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4권, 영조 9년 1733년 6월

싸라리리 2025. 9. 12.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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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경술

추국(推鞫)을 행하여 이위(李葳)·최두징(崔斗徵)·김윤귀(金潤龜)에게 형을 가하였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황유징(黃有徵)을 신문하고 한차례 형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정천우(鄭天遇)는 본래 모르는 사이이고 정천명(鄭千明)은 곧 정천우의 육촌(六寸)으로 함양(咸陽)에 살았는데, 신이 일찍이 절의 중을 만나 본 바 생각건대 서로 싸워서 원망하게 된 듯하였습니다."
하였다.

 

망명적(亡命賊) 황진기(黃鎭起)의 어미와 처(妻)를 잡아왔는데, 포청(捕廳)에 명하여 황진기의 간 곳을 엄문(嚴問)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이정제(李廷濟)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오광운(吳光運)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조빈(趙儐)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이례(二禮)가 물고(物故)되었다.

 

6월 2일 신해

황유징(黃有徵)이 물고(物故)되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는데, 시독관 조명겸(趙明謙)이 문의(文義)로 인해 아뢰기를,
"풍수(風水)에 대한 말을 주자(朱子)가 산릉의장(山陵議狀)에 말하였는데 ‘그 지형(地形)이 껴안은 듯이 둘러싸이어 허(虛)하고 이지러진 데가 없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은 이치로 미루어 말한 것이니, 이는 후세에 술수가(術數家)283)  들이 아무 산, 아무 물이 어떻다는 설(說)과는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宋)나라의 남내(南內)는 어느 곳인가?"
하니, 조명겸이 말하기를,
"남내는 송광종(宋光宗)이 거처하던 궁궐인데, 그가 상기(喪期)를 짧게 한 까닭에 북사(北使)284)  가 왔을 때 빈궁(殯宮)에서 조문(弔問)을 받았고 남내에 문안할 때는 길복(吉服)으로 거행하였으니, 대개 이미 탈상(脫喪)했던 까닭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송 효종(宋孝宗)은 고종(高宗)의 상(喪)을 입을 때 이미 장사지내고도 백포 의관(白布衣冠)으로 조정(朝廷)에 나아가 정사를 보았는데, 주자(朱子)가 ‘성대한 덕(德)을 행하는 일이라.’고 말하였으니 당시 상기를 짧게 하였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이와 같이 한다면 옛법을 회복하는 길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겼으므로 주자가 이를 제도로 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주자가 어떤 사람에게 답한 서찰 가운데 ‘감히 천거(薦擧)를 구하지 아니하여야 하고 자기 스스로 유능함을 남에게 과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경계를 이와 같이 절실하고 극진히 하였는데,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양전(兩銓)285)  의 관직 보기를 마치 윤번으로 돌아가는 자기 물건과 같이 생각하고 양계(兩界)286)  의 직임을 차례로 쫓는 당연한 자리로 여기고 있으니, 예양(禮讓)의 풍속이 허물어졌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벼슬을 신중히 하는 도리가 그 요체(要諦)를 얻지 못한 데 말미암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경월(卿月)287)  의 직책이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가? 그런데 근래에는 사람들이 모두 응당히 하는 직책으로 여기고 문득 차례로 돌아가는 자리로 만드니, 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하였다. 조명겸이 《예기(禮記)》의 왕제(王制)편과 월령(月令)편 다음에 조금 볼 만한 곳과 연달아 다른 책을 강해야 된다는 뜻으로써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기》는 선조(先朝)께서 다 강하지 못한 책이다. 지금 보다가 중지한 데는 선조께서 진강(進講)할 때 정해둔 곳이니, 또한 심히 비창(悲愴)한 감회가 든다."
하고는, 이내 목이 메이고 눈물을 머금었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전학(典學)288)  하는 가운데 효도하는 생각이 더욱 돈독해질 것이니, 강학(講學)하실 즈음에 숙묘(肅廟)께서 전학하신 유지(遺志)를 조용히 깨닫는다면 반드시 선조의 뜻과 사업을 이어가는 방도에 보탬이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김윤귀(金潤龜)가 물고(物故)되었다.

 

대사간(大司諫) 이춘제(李春蹄)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전하께서 무신년289)  의 역적을 다스리는 데 너무 관용한 데로 따르기를 힘써 번번이 모반(謀反)했던 자들이 스스로 안심(安心)하도록 하는 것으로써 생각하셨습니다. 무신년의 역적들은 사첩(史牒)에 드문 바로서 반역자의 남은 자손과 갈려 나간 당인(黨人)을 잠시도 용서해서는 안되는데도, 앞뒤의 대계(臺啓)에서 하나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다시 천일(天日)을 보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아는 우리들이 간교한 모략을 별안간 만들고 음흉한 계획을 몰래 빚어내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 역비(逆婢)의 사건을 보니 마음이 서늘함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건단(乾斷)290)  을 확연(廓然)히 발휘하시어 전일과 같이 느슨하게 하지 마소서."
하고, 끝으로 논하기를,
"역비(逆婢)의 옥사(獄事)는 단서가 이미 드러난지라 특별히 구핵(鉤覈)을 더한다면 실정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인데, 잘 검칙(檢飭)하지 못하여 죄인이 지레 죽었습니다. 신은 금오(金吾)의 당상(堂上)을 추고(推考)하고 해당 도사(都事)를 잡아다 처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단(末端)의 일은 그대로 실시하겠다."
하였다.

 

6월 3일 임자

이위(李葳)가 물고(物故)되었다.

 

김진상(金鎭商)을 승지로, 김상익(金尙翼)을 수찬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사간으로, 윤광운(尹光運)을 헌납으로, 김상석(金相奭)을 정언으로, 심육(沈錥)을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로 삼았다.

 

6월 4일 계축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김약로(金若魯)가 문의(文義)로 인해 진계(陳戒)하기를,
"당시에 위학(僞學)291)  의 금지가 바야흐로 엄하였으나 와서 배우는 무리들이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자가 많이 있었으니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그 과실이 영종(寧宗)292)  에게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인군(人君)이 거울삼아 경계할 곳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자(朱子) 같은 어짊으로도 와서 배우는 자들의 진실되고 거짓됨에 따라 문득 큰 노야(爐冶)293)  를 열어서 한번 단련(鍛鍊)294)  한 다음에야 그 진실되고 거짓됨을 알았으니, 오늘날의 시상으로 말한다면 어찌 특별히 한번 노야를 차릴 뿐이겠는가? 신축년295)  ·임인년296)  을 겪은 이후로 한번 단련을 치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무신년297)   이후로부터 19일의 하교(下敎)가 있기까지는 또 큰 단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신(朝臣)들은 마땅히 옛날의 폐습을 변화해 고쳐야 할 것인데, 끝내 바꾸지 않고 있으니, 나는 실로 개연(慨然)하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시독관 조명겸(趙明謙)이 말하기를,
"전하의 19일 하교는 되도록 온 세상을 진정시키려는 데서 나온 것인지라, 당시의 곡절(曲折)을 빠짐없이 말하신 것인데 비록 성교(聖敎)로 보더라도 원래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한 말이 없었던 까닭에 사람들의 보는 바가 대단히 서로 달라서 오늘날 논의의 소란함이 전일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지적한 것이란 무슨 일인가?"
하자, 조명겸이 말하기를,
"대소(臺疏)에 이른바 ‘스스로 귀속(歸屬)할 바가 있다.’고 한 것은 말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이광세(李匡世)의 소어(疏語)로서 저편을 ‘충(忠)’이라 하고 이편을 ‘역(逆)’이라고 한 것이나 그의 이른바 ‘분명히 귀속할 데가 있다.’고 한 것은 실로 긴절하지 않다. 19일의 하교는 민 봉조하(閔奉朝賀)의 수차(袖箚) 때에 비답한 것을 보면 저절로 요연(瞭然)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비록 사소한 곡절이 있었으나 유신(儒臣)이 이른바 진정시키려는 데서 나왔다는 것는 내가 하교한 본뜻이 아니다."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19일의 하교는 조금(朝禁)이 지극히 엄절하여 감히 서로 전하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신은 어떤 일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연석(筵席)에서의 설화(說話)를 상세히 반포하여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고루 보이지 않으시고 단지 그날에 입시(入侍)했던 여러 신하들만 듣게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0년 동안 가슴속에 간직해 두었던 것을 부득이하여 처음으로 그날에 발언하였는데 만일 연석에서 말할 것을 내어 보인다면 구애되는 바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우사(右史)에게 맡겨 사책(史冊)에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니, 실록(實錄)이 나온 뒤에는 어리석은 백성인들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오직 먼 훗날의 공의(公議)를 기다릴 뿐이지 내가 숨기는 것이 아니며,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하자, 김약로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말하지 못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연중(筵中)에서 하교하시고 또 다시 정신(廷臣)들에게는 숨기시니 의리의 시비(是非)와 천하의 공의를 어찌 지금에는 말하지 못하고 먼 훗날을 기다려야 할 이치가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을 말하여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후일의 공의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시 어떤 도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는 전소(前疏)의 말을 거듭 아뢴 것에 지나지 않는데, 설사 성상의 마음에 감동하지 못함이 있더라도 어찌 ‘역적의 부류를 달갑게 여긴다.’느니 ‘내 신하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신료(臣僚)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하가 임금을 친근히 하여 좌우에서 보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에 진실로 조금이라도 신자(臣子)의 마음을 가졌다면 어찌 뉘우쳐 고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내가 기유년298)  에 합문(閤門)을 닫고 19일에 하교한 것은 즐겨 한 것이 아니다. 유분자(劉盆子)가 양위(讓位)299)  한데 비유한 것 등의 말은 몹시 고통스런 진심에서 나와 그렇게 한 것이다. 유신(儒臣)이 장래의 처분을 천천히 보면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과실이 있는데 그 아비가 꾸짖지도 않고 매질하지도 않고 곧바로 내 아들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아들의 마음이 어찌 몹시 아프지 않겠으며 그 아비된 도리도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인군(人君)이 신하를 나무라는 방도는 본디 그 방도가 있습니다. 옛부터 성명(聖明)한 군주(君主)는 이렇게 박절한 하교는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유경의 상소 가운데 내 처분을 믿지 않는 뜻이 있으니 내 신하가 아니라는 하교는 중도(中道)에 지나친 것이 아니다. 옛날의 성인(聖人)이 엄하게 처분해야 될 일은 조금도 돌보아주는 법이 없었으니, ‘내가 너에게 어떻게 주토(誅討)하면 되겠는가?’라는 말이 어찌 박절한 말이 아니며, 사이(四夷)300)  에 물리쳐 더불어 중국(中國)에 같이 살지 않을 뜻을 보인 것이 역시 어찌 내 신하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최두징(崔斗徵)을 신문(訊問)하니 승복하지 않으므로 신필대(申必大)를 신문하였다. 처음에 신필대는 이제동(李濟東)이 옥사(獄事)에 증거로 끌어댄 가운데 나온 자인데 나머지 적도(賊徒)를 다 포청(捕廳)으로 옮긴 뒤에 신필대를 비로소 잡아다가 엄하게 국문하여 비로소 무신년301)                  에 역적에 가담하였다가 도망해 숨었던 정상을 알게 되었다. 잡아오라 명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신필대를 신문하기를,
"안성(安城)에서 적도를 따라갔던 정상과 보은(報恩)에서 무리를 모았던 일을 이미 포청(捕廳)에서 승복하였으니, 거기에 대한 정상(情狀)을 일일이 바로 고하라."
하니, 신필대가 공초(供招)하기를,
"재작년 가을에 이귀흥(李貴興)이 신에게 말하기를, ‘흉년에 살아갈 길이 없어서 무리를 모아 도적이 되려고 하는데, 너도 같이 들어오라.’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나는 심히 가난하지 않아서 같이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한즉 이귀흥이 놓아 주지 않고 내 동당(同黨)이 아무아무가 있음을 말하였는데, 청주(淸州)의 양반(兩班) 이만종(李萬宗)과 이흥득(李興得)이 그 가운데 있었고 나머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이귀흥이 또 말하기를, ‘다가오는 가을에 보은(報恩) 산사(山寺)에서 의당 회의할 것이니 너도 꼭 와서 모이라.’고 하였으나 신은 병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신이 비록 서로 면식(面識)이 있는 관계로 끌려가서 그들과 이름을 기록하는데는 허락하였으나 모의(謀議)하는 데는 참여할 수 없었고 적도를 안성까지 따라갔던 일에 대하여는 이미 포청에서 공초를 마칠 때 다 낱낱이 실제대로 말하였습니다. 이만종은 청주(淸州)에서부터 적군(賊軍)의 호궤(犒饋)302)                  를 주관하였는데, 사람된 품이 몹시 사나웠으며 안성까지 따라가서 신이 적도들과 있을 때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또 신필대를 신문하니, 신필대가 공초하기를,
"이귀흥이 신에게 말하기를, ‘무리를 모아 군졸이 많아서 경성(京城)으로 몰아서 간다면 도성이 반드시 허물어질 것이니, 너는 당연히 병조 판서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해마다 청주에 있는 농장(農庄)에 가면 이귀흥·이흥득·이제동이 번번이 와서 보았는데, 이흥득·이귀흥 등이 말하기를, ‘보은에 사는 구이후(具爾垕)는 글을 잘하고 용략(勇略)이 있으니, 추대하여 괴수(魁首)를 삼을 만하며 이인관(李仁寬)도 또한 그 무리들에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이흥득과 구이후를 잡아다가 신문하니, 이흥득이 공초하기를,
"신필대는 처음부터 서로 보지도 못했고 서로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구이후는 공초하기를,
"신필대의 성명과 얼굴을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하므로, 이흥득과 신필대를 면질시키니 둘이 서로 다투며 힐난하다가 신필대가 말하기를,
"네 나이 열 여덟 살이 아니었느냐? 내가 이귀흥을 통하여 들었다. 지금은 스물 한 살이 되었을 것이다."
하매, 이흥득이 말하기를,
"내가 과연 계사생(癸巳生)이다."
하였다. 이흥득과 구이후에게 모두 한차례 형을 가하고 또 이만종을 잡아다가 신문하니, 이만종이 공초하기를,
"신필대가 신을 무고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면임(面任)303)                  을 지내 과연 신필대의 얼굴을 알고 있으나 다른 사람은 그가 여러 번 그 이름을 바꾸었던 까닭에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이번에 체포되게 된 것도 역시 신이 가리켜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신에게 깊은 감정을 품고 보복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신필대를 신문하니, 신필대가 공초하기를,
"이만종이 가리켜 알렸다는 혐의도 과연 꾸며서 끌어댄 것이고 이흥득도 신을 그의 공초 속에 끌어댄 것으로서 역시 무고(誣告)하였으니, 없는 일을 꾸며내어 사람을 무함한 죄는 스스로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뒤에 신필대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신천영(申天永)이 이인좌(李麟佐)를 안방으로 끌고 들어가 은밀히 수작할 때 신이 좌석을 같이 하였는데, 신천영이 신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미 참석하여 들었으니 일을 같이 해야 할 것이다.’ 하기로 신이 허락하였습니다. 청주에서 성(城)이 함락되던 날 박종원(朴宗元)이 신을 군관(軍官)의 명안(名案)에 기록하고 이어 환도(環刀)와 말[馬]을 주면서 안성에 따라가도록 하므로 신이 과연 같이 갔었는데, 반군이 패한 뒤에는 몸을 빼 나와서 도망하여 이름을 고치고 숨어 있었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이제동과 이귀흥이 신에게 같이 들어가기를 요구하면서 ‘네가 이미 적도를 따랐으니 우리와 일을 같이 함이 옳다. 군졸이 많아지고 식량이 풍족하게 되기를 기다려 강물이 얼 때 경성(京城)을 침범한다면 반드시 허물어질 것이니, 너는 당연히 병조 판서가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과연 성명을 도목(都目) 속에 직접 썼습니다. 이만종과 이흥득에 이르러는 사감(私憾)으로 인하여 무고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모역에 함께 참여하였고 사람을 무함한 악역(惡逆)을 지만(遲晩)합니다."
하니, 형률(刑律)대로 처참(處斬)케 하였다. 구이후·이흥득을 다시 포청에 이송(移送)하라 명하였다.

 

6월 5일 갑인

추국(推鞫)을 행하여 이예(李預)를 신문하기를,
"이위(李葳)와 최두징(崔斗徵)의 무리들과 왕래하며 모의한 자취가 여러 사람의 초사(招辭)에 낭자하게 나왔고 남원(南原)의 흉서(凶書)는 바로 네가 지은 것이니, 사실대로 솔직하게 고하라."
하자, 이예가 공초하기를,
"이위는 신과 동성(同姓)이고 최두징은 곧 신의 사위의 오촌숙(五寸叔)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최두징이 그 형의 살옥(殺獄) 사건으로 인해 이위에게 글을 짓게 하기를 신에게 요구하여 그 분쟁을 해결해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신이 본래 글자를 알지 못하여 과연 언문(諺文)으로 두 번 글을 지었습니다."
하였다. 이예와 최두징을 면질시키니, 이예가 말하기를,
"흉서가 어찌 내가 지은 것이냐?"
하매, 최두징이 말하기를,
"네가 이위와 서로 의논한 것이다."
하자, 이예가 말하기를,
"나는 글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것을 지을 수 있느냐?"
하니, 최두징이 말하기를,
"네가 글을 모르는 것은 사실이나 반드시 참여하여 모의했을 것이다."
하였다. 다시 이예를 신문하니, 이예가 공초하기를,
"나이 많고 귀도 먹었는데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아비의 이름을 고하지 않은 것은 다만 음(音)은 아나 자획(字劃)을 알지 못한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승지로, 윤혜교(尹惠敎)를 대사헌으로, 이중진(李重鎭)을 장령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지평으로, 조진세(趙鎭世)를 정언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부수찬으로, 이흡(李潝)을 부응교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통제사(統制使)가 사폐(辭陛)304)  할 때에 군향(軍餉)을 마치지 않은 수령(守令)을 곧바로 장파(狀罷)305)  하도록 해 달라는 청이 있었는데, 수령을 내쫓고 승진케 하는 것을 통수(統帥)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게 할 수는 없다.’ 하면서, 가려내어 봉납(捧納)하지 아니한 것이 가장 많은 고을의 수령을 장문(狀聞)하게 하여 비국에서 그 경중(輕重)에 따라 죄를 처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송인명(宋寅明)이 말한 바 곡식을 늘리는 방도를 경(卿) 등은 들었는가?"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송인명이 지금 진휼청(賑恤廳) 당상이 되어 약간의 저축된 돈으로 가을을 기다려 곡식을 사들인다는 것인데, 박문수(朴文秀)의 소금을 구우려는 계획도 또한 마침내 그 효과를 어떻게 거둘지 알 수 없으나, 백성을 잘 무마하는 것이 오늘날 제일 시급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미년306)   이후로 환곡(還穀)이 이미 다 핍절되어 남은 것이 없어서 조적(糶糴)307)  을 계속할 방도가 없습니다. 삼군문(三軍門)의 외읍(外邑)에서 봉납하는 군포(軍布) 중에서 2천 동(同)308)  을 덜어내어 쌀로 바꾸어 환곡(還穀)으로 만들어 두고 양서(兩西)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각 4, 5천 냥의 은화(銀貨)로 책문(柵門) 밖의 당목면(唐木綿)을 쌍방의 합의하에 사다가 도로 팔아서 그 남은 이득을 취하여 쌀을 마련하는 베를 보충한다면 일이 편리하고 이익도 많을 것입니다."
하고, 우참찬(右參贊) 이정제(李廷濟)는 말하기를,
"재물을 늘리는 방도가 오늘의 시급한 일이 되겠으나 재물을 쓰는 방도는 더욱 어렵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중순(中巡)309)  의 시사(試射)에 상으로 베[布]가 50동에 이른다는 말을 듣고 ‘훈국(訓局)310)  이 말라 피폐될 우려가 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중순 시사에 상으로 내리는 베가 3백여 동에 이르고 있어 생산되는 물건은 한도가 있고 쓰는 재물은 절제함이 없으니, 오늘날 텅 비게 된 것은 당연한 사세입니다. 쓰는 것을 절제한 다음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니, 재물을 늘리는 절차는 역시 말단의 일일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서도(西道)의 사람이 경성(京城)의 사람을 사서 가는 자는 북도(北道)의 예에 따라 형률(刑律)에 비추어 엄하게 응징(膺懲)할 것을 명하였다. 대개 북쪽 사람이 경성 사람을 사 가서 저들에게 다시 팔아 넘길 염려가 있었으므로, 일률(一律)311)  로 논하였던 것인데, 서도(西道)는 일찍이 금령(禁令)이 없다가, 형조 참판 이진순(李眞淳)의 주청한 바로 인하여 이 명이 있게 되었다.

 

사간원 【대사간 이춘제(李春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비(逆婢) 늦매(莻梅)를 종전대로 국청(鞫廳)에 이송하여 여러 죄인과 일체로 구문(究問)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최두징(崔斗徵)의 국안(鞫案)에 ‘이예(李預)란 자가 흉서(凶書)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이예를 문초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예를 국청(鞫廳)에 잡아와서 엄중히 조사하게 하여 실정(實情)을 알아내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위(李葳)와 정천우(鄭天遇)는 혹은 승관(承款)하였으나 난잡한 말이 많았고 혹은 미처 잡아오기 전에 지레 죽었습니다. 지금 만약 이 두 적(賊)을 원범(元犯)으로 돌리고 그 기포(譏捕)를 해이하게 한다면 아마도 죄인을 놓칠 염려가 있으니, 중외(中外)에서 거듭 규포(窺捕)를 엄중히 하여 기필코 붙들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국옥(鞫獄)의 문안(文案)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시수(時囚)의 문안이 물고(物故) 문안에 잘못 들어가 있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를 체차(遞差)하고 하리(下吏)는 가두어서 죄를 처단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는 추고(推考)하고 하리는 가두어 치죄(治罪)함이 옳다."
하였다.

 

전(前)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이집(李㙫)이 졸(卒)하였다. 이집은 성질이 충독(忠篤)하고 근신(謹愼)하였으며 확고하게 지조(志操)를 지키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는데,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되어서는 탕평(蕩平)의 논리(論理)를 애써 부식(扶植)하였다. 그러나 유봉휘(柳鳳輝)를 앞장서 토죄(討罪)하고 이진유(李眞儒)에게 형을 청한 것은 족히 시비(是非)를 판단함이 올바르고 마음가짐이 공평하였음을 볼 수 있다.

 

임금이 승지 김계환(金啓煥)·이종성(李宗城)을 소견(所見)하고 하교(下敎)하기를,
"대신(大臣)의 상(喪)에 어찌 거애(擧哀)312)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만, 국기(國忌)313)  의 재계(齋戒)가 비록 내일부터 치재(致齋)314)  하나 오늘 거애하는 것은 혹시 타당하지 않을 듯하므로 소견하여 묻는 것이다."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국가의 전례는 2일을 재계하였는데 지금 3일 동안 재계를 끄는 뜻은 공경히 앙모(仰慕)하고 효도하는 생각이 그지없음입니다. 평일에 수족같이 소중히 여기던 신하를 진념(軫念)하시던 의의로 말한다면 실로 거애하는 것이 합당하겠으나, 이미 깨끗하게 재계하시는 중이니, ‘재(齋)’라 함은 부정(不淨)함을 깨끗하게 함인데 어떻게 거애하는 의절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6월 6일 을묘

추국(推鞫)을 행하여 다시 이예(李預)와 최두징(崔斗徵)을 신문하였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아 이예에게 한차례 형을 가하였다. 다시 죄인 구이후(具爾垕)·이흥득(李興得)·신필대(申必大)를 신문하고 또 황택(黃澤)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6월 7일 병진

공홍도(公洪道) 서원(西原)·회인현(懷仁縣)에 몹시 크게 천둥하여 벼락을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6월 9일 무오

주형리(朱炯离)를 장령으로, 신만(申晩)을 헌납으로, 홍현보(洪鉉輔)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임금이 영남 감진 어사(嶺南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에게 본도의 민사(民事)를 진달하라 명하고, 또 묻기를,
"김성탁(金聖鐸)·성이홍(成爾鴻)·이만(李槾) 등을 전후에 포천(褒薦)한 사람이 많았는데,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가?"
하니, 이종백이 말하기를,
"이만은 학문과 덕행(德行)이 깨끗하고 높으며 김성탁·성이홍은 모두 학식과 행의(行誼)가 있습니다. 이는 한 도(道)에서 다 허여(許與)하는 바이니, 어진 인재를 찾아내어 거두어 쓰는 방도에 있어 마땅히 먼저 검용(檢用)하여야 하는데, 한(漢)나라에서 주군(州郡)에 신칙하여 권가(勸駕)315)  한 예에 따라 먼저 군직(軍職)을 맡겨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돈독히 권고 면려하여 올려보내게 하여 연석(筵席)에 출입시켜 영남 지방의 풍속을 굽어 물으시고 더러 소대(召對)할 때에 불러 접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참찬관(參贊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이만은 유생(儒生)이니 군직을 맡길 수 없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곧바로 부직(付職)하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허락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기석(起石)과 이흥득(李興得)·황택(黃澤)·신필대(申必大)를 신문하였으나, 모두 불복(不服)하였다.

 

다시 황택을 신문하니, 황택이 공초하기를,
"신은 황진기(黃鎭紀)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기석의 말을 듣건대 ‘장차 흥해(興海)로 향한다.’고 했다 하니, 그렇다면 황진기가 아직까지 죽지 않았으니 거의 잡을 수 있는 길이 있으므로 마음에 은근히 기쁩니다. 신이 황진기의 칠촌(七寸) 친척으로 연좌(緣坐)되어 7년 동안 벼슬길에 막혔으므로 신이 뼈에 사무친 원수로 보는데, 만일 신의 임소(任所)에 도착했다면 신이 어찌 잡아 들이지 않았겠습니까? 기석이 신을 모해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영남(李永男)이 물고(物故)되었다.

 

부교리(副校理) 김약로(金若魯)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타고나신 자품이 고매(高邁)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총명(聰明)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천리(天理)를 다 확충하지 않음이 있고 사욕(私慾)을 다 버리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이치를 보심이 혹시 정밀하지 못한 바가 있고 마음을 씀이 혹시 정대함을 얻지 못하여서, 말단의 일은 살피면서 더러 근본을 빠뜨리고 자질구레한 것은 보면서 더러 큰 것을 잃으시며 한갓 형식만 일삼고 실심(實心)을 미루어 행하지 않으며 조그마한 혐의에 구애되어 크게 공평한 도리를 알지 못하여서 정사(政事)에 나타나고 일에 드러나는 것들이 거의 구차하게 억지로 보완하여 단지 구구(區區)한 눈앞의 계획만 하다가 무신년316)  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거의 몇 분(分)이 없었으니, 전하께서 더욱 마땅히 경계하여 구습(舊習)을 깨끗하게 벗어나고 분발하고 진작(振作)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원대한 기업(企業)을 떨어뜨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는 아직도 또 이완(弛緩)함과 고식(姑息)적인 것이 전일과 한결같이 같아서 마침내 한 가지 정사와 한 가지 일도 크게 진작하고 크게 변경함은 없고 군신 상하가 오직 탕평(蕩平)하게 한다는 한 가지 일만으로 한 개의 규모(規模)를 만들어서 정치의 모양을 꾸며 국가의 형세를 유지하자면 이것이 아니면 어떻게 할 수 없는 듯이 하고 있으나, 기강(紀綱)이 이로 인하여 무너지고 시비(是非)가 이로 인하여 흐려지며 세상의 도의가 더럽혀져 떨어지고 의기와 절조(節操)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실로 이에 연유함을 알지 못합니다.
아! 붕당(朋黨)이란 백여 년 동안 나라를 망쳐 온 병폐이고 탕평이란 옛날 성왕(聖王)이 나와서 다스림의 극치(極致)였습니다. 신도 또한 탕평이 좋은 제목이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유독 전하의 마음속에는 이미 환하게 밝으심이 뛰어나 한쪽으로 치우친 사사로움을 몹시 끊지 못하시고 항시 적당히 안배(按排)해 벌여 놓으려는 의사만 두어서 조종함에 그 요령을 얻지 못하고 등용함에 그 정도를 얻지 못하고는 단지 행동을 비상(非常)한 거조와 비통한 언어로써 온 세상을 가리질하여 인심(人心)을 복종시키려 하시니, 저 기유년317)  에 합문(閤門)을 닫은 일과 남한산(南漢山)에서 돌에 맹서하신 일 같은 것은 전하의 마음 속이 괴롭지 않음이 아니고 하교(下敎)가 간절하지 않음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보기로는 불행하게도 쇠퇴한 세상의 기상(氣象)에 가까웠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저 황극(皇極)·탕평의 다스림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남과 응대(應對)하는 말 사이에서 그 사람의 덕성(德性)이 나타나는 까닭에 군자(君子)는 반드시 말을 신중히 하는 법인데, 하물며 왕언(王言)은 한번 나가면 사방에 전해져 서로 외우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옛 태평시대의 임금을 두루 보건대 그 발표한 언어(言語)가 종용하여 핍박하지 않으며 엄격·정직하고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크고 작은 사륜(絲綸)에서 혹은 지엽적인 것인데도 말씀이 너무 번거롭고 혹은 미세한 사건인데도 논란하심이 너무 심하여 왕언은 간략하고 신중해야 하는 체통에 어그러짐이 있는데다가 또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사물을 접하고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우하지 않으며, 일이 혹시 성상의 뜻에 거슬리면 언제나 박절하여 차마 듣지 못할 분부를 가볍게 가하여 눌러 억제하는가 하면 기끔 뇌속에 저촉받아 감정이 폭발하면 야비하고 저속한 말과 욕설과 질타하는 말씀이 삼가하고 가려 하는 바가 없습니다.
신이 사사로이 듣건대 지난날 권영(權瑩)을 인대(引對)할 때에 말씀과 안색이 더욱더 화평함을 잃어 시상(時象)의 가자(假子)318)  라고 하신 하교(下敎)가 있기까지 하였다 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일찍이 전하의 실언(失言)이 한결같이 여기에까지 도달할 줄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권영이 말씨를 조심하지 않고 의붓자식이라고 이른다는 등의 말을 전석(前席)에서 꺼낸 것은 본디 그르오나 전하께서는 또 뒤쫓아 그 말을 제기하여 그대로 답습해 썼습니다. 인군(人君)이 신료(臣僚)를 깨우치고 나무라는 데는 스스로 그 방도가 있는 것인데 하필이면 비루하게 도리어 어긋난 말로 욕을 한 뒤에야 마음에 상쾌하십니까? 일이 지난 뒤에 반성하고 점검한다면 반드시 사불급설(駟不及舌)319)  의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상벌(賞罰)은 세상을 다스리는 큰 권한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기뻐하고 노하심이 중도(中道)를 잃고 사랑함과 미워함이 간혹 치우쳐서, 찡그리고 웃으심을 절제하지 못하여 도리어 외설(猥褻)한 데로 돌아가고 위엄과 형벌을 번갈아 써서 얼룩짐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한사선(韓師善)이 외람되게 선치(善治)한다고 칭송하매 사람들이 남몰래 웃은 적이 많았는데도, 승선(承宣)의 직임에 발탁시켰고 이주익(李周翊)은 유명(儒名)을 현혹되게 일컬어 소장(疏章)을 올렸는데도 서추(西樞)320)  의 직함을 주었으며, 박장윤(朴長潤)·윤연(尹㝚)은 죄를 진 것이 지극히 무거운데도 갑자기 좋은 지방으로 이송하였습니다. 이광운(李光運)·정홍제(鄭弘濟)가 아직까지 견책(譴責)당하여 출척(黜斥)되어 있고 권영을 먼 변방에 내친 것은 처분이 너무 지나친데도 모두 용서해 풀어줌을 아끼시며, 이광덕(李匡德)은 재읍(災邑)에 도임하지도 않고 곧바로 돌아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데 발끈하여 굳게 드러누워 움직이지 아니하고 조명(朝命)을 업신여겨 보다가 끝내는 또 조절하는 권세를 빌어서 물러가고 나아가는 관건(關鍵)을 만들려고 청한 것은 그 자취가 망령되고 방자한 데 연관되고 그 일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데도 전하께서는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로써 제재(制裁)를 가하지 못하시고, 이에 도리어 겸손한 말로 일어나 올 것을 권고하여 오직 실행되지 않을까 염려하심이 마치 인자한 아버지가 버릇없는 자식을 달래는 듯함이 있었습니다. 상과 벌의 법도가 없음이 이와 같으니, 그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 언관(言官)을 두는 것은 대개 진언을 독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말이 비록 마음에 거슬리더라도 반드시 넉넉하게 용납하고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반드시 관대하게 용서해 주어 말한 것을 가지고 죄주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언관을 대우하는 데 있어 그 말의 긴절하고 헐후하며 얕고 깊음을 논할 것 없이 말이 삼사(三司)에서 나오기만 하면 문득 음성과 안색을 크게 하고 위엄과 분노를 떨쳐 눌러서 꺾고 업신여겨 꾸짖음이 거의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서 소장을 불사르지 않으면 되돌려주고 꾸짖어 내쫓지 않으면 폐고(廢錮)시키므로 크게 입을 열면 큰 낭패를 당하고 적게 입을 열면 작은 낭패를 당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삼사에는 풍습이 크게 변하고 기상이 위축되어 고요하기가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이에 온 세상이 다 돌아보고 계교하면서 말하는 것을 서로 경계하여 언관의 직임을 그물과 함정같이 보고 있어서 성궁(聖躬)의 과실과 국가의 안위(安危)에 대하여 내 일신을 잊고 힘을 다해 거론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군하(群下)의 죄이기는 하나 여러 신료들을 인도하여 여기에 도달하도록 한 것은 전하께서도 아마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초야(草野)의 선비에 있어서는 인군(人君)이 반드시 뜻을 더해 우대하기를 조정의 관원보다 다르게 하는 것은 진실로 그 종적이 매우 소원(疏遠)하고 정지(情志)가 서로 미치지 못할까를 염려함인데, 근년에 오면서 이름이 장보(章甫)321)  의 상소라고 하면 매양 위포(韋布)322)  라는 이유로 소홀하게 여겨 일체 물리치고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 신은 굳이 멀리 지난 시대를 끌어대지 않고 아조(我朝)의 일로 말하겠습니다. 위포로써 소장을 진달하여 일을 논한 사람이 심히 많은데, 임병(壬丙)323)  의 병화(兵禍)를 당할 즈음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자신이 앞장서서 국난(國難)에 죽은 자의 태반이 초야의 사람들이었은즉, 우리 열성(列聖)께서 평일에 배양(培養)하신 그 힘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까마귀나 소리개가 알을 깨뜨린데는 봉황(鳳凰)이 이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대우하심이 이미 이와 같이 너무 박하시니 글 읽고 스스로 몸을 아끼는 선비들이 반드시 장차 입산(入山)하는 데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설사 병란(兵亂)의 경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누가 한 마디 말을 내고 한 가지 방책을 올려 전하께 충성하기를 원하겠습니까? 참으로 3백년 동안의 원기(元氣)가 성상의 대(代)에서 사라져 다할까 두렵습니다.
아! 무신년 난(亂)에도 국가가 오늘까지 유지하게 된 것은 8도(道)의 인심이 다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불행하게도 흉년이 해마다 들어 굶주림을 거듭 당하여 천륜(天倫)이 끊어져 인류(人類)가 서로 잡아먹기에 이르렀으므로 성문(城門) 가까운 거리에 산더미같이 시체가 쌓였으니, 인심은 이미 다 흩어졌고 나라의 형세를 믿을 만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를 위하는 계책으로는 오직 서둘러서 절약해 줄여서 백성의 곤궁함을 풀어주는 것뿐입니다. 궁가(宮家)의 절수(折受)가 점점 넓어져서 군현(郡縣)에 경작하지 않는 전지(田地)가 거의 없고 차인(差人)324)  의 불법한 침탈(侵奪)이 더욱 방자하여 촌락(村落)의 재물이 다해 공허하게 되었는데도 전하께서 궁부(宮府)를 일체(一體)로 보아 통쾌하게 혁파(革罷)를 단행하셨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내외의 여러 신하들이 조금만 위복(違覆)함이 있으면 문득 듣기 싫어하는 뜻을 보이시니 진실로 생민(生民)으로 하여금 안정케 하고 국가를 태평하게 한다면 여러 궁가의 섬부(贍富)하지 않음이 무엇이 걱정되기에 전하께서는 유독 ‘길이 장래를 위한 계획을 간직하라.’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하의 허다한 과실이 바로 학문의 도(道)가 순수하지 못하고 정심(正心)의 공부가 아직 이르지 못한 데 관련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아! 존주(尊周)325)  의 의리는 세상의 교화와 이륜(彝倫)에 도움됨이 클 것입니다. 비록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종묘 사직(宗廟社稷)이 굴복당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열성(列聖)들이 위에서 인도해 높이 들고 선정(先正)들이 아래에서 드러내 밝혀서 군신(君臣) 대소(大小)가 ‘아픔을 참으며 원통함을 머금고 급박한 위기에 하는 수 없었다. [忍痛含急迫不得已]’는 여덟 글자를 마음속에 두고 입으로 말하여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지지 않게 한 것은 이 대의(大義)가 있음에 힘입었을 뿐인데, 세대(世代)가 멀어지고 때가 지나가서 이 의리가 점점 흐려져서 부질없는 말로 핑계댔다는 기롱(譏弄)이 함부로 행해지고 대의의 논설이 세상에서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대의(大義)에 말이 미치면 원통해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었는데 지금은 한 마디 말이라도 여기에 관련되면 반드시 뭇사람들이 조롱하고 웃으며, 옛날에는 연경(燕京)326)  에서 상품을 주든가 세폐(歲幣)327)  의 값을 받으면 모두 부끄럽게 여겼었는데 지금은 전대(專對)의 직임(職任)이 하나의 다투는 자리가 되어버려 거의 천지 사이에 존주의 의리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데까지 이르러서 십수 년 이래로 다시는 사대부(士大夫)의 입에 오르지도 않으니,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그 누가 대의(大義) 두 글자를 전하의 전정(殿庭)에서 입을 열어 말한 이가 있습니까? 앞뒤에서 사단(事端)으로 인하여 대략이라도 진달한 자는 단지 권혁(權爀)과 박필재(朴弼載) 두 사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의 말이 비록 적료(寂寥)하나 그의 마음은 숭상할 만한데도 전하께서 그를 돕고 장려하여 보호할 것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너무 심하게 거절하여 싫어하고 박대하는 안색이 이이(訑訑)328)  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그 면면(綿綿)하게 이어가 있는 것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얼마가서 다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연석(筵席)에서 한 말을 숨기고 꺼려하는 것은 본디 성세(盛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근일에는 이를 금함이 더욱 엄하여 문득 하나의 완비된 당연한 의리로 만들어졌으니, 도유(都兪)329)  하는 한 자리에서 말한 것은 공공연하게 말할 뿐인데 무엇을 숨길 것이 있겠습니까? 혹시 전파되는 말이 사실과 틀림이 많을 것을 염려한다면 사실과 틀리게 전파시킨 자를 죄줄 따름인데, 또한 어찌 이로 인하여 일체 엄금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옥계(玉階)330)  가 얼마 안되는 곳에서 위에서 큰 과실이 있어도 바로잡을 길이 없을 것이며, 아래에서 의절(義節)같이 하지 않는 자가 있어도 규탄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니, 그 해가 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정원 19일 밤 연석(筵席)에서의 설화(說話)에 대하여 이미 누설하지 말라는 금령이 있어서 사람들이 얻어 들을 수는 없겠으나, 다만 앞뒤의 하교(下敎)가 난보(爛報)331)  에 나온 것을 보건대 그것이 큰 관계가 있고 큰 조치인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 발설한 말과 행한 일은 비록 적은 것이라도 오히려 숨길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큰 것이겠습니까? 그 일이 진실로 숨기는 것이 타당하고 누설하는 것이 부당하다면 처음부터 말하지 않는 것이 옳으며 만일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말했다면, 이미 말해 놓고 도리어 숨기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세와 도리로 추구하더라도 숨겨서는 안될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날의 입시(入侍)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과 승지(承旨)·사관(史官)들이 있었으니, 이를 듣고 아는 자가 두서너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똑같은 성교(聖敎)이고 똑같은 신료(臣僚)인데 입시한 여러 신료가 얻어 들은 것을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아직도 들을 수 없단 말입니까? 그것이 숨겨서 안되는 첫째입니다. 이미 우사(右史)에게 쓰라고 명하셨고 또 한 봉(封)의 문자(文字)를 사책(史冊)에 실으라고 부탁하였으니, 이는 당세(當世)에는 숨기려 하고 후세에는 숨기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하(天下) 고금(古今)에 어찌 후세에는 숨기지 않을 것을 당세에는 유독 숨기려 하고 후세에는 반드시 듣게 할 것을 당세에서는 감히 들어서 안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숨겨서 안되는 그 둘째입니다. 극비에 부친 것이 이미 엄하였기 때문에 그 마음이 반드시 의혹(疑惑)될 것이고 들은 것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이 반드시 잘못 와전되어 사람마다 말을 달리하고 집집마다 뒤집어 전파되어 한번 전하여서는 적은 것이 크게 되고 두번 전하여서는 없는 것이 있게 되며, 서너번 전하게 되어서는 더해지고 보태져서 더욱 그 진실이 변경될 것이니, 이것을 원근(遠近)에 전파하고 야사(野史)에 기록한다면 전하께서 법을 엄하게 하여 금하려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숨겨서 안되는 그 셋째입니다. 그 뒤 성교(聖敎)에 ‘모두를 사필(史筆)에 실어 후세의 공정(公正)한 논의를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는데, 그 일이 국가의 큰 시비(是非)에 관계가 있다면 마땅히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여 팔방(八方)에 보이고 후세에 질정할 따름인데, 지금 전하께서는 시비를 명확하게 말씀하시려고는 하지 않고 단지 난대(蘭臺)332)  에 깊이 간직한 것을 핑계하여 후세의 곤월(袞鉞)을 빌려고 하시니, 후세에서 오늘을 논의하는 자들이 오늘날을 어떠한 시대로 여기겠으며 전하를 어떠한 군주(君主)라 말하겠습니까? 이것이 숨겨서 안되는 그 넷째입니다.
영남(嶺南)의 한 도(道)는 우리 나라의 추로(鄒魯)333)  인데 근자에 난역(亂逆)이 느닷없이 일어나 한 지방의 수치를 남겼으니, 이는 진실로 영남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영남 사람을 대처함에 있어서 거의 그 도리를 잃었으니, 반드시 말하기를, ‘위로하여 무마하여야 한다. 불안해 하는 자를 안심하도록 한다.’ 하면서 별다른 인물(人物)처럼 보니, 이것은 영남 사람 전체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전체 영남의 사대부(士大夫) 거의가 대단한 원한을 품고 소장(疏章)을 진달하여 억울함을 펴게 해 줄 것을 호소함은 괴상할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 두 재신(宰臣)들의 연주(筵奏)에서 말한 뜻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나, 그 일에 대하여 분별하여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은 옳지 않은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나, 성교(聖敎)를 끌어서 별어(別語)를 부연해 내어 그 말의 실수를 엄포하고 여러 사람들의 노여움에 사과를 구하려고 심지어는 ‘동·서·남·북의 사람들이 거의 까마귀의 암수를 구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까지 하였으니, 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특별히 암컷과 수컷은 있으나 그것이 까마귀인 것은 일반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온 동방(東方) 전 국토의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의심을 면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어전(御前)에서 아뢰는 말은 결코 이같이 망령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끝으로 김유경(金有慶)에 대한 처분이 타당치 않음과 사교(辭敎)가 중도에 지나친 실수를 논하였는데, 소장이 들어오자 임금이 19일 하교한 뒤에 감히 구습(舊習)을 생각한다 하면서 엄한 분부로 꾸짖고 그의 관직을 파할 것을 명하고 저들에게 기휘(忌諱)할 말이 있다는 이유로 소본(疏本)을 궐내에 유치(留置)하였다.

 

경상도 진주(晋州)에 사나운 천둥을 하였는데, 벼락을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6월 10일 기미

오원(吳瑗)을 부교리로, 윤경룡(尹敬龍)을 수찬으로, 오언주(吳彦胄)를 부수찬으로, 정수기(鄭壽期)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구이후(具爾垕)·이만종(李萬宗)·신필대(申必大)를 신문(訊問)하였는데, 신필대는 승복(承服)하였다.

 

6월 11일 경신

정언섭(鄭彦燮)을 충청도 관찰사로, 신방(申昉)을 경기 관찰사로, 윤용(尹容)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적도(賊盜)가 범행을 승복한 뒤에 도신(道臣)을 시켜 직접 신문하게 한 것은 실로 신중히 심리(審理)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처리케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황해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도적 다스리는 법은 차라리 급하게 하고 느슨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체를 뿌리째 뽑아버리려고 하니, 마침내 신형(愼刑)하는 방도에 부족함이 있다면서 전에 지시한 대로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토포사(討捕使)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도적을 다스리기 위하여 책임을 지운 것이다. 만일 도신을 시켜 직접 신문하게 한다면 이는 토포사가 쓸데없는 관직이 될 것이고 도신이 직접 신문하는 것도 역시 그 폐단이 없을 것임을 어찌 알겠는가? 토포영(討捕營)에서 캐어물어 취초(取招)한 다음에 수령으로 하여금 동추(同推)하여 고찰해 사실을 자세히 밝혀낸다면 어찌 소홀할 염려가 있겠는가?"
하고는 처음에 하교한 것을 중지시키라 명하였다.

 

임금이 죄인 신필대(申必大)에게 용법(用法)하는 것의 마땅함과 마땅하지 아니함을 대신(大臣)과 참국(參鞫)한 여러 대관(臺官)에게 묻고 하교하기를,
"의금부로 하여금 국문(鞫問)케 한 것은 대역(大逆)이 자백한 다음에 정법(正法)을 하려고 한 것인데, 이제동(李濟東)과 같이 모의했다는 말은 허망하다. 다시 이귀흥(李貴興)과 서로 통했다는 일과 무신년334)   적군(賊軍)이 패몰 한 뒤 법망(法網)에서 빠져 나와 도망하여 살았다는 말을 문목(問目)에 보태어 넣어 이로써 실정을 다 자백한다면 곧바로 법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사헌부 【지평 한덕량(韓德良)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의주(義州) 사람이 역관(譯官)에게 살해를 당했는데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역관을 위하여 끝내 성옥(成獄)335)  을 하지 않으니, 청컨대 의주 부윤을 잡아다 심문하게 하소서."
하자, 아뢴 대로 따랐다. 사간원 【정언 조진세(趙鎭世)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북도(北道) 어사(御史) 조한위(趙漢緯)가 물한년(勿限年)336)   정배 죄인(定配罪人) 김우태(金遇兌)가 곡식을 내어 백성을 구했다는 공로를 장계(狀啓)로 포양(褒揚)하였는데, 김우태는 반 도(道)의 전세(田稅)를 교묘한 못된 꾀로 농락하여 막대한 수량의 늘릴 이익을 손실되게 하였으니, 실로 백성과 나라의 모특(蝥螣)337)  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김우태에게 논상(論賞)을 허락하지 말고 어사를 추고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추고하는 것은 오히려 가벼우니 특별히 그의 관작을 파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헌릉(獻陵)338)   직장(直長) 이휘천(李輝千)을 당초에 멀리 귀양을 보낸 것은 좌죄(坐罪)된 바가 가볍지 않았던 것인데, 도로 본직(本職)을 제수하여 물의(物議)가 떠들썩하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적(典籍) 방성규(方聖規)는 흉악한 역적의 동기(同氣)로서 의관(衣冠)의 반열에 섞여 있으니, 청컨대 사판에서 지워버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아울러 아뢴 대로 따랐다.

 

6월 12일 신유

김호(金浩)·한덕전(韓德全)·홍경보(洪景輔)를 승지로, 조최수(趙最壽)를 예조 참판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교리 조명겸(趙明謙)이 김약로(金若魯)가 견책 파직된 것으로써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신구(伸救)하니, 비답하기를,
"김약로의 일에 대하여 이같이 힘씀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죄인 이예(李預)를 심문하였으나, 전과 같이 공초하였다. 후천(後天)에게 세 차례 형문(刑問)하였으며 다시 신필대(申必大)를 신문하여 세 차례 형문하고 사죄(死罪)로 결안(結案)하였다.

 

모역(謀逆)에 함께 참여하고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한 죄인 신필대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처참(處斬)하였다. 신필대는 안성(安城)의 적진(賊陣)에서 몸을 빼 나와 도망하여 돌아와 성명(姓名)을 고치고는 그의 농장(農場)에 내왕하였는데, 신해년339)   가을에 이귀흥(李貴興)이 농장으로 신필대를 찾아가 모의 하기를, ‘이러한 흉년에 백성들의 굶주림을 이용하여 도당(徒黨)을 불러 모아들였다가 그 무리들이 많이 흩어져 있기를 기다려 여러 길을 쫓아 얼음이 굳게 얼었을 때 강을 건너 곧바로 경성(京城)을 침범하자.’ 하였고 이제동(李濟東)도 역시 그 모의에 참여했는데, 여러 번 형을 가한 다음에야 비로소 승복하였다. 처음에는 이만종(李萬宗)·이흥득(李興得)이 역모에 함께 참여했다고 끌어대었는데 이때에 와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거짓 끌어대었다고 자복(自服)하여 ‘모역에 함께 참여하고 사람을 악역으로 무함하였다.’는 것으로 그 형률(刑律)을 감정(勘定)하였다.

 

황재징(黃再徵)·황재흥(黃再興)을 작처(酌處)·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고, 황택(黃澤)은 극변(極邊)에 정배하고, 황재엽(黃再曄)·황재섬(黃再暹)은 원지(遠地)에 정배하고, 기석(起石)은 포청(捕廳)에 이송하고 구이후(具爾垕)·이흥득(李興得)은 도로 포청으로 보내고, 이만종(李萬宗)은 바로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구이후도 역시 신필대(申必大)가 끌어댄 것이었다. 황재징은 황진기(黃鎭紀)의 친족으로 황진기를 기포(譏捕)하던 날에 그가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알고도 붙들어 들이지 않고 그가 와서 보는 것을 그대로 맡겨두었으며 황재흥(黃再興)은 황진기가 망명(亡命)하던 때를 당하여 서로 수이산(戍伊山)의 집에 모여서 닭을 잡고 개를 삶아 놓고는 위로하였으므로 죄가 망사(罔赦)340)  에 해당되어 삼척(三尺)341)  을 면하기 어려웠으나, 임금이 황재징은 기석(起石)의 초사(招辭)가 눈으로 직접 본 것과는 다르고 황재흥은 율문(律文)으로 비추어 보더라도 또한 사죄(死罪)에까지는 이르지 않으니, 쓰러져 죽을 때까지 형을 가하는 것은 자세하게 살피고 삼가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다 하여 아울러 작처(酌處)할 것을 명하였다.

 

6월 13일 임술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전주(全州)의 백성으로 홍대은악(洪大隱岳)이라 이름을 일컫는 자가 있었는데, 행동이 수상하여 전라 감영(全羅監營)에 붙잡혀 와서는 그 아비 홍하성(洪夏成)이 무신년342)   역당(逆黨)에 함께 참여하였다가 다행히 법망(法網)에서 빠져 나왔으므로 늘 일찍이 간쟁(諫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고 공초(供招)를 바쳤으며, 남원(南原)의 괘서(掛書)가 있은 뒤에는 잡아가는 죄인을 보고서 한탄하기를, ‘이번 일도 또한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였는데, 또 그 뒤에 말을 바꾸어 말하기를, ‘막 염병(染病)을 겪어서 광증(狂症)이 갑자기 발동하여 전날의 고한 바는 모두가 속인 것이다.’ 하였다고 도신(道臣)이 이로써 장문(狀聞)하였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종성(李宗成)이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 조현명(趙顯命)의 장계(狀啓)를 보니, 자식이 그 아비를 고발한 옥사(獄事)가 있었으니, 당초에 그 자식이 아비를 고발했다는 것은 대단히 흉악한 일이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하지 못할 바였은즉 그의 무고(誣告)한 바가 비록 지극히 중대하다 하더라도 이미 그 자식의 말로 인하여 그 아비를 붙잡아 가둘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그를 다시 추문(推問)한 것이 이미 무고한 것을 승복한 뒤에 나왔고 또 ‘네 아비가 무슨 혐원(嫌怨)이 있었느냐?’는 등의 말로써 문목(問目)을 만들어 낸 것은 더욱 부당하니, 청컨대 감사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율령(律令)을 상고하는 것도 또한 느리게 해서는 안될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의(稟議)하게 하여 묘당(廟堂)에서 분명하게 즉시 형률을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의 범한 바가 강상(綱常)에 관계된다면 다시 자세하게 추문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느냐?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따르겠다. 임금과 아버지는 다름이 없어서 도리에 어긋나게 윗사람을 속인 것이 극률(極律)에 관계된다면, 아비를 악역(惡逆)으로 무함한 것도 형률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를 해당 부(府)로 하여금 삼성 추국(三省推鞫)343)  의 예에 따라 서울로 잡아오게 하여 법을 상고해 처단토록 하라."
하였다.

 

부교리 유최기(兪最基)가 상소하여 김약로(金若魯)가 견파(譴罷) 당한 것을 신구(伸救)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김약로가 상소한 말은 심중에 품고 있는 것을 숨김없이 진달하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그가 임금의 덕(德)을 진달하고 세도(世道)를 개탄한 것은 깊게 논사(論思)의 체모를 얻음이 있으니, 이는 장려할 만한 것이지 죄줄 수는 없습니다. 대저 옥당(玉堂)에서 일을 진언한 상소에 대하여 한 글자의 비답(批答)도 내리지 않고 엄한 말씀으로 견책(譴責)하신 것을 사방에서 전해 듣고는 ‘그 상소에 임금의 덕을 논한 것이 많은 까닭에 즐겨 듣지 않으려고 이와 같이 했다.’고 말한다면, 장차 무슨 말씀으로 그 의혹을 풀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19일의 연교(筵敎)를 숨기고 말로 전하지 않은 것을 근거없이 억측하는 무리들은 그 말이 갈래가 많아서 조정의 절반 정도의 신하들은 거개가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는 터인지라 김약로가 반포해 알리라는 요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그가 말한 김유경(金有慶)의 일에 있어서는 그때 성상의 하교가 실로 왕언(王言)의 실수이고 성덕(聖德)의 누가 되었으므로 그가 거듭거듭 말하여 그칠 줄을 모른 것은 김유경의 처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재신(宰臣)의 상소 가운데 암수 까마귀에 비유한 말은 한 시대를 속이기 위한 데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했은즉, 김약로가 간략히 경책(警責)할 것을 청한 것은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재신은 말의 차실(差失)을 가져온 데 지나지 않는데도 전하께서는 그의 말을 변동할 수 없는 바른 변론으로 삼으려 하시니, 이는 성명(聖明)께서 도리어 온 세상이 의심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끝으로 옥사(獄事)를 다스림이 대단히 느슨하고 국청(鞫廳)의 죄수를 작처(酌處)한 실수를 논하니, 임금이 엄한 분부를 내려 죄인을 변명해 구원하려 한다고 꾸짖었다.

 

6월 14일 계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김약로의 상소는 임금의 덕(德)을 힘써 권면하고 경계하였는데도 그 날의 하교(下敎)는 꺾어 누르는 데에 지나쳤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약로의 소장(疏章)은 그 가슴속에 가득 찬 것이 구습(舊習)뿐이며, 유최기(兪最基)도 처분하려 하였으나 하지 않았다. 영남(嶺南)에 대한 한 부분은 잊고 버려 두는 것이 옳겠다. 19일의 하교에 ‘모든 당(黨)에 다 난역(亂逆)이 있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는데, 이제 박문수(朴文秀)의 암수의 까마귀가 구별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로 인해 심지어 경책(警責)할 것을 청한다고 한 것이 그 과연 말이 되겠는가? 이미 하교를 하고 또 경책을 더한다면 먼 후세에 나를 어떠한 임금이라 하겠는가? 조명겸(趙明謙)의 사람됨을 나는 일찍이 마음이 넓고 너그러운 줄 알았는데, 날마다 등대(登對)하고도 한 마디도 김약로의 일에 제언(提言)함이 없다가 끝에 가서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신구(伸救)하니, 이 사람 또한 그 웅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유최기의 사람됨도 그리 심각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주서(朱書)344)  의 글뜻의 토론으로 인하여 정우량(鄭羽良)이 ‘오늘날의 신자(臣子)로서 누가 구습(舊習)을 품고 있겠느냐?’는 말이 있자, 유최기가 냉소(冷笑)하며 정우량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그대가 어떻게 구습을 잊은 것을 아는가?’ 하기에 나는 거짓 못들은 척하였으나 전석(前席) 가까운 자리에서 어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광덕(李匡德)을 호남(湖南)에 내려 보낼 때에 그의 사면(辭免)으로 인하여 나처(拿處)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제가 엄명(嚴明)에 핍박되어 내려간 것인데 무슨 보내 줄 것을 청한 일이 있었기에 이것을 처분이 엄하지 않았다고 하며, 정홍제(鄭弘濟)·이광운(李光運)에 있어서는 대각(臺閣)에 사람이 부족하여 겨우 자리를 채웠던 것이었는데 갑자기 유상(柳相)에 대한 계사(啓辭)를 냈으니, 그들의 정태(情態)를 볼 수 있는데도 처벌이 지나치다고 말하니, 쌍방이 도와주고 억압함이 아주 달라서 김약로의 논의와 한 조각으로 두드려 만들어진 것이 모두 가슴속에 가득찬 옛 습성뿐이니, 처분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조명겸(趙明謙)이 유최기(兪最基)의 소장에 대한 비답이 대단히 준엄하다 하여 소장을 올려 광구(匡救)하고 또 전주(全州)에서 자식이 아비를 고발한 일로 인하여 종이 주인을 고발하고 아들이 아비를 증언(證言)한 것은 거짓과 진실을 논할 것 없이 먼저 한 차례 엄형(嚴刑)을 더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유의할 만한 것은 유의하겠으며, 말단의 일은 그대로 실시하겠다."
하였다.

 

6월 15일 갑자

윤득화(尹得和)를 부교리로, 구칙(具侙)을 전라 우수사로, 유동무(柳東茂)를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이예(李預)와 최두징(崔斗徵)을 면질(面質)시키고 최두징을 한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6월 16일 을축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명겸(趙明謙)이 글뜻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남강(南康)에서 백성을 진휼(賑恤)할 때 거듭 기근(飢饉)이 든 나머지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 기미가 있으므로 구황(救荒)하는 데 적절한 일들을 진계(進戒)하면서 추위에 상하여 큰 병을 앓은 사람에게 비유하였으니, 이는 대개 풍년이 들었다 하여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면 연달아 흉년이 든 나머지 미처 소생(蘇生)하지 못하면 생활을 보전할 수 없기 때문이니 이는 바로 오늘날의 일과 서로 유사합니다. 올해에 비록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성상의 생각을 해이하게 갖지 말고 끝까지 부지런히 구휼한 다음에야 백성들이 은혜를 입어 보전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참 절실하다."
하였다. 조명겸이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도봉 서원(道峰書院)은 주문공(朱文公)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과 서로 비슷합니다. 도봉 서원은 산수(山水)의 수려함이 8도(八道)에 거의 비교할 곳이 없는데,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입니다. 옛날에 전답(田畓)을 내려 준 것이 있었는데, 지금 세금을 내는 가운데로 들어갔으니, 청컨대 종전대로 환급(還給)케 하소서."
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이예(李預)·최두징(崔斗徵)·후천(後天)을 심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6월 17일 병인

함경도(咸鏡道) 고원군(高原郡)에 우박이 내리고 부령(富寧)·종성(鍾城) 등 고을에는 서리가 내렸다.

 

6월 18일 정묘

어유봉(魚有鳳)을 승지로, 박필균(朴弼均)을 부수찬으로, 송수형(宋秀衡)을 사간으로, 황재(黃梓)를 집의로, 민원(閔瑗)을 지평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자문(咨文) 가운데에 빠진 말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의 서찰로 인하여 비로소 깨달았다.’하면서 고쳐서 다시 지어 보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개 정미년345)  에 저들이 자문을 보내 왔을 때 ‘국경(國境)을 넘어가 노략질한 자가 있으면 바로 포박(捕縛)해 보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를 잊어 버리고 지금 자문을 보낼 때에 또 번거롭게 범월(犯越)을 엄중하게 금단해 줄 것을 청했기 때문이다.
사신은 말한다. "변명해 주달(奏達)하거나 상대방에 대해 응답하는 글은 마땅히 처음 초고(草稿)를 작성하고 다시 문장(文章)을 수식할 때 자세하고 정밀하게 살펴서 엉성하고 경솔하여 업신여김을 당할 후환이 없게 하여야 한다. 더군다나 저들에게 보내는 자문 중 긴요하게 관계되는 말들을 애당초 등록(謄錄)조차 자세히 살피지 않고 있다가 끝에 가서야 의주 부윤의 서찰로 인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고 뒤쫓아서 고쳐 짓기를 청하니, 대신의 게으르고 소홀함이 지나치다. 평상시에도 묘당(廟堂)에서 허겁지겁하고 총망함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어찌 전쟁이 어지러울 즈음에 일의 기회(機會)에 따라 대응해 처리하여 사령(辭令)을 잘해 분란(紛亂)을 해결하기를 바라겠는가?"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초의 목식(草衣木食)의 뜻으로써 하교(下敎)하였는데 그 뜻인즉 깊은 바가 있다. 대저 아끼어 쓰고 검소하고 간략하게 한다는 그 명목(名目)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진실로 이를 실행한다면 그 효과가 명목보다 나을 것이다. 내가 입는 의복에 있어서 곤복(袞服)은 비단으로, 상복(常服)은 명주로 하며 일산(日傘)에 이르러서는 해어졌다 하여 갈자고 청한 것을 아직 중지하라 명하였다. 인군(人君)이 문을 나서면 반드시 일산을 벌리고 동궁(東宮)이 서연(書筵)에 나갈 때도 역시 일산을 벌리므로 1년 동안 벌리지 않을 때가 적은지라 그것이 해어지기가 쉽기 때문에 비가 올 때는 젖을 것을 염려하여 우산(雨傘)으로 교체하였다. 어가(御駕)를 움직일 때는 비록 우산을 쓰더라도 늘 쓰는 일산은 명주로 만드는 것이 옳을 것이니, 호조 판서는 알아두라." 하였는데,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검소함을 숭상하는 덕은 참으로 지극하십니다. 만일 매사에 항상 이 마음을 가지신다면 어찌 재정이 넉넉하여 나라가 풍족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좌부승지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승정원은 왕명(王命)을 출납하는 곳인데 기밀 문서(機密文書)를 어찌하여 뜯어 볼 수 없습니까? 일전에 포청(捕廳)에서 죄인 기석(起石)의 봉초기(捧招記)를 봉하여 왔는데, ‘전례에 열어 봐서는 안된다.’ 하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받아들였고,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도 역시 봉하여 내렸으므로 또 열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승정원에서 보아서는 안될 문서(文書)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선(承宣)의 말을 마치도록 기다리지 않아도 나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무신년346)   이후의 잘못된 전례이다. 이 뒤로 비록 인주(人主)가 억울하게 사람을 죽이고 포장(捕將)이 함부로 형벌을 더하는 일이 있다 해도 승정원에서 어디로 좇아 이를 알겠는가? 차후로는 해방(該房) 승지가 뜯어본 뒤에 신근봉(臣謹封)이라 써서 들이고, 계하(啓下)347)  한 뒤에도 역시 열어 보고 봉하여 내리도록 하라." 하고 이어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5책 34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60면
【분류】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사학(史學)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사법(司法) / 왕실-국왕(國王)


[註 345] 정미년 : 1727 영조 3년.[註 346]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347] 계하(啓下) : 임금의 재가를 받음.
사신은 말한다. "변명해 주달(奏達)하거나 상대방에 대해 응답하는 글은 마땅히 처음 초고(草稿)를 작성하고 다시 문장(文章)을 수식할 때 자세하고 정밀하게 살펴서 엉성하고 경솔하여 업신여김을 당할 후환이 없게 하여야 한다. 더군다나 저들에게 보내는 자문 중 긴요하게 관계되는 말들을 애당초 등록(謄錄)조차 자세히 살피지 않고 있다가 끝에 가서야 의주 부윤의 서찰로 인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고 뒤쫓아서 고쳐 짓기를 청하니, 대신의 게으르고 소홀함이 지나치다. 평상시에도 묘당(廟堂)에서 허겁지겁하고 총망함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어찌 전쟁이 어지러울 즈음에 일의 기회(機會)에 따라 대응해 처리하여 사령(辭令)을 잘해 분란(紛亂)을 해결하기를 바라겠는가?"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초의 목식(草衣木食)의 뜻으로써 하교(下敎)하였는데 그 뜻인즉 깊은 바가 있다. 대저 아끼어 쓰고 검소하고 간략하게 한다는 그 명목(名目)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진실로 이를 실행한다면 그 효과가 명목보다 나을 것이다. 내가 입는 의복에 있어서 곤복(袞服)은 비단으로, 상복(常服)은 명주로 하며 일산(日傘)에 이르러서는 해어졌다 하여 갈자고 청한 것을 아직 중지하라 명하였다. 인군(人君)이 문을 나서면 반드시 일산을 벌리고 동궁(東宮)이 서연(書筵)에 나갈 때도 역시 일산을 벌리므로 1년 동안 벌리지 않을 때가 적은지라 그것이 해어지기가 쉽기 때문에 비가 올 때는 젖을 것을 염려하여 우산(雨傘)으로 교체하였다. 어가(御駕)를 움직일 때는 비록 우산을 쓰더라도 늘 쓰는 일산은 명주로 만드는 것이 옳을 것이니, 호조 판서는 알아두라."
하였는데,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검소함을 숭상하는 덕은 참으로 지극하십니다. 만일 매사에 항상 이 마음을 가지신다면 어찌 재정이 넉넉하여 나라가 풍족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좌부승지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승정원은 왕명(王命)을 출납하는 곳인데 기밀 문서(機密文書)를 어찌하여 뜯어 볼 수 없습니까? 일전에 포청(捕廳)에서 죄인 기석(起石)의 봉초기(捧招記)를 봉하여 왔는데, ‘전례에 열어 봐서는 안된다.’ 하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받아들였고,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도 역시 봉하여 내렸으므로 또 열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승정원에서 보아서는 안될 문서(文書)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선(承宣)의 말을 마치도록 기다리지 않아도 나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무신년346)   이후의 잘못된 전례이다. 이 뒤로 비록 인주(人主)가 억울하게 사람을 죽이고 포장(捕將)이 함부로 형벌을 더하는 일이 있다 해도 승정원에서 어디로 좇아 이를 알겠는가? 차후로는 해방(該房) 승지가 뜯어본 뒤에 신근봉(臣謹封)이라 써서 들이고, 계하(啓下)347)  한 뒤에도 역시 열어 보고 봉하여 내리도록 하라."
하고 이어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사헌부 【지평 한덕량(韓德良)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통천군(通川郡)에 삼성 추국(三省推鞫)할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석 달을 끌고 미루어 아직까지 등문(登聞)하지 않으니, 청컨대 경옥(京獄)으로 잡아와서 형률에 의하여 처단하고 해당 추관(推官)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이어 주추관(主推官)348)  을 우선 잡아와 조처하라 명하였다.

 

사간원 【정언 조진세(趙鎭世)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태학(太學)은 현사(賢士)와 관련된 곳인데 당의(黨議)가 있은 이후로는 또한 경알(傾軋)하는 곳이 되었으니, 국자장(國子長)349)  이 된 도리로 마땅히 순순(諄諄)하게 교회(敎誨)함을 다해야 하는데도 새로운 것을 본받음은 벌써 아득하고 옛날 투식을 오히려 좇고 있습니다. 청컨대 대사성(大司成) 조명익(趙明翼)을 종중 추고(從重推考)케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국청(鞫廳)의 죄수를 작처(酌處)하여 이예(李預)는 먼 지방으로 정배(定配)하고 길선징(吉善徵)은 곧바로 방송(放送)하였다.

 

6월 19일 무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경기 감사 신방(臣昉)과 전 감사 윤양래(尹陽來)가 함께 들어왔다.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면서 시독관(侍讀官) 조명겸(趙明謙)이 글뜻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주자(朱子)의 이 장계(狀啓)에 당중우(唐仲友)350)  의 죄상(罪狀)을 논열(論列)하였는데, 당중우가 비록 척출(斥黜)을 당하였으나 주자도 파직되었으니, 소인(小人)의 해(害)가 이와 같습니다. 근래의 일로 말하더라도 무릇 죄를 범한 자가 힘이 있으면 죄가 있어도 요행히 면하고 세력이 없으면 허물이 없는데도 죄를 입으니, 이는 유념(留念)할 만한 곳입니다."
하매,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어제 자문(咨文)에 관한 일을 보더라도 정미년351)  의 일이 멀지 않은데도 벌써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다행히 의주 부윤(義州府尹)의 제보(提報)로 즉시 고쳐 지어서 무사하게는 되었으나 이는 오늘날 모든 신하들이 국사(國事) 보기를 가사(家事)와 같이 아니하여 자기 일신에 담책할 뜻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만일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와 이인엽(李寅燁)같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충근(忠勤)하게 국사를 담당하는 자가 있었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재하자(在下者)에게만 오로지 그 책임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진실로 능히 어진이를 선택해서 국사를 함께 하여 위임해 그 공효를 이루도록 책임지웠다면 어찌 이런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글 가운데 정소숙(鄭昭叔)352)  이 ‘합문(閤門)을 닫고 일을 사절하고는 열흘 동안 깊이 생각한 끝에 여러 관원을 모아 고한 말은 참으로 좋다.’하였는데, 단지 자신만 통달해 이해한 데 그치지 않고 요좌(僚佐)들로 하여금 다 이해하도록 하였으니, 일을 행함의 성실(誠實)함과 마음가짐의 공평(公平)함을 다 볼수가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 만일 사람마다 정소숙의 마음을 가진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근래 낭묘(廊廟)에 있는 사람들이 피곤하고 초췌(憔悴)하여 병을 이룬 것은 그들의 노고(勞苦)와 안일(安逸)을 고르게 하지 못한 까닭이다. 정소숙의 이 말을 널리 알려서 칙려(飭勵)하는 방도를 삼으려 하니, 옥당(玉堂)에서 한 통(通)을 베껴 내어 정원(政院)에 보내어 비국(備局)에 반포해 알리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신방을 앞으로 나오라 명하여 백성을 구휼하는 정치를 면칙(勉飭)하고 또 윤양래를 나오라 명하여 경기(京畿)의 백성에 관한 일을 물으니, 윤양래가 말하기를,
"거듭 굶주린 나머지 금년에 비록 풍년이 든다 하여도 오래 묵은 포흠(逋欠)을 만일 아울러서 징수한다면 백성들이 장차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영월(寧越)에 재임(在任)할 때 장릉(莊陵)353)  을 봉심(奉審)하였는데 당초의 상설(象設)이 단지 망주(望柱)와 무석인(武石人)만 있고 비석이 없었습니다. 능소(陵所)가 대단히 먼데 만일 비기(碑記)가 없으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무엇으로 능침(陵寢)이 있는 곳을 알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북도(北道)를 안무(按撫)하면서 모든 능(陵)을 두루 봉심하였는데 역시 다 비석이 있었는데 그 길이는 두어 자를 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장릉에도 역시 여기에 의하여 비석을 세워 아무 대왕(大王) 아무 능이라 쓴다면 마땅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침이 있는 데가 대단히 멀고 또 성고(聖考)354)  께서 추복(追復)한 것이 뜻이 있으니 선대(先代)의 뜻과 서업을 계승하는 도리에 있어서 문적(文跡)이 없을 수 없다. 듣건대, 북도의 모든 능의 비석도 역시 다 검약하다 하니 여기라 해서 또한 어찌 반드시 풍대(豐大)하게 하겠는가? 아직 앞으로 봐서 본도(本道)에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자, 윤양래가 말하기를,
"영월에는 원래 비석에 마땅한 돌이 없습니다. 신이 재임할 때에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비석을 세웠는데 돌의 품질이 대단히 좋지 못하였으니, 경사(京司)에서 돌을 다듬고 글자를 새겨서 수로(水路)를 따라 능소로 운반하면 편리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월 수령이 오히려 엄호장의 비석을 세웠는데, 나라에서 능침에 아직도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하고,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묘당(廟堂)에 물어 거행하게 하였다. 엄흥도는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했을 때 충성을 다하여 노고를 바친 사람이다.

 

6월 20일 기사

정언(正言) 조진세(趙鎭世)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승지(承旨)의 의망(擬望)은 큰 관계가 되거나 큰 흠절이 아니면 빼어 버리지 않는 것이 전례인데, 한 사람의 참의(參議)가 독정(獨政)355)  하여 이미 윤용(尹容)을 빼내고 또 이현보(李玄輔)를 빼냈는데 윤용은 오랫동안 미워하고 싫어함을 당하여 반드시 지색(枳塞)하고야 그만두려 하니, 아! 너무 심합니다. 이현보가 빼어 버림을 당한 데 이르러서는 그 붙인 제목에 ‘과명(科名)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말하였으니, 나라에서 실시한 과거인데 등제(登第)한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으며 반드시 부정(不正)한 것으로 명목을 삼는 것은 유독 무슨 까닭입니까?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섭(徐宗燮)에게는 마땅히 견책(譴責)하는 벌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관(銓官)을 추고(推考)하라 명하였다. 이현보가 그의 동생 이철보(李喆輔)와 임인년356)  의 위과(僞科)에 함께 함격하였는데, 영조(英祖)가 등극함에 미쳐 그 방(榜)을 회복시키고 방목의 명칭은 지워 버렸다. 뒤에 여러 신하들의 논쟁으로 인하여 방의 명칭을 그전대로 회복하였으나 전관은 그 과명이 바르지 못함을 이유로 의망할 즈음에는 때로 혹 곤란하게 여겼다.

 

6월 21일 경오

상원군(商原君) 이공(李糿)이 졸(卒)하였다. 공은 탄(坦)의 아들로서 연령군(延齡君)의 뒤를 이었었는데 무신년357) 탄의 일이 일어났을 때 미처 그 형적(形跡)이 더욱 위축되었으나 특별히 홍치중(洪致中)의 말에 힘입어 연령군(延齡君)의 후사(後嗣)를 파하지 않아서 연좌(連坐)의 형률을 면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임금이 정원(政院)에 하교(下敎)하기를,
"무신년의 일을 차마 어찌 말하겠는가? 빨리 계후(繼後)한 것을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였는데도 처분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모든 일을 전례와 같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이세근(李世瑾)이 대궐에 나아가 소(疏)로 진달하여 휴퇴(休退)할 것을 청원하니, 임금이 허락하면서 소대(召對)하는 연석(筵席)에서 인견(引見)하고 치사(致仕)케 하여 봉조하(奉朝賀)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명겸(朝明謙)이 글뜻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말한 바 장세형(張世亨)을 보임(補任)하자고 청원한 것은 가히 오늘날의 본보기가 될 만합니다. ‘자신의 사사로운 곡식으로 백성을 진휼(賑恤)한 자는 양전(兩銓)에서 수용(收用)한다.’고 한 조령(朝令)은 있으나 거행하지 아니함이 많으니, 실로 격려 권장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호남백(湖南伯) 조현명(趙顯命)이 사소(辭疏)에서 인용한 ‘주자(朱子)가 남강(南康)에 있을 때 거취(去就)를 결정했다.’는 말이 바로 이 일이다. 이는 조정에서 사람을 속인 것이다."
하고, 해조에 신칙하여 차례대로 수용하라 명하였다. 이때에 윤대관(輪對官)358)  을 동시에 들어오라 명하여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각기 직사(職事)를 진달하라 하니, 참찬관(參贊官)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해당 부서에서 윤대(輪對)하는 것이 비록 전례를 좇는 사실이나 아마도 다스리는 방도에는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밤이 깊도록 온갖 정사(政事)를 보살피신 여가를 이용하거나 동조(東朝)께 문안을 드린 뒤에 자주 승지(承旨)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친히 판단을 내리신다면 긴절한 효과가 있을 듯합니다. 옛날 조종조(祖宗朝)의 번성할 때는 이조·병조·형조·호조의 판서(判書)를 불러 전곡(錢穀)과 결옥(決獄)의 수효를 물으셨으니,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규례인데 그 실제의 효과가 됨이 반드시 근래에 상참(常參)과 차대(次對)에서 형식적으로 수응하고 숫자를 갖추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다 좋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6월 22일 신미

승지 한덕전(韓德全)·홍성보(洪聖輔) 등이 상원군(商原君)의 상(喪)에 은전을 내려 감싸 주라는 분부를 받들어 행할 수 없다 하여 아뢰기를,
"무신년359)   이후로는 대우함이 달랐으니, 그의 이름이 아직까지 그대로 있다 하여 갑자기 상전(常典)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관명(官名)이 있으면 마땅히 거행함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분부한 까닭에 도리어 응행(應行)해야 할 상전을 중지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사헌부 【지평 민원(閔瑗)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승선(承宣) 의망(擬望)에서 빼어 버림을 당한 감정으로 전조(銓曹)를 쳐서 흔들려는 계획을 마음대로 드러냈으니 그의 정상(情狀)을 깊이 살펴보건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정언(正言) 조진세(趙鎭世)를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승지의 의망을 임의로 빼버린 데 대하여 겨우 칙려(飭勵)하였으니, 설령 조진세가 협잡(挾雜)한 사사로운 뜻이 있었다 하더라도 대체(大體)는 옳다. 대관(臺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전관(銓官)을 위하여 도리어 대신(臺臣)을 배척하니, 참으로 한심(寒心)한 노릇이다."
하였다.

 

6월 23일 임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영의정 심수현(沈壽賢), 우의정 김흥경(金興慶), 좌참찬(左參贊) 송인명(宋寅明)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쳐 지은 자문(咨文)의 하단의 구어(句語)가 온당치 못하다. 이 자문은 외국 사람이 오래 머물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써 사유(事由)를 갖추어 보내는 데 불과한 것인데, 하단에 이른바 ‘성총(聖聰)에 옮겨 진달하여 굽어 처분을 내려 달라.’고 한 것은 마치 대국(大國)으로 하여금 처분해 달라고 말한 것 같음이 있으니, 이러한 자질구레한 일을 어떻게 황상(皇上)의 지휘를 청할 수 있겠는가? 삭제하는 것이 타당하며, ‘강요와 공갈을 멋대로 행하였다.’고 한 것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강요 공갈하였다.’라고 고치는 것이 옳겠다."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6월 25일 갑술

별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의 괴성(魁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꼬리의 길이가 두서너 자였고 색깔은 붉었다.

 

임금이 대사성(大司成) 조명익(趙明翼)과 동성균(同成均) 김취로(金取魯)를 명소(命召)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는데, 재유(齋儒)360) 윤봉삼(尹鳳三)과 이석민(李錫民)도 또한 불러들이게 하여 꾸짖는 분부를 내리고는 조명익에게 명하여 유생을 인솔하고 반중(伴中)361)  에 가서 들어오도록 권고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재유배(齋儒輩)들이 조진세(趙鎭世)가 피혐(避嫌)한 것이 관철되지 않은 것은 사석(師席)을 업신여겼다는 이유로 권당(捲堂)362)  을 발론하였는데, 동서재(東西齋) 반수(班首)363)  의 의논이 둘로 갈라져서, 동재(東齋)의 유생에 김이복(金以福)·이동복(李同復)·김우중(金遇中)·이정중(李定中)이 있었는데, 서재(西齋)의 유생들이 ‘배가 같다[同腹]느니, 배가 다르다[異腹]’느니, 또는 ‘우연히 맞혔다[偶中]’느니, ‘바로 맞혔다[正中]’는 등의 말로 기롱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소란이 일어났다고 동지관사(同知館事) 윤유(尹游)가 초기(草記)로 진달하였으므로 재유를 불러들여 친히 타일러서 깨달아 알도록 한 것이다.

 

6월 26일 을해

이현보(李玄輔)를 승지로, 이윤신(李潤身)을 지평으로, 심성희(沈聖希)를 헌납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수찬으로 삼았다.

 

6월 27일 병자

경상도에서 여역(癘疫)으로 1천 7백 11인이 사망하였고, 창녕현(昌寧縣)과 금산군(金山郡)에서는 심한 천둥으로 벼락을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6월 28일 정축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영의정 심수현(沈壽賢)과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함께 입시(入侍)하여 대제(大祭)를 친히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억지로 따랐다.

 

특별히 이조 판서 심택현(沈宅賢)을 파직하였다. 심택현이 참의(參議) 서종섭(徐宗燮)이 조진세(趙鎭世)에게 탄핵(彈劾)을 당하여 마침내 견파(譴罷)되기에 이르렀다 하여 자인(自引)하는 소(疏)를 여러 번 올리고 연달아 위패(違牌)364)  하기를 일삼으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다.

 

연령군(延齡君)의 후사(後嗣)였던 상원군(商原君) 이공(李糿)을 파하고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연령군의 후사를 별도로 세우도록 명하였다.

 

6월 30일 기묘

별이 위성(危星)의 위로 흘러갔는데 모양은 주먹같고 꼬리의 길이는 네댓 자나 되었으며 색깔이 붉었다.

 

황해도 곡산(谷山)·수안(遂安)·신계(新溪) 등 고을에 충재(蟲災)가 대단히 치성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향(香)과 축문(祝文)을 보내어 포제(酺祭)를 설행하게 하였다.

 

김취로(金取魯)를 이조 판서로, 이용(李榕)을 사간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정언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응교로, 밀창군(密昌君) 이직(李織)을 사은 겸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로, 민응수(閔應洙)를 부사(副使)로, 윤휘정(尹彙貞)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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