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신사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 판서 정형익(鄭亨益)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외번(外藩)에 있을 때 저보(邸報)253) 에서 ‘모든 당(黨)에 다 역도(逆徒)가 있다.’는 하교(下敎)를 삼가 보고 몹시 놀라고 두려워서 성상께서 마음 두신 바를 살필 수가 없었습니다. 일전에 전(前) 부제학(副提學) 김유경(金有慶)의 진소(陳疏)로 인하여 성상께서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데, 그 가운데 역도의 부류를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긴다는 분부가 있었는지라 신은 여기에서 비로소 전하께서 지난번 사람들을 또한 역도라고 말씀하신 뜻을 알았습니다. 아! 전하께서 일찍이 정신(廷臣)들을 신칙하실 때 역도의 명칭을 경솔히 사람들에게 가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는데, 지금에 와서 여러 신하들을 혼동해 열거하시면서 분변해 밝히지 않으신 채 일체로 난역(亂逆)의 죄과(罪科)에 몰아넣어 문득 한 시대의 법령을 이루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악명(惡名)을 덮어쓰고도 감히 그 일이 옳고 그른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시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비상(非常)한 처분을 하시는 것입니까? 신이 을사년254) 사이에 외람되게 헌장(憲長)255) 의 자리에 있으면서, 토죄 보복(討罪報復)하는 논의를 주장하였을 때 성상의 하교에서 여러 번 고집하는 의리는 옳다고 하셨으나 일찍이 모든 당이 다 역도라는 하교는 있지 않았는데, 어찌 몇 해 사이에 충신과 역적이 바뀌어 변하는 이치가 있습니까? 아! 역적을 역적이라고 하는 것은 본시 옳지만 역적이 아닌데 역적의 무리라고 이르는 것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볼 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인신(人臣)이 된 자가 한 번 이 명칭을 얻게 되면 실로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것이요 신(神)과 사람들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신도 또한 그 색목(色目)속의 한 사람으로서 곧 지난번 사람들과 일반인데 조금도 다름이 없다면 그 어찌 감히 육경(六卿)의 반열에 앉아서 웅크리고 있겠습니까?"
하니, 분부하기를,
"19일 하교에 군신(君臣)의 의리를 밝혔고 분쟁(紛爭)하는 습성을 막았는데, 그 한계가 분명하여 원래 혼동해 말한 것이 아니었은즉 지난날의 구습(舊習)을 아직 벗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인혐(引嫌)을 만드는 것은 이미 지나친 데 관계 될 것이다. 더구나 역당(逆黨)이라 말하지 아니하고 모든 당 속에 다 난역(亂逆)이 있다 말하였은즉, 중(中)자와 유(有)자는 그 지름길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19일 하교한 뒤에 전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옛 습성을 깊이 뉘우쳐 고쳐야만 저절로 충성이 될 수 있는데, 어찌하여 이것을 가지고 한없는 승강이를 계도(啓導)하는가? 원소(原疏)를 돌려 주고 차후로 이런 소장을 다시는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전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지(批旨)가 준엄하다 하여 차자를 올려 파직시킬 것을 원하니, 임금이 온후한 비답(批答)을 내려 위로하고 해명하였다.
야대(夜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5월 2일 임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절작통편》을 강하다가 임금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분부하기를,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는 의리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19일의 하교(下敎)는 곧 나의 10년 동안 정밀히 관찰해 온 것이고 10년 동안 꾹 참아 왔던 것을 처음 발표한 것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의리를 터득한 바가 해와 별같이 분명하다고 여겼는데 여러 신하들이 끝내 이를 깨닫지 못하니, 어찌 개연(慨然)하지 아니하랴?"
하니, 참찬관(參贊官)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백 년 동안의 고질(痼疾)을 어찌 하루 아침에 통쾌하게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늘 의리를 말하시고 그 다음날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는 것은 너무 조급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선(承宣)의 말이 틀렸다. 이런 군신간의 큰 의리는 한번 깨우쳐 주면 곧바로 깨달을 수 있다. 정형익(鄭亨益)의 상소에 말하기를, ‘을사년256) 초에 어찌 하교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는데, 내가 을사년에 하교하지 않은 것이 어찌 남의 사정을 보아 위로하고 도우려는 뜻이었겠는가? 대저 이른바 위로 성고(聖考)의 혈맥을 위하고 아래로 저사(儲嗣)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하였다 함은 옳다. 만약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서로 얽혀 있었다면 이는 의리가 아니다. 을사년 초에 이미 19일의 하교가 있었다면 이인좌(李麟佐)의 무리들이 반드시 감히 반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신축년257) 에 논의하던 것은 대개 이미 극한적이었지만 신축년에서 을사년 사이에는 피차가 비록 원수의 사이는 아니었으나 또한 서로 상대하지 않았는데, 정미년258) 이후에 전하께서 탕평(蕩平)의 도(道)를 행하려 하셨으므로, 신 등은 일찍이 너무 멀어져서 서로 어울려 합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당의(黨議)가 점점 줄어들고 공조(公朝)의 일을 서로 모여 논의하게 되었고 사실(私室)을 찾는 자도 있게 되었으니, 이는 전하께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칙을 세워서 정한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정형익(鄭亨益)의 상소에 있어서는 신과 이종(姨從)의 친척이 되므로 신이 감히 옳다 그르다 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지난번 성상의 하교 중에 혼동해 역적의 부류라고 지칭한 것 때문에 말한 것이고 성교(聖敎)와 대립하여 이기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렇다. 정형익은 김유경(金有慶)이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형익은 본디 강직(剛直)하였다."
함경도의 정평(定平)·함흥(咸興)·경성(鏡城)·회령(會寧)에 서리가 내렸고 갑산(甲山)·삼수(三水)에는 눈과 우박이 내렸다.
5월 3일 계미
강원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하였으며,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2백 68명이었다.
5월 4일 갑신
경기(京畿) 장단부(長湍府)에 있는 성묘(聖廟)에 화재가 났다.
경상 감사 김시형(金始炯)이 도내(道內)의 오랜 가뭄으로 인하여 비 오기를 빌 것을 청하고, 또 밀·보리가 잘 여물지 않았고 전염병이 더욱 치성함으로 인하여 수륙군(水陸軍)의 대도안(大都案)과 임자식년(壬子式年)의 대도안을 모두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기를 청하니,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전라도의 옛 감사(監司) 이성룡(李聖龍)이 비국(備局)에 급히 보고한 일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장계(狀啓)를 올리라 명하여 보기를 마치고 분부하기를,
"황가(黃哥)가 ‘종이를 절의 중에게서 빌어 썼다.’고 말하므로 절의 중에게 물으매 과연 그렇다고 하였고, 그 얼굴을 보게 한즉 또 틀림없다 하였다 하니, 그 일이 괴이하다."
하였다. 또 분부하기를,
"새 도신(道臣)이 부임할 때 그 종이 모양과 필적(筆迹)을 이미 가지고 갔으니, 만일 조사해 물어서 실정을 알아냄이 있으면 그 죄인을 곧바로 올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리를,
"이 방(榜)에 실린 사람은 모두 수금(囚禁)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방은 불에 던지고 이여매(李如梅) 형제는 곧 놓아 보내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고, 이어 분부하기를,
"이가(李哥) 형제는 이미 속량(贖良)259) 한 종[奴]에게 침징(侵徵)을 지나치게 더하다가 이런 곤액을 만났다."
하매,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렇게 품정(稟定)한 뜻을 은밀히 감사(監司)에게 시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각릉(各陵)의 제관(祭官)이 깨끗하게 재계(齋戒)하면서 하룻밤을 묵는 것이 본래의 국전(國典)이며, 감찰(監察)은 곧 옛날의 전중 어사(殿中御史)로서 이를 제관에 임명하게 한 것은 본디 그 뜻이 있는 것이니, 제관이 재계하며 묵는 것을 특별히 신칙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규찰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뜻을 사헌부에 분부하라."
하였다.
5월 5일 을유
공홍도(公洪道) 안에 유민(流民)의 사망이 7천 5백 80여 인이나 되었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지 현감(陽智縣監) 허신(許信)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5월 6일 병술
전라도의 옛 감사(監司) 이성룡(李聖龍)이 장계(狀啓)하였는데, 이르기를,
"여산 영장(礪山營將) 조호신(趙虎臣)이 한 상한(常漢)을 염탐해 붙잡아서 그의 주머니 속의 편지를 찾아 보니 곧 이것은 은진(恩津) 강경(江京)에 사는 진사(進士) 이위(李威)가 진안(鎭安)의 옥수(獄囚) 최성(崔姓)에게 편지를 보낸 것인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남원(南原)의 일은 내가 마땅히 감사(監司)와 새로 부임한 원에게 도모토록 하겠다.’ 운운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구대(求對)하여 올리니, 임금이 보기를 마치고 말하기를,
"마땅히 새로 부임한 도백(道伯)의 장문(狀聞)을 기다려 처리하겠다. 그런데 이 일은 남원의 적도들과 서로 관련된 듯하니, 또한 캐어 묻게 하여 만일 단서가 있으면 장교(將校)로 하여금 곧바로 압송(押送)케 할 것을 묘당(廟堂)에서 은밀히 관문(關文)을 발송하라."
하였다.
5월 7일 정해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임금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군신(君臣)의 사이는 붕우(朋友)와 다르다. 친구 사이에 서로 착한 일을 하도록 권하는 것도 오히려 어려운데, 더구나 군부(君父)에게 말을 다하겠는가?"
하니, 참찬관(參贊官)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내 몸에 긴요한 말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혹시 임금의 뜻을 거슬려 가며 간(諫)하는 사람을 나를 아낀다 하여 허심탄회하게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전하의 신자(臣子)된 자 누가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공부가 미숙하다. 그러나 말을 아뢰는 사람이 혹 분개하고 한탄하면서 사리(事理)에 어그러지고 격렬하게 하는 자가 있거나 혹 지나쳐 중도(中道)를 얻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음에 거슬림이 없지 않다. 일이 지난 뒤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고 생각하면 일찍이 이를 개탄하며 스스로 불만스럽게 여기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이는 평일에 속마음에 있던 것을 글뜻으로 인하여 말한 것뿐이다."
하였다.
5월 8일 무자
평안 감사 권이진(權以鎭)의 장계(狀啓)에 ‘청(請)나라 사람이 위원군(渭原郡)에 와서 한데 모여 트집을 잡기 때문에 역학(譯學)으로 하여금 봉황성장(鳳凰城將)에게 탐문하였더니, 봉황성장이 말하기를, 「어떠한 청나라 사람이 어떠한 일로 한 곳에 모여 해로운 트집을 잡는지 알지 못하겠는데, 비록 이것이 한 나라의 사람이더라도 이와 같이 국경(國境)을 넘어서 침범하였다면 어찌하여 붙잡아 보내지 않는가?」 라고 했다.’ 하였다. 이에 권이진이 장청(狀請)하기를,
"자문(咨文)260) 가운데 그들이 남 몰래 채굴(採掘)하는 폐단과 파졸(把卒)을 노략질해 가서 위협하여 뇌물을 요구하는 상황을 자세하게 말하여 이쪽에 넘어 온 놈은 여기에서 붙잡고 저쪽에 있는 놈은 저쪽에서 엄금하게 하소서."
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이를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5월 9일 기축
밤에 흰 구름 한 줄기가 서쪽에서 동쪽까지 이르렀는데 그 길이가 하늘 끝까지 뻗쳤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유최기(兪最基)가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올해 수만 명의 기민(飢民)이 조가(朝家)의 지극한 정성으로 진휼(賑恤)함을 입어 삶을 얻었으나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도 또한 많았습니다. 이들을 묻어 줄 즈음에 일을 맡은 자가 점검하여 살피지 않고 많은 해골(骸骨)을 모아 한 구덩이에 한데 묻은 것이 있는데, 옛말에 ‘사특(邪慝)한 기운이 이상함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온화한 기운을 손상시키는 단서가 될 것입니다. 여제(癘祭)의 예에 따라 제사를 베풀어서 위로한다면 또한 저절로 감동하여 통하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진휼(賑恤)을 마친 뒤 해조(該曹)를 시켜 거행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5월 11일 신묘
진휼(賑恤)을 철파하고, 기민(飢民)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데 양식을 주어서 보내니, 보리가 익고 농사철이 이미 다다랐기 대문이었다. 이때 일소(一所)에 1천 3백 7인이 있었으며 왕래한 기민이 6천 3백 62인이었고, 이소(二所)에 2천 4백 49인이 있었으며 왕래한 기민이 2천 9백 75인이었다. 진청 당상(賑廳堂上) 송인명(宋寅明)이 진휼을 마친 뒤에 진청 낭청(郞廳)에게 상을 주어야 된다는 뜻을 서계(書啓)로 아뢰자, 승지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자신이 당상이 되어 공로(功勞)를 써서 아뢰어 청함은 심히 그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낭청 이하에게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무엇이 손상 되겠는가?"
하였다.
경상도에서 진휼(賑恤) 현장에 나아간 기민(飢民)이 15만 7천 43인이었으며, 사망이 4천 2백 7인이었고 떠도는 거지가 1만 9백 4인이었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일찍이 조참(朝參)261) 과 상참(常參)262) 에 나아와서 참여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단지 정조(正朝)와 동지(冬至) 두 절일(節日)과 탄일(誕日)에만 봉조하가 숙배(肅拜)하는 사례가 있고 조참·상참은 거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자(箚子)를 올려 전의 명령을 도로 정침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황해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여 조엄(趙儼)의 탐장(貪贓)한 실상과 금오(金吾)의 경솔히 감죄(勘罪)한 실수를 말하면서 근신(近臣)을 보내어 자세히 조사해 밝힐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다시 금오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토록 하겠다고 비답하였다. 이보다 앞서 박사수가 장계(狀啓)로 전 안악 군수(安岳郡守) 조엄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탐한 일을 논하자, 금오에 명하여 붙잡아다 처치토록 하였는데, 조엄이 근거없는 말로 공초(供招)를 들이고 도리어 박사수를 감정을 풀기 위한 데에 돌렸으므로 금오에서 형률(刑律)를 적용한 것이 너무 가벼웠는지라, 이에 박사수가 조목을 열거하여 다시 논한 것이었다.
대사간 이광세(李匡世)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옛날에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편수(編修)하고 나서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했으니, 이는 대개 그의 기록한 것과 삭제한 것이 엄정하여 그 죄역(罪逆)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조정(朝廷)의 논의에서 혹은 충(忠)이라 하고 혹은 역(逆)이라 하여 10년 동안이나 충·역의 사이에 있던 자들이 전하의 19일 하교(下敎)를 얻고서야 비로소 그들의 귀속할 곳이 정하여졌습니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평일의 사사로이 좋아하는 정의(情誼)에 가리어 일체로 부호(扶護)하던 자들이 곧바로 마땅히 종전의 잘못을 빨리 깨달아 옛 습관을 통렬히 고쳐야 할 것인데도, 형조 판서 정형익(鄭亨益)은 이에 감히 왕언(王言)을 믿지 않고 명지(明旨)를 힘써 항거하면서 반역(反逆)이 아닌데 반역이라고 말한다는 따위의 말을 장주(章奏)의 사이에 공공연하게 말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또 당역(黨逆)이란 두 글자를 드러내어 말하여 자부(自負)하고 집요하게 끌어다가 혐의를 삼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뜻이 없으니, 이를 논죄(論罪)하지 않는다면 장차 난적(亂賊)들을 두렵게 하고 방종한 붕당(朋黨)을 혁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옛 습성을 면하지 못하였다면서 그 소장(疏章)을 돌려 주었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삼남(三南)의 감진사(監賑使)가 진휼(賑恤)하는 일을 이미 마쳤는데도 아직 올라오지 않아 효과는 적고 폐단만 많으며, 감진사 이광덕(李匡德)이 여러 가지 서울에 바칠 물품을 아뢰지 않고 집류(執留)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덕의 장단점은 내가 아는 바이다. 처음에는 이미 보내기를 청하고 이제 또 이와 같이 하니 이광덕의 형편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아뢰기를,
"진휼의 문서(文書)를 마감하자면 자연적으로 지연될 것이니 도신(道臣)에게 맡기고 올라오는 것이 무방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재촉할 수 있겠는가? 그의 당연히 할 바를 종결할 것 같으면 저절로 올라 올 것이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승지(右承旨) 서종옥(徐宗玉)이 상참(常參)의 전좌(殿座)263) 때에 통례(通禮)가 대기하지 않았다 하여 그 경책(警責)을 계청(啓請)하기를,
"나라의 기강(紀綱)이 해이하여 심지어 통례 같은 무리도 또한 거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통례는 옛날의 홍려(鴻臚)인데, 승선(承宣)이 ‘통례같은 무리’라고 말하는 것은 순후(淳厚)한 풍도가 매우 부족하다."
하였다.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유최기(兪最基)가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총재(冢宰)가 나라의 비용을 제어(制御)하기를 반드시 세초(歲抄)에 하는 것은 대개 나라의 재부(財賦)를 호조(戶曹)에서 주관하나 반드시 천관(天官)264) 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은 그의 제어를 중하게 여기는 까닭입니다. 국가에서 내수사(內需司)의 공사(公事)를 이조(吏曹)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은 《주례(周禮)》의 뜻을 모방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총재의 임무는 지금의 대신(大臣)과 같으니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같은 데 그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유최기가 말하기를,
"지난날 성교(聖敎)가 재감(裁減)하는 방도에 대해 누누이 언급하셨고 사치를 버리는 것이 가장 절생(節省)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에 고(故) 상신(相臣) 홍명하(洪命夏)가 사치를 금하는 것으로써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오늘날 입시(入侍) 한 여러 신하들이 먼저 자기 집에 있는 금비녀같은 것들을 버린다면 반드시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절실한 말입니다."
하고, 영사(領事) 서명균(徐命均)은 아뢰기를,
"지난번에 관서(關西)의 도신(道臣) 권이진(權以鎭)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이 변방(邊方)의 정세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비국(備局)에 앉아서 그 소본(疏本)을 승정원에서 가져오라 시켰는데 승선(承宣)이 승정원의 문서는 으레 궐외(闕外)로 내보낼 수 없다면서 끝내 보내어 보이지 않았으니, 청컨대 승지를 추고(推考)하시고 지금부터 이후로 대신(大臣)이 공청(公聽)에 있으면서 일이 변방의 정세에 관계된 소장(疏章)을 보려 하면 승정원에서 내어 보이는 것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 분부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 그 소장이 비록 비국에 계하(啓下)한 것이 아니더라도 변방의 정세에 관계가 있는 것 같은 것은 승정원에서 비국에 내어 보이는 것을 정식으로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고 석강(夕講)도 행하였다.
송진명(宋眞明)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이때 참판 자리가 비어 있어서 전의 망단자(望單子)265) 를 들이라 명하고 다시 전전의 망단자를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무릇 망단자를 세 번 들여 갔는데도 하비(下批)하지 않고 대신(大臣)에게 의망(擬望)하여 들이라고 명하여, 송진명이 말망(末望)으로서 수점(受點)266) 하게 된 것이다.
도적이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의 집에 들었다. 이때에 장붕익이 도성(都城) 안의 중요한 병권(兵權)을 오래 장악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시기하여 검객(劍客)을 모집하여 살해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듣고 장붕익을 내일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라 명하였다.
5월 12일 임진
심택현(沈宅賢)을 이조 판서로, 조최수(趙最壽)를 대사헌으로, 윤동원(尹東源)을 장령으로, 이주진(李周鎭)을 헌납으로, 조진세(趙鎭世)·신택하(申宅夏)를 지평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정언으로, 조명겸(趙明謙)·박필균(朴弼均)을 교리로, 윤득화(尹得和)를 부교리로, 박필재(朴弼載)를 수찬으로, 송징계(宋徵啓)·윤광운(尹光運)을 부수찬으로, 윤순(尹淳)을 형조 판서로, 이진순(李眞淳)을 형조 참판으로, 김동필(金東弼)을 공조 판서로, 이덕수(李德壽)를 공조 참판으로, 한범석(韓範錫)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이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자, 임금이 자객(刺客)에 대한 일을 물으니, 장붕익이 대답하기를,
"잠결에 창 밖의 사람 그림자를 보고서 칼을 들고 나가니, 사람이 칼을 가지고 대청 마루 위에 섰다가 이내 뛰어서 뜰 아래로 내려가므로 함께 칼날을 맞대고 교전(交戰)하여 외문(外門)까지 옮겨 갔었는데 그 자가 몸을 솟구쳐 담에 뛰어 올라 달아났습니다."
하였다.
5월 13일 계사
경상도에 선충(蟬蟲)과 황모(黃蟊)가 밀보리를 손상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하다가 문의(文義)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한(漢)나라의 제영(緹縈)267) 은 말하기를, ‘죽은 자는 다시 살 수 없고 목을 벤 자는 다시 붙일 수 없다.’ 하였으니, 무릇 형벌은 조심하고 삼가하지 않을 수 없고 강학(講學)하는 방도는 마땅히 옛것을 거울 삼아 오늘날을 경계하여야 하는데, 우리 나라의 토포영(討捕營)에서 도적을 다스리는 방법은 자세히 살펴 신중하게 하지 않고 늘 엄하게 신문하여 승복(承服)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엄한 장형(杖刑) 밑에서 옥석(玉石)을 구분하기 어려우니, 지금부터는 각별히 사람을 선택하여 반드시 영장(營將)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곤임(閫任)에 의망(擬望)하게 하고 죄수는 토포영에서 자백한 뒤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자세히 물어 죄상을 감안하여 처단토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각 아문(衙門)마다 구류간(拘留間)이 있는 것은 실로 그릇된 폐단이 되기 때문에 지난번에 혁파하라는 뜻을 형조(刑曹)에 분부하였었다. 직수 아문(直囚衙門)268) 으로 말하더라도 사헌부(司憲府) 같은 데도 그 폐단이 없지 않으며 포도청(捕盜聽)에 이르러서는 강절도(强竊盜) 외에 다른 일로 인하여 또한 구류(拘留)된 자가 있으니, 승정원에서 각별히 신칙하여 무릇 직수(直囚)에 관계되는 각 아문에도 혹 구류된 자가 있으면 찰추(察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여 《예기(禮記)》를 강하였다.
5월 14일 갑오
헌납(獻納) 이주진(李周鎭)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일전에 전하께서 액외(額外)의 궁녀(宮女)를 조사해 내어 전부 방출(放出)하여 궁궐(宮闕) 안이 하루 아침에 숙청되었다 하는데, 이미 액외라 이른다면 처음부터 그 이름이 궁적(宮籍)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궐문(闕門)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본시 거기에 해당하는 형률이 있을 것인즉, 대궐 안 심엄(深嚴)한 곳에 여리(閭里)의 천한 무리들이 몸을 숨기고 종적을 의탁한 것도 이미 매우 한심한데 지난번 요비(妖婢)의 변고를 겪고부터 전하께서 궁금(宮禁)을 칙려(飭勵)한 것이 어떠하였으며 여러 신료들이 전하를 우러러 권면함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도 다시 이런 일이 있으니, 신은 직극히 우려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듣건대, 망명 죄인(亡命罪人) 황진기(黃鎭紀)의 여노(女奴)가 방자(房子)의 이름을 핑계하여 궁비(宮婢)와 섞여서 있다가 또한 조사해 내는 가운데 있었다 하니, 그 마음에 놀라고 분노함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이른바 황진기의 종년은 마땅히 포청(捕廳)에서 기포(譏捕)하여 몰래 들어온 곡절을 엄히 묻게 하고, 그 사이에서 결탁하여 한통속이 된 사람도 또한 캐어물어 엄하게 처단함을 절대로 그만 둘 수 없습니다. 또 듣건대, 황진기의 아내는 희천(熙川)에 정속(定屬)269) 되어 며느리와 시어미가 같은 집에 있으면서 일찍이 관부(官府)에 입역(立役)하지도 않고 잉태했다는 말이 낭자하니, 황진기가 몰래 왕래한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 지아비의 간 곳을 그 아내가 알지 못할 리가 없으니, 또한 일체로 잡아다가 핵실(覈實)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진달한 일은 그대로 시행토록 하겠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남원(南原)의 괘서(掛書)한 일로 인하여 전라 감사의 장계(狀啓)가 올라왔다 하는데, 이 일은 대신(大臣)이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계에도 또한 긴요하게 캐어낼 만한 것이 없었다. 최두정(崔斗挺)이 살옥(殺獄) 사건으로 인해 방금 남원에 수금(囚禁)을 당하여 있는데 그 원척(元隻)은 최구(崔璆)이므로 이위(李葳)와 최두징(崔斗徵)의 무리가 최구를 죽이려고 남원에 괘서한 것을 최구에게로 돌렸으니, 사람을 무함한 악역(惡逆)의 형률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밖에는 다른 사정이 없으니 장계의 원본은 마땅히 비국(備局)에 내려보낼 것이다."
하매, 송인명이 말하기를,
"역시 포도청(捕盜聽)에도 보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홍상빈(洪尙賓)을 승지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으로, 윤유(尹游)를 동경연(同經筵)으로, 한현모(韓顯謨)를 응교로, 정광제(鄭匡濟)를 장령으로 삼았다.
5월 15일 을미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권이진(權以鎭)의 장계(狀啓)에 촌락(村落)이 모여서 살아야 된다는 말은 의견이 없지 않습니다. 연강(沿江) 일대에 사는 백성들이 흩어져 있어 촌락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저 나라의 사람이 뜻밖에 와서 침범한다면 반드시 약탁(掠奪)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 감사 송진명(宋眞明)이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행하려 했으나 단지 오가작통만 시행하고 한 곳으로 모여서 살지 않으면 형세가 외롭고 허약하여 지키고 망(望)을 보면서 서로 돕는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수십 호(戶)로 한 마을을 이루게 하고 통령(統領)할 책임자를 택정하여 강물과의 거리가 몇 리 밖으로 옮겨 살게 하기를 청야(淸野)해서 적을 대기하는 법과 같이함이 있다면, 한 마을이 서로 의지하여 거의 방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말단(末端)에 속하는 일이다. 그 책임이 수령(守令)을 선택하지 않는 데 있으니 변지(邊地)의 수령은 각별히 선택함이 타당하다."
하였다.
임금이 첨지(僉知) 이진기(李震箕)를 불러 보고 특별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는데, 이진기는 나이 75세에 등과(登科)하여 지금 81세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승지 서종옥(徐宗玉)이, 성종조(成宗朝) 때 김효흥(金孝興)이 70세가 지나서 과거에 급제하매 성종이 수서(手書)로 포장(褒奬)하고는 자급(資級)을 더하고 음식을 내렸던 전례를 끌어 앙달(仰達)하였으므로, 드디어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5월 16일 병신
한현모(韓顯謨)를 집의로, 박필균(朴弼均)을 지평으로, 신만(申晩)을 헌납으로, 이보혁(李普赫)을 동의금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론하였다.
5월 18일 무술
황해도 해주 교생(海州校生) 간철석(簡哲碩)의 처(妻) 이씨(李氏)의 정문(旌門)을 세우라 명하였다. 이씨는 나이 75세로 잘못하여 집에 불이 났는데 불속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가 그 지아비의 신주(神主)를 껴안고 죽었다. 도신(道臣)의 장문(狀聞)으로 특별히 정포(旌褒)하라 명한 것이다.
주강(晝講)을 행하여 《예기(禮記)》를 강하였다.
금오 당상(金吾堂上) 송인명(宋寅明) 등이 구대(求對)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보내 호남(湖南)의 죄인을 붙잡아 올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전라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남원(南原)에 괘서(掛書)한 죄인 이위(李葳)·최두징(崔斗徵)·김윤귀(金潤龜)·길희징(吉喜徵) 등 네 사람을 포박하여 용안 현감(龍安縣監) 윤우주(尹遇周)로 하여금 압송(押送)케 한다는 일을 장계(狀啓)로 주달했기 때문이었다.
이춘제(李春躋)를 대사간으로, 유건기(兪健基)를 지평으로, 황재(黃梓)를 응교로, 조상명(趙尙命)을 교리로 삼았다.
부교리 윤득화(尹得和)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19일의 하교(下敎)는 대개 백년에 걸친 폐습(弊習)과 고질을 진념하시어 조정(朝廷)에 있는 신료들로 하여금 옛 습성을 씻어 버리고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거듭 경계하여 타이른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모든 당(黨) 가운데 다 반역(反逆)이 있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이미 명확히 구별하여 분석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었는데, 그 후 비망기(備望記) 가운데는 역류(逆類)를 달갑게 여긴다는 하교가 갑자기 김유경(金有慶)의 소어(疏語) 밖에 나왔습니다. 역적을 역적이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역적이 아닌데도 이런 명칭을 혼동해 입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정형익(鄭亨益)이 마음에 놀라고 뼈아파 하여 기필코 명확히 구분하려 한 것인데, 무엇이 조금이라도 당론(黨論)에 관계된 것이 있으며, 또한 무엇이 몹시 핍박하고 듣기 싫은 단서가 있었기에, 일전에 이광세(李匡世)가 성교(聖敎)를 빙자하고 성지(聖旨)를 추측으로 판단하여 별다른 말을 연출하며 근거없는 말로 희롱하고 놀리어 충(忠)이니 역(逆)이니 단정했느니 귀속하느니 하면서 두각(頭角)을 감추고는 호도(糊塗)해 우물쭈물 말해 가다가 이에 그때 경계하여 격려한 성교를 가지고 도리어 악명(惡名)을 가해서는 안될 사람에게 혼동해 가하여 절반의 정신(廷臣)을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에 모두 몰아 넣었는데, 그 어구(語句)가 매우 패려하고 마음씀이 아름답지 아니하여 여정(輿情)이 놀라고 분통해 하고 있습니다. 삼가 연교(筵敎)를 보건대 이미 그의 정상(情狀)을 밝게 간파하신 것 같았는데, 대소(臺疏)를 되돌려 주어서 단지 뒷 폐단만 불어나게 하였으니, 우리 전하께서 공평하게 듣고 골고루 보시어 당시의 현상을 진정케 하고 지나친 붕당(朋黨)을 타파하시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어 방비를 엄하게 더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에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알지 못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런 소장(疏章)을 올리니 되돌려 주라."
하였다.
5월 19일 기해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호남(湖南)의 여러 죄인을 친국(親鞫)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과 판의금(判義禁) 송인명(宋寅明)이 참국(參鞫)하였다. 이위(李葳)에게 묻기를,
"무신년270) 흉역(凶逆)의 흉서(凶書)는 옛날까지 통하여 보아도 없었던 바이다. 감란록(勘亂錄)을 이미 반포한 뒤에 상도(常道)를 지키는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어찌 감히 이런 마음을 가슴속에 싹틔우겠느냐? 더구나 오늘날 남원(南原)의 일은 너의 무리들이 사사로운 다툼으로 인하여 사람을 무함하려고 이렇게 몹시 흉악한 상황을 만든 데 불과한 것이 이미 본도(本道)의 사장(査狀)에서 다 알았다. 네가 이른바 흉서(凶書)를 썼다는 김윤귀(金潤龜)의 필적(筆蹟)이 이미 괘서(掛書)한 필적과는 서로 비슷하지도 않으니, 역시 수상한 데 관계된다. 처음부터 뇌물을 받고 최두정(崔斗挺)과 결탁한 자도 곧 너였으며, 이 일을 미봉(彌縫)하려고 서찰(書札)을 왕복한 자도 역시 너였으니, 흉서에 결단코 불참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정황을 안다고 알린 것이 더욱 극히 흉악하다. 관아(官衙)에 알릴 뜻이 있으면 어찌 당연히 알릴 것을 알리지 아니하고 최두징과 친밀히 남모르게 왕복하면서 계략을 꾸미다가 기찰(譏察)에 붙잡혔느냐?"
하니, 이위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곧 이단장(李端章)의 재종질(再從姪)입니다. 신이 신자(臣子)가 되어 어찌 감히 괘서할 마음을 싹틔웠겠습니까? 4월 12일에 최두징의 일을 위하여 감사(監司)와 만나 보기를 요청하였으나 순찰(巡察) 길이어서 볼 수 없었으며, 또 남원에 변고가 생겨 감사가 한 죄인을 붙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에 심히 놀랐습니다. 최두징이 신이 감사를 만나 보지 못한 것을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내가 남원에 사람을 보냈는데 멀지 않아서 일이 생길 것이니 이것을 영문(營門) 문지기에게 알림이 옳을 것이다.’ 하기에, 신이 그 까닭을 묻자, 최두징이 말하기를, ‘이것이 괘서한 일이다. 우리 집에 있는 훈장(訓長) 김윤귀는 문필(文筆)을 할 수 있다.’ 하므로 신이 또 깜짝 놀라서 그 사람의 형상을 자세히 알아서 관아에 알리려고 최두징의 집에 가니, 과연 훈장이 있었습니다. 신이 식사를 하면서 묻기를, ‘남원의 괘서는 신자로서 차마 듣지 못할 일이다.’ 하니 그 사람의 낯빛이 변하면서 나갔다가 오후에 또 돌아와 신과 말하였는데, 신이 어느 누구인지를 알려고 통성명(通姓名)을 요청하였으나 그 사람이 단지 성(姓)이 김(金)이라고만 말하기에 억지로 물으매, ‘이름이 윤귀(潤龜)’라고 말하였습니다. 22일에 신이 집에 돌아와서 감사를 보고 알리려고 한즉 감사가 남원에 갔었고 25일에는 감영(監營)에 돌아왔는데, 또 영문 문지기에게 저지당했으며 5월 2일에 붙잡혔습니다."
하였다.
이위(李葳)를 최두징(崔斗徵)과 면질(面質)시켰다. 이위가 말하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괘서(掛書)케 하였다."
하니, 최두징이 말하기를,
"네가 20일에 처음으로 우리 집에 이르러 소지(所志)를 써서 길희징(吉喜徵)에게 주어 남원(南原)의 순찰사(巡察使)가 도착한 곳에 드리게 하였는데 길희징이 마령(馬嶺)에 이르러 최구(崔璆)를 만나고 돌아왔다."
하였다. 이위가 말하기를,
"초나흗날에 너의 집에 간 것은 너의 옥사(獄事)를 위함이었는데 순찰사가 순찰(巡察)을 떠났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너의 집에서 사흘을 머무르면서 스스로 흉서(凶書)를 지어서 김윤귀(金潤龜)로 하여금 쓰게 한 것을 네가 참견(參見)하지 않았느냐?"
하니, 최두징이 말하기를,
"비록 머리를 벤다 하더라도 초나흗날에는 네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너는 20일에 비로소 왔었다."
하였다. 이위가 말하기를,
"대개 이 글을 지은 것은 네 형을 옥(獄)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네 집에서 짓게 된 연유이다. 나는 네 일을 하다가 죽게 되었다."
하니, 최두징이 말하기를,
"흉서는 피차(彼此)가 다 죽는 일인데 내 형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네가 만약 네 집에서 스스로 지어서 걸었다면 알 수 없으나 언제 일찍이 우리 집에서 지어서 나로 하여금 걸게 하였느냐?"
하였다. 이위가 말하기를,
"초이렛날 네가 글을 가지고 돌아간 뒤 초아흐렛날에 네가 종을 보내어 나를 전주(全州)로 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 최두징이 말하기를,
"종을 보낸 것은 네가 감사(監司)를 만나 보고 우리 형님의 옥사(獄事)를 속히 결정지우는가에 대하여 탐지하려고 한 데 불과하다."
하였다. 이위가 말하기를,
"초사흗날 내가 감사를 기다리다가 이롭지 않게 생각되어 초나흗날 너의 집에 갔었다."
하니, 최두징이 말하기를,
"내 집이 진안(鎭安) 백여 리 땅에 있는데, 네가 어찌 즉시 올 수 있느냐?"
하자, 이위가 말하기를,
"해가 한창 긴데 어찌 가지 못하겠느냐? 나는 남의 곁방을 빌려서 살고 있어서 이목(耳目)이 번거롭고 소란하기 때문에 너의 집에서 〈흉서를〉 지은 것이다."
하니, 최두징이 말하기를,
"내가 전주에서 너를 보고 성을 내니까, 네가 말하기를, ‘남원의 괘서가 나온 것은 최구에게 밀어 핑계하면 저절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길희징으로 하여금 걸게 하겠다.’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나를 무함하느냐?"
하였다. 길희징(吉喜徵)을 문초(問招)하니, 길희징이 공초하기를,
"신은 바로 야은(冶隱)271) 의 10대 손으로서 금산(錦山)에 삽니다. 신의 오촌 고모부(五寸姑母夫) 이예(李預)가 역시 이위(李葳)에게 집안이 된다 하기 때문에 신이 이위의 글을 가지고 전주에 갔을 뿐이고 괘서한 것은 이위가 당연히 그 종을 시켜서 하였지, 어찌 신으로 하여금 걸게 하겠습니까? 신이 만일 보았다면 어찌 잡아 바치지 않았겠습니까? 단지 이위의 종이 돈을 받으러 최두징의 집에 내왕하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하므로, 길희징에게 형(刑)을 가하였으나 앞의 공초와 같았다. 이위와 김윤귀(金潤龜)를 면질시키자, 이위가 밥을 먹을 때 낯빛이 변했던 일과 최두징의 집에서 흉서를 썼다는 일을 말하니, 김윤귀의 대답에는 단지 ‘네가 어찌 이렇게 근거없는 말을 할 수 있느냐?’ 했을 뿐이었다. 다시 이위에게 묻기를,
"남원의 일이 그 근본은 비록 최두징(崔斗徵)의 피수(被囚)에 있겠으나 네가 그 사이에서 담당하여 이런 흉서를 지어 최구를 무함하려 했으니, 이미 간악(奸惡)한 데 관계된다. 그리고 흉악한 격문(檄文)을 네 필적(筆蹟)과 비교하니 역시 서로 비슷하였고, 흉악한 격문 가운데 ‘대명후(大明後)’라는 세 글자를 곧 무신년272) 에도 없던 바인데, 너의 책력(冊曆)에 청(淸)자를 고쳐 명(明)으로 한 것도 뜻이 또한 같다. 그 연호(年號)를 피한 것은 혹시 유자(儒者)가 한 짓이기도 하겠으나 두 글자가 서로 부합하는 것도 또한 이상한 일이다. 사실대로 고하라."
하고, 한 차례 형신(刑訊)하니, 이위가 공초(供招)하기를,
"지금 세 글자를 보니, 과연 괘서 중에 쓴 필적으로서 신이 4월 5일에 스스로 지었고 김윤귀가 쓴 것입니다. 흉서(凶書)의 자구(字句)를 비록 외울 수는 없으나 국세(國勢)가 외롭다는 뜻과 흉서의 연월일(年月日) 밑에 쓴 원수(元帥) 정(鄭)과 원수 위에 쓴 영남(嶺南)이란 글자는 내 마음은 배반하지 아니하며 내 말은 속이지 않는다는 구절이 기억납니다. 하단(下端)에 있는 오오(五午)란 글자는 5월 단오(端午)를 말한 것입나다."
하였다. 이위를 최두징과 면질시키니, 최두징이 말하기를,
"네가 감영(監營)에 들어가서 부채 하나와 쌀 네 말을 얻어가지고 돌아와 나에게 자랑하였었다."
하고, 이위는 말하기를,
"네가 ‘최구의 동생이 무신년에 죽었으니, 이번 일을 최구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좋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하였다. 다시 최두징을 신문(訊問)하고 한 차례 형(刑)을 가하니, 최두징이 공초하기를,
"이위가 신에게 이르기를, ‘만일 돈 1백 냥만 준다면 내가 최구를 무함하여 네 형을 구출할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괘서에 관한 일을 최구에게 돌리려 한 것입니다. 4월 12일에 이위를 만나서 물으니, 이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남원 백복사(百福寺)에 괘서했다.’ 하였습니다. 3월 그믐께 이위가 〈흉서를〉 자기가 짓고 자기가 써서 신에게 주기에 초닷샛날 백복사에 가니 절에 동불(銅佛) 세 개가 있으므로, 그 글을 가운데 있는 부처의 귀 위에 걸고 작은 흙덩이로 눌러 놓았습니다."
하자, 다시 이위를 신문하여도 전과 같이 공초하였다. 다시 최두징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제 형의 살옥(殺獄)에 유진기(兪振起)가 같이 들어갔는데 유진기는 곧 이예(李預)의 사위입니다. 신이 유진기의 집에서 이예를 만났는데, 말하기를, ‘괘서에 관한 일 때문에 남원에서 온다.’ 하므로, 신이 묻기를, ‘이것이 이위의 일인가?’ 하니, 이예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습니다. 흉서는 이예가 지었고 이위가 썼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신이 신의 형의 옥사(獄事)를 위하여 이위와 이예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예에게 물어 본다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경기 감영(京畿監營)의 죄인 조석관(趙錫觀)과 우춘(遇春)·해룡(海龍) 등을 석방하라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통영(統營)의 관노(官奴) 우춘·해룡이 걸어서 천안(天安)에 이르러 조석관의 행동이 수상한 것을 보고 시험삼아 묻기를, ‘근래 남원(南原)에 괘서(掛書)한 변고가 있었는데 그대가 혹시 그 사람이 아닌가?’ 하니, 조석관이 놀라고 당황하며 안색이 변하자, 우춘 등이 이것으로써 진위현(振威縣)에 알려 왔으므로,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로 주달하였는데, 여러 번 캐어 조사하였으나 끝내 단서가 없으므로 임금이 조석관은 특별히 석방하고 우춘·해룡 등은 형추(刑推)하여 방송(放送)할 것을 명하였다.
사헌부 【대사헌 조최수(趙最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역적(逆賊) 민관효(閔觀孝), 해보(海普)의 7촌(寸)까지 한정하여 방송(放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0일 경자
평안도 개천(价川)·덕천(德川)·구성(龜城)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어유봉(魚有鳳)을 집의로, 안상휘(安相徽)를 장령으로, 한덕량(韓德良)을 지평으로, 이주진(李周鎭)을 헌납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정언으로, 조석명(趙錫命)을 공조 참판으로, 김약로(金若魯)를 부교리로, 정형복(鄭亨復)을 수찬으로 삼았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의 덕(德)을 행장(行狀)에 기록하는 것은 체단(體段)이 매우 중하고 신축년273) 의 역적을 주토(誅討)한 것은 처분이 지극히 엄한 것인데, 전부 삭제해 없애어 성대한 덕행(德行)을 드러나지 않게 하였으므로 신이 과연 대략 논의하였습니다만, 시장(諡狀)274) 에 이르러서는 행록(行錄)과는 다름이 있고 당초에 빼버리라고 명한 것도 성상께서 가지신 뜻이 있을 것이므로 신의 상소가 여기에는 제급(提及)함이 없었으나, 시장을 지은 신하가 함부로 맡고 대신 담당한 것은 이 어찌 진실로 뜻밖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소장(疏章) 끝에 말한 사신(四臣)의 일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이미 밝게 아시고 분명히 유시(諭示)하시어 앞뒤에 있었던 임금의 말씀이 해나 별처럼 빛났었는데, 대저 네 번의 차자(箚子)에 대하여 죄주지 않는다면 네 신하를 혹은 신설(伸雪)하고 혹은 신설하지 않은 것은 실로 반은 올라가고 반은 떨어져 내려간 결과가 되어 있으므로 신이 이미 빠진 것을 주어 집는 책임이 있기에 현명하신 성상을 위하여 한번 진달한 것인데, 엄교(嚴敎)를 거듭 입고 오늘날 효상(爻象)으로 의심을 받았으니,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하건대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살펴보지 않았다.
전(前) 부제학(副提學) 이병태(李秉泰)가 졸(卒)하였다. 이병태는 청렴 결백함이 뛰어나고 몹시 가난하면서도 스스로 굳게 지조(志操)를 지켜 조금도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해어진 옷과 담박한 음식으로 지냈고 지방의 수령(守令)으로 있을 때도 역시 집에 있을 때와 같았으며 숙수(菽水)를 이어대지 못하였는데도 그의 지조는 변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본 천성(天性)이 그랬던 것이다. 문학(文學)과 인망(人望)이 같은 동류보다 뛰어났으나 정미년275) 이후로 뜻을 굽혀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다가 영남(嶺南) 고을에 한번 쫓겨나 수토(水土)에 익숙하지 못하여 마침내 이로써 죽게 되었으니 애석하다. 뒤에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살아서는 청백(淸白)한 지조가 있었고 죽어서는 시체를 염(殮)할 기구가 없었으며 또 늙은 어미가 기아(飢餓)를 면치 못한다.’고 아뢰어 고(故) 감사(監司) 한지(韓祉)의 전례에 따라 그 어미를 주휼(賙恤)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애석하게 여기며 한참 있다가 구휼(救恤)하는 은전(恩典)을 베풀고 증직(贈職)하며 장례를 치르게 하라 명하였다.
5월 21일 신축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헌부 【지평 유건기(兪健基)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이례(二禮)를 이미 형추(刑推)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다른 죄인을 하막(下幕)할 때에 혼동하여 하막하였으니, 청컨대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해당 낭관(郞官)을 나문(拿問)하소서."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나문하는 것은 지나치다. 당상은 추고하고 낭관은 종중 추고하라."
하였다. 사간원 【 헌납 이주진(李周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포청 죄인(捕廳罪人) 신필대(申必大)를 군문(軍門)에 효시(梟示)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고 국청(鞫廳)으로 옮겨 보내어 엄하게 국문하여 처단케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미 장문(杖問)하라 시켰다. 효시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뜻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또 생각한 바로써 이례를 포청에 회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논하면서 국청에 이송(移送)하여 캐어묻기를 청하고 대신(大臣)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우윤(右尹)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세 가지로서 성상의 의지를 분발할 것과 권세와 기강(紀綱)을 총괄할 것과 명예와 절개를 권면케 할 것인데, 오늘날의 일은 세 가지 어려움과 세 가지 다름이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만이 은혜를 베풀고 임금만이 위엄을 쓸 수 있습니다. 대저 권세란 것은 형체가 없는 물건으로서 한 세상이 붙좇고 한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은 곧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붕당(朋黨)은 옛날의 붕당과 달라 단지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얻은 다음에는 그것을 잃을까 걱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실로 얻은 다음에 그것을 잃을까 걱정한다면 총애(寵愛)를 위에 구하고 권세를 아래에 부려 여러 방면으로 벌여 놓고 하루 종일 경영하는 것이 도당(徒黨)과 자손(子孫)을 위하는 계획에 불과하고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세(形勢)가 어찌 돌아가지 않겠으며 권세가 어찌 편중되지 않겠습니까? 형세가 이미 돌아가고 권력이 이미 편중하게 되면 이익을 탐하는 자가 어찌 붙좇지 않겠으며 외롭고 약한 자가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래 사대부(士大夫)의 명망(名望)과 행의(行誼)가 흔적도 없이 되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일을 결정짓는 데 옳고 그름을 명백하게 가리지 않고 겨우 몸을 붙이고 살아가며 시속(時俗)을 따르면서 세월을 보내고, 아래에 있는 사람은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하는 것을 뛰어난 재주로 여기면서 빌붙는 것을 잘하는 일로 여겨 잠깐 사이에 종적을 흐리게 하는 등 대단히 기이하고 괴상한 여러 가지 자태(姿態)를 다 갖추고 있으니, 전하께서 비록 해와 달이 자그만한 틈에도 빛을 비치는 밝음이 있더라도 어찌 능히 이런 광경을 다 살필 수 있겠습니까? 설사 위급한 일이 있다 해도 이런 무리들은 모두 적(賊)을 바라보고 항복할 사람들이니, 치평(治平)하여 나라에 일이 없다고 이런 무리를 양성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소장(疏章)이 들어오자 머물러 두고 ‘면계(勉戒)한 바가 절실하니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라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임금이 몸소 황재숙(黃再淑) 등을 인정문(仁政門)에서 국문(鞫問)하였다. 처음에 역적 황진기(黃鎭紀)가 망명(亡命)한 지 이미 여러 해를 지났는데 구포(購捕)해도 잡지 못하였다. 황진기의 삼종(三從) 친척 황재숙이 황진기의 계집종 이례(二禮)를 꾀어 그의 딸 늦매(莻梅)를 궐내(闕內)에 들여보내어 방자 나인(房子內人)을 삼았으니, 방자 나인은 곧 나인(內人)의 종이다. 이보다 앞서 액외(額外)의 나인을 조사해 내보낼 때에 이미 사출(査出)되었는데 대소(臺疏)로 인하여 포청(捕廳)에서 캐어 신문하였다. 이에 이르러 판의금(判義禁)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역적 황진기의 계집종 이례는 단서(端緖)가 없지 않으나, 포청에 회부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국문하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황재숙의 공초에 황진기의 행적에 대해 상고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으니 황재숙도 아울러 궐내로 올려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황재숙에게 신문하기를,
"황진기의 아들이 붙잡힌 다음날 황진기가 그의 종 수이산(戍伊山)의 집에 왔었는데, 그의 집안인 황유(黃鎏)·황선(黃銑)·황윤(黃鈗)·황재흥(黃再興)·황재엽(黃再曄)·황재섬(黃再暹) 등이 서로 모여 닭을 잡고 개를 삶아서 그의 아들이 체포된 것을 위로하였고, 황진기가 갈 때는 수이산의 해어진 옷을 갈아입었다는 말은 이례의 공초와 같으나 앞뒤의 사상(事狀)을 사실대로 바로 고하라."
하니, 황재숙이 공초하기를,
"황진기가 왕래했다는 말은 기석(起石)에게 들었습니다."
하였다. 한차례 형문(刑問)하고, 이례와 황재숙을 면질(面質)시키니 이례가 말하기를,
"재작년 3월에 네가 우리 집에 와서 말하기를, ‘너의 여식(女息)을 어찌 궐내에 들여보내어 나인을 삼지 않느냐?’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어찌 그것이 쉽겠는가?’라고 하였다."
하니, 황재숙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네 집에 가겠느냐? 나는 네 집을 알지 못한다."
하자, 이례가 말하기를,
"네가 어찌 내 집이 요금문(曜金門) 바깥 원동(院洞)의 황진기 집 앞에 있는 것을 모르느냐? 네가 나에게 말하기를, ‘네 딸이 궐내에 들어가면 너에게나 나에게 모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 딸을 만일 들여보내면 혹시 사건이 생길까 두렵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신의 딸이 황진기의 비자(婢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여염집의 비자도 모두 궐내에 들어가는데 네 딸을 어찌 들여보내지 못하겠는가? 다가오는 장래에 저절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만일 2,3년만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니, 황재숙이 말하기를,
"궐내에 들어갔다는 말을 나는 하지 않았다."
하였다. 이례를 신문하고 한 차례 형문(刑問)하니, 이례가 공초하기를,
"황재숙이 말하기를, ‘수삼년 후에 역적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네 딸을 궐내에 들여보내어 방자 나인을 삼는다면 다가오는 장래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진기는 무신년276) 다음해에 그 종의 집에 와서 그 일족(一族)과 서로 모여 이야기 하기를, ‘수삼년 후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서 잇따라 그 처(妻)의 가락지와, 의복을 가지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갔다는데, 이것은 수이산에게서 들었습니다. 황진기의 자식들이 수원(水原)에 있기 때문에 황진기가 말하기를, ‘2, 3년 후에는 당연히 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데, 황진기가 지난해에 수원에 왔었다는 것도 이 또한 수리산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기석(起石)을 신문하니, 기석이 공초하기를,
"황진기가 금년 4월에 황칠곡(黃漆谷)의 집으로부터 신의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갔는데, 승복(僧服)을 입고 머리를 깎았으며 이내 가야산(伽倻山)으로 갔습니다. 보리밥과 무우김치를 먹였는데,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고기를 먹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2경(更)에 왔다가 4경에 돌아가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포(內浦) 가야산의 백암사(白巖寺)로 향한다.’고 하였으며, 그때 황칠골은 집에 있었고 이름은 재징(再徵)이었습니다. 황진기가 스스로 말하기를, ‘양식을 구할 계획으로 재궁(齋宮)의 승려(僧侶)라고 일컫고 장차 흥해(興海)로 간다.’고 하였는데, 흥해 고을의 원[倅] 황택(黃澤)은 곧 황칠곡의 아들입니다. 그 승려는 칭호(稱號)를 떠돌아다니는 법주(法主)277) 라 하면서 머리에는 승건(僧巾)과 삿갓을 쓰고 베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짚신을 신었습니다."
하였다. 수이산을 신문하니, 수이산이 공초하기를,
"신은 황진기의 노자(奴子)로 황진기의 농막(農幕)에 살았는데, 무신년 8월에 황진기가 신의 집에 와서 이틀을 머물다가 신의 옷을 빌어 입고 갔으며 또 전립(氈笠)을 썼는데, 한집안으로 와서 모인 자들은 연산(連山)의 황생(黃生)과 부평(富平)의 황생으로 모두 동네(洞內)에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니, 기석과 수이산을 포청(捕廳)으로 이송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례를 신문하니, 이례가 공초하기를,
"황재숙이 신의 귀에다 대고 은밀히 말하기를, ‘황진기가 나갈 때에 서로 의논하였는데, 만일 몇 년을 지나 패군(敗軍)이 다시 일어나면 나와 너는 모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딸이 궐내에 들어간 것은 궐내의 이야기를 더듬어 보려 한 것인데, 혹은 황진기를 뒤쫓아가서 잡는다거나 혹은 황진기의 족속(族屬)을 모두 죽인다는 말이었습니다. 궐내에 들어가게 된 경로는 취라치[吹螺赤] 이성(李姓)의 사내를 통해 수라간(水剌間)의 나인(內人)에게 들여보내어 9월에 방자(房子)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황재징을 신문하니, 황재징이 공초하기를,
"신은 연달아 서울에 있다가 작년 8월에 수원 묘하(墓下)로 갔고, 금년 4월에는 재사(齋舍)에 나가 피병(避病)하였으나 이내 여역(癘疫)을 앓다가 조금 나은 지 겨우 보름이 되었습니다. 황진기를 만나 본 일이 있다면 임금의 녹(祿)을 먹으면서 어찌 잡아들이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기석의 말은 천만 맹랑합니다."
하였다. 황재숙을 이례와 면질시킨 뒤에 한 차례 형을 가하였으나 전과 같이 공초하였다. 황재징과 기석을 면질시켰는데, 기석이 말하기를,
"4월 21일에 황진기가 어찌 네 집에 왕래하지 않았느냐?"
하니, 황재징이 말하기를,
"황진기가 네 집에 왔다가 우리 집으로 옮아 간다고 이르더냐?"
하매, 기석이 말하기를,
"네 집에서 우리 집으로 왔다고 말했다."
하니, 황재징이 말하기를,
"우리 집으로부터 왔다는 말은 더욱 거짓말이다. 네 형도 또한 아느냐?"
하자, 기석이 말하기를,
"내 형도 같이 보았다."
하니, 황재징이 말하기를,
"만일 너의 형 기선(起先)을 초문(招問)하여 한결같이 네 말과 같다면 내가 발명을 못할 것이다. 네 말은 모두가 허망(虛妄)하다."
하였다.
5월 23일 계묘
전라도(全羅道)에서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자가 1천 8십 4인이었고 무주(茂朱)에는 우박이 내렸다.
야대(夜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이때에 오랫동안 가물었는데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어 비가 조금 내렸으므로 임금이 제관(祭官)들에게 차등있게 활과 말을 내렸다.
5월 25일 을사
경상도(慶尙道)의 진휼장(賑恤場)에 나아간 기민(饑民)이 17만 9천 8백 65명이었고, 떠도는 거지가 1만 1천 6백 85명이었으며, 사망이 1천 3백 26명이었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이주진(李周鎭)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아! 3년 동안의 대단한 가뭄에 8도(道)가 흉년이 들어 하늘과 인심(人心)이 화합하지 아니하고 백성과 나라가 모두 병들었습니다. 이와 같고서 위태롭지 않은 적은 옛날에도 일찍이 없었습니다. 대저 편안하고 위태로운 기틀은 ‘공사(公私)’ 두 글자에 달려 있는데, 마음속에 혹시 계교(計較)함이 있거나 정사(政事)에 혹시 변화가 있거나, 혹은 밝은 데 지나쳐 작은 것을 살피는 데로 쏠리거나, 혹은 스스로 과대(誇大)하게 생각하여 아랫사람을 경시(輕視)하기 쉬워서 중천(中天)에 뜬 해와 달처럼 사람들이 함께 보도록 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곧 사(私)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공과 사를 혼동하고 크고 작은 것이 전착(顚錯)되어 그물의 눈은 벌렸어도 벼리줄[綱]을 빠뜨리고 말단의 일은 시행하면서 근본은 빠뜨리고 있으며, 근일에 이르러서는 또 다스림에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의지가 처음과 같지 않은가 하면, 형식과 본질(本質)이 서로 변하고 늦춤과 급하게 할 것을 뒤바꾸어 일을 더는 것으로 정치를 단속하는 근본을 삼고 말을 지식(止息)하게 하는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요체로 삼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래 사대부(士大夫)의 풍채(風采)가 점점 위축되어 순종하는 말만 날마다 위에 들리고 바로잡는 풍습이 이미 아래에서 끊어졌으며, 전하께서도 또 일을 좋아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배척하고 알력한다고 다스리기 때문에 일이 성상의 몸에 관계되면 마음을 거슬려서 노여움을 살까 하는 두려움이 대략 많고 말이 반대편에 관계되면 사심을 품었다는 주토(誅討)를 당할까 겁을 내어 허위(虛僞)의 풍습이 불어나고 직절(直截)의 소리가 사라졌으므로 바깥에서 볼 때는 비록 눈앞에 일이 없는 것 같으나 뱃속 가득하게 다 곪아서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면 말지 않을 것과 거의 같으니 이와 같고서도 하늘이 어찌 성내지 않으며 백성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황재흥(黃再興) 등은 모두 황진기(黃鎭紀)의 지친(至親)으로 개를 잡고 닭을 삶은 정상(情狀)이 낭자하게 알려지고 있으니, 청컨대 일체로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역적 황진기의 간 곳을 조사해 내게 하소서. 역적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급하게 서두르는 것이 마땅하고 늦추어서는 안될 것이니 청컨대 재계(齋戒)에 구애하지 말고 엄하게 국문하여 실상을 구명하게 하소서. 강계(江界)·흥양(興陽) 두 고을의 원[倅]은 욕심이 많고 비루하며 잔인하고 졸렬하니 아울러 개차(改差)시키소서. 전(前) 부사(府使) 어필원(魚必遠)이 도하(都下)의 우물물을 두루 길어다가 그의 문둥병 부스럼[癩瘡]을 씻은 다음 도로 그 부스럼 씻은 물을 몰래 본래의 우물에 쏟아부었으며, 소 내장[牛腸]을 긁어내고 그 속에 몸을 넣어서 부스럼의 충(蟲)을 나오게 한 다음 그 고기를 푸줏간에 팔았으니 일이 매우 추하고 더러우며 독(毒)을 옮기는 데 그 뜻이 있었습니다. 마땅히 사변(徙邊)의 형률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피해를 끊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황가(黃哥)의 여러 족속들을 규포(窺捕)하는 일은 그대로 실시하고 어필원의 일도 역시 그대로 실시하라."
하였다.
장령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쓸데없는 관원(官員)과 쓸데없는 비용을 제감(除減)하여 재해를 걱정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정치를 하며, 정원 외에 궁인(宮人)이 더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서 궁금(宮禁)의 방도를 엄숙히 하고 삼남(三南)의 포(布)를 바치는 군액(軍額)을 감하여 도망하고 물고(物故)되어 보충하기 어려운 폐단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고, 또 어필원(魚必遠)이 악질(惡疾)을 치료하기 위하여 도민(都民)에게 해독을 옮긴 죄를 논하여 먼 지방으로 물리칠 것을 청하니, 우비(優批)를 내렸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이진망(李眞望)을 동경연(東經筵)으로, 황정(黃晸)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5월 26일 병오
주강(晝講)을 행하여 《예기(禮記)》를 강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송진명(宋眞明)이 문의(文義)에 따라 아뢰기를,
"신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윤동원(尹東源)과 어유봉(魚有鳳)을 대각(臺閣)에 비의(備擬)한 것은 형식에 부응하여 숫자를 채운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정성으로 나오게 힘쓰시어 기필코 조정(朝廷)에 초치(招致)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정성이 얕은 까닭이니 마땅히 스스로 반성할 처지이다. 어려서 배우고 장성하여 실행하는 것은 이것이 본래 유자(儒者)의 일인데, 근래 유자들이 일체 세상에나오지 않는 것을 고상한 취지로 삼기 때문에 위에 있는 사람은 기필코 나오도록 힘쓰고 아래에 있는 사람은 나오지 않기로 작정하므로 도리어 군신(君臣)이 서로 버티는 단서가 되어 있으니 이것이 몹시 난처하다."
하고,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심육(沈錥)을 음관(蔭官)의 자리에 의망(擬望)해서 경연(經筵)에 출입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이진(權以鎭)이 신에게 사사로이 편지를 보냈는데, ‘저 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연변(沿邊)에 모여 있는 것이 거의 수십 군데가 넘으니 이것은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로서, 위원 군수(渭原郡守) 권경(權儆)이 도임(到任)한 후에 특별히 금단(禁斷)을 더하자, 호인(胡人)들은 싫어하고 꺼리어 다른 지경으로 갔으나 우리 나라의 간민(奸民)으로서 저 사람들과 체결(締結)한 자들은 그의 엄하게 단속하는 것을 원망하여 기필코 〈화근(禍根)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는지라, 지금 이들을 나문(拿問)하는 것은 그의 소원을 적중케 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두서너 달 늦추어서 그의 효과를 이루도록 책임지운 뒤에 처리하여도 마땅함을 잃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미 나문 정죄(定罪)하겠다는 것으로써 저 나라에 이자(移咨)하였으니 사체(事體)에 있어서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 뒤에 좌의정 서명균과 병조 판서 윤유(尹游) 등이 연석(筵席)에서 그의 일을 잘 처리함과 장략(將略)이 있음을 아뢰면서 가자(加資)278) 의 은전(恩典)을 베풀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때에 큰 비가 내렸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가뭄 끝에 때맞춰 큰 비가 내리니 백성의 일이 다행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정한 마음이 없어서 조금만 가물면 죽음이 목전(目前)에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잠깐 비가 오면 전혀 잊고 태평하게 여긴다. 어제 밤에 뜰 가운데 나가 섰는데 동남쪽에 검은 구름이 있고 빗방울이 낯에 떨어졌는데, 비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여 근심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에 빗소리를 듣고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지금 비록 비는 얻었으나 나라의 살림살이는 회복할 길이 없으니 묘당(廟堂)에서는 마땅히 재정을 얻어낼 방도를 미리 강구하여 경비를 변통해 세우도록 해야 할 것이고, 눈 앞에 비를 얻었다 하여 목말라 하던 그 생각을 조금도 해이케 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난번에 송인명(宋寅明)이 전포(錢布)를 잘 요리해 처리할 것을 진달한 바가 있었으니, 이런 사람들과 묘모(廟謨)를 강구하여 후일에 아뢰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자, 서명균이 대답함이 없이 나왔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다시 황재징(黃再徵)을 신문(訊問)하니, 황재징이 공초하기를,
"기석(起石)·기선(起先)·수이산(戍伊山)·금산(金山)과 황부(黃溥)의 생질(甥姪) 신진청(申震淸)이 황진기(黃鎭紀)의 집일을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신년279) 황부의 일이 있은 후로 신이 ‘황진기의 토지(土地)를 싼 값으로 마구 팔아서 황진기의 딸을 시집보낸다.’는 말을 듣고 황진기의 서울에 있는 계집종 이례(二禮)를 불러 물으니, 말하기를, ‘신진청이 수이산의 집에 와 있으면서 황진기의 집일을 주장하여 황진기의 딸을 혼인하는 데 안성(安城)에 망명한 역적 고가(高哥)와 성혼(成婚)하려 하자 황진기의 딸이 도망해 나갔기 때문에 신진청이 직접 뒤쫓아가 찾아내어 마침내 혼인을 지내기에 이르렀다.’ 하므로 신이 듣고 몹시 놀랐습니다. 신해년280) 에 황진기의 아들이 포청(捕廳)에 붙잡혔었는데 옥바라지를 잘못한다 하여 포청에서 이례를 나무라니, 이례가 신에게 와서 말하고 황부가 만들어 둔 석물(石物)을 팔아서 옥바라지하는 밑천을 장만하려 하므로 신이 허락하였습니다. 대개 황부가 죄로 죽은 뒤에 증조(曾祖)의 봉사(奉祀)를 신에게로 옮겼기 때문에 이러한 물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신진청은 문의(文義)에 살았으니 기석의 말은 천만 맹랑합니다."
하였다. 황재숙(黃再淑)과 황재흥(黃再興)을 면질(面質)시키니, 황재숙이 말하기를,
"무신년에 네가 수이산의 집에 가서 황진기 등의 여러 집안과 모였었다는 말을 네 어찌 나한테 와서 전하지 않았느냐? 이때는 곧 황진기의 아들 황일웅(黃一雄)이 붙잡혔던 때였다."
하니, 황재흥이 말하기를,
"무신년 3월 17일에 내가 홍주(洪州) 땅에 피란하였는데 그 달 19일에 황일웅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으며 황진기는 원래 서로 보지 못했다."
하자, 황재숙이 말하기를,
"황진기가 전립(氈笠)을 빌려 쓰고 와서 모였다는 말을 네가 어찌 말하지 않았느냐?"
하니, 황재흥이 말하기를,
"이 말은 황윤(黃鈗)에게서 듣고 그대로 너에게 전달한 것이지 내가 어찌 황진기와 모여 만났느냐?"
하였다. 황재엽(黃再曄)을 국문하니, 황재엽이 공초하기를,
"무신년 3월에 황진기가 망명(亡命)하고 그 어미가 연좌(緣坐)·정배(定配)되었는데, 이 뒤에 황진기가 왕래했다는 말은 절대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직산(稷山)에 있는 수이산의 집은 양성(陽城)의 신의 집과의 거리가 10여 리가 되는데, 신과 같이 곤궁하여 지탱해 가지 못하는 일가를 어찌 모임에 초청할 일이 있겠습니까? 황진기가 신에게 팔촌(八寸) 친족이 되나 그가 이미 역모를 범하여 망명하였는데, 신이 어찌 차마 망명한 역적과 같이 모이겠습니까?"
하였다. 황재섬(黃再暹)을 신문하니, 황재섬이 공초하기를,
"무신년 3월에 큰 나루 건너편에 피란하였다가 20일이 지나 비로소 돌아왔으니 황진기가 왔는가 안왔는가를 신은 전연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황재흥을 신문하니, 황재흥이 공초하기를,
"황보가 죽은 뒤에 신의 집 근처에 초솔하게 장사를 지냈는데, 황진기는 아비의 초상(初喪)에 달려 오지도 않고 망명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이 어찌 차마 황진기와 모임을 함께 하겠습니까? 이례는 황가(黃哥) 집에 내려오는 종으로서 주인 집의 족속을 해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런 무함(誣陷)을 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재차 황재징을 신문하니, 황재징이 공초하기를,
"기석(起石)이 포청(捕廳)에 바친 신의 문적(文跡)은 분명히 위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이 드러날 것을 겁내어 신의 몸을 무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례에게 석물을 팔라고 허락한 것은 황부가 만들어 둔 석물을 선산(先山)에 쓰는 것은 실로 더럽게 여겼기 때문에 팔아버리라는 뜻을 문서로 작성해 주었고, 황진기의 가사(家事)를 주관했다는 일에 있어서는 천만 맹랑합니다."
하였다. 기선(起先)을 신문하니, 기선이 공초하기를,
"금년 4월 21일 밤 2,3경(更)에 황진기가 충청도로부터 큰 나루를 건너 당진(唐津)을 경유하여 왔다면서 삿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신의 집에 왔는데, 황진기가 덕산(德山)의 가야산(伽倻山) 백암사(白巖寺)에 살고 있는지라 장차 산골짜기를 거쳐 들어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삿갓을 벗었을 때 보니 머리를 깎은 것 같았으며, 저녁밥은 신의 집에서 얻어먹고 첫새벽에 돌아갔으므로 오는 길에 들렀던 곳과 갈 때에 향하는 곳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다시 황재징을 신문하니, 황재징이 공초하기를,
"신은 기석의 형제가 마음이 반드시 같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기선의 말이 또 이와 같으니, 반드시 이것은 마음을 합하여 신을 모해(謀害)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황진기가 왕래한 상황은 신이 실제로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늦매(莻梅)를 신문하니, 늦매가 공초하기를,
"취라치(吹螺赤) 이가(李哥)가 늘 신의 집에 왕래했는데, 신의 어미가 말하기를, ‘나이 어린 여식(女息)을 입히고 먹일 수 없다.’고 하니, 이가가 말하기를, ‘만일 나인(內人)의 방자(房子)가 된다면 입고 먹는 것은 풍족할 것이다.’하였으므로, 신의 나이 열 세 살에 이가와 더불어 요금문(曜金門)을 경유하여 들어갔더니, 구월(九月)이가 차비문(差備門)에 와서 기다렸다가 신을 인도하여 들어가 수정당(守靜堂) 이상궁(李尙宮)의 방에 머물러 있었는데, 금년 4월에 취라치가 말하기를, ‘신의 상전(上典)이 바야흐로 포청에 수금(囚禁)되어서 그대로 궐내(闕內)에 둘 수 없다.’ 하고는 즉시 내보냈습니다."
하였다. 후천(後川)을 신문하니, 후천은 곧 늦매의 아비이다. 후천이 공초하기를,
"신이 재작년 봄에 나무를 지고 집에 돌아온즉, 죽산(竹山)의 황생(黃生)이 방 가운데 와 앉아서 신의 처(妻)와 비밀히 서로 말하기에 신이 방에 들어가려 하니, 신의 처가 말하기를 ‘들어와 앉을 필요가 없다.’고 하므로, 신이 나가서 나무를 팔아 다시 돌아온즉, 황생이 아직도 방에 있었습니다. 신이 방 밖에 서 있었더니, 황생이 나오면서 신의 처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너희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하고 갔습니다. 신이 그 사유를 신의 처에게 물은즉, 신의 처가 말하기를, ‘황생이 늦매를 궐내에 들여보낼 것을 권하면서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기에 신이 여러 번 그 좋은 일이 어떤 일인가를 물으니, 신의 처가 낯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자연히 알 것이니 괴롭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영남(李永男)을 신문하니, 즉 취라치였다. 이영남이 공초하기를,
"신은 궐내에서 입역(立役)하였고 이례는 요금문 밖에 살았으므로 늘 술을 사서 먹이곤 하여 안면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례가 신에게 말하기를, ‘나의 여식을 당신이 모름지기 모처(某處)로 길을 인도해 달라.’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내가 너의 내력(來歷)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길을 인도하겠는가?’ 하니, 이례가 스스로 말하기를, ‘주인 없는 양민(良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해년281) 9월에 나인 구월(九月)이가 심부름 할 여아(女兒)를 구하기 때문에 신이 과연 인도하여 들여보냈는데, 금년 3월에 조사해 냄으로 인하여 나오게 되었으나, 그것이 역비(逆婢)였다는 사실은 신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늦매를 신문하니, 늦매가 공초하기를,
"무신년 이후 신이 황일웅(黃一雄)을 위하여 포청(捕廳)에 음식을 전달할 때 이영남도 역시 가끔 왔었으므로 보았는데, 신이 역적의 비녀(婢女)가 된다는 것을 이영남은 본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자, 이영남과 늦매를 면질시키니, 이영남이 말이 막혔다. 한차례 형추(刑推)하여도 전과 같이 공초하였다.
5월 27일 정미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여 《예기(禮記)》를 강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서종옥(徐宗玉)이 나아와 말하기를,
"해주(海州)의 정방 산성(正方山城) 앞에 대봉(對峰)이 성 바깥을 누르고 있으니, 마땅히 그 대봉을 쌓아 올려 외성(外城)을 만들어 산산진(蒜山鎭)을 안에 옮겨 두게 하고, 장수 산성(長壽山城)은 한 길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돌로 된 산봉우리가 가파르고 험하여 상·하 성(城)으로 나누어 만들어졌으므로 비록 험준한 요새라고 말하나 역시 집을 짓고 백성이 살 수 있으며 적의 통로가 두 갈래가 있어서 만일 동선령(洞仙嶺)을 경유한다면 극성(棘城)이 뒤에 있고 극성을 경유한다면 그 길이 반드시 장수 산성 북쪽 모퉁이에서 평산(平山)의 태백성(太白城) 아래로 통하니, 이는 실로 적로(敵路)의 요충(要衝)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방수(防守)를 설치한 것은 뒷날의 걱정을 위한 것이다. 장수 산성·정방 산성·태백 산성은 모두 속현(屬縣)의 신지(信地)이니, 뜻밖의 변이 있을 때 번신(藩臣)이나 곤수(閫帥)가 들어가서 지키고 방어함에 어느 곳인들 불가하겠는가만, 승선(承宣)은 장수산을 주장하고 황해 감사(黃海監司)는 태백산을 주장하여 보는 바가 각각 다르고 취사(取舍)함이 같지 않으니 지금 승선의 말로 인해 태백산을 포기할 수 없으며 또한 황해 감사의 말을 들어 장수산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아울러 수축하는 것이 옳다."
하고,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이때에 황해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정방·장수 두 산성(山城)을 수축하자는 일로써 장계(狀啓)를 올려 그 이해(利害)를 논하면서 장수 산성은 지킬 수 없다고 하자, 서종옥이 일찍이 황해 감사를 지내면서 구획(區劃)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달(奏達)이 있었다.
5월 28일 무신
신사철(申思喆)을 예조 판서로, 신방(臣昉)을 예조 참판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형조 판서로, 김상규(金尙奎)를 승지로 삼았다.
우참찬(右參贊)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저 사람들이 강북(江北)에 와서 머무르며 멋대로 금지된 조례(條例)를 범한 자가 무슨 명목으로, 또 어느 지방에 사는 백성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혹시 산동(山東) 지방의 무뢰배들이 채렵(採獵)하러 온 자들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오라(烏喇)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몽고(蒙古)의 침범을 피하여 흘러 들어온 자들입니까? 이것은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듣건대 봉성(鳳城)과 심양(瀋陽)에 군방(軍房)을 만들어 두는 일이 있다고 하니, 이것이 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전일에 사행(使行)이 올린 별단(別單)과 지금에 들리는 바로써 헤아려 보건대 저 나라에서 동북 지방에 경영하는 일이 없지 않은 것 같은데, 저 나라의 동북은 곧 우리 나라와 인접한 국경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본래 남의 나라를 엿보지 않고 그저 유유(悠悠)히 세월만 보냈으니 혹시 우려할 만한 단서가 있다면 장차 어떻게 대응하시렵니까? 지금 이자(移咨)하는 길에 일을 잘 아는 역관(譯官)을 보내어 이런 등의 정적(情跡)을 반드시 도로(道路)에서 충분하게 염탐하여 돌아와 아뢰게 하소서. 일찍이 노숙(老宿)한 무변(武弁)의 말을 듣건대 전부터 강변(江邊) 읍(邑)·진(鎭)에 임명된 자는 하루도 편안하게 앉아 있지 않고 위엄있는 의용(儀容)을 많이 벌이고 날마다 각기 담당한 지역을 순검(巡檢)하면서 더러 활로써 사냥도 하고 더러 말을 달리기도 하였으므로 변방의 백성들이 외축(畏縮)되어 감히 몰래 나가지 못하고 저 사람들도 역시 혹 바라보다가 위엄에 겁내어 머리를 조아리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까닭에 저쪽이나 이쪽의 변민(邊民)이 저절로 간란(奸攔)하는 폐단이 없었는데, 근래에는 변지(邊地)에 있는 자가 사람마다 편안하게 쉬는 것을 즐겨 문을 닫고 깊숙이 있으면서 일삼는 것이란 성기(聲妓)들과 놀아나는 것뿐이라 합니다.
연강(沿江) 일대에 두서너 파수군(把守軍)이 있는데 고독하게 초막(草幕)에 거처하면서 저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한다 하니, 금령(禁令)을 무릅쓰고 범하는 것은 본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대개 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은 오직 우리 나라의 군뢰(軍牢)들입니다. 강변의 여러 고을에는 본디 용건(勇健)한 사람이 많으니, 지금 마땅히 대읍(大邑)에서는 수백 명을 선발하고 소읍(少邑)에서는 백 여명을 잘 통솔하여 그 복색(服色)을 선명하게 하며 그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을 썩 뛰어나고 예리하게 하여 변방의 원[倅]으로 하여금 다수를 거느리고 날마다 강로(江路)에 순검하다가 만일 변민의 행동이 수상한 자를 만나거든 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엄하게 곤장(棍杖)을 치게 한다면 저절로 위엄을 베풀게 되어 간교한 폐단을 금절(禁絶)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도신(道臣)을 시켜 이것을 변방에 있는 고을에 신칙하게 하소서. 진소(賑所)의 장교(將校)로서 상전(賞典)을 입은 자 가운데 금위영(禁衛營) 장교 이문(李汶)은 분소(分所)한 뒤에 더러는 오고 더러는 가서 열흘을 채우지 못했다 하니, 청컨대 가자(加資)한 은전(恩典)을 거두소서. 어영청(御營廳) 장교 백시한(白時漢)은 1천 명에 가까운 병인(病人)들을 손수 어루만지다가 마침내 병이 전염되어 죽었으니, 이것은 전쟁에 나갔다가 사망된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미와 처가 길거리에 다니며 구걸한다고 들리니, 만일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다시 넉넉하게 구휼하게 한다면, 그의 국사(國事)를 위하다 죽은 혼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진달한 바 일이 매우 타당함을 얻었으니 묘당(廟堂)에 분부하여 신칙토록 하겠다. 이 문의 일은 그에게 가자한 것을 정지할 것이고 백시한에 대해서는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그의 처자를 고휼(顧恤)하게 하겠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 헌납 이주진(李周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필대(申必大)를 국청(鞫廳)으로 이송하는 일은 아뢴 대로 따랐다.
대사성(大司成) 조명익(趙明翼)이 상소하여 성균관(成均館)의 공저(公儲)가 모자라는 폐단을 말하고, 말미에 유생(儒生)의 의제(衣制)를 분포(粉布)·청금(靑衿)과 복두(幞頭)로써 평상시 재(齋)에 거처할 때의 복색(服色)으로 하고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신방(新榜)에도 역시 이 예(例)를 쓰되, 한 가지 연꽃을 복두의 뒤에 마름질해 붙이며,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시험에 모두 합격한 자는 두 가지의 연꽃을 붙여서 구별하였다가 3일 후에 그 꽃을 떼어 중화(中華)의 제도를 좇아 행할 것을 청하였다. 대개 현종(顯宗) 말년에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가 태학(太學)의 재임(齋任)이 되어 대사성(大司成)에게 품신하니,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이것을 진소(陳疏)하여 윤허를 받았으나 갑자기 국상(國喪)을 당하였으므로 결단하여 수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때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여 《예기(禮記)》를 강하였다.
강원도 흡곡현(歙谷縣)에 별이 북방으로 흘러 갔는데 크기는 물동이만 하고 불빛 같이 땅을 비추었으며 천둥 같은 소리가 있었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김윤귀(金潤龜)를 신문(訊問)하기를,
"이위(李葳)의 괘서(掛書)가 오로지 최두정(崔斗挺)을 위한 것이라면 네가 최두정의 처남(妻娚)으로서 구원하려는 마음이 어찌 이위에 비교하겠느냐? 또 최두징(崔斗徵)은 글을 못하였으므로 크고 작은 서찰(書札)을 네가 다 담당하였다 하는데,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라."
하고 한 차례 형(刑)을 가하니, 김윤귀가 공초하기를,
"살옥(殺獄)을 주선하는 상황을 신이 과연 서찰을 써 주기는 했으나 괘서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이위가 최구(崔璆)를 해치려 했다는 말은 과연 이미 들었습니다."
하였다.
전라 감영(全羅監營)에서 죄인 황유징(黃有徵)을 기포(譏捕)하였다고 계문(啓聞)하고 잡아왔다. 이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으로 나아가 황유징을 친히 국문(鞫問)하여 묻기를,
"남원(南原)의 괘서(掛書)가 얼마나 흉악한 일인가? 그런데 네가 고한 정가(鄭哥)의 일은 문안(文案)이 의심할 만하고 날짜가 서로 모순된 것이 이미 도신(道臣)의 문목(問目) 가운데 등재되었으니, 앞뒤 일의 상황을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라."
하였다. 황유징을 한 차례 형신(刑訊)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성주(星州) 사람으로서 행상(行商)을 하며 남원(南原)에 옮겨 사는데, 백복사(百福寺)의 중[僧]과 더불어 객점(客店)에서 같이 자다가 우영(右營)에 붙잡힌 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정가(鄭哥)가 절에서 고풍(古風)282) 짓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엄한 형신 아래 지적해 고한 바가 있었습니다."
하자, 다시 황유징을 신문하여 한 차례 형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주막(酒幕)에서 정천우(鄭天遇)와 같이 자면서 괘서에 대한 일을 물으니, 정천우가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 고풍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일컫기를 「이같은 문필(文筆)은 버리기 아깝다」 하였으므로 괘서를 하게 된 의도도 역시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신이 창기(娼妓)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던 일 때문에 그 절의 중 최진(最眞)을 욕하였던 것입니다. 붙잡히던 날 밤에 중이 방황(彷徨)하였는데, 추문(推問)을 당할 때 미처 상세히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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