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6권, 영조 9년 1733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12. 12:26
반응형

10월 1일 기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고 제도(諸道)의 구포곡(舊逋穀)을 견감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경상 감사 김시형(金始炯)이 본도(本道)의 기황(饑荒) 때문에 오래 된 포곡을 견감해 주기를 장청(狀請)하자, 임금이 허락했었는데,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제도에도 영남의 예에 의하여 견감해 주기를 주청(奏請)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평양(平壤)의 중성(中城)을 쌓도록 명하였다. 비국 당상(備局堂上)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관방(關防)은 두서너 산성(山城)이 있으나, 피란(避亂)하여 입보(入保)하는 곳이 되는 데 지나지 않아서 직로(直路)의 천리 사이에 하나도 믿을만한 곳이 없고, 오직 평양성이 조금 나아서 또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이 모이고 삼현(三縣) 오읍(五邑)이 의뢰하는 곳이나, 둘레가 매우 좁고 서남쪽이 자못 허술합니다. 또 창광산(蒼光山)이 있어서 규봉(窺峰)이 되므로, 옛날에 중성(中城)을 설치하였는데, 아직도 유지(遺址)가 있으며, 민정(民情)이 모두 증축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신이 서번(西藩)에 있을 때에 공역(工役)을 헤아려 재료를 모아 놓고 장차 상청(上請)하고자 하였으나, 흉년을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하문(下問)해 재량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우참찬(右參贊)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오명항(吳命恒)은 방백(方伯)이 되었을 때 일찍이 심양(瀋陽)에 사람을 보내어 기와 굽는 법을 배우게 하고 장차 이 성을 쌓는 데 쓰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송진명이 이미 재력(財力)을 모아 놓아 조정의 구획(區劃)에 번거로울 것이 없으니, 이를 허락하심이 마땅합니다."
하고,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모두 편의(便宜)함을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서명균이 이어 말하기를,
"이양신(李亮臣)이 연좌된 것은 그 죄가 깊지 않으니, 오랫동안 금고(禁固)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양신이 처음에 말하기를, ‘송인명(宋寅明)은 두 갈래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혈침(血忱)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 사람의 심술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비록 이양신이 없다 하더라도 조정에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그가 참으로 자신을 버린 것이지 내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와 참의 서종옥(徐宗玉)을 체차(遞差) 시키도록 명하였으니, 인혐(引嫌)하고 오랫동안 출사(出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종성(李宗城)을 이조 참의로 삼았는데, 묘당(廟堂)에서 천거한 것이었다.

 

10월 2일 경술

영의정 심수현이 차자(箚子)를 올려서 병(病)이 위중하다 하여 면직(免職)되기를 원하자, 비답(批答)하기를,
"내 뜻은 굳게 정해졌다. 결코 따르기 어려우니, 사양하지 말고 곧 들어와서 밤낮으로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3일 신해

임금이 뜸을 떴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김취로(金取魯)를 공조 판서로, 송인명(宋寅明)을 호조 판서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으로, 오언주(吳彦胄)를 교리(校理)로, 남태량(南泰良)을 부교리로, 김약로(金若魯)·유최기(兪最基)를 수찬(修撰)으로, 심성희(沈聖希)를 부수찬으로, 한현모(韓顯謨)를 집의(執義)로, 권상일(權相一)을 장령(掌令)으로, 조진세(趙鎭世)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승상(陞庠)532)  을 기한 안에 설행(設行)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대사성(大司成)으로 하여금 사학 교수(四學敎授)와 일시에 합설(合設)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승학(陞學)을 베푸는 것은 바로 상서(庠序)533)  에서 뽑아서 태학(太學)에 올리는 뜻인데, 대사성(大司成)이 겸하여 설행하는 것은 매우 구간(苟簡)하다. 당년조(當年條)를 만약 기한 안에 설행하지 못한다면, 삭제하는 일을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고, 거듭 고제(故制)를 밝히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심성희(沈聖希)가 신에게 발노(發怒)한 두 가지 일이 있는데, 그 하나는 추국(推鞫)하기를 청한 계사(啓辭)이고, 그 하나는 가랑청(假郞廳)을 불러서 꾸짖은 것입니다. 양전(兩銓)에서 개정(開政)한 이튿날 아침에 이조 낭청이 정원(政院)에 와서 관안(官案)과 창준(唱準)을 어람(御覽)하시기를 청하는 것은 곧 전례(前例)입니다. 그런데 9월 초1일에 정사(政事)가 있었으나, 5일까지 이조 낭청이 관안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정원에 있다가 두 서리(書吏)를 잇따라 가두었더니, 가랑청(假郞廳) 정집녕(鄭輯寧)이 상서원(尙瑞院)에 와서 앉아 서리로 하여금 와서 청하도록 하였으므로, 신이 정집녕을 불러 놓고 준열하게 꾸짖고는 그쳤습니다. 심성희의 이른바 ‘저 놈’이라고 부르며 때려서 쫓아내게 하였다는 데 이르렀다는 것은 신이 비록 비루하고 패악하다 하더라도 이처럼 극도에 이르지는 않았으니, 사방의 자리에 있던 이들이 직접 보았는데,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전(前) 참의(參議) 한덕전(韓德全)의 상소와 같은 데 이르러서는 신이 또한 변리(辨理)하는데 지쳐서 말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예비(例批)를 내렸다. 심성희가 또 수찬(修撰)으로서 맞서서 변명(辨明)하니, 번번이 인혐(引嫌)하는 것은 자못 지리(支離)한 데 관계된다고 비답을 내렸다.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후사(後嗣)를 가려서 세우도록 명하였다. 동지돈녕(同知敦寧) 안구(安球) 등이 종친부(宗親府)에 단자(單子)를 바치고 말하기를,
"선조(先祖) 연창위(延昌尉)는 곧 세종조(世宗朝) 8대군(八大君)·한 공주(公主)의 부마(駙馬)인데, 장파(長派)가 4대에 세 번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첩자(妾子)로 승중(承重)하였으나, 사람됨이 용렬하고 잔약한데다가 무식(無識)해서 파산(破産)하여 유리(遊離)하였으므로, 사옥(祠屋)은 주인이 없어졌습니다. 바라건대,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후사를 세운 예에 의거하여 지손(支孫)을 가려서 봉사(奉祀)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允許)하였다.

 

10월 4일 임자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도성(都城) 밖에서 상소하여 사은(謝恩)하니, 액례(掖隷)를 보내어 손수 글을 써서 문병(問病)하고,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렸다.

 

10월 5일 계축

지춘추(知春秋) 김동필(金東弼)·봉교(奉敎) 김한철(金漢喆)이 《경종실록(景宗實錄)》과 《선조보감(宣祖寶鑑)》·《숙종보감(肅宗寶鑑)》을 봉화(奉化)의 태백산(太白山)에 봉안(奉安)하였다.

 

한성 판윤(漢城判尹) 장붕익(張鵬翼)이 상소(上疏)하여 조석명(趙錫命)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병서(兵書)에 이르기를, ‘적(敵)이 행영(行營)의 측면이나 앞뒤에서 돌출(突出)하면, 파총(把摠)·초관(哨官)이 스스로 호령(號令)을 주장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행영이라는 것은 행군(行軍)하는 진영(陣營)이고, 돌출이라는 것은 불의(不意)에 나타난 적이며, 파총·초관이 스스로 호령을 주장한다는 것은, 뜻하지 않게 돌출하는 형세는 지극히 급박한 까닭에 당부(當部)의 장관(將官)이 주장에게 미처 품고(稟告)할 겨를이 없으므로 스스로 호령을 주장하여 거느리고 있는 군사로 하여금 즉시 이를 방어하게 하는 것입니다. 친림(親臨)하신 강무(講武)가 얼마나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까? 그런데 다른 진영의 군사가 갑자기 말을 달려 돌입(突入)하면, 어가(御駕)를 호휘하던 장수와 군사가 들어오도록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미처 신에게 품령(稟令)하지 않았던 것은 사세(事勢)가 그러하였으니, 곧 병서에 이른바, ‘스스로 호령을 주장한다.’는 뜻입니다. 방포(放砲)하여 추격(追擊)하는 것 또한 까닭이 있습니다. 뒤쫓아 들어온 군사가 비록 다른 진영의 군사라 하더라도 대오(隊伍)를 정비하여 천천히 나아가다가 상명(上命)을 선포하면 어가의 미국(尾局)534)  을 호위할 것이며, 비록 혹 전례에 의거하여 차단한다 하더라도 곧 신에게 보고해야 마땅하고, 신은 또 어가 앞에 상품(上稟)하여 삼가 신전(信箭)535)  을 받은 후에야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어가 뒤에서 겨우 차단을 당하자 원진(原陣)의 금군(禁軍)이 일시에 충돌(衝突)하였는데, 저들이 먼저 고함을 지르며 곤봉을 휘둘렀으므로, 이곳에서도 또한 방포하여 차단했던 것입니다. 이는 저들이 장차 진영에 돌입하려 함에 있어서 이쪽은 응변(應變)한 군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이 그때 급히 방진(方陣)을 청했던 것은 대개 급급히 진을 이루어 엄정하고도 신밀하게 어가를 호위하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때의 일은 이미 알고 있다고 비답하였다.

 

수찬(修撰) 김약로(金若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연중(筵中)의 이야기를 반포(頒布)하기를 청하여 전석(前席)에서 직접 진달(陳達)하고, 거듭 상소 가운데 논한 것은 지나친 염려와 망령된 계책으로서, 전하의 거조(擧措)가 구간(苟簡)함을 염려하고 전하께서 엄정하게 처분(處分)하시도록 권면한 데 지나지 않으며, 일찍이 그 사이에 사사로운 이해(利害)에 얽매이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날 연중(筵中)의 이야기는 비밀스럽게 숨기고 지극히 엄중하셨는데, 추후에 반하(頒下)한 손수 쓰신 하교(下敎)에도 또한 기꺼이 밝게 말하고 드러나게 유시하지 않으신 채 다만, ‘여러 당(黨)에 모두 난역(亂逆)이 있다.’고 하셨으며, 그 이름을 감추고서 하신 말씀은 일대(一代)의 시비(是非)를 밝히고 만세(萬世)에 부월(斧鉞)을 드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이러한 청을 했던 것은 국가(國家)를 위하고 세도(世道)를 위해서였습니다. 신이 장차 어떠한 사람을 영호(營護)하고 어떠한 자리에 발명(發明)하겠습니까? 가령 신에게 협잡(挾雜)하는 뜻이 있었다면, 오로지 연중에서의 이야기가 혹 누설될까 두려워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여러 번 말하고 힘써 청하면서 그칠 줄 모르겠습니까?"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지난 일을 무엇 때문에 혐의롭게 여기는가?"
하였다.

 

정언(正言) 윤급(尹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지난날의 재이(災異)가 어찌 지극히 비상(非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거조가 과연 천심(天心)에 합당하였다면, 재이의 발생이 어찌 이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날 오전(午前)에는 하늘이 청명(淸明)해서 비가 올 조짐이 없었습니다. 만약 강을 건너 천천히 몰아서 곧바로 성궐(城闕)로 향했더라면, 또한 먼저 대내(大內)에 돌아올 수 있었으니 황급히 서두르는 구차한 근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필(駐蹕)하여 관병(觀兵)하는 즈음에 세찬 바람에 돌이 날리고 동이로 퍼붓듯 하는 소나기에 군사들이 혼잡하여 어지러웠고, 반행(班行)이 북적거리며 어수선한 가운데 어교(御轎)가 황급히 회란(回鑾)536)  하였는데, 번쩍거리며 번개가 치고 우르르 쿵쾅 천둥이 울리다가, 악차(幄次)에서 멀리 않은 곳에서 여러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아! 매우 두려워할 만합니다. 이러한 재이(災異)는 심상한 데에 견줄 바가 아니었으니, 환궁(還宮)하신 초기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셔서 하늘을 공경하고 재이를 두려워하여 죄(罪)를 자신에게 돌리며 스스로 책망하시는 뜻을 보이시고, 신하들에게 도움을 구하신 후에야 사체(事體)에 합당할 것인데, 귀를 기울인 지 여러 날이 되도록 들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러한 일들을 문구(文具)로 보셔서 할 것이 못된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삼가 듣건대, 여가(輿駕)에서 내리시자마자 곧 명일(明日)에 주강(晝講)을 행하겠다는 명이 있었으니, 한제(漢帝)가 전쟁을 그치고 도(道)를 강론한 데에 비교하여 훨씬 우월(優越)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振作)시켜서 위로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뜻을 만족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법연(法筵)은 문의(文義)를 강설(講說)하는 데 지나지 않았고, 마침내 달리 공경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으며, 전하께서 부지런히 하신 것은 단지 번문(繁文)과 말절(末節)이었으니, 그 하늘에 응종(應從)하는 도리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무릇 학문(學問)하는 도리는 오로지 실천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가 될 것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또 한 가지 일로써 성학(聖學)의 깊고 얕음을 분변(分辨)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 성왕(聖王)이 애써 분별하는 바란 ‘음양(陰陽)·흑백(黑白)’에 달려 있다는 그 말이 모두 경전(經傳)에 보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이 네 개의 글자를 듣기 싫어하셔서 문득 미안(未安)한 전교(傳敎)를 내리시고, 또한 따라서 죄벌(罪罰)을 또 주시니, 그 전해진 폐단은 어둡고 게으른 것을 노성(老成)하다고 지목하며 음순하고 부드러운 것을 충후(忠厚)하다고 인정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직기(直氣)가 완전히 소멸되어서 가언(嘉言)을 듣지 못하니, 이는 전하께서 평일에 강론(講論)하시던 것과 매우 상반(相反)되는 듯합니다. 또 왕언(王言)의 체모(體貌)는 오로지 존엄하고 간중(簡重)함을 위주로 삼아 대개 장차 팔방(八方)에 파고(播告)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 보이고, 사책(史冊)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데도 전하께서는 사령(辭令)의 사이에 거의 한계와 절도가 없으니, 무릇 인용하고 비유함에 있어서 합당한지 합당하지 못한지를 논할 것 없이 쉽사리 말씀하시며 걸핏하면 천백 마디에 이르고 있습니다. 포장(褒奬)하여 추켜올릴 때를 당해서는 칭찬과 자랑이 실제보다 더하고, 폄척(貶斥)하기에 미쳐서는 꾸짖어 책망하심이 중도에 지나칩니다. 화적(火賊)·도당(徒黨)의 지목을 가볍게 경악(經幄)의 관원에게 베푸시고, 시상(時象)의 가자(假子)라는 하교(下敎)를 차마 대각(臺閣)의 신하에게 더하시는데, 성인(聖人)의 모훈(謨訓)의 말씀이 이와 같음은 결단코 마땅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선 한결같이 화두(話頭)를 만들어 언자(言者)를 겸제(箝制)537)  하는 파병(欛柄)으로 삼으시는데, 알지 못하겠지만, 시상(時象) 두 글자를 어떤 경서(經書)에서 처음으로 보셨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위에서 이미 만들어 쓰시자, 아래에서 또 받들어 서술하여 이를 사륜(絲綸)538)  에 드러내고 장주(章奏)에 올려 겨우 한 마디라도 말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그 가운데에 몰아 넣으니, 대개 따로 방금(邦禁)을 세우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언자(言者)는 자연히 입을 열 수가 없습니다. 간혹 한둘의 직언(直言)을 한다고 알려진 신하가 있더라도 또한 시배(時輩)에 저촉(抵觸)되어 다른 사람의 뜻보다 조금 강한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니, 그 옛사람이 뇌정(雷霆)을 범하고 용린(龍鱗)539)  을 건드린 자에 비교하여 처질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너그럽게 용납하지 않으시어 크게는 천극(栫棘)을 더하고, 적어도 폐고(廢錮) 시키시니 만약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말하게 하면, 전하께서는 또한 반드시 그를 깊이 죄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도리를 인순(因循)하여 오늘날의 습속(習俗)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요순(堯舜)과 공주(孔周)540)  를 이야기하더라도 또한 한갓 말뿐이니,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면계(勉戒)한 일을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이른바 ‘음양·흑백’은 옛날의 이른바 음양·흑백이 아니니, 공변된 말이 아니고 사사로운 말이다."
하였다.

 

10월 6일 갑인

임자년541)                   식년(式年) 감시(監試)와 복시(覆試)542)                  를 출방(出榜)하여 생원(生員) 정실(鄭宲)와 진사(進士) 이종적(李宗迪) 등 각 1백 명을 뽑았다.

 

10월 7일 을묘

유성(流星)이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았으며, 꼬리의 길이가 3,4척이고, 빛깔이 붉었다.

 

10월 8일 병진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듣건대, 생원(生員)·진사(進士)의 관복(冠服)을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다고 하는데, 일찍이 현종조(顯宗朝)에서도 이 일을 널리 순문(詢問)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관제(冠制)가 분명하지 못한 까닭에 고(故) 판서(判書) 신(臣) 조복양(趙復陽)의 말로 인하여 그 의논이 정침(停寢)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후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관제(冠制)를 얻어 왔으나, 조정에서 인순(因循)하여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지금 과거(科擧)의 기일이 이미 임박하였으므로, 향곡(鄕曲)의 사람들이나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급한 시기에 조처해 준비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지금은 사세(事勢)가 미치지 못할 것이니, 전례에 의거하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기고, 후에 여러 유신(儒臣)들에게 널리 순문하여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10월 9일 정사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10월 10일 무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또 병(病)을 끌어대어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10월 11일 기미

밤에 무지개 같은 백기(白氣)가 손방(巽方)에서 일어나 간방(艮方)으로 구불구불 갔는데, 한참 지나 없어졌다.

 

남태경(南泰慶)을 집의(執義)로, 윤동원(尹東源)을 장령(掌令)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지평(持平)으로, 이재후(李載厚)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문신 전강(文臣殿講)을 시행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연해(沿海) 백성들의 참상(慘狀)을 논하기를,
"흥양(興陽) 한 고을은 원호(元戶)가 4만 명이었는데 죽은 사람이 2만여 명이니, 비록 임진년543)  과 병자년544)  의 병화(兵禍)가 참혹했었다 하나, 이보다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밖에 여섯 고을에서도 닭과 개가 모두 멸종(滅種)되었습니다. 청컨대, 일곱 고을의 옛 포흠(逋欠)을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소서. 전(前) 현감(縣監) 서종진(徐宗鎭)·권상직(權相稷)은 구제하여 살릴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죽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으니, 그 곳에서 효수(梟首)하여 많은 사람의 영혼에게 사죄(謝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0월 12일 경신

어용(御容)의 모본(模本)이 완성되었다. 하교(下敎)하기를,
"옛날의 은사(恩賜)는 감히 민멸(泯滅)할 수가 없다. 이제 어복(御服)을 바꾸었으므로 영자(影子)를 중수(重修)하여 도본(圖本)이 완성되었으니, 을해년545)                  의 예에 의거하여 화원(畫員) 박태진(朴泰晉)을 가자(加資)하고, 동참한 화원들에게 동반(東班)·서반(西班)의 관직을 제수(除授)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숙종(肅宗)이 두 왕자(王子)의 상(像)을 그리도록 명하고 각각 반사(頒賜)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어복(御服)을 고쳐 그렸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사신은 말한다. "삼가 상고하건대, 오직 명기(名器)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빌릴 수가 없는데, 이에 어용을 모사(模寫)한 노고 때문에 갑자기 비천한 무리에게 외람된 작상(爵賞)을 더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상(賞)을 신중히 하는 도리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8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예술-미술(美術)


[註 545]          을해년 : 1695 숙종 21년.
사신은 말한다. "삼가 상고하건대, 오직 명기(名器)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빌릴 수가 없는데, 이에 어용을 모사(模寫)한 노고 때문에 갑자기 비천한 무리에게 외람된 작상(爵賞)을 더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상(賞)을 신중히 하는 도리이겠는가?"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성묘(省墓)한다면서 휴가를 청하자,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이부(嫠婦)의 칠실지우(漆室之憂)546)  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은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고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달마다 이렇게 발생하니, 신은 지극히 근심스럽고도 두려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남해(南海)의 여러 섬에는 대부분 죄를 범하여 유배(流配)된 무리와 주인을 피해 숨어 있는 무리로서, 인심이 완악하고 사나워서 법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근래에 폐족(廢族) 및 연좌(緣坐)된 자들이 섬 가운데에 많이 살고 있어 진실로 작은 근심이 아니니, 남중(南中)에서의 괘서(掛書)의 변(變)도 또한 반드시 이 무리에게 연유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풍릉군(豐陵君) 조문명(趙文命)이 힘써 고을을 설치하자는 의논을 주장했었는데, 조정 의논이 나뉘어짐으로 인하여 중도에 정지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다시 도신(道臣)에게 물어서 속히 상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갑자기 설치할 것 같으면, 쉽사리 인심을 경동(驚動)하게 될 것이다. 경이 바야흐로 묘당(廟堂)에 있으니, 조용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10월 13일 신유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또 차자(箚子)를 올려 병들었다고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 돈유(敦諭)하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간병(看病)하게 하였다.

 

10월 14일 임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상소하여 재해(災害)가 더욱 심한 일곱 고을은 세금을 견감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자,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른바 옛 포흠(逋欠)이란 임자년547)   연조(年條)의 전세(田稅)인데, 금년에 반드시 이미 받아들인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특별히 혜정(惠政)을 행하고자 한다면, 곧바로 계축년548)  의 연조를 가지고 시행하도록 허락하여야 백성들이 반드시 혜택을 알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소어(疏語)에 흥양(興陽) 등지(等地)에서 닭과 개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호남(湖南)의 연해(沿海)가 더욱 참혹하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곧 임자년의 연조이니 특별히 탕감하도록 허락하고, 아울러 일곱 고을의 대동세(大同稅)를 견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송 인명이 또 말하기를,
"지부(地部)549)  의 은화(銀貨)가 이미 바닥이 나서 혹 칙사(勅使)의 행차나 뜻밖의 큰 일이 있을 경우 계책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관서(關西)의 천류고(泉流庫)는 호조에 속한 곧 외방의 창고입니다. 이제 해마다 가을에 은(銀) 1만 냥을 한정해서 받아들여 만들고, 회록(會錄)550)  하여 지부에 보고해서 뜻하지 않는 수용(需用)에 대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들에게 묻도록 하였는데, 모두 적절하다고 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때 영남(嶺南)의 유생(儒生)으로서 상소하여 민폐(民弊)를 아뢴 자가 있었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이것은 향유(鄕儒)가 과거(科擧)로 인하여 진소(陳疏)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재(田災)와 적포(糴逋)는 이미 도신(道臣)의 장청(狀請)에 대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군정(軍丁)을 다른 고을에 이송(移送)하는 일은 도신에게 엄중하게 신칙(申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유생으로서 민막(民瘼)을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 유생은 소를 올려 진달하였으니 채납(採納)하지 않을 수 없다. 군정의 일은 도신으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이재후(李載厚)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날 성상께서 야차(野次)에서 열무(閱武)하셨을 때 진중(陳中)의 대오(隊伍)가 뒤섞여 어지러웠던 것은 성상의 암령(暗令)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데, 차단하고 추격하며 포(砲)와 화살을 잇따라 쏘는 등 어가(御駕)의 지척(咫尺)에서 거조(擧措)가 해이(駭異)하였으니, 듣는 자로서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아! 훈국(訓局) 친병(親兵)의 장이 얼마나 중대한 직임(職任)인데, 평상시 무사(無事)한 때에 이와 같이 뒤집히고 어긋났으니, 다른 날의 완급(緩急)에 어떻게 믿어 소중하게 여기겠습니까? 물론(物論)이 그치지 않자, 상소(上疏)하여 스스로 변명하였으니, 더욱 장신(將臣)으로서 삼가고 경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은 파직(罷職)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비답(批答)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5일 계해

월식(月食)하였다.

 

조명택(趙明澤)을 부응교(副應敎)로, 오원(吳瑗)을 수찬(修撰)으로, 심성희(沈聖希)를 헌납(獻納)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집의(執義)로, 최명상(崔命相)을 사간(司諫)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정언(正言)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지평(持平)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부교리(副校理)로, 여광헌(呂光憲)을 장령(掌令)으로, 홍호인(洪好人)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16일 갑자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절작통평(節酌通編)》의 문의(文義)를 강하기를 마치자, 참찬관(參贊官) 한덕전(韓德全)이 말하기를,
"신이 향리(鄕里)에 있으면서 듣건대, 신료(臣僚)들의 장주(章奏) 사이에 매번 군덕(君德)을 찬송하는 것으로써 장황하게 말한다고 하니 개연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인신(人臣)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은 본디 도리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禹)가 순(舜)임금에게 경계하기를, ‘단주(丹朱)551)  처럼 오만하지 마십시오.’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인신으로서 임금에게 고(告)하는 정법(正法)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참으로 도덕을 갖추셨다면, 군하(群下)의 찬송이 진실로 가중(加重)한 바가 없을 것이나, 만약 털끝만큼이나마 미진함이 있는데도 지나치게 거짓 아첨한다면 이는 눈앞에서 속이는 것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장주(章奏) 사이에 ‘성(聖)’자를 못쓰게 하였으니, 이 뜻이 매우 좋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근세(近世)에 제향(祭享)의 축문(祝文)에 모두 피인(彼人)의 연호(年號)를 쓰고 있습니다. 대저 공자(孔子)의 사업으로는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격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조(聖祖)께서도 이 뜻을 잊지 않으시고 매번 원통함을 품은 채 고통을 참는다고 하교(下敎)하셨는데, 부득이 지금 그 연호를 쓰고 있지마는 어찌 《춘추(春秋)》의 뜻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또 상고(上古)에서는 무릇 축문을 고할 때 단지 연월(年月)과 간지(干支)만 썼었습니다. 신은 태묘(太廟)와 문묘(文廟)의 축문에 마땅히 피인(彼人)의 연호를 쓰지 말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도 유소(儒疏)가 있었으나 따르지 않았는데, 승지(承旨)가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여 이를 말하였으니, 진실로 경솔하다."
하였다.

 

10월 17일 을축

조명익(趙明翼)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서종섭(徐宗燮)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응교(副應敎)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執義)로, 남태경(南泰慶)을 사간(司諫)으로, 신만(申晩)을 헌납(獻納)으로, 이선행(李善行)·이이제(李以濟)를 장령(掌令)으로, 김상익(金尙翼)·남태제(南泰齊)를 지평(持平)으로, 조진세(趙鎭世)를 정언(正言)으로, 이보혁(李普赫)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송진명(宋眞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10월 18일 병인

민응수(閔應洙)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윤양래(尹陽來)를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진순(李眞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윤급(尹汲)을 헌납(獻納)으로, 이흡(李潝)을 응교(應敎)로, 송징계(宋徵啓)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을 읽다가, ‘임금이 죽고 세자(世子)가 탄생하였다.’는 데 이르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내지 못하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처연(凄然)해 하지 않는 이가 없다. 지사(知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옥음(玉音)을 가리며 울먹였다고 하니 신 등은 위로할 바가 없습니다. 《소학(小學)》에 이르기를, ‘차마 아버지의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손때가 남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갓 슬픔만 더할 뿐이요 이로울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편을 정지하소서."
하였는데, 이금이 말하기를,
"이를 읽다 보니, 자연히 상심(傷心)이 되었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유최기(兪最基)가 말하기를,
"왕부(王裒)가 차마 육아(蓼莪)의 시(詩)를 읽지 못하자, 문인(門人)들이 그 장(章)을 폐(廢)하였습니다. 이 편(篇)을 강(講)하지 않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명일(明日)에 하편(下篇)을 계속해서 강하도록 하였다.

 

10월 18일 병인

소대(召對)를 행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집안 대대로 무예(武藝)를 업(業)으로 삼으라는 하교(下敎)가 진실로 좋다."
하자, 시독관(侍讀官) 유최기(兪最基)가 말하기를,
"하교에서 비록 무예를 업으로 삼으라고 하였으나, 진실로 우리 태종(太宗)만큼 문학(文學)을 좋아하신 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세종(世宗)께서 문명(文明)의 치화(治化)를 열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성인(聖人)께서 스스로 겸손하신 뜻입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한덕전(韓德全)이 말하기를,
"태종(太宗)께서 등제(登第)하시던 날 태조(太祖)께서는 대궐 뜰에서 사은(謝恩)하시고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태종께서 전조(前朝)의 제학(提學)이 되시자, 태조께서는 매우 기뻐하셔서 방인(傍人)으로 하여금 관교(官敎)를 서너 차례 읽게 하셨습니다. 태조께서 이와 같이 문학을 사랑하셨으므로, 마침내 3백 년 휴명(休明)의 치화(治化)를 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참위(讖緯)552)  의 말을 나는 매우 그르게 여기는데, 지금 조선(祖先)의 보감(寶鑑)을 강하다 보니, 척연(惕然)함을 깨닫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호남(湖南)의 풍속(風俗)이 가장 잡술(雜術)을 숭상한다고 하는데, 지난해 송하(宋河)의 요술(妖術)과 근래에 태진(太眞)의 참서(讖書)에서 그 폐해(弊害)를 볼 수 있다. 더욱이 감여(堪輿)553)  의 말도 또한 허황됨이 많은 것이다. 금년처럼 잇따라 흉년이 들어서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못한 때에는 진실로 정도(正道)를 깨달아 알게 함만 못하니, 엄중하게 참위(讖緯)를 금해야 할 것이다. 그대 도신(道臣)들은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소민(小民)에게 효유(曉諭)하게 하고, 그 나머지 참위와 음양(陰陽)의 책들은 서운관(書雲觀)에서 반행(頒行)한 것이 아니면, 드러나는 대로 불에 던져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경(邪徑)을 버리고 정도(正道)로 나아가도록 호남 도신에게 하유(下諭)하라."
하고, 파할 즈음에 임금이 소환(小宦)으로 하여금 물고기와 과일을 옥당(玉堂)·한림(翰林)에게 나누어 주게 하면서 말하기를,
"듣건대, 그대들에게 늙은 어버이가 있다고 하므로 이를 내려 주니, 돌아가서 공궤하도록 하라. 옛날에 태종(太宗)께서 감귤을 시신(侍臣)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 제릉(齊陵)554)  에 봉양(奉養)을 다하지 못했던 것을 한스럽게 여기셨는데, 내가 오늘날 이와 똑같이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고, 옥색(玉色)에 오랫동안 슬퍼하는 빛이 있었다.

 

10월 19일 정묘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이광덕(李匡德)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연달아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비로소 출사(出仕)하였는데,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유시(諭示)하기를,
"내가 황구(黃耉)에게 위임하는 뜻을 본받아 편안히 논도(論道)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1일 기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을 읽다가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증자문편(曾子問篇)을 읽다가 이를 정지하고 지금 이 편을 강하고 있는데, 옛날에 자로(子路)가 초(楚)나라 재상이 되어 곧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집이 가난하므로 어버이를 위하여 백리 길에 쌀을 짊어져 온 일이 있었는데,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이런 일을 다시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바야흐로 동조(東朝)555)  를 모시고 있으면서 스스로 슬퍼 애모(愛慕)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이 편은 대개 문왕(文王)이 세자(世子)의 도리를 다한 것을 기록하였는데, 무왕(武王)이 계술(繼述)하였으니, 이것이 달효(達孝)가 되는 것입니다. 증자문편의 강독(講讀)을 정지하라는 금일의 하교(下敎)에서 타고나신 성효(聖孝)를 우러러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미루어 선왕(先王)께서 전해주신 근고(勤苦)한 업적을 생각하고 계술하는 도리를 다한다면, 더욱 달효(達孝)가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칭선(稱善)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10월 22일 경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때 재자관(䝴咨官)의 수본(手本)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넘어가서 저들의 경계를 범하여 붙잡혔습니다."
하였는데, 지사(知事)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강변은 간사한 백성이 포도(逋逃)하는 소굴이 되었습니다. 대개 인삼(人蔘)이 폐사군(廢四郡)556)  에서 많이 생산되므로, 피인(彼人)과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 땅에서 채취(採取)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를 당하면 피인이 표문(票文) 2천여 장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오는데, 애초에 양식을 가지고 오지 않고 경화(輕貨)를 가지고 우리 나라 사람과 곡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피인과 우리에게 큰 이익이 되므로, 끝내 금단(禁斷)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이 회자(回咨)는 청(淸)나라 상서(尙書) 삼태(三泰)가 뇌물을 받고 주선하였으나, 한 상서(漢尙書) 오양(吳襄)은 말하기를, ‘일종의 완악(頑惡)한 백성들이 왕법(王法)을 준수하지 않으므로, 전후에 이미 나포(拿捕)하라는 황지(皇旨)가 있었는데, 어떻게 준행(遵行)하지 않겠는가?’ 하였고, 시랑(侍郞) 임지란(任芝蘭)은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자문(咨文)에 14인이 국경을 넘어왔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목도(目睹)한 것인데, 어두운 밤에 급작스러운 데로 돌렸으니 요(要)는 변금(邊禁)이 엄중하지 못함을 숨기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이치가 있다. 이 두 사람이 만약 듣는다면, 트집을 잡아 말썽을 일으킬 단서(端緖)가 없을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한현모(韓顯謨)를 응교(應敎)로, 조한위(趙漢緯)를 부응교(副應敎)로, 박필재(朴弼載)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0월 23일 신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하다가, ‘한 사람의 원량(元良)’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임금이 훌쩍거리고 울며 말하기를,
"이 원량(元良)이라는 글을 보고 국본(國本)을 돌이켜 보며 지난 일을 생각하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슬픈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묵묵히 말이 없었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10월 25일 계유

경주 역리(慶州驛吏) 박상희(朴尙希)의 딸 초랑(楚娘)은 나이가 19세인데, 초랑이 그 어미와 더불어 산전(山田)에 갔다가 그 어미가 호랑이에게 물리자, 초랑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지난날에는 우리 형(兄)이 호랑이에게 물렸는데, 이제 또 우리 어머니를 무니, 차라리 내가 함께 죽고 말겠다.’ 하고, 왼손으로 그 어미를 안고 오른손에 낫을 잡고 휘둘러 그 어미의 시신(屍身)을 빼앗았다. 수신(帥臣)이 이를 장문(狀聞)하니, 임금이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10월 27일 을해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서 나왔는데, 모양이 바리때 같았다.

 

10월 27일 을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명겸(趙明謙)이 말하기를,
"이양신(李亮臣)이 중신(重臣) 송인명(宋寅明)과 더불어 소하(疏下) 오적(五賊)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입시(入侍)하여 계달(啓達)한 바는 대개 숨김 없는 정성에서 나왔으며, 지친(至親)의 음사(陰私)를 들추어 내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기유년557)  에 주달(奏達)했던 것도 또한 간절한 마음에서 나왔으나, 말이 그 의견(意見)을 조리(條理) 있게 밝히지 못하여 성명(聖明)의 아래에 저지당했던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양신이 처음에는 송인명이 동궁(東宮)을 저버렸다고 하였다가, 후에는 공로(功勞)가 있다고 하였으니, 전후의 말이 어찌 어긋나지 않았는가?"
하였다. 지사(知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양신이 저번에 진달(陳達)한 것은 곧 신과 평일에 수작(酬酌)했던 말들입니다. 전하께서 전후에 혹은 헐뜯고 혹은 찬양했다고 이양신을 의심하시니, 지극히 억울합니다. 신은 그 본정(本情)을 환히 알고 있었지만 신의 지친(至親)이 되므로, 단지 아픔을 숨기고 있다가 이제 언단(言端)으로 인하여 감히 진달(陳達)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며, 조명겸이 말하기를,
"이양신은 사람됨이 어질다고 한다면 옳겠지만 소인(小人)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정이 아니며, 폐고(廢錮)된 지 이미 5년이 되었습니다."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그 아비 이희조(李喜朝)가 남쪽에 찬배(竄配)되었다가, 북쪽으로 귀양가서 마침내 길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양신은 슬픈 감상(感傷)이 뼈에 사무쳐 혹 격렬한 바가 있으나, 의견은 준론(峻論)이 아닙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호판(戶判)의 말을 듣건대, 대체(大體)는 그렇지만 논의(論議)가 있어 온 이래로 같은 집안 안에서 무기를 들고 서로 다투어 왔다. 내가 이양신을 치우치게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조관빈(趙觀彬)의 일을 가지고 말하면, 그 고통스럽고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은 사정(私情)에 있어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임 사화(辛壬士禍)558)  의 일을 매번 그 당시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으나 그 결말은 군상(君上)에게 있으니, 분의(分義)로 헤아려 보건대, 어떻게 오늘날에 입 밖에 낼수 있겠는가? 진실로 경종조(景宗朝)에 억울함을 하소연했다면 가(可)하겠지만, 오늘날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은 크게 불가(不可)한 것이다. 회맹제(會盟祭)559)   때 경은 봉혈(奉血)하지 않았는가? 나는 숟가락으로 삽혈(歃血)560)  하였으나 회맹(會盟)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경묘(景廟)를 따라서 갔었는데, 경은 그래도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이양신의 처지는 진실로 조관빈·이희조를 당시에 찬적(竄謫)했던 것도 또한 각박하다고 하였는데, 이양신이 어떻게 준론(峻論)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 양신으로 하여금 옛 마음을 통렬히 버리게 한다면, 비록 개석(開釋)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풀릴 것이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신이 작년에 북경(北京)에 갔을 때 듣건대, 통관(通官)의 무리가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개시(開市)를 너희 나라에서 혁파(革罷)하고자 한다면 대국(大國)에서도 마땅히 이를 혁파할 것이다. 대개 개시에서 농기(農器)와 소금을 무역하였는데, 지금 영고탑(寧古塔)에서 그릇을 주조(鑄造)하고 소금도 굽고 있으니, 호시(互市)는 매우 긴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제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었을 때 듣건대, 개시의 폐해가 한없이 많아서 육진(六鎭)의 백성이 모두 매우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함경도(咸鏡道)는 온 도가 고루 그 폐해를 받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개시(開市)를 혁파(革罷)한다면, 북민(北民)이 지탱하여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합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에 하문(下問)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개시의 폐단은 나도 또한 이를 알고 있다. 지금 김시유(金是瑜)의 수본(手本)에도 개시를 혁파하려면 혁파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시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또 이두(利竇)561)  가 되면 지금 비록 혁파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폐단이 생길 것이니, 옛날 그대로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연신(筵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에게 그 편부(便否)를 물으니, 송진명이 말하기를,
"회령(會寧)의 개시는 북관(北關)의 물화(物貨)가 전부 이곳에 나오므로 이익이 진실로 크지만, 경원(慶源)의 개시에 이르러서는 육진(六鎭)에서 낭비하는 것이 매우 많아서 백성들이 이를 고통스러워 한다고 합니다."
하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말하기를,
"두 나라 사이에 어떻게 호시(互市)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한 역관이 신에게 와서 말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개시를 혁파한다면 이익이 역관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물러갔습니다. 이는 바로 역관의 무리가 간계(奸計)를 쓰는 소치이니, 피인(彼人)이 비록 혁파할 것을 청한다 하더라도 결단코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10월 28일 병자

유성(流星)이 천원성(天苑星) 아래에서 나왔다.

 

대신(大臣)이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거느리고 구대(求對)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지금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이르기를, ‘고산리(高山里)의 병방 군관(兵房軍官)        김창온(金昌溫)과 영장(領將) 등이 삼(蔘)을 캐는 사람 20여 인을 거느리고 조총(鳥銃)을 가지고 피인(彼人)의 지경에 들어가서 피인이 캔 삼을 약탈했습니다.’ 하였으니, 이 일은 재자관(䝴咨官)의 수본(手本) 가운데에 사람을 죽이고 삼을 빼앗았다는 일과 서로 부합(符合)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반드시 사사(査使)가 있을 건인데, 지금 절사(節使)의 행차 편에 조사하여 다스리겠다고 먼저 이자(移咨)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심수현이 말하기를,
"급히 조사한 후에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유신(儒臣) 이철보(李喆輔)를 안핵 어사(按覈御史)로 삼아 달려가서 조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비국 당상(備局堂上)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이 일찍이 영남인(嶺南人) 성이홍(成爾鴻)·김성탁(金聖鐸)·이만(李槾) 등을 천거하자, 권하여 올려 보내라는 하교(下敎)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성이홍은 시론(時論)에 가깝기 때문에 도정(都政)562)                   때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그 나머지는 마침내 검의(檢擬)563)                   하지도 않았으니, 이미 지극히 고르지 못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성이홍이 어제 사은 숙배(謝恩肅拜)하기 위해 나왔으나 후원(喉院)에서 계품(啓稟)하지 아니하여 인접(引接)받지 못하고 밖에서 물러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권가(勸駕)564)                  하는 뜻이겠습니까? 신은 적이 개연(慨然)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자리 오른쪽에 써 놓은 전교(傳敎)가 있었으나, 근래에 정신이 전과 같지 않아서 깨달아 살피지 못하였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마땅히 뉘우쳐 깨달았다는 뜻을 보이시고, 도신(道臣)에게 하유(下諭)하여 곧 다시 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박사수(朴師洙)는 면(面)·리(里)를 분등(分等)한 일로써 추고(推考)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신이 그 절목(節目)을 가져다 보았더니, 정신을 기울여 마음을 쓴 바가 지극히 상밀(詳密)하였습니다. 대개 한전(旱田)에는 원래 급재(給災)565)                  하는 규례가 없는데, 산골에 있는 고을에는 전혀 수전(水田)이 없으므로, 비록 혹독한 재해(災害)를 입는 다 하더라도 혜택을 베풀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전재(田災)에 대해 헤아려 급재하자는 청(請)이 있었는데, 이미 정밀하게 구별하였고 상정미(詳定米)566)                  는 대동미(大同米)와 다름이 있으니, 허락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심수현이 또 아뢰기를,
"낙안 군수(樂安郡守)        이만유(李萬囿)와 광양 현감(光陽縣監)        박동형(朴東亨)은 모두 전세(田稅)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여 나치(拏致)되었습니다. 법은 결장(決杖)해야 마땅한데, 비록 미천하다고 하지만 이들은 친공신(親功臣)567)                  이니, 의공(議功)568)                  의 도리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문서(文書)를 뒤섞어 내린 소치이다. 기린각(麒麟閣)에 그려진 자를 어떻게 결장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친공신은 장형(杖刑)을 면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남태제(南泰齊)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산 부사(理山府使)        우하형(禹夏亨)은 강 건너 청인(淸人)이 땔나무를 채취하여 혼자 가는 사람을 붙잡아 가지고 범월(犯越)하였다 위협하고 공갈하니, 우하형은 사단(事端)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보문(報聞)하지 않은 채 쌀 10두(斗)를 사사롭게 속바치고 돌아 왔습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뒷날의 폐단이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윤허(允許)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