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계축
박찬신(朴纉新)을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로, 정내주(鄭來周)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2월 2일 갑인
병조 참의(兵曹參議) 안중필(安重弼)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궐문을 지키는 향군(鄕軍) 모두가 부황이 들어 거의 귀신 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휼청(賑恤廳)에서 선발하여 건량(乾糧)을 지급하고 있는데, 선발에 들지 않은 자는 장차 차례로 죽게 될 지경입니다. 청컨대 똑같이 건량을 지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진휼청에 명하여 특별히 관심을 갖고 돌보게 하였다.
2월 3일 을묘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가 사은(謝恩)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은 숙종(肅宗) 말년(末年)과 경종(景宗) 초년(初年)에 전(前) 참판(參判)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그 후에 비록 조정에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전후의 비밀스러운 일들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19일의 하교(下敎)를 듣고서는 진실로 큰 꿈을 처음 깬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삼가 손수 써 주신 글을 보니, 말뜻이 해와 달처럼 분명하고 도끼처럼 엄격하여 후세의 난신(亂臣)·적자(賊子)들이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었고 만세(萬世)의 임금이 임금 구실을 하고 신하가 신하 구실을 하는 의리가 이로부터 정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글에서 이미 ‘겨울의 밤이다.’ 하고, 또 ‘처지를 바꾸면 같다.’고 하셨는데, 대개 사람은 각각 같지가 않은데, 어찌하여 처지가 바뀐다고 해서 같겠습니까? 신이 이미 겨울의 긴 밤의 죄가 있으면 마땅히 겨울의 밤의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큰 벌을 내려 나라의 체통을 높이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매우 은근하게 위로하고 이어 어제시(御製詩)와 서(序)를 하사(下賜)하니, 이광좌가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신이 감히 몸뚱이가 끊어지지 않기를 아껴서 죽고 사는 문제를 내버려 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여덟 조항의 경계하는 말을 편간(片簡)에 쓴 것을 소매 속에서 꺼내어 바쳤는데,
"첫째 조양(調養)074) 의 방법을 삼갈 것. 둘째 학문에 힘을 더 기울일 것. 셋째 처음의 일을 살펴 경솔하게 변경하지 말 것. 넷째 세입(歲入)을 헤아려서 용도(用度)로 삼을 것. 다섯째 인재를 선택하고 또 오래 맡겨둘 것. 여섯째 허물을 경책(警責)하여 두려움을 알게 할 것. 일곱째 성급하게 하지도 말고 속단(速斷)하지도 말 것. 여덟째 반드시 매사를 견고(堅固)하게 할 것."
등이었다. 조목마다 해석하여 힘써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몇 줄의 조목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다 갖추어졌으니, 마땅히 가슴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이 광좌가 긴긴밤이 되게 한 죄를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손을 잡고 애써 만류하였다. 이광좌가 비로소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니,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이 억울하게 번민하는 것은, 신은 본래 치우치게 논의를 하지 않는 사람인데, 풍릉(豐陵)075) 은 이에 신과 민진원(閔鎭遠)을 함께 거론하고 있으니, 늘 매우 개탄(慨歎)스러워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19일에 손수 써주신 글을 중앙과 지방에 내어 보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내보이지 않더라도 거짓으로 전해지는 말은 오래되면 저절로 그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무일(愼無逸)의 문예(文藝)와 논의(論議)는 일찍부터 동료들에게 추후(推詡)되었으나, 이제야 처음으로 대사간(大司諫)에 통망(通望)되었으니 또한 늦다고 할 수 있는데, 뜻밖에도 사람들의 평판이 너무도 근사(近似)하지 않았습니다. 신(臣)도 연경(燕京)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으므로 형편과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비록 사신은 수단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본래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극히 나쁜 행위를 하였다는 죄목으로 애매모호하게 단정을 내려 암담한 데로 빠뜨려 변명하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응(李膺)을 납언(納言)으로 의망(擬望)한 것은 대개 공의(公議)를 채택한 것인데, ‘겨우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한 것은 매우 독후(篤厚)한 구기(口氣)는 되지 못하는 것인지라, 신은 대사간을 위해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대사간은 또 대간(臺諫)에 의망된 두세 사람 외에는 많은 사람을 저지(沮止)시켰다고 하고 있습니다. 신은 신칙(申飭)하는 아래에서 감히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가 없었는데, 대간의 의망을 당할 적마다 사고(事故)가 없는 사람은 대개 모두 융통성 있게 돌려가며 의망이 되고 있으니, 전후(前後)의 정부(政簿)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4일 병진
이달 12일에 문묘(文廟)의 작헌례(酌獻禮)와 시학례(視學禮)를 행하고 시사(試士)는 오는 가을로 물려서 행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는 승지 황정(黃晸)의 아룀으로 인해 작헌례와 시사례를 행하라고 명하였는데,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흉년이 거듭되어 백성이 굶주린다 하여 차자를 올려 물려서 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의견을 그대로 따라 시학례(視學禮)만을 행하고 진주(進酒)·진찬(進饌)의 의식은 없애게 하였다.
2월 6일 무오
임금이 시학(視學)할 때에 국자감(國子監)에서 세자(世子) 교육을 맡은 자도 강석(講席)에 동참(同參)시킬 뜻을 하교(下敎)하여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에게 권했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사은(謝恩)하였는데,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또다시 경연(經筵)과 상참(常參)에 입참(入參)하라는 뜻으로써 개유하니, 민진원이 대답하기를,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매월 초하루에는 반드시 조복(朝服) 차림으로 조회에 참여했다.’고 하였는데, 대개 공자(孔子)가 벼슬을 그만두었을 때 그렇게 한 것으로서, 이는 대체로 옛날의 예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이미 서울에 있으니, 매월 초하루에는 대궐에 와서 문안(問安)을 드리는 것이 존양(存羊)076) 의 의리에 부합될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번에 삼가 들으니, 지난달 19일 밤에 경연(經筵)에서 경자년077) 과 신축년078) 에 올바르지 못한 무리들의 정상을 하교하시면서도 세제(世弟)를 세운 여러 신하에 대해서는 논급(論及)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후 손수 써주신 글이 조보(朝報)에 나온 것을 삼가 보았는데,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위한 것이 아니고 벼슬을 잃을 것을 걱정한 데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신 하교가 있었습니다. 삼가 그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신축년 저사(儲嗣)를 세울 때의 여러 대신(大臣)을 가리킨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은 이미 사대신(四大臣)과 일을 같이 했는데도 다만 직책이 대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행히 홀로 살아 남았습니다만, 죽은 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항상 부끄러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저사(儲嗣)를 세우는 일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저사를 세울 때 여러 사람이 일을 함께 했는데, 또한 어찌 벼슬을 잃을 것을 걱정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 중에 섞여 있는 일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지난날 밤 하교하시기를, ‘저사를 세운 일은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서덕수(徐德修)로 하여금 나의 뜻을 탐지하게 했다.’고 하시고, 또 ‘서덕수가 도목(都目)을 하는 중에 세 대신(大臣)의 이름은 그 중에 들어 있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상의 뜻은 아마도 김창집(金昌集)을 가리키신 것 같은데, 그때 조정의 일을 신이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을사년079) 에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책봉(冊封)할 때 신은 예조 판서로 청대(請對)하여 신축년의 일을 대략 진달하였는데, 지금 다시 진달하겠습니다. 경자년의 국휼(國恤)이 있고 난 뒤 여러 신하들이 서로 대하여 문득 머리를 맞대고 걱정하며 ‘사왕(詞王)의 성후(聖候)가 건강하지 못하셨고 더욱이 후사(後嗣)를 얻을 희망도 끊겼으니, 나랏일이 장차 어찌될 것인가?’ 하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사를 세워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랏일이 비록 급하기를 하지마는 주상이 즉위하신 지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았는데, 즉시 저사를 세운다면 중외(中外)에서는 성상의 건강함이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고 반드시 의혹이 있을 것이니, 힘을 합해서 보필하다가 3년이 지난 다음에 저사를 세울 것을 의논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왕자(王子)가 많으면 마땅히 저사를 세울 것을 일찍 의논하여 인심(人心)을 매어 둘 수 있겠지만 우리 임금의 아들은 다만 한 분뿐이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다시 어느 곳으로 돌아가겠습니까? 3년 후에 의논하자는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조정 신하들은 모두 저사 세우는 것을 서둘렀으나 김창집은 끝까지 앞서의 견해를 고집했습니다. 고(故) 판서(判書) 이만성(李晩成)이 신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종묘와 사직의 계책이 시급한데 어찌하여 늦추고 있는가?’ 하였습니다. 신축년에 이르러 대관(臺官)의 상소가 갑자기 나왔는데, 그때 신은 ‘이는 나라의 큰 일인데, 한 명의 대관이 갑자기 상소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비답이 내려진 다음에 김창집이 빈청(賓廳)으로 나아가는 길에 신을 찾아와 신에게 말하기를, ‘3년 이후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지금 대관의 상소가 있어 이미 발언이 되었으니, 강력하게 청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이 의논이 이미 나온 뒤에는 잠시도 지연시킬 수가 없으니, 반드시 오늘 밤에 정성을 다하여 강력하게 진달하여 기어이 정책(定策)하도록 해야 하겠오. 만약 혹시라도 지연시킨다면 종묘와 사직의 변란이 반드시 발생할 것이오.’ 하였더니, 김창집도 그렇게 여기면서 즉시 대궐에 나아가 여러 재신(宰臣)을 부르도록 청하기로 하고 그날 밤 유문(留門)080) 하고서 들어와 아뢰어 대책(大策)을 결정한 다음에 다시 신 등을 부르겠다고 하교하셨으므로 합문(閤門) 밖에 물러나와 기다렸습니다. 밤이 3, 4경(更)에 이르렀는데도 소명(召命)이 내려오지 않으므로, 신이 ‘이 일은 경각이 급박한 것이니, 지금 다시 청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더니,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마치 군부(君父)에게 독촉하는 것과 같으니,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파루(罷漏)한 다음에 신이 말하기를, ‘일을 독촉하는 것과 같은 것은 작은 절의(節義)이고 청대를 요구하며 입시(入侍)하는 것은 큰 일이니, 곧 청대를 서두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들도 말하기를, ‘그렇다.’하고 즉시 승전색(承傳色)에게 면대(面對)를 청하고 날이 샐 무렵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어좌(御座) 곁에 서안(書案)이 있었고 그 서안 위에 글이 놓여 있었습니다. 경종께서 서안을 돌아보고 가리키므로, 대신(大臣)이 가져다가 받들어보니, 자전(慈殿)의 언문(諺文) 교서(敎書)와 경종의 친필(親筆)이었습니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받들어 읽자 입시하였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목이 메이도록 울고 물러나왔습니다. 그후에 임인년081) 의 화(禍)가 있어 신은 성주(星州)로 귀양가 있었고, 김창집도 체포되어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장차 후명(後命)082) 을 받으려고 할적에 신이 영결(永訣)을 하고자 찾아갔더니, 김창집이 울며 말하기를, ‘나는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고 한 가지 일도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다만 한평생 사업은 저사(儲嗣)를 세우는 한 가지뿐이었는데, 이는 사실 종묘와 사직의 복이다. 다만 지금의 세상을 보건대, 동궁(東宮)을 보전 하기가 어려운데, 만약에 아무런 탈이 없다면 내가 죽어서 선왕(先王)의 얼굴을 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김창집의 본뜻은 다만 종묘와 사직에 있을 뿐이었고 결코 다른 뜻이 없었음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지난번에 들은 하교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덕수로 하여금 성상의 뜻을 탐지하게 했다는 것은 전연 사리에 가깝지 않습니다.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은 다만 전하만이 계실 뿐인데, 위로 자전(慈殿)과 경종의 명령이 있었으니, 전하께서 비록 태백(泰伯)이나 중옹(仲雍) 같은 뜻이 있다 하더라도 피할 수가 있으셨겠으며 전하의 뜻을 어찌 탐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올바르지 못한 무리들이 조정에서 3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므로 고의적으로 속성(速成)시켜 자신들의 공으로 삼고자 하는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데, 김창집은 바야흐로 수상(首相)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권위를 빙자하게 된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 일은 이미 3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논의에 말미암은 것인데, 그 논의는 신이 먼저 발론한 것이니, 신이 마땅히 그 죄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대개 김창집의 사람됨은 소탈하고 솔직하므로 주장하는 바가 있으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주견으로써 했기 때문에 때로는 착오도 있었으나 또한 볼 만한 곳도 많이 있었습니다. 숙종(肅宗)의 ‘어제화상찬(御製畫像贊)’에 이르기를, ‘머리털은 희고 마음은 붉어 낭묘(廊廟)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하였습니다. 성고(聖考)께서는 명철하고 현명하셨으니, 반드시 능히 그의 마음을 살펴보고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덕수가 권위를 빙자한 일로 인하여 난역(亂逆)으로 의심한다면 어찌 너무 억울하지 않겠으며, 성상의 덕에도 어찌 결함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사(儲嗣)를 세우는 일은 광명정대한 것으로서 나의 마음을 신명(神明)에 질정할 수 있으니, 경(卿)이 말한 바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을 한다면 잘못이 없다.’는 것과 ‘오늘 밤에 말한 것은 또한 뜻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의구심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에 범진(范鎭)의 십구표(十九表)와 같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경 등의 거조(擧措)가 이와 같지 못한 것은 역시 의구심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며칠이 못가 과연 유봉휘(柳鳳輝)의 상소가 있었으니, 그날 밤으로 속히 결정한 것이 어찌 다행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 일을 굳이 끌어내 말할 필요가 없다. 네 신하를 처분하는 것이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속담에 ‘물도 씻어서 마시고자 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곧 나의 마음과 같은 말이다. 전후로 내린 처분이 흔들림을 면하지 못한 것 같았는데, 경자년083) 이후로 큰 살육(殺戮)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이를 억제하고자 하여 을사년084) 의 처분이 있었다. 그러나 사충사(四忠祠)도 또한 지나침은 못미치는 것과 같다는 실수를 면치 못하였으므로, 내 마음에 의심되는 바가 있었다. 경자년 대점(大漸)085) 때에 동조(東朝)께서 나에게 하교하시기를,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병 증세는 이미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는데, 약효가 있어서 마침내 회복이 되었다. 지금이라고 어찌 한번 손을 써볼 방법이 없겠는가? 이 일을 나가서 대신(大臣)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 내가 명을 받들고 나와서 전하였더니, 김창집이 듣고서 즉시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때 그에게 나라를 향한 정성이 있음을 알았다. 그 사람이 어찌 차마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저버렸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나도 그가 다른 사람의 권위에 빙자하는 바 되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는데, 혹시 사생(死生)·화복(禍福)의 설(說)에 흔들려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처분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그 마음을 한번 정하면 조금도 흔들리거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결코 사생이나 화복의 말에 동요되지 않을 사람입니다. 이것은 경솔하게 처분을 내릴 수가 없으니, 조용하게 깊이 생각하면 저절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이렇게 하교하면 지난달 19일에 하교한 데 대해서는 반드시 의혹의 실마리가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오늘 경연(經筵)에서 한 말을 한 통 써서 내보내어 중외(中外)에서 알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서(注書)의 일기(日記)에 기록되었으니, 저절로 마땅히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손수 써주신 글에 ‘3백 년 종묘 사직을 붙들고 삼종의 피붙이를 편안하게 한다.’라고 하신 하교가 있었는데, 성상께서 뜻하신 바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삼종의 피붙이가 전하 위에 누가 또 있습니까? 지금 성상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보호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앞으로 피붙이가 있게 되면 보호하려고 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신년086) 의 난역(亂逆)은 비록 이미 평정되었으나 인심(人心)은 알 수가 없다. 이는 아직도 올바르지 못한 무리들이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고, 비록 오늘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일지라도 그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으며, 측근에 있는 환관(宦官)들의 마음인들 어떻게 알겠는가? 조조(曹操)는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었고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이었으니, 한(漢)나라 조정이 무사(無事)하였다면 다만 분주(奔走)하면서 직무 수행에 여가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 조정이 안정되고 나라 형편이 공고하다면 무신년 난역이 어찌 감히 발생했겠는가? 경(卿)과 같이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는 사람이 조정에 줄을 서 있다면 비록 올바르지 못한 무리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마음을 바꾸고 얼굴을 고칠 것이니, 이것을 보호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궁금(宮禁)을 숙청(肅淸)하는 것이 화(禍)를 방지하는 근본이 됨을 아뢰고, 경술년에 올바르지 못한 무리가 궁궐에 잠복했던 일로 증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술년의 일은 밖에 흉적(凶賊)이 있었기 때문에 깊이 침입할 수가 있었다. 밖에 이미 흉적이 없다면 안에 어찌 이러한 환난이 있었겠는가?"
하니,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전하의 탕평(蕩平)하시려는 뜻은 좋은 생각이오니, 당론(黨論)을 타파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앞서 성상의 마음에 먼저 ‘당(黨)’이란 글자부터 잊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마음을 비운다[虛心]’는 두 글자가 가장 긴요합니다. 만약 당(黨)을 미워한다는 생각을 먼저 가슴속에 집착시킨다면, 이것도 치우친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살피며 노여움을 잊고 이치를 관찰하여, 옳은 것은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겨 지극히 공정하게 한다면, 몇 년 안에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반드시 위세(威勢)로 제압하고 억지로 결합시키려고 하여 혹 어기는 자가 있으면 곧 음성과 낯빛을 크게 번거롭게 하여 꾸짖거나 처벌하는 것이 중도(中道)에 지나치시니, 이와 같이 하고서야 어떻게 탕평의 효과가 있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옳게 여겼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손수 써 주신 글 가운데, ‘색목(色目)을 완전히 잊어야 된다.’고 하교하신 데 대해서는 신이 마땅히 스스로 노력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도 스스로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사대부로서 벼슬하지 않는 것은 다만 사대신(四大臣)의 일 때문이라고 여기시지만, 유독 이 일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신년에 반역에 대한 옥사(獄事)를 다스린 것이 너무 느슨하여 법망에서 빠져 나간 무리가 있었습니다. 박필현(朴弼顯)의 초사(招辭)와 나홍언(羅弘彦)의 책자(冊子)를 다 불태우게 한 것은 그 목적이 반심(反心)을 가졌던 자들에게도 스스로 마음을 놓을 수 있게 한 것이었으나, 조정 안에서 어떤 사람이 그 중에 들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사대부들이 어찌 그러한 무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을 마주치려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같은 범주 안에 들어 있으면서 같은 반열에 있기를 수치로 여기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올바르지 못한 무리들의 행위는 안보이는 곳에서 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한 무리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쪽은 미처 일을 하지도 않았고 저쪽은 곧바로 일을 했지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당론(黨論)에 대한 마음이 없습니다. 다른 당(黨) 중에서도 만약 옳은 것이 있으면 당연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만 다른 당에서는 비록 용서할 만 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 일의 본말(本末)을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가 없으나, 이 당 중에서 만약 용서할 만한 일이 있으면 그 본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용서할 것입니다."
하고, 이어 《주문초선(朱文抄選)》의 진강(進講)을 우러러 권면하며 말하기를,
"마음을 가라앉히고 반복해 깊이 탐색하면 반드시 큰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늙고 혼미하지만 명소(命召)하여 강론(講論)하게 한다면 마땅히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또 곡식을 저축했다가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방법과 덕원(德源)·문천(文川) 사이에 창고를 세울 것과, 영남(嶺南) 영일포(迎日浦)의 창고 곡식을 흉년과 풍년에 따라 서로 유통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좋다고 하고 어제시(御製詩)와 서(序)를 하사하며 말하기를,
"경의 형제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은 내가 아는 바이다. 이번에 벼슬을 그만두도록 허락한 것은 생각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대문(對問)을 위해서는 부름에 응하겠다고 경이 이미 직접 승낙하였으니, 부부인(府夫人)을 받들고 서울에 머물면서 우리의 냉기가 서린 나라를 보호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2월 7일 기미
호남 감진사(湖南監賑使) 이광덕(李匡德)이 서울로 올라왔으므로,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백성의 일을 물어보았다. 이광덕이 말하기를,
"소를 잡는 일은 사람들이 치욕인 줄 모두 알고 있는데, 향품(鄕品)의 사람이 손수 칼을 들고 스스로 소를 잡아서 먹고 있으며, 별성(別星)087) 은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대상인데도, 우후(虞候)가 객사(客舍)에 묵고 있을 경우 그 옷과 이불까지 빼앗아갑니다. 이런 일로 본다면 금년의 흉년은 보통의 예(例)로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만약 장계(狀啓)로써 진달한다면 묘당(廟堂)에서는 사실이 이와 같은 줄을 알지 못하므로 반드시 듣고 시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직접 올라온 것입니다. 청컨대 강진(康津)·해남(海南) 등 일곱 고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와 군포(軍布)를 정봉(停捧)하게 해 주소서."
하고, 또다시 호남의 어세(漁稅)로 받은 돈을 진휼(賑恤)에 필요한 자본으로 보탤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내일 동가(動駕)하기 전에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이 비국에 모여 감진사(監賑使)와 상의하여 결정한 뒤 감진사가 두 봉조하(奉朝賀)와 서울에 있는 원임(原任)에게 가서 상의하여 환궁(還宮)한 뒤에 입시(入侍)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2월 8일 경신
밤에 흰 구름 한 줄기가 손방(巽方)088) 에서 곧바로 곤방(坤方)을 가리키며 하늘 끝까지 뻗어 갔다.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윤동형(尹東衡)을 대사간으로, 박필건(朴弼健)을 동의금으로, 이덕재(李德載)를 정언으로, 권적(權𥛚)을 이조 참의로, 홍경보(洪景輔)를 전라 감사로, 이유(李瑜)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과 우의정 김흥경(金興慶)과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와 승지 서종옥(徐宗玉)이 청대(請對)하여 재전(齋殿)에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알성(謁聖)한 후에 시학(視學)하는 절차를 물으니, 서종옥이 말하기를,
"하번 한림(下番翰林)의 말을 들으니, 중종(中宗) 때에 시학한 전례(前例)에 대해 근거할 만한 문자(文字)가 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한림 김한철(金漢喆)이 말하기를,
"신이 야사(野史)에서 보았는데, ‘중종 기묘년089) 9월에 중종께서 문묘(文廟)에서 작헌례를 마치고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동지사(同知事) 윤탁(尹倬)·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사성(司成) 이득전(李得全)·이조 정랑(吏曹正郞) 정옥형(鄭玉亨)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주역(周易)》 태괘(泰卦)를 강(講)하게 하고, 또 첨지(僉知) 신광한(申光漢)·윤자임(尹自任)과 사인(舍人) 민수천(閔壽千)과 장령(掌令) 박훈(朴薰)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상서(尙書)》 무일편(無逸篇)을 강하게 하고, 또 생원(生員) 이약빙(李若氷)·이종경(李宗景)·최경홍(崔景弘)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게 하였는데, 모두 글의 뜻을 논란(論難)하면서 혹은 마음먹었던 것을 진달하기도 하니, 많은 선비들이 문에 빙 둘러서서 보고 듣는 자가 천만으로 헤아릴 정도였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근거로 삼을 만한 전례가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림이 말한 것은 아마도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닌 듯하다."
하고, 이어 예관(禮官)을 보내어, 시학(視學) 책자(冊子)와 시강관(侍講官)과 강서관(講書官)의 인원 수효를 밖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 물어보도록 명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을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강론(講論)한 일이 있었으나, 이것은 이미 폐지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 유생들과 한꺼번에 강론하는 것도 떠벌릴 일은 아닙니다."
하였다.
2월 9일 신유
조명익(趙明翼)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는데, 감진사(監賑使) 이광덕(李匡德)도 함께 들어왔다. 임금이 감진사가 청한 호남(湖南) 일곱 고을의 세금과 대동미(大同米)와 군포(軍布)를 나중에 바치게 하는 일에 대해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모두 경비의 용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겼다. 임금이 이광덕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러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두 봉조하(奉朝賀)에게 물어보았는가?"
하니, 이광덕이 각각 그들의 말을 차례로 아뢰기를,
"봉조하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비록 흉년이 아니라도 간혹 전세(田稅)를 감하는 정책이 있었다. 나라에서 대동법(大同法)을 설치할 때에 백성들과 5두(斗) 단위로 1분을 탕감하기로 약속했는데 그전에 없던 흉년을 만났으니, 더욱 심한 고을에는 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으나 나라의 경비도 매우 서둘러야 할 형편이다. 조정에서 그 감해 줄 수 있는 수량을 헤아리고 그에 상응하는 바탕을 재량껏 덜어 낸 뒤에 감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감할 수가 없다.’ 하였고, 민진원(閔鎭遠)은 ‘선왕조(先王朝) 정축년090) 에 감진사의 명을 받고 호남 지역의 16고을에 대한 대동세(大同稅)에 대해 편의에 따라 정퇴(停退)하였는데, 조정에서 비록 추고(推考)하라고 하였으나 특명으로 감해 주게 한 일이 있었다. 지금 이처럼 더욱 심한 고을의 대동세는 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고,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전세(田稅)는 이미 무겁게 거두는 것이 아닌데도 현재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는 것은 다만 마음이 산란(散亂)하여 생활의 법도가 없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흉년을 만날 때마다 조정에서 번번이 감해 주었기 때문에 세입(歲入)이 감축(減縮)되어 도하(都下)에서는 축적이 전혀 없으므로 백급(白給)091) 하는 폐단을 이루게 되니, 식견이 있는 이들은 망국(亡國)의 단서라고 한다. 더구나 호남의 민속(民俗)은 간사한 짓이 많은데, 만약 그 백성들이 원망한다는 이유로 성급하게 전부를 감해 주도록 한다면, 백성의 마음에 더욱 그 희망만 조장(助長)시켜 앞으로는 나라에서 백성에게 무어라고 명령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전부를 감해 주라고 청한 것은 한결같이 모두 시행하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광덕이 말하기를,
"송인명의 말은 매우 모양이 없는 생각인데, 예로부터 간사한 신하의 간사한 말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바닥난 것은 세금을 많이 거두기 때문이 아니고 고식전(姑息的)인 생활 태도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하늘을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신(臣)이 이번 걸음에 이를 보았는데, 한강(漢江)으로부터 호서(湖西)·호남(湖南)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어져 있는 유민(流民)들은 거의 모두가 나라의 역사(役事)를 견딜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송인명이 진달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일시적인 폐단만이 아니고 실은 만고(萬古)의 소인(小人)의 말입니다. 성상께서 만약에 이 말을 받아들이신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장차 한번 숨쉬는 사이에 있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송인명을 효시(梟示)하여 천지 신명(天地神明)에게 사죄(謝罪)한 후에야 올해 풍년이 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비국(備局)에서 회의하여 계획을 세워 진휼(賑恤)할 물품을 주게 하는 한편, 대동세(大同稅)와 군포(軍布)를 바치기 어려운 자는 감진사가 다시 내려가 그들을 골라내어 장계(狀啓)로 알리게 하였다. 심수현(沈壽賢)이 이광덕의 말이 너무 과격하다 하여 엄중하게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자문(咨文)을 갖추어 표류(漂流)한 사람을 봉성(鳳城)으로 호송(護送)했다.
2월 10일 임술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결성(結城)의 옥사(獄事)를 삼성 죄인(三省罪人)092) 으로 논단(論斷)하였는데, 본읍(本邑)은 이미 현감(縣監)이니, 또다시 고을 이름을 강등시킬 수가 없다고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그 고을을 혁파(革罷)하고 그 수령(守令)을 파직시켜 징계·토죄하는 형벌을 엄중히 적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 강변(江邊)의 여섯 고을 유생(儒生) 오경(吳璟)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청천강(淸川江) 북쪽의 도회(都會)에서는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각 한 과(窠)마다 ‘강(江)’자를 시험지 위에 표서(標書)하여 시험보인 지역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강계(江界)에서 설행(設行)할 적에는 길의 거리가 매우 멀어서 개장(開場)한다는 관문(關文)이 혹은 파장(罷場)한 뒤에 정해지기도 하여, 마침내 나라에서 내리는 은전(恩典)이 유명무실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만약 시험 장소를 옮겨 정하여 매양 도사(都事)가 복심(覆審)할 때 그대로 정한 행사로 삼고, 강계(江界)·벽동(碧潼)·이산(理山)의 세 고을과 혹은 태천(泰川)·어천(魚川) 등의 관장(官長)을 참고관(參考官)으로 차정(差定)하게 되면 좌정(坐停)하는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전교(傳敎)하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성균관주(成均館註)에 ‘신묘년093) 2월에 선성(先聖)094) 에게 친히 향사(享祀)를 마치고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관관(館官)과 노성(老成)한 유신(儒臣)을 인견(引見)하고 경서(經書)를 가지고 문난(問難)하였으며, 무술년095) 4월에 작헌례(酌獻禮)를 마치고 명륜당에 나아가 양로례(養老禮)를 행하고 군신(群臣)과 더불어 경서를 가지고 문난하였으며, 신묘년 2월에 태뢰(太牢)096) 로 선성께 향사를 마치고 명륜당에 나아가 문신(文臣) 2품(二品) 이상과 관관(館官)을 인견하고 경서를 가지고 문난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살펴본다면 전례(前例)가 각각 같지가 않다. 그리고 춘방(春坊)의 회강(會講)하는 전례로 살펴본다면, 사부(師傅) 이하로 관료(官僚) 중에 사고(事故)가 없는 자는 모두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영사(領事)·지사(知事)와 본관(本館)의 지사를 시강관(侍講官)으로 삼고,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을 지낸 사람과 한원(翰苑)에서 6품으로 승진된 사람과 경연관으로 선발된 사람으로서 서울에 있는 자는 실직(實職)과 군함(軍銜)을 막론하고 강서관(講書官)으로 삼으면 범람(汎濫)한 폐단이 없을 것이니, 이는 별도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고 관부(官府)의 문서를 고찰해 거행하자는 것이다. 승정원에서 정시(庭試)의 시관(試官)의 관례에 의하여 거행하고, 책자는 《주례(周禮)》와 《근사록(近思錄)》으로 하라."
하고, 이어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과 전 집의(執義) 박필주(朴弼周)와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가 모두 《오례의(五禮儀)》의 소주(小註)를 인용하였다. 전교하기를,
"대략 이미 하교한 것과 서로 부합하는 것이며, 앞서의 하교에 의하여 거행하되, 책자는 《서경(書經)》·《중용(中庸)》 중에서 임시하여 품지(稟旨)하라."
하였다.
2월 12일 갑자
밤에 흰구름 한 줄기가 곤방(坤方)에서 곧바로 손방(巽方)을 가리키며 하늘 끝까지 뻗쳤다.
임금이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친히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 시학례(視學禮)를 행하였는데,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옥교(玉轎)를 타고 집춘문(集春門)으로부터 나와 성균관(成均館)에 이르러 옥교에서 내려 대차(大次)에 들어가 면복(冕服)으로 바꾸어 입고 문묘(文廟)에 들어가 태뢰(太牢)로 작헌례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다시 대차에 들러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명륜당에 나아가 시학(視學)하였다. 시강관(侍講官)인 삼공(三公)과 종2품(從二品)이상 5명, 그리고 강서관(講書官)인 정3품(正三品) 이하 7명이 먼저 뜰 아래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시위(侍衛)한 백관(百官)들은 모두 흑단령(黑團領) 차림을 하고 유생(儒生)은 청금(靑衿)을 입고, 승지·사관(史官)의 비원(備員)이 동계(東階)로부터 올라와 동영(東楹) 안에 나아가 북향(北向)하여 부복(俯伏)하고 시강관은 동계(東階)·서계(西階)로 나누어 올라가는데, 심수현(沈壽賢)과 서명균(徐命均)은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은 동계로부터 올라가 동영 안에 부복하여 서향(西向)하고, 김재로(金在魯)·김취로(金取魯)·윤유(尹游)·윤혜교(尹惠敎)·홍현보(洪鉉輔)는 서계로부터 올라가 서영 안에 부복하여 동향(東向)하였다. 김흥경이 어좌(御座) 왼쪽으로 나아가 서향하고 부복하니, 시위(侍衛)한 여러 신하들은 동과 서로 나뉘어 승지와 사관의 오른편인 시강관 뒤에 서고, 강서관인 조적명(趙迪命)·윤휘정(尹彙貞)·조명택(趙明澤)·조명겸(趙明謙)·박필재(朴弼載)·유최기(兪最基)·조명리(趙明履)는 서계 밑인 보계(補階) 위에 부복하고, 대사성 조명익(趙明翼)은 여러 유생을 인솔하고 동정(東庭)과 서정(西庭)으로 나누어 들어가 북향하여 부복하였다. 임금이 국자감(國子監)의 장(長)에게 올라와 시강관(侍講官)의 반열에 부복하여 강연(講筵)에 동참(同參)하도록 명하였다. 조명리(趙明履)를 앞으로 나오게 하여 《주례(周禮)》의 지관 사도(地官司徒) 상편(上篇)과 고공기(考工記)를 강(講)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조명리가 《주례》에 상당히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윤휘정·조명겸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근사록(近思錄)》을 강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동재(東齋)의 장의(掌議)인 유언호(兪彦好)를 앞으로 나오게 하여 《중용(中庸)》의 구경장(九經章)을 강하게 하고, 또다시 서재(西齋)의 장의인 윤광찬(尹光纘)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서전(書傳)》 대우모(大禹謨)를 강하게 하고, 또 관관(館官) 안성시(安聖時)를 앞으로 나오게 하여 《서전》의 요전(堯典)을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글뜻을 토론하고 또 각각 생각한 바를 말하게 하며 조용히 문난(問難)하다가 해가 기운 다음에야 그쳤다.
강(講)을 마치고 동재(東齋)·서재(西齋)의 재임(齋任)과 색장(色掌)·반수(班首)를 명소(命召)하여 중계(中堦)에 세우고 한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폐단과 선비의 습관을 말하게 하였다. 윤광찬(尹光纘)이 앞으로 나와 부복하여 말하기를,
"성상께서 겉으로는 사기(士氣)를 배양하고 현관(賢關)097) 을 중하게 여기는 듯하시면서도 사실은 사기를 꺾고 현관을 무시하고 계십니다. 조정 선비에게 유벌(儒罰)을 시행하는 것은 비록 선왕조(先王朝)의 금령(禁令)이 있으나 이 역시 관학(館學)098) 의 옛 법규였습니다. 사론(士論)이 어떻게 조정의 금법으로써 꺾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엄중한 하교를 거듭 내리셨습니다. 지난번의 금송(禁松)099) 으로 인하여 오늘의 현관은 현관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교하신 것은 전하의 큰 실언(失言)이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해에는 재임이 재사(齋舍)에 거처하지 않는다 하여 제명(除名)하는 벌까지 있었습니다. 재임이 사고(事故)가 있으면 체임(遞任)시키고 사고가 없으면 그대로 시행하는 것은 옛 관례입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이 2년 동안 정거(停擧)100) 시키는 벌을 베푸셨으니, 그것도 사림(士林)을 무시한 것입니다."
하고, 유생(儒生)이 반중(泮中)101) 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뜻을 상세히 아뢰었는데, 임금이 너그럽게 받아들이며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다 말하게 하고 재임에게 정거의 벌을 해제하는 한편, 《서전(書傳)》과 《중용(中庸)》 각각 한 질을 태학(太學)에 하사(下賜)하여 권장하고 이날 환궁(還宮)하였다.
2월 13일 을축
이때 대궐 문을 지키는 군사들 중에 굶어 죽는 자가 많았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조명교(曺命敎)가 상소하여, 진휼청(賑恤廳)에서 인구를 계산하여 쌀과 장을 보내 주고, 본조(本曹)에서는 그 형편을 살펴서 제때 공급하도록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진휼청으로 하여금 보살펴 주게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신방(申昉)을 명초(命招)하여 반궁(泮宮)에서 시사(試士)하여,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정광익(鄭光益)과 차석을 한 한억증(韓億增)에게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명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정호(鄭澔)가 현도(縣道)로 상소하여 사직(辭職)을 바라고 이어 근일(近日)의 처분이 중도(中道)에 지나친다 하여 끝에 경계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의 일치하지 않은 마음을 합쳐서 일시적으로 강경하게 안정된 나라를 만들려 한다면 이는 설령 손으로 눌러서 한 곳에 모으더라도 구차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변치 않고 오래 갈 수 있는 방법이 되겠습니까? 훈유(薰蕕)와 빙탄(氷炭)을 한 그릇에 섞어 놓고 향기롭고 깨끗하여 더럽지 않기를 바라려고 하니, 반드시 이런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이 이광덕(李匡德)이 조정에서 자기를 모욕했다 하여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원하였다. 이광덕도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引責)하며 결론을 지어 말하기를,
"중신(重臣)의 이른바, ‘백성들의 곤궁함은 역사(役事)가 과중하기 때문이 아니다.’고 한 것은 끝내 잘못된 견해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시면 그 잘못된 점을 아실 수 있을 것이니, 거기에 말려들지 마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려 조정하여 화해시켰다.
2월 14일 병인
송사윤(宋思胤)을 장령으로, 유최기(兪最基)를 지평으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으로, 이중신(李重新)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유선(柳璿)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2월 15일 정묘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황재(黃梓)·이경원(李慶遠)·김상석(金相奭)에게 내린 부첨(付籤)102) 의 명(命)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작년에 옥당(玉堂)의 세 신하가 두 대신(大臣)의 일로 차자(箚子)를 올렸을 적에 비지(批旨)가 매우 엄중하였는데, 체포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특명으로 부첨하게 하였습니다. 죄가 있으면 죄를 줄 일이지 부첨까지 한다는 것은 사실상 지나친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선조(先祖) 때 신회(申懷)·유득일(兪得一)에게 부첨의 명이 있었으므로 대신(臺臣)들이 다투어 부당하다고 고집하였는데, 금번에는 끝내 거두어 들이라는 계하(啓下)가 없으니, 이는 까닭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대신들의 건의가 이와 같다 하여 그 부첨을 제거하라고 명하였다. 김흥경이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일찍이 두 신하에게 신원(伸冤)을 윤허하신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1년, 2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이처럼 지연되고 있습니다. 이이명(李頤命)에게는 이미 진실된 적심(赤心)103) 이었다고 하교하셨고, 김창집(金昌集)에게는 마음에 의심가는 것이 있어서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만, 의심간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요? 전하께서는 저사(儲嗣)를 세우게 한 것은 광명정대한 처사라 하교하셨고, 또 올바르지 않은 무리와는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이미 그러함을 아셨다면 무슨 의문이 있어서 신원해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9일의 하교가 있고 난 이후로는 여러 신하들은 마땅히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경(卿)부터 시작하여 영구히 잊어버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6일 무진
밤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임금이 미역 6백 동(同)과 장(醬) 20통(桶)을 두 진휼소(賑恤所)에 보내어 진휼소의 죽(粥)에 보태게 하였다. 또 어공미(御供米)에서 감한 것을 보리가 익을 때까지 수량을 계산해서 두 진휼소에 나누어 주어 간혹 밥을 해 주게 하고, 또 쌀 5섬과 장 5통을 병조에 하사(下賜)하여 문을 지키는 기병(騎兵)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2월 17일 기사
햇무리가 있었는데, 두 귀고리 모양을 하였고,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으며, 빛깔은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푸르렀다.
2월 18일 경오
윤급(尹汲)을 지평으로 삼았다.
2월 19일 신미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을 간택(揀擇)하여 이철보(李喆輔) 등 22인을 뽑았다.
2월 20일 임신
이주진(李周鎭)을 부수찬으로, 황재(黃梓)와 조명겸(趙明謙)을 교리로, 윤득화(尹得和)를 수찬으로, 한현모(韓顯謨)를 이조 좌랑으로, 최명상(崔命相)을 지평으로, 이성룡(李聖龍)을 전광 감사(全光監司)로 삼았다.
집의 송수형(宋秀衡)이 전광 감사(全光監司)로 있는 홍경보(洪景輔)는 인망(人望)이 본래 가볍다 하여 상소로 체임(遞任)시킬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체임을 윤허하고 대신할 사람을 선발함에 있어 승지에게 의망(擬望)한 전례가 있는가를 물었다. 대신(大臣)들이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물러와 천망(薦望)을 할 적에 세 승선(承宣)을 연달아 의망하였는데, 이성룡(李聖龍)은 의망자 중에서 끝에 해당하는 자였지만 낙점(落點)을 받았다. 대신의 직무는 사람을 추천하는 데 있는 것인데도 재량하는 바가 없고 다만 임금의 뜻만 따를 것을 생각하여 구차스럽게 일을 해치워 의망에 대비했으니, 이루 탄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정언 이덕재(李德載)가 이유신(李裕身)이 대변(對辨)한 상소로 인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유신 부자(父子)가 역적(逆賊) 김일경(金一鏡)에게 양육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에서 다 아는 바입니다. 과연 막부(幕府)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교분을 맺은 사이가 아니라면 수학(受學)함에 있어 어찌 반드시 역적 김일경의 집에서 그 변려문(駢儷文)을 배워야 했겠으며, 같이 연마를 함에 있어 어찌 반드시 역적 김일경의 아우와 시종일관 같이 행동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기름진 고을을 차지하기 위하여 영남 고을의 원[倅]을 면전에서 애걸하며 서읍(西邑)에서 파직시켜 줄 것을 청한 것과 사헌부에서 출금(出禁)한 것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것이 옳다는 것과 사주를 받아 필한(筆翰)을 빌렸다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고 거듭 말하고, 끝부분에서 박필재(朴弼載)의 상소 중에 먼저 보였다는 등의 말을 언급하며 자세히 말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세도(世道)가 바르지 못함으로 인하여 사람을 배척하고 사람을 공격함에 있어 난역(亂逆)한 자에게 권위를 빙자하여 다행히 직책이 있으면 지례 먼저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있으니, 그런 일은 매우 미안스러운 것이다."
하고, 그 상소를 되돌려 주고 특명으로 체직(遞職)시키라고 명하였다.
2월 20일 임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여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같이 들어 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조(東朝)께서 굶주린 백성을 염려하시어 장차 선혜청(宣惠廳)에서 올릴 삭선미(朔膳米)를 작년의 예(例)에 의하여 내주어 진휼(賑恤)에 필요한 물자를 돕게 하려고 하시니, 동조(東朝)의 은덕을 베푸는 뜻을 감히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마땅히 명례궁(明禮宮)에서 2백 섬을 내어다가 두 진휼소(賑恤所)에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작년에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아뢴 바로 인하여 법을 지키지 않은 수령(守令)에 대해 금고(禁錮)시키는 연한(年限)을 곡식의 섬 수로 마련하라는 일을 성상의 하교에 의해 묘당(廟堂)에 나아가 상의했더니, 여러 의논이, ‘쌀 1백 섬 이상은 3년을 금고시키고, 2백 섬 이상은 5년을 금고시키고, 3백 섬 이상은 10년을 금고(禁錮)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법식(法式)으로 정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범한 바에 아마도 공사(公事)와 사사(私事)의 구분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였다.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형률(刑律)에는 왕법(枉法)104) 과 불왕법(不枉法)이 있는데, 왕법에는 스스로 마땅히 시행해야 할 형률이 있으나 불왕법은 죄가 3천 리의 유배(流配)에 그칩니다. 지금 이렇게 품정(稟定)한 것은 그 뜻이 불왕법에 대해 본죄(本罪) 외에 이 형률을 가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로써 법식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동필이 말하기를,
"화속(火粟)105) 의 용처(用處)도 공용(公用)과 사용(私用)의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하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화속은 마땅히 공용(公用)에 보태야 하는 것인데, 어찌 사용(私用)이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제조(提調)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관서(關西)와 관동(關東) 지역에는 수령(守令)들이 애당초 월급이 따로 없고 모두 화속에서 나오고 있으니, 형편상 같은 예로 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김동필이 말하기를,
"전포(錢布)를 남용(濫用)한 자에 대해 금고(禁錮)시키는 법은 마땅히 지부(地部)106) 에서 정한 값으로 쌀을 가지고 장물(贓物)에 대한 액수를 계산하리까?"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금고의 연한은 기한이 된 후에 곧 바로 탕척(蕩滌)107) 시킬 수는 없습니다. 세초(歲抄)108) 를 기록하여 들일 때 그 연한의 만기가 된 것을 죄목(罪目) 밑에 기록하였다가 성상의 결재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1일 계유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2월 22일 갑술
해에 양이가 있었다.
지평 최명상(崔命相)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말이 혹시 전하의 마음에 거슬리게 되면 그 말이 옳고 그름은 구분하지 않고 곧장 시상(時象)으로 돌려 그 말을 꺾어버리고 견책(譴責)하고 처벌하면서 의도적으로 구날(構揑)109) 하려고 하시는가 하면, 각박한 논의를 고집하는 자라도 전하의 뜻에 순응하기만 하면 비단 처벌하지 않으실 뿐만이 아니라 뒤따라 가납(嘉納)하며 추켜 세우십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이 뒤섞이고 언로(言路)가 막히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엄중한 전교(傳敎)를 내려 꾸짖고 그 상소를 되돌려 주라고 하였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오늘날 임금에게 북면(北面)을 하는 자 중에서 만약 19일의 하교를 손수 써서 경연(經筵)에서 내린 후에도 스스로 옛 습관을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신하의 예절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아직 그들이 하는 짓을 관찰하면서 상황에 따라 대처하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 올리는 글을 살펴보건대, 오히려 자신을 팔려고 하고 있다. 아! 주(周)나라 사람의 얼굴에 진(晉)나라 사람의 심장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백년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비록 그 찌거기가 다 제거되지 않았을지라도 결단코 이와 같이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바로 의리(義理)의 큰 관건이니, 먼저 나의 뜻을 유시(諭示)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해서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먼저 신칙하고 뒤에 법을 적용하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영광 군수(靈光郡守) 조명신(趙命臣)이 상소하여 본읍(本邑)의 흉년이 든 상황을 말하고, 이어 대동미(大同米)는 가을을 기다려 징납(徵納)할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홍현보(洪鉉輔)를 대사헌으로, 조명교(曺命敎)를 대사간으로, 김상석(金相奭)을 정언으로, 조원명(趙遠命)을 함경 감사로 삼았다.
2월 24일 병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講)했는데, 시독관(侍讀官) 조명겸(趙明謙)이 말하기를,
"주자(朱子)의 글 중에, ‘강(强)110) ·의(毅)111) ·목(木)112) ·눌(訥)113) 이 인(仁)에 가깝다.’는 말은 마땅히 유념(留念)해야 할 곳입니다.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장석지(張釋之)의 말을 받아들여 말을 척척 잘하는 색부(嗇父)에게 벼슬을 주지 아니하였습니다.114) 그런 까닭으로 소강(小康)의 다스림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개 도(道)를 즐기는 사람은 비록 무미(無味)한 것 같으나 마땅히 숭상하고 장려하여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을 척척 잘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총명하고 민첩한 사람도 중후(重厚)한 사람만 못하다. 근래에 그 폐단이 없지 않으니, 마땅히 중후한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즉위한 이후로 겉모습을 잘 꾸미고 말을 잘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무리들이 대부분 권장되어 등용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조정(朝廷)의 풍습이 갑자기 달라져 모두가 겉모습을 가다듬어 요행을 바라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도 그 폐단을 알았으므로, 간혹 중후한 사람을 등용하여 이런 폐단을 진정(鎭定)시키려고 했으나, 둔하고 용렬한 무리들이 또한 이로 말미암아 많이 진출(進出)하였으니, 사람 채용의 어려움을 여기서 볼 수가 있다."
【태백산사고본】 25책 33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35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註 110] 강(强) : 욕심이 없음.[註 111] 의(毅) : 과감함.[註 112] 목(木) : 질박(質樸)함.[註 113] 눌(訥) : 행동이 느림.[註 114] 한(漢)나라문제(文帝)는 장석지(張釋之)의 말을 받아들여 말을 척척 잘하는 색부(嗇父)에게 벼슬을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어느 날 상림원(上林園)에 있는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 구경을 하다가 책임자인 상림위(上林尉)에게 짐승들의 현재 상황을 물으니, 대답을 얼른 못하였음. 옆에 있던 하급 관리인 색부(嗇夫)가 나서서 자세히 대답하므로, 문제가 즉석에서 그 색부에게 상림위를 대신 임명하려고 하자, 수행하던 장석지(張釋之)가 "말재주만을 가지고 파격적인 승진을 시키기로 한다면 온 세상에서 인격과 실력은 배양하지 않고 말재주만을 부리게 될까 걱정입니다."하였음. 이에 문제가 그 말을 받아들여 색부의 임명을 취소하였다는 고사.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즉위한 이후로 겉모습을 잘 꾸미고 말을 잘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무리들이 대부분 권장되어 등용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조정(朝廷)의 풍습이 갑자기 달라져 모두가 겉모습을 가다듬어 요행을 바라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도 그 폐단을 알았으므로, 간혹 중후한 사람을 등용하여 이런 폐단을 진정(鎭定)시키려고 했으나, 둔하고 용렬한 무리들이 또한 이로 말미암아 많이 진출(進出)하였으니, 사람 채용의 어려움을 여기서 볼 수가 있다."
2월 25일 정축
영남 사람인 정랑(正郞) 김오응(金五應)·감찰(監察) 장위항(張緯恒)·전적(典籍) 이세후(李世垕)·훈도(訓導) 박시태(朴時泰)·직장(直長) 정중기(鄭重器)·저작(著作) 김극령(金極齡)·사록(司錄) 정권(鄭權)·학정(學正) 성헌조(成憲祖)·부정자(副正字) 이권(李權)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연신(筵臣)들이 영남(嶺南)의 일을 진달했다 하는데, 이는 대개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대처(對處)하기 어렵다고 하고,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은 천하의 일에 사변(事變)은 알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진정시킬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남이 어찌하여 대처하기가 어려우며 또한 어떤 모양의 사변(事變)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기에 진정시키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흉역(凶逆)의 무리인 정희량(鄭希亮)·조성좌(曹聖佐)가 출생하였기 때문에 영남 사람을 다 의심하는 것이 아닌지요? 역적 정희량은 안음(安陰)에 살았고 역적 조성좌는 합천(陜川)에서 출생하였는데, 여기는 곧 낙동강의 오른쪽 궁벽한 고을로서 정인홍(鄭仁弘)이 악취(惡臭)를 남긴 곳입니다. 대개 일종(一種)의 잘못된 기운이 그 중간에 뭉쳐서 이렇게 흉악한 무리를 출생시켰던 것입니다. 그 변란이 처음 발생했을 적에 여러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앞을 다투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종이로 만든 기(旗)와 나무 장대를 가지고 곳곳에서 단속을 하였으니, 또한 그 일도(一道)의 충의(忠義)로운 기개(氣槪)가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희량과 조성좌가 흉역 행위를 한 것은 한줄기의 맥(脈)이 이어져 온 곳은 따로 있으나 영남 지역의 인심(人心)은 진실로 변함이 없었으니, 무슨 처치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며 무슨 사변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기에 나라의 진정시키는 대책을 허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번의 선발하여 등용하겠다는 청은 사실상 영남 사람을 돌보아 아낀 것도 아니며 또한 나라에 수용(需用)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다만 인심이 안정되지 못함을 염려하여 얽매어두는 방법을 베풀기 위한 것뿐이니, 다만 이적(夷狄)을 대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영남 사람들이 비록 다른 장점은 없으나 그래도 염치와 의리의 귀중한 것을 대략은 알고 있으므로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115) 그런데 어찌 부질없이 의도적인 미끼를 던져서 도리어 무심(無心)한 물고기를 유혹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두 신하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것과 알기가 어렵다고 한 원인을 자세히 진달하게 하고, 인하여 엄중하게 사실을 규명하게 해서 충신(忠信)과 역적(逆賊)을 명백히 분변해서 온 도(道)의 사람으로 하여금 남이 모르는 죄과(罪科)에 모두 돌아가지 않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두 재신(宰臣)이 진달한 것 중에 이른바 대처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그 지역 사람의 성품이 고집스러움을 가리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이른바 알기가 어렵다는 것은 세상의 일을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영남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므로 평소의 생각에도 늘 잊지 않고 있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대들의 견해는 어찌 그렇게 지나친가? 그대들의 이번 일은 내가 영남 사람을 대우한 것이 성의가 얕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세도(世道)가 시끄러운 때여서 자세히 효유(曉諭)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대들이 지나치게 의심하는 마음을 시원스럽게 열어주는 것이니, 굳이 번거롭게 따지다가 도리어 스스로 임금과 사이가 막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홍현보(洪鉉輔)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덕재(李德載)는 지난번에 횡역(橫逆)을 만났는데, 지금 대각(臺閣)에 들어 왔으니, 한번 상소하여 변명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조금도 용서해 주시지 않고 가볍게 체직(遞職)시키셨으니, 신(臣)은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정익하(鄭益河)의 일은 비록 이덕재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익하가 재앙에 걸려든 것과 이덕재가 연좌된 것은 그 성격이 북방의 연(燕)나라와 남방의 월(越)나라처럼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이덕재가 글을 빌린 것은 본래 정익하에 대해 조사한 일의 결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인데, 이처럼 경솔하게 ‘자포자기(自暴自棄)’라는 하교를 하셨으니, 공평하게 듣고 양쪽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는 도리에 있어서 결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이른바 전계(傳啓)의 초안(草案)이 대청(臺廳)에 머물러 있다는 것에 대해 청컨대, 그의 집에 있는 계초(啓草)와 참고하여 그 사실 여부를 밝혀 사람을 남이 모르는 죄과(罪科)에 두지 않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공평하게 듣는 것으로 스스로 힘쓰고 옛날에 물든 것에 있어서는 어찌 고치고 가다듬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으로 비답하였다.
종친부(宗親府)에서 아뢰기를,
"종신(宗臣) 중에서 매우 가난하고 곤궁한 자는 다만 늠료(廩料)만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바야흐로 춘궁기(春窮期)를 만났으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음식물을 주어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6일 무인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복시 도제조(司僕寺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목장(牧場)이 있는 진(鎭)의 첨사(僉使) 세 과(窠)에 대해 근래에는 태복시(太僕寺)에서 자벽(自辟)116) 으로 차출(差出)하면서 대부분 백도(白徒)117) 로써 곧바로 차정(差定)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병조(兵曹)에 이송(移送)시켜 각별히 선책해서 의망(擬望)하도록 법식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7일 기묘
사헌부에서 전일의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8일 경진
정형복(鄭亨復)·유최기(兪最基)를 지평으로, 윤광운(尹光運)을 부응교로, 신만(申晩)을 부교리로, 김유경(金有慶)을 좌윤(左尹)으로 삼았다.
청국(淸國)의 상인(商人) 16명이 표류(漂流)하여 제주도(濟州島)의 대정현(大靜縣)에 도착하였는데, 역관(譯官) 한수희(韓壽禧)를 차정(差定)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어 압송(押送)하였다.
2월 29일 신사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성룡(李聖龍)도 함께 들어왔는데, 임금이 이성룡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명하니, 이성룡이 ‘호남(湖南)에 소속된 여러 궁방(宮房)과 각 아문(衙門)의 어세(漁稅)를 모두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청하고, 또 공명 직첩(空名職帖) 수십 장을 가지고 7읍(邑)의 굶주린 백성의 농량(農糧)의 밑천으로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어세(漁稅)만은 절반을 쓰도록 명하고 공명첩(空名帖)은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초식(草食)을 먹고 초의(草衣)를 입어야 한다는 하교(下敎)가 있었으니, 마땅히 그 좋은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용도를 절약(節約)하고 줄이는 방법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 작년에 재감(裁減)118) 을 했더니 공인(貢人)의 무리들은 실직(失職)을 하였다고 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금년에는 장차 형편에 맞게 재감할 것이나, 대개 공물을 재감하는 것은 대신(大臣)과 의논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작년에 재감한 것은 모두가 성상께 공상(供上)하는 물품이었습니다. 무릇 성상께 공상하는 등의 물품을 어떻게 재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임금에게 공상하는 것에 수요(需要)되는 것은 별도의 단자(單子)에 기록하여 들여보내라. 지나친 경비에 가까운 것은 마땅히 재감할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명겸(趙明謙)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성상께서 초의를 입고 초식을 먹어야 한다고 하신 하교는 진실로 천년에 한번 있는 일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진실로 능히 이로 인해 분발한다면 당우(唐虞)119) 의 치세(治世)인들 어찌 만들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유사(有司)의 신하로서 임금의 몸에 관계되는 것을 가지고 어찌 감히 재감(裁減)하기를 청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어찌 증자(曾子)의 양지(養志)하는 도리가 되겠습니까? 물품의 종류를 재감함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용도를 절약(節約)하는 방법에 이익이 있다면 어찌 공인(貢人)들의 원망 때문에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진달한 것은 대체로 다 좋은 것이니,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아뢰기를
"이번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음관(蔭官)의 출륙(出六)에는 과(窠)120) 는 적고 사람은 많으며, 승문원(承文院)의 참하(參下)에는 과는 많고 사람은 적습니다. 이인(利仁)·금정(金井)·평릉(平陵)은 본래 음관(蔭官)이 출륙하는 과이니, 청컨대 음과(蔭窠)로 다시 만들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조명교(曺命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달 초엿샛날 인대(引對)하였을 때에 경연(經筵)에서 서로 대화한 것을 두 벌을 내놓았는데, 성교(聖敎)를 삭제한 것이 자세함과 간략함이 같지 아니하니, 사체(史體)를 엄중하게 하고 뒷날의 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그날의 주서(注書)를 잡아다가 사실을 규명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후에 교리(校理) 조명겸(趙明謙)이 조명교(曺命敎)가 사실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주서(注書)를 경솔하게 먼저 잡아오기를 청했다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조명교를 체직(遞職)시킬 것을 청하였으며, 집의(執義) 송수형(宋秀衡)도 조명교의 마음 씀이 교밀(巧密)하다 하여 파직(罷職)시킬 것을 상소하여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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