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4권, 영조 9년 1733년 4월

싸라리리 2025. 9. 1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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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임자

오광운(吳光運)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4월 1일 임자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죄인 장규소(張奎紹)·김희능(金喜能)·김희공(金喜功)이 나포(拿捕)되어 사정(事情)을 하소연하니, 이제동(李濟東)과 장규소를 면질(面質)시키고 이제동과 이공형(李公衡)을 면질시켰다.

 

다시 이제동을 국문(鞫問)하여 다섯 차례 형신(刑訊)하니, 이제동이 공초(供招)하기를,
"반역(叛逆)을 꾀했던 동당(同黨)은 이시만(李時萬)·이시림(李時霖)·김세옥(金世鈺)과 보은(報恩)에 사는 경중(京中)의 중인(中人) 장규소(張奎紹)와 장규소 처(妻)의 사촌 오라비 김심(金鐔)이었습니다."
하였다.

 

이인기(李仁器)에게 두 차례 형신하였으나, 공초가 전과 같았다.

 

이순채(李順采)를 국문하니, 이순채가 공초하기를,
"신이 관(官)의 군(軍)으로 대동(大同)186)  을 독촉할 즈음에 이인관(李仁寬)의 칠촌(七寸)에게 죄를 받았는데, 이번에 신의 아비가 장교(將校)로서 이인관의 무리를 붙잡아 들였기 때문에 필시 이 까닭으로 원한을 품고 신을 무함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장규소(張奎紹)를 국문하니, 장규소가 공초하기를,
"이제동(李濟東)은 본래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입니다. 신해년187)   3월 전옥(典獄)에 갇혀 있었는데, 처의 사촌 오라비 김심(金鐔)이 신을 위해 문복(問卜)할 때 이제동을 점장이 집에서 만났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 봄에 이제동이 한번 찾아왔기에 반노(叛奴)를 징계하여 다스리는 일로써 글을 빌려 이제동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반역을 모의하여 수작했다는 것은 실로 애매합니다."
하였다.

 

김희능(金喜能)을 국문하니, 김희능이 공초하기를,
"신은 김두병(金斗柄)의 동네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김두병이 그 어미를 굶주리게 버려두고는 날마다 방탕하게 놀기에 신이 일찍이 꾸짖었고, 변(變)이 난 후에는 신이 본동(本洞)의 존위(尊位)로서 한번도 돌보지 않았다고 하여 김두병이 옥(獄)에 갇혀 있으면서 유감스레 여기는 말이 많았다 합니다."
하였다.

 

김희공(金喜功)을 국문하니, 김희공이 공초하기를,
"지난해 3월에 신이 산목(山木)을 벌채해 팔 때 김두병이 매판(買板)을 소개하는 자로 와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신이 한번 찾아주지 않았다고 하여 이 때문에 유감을 품었습니다. 또 금년 봄에 집에 있는 곡식을 약간 흩어 인근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었는데 김두병은 이웃하여 살지 않기 때문에 나누어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무함을 당한 것입니다."
하였다.

 

구준석(具俊碩)을 국문하여 한 차례 형신(刑訊)을 가하고 박진좌(朴震佐)를 국문하여 20번의 형장(刑杖)을 가하니, 숨이 막혔다. 공초는 모두 전과 같았다.

 

영상(領相) 심수현(沈壽賢)과 우상(右相) 김흥경(金興慶)이 옥관(獄官)을 인솔하고 청대(請對)해 입시하여 아뢰기를,
"옥사(獄事)의 실정을 마땅히 더 따져서 밝혀야 하겠으나, 국청(鞫廳)의 죄수에게 형벌을 더하기는 곤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굶주림으로 인하여 당(黨)을 모았고, 작은 데서 큰 데로 들어갔으니, 그 본심은 무신년188)  의 적도(賊徒)와는 같지 않다. 이번 옥사는 심하게 우려할 것이 없으나 앞으로 닥쳐 올 걱정이 끝이 없을 것이니, 조용히 생각하건대 잘 처리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4월 2일 계축

지평 김상중(金尙重)이 상소(上疏)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는 참으로 성주(聖主)이십니다. 간단한 말로써 만세(萬世) 동안의 군신(君臣)의 기강(紀綱)을 확립하고 한 마디 말로써 만세 동안의 난적(亂賊)의 무리를 두렵게 하였습니다. 짧은 종이에 담은 윤발(綸綍)189)  이 바로 황극(皇極)190)  을 크게 세울 수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중간에 한번의 착상(着想)이 또 어찌하여 거꾸로 되고 잘못되었습니까? 전하의 그 날의 하교가 곧 10여 년 동안 일찍이 경솔하게 발표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이 어떻게 강구(講究)해 얻은 의리인데 조명익(趙明翼) 한 사람의 말로 인하여 도로 들이시고 또 정우량(鄭羽良) 한 사람의 말로 인하여 도로 내리시는 것입니까? 만일 도로 들이는 것이 옳았다면 본시 도로 내린 것이 부당하고, 만일 도로 내린 것이 불가하다면 또한 도로 들인 것이 부당할 것입니다. 두 가지 사이에 반드시 하나는 여기에 해당될 것이니, 요양(撓攘)의 병증이 아니라면 혹시 사정을 보아 준 실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 치사(致仕)191)  한 대신을 다시 기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기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전하께서 그를 삼사(三事)192)  의 반열에 두고 예(禮)로 대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로 대우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 정약(停藥)193)  하고 부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대저 정약한 그 한 가지 일이 이 얼마나 지나친 거조(擧措)입니까? 앞서는 폐합(閉閤)한 일이 있었고 뒤에 정약한 일이 있었던 것은 그 첫째도 전하의 고심(苦心)이었고 둘째도 전하의 고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에서 본다면 반드시 말하기를, ‘전하께서 그 사이에 권모 술수(權謀術數)를 써 이와 같은 비상한 거조가 있었을 것이니, 비상한 처분이 있었을 것 같은데도 묵묵히 그 결말을 보건대 단지 하루에 두 봉조하(奉朝賀)를 제수했을 뿐이라.’고 할 것입니다. 힘써 조정에 초치(招致)했다가 잠깐 사이에 면직하였으니, 돈소(敦召)가 진실로 뜻이 있었다면 무엇하러 치사(致仕)케 하며 치사케 하는 것이 진실로 뜻이 있었다면 무엇하러 돈소 하십니까? 전하께서 비록 이것이 성실한 도리(道理)라 말씀하더라도 여러 신료들 중에 그 누가 믿겠습니까? 저 대신이 또한 천하를 경륜(經綸)하여 다스릴 만한 재주는 있지 않다 하더라도 몸은 안위(安危)에 관계되고 의리는 휴척(休戚)을 함께 할 것이라 하여 특별히 회오(悔悟)하는 교서를 내리고 잇따라 치사케 한 명령을 중지하여 원임 대신(原任大臣)으로 왕실(王室)을 돕게 한다면, 조야(朝野)에서 듣고서 반드시 믿음을 둘 것입니다. 대저 전하의 명철(明哲)하심은 수많은 임금 중에서 훨씬 뛰어나지만, 오직 총명하게 살피심이 너무 지나쳐 늘 신료들을 불신(不信)하는 마음을 가지신 까닭에 충성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의심을 받고 지우(智遇)를 받았던 사람은 문득 소원(疏遠)을 당했던 것입니다. 신이 일일이 들어 말하겠습니다. 이양신(李亮臣)의 소장(疏章)이 나오자 전하께서 비록 그를 죄 주었으나 이광좌(李光佐)와 아울러 소원하게 하였고, 조관빈(趙觀彬)의 소장이 나오자 전하께서 비록 죄 주었으나 송인명(宋寅明)과 아울러 소원하게 하였으며, 호유(湖儒)들이 이재(李縡)를 소환하자고 청하였을 때 전하께서는 이재에게 의심 아니하지 않으셨고 장단(長湍) 백성들이 윤순(尹淳)을 들추어 무함하였을 때 전하께서는 윤순에게 의심을 아니하지 않으셨습니다. 박규문(朴奎文)이 조·송(趙宋)을 참언(讖言)한 데 이르러서도 끝내 그 뜻이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어찌 전하의 의중에 아직도 그 말에 석연(釋然)히 의심이 없지 않음을 알겠습니까? 그 사람을 아끼면 귀(貴)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사람의 상정(常情)일진대, 심악(沈)과 같은 지망(地望)과 재학(才學)이 여러 사람에 앞서고 있으니, 국가를 위하여 한 인재(人才)를 추천한 것이 무슨 혐피(嫌避)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대신이 권점(圈點)194)  할 때 힘써 빼버린 것은 진실로 세상에 드문 하나의 미덕(美德)이니,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서 정로(正路)에서 청탁함에 있어서 정의(情誼)나 호오(好惡)를 따름이 없고 묘의(廟議)에서 채용하고 버림에 있어 피차(彼此)를 따지지 않는다면, 백관(百官)이 모두 우러러 보며 스스로 감동할 것입니다. 신이 이에서 어찌 대신(大臣)을 위하여 힘씀을 더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논의하는 방도는 마땅히 그 심적(心跡)의 구별을 관찰해야 할 것이니, 한 사람이라도 억울함을 품는 자가 있다면 어찌 심히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윤용(尹容)과 이거원(李巨源)의 일을 시험삼아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잡음이 순후(醇厚) 근각(謹殼)하고 몸가짐이 청렴 결백(淸廉潔白)하여 진실로 그런 사람을 얻기가 쉽지 않은데도, 다만 그의 처지가 불행한 나머지 이를 허물로 삼아 버림받은 사람이 되어 조가(朝家)에서 채용하면 마음을 다해 봉사하고 조정에서 채용하지 않으면 종적을 감추고는 분수를 지켰으니, 그 정상(情狀)은 슬프나 의리상으로는 본시 당연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해번(海藩)195)  의 임명을 받은 것만해도 또한 어찌 벼슬을 탐내는 마음이 끌려 그러했겠습니까? 대개 그 처지가 위태롭고 불안하여 감히 어기고 도피하거나 승강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조금이라도 정상을 잘 살펴 용서하려 하지 않고 반드시 이것으로 연유하여 벼슬길을 막아 폐기하려 하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거원의 신축년196)  ·임인년197)  에 주장했던 논리도 또한 볼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목내선(睦來善)을 배척하여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크게 거스른 사람도 이거원이고 이정소(李廷熽)를 부지하여 대론(臺論)을 정지하게까지 한 사람도 이거원이었으니, 이거원은 곧 그 당시 청의(淸議)가 깊이 허여(許與)했던 바로서 이것은 모두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장식했던 것입니다. 오직 그가 교서(敎書)를 대신 찬술(撰述)한 것이 손목을 끊을 만큼 의리에 부끄러움이 있고 연석(筵席)에서 망령되게 진달한 것이 혀를 깨물어야 할 후회를 스스로 초래하였으나, 이는 조현명(趙顯命)의 이른바 한번 잘못 들어간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10년 동안 좌폐(坐癈)되어 있으면서도 끝내 조금도 사람들을 원망하는 뜻이 없었으니, 그의 스스로 처신한 바를 그 누군들 아름답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속마음은 서로 거리가 먼 역적 김일경을 심지어 ‘그의 일당(一黨)으로 아비로 섬겼다.’고 이르는 등의 말로 제마음대로 헐뜯으면서 이보욱(李普昱)과 아울러서 갑자기 마구 몰아치는 것도 이상합니다. 또 영남(嶺南)의 인재를 고르게 채용하라고 신칙한 것이 이미 무신년198)  의 난 이전에 있었는데, 무신년 이전에는 영남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무심히 본 때문이고 무신년 이후에는 영남 사람이 먼저 스스로 안심하지 않은 것은 뜻을 두고 보아온 것이니, 무심하게 되면 사람들 또한 무심하게 마련이고 뜻을 두게 되면 사람들 또한 뜻을 두게 됩니다.
진실로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방도로써 재질이 있는 자만을 채용한다면 영남을 논할 것 없이 팔로(八路)가 스스로 탕탕 평평(蕩蕩平平)한 가운데로 다 돌아갈 것이니, 진실로 마음과 말이 상반되고 안면만을 서로 바꾸면서 윗사람의 지시만 따라 남에게 구사(驅使)되기를 권해(權賅)·정희보(鄭熙普) 등과 같이 하지 않는다면, 비록 명문 세족(名門勢族)이라도 벼슬길이 막힌 가운데에 많이 있을 것이고 먼 지방의 문관(文官)같은 이도 물색하는 사이에 들어갈 것인데, 애석하게도 두 재신(宰臣)의 수습하자는 청이 여기에는 미치지 않고 유독 영남에만 미친 것은 또한 일찍이 그 도(道)를 안무(按撫)할 때 침체된 사실을 익히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란 말입니까? 정광제(鄭匡濟)를 외람되게 통하여 납언(納言)하는 자리에 통망(通望)한 것은 의당 다시 의망(擬望)하지 말아야 하며 채응복(蔡膺福)의 혐의를 무릅쓰고 구인(救人)한 것도 역시 견척(譴斥)함이 마땅하며,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언섭(李彦燮)과 경흥 부사(慶興府使) 한사정(韓師正)과 평해 군수(平海郡守) 이제명(李濟命)은 모두 체개(遞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처음으로 대관(臺官)의 자리에 들어와서 품고 있던 생각을 숨김없이 전달하니, 그 가운데 더러 지나친 것이 없지 않으나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유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최세흥(崔世興)을 국문하니, 최세흥이 공초하기를,
"김두병(金斗柄)과는 본래 알지 못하는 사이고 이제동(李濟東)은 10년 전에 만나 본 사람이긴 하나 신은 병든 몸으로 본디 출입을 못하였으니, 취회(聚會)했다는 말은 천만 애매합니다."
하였다.

 

김심(金鐔)을 국문하니, 김심이 공초하기를,
"김두병은 지난해에 처음으로 얼굴을 알았고 이공형(李公衡)·이귀흥(李貴興)·이인복(李仁福)은 모두 본래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하였다.

 

4월 4일 을묘

황정(黃晸)을 승지로, 이종백(李宗白)을 부응교로, 박필균(朴弼均)을 부수찬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정언으로 삼았다.

 

경기(京畿)에 전염병으로 사망한 자가 3백여 명이었다.

 

4월 5일 병진

전라도에 전염병이 또 크게 번져 흥양(興陽) 한 고을에 1백 47명이 사망하였고, 경상도 26읍(邑)에 8백여 명이 사망하였다.

 

4월 6일 정사

서종급(徐宗伋)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장청(狀請)하기를,
"소금을 굽는 한 가지 일은 곡식을 생산하는 방도가 됩니다. 그런데 등산(登山)의 옛 진(鎭)에 금표(禁標)한 소나무가 있으나 토질이 매우 척박하고 소나무가 모두 왜소하여 배를 만드는 재목으로는 적합하지 않으니, 특별히 베어서 쓰도록 허락하여 염리(鹽利)를 넓게 열어 곡식을 생산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밑천을 삼도록 하소서."
하고, 잇따라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의 《염설록(鹽說錄)》을 올렸는데,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여 시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김두병(金斗柄)이 물고(物故)되었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이둘로미(李㐙老味)를 국문하니, 둘로미가 공초하기를,
"지난해 이귀흥(李貴興)의 꾐에 빠져 상경(上京)했는데, 신의 아비가 나무랐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 내려갔으니, 실제로 경향(京鄕)을 분주하게 다니면서 모의하는 일을 전달한 사실이 없었으며 홍원창(洪元昌)과는 본래 모르는 사이입니다.
이귀흥은 충주(忠州)에 부족(富族)이 있어 식량을 빌린다면서 갔고 신은 용인(龍仁)에서 곧장 돌아갔습니다. 이번에 상경한 것은 이제동(李濟東)의 아비만이 아니라 신의 아비도 수금(囚禁)을 당한 까닭에 아비를 위하는 마음으로 과연 편지를 받고 상경하다가 청주(淸州)에 도착하여 현교(縣校)에게 붙잡혔습니다."
하였다.

 

다시 이제동(李濟東)을 국문하기를,
"경인(京人)이 서로 약속했다는 것은 단지 이호인(李好仁)이 발고(發告)한 것뿐이고 모역(謀逆)은 이미 한두 사람이 단독으로 이룰 것이 아닌데, 이호인의 동당(同黨)을 한 사람도 지적해 고하지 않으니 간악하기 그지없다. 친밀히 모의할 즈음에 어찌 4년이 되도록 한번도 서로 접촉함이 없었느냐?"
하니, 이제동이 공초하기를,
"신은 이호인의 졸도(卒徒)였으니 이호인한테 하문(下問)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숨이 질식되어 형장(刑杖)을 정지하였다.

 

4월 7일 무오

지의금(知義禁) 이정제(李廷濟)가 아뢰기를,
"이제동(李濟東)이 서울과 시골에 출몰(出沒)하여 보은(報恩)의 사람이 잘못 그릇되게 된 자들이 많았는데, 그 근처에 양반적(兩班賊)이 많다는 말을 11월 문안(問安) 반열에서 훈장(訓將)이 이미 단서를 발설하고 잇따라 금산(錦山) 등 고을에 무변(武弁)으로 차임(差任)해 보내라는 뜻을 누누이 말하니, 좌규(左揆)199)  가 인심을 공동(恐動)할까 염려하여 다만 옥천(沃川)에만 무인(武人) 출신의 원[倅]을 보내고 또 덕유산(德裕山)이 도망자의 소굴이 되어 있다고 하기 때문에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양남(兩南)의 병영(兵營)에 관문(關文)200)  을 보내어 포치(捕治)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떼 지어 모인 무리들을 수색해 다 잡을 수는 없는 것이오니, 청컨대 백성을 동요케 하지 말라는 뜻을 3도(道)의 방백(方伯)에게 분부하여 수령(守令)을 신칙해서 오로지 안심하고 집합하게 하는 데 힘쓰도록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달(奏達)한 내용이 참 좋다. 수령을 가려서 차임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돌아온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진망(李眞望)과 부사(副使) 서종섭(徐宗燮)을 인견(引見)하고 저 나라의 사정을 물으니, 서종섭이 말하기를,
"청황(淸皇)이 늘 그 신하들이 한결같이 나와서 규간(規諫)하지 않음을 책망하다가 그들의 규간이 있을 때는 곧 소척(疏斥)하고, 또 재해(災害)와 이변(異變)을 듣기를 싫어하여 흠천감(欽天監)201)  에서는 비록 재변이 있어도 감히 아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고(故) 충신(忠臣) 김응하(金應河)의 선천묘(宣川廟)에 사액(賜額)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수리하는 것을 돌보아 주라고 명하였다. 기미년202)   심하(深河)의 싸움에 김응하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서 그 곳에 가서 죽었는데 본 읍의 사람들이 그의 의리를 생각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 왔다. 이때에 이르러 동지 사신(冬至使臣)이 돌아와 그의 사당에 아직 사액이 없음을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4월 8일 기미

서종옥(徐宗玉)을 승지로,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김정윤(金廷潤)을 장령으로, 윤유(尹游)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조석명(趙錫命)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4월 9일 경신

추국(推鞫)을 행하여 죄인 이제동(李濟東)을 여섯 차례나 국문하였으나 불복(不服)하고, 이둘로미(李㐙老味)를 다시 추문(推問)하였으나 불복하였다.

 

4월 10일 신유

추국(推鞫)을 행하여 죄인 이제동을 일곱 차례나 국문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이둘로미를 한 차례 국문하니 불복하였고, 이공형(李公衡)을 세 차례 국문하니 공초를 바쳤다.

 

4월 11일 임술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안경운(安慶運)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평 김상중(金尙重)의 상소한 말이 협잡하여 공의(公議)가 그르게 여깁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4월 13일 갑자

김상규(金尙奎)를 승지로, 권현(權賢)을 지평으로, 민창기(閔昌基)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4월 13일 갑자

장령 안경운(安慶運)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무신년203)   역적 나두동(羅斗冬)을 남원(南原)에 매장(埋葬)할 때 그 고을의 수령 최집(崔)이 역군(役軍)을 많이 주고 별도의 환곡(還穀)을 넉넉히 제급(題給)하였으며 읍민(邑民)의 집안 산을 곤장을 때려 빼앗아서 장지(葬地)로 삼게 하고 관고(官庫)의 짚자리를 실어 운반하여 제청(祭廳)을 덮게 했으니, 그의 범한 죄가 무거워서 비록 여러 해가 지났으나 의당 감히 기용(起用)해서는 안되는데, 전조(銓曹)에서는 태상(太常)204)  의 정(正)에 맨먼저 의망(擬望)하였고 승정원에서는 고관(考官)205)  의 망(望)에 갖추어 추천하여 방자하게 꺼림이 없으니, 청컨대 이조(吏曹)의 해당 당상(堂上)과 해당 승지를 모두 파직하게 하소서. 역적 집안의 원망하는 족속으로 육진(六鎭)206)  에 처해 있는 자들이 무뢰배들과 체결하여 사람들이 자못 의심스럽고 두려워하니 청컨대 각도(各道)의 여러 고을에 분이(分移)하게 하소서. 포도 종사관(捕盜從事官) 김성팔(金聲八)이 그 아들과 같이 밤에 술집에 가서 술 파는 사람을 꾸짖어 욕설하면서 발로 차고 때리는 등 온갖 짓을 다하다가 이튿날 아침에 주장(主將)에게 헐뜯어 고해 바쳐 재차 엄하게 수금(囚禁)하여 도적을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하였는데 끝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의 70세 된 늙은 아비는 아들의 비명(非命)을 한탄한 나머지 연달아 며칠 안에 죽었고, 또 듣건대 그의 90세 된 조모(祖母)가 상심(傷心) 비통(悲痛)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김성팔로 인하여 남의 집안 3대(代)를 해쳤으니, 아! 혹독합니다. 추조(秋曹)207)  에서 이미 조사하여 아뢰었으니, 마침내는 상명(償命)208)  하겠습니다만, 주장(主將)이 진실과 허위를 살피지 않고 오직 종사관의 말만 들었으니, 청컨대 파직하는 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정관(政官)과 승선(承宣)209)  이 모두 경솔하긴 했으나, 너의 배척함도 지나치다. 포장(捕將)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고 그 나머지는 금오(金吾)210)  로 하여금 천천히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4일 을축

정언(正言)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여 경상도의 금위군(禁衞軍)이 소홀한 폐단을 말하고 청하기를,
"좌우도(左右道)의 겸파총(兼把摠)211)  이 관장하고 있는 먼 고을의 금위군을 근읍(近邑)에 있는 수군(水軍)의 무학(武學)과 환정(換定)토록 하소서. 김상중(金尙重)의 소장(疏章)에 있어서는 말과 뜻이 다르며 쓸데없는 계획을 경영하면서 말을 발표하는 사이에서도 비록 일사불란(一絲不亂)한 것 같으나 그 정신을 쏟는 바에 이르러서는 억양(抑揚)하고 여탈(與奪)함이 하늘과 땅의 차이뿐만이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당국(當國)한 대신을 온갖 말을 다하여 찬양한 것은 실로 대각(臺閣)에서는 있지 아니하였던 일이었으니, 진신(搢紳)의 수치가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이거원(李巨源)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사당(死黨)이 되었던 것은 비록 입이 백 개가 있다 하더라도 엄호(掩護)할 수 없는데 이것을 한 번의 실수로 돌리려 하니 그 어찌 언의(言議)의 바르지 못함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청컨대 관직을 삭파(削罷)하는 법을 실시하여 마음씀이 비뚤어진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군제(軍制)에 관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상량 확정해서 처리하고, 김상중의 일은 과연 대거(對擧)한 뜻을 면하지 못하겠으나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 마땅히 말미(末尾)를 보겠다."
하였다.

 

4월 15일 병인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청대(請對)하여 남원(南原)의 괘서(掛書)의 변(變)을 아뢰기를,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서보(書報)하기를, ‘남원 산사(山寺)에 흉서(凶書)가 석불상(石佛像)에 걸려 있었는데 임금을 무함하는 흉악한 말이 한결같이 무신년212)  의 흉격(凶檄)을 답습했다.’고 하였으며, 끝에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의 몇 만명의 군병이 이제 곧 날짜를 지정하여 일을 일으키겠다.’고 하고 명칭하기를, ‘영호 대원수(嶺湖大元帥) 정회충(鄭懷忠)’이라고 하였는데, 말을 늘어놓은 것과 뜻을 표한 것이 대단히 흉참합니다. 청컨대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기포(譏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신축년213)  의 일을 항상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이 말한 것을 믿었던 까닭에 그 말이 같으니, 무신년의 전례에 따라 현상(懸賞) 구포(購捕)토록 하라."
하였다.

 

4월 16일 정묘

추국(推鞫)을 행하여 죄인 이공형(李公衡)을 세 차례 형문(刑問)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구이후(具爾垕)·박진좌(朴震佐)·이인기(李仁器)·이호인(李好仁)을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이제동(李濟東)이 공초하기를,
"이호인과는 본래 혐의나 원한이 없었는데 신이 형장(刑杖)을 이기지 못하여 과연 무고하였습니다. 이호인은 남인(南人)이 그의 말을 쉽게 믿는 까닭에 끌어 고하였습니다. 김정우(金鼎禹)는 중인(中人)입니다. 중인 중에는 단지 김정우만을 알기 때문에 과연 무고했습니다. 장규소(張奎紹)는 경인(京人)으로 늘 왕래할 때 식사를 찾아서 서로 안 까닭에 또한 무고했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의 대신(大臣) 이하가 청대(請對)하였는데,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추안(推案)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으나 옥사(獄事)는 끝내 그 실정을 알아 내지 못했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은 말하기를,
"이번 옥사의 중요한 곳은 경인(京人)이 서로 약속하고 올라왔다는 말에 있기 때문에 비록 국청은 설치하였으나 처음부터 병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제동은 요악(妖惡)하여 전후에 걸쳐 수없이 거짓의 약속이었고 이호인·이공형은 모두 실상(實狀)을 알아내지 못했으며 김정우는 애당초 의거할 것이 없었고 장규소의 일은 여러 번 국문한 끝에 무고한 것으로 공초를 들여서 옥정(獄情)이 의혹스럽고 현란(眩亂)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무신년과 같다는 말 때문에 설국(設鞫)하기에 이르렀으나, 문안(文案)으로 보건대 결실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이것은 무신년과 경인(京人) 등의 말이 없었다면 하나의 명화적(明火賊)에 불과합니다."
하고, 판의금(判義禁)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이제동이 본디 성실하지 않기 때문에 결말이 날 기약이 없고 또 보은(報恩)의 도적으로 말하더라도 반드시 응취(凝聚)한 자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정언(正言) 안상휘(安相徽)가 말하기를,
"이제동이 비록 흉악하더라도 무신년 운운한 것은 곧 불궤(不軌)214)  입니다. 이호인의 일은 늘 말하기를, ‘졸도(卒徒)였다.’고 하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무고했다고 말을 하니 진실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신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야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번에 국청의 체면을 손상함이 많다. 매일 직초(直招)로 써서 냈다가 이제 갑자기 사람을 속인 악역(惡逆)으로 정형(正刑)한다면 중외(中外)에서 보고 듣는 자가 반드시 놀랄 것이다. 마땅히 다시 엄하게 신문해야 하겠는데 세도(世道)가 괴상한 탓인지 어찌 오늘날에 다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는가?"
하고, 인하여 남원(南原)의 흉서(凶書)를 내어 보이니, 전라 감사 이성룡(李聖龍)의 장계(狀啓)로 인한 것이었다. 대개 통제사(統制使) 박찬신(朴纘新)이 부임(赴任)하는 행차가 남원을 지나다가 나그네의 전하는 바로 인하여 현문(縣門)에서 거리가 몇리밖에 안되는 백복사(百福寺)에 흉서(凶書)를 건 변이 있는 줄 알고도 고을 원에게 말하지 않고 다음날 전진하여 운봉현(雲峰縣)에 이르러 비로소 비장(裨將)을 보내 바로 백복사로 가서 그 흉서를 가져다가 고을 원에게 전하였는데, 원이 도신(道臣)의 순찰하는 곳으로 달려가 보고 소매 속에서 꺼내어 바쳤기 때문에 도신이 이로써 장문(狀聞)한 것이다. 대신이 입시(入侍)하였을 때 임금이 흉서를 보이니, 승지 김상규(金尙奎)와 대신이 모두 통제사가 곧바로 가져와서 주달(奏達)하지 않은 잘못을 말하였다. 정언 안상휘가 생각한 바를 진달하기를,
"남원의 괘서(掛書)는 실로 천지에 없었던 흉변(凶變)입니다. 이를 듣고서 누가 마음에 놀라고 뼈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통제사 박찬신이 남원에 도착하여 이 괘서의 변이 백복사에 있다는 것을 들었고 절에서 현문까지의 거리가 몇 리에 불과하니, 본시 마땅히 곧바로 본현(本縣)의 원에게 말하여 함께 그 절에 가서 중 가운데 물을 만한 자에게 자세히 힐책해 묻고 잇따라 즉시 장문(狀聞)했어야 하는데도, 이렇게 하지 않고 하룻길의 운봉현을 어정거리며 가서 비로소 군관(軍官)을 보내어 남원 현감(南原縣監)에게 말하고도, 조금도 경동(驚動)하는 뜻이 없었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청컨대 통제사 박찬신을 나문(拿問)하여 죄를 결정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도신(道臣)이 남원에 이런 변이 있었음을 듣고도 달려 나아가서 그 절의 중을 안치(按治)하지 않고 다만 기포(譏捕)하는 것만을 일삼았으니 일이 몹시 소홀하다. 종중 추고(從重推考)215)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수도(囚徒)가 비록 남원에 있으나 전주(全州)·운봉(雲峰)의 두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합좌(合坐)하여 신문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운봉 현감 박준경(朴俊慶)의 명성(名聲)이 없다 하여 지의금(知義禁) 윤유(尹游)가 개차(改差)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유경장(柳經章)을 운봉 현감으로 삼고, 또 포청(捕廳)에 하교하여 ‘적도(賊徒)를 붙잡는 자는 천금(千金)을 상주고 두 자급(資級)을 뛰어 실직(實職)을 제수한다.’ 하였다. 포도 대장(捕盜大將) 장붕익(張鵬翼)이 말하기를,
"지금부터 문금(門禁)을 마땅히 엄하게 하여 성문(城門)을 열고 닫음을 무신년의 전례(前例)에 따르고 봉화(烽火)를 올리는 것은 날이 샐 무렵까지 한정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막 국옥(鞫獄)이 있었는데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안팎에서 반드시 소동(騷動)할 것이다. 전과 다른 행동을 하여 그 소동을 더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며, 또 보잘것없는 괘서(掛書)로 인하여 성문을 일찍 닫기까지 한다면 어찌 허약함을 보임이 아니겠는가? 사문(四門)을 환하게 열어 두어 저절로 들어와서 붙들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장령 김정윤(金廷潤)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북도(北道)에서 연어(鰱魚)를 봉진(封進)하던 것을 궁차(宮差)216)  와 감색(監色)217)   무리들이 돈으로 대신 바치고 민간에 나누어 거둡니다. 청컨대 별도로 법식을 정하여 잡는 대로 나누어 쓰게 하고 돈으로 바치는 폐단을 엄히 더 금단하게 하소서.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 배[梨]는 곧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잠저(潛邸)218)   때 친히 심으신 것이므로 진상(進上)하는 규례가 있었는데 배나무는 햇수가 오래되어 말라 죽고 승도(僧徒)들이 해마다 사서 바쳤으니, 마땅히 감해주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안변(安邊)의 동점(銅店)과 정평(定平)의 은점(銀店)은 마침내 성사(成事)하지 못하였으니 당초의 호조 낭청(戶曹郞廳)은 일을 잘못 도모한 죄로 견파(譴罷)를 실시하고 감색(監色)은 조사해 다스리게 하소서.
원산(元山)의 판재(板材)는 곧 북로(北路)의 수령(守令)들이 탐장(貪贓)하던 물건입니다. 또한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각별히 금단하게 하소서. 친기위(親騎衞)219)  의 전마(戰馬)는 기유년220)   흉년에 어사(御史)에게 호소하여 팔아 먹고 개립(改立)하지 않은 것이 많이 있으니, 청컨대 본도에서 조사해 내어 개립하게 하소서. 육진(六鎭)의 수령은 마땅히 문무관(文武官)으로 돌려가며 차임(差任)해야 합니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중술(李重述)은 구전(口傳)221)  으로 차출(差出)되었는데도 아직 출숙(出肅)하지 않아 조령(朝令)이 지체되고 있어 신은 가만히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북로의 수령과 변장(邊將)이 탐장하는 물건과 잠상(潛商)들의 왕래하는 길이 모두 정평(定平)의 장곡(長谷) 사이를 경유하는데 고산 찰방(高山察訪)이 30리 밖에 있으니, 어찌 능히 일일이 검찰(檢察)하겠습니까? 청컨대 도신에게 분부하여 이 길로 왕래하는 자는 나타나는 대로 속공(屬公)222)  하게 하여 엄한 방색(防塞)을 더하게 하소서. 조사(朝士)들의 부모 나이가 70세가 된 자는 3백 리 밖에 서임(敍任)하지 말아야 하는데, 곡산 부사(谷山府使) 조경(趙儆)은 안연(晏然)히 무릅쓰고 부임하였으며 그의 동생 조담(趙倓)은 호읍(湖邑)에서 정체(呈遞)223)  하였으니, 어떻게 그 의리를 지킴이 뒤섞였습니까? 청컨대 조경의 관직을 파하소서. 영원 부부인(靈原府夫人)은 유적(維賊)224)  이 복주(伏誅)된 뒤로 강촌(江村)에 오두막집을 세로 얻었는데 무릎을 용납할 수 없으니, 마땅히 고휼(顧恤)하는 은전(恩典)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요즈음 공사(公事)의 출납이 더러 지체됨이 있어 왕사(王司)의 파직 전지(傳旨)와 전조(銓曹)의 정사(政事) 취품(取稟)을 혹은 밤을 지나서야 비로소 내리시고 혹은 며칠을 지나서야 내리십니다. 청컨대 유념을 더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맨먼저 진달한 칙려(飭勵)하라는 일과 감해 주라는 일은 그대로 실시하겠다. 감색배(監色輩)를 조사해 다스리는 일은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거행하게 할 것이며, 해조(該曹)의 낭관(郞官)은 금오(金吾)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겠고, 도신을 신칙하라는 일과 전마(戰馬)에 대한 일도 또한 본도로 하여금 그대로 시행하게 하겠다. 그런데 어사(御史)가 팔아먹는 것을 허락한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하니 추고(推考)하겠고, 문무관으로 교체하는 일은 일찍이 칙려하였으나 다시 전조(銓曹)에 신칙하겠다. 종성 부사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하게 사조(辭朝)225)  할 것을 독촉하게 할 것이고 잠상의 일은 비국(備局)에서 분부토록 하겠다. 형제간에 혹은 부임하고 혹은 부임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사유가 있을 것이다.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근래 정사(政事)를 날마다 열었으나 이목(耳目)의 신하들이 위패(違牌)226)  를 일삼고 있고, 위에 있는 자는 날로 그 수응(酬應)을 일삼고 있어 다만 사체(事體)만 손상되므로 더러 유체(留滯)되는 것도 또한 처사를 신중히 하는 뜻에서 연유된 것이다."
하였다. 뒤에 약방(藥房)의 입진(入診)으로 인하여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북관(北關)에 문관(文官)을 차견(差遣)한 것은 연전에 이덕수(李德壽)가 아전(亞銓)227)  이 되었을 때 진품(陳稟)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필경에는 단지 한사득(韓師得)만을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삼았고 그 뒤에 다시 문관을 차견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형편이 실행하기 어려웠던 까닭이었습니다. 대신(大臣)이 여러 도(道)의 곤수(閫帥)228)  는 반드시 6진(六鎭)의 수령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의차(擬差)229)  하여야 된다는 일을 조례(條例)로 만들었으나 중간에 이 법이 이미 폐지되었습니다. 이제 만일 옛날의 제도를 거듭 밝혀서 6진의 수령으로 곤수의 계제(階梯)를 삼는다면, 앞으로 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잇따라 하교하기를,
"근래에 영장(營將)을 허다하게 골라서 차임(差任)하지 않고 있는데, 무신(武臣)은 반드시 영장을 거친 다음에 곤수에 제수하는 일도 또한 신칙(申飭)하는 것이 옳겠다."
하고, 또 조경의 일을 물으니, 서명균이 말하기를,
"곡산(谷山)은 내지(內地)이기 때문데 조경이 먼저 어미를 데리고 내려갔었는데, 그의 동생 조담이 옥천 군수(沃川郡守)가 되자 옥천에서 곡산까지의 거리가 3백 리 바깥이 되기 때문에 전례를 끌어 체차(遞差)할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면 대관(臺官)의 상소는 사실과 달랐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영원 부부인이 강교(江郊)에 있다고 들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운봉 현감(雲峰縣監) 유경장(柳經章)이 사조(辭朝)하니, 인견(引見)하고 분부하기를,
"팔량치(八良峙)의 요해지(要害地)에 지금 너를 보내는 것은 비단 괘서(掛書)한 도적을 기포(譏捕)하라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지리(地利)를 겸하여 지키게 하려는 것이니, 시절이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한 이런 때를 당하여 오직 도적이 없게 할 것을 기약하고 도적을 붙잡는 것만을 능사(能事)로 여기지 말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위원군(渭原郡)의 잠상 죄인(潛商罪人) 김상중(金尙重)은 일이 발각 되어 효시(梟示)하였다. 그 뒤에 청인(淸人)이 국경을 넘어와서 파수(把守)하는 장졸(將卒)을 묶어 가서 저의 땅에 인질(人質)로 유치(留置)해 놓고는 강을 사이에 두고 소리를 지르기를, ‘김상중 등이 인삼(人參) 값 갚지 않은 것을 찾아 달라.’고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이진(權以鎭)이 장계(狀啓)로 말하기를,
"작년에 우리 백성을 붙들어 가고는 뇌물(賂物)을 받고 놓아 보냈는데, 금년에 또 파수보는 장졸을 붙잡아 갔으니 그 변방(邊方)의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추환(推還)을 엄하게 금하는 뜻으로 저 나라에 자문(咨文)230)  을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안옥(按獄)한 대신 이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이제동(李濟東)을 오늘 결안(結案)하였는데 이미 반역(叛逆)을 모의한 것을 자복했고 또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했다고 자복했으니, 그 말의 성실함이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극률(極律)을 가하는 것은 살피지 못한 우려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가 말하기를 그 마음속으로 무신년231)  의 반역을 본받았다 했으니, 곧 이것이 반역이다. 극률을 시행하는 것이 본시 불가할 것이 없겠으나 그 자취는 나타나지 않아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하는 역적과는 차이가 있으니, 참작하여 형률(刑律)을 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난 뒤에 임금이 말하기를,
"역적으로 다스리는 형률은 너무 무거우니 ‘임금을 부도(不道)하게 무함하고[誣上不道] 사람을 악역에 빠뜨렸다[陷人惡逆]’는 8자로 형률을 정하여 주륙(誅戮)이 그의 한 몸에만 그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그 나머지 죄인 중에 박진좌(朴震佐)·이귀흥(李貴興)·이공형(李公衡)·이둘로미(李㐙老味)는 도적이었고 역적이 아니니, 포청(捕廳)으로 옮겨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고, 홍원창(洪元昌) 같은 자는 무고(誣告)가 명백하니 곧바로 놓아 보내는 것이 또한 옳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죄수 중에서 무인(誣引)된 자가 어찌 홍원창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이호인(李好仁)·김정우(金鼎禹)·장규소(張奎紹)·이순채(李順采)·김형섭(金亨燮)·김유섭(金燮) 등 7인은 곧바로 방송(放送)하고 그 나머지 여러 죄인은 일체 포청에 이송(移送)하여 안옥 대신(按獄大臣)에게 품의하여 거행케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8일 기사

추국 죄인(推鞫罪人) 이제동(李濟東)이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했다 하여 복주(伏誅)되었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흉계(凶計)인즉 경술년232)   봄 사이에 있었으나 당초에야 어찌 감히 범상(犯上)할 계획을 했겠습니까? 도당(徒黨)이 점차 성대해지면 두서너 고을을 공략(攻掠)하고 잇따라 범상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신년233)   여러 역적의 마음을 향모(嚮慕)하는 뜻은 두지 않았으며 단지 도당을 모아 군사를 일으킨 것이 무신년의 일과 같은 데 불과하였습니다. 이귀흥(李貴興)은 한낱 용렬한 사람이니, 어떻게 먼저 주장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을 악역으로 무함하였은즉, 다만 흉악한 마음을 지니고 미쳐 도당을 모으기도 전에 발각되어 붙들렸으므로 지정해 고할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티 없는 사람을 감히 무고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유최기(兪最基)가 말하기를,
"무신년234)   이후에 한 종류의 흉악하고 요망한 무리들이 몰래 숨어 있었으나 어찌 오늘날 남원(南原)의 괘서(掛書) 같은 변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번에 국옥(鞫獄)을 경솔하게 먼저 마무리지은 것은 옥사(獄事)의 체통에 어그러짐이 있는데도 양사(兩司)에서 쟁집(爭執)하지 않았으니, 또한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청컨대 어제 방송(放送)한 죄인을 포청(捕廳)에 이송(移送)하여 따져 물어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혹 무신년의 역적을 철저히 다스리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무신년에 사람을 죽인 것이 또한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또 철저히 다스린다면 문득 진 시황(秦始皇)이 마주 대화(對話)하는 자도 참수(斬首)한 포학한 정치235)  와 같을 것이니, 이 어찌 인군(人君)이 살상(殺傷)을 싫어하고 생명을 아끼는 덕(德)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호인(李好仁)에 있어서는 이제동(李濟東)의 공초(供招)에서 이미 티 없는 사람을 무함하여 공초를 바쳤다고 하였으니 엄하게 형신(刑訊)한 것도 또한 이미 뉘우치거늘 이제 어찌 포청(捕廳)으로 이송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 19일 경오

홍호인(洪好人)을 승지로, 심성희(沈聖希)를 헌납으로, 김유경(金有慶)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삼영(三營)에서 궁장(宮墻)을 돌 때에 목적 지점을 정하여 특별히 순라(巡邏)하라고 명하였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는 집춘영(集春營)에서 대보단(大報壇) 서족 담 모퉁이까지 이르고, 금위영(禁衞營)에서는 종묘(宗廟) 대문(大門) 서쪽에서 대보단 서쪽 담 모퉁이까지 이르고, 어영청(御營廳)에서는 종묘 대문 동쪽에서 집춘영(集春營)까지 이른다.】


【태백산사고본】 25책 34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47면
【분류】사법-치안(治安)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론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9일 하교(下敎)한 뒤로 내가 피차(彼此)의 말을 다시는 입에서 발설하지 않으려 했으나, 문의(文義)는 강론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자(朱子)가 이른바 ‘천하(天下)에는 단지 한 가지 이치만 있으므로 이것이 옳으면 저것이 그르고 이것이 그르면 저것이 옳은 것이니, 절대로 아울러 들어감을 용납할 수 없다.’는 말에 대하여 내가 감히 이 교훈이 그르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다만 시비(是非)란 반드시 한결 같이 정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세(末世)의 일들이 예전과 크게 달라서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름을 만일 깊이 밝히려 한다면 자연적으로 일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유최기(兪最基)가 말하기를,
"어찌 옳지 않음이 있는 것을 주자께서 말했겠습니까? 천하의 일이란 옳고 그름이 있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것이 옳으면 저것이 그르고 이것이 그르면 저것이 옳은 것이니, 본시 힘껏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시(是)도 아니고 비(非)도 아니어서 시비의 표적이 없음이 오늘과 같은 때가 있었겠습니까?"
하고, 승지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천하에 또한 어찌 양쪽이 다 옳고 양쪽이 다 그른 이치가 없겠습니까만, 근래에 와서는 단지 남의 잘못만 알고 자신의 잘못은 알지 못하니, 이는 곧 붕당(朋黨)의 독해(毒害)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오직 진정한 의리만을 마음에 두고 다시는 옳고 그름을 가지고 피차 다투지 말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최기가 말하기를,
"근일의 시비는 마땅히 백년은 기다린 뒤에야 공의(公議)가 비로소 정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틀렸다. 신축년236)  ·임인년237)   이후의 일에 대해서 19일 하교가 있은 뒤로는 단안(斷案)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다시 어찌 기다릴 공의가 있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치가 있으면 일이 있고 일이 있으면 시비(是非)가 있는 법이다. 시비는 음양(陰陽)과 흑백(黑白)이 서로 반대되는 것과 같아서 한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것이니 곧 자연의 이치이다. 비록 혹은 선정진(先正臣) 이이(李珥)의 이른바 ‘양쪽이 다 옳고 양쪽이 다 그르다.’는 일과 같음이 있더라도 그 가운데에는 스스로 경중(輕重)과 천심(淺深)의 구별이 있을 것이니 시비의 이치를 또한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건극(建極)238)  의 도(道)는 의리를 밝게 드러내고 시비를 밝게 판단하여 온 세상으로 하여금 모두 대중지정(大中至正)한 지역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는데, 성상(聖上)께서는 늘 탕평(蕩平)의 다스림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시어 무릇 옳고 그름에 있어서 그 의리의 극진한 곳은 찾지 않으면서 다만 모두 좌우(左右)를 평정하게 나누고 피차(彼此)를 고르게 조정(調整)하여 분쟁을 그치게 하고 시끄러움을 진정시키는 처지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의(文義)를 임강(臨講)함에 있어서도 이런 하교(下敎)가 있게 되었다. 반·우(盤盂)와 풍·초(風草)는 그 반응이 빨라서 선비는 구차(苟且)한 뜻을 품게 되고 사람들은 아첨하는 태도가 많아서 어지럽고 분주하게 오직 녹리(祿利)만을 경영하고 진정한 시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 세도(世道)를 걱정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5책 34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47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사학(史學) /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註 236]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237]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238] 건극(建極) : 임금이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워 나라를 다스림.
사신은 말한다. "이치가 있으면 일이 있고 일이 있으면 시비(是非)가 있는 법이다. 시비는 음양(陰陽)과 흑백(黑白)이 서로 반대되는 것과 같아서 한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것이니 곧 자연의 이치이다. 비록 혹은 선정진(先正臣) 이이(李珥)의 이른바 ‘양쪽이 다 옳고 양쪽이 다 그르다.’는 일과 같음이 있더라도 그 가운데에는 스스로 경중(輕重)과 천심(淺深)의 구별이 있을 것이니 시비의 이치를 또한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건극(建極)238)  의 도(道)는 의리를 밝게 드러내고 시비를 밝게 판단하여 온 세상으로 하여금 모두 대중지정(大中至正)한 지역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는데, 성상(聖上)께서는 늘 탕평(蕩平)의 다스림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시어 무릇 옳고 그름에 있어서 그 의리의 극진한 곳은 찾지 않으면서 다만 모두 좌우(左右)를 평정하게 나누고 피차(彼此)를 고르게 조정(調整)하여 분쟁을 그치게 하고 시끄러움을 진정시키는 처지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의(文義)를 임강(臨講)함에 있어서도 이런 하교(下敎)가 있게 되었다. 반·우(盤盂)와 풍·초(風草)는 그 반응이 빨라서 선비는 구차(苟且)한 뜻을 품게 되고 사람들은 아첨하는 태도가 많아서 어지럽고 분주하게 오직 녹리(祿利)만을 경영하고 진정한 시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 세도(世道)를 걱정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4월 20일 신미

조명택(趙明澤)을 헌납으로, 김집(金潗)을 통제사(統制使)로, 조현명(趙顯命)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조강(朝講)을 행하여 《예기(禮記)》를 강하다가 ‘천자(天子)는 사냥할 때 주위를 둘러 에워싸서 잡지 않고 제후(諸侯)는 불의(不意)에 엄습(掩襲)하여 많은 것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한 데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239)   이후로 자주 강연(講筵)을 베풀지 못하여 여러 신하들의 강설(講說)을 오래도록 듣지 못하였는지라, 내 자신에 있어서 빠뜨리고 잃은 것이 많았다. 옛 성왕(聖王)들은 그 덕택(德澤)이 오히려 곤충(昆蟲)에까지 미쳤는데 나는 아직껏 백성을 보전하지 못하여 온 나라의 생민(生民)들로 하여금 길거리에서 전련(顚連)240)  하게 하였으니, 마음이 구슬프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고, 또 분부하기를,
"《예기》에 품절(品節)과 의도(儀度)를 많이 말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敬)’자는 더욱 긴요하다. 오늘 《예기》를 강론한 뒤로 모든 신료들이 경(敬)을 목표로 삼아 조정(朝廷)의 기강을 엄숙하게 할 수 없다면, 이것을 강론한들 무엇하겠는가?"
하고, 또 분부하기를,
"금년의 농사는 비록 그 풍흉(豐凶)을 기필할 수 없으나 조종(祖宗)께서 백성을 사랑한 덕(德)이 매우 극진하였으니, 이제 만일 조종을 뒤좇아 본받아서 민생을 보전해 편안하게 하지 못한다면, 후세에 장차 나를 어떠한 임금이라 하겠는가? 묘당(廟堂)에서는 각별히 신칙하고 힘쓸 것이다."
하였다. 이어 강(講)을 파하라 명하고 차대(次對)241)  를 행하여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흉년이 들고 세입이 감축되어 경비에 쓸 것이 모자라는 까닭에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주는 녹봉(祿俸)과 군병(軍兵)에게 흩어 주는 급료(給料)를 좁쌀로 등급을 나누어 참작해 바꾸어 지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계속되는 기근(飢饉)이 여기에 이른 것은 곧 나의 박덕(薄德)한 소치인데, 나누어 주는 녹봉을 좁쌀로 참작해 바꾸어 주는 것은 내가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궁부(宮府)가 일체(一體)인데 백관의 녹봉을 이미 삭감해 바꾸어 주는데 나만 홀로 쌀을 먹는 것을 어찌 참겠는가? 어공(御供)도 역시 좁쌀로 대신 하고 싶으나 국체(國體)에 관계가 있으니 어공미(御供米)는 가을 곡식이 익을 때까지 한정하여 특별히 5분의 1을 삭감하고 선반미(宣飯米) 이하는 일체 참작해서 바꾸도록 하라."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어공미는 전에 이미 삭감해 줄였으므로 지금 또 삭감할 수 없다고 우기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늘이 사람을 출생시킬 때에는 본래 귀천(貴賤)과 상하(上下)가 없는 것이다. 임금이 자리를 만든 것은 대개 그 민생을 보안(保安)케 하기 위해서이다. 시절이 흉년이 들어 백성은 궁핍한데 혼자 부귀(富貴)를 누린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어공을 삭감하라는 명령은 실제로 나의 지극한 뜻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그래도 우기기를 그만두지 않자, 감진 당상(監賑堂上)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오늘 성상의 분부는 진실로 나라를 흥기시키는 말씀으로 성덕(聖德)에 빛남이 있으니, 대신과 탁지장(度支長)242)  은 오직 마땅히 봉행(奉行)해야 할 것인데 하필 억지로 우기기만 합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그 하는 바를 잘 추진할 따름이다.’ 하였으니, 성상께서 만일 이 마음을 잘 추급케 한다면 어찌 나라를 흥기시키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재로가 공상(供上)하는 물품을 재량하여 삭감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동조(東朝)243)  에 공상하는 것 외에는 모두 금년을 한정하여 혹은 바치는 것을 정지하고 혹은 차례로 반으로 줄여 진상할 것을 허락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공상(供上)을 삭감하라는 명은 실로 성덕(盛德)의 일이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의 우기는 것이 비록 사체(事體)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처지에서 나왔으나, 조현명의 그 한 마디 말은 능히 인신(人臣)으로서 규간(規諫)하고 권면하는 의리를 얻어서 족히 임금의 마음을 감동케 함이 있었으니, 아! 아름답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박찬신(朴纘新)이 흉서(凶書)를 보고도 곧바로 장문(將聞)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실을 들으니 처음 요량(料量)했던 것과는 다르다.’ 하면서 신구(伸救)하여 아뢰고, 좌참찬(左參贊) 송인명(宋寅明)도 또한 ‘박찬신의 사서(私書)에 「처음에 박광익(朴光益)의 말을 들은 일이 없다.」하니, 반드시 곡절(曲折)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 박문수(朴文秀)는 ‘전라 감사 이성룡(李盛龍)이 박광익을 수금(囚禁)하지 않았고 절의 중을 구핵(究覈)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박찬신과 같이 아울러 나문(拿問)하여야 된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찬신의 장사(狀辭)는 끝내 미심(未審)한 데가 있다. 이른바 흉서란 보기도 어렵고 보지 않기도 어렵다는 말이 어찌 진실로 해괴하지 않은가? 끝내 용서할 수 없으며, 도신(道臣)이 승도(僧徒)를 구핵하지 않은 것도 또한 완만(緩慢)하고 경솔한 데 관계되니, 파직(罷職)을 명하라." 하였다. 또 분부하기를, "지난번 유신(儒臣)과 헌신(憲臣)의 상소에 괘서(掛書)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어느 곳에서 들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마침내 이런 변고가 있었으니, 이와 같은 말을 미리 퍼뜨린 것도 또한 수상하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만일 인심을 선동하려고 했다면 마땅히 〈그 괘서를〉 시장(市場)에 걸었을 것인데 어찌 궁벽(窮僻)한 사찰(寺刹)에 걸었겠습니까? 이것도 또한 의심할 만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한쪽 사람들이 박광익이 조관빈(趙觀彬)의 처족(妻族)이라는 이유로 조관빈이 괘서를 은밀히 사주(使嗾) 하고는 통제사(統制使)의 부임길에 알리게 하여 한편으로는 성상(聖上)의 마음을 의란(疑亂)시키고 한편으로는 한쪽 사람에게 화(禍)를 얻도록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기 때문에 박문수가 이성룡이 박광익을 수금하지 않은 것으로써 죄를 삼은 것은 뜻을 둔 데가 있었고, 성상의 마음도 또한 지난번 두 신하가 나라를 걱정하고 환란(患亂)을 염려하는 말을 가지고 도리어 그들이 먼저 듣고 미리 퍼뜨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는데, 박문수가 또 궁벽한 사찰에 걸어 둔 것이 의심할 만하다는 말로 격동케 하였으니 그 또한 의심케 하고 멀리하게 함이 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5책 34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47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구휼(救恤) / 재정-국용(國用) / 재정-상공(上供) / 역사-사학(史學) / 사법-치안(治安) / 정론-간쟁(諫諍)


[註 239]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240] 전련(顚連) : 가난하고 의지 할 곳이 없음.[註 241] 차대(次對) : 매월 여섯 차례 정부 당상(政府堂上)·대간(臺諫)·옥당(玉堂)들이 입시(入侍)하여 중요한 정무(政務)를 상주(上奏)하는 일.[註 242] 탁지장(度支長) : 호조 판서.[註 243] 동조(東朝) : 왕대비(王大妃).
사신은 말한다. "공상(供上)을 삭감하라는 명은 실로 성덕(盛德)의 일이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의 우기는 것이 비록 사체(事體)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처지에서 나왔으나, 조현명의 그 한 마디 말은 능히 인신(人臣)으로서 규간(規諫)하고 권면하는 의리를 얻어서 족히 임금의 마음을 감동케 함이 있었으니, 아! 아름답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박찬신(朴纘新)이 흉서(凶書)를 보고도 곧바로 장문(將聞)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실을 들으니 처음 요량(料量)했던 것과는 다르다.’ 하면서 신구(伸救)하여 아뢰고, 좌참찬(左參贊) 송인명(宋寅明)도 또한 ‘박찬신의 사서(私書)에 「처음에 박광익(朴光益)의 말을 들은 일이 없다.」하니, 반드시 곡절(曲折)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 박문수(朴文秀)는 ‘전라 감사 이성룡(李盛龍)이 박광익을 수금(囚禁)하지 않았고 절의 중을 구핵(究覈)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박찬신과 같이 아울러 나문(拿問)하여야 된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찬신의 장사(狀辭)는 끝내 미심(未審)한 데가 있다. 이른바 흉서란 보기도 어렵고 보지 않기도 어렵다는 말이 어찌 진실로 해괴하지 않은가? 끝내 용서할 수 없으며, 도신(道臣)이 승도(僧徒)를 구핵하지 않은 것도 또한 완만(緩慢)하고 경솔한 데 관계되니, 파직(罷職)을 명하라."
하였다. 또 분부하기를,
"지난번 유신(儒臣)과 헌신(憲臣)의 상소에 괘서(掛書)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어느 곳에서 들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마침내 이런 변고가 있었으니, 이와 같은 말을 미리 퍼뜨린 것도 또한 수상하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만일 인심을 선동하려고 했다면 마땅히 〈그 괘서를〉 시장(市場)에 걸었을 것인데 어찌 궁벽(窮僻)한 사찰(寺刹)에 걸었겠습니까? 이것도 또한 의심할 만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한쪽 사람들이 박광익이 조관빈(趙觀彬)의 처족(妻族)이라는 이유로 조관빈이 괘서를 은밀히 사주(使嗾) 하고는 통제사(統制使)의 부임길에 알리게 하여 한편으로는 성상(聖上)의 마음을 의란(疑亂)시키고 한편으로는 한쪽 사람에게 화(禍)를 얻도록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기 때문에 박문수가 이성룡이 박광익을 수금하지 않은 것으로써 죄를 삼은 것은 뜻을 둔 데가 있었고, 성상의 마음도 또한 지난번 두 신하가 나라를 걱정하고 환란(患亂)을 염려하는 말을 가지고 도리어 그들이 먼저 듣고 미리 퍼뜨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는데, 박문수가 또 궁벽한 사찰에 걸어 둔 것이 의심할 만하다는 말로 격동케 하였으니 그 또한 의심케 하고 멀리하게 함이 심하였다.

 

사헌부 【지평 권현(權賢)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국청(鞫廳) 죄인 이제동(李濟東)의 초사(招辭)에 관련된 여러 죄수들을 전부 석방해서는 안될 것이니, 왕부(王府)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조명택(趙明澤)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장차 계사를 독주(讀奏)하려 하니, 임금이 단지 끝 부분만 들라고 명하였다. 조명택이 말하기를,
"비록 이것이 연달아 아뢴 것이긴 하나 또한 마땅히 구절(句節)마다 독주하는 것은 성상(聖上)의 마음으로 하여금 이를 깨달아서 채택(採擇)하여 받아 들이도록 하려 함인데, 단지 율명(律名)만을 열거하는 것은 성실한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선조(先朝)의 옛 규례이다."
하였다. 조명택이 말하기를,
"비록 이것이 선조의 옛 규례라 할지라도 어찌 굳이 그 잘못된 것을 다 따라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성내어 말하기를,
"이미 선조의 옛 규례라고 일렀는데, 어찌 감히 그르다고 하느냐?"
하였다. 조명택이 곧 피혐(避嫌)하면서 체직(遞職)을 청하니, 임금이 곧바로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조명택이 나갈 때 잘못하여 두 기둥의 어간(御間)을 거쳐 나가니, 임금이 주목(注目)해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옛말에 이른바 출입(出入)하는 곳도 알지 못하면서 남을 잘 평론 한다는 것이다."
하였는데, 바로 교리(校理) 유최기(兪最基)의 말로 인하여 체차(遞差)하라는 명을 거두어 들였다.

 

4월 21일 임신

사헌부 【지평 권현(權賢)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홍천 현감(洪川縣監) 안윤승(安允升)은 비루하고 잗달면서 탐욕하고 혹독하며, 서산 현감(瑞山縣監) 이태창(李泰昌)은 병으로 정무(政務)를 폐지하였으니, 파직(罷職)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전라 감사에 대한 처분은 지나친 듯합니다.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키는 마음은 사람마다 동일하게 얻은 것인데, 어찌 이와 같은 일을 보고 조금도 놀라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박찬신(朴纘新)은 스스로 계획하려 하였고 이성룡(李聖龍)은 성질이 본래 느리기 때문에 그들의 처사(處事)가 이와 같았습니다. 조현명(趙顯命)은 이제 막힌 외번(外藩)에서 들어왔는데 또 번임(藩任)에 차송(差送)하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박찬신이 이미 이 흉언(凶言)을 듣고 유심(柳諗)을 보내어 가지고 왔으면 당장 곧바로 받들어 올려야 하는데도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의사에 벗어나는 일로 연유하여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성룡이 바야흐로 순찰하는 길에 있었으니 이 소문을 들었으면 어찌 그 사찰(寺刹)의 형태를 보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또 데리고 있던 군관(軍官)을 보내지 아니하고 운봉(雲峰)의 군관을 보낸 것은 본시 이미 늦었던 것이다. 또 며칠을 지나도록 수금(囚禁)된 승려에게 공초(供招)를 받지 않고 범연(泛然)히 수금하고 적곡(糴穀)244)  을 독촉하듯 하지 않았는가? 아비가 욕을 당하면 그 자식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비록 은혜를 위주로 하고 의리를 위주로 한다고 말하나 돌아본다면 어찌 간극(間隙)이 있겠는가? 조현명으로 말하자면 호남(湖南)에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남원(南原)의 죄수를 신문하는 것은 지체할 수 없으니, 먼저 감진 어사(監賑御史)로 하여금 캐묻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4월 22일 계유

공홍도(公洪道) 충원현(忠原縣)에 바람이 불고 우박이 쏟아져 곡식을 손상시켰는데 크기가 새알만 하였다.

 

전라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이번에 도신(道臣)을 체임(遞任)한 것은 오로지 안핵(按覈)하는 한 가지 일을 위함이니 도내(道內)의 직질(職秩)이 높은 수령(守令)으로 안핵에 참여시켜 죄수를 신문하게 하소서. 괘서(掛書)한 적(賊)을 붙잡은 자에게 상(賞)을 논의함에 있어서는 보통의 사례를 다를 수 없으니, 사부(士夫)는 두 자급(資級)을 뛰어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고 중서(中庶)·상인(常人)은 특별히 실직(實職)의 동지(同知)를 임명하며 아울러 은(銀) 1천 냥을 상으로 주게 할 것이며, 같이 모의한 자를 적발해 알리면 김중만(金重萬)의 예에 의하여 공(功)을 논의하고, 정상(情狀)을 알면서 알리지 않는 자는 대역(大逆)으로 논죄(論罪)하여야 하며, 본도(本道)에서 상납(上納)하는 면포(綿布) 2백 동(同)을 떼어 주어서 감영(監營)에 도착한 뒤 기포(譏捕)하여 시상(施賞)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소서. 전주 영장(全州營將)은 마땅히 자력(資歷)과 위망(威望)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차임(差任)해야 되는데, 여주 목사(驪州牧使) 최명주(崔命柱)는 청렴 강직하고 뛰어나게 총명하고, 전(前) 병사(兵使) 조담(趙倓)도 또한 계략(計略)이 있으니, 이 두 사람 가운데에서 선택하여 차송(差送)하소서. 괘서의 변(變)이 남원(南原)에서 났으므로 그 수령을 마땅히 무신(武臣)에게 맡겨야 될 것이니, 전 수사(水使) 이수신(李守身)과 옥천 군수(沃川郡守) 김광(金洸)으로 선택해서 의망(擬望)245)  하게 하소서. 금성(錦城)246)  은 생산되는 물품이 많고 지역이 큰데, 구택규(具宅奎)는 자못 재능과 식견이 있으니 청컨대 구택규를 차송토록 하소서."
하자,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또 흉서(凶書)를 보기를 청하여 보고 말하기를,
"뛰어 줄을 베어 가지고 가서 안핵할 때 증빙에 대비토록 하게 하소서."
하니, 또한 그대로 따랐다. 뒤에 대신(大臣)의 주달(奏達)로 인하여 고발한 자의 논공(論功)은 김중만의 예에 의하라는 분부를 도로 중지하고 그 죄를 면해주며 두 자급을 뛰어 실직을 제수한다고 고쳤다.

 

이조 참의 권적(權𥛚)을 기장 현감(機張縣監)에 척보(斥補)하였다. 권적이 호남백(湖南伯)을 차출(差出)할 때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박문수(朴文秀)를 맨 앞에 의망(擬望)하게 하니, 권적이 ‘박문수는 일찍이 영남(嶺南)의 일이 있었다.’ 하여 그 불가함을 말하자, 심수현이 성내어 정리(政吏)를 가두려고 하니, 권적이 마지못하여 맨 끝에 의망하였다. 박문수가 상소(上疏)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권적이 신(臣)을 ‘영남의 일이 있었다.’고 하면서 호남의 번신(藩臣)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으니, 이른바 영남의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최도장(崔道章)이 무고(誣告)한 일을 지적하는 것입니까? 이양신(李亮臣)이 무고한 일을 지적하는 것입니까? 청컨대 사패(司敗)에 함께 내려 보내어 대질(對質)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소장(疏章)이 들어가자, 임금이 권적을 불러들여 분부하기를,
"19일 하교(下敎)가 있은 뒤에도 다시 전의 습관을 행하는 자는 오늘날의 신자(臣子)가 아니다. 영성군(靈城君)247)  의 성질이 본래 거칠고 경솔하기는 하나 영남의 일로 의심한다면 어찌 원통해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만약 과연 의심할 만한 일이 있다면 내가 비록 무겁게 의탁하는 처지일지라도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남번(南藩)을 지색(枳塞)하려는 것은 영남의 일을 의심하는 것이냐? 번신으로 재임했을 때 선치(善治)하지 못하였음을 이름이냐? 아니면 혹시 이양신의 여론(餘論)을 주워 모아서 그러는 것이냐?"
하니, 권적이 대답하기를,
"박문수가 영남이란 두 글자를 듣고는 지나치게 의심하고 겁을 내서 소장을 진달한 것입니다. 신이 계속 시골에 있었으므로 이양신의 소장만 단지 대충대충 보았고 이흡(李潝)의 별단(別單)은 보지를 못했으나 소문에 듣기로는 박문수가 영남 지방을 다스릴 때 별로 치적(治績)이 없었고 단지 여색(女色)을 탐하여 음란한 짓을 일삼았다 하였기 때문에 과연 호남의 번신을 차출할 때 대신(大臣)과 쟁집(爭執)한 말이 있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꾸짖기를,
"군부(君父) 앞에서 숨기는 것은 부당하거늘 어찌 이와 같이 거짓을 꾸미느냐? 박문수를 헐뜯는 자들이 비록 성질이 거칠고 도리에 어그러졌다고는 말하나 결코 여색을 탐하여 음란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다. 이양신의 말은 진실로 그 진위(眞僞)가 분명하지 않고 이흡의 별단은 큰 단락(段落)을 논한 것은 없고 의심하고 막혀 있는 소치에 불과하였다. 내가 비록 어둡다 하더라도 어찌 역적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박문수는 그 사람됨이 끝내 소인(小人)은 아닌데 어찌 감히 역적으로 지목하느냐? 더구나 군부가 믿고 쓰는 사람을 또한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이보욱(李普昱)과 이거원(李巨源)을 지색(枳塞)한 것은 오히려 고집한 바가 있었으며 오명신(吳命新)은 곧 역적 이함(李椷)의 처남(妻娚)이고 또 정업(貞業)의 초사(招辭)도 있었는데, 박문수는 원래 의심할 만한 일이 없었으며 성탁(成琢)과 최도장은 모두 무고(誣告)한 것으로 자복(自服)하여 복주(伏誅)되었거늘, 네 어찌 감히 다시 이를 본받느냐? 네가 과연 영남의 일로 의심을 했다면 마땅히 바로 고하여야 하는데도 여색을 탐하여 음란한 짓을 했다고 핑계하여 급작스럽게 미봉하려 하니, 교묘하게 속임이 심하다."
하고, 이어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출보(黜補)하여 즉일로 사조(辭朝)하라 명하니, 승지 김상규(金尙奎)가 처분이 중도에 지나치다고 누누이 진달하자, 비로소 기장 현감으로 고쳐 제수하라 명하였다. 또 박문수가 상소하여 변론한 것도 가려서 하지 않은 말이 많다 하여 추고(推考)하라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3일 갑술

교리 윤경룡(尹敬龍)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호남(湖南)에 괘서(掛書)한 적도들을 오래도록 기포(譏捕)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포장(捕將)을 경계하여 문책하소서. 대신(臺臣)이 소장(疏章)을 진달하여 미안한 비답(批答)을 받들고도 곧바로 사피(辭避)하지 않고 처치(處置)를 무릅쓰고 담당하였으니, 청컨대 장령(掌令) 안경운(安慶運)을 체개(遞改)하소서. 연달아 전관(銓官)과 혼인하여 함부로 비옥(肥沃)한 고을에 제수된 함종 부사(咸從府使) 남정하(南正夏)와 일찍이 영남(嶺南)의 우관(郵官)248)  으로 있으면서 놀랄 만한 일이 많았던 문의 현감(文義縣監) 윤광천(尹光天)을 아울러 체개하고 파직케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4월 24일 을해

사헌부 【지평 한덕량(韓德良)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지 현감(陽智縣監) 허신(許信)은 의관(醫官) 출신으로 전혀 공로와 이력(履歷)이 없는데도 함부로 흉년에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제수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케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제학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여 사면(辭免)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정미년249)   겨울에 사국(史局)의 거듭된 개간(改刊)으로 인하여 죄를 진 소장(疏章)을 함부로 올렸다가 화(禍)를 자아내어 글을 불태우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틀리고 동떨어진 말로써 권익관(權益寬)을 잇따라 논한 소장도 그 말의 뜻이 망측하였고 이어서 당차(堂箚)에 미친 흉언(凶言)은 실로 교문(敎文)의 근본이 되었는데도 이를 발탁하여 포장(褒奬)해 임용한 것은 마치 공로에 보답해 갚은 것 같음이 있었으나, 유독 김영해(金寧海)에 대한 계사(啓辭)는 아직도 고지(故紙)로 전해 오고 있으니, 속담에 이른바 낫[鎌]으로 눈을 가린다는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말이 휘(諱)하는 데 저촉(抵觸)된 것이 많았고 어리석어서 재량(裁量)할 줄을 알지 못하였는데도 성상의 도량이 관대하시어 섬으로 귀양보내는 형전(刑典)을 가볍게 베풀었다가, 성은(聖恩)을 입어 육지로 옮겨서 살아서 고향에 돌아왔는데 다시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수록되는 데 이른 것이야 더욱 어찌 꿈결엔들 도달할 바였겠습니까? 신(臣)도 또한 사람입니다. 어찌 감격한 마음이 없겠으며, 또한 어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대도(大道)에 함께 가시려는 성상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선(善)을 옳게 여기고 악(惡)을 그르게 여기는 마음과 불의(不義)를 부끄러워하고 불선(不善)을 미워하는 마음은 사람이 본래부터 가진 바인데, 이 미혹하고 막힌 소견이 한번 정해지면 돌리기 어렵고 성급하고 편협한 성격은 아홉 번 죽는다 해도 뉘우치지 않아서 가만히 스스로 이르기를 ‘이 굳게 잡은 대의(大義)는 성인(聖人)에게 질정(質正)해도 의심할 바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척할 뜻이나 남을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이는 전하께만 죄를 얻는 것이 아니라 천지 신명(天地神明)이 반드시 주극(誅極)을 더할 것입니다."
하였다. 소장(疏章)이 들어가니, 비답하지 아니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이른바 의리라는 것은 19일에 하교한 뒤로 얼음이 녹아 풀리듯이 해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 다시 이런 뜻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른바 군신(君臣)이 서로 시비(是非)를 다투어서 장차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은 데에 이를 것인데, 먼 훗날에 나를 가리켜 어떠한 임금이라 하겠는가? 군부(君父)의 분부에 승부를 다투고 역당(逆黨)의 부류를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겼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면 결코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원소(原疏)를 되돌려 주고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내 신하가 아니라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5일 병자

경상도에서 전염병으로 인해 3천 3백 99명이 사망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권적(權𥛚)에게 내린 처분이 중도(中道)를 벗어났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권적이 만약 영성(靈城)이 반역했다고 하여 옥관(獄官)에게 분부해 물어서 영성이 틀림없이 반역했다면 저절로 마땅히 시행해야 할 형률이 있을 것이나, 권적이 만약 무고(誣告)했다면 당연히 반좌(反坐)250)  의 형률을 써야 할 것이다. 이제동(李濟東)에게는 마침내 무고한 형률을 시행하였는데 권적에게는 도리어 용서를 더하였으니, 이는 정말 무른 땅에 나무를 꽂는 격이다.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의 죄를 말한다면 멀리 찬배(竄配)시키는 것이 진실로 마땅한 형률이 될 것인데, 이제 이 척보(斥補)한 것을 어찌 지나치다고 이르는가?"
하였다. 임금이 전라 감사 조현명(趙顯命)을 들라 명하여 분부하기를,
"경(卿)이 영남(嶺南) 감영(監營)에 있었으니 반드시 이광덕(李匡德)이 호남(湖南)을 다스린 정치를 들었을 것이다. 그 잘못된 점을 경은 아는가?"
하니, 조현명이 대답하기를,
"수령(守令)들이 소용되는 물건에 있어서 만약 선왕(先王)의 정한 제도가 아니면 이광덕이 거의 다 삭감하여 민역(民役)을 도왔다 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물이 맑으면 큰 고기가 없는 법이다. 무릇 물건을 모름지기 나타나지 않게 둔곳이 있으면 평상시에는 비록 탐리(貪吏)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될 것이나 이같은 흉년에는 또한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경을 보내는 것은 비록 괘서적(掛書賊)을 기포(譏捕)하기 위해서이나 또한 민사(民事)를 위해서이다. 경은 도임하여 모름지기 잘 처리하라."
하였다. 조현명이 ‘영남에서 권분(勸分)251)  한 두 사람에게 아직까지 직첩(職牒)을 주지 않았는데, 백성과 서로 약속한 것이어서 신의를 잃을 수 없다’고 하면서 주자(朱子)가 절강(浙江) 동쪽 사람에게 수직(授職)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절강 서쪽의 제형(提刑)252)  에 취임하지 않은 옛일을 인용하여 당초의 절목(節目)에 의해 수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차자(箚子)를 올려, 권적(權𥛚)을 척보(斥補)한 처분이 중도에 벗어났다는 것과 박문수(朴文秀)가 소장에다 한 말이 들추어 헐뜯는 데 관계되었음을 논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어 차자에 논한 것이 한 사람은 부익(扶翼)하고 한 사람은 억제(抑制)함을 면하지 못했다고 꾸짖었다.

 

4월 26일 정축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7일 무인

경상도 상주(尙州)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전라도 전(前) 감사(監司) 이성룡(李聖龍)이 ‘여산 영장(礪山營將) 조호신(趙虎臣)을 보내어 괘서적(掛書賊)을 기포(譏捕)토록 하라.’고 계달(啓達)하니, 대개 적도의 정상(情狀)을 밀고한 자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4월 28일 기묘

부교리 유최기(兪最基)가 상소하여 ‘김유경(金有慶)의 상소가 있은 뒤 분부한 말씀이 중도(中道)에 지나친 과실임을 진달(陳達)하고, 장령 김정윤(金廷潤)이 상소하여 권적(權𥛚)에 대한 처분이 실로 중도에 지나쳤는데, 대신(大臣)이 이를 바로잡아 구제하려는 차자(箚子)에 대하여 비지(批旨)가 매우 화평(和平)함을 잃었으며, 김유경을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한 것은 이미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처사가 아니고 사령(辭令)도 또한 이와 같이 박절하게 하는 것은 온당치 않음을 논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충청도 충원현(忠原縣)에 우박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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