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5권, 영조 9년 1733년 7월

싸라리리 2025. 9. 12.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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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경진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을 인견(引見)하니,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과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청대(請對)하여 같이 들어갔다. 서명균이 아뢰기를,
"심양(瀋陽) 예부(禮部)에서 일찍이 곧장 이자(移咨)하는 규례가 없었는데, 정미년365)  에 호가패(胡嘉珮)의 사건으로 비로소 심양에서 이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방색(防塞)하고 치계(馳啓)하였는데 성상께서 이미 황지(皇旨)가 없으면 자문(咨文)을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하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돌아온 사행(使行)의 별단(別單)에 황지에서 나왔다고 했기 때문에 대신(大臣)이 수의(收議)하여 곧 그 자문을 받았습니다. 이제 또 이자한 일이 있는데, 만약 황지가 없다고 해서 받지 않는다면, 저 사람들이 ‘지난번엔 비록 황지가 없어도 받더니, 이제 와서는 어찌하여 받지 않는가.'라고 할 것이니, 대답할 말이 없게 되어 혹 사단이 생길까 합니다. 여러 대신의 의논도 역시 모두 ‘굳이 거절할 수 없다.’고 하니, 정미년 하교에 의거하여 먼저 방색하다가 끝내 회청(回聽)시키지 못하게 되면, 받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민진원에게 고문(顧問)하니, 대답하기를,
"피차간의 사체(事體)로 논한다면 심양의 예부에서 이자하는 의도는 불가할 것이 없고 또 정미년에 이미 받은 전례가 있으니, 황지가 없으면 받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봉성장(鳳城將)에게 급히 통보하였다가 그가 만약 굳이 다툰다면 또한 받도록 허락하셔야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이치에 의거하여 다투어 고집하다가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면 형편상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는 마땅히 한번 정식(定式)해야 하니, 이러한 뜻으로 예부(禮部)에 글을 보내어 묻되, ‘심양 예부에서 만약 이자가 있으면 비록 황지가 없더라도 또한 마땅히 곧장 거행하여야 하는가? 않아야 하는가?’ 하고, 그 답하는 것을 보아서 곧 정식하는 것이 마땅하며, 지금 이 회자(回咨)에도 또한 이러한 뜻으로 말단에 글을 꾸며 예부에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민진원이 일어섰다 엎드려 말하기를,
"신(臣)이 구구하게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있어 황공하나마 감히 상달(上達)하옵니다. 지금 나라의 형편이 외롭고 약한데다가 또 거듭 기근(飢饉)을 만나 인심이 안정되지 않고 있으므로 신민(臣民)의 간절한 소망은 오직 종사(螽斯)366)  의 경사에 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작년 초봄에 신이 명종조(明宗朝)의 고사(故事)에 유의하실 것을 우러러 진달한 바 있었고, 그해 여름에 또 아뢰자 성상께서 ‘나 또한 어찌 일시라도 잊고 있겠느냐?’고 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올 봄에 후궁(後宮)의 소생(所生)에서 또 실망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과연 신이 말씀 드린 것에 유의하신다면 신 등의 마음에도 의지하고 믿는 바가 있겠습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이 일이 가장 편당(便當)한데, 만약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경사가 있게 되어 앞으로 성사(聖嗣)가 탄생한다면 내간사(內間事)는 절로 흔적이 없게 될 것이고, 혹시라도 불행하게 뜻밖의 사변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이를 믿어 근심이 없을 것이니, 지금 국가의 심장(深長)한 근심과 염려가 이를 넘지 아니합니다. 보잘것없는 고루한 말이라도 성인(聖人)이 또한 선택한다고 하였으니, 다시 더 유의 하시기를 천만번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진달한 바가 대체로 좋은데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 말에 따르겠다는 하교를 받자와 들은 연후에야 대내의 일은 비록 감히 알 수 없겠으나 또한 믿는 바가 있게 되어 신민(臣民)의 마음을 위로하겠습니다."
하자,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이 일은 옛날에도 또한 행한 자가 있었고 의임(倚任)하는 대신(大臣)이 혹 지적히여 곧바로 진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기와 형편은 옛날과는 다름이 있어 애초 기본(基本)이 없으면 그 형편이 진실로 어렵습니다. 신이 감히 아래에서 우러러 진달할 수 없습니다만, 돌아 보건대 지금 저사(儲嗣)를 광구(廣求)하는 방도는 오직 마땅히 의약(醫藥)으로 기혈(氣血)을 보(補)하는 것이 마땅하니, 신이 전날 진달한 바가 진실로 긴요하고 절실한 요무(要務)입니다."
하고, 김흥경(金興慶)은 말하기를,
"지금 나라의 형편이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에 이르렀으니, 대소 신료(臣僚)가 누군들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경술년367)   이후로 아직 종사(螽斯)의 경사가 없으니, 좌상(左相)이 진달한 약으로 보하여 저사(儲嗣)를 광구(廣求)하시라는 말에 진실로 마땅히 유의하셔야겠습니다. 그리고 봉조하(奉朝賀)가 진달한 것도 또한 좋은 말입니다. 지금 비록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지적하여 하교(下敎)하시지 않더라도 이미 유의하시라는 것으로써 우러러 청하였으니, 성상께서 또한 반드시 유의하셔야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자못 기쁘게 여기지 않고 말하기를,
"유의하겠다고 답하는 것 외에 다시 무슨 가합한 말이 있단 말인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아무리 그렇기는 하나 만일 ‘말한 것에 따르겠다’고 하교하신다면 진실로 기쁘고 다행스럽겠습니다."
하자, 서명균은 말하기를,
"지금 논할 만한 기본이 없으니 어찌 곧바로 청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황옥현(黃玉鉉)의 일로 친국(親鞫)할 때 송인명(宋寅明)이 ‘이것은 국가에서 금령(禁令)을 둔 것이 아니다.’고 했는데, 말인즉 옳다만 지금 나라 형편이 전과 다르다. 경연(經筵)이 아무리 은밀한 곳이라고 하나 대신(大臣)이 진달한 말은 자연이 누설되기 쉽다. 오늘날 세도(世道)로 보아 진정시키는 데 힘써야 할 것인데, 봉조하는 매양 내가 유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 또한 나라의 형편을 생각하고 있으니, 어찌 유의하지 않겠는가? 이런 일은 밖으로는 아무리 소홀한 것처럼 하나 안으로는 깊이 살피는 것이 옳다. 나라의 형편이 외롭고 약하여 아래에서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자가 많이 있다. 봉조하는 비록 이것을 답답하게 여기지만 나는 진정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지금 괘서(掛書)의 변(變)으로 보건대, 또한 나라의 형편이 고단(孤單)한 소치에서 나왔으니, 신민(臣民)의 분통(憤痛)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안에서 스스로 유의하겠다는 하교(下敎)를 받자오니 신(臣)의 마음에 진실로 다행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아! 저위(儲位)가 오래 비어 있으니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일종의 흉역(凶逆)의 무리가 방자하게 넘겨다보고 제멋대로 억측(臆測)하여 장차 함부로 날뛰려고 하니, 종국(宗國)의 근심은 위태롭기가 한 가닥 머리카락에 달려 있는 것과 같다. 원로 대신(元老大臣)의 심혈을 기울이는 고충(孤忠)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해 사생(死生)을 돌보지 않고 전후의 간곡한 말은 진실로 나라를 위하고 자신을 잊는 뜻에서 나왔다. 그런즉 당시 정승이 된 자가 또한 어찌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나라의 근본이 소중한 줄을 몰랐겠는가마는 단지 눈치나 살피자는 계획으로써 그 말하기 어려운 것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이에 약을 복용하여 후사(後嗣)를 구하는 것으로 권면(勸勉)하여 미봉(彌縫)하였으니, 옛날 대신(大臣)이 국가(國家)의 주석(柱石)이 되는 의리가 또한 이와 같았단 말인가? ‘지금 논할 만한 기본이 없다.’고 한 말에 이르러서는 장차 임금의 마음으로 하여금 의심하고 노여워하게 만들 인심을 영원히 두절(杜絶)시킨 것이니, 거의 사람에게 화를 입히고 나라를 그르치는 데로 귀착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거듭 흉년이 든 끝에 도 역질(疫疾)을 만나 죽은 백성이 거의 절반이나 되니, 무릇 떠돌아다니다가 죽은 자를 모두 사실대로 위에 아뢰게 하여야 합니다. 민간(民間)에 기근(饑饉)이 들어 먹을 것이 없으니 금년의 농사는 진폐(陳癈)가 반드시 많아질 것은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이달 내로 먼저 전재(全災)368)  를 주도록 허락하소서. 가을에 가서 비록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만약 그 진대(賑貸)한 것을 죄다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백성이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마땅히 받을 것과 받지 못할 것을 연조별(年條別)로 구별하여 일찍 공문(公文)을 내려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알아서 거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군포(軍布)를 제감(除減)하는 영(令)도 또한 마땅히 겨울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일찍 구획하여 실질적인 혜택이 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뭇 신하로 하여금 소장(疏章)을 올릴 때에 ‘성(聖)’ 자를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본받을 만합니다. 《서경(書經)》에 ‘말이 네 뜻에 손순(遜侚)함이 있거든 비도(非道)에 구해 보고, 네 뜻에 거슬림이 있거든 도(道)에 구하여 보라.’고 하였으니, 무릇 소장 가운데서 성덕(聖德)을 찬양한 말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실정(實情)을 살펴서 통렬히 배척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서명균이 유중(留中)한 오광운(吳光運)의 상소에 있는 ‘권강(權綱)을 모두 장악하였다.’거나 ‘적(賊)을 바라보고 투항(投降)했다.’는 등의 말은 말뜻이 옳지 못하다 하여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김흥경은 말하기를, "그 상소를 본 자는 모호한 뜻이 있어 의사(意思)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서명균은 말하기를, "그 논의(論議)의 변환(變幻)을 배척한 것은 홍성보(洪聖輔)·나학천(羅學川)의 무리를 지적한 것 같고, 적을 바라보고 투항했다는 것은 과연 이 무리를 지적한 것인지는 모르나 어의(語意)가 진실로 지나칩니다." 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한때의 이해(利害)에 추부(趨附)하여 그 논의를 변환시킨 자라면 잘못이지만 사리(事理)의 시비(是非)를 밝게 보고 잘 변환시킨 자라면야 어찌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369)   전에 그 소본(疏本)을 보고 황연(怳然)히 크게 깨달은 자는 옳다고 하겠으나, 혹은 좌(左)로 하고 혹은 우(右)로 하며 반복하여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자는 내가 일찍이 그르게 여겼다. 영남(嶺南)의 나학천과 같은 무리는 신축년370)  ·임인년371)   뒤에 초출(超出)되었고 오광운은 무신년 뒤에 초출하였는데, 초출한 것은 같으나 조금은 다른 점이 있다. 오광운은 남을 책망하기는 잘한다 할 수 있다. 오광운은 신축년과 임인년의 일을 옳다고 하였고, 나학천은 신축년과 임인년의 일을 그르다고 하였으니, 이 점을 내가 일찍이 나학천을 가상하게 여긴 것이다. 그 상소를 궁중에 유치한 것도 바로 진정시키려는 뜻이었다. 오광운의 적(賊)을 바라보고 투항하였다는 말을 그르다고 한다면 홍봉조(洪鳳祚)의 ‘한인(漢人)의 얼굴에다 오랑캐의 심장(心腸)’이란 말은 또 어떠한 것인가? 오광운과 같은 자는 부평초(浮萍草)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깊이 책망하고 싶지 않다. 만약 그 소를 그르다고 한다면 어찌 추고(推考)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6책 3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62면
【분류】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구휼(救恤) / 재정(財政) / 군사-군역(軍役) / 정론-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보건(保健)


[註 365] 정미년 : 1727 영조 3년.[註 366] 종사(螽斯) :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한 번에 알을 99개를 낳는다 하여, 부부(夫婦)가 화합하여 자손(子孫)이 번창함을 비유한 말로 쓰임.[註 367] 경술년 : 1730 영조 6년.[註 368] 전재(全災) :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수세조(收稅條)에 보면, "전부 재상(災傷)을 입은 전지는 면세(免稅)한다"고 하였음. 곧 전부 재상을 입어 면세받은 전지.[註 369]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370]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371] 임인년 : 1722 경종 2년.
사신은 논한다. "아! 저위(儲位)가 오래 비어 있으니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일종의 흉역(凶逆)의 무리가 방자하게 넘겨다보고 제멋대로 억측(臆測)하여 장차 함부로 날뛰려고 하니, 종국(宗國)의 근심은 위태롭기가 한 가닥 머리카락에 달려 있는 것과 같다. 원로 대신(元老大臣)의 심혈을 기울이는 고충(孤忠)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해 사생(死生)을 돌보지 않고 전후의 간곡한 말은 진실로 나라를 위하고 자신을 잊는 뜻에서 나왔다. 그런즉 당시 정승이 된 자가 또한 어찌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나라의 근본이 소중한 줄을 몰랐겠는가마는 단지 눈치나 살피자는 계획으로써 그 말하기 어려운 것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이에 약을 복용하여 후사(後嗣)를 구하는 것으로 권면(勸勉)하여 미봉(彌縫)하였으니, 옛날 대신(大臣)이 국가(國家)의 주석(柱石)이 되는 의리가 또한 이와 같았단 말인가? ‘지금 논할 만한 기본이 없다.’고 한 말에 이르러서는 장차 임금의 마음으로 하여금 의심하고 노여워하게 만들 인심을 영원히 두절(杜絶)시킨 것이니, 거의 사람에게 화를 입히고 나라를 그르치는 데로 귀착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거듭 흉년이 든 끝에 도 역질(疫疾)을 만나 죽은 백성이 거의 절반이나 되니, 무릇 떠돌아다니다가 죽은 자를 모두 사실대로 위에 아뢰게 하여야 합니다. 민간(民間)에 기근(饑饉)이 들어 먹을 것이 없으니 금년의 농사는 진폐(陳癈)가 반드시 많아질 것은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이달 내로 먼저 전재(全災)368)  를 주도록 허락하소서. 가을에 가서 비록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만약 그 진대(賑貸)한 것을 죄다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백성이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마땅히 받을 것과 받지 못할 것을 연조별(年條別)로 구별하여 일찍 공문(公文)을 내려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알아서 거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군포(軍布)를 제감(除減)하는 영(令)도 또한 마땅히 겨울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일찍 구획하여 실질적인 혜택이 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뭇 신하로 하여금 소장(疏章)을 올릴 때에 ‘성(聖)’ 자를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본받을 만합니다. 《서경(書經)》에 ‘말이 네 뜻에 손순(遜侚)함이 있거든 비도(非道)에 구해 보고, 네 뜻에 거슬림이 있거든 도(道)에 구하여 보라.’고 하였으니, 무릇 소장 가운데서 성덕(聖德)을 찬양한 말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실정(實情)을 살펴서 통렬히 배척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서명균이 유중(留中)한 오광운(吳光運)의 상소에 있는 ‘권강(權綱)을 모두 장악하였다.’거나 ‘적(賊)을 바라보고 투항(投降)했다.’는 등의 말은 말뜻이 옳지 못하다 하여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김흥경은 말하기를,
"그 상소를 본 자는 모호한 뜻이 있어 의사(意思)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서명균은 말하기를,
"그 논의(論議)의 변환(變幻)을 배척한 것은 홍성보(洪聖輔)·나학천(羅學川)의 무리를 지적한 것 같고, 적을 바라보고 투항했다는 것은 과연 이 무리를 지적한 것인지는 모르나 어의(語意)가 진실로 지나칩니다."
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한때의 이해(利害)에 추부(趨附)하여 그 논의를 변환시킨 자라면 잘못이지만 사리(事理)의 시비(是非)를 밝게 보고 잘 변환시킨 자라면야 어찌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369)   전에 그 소본(疏本)을 보고 황연(怳然)히 크게 깨달은 자는 옳다고 하겠으나, 혹은 좌(左)로 하고 혹은 우(右)로 하며 반복하여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자는 내가 일찍이 그르게 여겼다. 영남(嶺南)의 나학천과 같은 무리는 신축년370)  ·임인년371)   뒤에 초출(超出)되었고 오광운은 무신년 뒤에 초출하였는데, 초출한 것은 같으나 조금은 다른 점이 있다. 오광운은 남을 책망하기는 잘한다 할 수 있다. 오광운은 신축년과 임인년의 일을 옳다고 하였고, 나학천은 신축년과 임인년의 일을 그르다고 하였으니, 이 점을 내가 일찍이 나학천을 가상하게 여긴 것이다. 그 상소를 궁중에 유치한 것도 바로 진정시키려는 뜻이었다. 오광운의 적(賊)을 바라보고 투항하였다는 말을 그르다고 한다면 홍봉조(洪鳳祚)의 ‘한인(漢人)의 얼굴에다 오랑캐의 심장(心腸)’이란 말은 또 어떠한 것인가? 오광운과 같은 자는 부평초(浮萍草)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깊이 책망하고 싶지 않다. 만약 그 소를 그르다고 한다면 어찌 추고(推考)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하였다.

 

7월 2일 신사

형조(刑曹)에 명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더위가 한창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좌윤(左尹) 오광운(吳光運)이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그가 전에 올린 상소를 배척했다 하여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여러 신하의 등철(登徹)되지 않은 상소 때문에 인혐(引嫌)하는 상소는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때 우부승지 홍성보(洪聖輔)가 좌상(左相)의 연주(筵奏)에서 오광운(吳光運)의 상소 가운데 ‘논의(論議)를 변환(變幻)시켰다.’는 말은 홍성보에게로 돌아간다고 했기 때문에 투소(投疏)하고 경출(徑出)372)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정언 신택하(申宅夏)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각(臺閣)에서 서로 규계(規戒)하는 체통은 모름지기 흑백(黑白)을 분별하는데 두어야 합니다. 지난날 헌신(憲臣)이 논박할 때 의도가 영호(營護)하는 데 있으면서 범연하게 ‘고감(敲撼)’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근거없는 말로 농락하였으니 이같은 정태(情態)는 남을 대신 부끄럽게 만듭니다. 신(臣)은 마땅히 견책(譴責)과 파직(罷職)을 더하여 그 당(黨)에 아첨하는 습성을 징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번에 이광세(李匡世)는 한 장의 상소에서 의리(義理)를 대략 분변하여 약간이나마 조정의 체통을 높였으니, 또한 직책(職責)을 저버리진 않았다고 할 만한데 선부(選部)에서 의망(擬望)을 저지하였으니, 실로 방자한 데 관계됩니다. 간신(諫臣)이 이미 승지의 망단(望單)에서 뽑아버린 일로 상소하여 논할 적에 단지 두 사람만 거론하고 이광세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또한 유독 무슨 심사란 말입니까? 혹은 논하고 혹은 논하지 않은 것은 아주 지극히 구차한 일입니다. 신은 체개(遞改)를 허락하여 대각의 체통을 보존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령(守令)을 선택하는 일은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가 되는데, 이용신(李龍臣)처럼 용렬하고 잗단 자가 요행과 기회를 타고 언제나 은혜로운 가직(加職)을 받았습니다. 이번 호남(湖南)의 군(郡)에 있어서 대신(大臣)이 택차(擇差)하는 일을 연석에서 아뢰고 전조(銓曹)에서 옮겨 의망(擬望)할 것을 계품(啓稟)하였으나, 필경에는 제목(除目)이 도리어 이 무리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신은 또한 마땅히 체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광세의 일은 옳다. 그러나 이미 그 직임을 체개(遞改)하였는데 어찌 심각(深刻)하게 치죄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용신의 일은 일찍이 기읍(畿邑)에서 치적(治績)이 있었다. 용렬하고 잗달다는 말이 적합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7월 3일 임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오광운(吳光運)의 두 번째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 내용에 신의 말이 짐작하여 헤아리지 못함이 있다고 하였으니, 혹은 이로 인하여 시끄러움을 야기시킬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광운의 첫 번째 상소의 뜻을 내가 이미 알았고 두 번째 상소한 어의(語意)도 과연 나의 뜻과 같았다. 그런데 그 내용에 신축년373)  ·임인년374)  의 일은 억누르고 을사년375)  ·병오년376)  의 일은 부추기는 말이 있는데, 무슨 의사를 지닌 것인지 이는 매우 긴요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정원(政院)에 내리지 않은 상소는 인혐(引嫌)할 수 없다는 하교가 있었으나 이는 진실로 금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정원에 내리지 않았더라도 상소의 내용이 이미 전파되었으니, 어찌 인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뒷날에 폐단을 열어놓는 것이다. 내가 처분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
하고, 인하여 승지에게 명하여 전교(傳敎)에 쓰기를,
"시폐(時弊)의 시작은 본래 경미(輕微)하였다. 지금 조정의 분위기를 조제(調劑)하고 기강(紀綱)을 엄격히 하는 때를 당하여 결코 그 전례(前例)를 따르기를 기다려 처치할 수는 없다. 지평 민원(閔瑗)과 전 대사간 이광세(李匡世)를 파직하고, 정언 신택하(申宅夏)와 부교리 조명겸(趙明謙)은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이광세는 소어(疏語)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누차 비난과 논박을 받았고, 조진세(趙鎭世)는 이현보(李玄輔)와 윤용(尹容)이 승지의 망단(望單)에서 빠진 일로 상소하여 전관(銓官)을 논박하였으며, 민원은 그 전관을 고감(敲撼)했다는 이유로 조진세를 견책(譴責)하여 파직시킬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조진세는 또 영남 어사(嶺南御史) 이종백(李宗白)이 ‘사민(士民)이 풍동(風動)377)   되었다.’는 말로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언섭(鄭彦燮)을 포장(褒奬)하여 아뢰었는데, ‘풍동’이라 한 것은 곧 고요(皐陶)378)  를 찬미한 말이었다. 이로 정언섭을 포장한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라 하여 이종백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였는데 윤허를 받았다. 그런데 조명겸(趙明謙)은 ‘풍동’이라고 한 것은 늘 쓰는 말이며 꼭 성현(聖賢)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데 조진세가 어구(語句)를 지적하여 논열(論列)함에 이르렀으니, 그 흐르는 폐단을 이루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에 상소하여 경책(警責)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제 와서야 이러한 처분(處分)이 있게 된 것이다.

 

7월 4일 계미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5일 갑신

중궁전(中宮殿)에 수두(水痘)의 증세가 있어 의약청(議藥廳)을 사옹원(司饔院)에 설치하고 약방의 세 제조(提調)가 숙직(宿直)하였다.

 

칠원현(漆原縣)의 양인(良人) 최개야지(崔介也之)의 처(妻) 신양금(辛良金)을 정문(旌門)하라고 명하였다. 최개야지가 범에 물려가자 신양금이 손으로 범의 꼬리를 움켜잡고 ‘내 남편은 놓아 두고 나의 살점을 먹으라.’고 크게 외치니, 범이 담을 넘어 골짜기로 뛰어갔다. 그런데도 오히려 꼬리를 움켜쥐고 따라가니, 범이 곧 그 남편을 팽개치고 도리어 그 처를 물어뜯어 남편은 모면하고 자신이 죽었다. 이에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전라도 해남현(海南縣)에 샘의 물이 마르고 소와 말이 목이 말라 죽었다.

 

7월 6일 을유

전라도에 가뭄이 혹심하였고, 해충(蟹蟲)의 재해(災害)가 있었다. 충청도에는 큰 비가 내려 곡식이 손상되고 사람과 가축이 물에 빠져 죽었다.

 

임금이 복부(腹部)에 편안치 못한 증세가 있었다. 약원(藥院)의 세 제조(提調)가 여러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들어가 진찰하였다.

 

홍상빈(洪尙賓)·정우량(鄭羽良)을 승지로, 이종성(李宗城)을 대사간으로, 유최기(兪最基)를 교리로, 심악(沈)·박필재(朴弼載)를 지평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정언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이조 참의로, 홍현보(洪絃輔)를 대사성으로, 윤순(尹淳)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7월 7일 병술

임금이 복부에 편안치 못한 증세가 더하므로 약원의 세 제조가 여러 의관을 거느리고 들어가 진찰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좌부승지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으로, 조명익(趙明翼)을 대사헌으로, 윤양래(尹陽來)를 동의금으로, 김상규(金尙奎)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8일 정해

임금이 복부에 편안치 못한 증세가 덜해졌다. 약원에서 진찰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7월 9일 무자

유성(流星)이 실성(室星)의 아래에서 나왔다.

 

임금의 증세가 완전히 회복되었으므로 조정의 문후(問候)를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중궁전(中宮殿)의 수두(水痘)와 모든 증세가 점차 나아졌으므로, 임금이 의약청(議藥廳)을 혁파(革罷)하고 본원(本院)에서 숙직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중궁전의 수두가 회복되었다 하여 무술년379)   홍진(紅疹)의 전례에 의해 태묘(太廟)에 고하고 교문(敎文)을 반포하며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리고 권정례(權停禮)로 하의(賀儀)를 거행하되 각도(各道)에다 방물(方物)이나 물선(物膳)을 봉진(封進)하지 말라 하고, 의정부와 육조에서도 또한 다만 표리(表裏)380)  만 올리게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이번의 칭경(稱慶)하는 문자(文字)에 환후(患候)가 회복되었다고 써 내고, ‘수두(水痘)’란 글자를 쓰지 말라."
하였다. 대개 수두는 비록 의서(醫書)에 있기는 하지만 대두(大痘)나 홍진(紅疹) 등의 증세와는 다름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주 감진 어사(濟州監賑御史) 심성희(沈聖希)를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심성희가 제주에 정배(定配)된 죄인이 매우 많은데다 거듭 흉년이 든 나머지 백성이 곤궁하여 능히 접제(接濟)하지 못한다 하여, 조령(朝令)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다른 읍(邑)으로 옮기고 장문(狀聞)했기 때문이었다.

 

7월 10일 기축

위원(渭原)에서 사로잡혀간 파수군졸(把守軍卒) 이수웅(李守雄) 등 세 사람이 피인(彼人)들 가운데서 풀려나 돌아왔는데, 이수웅은 곧바로 호복(胡服) 차림으로 도망쳐 버렸다.

 

7월 11일 경인

임금이 입직(入直)하는 승지(承旨)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겸하여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講)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이 장주(漳州)에서 9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난데 대하여 주자(朱子)가 형정(刑政)이 어긋나고 음양(陰陽)에 침박(侵迫)되었다며 스스로 허물을 인책(引責)하여 대죄(待罪)한 일을 들어 인군(人君)이 재해(災害)를 만나면 자신을 닦고 반성하는 방도를 미루어 논평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시독관 윤득화(尹得和)는 주자가 환장각(煥章閣) 대제(待制)를 사면(辭免)한 일을 경악(經幄)의 책임이 중요함의 증거로 삼고, 산중에서 독서(讀書)한 선비를 불러들여 성학(聖學)을 보완하기를 청하였다. 오원 또한 이에 대해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말한 것이 좋다. 산중에서 독서하는 것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우리 동방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자로 인재를 등용하기 때문에 경연(經筵)에 있는 자 또한 모두 과목(科目)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만약 ‘산중에 있는 사람이 참으로 식견이 고명(高明)하니, 내가 어떻게 따르겠는가?’하고 스스로 힘쓸 줄을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각각 스스로 힘써 선조(先朝)에서 경연을 설치한 의도가 그 명목만 있고 그 실효가 없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자의 시대에는 효종(孝宗)을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주자가 이처럼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만약 현철한 임금을 만났다면 주자가 어찌 나아가지 않았겠는가?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는 것은 옛부터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삼대(三代)381)   이후로 유독 한(漢)의 소열제(昭烈帝)가 공명(孔明)을 만난 일과 진(秦)의 부견(符堅)이 왕맹(王猛)을 만난 일이 있을 뿐이다. 효종이 비록 주자를 알아 주었으나 능히 쓰지 못했으니, 자못 기뻐는 하였으되 그 도(道)는 추구(推究)해 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오원이 말하기를,
"주자가 사면(辭免)한 모든 글은 곧 인신(人臣)이 관직을 사양하는 소장(疏章)으로서 성학(聖學)에는 관계가 긴요하지 않은 것 같으나, 성현(聖賢)이 나아가고 물러가며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데 정밀한 뜻과 오묘(奧妙)한 용도를 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주자의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것은 모두 굳게 지킨 바가 있는 것이니, 인군(人君)이 신하를 예(禮)로 부리는 도리에 있어 진실로 그 굳게 지키는 바가 있어 나아가지 않는 자에게 또한 억지로 핍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말한 것이 진실로 좋다. 그러나 굳게 지킨 것이라고 한 것은 마치 의도가 있어서 발설한 듯하다. 지금 사람들이 굳게 지키는 바가 없다고 해서 그런 것이라면 또한 지나치지 않는가?"
하였다. 오원이 말하기를,
"의견이 이와 같기 때문에 곧 진달했을 뿐입니다. 어찌 감히 시의(時議)를 끼고서 말했겠습니까? 옛날 사마광(司馬光)이 신종(神宗)에게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進講)할 때에 신종이 ‘경(卿)은 매양 시사(時事)를 풍자(諷刺)한다.’고 하니, 사마광이 대답하기를, ‘감히 그렇게 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저술(著述)의 뜻을 진술하려고 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본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감히 진달하였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오원에게 묻기를,
"지난날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듣건대 「유신(儒臣)이 임금이 무함당한 한 절목(節目)을 소장(疏章) 내용에 거론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하였는데, 과연 이런 말이 있었는가."
하였다. 오원이 말하기를,
"신(臣)은 일찍이 ‘심유현(沈維賢)의 무리가 복법(伏法)된 뒤 그 흉언(凶言)을 꾸며낸 정상을 누군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이제부터는 임금이 무함 당한 한 절목은 다시 제론(提論)할 필요도 없고 오직 징토(懲討)를 엄격히 더하여 거조(擧措)에 마땅함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이 지난번 상소 내용에 이 한 절목을 언급하지 않았고, 과연 김재로와 수작(酬酢)한 바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의 의견이 참으로 좋긴 하나 또한 늦은 것이다. 심유현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당초 설치(雪耻)할 만한 무고(誣告)가 없었다. 더구나 19일 하교(下敎)한 뒤에 다시 임금이 무함당한 것을 글에다 썼으니, 이것은 도리어 군부(君父)를 무함(誣陷)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어 부드러운 어조로 면계(勉戒)하기를,
"그대는 모름지기 조심하기를, 금석(金石)과 같이 굳게 하여 다시는 떠도는 의논에 동요되지 말라."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신이 감히 명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바야흐로 경연(經筵)에 있으니, 만약 또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어찌 감히 숨기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정언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접때 망명(亡命)한 역적(逆賊)의 비자(婢子)가 궁비(宮婢)가 되기를 꾀하여 함부로 궐내(闕內)에 들어갔으니 반드시 캐물을 만한 정상(情狀)이 있을 것인데, 이례(二禮)·이영남(李永男)의 무리가 완강하게 버티고 자복하지 않다가 급기야 경폐(徑斃)382)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역적 황진기(黃鎭紀)의 여러 족속(族屬)으로서 국문(鞫問)받게 된 자들은 마땅히 엄하게 신문(訊問)하여 정상을 캐내기를 기약해야 함에도 서둘러 앞서 짐작하여 처치하였으니, 물정(物情)을 크게 놀라게 하였습니다. 늦매(莻梅)에 이르러서는 본래 원범(元犯)으로서 그 어미가 유인(誘引)하여 들여보낼 때에 그 치밀하게 꾸민 정상을 알지 못했을 리가 만무한데 다시 국청(鞫廳)으로 옮긴 뒤에는 한 번의 신문도 더하지 않고 급작스레 감사(減死)의 형률(刑律)을 시행하였으니, 국청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결코 이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늦매를 밖에서 들어가도록 꾀한 자는 이례이고 안에서 끌어들인 자는 구월(九月)입니다. 늦매를 끌어들일 때 옷을 지어 준 것은 은밀한 뜻이 현저하게 있으니, 또한 마땅히 일체로 국문하여야 할 것인데 지레 서둘러 정배(定配)하였으니, 너무나도 방비를 엄격히 하는 뜻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실정을 캐내고 죄를 바로잡으소서. 해마다 거듭 흉년이 든데다가 역질(疫疾)이 겹쳤는데, 이번 대비과(大比科)383)  를 8월 보름 뒤로 정했으니, 시골에서 과거에 응시하려 하는 무리가 미리 곡식을 베어서 불때어 밥을 짓자면 소비가 적지 않습니다. 소과 초시(少科初試)는 우선 보름을 물려서 신곡(新穀)을 미리 베야 하는 폐단을 면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처분은 이미 상세히 살펴서 헤아림이 있었다. 대비과는 매번 조금씩 물릴 수 없으나, 사세(事勢)가 그대의 상소와 같다면 스무날 뒤로 물려서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황해도 신계현(新溪縣)에 폭우(暴雨)로 물이 불어나 민가(民家) 1백여 호(戶)가 침몰되었다.

 

7월 12일 신묘

임금이 사조(辭朝)하는 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고 직접 신칙하기를,
"그대들이 각각 백리 지방의 근심을 분담하게 되었으니, 반드시 착념(着念)하여 고을을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도에 오랜 가뭄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설행(設行)하였다.

 

강원도 통천(通川)에서 형과 재물을 다투다가 어미와 누이를 죽인 변고가 일어났다. 황해도 평산(平山)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죽인 자가 있었다. 도신(道臣)이 모두 장계(狀啓)로 알려온 것이다.

 

수찬 윤경룡(尹敬龍)을 척보(斥補)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삼았다. 이때 윤경룡이 관직(館職) 때문에 버티고 있다가 곤전(坤殿)의 수두(水痘)로 후반(候班)384)  에 나아가 참여하고는 곧바로 인입(引入)하니, 책망하는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사체(事體)가 엄격하다. 어찌 약원(藥院)에서 모두 입직(入直)하는 것과 입직을 철폐하는 것에 차이가 있겠는가?"
하고,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대개 아침나절에 보은 현감 이하귀(李夏龜)를 인견(引見)할 때 임금이 묻기를,
"보은은 이제동(李濟東)이 살던 곳이다. 만약 또 이제동의 무리가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스리겠는가?"
하니, 이하귀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그 분명하지 못함을 책망하고 얼마 안되어 윤경룡을 척보(斥補)하는 명이 있었다.

 

7월 13일 임진

제주(濟州)의 운수(運輸)를 감독하는 위유 어사(慰諭御史) 심성희(沈聖希)가 들어와서 탐라(耽羅) 세 고을의 구령 산천도(九嶺山川圖)와 제주 백성의 팔간도잠(八艱圖箴)을 바쳤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윤순(尹淳)·조석명(趙奭命)에게 가자(加資)하고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에게 말을 주었다. 의관(醫官)·의녀(醫女)에게 시상(施賞)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평안 감사 권이진(權以鎭)이 강변(江邊)의 사정을 염탐(廉探)하여 그곳 토인(土人)의 이야기를 얻어내어 말하기를,
"강계(江界) 고산리(高山里) 진영(鎭營) 건너편 저쪽 땅에 세동(細洞)·구랑합동(九郞哈洞)·고도수동(古道水洞)이란 세 동리가 있는데 세동은 이산(理山) 경계인 파저강(婆猪江)에 길이 통(通)하여 북쪽으로 심양(瀋陽)까지의 거리가 닷새 노정(路程)에 지나지 않으며, 호인(胡人)이 집 16, 7호(戶)를 짓고서 3, 4백 명이 상주(常住)하는데, 우리 나라 사람 3, 4명을 사역인(使役人)으로 두었고 그 주무자는 호족(胡族)인 산서인(山西人) 이등사(李登四)입니다. 위원군(渭原郡) 아래 파수진(把守津) 직동보(直洞堡) 사이에 추동(秋洞)이 있어 금년 초여름에 또한 집을 짓고 전토(田土)를 개간하였는데, 그 아래는 갈헌동(乫軒洞)이고 위는 파수진 건너편 야둔동(也屯洞)입니다. 또한 호인(胡人)의 집 14, 5호가 있는데 각종의 당화(唐貨)385)  가 7칸 창공에 채워져 있으며 우리 나라와 통상(通商)하여 우리 나라의 물건으로 또 심양 등 여러 곳에 통상하고 있습니다. 주관하는 호인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심양 사람 왕삼평(王三平)이고, 하나는 당성(唐姓) 혹은 탕성(湯姓)이라고 일컫는데, 이 세 호인은 모두가 만금(萬金)을 가진 대상(大商)으로서 법을 범하여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해 이곳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왕래하며 통상하는 자는 모두가 우리 나라 사람으로 호지(胡地)로 도망쳐 가 있는 자인데, 그 중에 아이진(阿耳鎭)의 관노(官奴)인 세필(世必)과 진졸(鎭卒)인 조영망(趙永望)이 가장 드러난 자입니다. 그 문서(文書)를 관장하는 자도 또한 우리 나라에서 도망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김서방(金書房)이라고 일컫는데 용모나 행동이 망명(亡命)한 적(賊) 황진기(黃鎭紀)와 흡사합니다. 황진기는 일찍이 마마해 권관(馬馬海權管)이 되었기 때문에 토인(土人)이 대부분 그 얼굴을 안다고 하는데 이 말이 꼭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또한 그렇지 않은지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또 그 각동(各洞)에 호인의 집은 이루 셀 수가 없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벌등(伐登) 건너편에 황제성평(皇帝城坪)이 있는데 풀이 풍성한 큰 들판에 늘 호마(胡馬) 수천 필을 방목(放牧)해 오다가 금년에는 한 필도 없으니, 모두가 삼(蔘)을 캐는 사람들이 끌어 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간민(奸民)들이 날마다 왕래하는데다 또 항상 호인의 막사(幕舍)에 머물러 양자(養子)로 칭탁(稱托)하면서 정의가 동기간(同氣間)보다 더하며, 우리 경내(境內)를 왕래하여 밤낮 들고남이 무상(無常)하니, 강변(江邊)의 백성들이 모두 저들의 사정을 알고 공공연히 전하여 말합니다. 그 조치할 방략(方略)은 신이 반드시 그곳에 직접 가서 일에 따라 계문(啓聞)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소소한 촌락(村落)을 모아서 큰 촌락을 이루고 그 잔보(殘堡)를 모아 큰 관부(官府)를 이룬 뒤에야 바야흐로 일분이나마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치계(馳啓)하여 알리니, 정원(政院)에서 밀봉(密封)하여 들였다.

 

7월 14일 계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충청 감사 정언섭(鄭彦燮)이 같이 들어갔다. 임금이 무신년386)   이후로 민심(民心)이 함닉(陷溺)되어 관장(官長)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인민(人民)을 진무(鎭撫)하고 겸하여 위령(威令)을 베풀라는 뜻으로 신칙하여 힘쓰게 하였다.

 

윤양래(尹陽來)를 도승지로, 송성명(宋成明)을 대사헌으로, 신만(申晩)을 헌납으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윤급(尹汲)·남태량(南泰良)을 수찬으로, 민형수(閔亨洙)를 부수찬으로, 이덕수(李德壽)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정의현(旌義縣) 사람 홍달한(洪達漢)을 포상(褒賞)하였다. 홍달한은 효성으로 어미를 섬겼다. 어미가 종기를 앓자 입으로 빨아내고 병이 심하자 손가락을 베어〈피를 먹였으며〉 똥을 맛보았다. 국상(國喪)을 만나면 문득 술과 고기를 철폐(撤廢)하고 초하루·보름과 상제(祥祭)나 담제(禫祭)에는 북쪽을 바라보고 울부짖었으므로, 어사(御史) 심성희(沈聖希)가 그의 충효(忠孝)를 장계하여 포상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5일 갑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해서(海西)의 상정미(詳定米)387) 대미(大米)388)  ·소미(小米)389)  도합 3천 석과 호서(湖西)의 전작미(錢作米)를 모두 곧 얼어붙기 전에 올려보내고, 호서(湖西)에 유치(留置)하여 진휼(賑恤)할 대동미(大同米) 4천 석과 호남(湖南)에 유치하여 진휼할 대동미 5천 석에 모곡(耗穀)을 합쳐 내년 봄을 기다려 태창(太倉)에 올려보내어 녹봉(祿俸)을 나누어 주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금년 가을에 제도(諸道)의 수군(水軍) 습진(習陣)과 조련(操鍊)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각도(各道) 번곤(藩閫)390)  의 군관(軍官)과 아병(牙兵)의 너무 많은 수효를 감축시켜 각읍(各邑)의 수포(收布)하는 정군(正軍)이 도망하거나 물고된 대리로 보충하라고 명하였으니, 황해 감사 박사수(朴師洙)의 장청(狀請)으로 인한 것이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평안 감사가 강변(江邊)의 일을 장품(狀稟)한 것 때문에 아뢰기를,
"이른바 김서방(金書房)이란 자의 경우 만약 그 일이 실제 그런 것인 줄 알고 있다면 왕래하며 서로 통한 사람은 의당 효시(梟示)하는 형률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변의 일은 자못 염려는 되나 실로 좋은 대책이 없다. 도신(道臣)이 청한 바 ‘촌락(村落)을 합쳐 관부(官府)를 설치한다.’는 것이 좋은 듯하나, 만약 완악한 백성으로 하여금 체결(締結)하여 여기에 모이게 한다면 더욱 훗날 사단을 일으키기 쉬울 것이니, 이는 상의하여 조처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묘당(廟堂)의 공사(公事)는 사흘을 지나면 잊어 버린다. 그 강론(講論)한 것이 한때 한가롭게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이른바 ‘의논(議論)이 정하여졌을 때에 오랑캐는 이미 강을 건너왔다.’는 격이다. 지금의 계획을 하는 것은 오직 마땅히 변장(邊將)과 수령(守令)을 뽑아서 거듭 변지의 금령(禁令)을 엄격히 할 뿐이다. 경(卿) 등이 의당 마음에 두고 잊지 않아서 늘 적환(賊患)이 당두할 것같이 여긴다면 거의 유익한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유(李瑜)가 아뢰기를,
"강화는 곧 진무영(鎭撫營)인데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진무영의 후영장(後營將)이 되었습니다. 만약 위급한 일이 있으면 연안 부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본영(本營)에 념겨 주고 그 수하(手下)에 있는 이노대(吏奴隊)를 가지고 본읍(本邑)으로 물러가 지켜야 합니다. 지금 방어해 지켜야 할 걱정은 서해(西海) 연변(沿邊)에 있으니, 만약 후영장으로 하여금 그 이노대를 거느리고 오로지 각산진(角山鎭)을 지키게 한다면 또한 급할 때 임하여 경계(警戒)히고 지키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근래에 황해 병사(黃海兵使)가 연안부(延安府)의 이노대를 순행하여 점검하고 그 관하(管下)에 소속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영장(營將) 하나에 대장(大將) 둘이 되는 셈인데, 호령(號令)이 두 군데서 나와 통솔하는 명령이 한 곳이 아니니, 급한 즈음에 영장이 된 자는 장차 어느 곳에 나가 명령을 따른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廟堂)에서는 황해 병사에게 분부하여 다시는 순행하여 점검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 【사간 이용(李榕)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곤전(坤殿)의 환후(患候)로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한 날 수가 많지 않은데 상전(賞典)이 지나치게 많으니, 청컨대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에게 가자(加資)하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대신(臺臣)이 피혐(避嫌)하고 유신(儒臣)이 편들므로 ‘아뢴 대로 하라.’는 비답을 내리고, 두 제조(提調)에게 가자하는 것을 도로 거두고 대신 말을 주었다.

 

임금이 과거(科擧)의 일이 너무 잦다 하여 곤후(坤候) 평복(平復)에 대한 경과(慶科)는 명년 봄으로 물려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15일 갑오

부수찬 민형수(閔亨洙)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신이 지난해 외람되게 간직(諫職)에 있을 때 난역(亂逆)이 방자하게 굴고 기강(紀綱)이 끊어짐을 눈으로 보고 대략 짧은 상소로 아뢴 것은 모름지기 이미 지나간 성무(聖誣)를 밝히고 앞으로 다가오는 화란(禍亂)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근본을 미루어 거슬러 논한다면 그 뜻이 당초 남의 죄를 논하는 데에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하는 자는 오히려 사나운 독기(毒氣)를 품어 원한을 하소연하는 소장이 차례로 나왔는데, 스스로 변면한다는 것이 자못 말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광좌(李光左)의 상소에 ‘7월 그믐 이후로 제조(提調)가 모두 숙직을 하고 약원(藥院)을 옮겨 설치하였다면, 증후(症候)의 위독함을 알 만한데, 시약청(侍藥廳)은 전례(前例)에 망극(罔極)했기 때문에 차마 거론(擧論)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 한 달이 지나도록 증후가 위독하였고 20일부터 중증(重症)을 더한 뒤에도 시약창을 설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점(大漸)391)  한 전날 저녁에서야 비로소 합문(閤門) 밖에 옮겨 숙직하기를 청하였으며, 입으로 전해온 계달(啓達)은 대부분 조보(朝報)에 빠뜨렸고 삼다(蔘茶)를 다음(茶飮)으로 일컬어 오히려 외인(外人)이 혹은 위중한 것을 알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옛부터 진실로 충성하는 신하가 약원에 있으면서 이러한 경우를 당하는 자가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전례가 망극한 것 때문에 시약청의 설치를 차마 하지 못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유독 이광좌에게만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겠습니까? 그 당시 성질(聖疾)을 굳이 숨긴 것은 다른 날 화란(禍亂)의 기본(基本)을 삼기 위한 것이요, 오늘날 자질구레한 절차만을 크게 늘어 놓는 것은 자기가 벗어날 도구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광좌의 말과 같이 한다면 교문(敎文)의 어세(語勢)는 본디 의당 ‘한 달이 지나도록 위독하다가 마침내 망극한 데 이르렀다.’고 하여 문자(文字)의 순서를 삼아야 할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갑작스레 밤중에 궤(几)에 기대었다.’고 말하여 일찍이 질환(疾患)이 없다가 갑자기 대점한 것처럼 하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광좌의 마음이 과연 가리고 숨기는 데서 나오지 않았다면 조태억(趙泰億)의 글이 그 또한 이상하다고 하겠으니, 이광좌와 조태억은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이광좌가 그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여 말을 장황히 늘어 놓았다면, 조태억이 지은 교문(敎文)이 스스로 망측(罔測)한 데로 귀착되어 돌아볼 겨를도 없게 될 것이니, 그 또한 애처로울 따름입니다. 교문의 지적한 뜻이 망측한 것은 실로 내력과 차서(次序)가 없는데다 갑자기 ‘반야(半夜)’ 두 글자를 썼으니, 조지빈(趙趾彬)이 하룻밤이니 밤중이니 한 것을 으레 쓰는 문자로 돌린 것은 어찌 매우 궁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광좌가 진실로 일분이나마 신자(臣子)로서 애통 박절(哀痛迫切)한 마음이 있었다면, 변란(變亂)의 초기에 어찌 한 장의 상소로서나마 대점 때 질환이 한달을 지나도록 위독한 상황을 다 폭로하고 또 미처 약청을 설치하지 못한 죄를 인책(引責)하여 성무(聖誣)를 씻고 남의 의혹을 푸는 단서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일언 반구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다가 역적을 다스릴 무렵에 이르러서는 또 다시 남몰래 가려 덮고 대부분 풀어 놓아 국가의 무궁한 앙화가 멈추어 안정될 날이 없게 하였으니, 그 전후 죄상을 추적하여 보면 《춘추(春秋)》의 법과 한(漢)나라의 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에 도리어 부도(不道)한 죄목을 억지로 신에게 씌웠으니, 그 말이 또한 분의(分義)를 몹시 망각한 것입니다.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죄명을 지고 어찌 감히 스스로 세상에 서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지난 일을 다시 제기하였으니 말이 지극히 무엄하다. 19일 하교한 뒤로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군부(君父)가 약을 먹지 않고 밤중에 불러 곡진하게 개유(開諭)하였는데, 누가 남의 아들이 되고서 그 아비가 타이르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그 임금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 감동됨이 없이 사직(辭職)을 빙자하여 이처럼 소란을 피운단 말인가? 신자(臣子)의 의절(儀節)이 다시 여지가 없다. 이런 사람은 반각(半刻)이라도 도성(都城) 안에서 살게 할 수 없다. 갑산(甲山)으로 투비(投畀)392)  하되, 성문이 닫히기 전에 출발시켜 보내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무신년393)   이후로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죄를 성토한 것으로 이 상소처럼 엄정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주상(主上)은 위를 무함한 흉언(凶言)이 오로지 이광좌가 병을 숨긴 사실과 조태억의 교문에서 비롯 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이제 와서 애초에 변명할 무함이 없다고 하였으며, 민형수(閔亨洙)의 무리가 변무(辨誣)한다고 말한 것이 도리어 역적의 구실거리가 되었다. 이것을 혐의로 삼아 점점 더욱 격렬해져 심지어 지난 일을 제기하여 말이 무엄하다는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민형수의 무리가 임금이 무함당한 것을 변명한다는 구실로 이광좌와 조태억의 죄를 얽어 놓은 듯함이 있었다. 한 번 말한 것이 겨우 들어가자마자 엄한 견책이 뒤따라 장차 의리가 밝혀지지 못하고 흉도(凶徒)가 그치지 않게 되었으니, 식자(識者)의 근심과 탄식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6책 35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6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왕실-국왕(國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정론-간쟁(諫諍)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註 391] 대점(大漸) : 임금의 병세가 위독함.[註 392] 투비(投畀) : 왕명으로 죄인을 지정한 곳에 귀양 보냄.[註 393]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사신은 논한다. "무신년393)   이후로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죄를 성토한 것으로 이 상소처럼 엄정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주상(主上)은 위를 무함한 흉언(凶言)이 오로지 이광좌가 병을 숨긴 사실과 조태억의 교문에서 비롯 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이제 와서 애초에 변명할 무함이 없다고 하였으며, 민형수(閔亨洙)의 무리가 변무(辨誣)한다고 말한 것이 도리어 역적의 구실거리가 되었다. 이것을 혐의로 삼아 점점 더욱 격렬해져 심지어 지난 일을 제기하여 말이 무엄하다는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민형수의 무리가 임금이 무함당한 것을 변명한다는 구실로 이광좌와 조태억의 죄를 얽어 놓은 듯함이 있었다. 한 번 말한 것이 겨우 들어가자마자 엄한 견책이 뒤따라 장차 의리가 밝혀지지 못하고 흉도(凶徒)가 그치지 않게 되었으니, 식자(識者)의 근심과 탄식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가 민형수(閔亨洙)의 상소 때문에 교외(郊外)로 나가자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효유(曉諭)하고 같이 들어오게 하였다.

 

7월 16일 을미

약방(藥房)의 문안 계사(問安啓辭)에 대해 비답(批答)하기를,
"더위에 원기(元氣)를 손상시켜 바야흐로 탕제(湯劑)를 복용해야 하는데, 기쁨과 근심을 함께 할 신하가 군부(君父)의 처분에 불만을 품고 쌓여온 원한을 풀기 위해 감히 휴퇴(休退)한 대신을 쫓아내니, 이는 군부를 배반하고 처분을 저패(沮敗)시키는 것이다. 그 심사의 통탄스러움을 사람이면 누군들 모르겠는가? 약을 먹고 병을 치료하여 이런 무리를 통렬히 뉘우치게 함으로써 훗날 지하(地下)에 돌아가 선조를 배알(拜謁)할 명분을 세울 것이니 다음(茶飮)을 의정(議定)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입진(入診)하라고 명하였다.

 

부교리 윤득화(尹得和)·오원(吳瑗)이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민형수(閔亨洙)의 상소는 새로운 의논이 없고 그 지난해 올린 한 장의 상소로 인해 거듭 반대하는 공박을 받은 나머지 사면(辭免)하는 소본(疏本)에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단서를 갖추어 진달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전의 일을 제기한 데 있어서는 밝게 폭로할 바가 있었으니, 이는 염의(廉義)나 사리(事理)에 비추어 진실로 그만둘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조금도 조용히 추구해 보지 않으시고 갑자기 위벌(威罰)을 가하시어 허둥지둥 어두운 밤에 몰아 성문(城門) 밖으로 내치시니, 처분이 엄급(嚴急)하고 경색(景色)이 수참(愁慘)스럽습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당고(黨錮)394)  를 쇄신(刷新)하는 데 뜻을 두시고 진압하여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시어 무릇 말하는 자가 조금이라도 기휘(忌諱)에 저촉됨이 있으면 위엄스런 노기가 공평함을 잃고 꺾어 누르는 것이 중도에 지나칩니다. 더구나 민형수가 말한 것은 당초 일을 논한 것이 아니고 다만 스스로 그 실정과 형편을 밝히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민형수의 처음 상소에 대해서는 이미 찬축(竄逐)의 벌을 가하지 않으셨는데, 이제 대변(對辨)하는 소장(疏章)을 인하여 위엄스런 견책(譴責)의 과중함이 도리어 전에 비하여 여러 갑절이나 됩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일이 지난 뒤에 공평한 마음으로 노여움을 가라앉히시고 이리저리 궁구하여 헤아려 보신다면, 또한 반드시 마음을 돌려 뉘우치심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차자가 들어가니, 하교하기를,
"민형수가 군부(君父)를 배반하고 처분을 저패(沮敗)시킨 정상은 어제와 오늘의 하교에 남김없이 환히 효유하였다. 그런데 직책이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이에 도리어 정침하기를 청하고, 돌보아 아끼면서 두둔하였다. 지난번에 하교한 뒤로 남의 신하된 자가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단지 민형수가 있는 줄만 알고 그 임금은 모르는 자이니, 너무나도 몹시 무엄하다. 윤득화는 고원 군수(高原郡守)로, 오원은 이성 현감(利城縣監)으로 삼아 곧 사조(辭朝)하게 하고 도임(到任)한 날짜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교리(校理)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두 신료(臣僚)를 척보(斥補)하라는 명(命)은 그윽이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그 차자(箚子)의 내용을 보건대 비록 복역(覆逆)395)  이라 하였으나 원래 드러나게 말하여 한쪽을 두둔하려는 뜻이 없었고 장황한 한 통의 글은 자신이 경악에 있으면서 바로잡아 구제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비록 그 성상의 마음에 석연(釋然)하지는 못했으나 진실로 마땅히 회유(誨諭)하고 개도(開導)하여 조용히 고치도록 힘쓰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배척하여 쫓아 내기를 이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전교(傳敎)하기를,
"긴요하지 않으니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서명균(徐命均) 등에게 이르기를,
"조금 전에 민형수(閔亨洙)의 일 때문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데 민 판부사(閔判府事)가 진실로 개탄스럽기만 하다. 9년 동안 마음에 가득 맺힌 회포를 지난날에 하교하였던 것인데 이제 곧 그 아들을 교유(敎諭)하여 또 상소하였으니, 사실 수차(袖箚)가 근본이 된 것이다. 병을 조리하는 가운데 반드시 나의 마음을 격동시키려고 하지만, 내가 어찌 그에게 격노(激怒)해 병이 겹쳐져 그가 마음먹은 것을 맞추어 주겠는가? 내가 이제부터 억지로라도 약을 먹고 오래 살 것이니, 결단코 범증(范增)이 등창이 나고 주아부(周亞夫)가 피를 토하듯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형수가 이 봉조하(李奉朝賀)를 쫓으려 하여 함부로 성(姓)을 버리고 이름을 지척(指斥)하였으니, 만약 다른 사람이 제 아비에게 이와 같이 한다면 제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편안치 않겠는가? 그리고 김재로(金在魯)의 언론(言論)은 약간 낫긴 하나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홍 영상(洪領相)은 능히 이 영부사(李領府事)의 마음을 알아 주니 내가 일찍이 가상하게 여겼다. 민 봉조하(閔奉朝賀)는 치사(致仕)했음에도 도리어 수차(袖箚)를 진달(陳達)하였으니, 그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지 나라를 위하는 데서 나온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이로써 보건대 만약 치사(致仕)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더욱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작년 1월에 아뢴 말은 진실로 경솔하였다. 명종조(明宗朝)의 고사(故事)를 어떻게 오늘에 다 비겨 의논할 수 있겠는가? 저번에 송인명(宋寅明)이 금령(禁令)을 베풀지 말라고 말한 것이 비록 옳기는 하지만 시기와 형편이 옛날과 다름이 있으니, 민 판부사(閔判府事)가 갑자기 진달한 것은 진실로 잘못이다. 그럼에도 조정 신하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논하지 않았으니, 또한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민 판부사가 만약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생각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말은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 나이가 아직도 희망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이고, 또 선왕(先王)의 친 혈육이 없고 연령군(延齡君)의 양자(養子)에 또한 합당한 자가 없다.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 이제 존재하지 않다고 한들 이와 같은 말을 어떻게 경솔히 입에 꺼낸단 말인가? 원량(元良)396)  이 만약 살아 있다면 지금 15세가 되었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운명이 기박하여 아직도 후사(後嗣)가 없는데, 민 봉조하(閔奉朝賀)의 말을 듣고부터는 심담(心膽)이 떨어지는 듯하여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속으로 ‘나라 형편이 만약 외롭고 약하지만 않았다면 민 봉조하의 말도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하였다. 지난날 연중(筵中)에서 또 진달하기에 내가 짐짓 진정(鎭定)하라고 답하였으나, 재삼 착실히 유의할 것을 굳이 청하였다. 그 심정을 추구하여 보면 성실하여 다른 뜻이 없고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내가 비록 어둡고 용렬하나 기필코 송종(宋宗)과 같지는 않을 것인데 장차 나를 어느 곳에 두려고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때 과연 관대하게 포용하였는데도 민형수가 또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남이 만약 그 아비를 그가 이 봉조하(李奉朝賀)를 무함하듯 무함한다면 그는 장차 무어라 하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민형수가, 그 아비가 전번에 영동(嶺東)에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므로 유감을 풀려고 한 계획이니, 이 봉조하의 그 당시의 일은 진실로 지나쳤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성감(聖鑑)이 몹시 밝으시니 신(臣) 등은 더욱 감격스러운 마음이 간절하여 엄히 처분하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어찌 이와 같이 지나친 성기(聲氣)를 쓰셔서 조섭(調攝)하시는 체후(體候)를 손상시키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편당(偏黨)을 없애고 선왕(先王)께 돌아가 배알(拜謁)하려 하니, 어찌 한낱 민형수에게 마음이 격동되어 음식을 물리치고 잠을 자지 않아 병을 더하게 하겠는가? 위로 인현 성모를 생각하고 아래로 부부인(府夫人)을 생각하면 어떻게 차마 민형수를 멀리 내칠 수 있겠는가마는 국법(國法)으로는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 제조(提調) 윤순(尹淳)이 또한 말하기를,
"노여움의 원인이 그에게 있으니, 다만 마땅히 엄하게 처분할 뿐입니다. 과격하게 노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아 온 일이 많았다. 옛날에도 또한 박소(薄昭)의 사건397)  과 공명(孔明)398)  이 울면서 마속(馬謖)을 참(斬)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참아 온 적이 많았다. 지난번에 권혁(權爀)이 귀양갔을 때 한덕후(韓德厚)가 진소(陳疏)하여 ‘공의(公議)에서 나왔다.’고 한 것을 내가 몹시 잘못으로 여겼다. 요즘 옥당(玉堂)에서 또 다시 영구(營救)하였으니, 오원(吳瑗)은 더욱 무엄하다. 지난번 연중(筵中)에서 면계(勉戒)한 뒤에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의금부(義禁府)에 나아가 명을 기다렸는데,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효유(曉諭)하였다.

 

해래 승지(偕來承旨)의 서계(書啓)로 인해 임금이 이광좌(李光佐)가 다시 양주(楊州)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전교(傳敎)하기를,
"아! 고금(古今)에 어찌 휴퇴(休退)한 신하를 협박하여 쫓은 일이 있으며, 휴퇴한 신하가 어찌 인혐(引嫌)한 사단이 있었던가? 아! 부형(父兄)의 일은 만약 상도(常道)를 지키는 마음이 있다면 매양 자제(子弟)에게 차마 제기하지 못하는 법이다. 군부(君父)의 병을 가지고 감히 남을 무함하는 권병(權柄)으로 삼았으니, 내 비록 불효(不孝)·부제(不悌)하지만 과연 민형수의 말과 같다면 어찌 차마 경(卿)을 돌보아 아끼면서 우리 황형(皇兄)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는 경을 무함하는 것이 아니고 실은 위를 무함하는 것이다. 반드시 곧 함께 들어와서 나의 통박(痛迫)한 심정을 위로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아! 통탄스럽다. 황형(皇兄)과 내가 어떤 조정의 혈맥(血脈)인가? 오늘날 조정의 신하가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로서 나라에 보답할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황형을 빙자하여 의로운 나를 농락한 지가 그 몇 해였던가? 19일 하교한 뒤로 저쪽과 이쪽에 한계가 분명해졌으니, 조정의 신하를 위한 뜻이 곡진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민형수가 만약 군부(君父)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과연 그가 말한 것과 같다면 내가 비록 불초(不肖)하나 결코 대신을 위하여 차마 황형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감히 말하지 못할 곳을 빙자하여 기어이 군부의 조제(調劑)하는 마음을 저지시키니, 그 마음 둔 바를 길가는 사람도 다 알고 있다. 아! 부형이 병이 있는데도 의원이 만약 대충대충 치료하면 곁에 있는 사람이 모두 분노하게 마련이니, 그 자제(子弟)가 되어 단지 그 의원을 위하여 통렬히 배척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효 부제한 사람이다. 19일 하교에 마음의 충곡(衷曲)을 밝게 효유(曉諭)하였는데도 또다시 이와 같이 하니, 진실로 그의 말과 같다면 위에 있는 자도 또한 가리워 두둔한 죄과(罪科)에 돌아갈 것이다. 아아! 특별히 이를 효유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번 수서(手書)에서도 또한 이 의리(義理)를 엄격히 밝히었다. 이 일은 마땅히 전정(殿庭)에서 친히 신문(訊問)하여 처분을 엄격히 하고 의리를 정해야 하나 오히려 한(漢)나라의 중주(中主)에 미치지 못하겠으므로, 원릉(園陵)을 멀리 바라보며 세 차례나 뜻을 억눌렀다. 그러나 그 국법에 있어서 규례에 따라 투비(投畀)하고 말 수는 없다. 무장(無將)399)  ·불경(不敬)한 죄목은 바로 민형수를 두고 이른 것이니, 즉시 의금부 낭관을 보내어 엄중하게 천극(栫棘)400)  을 더하도록 하라. 이 뒤에 만약 민형수를 위하여 구호하는 자는 곧 시상(時象)의 신하요, 과궁(寡躬)의 신하가 아니다. 마땅히 먼저 그 근본을 다스려서 군신(君臣)의 의리를 엄격히 할 것이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 윤급(尹汲)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민형수가 작년에 한 차례 상소한 것은 진실로 임금의 무함을 밝히고 역적을 엄격히 토주(討誅)하자는 의리에서 나왔으니, 한 조각 괴로운 마음은 해와 같이 밝았습니다. 그런즉 받는 자는 오직 마땅히 공평한 말로 밝혀야 할 것인데 심지어 부도(父道)한 죄목을 억지로 말한 자에게 씌웠으니, 민형수의 오늘날 상소가 어찌 이와 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에 한 말을 거듭 밝히는 데 지나지 않았고, 한층 더 새로 논한 일은 없었는데도 전하께서 갑자기 위엄과 노여움을 더하시어 아주 먼 변지로 물리쳐 쫓아내시니, 처분이 이미 지극히 거꾸로 되었습니다. 두 유신(儒臣)이 차자로 진달하여 바로잡아 구제한 데 이르러서는 곧 그의 직책인 것이니, 무슨 미워할 단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연달아 척보(斥補)하였으니 기상(氣象)이 근심스럽게 막혔습니다. 어찌 성명(聖明)의 세대에 이러한 지나친 거조가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니, 그 소를 돌려 주라고 명하고, 이어 말하기를,
"오늘날 임금의 녹을 먹고 임금의 조정에 서 있으면서 이러한 소를 받아 들였으니, 윤급을 두려워한다면 나라에 대하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요즈음 당인(黨人)의 무리 때문에 수응(酬應)에 시달림을 받아 몸이 매우 고달프다. 긴급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우선 며칠간 머물러 두고 들이지 말라."
하였다.

 

7월 17일 병신

사간 이용(李榕)·헌납 신만(申晩)이 함께 상소하기를,
"청컨대 세 유신(儒臣)에 대한 찬보(竄補)의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오늘날 임금을 섬기는 자가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인가?"
하고, 그 상소를 돌려 주게 하였다.

 

정언 안상휘(安相徽)도 또한 상소하여 세 유신에 대한 투비(投畀)·척보(斥補)의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반드시 민형수를 따라 가려고 하는가? 이상소를 돌려주라."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죄를 진 신하로 칭탁하고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신(臣)이 자식을 가르치지 못하여 망령되이 국법(國法)에 저촉되었으니, 집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따라 함께 죄벌을 받을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습니다. 어제 삼가 약원(藥院)에 내린 전교를 보건대 사지(辭旨)가 지극히 엄하므로 달려가 의금부(義禁府) 문 밖에서 엎드려 삼가 엄한 주벌을 기다렸는데, 잇따라 들은즉 입진(入診)할 때 성교(聖敎)가 아주 엄격하고 노여움이 격렬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신의 죄상은 모두가 남의 신하로서 감히 듣지 못할 바이고 나라의 법으로써 용서받지 못할 바이니, 남의 신하로서 이런 죄명을 지고 천지의 사이에 스스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이에 석고 대죄(席藁待罪)하고 천지 부모(天地父母) 앞에 슬피 호소하오니 빨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감정(勘正)하여 왕법(王法)을 펴시면 신은 또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혹 전하께서 오히려 차마 부월(鈇鉞)401)  의 주벌을 곧 가하지 못하신다면, 또한 바라건대 먼저 시골로 물러나도록 허락하여 허물을 반성(反省)하게 하소서."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민진원(閔鎭遠)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아들을 기르고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은 옛 교훈에도 있는 바이다. 경(卿)이 면유(面諭)함을 들었는데, 아들이 고의로 범하였으니, 내가 더욱 개탄스럽게 여김이 다른 사람의 갑절이나 된다. 지난번에 진달한 사연에 이르러서는 미안스러운 뜻과 다른 마음이 없다는 분부를 모두 전석(前席)에서 효유하였다. 이는 경(卿)의 본래의 병통이니 내가 어찌 깊이 그르게 여기겠는가? 경이 만약 이 때문에 다시 시골로 돌아간다면 이는 나의 정녕(丁寧)한 계칙(戒飭)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백발(白髮)로 경향(京鄕) 사이에서 황급(遑急)하게 구는 것이 국가나 사가(私家)에 대하여 충효(忠孝)한다 할 수 있겠는가? 아! 봉조하(奉朝賀)가 숙배(肅拜)하고 사은(謝恩)할 때 직접 효유(曉諭)하고 손수 쓴 시(詩)을 내렸는데 먹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경은 모름지기 이를 본받아 부부인(府夫人)을 받들고 안심하여 서울에 있으면서 위로 하늘에 계신 성모(聖母)의 혼령을 위로하라."
하였다. 쓰기를 마치니, 임금이 목이 메어 말하기를,
"내가 비망기(備忘記)를 쓸 때 울음과 눈물이 함께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민봉조하(閔奉朝賀)는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훗날 성모께로 돌아가 아뢸 말이 있겠지만 민 봉조하는 장차 무슨 말로 우러러 대답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7월 18일 정유

곤전(坤殿)의 환후(患候)가 평복(平復)되었으므로 백관(百官)이 전문(篆文)을 올려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하고 교문(敎文)을 내려 사령(赦令)을 반포(頒布)하였다. 그러나 환곡(還穀)을 허위로 기록하여 귀양갔다 석방되어 영구히 관직을 받지 못하는 자와 기한이 찼는데도 서용(敍用)되지 않은 자와 재상 파출(災傷罷黜)402)  과 포폄(褒貶)에서 중하(中下)에 있는 자는 사전(赦典)에 넣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날 비가 오므로 행례(行禮)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이미 모두 나와서 춤추며 기뻐하는 정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있으며, 또 이미 종묘에 고하는 예식을 거행하였은즉 교문(敎文)을 선포(宣布)하는 한 절차는 순서대로 거행함이 마땅하니, 비 때문에 문득 정지할 수는 없습니다. 전에도 하례(賀禮)를 이미 정한 뒤에는 비로 인해 혹 정지된 예가 없었으니, 청컨대 비 오는 상황을 보아서 때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막중한 전알(展謁)도 전에 비 때문에 행사를 정지한 예가 있었다. 지난해 친림(親臨)하여 진하(陳賀)하느라 선정전(宣政殿)에 임어하였는데, 승지가 먼저 절할 때에 비가 세차게 쏟아졌으므로 여러 승지들이 조복(朝服)이 더러워진다는 이유로 면대(面對)를 요구하여 정지하기를 청하였다가 비가 멈춘 다음에 거행하였으니, 이제 정지하라는 명을 어찌 그만두겠는가? 그러나 청한 바가 이와 같으니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때 마침 비가 개었으므로 대신이 전례를 따라 예(禮)를 행할 것을 의논하여 들였다.

 

홍현보(洪鉉輔)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정수기(鄭壽期)를 공조 참판으로, 홍호인(洪好人)·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김종태(金宗台)를 지평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교리로, 윤휘정(尹彙貞)을 수찬으로, 김상익(金尙翼)을 부수찬으로, 이의익(李義翼)을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로 삼았다.

 

7월 19일 무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소장(疏章)을 비답없이 도로 내어 주는 것은 삼사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만약 큰 죄에 관계된 것이 아닐 경우 비답없이 도로 내어 줌으로써 뒷날의 폐단을 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목(耳目)과 경악(經幄)의 신하는 곧 현재 당인(黨人)의 이목과 경악이고 나의 이목과 경악이 아니다. 19일 하교한 뒤에 민형수(閔亨洙)가 감히 이런 말을 하였으니 천극(栫棘)한 것 또한 이 죄를 가볍게 처분한 것인데, 민형수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앞장서서 다투어 구호(救護)하였으니, 아무리 표리(表裏)가 부동하다고 하나 조상명(趙尙命)과 같은 자는 더욱 어찌 몹시 긴밀(緊密)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으론 민형수를 갈아 없애려 하면서도 오히려 또 구해(救解)하였고 심지어 두 옥당(玉堂)은 민형수와 다름이 있다고 하였으니, 영호(營護)하기를 달갑게 여기는 것은 불충(不忠)한 것이고 억지로 구호하는 것은 성실치 못한 것이다. 충성스럽지 못하고 성실치 못한 말에 어떻게 비답을 하겠는가? 민형수는 내가 이 봉조하(李奉朝賀)를 아껴서 경종(景宗)께서 편찮을 때에 삼가지 않은 죄를 법을 굽혀 용서하였다고 하는데, 설령 내가 본래 이 봉조하를 소중하게 여겼다 하더라도 어찌 다시 부형(父兄)보다 소중하게 여기겠는가? 이는 대신(大臣)을 무함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나를 무함한 것이다. 무신년403)  을 전후하여 또한 다름이 있기는 하였으나 지금에 와서 말하는 자가 또한 모두다 변무(辨誣)한다고 청탁하는데, 그 변무할 것이 무엇인가? 한갓 인심을 의혹시킬 뿐이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란 인정(人情)이나 천리(天理)에 벗어남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가 말한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인정이나 천리에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불행하게도 이런 세계(世界)를 당하여 전후로 한 것이 뒷날 폐단에 관계됨이 많을 것이다. 그 황음(荒淫)404)  하여 안일(安逸)함을 좋아하는 자로서 모든 정무(政務)를 들어 다스리려 하지 않고 합문(閤門)을 닫고 편히 누워 있으면 이는 나로 말미암아 열린 것이고, 강퍅(剛愎)405)  하여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뜻을 여러 신하를 위협하여 제압하는 데 두어 약을 물리치고 먹지 않는다면 이는 나로 말미암아 열린 것이며, 귀에 거슬리는 것을 미워하여 삼사(三司)의 소장(疏章)에 비답하지 않고 도로 물리친다면 이는 또한 나로 말미암아 열린 것이다. 내가 진실로 후일에 인주(人主)가 나를 구실로 삼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또 이렇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니, 어찌 즐거워서 하는 것이겠는가? 만약 그 상소를 보고서 비답을 내려 주려고 하면 장차 날마다 보외(補外)시키고 날마다 찬출(竄黜)하여야 할 것이니, 비답없이 도로 내려 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기(聲氣)를 동요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곤전(坤殿)이 평복(平復)된 경과(慶科)를 신묘년406)  ·무술년407)  의 전례에 의거하여 정시(庭試)로 정할 것을 명하였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정한 바를 허락하여 오직 명한 대로 시골에 물러나 있게 할 것을 상소하여 간곡하게 진달하니, 안심하여 인구(引咎)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7월 20일 기해

김용경(金龍慶)을 승지로, 심택현(沈宅賢)을 판돈녕(判敦寧)으로, 박내정(朴乃貞)을 우윤(右尹)으로, 송수형(宋秀衡)을 사간으로, 정형복(鄭亨復)을 교리로, 조명겸(趙明謙)을 부교리로, 송징계(宋徵啓)를 수찬으로 삼았다.

 

관상감 관(觀象監官) 안중태(安重泰)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본감 제조(本監提調)가 상전(賞典)을 계청(啓請)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 역법(曆法)이 청(淸)나라와 서로 어긋난 곳이 있으므로 안중태로 하여금 동지 사행(冬至使行)을 따라 청나라에 들어가 흠천감관(欽天監官)으로서 추보(推步)408)  에 능한 하국훈(何國勳)과 더불어 추고(推考)하는 법을 강토(講討)하여 그 환히 이해하지 못한 점을 다 알아내게 되었다. 그리고 사재(私財)를 내어 《칠정사여만년력(七政四餘萬年曆)》 3책(冊), 《시헌신법오경중성기(時憲新法五更中星紀)》 1책, 《이십사기혼효중성기(二十四氣昏曉中星紀)》 1책, 《일월교식고본(日月交食稿本)》 각 1책과 서양국(西洋國)에서 만든 일월규(日月圭) 1좌(坐)를 사 가지고 왔다. 모든 서책은 역가(歷家)에 가장 긴요한 것이고 일월규 역시 의기(儀器) 중에서 간요(簡要)한 것으로 밤중에 시간을 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데, 모두 지금에서야 구해 온 것이었다.

 

7월 21일 경자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전내(殿內)에 들어가 봉심(奉審)하였다.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하고 예식대로 봉심한 다음 드디어 환궁(還宮)하였다.

 

연안 부사(延安府使) 김희로(金希魯)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잘 다스리고 잘 진휼(賑恤)하였다고 도신(道臣)이 장계하여 포장(褒奬)했기 때문이었다.

 

7월 22일 신축

임금이 내시사(內試射)에 친림(親臨)하여 특별히 권무(勸武)409)   별군직(別軍職) 김성응(金聖應)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시킬 것을 명하였다. 김성응은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증손(曾孫)이고 판서(判書) 김석연(金奭衍)의 손자이다. 특별히 권무 군관(勸武軍官)에 추천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등과(登科)한 것이다.

 

강계(江界)의 만포진(滿浦鎭) 경내에 피지(彼地)에 있는 갑군(甲軍) 1백여 명이 와서 ‘흉범(凶犯) 청인(淸人)과 도둑질하는 산적(山賊)이 폐사군(廢四郡)·지롱괴(知弄怪) 두 곳에 은신해 모였기 때문에 수색하여 체포하러 나왔다.’고 하였으므로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수량(李遂良)이 연변(沿邊)에 비장(裨將)을 보내어 기찰(譏察)하라고 신칙(申飭)하였다. 도신(道臣)·수신(帥臣)이 치계(馳啓)한 것이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차자(箚子)를 올려 병을 이유로 면직(免職)을 원하였으나,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7월 23일 임인

이조 참의 서종옥(徐宗玉)이 이현보(李玄輔)를 승지에 의망(擬望)하는 것을 정지할 수 없다며 장관(長官)과 오가면서 다투고 논란하였으나, 마침내 빠지게 되자 상소하여 사면(辭免)하였다. 비답하기를,
"승지의 의망은 정관(政官)이 뜻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조 판서가 일찍이 병조 판서로 있었을 때 김광(金洸)의 일로써 하교하여 자못 효과가 있었다. 과거(科擧)가 이미 같은데 문무(文武)가 어찌 다르겠는가? 병조나 이조에서 혹은 따르고 혹은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일의 체통이 되겠는가? 이제 승지의 의망을 상세히 보았으나 능히 깨닫지 못하다가 지금에서야 깨달았으니, 시습(時習)의 어기기 어려움이 참으로 심각하다."
하였다.

 

이때 승지에 궐원(闕員)이 있었으므로 곧 정사(政事)를 열어야 했는데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여러 번 소패(召牌)를 어겼다. 이에 임금이 승지의 망단(望單)을 들이라 명하고 부호군(副護軍) 이현보(李玄輔)를 망차(望次)에 친히 쓰고는 하교하기를,
"조정(朝廷)은 나라의 조정이고 전조(銓曹)는 나라의 전조이며, 정관(政官)은 임금의 정관이고 정신(廷臣)은 임금의 정신이다. 우리 나라의 조정에 서서 우리 나라의 전조를 맡았으며, 현재 임금의 정관이 되어 현재 임금의 정신(廷臣)을 쓰는 것이다. 그런대 승지의 의례적인 의망을 오직 마음대로 취하고 버리니, 사체(事體)에 있어서 결코 이와 같이 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조정의 공기(公器)를 그 장차 자기의 뜻대로 낮추었다 높였다 할 것이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뒤로는 정관(政官)은 곧 공정함을 따라 그 취하거나 버리는 것을 자기의 뜻대로 혼잡하게 하지 말 것을 각별히 칙려(飭勵)하라."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승지 망단 가운데서 이현보의 이름자를 어필(御筆)로 친히 써서 내리셨으니, 이는 진실로 부추기거나 억누르는 것을 진정시키고 어지럽히며 시끄러운 것을 진압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정관(政官)을 두어서 통색(通塞)의 권한을 맡겼으니, 만약 통색이 공평함을 잃는다면 정관을 죄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제 곧 망단을 들여오라 명하여 인명(人名)을 첨가해 쓰셨으니, 당당한 인주(人主)의 존귀함으로 아래로 해조 낭관(該曹郞官)의 일을 행하셨으니, 사체(事體)나 도리(道理)에 있어 끝내 미안할 듯합니다. 해조에서 이 어필을 받들어 장차 어느 곳에 두겠습니까? 또 이조 참의 서종옥(徐宗玉)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승지의 의망은 본래 뽑은 바가 아니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아마도 신칙하고 격려하여 조심스럽게 뽑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이미 대체에 관계되고 또 뒷날의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니, 전교하신 망단과 상소에 대한 비답을 모두 도로 들여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침나절에 처분한 것은 세도(世道)의 공평치 못함을 개탄하고 말세(末世)의 부추기고 억압하는 것을 진정시키려고 한 것인데, 진달한 것이 진실로 옳다. 이미 그 뜻을 보였으니 원망단(原望單)은 궁중에 보류해 두고 상소에 대한 비답은 고쳐서 내리도록 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김상규(金尙奎)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요즘 옥후(玉候)가 오히려 조용히 조섭하는 중에 계셨는데 민형수(閔亨洙)의 한 장의 상소로 인해 성상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아! 삼강(三綱)의 의리는 임금과 신하보다 엄격함이 없고 만대(萬代)의 화(禍)는 붕당(朋黨)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의리(義理)는 쇠해 어두워지고 논의(論議)는 방자해지니,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공력을 전하가 아니면 누가 맡으며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조정을 진정시키는 책임을 전하가 아니면 누가 능히 하겠습니까?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수고롭고 부지런하며 깊이 생각하시는 성상의 마음에서 백년 망국(百年亡國)의 화를 구원하여 일대 건근(一代建極)의 정치를 성취시켰으니, 맵고 단 것을 거의 조제(調劑)하고 모든 괴로움을 거의 씻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근원에 여전히 완결되지 않은 안건(案件)이 남아 있어 대강(大綱)이 서지 않았고 대유(大維)가 바로잡히지 아니합니다. 지난날 전하께서 10년쯤이나 아예 가볍게 발론하지 않았던 것이라 하시면서 당중(黨中)에서 모두 난역(亂逆)이 나왔다는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편어(片語)로 군신(君臣)의 극치(極致)를 세우고 일언(一言)으로 난적(亂賊)의 무리를 두렵게 하셨습니다. 이 어찌 전하께서 억지로 안배(安排)하고 억지로 집착(執着)한 것이겠습니까? 이는 곧 천만세(千萬世)에 어긋나지 않는 공정한 의리이고 또한 천만인(千萬人)이 함께 가진 진정한 시비(是非)인 것입니다.
한 장 종이의 사륜(絲綸)이 진실로 단청(丹靑)과 같아 백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정하여지고 백대(百代)를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을 것이니, 설령 흉역(凶逆)의 무리가 가까이 지친(至親)의 사이에서 나오더라도 오직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한 칼로 통렬하게 베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습(黨習)이 이미 고질이 되어 오히려 일종의 불평스런 의논이 있어 소를 올리고 지레 돌아가 거취(去就)의 큰 관계로 삼고 있으니, 그 태도가 발칙하고 거조(擧措)가 해괴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조정(調停)하는 데 힘써 오히려 견파(譴罷)의 청에 윤허를 아끼시니 너그러이 관대(寬貸)하는 데서 실수하시어 마침내 무사하게 되고, 제재(制裁)와 억압이 지나친 데서 마침내 또 뒤좇아 죄를 주십니다. 이에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망령되이 스스로 틈을 엿보아 난데 없는 괴격(乖激)한 의논이 다시 한층 더해질 것입니다. 아! 갖가지 계책으로 몰아 쫓아낸 한 원로(元老)는 이미 조적(朝籍)을 사절(謝絶)하였고 한 번 눈을 감아 저 세상으로 간 대신(大臣)의 묘(墓)에는 풀이 여러 해 묵었으니 은혜와 원수의 감정도 모두 싸늘하게 식어 버렸고 시기하여 미워하던 자도 또한 멈출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소란을 일으켜 다시 옛날의 투식을 시도(試圖)하니 전하께서 엄중한 말씀으로 통렬히 징계하는 것이 어찌 그만두어야 하는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일전에 승지의 의망에 대해 그윽이 개탄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무릇 계묘년410)   과방(科榜)을 반드시 막으려 한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그 과명(科名)은 이미 부정(不正)하다고 할 수 없으며 거자(擧子)도 또한 죄가 있는 것이 아닌데 공공연히 금고(禁錮)하여 막았으니 비록 끌리고 구애되는 바가 있으며 꺼리고 싫어하는 소치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이며 이것이 무슨 의의(意義)입니까? 의당 특별히 경칙(警飭)을 더하여 힘쓰게 하는 효과가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승지 망단의 일은 이조 참의에 대한 비답에 이미 효유(曉諭)하였다. 해당 정관(政官)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가 민형수(閔亨洙)의 상소 때문에 스스로 변명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은 어찌 이처럼 나를 피곤하게 하는가? 경은 안심하고 들어와서 내가 직접 효유하는 것을 듣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4일 계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道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지금 강변(江邊)의 일이 진실로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변의 일은 자문(咨文)을 보낸 뒤 그들이 반드시 파졸(把卒)이나 차출해 보내고 말 것이라 생각했는데, 수백 명의 갑군(甲軍)을 동원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몇 명의 사나운 호인(胡人)을 보고 어찌 이와 같이 크게 떠벌린단 말인가? 심양(瀋陽)에서 한 번 분부하여도 넉넉히 소탕(掃蕩)할 것인데, 군사를 동원하여 수색해 잡으려 하니 그들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졌다는 것을 또한 알 만하다."
하였다. 제조(提調)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심양의 자문을 보건대 도둑질하는 산적(山賊)이 모여 소란을 피운 지가 반드시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문의 규례(規例)도 또한 적당히 고칠 데가 있으니 심양의 자문은 예부(禮部)에서 황지(皇旨)를 받든 자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명(明)나라 때에 이런 문자(文字)는 정부(政府)의 게첩(揭帖)으로 왕복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변경의 일이 이와 같으니 이 뒤로는 반드시 그들과 말을 통해야 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인데, 열읍(列邑)에 통사(通事)가 없으니 어느 겨를에 병영(兵營)에 보고 하겠는가? 의주(義州)의 통사를 불러 와야 하겠는가?"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호서(胡書)는 화전(火箭)으로 쏘아서 보내는데 강변에 통역이 없어 자음(字音)을 알지 못하니, 무슨 말인지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영상(領相) 심수현(沈壽賢)의 뜻에 따라 청어(淸語)를 이해하는 역관(譯官) 한 사람을 뽑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역관으로 할 필요가 없다. 강변 열읍(列邑)에는 각각 소통사(小通事) 세 사람만 두면 된다."
하였다. 서명균이 안흥 첨사(安興僉使) 이선(李譔)을 향곡(餉穀)의 일로 죄주어 파직하는 것은 당초에 위임한 뜻이 아니라 하여 그대로 유임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면서 말하기를,
"다시 앞으로 치적(治績)의 여부(與否)를 보아서 공(功)을 가지고 죄를 속(贖)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대개 이선이 안흥에 굴포(掘捕)하는 일을 스스로 책임졌고 조정에서도 위임했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이현보(李玄輔)가 의망에 정지된 것은 신이 사적으로 좋아하거나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과명(科名)의 관계가 몹시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의리로 헤아려 보건대 청환(淸宦)에 의망할 수 없기 때문에 과연 요당(僚堂)과 수작한 바가 있었고 마침내 감히 의망에 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신(臺臣)이 반드시 과명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려 한다면 신도 또한 할 말이 있습니다. 무릇 흉적(凶賊)의 교문(敎文)을 중외(中外)에 널리 알리고 이것으로 칭경(稱慶)하고 이것으로 설과(設科)하였다가, 위훈(僞勳)의 역적이 법에 복주(伏誅)되고 이미 삭제된 방호(榜號)가 여러 번 바뀌었으니, 그 명분의 정당성 여부는 절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 막은 것이 그 과연 어느 곳에 구애(拘碍)되며 무슨 일에 싫어하고 미워함이 있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이런 제목(題目)은 대신(臺臣)에 있어 정말 스스로 반성하기 좋은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삼가 생각하건대 정조(政曹)가 있으면 권형(權衡)이 있고 권형이 있으면 통색(通塞)이 있게 마련인데, 요즈음 정주(政注)하는 사이에 혹 사단(事端)이 있으면 전하께서 곧 ‘오늘의 정관(政官)이 되어 오늘의 정신(廷臣)을 썼다.’고 분부하시며 감히 그 사이에서 임용(任用)하거나 버리지 못하게 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통색의 두 가지 일을 정조(政曹)에 위임시키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승지의 망(望)이 비록 잦기는 하나 돌아보건대 그 관직은 청선(淸選)이니, 통색의 엄격함은 옛부터 그러했던 것입니다. 만약 의망하지 않을 것을 의망하였다면 정관을 죄주는 것이 옳고, 저지하지 않을 것을 저지하였다면 정관을 죄주는 것이 또한 옳습니다. 그러니 지금 신이 이현보를 저지한 것이 만약 당사(黨私)에 관계되었다면 공정하지 못한 데 대한 율(律)을 신이 의당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망단(望單)을 친히 들여오라 하시고 어필(御筆)로 첨가해 쓰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또 주의(注擬)하는 한 가지 일을 정조(政曹)에 넘겨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니, 정관(政官)을 두고서 주의하여 통색하는 것을 책임지우지 않으신다면 또한 정조를 어디에다 쓰시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전후에 하교하였고 오늘 연중(筵中)에서 남김없이 환히 효유(曉諭)하였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講)했다. 시독관(侍讀官) 조명겸(趙明謙)이 문의(文義)로 인해 아뢰기를,
"〈송(宋)나라〉 영종(寧宗)이 처음에 주자(朱子)를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토록 했는데, 주자가 임금을 도와 잘 다스리게 하려고 일에 따라 규계(規戒)하고 권면하여 숨기는 바가 없자, 영종이 ‘강관(講官)을 설치한 것은 단지 학문을 강론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 매사에 간여하는가?’ 하고, 이로 인해 궁관(宮觀)을 주고 그 보좌하여 인도하는 것을 책임지워 그 규계하고 권면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니, 이는 후세에 끼친 한(恨)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명겸이 또 말하기를,
"전하의 근래 처분은 중도(中道)에 넘는 지조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삼사(三司)의 소장(疏章)에 이르러서는 비답없이 도로 내어 주셨으니, 더욱 지나치며, 크고 작은 소장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성의(聖意)에 부합되지 않으면 곧 도로 다 내리십니다. 대개 조종조(祖宗朝)의 한 마디의 말과 한 행동은 후세의 법이 됩니다. 전하의 자손 가운데 어찌 혼란(昏亂)한 군주(君主)가 없을 줄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혹 그 법도를 무시하고 그 덕(德)을 어지럽혀 삼사(三司)의 진계(陳戒)를 듣기 싫어하여 문득 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께서도 비답을 내리지 않은 일이 있었다.’하며 일체 모두 물리친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자가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이는 참으로 아는 것이 못된다. 과연 참으로 안다면 행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행하여진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언로가 막히는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단서가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연중(筵中)에서 ‘비답없이 도로 내주는 것이 나로부터 열린다.’는 분부가 있었는데 전하께서 알고도 고의로 하신다면 그 해는 도리어 모르는 것보다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기뻐하고 추구(推究)해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수 없다.’ 하였다. 내가 참으로 알지 못하고 이런 일을 즐겨 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전하의 이번 처분은 중도에 지나쳐 너무나 놀란 나머지 감히 들을 수도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분부가 많이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위엄과 벌로 억제하고자 하시나 무릇 신하를 다스리는 도리는 반드시 그 마음을 감화시킨 뒤에야 하시려고 하는 정치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니, 위엄과 벌로 억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윤득화(尹得和)·오원(吳瑗)은 자신이 숙직(宿直) 중에 있으면서 예사롭지 아니하게 지나친 거조를 목도하였으니,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다투어 논한 것은 곧 그의 직책입니다. 만약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옛날 세종조(世宗朝)에 한 간신(諫臣)을 죄주었는데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가 사람을 시켜 대청(臺廳)을 헐었습니다. 세종께서 그 까닭을 물으시자, 황희가 대답하기를, ‘대각(臺閣)을 둔 것은 장차 그들이 말한 것을 쓰고자 해서인데 이제 말한 것으로 인해 죄를 얻었으니, 대청은 쓸데가 없습니다. 때문에 신이 과연 헐었던 것입니다.’ 하니, 세종께서 태도를 고쳐 가납하고 그 대신(臺臣)을 발탁해 썼습니다. 그리고 효종조(孝宗朝)에도 대사헌 유철(兪㯙)이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일로써 크게 저촉된 것이 있었으므로 전정(殿庭)에서 친국(親鞫)하면서 하교하시기를, ‘감히 유철을 두호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죄줄 것이다.’ 하였으나, 사간(司諫) 윤집(尹鏶)이 홀로 대각(臺閣)에 나아가 곧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습니다. 효종께서 비록 따르지는 않으셨으나 며칠 뒤 윤집을 발탁하여 대사간으로 삼았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언로(言路)를 열어 인도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 누가 분발하고 격동(激動)하여 말을 다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격려 권장하는 방도가 있음을 듣지 못하고 다만 꺾어버리는 것만 일삼아 왔습니다. 지난번의 일로 말하더라도 세 유신(儒臣)이 서로 잇따라 멀리 쫓겨났으니,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라고 할 만한데도 한 사람의 대신(臺臣)도 도로 거두라는 계사(啓辭)를 발론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가에 있어서 언로란 사람에게 핏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핏줄이 끊기면 사람은 반드시 죽고 언로가 끊기면 나라는 망합니다. 지금 위망(危亡)의 조짐이 하나만이 아닌데, 언로의 막힘은 반드시 망할 조짐입니다. 국가가 장차 망하게 되면 전하께서 훗날 무슨 면목으로 열성(列聖)을 돌아가 배알(拜謁)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유년411)   폐합(閉閤)된 뒤에도 여전히 옛날 습관을 고치지 않기 때문에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말을 처음 꺼내게 되었다. 그리고 19일 하교에 이미 말하기를, ‘여러 당(黨)에서 모두 난역(亂逆)이 있다. 먼동이 틀 무렵 이후로 다시 이 일을 제기하는 자는 오늘의 신하가 아니다.’고 하였다. 유신(儒臣)의 입장에서 본다면 민형수(閔亨洙)의 말이 지나친가 지나치지 않은가? 19일 하교를 들은 뒤로 옥당(玉堂)에서는 영호(營護)하지 않았어야 마땅할 것이다. 오원이 만약 위로 현종(顯宗)을 생각하고 아래로 과궁(寡躬)을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당론(黨論)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차자의 사연을 보건대 만약 오원이 아니었다면 글을 엮은 것이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외방에 보직(補職)하는 벌은 그에게는 상이지 벌이 아니다. 이른바 ‘성무(聖誣)’란 것은 갑진년412)   즉위한 뒤로는 다시 제기해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성무를 칭탁하고 저쪽과 이쪽에서 서로간에 언쟁(言爭)을 하다가 무신년413)  의 변란(變亂)을 빚어냈으니, 또 어찌 다시 오늘날에 제기할 수 있겠는가?"
하니, 조명겸이 말하기를,
"민형수가 무단히 소란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한 장의 상소가 도리어 부도(不道)하다는 지목을 받았으니, 그가 과연 태연히 감수한다면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설왕설래하다가 스스로 근원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니, 이는 바람이 없는데 물결이 일어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에 민형수가 만약 곧바로 진소(陳疏)하였다면 단지 천극(栫棘)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사직소를 핑계로 이처럼 끌어대었으니, 더욱 교묘하고 치밀한 일이었다. 민형수가 다시 제기하는 것이 불가한 것인 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뜻이 이 봉조하(李奉朝賀)를 쫓아버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너무 세밀히 살피시는 것이 사실 병통이 됩니다. 민형수가 사직(辭職)한다는 명목으로 진소(陳疏)하였으니 전하께서 다만 사직하는 것이라고 하시면 옳을 것인데, 어떻게 억지로 실정 밖의 명목을 더하여 곧 교묘하고 또 치밀하다고 하십니까? 오원이 민형수를 구호(救護)한 것은 전하를 저버린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언관(言官)을 박대(薄待)하여 규례(規例)에 따라 진언(進言)한 것에도 또한 위벌(威罰)을 가하시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삼사(三司)를 사지(死地)와 같이 회피(回避)하고 있습니다. 이 어찌 길하고 상스러운 좋은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성미가 몹시 괄괄하다. 그 ‘법도를 무너뜨리고 그 덕을 어지럽혔으니, 무슨 얼굴로 돌아가서 선조를 배알하겠는가?’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지나치다. 이것이 곤궐(袞闕)414)  을 보완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내가 어찌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겠는가?"
하고, 또 임금이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것은 내가 이미 밝게 알고서 말한 것이다. 만약 과연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위하는 데서 오로지 나왔다면 옳다 하겠지만 건저(建儲)니 대리(代理)니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면서 변명하니 듣기가 괴롭다. 그때 만약 사세(事勢)를 알았다면 의당 정청(庭請)을 설행(設行)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조태구(趙泰耉)를 따라 같이 들어가서 번거롭게 사죄(謝罪)하고 도로 작환(繳還)했던가? 세종(世宗)을 책립(冊立)한 뒤에 곧바로 어보(御寶)를 보냈으니, 이는 부자간(父子間)이므로 오히려 혐의할 것이 없어서 마침내 무사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건저(建儲)한 뒤로 해괴한 말이 많이 있었다. 근본이 이미 어긋났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더욱 격렬해져 점차 깊은 데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대개 할 만한 일이라면 대신이 마땅히 곧 해야 할 것이니, 당당한 도리라면 어찌 내가 응하고 불응하는 것을 기다려서 하겠으며, 19일 하교에 이미 다 효유(曉諭)하였는데 무슨 다시 할 말이 있겠는가? 경신년415)   이후로 각각 명목(名目)을 둔 것은 대개 방례(邦禮)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누가 옳은지 알지 못하겠으나 그 뒤로 기사년416)  ·갑술년417)  에 이르러 처분이 지극히 엄하였는데, 병신년418)   이후로 또 별다른 논란이 생겨 점점 더 괴격(乖激)한 데 이르게 되었다. 이만유(李萬維)의 무리와 같은 경우는 내가 용서할 수 없어 지난번에 이미 처분하였다. 19일 이후로는 두 개의 글자를 마음속에 두지 않았으나 오히려 내 말을 믿지 않으니, 고금(古今)에 어찌 이러한 세계(世界)가 있단 말인가? 지난번 김유경(金有慶)의 처분이나 오늘 민형수의 찬배(竄配)는 또한 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만한데 과중(過中)하다고 하니, 과연 옳겠는가? 저번 이광세(李匡世)나 김상규(金尙奎)가 말한 것도 또한 지나치다. 지금부터 만약 네 신하의 일을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국문(鞫問)할 것이다."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19일 하교는 저쪽이나 이쪽의 신료(臣僚)들의 당고(黨錮)의 마음을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송인명(宋寅明)이 ‘이광세(李匡世)의 상소 가운데 귀착(歸着)된 바가 있다고 하신 것은 한 사람을 지칭한 말입니다.’ 하니, 전하께서 ‘한 사람은 누구를 지칭한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한쪽편 사람들은 이 분부를 듣고부터 기화(奇貨)나 얻은 양 능멸(凌蔑)을 가하려고 했으니, 어찌 이 때문에 남의 능멸을 받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세의 말은 진실로 지나치기는 하다. 하지만 또한 어찌 문자(文字) 때문에 죄주겠는가? 이광세가 아무리 이와 같더라도 아울러 이 봉조하(李奉朝賀)를 배척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네 신하 가운데 한 사람에 대하여는 민 봉조하(閔奉朝賀)가 오히려 말하기를 ‘1백 사람으로서 그 신분(身分)을 보증한다.’고 하였다."
하니, 참찬관(參贊官) 이성룡(李聖龍)이 말하기를,
"민진원의 심사(心事)를 전하께서 여전히 다 살피지 못하고 계십니다. 평생에 다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이 있을 뿐이니 반드시 죽은 자를 위하여 전하께 속여서 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늘 하나의 ‘의(疑)’자를 성심(聖心)에 두시니, 비록 관계없는 일일지라도 곧 의심하고 믿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그 도끼를 잃고 그 이웃 늙은이를 의심하였는데 이웃 늙은이를 보면 앉아 있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고 서 있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더니, 얼마 후 방안에서 도끼를 찾고 나서 또 이웃 늙은이를 보았는데 앉아 있어도 도끼를 움치지 않은 것 같고 서서 있어도 도끼를 훔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하나의 ‘의(疑)’자를 마음에 두면 보이는 것이 분명하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에 유념(留念)하소서."
하였다.

 

7월 25일 갑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이산 부사(理山府使) 우하형(禹夏亨)은 청인(淸人)이 넘어올 즈음에 능히 막아 끊지 못하고 각각 자리를 베풀어 말을 나누었으니, 이는 그 넘어오는 이유를 물어보려고 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비록 전에 없는 일이긴 하나 형편이 그랬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법(國法)에 ‘강(江)을 사이에 두고 불러 묻게 한 것’은 뜻한 바가 있는 것이다. 우선 심각하게 다스리진 않는다 하더라도 먼저 종중 추고(從重推考)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피인(彼人) 4백여 명이 강변에 머물면서 여러 날 동안 떠나지 않는다 하는데, 혹은 위급하여 변란(變亂)에 대응할 일이라도 있으면 한갓 수령(守令)에게만 위임 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하여금 그 근처에 나가 머물면서 일에 따라 대응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변에 여러 고을이 있으니 사단이 어느 고을에서 일어날지 모르는데, 한 사람 병사(兵使)가 어느 곳에 접응(接應)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병사가 나가서 머무르는 것은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데 관계되니, 단지 병사로 하여금 강변 수령에게 신칙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강변 여러 고을에 청어(淸語)에 통한 소통사(小通事)를 각각 둔다면 잠상(潛商)과 서로 통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각 고을 이서(吏胥) 가운데서 청어를 통하는 자 한 사람을 정하여 두고자 하였다. 승지 이성룡(李聖龍)이 말하기를,
"이서도 또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강변 여러 고을에 모두 파수(把守)하는 장졸(將卒)을 두고 장교(將校)로서 청어(淸語)에 통한 자를 정하여 파수장(把守將)을 삼는다면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이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명균이 공홍도(公洪道)의 신해년419)   세태(稅太) 1만 포(包)를 산성(山城) 다섯 곳에 나누어 둘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산성 다섯 곳의 군량(軍粮)에 모두 대두(大豆)가 없었으므로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로 청했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민형수(閔亨洙)에 대한 견벌(譴罰)이 과중하다고 반복해 진달하기를,
"민형수의 상소는 스스로 변명한 말에 지나지 않으며 다시 전일에 논한 것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한 개인으로 일반적인 일을 논하였는데, 전후의 견벌이 이처럼 같지 않고 처분이 일정하지 않아 사령(辭令)이 정당함을 잃었습니다. 두 유신(儒臣)이 차자를 올려 구정(捄正)한 데 이르러서는 곧 그의 직책일 뿐인데 한결같이 출보(黜補)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거조란 말입니까? 더구나 민형수의 상소를 봉조하 신 민진원에게까지 미루어 나갔습니다. 민진원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늙었어도 쇠하지 않았고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은 진실로 남이 따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다고 하교하셨는데 요즘 연교(筵敎)는 지극히 엄준(嚴峻)하여 조금도 돌보아 아낌이 없으시니, 이것이 어찌 원로(元老)를 우대하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노여움을 옮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아들의 일을 그 아비에게까지 옮겨 미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전후의 처분이나 사령(辭令)중에서 과중한 것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처분을 경(卿)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무 유하다고 생각한다. 두 봉조하를 경중 서울에 있도록 만류하여 치사(致仕)를 허락한 것은 국가에 보탬이 있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른바 다투는 것을 화해시킨다는 것은, 민 봉조하의 나라를 위하는 충심(忠心)은 과연 늙었어도 쇠하지 않았으나 그 까다로운 마음도 또한 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승을 제수한 처음에 내가 중후(重厚)하란 것으로 경계하였던 것이다. 치사(致仕)한 사람이 시상(時象)에 무슨 간여할 것이 있기에 도 수차(袖箚)를 올리는 것이며, 이미 여러 당(黨) 가운데 모두 난역(亂逆)이 있다고 하교한 뒤에도 또 다시 이와 같이 하니, 그것이 옳겠는가? 수차에 이르기를, ‘신축년420)  의 일은 진실로 삼종 혈맥(三宗血脈)을 위한 데에서 나왔으므로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는 바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서덕수(徐德修)가 공동(恐動)한 말도 또한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어찌 잘못 받아들인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민형수는 수차에서 끝내지 못한 말을 이어 진달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그 아들의 죄로서 그 아비를 의심하겠는가? 이 뒤로 민 봉조하가 만약 다시 이런 말을 한다면 내가 의당 처분함이 있을 것이다.
갑진년421)   즉위한 뒤로 신하된 자는 마땅히 ‘성무(聖誣)’를 말할 수 없는 것인데, 네 신하를 위하는 자들은 네 신하를 신원(伸冤)시키려고 성무를 핑계대고, 네 신하를 공격하는 자는 또 연차(聯箚)와 대리(代理)를 말하니,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그때 이정소(李廷熽)의 상소가 나온 뒤로 나는 태백(泰伯)·중옹(仲雍)422)  의 마음이 있었는데, 자전께서 하교하기를, ‘효종의 혈맥과 선왕의 골육은 다만 연잉(延礽) 한 사람이 있다.’고 하셨으니, 부인으로서 이런 하교를 하신 것은 진실로 생각 밖에 일인지라 내가 이 분부를 듣고는 나도 몰래 눈물을 흘렸고 차마 우리 효종(孝宗)과 성고(聖考)께서 처음에 이루지 못하신 뜻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성고께서 항상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의당 편안할 것이다.’ 하셨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극히 어렵고 지극히 해괴한 지경을 당하게 되었으니, 성고의 하늘에 계신 영혼도 또한 반드시 민망하게 여기고 슬퍼하실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설청(設廳)의 일로 말하자면 밖으로는 약원(藥院)이 있고 안으로는 세제(世弟)가 있지 않았던가? 매양 설청하지 않은 것으로써 죄를 삼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나 의심하고 심유현(沈維賢)은 심지어 옥체(玉體)의 안색이 평상시와 같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지난날 비망기에 우리 삼종의 혈맥을 부지하게 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민봉조하는 그 별다른 뜻이 있는가 의심하여 연중(筵中)에서 물었다. 그 뒤 수서(手書)에 우리 종사(宗社)를 부지하게 하라는 말이 있었는데, 또한 깊은 뜻이 있는가 의심하여 이제 진달(進達)했으니 비록 순수하게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계려(計慮)가 없다고 할 만하다. 명종조(明宗朝)의 고사(故事)를 지금에 행할 곳이 있겠는가? 경(卿)은 지금 민형수를 옳다고 생각하여 내가 처분한 것을 과중하다고 하니,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민형수는 단지 그 자신 한 사람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곧 정미년423)   이전에 합계(合啓)한 내용의 말이니, 실은 공통된 논의입니다. 민형수의 이번 상소는 그 도로 공박한 말을 대변(對辨)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 어찌 아주 변지로 천극(栫棘)하는 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접대 약을 먹지 않고 두 봉조하(奉朝賀)를 만류한 것에서 나의 뜻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 아들이 진소(陳疏)를 그 아비가 만류했다면 어찌 감히 하였겠는가?"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민 봉조하의 말이 공(公)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사(私)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나라를 위한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그 아들이 진소한 일을 원로(元老)에게까지 옮겨 사지(辭旨)가 아주 준엄했으니, 실로 이는 사리에 대단히 미안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어라. 이 하교를 듣고도 이와 같이 입이 쓰도록 말을 하니, 경(卿)은 실로 지나치다."
하였다.

 

김제군(金堤郡)의 토주(土主)424)  를 죽일 것을 꾀한 죄인 나치형(羅致亨)을 작처(酌處)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고, 이정운(李鼎運)을 먼 변지(邊地)에 정배 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정운은 이인좌(李麟佐)의 족속으로서 호중(湖中)에서 김제로 이사와 살면서 나성(羅姓) 족당(族黨)과 결탁하여 흉포(凶暴)을 자행하였으므로, 군수 이정(李淨)이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잡아다 다스리려 하였다. 이에 나치형 등이 도당(徒黨)을 거느리고 창검(槍劍)을 가지고 곧바로 아헌(衙軒)으로 들어가서 군수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수가 마침 다른 방에 있기 때문에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사(監司) 이수항(李壽沆)이 은밀히 도와주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대신이 진달(陳達)하여 경옥(京獄)으로 잡아 왔는데, 형조 판서 이정제(李廷濟)는 부경(傅輕)425)  의 의논을 창도(倡導)하였다. 이때에 와서 죄상을 감안하여 처단하였는데, 단지 두 사람만 죄주었다.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서 장릉(莊陵)에 비(碑)를 세우는 것을 본도(本道)에서 거행하되, 예조 당랑(禮曹堂郞)이 내려가서 도신(道臣)과 함께 감독하고 비문(碑文)은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며 서사관(書寫官)은 이조(吏曹)로 하여금 차출(差出)하게 하고 비석 모양은 북도(北道)에 여러 능의 비보다 약간 크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라도에 역질(疫疾)이 번져 2천 81명이 사망하였다.

 

7월 26일 을사

만포진(滿浦鎭) 삼강구비(三江仇非)의 위와 아롱괴(阿弄怪)의 아래에 청나라 갑군(甲軍) 2백여 명이 강중(江中)에 둔복(屯伏)해 있는 청인(淸人) 20여 명을 추급 추격하여 포살(砲殺)하였다. 두 호인(胡人)이 우리 경내로 도망하여 들어와 만포 첨사(滿浦僉使)에게 잡혔는데, 하나는 바로 위원(渭原)의 파졸(把卒)을 납치해 간 자였다. 갑군의 두목(頭目)이 흥경성 수위(興京城守尉)로 칭하며 봉서(封書)를 넘겨 보내어 두 호인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말썽이 생길까 염려하여 그 청에 따라 돌려보냈다.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치계(馳啓)하기를,
"청컨대 의주부(義州府)로 하여금 형편을 봉성장(鳳城將)에게 빨리 통지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강원도 영동(嶺東)의 9읍(邑)과 영서(嶺西)의 8읍에 큰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밤낮 그치지 않았다. 육지가 내를 이루고 집들이 침몰되었으며 빠져 죽은 사람과 가축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수이산(戍伊山)과 기선(起先)을 사형을 감면하여 북도(北道)의 종으로 삼으라고 명하고, 이흥득(李興得)·이공형(李公衡)을 사형을 감면하여 육진(六鎭)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7월 27일 병오

소대(召對)를 행하고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講)하였다.

 

7월 28일 정미

좌의정 서명균(徐命均), 우의정 김흥경(金興慶),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 송인명(宋寅明)·박문수(朴文秀)가 구대(求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서명균 등이 심양(瀋陽)에 이자(移咨)의 왕복하는 일을 예부(禮部)에 품청(稟請)하여 규식을 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대개 전에 이 일로 예부에 이자하라는 분부가 있었다가 다시 정지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양의 자문(咨文)을 이미 받고 또 예부에 품하는 것은 매우 긴요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전(前) 병사(兵使) 이익필(李益馝)은 무신년426)  의 훈신(勳臣)으로서 병사가 되었는데, 두어 동(同)의 무명을 사용(私用)한 것에 지나지 않는 일 때문에 폐고(廢錮)하기에 이르렀으니, 자못 공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의당 금고를 풀어 주어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전에 소금을 굽는 일을 품정(稟定)한 바가 있었으나, 묘당의 의논은 소나무를 베는 폐단이 있다는 것을 어렵게 여겼으므로 아직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경외(京外)에 재정(財政)이 바닥이 났으니, 만약 또 흉년을 만나거나 혹 사변(事變)이라도 있게 되면 실로 손을 쓸 곳이 없을 것입니다. 수만 석(石)의 소금을 굽는다면 10만 석의 곡식을 충분히 장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진휼청(賑恤廳)에 적치(襀置)해 놓으면 예상하지 않은 용도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고 연해(沿海)의 한 고을에서 벤 소나무로도 넉넉히 소금을 구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서명균이 아뢰기를,
"해은군(海恩君) 오명항(吳命恒)이 죽은 뒤로 3년상이 이미 끝났는데도 아직 위문하는 은전(恩典)이 없으니, 원훈(元勳)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자, 박문수가 말하기를,
"해은군은 곧 신(臣)의 장수(將帥)였습니다. 장수에게 억울한 일이 있으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무신년의 변란(變亂) 때 병판(兵判)으로서 스스로 출정(出征)하기를 원하였으니, 그 충의(忠義)와 공로(功勞)는 따를 수 없이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익하(鄭益河)에게 참소와 무함을 참혹하게 당하고 강상(江上)에서 죽었습니다. 따라서 시기하고 미워하는 무리는 오명항을 서묘(鼠猫)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서묘라는 것은 쥐가 쥐를 물어 죽임을 말하는 것이니, 대개 오명항이 그 같은 당인(黨人)을 죽인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지극히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서명균은 말하기를,
"오명항의 충의나 공로가 저와 같은데도 이번에 또한 흉서(凶書)에 들어갔으니 더욱 그 몹시 원통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남원(南原)의 괘서(掛書)에 ‘오명항이 약속을 배반한 것과 이사성(李思晟)이 기약을 어긴 것과 같은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장차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금년에 신포(身布)를 감하되 반드시 가을이 되기 전에 영(令)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6책 35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70면
【분류】외교-야(野) / 변란-정변(政變) / 수산업(水産業) / 농업-임업(林業) / 사법(司法) / 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역(軍役)


[註 426] 무신년 : 1728 영조 4년.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장차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금년에 신포(身布)를 감하되 반드시 가을이 되기 전에 영(令)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또 상소하여 사면(辭免)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계묘년427)  의 과방(科榜)을 저지하려고 한 것이 공(公)을 위한 것인가 사(私)를 위한 것인가를 한 말로 밝히겠습니다. 교문(敎文) 구어(句語)가 아주 패악하고 극히 음흉한 것은 역적 목호룡(睦虎龍)과 서로 전해 받은 것으로, 많은 사람이 눈으로 보는 바요 여러 사람이 손으로 지적하는 바이니, 당초 과시(科試)를 설시함에 있어서 이 교문을 사용해야 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아야 했겠습니까? 따라서 과명(科名)이 과연 정당하다고 하겠습니까,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정미년428)  에 그 과명을 남겨두고 그 방호(榜號)를 삭제시킨 것이 특교(特敎)에서 나왔으니, 성의(聖意)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연신(筵臣)이 일로 인하여 고쳤으나 교문이 그대로 있고 방호가 그대로 회복 되었으니 전형(銓衡)의 책임자가 저지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겠습니까? 교문에 있는 흉언은 대신(臺臣)도 또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명은 유독 없애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의 모순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과중한 소견을 가지고 다시 무엇 때문에 고집하느냐고 비답을 내려 책망하였다.

 

7월 29일 무신

경상도의 고(故) 참봉(參奉) 정만양(鄭萬陽)과 고 학생(學生) 성헌징(成獻徵)에게 관직을 추증(追贈)하라고 명하였다. 전 감사(監司) 조현명(趙顯命)이, 두 사람이 재주와 학문이 뛰어났는데도 살아서는 능히 수용(需用)되지 못하고 죽어서는 매몰(埋沒)됨을 면치 못하였다고 진소(陳疏)하여 포상(褒賞)과 증직(贈職)을 더하도록 청하였고,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남원 현감(南原縣監) 조호신(趙虎臣)이 괘서(掛書)한 죄인 김영건(金永建) 부자(父子) 4인을 염탐하여 체포하였다. 감사(監司) 조현명(趙顯命)이 치계(馳啓)하자 정원(政院)에서 밀봉하여 들였다. 불사(佛寺)에서 흉서(凶書)가 나온 뒤에 편지(片紙)에 괘서(掛書)한 자인 이여매(李汝梅)·이여진(李汝榛)을 써서 성변(城邊)에 걸어 놓은 일이 있었으므로, 전 감사 이성룡(李聖龍)이 이여매 등을 잡아 가두고 알리자, 임금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니 곧 놓아 보내라고 분부하였다. 대개 남원에 사는 김영건은 아들 김원팔(金元八)·김원하(金元河)·김원택(金元澤) 세 사람을 두었는데 모두가 글을 잘하고 글씨를 잘 쓰는데다 부호(富豪)하고 간활(奸猾)하였다. 그런데 같은 고을에 정가(丁哥)인 사람이 김영건을 종의 양처(良妻) 소생이라 하여 서로가 소송을 걸게 되었고 서로가 원한을 가져 남모르게 반드시 죽일 계획을 품었다. 이여매의 아들 이유성(李惟晟)은 문장이나 변론으로 송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정가의 외손녀서(外孫女婿)가 되어 입척(立隻)429)  을 담당했기 때문에 김영건이 이유성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것이 정가보다 심함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여매 형제의 이름을 써붙여 무함(誣陷)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조호신이 정탐군을 놓아 살피다가 그 단서를 얻고 밤을 노려 김영건 4부자(父子)를 덮쳐 잡고는 그 문서(文書)를 수색하니 과연 크고 작은 두 종이에 흉서(凶書)의 초안(草案)이 있었는데 큰 종이에 쓴 것은 아주 흉악하고 참혹한 것이 절 안에 괘서한 것보다 갑절이나 더함이 있었다. 김원팔의 공초에서 ‘이는 바로 무신년430)   뒤에 베껴 전해지는 흉서인데 같은 고을 최봉희(崔鳳禧) 집에서 얻어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호신이 최봉희를 체포하고 본부(本府)의 아전으로 무신년의 흉서를 본 자를 불러 묻고 증거를 대게 하니, 아전이 ‘무신년 흉서 가운데 이 영부사(李領府事)의 명자(名字)와 자미진주(紫薇眞主) 등 말이 대략 기억이 나는데 피차 구어(句語)가 대략 서로 비슷하다.’고 하였으므로, 도신(道臣)이 흉서와 여러 죄수의 공초를 올려서 알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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