡)의 지난날 상소에 대해 내가 회유(誨諭)의 뜻을 약간 보였는데도 시골 선비와 사헌부의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번갈아 나서서 그를 비호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심지어는 소환(召還)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신하들이 당파를 만드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미세한 것에서 막아야 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그 버릇을 키울 수가 있겠는가? 대사헌 이재(李縡)를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숙위(宿衛)는 중요한 곳으로 죄인이 머물러 쉬는 곳이 아니다."
하였다. 이때 권영(權瑩)이 절도(絶島) 유배(流配)의 명을 들은 뒤 임시로 공해(公廨)에 있었는데, 총관(摠管)이 이를 살피지 아니하여 밀창군(密昌君) 직(樴)과 해춘군(海春君) 영(栐)이 파직되었다. 이는 대개 권영이 물러날 때에 도총부(都摠府)에 들러 쉰 것을 임금이 묻고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죄인 권영에게는 금호문(金虎門)을 열어주지 말고 단봉문(丹鳳門)을 열어 내보내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권영은 시례(時禮)를 숭상하는 집안에서 생장하여 일찍부터 충의(忠義)의 교훈을 실천했으며, 나이 60에 가까워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다. 대각(臺閣)에 들어가는 날에 이르러 맨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말을 하다가 한밤중의 전석(前席)에서 천둥 같은 임금의 위엄이 거듭되어 깊은 바다 밖으로 쫓겨났으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말을 조심하였다. 그러니 누가 임금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5책 33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27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 정론(政論)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물(人物)
사신은 말한다. "권영은 시례(時禮)를 숭상하는 집안에서 생장하여 일찍부터 충의(忠義)의 교훈을 실천했으며, 나이 60에 가까워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다. 대각(臺閣)에 들어가는 날에 이르러 맨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말을 하다가 한밤중의 전석(前席)에서 천둥 같은 임금의 위엄이 거듭되어 깊은 바다 밖으로 쫓겨났으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말을 조심하였다. 그러니 누가 임금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부산(釜山)의 왜관(倭館)에 화재가 났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5일 정유

장령 민치룡(閔致龍)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권영(權瑩)은 대각(臺閣)에 막 들어와서 이해(利害) 관계를 돌보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과감하게 말하다가 천둥 같은 질책을 받고 꺾여 깊은 바다 밖으로 버려지게 되었으니, 성상(聖上)의 시대에 이러한 일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권영을 절도(絶島)에 귀양보내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고, 이어 여러 대관(臺官)과 총관(摠管)을 파직시킨 것의 지나친 점을 말하고 겸하여 임금의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정도(正道)를 잃은 것에 대해 경계하는 말을 진달하였는데, 임금이 책망하는 하교(下敎)를 내리고 그 글을 되돌려 주었다.

 

1월 16일 무술

도승지 조명익(趙明翼)과 좌승지 이성룡(李聖龍)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권영에 대한 조처가 중도(中道)에 지나친 점을 거론하고, 또 대사헌을 특별히 체직시킨 데 대한 잘못을 거론하여 말하기를,
"시골 선비를 소환하라고 요청한 것과 사헌부의 신하들이 상소한 것이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는 이재(李縡)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곧 파당을 만든다는 등의 하교를 하십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우리 나라에는 다만 시상(詩象)뿐인데, 폭원(幅員)026)  이 이미 작아서 대정현(大靜縣) 밖에는 다른 땅이 없으므로 그렇게 조처한 것이다. 이재의 일은 지금 내가 조처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것이다."
하였다.

 

정언 정희보(鄭熙普)가 상소하여 권영(權瑩)을 절도(絶島)에 귀양보낸 것과 대사헌을 체차(遞差)한 잘못을 거론하였는데,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거원(李巨源)과 이보욱(李普昱)을 신구(伸救)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권영이 두 사람의 일을 상소하여 논핵한 것에 대해 심지어 이 제방(隄防)이 한번 무너진다거나 난적(亂賊)이 딴 마음을 내게 된다는 등의 말까지 하셨으니, 신은 놀랍고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거원은 진실로 연좌된 바가 있으나 평상시에는 난적 김일경(金一鏡)과 서로 뜻이 맞지 않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아는 바이고 전후(前後)의 연신(筵臣)들도 이미 그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다만 의심하는 마음 때문에 지난 자취에 집착하여 말다툼을 했을 뿐입니다. 이보욱은 애당초 그러한 의심과 비방은 없었는데, 그가 죄를 얻은 것은 대개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고을을 잘 다스렸다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신이 수령(守令)을 선발할 적에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설사 신이 알지 못하고 말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죄이고, 알고서도 고의적으로 비호하여 애석하게 여겼다면 그것도 죄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권영에 대한 조처는 성색(聲色)027)  을 너무 허비했으며, 대사헌을 체직(遞職)시킨 것과 총관(摠管)을 파직시킨 것은 노여움을 옮긴 것에 가깝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어찌 입에 담을 필요가 있는가? 저 탐라(耽羅)를 쳐다보건대, 권영과 권혁(權爀)이 서로 갔으니 시상(詩象)을 위해 충성을 바친 것은 그들에게 적당한 것이다. 총관의 일은 파직시키지 말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1월 17일 기해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온갖 보양(補養)이 모두가 헛것이고 다만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요방(要方)이다.’ 하였다. 지금 나는 시상(時象)에 시달려서 그런 것이니, 다시는 약을 의논하지 말라."
하고, 또 여러 대신(大臣)들이 시골에 있으면서 서울에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중한 하교를 내렸다.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 서명균(徐命均)과 제조(提調) 송인명(宋寅明)이 입시(入侍)하였다. 서명균이 약원에 내린 비답의 뜻이 중도(中道)에 지나친 점을 들어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나의 병을 첨가시켜 놓고 곧 의원(醫員)으로 하여금 치료하도록 하느냐? 예로부터 약을 먹지 않은 자가 없으나, 다만 만석군(萬石君)028)  만이 먹지 않았다. 내가 어찌 지나친 일을 하기를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권영(權瑩)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하여 한번 보고자 불러들인 것인데, 참으로 이른바 ‘강항령(强項令)’029)  이었다. 대정현(大靜縣)에 귀양보낸 것은 나도 지나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마땅히 문간에서 석고 대죄(席藁待罪)를 했어야 할 것이었는데 도총부(都摠府)에 편안히 있었으니, 만약 한(漢)나라 조정의 어사(御史)가 있었다면 반드시 ‘크게 불경(不敬)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승지 황정(黃晸)이 말하기를,
"권영의 상소는 비록 시상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그의 직책은 곧 대간(臺諫)입니다. 상소가 올라가자마자 엄중한 견책(譴責)을 뒤따라 가하여 궁벽한 바다로 귀양가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바람이 잠잠해질 때를 기다려서 가야 할 곳인데도 급박하게 시간을 정해 놓고 귀양지에 도착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그것이 어찌 성인(聖人)의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상의 화는 홍수(洪水)나 맹수(猛獸)보다 심하다. 내가 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 것이 어찌 허물이 되겠는가?"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가 뒤따라 들어와 모시고서 여러 번 강력하게 청하고 여러 신하들도 번갈아가면서 약을 의논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의 청이 이와 같으므로 비록 진찰하는 것은 마지못해 따르겠지만, 약은 비록 정청(庭請)을 한다 하더라도 결단코 먹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 태좌가 먼저 물러가니, 소황문(小黃門)030)  에게 명하여 부축해서 나가게 하였다.

 

송진명(宋眞明)을 대사헌으로, 송수형(宋秀衡)을 집의로, 안상휘(安相徽)와 민계(閔堦)를 지평으로, 김동필(金東弼)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유(李瑜)를 전광 감사(全光監司)로, 한범석(韓範錫)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송징래(宋徵來)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이의풍(李義豐)을 함경 남병사(咸鏡南兵使)로, 윤광신(尹光莘)을 전광 우수사(全光右水使)로 삼았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또 상소하여 굳이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답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시수 죄인(時囚罪人) 중에 신병(身病)으로 보석(保釋)이 된 자는 옥문(獄門)에서 멀리 떠나게 하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선왕조(先王朝) 을유년031)   수교(受敎)에 ‘부모의 상(喪)을 당한 자는 사형수(死刑囚)를 제외하고는 성복(成服) 때까지 한하여 계품(啓稟)해서 보석해 주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명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정해년032)  에 시수 죄인 이태언(李泰彦)을 성복 때까지 휴가를 준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죄인 이보춘(李普春)은 지난번에 이미 보석되었는데 현재 부모상을 당했으니, 진실로 마땅히 관례에 의하여 휴가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들으니, 그의 부모의 상을 당한 곳이 공주(公州)라고 합니다. 그것은 서울에 있는 자와 다르기는 하나, 선왕조 때의 수교가 이미 인정과 사리를 곡진하게 살핀 데서 나온 것이니, 서울과 시골이라고 하여 차별을 둘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중죄수(重罪囚)가 아니니, 수교에 의거하여 휴가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8일 경자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 등이 의약(議藥)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환약(丸藥)을 들일 것을 청하였으나, 그것도 윤허하지 않았다.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과 이의현(李宜顯)이 엄중한 하교로 인해 서울에 들어와서 금오(金吾)에서 왕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임금이 기다리지 말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어제 삼가 하교를 보건대, 신들 때문에 의약(議藥)을 윤허하지 않으시고 환약도 드시지 않으신다고 하오니, 신 등은 죽어도 여죄(餘罪)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한 몸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의지한 바요, 동조(東朝)033)  께서 부탁하신 바인데, 어찌 자신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이 만약 깨달았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을 의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 등이 혼미하고 용렬하여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약을 의논하는 한가지 일을 가지고 혼미해진 일을 열리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 대신(大臣)들과 극력 청했는데도 끝까지 들어주시지 않으신다면 어찌 감히 다시 대신으로 자처(自處)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매양 척신(戚臣)으로 자처하였는데, 오늘에야 처음으로 대신(大臣)이라고 일컫는 말을 들었으니, 내가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환약은 마땅히 경을 위해 먼저 먹도록 하겠다."
하였다.

 

권이진(權以鎭)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1월 19일 신축

응교(應敎) 이흡(李潝)을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출보(黜補)하였다. 이흡이 상소하여 권영(權瑩)을 절도(絶島)로 유배(流配)시킨 것이 중도(中道)에 지나친 점을 말하고, 또 이재(李縡)를 특명으로 체임(遞任)시키고 세 대간(臺諫)을 모두 파직(罷職)시킨 것에 대한 잘못을 말하기를,
"갑(甲)에게 화난 것을 을(乙)에게로 옮기는 것은 옛 성인(聖人)이 경계한 바인데, 이번의 일은 을에게 옮긴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 격노(激怒)하심이 그처럼 심했고, 또 경연(經筵)에서 권영을 꾸짖을 적에 너무 지나치게 노여워하여 듣기가 민망할 정도의 하교가 많이 있었습니다. 청컨대 그 명을 모두 거두어 들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하교하여 심하게 꾸짖고 인하여 외직(外職)에 출보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한강(漢江) 밖에 이르러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간곡한 비답을 내리고 출사(出仕)를 권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나와 사죄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는데, 김흥경이 의약(議藥)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윤허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도성(都城) 밖에 와서 상소하였다. 임금이 비답을 내려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과 함께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약방(藥房)에서도 같이 들어오게 하였는데, 시간이 벌써 밤 2경(二更)이 되었다. 임금이 좌우의 근신(近臣)을 물리치고 주서(注書)에게는 붓을 멈추고 기록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사관(史官)에게만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는 하교하기를,
"경(卿) 등이 각각 겨울의 긴 밤과 같은 시대에 있은 지 오래 되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여 경 등을 꼭 오게 한 것은 진실로 마음먹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애통하다. 내가 말하려고 하면서도 말을 못한 것이 이제 몇 해나 되었던가? 나는 궁중(宮中)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세상의 고통을 알지 못하였는데, 신축년034)                   이후로 지극히 애통함을 가슴에 품고 있은 지 이제 13년이나 되었다. 지금 경 등을 보니 비록 각자가 의리라고 여기고 있으나 사실은 그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만약 자세히 말해 주지 않는다면 다만 심기(心氣)만 상할 뿐이므로, 나라의 형편을 돌아볼 때 장차 어찌 할 방법이 없어 이제 자세히 말하는 것이니, 경 등은 조용히 들으라. 내가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말하려면 어찌 다만 두 경(卿)뿐이겠는가? 그것은 고집을 부리는 자가 경 등이기 때문에 일깨워 주려는 자도 경 등일 뿐이다. 아!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면 거의 마음에 맺힌 통한은 풀리겠지만 그것이 제갈양(諸葛亮)이 피를 토한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니, 사실 어리석은 것이다. 시상(時象)의 근원과 사문(斯文)의 시비(是非)에 대해서는 나는 말하지 않겠다. 아! 경자년035)                   국휼(國恤) 이후로 3백 년 동안 지켜오는 예의(禮義)가 아주 무너져서 임금이 임금 구실을 하고 신하가 신하 구실을 하는 의리가 점점 땅에 떨어져 밝혀지지 아니하였다. 노론(老論)은 스스로 나를 위한다고 하고, 소론(少論)은 스스로 무신년036)                  의 추대한 사람을 위한다고 하고, 남인(南人)은 스스로 낙산(駱山)을 위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색목(色目)에 든 사람이 다 역심(逆心)이 있어서 그러했겠는가? 그것은 그중에 이익을 탐하는 효경(梟獍) 같은 무리가 한 짓인데, 경 등이 만약에 그러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결코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제각기 무엇인가를 한다.’는 말은 다른 데서 들은 것이 아니고 서덕수(徐德修)에게 들은 것이다. 아! 신축년037)                  부터는 내가 더욱 문을 닫고 들어앉아 방문객을 사절(謝絶)했는데 비록 전날 후하게 대하던 종신(宗臣)들이라도 번번이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서덕수는 평소부터 그들 부자(父子)의 사람됨이 달성(達城)038)                  처럼 근신(謹身)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하물며 그런 때 어찌 만나보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세상의 도의(道義)는 이를 두려워하면서 처족(妻族)을 소홀히 대하면 반드시 부부(夫婦) 사이가 화목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런 까닭으로 그가 열 번 오면 하는 수 없이 두세 번은 만나 보았다. 그러자 먼저 백망(白望)에게 부탁하여 나의 동정을 살피곤 하였는데, 백망은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일을 알고 말하기를, ‘이것은 신자(臣子)로서 할 일이 못된다. 더구나 선왕(先王)의 혈속(血屬)이 지금 몇 사람이나 되는가? 이 무리들이 만약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위하여 이런 계획을 세웠다면, 마땅히 충심으로 나라를 부지하면 될 것인데, 어찌 반드시 내가 알게 하려고 하는가? 이는 이익만을 탐할 뿐 충성을 다하지 않는 무리이니, 너는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며 또한 드러내놓고 배척하지도 말아라. 그의 마음이 여기게 이르렀으니, 반드시 장차 나라 일을 그르치고 나를 해치고야 말 것이다. 그대는 되도록이면 그를 삼가고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후에 온갖 계책을 부려가며 찾아오면서 끈질기게 매달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멀리 외방(外方)으로 피하게 하였는데, 과연 해서(海西) 지방으로 내려갔다. 신축년에 왔을 적에는 반드시 일이 정해졌다고 여겼는데 결국 목호룡(睦虎龍)의 그물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이른바 은화(銀貨) 문제는 비록 미처 듣지는 못했으나 그때 뇌물을 주었다는 말이 많이 돌아다녔으므로 내가 매양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르니 장차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다. 비록 좋지 못한 일이기는 하나 그때 되돌려 주게 되면 반드시 다른 길을 통하여 내 마음을 더럽힐 것이니, 너는 굳게 간직하여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만약 목호룡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면 반드시 이 은화일 것이다. 임인년039)                   공초(供招) 중 남인(南人)·소론(少論)의 완론(緩論)은 곧 정인중(鄭麟重)·목호룡의 말이고, 백망이 처음 말한 것이 아닌데, 역적 박상검(朴尙儉)이 그 준엄한 논설을 질시하여 홀로 면대(面對)를 요구해 반드시 죽이고야 말았다. 비록 조금만 이론(異論)이 있어도 완화(緩和)한다는 이름을 싫어하여 이것으로 억지로 버티다가 을사년040)                  ·병오년041)                   이후까지도 이것으로써 한쪽 사람을 모함하는 계제(階梯)로 삼았으니, 이 무리들의 말을 외우고 있는 자가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무릇 백망이 시골로 피한 후와 노론(老論)이 또 서덕수를 얻은 이후부터는 내가 본래 남을 위해 말하는 것이 유익함이 없는 것을 알았으므로 마치 귀머거리처럼 지냈으나, 귀로 들은 일을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처음에는 노론들이 나를 후하게 해 준다고 하였으나 그 말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처럼 하였더니, 나를 협박하기를, ‘이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을 얻어 이 계책을 소론에게 주어 잿골[灰洞]을 만들겠다.’ 하였으니, 이에서도 영화를 탐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임을 알았다. 이 말을 들으니, 그 기세가 그치지 않으면 장차 나를 해쳐 선왕(先王)의 피붙이가 남아나지 않게 하려는 뜻임을 더욱 알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경종(景宗)까지도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과 뼛속까지 소름이 끼쳐 다만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고 울 뿐이었다. 아! 나의 그러한 마음은 천지신명에게도 질정(質正)할 수가 있다. 집이름에다가 뜻을 나타내고 분수를 지키며 여생을 보내고 싶은 것이 나의 지극한 소망이었다. 그런데 신축년에 명을 따른 것은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생각하건대, 마음에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계력(季歷)042)                  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또 양백기(楊伯起)043)                  에게 부끄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무리들이 감히 동조(東朝)를 의심하여 이석효(李錫孝)의 말대로 백금(百金)을 봉하여 들여보냈는데, 이는 대궐 안으로 유입(流入)시키려고 하는 계획이었다. 내가 이런 전갈을 듣고 급히 그 은(銀)을 찾아 그 속에 싼 것은 그대로 두고 다시 단단히 봉하여 스스로,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이라고 기록하여 두었다. 그랬다가 명을 듣고 난 뒤에는 들여온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상이 이와 같았으므로 동조(東朝)께서 매양 슬퍼하고 애절하게 여기시는 하교(下敎)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들은 자도 많았는데, 그들은 소인(小人)의 복안(腹案)으로써 성인(聖人)의 도량을 헤아렸던 것이었다. 이 일은 측근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이 나를 칭찬하기를 바란 뜻이었는데, 내가 즉시 되돌려 주지 않고 연·월·일을 기록하여 두었던 것은 만약 돌려보내면 반드시 다른 길을 통하여 그들의 뜻을 행하고야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조(東朝)의 대공(大公)·무사(無私)하신 처분에 대해 그들은 반드시 그 계획을 이루었다고 여길 것이니, 그렇게 되면 누(累)를 끼침이 어떠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처음에는 그냥 두어 그 무리들로 하여금 그 뜻이 행해진 것처럼 여기게 했다가 종말(終末)에는 연·월·일을 명백하게 기록하여 돌려 보냈으니 이렇게 해야 그들의 간사한 마음을 깨뜨릴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 내가 비록 학문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였으나 노론들이 만약에 범진(笵鎭)044)                  의 마음을 갖고 범진의 일을 행했다면 내가 마땅히 그들의 충성심을 가상(嘉尙)히 여겨 내가 마땅히 그들의 충성심을 공심(公心)으로 임용(任用)했을 것이고 결단코 그 무리들이 나의 마음을 유혹시키는 데에 현혹되어 녹훈(錄勳)을 책정(策定)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 계책은 또한 어리석은 것이었다. 녹훈을 정하는 말에도 내력이 있다. 서덕수로 하여금 도목(都目)을 들여보내게 했는데 사대신(四大臣)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그 중에 있었으나, 이는 이건명(李健命)도 아니고 조태채(趙泰采)도 아니었고, 장세상(張世相)의 이름이 있었으며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제겸(李濟謙)의 무리도 모두 그 중에 있었다. 장세상이란 자는 곧 내가 번저(藩邸)에 있을 적에 차지 중관(次知中官)045)                  이었는데도 잡된 무리들과 서로 결탁했으니 본래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항상 멀리했더니, 다른 중관들은 모두 나를 괴이하게 여겼지만 나의 소견은 헛되지 아니하였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나와 친근하여 별도로 그 길을 얻어 대궐 안의 뜻을 탐지하려는 것이었으나, 이 세상에 어찌 사대부로서 환시(宦寺)들과 결탁을 하고서 실패하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옛날에 남인(南人)·소론(少論)들은 박상검(朴尙儉)을 통하여 궁중의 일을 서로 알아내었다. 이것이 내가 장세상에게 한계를 엄격히 한 까닭이었다. 경술년046)                  에 최필웅(崔必雄)도 그러한 나머지 습관을 주워모은 것이었다. 통탄스럽다! 내가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부형(父兄)에 대한 의리는 대략 알고 있다. 선왕(先王)의 혈맥(血脈)은 황형(皇兄)047)                  과 나뿐인데, 환득 환실(患得患失)048)                  하는 무리가 우리 형제 사이에 있으면서 고금(古今)에 없던 일을 만들어 냈으니, 어찌 대단히 상심(傷心)하지 않겠는가? 다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옛날 우리 선왕을 섬기던 정성을 다하여 우리 황형을 섬기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갑진년049)                  의 일을 당하였으니,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면서 진실로 죽고 싶은 심정(心情)이었다. 민 판부사(閔判府事)050)                  가 나의 이런 말을 듣고서도 또다시 차마 스스로 그의 당(黨)을 옳게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경(卿)은 만약에 저사(儲嗣)를 세울 때 주고받은 것을 광명(光明)하다고 생각한다면 괜찮겠지만, 신하의 행위로서는 다시 무어라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서 스스로의 의리라고 생각하여 나를 거의 불의(不義)에 빠지게 한다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소론들도 역시 잘못이다.
신축년과 임인년의 일도 곡절이 있었으니, 내가 또한 자세히 말하겠다. 아!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가 필정(必貞)·박상검(朴尙儉)의 무리를 얻어 밖으로는 조정 신하를 모함하고 안에서는 외부와 통하여 함정을 파고 있었다. 그래서 신축년의 김일경이 올린 상소를 가지고 박상검이 동궁(東宮)의 상소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어찌 간사하고 흉악스럽지 않은가? 역적 박상검은 곧 남인(南人) 심익창(沈益昌)의 제자(弟子)로서 그의 뜻은 먼저 소론을 선봉(先鋒)으로 삼아 반드시 폐족(廢族)들을 쓰려고 하는 의도(意圖)였는데, 스스로 나에게 그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아! 경종께서는 지극히 인자(仁慈)함과 대단한 효성(孝誠)으로써 우리 성모(聖母)이신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섬기시는 것이 어릴 때부터 빈틈이 없었고, 경자년 이후에 능히 선왕(先王)의 처분을 지켰으니, 이는 지나간 역사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변변치 못한 역적 환관(宦官)들은 뜻을 잃은 무리들과 결탁하여 감히 해와 달처럼 명백한 처분을 어지럽히고자 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해야 할 임무는 주상의 잠자리의 안부를 묻고 아침저녁으로 주상의 수라상(水剌床)을 몸소 살펴보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을 보고서 입을 다물고 아뢰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 성모(聖母)와 황형(皇兄)을 저버리고서 홍수(紅袖)051)                  들과 서로 결탁한다는 것이 반드시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먼저 국구(國舅)에게 서신(書信)으로 아뢰어서 곤전(坤殿)에게 말씀드리도록 했더니, 국구께서는 진실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답을 하여 나로 하여금 양성(兩聖)052)                  에게 말씀드리게 하였다. 그래서 먼저 곤성(坤聖)053)                  께 아뢰고 그 다음에 요망스러운 환관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이유를 말씀드렸더니, 경종께서는 흔쾌히 따르셨다. 황형과 나는 이렇게 틈이 없었다. 그러나 소인(小人)의 해는 성세(聖世)에도 면하기 어려운 것인지라,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위조(僞造)한 하교(下敎)가 내려와 그날의 승전내관(承傳內官)을 먼저 파면시켰는데, 이는 비망기(備忘記)를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일이 순조롭지 못함을 알고 동궁(東宮)으로 물러와 들어앉게 되어 문안을 드리는 일이 이 일로 인하여 막혀버렸다. 그후 이틀 뒤 어명(御命)으로 나를 불렀는데, 이는 필정과 박상검이 국구(國舅)의 서신 사연 중의 내용을 알고자 하여 그 서신을 찾아내기 위한 뜻이었다. 나는 곤전(坤殿)께 아뢰어 승낙을 얻은 다음에 그것을 드리면서 다시 요망한 환관들의 죄상을 밝힐 것을 청하고 물러나왔다.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를 인견(引見)하였을 적에 필정과 박상검의 심복 환관이 그 서신을 용안(龍案)054)                  에 두었는데, 이는 한번의 거사(擧事)에 둘을 다 해치려는 의도였으나, 다행히 경종의 지극한 우애에 힘입어 그 계책이 성공하지 못하고 인하여 나에게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가짜 전지(傳旨)가 내려졌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하는 수 없이 사위(辭位)하였던 것이다.
아! 소론들은 이런 줄도 모르고 도리어 남인(南人)의 길잡이가 되었으니, 어찌 웃을 일이 아닌가? 잘못된 것은 항상 노론의 마음을 불편하게 여기면서 스스로 그 당(黨)을 옳게 여기는 것이다. 아! 김일경과 박필몽의 마음을 경(卿) 등이 이미 알지 못하는데, 정인중(鄭麟重)과 김용택(金龍澤)의 마음을 유락(唯諾)한 사람들이 어찌 홀로 알겠는가? 더구나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린 것은 역모(逆謀)가 아니고 그런 마음가짐이 역모인 것이니, 그 마음가짐만을 거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선왕(先王)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당저(當宁)055)                  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그 중에서 이이명(李頤命)에 대해서는 서덕수가 독대(獨對)한 일을 가지고 노론들의 올바르지 못한 말을 받아들여 나를 섬에 안치(安置)시켜야 한다 했고, 이건명(李健命)에 대해서는 서덕수 등과 사이가 좋지 못함은 나도 알고 있으니, 그 무리들과 혼동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조태채(趙泰采)는 본래 피차간에 미움을 받지 않았는데, 이미 그러함을 알았으면 이를 구별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김창집(金昌集)·이이명 두 사람에 대해 처분을 내리지 않은 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을사년 사충사(四忠祠)를 세운 것은 신축년과 임인년의 참혹함을 애통하게 여겨 그러한 풍습을 억제하려는 뜻이었다. 그런데 백금(百金)의 뇌물이 어찌 곤궁한 선비로서 마련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나는 그렇게만 알고 그 문제를 잠시 중지시켰는데, 지금 생각하고 깊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어찌 다시 그 옛방식을 따르겠는가? 장차 처분을 할 적에는 김창집과 이이명에 대해 반드시 구별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아직까지 늦춘 것은 그 뜻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그러나 이희지(李喜之)는 아무리 형편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일가야 무슨 상관이며, 김제겸(金濟謙)은 비록 역심(逆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일가야 무슨 연루될 것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지난번 조참(朝參) 때와 어제 경연(經筵)에서 견록(牽錄)하라고 교시(敎示)한 것도 곧 그런 뜻이었다. 이 영부사(李領府事)가 그 말을 들은 뒤에도 어찌 끝까지 처음의 마음을 지키겠는가? 아! 노론은 기사년056)                   이후로부터 모두가 경종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졌고, 소론은 병신년057)                   이후로 모두 ‘저들은 반드시 이심(異心)을 갖고 있다.’고 하며, 그런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미루어 노론 중에는 김제겸(金濟謙)의 무리를 꾸며내고, 소론 중에는 마침내 김일경·박필몽의 무리가 있었는데, 노론은 오히려 그의 당을 비호하다가 스스로 김제겸의 무리와 결과가 같은 것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소론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다가 역시 자신도 모르게 김일경·박필몽과 구별이 없게 되었다.
나의 견해로 보건대, 그런 마음을 버리지 않는 자는 다같이 김제겸과 박필몽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경 등이 지금 이후로 어찌 차마 ‘노소(老少)’ 두 글자를 마음에 싹틔울 수가 있으랴? 아! 지금의 처지는 지극히 어렵다. 아주 공평하게 하면 요(堯)·순(舜) 같은 임금이 될 수 있으나,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을 가지면 어떠한 임금이 되겠는가? 나의 마음은 얼음이나 옥처럼 깨끗하다. 황형(皇兄)에게 만약 후사(後嗣)가 있었다면, 나는 본래의 뜻을 굳게 지키면서 스스로 분수대로 산야(山野)에서 살았으리라. 이것이 나의 지극한 소원이었으나, 자성(慈聖)의 지극하신 하교(下敎)에 감동하고 경종의 지극하신 우애를 입었는지라 위로는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의 중대함을 생각하여 나 자신의 덕이 모자람도 헤아리지 않고 감히 현재 나의 뜻을 굳게 지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태백(泰伯)·중옹(仲雍)058)                  을 생각할 적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아! 증자(曾子)의 어머니처럼 현명(賢明)한 분도 똑같은 말이 세 번 이르니 베틀에서 내려오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며059)                  , 송나라        태종(太宗)처럼 현철(賢哲)한 군주도 부자(父子) 사이에서 ‘짐(朕)을 어느 곳에 두려는가?’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경종께서는 시종 나를 보호하였으니, 이는 지나간 역사에도 드물게 있던 일이다. 세상 일을 예측할 수 없는 때를 만나 남들이 견딜 수 없는 일을 겪으면서 미처 그 남은 정성을 다 바칠 수가 없었다. 황형께서 예척(禮陟)060)                  하신 뒤 갑진년 이후로는 오히려 경휘전(敬徽殿)061)                  만을 의지하였었는데, 작년 이후로는 만사(萬事)가 이미 끝나 버렸다. 잊을 수 없는 이 정성을 어느 곳에 다시 펴겠는가? 저 멀리 의릉(懿陵)062)                  을 바라보니, 애통한 감회가 가슴을 메운다. 아! 이 일을 동조(東朝)와 경종에게 자세히 말씀드린 것은 오래 되었으나 이제 와서 경 등에게 다 말하게 되니, 다시 유감이 없다. 그래도 한 가지가 있는데, 이는 마땅히 유교(遺敎)를 기다려야 할 것이나 그것도 이미 10분의 9는 설명이 되었다. 아! 당론(黨論)이 나를 모함하고 당론이 나를 해쳤다. 서덕수 등이 말한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 이쪽에서는 초(楚)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고063)                   하여 나를 그처럼 얽어 매었고, 저쪽에서는 올바르지 못한 자들이 말하는 바를 이용하여 나에게 예측할 수 없는 말을 첨가시키는지라. 이미 황형에게 정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어 그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듣고서도 지금까지 침묵을 지켰으니, 또한 미련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내가 탄식과 눈물이 함께 나오는 까닭이다. 아! 삼당(三黨)이 이와 같으니, 지금 가장 중요한 방법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등용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비록 올바르지 못한 무리가 있을지라도 저절로 마음을 고칠 수가 있을 것이니, 조정이 공고해지고 나라의 형편도 자연히 굳혀질 것이다. 원컨대 경 등은 모름지지 옛버릇을 잊어버리고 한마음을 아주 결백하게 가지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下敎)를 마친 뒤 약방(藥房)에서 탕제(湯劑)를 올리겠다고 거듭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고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그리고서 임금이 오른손으로는 이광좌(李光佐)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閔鎭遠)의 손을 잡고서 이대로 머물러 있고 가지 말라고 권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감히 벼슬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 만약 윤허를 받는다면 여유를 갖고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만약에 머물러 있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어 어렵겠는가?"
하고, 마침내 윤허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도 벼슬을 그만두는 윤허를 받게 되면 마땅히 서울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역시 윤허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비록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하더라도 간혹 상참(常參) 등의 큰 일을 만나면 당연히 들어와 참여해야 할 것이며, 강연(講筵)의 빈대(賓對)에도 때때로 입시(入侍)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고, 이튿날 임금이 어제 밤에 있었던 하교 내용을 친히 한 통을 써서 사관(史官)에게 주어 역사를 편수(編修)할 적에 참고하게 하였는데, 대교(待敎)        김한철(金漢喆)이 그 글을 되돌려 보내면서 아뢰기를,
"삼가 손수 써주신 글을 받고 물러나와 신(臣)의 초책(草冊)064)                  과 고증(考證)해 보니,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군주가 글을 써서 사관(史官)에게 주어 역사 편수(編修)를 지휘하게 되면, 아마도 후일의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史官)의 말이 옳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임금이 지난해에는 합문(閤門)을 폐쇄하였고 이번에는 약을 중지시켰는데, 이는 다른 의견을 억지로 합쳐서 탕평(蕩平)을 단단히 이루려는 뜻이었으나 옳고 그른 것이 모두 뒤섞이고 의리(義理)가 마침내 명백히지지 아니하여, 다만 임금의 위엄만 날로 위에서 손상되고 성의는 아래로 먹혀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밤중에 전석(前席)에서 눈물을 흘리며 은밀하게 말한 것은 대개 두 정승을 개도(開導)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함을 깨닫게 한 말은 별로 없고, 심지어는 벼슬을 그만두는 것을 모두 윤허했으니, 이는 또 애써 불러온 뜻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주서(注書)에게 붓을 멈추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발설하지 못하게 했으니, 무릇 밖에 있는 사람이야 그 누가 다시 이 일을 알겠는가? 그런데 그후 상소에 다시 이 일을 주달(奏達)하는 것 중에 만약에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문득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에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느냐?’라고 하여 의혹을 면하지 못하게 했으니, 온 세상에서 보고 듣는 자와 식견이 있는 이들이 남몰래 탄식하는 것이 어떠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5책 33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2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왕실-궁관(宮官) / 역사-사학(史學)


[註 03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035]          경자년 : 1720 숙종 46년.[註 036]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03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038]          달성(達城) :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註 039]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040]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041]          병오년 : 1726 영조 2년.[註 042]          계력(季歷) :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셋째 아들로서, 형(兄)인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양위(讓位)를 하므로 아버지의 대를 잇고 문왕(文王)을 낳았음.[註 043]          양백기(楊伯起) : 백기(伯起)는 후한(後漢) 때 사람인 양진(楊震)의 자(字). 청렴결백하여 자기가 추천한 사람 왕밀(王密)이 밤중에 몰래 황금(黃金) 10근을 갖다 주니, 그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 하면서 왕밀을 꾸짖으니, 왕밀이 부끄러워 물러갔다는 고사(故事)가 있음.[註 044]          범진(笵鎭)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간관(諫官)으로서 나라 일에 충성을 다바쳤음.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간절하게 청하여 눈물을 흘린 적이 있으며, 전후(前後)하여 19차례나 상소(上疏)하였는데, 그에 대한 하명(下命)을 1백여 일이나 기다리느나 수염과 머리털이 다 희게 될 정도로 정성을 다하였음.[註 045]          차지 중관(次知中官) : 각 궁방(宮房)의 일을 맡아 보는 환관(宦官).[註 046]          경술년 : 1730 영조 6년.[註 047]          황형(皇兄) : 경종.[註 048]          환득 환실(患得患失) : 녹위(祿位)에 집착하는 것을 말함.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 "비부(鄙夫)들은 벼슬을 얻기 전에는 못얻어 걱정이고 얻고나서는 놓칠까 걱정하여 그것을 지키려고 못하는 짓이 없다."라고 한 말임.[註 049]          갑진년 : 1724 경종 4년.[註 050]          민 판부사(閔判府事) : 민진원(閔鎭遠).[註 051]          홍수(紅袖) : 궁녀의 별칭.[註 052]          양성(兩聖) : 경종과 왕비.[註 053]          곤성(坤聖) : 왕비.[註 054]          용안(龍案) : 임금의 책상.[註 055]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 경종을 이름.[註 056]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057]          병신년 : 1716 숙종 42년.[註 058]          태백(泰伯)·중옹(仲雍) :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와 차자(次子)로, 아우인 계력(季歷)에게 양위(讓位)하였으므로 후세에서 그 덕을 일컬었음.[註 059]          증자(曾子)의 어머니처럼 현명(賢明)한 분도 똑같은 말이 세 번 이르니 베틀에서 내려오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며 : 증자(曾子)의 어머니가 베를 짜고 있었는데, 어떤 이가 와서 ‘증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하니, 증자의 어머니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 후 다른 사람이 또 와서 독같은 말을 세 번이나 하니, 아들을 믿던 어머니도 베틀에서 내려와 달려가 보았음. 거짓도 자주 되풀이하면 사실로 믿는다는 뜻.[註 060]          예척(禮陟) : 승하했다는 말.[註 061]          경휘전(敬徽殿) : 경종의 계비(繼妃) 선의 왕후(宣懿王后).[註 062]          의릉(懿陵) : 경종의 능.[註 063]          초(楚)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 ‘위초비위조(爲楚非爲趙)’의 귀절(句節)을 변조(變造)한 것으로, 겉으로는 위하는 체하면서 실상은 딴 것을 위함을 이름.[註 064]          초책(草冊) : 초벌로 기록한 문서.
사신은 논한다. "임금이 지난해에는 합문(閤門)을 폐쇄하였고 이번에는 약을 중지시켰는데, 이는 다른 의견을 억지로 합쳐서 탕평(蕩平)을 단단히 이루려는 뜻이었으나 옳고 그른 것이 모두 뒤섞이고 의리(義理)가 마침내 명백히지지 아니하여, 다만 임금의 위엄만 날로 위에서 손상되고 성의는 아래로 먹혀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밤중에 전석(前席)에서 눈물을 흘리며 은밀하게 말한 것은 대개 두 정승을 개도(開導)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함을 깨닫게 한 말은 별로 없고, 심지어는 벼슬을 그만두는 것을 모두 윤허했으니, 이는 또 애써 불러온 뜻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주서(注書)에게 붓을 멈추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발설하지 못하게 했으니, 무릇 밖에 있는 사람이야 그 누가 다시 이 일을 알겠는가? 그런데 그후 상소에 다시 이 일을 주달(奏達)하는 것 중에 만약에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문득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에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느냐?’라고 하여 의혹을 면하지 못하게 했으니, 온 세상에서 보고 듣는 자와 식견이 있는 이들이 남몰래 탄식하는 것이 어떠했겠는가?"

 

1월 20일 임인

조적명(趙迪命)을 응교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심공(沈珙)을 이조 참판으로, 민정(閔珽)을 장령으로, 심택현(沈宅賢)을 공조 판서로 삼고, 이광좌(李光佐)와 민진원(閔鎭遠)을 봉조하(奉朝賀)로 삼았다.

 

권영(權瑩)을 해남현(海南縣)에 이배(移配)하라고 명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권영에 대한 당초의 처분은 나도 지나치다고 여겼으니, 마땅히 참작하는 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있는 도(道)에서 육지로 나오게 하되, 해남으로 이배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1일 계묘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어미의 병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언 이주진(李周鎭)이 상소하여, 언관(言官)을 귀양보낸 잘못을 말하고, 끝에는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벼슬을 그만두게 한 명령을 도로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는 아직 현거(懸車)065)  할 나이가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조정이나 민간(民間)에서 사모하고 기대하고 있으니, 그의 나아가고 물러남과 쓰여지고 쓰여지지 않음에 관계된 바가 어떠하겠습니까? 현재 벼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직 나이가 많지 않으면서 떠나기를 원하는 자가 번번이 이 예(例)를 인용(引用)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시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다른 대신(大臣)들이야 어찌 이 일을 본받아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나도 어찌 이 일로 인해 모두 윤허할 리가 있겠는가? 그대의 생각이 지나치다."
하였다.

 

1월 22일 갑진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도승지 조명익(趙明翼)에게 손수 쓴 글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는 지난날 미처 하교(下敎)하지 못한 것이니, 사관(史官)에게 내어주라."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아! 여러 당(黨) 중에 모두 난역(亂逆)한 자가 있고, 본래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바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신 ‘진실로 벼슬을 잃을 것을 걱정하게 되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 근본은 신축년066)  이나 임인년067)  , 그리고 무신년068)  이나 경술년069)  에 비롯된 것이 아니고 사실은 경자년070)   국휼(國恤) 때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난번에 이른바,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고 한 것이다. 민 판부사(閔判府事)가 항상 지키는 의리와 이 영부사(李領府事)가 옛날부터 자신만을 옳게 여기는 고집에 대해서 나는 모두 ‘긴 밤중에 있으면서 그 긴 밤의 기다리는 마음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 깨닫지 못함은 비록 처지를 바꾸어 놓더라도 반드시 같을 것이다.’ 하였다. 그 병은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색목(色目)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잘못을 크게 깨달아 지난 일에 대해 송구함을 갖고 재주가 있는 자면 등용하여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게 해서 3백 년 종묘 사직으로 하여금 영구히 굳게 하고 우리 삼종(三宗)의 피붙이를 편안케 하는 것이 변경할 수 없는 대의(大義)이다.’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두 원임 대신이 입시(入侍)했을 적에 큰 의리의 요긴한 곳으로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다 말하게 되었다."
하였다. 조명익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손수 쓰신 글의 어구(語句) 중에 크게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건저(建儲)의 일을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당시의 대신(大臣)들은 비록 걱정할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처사에 대해서는 또한 어떻게 여기시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도(世道)는 비록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찌 이 일 때문에 의심해서는 안될 자리까지 의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그 글을 고쳐 하교하기를,
"아! 10여 년 이래로 기강이 날로 무너져서 난역(亂逆)의 행위가 번갈아 나오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공자(孔子)께서 이르신 ‘진실로 벼슬을 잃을 것을 걱정하게 되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경(卿) 등이 지키는 의리와 자신만을 옳게 여기는 고집에 대해 나는 모두 ‘긴 밤중에 그러한 마음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깨닫지 못할 것은 비록 처지를 바꾸어 놓더라도 반드시 어떻게 제거시킬 것인가? 색목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깨달아 지난 일에 대해 공구심(恐懼心)을 갖고 재주가 있는 자면 등용하여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게 해서 우리 3백 년의 종묘 사직으로 하여금 영구히 굳게 하는 것이 곧 바꿀 수 없는 큰 의리이다. 내가 늘 알고 있는 의리는 본래 이와 같은 것이다."
하고, 인하여 그것으로 반포(頒布)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대사간 정우량(鄭羽良)이 상소하여 손수 써준 글을 다시 내릴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여러 번 주서(注書)를 물리치고 여러 신하들에게 경계하여 누설하지 못하게 하셨는데, 진실로 누설하려고 하지 않으신다면 하교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고 꼭 하교를 하셔야 한다면 굳이 누설하지 말라고 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교하실 때에 하늘도 듣고 신명도 듣고 여러 신하들도 들었으니, 비록 누설하지 말라고 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때 조명익이 창졸간에 구대(求對)하였고 하번 한림(下番翰林) 김한철(金漢喆)은 공무(公務)로 인하여 외출(外出)하였으므로 다만 좌사(左史)인 송교명(宋敎明)이 입시(入侍)하였다. 김한철이 돌아와서 상소하여 그 체통을 잃은 점을 지적하고, 장령 민정(閔珽)도 상소하여 말하기를,
"좌사(左史)·우사(右史)를 다 갖추지 않고 입시하였으니, 듣기에 놀랍고 괴이합니다. 청컨대 조명익을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으나, 단지 추고(推考)만을 명하였다.

 

1월 23일 을사

이병상(李秉常)을 형조 판서로, 이종백(李宗白)을 응교로, 이유(李瑜)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1월 25일 정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고, 흉년이 들었다 하여 여러 도(道)의 봄철의 조련(操鍊)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언성(言聲)을 높이고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니 조정의 위의(威儀)가 엄숙하지 못하다 하여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고사(故事)를 보면 경연석(經筵席)에서 대신(大臣)은 꿇어앉고 재신(宰臣)은 손을 잡고 반만 구부리게 되어 있지, 일찍이 부복(俯伏)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요즈음 조정의 정국이 자주 바뀌게 되어 조정의 신하들이 겁을 먹고 모두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엎드립니다. 임금과 신하는 아비와 자식 같은 것인데, 아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본다고 하여 도리어 무슨 손상이 되겠습니까? 승지가 대신(大臣)의 추고 요청으로 인해 이렇게 변명까지 하였으니, 더욱 조정의 체통을 잃은 것입니다."
하였다. 또다시 추고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1월 26일 무신

신방(申昉)을 도승지로, 서종옥(徐宗玉)을 승지로, 신택하(申宅夏)를 정언으로, 김상규(金尙奎)를 전광 감사(全光監司)로 삼았다.

 

임금이 일소(一所)071)  와 이소(二所)에서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賑恤)하는 죽을 가져다 보고 이소의 것이 일소의 것보다 낫다고 하여 이소의 감진 장교(監賑將校)는 상방(尙方)의 활로 상을 주고, 일소의 감진 장교는 곤장으로 죄를 다스렸다. 이어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에게 명하여 매일같이 출근해서 5일마다 서계(書啓)하도록 하였다.

 

1월 27일 기유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으로, 김동필(金東弼)을 판돈녕(判敦寧)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좌윤(左尹)으로 삼았다.

 

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차귀(次貴)가 복주(伏誅)되었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여, 소금을 구워 흉년을 구제하는 잇점을 말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전국에 흉년이 거듭 들어 많은 백성들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저축은 이미 바닥나 구제하여 살릴 대책이 없습니다. 올해는 사람이 서로 잡아 먹는 지경인데, 다시 한 해 거듭 흉년이 든다면 백성이 하난들 남아나겠습니까? 온 나라 안에 많은 사람이 다 굶주리고 있으니, 부황이 들어 다 죽게 되면 하수(河水)가 터진 다음에 물고기가 썩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떻게 수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통곡을 해도 시원치가 않을 것입니다. 소금을 굽는 계책은 사실상 천만번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것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해(利害) 관계는 자세히 연구해 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이론(異論)만을 제시하여 소금을 굽지도 않고 폐단만을 닳도록 다툽니다. 소금 굽는 일을 버려두고서 또다시 장차 무슨 계책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세 분의 정승이 자리를 갖추고 있고 여러 선비들도 모였으며, 심지어는 민간에 있는 대신(大臣)들까지도 모두 서울에 머물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어찌하여 정사(政事)하는 묘당(廟堂)에 많이 모여 사당(私黨)의 마음을 싹 끊어버리고 나라를 살릴 대책을 함께 의논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때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계획을 조처하여 시행한다면, 다소나마 기울어가는 것을 바로잡고 낭패된 형편을 구제할 수 있는 대책이 될 것입니다. 아! 모두들 당(黨)을 위해 죽는 것은 몸을 아끼는 것보다 더하고 몸을 아끼는 것은 나라를 근심하는 것보다 더하여, 그 당과 몸을 위하는 일에 있어서는 모발(毛髮)을 태우거나 수족(手足)을 적셔가면서 구제하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나랏일에 이르러서는 마치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여윈 것을 보는 것처럼 하면서 예사롭게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만, 나라가 망한 뒤에는 어느 곳에서 당을 위해 죽을 것이며 어느 곳에서 몸을 아끼게 되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뼈에 사무치고 마음이 아픔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도 마땅히 반성하셔서 이런 때에 스스로 힘써 경비는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고 백성을 구제하시는 일은 좋은 점을 따라 시책하여 군신(君臣)과 상하(上下)로 하여금 미처 못한 것을 후회하여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진심(眞心)에서 나온 정성이니,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29일 신해

소대(召對)를 행하여 《주서절작통편(朱書節酌通編)》을 강(講)하고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감귤을 하사했다.

 

영남 감진 어사(嶺南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이 상소하여, 저축한 쌀 3천 석을 획급(劃給)해 입본(立本)072)  하지 말고 특별히 나누어 구제할 수 있게 하며, 다시 유사(有司)의 신하로 하여금 성명(成命)이 내려진 다음에는 인색하게 고집하지 말도록 하기를 중국에서 호부(戶部)와 공부(工部)에게는 참견하지 못하게 한 고사(故事)처럼 해주기를 청하였는데, 묘당(廟堂)에 내려 조처하도록 명하였다.

 

1월 30일 임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전광 감사(全光監司) 유엄(柳儼)이 처음에 전결(田結)을 보고할 적에는 이미 정미년073)  의 총수(摠數)로 기준을 삼았는데, 곧 이에 제멋대로 2만여 결(結)을 감(減)했다는 이유로써 엄중하게 견책(譴責)을 가하고 아울러 감한 것을 도로 기록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유엄이 묘당(廟堂)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이미 봉납(捧納)한 전결(田結)을 감하였으니, 지방 감사(監司)의 체모가 아니다. 그를 잡아다가 조처해야 하겠으나 전결을 만약 환추(還推)하게 한다면, 이는 조정에서 백성을 위하는 생각이 도리어 도신(道臣)만도 못한 격이니, 그냥 내버려 두어 거론하지 말고 우리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게 하라."
하였다.

 

민응수(閔應洙)를 종성(鐘城)에 보임(補任)시키라는 명을 다시 도로 정지시켰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의 말을 따른 것이다.

 

대사간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요즈음 오로지 탕평책(蕩平策)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 만약 전조(銓曹)로 하여금 탕평을 하게 한다면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정목(政目)을 하는 사이에 저지(沮止)된 것이 매우 많아 드나드는 사람은 다만 두세 사람뿐입니다. 그래서 소론(少論)들이 억울하게 되어 당론(黨論)이 제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무일(愼無逸)이 외국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는 다른 나라에 나쁜 평판을 끼쳤는데도 갑자기 간원(諫院)의 장(長)으로 의망(擬望)되었고, 이응(李膺) 같은 이는 늙고 정신이 없어 겨우 사람의 형체만 갖추고 있는데도 납언(納言)에 통망(通望)되었으며, 이진순(李眞淳)처럼 자질(資質)과 인망이 얕은 이에게 강화도(江華島)란 보장(保障)의 지역을 맡겼으니, 이러한 일은 별도로 전조(銓曹)에 경계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좌승지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신무일은 만약 탐욕을 부렸다는 일로써 말한다면 옳겠으나, 이렇게 대충 논핵한다면 대간(臺諫)의 체모에 어긋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응은 늙어서 혼미하기는 하지만, ‘겨우 사람의 형체만 갖추었다.’는 말은 중도(中道)에 지나치다 하겠다. 신무일과 이진순에 대해서는 대간(臺諫)에서 체차(遞差)하기를 계청(啓請)하는 것인가?"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신무일과 이응은 청컨대 다시 의망(擬望)하지 말고 이진순은 체차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진순은 이미 감사(監司)를 지냈고 또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거쳤는데, 자질과 인망이 어찌 유수(留守)에 부족하겠는가? 이응에 대해서는 어찌 반드시 그렇게까지 말하는가? 신무일은 이미 나쁜 평판을 끼쳤다고 말하니, 시비(是非) 속에 둘 수가 없다. 잡아다가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이튿날 지평        안상휘(安相徽)가 대충 탄핵을 했다는 이유로써 정우량을 체임시킬 것을 논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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