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5권, 영조 9년 1733년 9월

싸라리리 2025. 9. 12.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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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기묘

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지돈녕(知敦寧)으로, 윤순(尹淳)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감시(監試)의 초시(初試)를 설행(設行)하였으니 임자년482)   식년과(式年科)를 물려서 설행한 것이었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정언 조정(趙侹)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전조(銓曹)에서 주의(注擬)하는 즈음에 전혀 어렵게 여김이 없습니다. 윤대영(尹大英)은 흉도(凶徒)에게 빌붙어 그 사주(使嗾)를 받고 사류(士類)를 공격해 제거하는 것을 앞장서 스스로 담당하였으며, 흉당(凶黨)이 복법(伏法)된 뒤에는 다시 검의(檢擬)하지 않았는데 작년에 서읍(西邑)에 제수하였으니, 이미 뜻밖의 일입니다. 더구나 이 장례원 장관(掌隷院長官)을 어찌 이와 같은 무리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다시 검의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황해 도사(黃海都事) 이시희(李時熙)는 감시(監試)의 주시관(主試官)으로서 장옥(場屋)483)  에서 간계(奸計)를 막는 것을 엄밀(嚴密)하게 하지 못하여 시제(試題)를 내걸기도 전에 관리(官吏)가 몰래 베껴 외간(外間)에 전하다가 많은 선비에게 발각되어 시원(試院)으로 잡혀 들어와서는 온갖 소란을 빚었으니, 그 어지러운 원인을 캐보면 실로 주시(主試)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청컨대 우선 파직하고 소란을 피운 거자(擧子)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일 경진

소대(召對)를 행하고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론(講論)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열 차례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각별히 효유(曉諭)하고 돈독하게 불렀다.

 

지아비를 죽인 죄인 옥단(玉丹)이 복주(伏誅)되었다. 집터에 못을 파고 자녀(子女)는 종으로 삼았으며, 그 읍호(邑號)를 강등시켰다.

 

9월 3일 신사

임금이 친림하여 관학(館學)의 도기 유생(到記儒生)484)  을 시강(試講)하였다. 이장하(李長夏)·김광윤(金光潤)·고명열(高命說) 등 세 사람을 뽑아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당(黨)의 화란(禍亂)이 하늘을 뒤덮기에 이르러 세도(世道)의 번복(翻覆)이 무릇 몇 차례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어리석고 망령되어 시의(時宜)를 헤아리지 못하고 이름이 죄적(罪籍)에 있는 자가 아니면 비록 인심에 협흡(浹洽)하지 못하고 공의(公議)에 비난을 받는 자라도 일례(一例)로 포섭(包攝)하여 오로지 소통(疏通)시키기에 힘썼으며 이미 지나간 일은 모두 개벽(開闢) 이전으로 부치고 모름지기 성대(聖代)에는 끝내 버려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데 귀착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날 간원(諫院)에서 판결사(判決事) 윤대영(尹大英)을 감안해 파직시킬 것을 아뢰면서 ‘전조(銓曹)에서 주의(注擬)하는 즈음에 전연 어렵게 여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윤대영이 어떤 흉도(凶徒)에게 빌붙었고 어떤 사류(士類)를 공격하였다는 것입니까? 신은 그를 마땅히 금고(禁錮)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신이 검의(檢擬)한 것은 다만 그가 시종(侍從)의 신하로 승자(陞資)된 지 7년인데도 당상직(堂上職)에 붙이지 않은 것은 정사의 규례에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한 것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곽처웅(郭處雄)이 물고(物故)되었다.

 

9월 4일 임오

이광덕(李匡德)을 이조 참의로, 김동필(金東弼)을 형조 판서로, 조명택(趙明澤)을 응교로, 정형복(鄭亨復)을 부수찬으로, 안상휘(安相徽)를 헌납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지평 이현망(李顯望)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유(李瑜)가 분사(分司)485)  의 신하로서 무단히 밀계(密啓)하여 반드시 유중(留中)할 것을 청하였으니, 거조가 상도(常道)에 어긋나 물정(物情)에 의혹을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이 비록 경솔하나 뜻은 보장(保障)을 중히 여긴 것이니, 청한 것이 지나치다.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강화(江華)의 대한 포폄 계본(褒貶啓本)에 아약(兒弱)이 초관(哨官)으로 된 명호(名號)가 있다 하여 임금이 특별히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이유가 이에 장계(狀啓)하기를,
"신(臣)이 봉진(封進)한 포폄 계본 가운데서 아약인 초관이 있다고 신칙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황송하고 감격하여 심지어 울음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오려 하였습니다. 곧 장교배(將校輩)들을 불러 특별히 분부하신 사연으로 반복하여 고하기를, ‘너희들이 감히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 가지 정무(政務)의 수응(酬應) 중에서 강도(江都)의 장교에 관한 등제(等第)486)  와 같은 것에 대하여도 깊은 밤에 반드시 두루 열람하셔서 일찍이 빠뜨리지 않으셨으며, 아약의 이름은 가장 글 줄이 으슥한 곳에 있는데도 열거하여 효유(曉諭)하시었다. 너희들이 감히 섬 가운데의 깊고 궁벽한 곳이라 하여 스스로 국사(國事)에 태만하게 하는가? 해와 달의 빛은 깊숙한 곳에도 비추지 않음이 없는데 너희들은 감히 작은 일이라 하여 소홀히 하는가? 태평무사한 때에도 성상께서 반드시 완급(緩急)에 진려(軫慮)하시어 한두 아약(兒弱)의 이름도 늘 갑작스러운 때에 힘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셨거늘 너희들이 감히 승평(昇平)하다 하여 안일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늘 늠곡(廩穀)을 더해 주시고 또 오래 근무하면 옮겨 주셨으니 이 어찌 한갓 너희들 자신에만 영광일 것이랴? 어찌 또한 힘쓰지 않을 수 있는가?’ 하니, 여러 군교(軍校)가 모두 말하기를, ‘감히 받들어 스스로 힘쓸 것을 도모하지 않습니까?’ 하였습니다.
대저 별도로 여리(閭里)의 장성(壯成)하지 않은 아약을 거두어 2초(哨)로 편성(編成)하고 또 초관(哨官) 2명을 뽑아서 거느리게 하였다가 그 장성함에 미쳐 원군(元軍)의 궐원(闕員)에 따라 옮겨 채우려 한 것이요 아약을 원군의 가운데에 뒤섞어 놓은 것은 아닙니다. 그 외의 군제(軍制)에 마땅히 변통할 일이 있으면 신이 다시 상량(商量)하여 조만간 진품(陳稟)하겠습니다. 이러한 진청(陳請)은 가부간에 신충(宸衷)으로 결단을 내리시도록 하기 위해 이 계지(啓紙)를 특별히 유중(留中)하도록 한 것입니다. 대개 밀계(密啓)한 가운데 사의(辭意)가 숨길 만한 일이 없고 다만 군덕(君德)을 찬송(贊頌)한 것이나, 반드시 유중하기를 청하여 물정(物情)을 놀라게 하였으니 어찌 대각(臺閣)의 규정(赳正)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언(正言) 조정(趙侹)이 송진명(宋眞明)의 소어(疏語) 때문에 인피(引避)하여 아뢰기를,
"윤대영(尹大英)은 신축년487)  ·임인년488)   사이에 죄범(罪犯)이 낭자한지라 사람들이 몹시 미워하여 침을 뱉고 꾸짖지 않는 이가 없는데, 어찌 유독 아전(亞銓)489)   만이 알지 못하고 반드시 신(臣)이 분명히 말하기를 기다리고자 하는 것입니까? 인심(人心)에 흡족하지 아니하고 공의(公議)에 비난을 받는 자라도 일례(一例)로 소통(疏通) 시킨다고 한 것은 어찌 그리도 심히 기탄(忌憚)이 없는지요? 죄범이 낭자한 사람을 대부분 팔뚝을 걷어 붙이고 권장하여 나오게 하면서 한낱 윤대영의 외람된 관직을 논한 데 대하여 또한 성난 눈으로 보고 소장(疏章)에 드러내어 배척하면서 한 마디의 말도 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9월 5일 계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講)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知經筵)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전세(田稅)나 대동미(大同米)는 비록 조금 미수(未收)하더라도 모두 해유(解由)와 구애되고 녹봉(祿俸)의 월등(越等)490)  하는 법이 있어서 이에 구애 받는데, 호조에 바치는 정포(正布)·가미(價米)나 세폐목(歲幣木)491)  에 대해서는 원래 해유나 월등의 법이 없기 때문에 해마다 미수의 폐단이 있게 마련입니다. 청컨대 한결같이 대동미의 규례에 의하여 법을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영빈방(寧嬪房)에서 절수(折受)한 곳을 호조에 소속되어 적몰(籍沒)해 들인 전토와 바꾸어 궁방(宮房)에 주라고 지난번에 판부(判付)한 분부가 있었고, 또 ‘하필 서로 버틸 것이 있는가? 수본(手本)에 의하여 아울러 시행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양향청(糧餉廳)에 귀속시켜 군문(軍門)의 물건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군문의 전토를 궁방에 바꾸어 주는 것은 실로 뒷날 폐단에 관계 되어 길을 터놓기 어려우니, 끝내 받들어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향청은 호조에 소속된 것이 아닌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훈국(訓局)에 소속되었는데 호조에서 으레 제조(提調)를 겸임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이 염려스러우니, 시행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고, 승지 이종성(李宗城)도 또한 김재로의 말을 옳게 여기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향청과 훈국은 다름이 있고 또 서로 비꾸어 주는 것은 빼앗아 주는 것과는 다르다. 본방(本房)은 또 다른 궁방(宮房)에 비할 바가 아니며, 선조(先朝)의 대우가 자못 각별하였으니, 바꾸어 주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양향청도 또한 군문(軍門)입니다. 군문의 전토(田土)를 궁방에 바꾸어 주는 일을 오늘부터 새로이 터놓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입니다. 유사(有司)의 신하가 쟁집(爭執)한 것은 체모를 얻은 것입니다. 성상의 분부가 비록 이와 같으나 신은 그윽이 작환(繳還)의 뜻을 붙여 또 이렇게 번거롭게 아룁니다."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군문의 전답(田畓)을 바꾸어 주는 것은 끝내 미안한 데 관계되니, 이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뒤로는 반드시 전례를 끌어대며 청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하교는 중요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후에 규례로 끌어댈 염려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뒤로는 영원히 막아서 엄격하게 정탈(定奪)492)  을 밝히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권영(權瑩)의 소어(疏語)는 큰 죄가 아니며 사람됨이 거만하지도 않습니다. 신진(新進)으로 천안(天顔)을 보고자 한번 우러러 본 것이니, 이미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눈이 큰 것이 원래 본 생김새이니 노려보는 눈으로 우러러 보았다는 분부는 원통합니다. 물러갈 때에 단지 체직(遞職)된 줄로만 알았고 찬적(竄謫)의 명은 듣지 못했으며, 친척(親戚)의 직소(職所)에 잠깐 들러 쉬었던 것도 또한 족히 괴이할 것이 없으니, 방자하다는 것으로 단정하심은 더욱 지나칩니다. 특별히 너그러이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금석(金石)처럼 정하여졌는데 어찌 흔들려 고쳐지랴?"
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 이이제(李以濟)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남병사(南兵使) 이의풍(李義豐)은 토산물(土産物)이 아닌 것을 과외로 함부로 별시군(別寺軍)에게 징수하여 가난하고 잔약한 군졸(軍卒)이 참독(慘毒)함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가 함부로 받아들인 것이 어느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직임을 파하기를 청하는 것은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헌납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곽처웅(郭處雄)의 정절(情節)이 이미 제문(祭文)에 드러났는데도 마침내 경폐(徑斃)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극악 무도(極惡無道)한 무리는 상례(常例)로 처치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해부(該府)로 하여금 빨리 처자(妻子)를 종으로 삼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소서. 근래 국청 죄수(鞫廳罪囚)가 경폐하는 경우가 많으니, 특별히 해부(該府)에 신칙하여 중죄수(重罪囚)가 경폐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곽처웅의 일이 비록 지극히 절통하나 법외(法外) 형전(刑典)을 가볍게 시행할 수는 없다."
하였다.

 

9월 6일 갑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윤유(尹游)가 문의(文義)로 인해 각도(各道)에 신칙하여 백성에게 제때에 보리를 파종하도록 권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저울·되·말·휘를 공평하게 한 뜻에서 또한 느낀 점이 있다. 윗사람이 손해를 보고 아랫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정사를 진실로 쉽게 행하지는 못하겠지만, 만일 조적(糶糴)하는 즈음에 말과 휘의 크고 작은 것이 같지 않다면 이 어찌 백성의 위가 되어 도량형을 공평하게 하는 방도라 하겠는가? 외방(外方)에도 이런 폐단이 없지 않으니 모두 신칙하라."
하였다.

 

지평 이현망(李顯望)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전 정언(正言) 조정(趙侹)이 죄가 없는 윤대영(尹大英)을 탄핵하고 논박하며, 그 빙자하여 경함(傾陷)할 계획을 부리는 것은 오로지 시사(時事)를 낭패시키고 조정을 어지럽히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더구나 어리석고 글을 못해 남의 사주를 받았으니, 청컨대 그 직임을 파하고 인하여 전조(銓曹)로 하여금 다시는 청선(淸選)에 검의(檢擬)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은 이미 체직(遞職)시켰다. 다시 어찌 죄를 논한단 말인가?"
하였다.

 

9월 7일 을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윤순(尹淳)이 능행(陵幸) 때의 의대(衣襨)493)  는 의당 몸에 편하도록 힘써야 한다며 배자(褙子) 등이 대내(大內)에 있는가를 우러러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시 초문이다. 그 제도가 어떠한 것인가?"
하니, 윤순이 그 제도를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처럼 매우 긴요한 것인가?"
하고, 약방에서 지어 들이라고 명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국청 죄수 곽처웅(郭處雄)이 경폐(徑斃)한 뒤 대신(臺臣)이 그 처자(妻子)를 종으로 삼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비록 법외의 일이나 죄범이 낭자하니, 시행을 들어주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494)  의 역란(逆亂)은 군사를 일으킨 역적이기 때문에 특별히 이 형률(刑律)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법외의 형률을 매번 시행할 필요는 없다. 국가의 상법은 비록 지만(遲晩)한 뒤라 하더라도 경폐한 자에게는 추론(追論)하는 일이 없다. 지난 갑진년495)  에 육시(戮屍)의 형률을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에게 시행하였는데 이는 뜻한 바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임인년496)   사이에 이사상(李師商)·김일경이 구대(求對)하여 이 육시의 율을 쓸 것을 청하였으니, 상앙(商鞅)497)  이 이른바 ‘법(法)을 만든 자가 자신부터 그 법에 빠져든다.’는 것은 또한 김일경에 해당되는 말이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대계(臺啓) 가운데 이른바 ‘윤대영(尹大英)이 흉도(凶徒)에게 빌붙어 사류(士類)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윤대영이 전후로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한 번도 발계(發啓)한 일이 없었고 단지 연계(連啓)에만 참여했을 뿐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계라면 윤대영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아전(亞銓)498)  과 승지 이광보(李匡輔)와 같은 여러 사람이 누가 연계에 참여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도겸(李道謙)은 무신년에 호서(湖西)의 어사(御史)로서 마침 흉변(凶變)이 도내(道內)에서 일어났는데도 잘 조처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먼저 올라왔으니, 큰 실착입니다. 그러나 집안이 대대로 청백(淸白)하였으니 끝내 영원히 폐기(廢棄)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도겸이 어사로서 그 도내에 있을 때 마침 흉변을 당하였다면 의당 조처하고 지휘하여 한 지방(地方)이라도 보호할 일을 생각했어야만 했을 것인데 경솔하게 먼저 올라왔으니, 이 뒤로 아무리 발탁되어 서용(敍用)된다 하더라도 그때의 실착은 면할 수 없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근래 정시(庭試)에서 4자문(四字文)을 꾸며내는 것은 그 공부가 사륙문(四六文)보다 쉽기 때문으로 정권(呈券)이 전에 비해 너무 많습니다. 숙종 초년에는 잇따라 명(銘)이나 송(頌)을 시험문제로 내었기 때문에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와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이 그 폐단을 아뢰어 그 뒤로 잇따라 사륙문으로 내었던 것입니다. 이제 알성(謁聖)하는 일이 임박했으므로 신(臣)이 감히 우러러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서울의 유생(儒生)은 전적으로 사륙문만 공부하고, 시골의 유생은 전적으로 사(詞)와 부(賦)를 공부해 왔다. 갖가지 시제(試題)를 흩어 낸 것은 내가 또한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이미 사대(事大)하는 나라로서 사대하는 문자(文字)는 사륙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문사(文辭)가 풍부한 자는 글이 헌걸스럽지 않은 것이 없으나 사륙체는 반드시 공정(工程)이 있은 뒤에야 변려(倂儷)의 체제를 얻습니다. 사자문(四字文)과 같은 것은 임시로 갑자기 얽더라도 오히려 완편(完篇)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륙체도 또한 한쪽으로만 전적으로 주력할 것은 없다."
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사(詞)와 부(賦)에 만약 압운(押韻)을 하지 않으면 곧 동몽(童蒙)의 고풍(古風)이 됩니다. 근래의 과부(科賦)에 대부분 압운을 하지 않으니, 국시(國試)에서 어찌 운자(韻字)가 없는 글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이 뒤로는 대과(大科)나 소과(小科)의 부(賦)에 압운하지 않은 것들은 마땅히 격례(格例)에 어긋나는 것으로 빼 버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로는 옛날의 규례에 의하여 압운한 뒤에야 입격(入格)하는 일로써 예조(禮曹)의 절목(節目)에 첨가해 넣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도승지 윤양래(尹陽來)가 말하기를,
"이현망(李顯望)이 강화 유수(江華留守)를 논박했는데, ‘그 밀계(密啓)를 몰래 들여 보냈다.’는 등의 말은 더욱 지극히 위험합니다. 이이제(李以濟)가 이의풍(李義豐)을 논박한 것도 또한 실상이 아닙니다. 이른바 ‘남징(濫徵)’이란 곧 10월에 징수한 물건인데 이의풍의 도임(到任)은 올해 3월에 있었으니, 올해는 10월의 시기가 되지 않았고 지난해의 일은 이의풍의 알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8일 병술

달이 입성(立星)을 침범하고 유성(流星)이 군시성(軍市星) 아래에서 나왔다.

 

9월 9일 정해

조상경(趙尙絅)을 공조 판서로, 윤휘정(尹彙貞)을 사간으로, 조명겸(趙明謙)을 정언으로, 심성희(沈聖希)를 수찬으로 삼았다.

 

9월 10일 무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왔다.

 

임금이 헌릉(獻陵)을 전알(展謁)하였다. 묘시(卯時) 초3각(刻)에 소여(小輿)를 타고 인정전(仁政殿)을 나와 인정문 밖에 이르러 말을 탔고, 흥인문(興仁門) 밖에 이르러서 비로소 가교(駕轎)를 탔다. 사시(巳時) 광진(廣津)주정소(晝停所)499)                  에 이르니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가 지영(祗迎)하였으므로, 임금이 불러 보았다. 인하여 배 위의 장전(帳殿)에 올랐고, 이미 건너서는 다시 교자(轎子)를 탔으며 안향청(安香廳)에 이르러 천담복(淺淡服)으로 갈아입었다.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려 할 즈음에 좌상(左相)과 우상(右相) 및 약방 제조(藥房提調)를 따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홍살문에 들어가 망릉례(望陵禮)를 행하고, 걸어서 능소 위로 나아가 봉심하고는 내계(內階) 위에 이르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갑술년500)                  에 행행(幸行)하신 뒤로 이제 40여 년이 되었는데, 어찌 내가 거듭 오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갑술년은 바로 내가 태어난 해니, 옛날의 감회가 절로 갑절이나 된다."
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전부터 이 능소에 행행하려고 하면 번번이 사고가 있었습니다. 숙종께서 비로소 행행하셨고 이제 성상께서 또 전알하셨으니 효성(孝誠)이 더욱 빛이 납니다."
하고, 도승지        윤양래(尹陽來)가 말하기를,
"효종조(孝宗朝)에도 일찍이 행행하려 하였으나, 칙사(勅使)의 행사와 상치되어 중지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전의 일을 비록 알지는 못하나 세종조(世宗朝) 이후로는 행행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임금이 인하여 서쪽을 따라 북쪽으로 해서 도로 남쪽 뜰에 이르렀고 비각(碑閣)으로 내려가 각문(閣門) 안에 머물고는 새로 세운 비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갑술년에 행행하신 뒤로 곧 이 비석을 세운 것인가?"
하니, 윤순이 말하기를,
"임진년501)                   난리가 난 뒤로 옛날의 비석이 파손되었는데 갑술년 행행 때에 매안(埋安)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 옛날의 비석은 전과 같이 두고 다시 그 옆에 새로 비석을 세워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면(下面)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숙종조 때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걸어서 홍살문 안에 이르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는 소여(小輿)를 타고 재실(齋室)에 이르렀다.

 

9월 11일 기축

큰 바람이 불면서 천둥과 번개가 쳤다. 우박의 크기는 개암 열매만 하였다.

 

임금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후손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고, 말하기를,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날을 잡아 영창 대군(永昌大君),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公主)의 묘(墓)와 해창위(海昌尉)·명안 공주(明安公主) 묘에 치제(致祭)하게 하라. 그리고 제문(祭文)은 모두 친히 지을 것이나 영창 대군 묘의 제문은 관각(館閣)에 명하여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 묘들은 모두 연로(輦路)의 지나는 길에 있었으니 갑술년 선조(先朝)에서 능행(陵行)할 때의 규례를 따른 것이었다.

 

전교(傳敎)하기를,
"본 능(陵)에 행행(幸行)한 지 이제 40년이나 되니, 백성을 역사시킨 바가 반드시 다른 도의 갑절이 될 것이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규례를 상고하여 진휼(軫恤)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헌릉(獻陵)에서 환궁(還宮)하였다. 선상 훈국군(先廂訓局軍)에게 먼저 나루를 건너 화양정(華陽亭)에 머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전후의 상군(廂軍)인 어영군(御營軍)도 또한 대가(大駕)가 배를 타기 전에 먼저 나루를 건너 나룻 머리에 머물러 있다가 대가가 이르자 기고(旗鼓)로 맞이하였다. 대가가 광나루 주정소(晝停所)에 이르자 병방 승지(兵房承旨)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대가(大鴐)가 장대(將臺)에 오른 뒤에 여러 장교(將校)가 참알(參謁)하는 것과 방포(放砲)를 등대(等待)하는 것을 아울러 하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대가가 친히 조련(操鍊)을 행할 때는 군문(軍門)에 들어간 뒤에 시위(侍衛) 이하 따르는 관원들이 모두 걸어서 따른다고 하였으나,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세류영(細柳營)502)  에 들어갔을 때에 고삐를 당기고 천천히 가자, 수종하는 관원들이 모두 걸어서 따랐던 것은 곧 군사를 위로한 것이지 군사를 조련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군사의 조련에 친림하셨으니 곧 대장(大將)의 일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마땅히 늘 조련하는 규례에 의하여 따르는 관원들이 모두 말을 타고 반열의 차서에 의하여 곧바로 장대(將臺)로 향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체모를 얻었으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기 관찰사 신방(申昉)과 광주 부윤(廣州府尹) 조명교(曺命敎)와 양주 목사(楊州牧使) 이여적(李汝迪)을 불러보고 각각 소회(所懷)를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신방은 도내(道內)의 농사 형편을 갖추어 전달하면서 각 항목의 응당 받아야 할 곡식과 잡색 군포(雜色軍布)에 대하여 감봉(減捧)할 것을 청하고, 이여적은 우러러 아뢰기를,
"주정소(晝停所)의 기지(基址)는 본읍(本邑)의 민전(民田)이고, 선창(船艙)의 기지에서 취토(取土)하는 곳은 곧 춘초정(春草亭) 한사(寒士)의 밭인데, 춘초정은 곧 세종조(世宗朝)의 친왕자(親王子)인 익현군(翼峴軍) 이관(李璭)의 묘전(墓田)입니다. 매번 능행(陵幸) 때면 흙을 파서 선창을 쌓아 그 땅이 거의 강(江)을 이루었으니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고, 표피(豹皮)와 궁시(弓矢)를 도신(道臣)과 지방관(地方官)에게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막차(幕次)를 나와 수레를 탔다. 병조 판서 윤유(尹游)가 아뢰기를,
"열무(閱武) 때 납함(吶喊)503)  하는 것은 전례(前例)에 없는 일이며 선조(先朝) 때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군문(軍門)의 절조(節操)는 으레 병조 판서로 지휘(指揮)하게 하나 어떤 이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도 합니다."
하니, 납함은 선조의 규례를 따르고 지휘는 병조 판서가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선창(船艙)에 나아가니 승지가 하정포(下碇砲), 하정취(下碇吹), 하선취(下船吹)를 규례와 같이 할 것을 품(稟)하였다.. 임금이 배에서 내려 말을 타니 승지가 후상군(後廂軍) 어영진(御營陣)의 기고(旗鼓)가 앞에 있다 하여 주필(駐驆)을 청하였다. 임금이 고삐를 당기니, 승지가 세 발의 신포(信砲) 쏘기를 청하였다. 어가(御駕)가 어영진 앞에 이르자 어영 대장이 신전(信箭)504)  이 없다 하여 진문(陣門)을 열지 않으니 백관(百官)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세류영(細柳營)의 전례(前例)를 따르려는 것인가?"
하니, 승지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영 대장의 잘못입니다. 세류영(細柳營)은 대장이 앞에 있었고 천자(天子)가 군사를 위로할 즈음에 앞잡이가 이르니 곧 문을 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에 신전(信箭)으로 기고(旗鼓)를 가지고 대가(大駕)를 영접하게 하였으니, 대장이 마땅히 진두(陣頭)에 꿇어앉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해영(該營)에서 교련관(敎鍊官) 2인이 신전을 가지고 앞에 있었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가로 막으면서 다시 신전을 청한다 말입니까?"
하매, 임금이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대가가 전교(箭橋) 앞에 이르자 선상군(先廂軍)인 도감진(都監陣)의 기고(旗鼓)가 앞에 있었으므로 또 주필(駐驆)하고는 고삐를 당기니 신포(信砲)를 쏘았다. 임금이 군문(軍門)에 들어가서 대가(大駕)의 뒤에 있는 금군(禁軍)이 먼저 가서 장대(將臺)의 좌우(左右)를 둘러싸 호위하라고 명하였다. 금군이 진중(陣中)에 돌입하니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이 보졸(步卒)을 지휘하여 가로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진중(陣中)에서 포(砲) 소리가 어지럽게 나고 진외(陣外)에서 사람과 말이 달리며 충돌하니 시위(侍衛)하는 백관(百官)들이 놀라지 않음이 없었고 임금은 말을 멈추어 나아갈 수가 없었다. 장붕익이 대가 앞에서 품(稟)하여 방진(方陣)의 호령을 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진을 할 필요가 없다. 속히 포성(砲聲)을 금지하게 하고 금군 별장(禁軍別將) 조경(趙儆)을 불러서 금군을 급히 물러나게 하라."
하고, 임금이 장대(將臺)에 나아갔다. 좌참찬 송인명(宋寅明)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포성을 마구 내어 대가(大駕)를 놀라게 했다 하여 훈장(訓將)을 처참(處斬)할 것을 청하였다. 좌승지 이광보(李匡輔)는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미 주둔(駐屯)해 있는 진을 금군이 침범하였은즉 훈장은 암암리에 영(令)을 낸 것이 있는가 의심하여 응접한 것이니 병법(兵法)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하고,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이미 암암리에 영을 낸 일이 없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 윤유(尹游)는 또한 말하기를,
"마침내 미안한 데에 관계됩니다."
하고, 유엄(柳儼)은 말하기를,
"금군이 돌진하여 진영(陣營)을 침범하자 훈장(訓將)이 암암리에 영을 낸 것으로 알고 응접했던 것이니 의도는 대가(大駕)를 호위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훈장(訓將)이 병사(兵事)를 익숙하게 알고 있었으니, 이런 일은 상을 줄 만한 것이고 죄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와 각영(各營)의 대장이 갑옷과 투구를 입고 양쪽에 꿇어앉아 한번 읍(揖)하여 참알례(參謁禮)를 행하였다. 유엄이 유엄이 소개문(小開門)하고 취타(吹打)하기를 품하였고, 여러 대장들이 각각 본진(本陣)으로 돌아갔다. 윤유는 승장포(陞帳砲)를 쏠 것을 품하였고, 유엄은 방포할 때 기(旗)를 휘두를 것과 호적(號笛)을 맡는 일을 가지고 명을 품하였는데, 임금이 호적과 방포할 것을 명하니 각영(各營)의 대장 이하가 바야흐로 말을 달려 장대(將臺) 아래로 나아가서 방포하는 것을 등대(等待)하였다. 그런데 마침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장막이 말리고 기(旗)가 부러졌다. 천둥·번개·우박이 일시에 일어나니, 벼락을 맞아 죽은 자가 셋이었다. 임금이 크게 놀라 곧 진(陣)을 거두고 백관(百官)은 우비(雨備)를 쓰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은 바야흐로 노천(露天)에 있었는데 반열 가운데 먼저 우비를 갖춘 자가 있었다. 유엄이 추고(推考)를 청하니 임금이 이미 하교(下敎)가 있었다며 추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가교(駕轎)로 환궁(還宮)할 때에 취타(吹打)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몇 리(里)를 가다가 유엄이 말하기를,
"비바람이 급하게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말을 서서히 몰아 조용한 뜻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비가 이처럼 세차게 내리니, 청컨대 승지로 하여금 어가(御駕)의 뒤를 가까이 따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백관과 군졸(軍卒)들이 난잡하게 순서를 잃어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가가 도성(都城) 밖에 이르자 유엄이 도성 문이 가까이 있어 사민(士民)들이 우러러 보는 데에 대비(對備)하여 가마의 3면의 창을 열어 놓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가(大駕)가 도성에 들어오자 길 옆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소회를 아뢰기를 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형조에 넘겨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곧 천례(賤隷)로 이름을 김기리금(金己里金)이라고 하는 자가 스스로 지술(地術)에 밝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명릉(明陵)은 화산(火山)이 서남방(西南方)에 보이고 금성(金星)이 서방(西方)에서 비치니 마땅히 능침(陵寢)을 옮겨야 하고 북한산(北漢山) 대성문(大成門) 길은 도성(都城)의 지맥(地脈)에서 나와서 국도(國都)에 해가 있습니다. 청컨대 그 길을 다시 내소서."
하였는데, 난언(亂言)을 했다 하여 형배(刑配)하였다.

 

대사헌 조명익(趙明翼)과 대사간 조석명(趙錫命) 등이 가가(假家)505)  가 지나치게 사치하다 하여 헌부(憲府) 관원을 엄중히 추고(推考)하라고 한 분부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고, 아뢰기를,
"이는 곧 경기 감영(監營)에서 열읍(列邑)에 알려 분배해 온 옛 규례로 양사(兩司)에서 간섭하고 지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상세하게 살피지 않으시고 곧바로 신(申) 등의 죄로 단정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전하께서 대각(臺閣)을 몹시 박하게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곳에 따라 촉발(觸發)되는 것이 이와 같은 유가 많으니, 신 등은 그윽이 개연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경기의 광주(廣州) 등 21개 고을에 큰 바람과 함께 우박이 쏟아졌는데 큰 것은 달걀만 하고 작은 것은 새알만 하였다. 충청도 5개 고을에는 우박이 곡식을 손상시켰고, 황해도 3개 고을에는 바람이 불고 천둥치며 우박이 쏟아졌는데 크기가 거위알만하여 쌓인 것이 언덕을 이루었다.

 

9월 12일 경인

승정원에서 능침(陵寢)을 전알(展謁)하고 환궁(還宮)하며 교련장(敎鍊場)에서 열무(閱武)할 즈음에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천둥치며 우박이 쏟아진 변괴를 가지고 아뢰며 진계(陳戒)하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재해(災害)를 인하여 하교(下敎)하시기를, ‘동작(動作)에 마땅함을 잃어서 자신의 덕이 휴손(虧損)된 것인가? 폐총(嬖寵)이 진출(進出)하고 사알(私謁)이 행해진 것인가? 형벌(刑罰)이 신중하지 않아 사람들이 권장되거나 징계됨이 없어서인가? 등용하고 버리는 것이 마땅함을 잃어서 인재(人才)가 빠뜨려지고 막혀서인가? 제사(祭祀)의 봉향(奉享)이 정결하지 못하여 많은 신명(神明)이 흠향하지 않아서인가? 부역이 고르지 못하여 서민(庶民)이 원망해서인가? 간사한 자가 법을 문란(紊亂)시켜 옥송(獄訟)이 지체되고 억울함이 있어서인가? 토호(土豪)의 교활함이 방자하게 날뛰고 마을에 근심과 탄식이 있어서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참찬관(參贊官) 권근(權近)이 상서(上書)하여 진계(陳戒)하였는데, 그 말이 절실(切實)하고 곧으매, 일일이 채택하여 시행하셨습니다. 또 수재(水災)를 만나 지신사(知申事)를 꾸짖기를, ‘그때는 어찌 말하지 않는가?’하셨으니, 이에서 참으로 우리 성조(聖祖)께서 성실(誠實)한 덕(德)으로써 하늘에 대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태종(太宗)의 기업(基業)을 이어받았고 태종의 능침을 전알(展謁)하셨으니, 의당 태종의 유교(遺敎)를 지켜 태종의 치도(治道)를 이어받으셔야 합니다. 태종께서 자책(自責)한 8조(條)와 같은 것은 비록 감히 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저 전하의 병통이 진실로 직언(直言)을 용납하지 못하는 데에 있으니, 종종 하자가 모두 이로부터 나옵니다. 전하의 덕이 이미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했기 때문에 이에 도리어 단상(壇上)에 앉아 군병을 훈련시킬 때에 위엄으로 충동시켜 척연(惕然)히 두려워하고 구연(瞿然)히 스스로 반성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오직 간절한데, 힘써 경계한 말이 절실하니 어찌 맹렬히 반성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전(前) 군수(郡守) 윤봉구(尹鳳九)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신(臣)이 신해년506)  에 외람되게 《집요(輯要)》의 진강(進講)에 참여하라는 명을 받고 대략 《집요》 가운데 있는 이야기를 주워 모아 잠규(箴規)의 정성을 폈는데, 성비(聖批)를 받기에 미쳐서는 선정(先正)의 구어(句語)를 들어 특별히 미안한 뜻을 보이셨습니다. 전하의 유자(儒者)를 높이고 학문을 좋아하시는 뜻으로써 오히려 그 글을 읽고 그 뜻을 버린 것을 면치 못하였고, 신의 비루함과 야박함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선정의 말이 군심(君心)을 깨우치게 함을 보지 못하였으니, 신의 마음에 황송하고 부끄러움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한원진(韓元震)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그때에 처분의 전말(顚末)을 채 다 알지는 못하나, 다만 상소 끝에 진퇴(進退)를 같이하는 뜻은 대략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한원진이 감히 말하지 못할 곳을 능멸하고 업신여긴 것을 그 소(疏)에 가리우기 어렵다고 비답하셨으며, 심지어는 존주 대의(尊周大義)에 의해 패만(悖慢)한 말을 한 사람을 토죄(討罪)하여야 한다고 분부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신은 감히 어떠한 것이 존주(尊周)의 의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존주의 의리는 《춘추(春秋)》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주나라 천자(天子)의 과실을 쓴 것이 한 군데뿐만이 아닙니다. 황명(皇明)을 높이는 뜻은 우리 효종(孝宗)보다 더 밝음이 없고, 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과 같은 이는 평생 동안 지켜온 것이 바로 의리힌데, 나아가 치도(治道)를 논할 때 말이 황조(皇朝)에 미치면 그 득실(得失)에 따라 숨기지 않고 모두 하였습니다. 이것은 연보(年譜)에 실려 있으니 분명히 상고할 수 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은 홍무(洪武)507)   때 예제(禮制)가 성전(聖傳)을 어지럽혀 세상의 교훈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임금을 높이는 의리와 일을 논하는 체제가 같이 행해져 어긋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일이 천조(天朝)에 관계된다 하여 감히 그 시비(是非)를 말하지 못하고 한결같은 말로 찬미(贊美)하는 것만이 존주(尊周)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무슨 도리(道理)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한원진이 이미 들은 바 있어 감히 광구(匡救)하는 뜻을 첨부한 것이니,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 말하건대 황조(皇朝)에 언급 된 것은 사리(事理)로 헤아려 보면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침모(侵侮)한 것이라고 하여 존주하는 데 죄를 얻었다고 한다면, 또한 어찌 한원진이 털끝만큼인들 마음에 싹틔운 것이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지난해에 한원진을 불러오게 하여 유사(儒士)로 대우할 때 은례(恩禮)가 저와 같이 융숭하였는데, 선입견이 주가 되어 위노(威怒)가 너무 지나치고 죄를 성토(聲討)함이 낭자 하니, 당초의 은례를 이어나가지 못하는 한탄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한원진과 어려서부터 같이 배워 뜻과 행동이 상합(相合)하였으니 굶주리고 배부른 것과 춥고 더운 것을 의리상 달리할 수 없습니다. 어찌 처음에 서로 간여한 것이 없다 하여 혼자만이 영진(榮進)하겠습니까? 아! 숙종 대왕께서 세상의 변고를 두루 겪으셨는데, 그 시비의 원인을 추구하여 이미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대현 군자(大賢君子)로 삼았으니, 송시열을 배반하는 자는 바로 소인입니다. 그리고 만년의 처분이 광명(光明)하고 활달한 것은 가히 귀신에 질정하고 백세(百世)를 기다릴 만합니다. 최초의 분열은 실로 공사(公私)·사정(邪正)의 나뉨에서 말미암았는데 45년 사이에 크고 작은 논의(論議)가 매번 흑(黑)과 백(白)이 서로 반대되는 것과 같아 온 나라의 사람이 일정한 색목(色目)이 있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마음을 세우고 행동하는 데서부터 언론(言論)과 풍습(風習)이 바로 향기나는 풀과 악취나는 풀 그리고 얼음과 숯이 한 그릇에 있지 못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이에 다시 가차없이 칼로 양단(兩斷)한 것과 같이 하였으며, 문자(文字)를 만들어서 후손을 편하게 할 계책을 전하였고 선위(禪位)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모두 정일(精一)한 법을 주어 명하였으니, 이 어찌 잠깐 사이의 우연한 처분이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탕평(蕩平)’ 두 글자를 가지고 다스리는 신부(信符)와 조정(調停)하는 틀로 삼아 반드시 그 근원부터 시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심지어 정미년508)   하교(下敎)가 있기까지 하여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세도(世道)가 날로 변하여 난역(亂逆)이 겹쳐 발생하였으니, 실로 건중(建中)의 조정(調停)509)  이 마침내 정강(靖康)의 난510)  을 빚어내어 전철(前轍)에서 밝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모두 탕평이 그 요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시고 도리어 요즘의 변란(變亂)은 붕당(朋黨)에 연유되었고 붕당의 원인은 사문(斯文)511)  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시어 사문을 변모(弁髦)512)  처럼 보시고 사론(士論)을 오훼(烏喙)513)  처럼 여기십니다.
따라서 사림(士林)의 사이에 정론(正論)이 사라지고 조정에서는 충절(忠節)이 없어져, 군자(君子)는 물러나고 소인(小人)은 나오며 양(陽)이 사라지고 음(陰)이 길어져서 송시열의 도가 날로 더욱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옛날 화정 윤씨(和靖尹氏)514)  가 정씨(程氏)515)  가 배척을 당함으로 인해 사직하고 소명(召命)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은 선정(先正) 권상하(權尙夏)에게 배워서 송시열의 도를 사표로 삼아왔는데 송시열의 도가 이미 다시 오늘에 칭송되지 않으니 스스로 초개(草芥)처럼 버려짐을 달게 생각합니다. 어찌 감히 양귀산(楊龜山)이 한번 행역(行役)하여 주자(朱子)의 비난을 사는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군자는 물러나고 소인은 나오며, 음이 길어지고 양이 사라진다는 등 말은 겨우 안정된 세도(世道)를 시끄럽게 만들려고 하는 것으로 유자(儒者)를 위해 길이 개탄한다. 본직(本職)의 체임(遞任)을 허락한다."
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과 우의정 김흥경(金興慶) 등이 청대(請對)하여 별저상(別儲廂)에 입시(入侍)하였다. 서명균 등이 어제의 재이(災異)를 가지고 각각 면계(勉戒)하는 말을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강무(講武)한 것은 크게 벌이려고 한 뜻이 아니라 또한 성고(聖考)의 일을 계술(繼述)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환궁(還宮)할 때에 재이는 혹 성효(誠孝)가 부족한 데서 연유한 것인가? 하늘과 사람은 한 이치인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 사관(史官)이 자주 나의 안색이 움직였는가 않았는가를 살폈으니 나의 놀라서 두려워하는 안색을 사관도 또한 보았을 것이다. 내가 평상시에도 천둥치고 비오는 때를 만나면 일찍이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니, 이는 젊을 때부터 선조(先朝)의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일을 보아온 데서 연유하여 그런 것이긴 하나, 이는 성고의 처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옛말에, ‘상제(上帝)가 너에게 임하였으니 두 마음을 가지지 말고 걱정하지도 말라.’고 하였으니, 매양 이 교훈을 보면 문득 반드시 일어나 앉는다. 평상시에도 혹은 ‘천(天)’자가 자리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주워서 물에 넣어 잠기게 하였으니, 나의 성미가 본래 이와 같았다."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하늘은 진실로 감응시키는 것이요 문식(文飾)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려면 감히 편하고 게을리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항시 지난날 재이를 만났던 마음을 마음에 두소서."
하고, 승지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숙종께서는 매양 재이를 당하면 근심이 안색에 나타났고, 효종께서도 또한 ‘진실된 정사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늘의 견책(譴責)에 보답하겠느냐?’고 분부하셨습니다. 태종의 덕을 추모하고 효종의 훈계에 더욱 힘쓰시면 이것이 바로 계술(繼述)하는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옛말에, ‘선왕(先王)은 덕을 빛내고 군사의 위엄으로써 시위(示威)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또한 원컨대 유의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숙종조(肅宗朝)에 또한 전성(展省)하고 난 뒤에 ‘바야흐로 상로(霜露)의 감회516)  가 간절하니, 마땅히 강무(講武)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고 진달하였습니다. 대저 강무는 능행(陵行) 때 할 필요가 없으니, 봄 가을 두 계절에 날을 받아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김흥경이 말하기를,
"주 선왕(周宣王)도 또한 대수(大蒐)517)  의 거조가 있었으나 능행 때 시행하지는 않았으니, 교야(郊野)에 들녘의 추수가 끝난 뒤에 날을 잡아 강무하는 것도 또한 왕정(王政)의 할 바입니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어제 진중(陣中)에서 군병(軍兵)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이 서로 다투고 포(砲)와 화살이 어지럽게 일어났으니 신(臣) 등은 처음에 암령(暗令)이 있었는가 생각했습니다만, 추후에 들으니 영(令)을 낸 일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망령되이 서로 억측하고 대가(大駕)의 지척에서 이런 놀랄 일이 있었으니, 훈련 대장과 금군장(禁軍將)을 모두 잡아다 신문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뜻하지 않게 금군(禁軍)이 갑자기 진중(陣中)에 들어갔으니, 훈련 대장이 가로 막았던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신이 금군을 부르자고 품할 때에 능히 암령이 없다는 뜻으로 훈련 대장에게 분부하지 못하여 이런 일이 있게 되었으니, 만약 그 죄를 논한다면 신이 실로 먼저 받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승지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講)하였다. 영경연(領經筵)        서명균(徐命均)이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연안(延安)의 이노 작대(吏奴作隊)를 병사(兵使)가 순점(巡點)하지 말게 할 것을 장청(狀請)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배천(白川)은 같은 강화의 속읍(屬邑)이므로 의당 연안의 예에 따라 시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연안은 강화의 겸영장(兼營將)이 되었으니 군병(軍兵)을 강화에 영부(領付)하고 그 본읍(本邑)으로 돌아오면 바로 연안 부사(延安府使)입니다. 만약 감사(監使)·병사(兵使)가 징병(徵兵)하는 일이 있으면 형편상 의당 연안 부사로서 거행하여야 하는데, 이로써 본다면 이노 작대가 본도(本道)의 본읍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결코 강도(江都)에서 구관(句管)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노 작대는 수령(守令)의 수하 친병(手下親兵)이어서 병사(兵使)가 관섭(管攝)할 바가 아니니, 병영(兵營)에서 순점(巡點)하는 것도 일체 정파(停罷)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어저께 행행(行幸) 때 광주(廣州)의 백성들을 진념(軫念)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갑술년518)                  에는 그 환자곡[還上穀]을 탕감하였는데 지금은 광주의 환자곡이 거듭 흉년이 든 나머지 원수(元數)가 많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갑술년의 예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박문수가 재이(災異)로 인해 진계(陳戒)하기를,
"지금에 교화(敎化)가 행해지고 있는지요? 법도(法度)가 세워져 있는지요? 인재(人才)가 다 수용(收用)되고 있는지요? 사대부(士大夫)들이 염치(廉恥)가 있는지요?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재용(財用)이 고갈(枯竭)되었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경우가 있으며 아들이 부모를 죽이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교화가 행하여지지 못한 것입니다. 죄를 범한 자도 권세가 있으면 모면하고 권세가 없으면 모면하지 못하니, 이는 법도가 세워지지 못한 것입니다. 등용된 모든 신하가 경망스럽고 약삭 빠르며 짇단 무리가 아니면, 곧 미련스럽거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구차하게 미봉하여 향기 나는 풀과 냄새 나는 풀이 한 그릇에 있게 되었습니다. 옛날 이탁(李鐸)이 대신을 논하여 이튿날 곧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지금은 일시의 추고(推考)로 절교(絶交)에 이르며, 옛날에는 명사(名士)가 걸군(乞郡)519)                  한다는 말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두운 밤에 애걸하고 다니니, 사대부의 염치가 없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성상께서 깊고 후한 덕이 있어 견감(蠲減)의 영이 혹은 목전에 미치더라도 먼 곳의 백성은 위에 알릴 길이 없어 민생의 곤궁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용도(用道)는 지출은 있고 수입은 없는데다 잡된 비용이 너무나 번다하므로 부고(府庫)가 바닥이 나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520)                  가 추위에 떠는 걸아(乞兒)의 꼴이 되었으니, 재정의 핍절(乏絶)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3백 년 종사(宗社)가 오늘에 이르러 여지 없이 무너지게 되었으니 후세에서 오늘날을 보고 신 등을 어떻게 생각하겠으며, 전하께서는 또한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식견이 있는 못 신하들이 모두 집에서는 근심하면서도 감히 조정에서는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데도 집이 어찌 망하지 않으며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하시는 뜻이 없다면 비록 오늘의 올리는 말에 유의하시겠다고 분부하시더라도 내일이면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것이 모두 절실하다. 유념하겠다는 분부는 이제부터 하지 않을 것이다. 진달한 폐단은 모구 과인(寡人)에게서 연유된 것이다."
하였다.

 

9월 13일 신묘

부응교 조적명(趙迪命)과 수찬 유최기(兪最基)가 재해를 만나 진계하는 뜻으로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고 말단에 논하기를,
"그저께 환궁(還宮)할 때 승지가 망령되이 영릉(寧陵) 행행(行幸) 때의 규례를 인용하여 대가(大駕)의 뒤에서 시위(侍衛)하는 자를 물리치고 자신이 배종(陪從)할 것을 청하여 반행(班行)의 흩어짐을 초래하였으므로, 신 등과 같이 가까이 모신 자도 오히려 놀라서 당혹했거늘 하물며 길에서 보고 있던 숱한 사람들이야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치는 때에는 더욱 안상(安詳)해야 하는데 그처럼 어긋난 일을 전하께서 체모를 얻었다고 인정하셨으니, 사체(事體)를 엄격히 하고 뒷날의 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 빠뜨려 둔 채 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견책(譴責)을 가하여 훗날의 징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재이(災異) 때문에 사면(辭免)을 원하였으나,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4일 임진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병이 있어 도성(都城) 밖에 왔었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도성으로 들어오라고 효유(曉諭)하고 태의(太醫)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홍호인(洪好人)·홍경보(洪景輔)를 승지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講)하였다. 지경연(知經筵) 김재로(金在魯)가 재이(災異)에 대한 일로 진계(陳戒)하기를,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재이에 대한 일로 하교하시기를, ‘금주(禁酒)했는데도 능히 저지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술을 끊지 못한 소치이니, 다시는 술을 올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모든 신하가 감히 술을 마시는 자가 없었으니, 거룩한 용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원컨대 태종을 법으로 삼으시어 사물에 얽매여 그대로 따르는 습성을 통렬히 버리시되, 반드시 천심(天心)이 기뻐하고 세도(世道)가 만회되는 것을 기약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사치가 심하면 또한 재앙을 부르는 길이 됩니다. 성상께서 몸소 절약과 검소를 행하시되 의복이나 거마(車馬)의 물건을 모두 검소와 절약을 숭상하소서. 그리고 상을 주는 것이나 궁방(宮房)에 절수하는 것이 혹 너무 지나침이 있으면 또한 검소함을 밝히는 도가 아닙니다. 언로(言路)로 말하자면, 가상하다는 분부가 비지(批旨)의 사이에 끊이지 않으나 매양 억측하는 병통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신하가 또한 구차하게 형적(形迹)을 감추기에 힘쓰니, 언로가 점점 막히기에 이르렀습니다. 약간 검소하게 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마시고 반드시 대덕(大德)을 다하시며, 반드시 그 말의 시비를 살펴서 마음을 비우고 널리 받아들이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어미를 죽인 죄인 백진성(白振聲)이 물고(物故)되었다. 율문(律文)에 의하여 처자를 종으로 삼고 집터에는 못을 팠으며 읍호(邑號)를 강등시켰다. 백진성이 미처 정법(正法)되기 전에 경폐(徑嬖)하였다. 《대명률(大明律)》 부주(附註)에 자손으로서 부모를 모살(謀殺)한 자가 물고되면, 그 시체를 처참(處斬)한다는 조문이 있으므로, 의금부(義禁府)에서 《대명률》을 근거로 해 초기(草記)하여 윤허가 내렸는데, 임금이 원율(原律)이 아니라 하여 어렵게 여겼다. 일전에 주강(晝講)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고 명하자, 동경연(同經筵)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삼성 추국(三省推鞫)521)  이 비록 중대하기는 하지만, 시체를 처참하는 것은 끝내 법을 벗어난 것이 됩니다."
하고, 약방 제조(藥房提調) 윤순(尹淳)은 말하기를,
"백진성과 같은 자는 시체를 처참해도 족히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장래 차차 율을 비교해 본다면 너무 지나친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삼성 추국의 죄수가 장폐(杖斃)된 것은 전에 듣지 못한 바이니 생각하면 절통(切痛)하나, 이형률은 이미 금한 뒤에 낮추었다 높였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본래 원율(元律)이 아니고 부주(附註)에 지나지 않으니, 금령(禁令)을 고쳐 뒷날의 폐단을 열 수는 없다. 의금부에 분부하여 다만 육시(戮屍)의 율만 제외하고 그 밖의 것은 정법(正法)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9월 15일 계사

이춘제(李春躋)를 도승지로, 이성룡(李聖龍)·이현보(李玄輔)·윤용(李容)·유언통(兪彦通)을 승지로 삼았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수재(水災)가 몹시 참혹합니다. 사람과 가축이 빠져 죽고 가옥이 떠내려 간 것이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도신(道臣)이 장청(狀請)한 신역(身役)과 호역(戶役)을 일체 모두 견감(蠲減)하되 세초(歲秒)522)  나 첨정(簽丁)에 이르러서는 다 폐할 수 없으니, 마땅히 시행을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론(講論)했다. 지경연(知經筵) 윤유(尹游)가 문의(文義)로 인해 아뢰기를,
"중국(中國)은 열무(閱武) 때 오로지 시예(試藝)와 용재(用才)를 중요하게 여기나 우리 나라는 가왜(假倭)를 설치하고 허총(虛銃)을 쏘는 데 불과한데도 그것을 습진(習陣)이라 하니, 진실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지난번 열무(閱武) 때 전상군(前廂軍)과 금군진(禁軍陣)이 모두 실수한 거조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대개 선조(先朝) 때 무신(武臣)을 우대하고 전하께서 지나치게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근래에 무인(武人)의 습성이 더욱 교만해져 오직 자신의 편한 것만을 일삼고 궁시(弓矢)나 병서(兵書)가 어떠한 물건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조(我朝)에서 무신(武臣)을 배양하는 법은 빈청(賓廳)과 능마아청(能麼兒廳)523)  의 강서(講書)524)  와 삭시사(朔試射)525)  의 규례가 있었으니, 모두 권장(勸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래 게으름이 습성이 되어 곧 문구(文具)가 되었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엄하게 신칙을 더하여 각 군문(軍門)의 교련관(敎鍊官)을 의당 각별히 선택하되 병학(兵學)에 통달하고 군법(軍法)을 이해하는 자로 차출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죄인 신익세(辛翊世)를 신문(訊問)하였으니 신익세는 곧 곽처웅(郭處雄)의 처부(妻父)이다. 신익세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의 집과 곽처웅의 집은 거리가 한 마장쯤 되는데 곽처웅은 늘 출입이 잦아 집에 있는 날이 몹시 드물었으며 일찍이 찾아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병영(兵營)의 장교(將校)가 먼저 신의 집에 와서 신을 꽁꽁 묶고 다시 곽처웅 집으로 가서 문서를 수색해 내고 또 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차례로 살펴보았는데, 곽처웅의 필적(筆跡) 여부는 신이 글을 잘 알지 못하므로 자체(字體)를 능히 구별하지 못하였습니다. 병영에서 추고하여 신문하는 날 문서가 이미 곽처웅의 그릇에서 나왔으니, 곽처웅의 필적인 듯하다고 하였으나 그 참으로 곽처웅의 필적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황명후(黃命垕)를 신문하였으니, 황명후는 곧 곽처웅이 살고 있던 집의 주인이다. 황명후가 공초하기를,
"신(臣)은 곽처웅을 기유년526) 선산(善山)의 감시(監試)에서 처음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뒤 서로 왕래하지 않았는데, 금년 정월에 곽처웅이 갑자기 와서 ‘이런 흉년을 당하여 호구(糊口)할 수가 없으니 원컨대 그대 집에서 머물면서 여러 아우들을 가르쳐 주겠다.’하고 또 신의 아우의 혼처(婚處)를 지시(指示)해 주었기 때문에 신이 처음에는 몹시 어렵게 여기다가 과연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갑오일(甲午日)에 다시 신익세를 신문하였으나 공초에 다른 말이 없었고, 황명후를 신문하였으나 또한 전과 같이 공초하였다.

 

9월 16일 갑오

수찬 심성희(沈聖希)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일전에 승지 이종성(李宗城)이 가관(假官)이 대행하는 폐단을 핑계로 갑자기 추고(推考)를 청하였습니다. 대개 신은 막 대정(大政)을 치르고 나서 온종일 직사(職仕)에 이바지했고, 역원(譯院)의 녹시(祿試) 자리에 비로서 가관을 차출하였습니다. 그 기간이 2, 3일에 지나지 않고, 이 또한 공사(公事)에 속하는 일이었으니, 신이 자신의 편안함을 도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른바 ‘게으르고 교만한 것이 습관이 되어 신칙해도 오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 또한 이상합니다. 더구나 듣건대 ‘가관이 나가니 큰 소리로 꾸짖으며 저놈이라고 지적하여 부르면서 심지어 그 머리를 구타하며 쫓아냈다.’고 하였습니다. 그 관직이 아무리 낮으나 또한 천신(薦紳)의 반열에 있는데 천시하고 미워하며 짓밟아 버림이 어찌하여 졸지에 이에 이른 것입니까?"
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9월 17일 을미

이기진(李箕鎭)을 대사헌으로, 박필주(朴弼周)를 집의로, 안상휘(安相徽)를 장령으로, 송징계(宋徵啓)·정희규(鄭凞揆)를 지평으로, 이용(李榕)을 사간으로, 김정윤(金廷潤)을 헌납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정언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부교리로, 조최수(趙最壽)를 대사간으로, 권업(權𢢜)을 지돈녕(知敦寧)으로, 조명익(趙明翼)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동경연(同經筵)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심(聖心)에 조금이나마 해이해지는 생각이 없는지요?"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만약 신하를 속이면 이는 내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감히 잊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오히려 그날의 심정 같지는 않으니 인심(人心)의 소홀함이 이와 같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만약 재해(災害)를 만나면 반드시 성지(聖旨)를 내려 구언(求言)하였는데, 이 또한 문구(文具)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하께서 비상한 재해를 만났으나 구언하는 일이 없었으니, 만약 잠자코 방도를 생각하신다면 어찌 문구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초야(草野)에 선비가 없어 괴이한 말이 자주 들렸는데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으니 이는 내가 수용하는 도량이 없는 데 연유한 것이다. 근래에는 몹시 문자(文字)를 싫어하므로 이와 같은 문구는 하지 않는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한덕전(韓德全)이 말하기를,
"초야에 선비가 없다는 분부는 개연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능히 선비를 양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선비를 보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성심으로 구하신다면 온 나라 안에 어찌 선비가 없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초야에다 구언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신하를 불러들여 치도(治道)를 묻는다면 이 또한 재앙을 그치게 하는 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 두 봉조하(奉朝賀)를 성중(城中)에 머물게 한 것은 때때로 맞이하여 자문(諮問)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민진원(閔鎭遠)은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고, 이광좌(李光佐)는 충성이 순일(純一)하여 여러 신하가 미치지 못하는 바인데, 어찌 연접(延接)하여 자문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시독관(侍讀官) 조명택(趙明澤)은 말하기를,
"말을 수응(酬應)하는 사이에 신료(臣僚)를 꺾어 누르는 것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이런 때 어찌 한마디 말을 하여 찬축(竄逐)을 당하겠는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이 비록 관직(館職)에 대죄(待罪)하고 있습니다만 아예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 것은 이런 말을 하면 저쪽에 관계될 듯하고 저런 말을 하면 이쪽에 관계될 듯하여 이와 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니, 이는 망국(亡國)의 조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무리 그러하나 내가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겠는가?"
하였다.

 

9월 18일 병신

조석명(趙錫命)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고(故) 경상 감사 황선(黃璿)은 무신년527)  의 변란(變亂)을 당하여 밤낮으로 근로(勤勞)하였는데 그가 계획한 바는 모두 기의(機宜)에 맞았고 여러 장수를 지휘하여 빠른 시일 내에 흉적(凶賊)을 토평(討平)하였으니, 그 공훈이 실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병사(兵事)가 겨우 안정되자 자신이 갑자기 죽었으니, 이는 진실로 옛날에 이른바 왕사(王事)에 부지런히 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 당시 조정에서 처음에 녹훈(錄勳)하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누락되고 말았으므로 공의(公議)가 지금도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훈신(勳臣)은 비록 낮은 관직에 있다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시호를 주는 법인데, 황선은 직질(職秩)이 본래 아경(亞卿)이고 또 이조 판서에 증직(贈職)되었으니 의논하는 자들이 ‘시호를 내리도록 허락하여 특이한 은전(恩典)을 보임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의 노모(老母)와 처자(妻子)가 굶주림과 추위로 인하여 떠도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제 만약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여 그 어미를 봉양하게 한다면 실로 공훈을 생각하고 외로운 자를 불쌍히 여기는 도리에 부합될 것입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이보혁(李普赫)은 말하기를,
"신(臣)이 황선의 지휘를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에 나갔는데, 채 돌아오기 전에 황선이 이미 죽었습니다. 신은 공훈도 없이 외람되게 상을 받았는데, 황선은 온갖 노고만 겪고 갑자기 세상을 떴고 그의 노모와 고아(孤兒)는 빈한(貧寒)으로 인해 떠돌고 있으니, 더욱 애처롭고 민망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선의 그 당시 일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고, 훈신(勳臣)의 예에 따라 그 아들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9월 19일 정유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정승의 직임을 극력 사양하면서 정고(呈告)하고 인입(引入)하였다. 또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辭免)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예기(禮記)》에서 볼 만한 것은 월령(月令)·왕제(王制)·경해(經解)·곡례(曲禮)인데, 월령은 칠월편(七月篇)528)  과 서로 참고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경국대전(經國大典)》도 또한 이 뜻이니, 만약 조종(祖宗)의 법제(法制)를 닦아 밝힌다면 월령의 뜻이 스스로 그 가운데 있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병조 참판 조석명(趙錫命)이 동가(動駕) 때 포성(砲聲)과 화살이 어가(御駕)의 지척에서 어지러이 쏘는데도 대신(大臣)이나 삼사(三司)가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조정에서 당론(黨論)에 관계되는 일이면 눈을 밝히고 담력(膽力)을 펼쳐 탄핵과 공격이 서로 따르지 않음이 없으나, 관계가 지극히 중대한 일은 끝내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오늘날에 만약 일분이나마 기율(紀律)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훈련 대장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9월 20일 무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국청 죄수(鞫廳罪囚) 황명후(黃命垕)·신익세(辛翊世)·조영하(曹永河)는 석방하고, 태진(太眞)은 섬으로 유배(流配)시키고, 최봉희(崔鳳禧)는 사형을 감하여 외딴섬으로 정배(定配)하고, 김원하(金元河)는 연좌(緣坐)의 형률(刑律)로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국옥(鞫獄)의 기찰(譏察)로써 포교(捕校)가 사방(四方)에 흩어져 나갔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서로 대하여 말을 하지 못했으니, 대신이 진압하여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講究)하였다. 좌참찬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도신(道臣)이나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기찰하게 하고 포청(捕廳)의 기포(譏捕)는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승지 홍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영남 하도(下道)나 호남의 인심이 매우 험악한데 만약 기찰을 멈춘다면 죄인의 괴수(魁首)들이 반드시 듣고 웃을 것입니다. 각별히 기찰하여 체포하되 또한 난잡하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내 신칙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윗 조항을 보고는 징계하고 면려(勉勵)하며 아랫 조항을 보고는 뜻이 시원스럽게 풀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각별히 엄한 신칙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우참한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역옥(逆獄)에 관계된 죄인으로 흩어 유배한 자를 청컨대 서북(西北)으로 옮겨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변방 일에 염려스러움이 많은데다 변지(邊地)의 인심이 몹시 간교하다. 근래 국경을 범월(犯越)하는 일로 엄중히 단속하여 변경의 백성이 생애가 끊겼으니, 만약 예기치 않은 일이 있으면 찬배(竄配)된 반역의 족속이 아마도 선도(先導)를 할 것이니, 깊고 궁벽한 곳으로 옮겨 정배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알성(謁聖)한 뒤에 춘당대(春塘臺)에서 시사(試士)하는 것을 이미 품정(稟定)하였습니다. 문무(文武)를 시험하여 취한 뒤 군문(軍門)의 장교(將校)들이 일순(一巡)529)  을 시사(試射)하는 것은 또한 전례가 있기는 하나 거듭 기근이 든 나머지 성대한 연회(宴會)을 베푸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며, 시사의 상격(賞格)도 또한 절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은 나의 뜻을 알지 못한다. 지금 춘당대에서 설과(設科)한 것은 일을 장황하게 떠벌리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어찌 시사의 거조를 하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탐오(貪汚)를 징계하는 법에 연한을 정하여 금고(禁錮)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탐장(貪贓)을 범하였다면 큰 경우는 사형시키고 작은 경우는 종신토록 금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서명균은 말하기를,
"팽아(烹阿)530)  나 영원히 금고(禁錮)하는 것이 본래 그런 형률이 있긴 하나 능히 적실하게 알지 못하면 일체로 법을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죄에 따라 형률을 정하되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않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아조(我朝)에서 은일(隱逸)에 대하여 각별히 처우(處遇)해 왔습니다. 장령(掌令) 윤봉구(尹鳳九)를 사소(辭疏)로 인해 특별히 그 직임을 체차(遞差)하는 것은 사실 예대(禮待)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상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무익(無益)한 사문(斯文)의 일 때문이다. 내가 어찌 맹자(孟子)를 몰아 욕한 것이 있는가? 그런데 윤봉구가 한원진(韓元震)과 거취를 같이하겠다고 말하니,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소인(小人)이 물러가고 군자가 나온다는 것은 주자(朱子)가 흑백(黑白)이 분명한 곳에 쓴 것인데, 지금 산림(山林)의 선비가 주자의 말을 빙자하여 마땅히 쓰지 않아야 할 곳에 써서 명리(名利)에 급급하니, 유자(儒者)의 말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인가? 선조(先朝) 때 유자의 ‘이를 갈며 앙심을 품고 있다.’는 말에 대하여 일찍이 개탄한다는 분부가 있었는데, 나 또한 잊지 않고 있다. 이미 그가 그르다는 것을 알고도 속히 올라오라고 답한다면 성실한 도리가 아니다. 윤봉구가 만약 올라온다면 윤봉구를 본받는 자가 의당 몇 층이나 더 과격한 논의를 할 것이다. 당하관(堂下官)의 체직을 허락한다[許遞]는 두 글자는 또한 대우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9월 21일 기해

조명익(趙明翼)을 예조 참판으로, 신만(申晩)을 수찬으로, 윤급(尹汲)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9월 22일 경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권이진(權以鎭)의 장계(狀啓) 가운데 망명(亡命)한 적(賊) 황진기(黃鎭紀)의 일이 있고, 사서(私書) 가운데는 ‘국경을 범월(犯越)한 죄인 김상중(金尙重)은 황진기의 주인(主人)이 되었으니, 달래어 황진기를 체포(逮捕)하고 사죄(死罪)를 용서하도록 허락하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장계에 의하여 시행하라는 뜻으로 회보(回報)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이수웅(李守雄)·이사천금(李四千金)·김상중 등 세 사람이 국경을 범월한 죄가 효시(梟示)에 해당되었으므로 강계(江界)에서 영옥(營獄)으로 압령해 왔는데 피중(彼中)의 사정(事情)을 캐물으니, 이수웅은 말하기를,
"우리 경내(境內) 사람으로 피중에 왕래하는 자가 많은데 서울에 사는 자 세 사람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회계(李會計)요 한 사람은 황회계(黃會計)인데 생김새에 사나운 기운이 있고 나이는 마흔 남짓하였습니다. 가을 무렵에 갑군(甲軍)이 수색하여 체포한다는 기별을 듣자 서울 사람 두 총각(總角)과 더불어 우리 경내인 이산(理山) 신의창(申義昌) 집에 피하여 숨어 있으면서 호막(胡幕)에 머물러 있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우리 경내의 일을 번번이 죄다 호인(胡人)에게 전하여 말하였으므로, 호인이 그를 가장 신임하였습니다. 조영삼(趙永三) 형제는 스스로 안주(安州) 사람이라 이르고 오랫동안 호막에 있으면서 호인들이 둔취(屯聚)해 사는 고산리(高山里) 건너편 세동(細洞)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그곳을 도막(都幕)이라 하였고 쌓아놓은 곡식은 다 우리 나라의 좁쌀이었습니다. 세동은 곧 여름에 머무는 막(幕)이고, 장동(長洞)·야둔동(也屯洞)은 곧 겨울에 머무는 막입니다."
하고, 이사천금과 김상중은 말하기를,
"지난해 겨울에 피지(彼地)로 넘어가 호막에 머물러 있었는데 갑군이 수색하여 토죄(討罪)할 때 지롱괴(知弄怪)로부터 넘어오다가 상토 첨사(上土僉使)에게 붙잡혔는데, 갑군이 포(砲)를 쏘아 죽인 것이 무릇 30여 명이었고 우리 나라 사람은 5명이었습니다. 세동 안에 우리 나라 사람 8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황초관(黃哨官)이라고 일컫는 자로 나이가 마흔 남짓하였습니다. 얼굴은 푸르면서 희고 코는 높으면서 길며, 수염은 적으나 검고 체신(體身)은 대소(大小)의 중간이었는데, 평상시에도 속에 입은 소의(小衣)를 벗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택견을 했는데, 날래고 용맹하기가 남보다 월등했으며 늘 칼을 차고 스스로 춤을 잘 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살던 곳을 물으면, 하삼도(下三道)에 있었다고 답하였으며, 지난해에 왕가(王哥) 기달(起達)이 그의 생김새를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전에 만호직(萬戶職)을 지냈다고 답하였습니다. 또 무슨 까닭으로 다른 나라로 피해 숨어지내느냐고 묻자, ‘사죄(死罪)를 범하여 궐내(闕內) 직소(直所)에서 담을 넘어 망명(亡命)하였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 당세(當世)에는 자신의 재주만한 자가 없다고 장담하였으므로, 청인(淸人)들이 예삿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대우하는 것이 아주 공손하였습니다. 호인(胡人)이 그 이름을 물어보면 김서방(金書房)이라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이 물어보면 황초관(黃哨官)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조영삼(趙永三) 형제와 최성업(崔成業)·천도령(千都令)의 무리가 있어 잠상(潛商)으로 왕래한 지가 이제 7, 8년이 되었는데, 조영삼은 날랜 용맹에 좋은 신수였고 그 아우는 힘이 장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권이진이 치계(馳啓)하기를,
"역적 황진기가 피중(彼中)에 가 있는 것이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합니다. 우하형(禹夏亨)이 ‘일찍이 황진기와 서로 알고 지냈는데 몇 해 동안 같이 살았지만 그가 소의(小衣)를 벗은 때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이 사람인 것을 믿을 만합니다. 대개 저 호인(胡人)이 있는 곳은 우리 국경과 거리가 5리나 10리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죄를 지은 무뢰한(無賴漢)들이 모두 찾아가서 변경(邊境) 사람이 죄다 그의 심복과 이목이 되니, 명(明)나라 말기의 간세배(奸細輩)들의 작폐(作弊)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삼세관(蔘稅官)이란 곧 피중(彼中)에서 차출한 자인데 파저강(婆猪江)에 있으면서 오로지 세금을 거두고 뇌물을 받는 것을 일삼고 심양(瀋陽)과 봉성(鳳城)에서도 모두 뇌물을 받으니, 저 호인(胡人)들이 스스로 과시하기를, ‘우리에게 인삼(人蔘)이 있는 한 어찌 관군(官軍)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변지의 방비가 허술하니 근심과 걱정이 진실로 깊기만 합니다. 동지사(冬至使)를 보낼 때 따로 자문(咨文) 한 통을 갖추어 변금(邊禁)을 엄격히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 돌려보내게 하며, 또 배를 타고 강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게 한다면 일분이나마 외부의 침략을 물리치는 정책이 될 것입니다. 안으로 수비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백성의 거처를 옮겨 모여서 살게 하여야 하며, 성지(城池)를 수축(修築)하고 군제(軍制)를 엄격히 하는 데 대해서는 의당 별본(別本)으로 계문(啓聞)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에 명하여 상의해서 회계(回啓)하게 하고, 자문(咨文)에 대한 일은 우선 그대로 두게 하였다.

 

9월 25일 계묘

4경(更) 1점(點)에 임금이 수레를 타고 집춘문(集春門)으로 나가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묘(聖廟)의 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곤복과 면류관을 갖추고 규(圭)를 잡았다. 대성전(大成殿)에 이르러 서향(西向)하여 먼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작헌례(酌獻禮)의 행사를 마친 뒤 또 사배례를 행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도로 나아가 문무(文武)를 시험보여 진사(進士) 이석표(李錫杓) 등 5명과 업무(業武) 이정선(李廷善) 등 8명을 뽑아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

 

부응교 조적명(趙迪命)이 상소하여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를 공척(攻斥)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아! 오늘날 군주의 위엄은 날로 낮아지고 나라의 체모는 날로 무너져 식견이 있는 자의 근심과 탄식이 되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요즘 전조(銓曺) 당상관(堂上官)의 일로 말하자면, 김취로가 이현보(李玄輔)를 저지하여 막은 것은 그에 있어서는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변절(變節)한 것을 수치로 여겨 고집하는 바를 굳게 지킨다면, 견벌(譴罰)을 달갑게 여겨 굳게 누워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한 방도이고, 만약 분의(分義)를 소중히 여겨 엄명(嚴命)에 몰렸다면 우선 자기의 소견을 굽히고 성지(聖旨)를 받드는 것이 또한 한 방도입니다. 그리고 군주가 신하를 다스리는 방도도 또한 이 둘을 책임지우는 것을 벗어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김취로를 도리어 두둔해 주시고 그의 처지를 위해 이조(吏曹)의 집필(執筆)을 대신하여 스스로 주의(注擬)하시어 김취로로 하여금 핑계댈 말이 있게 했으니, 너무나도 체모를 손상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김취로가 문득 이미 성상의 뜻을 우러러 엿보고 따를 듯 어길 듯 하여 모색(摸索)하기 어려운 활로(活路)는 숨겨버리고 혹은 휴가를 핑계대며 혹은 문정(問政)을 핑계대어 오직 교묘하게 회피하는 것을 양책(良策)으로 삼았으니, 필경에는 군부(君父)의 명은 도리어 한번 쓰고 버리는 변모(弁髦)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김취로의 이판(吏判)의 자리는 그대로 있어 손상됨이 없으니, 속담에 이른바, ‘귀를 가리고 방울을 도둑질하며 눈을 감고 낫질을 한다.’는 것도 족히 그 방자함을 비유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관(銓官)의 한 가지 일은 큰 관계가 없는 듯하나, 그 후일에 미치는 폐단을 논하자면 장차 임금의 위엄은 더욱 낮아지고 나라의 체모는 더욱 무너지는 데 이를 것이니, 이 어찌 사소한 걱정이겠습니까? 그러나 전하의 과실을 바로 잡고 김취로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신은 적이 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인신(人臣)은 임금을 섬김에 있어 의당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숨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진달할 바가 있으면 경연(經筵)에서 말하더라도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이제 조적명의 상소를 보건대 앞서지도 않고 늦추지도 않으면서 시기를 노려 경알(傾軋)하니 이는 곧 자기와 취향(趣向)이 다른 전조(銓曹)의 지위를 미워하는 것이다. 군부의 뜻을 본받지 않고 이처럼 소란을 야기시키니 지극히 의지할 데 없는 일이다."
하였다. 그리고 그 상소는 도로 내주고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서종옥(徐宗玉)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때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이조 판서 김취로는 부응교 조적명의 상소 때문에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으며 참판 송진명(宋眞明)은 정고(呈告)하고 인입(引入)하였다. 신방(新榜)이 나온 뒤에는 곧 개정해야 하는 것인데, 전조(銓曹)에 사람이 없었으므로 특별히 이조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참의를 차출하고 곧 개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송성명(宋成明)을 대사헌으로, 이저(李著)를 집의로, 이광식(李光湜)을 장령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지평으로, 윤급(尹汲)을 정언으로, 조상명(趙尙命)을 교리로, 이석표(李錫杓)를 전적(典籍)으로, 이정선(李廷善)을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로 삼았다. 이석표와 이정선은 괴과(魁科)로서 곧바로 6품직을 부여했으니, 규례에 의한 것이다.

 

9월 26일 갑진

유성(流星)이 벽성(壁星) 아래에서 나왔다.

 

수찬 유최기(兪最基)가 장릉(莊陵) 비(碑)의 역사를 늦추어 명년 봄까지 기다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상소하여 곧 거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27일 을사

예조 참판 조명익(趙明翼)이 상소하여 유생(儒生)의 의관(衣冠)을 중화(中華)의 제도(制度)를 준용할 일로 다시 전소(前疏)의 뜻을 거듭 아뢰니, 비답하기를,
"여러 대신(大臣)의 헌의(獻議)는 곧 차라리 질박하게 하려는 뜻이고 또 열조(列朝)에서 행하지 않았던 일이니, 이런 때에 없는 일을 새로 만드는 것은 그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뜻도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이미 판부(判付)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또한 생각한즉 중화의 옛 법제는 유독 우리 나라에 남아 있다. 이런 세도(世道)에 더욱 마땅히 궐문(闕文)을 수거(修擧)하여야 하고 또한 선정(先正)이 청한 것도 유의(遺意)를 거행하려고 함에 있으니, 중화의 법제를 닦아 밝히는 것을 내가 어찌 어렵게 여기겠는가? 고삭(告朔)의 양(羊)531)  이 어찌 문구(文具)가 아니겠는가마는 공자(孔子)가 그대로 두도록 했으니 문인(門人)은 양을 아꼈고 성인(聖人)은 예(禮)를 아낀 것이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널리 옛 전적(典籍)을 상고하여 시행하게 하라. 아! 옛 법제로서 빠진 것을 수거하는 데 있어 추감(追感)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고 한갓 문구로 돌아가게 하는 데 힘쓴다면, 어찌 성실한 마음이라 하겠는가? 그 상하(上下)로 하여금 마땅히 그 실질(實質)을 생각하여 더욱 힘쓰게 하라."
하였다.

 

9월 28일 병오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왔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송인명(宋寅明)에게 명하여 성균관에서 시사(試士)하게 하였다. 유학(幼學) 이언세(李彦世)를 전시(殿試)에 직부(直赴)시킬 것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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