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6권, 영조 9년 1733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1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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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무인

밤에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 엷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5, 6척이며 흰색이었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569)  을 행하였다.

 

이광보(李匡輔)를 승지(承旨)로, 이정제(李廷濟)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송수형(宋秀衡)을 사간(司諫)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정언(正言)으로, 신만(申晩)을 지평(持平)으로, 오원(吳瑗)을 교리(校理)로, 윤순(尹淳)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사(知事) 윤유(尹游)가 아뢰기를,
"통영(統營)의 파총(把摠) 윤영래(尹迎來)가 몰기(沒技)했기 때문에 직부(直赴)의 명(命)이 있었으나 죽고 말았습니다. 일찍이 병신년에 강도(江都)의 무사(武士) 정태악(鄭泰岳)이 전시(殿試)에 나아가기 전에 죽었는데, 시재 어사(試才御史)의 서계(書啓)로 인해 그의 이름을 방목(榜目) 끝에 쓰고 이어서 홍패(紅牌)를 하사하였으니, 이는 의거할 만한 전례(前例)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을 방목에 쓰는 것은 일이 비록 괴이하나, 이미 선조(先朝)의 구례(舊例)가 있으니 그에 의거해 시행함이 좋겠다."
하였다.

 

11월 2일 기묘

경기(京畿) 고양군(高陽郡)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는 하나에 발이 다섯이었고 등에 다리 하나가 났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掌令) 이이제(李以濟)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臺臣)의 말이 자기와 취향(趣向)이 다른 자에 관계되는 것이면 혹 그 당비(黨比)인가 의심하고, 정주(政注)에 관계되는 것이면 혹 흔드는 것인가 염려하며, 궁방(宮房)에 관계되는 말이면 싫어하는 기색을 들어 보이고, 성궁(聖躬)에 관계된 말이면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간혹 강개(慷慨)하여 일을 말하는 정성이 있더라도 좌우에서 끌며 제지하여 머뭇거리며 발설하지 못하니, 한 사람도 눈썹을 휘날리고 기(氣)를 토(吐)하며 거리낌 없이 말을 다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무슨 효상(爻象)입니까? 바로 성명(聖明)께서 스스로 반성해야 할 곳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능히 응물(應物)의 근원을 맑게 하여 물아(物我)의 사사로움을 없애시고, 당직(讜直)한 사람을 넉넉히 용납하시어 마음과 뜻이 서로 미덥게 한다면 인협(寅協)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호남(湖南) 연해(沿海)의 기근(饑饉)의 급박함에 이르러서는 봄·여름과 차이없이 여리(閭里)가 거의 텅 비었으며, 서로 무리를 이루어 도둑이 되어 백주(白晝)에 가로(街路)에서 사람을 막고 돈을 빼앗습니다. 여러 곳에 자리를 잡고 형세를 서로 의지하고 있으니 토벌(討伐)과 기찰(譏察)도 감히 어찌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따로 정탐(偵探)을 더하여 나은 대책을 강구하게 하소서. 전조(田租)와 신포(身布)를 적절히 헤아려 견감(蠲減)하고, 따로 어사(御史)를 파견해 윤음(綸音)을 선포하여 먼 지방의 잔민(殘民)들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는 바가 있게 하소서."
하고, 인하여 수령(守令)의 불법(不法)을 논죄(論罪)하니, 답하기를,
"면계(勉戒)가 절실하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머지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11월 4일 신사

포도 대장(捕盜大將) 신광하(申光夏)가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어제 밤 창원(昌原) 사람 김계보(金繼寶)란 자가 금영(禁營)의 순라(巡邏)에게 잡혔는데, 국가에 대해서 고(告)할 바가 있다고 하므로 포청(捕廳)으로 이송(移送)하였더니, 납공(納供)하기를, ‘연전(年前)에 압량위천(壓良爲賤)한 죄(罪) 때문에 호남에 적거(謫居)하여 있었는데, 무신년570)   역적들이 많이 누망(漏網)해 있음을 보았고, 근년의 괘서(掛書)한 죄인이 아직도 잡히지 않은 까닭에 강개(慷慨)함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정월에 비로소 집을 떠날 것을 결심하고 이들을 이리저리 다니며 기포(譏捕)하려 했습니다. 금년 8월 16일에 창평(昌平) 땅에 갔는데, 태인(泰仁) 사람 홍구채(洪九采), 정읍(井邑) 사람 김명신(金命信)·서정구(徐鼎九), 흥덕(興德) 사람 김팔기(金八起)·정제인(鄭齊仁), 부안(扶安) 사람 김남역(金南繹) 등이 고만령(高萬齡)의 집에 몰래 모여 바깥문을 굳게 닫고 모의(謀議)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인(小人)이 밤을 틈타 담을 넘어 들어가서 가만히 들어 보니, 홍 구채와 김팔기가 말하기를, 「남원(南原)과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 두 차례 괘서했지만, 끝내 그 효과가 없었으니 내년 봄을 기다렸다가 곳곳에 방(榜)을 건 뒤에 장차 당(黨)을 모아 거사(擧事)하자.」고 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주달(奏達)한 것을 읽게 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작년 정월에는 괘서한 일이 없었으니 이는 어긋나는 단서이다. 그가 이미 압량 때문에 귀양갔으니,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범야(犯夜)한 죄를 면하려는 계책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승지가 말하기를,
"어찌 범야했다고 이렇게 고하겠습니까? 허실(虛實)을 물론하고 이미 거사(擧事)한다는 말이 있으니, 포청(捕廳)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설국(設鞫)하여 구문(究問)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듣건대, 좌상이 ‘남중(南中)에 기형(譏詗)이 사방으로 펼쳐져 두 사람이 마주 이야기를 할 수 조차 없다.’고 했으니, 더욱 소동이 일까 두렵기 때문에 포청으로 하여금 구문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승지의 아뢴 바가 사체를 얻었으니 즉시 설국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유최기(兪最基)가 말하기를,
"근래 호남(湖南) 연안이 거듭 흉년이 들어 도적이 창궐하고 진도(珍島)와 나주(羅州)의 여러 섬에는 주인을 배반한 악소배(惡少輩)들이 많아 혹은 도주(盜鑄)하는 폐단이 있기도 하고 혹은 황당선(荒唐船)과 왕래하며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또 역적에 연좌된 자들이 여러 섬에 많이 유배되어 있기 때문에 요언(妖言)을 선동(煽動)하니, 진실로 변란(變亂)을 자극시켜 일으킬 걱정이 있습니다. 방금 듣건대, 전라 우후(全羅虞候)가 장교(將校) 두 사람을 보내어 섬을 기찰(譏察)하게 했더니, 적괴(賊魁)라고 일컫는 자가 있어 두 명을 잡아다 베었다고 하는지라, 듣기에 지극히 놀랍습니다. 훈장(訓將) 장붕익(張鵬翼)이 바야흐로 형찰(詗察)을 보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이는 보통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의논하는 자들 중에 어떤 이는 여러 섬에 읍진(邑鎭)을 설치해야 마땅하다고 합니다만, 이는 오히려 소홀한 것입니다. 명년 봄에 조운(漕運)의 길도 역시 의외의 걱정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묘당(廟堂)에 하순(下詢)하시어 빨리 비어(備禦)할 계책을 강구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듣고 놀라서 말하기를,
"흉년이 들면 양민(良民)이 변하여 도둑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까지 이른 줄은 알지 못했다."
하였다. 승지(承旨) 이 광보(李匡輔)가 말하기를,
"금성(錦城)의 대양(大洋)에 일흔 두 개의 섬이 있는데, 본읍(本邑)에서는 통찰(統察)할 수가 없습니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태수(太守)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조정이 있는 줄을 알겠습니까? 이들은 곧 화외(化外)의 백성이니, 만약 유혹하고 협박하는 무리가 있으면 어딘들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한림(翰林)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문종실록(文宗實錄)》 제11편이 본관(本館)과 적상산(赤裳山)·태백산(太白山)의 여러 사고(史庫)에 누락되었으니, 청컨대, 오대산(五臺山) 사고의 포쇄(曝曬) 행차 때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본관에 도착한 뒤 각본(各本)을 전서(傳書)하여 여러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합당하게 여겼다.

 

재자관(䝴咨官) 김시유(金是瑜)가 나올 때에 피국(彼國) 사람들이 몰래 건너와서 강을 지키는 장졸(將卒)을 잡아 갔으므로 김시유를 파견해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고, 봉천부(奉天府)의 장군(將軍) 부윤(府尹) 등 아문(衙門)에 엄히 신칙하고 수포(搜捕)하여 지연(遲延)됨이 없게 할 것을 행문(行文)하여 청하니, 회문(回文)에 ‘봉지(奉旨)하고 의논에 의거해 흠준(欽遵)한다.’고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죄인 김계보(金繼寶)를 신문하니, 김계보가 공초(供招)하기를,
"신(臣)이 괘방(掛榜)이 또 나왔음을 듣고서 나라를 위해 적당(賊黨)들을 잡으려고 금년 5월 그믐께 전라도(全羅道)에 가서 적(賊)의 무리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탐문하여 상세히 알아냈으니, 곧 남원(南原) 백복사(百福寺)와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 괘서(掛書)가 있었습니다. 태인(泰仁)에 사는 양반(兩班) 홍구채(洪九采), 정읍(井邑)에 사는 상한 당상(常漢堂上) 김명신(金命信)·서정원(徐廷遠), 흥덕(興德)에 사는 양반 김팔기(金八起), 상한 당상 정제인(鄭祭仁), 부안(扶安)에 사는 양반 김남역(金南繹), 창평(昌平)에 사는 양반 고만령(高萬齡) 등이 금년 8월 16일에 고 만령의 집에 모여 수작(酬酢)한 바가 있는데 신이 담장을 넘어 들어가 창밖에서 몰래 들었더니, ‘두 차례 괘방했으나 끝내 효과가 없으니 봄을 기다렸다가 팔도(八道)에 괘서하여 나라를 도모하자.’고 했습니다. 남원에는 고만령이 직접 가서 괘서하고, 순천에는 김남역이 역시 직접 가서 괘서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들이 금년 5월에 더위를 무릅쓰고 가서 괘방했으나 널리 괘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 심하게 요란스럽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고만령의 집으로 들어갈 때에 정제인을 고만령의 집 동구(洞口)에서 만나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이 마을에 가볼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이 뒤를 밟아 고만령의 집에 몰래 들어가 보았더니 앞서 말한 여러 사람들이 이미 와 모여 있었는데, 정제인·김남역은 신이 얼굴을 알았으며 그 나머지는 열 예닐곱쯤 된 고 만령이 계집종에게 물어 보았더니 ‘모처(某處)의 아무개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무신년571)  부터 어떠 어떠한 사람이 적당(賊黨)이 되었다는 것을 듣고 있었던 까닭에 그들의 성(姓)만 듣고도 이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다시 김계보를 심문하기를,
"괘서(掛書)는 이미 5월 이전에 있었으니 오월에 괘서했다는 말은 어긋나는 단서이다. 모의(謀議)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잠입한 것은 무슨 생각에서였으며, 열 여섯 된 어리석은 계집종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의 성명을 알 수 있었단 말이냐? 또 공연히 몰래 들은 것은 아닐 것이니, 들은 사람을 낱낱이 실토하라."
하자, 김 계보가 공술하기를,
"괘서한 것은 그들이 5월이라고 했기 때문에 신도 또한 5월이라고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성명은 신이 일찍이 그 무리들 중 적당(賊黨)이 된 자들을 들어서 그 성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에서 정제인이 고만령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혹시 모의하는 일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그 계집종을 만나서, ‘오늘 너희 집에 온 자들이 아무 고을의 아무개이며, 아무 면(面)의 아무개이더냐?’고 물었더니 계집종이 그렇다고 하여 신이 아무아무개가 와서 모인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몰래 창 밖에서 들으니, 고만령이 ‘남원에 괘서했다.’고 하고, 김남역은 ‘순천에 괘서했다.’고 했으며, 정제인은 ‘널리 괘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이에 효과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신은 이미 참섭(參涉)한 일이 없고 고한 바 여러 사람들에게 또한 혐원(嫌怨)이 없었으나, 항상 의심이 가서 매번 기찰(譏察)하고 있었는데, 마침 여러 사람이 서로 모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몰래 들어가 엿듣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5일 임오

국청 대신(鞫廳大臣) 이하가 구대(求對)하여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죄인은 판부(判付)에 의거해 위엄을 베풀어 엄히 물었는데, 처음 공초(供招)와 바뀐 말은 없었으나 어긋나는 단서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국체(鞫體)로 보아 원고(援告)한 자들을 잡아다 그 허실(虛實)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진짜 괘서(掛書)한 사람을 알아낸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괜히 소란만 일으킬 뿐이다. 지금 또 발포(發捕)한다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그 자가, ‘고만령의 계집종과 얼굴을 알므로 아무아무의 성명과 고만령의 집에 모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그 계집종을 지금 만약 잡아온다면 그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당연히 체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그 공초(供招)에 또 말하기를, ‘고만령이 남원(南原)에 괘서하였고, 김남역이 순천(順天)에 괘서하였으며, 그가 정제인과 길에서 서로 만났고 고만령의 집에 뒤좇아 가서 모의(謀議)하는 것을 몰래 들었습니다.’고 했으니, 이 세 사람은 먼저 마땅히 발포(發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만령·김남역·정제인과 고만령의 계집종을 아울러 함께 발포하고, 그 나머지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잡아 가두고 결말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묻기를,
"어제 유신(儒臣)들의 말을 들으니, 연해(沿海)에 도적이 있어 우후(虞候)의 장교(將校)를 베어 죽이기까지 했다고 하니, 참으로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경들도 들었는가?"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신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도신(道臣)이 어찌 장계(狀啓)로 알리지 않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광덕(李匡德)이, ‘우후(虞候)의 행장(行裝)을 도적들에게 노략질당했습니다.’고 했지만, 도신들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이런 일들은 전해지는 말이 많이 불어나고 보태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훈장(訓將) 장붕익(張鵬翼)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이 일을 듣고 즉시 형탐(詗探)을 파견했는데, 돌아와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도적을 만나 봉인(鋒刃)에 다쳐 죽은 것이지 기찰 장교(譏察將校)는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전하는 자들이 와전(訛傳)한 것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죄인 법흠(法欽)을 합좌(合坐)하여 처웅(處雄)의 편지 가운데 있는 낙빈왕(駱賓王)·김시습(金時習) 등의 말도 구문(究問)하였는데, 법흠의 편지 가운데 또한 ‘가을 국화·봄 난초는 각각 절기가 있다.’는 말이 있어 숨기는 정실이 있는 듯한데, 끝내 직초(直招)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처웅이 법흠에게 보낸 편지를 가져다 보고 하교하기를,
"이는 반드시 깊이 생각할 것은 아니다. 그 자는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산사(山寺)에서 병영(兵營)에 제발로 내려와 취포(就捕)되었다고 하니, 의심할 자취가 없는 듯하다. 석방(釋放)함이 좋겠다."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신이 호서(湖西)에 대죄(待罪)하였을 때에 도내(道內)의 곡식을 다른 도에 옮기지 말고 본도(本道)에 남겨두어 진제(賑濟)할 비용으로 하자고 장문(狀聞)하였었습니다. 무릇 진휼(賑恤)하는 일은 반드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도내에서 마련하도록 하고 달리 변통(變通)하지 않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이 신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도내에서 진휼할 비용을 마련하고, 감히 조정(朝廷)에 청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지금의 급무는 비용을 억제하고 절약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것 만한 것이 없는데, 군포(軍布)가 백성들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이 됩니다. 마땅히 재해(災害)를 입은 천심(淺深)을 헤아려 등급을 나누어 감면시켜줌으로써 눈앞의 급한 일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장차 토붕와해(土崩瓦解)의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 버리면 아무리 구제하려 해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마땅히 선후(善後)의 대책을 미리 강구하고 때에 맞추어 크게 변통한 후에야 나라와 백성이 보전될 것입니다."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양민(良民)이 도둑으로 변하는 것은 전적으로 양포(良布)의 침징(侵徵)에 연유합니다. 어떤 이는 공사(公私)의 천역(賤役)에 투탁(投托)하고 어떤 이는 사방(四方)으로 흩어져 버리니, 만약 변통하지 않는다면 양민들은 장차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의 조(租)·용(庸)·조(調)572)  는 가장 양법(良法)이었는데, 우리 나라는 사람을 수탈(收奪)하여 사람을 기르고 사람이 사람을 먹였기 때문에 폐단이 고습도치 털처럼 일어난 것입니다. 일찍이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하였으나, 좋은 방책이 없어서 임시로 혁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역은 끝내 망국(亡國)의 근본이 되고 말 것이니, 마땅히 조용히 강구(講究)하여 이제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호포(戶布)와 결포(結布)를 백년 전부터 시행했으나 폐단이 없었는데, 어찌 유독 오늘날에는 시행할 수 없겠습니까?"
하니,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국력(國力)으로 말하자면 양병(養兵)이 끝내 너무 많은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장계하기를, ‘만약 범월(犯越)하는 변고가 있게 되면 심양장(瀋陽將)이 주문(奏聞)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만윤(灣尹)으로 하여금 치통(馳通)하여 그 주문을 물은 후에 우리가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했는데, 안핵사(按覈使)는 즉시 자문을 보내기를 청하였다."
하니, 심 수현이 말하기를,
"봉성(鳳城)에 먼저 치통한다는 논의는 마땅한지 알 수 없습니다. 어사(御史)의 사장(査狀)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사행(使行)이 강을 건너기 전에 자문을 내려 보내되, 심양에 도착한 뒤 탐문(探問)해서 만일 난처(難處)한 단서가 없으면 곧장 예부(禮部)에 올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지레 치통하여 저들로 하여금 미리 알게 한다면 뜻밖의 사단(事端)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매, 임금이 옳게 여겼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두 나라 국경에 만일 일이 생기면 심양장(瀋陽將)도 또한 죄가 있게 되므로 매우 두려워하고 꺼린다 합니다. 그리고 저들 가운데 명출(明出)과 흑출(黑出)이란 이름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른바 명출은 황표(皇標)를 소지한 자들이고 흑출은 잠상(潛商)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명출은 범(犯)할 수 없으나, 흑출은 비록 많이 죽인다 해도 해가 없는데, 지금 저들이 이 일을 흑출로 돌리려 한다고 합니다."
하고, 서명균이 또 말하기를,
"해흥군(海興君) 강(橿)이 난데없이 빈청(賓廳)에 와서 대신(大臣)의 자리에 앉았으므로, 신(臣)이 ‘하리(下吏)가 잘 인도하지 못했다.’고 하여 종친부(宗親府)의 서리(書吏)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우인 해춘군(海春君)이 도리어 정부(政府)의 서리들을 가두었습니다. 이 일은 비록 나이 어린 종반(宗班)이 사체(事體)를 알지 못한 소치라 해도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하자, 심수현이 말하기를,
"빈청은 대신(大臣)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물며 대신에 소속된 서리들을 어찌 잡아 가둘 수 있었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王子)와 대군(大君)은 대신과 절석(絶席)하고 1품의 종신(宗臣)은 대신과 항례(抗禮)573)  한다. 빈청은 비록 다른 사람이 감히 들어갈 수 없다고 하나, 내가 잠저(潛邸)에 있었을 때 빈청에 앉아 선온(宣醞)을 받았다. 또 종친부(宗親府)는 백사(百司)의 우두머리가 되어 왕자나 대군이 아니면 제조(提調)가 될 수 없었다. 지금은 먼 종친이 제조가 되었기 때문에 외조(外朝)에서 가볍게 보이지만, 사람을 가둘 수 있는 패(牌)는 왕자와 대군이 쓰는 것이다. 해흥군이 와서 대신의 자리에 앉은 것은 진실로 매우 농동(儱侗)하다. 겸종(傔從)을 가두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서리는 곧장 가둘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종친부는 진실로 소중한 바가 있지만 정부(政府)에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자별하니, 결코 그 서리를 가둘 수는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어째서 그러한가? 종친이 근래에 피연(疲軟)하기 때문이다."
하자, 서명균이 말하기를,
"더욱이 반행(班行)의 종반(宗班)이라 할지라도 혹 완홀(緩忽)한 일이 있으면, 정부에서 으레 마땅히 검칙(檢飭)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종친부는 정부에서 간섭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정언(正言) 조진세(趙鎭世)가 전계(傳啓)를 마치고, 이어 말하기를,
"대신(大臣)은 지위가 백료(百僚)의 위에 있어 체모(體貌)가 자별한데, 종반(宗班)이 대신에게 노하여 하리(下吏)를 가두어 다스렸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이와 같다면 대신이 어떻게 백규(百揆)를 총괄하고 체통(體統)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경책(警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는 말하기를,
"대신을 공경하는 것은 국체(國體)를 높이는 바이며 종친부도 존중(尊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왕자나 대군이라면 논할 것이 없으나, 2품 종반(宗班)일 경우 곧바로 정부의 서리를 가둘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개연(慨然)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큰 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박문수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너희들이 내가 왕자로 들어와 이 자리를 이었다고 가벼이 여기기 때문에 종친부를 멸시(蔑視)하느냐?"
하고, 안상(案床)을 치며 오열(嗚咽)하니,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허둥지둥 물러났다.
사신은 말한다.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염폐(簾陛)가 능이(凌夷)하고 기강(紀綱)이 해이해져 2품의 먼 종친이 곧바로 정부의 서리를 가두었으니, 박문수의 말은 체모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상(聖上)께서는 마땅히 화내지 않아야 할 말에 격노(激怒)하여 군부(君父)를 가볍게 업신여긴 것으로 책망하였다. 아! 대신(大臣)을 중히 여기는 것은 군부를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인데, 사령(辭令)의 잘못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하였으니, 어찌 그 궐실(闕失)을 광구(匡救)하여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지경에 인도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87면
【분류】사법(司法) / 왕실-종친(宗親) / 출판-서책(書冊)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신분(身分) / 인사(人事) / 역사(歷史) / 변란(變亂) /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外交) / 무역(貿易) / 상업(商業)


[註 572] 조(租)·용(庸)·조(調) : 당대(唐代)의 세 가지 징세법. 토지에 부과하는 조(租), 백성에게 부역을 시키는 용(庸), 가업(家業)에 부과하는 조(調)임.[註 573] 항례(抗禮) : 대등(對等)한 예(禮).
사신은 말한다.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염폐(簾陛)가 능이(凌夷)하고 기강(紀綱)이 해이해져 2품의 먼 종친이 곧바로 정부의 서리를 가두었으니, 박문수의 말은 체모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상(聖上)께서는 마땅히 화내지 않아야 할 말에 격노(激怒)하여 군부(君父)를 가볍게 업신여긴 것으로 책망하였다. 아! 대신(大臣)을 중히 여기는 것은 군부를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인데, 사령(辭令)의 잘못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하였으니, 어찌 그 궐실(闕失)을 광구(匡救)하여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지경에 인도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박사익(朴師益)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보욱(李普昱)을 집의(執義)로, 박필재(朴弼載)를 지평(持平)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11월 6일 계미

동지사(冬至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등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직이 말하기를,
"신(臣) 등이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동정(動靜)을 탐문(探問)할 때 저들이 만약 ‘이미 미봉(彌縫)해 놓았다.’고 한다면 가지고 간 자문(咨文)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국(上國)을 섬기는 체모는 크고 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진실로 두 나라 국경(國境)에 관련된 것이라면 들어 아뢰는 것이 옳다. 과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잡혀 간 일이 있다면 저들이 비록 미봉하고자 해도 가능하겠느냐? 사신(使臣)의 도리에 있어 자문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의주(義州)에 가서 탐문(探問)해 보아 이런 일이 없고 심양에 가서 정찰(偵察)하여 이미 순조롭게 타첩(妥帖)되었다면 전하지 않아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오직 마땅히 기미를 보아서 선처(善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7일 갑신

장령(掌令) 이이제(李以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그 요령이 체통(體統)을 보존하는 데에 불과할 따름이며, 체통을 보존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신하가 법도를 지키도록 용납하는 것일 뿐입니다. 능히 법도를 지킬 수 없으면 일이 모두 꺾이고 굽어지며 기강(紀綱)이 날로 무너지게 됩니다. 삼대(三代) 이후로 신하가 법도를 지키는 것을 능히 용납한 경우를, 신이 청컨대, 전하(殿下)를 위하여 외어 보겠습니다. 태자(太子) 번왕(藩王)이 한 번 사마문(司馬門)에서 하마(下馬)하지 않으면 공거령(公車令)이 핵주(劾奏)할 수 있었고, 군문 도위(軍門都尉)가 장군(將軍)의 명령으로 천자(天子)의 승여(乘輿)를 막을 수 있었으며, 중대부(中大夫)가 전상(殿上)에서 한 번 희롱하면 승상(丞相)이 격문(檄文)으로 불러 목 벨 것을 의논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저세 신하는 그 직책을 지킬 줄만 알았을 뿐이고, 한 문제(漢文帝)는 반드시 그 법(法)을 행하게 하였으니, 사책(史冊)에 전하며 미담(美談)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대저 종친부(宗親府)는 왕자(王子)·대군(大君)의 아문(衙門)이니 백사(百司)가 존경하는 바인데, 대신(大臣)이 한 가지 작은 일 때문에 부리(府吏)를 잡아 가둔 것을 갑자기 듣는다면, 성심(聖心)에 기껍지 않으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만 생각건대, 전하(殿下)께서 계시는 자리는 곧 조종(祖宗)의 자리니 군(君)이며 부(父)이요, 왕자와 대군은 신하이며 자식입니다. 군부(君父)의 명(命)을 받아 군부(君父)의 고굉(股肱)에 임명되어 스스로 백료(百僚)를 총괄하니, 조정(朝廷)을 중(重)히 하고 체통을 높이는 것은 대신(大臣)의 책임입니다. 성의(聖意)에 만약 ‘종반(宗班)이 혹 범과(犯科)했다면 대신들이 일에 따라 규핵(規劾)해도 혹 괜찮겠지만, 하나의 작은 일로 인해 곧장 부리(府吏)를 가둔 것은 종친부를 높이고 왕족(王族)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신다면, 또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이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 있으면서 조그만 허물도 오히려 규정(規正)할 수 없고 체통을 오히려 지킬 수 없다면 어찌 군부를 높이고 조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을 책임지울 수 있겠습니까? 일은 비록 작으나 관계된 바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연신(筵臣)의 진백(陳白)은 정직하여 결코 다른 뜻이 없었는데, 귀담아 듣기를 싫어하고 성색(聲色)이 너무 거치셨으니, 이는 아마도 평소에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사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희로(喜怒)를 나타냄이 절도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린(臣隣)을 예대(禮待)하고 법을 지키는 신하들을 우용(優容)하는 것이 도리어 한 문제보다 부족하니, 지사(志士)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림이 어찌 가생(賈生)574)  보다 백 갑절이 되지 않겠습니까?"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 일은 어제 이미 하교(下敎)하였다. 인용한 한나라 때의 일은 아주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 직책이 헌부(憲府)에 있으면서 규정(規正)하지 않고 오히려 비호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상명(趙尙命)이 말하기를,
"어제는 하나의 작은 일로 인하여 갑자기 너무나도 비상한 하교를 내리셨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허둥지둥 물러났으니, 참으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무릇 대신(大臣)이란 체국(體國)하는 신하입니다. 재신(宰臣)이 아뢴 바는 국체(國體)를 존중하자는 듯에 불과하였으니, 어지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가벼이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엄교(嚴敎)가 준절(峻截)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마음에 싹틀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윽이 보건대 전하께서는 조금만 격뇌(激惱)하면 더러 말을 가리지 않고 하시니, 신(臣)이 항상 개연(慨然)해 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예(禮)를 행하는 데 화평함이 귀중하다.’ 했으니, 삼가 원하건대, 이제부터 사기(辭氣)의 사이에 화평(和平)에 더욱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본사(本事)에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른바 종신(宗臣)을 제재하고 억누른다는 것은 권세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묘조(世廟朝) 이래로 종신들은 권세가 없이, 다만 종친부(宗親府)에 의지하는데, 종신들의 영체(零替)가 근래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비록 세력을 부리고자 하나 그 누가 받아 주겠는가? 오늘의 일이 만약 대신을 가볍게 업신여긴 데서 나왔다면 논할 것도 없다. 하지만 먼 종친이 왕자(王子)의 관아에 대신 거처하고 있는데 여러 신하들이 만약 ‘지금 왕자가 없다.’고 이른다면, 그 아래 종반(宗班)들은 정부(政府)의 하리(下吏)를 가두어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정부에 대신은 없고 다만 참찬(參贊)만 있을 경우 타사(他司)에서 또한 그 서리를 추치(推治)하는데도 장차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내가 대신들을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뜻을 둔 바가 있어서이다. 박문수(朴文秀)는 비당(備堂)으로서 입시(入侍)하였으니, 이미 자기 직사(職事)가 아니었고 월조(越俎)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이미 상해 있었으므로 저절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느냐?"
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노여움을 제어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보통 사람을 지적해 말한 것인데, 성상(聖上)의 학문으로 사령(辭令)의 화평함을 잃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개연(慨然)하지 않겠습니까? 설사 노할 만한 일이 있다하더라도 오직 조용하게 효유(曉諭)하여 성의(聖意)를 열어 보여야만 바야흐로 사물(事物)이 와서 순응하는 도리에 합치될 것입니다. 무릇 대신이란 전하(殿下)의 고굉(股肱)입니다. 비록 인주(人主)의 존귀함으로서도 추고(推考)의 벌(罰)을 베풀 수 없는 것은 국체(國體)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자(王子)·대군(大君)이라도 부리(府吏)를 잡아 가둘 수 없는데, 더욱이 해춘군(海春君)은 2품의 종재(宗宰)로서 대신에게 화를 내고 부리(府吏)를 가두었으니, 이는 참으로 전에 없었던 괴이한 행동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아뢴 바에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엄교(嚴敎)에 심지어 신하로서 감히 듣지 못할 말이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함양의 공부가 아직 미진해 그런 것입니다. 원하건대 더욱 뜻을 두소서. 종재에 이르러서는 끝내 망령된 실착을 면하지 못했으니 책벌(責罰)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번저(藩邸)에서 입승(入承)하여 궁중(宮中)에서 생장(生長)하였으므로 일찍이 예(禮)를 읽지 못하였고, 다만 조종조(祖宗朝)의 예법(禮法)을 따랐을 뿐이다. 일찍이 경자년575)   대상(大喪) 뒤에 전도(前導) 없이 대궐로 가다가 길에서 대신(大臣)을 만났는데, 앞에 있으면서 끝내 길을 비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뒤따라 가지 않으려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갔었다. 내가 왕자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에 저사(儲嗣)가 없고 종실(宗室)은 고단(孤單)하여 세력을 부릴 만한 기운이 없는데 또 제재하고 억누르고자 하니, 내가 붙들어 주지 않으면 누가 다시 돌아보겠는가? 선묘(宣廟)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 꽃이 피고난 뒤에는 다시 꽃이 없다’ 하였으니, 매번 이 하교를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자연히 평안치 않았다. 내가 해흥군(海興君)의 잘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홍 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사기(辭氣)가 마땅히 이와 같아서는 아니됩니다. ‘홍의(弘毅)’ 두 글자로 앙면(仰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의(弘毅)에 대한 공부가 나에게 과연 부족하다. 그러나 매번 ‘삼종(三宗)의 부탁(付托)’을 생각하면 비록 힘쓰고자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명겸(趙明謙)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3백 년 동안 덕(德)을 쌓았는데 어찌 식보(食報)의 이치가 없겠습니까? 전하게서 진실로 마음을 넓히시고 화평(和平)을 잃지 않으신다면 곧 상서로운 길조(吉兆)가 저절로 이르게 될 것인데, 매번 마음이 괴롭다는 하교를 내리시어 군신(君臣)이 서로 마주 대하고 흐느끼니, 이것이 어찌 좋은 기상(氣象)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자못 가납(嘉納)하였다.

 

지평(持平) 박필재(朴弼載)·정언(正言) 조진세(趙鎭世) 등이 상소하여 사교(辭敎)가 중도(中道)에 지나쳤음을 논하니, 임금이 아울러 예비(例批)를 내렸다.

 

임금이 명하기를,
"지금부터 전시(殿試)의 시관(試官)은 별생기(別省記)를 갖추어 궐중(闕中)에서 입숙(入宿)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8일 을유

식년 전시(式年殿試)를 설행하여 박첨(朴瞻) 등 30인을 뽑았다.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日前)에 망령되게 진언(陳言)한 바가 있었는데, 성교(聖敎)가 지엄(至嚴)하여 오정(五情)이 덜덜 떨리고 땀이 뼛속까지 적시었습니다. 설사 신이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여 그릇된 전례를 그대로 답습했다면 오히려 상소하여 변명할 수 있는데 신에게 노여움을 옮겨 도리어 부리(府吏)를 가둔 데 이르렀으니, 일찍이 없었던 놀라운 일입니다. 조가(朝家)에서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데는 본래 체모(體貌)가 있으니, 만약 죄고(罪辜)가 있다면 파삭출찬(罷削黜竄)함도 못할 게 없으나 문비(問備)576)  의 벌(罰)이 유독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조정(朝廷)을 존숭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보잘것없음으로 인하여 체통을 다시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손상시켰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백료(百僚)를 통솔하는 자리에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엊그제 하교(下敎)한 것은 직분을 넘어 번거롭게 주달(奏達)한 사람에게 미안한 것이었다. 경이 어찌 지나치게 혐의하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또한 차자(箚子)를 올려 인구(引咎)하니, 우악한 비답으로 위유(慰諭)하였다.

 

11월 9일 병술

홍현보(洪鉉輔)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유엄(柳儼)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한위(趙漢緯)를 헌납(獻納)으로, 이익한(李翊漢)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송진명(宋眞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우하형(禹夏亨)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

 

11월 10일 정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한전(旱田)에는 급재(給災)한 예가 없으니, 그것은 1년에 두 번 경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흉년을 거듭 당한 나머지 여역(癘疫)이 또 크게 발생하여 온가족이 몰사한 자도 많으니 주인 없는 밭은 대부분 진폐(陳廢)되어 있습니다. 신이 성묘(省墓)하러 가는 길에 기호(畿湖)의 백성들이 말을 에워싸고 호소하며 상문(上聞)되기를 바랐습니다. 제도(諸道)를 합산하면 주인 없는 진전(陳田)의 세는 요컨대 수만 석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가 어찌 수만 석의 쌀을 아껴가며 민심(民心)을 수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청컨대, 제도로 하여금 더욱 정밀하게 조사하고 뽑아서 특별히 조세를 감면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특별히 급재(給災)하도록 명하여 긍휼(矜恤)히 여기는 뜻을 보였다. 김흥경이 또 말하기를,
"산양회진(山羊會鎭)에서 잡힌 청나라 사람을 잠시 후에 만부(灣府)로 하여금 치통(馳通)하여 들여 보내게 하였습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이진(權以鎭)의 장계(狀啓)를 보니, 을미년577)   경에 창성부(昌城府)에서 일찍이 청나라 사람을 잡았는데, 조정(朝廷)에서 이자(移咨)하여 들여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도 또한 마땅히 이 전례(前例)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옳게 여기며 말하기를,
"사신(使臣)이 그 사람을 데리고 간다면 사체(事體)에 미안하다. 만부(灣府)로 하여금 봉성(鳳城)에 전송(傳送)하게 하고, 자문(咨文)은 사행(使行) 편에 부치는 것이 좋갰다."
하였다. 김흥경이 또 아뢰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수량(李遂良)의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의 마상선(馬尙船) 11척이 표류해 강계(江界) 지경에 왔다.’고 합니다. 청컨대, 한꺼번에 쳐 깨뜨려 금절(禁絶)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흥경이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권이진의 장계에 이르기를, ‘강변(江邊)의 파수(把守)는 대개 채삼(採蔘)하는 사람을 방금(防禁)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일찍이 철파(撤罷)하곤 합니다. 전 감사(監司) 송진명(宋眞明)은 성교(聖敎)로 인하여 겨울철의 파수를 창설(創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잠상(潛商)들이 국경을 넘나들어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갓 얇은 옷에 지친 군졸로 하여금 눈보라를 무릅쓰고 모래 벌판에서 지내게 할 뿐이니, 참으로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청컨대, 그전처럼 정파(停罷)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시행한 지 1년도 안되어 문득 정파한다면 아마도 전도(顚倒)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수를 설치한 것은 다만 금삼(禁蔘) 때문만은 아니다. 얼음이 언 뒤에는 마땅히 더욱 방수(防守)해야 하는 까닭에 송진명이 사폐(辭陛)할 때에 하교하여 창설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날씨가 대단히 추운데 저들이 바람을 무릅쓰고 모래 벌판에서 노처(露處)578)  하는 고초를 생각하면, 어찌 동사(凍死)할 걱정이 없다고 보장하겠는가? 다시 전례(前例)를 상고(詳考)하여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한성 판윤(漢城判尹) 장붕익(張鵬翼)이 아뢰기를,
"도성(都城)의 금표(禁標) 안에 투장(偸葬)한 것에 대해 일찍이 파서 옮기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낭관(郞官)을 발견(發遣)하여 사문(四門) 밖을 두루 살피게 했더니, 몰래 매장한 자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임자가 있는 것은 이장(移葬)시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근년에 이르러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자들의 무덤이 즐비하게 언덕에 가득하니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모두 파내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봉분(封墳)을 깎아 버려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새 무덤과 옛무덤을 막론하고 임자 없는 것을 누구에게 파서 옮기게 하겠느냐? 봉분을 깎아 내면 혹 뼈가 드러날 것인데. 또 왕정(王政)에 차마 할 바가 아니니, 잠시 내버려 두고 다만 다음부터 금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려 하다가 판부사(判府事) 이관명(李觀命)의 병이 위중하다는 서계(書啓)를 보고 정지하게 하였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관명(李觀命)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슬퍼하고, 상장(喪葬)을 돌보아주되 예(例)에 의거해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관명의 자(字)는 자빈(子賓)이니 이건명(李健命)의 형이다. 성품이 염정(恬靜)하고 청간(淸簡)하였으며, 젊어서는 경직(鯁直)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신축년·임인년의 화(禍)를 겪고 나서는 세상사에 대한 생각이 도무지 없었는데, 을사년579)   개기(改紀) 때에는 맨먼저 등용(登庸)되자 분의(分義)를 끌어대어 힘써 사양하였고, 강교(江郊)로 물러나 마침내 구용(究用)되지 못하였으며, 간혹 식량이 자주 떨어지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나 기미를 거의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문형(文衡)을 맡았고, 기사(耆社)에 들었으며 한가롭게 살다가 생을 마쳤다. 뒤에 문정(文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11월 11일 무자

밤에 유성(流星)이 하늘 한복판 엷은 구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았고 고리의 길이는 2, 3자였다.

 

교리(校理) 오원(吳瑗)과 부수찬(副修撰) 조명겸(趙明謙) 등이 차차(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한 번 종부(宗府)의 서리(書吏)를 가둔 것 때문에 그 자리를 불안해 하고, 2품의 종신(宗臣)이 대신에게 방자하게 화를 내며 서로 대항하여 대거리로 정부(政府)의 서리(書吏)를 가두니, 이와 같고도 나라의 기강(紀綱)과 조정의 체모를 사방(四方)에 보일 수 있으며 후대(後代)에 법도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성비(聖批) 가운데 ‘군부(君父)의 방촌(方寸)’이라는 하교를 생각하고 마음에 아주 병이 되어 계속 근심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아! 국세(國勢)가 위태롭고 어려움이 너무나도 심하니, 신린(臣隣)이 우러러 믿고 목숨으로 삼는 것은 오직 전하(殿下)의 한 마음일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마땅히 함양(涵養)·조존(操存)의 공력(工力)을 깊이 체득하시고 더욱 관대·홍의(弘毅)한 도(道)에 힘쓰소서. 비록 지극히 어렵고 배억(排抑)한 일이 있더라도 마땅히 성심(聖心)을 넓게 가지시고 이치를 거울삼고 성정(性情)을 절제(節制)하여 인의(仁義)의 마음을 움직이고 물욕(物慾)의 성품을 참아서 하지 못하는 바를 더욱 낫게 함으로써 도(道)를 이루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렸다.

 

11월 12일 기축

하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마는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하였다. 지난번의 일은 비록 하찮은 것이었지만, 이미 그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 본래 일과 아울러 비호하였으니 허물을 감춘 데 가까우며, 또한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뜻이 아니니,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을 파직하라. 그리고 그 당시 하교가 지나쳤던 것은 마땅히 허물을 알고 그 마음에 느껴야 할 부분이다. 국세(國勢)의 단약(單弱)함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으며, 종척(宗戚)이 시들어 쇠잔함도 또한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었다. 아! 지금의 종척들은 ‘세대(世代)가 멀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 열조(列祖)로부터 보면 모두 다 금지옥엽(金枝玉葉)인 것이다. 지금부터 의정부(議政府)는 잘못된 예(例)를 버리고 존경으로 대우할 것이고, 종친부(宗親府)는 지난 일을 생각지 말고 서로 공경하라. 외조(外朝)에서 종신(宗臣)을 경멸하는 폐단이 있으면 결단코 대관(大官)·숭품(崇品)이라 해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내조(內朝)에서 정신(廷臣)을 침릉(侵凌)하는 일이 있으면 결단코 귀종(貴宗)·근척(近戚)이라 해서 용서하지 않겠다. 나의 뜻을 환히 유시하니, 각자 모름지기 모두 알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3일 경인

헌납(獻納) 조한위(趙漢緯)가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고, 인하여 북로(北路) 산천(山川)의 지도를 올려 관방(關防)의 사이(事宜)를 논하니, 예비(例批)를 내렸다.

 

박사정(朴師正)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유(李瑜)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집의(執義)로, 심육(沈錥)과 이유(李濰)를 장령(掌令)으로, 임집(任)과 신택하(申宅夏)를 정언(正言)으로, 남태량(南泰良)과 심성희(沈聖希)를 지평(持平)으로, 윤득화(尹得和)와 정형복(鄭亨復)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1월 14일 신묘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여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보감(寶鑑)》을 보건대, 무릇 부리(府吏)·서도(胥徒)가 그 관장(官長)을 고발하고 서민(庶民)이 그 수령(守令)과 감사(監司)를 고발한 경우 모두 그에 해당하는 죄벌이 있다. 그러나 근래 상언(上言)한 부류에는 말이 관장(官長)을 침핍하는 것이 매우 많으니, 일이 매우 무엄하다. 자제(子弟)가 부형(父兄)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설혹 용서할 만한 것이 있으나, 그 나머지는 경중(輕重)과 곡절(曲折)을 논할 것 없이 일체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수령(守令)을 가려 뽑을 것을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11월 15일 임진

안국 대신(按鞫大臣) 이하가 청대(請對)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죄인 김계보(金繼寶)를 형신(刑訊)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여러 의논이 죄인을 면질(面質)시킨 뒤에 다시 초사(招辭)를 받지 않고 곧장 형신을 가함은 법례(法例)에 어긋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경(卿)들의 말은 신중한 데서 나온 것이나, 김계보가 정말로 고변(告變)할 생각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직접 포청(捕廳)에 고하지 않고 일부러 순라(巡邏)에게 잡혔겠느냐? 대개 그 궁곤(窮困)이 이미 심하여 원래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우연히 야금(夜禁)을 범해 장차 무거운 곤장을 맞게 되자, 갑자기 요행(僥倖)의 계책이 생각나서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공사(供辭)는 하나도 말이 되는 것이 없고 면질(面質)은 말하는 것마다 꺾이니, 어찌 다시 신문할 단서가 있겠는가? 어제 《보감(寶鑑)》을 보니, 성조(聖祖)께서 삼복(三覆)580)  할 때 문서(文書)를 다시 살피지 않았다 하여 칙력한 하교가 있었다. 하물며 설국(設鞫)하여 안문(按問)함은 사체(事體)가 엄중하니, 어찌 신중히 살피는 뜻이 없겠는가? 이 사건은 이미 매우 허황(虛荒)되고 또 간증(干證)이 없으니 다시 어찌 의심하여 어려워하겠는가? 취복(取服)하고 행형(行刑)하는 것이 만약 양복(陽復)의 때에 있다면 선왕(先王)의 폐관(閉關)하는 뜻에 어긋난다. 그래서 반드시 빨리 수쇄(收殺)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금부 도사(禁府都事) 이필(李弼)이 고만령(高萬齡)을 잡아올 때 먼저 그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사사로이 이야기를 나누고 비로소 잡아왔으니, 옥정(獄情)을 누설한 자취가 현저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가도사(假都事) 유세도(柳世燾)는 정인선(鄭仁先)의 인(仁) 자가 서로 같다고 하여 조정에 품처(稟處)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잡아 왔으니 모두 매우 해괴합니다. 아울러 마땅히 잡아다 핵실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안핵 어사(按覈御史)의 장계(狀啓)를 보았는데, 이미 단서(端緖)를 얻었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자문(咨文)을 보내야 하겠는가?"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밖의 의논도 또한 그러합니다. 우선 이제 막 단서를 얻었으니, 이제 바야흐로 끝까지 핵실을 다하고 자문을 갖추어 치보(馳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저들 나라의 법은 변방에 사건이 생기면 죄가 심양 어사(瀋陽御史)에게 있기 때문에 심양 사람들은 이를 염려하여 번번이 중간에서 미봉(彌縫)한다고 합니다. 지금 비록 자문을 보내어 절사(節使)에게 부치더라도 심양에 도착하여 형세를 관망하고 바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역관(譯官)들은 매번 심양에서 사건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오직 목전(目前)의 무사함만을 생각하니, 그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사체(事體)로 논하건대, 자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공홍도(公洪道)의 문의(文義)·청산(靑山)·보은(報恩)·연기(燕岐) 등 여러 읍(邑)에 지진(地震)이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멈췄는데, 집이 크게 흔들리고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죄인 김남혁(金南爀)·고만령(高萬齡)·이매(二梅) 등을 김계보(金繼寶)와 면질(面質)시키니, 김계보가 말이 막혔다. 임금이 김계보를 신문하라 명하자, 김계보가 처음 공사(供辭)에서 말하기를,
"신이 금년 5월 그믐 사이에 전라도에 가서 염탐했는데, 남원(南原)의 백복사(百福寺)·순천(順天)의 송광사(松廣寺)에 괘서(掛書)가 있었고, 태인(泰仁) 검리(黔里)에 사는 양반(兩班) 홍구채(洪九采), 정읍(井邑)의 상한(常漢) 김명신(金命信)과 서정원(徐廷遠), 흥덕(興德)의 양반 김팔기(金八起), 상한 정제인(鄭齊仁), 부안(扶安)의 양반 김남역(金南繹), 창평(昌平)의 양반 고만령(高萬齡) 등이 8월 16일 고만령의 집에 모여 수작(酬酌)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장을 넘어 들어가 창 밖에서 몰래 들으니, ‘두 번 괘방(掛榜)했으나 끝내 효과가 없으니 봄이 되길 기다렸다가 팔도(八道)에 괘방하여 나라를 도모하자.’고 했습니다."
하고, 또 공초(供招)하기를,
"남원에는 고만령이 직접 가서 괘방했고, 순천에도 김남역이 직접 가서 괘방했다고 했습니다. 정제인과 김남역은 일찍이 얼굴을 알고 있었으나, 그 나머지는 고만령 집의 어린 계집종에게 물었더니 아무 데 사는 모씨(某氏) 성(姓)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신은 일찍이 정미년581)  에 흥덕(興德)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무신년582)   겨울에 방면(放免)되었는데 그때 적정(賊情)을 상세하 듣고 이미 어떠어떠한 사람이 적당(賊黨)인지를 알았던 까닭에 그 성(姓)을 듣고는 이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재차의 공초에는 이르기를,
"고만령의 집 어린 계집종은 일찍이 그 얼굴을 알았던 까닭에 그날도 또 그 계집종을 만나 ‘오늘 네 집에 온 사람은 아무 고을의 아무개이냐?’ 하고 물었더니, 계집종이 ‘그렇다.’고 하여, 이 때문에 어떠어떠한 사람이 모여 있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김남역(金南繹)이 공술하기를,
"신의 이름은 남혁(南爀)이지, 남역(南繹)이 아닙니다. 홍구채·김팔기는 다만 이름만 들었을 뿐이며 그 얼굴은 모릅니다. 고만령이란 이름은 들은 것 같기는 하지만 상세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모이지도 않았는데 어찌 모의(謀議)를 했겠습니까? 괘서 등의 말은 허무맹랑합니다."
하였다. 고만령은 공술하기를,
"이른바 와서 모였다는 사람들은 그 얼굴을 모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이름도 듣지 못했습니다. 괘서에 대한 말은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신은 가계(家計)가 다소 넉넉하므로 작년과 올해에 영호(嶺湖)의 걸객(乞客)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신은 비록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그들은 반드시 신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변명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신은 8월 16일 감시(監試)의 초시(初試)를 보려고 장수(長水)의 시소(試所)에 갔었기 때문에 원래 집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매(二梅)는 공술하기를,
"지난해 가을 쯤에 전립(氈笠)을 쓴 한 걸인(乞人)이 와서 말하기를, ‘경상도(慶尙道)에서 귀양살이하다가 이제 막 풀려나 돌아온다.’고 하면서 쌀 한 뒷박과 돈 몇 푼을 달라기에 쌀 약간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적다고 화를 내면서 문을 나가며 말하기를, ‘네 집은 장차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하였고, 그밖에는 원래 문답(問答)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김남혁 등과 김계보를 면질(面質)시키니 서로 발명(發明)하는데 김계보가 매번 말이 막혔고, 고만령이 그날 집에 없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대답을 하지 못했으므로 신문(訊問)하라는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정제인 또한 발포(發捕)하는 가운데 있었으나, 흥덕(興德) 근처에는 원래 제인(齊仁)이라는 이름을 쓰는 자가 없었으며, 가도사(假都事) 유인도(柳仁燾)가 정인선(鄭仁先)의 인(仁) 자와 사로 같다하여 잡아왔던 것이다. 정인선과 김계보를 면질시키니, 피차 모두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에 즉시 석방(釋放)했다. 그 뒤 김 계보는 연달아 네 차례의 엄한 신문에 물고(物故)되었다. 김남혁은 본 사건에서 탈공(脫空)되었으므로 석방하라고 명했고, 고만령과 이매는 추조(秋曹)에 이송(移送)하여 각별히 엄문(嚴問)하게 하였다.

 

기설제(祈雪祭)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겨울이 깊었으나 눈이 내리지 않아 가을보리[秋牟]를 손상시키므로 예조(禮曹)에서 전례(前例)를 들어 청했기 때문이었다.

 

11월 16일 계사

첫눈이 왔다.

 

사직(司直) 송성명(宋成明)이 진소(陳疏)하여 사면(辭免)을 청하니, 임금이 다시는 시애(撕捱)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애초에 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유(尹游)가 ‘조송 건곤(趙宋乾坤)’이란 얘기를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공적인 모임에서 말하니, 대개 조씨와 송씨의 양가(兩家) 족당(族黨)이 매우 번성하여 재직(在職)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에 당시 요언(謠言)이 있었던 것이다. 윤유가 정목(政目)을 보고 장난삼아 이런 말을 했는데, 후에 헌신(憲臣) 박규문(朴奎文)이 상소에서 이 일을 언급하면서 윤유의 패언(悖言)한 죄를 청하였다. 그 의도는 양가(兩家)를 기울게 하려고 한 것이지 곧장 윤유를 미워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그를 위하여 대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총애를 탐내고 영화로움을 사모하는 무리들이 초탈(超脫)할 수가 없었는데, 유독 송성명은 강교(江郊)로 물러나 거처하여 여러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으니, 당시 의논이 칭찬하였다.

 

11월 18일 을미

하교하기를,
"백성을 위해 풍년들기를 기도함은 오직 힘써 정성스럽게 함에 있는데 금년 농사는 연해(沿海)에 더욱 흉년이 들었다. 내가 장차 명년(明年) 상신일(上辛日)583)  에 기곡제(祈穀祭)를 몸소 행하고자 하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밤에 목성(木星)이 방성(房星)으로 들어갔다.

 

11월 19일 병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講)하고,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제사하라고 명하였다. 한림(翰林) 김한철(金漢喆)이 말하기를,
"신이 사책(史冊)을 포쇄(曝曬)하라는 명을 받들고 영남(嶺南)에 갔었는데,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남긴 교화(敎化)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습니다. 아동(兒童)·주졸(走卒)들도 모두 노선생(老先生)이라고 칭하고, 척자편언(隻字片言)이라도 사람들이 모두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는 치제했는데, 유독 문순공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자못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도산(陶山)은 곧 선정(先正)이 살았던 곳인데 명묘(明廟)께서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까지 하셨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다가 감상(感想)이 일어나 문성공에 치제하게 되었다. 지금 듣건대, 문순공의 유화(遺化)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하니, 내가 실로 흠탄(欽歎)한다. 특별히 근신(近臣)을 보내어 도산 서원과 예안(禮安)의 고택(故宅)에 치제하게 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라."
하였다. 김한철이 말하기를,
"안동과 예안의 인사(人士)들이 선정의 언행을 널리 수집하여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이라 이름했으니, 마땅히 한 번 예람(睿覽)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하자, 임금 역시 본도로 하여금 인행(印行)해 올리라고 하였다.

 

11월 20일 정유

성균관 유생에게 황감(黃柑)을 나누어 주고 홍문 제학(弘文提學) 송인명(宋寅明)에게 명하여 시사(試士)하게 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생원 김운(金運)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11월 22일 기해

서종옥(徐宗玉)을 이조 참의로 삼았으니, 묘당의 추천이었다.

 

서명빈(徐明彬)을 승지(承旨)로, 서종섭(徐宗燮)을 대사간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예조 참판으로, 김동필(金東弼)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유(李瑜)를 좌윤(左尹)으로, 신만(申晩)을 헌납(獻納)으로, 조명겸(趙明謙)·송징계(宋徵啓)를 정언(正言)으로, 조진세(趙鎭世)·이재후(李載厚)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11월 23일 경자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講)하였는데, 특진관(特進官) 박내정(朴乃貞)과 검토관(檢討官) 윤득화(尹得和)가 ‘효지(殽地)’의 뜻에 대해 쟁론하니, 말이 매우 번거럽고 지루했다. 윤득화가 말로 배척하니, 이에 박내정이 크게 화를 내며 책을 덮고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야 다시 어찌 말할 것이 있는가?"
하자, 지사(知事) 윤유(尹游)가 시끄럽다고 책망하니, 박내정이 더욱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면 특진(特進)자리에 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글뜻을 토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 그 말을 마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날 박내정의 거조(擧措)가 해괴하고 어긋났으므로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입을 가리고 웃었으며, 임금은 노망(老妄)이라 여기고 죄(罪)주지 않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재로(金在魯)가 여러 번 소명(召命)을 어기어 엄지(嚴旨)을 받고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자, 임금이 다그쳐 입시(入侍)하라 하니, 김재로가 부득이 명(命)을 받들었다. 임금이 인견(引見)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종제(從弟)를 대신하여 전조(銓曹)를 맡고 있으니, 공체(公體)와 사의(私義)에 모두 지극히 불안합니다."
하고, 극구 사직해 마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위유(慰諭)·책면(責勉)하고 이어 어필(御筆)로 쓴 짧은 종이를 내리며 말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국세(國勢)는 큰 바다의 외로운 배와 같다.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면 인재를 쓰는 것이 급선무이기에 경에게 이 임무를 맡겼으니, 그 뜻은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데 있다."
하니, 김재로가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

 

11월 24일 신축

정언(正言) 조명겸(趙明謙)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서북쪽이 저들 나라와 경계를 접하여 간민(奸民)들이 몰래 넘나드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징려(懲勵)의 방도는 반드시 도신(道臣)·수신(帥臣)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전후로 이 일로 견책(譴責)당한 자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이 위원(渭原) 사람은 저 나라 사람들을 살해(殺害)하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작은 변고가 아닙니다. 저 나라에서 이미 죄인을 잡았고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안사(按査)하게 하였으니, 사체(事體)의 중대함이 돌아보건대 어떠합니까? 그런데도 유독 도신과 수신을 견책하지 않았으니, 변금(邊禁)을 엄하게 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비록 이왕 지난 일로 말씀드린다 하더라도 기축년에는 도신(道臣)이 나처(拿處)되었고, 기유년에는 특파(特罷)되었습니다. 당시엔 비록 살해한 일이 없었으나 처분(處分)의 엄정(嚴正)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청컨대,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를 함께 나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講)하고 나서 특진관(特進官) 이진순(李眞淳)이 말하기를,
"이른바 성인(聖人)이 능히 칠정(七情)584)  을 다스렸다는 것은 먼저 나에게 있는 정(情)을 다스리고 난 뒤에 만민(萬民)의 정을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칠정을 발함에 있어 아직 미진한 곳이 있으니 신은 애(愛)·오(惡)·욕(慾)·노(怒) 네 가지에 대해 우러러 힘쓸 것을 청합니다. 무릇 인군(人君)의 사랑이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큽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흉년이 든 나머지에 백성들은 모두 거꾸로 매달린 듯한 형편에 있고 감역(減役)의 의론은 끝내 실마리를 찾지 못하였으며, 그 뒤로는 다시 강구(講究)하지 않았으니 이는 전하의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가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장오(贓汚)를 통렬히 물리치시고 당습(黨習)을 엄히 금하여 진실로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폐고(廢錮)시키고 귀양보내십니다. 그러나 참작해 헤아림은 마땅함을 잃고 경중(輕重)은 고르지 않아 죄벌(罪罰)이 한갖 잔약(殘弱)하고 세력 없는 자들에게만 행해지니, 이는 악을 미워하는 방도가 치우침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 전하께서 의복과 기완(器玩)에 비록 검약(儉約)한 듯하시나, 외사(外司)의 물종(物種)에 대해 내지(內旨)라 일컫고 취용(取用)하는 일이 많아도 유사(有司)가 감히 거스리지 못하며, 여러 궁가(宮家)의 절수(折受)가 실로 막대한 폐해가 되고 있으나 사람들 중에 말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미안한 뜻을 보이시니, 이는 사욕(私慾)이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서입니다. 지난날 종신(宗臣)의 사건에서는 위엄과 노여움이 격발(激發)하였고, 사교(辭敎)가 비상하여 신자(臣子)가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촌(方寸)이 이미 상했다.’ 하셨는데, 이 또한 노여움을 잊는데에 공력을 쓰지 아니한 것이니, 어떻게 만민(萬民)의 정성(情性)을 바르게 할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매우 절실하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진순이 또 양약(良役)을 변통(變通)함이 마땅함을 진달하고 한 군문(軍門)을 혁파(革罷)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나이 든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니,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진순(李眞淳)이 반열(班列)에서 나와 과감하게 말하여 사기(辭氣)가 절직(切直)하여 명주(明主)로 하여금 경청(傾廳)하기에 족했는데 개납(開納)한 실상이 없었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90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사법(司法) / 군사-군역(軍役)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재정-상공(上供) / 농업(農業) / 역사-사학(史學) / 군사-군정(軍政)


[註 584] 칠정(七情) : 사람의 일곱 가지 심리 작용으로, 기쁜[喜]·노여움[怒]·슬픔[哀]·즐거움[樂]·사랑[愛]·미움[惡]·욕심[欲]을 말함.
사신은 말한다. "이진순(李眞淳)이 반열(班列)에서 나와 과감하게 말하여 사기(辭氣)가 절직(切直)하여 명주(明主)로 하여금 경청(傾廳)하기에 족했는데 개납(開納)한 실상이 없었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11월 25일 임인

이광세(李匡世)를 승지(承旨)로, 민정(閔珽)을 헌납(獻納)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정언(正言)으로, 김약로(金若魯)를 수찬(修撰)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1월 26일 계묘

안국 대신(按鞫大臣)이 죄수의 공사(供辭)를 가지고 입시하여 말하기를,
"원고인(元告人)인 김계보(金繼寶)는 이미 물고(物故)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실상이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죄인 김계보는 처음에 야금(夜禁)을 범한 것으로 인하여 남을 악역(惡逆)으로 고발했으니, 이미 허황(虛荒)된 것이었으나 사체(事體)에 관계됨이 있으므로 설국(說鞫)하여 엄문(嚴問)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공초(供招)를 보니, 구걸하다가 원망을 품게 된 정상이 남김없이 탄로(綻露)되었다. 그 자 역시 원망을 품고 무고하려는 뜻으로 토로했다가는 다시 삼켜버렸으니, 지금 다시 물을 것이 없게 되었다. 피고인(被告人) 고만령(高萬齡) 등은 아울러 석방(釋放)시키고 관련되어 잡혀온 사람들도 역시 제도(諸道)로 하여금 즉시 풀어 주게 하라."
하였다. 헌부 【지평(持平) 이재후(李載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청컨대, 고만령 등을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서종섭(徐宗燮)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이현보(李玄輔)의 정의(停擬)에 대한 일은 허다한 말을 제쳐 놓고 이 과거(科擧)의 설행은 이미 반교(頒敎)·칭경(稱慶)에 근거를 둔 것인즉 교문(敎文) 가운데 과연 어떠한 문자(文字)가 있었습니까? 관복(冠服)한 유자(儒者)가 심상하게 보며 조금도 놀라거나 아파하지 않고 그로 인하여 등과(登科)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사리를 이해할 줄 아는 자라면 결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가(朝家)에서 그대로 두고 파방(罷榜)하지 않았으니, 전연 폐지(廢枳)할 필요는 없으나 어찌 근밀(近密)·인선(遴選)의 자리에 의망(擬望)할 수 있겠습니까? 윤용(尹容)에 이르러서는 본래 인망(人望)과 문벌이야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마는, 일이 마침 불행하게 되어 지친(至親)이 국수(鞫囚)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계(臺啓)가 날마다 조지(朝紙)에 실리니, 출장(出場)하기를 조금 기다려 천천히 그 임용을 의논하는 것이 사람을 처우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길에서 호창(呼唱)하고 근반(近班)에서 머뭇거리게 한단 말입니까? 신이 마침 외람되게도 인물(人物)을 진퇴시키는 자리에 있어 감히 갑자기 소견을 바꿀 수 없기에 조금 권도(權道)를 두었다가 필경에는 스스로 전제(顚隮)를 불러오고야 말았습니다. 비록 용관(冗官)·산직(散職)이라 하더라도 감히 승당(承當)할 수 없는데, 하물며 언의(言議)의 자리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28일 을사

홍상빈(洪尙賓)을 승지(承旨)로, 이정제(李廷濟)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박찬신(朴讚新)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박문수(朴文秀)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은 본래 어리석고 광포하여 걸핏하면 문득 제멋대로 행동하였는데, 다만 천지(天地)의 함용(涵容)을 입어 아직까지 성명(性命)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마음에 품은 것은 반드시 진달했었습니다. 지난달 대신(大臣)들이 경연에서 아뢸 적에 신이 감히 잇따라 진달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미세한 일에 불과하였으니, 어찌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신의 말이 때마침 성충(聖衷)이 격뇌(激惱)한 때에 나왔으므로 천위(天威)가 진첩(震疊)하고 성교(聖敎)가 준절(峻截)하였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그때 다시 한 마디도 진달할 수 없었기에 두려워 떨며 물러났으니, 이는 그 죄가 만번 죽어도 스스로 속(贖)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설령 지나친 행동이 이보다 더 무거운 경우가 있더라도 신(臣)과 다른 사람을 말할 것 없이 전하를 위하여 범안(犯顔)하며 충성을 다할 자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오늘날 상하(上下)의 거조와 기상(氣象)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아! 십여 년 동안 전하의 쌓여온 상처(傷處)는 바로 신 등이 지극히 아파하는 것입니다. 말이 이런 지경에 이르니 군하(群下)의 마음이 슬프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슬퍼지며, 군하의 기(氣)가 저상(沮喪)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저상됩니다. 말할 만한 일이 있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다툴 만한 일이 있어도 감히 다투지 못하니, 아! 슬픔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전하의 지기(志氣)의 강대(强大)함이 이로 말미암아 쇠약해졌으며, 학문에 대하여 힘썼던 것이 이로 말미암아 퇴보하였습니다. 시조(施措)하는 사이에는 옛날의 영발(英發)을 회복하지 못하고, 종위(從違)할 때에는 전날의 옹용(雍容)함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신하들이 숨겨진 근심이 없지 않으나 감히 어기지 못한 채 오직 봉승(奉承)하기만을 일삼는 것은 실로 전하의 심기(心氣)가 갈수록 더욱더 격발되고 전하의 거조(擧措)가 더욱 그르쳐질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전(殿)에 오르면 우물쭈물하다가 물러나 위축되지 않는 이가 없고, 전에서 내려오면 근심하고 한탄하여 급박함을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저 사방(四方)의 모르는 자들이 만약 가만히 의논하기를, ‘우리 임금이 매번 방촌(方寸)이 상했다는 하교로써 군하(群下)를 꺾고 굴복시키는 하나의 자료로 삼았다.’고 한다면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신이 더욱 천지(天地)에 유감스러움이 있으니, 전하게서 평일(平日)에 스스로를 반성(反省)함이 어떠하셨습니까? 비록 크게 견디기 어려운 지경과 지극히 억누르기 어려운 슬픔도 마땅히 이치로써 이겨내어 확연(廓然)히 막힘이 없어야 하는데, 다만 눈앞의 정리(情理)에 이끌려 이에 무익하게 감정을 상할 뿐입니다. 단지 전하께서 입지(立志)가 견고하지 못하셔서 혈기(血氣)의 누로 인해 아침에 후회하고는 저녁에 또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니 요순(堯舜)의 다스림은 다시 바랄 수가 없거니와 한당(漢唐)의 중주(中主)에게 또한 발돋음해도 미치기 어렵습니다. 말이 이에 미치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아!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노여움이 억제하기 어렵고 오직 슬픔이 마음을 상하기 쉽게 합니다. 노여움으로 남에게 노여움을 옮기고 슬픔으로 남에게 그 슬픔을 옮기는 것은 오히려 성인(聖人)이 자신을 이기고 감정을 절제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물며 전하게서는 노여움을 가지고 남에게 슬픔으로 옮기고 슬픔을 가지고 남에게 노여움으로 옮기니, 화평함을 잃고 조화로움을 어긋나게 함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심신(心身)의 병이 되고 근본에 누가 됨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비록 성상(聖上)의 자질(資質)이 밝고 지혜로워 간(諫)하기 전에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병의 근원은 그대로 방촌(方寸) 사이에 숨어 있다가 혹 일이 있으면 촉발되고 물욕에 따라 얽히게 되어 장차 전날처럼 다시 발작(發作)할 것입니다. 이런 병을 제거하지 못하면 말류(末流)의 허다한 병패(病敗)는 치료하려 해도 방법이 없어 반복되다 깊은 고질이 되어 끝내는 어찌해야 할지 그 바탕을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깊이 성찰(省察)하시어 먼저 대체(大體)를 세우시되, 다만 한 개의 천리(天理)를 준칙(準則)으로 삼으소서. 일에 비록 크게 상심(傷心)되고, 크게 감촉(感觸)되며, 크게 격발(激發)하고 크게 번뇌(煩惱)함이 있더라도 탈연(脫然)히 자기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구하고 천리(天理)에 질정(質正)하여 진실로 털끝만큼도 겸연(慊然)함이 없게 된다면 극치(克治)는 칼로 두 조각으로 잘라 버리듯이 될 것이고, 해탈(解脫)은 더러운 냄새 피하듯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환히 통달(洞達)해 다시 막힘이 없게 되면 손상된 감정과 격뇌(激惱)의 실마리가 봄눈이 햇볕을 받은 것보다 더 빨리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뒤에는 사물이 다가와도 순응(順應)하게 되어 넓디넓음이 여지(餘地)가 있고 기상(氣象)은 관대해져서 사령(辭令)이 화평해지며, 거조(擧措)가 정당(精當)하여 인심(人心)이 즐겨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상순(祥順)·화태(和泰)한 기운이 온 마음에 가득 차서 천지(天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니, 성궁(聖躬)의 안길(安吉)함이 극에 달하게 될 것이며, 국가의 평치(平治)가 반드시 이룩될 것입니다. 종사(宗社)의 억만년 끝이 없는 기쁨이 어찌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언로(言路)가 막힌 것이 오늘날 고질적인 병폐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기절(氣節)이 옛사람만 못한 것에 연유하지만 전하께서 역시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붕당(朋黨)을 없애고자 하는 것은 뜻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나, 오직 성의(聖意)에 ‘오봉당(惡朋黨)’ 세 글자를 먼저 두고 계시기 때문에 매번 억역(臆逆)하며 지나치게 의심하는 병폐가 있습니다. 조신(朝臣)들이 만약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논하면 반드시 벌이(伐異)라고 여기고, 혹 논함이 친한 사람에 미치면 명예를 바란다고 이르며, 피차(彼此)를 아울러 논하면 또 호대(互對)라고 여기니, 비록 한 마디 말을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직언(直言)과 당론(讜論)은 진실로 논할 수도 없거니와 관사(官師)의 상규(相規) 역시 장차 끊어져 버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일의 폐단이 과연 이와 같다."
하였다. 오원이 말하기를,
"지금 다행히 큰 권간(權奸)이 없어도 언로가 이와 같은데, 설령 있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성상(聖上)께 아뢰겠습니까? 조신(朝臣)들은 매번 하나의 소장(疏章)을 진달하려면 왼쪽으로 보고 오른쪽으로 보면서 말하기를, ‘이 글자는 눈에 거리끼는 것이 아닌가? 이 구절은 거슬리지 않을까?’하는데, 이런 일이 쌓이고 쌓여 이미 습관을 이루었으니 이는 비록 군하(群下)의 죄라 하더라도 실로 전하께서 능히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관대하게 용납하시지 못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였다.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우선 색목(色目)을 잊어버린 후에야 언로가 열릴 수 있으며 붕당도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옳다. 그러나 민형수(閔亨洙)·조적명(趙迪命)의 일 같은 것은 어찌 버려두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오원이 이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후손을 임용할 것을 청하고, 김약로가 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후손을 임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아울러 따랐다.

 

11월 30일 정미

윤양래(尹陽來)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장태소(張泰紹)를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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