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6권, 영조 9년 1733년 12월

싸라리리 2025. 9. 1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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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무신

임금이 초복(初覆)585)  을 행하였다. 상주(尙州)의 유학(幼學) 정도신(鄭道信)이란 자가 있었는데, 신해년586)  과 임자년587)  의 흉년을 당하여 온 집안 신구가 여러 날 먹지 못하고 있었다. 노모(老母)가 굶주림이 심하여 장차 죽게 되자 정도신이 통박(痛迫)함을 금하지 못한 나머지 인문(印文)처럼 벌레 먹은 소나무 껍질을 가져다 관첩(官帖)을 위조하여 창리(倉吏)에게 거짓으로 고하고 조곡(糶穀)588)  을 받아다 그 어미를 구하여 죽지 않게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자복(自服)하고 옥에 갖혔다. 임금이 그 문안을 살펴보고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용서함이 가합니다."
하였는데, 좌윤(左尹) 박내정(朴乃貞)과 정언(正言) 조명겸(趙明謙)은 법을 굽힐 수 없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를 이어 든 흉년과 굶주림에 백성들이 상성(常性)을 잃었다. 법으로는 비록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나 정실(情實)이 불쌍하니, 특별히 죽음을 용서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죄수가 많다 하여 이틀 동안 나누어 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예(例)가 있는가?"
하자, 심수현이 말하기를,
"예가 있고 없고를 논할 것 없이 만약 야심(夜深)한 때가 되면 다만 성궁(聖躬)이 피곤할 뿐만 아니라 대충대충 일을 마무리지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는 매번 계복(啓覆)589)   때가 되면 ‘아무 죄수는 살릴 만하다.’고 하교하셨으니, 흠휼(欽恤)의 뜻을 상상할 수 있다. 이번의 계복(啓覆)에는 살릴 만한 자가 매우 적으니 마땅히 신중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영상(領相)의 염려가 옳으니, 오늘은 그만 파(罷)하고 내일 다시 모이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박사수(朴師洙)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죽은 자는 다시 살 수 없고 형(刑)을 받은 자는 다시 속(屬)할 수 없으니 신중히 살펴야 할 것이 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卿)이 도임(到任)한 뒤에 의옥(疑獄)을 조사하여 그 실정을 명쾌하게 해결하였고 다른 문안(文案)도 또한 상세히 갖추어진 것이 많았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내가 면려(勉勵)할 것이 있으니, 한 사람의 총명은 한계가 있고 지혜로운 자의 사려에도 실수가 있는 것이다. 이번의 박운득(朴云得) 등의 초사(招辭)가 이처럼 분명한데도 혹시 상세함을 믿고 자기의 뜻을 편벽되게 주장한다면 고증(考證)할 만한 문안을 받들어 시행함이 박운득을 위하는 것임을 어찌 모르는가? 또 외방(外方)의 동추(同推)590)  는 소홀함이 지극히 많다. 경의 날카로운 생각으로 직접 신문한 것이 비록 칙려(飭勵)의 도(道)를 얻었다고 하겠으나, 동추·고복(考覆)591)  은 법전(法典)에 있는 바이니, 직접 신문할 때에 승관(承款)했다 하여 곧장 고복을 행하여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면, 비록 명쾌할 것 같지만 금석(金石)의 법전(法典)을 훼손시키고 훗날의 폐단의 근원을 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경에게서 장점을 취하고 경의 단점을 경계하는 바이니 경은 모름지기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박문수(朴文秀)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용경(金龍慶)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상경(趙尙綗)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이재(李縡)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조최수(趙最壽)를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조명익(趙明翼)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송진명(宋眞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최명상(崔命相)을 사간(司諫)으로, 홍창한(洪昌漢)·신사영(申思永)을 지평(持平)으로, 이석표(李奭杓)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2월 2일 기유

이어서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전(前前)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을 불러 문형(文衡)을 의천(議薦)케 하였다.

 

12월 3일 경술

소대(召對)를 행하여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講)하였다. 참찬관(參贊官)        홍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어떠한 명상(名相)입니까? 그런데도 전장(田莊)을 점취(占取)한 일로써 탄핵(彈劾)받는 데 이르렀으니, 그때 대각(臺閣)의 풍채(風采)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니, 검토관(檢討官)        윤득화(尹得和)가 말하기를,
"근래 대각은 관사(官師)가 서로 규계(規戒)하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궁방(宮房)의 절수(折受)에 이르러서는 그래도 간혹 말하지만, 일이 낭묘(廊廟)에 관계되면 감히 입을 열지 못하니, 진실로 개연(慨然)하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홍경보가 말하기를,
"오늘날 탕평(蕩平)의 정책은 전혀 효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폐단 또한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은 말하기를,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것은 대중지정(大中至正)한 영역으로 돌아가는 데 힘쓰는 것이니, 이는 황극(皇極)의 도(道)입니다. 어찌 구차하고 미봉(彌縫)한 것을 ‘탕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경보는 말하기를,
"전하의 탕평은 거의 왕도(王道)에 마음을 두면서 패도(霸道)를 따른다고 할 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극(皇極)·대중(大中)의 도(道)를 나는 진실로 능히 못하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19일에 하교(下敎)한 것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부끄러운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홍경보가 이어 말하기를,
"고(故) 정언(正言)        정광은(鄭光殷)은 처음에 그 아비를 잃고 그 어미와 함께 강촌(江村)에 살았는데, 어미가 여질(癘疾)을 앓아 점점 위독해지자 정광은이 두번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넣어 수십 일 동안 생명을 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하지 못하기에 미치자 정광은 자신도 있따라 병이 들었고 손가락의 상처 또한 위험하게 되었으나, 억지로 먹어가며 스스로 기운을 차려 송종(送終)의 예(禮)를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막 성복(成服)하자 크게 부르짖으며 절명하니 효(孝)에 죽었다고 말할 만합니다. 일찍이 시종(侍從)을 거친 자의 효행이 이러하니 마땅히 포상(褒賞)의 은전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탄복하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예(例)에 따라 정표(旌表)하게 하였다.

 

임금이 세조(世祖)가 형관(刑官)에게 칙유(飭諭)한 글을 보고 탄식하기를,
"하교(下敎)가 지극히 착하고 곡진하셨으니, 내가 감히 계술(繼述)하지 않겠는가? 그대 승선(承宣)은 이 교서를 써서 새겨 본조(本曹)의 벽 위에 걸어 두고, 인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 감옥이 만약 깨끗이 청소되지 않았거나, 죄수 중에 혹 추위에 얼고 굶주린 자가 있으면 자세히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제 문의(文義)로 인해 더욱 느끼는 바가 있다. ‘아! 사람을 해치고 손상시키는 것은 주색(酒色)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술에 의한 해(害)는 더욱 심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성조(聖朝)에서 옛날 사첩(史牒)의 감계(鑑戒)를 들어 신서(臣庶)에게 정성스레 훈계한 것이다. 이 해가 장차 끝나려 하니, 새 봄이 멀지 않다. 유사(有司)의 신하로 하여금 중외(中外)에 엄칙(嚴飭)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3일 경술

이때에 대신(大臣)·경재(卿宰)가 문형(文衡)을 권점(圈點)592)  하려고 빈청(賓廳)에 모였다. 전전(前前)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여 말하기를,
"전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가 바야흐로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는데, 거류(居留)는 외임이 아니니 이덕수를 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하순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예전에 전 대제학이 외직(外職)에 있었고 신의 아비 또한 원임(原任)에 있었는데, 이여(李畬)가 전전(前前) 문임(文任)으로서 이에 천망(薦望)을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윤순이 이덕수를 외임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틀린 것입니다. 설사 서울에 있어도 주천(主薦)하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송도(松都)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대신과 중신(重臣)이 모두 이미 와서 모였는데, 윤순이 구구한 규례(規例)를 지키고자 하니, 어찌 그리 편벽되단 말입니까?"
하였다. 임금이 곧 물러가서 천망(薦望)하라 하였다. 윤순은 파대(罷對)하고 곧장 나가서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다.

 

교리(校理)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청 도사(鞫廳都事)가 죄수를 발포(發捕)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합니까? 그런데 시수 죄인(時囚罪人)에 대하여 이필(李弼)이 도사(都事)로서 봉명(奉命)하는 행차에서 본군(本郡)을 경유(經由)하지 않고 곧장 죄수의 집에 도착하여 서로 정답게 말하며 옥정(獄情)을 몰래 누설하다가, 나졸(羅卒)이 사체(事體)를 들어 책망한 후에야 비로소 잡아왔으니, 엄중한 옥체(獄體)의 도리에 있어서 나처(拿處)에 그칠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그 죄를 정하게 하소서. 또 더구나 금오랑(金吾郞)을 당초에 나누어 파견할 적에 이필은 이에 월차(越次)한 사람으로서 갈 것을 힘써 청한 것을 궐중(闕中)의 공회(公會)에서 목도(目睹)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적(情迹)이 환하여 감출 수가 없으니, 이것을 문목(問目)에 첨가함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서명빈(徐命彬)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조최수(趙最壽)를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삼았다.

 

12월 4일 신해

윤순(尹淳)과 김재로(金在魯)를 양역 구관 당상(良役句管堂上)으로 삼아 양역을 변통(變通)할 방법을 강구(講究)하게 하였다.

 

12월 5일 임자

이진순(李眞淳)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12월 6일 계축

헌부(憲府) 【지평(持平) 신사영(申思永)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구 판관(大丘判官) 박사순(朴師順)은 윤취상(尹就商)의 질서(姪婿)로서 역적 박필몽(朴弼夢)의 심복(心腹)이 되었는데, 역적 박필몽이 바다에서 육지로 나올 때를 당하여 몸소 후풍(候風)하는 곳에서 기다렸다가 그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집이 금성(錦城)에 있어 그의 적소(謫所)와 서로 가까웠으므로 비밀리에 왕래하여 정적(情迹)이 서로 주밀하였습니다. 사로(仕路)가 막힌 지 이제 여러 해 되었는데, 작년 이래로 처음 낭서(郞署)에 임명되었다가 갑자기 대직(臺職)에 의망(擬望)되었으며, 끝내는 영남(嶺南)의 웅읍(雄邑)을 맡겼으니, 물정(物情)이 놀랍고 분하게 여깁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정언섭(鄭彦燮)은 지난번에 강세윤(姜世胤)이 아비의 상(喪)을 당했을 때 국계(鞫啓)가 바야흐로 한창 벌어지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를 청하였으니, 이미 지극히 방자하였으며, 윤연(尹㝚)이 역적 하의련(河宜璉)의 초사(招辭)에 나온 것에 이르러서는 정절(情節)이 낭자(狼藉)한데도 서둘러 찬배(竄配)의 벌을 베풀었고, 이제 사전(赦典)으로 인하여 품질(稟秩)에 두었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고(故) 감사(監司) 권중경(權重經)이 30년 동안 자신을 깨끗이 하고 스스로 조용히 지냈다는 말은 화심(禍心)이 이미 싹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역적 이인좌(李麟佐)의 종숙(從叔)이고 권서경(權敍經)의 당형(堂兄)이며 정사효(鄭思孝)의 친사돈입니다. 한편 그의 사위 세 사람은 모두 역적의 초사(招辭)에 들었는데 혹은 곤장에 경폐(徑斃)하기도 하고 혹은 승복하여 복법(伏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권중경이 또 역적의 초사에 나왔으니, 역모(逆謀)에 동참한 실상이 남김없이 환희 드러났습니다. 하물며 변(變)이 생긴 다음날 갑자기 폭사(暴死)하였으니 스스로 겁내어 자살한 것은 길 가는 사람도 아는 바입니다. 다만 자신이 죽음으로 해서 요행히 방형(邦刑)을 피했을 뿐입니다. 청컨대, 고 감사 권중경을 추가로 삭직(削職)하여 엄히 징토(懲討)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만(申晩)을 헌납(獻納)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정언(正言)으로, 정형익(鄭亨益)을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광덕(李匡德)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본래 공명(功名)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로 노둔(魯鈍)함을 책려(策勵)하여 조금이나마 당세의 쓰임에 보람이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물며 또 일찍이 한두 명의 뜻을 같이하는 신하(臣下)들과 함께 동궁(東宮)에서 전하를 모신 적이 있으므로, 천지의 광대(廣大)함을 비록 관라(管蠡)593)  로서 헤아려 볼 수는 없지만, 총명한 천종(天縱)의 성덕(聖德)은 실로 심취(心醉)하고 성복(誠服)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요순(堯舜)의 태평(太平)을 아침 저녁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문득 자신의 불초(不肖)함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마음과 망령된 생각으로서 혹시라도 풍운(風雲)을 즈음하여 세력에 빌붙어 이름을 날릴까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낭패(狼狽)하여 참소하는 말이 마구 생격나고 몸과 이름을 더럽혔으며 종적(蹤跡)의 위태로움이 오늘날과 같았으니 이 어찌 신이 몽매(夢寐)엔들 기대한 것이었겠습니까? 예로부터 인신(人臣)이 되어서 망극(罔極)한 무고를 당하는 것은 혹 친지(親知)와 관련이 되거나 혹은 형적(形迹)의 의사(疑似)로 인하여 오게 마련인데 이런 몇 가지는 신에게는 없습니다. 반세(半世)동안 문을 닫고 시사(時事)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소원하는 것은 오직 우리 임금이 요순의 정치를 하는 것이요, 오직 우리 임금의 백성이 요순의 백성이 되는 일뿐이었습니다. 살피지 못하건대, 이런 마음이 어찌 당인(黨人)을 저버리는 것이겠습니까? 화복(禍福)과 앙경(殃慶)은 모두 신의 알 바가 아닙니다. 오직 타고난 성품이 조급(躁急)하여 실로 악한 말을 받아들여 소화시키지 못하고 매번 한 마디 악한 말을 들으면 간담(肝膽)이 문득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지금 시골에 물러가 깊숙이 칩복(蟄伏)하고 있는 것은 실로 다른 마음이 아니요, 다만 악한 말이 들리지 않게 하고자 할 따름인 것입니다. 대개 신이 출신(出身)한 지 오래지 않아 원래 사류(士類)에 끼이지 못했는데, 불행히도 정미년594)  과 무신년595)   사이에 기회를 인연하여 빛나는 자리에 총탁(寵擢)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이양신(李亮臣)의 상소가 있었고 성탁(成琢)의 변서(變書)가 있어 몇 해 되지 않는 동안에 서로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신해년596)  에 물러나 시골로 돌아온 뒤부터 지금까지 3년 동안 아직 다시 악한 말을 서로 더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대명(待命)한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건대, 그 동안 횡역(橫逆)을 만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조정이 그 때문에 여러 번 시끄러웠습니다. 신이 이에 지난날 미움받은 것은 신의 몸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로 신이 영광과 총애를 진취(進取)한 것을 미워했기 때문이란 것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고를 당한 것도 또한 영광과 총애를 진취한 데에 있었고 그 자신은 일찍이 무고를 당한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신은 이에 나아간다면 반드시 흉무(凶誣)를 당할 것이고, 물러난다면 마땅히 악언(惡言)을 면할 것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은영(恩榮)과 위질(位秩)은 참언을 초래하는 계제가 아닐 수 없으나, 황야(荒野)의 전려(田廬)에 사는 것은 저절로 비방을 변명할 여지(餘地)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은 또 듣건대, 고인(古人)이 비방을 변명하는 것에 대해 이르기를, ‘말로 변명하는 것은 몸으로 변명하느니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말로 변명하는 자는 다투기를 더욱 빨리 해서 꾸짖음이 더욱 심해지고, 몸으로 변명하는 자는 행동이 더욱 드러나게 되어 비방이 저절로 그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옳고 저는 그르다하여 시비(是非)가 시끄러워지면 사람들이 누가 변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물러나 스스로 수양하여 마침내 능히 청충(淸忠)하고 염치(廉恥)를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세상에 어찌 청충하고 염치를 아는데도 부도(不道)하다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무고의 허실(虛實)과 무고한 자의 현사(賢邪)는 천백 세(世) 뒤에 반드시 그를 위해 대신 변명해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니, 신이 또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신은 이 때문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고당한 것에 대해 진실로 기를 쓰고 쟁변(爭辯)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바는 오직 군자(君子)들에게 혹 죄를 얻을까 염려되는 것이니, 참소한 자의 입이 실로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퇴(進退) 사수(辭受)와, 그리고 염치 의리(義理)의 즈음에 더욱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인(仁)·서(恕)로 다스리셔서 동토(東土) 수천 리 전역(全域)에 걸쳐 필부 필부(匹夫匹婦)도 각자 그 뜻을 얻고 모두 그 살 곳을 얻게 되었습니다. 초목과 곤충, 날개짓하고 꿈틀거리는 미물들도 우로(雨露)의 은택에 젖어 생성(生成)의 교화에 고무(鼓舞)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나 역시 조화(造化) 가운데 일물(一物)인데, 유독 정리(情理)를 드러낼 수 없고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또한 어찌 어진 하늘의 한 유감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오늘의 말은 모두 간혈(肝血)에서 나온 것으로서 일자 반사(一字半辭)도 진실로 거짓이 없습니다. 삼가바라건대, 신의 벼슬을 거두고 신을 전야(田野)로 내치시어, 신으로 하여금 끝내 악언(惡言)이 다시 오는 것을 면할 수 있게 하고, 참소한 신하로 하여금 그 말이 사실이 될 수 없게 하소서. 이는 신이 밤낮으로 읍혈(泣血)하며 우러러 축원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執義)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신(朝臣)이 혐의로 인해 전석(前席)에서 사면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경근(敬謹)함이 모자랍니다. 청대(請對)하는 데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더욱 중한데, 문형(文衡)을 회권(會圈)597)  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좌참찬(左參贊) 윤순(尹淳)이 구대(求對)하였는데, 밖에서 보면 마치 어떤 큰 일이 있는 듯하지만, 그 사실은 천망(薦望)을 맡지 않으려 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런데 거조(擧措)의 전도(顚倒)됨이 이미 외람된 데 관계되며, 파대(罷對)함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앞질러 나가버려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은 이미 모였다가 곧바로 파(罷)하였으니, 이 일을 들은 자들이 놀라고 당혹해 하였습니다. 신은 특별히 파직(罷職)시켜 사체(事體)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여 사체를 보존하라."
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홍경보(洪景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엊그제 감히 심왕적패(心王跡霸) 등의 말로써 우러러 규계(規戒)의 정성을 드렸으나, 밤이 깊어가고 있을 때라서 마음속에 쌓인 것을 다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앞의 말을 추연(推演)하여 반복해 전달하는 바입니다. 무릇 마음을 왕도(王道)에 두면 왕도의 업적(業積)을 이룩하고 마음을 패도(霸道)에 두면 패도의 업적을 이룩하는 것인데, 지난번 신이 이른바 마음은 왕도에 두고 패도를 따른다는 것은 고인(古人)이 논한 바에 어긋나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이 미묘한 것과 일을 운영(運營)하는 사이에 대해 가만히 스스로 헤아린 바가 있어 망령되게 지적해 의논할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고인이 하지 않은 말을 처음으로 발론하여 이미 발현(發現)된 단서를 잘 미루어 찬조(贊助)하고자 했던 것이니, 그 마음은 진실로 괴롭고 그 어리석음이 또한 심하다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백년 이래 당고(黨錮)의 폐단을 통탄하시고 삼대(三代) 탕평(蕩平)의 다스림을 사모하시어 못된 붕당을 타파하고 정치를 함께 하려는 한 계책을 가지셨으니, 참으로 지성측달(至誠惻怛)한 데서 나온 것이며, 실로 천덕왕도(天德王道)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전하의 이 마음은 비록 왕도(王道)라 하더라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왕자(王者)의 도(道)는 계교(計較)와 안배(安排)와 계착(係着)과 장영(將迎)이 없는 것이니, 오직 한개의 ‘시(是)’와 ‘공(公)’을 볼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그렇지 아니하시어 사람을 등용하는 데는 반드시 상호간에 대거(對擧)하여 쌍으로 천거하려 하시며, 말을 듣는데는 반드시 먼저 거짓인가 억측(臆測)하여 의심을 두십니다. 그리고 부억(扶抑)에 뜻이 있어 물건을 각기 물건에 붙이는 아름다움이 없으며 처분(處分)에 일정함이 없어 자주 반복되니, 위태로운 후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19일 내린 하교(下敎)가 명백 통쾌하여 환한 것이 일성(日星)을 매단 것 같다 하더라도 오히려 뭇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하여 감동시키지 못하며, 구습(舊習)을 씻어 버리지 못합니다. 이런 길을 답습한다면 우선 동이(同異)를 조정(調停)해 일시(一時)를 진정(鎭定)시킬 수는 있겠으나, 황극(皇極)을 세워 법으로 삼으며 어진 이를 세우는 데 문벌을 가리지 않는 다스림을 이루는 것은 가볍게 의논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성상께서 인도(引導)하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아래서 그에 응하는 것도 또한 그러합니다. 묘당(廟堂)은 고식지계(姑息之計)로써 미봉(彌縫)함을 좋은 계책으로 여겨 앞으로 나아가 담당할 뜻이 없고, 전조(銓曹)는 당색(黨色)을 배비(排比)하는 것으로 선책(善策)을 삼아 재능 있는 이를 천거하는 실상이 없으며, 대각(臺閣)은 형적(形跡)을 교묘히 피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아 관사(官師)가 서로 규정(規正)하는 기풍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국사(國事)는 점차 문란해지고 인재는 침체되며 사풍(士風)은 나약하게 시들어졌으니,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한쪽이 나아가고 한쪽이 물러날 때를 보건대, 크게 나은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폐단이 매우 심합니다. 아! 한(漢)·당(唐) 이후로 왕도(王道)가 회복되지 못한 것은 다만 그 당시 임금들의 이런 마음이 없었던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게서는 이미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것을 씀에 있어서는 잡패(雜霸)의 술수에서 나옴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천고(千古)에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세도(世道)는 물과 같아서 더욱 아래로 흐르고, 일월(日月)은 더욱 멀어져 함께 가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전하의 성시(盛時)이나 전하께서 스스로 기대하고 스스로 편안하게 여김이 이에 그칠 뿐이니, 신이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스스로 분발하시어 무릇 위에 진달한 갖가지의 병통(病痛)을 일체 쓸어 버려 안과 밖, 처음과 끝이 순수하게 순왕(純王)의 도(道)에서 나온다면, 반드시 탕평이라는 명목에 구구(區區)해 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당무편(無黨無偏)의 영역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12월 7일 갑인

약방(藥房)에서 의관(醫官)을 데리고 입시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신 등이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직 성사(聖嗣)의 탄생에 있으나, 아직까지 하교를 듣지 못하여 민망하고 울적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사(後嗣)를 구하는 도는 보통 사람도 오히려 소홀히 하지 않는데, 하물며 삼종혈맥(三宗血脈)의 존망이 이에 달려 있는 것이겠는가? 또한 어찌 용의(容意)할수 있겠는가?"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앞서 광박(廣博)한 도(道)를 앙진(仰陳)하였는데, 그 혹시 마음에 남겨 두셨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나이가 매우 많지는 않으나 마음은 이미 늙었으니, 이 또한 마음에 상처를 받은 때문이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실내(室內)가 화흡(和洽)하지 아니한 것은 건곤(乾坤)이 교태(交泰)하는 뜻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의(聖意)를 더욱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좋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는 도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근래 여항(閭巷)의 여인들이 혹 궁비(宮婢)와 교결(交結)하여 궁중에 출입하는 경우가 있다 들었습니다. 만약 통렬하게 금지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말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엄히 신칙하여 그 길을 끊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이 문의(文義)로 인해 수령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폐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세초(歲抄)598)  에 항상 ‘함부로 죽이는 것’을 장리(贓吏)와 같은 죄(罪)로 여겨 서용(敍用)을 아꼈다. 외관(外官)이 원장(圓杖)이나 혹은 난장(亂杖)을 사용하는 것은 모두 법외(法外)의 형(刑)이니, 지금부터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8일 을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윤득화(尹得和)가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감사(監司)의 임무를 감당할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거의 팔도(八道)를 두루 역임(歷任)했으나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 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당상(堂上) 이상은 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이(吏)·호(戶)·병(兵)의 장관(長官)에 이르러서는 대신(大臣)이 천거한 바인데, 정경(正卿) 가운데 의망(擬望)되지 않은 자가 없다."
하였다. 윤득화가 말하기를,
"신의 선조인 고(故) 상신(相臣) 윤두수(尹斗壽)는 당시의 명신(名臣)으로 지위가 상상(上相)에 이르렀지만, 다만 호판(戶判)을 지냈을 뿐 일찍이 양전(兩銓)의 장(長)은 되지 않았으니, 옛날의 관방(官方)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보감(寶鑑)》을 열람해 보니, 성조(聖祖)께서 인명(人命)을 중히 여긴 지극한 뜻을 볼 수 있다. 무릇 노비(奴婢)에게 죄가 있어 관(官)에 고하지 않고 구살(毆殺)하면 저절로 그에 해당되는 형률이 있으나, 잘못된 습관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
하자, 승지(承旨) 홍호인(洪好人)이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허물어져 가끔 저주하고 흉물(凶物)을 묻는 변고가 있으므로, 혹 관에 고하지 않고 함부로 죽이는 자가 있기도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권부(權扶)의 일에서 그걸 보았다. 죄가 있어 죽이는 것도 진실로 법 밖의 일인데, 어찌 분한 김에 잘못 죽이는 자가 없음을 알겠는가? 지금부터 조사(朝士)와 유생(儒生)을 논하지 말고 함부로 죽이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법관(法官)은 드러나는 대로 논죄(論罪)하고, 양사(兩司)는 풍문을 듣고 규정(糾正)하도록 하라. 그러나 그 근본을 궁구(窮究)해 보면 이는 추조(秋曹)가 엄하지 못한 소치이니, 엄히 신칙(申飭)을 더하라."
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유엄(柳儼)을 승지(承旨)로, 이종백(李宗白)을 집의(執義)로, 송교명(宋敎明)을 지평(持平)으로, 안상휘(安相徽)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2월 9일 병진

소대(召對)를 행하여 육선공(陸宣公)의 주의(奏議)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이좌상(李左相)·홍영상(洪領相)·조풍릉(趙豐陵)은 모두 나에게 이 글을 강할 것을 권하였으니, 그 뜻을 대개 생각할 수 있다. 지금 이 세 상신(相臣)이 다 세상을 떠나서 내가 이 글을 강하는 것을 보지 못하니, 이것이 감동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나에게 도량이 좁은 병이 있으나, 군하(群下)가 넓히지 못했기 때문에 세 상신이 이 글을 빌어 통하여 깨닫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조겸(呂祖謙)599)  은 한 학자로서 《논어(論語)》를 강(講)하여 능히 기질(氣質)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내가 이 글을 강하고도 병통(病痛)을 제거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이미 세상을 뜬 대신(大臣)을 저버린 것이다."
하자,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이 글이 뜻을 체인(體認)하고 이 글의 말을 추행(推行)하신다면 고(故) 대신(大臣)이 비록 저 어두운 가운데 있더라도 또한 반드시 그 성대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축원할 것입니다."
하고, 감토관(檢討官) 윤득화(尹得和)는 말하기를,
"소식(蘇軾)600)  의 차자(箚子) 가운데 ‘육지(陸贄)의 얼굴을 보는 듯하고 육지와 함께 말하는 듯하다.’는 등의 말은 매우 친절합니다. 성상(聖上)께서 단지 대신들을 추념(推念)할 뿐만 아니라 항상 육지가 날마다 좌우(左右)에 있는 것같이 하시면 보탬이 되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唐)의 덕종(德宗)은 봉천(奉天)의 난(亂)601)  을 겪고는 ‘재화(財貨)가 부족한 소치(所致)’라고 여겨 다시 경림(瓊林)·대영(大盈) 두 창고를 행궁(行宮)에 지었으니, 그 마음의 함닉(陷溺)이 이와 같은 것이다. 지금 나라가 무신년602)  을 거치고 겨우 약간의 햇수가 지났는데, 상하(上下)가 편안하고 게으른 데 빠져 마치 무신년의 일이 있었음을 모르는 듯하니, 이는 덕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이어 글로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여 이르기를,
"아! 옛날 제왕(帝王)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에서 전철(前轍)을 거울삼을 수 있다. 역대의 사첩(史牒)을 보면 치세(治世)는 적고 난세(亂世)는 많았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공사(公私)와 의(義)·이(利)의 나뉨이다. 태종(太宗)는 당나라의 영주(英主)이었으나 십점(十漸)의 권태로움을 면치 못하였고, 현종(玄宗)은 개원(開元)의 치주(治主)였으나 거의 난망(亂亡)의 지역에 이르렀으니, 이는 욕심이 승(勝)한 폐해였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묘(微妙)하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함이 없으면 광인(狂人)이 된다.’ 하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우리 영묘(英廟)603)  께서는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명황계감(明皇戒鑑)》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수훈(垂訓)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항상 개연(慨然)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성색(聲色)과 유전(遊畋)에 빠진 임금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겠으니, 하고자 해도 하지 못하고 다스리고자 하나 다스리지 못하며 인순(因循)·고식(姑息)으로 난망(亂亡)을 초래한 임금은 바로 부자(夫子)께서 ‘어찌할 수 없다.’고 한 자이다. 내가 불초(不肖)하여 덕은 본래 박하고 학문은 진실로 얇으나, 저 신축년604)  에 있어 황형(皇兄)의 무거운 부탁을 받들고 삼종혈맥(三宗血脈)의 외로움을 생각하여 외람되게 대명(大命)에 응했다. 그리고 갑진년605)  에 이르러 부탁하심의 지극히 무거움을 돌아보고 백성들이 나를 우러러봄을 생각하였으니, 어찌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고 뜻을 다해 건져 구제하여 위로는 조종(祖宗)께서 정성스레 돌보아주시는 뜻에 답하고, 아래로는 인민(人民)의 눈을 씻고 바라는 소망에 부응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일이 마음과 같지 않고 정사는 뜻과 같지 않아 즉위한 지 9년이 되도록 그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게다가 거듭 대척(大慽)을 당해 마음은 더욱 상처를 입어 전에는 뜻이 날카로우나 뒤에는 물러나고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중도에 게을러졌다. 기강(紀綱)으로 말하자면 쓸어버린 듯 여지(餘地)가 없고 이목(耳目)으로 말하자면 벙어리가 되어 채 입을 다무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으니, 위에서 싫어함을 면하지 못한 것으로 말미암았으나, 그 병의 뿌리가 또한 있었다. 왜냐하면 비록 칙려(飭勵)하고자 하나 그 대강(大綱)을 들지 않고 단지 그 말단적인 것만을 드니, 허물있는 자는 치우치게 허물하고 용서할 자를 치우치게 용서하게 되었다. 비록 전사(前史)에 깊이 개연스러움을 느끼지만 하지 못하고 다스리지도 못하는 것을 내가 실로 겸하고 있으니, 기강이 무너짐과 이목이 적료(寂寥)함은 신하의 허물이 아니라 곧 나의 잘못이다. 지난해 소대(召對) 때의 책을 문의(問議)할 때에 고(故) 좌상(左相)이 《육지주의(陸贄奏議)》를 선무(先務)로 삼았고 영상(領相)과 풍릉(豐陵)이 서로 잇따라 나에게 권하였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도록 그렇게 하지 못하다가 이제 이 글을 강(講)하게 되었으니 깊이 느끼는 바가 있다. 세 상신이 육서(陸書)를 빌어 나를 기감(起感)시켰으니 역시 겸연(歉然)함이 있었다. 재상을 두고도 능히 활짝 넓히지 못한 채 도리어 옛 책을 빌어 나를 경계했던 것이다. 옛날 여백공(呂伯恭)은 몸소 자신을 책망함을 두터히 하고 남을 책망함을 박하게 해 기질을 변화시켰다. 내가 비록 배우지 못하였으나 글에 임해 스스로 반성해 보건대, 노유(老儒)에 미치지 못하니 이 책은 그대로 책일 뿐이며 세 상신까지도 저버리게 되었다. 아! 이미 상한 마음은 비록 회복시키기 어려우나 본연의 기품(氣稟)이야 어찌 민멸시킬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스스로를 통찰하여 맹성(猛省)하고, 더욱 면려(勉勵)를 더하며 나의 몸에 돌이켜 스스로 책망할 것이니, 정부(政府)에서는 이 대략(大略)의 뜻을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여 과인의 병통을 알게 하고, 과인의 부족함을 보충하게 하라. 말이 비록 과중(過中)하더라도 나는 허물하지 않겠으며, 만약 절실한 것이라면 내가 마땅히 채납(採納)하겠다. 아! 세 상신이 어찌 저 어두운 곳에서 들을 수 있겠는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특별히 제사를 지내고 제문(祭文)을 문원(文苑)으로 하여금 찬진(撰進)하도록 하라. 지난번에 정한 삭망(朔望)의 상참(常參)은 이미 문구(文具)가 되어 버렸으며, 5일의 차대(次對)도 또한 오랫동안 궐(闕)하였다. 이후로 비국(備局)의 차대는 국기(國忌)가 아니면 감히 품정(稟停)하지 말라. 품정하는 날에는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고, 비당(備堂) 가운데서 사고(事故)가 없는 자와 육조(六曹)의 장관(長官)으로서 품(稟)할 것이 있는 자를 같이 입시(入侍)하도록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아! 그대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은 이 뜻을 체득(體得)하여 능히 구투(舊套)를 버리고 공사(公事)에 더욱 힘쓰도록 하라. 나 역시 마음을 비워 들을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이 하는데도 구습(舊習)을 따르고, 혹 칙려(飭勵)했음에도 감히 임금이 먼저 의심한다고 한다면 이는 그대들의 죄이며, 마음을 비워 보지 못하고 행적을 잡아 책망한다면 이는 나의 잘못이다. 모두 이 유시(諭示)를 들을지니, 생각건대 마땅히 모두 다 알아 들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10일 정사

삼복(三覆)을 행한 사수(死囚)가 무릇 14인이었는데, 작처(酌處)한 사람은 2인이었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송교명(宋敎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이희좌(李羲佐)는 전혀 문자(文字)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6품(品)의 강(講)을 통하지 못하였는데, 다시 명음(名蔭)의 자리에 차출되었으니 관방(官方)이 효잡(淆雜)합니다.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 이관진(李觀鎭)은 본래 모리(牟利)나 하는 사람으로서 전혀 선비의 모양과 태도가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안상휘(安相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여정(閭井)에서 결혼할 때 납폐(納幣)의 규식은 외람됨이 많아 절도(節度)가 없습니다. 많은 자는 걸핏하면 수백 금(金)을 소비하고 적다 해도 역시 백 금을 밑돌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이것을 마련할 수 없으니, 나이가 비록 4,50이 넘어도 아내를 맞이할 수 없게 되어 윤상(倫常)이 폐절(廢絶)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개탄스럽습니다. 삼가 《오례의(五禮儀)》를 살피건대 납폐에는 명주나 혹은 포(布)를 썼는데, 3품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는 현훈(玄纁)이 각 하나로 되었으니, 선왕(先王)께서 제정한 것이 지극하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폐기되어 행하지 않으니 법을 준행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엄히 검칙(檢飭)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여리(閭里)에서 혼인 때 폐백을 반드시 현훈으로 하는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고, 이보다 지나치게 하는 자는 법사(法司)에서 가장(家長)을 적발하여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다스려 사치하고 남용하는 관습을 혁파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평안 감사(平安監司) 윤양래(尹陽來)는 평소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인망(人望)이 가벼워 서변(西邊)을 탄압(彈壓)할 책임을 맡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너무 지나치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한사선(韓師善)이 전에 남중(南中)에 임명되었을 때 잘 다스리지 못한 성적(成績)이 낭자하게 전파되었는데, 어사(御史) 황정(黃晸)은 사사로움을 끼고 함부로 포장(褒奬)하여 심지어 승선(承宣)에 특제(特除)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공의(公議)가 지금까지 불울(拂鬱)해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정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황정의 사람됨을 내가 안 지 오래이다. 더욱이 수의(繡衣)의 일로 만윤(灣尹)을 파직하라고 청하는 것은 또한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12월 11일 무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주의(奏議)》에 이른바 ‘군상육폐(君上六弊)’ 가운데 내가 면치 못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여러 신하들은 각각 소견을 말하라."
하니, 참찬관(參贊官) 홍경보(洪景輔)는 말하기를,
"총명(聰明)을 자랑하고,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며, 허물 듣기를 부끄러워하고, 변급(辯給)이 빠른 것 네 가지가 전하께서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은 말하기를,
"신이 가만히 생각하니 강퍅(强愎)함을 제멋대로 한다는 것 외에 모두 있는 듯합니다."
하고, 검토관(檢討官) 윤득화(尹得和)는 말하기를,
"신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아는 것이 적고 배운 것이 많지 않으며 뜻은 크나 재주가 적어 말을 하고 일을 하는 사이에 과연 허다한 병통(病痛)이 있다. 대저 세도(世道)를 개탄하는 마음은 지나치고 사람을 용납하는 도량은 작으니,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게 된 것이요, 일에 실수가 있으면 문득 깨닫고 마음속으로 후회하니 허물듣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병통이 있는 것이며, 변급에 빠르다는 것은 학문이 부족한 소치요, 총명을 자랑함은 아는 것은 적은데 뜻만 크기 때문이다. 또 위엄을 부리지 않아야 하는데 위엄을 부리는 것은 위엄을 사납게 부리는 데 가까운 것이다. 오직 강퍅함을 제멋대로 한다는 한 가지는 나에게 실제 없다. 이른바 ‘신하 삼폐(臣下三弊)’는 여러 신하들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홍경보가 말하기를,
"아첨하며 눈치를 본다는 것을 아직도 또한 면하기 어려우니, ‘두려워하고 겁이 많다[畏懦]’는 두 글자야 어찌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어 옥당(玉堂)에 명하여 육폐(六弊)를 써서 올리게 하였다. 오원이 말하기를,
"권영(權瑩)을 찬축(竄逐)한 것에서 또한 처분이 지나치게 엄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지나친 것이 아니다. 권영이 군부(君父) 앞에서 감히 이보욱(李普昱)이 김일경(金一鏡)의 의붓자식이라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해괴하지 않은가?"
하였다. 오원이 오히려 힘써 말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이 서로 대하여 각각 단점을 말하는 것은 진실로 또한 아름다운 일이나, 끝내 권영을 신구(伸救)하는 데로 돌아가니, 참으로 개탄할 만하다."
하였다.

 

한익모(韓翼謨)를 집의(執義)로, 신택하(申宅夏)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2일 기미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혹자는 오지(午地)에 나타났다 하였는데, 일관(日官)이 기휘(忌諱)하여 사지라 했다고 한다.

 

부수찬(副修撰)        유최기(兪最基)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내리신 비망기(備忘記)를 받들었더니, 성심(聖心)을 분발하고 사지(辭旨)가 간측(懇惻)하여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아 ‘이는 참으로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키는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시험삼아 오늘날의 인심과 세도(世道)를 보건대 위태롭고도 험난하다 할 만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상서로운 일이 많은 경우에는 그 나라가 흥하였고 재앙이 많은 경우에는 그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청대(靑臺)606)                  에서 쓴 것과 제도(諸道)에서 아뢴 것은 이미 예람(睿覽)을 거친 것이니, 신이 하나하나 번잡하게 진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놀랄 만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을에 열무(閱武)하던 날 바람과 우박·번개와 벼락이 치더니 끝내 비상(非常)한 변고에 관계되었습니다. 추후(追後)하여 듣건대, 그날 용(龍)이 심도(沁都)의 매도(煤島)에서 올라갔는데,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치고 바다 파도가 넘쳤으며, 얼마간 싸우고 다투다가 삽시간에 흩어져 날아갔습니다. 지나간 땅에는 괴이한 우박이 갑자기 쏟아졌는데, 크기가 얼음 조각만 하였으며 백곡(百穀)의 이삭이 떨어져 일로(一路)의 재앙이 똑같았으니 지극히 괴상합니다. 또 기전(畿甸)의 연해(沿海) 고을에는 가을에 갑충(甲蟲)이 전야(田野)에 두루 가득했다 합니다. 근래 들으니 사나운 호랑이가 함부로 횡행하며 사람을 고기 씹듯 하는데, 가평(加平)·포천(抱川) 지경과 연안(延安) 배천(白川)의 들에서는 대낮에도 제멋대로 쏘다녀 혹독하게 물린 자가 낭자합니다. 호표(虎豹)가 산에 있지 않고 들에 있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입니까? 신은 들으니 고려(高麗)의 말기에 호환(虎患)이 매우 극성하였고, 임진 왜란(壬辰倭亂) 전에는 호랑이가 사동(社洞)에 들어왔었다고 합니다. 근래 일로 말하자면, 을해년607) 병자년608)                  에 호환이 특히 심하였습니다. 지나간 조짐을 살펴보건대, 혹은 병상(兵象)이 되기도 했고 혹은 대살(大殺)이 되기도 했으니, 지극히 두려워할 만합니다. 소의 등에 다리가 난 것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괴역(乖逆)의 상(象)이며, 백기(白氣)가 하늘을 가로지른 것도 또한 지극히 위태롭고 두려운 걱정거리입니다. 이 어찌하여 성명(聖明)께서 어극(御極)하셨는데 재앙과 허물이 여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신이 들으니 세상이 장차 다스려지려 할 때에는 천기(天氣)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고, 세상이 장차 어지러워지려 할 때에는 천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간다 하였습니다. 근년에 동남(東南)의 해족(海族)이 모두 서쪽 바다에서 났으니, 식견이 있는 자의 근심이 어찌 다만 천진(天津)에서 두견새 소리를 듣는 데 비길 수 있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봉사(封事)에 이르기를, ‘완운(頑雲)이 흩어지지 않고 천일(天日)이 항상 어둡다.’고 한 것은 대개 목묘(穆廟)609)                  의 신묘년610)                   간에 해당합니다. 신이 그윽이 보건대, 입동(入冬) 이래로 낮에는 항상 침침하고 안개가 온통 꽉차 있으며, 겨울인데도 따뜻한 것이 봄과 같아 꽃나무들이 만발(滿發)하고 두견화가 남쪽 언덕을 향해 피어 길가의 아이들이 꽃을 꺾어 놀기까지 했으니, 이는 천시(天時)·물리(物理)가 상도(常道)와 한결같이 상반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사사로운 근심과 지나친 염려가 어디엔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빈 산의 썩은 나무는 꺾어짐을 기다릴 수 있고 창해(滄海)의 물이 새는 배는 반드시 패몰(敗沒)되는 것입니다. 흉년과 여역(癘疫)에 명맥(命脈)이 끊길 날이 가까이 닥쳐 있는데, 산붕(山棚)611)                  이 나그네의 길을 막고 불러 모아 떼를 이루고 있습니다. 백성의 재물은 세금을 거두는 데에 고갈되었고 앙화가 잠복(潛伏)되어 틈을 엿보고 있으니, 그 형상은 보지 않아도 그 그림자는 살필 수 있습니다. 신은 아마도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환란이 오로지 외모(外侮)에만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 언로(言路)는 국가(國家)에 있어서 몸에 혈맥이 있는 것 같으며, 인재(人才)는 천하에 있어서 집에 동량(棟樑)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혈맥이 끊어지면 사람이 죽고 동량이 부러지면 집이 무너지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언(知言)·지인(知人)은 요(堯)·순(舜)도 어렵게 여긴 바입니다. 진실로 총명함이 요·순에 미치지 못하면서 또 한 몸의 사사로움으로 호오(好惡)의 공변된 것을 침삭(侵削)한다면 충(忠)을 사(邪)라 여기고, 불초(不肖)한 사람을 어진 사람이라 여기며,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데 이르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한무제(漢武帝)가 곧은 급암(汲黯)을 등용하자 회남왕(淮南王)이 역모(逆謀)를 그만두었고, 당 현종(唐玄宗)이 간사한 이임보(李林甫)를 임용하자 안녹산(安祿山)이 난리를 일으키는 장본(張本)이 되었습니다. 장구령(張九齡)612)                  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도 끝내 곡강(曲江) 땅에 허무하게 버려졌고, 이백기(李白紀)613)                  의 충언(忠言)은 시의(時議)에 거슬려 배척을 입었으니, 천축의 금경(金鏡)은 한갓 충신이 길이 탄식하는 것이 되었으며, 남쪽으로 날아간 한 마리 봉황은 다만 지사(志士)가 깊이 애석해 함을 더할 뿐입니다. 만약 장구령의 말이 개원(開元)614)                  시대에 행해질 수 있었고, 이강(李綱)의 의논이 정선(政宣)615)                   시대에 채용될 수가 있었다면 반드시 천보(天寶)616)                  와 정강(靖康)617)                  의 난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지기(志氣)가 점점 쇠약해져 문득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는 뜻이 있어 처분이 엄하지 않으니, 혹 쇠퇴기의 위미(委靡)한 징조인 듯합니다. 난역(亂逆)이 방자하게 날뛰고 흉서(凶書)가 번갈아 나왔으나 능히 그 근저(根柢)를 다스리지 못하니, 윗사람의 권위는 날로 떨어지고 왕강(王綱)은 날로 문란해져서 변괴가 겹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 사유(四維)가 폐기되고 삼강(三綱)이 무너지니, 온갖 관원이 직무를 태만히 하고 서사(庶事)가 자질구레해집니다. 위에서 아래에 신칙하는 바는 관청의 자질구레한 문서에 지나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고하는 것은 모두 외쇄(猥瑣)하고 번잡스런 말단적인 것이니, 이는 진실로 여러 신하들의 죄이지만 진실로 그 실책을 궁구해 보면 전하께서 초래하신 바입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지금부터 통렬히 스스로를 징개(懲改)하시어 언로를 크게 열고, 인재를 빨리 등용(登用)하고, 민심을 수습하고 국세(國勢)를 공고히 하소서. 그리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참으로 협공 화충(協恭和衷)의 아름다움을 만들고, 백성으로 하여금 실로 소생시켜 길러 주는 은택을 입게 한다면, 태평만세(太平萬世)의 아름다움을 발돋움하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날 경신년618)                   간에는 하늘에 뻗치는 혜성이 있었고 무지개가 해와 달을 뚫었으며, 지진과 목요(木妖) 등의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숙고(肅考)께서 실덕(實德)으로 하늘의 변에 응하고 실심(實心)으로 구언(求言)하시어 강대(剛大)하게 분발해 반역의 무리를 엄히 토벌하고 천주(天誅)를 쾌히 바루시자 위태로웠던 인심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고, 괴기(乖氣)가 변화하여 상서가 되어 마침내 50년의 치평(治平)을 이루었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고(聖考)의 뜻과 성고의 사업을 계술(繼述)하신다면 국가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종이에 가득히 면계(勉戒)함이 모두 매우 절실하니,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옥(徐宗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어제 소대(召對) 때 성유(聖諭)를 본즉 수십 항(行)의 사륜(絲綸)에 심신(心腎)을 널리 펴셨으니, 신이 재삼 반복하여 완역(玩繹)하매 저절로 감동하여 눈물이 흘렀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신이 일찍이 국조(國朝)의 명신(名臣)들이 응지(應旨)한 상소를 보건대, 말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고 또 절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끝내 일장(一場)의 공언(空言)을 면치 못했고, 시행하는 데 이익이 없었으니, 생각건대 저들의 진언한 정성이 어찌 이와 같이 하고자 한 데 그쳤겠습니까? 대개 지적해 진달한 가운데서 사정이 혹 어긋나고 한만(汗漫)한 가운데 성찰하기 또한 어려워 한 마디라도 타당함이 없으면 문득 버려 두었으니, 그 이세(理勢)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신이 능히 입을 열어 조금이라도 성의(盛意)에 책임을 다하지[塞責]는 못하나, 또한 성교(聖敎) 가운데 있는 몇 가지 일에 대해 청납(聽納)하는 도리를 확장해도 좋겠는지요? 빈청(賓廳)의 차대(次對)는 공사를 품정(稟定)하는 데 불과하고 비국(備局)의 좌기(坐起) 역시 문서를 거행(擧行)하는 데 지나지 않아, 별다른 모유(謀猷)가 있거나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써 사리(事理)를 갖추어 간곡히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같이 하고 파하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도움을 구하는 뜻이겠습니까?
신은 먼저 여러 대신(大臣)에게 평상시 마음속의 미륜(彌綸)과 지금 백성의 질고(疾苦)를 책자로 만들고 한 통씩 써서 바치도록 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또한 한가한 가운데에 조용히 보시어 그 요령(要領)을 얻으신 뒤 훗날 연대(筵對) 때에 반복 논란(論難)하여 종위(從違)·취사(取捨)하는 사이에 마음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다면, 한번 진소(陳疏)하고 한번 판비(判批)를 거친 뒤 방치하고 살피지 않는 것에 비교해 득실(得失)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비국(備局)의 여러 당상(堂上)과 육조(六曹)의 정관들이 함께 입시(入侍)함은 진실로 좋은 일이나 모두가 직책상 일을 맡은 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하도록 인도하지 못한다면, 어찌 자리에서 나와 망령되게 말해 상구(尙口)의 경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평상시에 글을 읽어 당세의 임무를 헤아리다가 비록 다행히 밝은 조정(朝廷)의 반열에 서게 되었더라도 자취는 성글고 말은 가벼운지라 반드시 쓰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잠자코 물러나는 자도 또한 어찌 없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시종(侍從)·방백(方伯)의 정3품(正三品) 이상을 거쳐 현재 실직(實職)에 있는 자는 매번 연대(筵對)하는 날 정원에서 품정(稟定)하여 입시(入侍)하되, 주강(晝講) 때 종반(宗班)·무신(武臣)의 규례와 같이 군함(軍銜)을 띠고 있는 부류에 이르러서는 정원에서 서계(書啓)하여 수점(受點)하는 것 역시 윤대관(輪對官)의 예(例)와 같이 할 것이며, 소회(所懷)가 있으면 홀(笏)에 써서 입으로 진달하게 할 것을 청합니다. 전하께서는 또 마음을 비우고 고문(顧問)하시되 그 간직한 바를 물어보고 그 사람됨을 살피신다면, 청납(聽納)의 넓음과 용사(用捨)의 마땅함에 있어서 두 가지 요체를 모두 얻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도움을 구하시는 뜻으로서 임시로 거행하게 하다가 사람이 다하여 파(罷)한다면 어찌 번거로운 폐단이 있겠습니까? 신이 그윽이 전사(前史)를 보건대, 다스려지기를 원하는 임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끝내 중의(衆議)를 널리 채집하거나 인재를 여러 모로 구하지 못하여 뜻은 있건만 성취하지 못한 채 그쳤으니, 상례(常例)에 구애되었기 때문입니다.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천장각(天章閣)을 열고 집정(執政)을 불러 천하의 일을 써서 올리게 하였으며,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오품(五品) 이상에서 장하(仗下)에 이르기까지 일을 아뢰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그 규모가 아주 넓고 지기(志氣)가 분발하고 날카로웠으니 ‘정관(貞觀)619)  ’·‘경력(慶曆)620)  ’의 법이 앞뒤로 아름다움을 이은 것이 당연하지 않았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는 10년동안 정사에 힘쓰셨으나 다스린 효험은 아득합니다. 지금 그 병이 나게 된 근원은 이미 자신에게 돌이켜 통렬히 반성(反省)하였습니다. 통렬히 반성한 마음으로 인해 더욱 진려(振勵)를 더하여 능히 일을 해 나간다면 다시는 처음에 부지런하다가 마침내 태만하게 되는 폐단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전이(轉移)의 일대 기회(一大機會)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면계(勉戒)함을 깊이 가상히 여긴다. ‘대신이 책자(冊子)에 써서 올려야 한다.’는 말은 옳다. 정원으로 하여금 사관(史官)을 보내어 여러 대신과 치사(致仕)한 대신에게 전유(傳諭)토록 하라. 실직(實職) 정3품의 입시와 군함을 띠고 있는 자들이 윤대하는 일은 뜻이 옳다. 그러나 이것은 문구(文具)에 가까우니 지금부터 군직·실직을 논하지 말고 일찍이 시종(侍從) 정3품의 이상을 거친 자로 서울에 있는 자는 매번 삭망(朔望)의 상참(常參) 때 정원에서 열서(列書)하여 올리고, 낙점(落點)을 기다려 같이 참여하게 하라. 그리고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서 예궐(詣闕)하여 전계(傳啓)하는 자가 만약 법강(法講)을 만나면 함께 입시하는 일을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말단(末端)에 면계한 것은 더욱 절실하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응지(應旨)하여 진차(陳箚)하고 육폐잠(六弊箴)을 지어 올렸는데,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장려하였다.

 

12월 13일 경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유성(流星)이 항성(亢星) 아래서 나왔다.

 

여러 승지(承旨)에게 《대전(大典)》을 가지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이광보(李匡輔)가 말하기를,
"청렴을 장려함은 탐욕을 징계하려는 것입니다. 청백리(淸白吏)를 오래도록 뽑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구전(舊典)을 수명(修明)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리고 대신(大臣)·육조(六曹)의 장관(長官)·비당(備堂)에게 각각 염근(廉謹)한 사람을 두 명씩 천거하고, 팔도 방백(方伯)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는 각각 효렴(孝廉)한 사람 한 명씩을 추천하되, 이미 입사(入仕)한 사람들은 염근의 항목에 넣고, 아직 입사하지 않은 자들은 효렴의 항목에 넣으라 명하였다. 이춘제(李春躋)가 말하기를,
"고(故) 헌납(獻納) 김두남(金斗南)은 염절(廉節)이 탁이(卓異)하여 주군(州郡)을 다섯 번 맡았지만 식량(食糧)이 자주 핍절되었습니다. 선조(先祖) 때에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끝내 포양(褒揚)의 은전(恩典)이 없었습니다."
하고, 이광보는 말하기를,
"고 응교(應敎) 이현모(李顯謨)가 용강(龍岡)에 보임(補任)되었을 때에 신도 또한 서읍(西邑)에서 대죄하고 있다가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보니, 울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조정에 선 이래로 오로지 군덕(君德)을 보도(輔導)할 것을 마음먹고 붕당(朋黨)에 발자취를 더럽히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론(黨論) 때문에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어 병으로 장차 거의 죽게 되었으나, 이 마음을 미처 드러내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기 어렵다.’라고 하였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염(殮)할 만한 옷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비 이제(李濟)는 관직이 관서백(關西伯)에 이르렀고 이현모도 또한 여러 번 군읍을 역임(歷任)하였으나, 가난과 곤궁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가상(嘉尙)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두남의 청백(淸白)은 내가 이미 알고 있어 바야흐로 대신(大臣)에게 순문하였다. 이현모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 자손을 수용(收用)하게 하여 측은(惻隱)해 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농상(農桑)을 권장하는 것, 제언(堤堰)을 수리하는 것, 도량(度量)을 공평히 하는 것, 가취(嫁娶)를 보조하는 것 등의 일은 모두 구제(舊制)를 수거(修擧)하도록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가 임금의 교시로 인해 차자(箚子)를 올려 소회(所懷)를 진달하니, 임금이 ‘가슴속에 새겨 두겠다.’고 답하고 유중(留中)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4일 신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광덕(李匡德)을 특별히 갑산 부사(甲山府使)에 보임(補任)하였다. 이광덕을 강화 유수에 제수하여 여러 달을 넘기도록 연이어 칙교(飭敎)를 내렸으나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에 하교(下敎)하기를,
"인신(人臣)이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설령 마음에 통박(痛迫)한 것이 있더라도 군부가 개석(開釋)한 뒤에는 분의(分義)에 있어 감히 시애(撕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지난날 무고를 당한 것은 상하(上下)가 모두 알고 있으며 내외(內外)의 직명은 사체가 또 차이가 있으니, 유수로 있는 것이 비록 방백(方伯)과는 다르나 곧 외임(外任)이다. 당일로 사조(辭朝)하라는 명을 마치 외직에 보임하는 것처럼 여겨 끝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외직에 보임된 사람들이 또한 반드시 이를 본받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정신(廷臣)들이 말이 많았으나, 임금이 듣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이광덕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북로(北路)가 황벽(荒僻)하고 백성의 풍속이 완고하고 어리석어 왕화(王化)를 알지 못하므로, 이광덕을 시켜 한 번 가서 그들을 위무케 하려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이중진(李重震)을 헌납(獻納)으로, 이흡(李潝)을 부응교(副應敎)로, 신만(申晩)을 교리(校理)로, 오원(吳瑗)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약로(金若魯)·윤득화(尹得和)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2월 15일 임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모(典謀)와 고훈(誥訓)은 경서(經書)에 실려 있고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은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으니, 예로부터 치도(治道)를 구함에 있어서 이 두가지를 버리고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10년의 연석(筵席)에 전하께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심이 이미 넓었습니다. 그러나 무릇 정령(政令)과 시조(施措) 사이에 조금이나마 실효가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본받아 시행하는 데에 지극하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신이 전후로 ‘혹 문구(文具)를 제거하여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혹 다스림은 말을 많이 하는 데 있지 않으니 힘써 행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을 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책자로 써서 올리라는 명은 비록 이목(耳目)에는 새롭지만, 전하께서 경사(經史)에 이미 힘을 얻지 못함이 이와 같았으니, 지금 여러 신하들이 올리는 바에도 아마 치화(治化)에 보탬이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도 또한 문구로 돌아갈 것이니, 신은 그윽이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말은 비록 간단하나 면계(勉戒)한 것이 절실하다. 깊이 감탄을 느끼는 동시에 또한 겸연(慊然)함을 깨닫겠다. 어찌 두려워하며 마음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이조(吏曹)·병조(兵曹)의 당상(堂上)들을 입시하라 명하고 포폄(褒貶)의 계본(啓本)을 뜯어 보았다.

 

12월 16일 계해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이흡(李潝)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신이 외직에 보임(補任)된 것은 권영(權瑩)의 일로 인하여 죄를 얻었는데, 신은 소환되었으나 권영은 아직 죄적(罪籍)에 있습니다. 신의 말이 채용되었다면 비록 용서받아 돌아오지 못했더라도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권영의 무리들이 사당(死黨)에 감심(甘心)한 것을 어찌 말때문에 죄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유최기(兪最基)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특별히 대고(大誥)를 내리시고 초야에 숨어 사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생각하고 계시니,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려는 뜻을 누가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근래에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이 매우 많으니, 단지 권영뿐만이 아닙니다. 청컨대, 대신에게 물어보시고 경중(輕重)을 헤아려 풀어 줄 만한 자는 풀어 주고 이배(移配)할 자는 이배하소서. 그리고 사람을 쓰는 도리에 있어서는 추천하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천주(薦主)에게 신칙하여 공정하고 엄격함을 위주로 하는 데 힘쓰게 한다면 어찌 효과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2월 17일 갑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강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육폐(六弊)’를 써서 전상(殿上)에 붙인 것은 매우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다만 성상께서 접때 양득중(梁得中)의 말 가운데서 ‘실사구시(實事求是)’란 네 글자를 써서 걸어두신 것이 지금 이미 해를 넘겼으나, 실효가 없습니다. ‘육폐’를 써서 건 것이 어찌 네 글자와 같지 않을 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매우 부끄럽다. 마땅히 경척(警惕)함을 더하겠다."
하였다. 유엄이 이로 인하여 탕평(蕩平)의 효과에 대해 힘써 말하기를,
"탕평을 주장하는 사람을 혹자는 당(黨)을 부식(扶植)한다고 비난하는데, 성심(聖心)에 요동(撓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탕평은 청론(淸論)이니 내가 어찌 투저(投杼)621)  의 뜻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를 논하는 자들은 마땅히 관심(關心)이 없이 행해야 할 것이니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관심이 없어야 한다는 분부는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모든 일에 어찌 관심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있겠습니까? 당(黨)을 수립(樹立)한다는 지목이 비록 옳지 않은 듯하지만, 탕평을 행하고자 한다면 오직 탕평의 당(黨)이 많지 않음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黨)’ 자에 폐단이 있다. 탕평이 되면 어찌 당이 있겠느냐? 탕평을 비평(批評)하는 자는 진실로 나의 신하가 아니다. 만약 많이 모여 무리 짓는 것을 위주로 한다면 또한 혼륜(混淪)의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지금의 시세(時勢)는 처음과 다릅니다. 가령 전하의 춘추가 많아 지기(志氣)가 쇠약해진 뒤에 세도(世道)를 유지하는 바가 만약 오늘만 못하게 된다면 뒷날의 근심은 지난날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무당무편(無黨無偏)’과 ‘탕탕평평(蕩蕩平平)’은 성왕(聖王)의 지극한 공이다. 인군이 진실로 탕평의 정치를 행할 수 있다면 삼대(三代)의 융성함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을 어찌 인신(人臣)의 사당(私黨)으로 지목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유엄이 감히 ‘당(黨)을 수립한다.’는 말을 군부(君父) 앞에서 했으니, 어찌 크게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근래 연석(筵席)의 사이에 왕패(王霸)·진가(眞假)의 의논이 있었기 때문에 혹 그 말이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 빼앗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이런 망령되고 방자한 말을 하여 공(公)을 빌어 사사로움을 도모하는 술책을 이룩하고자 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성상의 ‘관심이 없어야 한다.’는 분부는 대개 또한 그 심술(心術)을 엿보고 깨뜨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96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사학(史學)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註 621] 투저(投杼) :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세 번 듣고 비로소 의아(疑訝)하여 짜던 베틀의 북을 내던지고 달아났다는 고사(故事). 전(轉)하여 참언(讒言)을 믿는 일.
사신은 논한다. ‘무당무편(無黨無偏)’과 ‘탕탕평평(蕩蕩平平)’은 성왕(聖王)의 지극한 공이다. 인군이 진실로 탕평의 정치를 행할 수 있다면 삼대(三代)의 융성함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을 어찌 인신(人臣)의 사당(私黨)으로 지목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유엄이 감히 ‘당(黨)을 수립한다.’는 말을 군부(君父) 앞에서 했으니, 어찌 크게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근래 연석(筵席)의 사이에 왕패(王霸)·진가(眞假)의 의논이 있었기 때문에 혹 그 말이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 빼앗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이런 망령되고 방자한 말을 하여 공(公)을 빌어 사사로움을 도모하는 술책을 이룩하고자 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성상의 ‘관심이 없어야 한다.’는 분부는 대개 또한 그 심술(心術)을 엿보고 깨뜨린 것이다.

 

12월 18일 을축

사관(史官)을 보내어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를 불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오늘 경을 부른 것은 치도(治道)를 논하는 말을 듣고자 해서이다. 치도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니, 이광좌가 사사(辭謝)하고 인하여 나아가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보민(保民)이 우선입니다. 《서경(書經)》 오십편(五十篇) 가운데 ‘사해(四海)가 곤궁(困窮)하면 천록(天祿)이 영영 끝장이 난다.’는 한 구절이 바로 단안(斷案)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백성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었으며,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하고 당화(黨禍)가 하늘에 사무쳐 있습니다.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재물을 절약하여 백성을 구제하고 인재를 얻어 직무를 맡기는 두 가지 일이 오늘날의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또한 인주(人主)가 뜻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반드시 기갈(飢渴)에 음식을 구하는 것과 같이 돈독하게 뜻을 세우신 뒤에야 바야흐로 일분이나마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달의 대고(大誥)는 실로 뉘우치고 감동한 뜻에서 나온 것이나, 그래도 성탕(成湯)의 육책(六責)622)  이 골수에 깊이 스며든 것만은 못합니다. 전하의 마음이 진실로 성탕과 같다면 어찌 실효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또 목전의 절급(切急)한 폐단과 양역(良役)을 변통할 대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조적(糶糴)623)  의 모축(耗縮)과 군정(軍丁)의 도고(逃故)와, 전재(錢財)의 고갈과, 수령(守令)을 가리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큰 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역(良役)에 이르러서는 실로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혹자는 호포(戶布)·구전(口錢)624)  을 행해야 마땅하다고 말하지만, 오늘날의 이른바 양반(兩班)이란 앉아서 조곡(糶穀)을 먹고는 또한 즐겨 납부하지 않으니, 갑작스레 전에 없었던 역(役)을 책임지운다면 장차 잡아가두고 채찍질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같이 할 즈음에 또 장차 어떠한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결포(結布)에 이르러서는 그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만약 큰 흉년을 만난다면 무엇으로 봉납(捧納)을 책임지우겠습니까? 그래서 신은 곧 변통에는 다른 방도가 없고 오직 국가에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해 용도(用道)에 여유가 있게 한다면 양역 또한 반은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경묘조(景廟朝)에 1냥(兩)을 줄일 의논을 냈지만 유사(有司)의 신하가 불가하다 하여 그만두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일시적인 혜택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만족스러움을 알지 못하니 만약 1필을 줄여 주면 또 반드시 반 필을 바라게 된다. 인족(隣族)에 대한 폐단은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이는 수령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수령을 가려 뽑지 않으면 비록 한 필을 봉납하지 않는다 해도 백성들이 역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대개 자기의 신역(身役)에서 그친다면 백성이 받는 곤궁함이 어찌 이렇게 극심한 데에 이르겠습니까? 인족에게 함부로 침징(侵徵)함이 혹 3,4인의 몫이 겹칠 때도 있으니, 이것이 곤궁한 백성이 보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자,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뜻을 세움이 굳지 않고 자신의 사사로움이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무릇 제왕가(帝王家)의 자녀는 반드시 재물이 부족한 걱정은 없는 것인데, 이번에 새로 태어난 옹주(翁主)를 위해 큰 제택(第宅)을 짓고 광대한 토지를 절수(折受)했으며, 따라서 온갖 물건을 구비하였습니다. 심지어 외방(外方)의 구사(丘史)를 뽑아 올리는 일까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절약하는 뜻이겠습니까? 또한 본래 고귀한 곳에서 태어난데다가 또 사치스러운 데에 힘쓰는 것은 자못 복(福)을 아끼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수령을 가리는 것이 천명(天命)이 영원한 것을 하늘에 비는 근본이 되며, 그 근본은 또 학문에 부지런하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깊이 가장(嘉奬)하여 받아들였다. 이어 내사(內司)에 신칙하여 이미 도착한 절수 성책(折受成冊) 이외에는 한결같이 모두 그만두고 각사(各司)의 면세를 계속 청하지 말도록 하였다.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동필(金東弼)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양득중(梁得中)을 집의(執義)로, 이저(李著)를 사간(司諫)으로, 김광세(金光世)·윤득징(尹得徵)을 지평(持平)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12월 19일 병인

삼남(三南)의 도신(道臣)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대고(大誥)를 이제 막 내렸으니, 상하(上下)가 비록 힘쓸 것이나, 눈앞의 급선무는 생민(生民)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태만하여 세월만 보내고 있다. 해가 장차 바뀌어 만물이 이에 소생할 것인데, 아! 저 백성들만은 유독 근심과 괴로움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왕자(王者)가 차마 할 바이겠는가? 언제나 호남(湖南)을 생각하면 먹고 쉬는 것이 어찌 편하겠느냐? 연해의 우심(尤甚)한 고을에 대해 근래 사망한 상황과 민간의 질고(疾苦)를 다시 더 두루 물어 상세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명을 받고 도(道)를 안찰(按察)하는 신하가 추솔(騶率)을 간단히 거느리고 몸소 위문(慰問)하여 사실에 의거해 치계(馳啓)하라. 개혁할 만한 것은 옛투식을 따르지 말고 묘당(廟堂)과 상확(商確)해 처리할 것이나, 번거롭게 알리지 않고 스스로 개혁할 만한 것은 오직 도신(道臣)에게 달려 있다. 비록 평년(平年)에 있어서도 생민(生民)의 기쁨과 슬픔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는데, 하물며 이러한 우심(尤甚)한 읍(邑)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전최(殿最)는 비록 이미 봉(封)해졌지만, 만약 백성을 보존하지 못하고 백성을 소요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또한 즉시 치문(馳聞)하라. 내가 마땅히 엄히 징계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청대(請對)하여 같이 들어왔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진실로 성심(聖心)의 분발하심이 요컨대 조만간에 있을 줄 알고 있었으나 삼가 일전의 대고(大誥)를 보건대, 대개 즉위하신 이후로 이처럼 크게 분발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신이 또한 평소 가슴속에 간직해 온 바가 있으니, 만약 성문(聖問)을 받들게 된다면 삼가 마땅히 숨김없이 모두 말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가슴속의 것을 널리 말하겠다. 신축년·임인년 이후로 국사(國事)를 한결같이 포기(抛棄)한 채 내버려 두어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시상(時象) 외에는 다른 일이 없었는데, 백성과 나라의 폐단이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았으니,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하후(夏后)·은(殷)·주(周)로부터 비로서 세습(世襲)으로 계승하였는데, 뒷날 제왕(帝王)에서 걸(桀)·주(紂)·유(幽)·여(厲) 같은 왕이 있어 끝내 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말았던 것이니, 이른바 ‘창업(創業)은 쉽고 수성(守成)은 어렵다.’는 것이다. 대개 수성의 인주(人主)는 한갓 조종(祖宗)이 쌓아 놓은 덕(德)을 믿고 ‘이와 같이 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여 편안히 지내면서 일찍이 힘쓰지 않았고, 도(道)가 없는 인주의 경우는 또 거기다가 방자(放恣)하고 편벽되어 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애(仁愛)한 하늘이 어찌 그로 하여금 복망(覆亡)케 하겠는가? 우리 나라는 중국과 달라서 비록 한(漢)·당(唐)의 위세로써도 땅을 빼앗고 나라를 바꿀 수 없었으며, 조선(朝鮮)의 안에서 스스로 서로 대(代)를 갈아 오늘에 이르렀다. 3백 년 종사(宗社)의 맡김이 내 한몸에 달렸으니, 어찌 상도(常道)를 좇아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수 있겠는가? 금일의 형세는 굶주린 사람이 대황(大黃)과 부자(附子)를 먹은 것과 같으니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는가? 대고(大誥)로 칙려(飭勵)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대개 창업(創業)한 임금은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아서 비록 유유범범(悠悠泛泛)하게 해도 다스릴 수 있으나, 수성한 뒤에는 해가 오방(午方)을 지나 미방(未方)으로 향하는 것과 같아 만약 혹시라도 인순(因循)한다면 결코 만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념(聖念)이 분발해 힘쓰시니, 이는 진실로 크게 변화시킬 전기(轉機)입니다. 오늘 전하께서 손을 댄 곳은 ‘진실로 뜻을 세우고, 치도(治道)를 구하며 진실로 인재를 쓰고 재물을 절약하는 것’에 불과하니, 일정한 공부(工夫)로서 일정한 사업(事業)을 이루신다면, 하고자 하시는 대로 다스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명(明)나라의 선종(宣宗)은 한 사람의 수령(守令)을 제수하는 데도 언제나 현부(賢否)를 묻고 상벌(賞罰)을 시행하였으므로, 황명(皇明)의 다스림이 이에서 융성해졌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끝내 선한 사람을 선하게 여기시나 능히 등용하지 못하시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시나 능히 버리지 못하는 병통이 있기 때문에, 죄가 있는 자도 또한 징즙(懲戢)이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앞서는 편벽된 의논이 있었기 때문에 피차가 서로 과실(過失)을 말하였으나, 한 번 탕평(蕩平)을 행한 뒤로부터는 온 세상이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으니, 군하(群下)의 허물을 전하께서 어디를 통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언로(言路)를 크게 연다면 인재(人才)가 또한 마땅히 무리를 지어 나올 것인데, 탕평이란 이름은 있으나 탕평의 실적은 없습니다. 무릇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씀에 있어서 저울대처럼 공평히 하여 색목(色目)을 논하지 말고 공정하게 임용(任用)한 뒤에야 비로소 동서 남북(東西南北)의 탕평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다만 노론(老論)·소론(少論)만 탕평되었을 뿐입니다. 무릇 탕평이란 것은 천하(天下)의 탕평이 있고 조선(朝鮮)의 탕평이 있는 것인데, 어찌 유독 노론·소론의 탕평만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릇 이와 같기 때문에 대소(大小) 조신(朝臣)들은 서로 엄호(掩護)하는데 힘쓰고 있으니, 가령 나라가 장차 위태롭고 멸망하는 데에 이르더라도 절의(節義)를 위해 죽는 선비는 기필코 없을 것입니다. 혹 한 사람이나마 직언(直言)하는 자가 있으면 뭇사람들이 떼를 지어 떠들어 대며 함께 비척(非斥)을 더하니, 사람들은 모두 말하지 않는 것을 득계(得計)로 여깁니다. 이와 같은데 누가 기꺼이 시비(是非)를 직언하겠습니까? 인재(人才)에 대해 논하자면, 오광운(吳光運)의 문한(文翰)과 좌지(坐地)는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보다 낮지 않으나 쓰여진 것은 송인명과 조현명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홍경보(洪景輔)는 이미 옥당(玉堂)과 대간(大諫)을 거쳤으며, 자력(資歷)과 인물이 이광덕(李匡德)·민응수(閔應洙)·이수항(李壽沆)·이성룡(李聖龍)의 무리보다 밑돌지 않는데, 완백(完伯)의 제수에 논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사람을 쓰는 것이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노론·소론의 나라이지 전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니, 검토관(檢討官)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박문수의 말은 잘못입니다. 오광운은 공의(公議)에 배척받아 지신(知申)의 망(望)에서 발거(拔去)되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칙려(飭勵)하는 날을 당하여 어찌 감히 다시 ‘노소(老少)’ 두 글자를 성상(聖上) 앞에서 꺼낸단 말입니까? 사체(事體)가 미안(未安)하였는데,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군이 오늘 당직(戇直)한 말을 하였다. 대고(大誥)로써 구언(求言)한 때에 만약 추고를 청한다면 초야(草野)에 있는 사람들이 누가 기꺼이 와서 말하겠는가? 유신(儒臣)이 잘못한 것이다. 이미 19일 하교(下敎)에 유시(諭示)했지만, 이제 노론·소론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또한 아픈 것을 숨기고 의원을 꺼리는 것과 같다."
하였다.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신은 오광운을 소인(小人)이라고 생각합니다. 올 여름의 상소(上疏) 가운데 ‘임금은 있고 신하는 없다.’고 한 것은 완전히 아첨이며, 아래 조항의 ‘위복(威福)’이란 말도 또한 심히 참특(譖慝)한 것입니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자기(自己)에게 절핍(切逼)하기 때문에 소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오원이 말하기를,
"그 사람됨을 살피건대 끝내 경위(傾危)하여 불길하며, 그 상소 역시 그러하니 신은 결단코 그가 소인인 줄 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광운의 마음을 캐본다면 슬픈 일이니, 어찌 소인이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금일의 폐단은 재상이 사의(私意)를 쓰지 않아야 옳은데, 심지어 자질구레한 선천(宣薦)까지 재상이 주천(主薦)하는 자를 불러 단단히 청촉(請囑)합니다. 이런 일이 한 번뿐이 아니니 기강(紀綱)이 어떻게 서겠습니까? 다스리는 도(道)란 요행(僥倖)을 억제한 뒤에야 백성의 뜻을 정할 수 있고, 백성의 뜻이 정해진 뒤에야 기강이 설 수 있으며, 기강이 세워진 뒤에 온갖 일이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소강절(邵康節)의 시에 ‘당기기는 천균(千勻)의 쇠뇌처럼 하고, 갈기는 마땅히 쇠를 백 번 제련하듯 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의 재상은 만약 시변(時變)을 당했을 경우 들어가 임금에게 고하고 계구(戒懼)·수성(修省)하며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를 강구(講求)하였는데, 지금은 역변(逆變)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심지어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변고까지 있으나, 조정에서는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을 모르며 투미(媮靡)는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인심이 이와 같고 기강이 이와 같으며 백성은 궁핍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3백년 종사(宗社)가 어찌 전하 때에 망하려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크게 분발하고 크게 진작(振作)한 연후에야 국사(國事)를 다스릴 수 있고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함이 너무 지나치나 학식이 부족하여 작은 일은 살피지만 혹 대체(大體)를 잃기도 하십니다. 삼가 원하건대 긴요하지 않은 문서는 제거해 없애고 긴절(緊切)한 공부(工夫)를 하시며, 전날의 투타염희(媮惰恬嬉)하던 것을 버리신다면 국가를 부지(扶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소회(所懷)는 낮이 지나고 밤을 새워도 다 말씀드릴 수 없으니, 어리석은 충정이 답답하게 맺힌 나머지 거의 광기(狂氣)를 발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군의 이와 같은 기습(氣習)을 사람들이 거칠다고 하지만 나는 당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비록 옹주(翁主)의 제택(第宅)으로 말씀드리더라도 거처(居處)할 만하면 족할 것이니, 어찌 장대(張大)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득한 큰 들과 척박한 산전(山田)에 이르기까지 곳곳을 절수(折受)하였으니, 부마(駙馬)의 위력으로 처음에는 수습(收拾)할 수 있겠지만, 그 자손들은 결코 추심(推尋)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갓 목전(目前)의 민폐를 끼치는 것일 뿐이니, 한도(限度)를 정해 비옥한 땅을 사주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신도 또한 일찍이 자식을 낳았으나 훈봉(勳封)을 얻자 갑자기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서명균(徐明均)이 복이 많은 것은 선세(先世)의 검약(儉約)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조물주의 이치는 본래 이와 같은 것입니다. 무릇 부마의 전택(田宅) 등에 관계된 일은 한결같이 검약을 따라서 많은 복을 받게 하소서.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성색(聲色)·토목(土木)·사치(奢侈)의 일을 일체 물리쳐 버리셨으나, 사사롭지 않을 수 없고 욕심 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단지 부마의 영산(營産) 한 가지 일에 있으니, 이 간절한 일에 대해서도 단연코 잘라 버린다면 그 나머지 국사(國事)는 이에 절반을 넘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의 말이 절실하다. 이후로 만약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경은 또 들어와 말하라. 내가 임어(臨御)한 지 1기(紀)에 가까워지니 자못 여러 신하들의 장단점을 알겠다. 을사년 이후로 이병태(李秉泰)가 자못 고지식하였고, 그 뒤에 안색을 범하여 강력하게 간하고 모자란 점을 보필한 사람으로는 조현명(趙顯命)이 있었으며, 조용히 개도(開導)하며 일에 따라 옳은 것을 올리고 나쁜 것을 고치는 자로는 이종성(李宗城)이 있었다. 깊이 생각하고 널리 염려하여 일을 맡아 효과(効果)을 이룩하며, 비록 외임(外任)에 있어서도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가 있음을 알게 하는 사람은 경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학문이 부족할 뿐이다."
하였다.

 

부평 부사(富平府使)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규모(規模)로 오늘날의 경상(景像)을 보면 천고(千古)에 없던 역란(逆亂)이 이미 조용해진 듯하고, 백대(百代)토록 깨지지 않던 못된 붕당(朋黨)이 이미 제거된 듯합니다. 조정의 위에는 마치 인협(寅協)한 듯하고, 강역(彊城)의 안은 마치 편안한 듯하며, 낭묘(廊廟)는 여유가 있어 민우(民憂)를 강구할 것이 없는 듯하고, 대각(臺閣)은 조용하여 관사(官師)의 논할 것이 없는 듯합니다. 이에 뜻이 차고 마음이 만족해져 지존(至尊)은 교만함을 기대하지 않아도 절로 교만해지고, 재상은 안일함을 기대하지 않아도 절로 안일해집니다. 겉으로 편안하게 다스려지는 형상은 다만 허위를 꾸밀 뿐이고, 세도(世道)가 날로 어그러지고 인심이 날로 험악해져 부자(父子) 사이의 변고가 어리석은 백성에게서 간혹 나타나고, 군신(君臣) 사이의 분의(分義)가 거족(巨族)에게서 먼저 허물어졌습니다. 왕부(王府)에서의 신국(訊鞫)하는 자리가 없는 달이 없고 여러 도에서 체포(逮捕)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치평(治平)의 운회(運會)이며 화길(和吉)의 기상이겠습니까? 무고(巫蠱)와 저주(詛呪)의 변고가 거의 여항(閭巷)에까지 두루 퍼져 있으니, 진실로 종이 주인을 해치는 것이 아니면 모두 얼첩(孽妾)이 적실(嫡室)을 모함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세도(世道)를 장차 일분이나마 믿을 수 있겠습니까?
3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팔도(八道)가 같이 기근에 허덕이니, 기한(飢寒)에 죽지 않으면 질역(疾疫)에 죽은 자들이 전후에 거의 10만을 헤아립니다. 세금을 덜어주고 호포(戶布)를 감해 주는 은혜를 해마다 살펴 행하여 문득 상례(常例)와 같이 하고, 진휼을 의논하여 급재(給災)하는 정사가 매년 강구되어 거의 고전(古典)과 같이 하는데, 위에서 덜어내지 않는 것은 아니나 아래에서 이익 보는 것이 없습니다. 이는 그 까닭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중외(中外)에서 겸병(兼幷)하여 소민(小民)의 근본이 뒤집혀졌으며 위아래 할 것 없이 매우 사치하여 국가의 재정(財政)이 한없이 새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지금 길바닥에 엎어져 죽은 사람들이 조종(祖宗)이 휴양(休養)한 적자(赤字)가 아님이 없으나, 그 양전(良田) 미답(美畓)은 모두 호부가(豪富家)에 들어가 있고, 밭 가운데에 흘린 땀방울로 된 세금은 다만 쓸데없는 관리의 녹봉(祿俸)에 허비되며, 손가락이 찢어지듯 짠 베틀의 비단은 한갓 활리(猾吏)의 돈주머니를 기름지게 할 뿐입니다. 또 허다한 갑제(甲第)에는 자식과 아낙네를 판 돈이 얼마나 쌓여 있는가 알지 못할 지경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높은 관직(官職)과 후한 녹(祿)으로 허다한 신료(臣僚)들을 양득(養得)하면서,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수척(瘦瘠)함을 앉아서 보듯 하여 불행하게도 백성들이 다 죽어 가고 국세(國勢)도 따라 무너지게 된다면, 오늘날의 사대부들이 또한 어찌 홀로 스스로 교만하고 안일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죽을 죄를 졌습니다. 전하께서 내사(內司)의 사장(私藏)을 능히 혁파하지 못하시면서 어떻게 군하(群下)의 뇌물꾸러미를 막을 수 있겠으며, 전하께서 궁방(宮房)의 점수(占受)를 능히 멈추게 하지 못하시면서 어떻게 군하의 전택(田宅)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재정은 고갈되고 백성은 곤궁하여 원망과 비방이 떼 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강장(疆場)이 조용하지 않게 된다면, 간도(奸徒)와 얼수(孽竪)가 화(禍)를 즐겨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침고(沈痼)된 문무(文武)가 난(亂)을 생각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니, 이같은 인심(人心)을 장차 일분이나마 믿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개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지난날에 어지러움을 감정(勘定)하신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지난해에 참척을 당하고도 좌절하지 않으면서 다만 ‘파당(破黨)’ 두 글자로서 제왕(帝王)의 대사업(大事業)으로 여기시어 애석하게도 이치를 살핌이 익숙지 못하고 의(義)를 봄이 정밀하지 못하여 경권(經權)을 섞어 쓰고 의리(義利)가 같이 행해지는 데 이르렀으니, 전하께서는 황극 제일의(皇極第一義)를 한(漢)나라        당(唐)나라가 쓴 패도(霸道)의 나머지 술수로 오인함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편벽됨이 없고 당파가 없으면 왕도가 탕탕(蕩蕩)하며, 당파가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도가 평평(平平)한 것이니, 이른바 왕도라는 것은 호오(好惡)가 없어 저절로 탕탕할 수 있는 것이고, 편당이 없어 저절로 평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욕(人慾)이 사라져 없어지고 천리(天理)가 유행(流行)되어 황극에 모이고 황극으로 돌아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은 단지 이탕평의 효험일 것인데, 어찌 먼저 제목(題目)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이치에 붙이지 아니하여 재량(裁量)이 너무 지나치고 배비(排比)가 너무 심해서 노소(老少)를 쌍쌍(雙雙)으로 대거(對擧)하되 양단(兩端)으로 나누듯 하였습니다. 저 가운데서 한 개의 옳은 것을 구하면 이 가운데서도 역시 한 개의 옳은 것을 구하고, 저 가운데서 한 개의 그릇된 것을 성토하면 이 가운데서도 또한 한 개의 그릇된 것을 성토하여 무릇 출척(黜陟)하고 용사(用捨)하는 사이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번 정과(政窠)가 나오면 정관(政官)의 심력(心力)이 거의 지치게 되고, 한번 묘천(廟薦)이 나오면 대신(大臣)의 조정(調停)함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 그 끼쳐질 폐단은 경중(輕重)이 서로 뒤섞이고 장단점을 구분하기 어려워져 물성(物性)을 굽히고 물정(物情)을 손상시킴이 어찌 큰 신발과 작은 신발의 값이 같은 데에 그치겠습니까? 홍범(洪範)625)                  에 이르기를, ‘덕(德)을 좋아함이 없으면 너에게 비록 작록(爵祿)을 주더라도 그것은 너에게 허물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녹을 어진이에게는 주고 악(惡)한 자에게는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지금은 사사로운 뜻으로써 혼란시키고 사사로운 지혜로써 천착(穿鑿)하며, 지벌(地閥)로써 국한하고 형세(形勢)로써 선택하며, 색목(色目)으로써 견별(甄別)하니, 이는 한유(韓愈)가 이른바 ‘어진 자에게 천금(千金)을 주고 어질지 못한 자에게도 역시 천금을 주었는데, 어진 자는 날로 물러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날로 나아간다.’는 것에 또한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이제 지금 전하께서는 사람을 쓰는 데는 너무 급히 하시고 사람을 버리는 것에는 너무 쉽게 하시어 아침에 한 사람을 임용하였다가 저녁에 한 사람을 바꾸니, 빨리 나아간 자는 필시 재빨리 물러나며 지우(知遇)를 입었던 자도 필경 의심을 받습니다. 앞의 사람이 이미 소원(疏遠)해지자 뒷사람이 올라가고 옛사람이 이미 제거되자 새로운 사람이 그 사이에 낍니다. 전하께서 평일에 믿고 의지하던 자들을 차례로 배척하여 버리지 않음이 없으니, 비록 모려(謀慮)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펼치겠으며, 비록 재지(才智)가 있다해도 어떻게 시행하겠습니까? 조금 지조를 지키는 자가 있더라도 간사한 방법으로 벼슬길에 오른다면 그 지조가 아니며, 뒷 구멍을 뚫고 상종하고자 한다면 그 지킨 것이 아닙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염의(廉義)를 무릅쓰고 청촉하는 무리들은 문득 좋은 벼슬을 얻고, 물러나 조용히 자중하는 선비는 실제 쓰임에 충원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황극(皇極)을 크게 세우시고 오직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뜻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명기(名器)와 작상(爵賞)은 인주라도 오히려 사사로움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인데, 주고 빼앗음을 또 어찌 군하(群下)가 제멋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현우(賢愚)를 묻지 않고 반드시 사람에 따라 기쁘게 하며, 군하(群下)는 한갓 호오(好惡)를 좇아 반드시 당사(黨私)를 부식(扶植)하려고 하여 조종(祖宗)께서 아끼신 공기(公器) 보기를 부귀(富貴)한 자의 하룻밤 전사(傳舍)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조정의 극선(極選)이 날로 낮아지고 국가의 공기(公器)가 날로 천(賤)해지는 것이 어찌 그리 괴이하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세도(世道)를 만회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인심을 수습하고, 인심을 수습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당습(黨習)을 없애 버릴 방도를 살피시고, 당습을 없애 버리고자 하신다면 먼저 인재를 견별(甄別)할 방법에 공력을 기울이소서. 성취함이 빠르냐 늦으냐는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나, 오직 마땅히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의심하지 말며, 막히지 말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며, 유구(悠久)하게 행하고 성실하게 해야 할 것인데, 근래 성의(聖意)가 있는 바를 보면 또한 이미 7,8분(分)은 늦추어져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모려(謀慮)하는 사람은 꽉 막힌 데 가깝고 설시(設施)하는 사람은 경장(更張)에 가까우며, 조수(操守)하는 사람은 교항(驕亢)에 가깝고 재지(才志) 있는 사람은 경박(輕薄)한 데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에 반드시 좌우의 폐단이 없는 자를 취하여 과급(窠級)에 채우십니다. 따라서 녹(祿)을 생각하고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분주하게 봉승(奉承)하느라 겨를이 없는 것을 보고는 끌어다 채우고 구차히 지낼 수 있다고는 하겠지만, 일찍이 뜻있는 사람은 스스로 소원해지고 재주를 가진 자가 스스로 저상(沮喪)되는 것은 깨닫지 못하십니까? 비록 언로(言路)로써 말하더라도 근래 사대부(士大夫)로서 기절(氣節)이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자는 당의(黨議)에 불과하니, 이것은 반드시 참으로 강직(强直)한 기풍이 있어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고 참으로 촉로(觸怒)하여 감언(敢言)할 절개가 있어 임금의 잘못을 척언(斥言)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머뭇거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구차한 것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대개 그 일종의 풍습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여 화복(禍福)의 경계할 만한 것과, 이해(利害)의 두려워할 것임을 거의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일개 가슴속의 기(氣)일 뿐입니다. 지난번 이래 고요하게 잠든 저 세상 사람들이 부앙(俯仰)하며 돌아보는 태도로 가법을 삼을 뿐만 아니라 움추리고 아첨하는 습관으로 도리어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어찌 십수년 간에 이미 고금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조정(朝廷)에서 말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시정(時政)을 지적해 논평하면 재상(宰相)이 미워하고, 임금의 잘못을 척언(斥言)하면 지존(至尊)이 싫어하며, 당론이 같은 자들끼리는 해치고자 하지 않고 뜻이 다른 자를 논박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성총(聖聰)을 크게 펼쳐 대간(臺諫)을 인도하여 말하도록 하더라도 오직 함묵(含默)할까 염려되는데, 진언(進言)하여 죄를 얻었다는 것은 들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하여 견책을 당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 누가 능히 강개(慷慨)하여 거리낌없이 말하고 남의 득실(得失)을 논하여 남의 사기와 미움을 취하겠습니까? 예전에 한 번 나아가고 한 번 물러날 때에는 사대부도 오히려 돌아보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고, 조신(朝臣)으로 권세를 팔고 농락하며 수재(守宰)로서 뇌물을 받는 자들도 또한 법관(法官)이 그 뒤를 의논할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설령 큰 권간(權奸)과 큰 장오(贓汚)가 있더라도 또한 믿는 데가 있어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근래에 말을 하지 않는 풍습이 문득 규모를 이루어 차라리 혹 민폐에 대해 범연(泛然)히 논할지언정 감히 조정(朝政)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진달하지 못했고, 혹 군덕(君德)에 대해 범연히 논할지언정 감히 시론(時論)에 조금이라도 간섭하지 못하였습니다. 묘당(廟堂)과 전조(銓曺)에 이르러서는 한 마디 말이라도 관계되면 또한 치고 흔들어 경알(傾軋)한다고 하여 크게는 원한을 갚는다는 죄목을 얻고 작게는 시끄러운 사단을 일으켰다는 의심을 초래(招來)합니다.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은 믿을 것이 없게 되고 국가의 원기(元氣)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무릇 완급(緩急)이 있으면 그 장차 어디에 책임을 지우겠습니까? 관자(管子)는 말하기를, ‘예의 염치(禮義廉恥)란 나라의 사유(四維)이다.’ 하였습니다. 중세(中歲)의 사대부는 긍지가 자못 높아 장쾌(駔儈)626)                  와 상서(象胥)627)                  를 문정(門庭)에 가까이 하지 않았고 관절(關節)과 간탁(干托)이 주군(州郡)에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경사(京司)에서는 월추(月騶)의 녹봉에 반드시 내외(內外)의 구별을 살폈고, 외방(外方)에서 보내는 세시(歲時)의 선물도 반드시 사수(辭受)할 즈음에 엄격하였습니다. 집이 넓고 사치스러우면 오직 세덕(世德)에 혹 누(累)가 될까 두려워하고 구마(裘馬)가 화려하면 오직 공의(公議)가 몰래 비난할까 걱정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맹자(孟子)가 이른바 ‘사양(辭讓)하는 마음은 예(禮)의 실마리요, 수오(羞惡)하는 마음은 의(義)의 실마리다.’라고 한 것인데, 지금 조정의 예양(禮讓)하는 기풍은 일체 소멸되어 없어졌고, 진신(搢紳)들의 염치(廉恥)를 지키는 도리는 태반이나 쓴듯이 없어졌습니다. 진실로 집을 이롭게 하는 데 있어서는 비록 염치를 손상시키고 의리에 해로움을 안다 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비난과 비웃음을 사도 창피한 줄을 모릅니다. 비록 맑은 조정의 사대부들의 기풍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사유가 펼쳐지지 않아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된 데 거의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윽이 살피건대 전하의 본래 기질이 없마나 밝고 순수합니까? 그러나 학문이 깊지 않고, 조존(操存)에 힘쓰지 않아 일을 만나 불쑥 나오는 것은 곧 해질녘에 돌아가 관렵(觀獵)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리(天理)는 자연히 소멸되어 날로 조금씩 줄어들고, 인욕(人慾)은 절로 자라 날마다 조금씩 불어납니다. 진실과 거짓이 서로 뒤섞이고 의(義)와 이(利)가 번갈아 공격하는 까닭에 높은 곳은 너무 높고 낮은 곳은 너무 낮아 잠시 성현이 되었다가 잠시 범인이 되기도 하고, 급속히 왕도(王道)가 되었다가 급속히 패도(霸道)가 되기도 합니다. 근래에는 또 거만스레 성현인 체 자부하며 방훈(放勳)628)                  과 중화(重華)629)                   같은 다스림을 이미 8, 9분(分)의 지위(地位)를 차지한 양 하십니다. 그러나 꼭 급암(汲黯)이 이른바 ‘폐하께서 속에는 욕심이 많은데 밖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푼다.’고 한 것과 같으니, 삼대(三代)는 진실로 논할 것도 없거니와 또한 어떻게 한(漢)·당(唐)의 중주(中主)에 발돋움해 미치겠습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전하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린 것이 곧 전하의 명예(明睿)요, 전하의 자질(資質)을 그르친 것이 곧 전하의 재지(才智)입니다. 왜냐하면 가령 전하의 명예가 만 가지 이치를 감촉(鑑燭)하는데 부족하고 재지는 백료(百僚)를 굴복(屈服)시키는 데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총명을 취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재지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총명함은 능히 호말(毫末)의 끝을 통촉(洞燭)할 수 있고, 재지는 발자국 사이를 두루 살필 수 있는 까닭에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세상에 가인(可人)이 없으며,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나고 천고(千古)를 휩쓸었으니, 전하의 마음에도 역시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저 군하(群下)들 중에 능히 곧은 도(道)를 스스로 지키고 정색(正色)하여 과감히 말하는 자가 있다면, 전하께서 비록 총명과 재지로써 스스로 굽히지 않더라도 또한 어찌 의리(義理)에 굽혀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대관(大官)은 아첨[容悅]하고 소관(小官)은 아유(阿諛)하여, 오늘 전하의 뜻을 맞이하고 내일은 전하의 생각을 받들어 교만한 마음을 기르는 것이 문득 이미 습관이 되고 성품으로 이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만한 사람이 없고 나를 어길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심(聖心)이 향한 곳은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다가 문변(文辯)을 꾸며 사람을 제어(制御)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혹 단점을 보호함이 너무 지나친 데 이르면 도리어 그 졸렬함이 노출되고 과실을 부끄러워함이 너무 심하면 도리어 잘못을 그대로 이룹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본래 칠정(七情)의 상도(常道)이나 전하께서는 슬픔을 노여움으로 노여움을 슬픔으로 옮기니, 촉발되어 터져나올 때는 안색이 너무 사나워짐을 스스로 알지 못하시고, 폭발될 때 미쳐서는 울음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와 흐느낌을 깨닫지 못하십니다. 아! 여항(閭巷)의 자호(自好)하는 선비는 조금이나마 수성(修省)에 마음을 둠이 있다면, 오히려 또 이치로써 사물(事物)에 응하고 뜻으로써 기(氣)를 제어합니다. 일찍이 당당(堂堂)한 천승지존(千乘之尊)이라 하면서 이런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조정에 임하여 아랫사람과 접할 때에 이러한 놀라운 거조(擧措)가 있단 말입니까? 일이 지나가고 나서 후회가 생기면 전하께서는 매번 마음에 쌓인 상처(傷處) 때문이라고 미루어 버립니다. 하지만 무릇 인주(人主)의 한 마음은 실로 만화(萬化)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일종의 사루(私累)에 휘말린 바 되어 모쪼록 가리고 꾸며 오직 드러날까 두려워하면서도 일찍이 좌사(左史)는 행동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말을 기록하여 백세(百世) 뒤에 득실(得失)을 의논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안색을 변하여 진노(震怒)하고 서안(書案)을 치며 오열하는 것은 종척(宗戚)의 일이 아니면 곧 절수(折受)하는 일이며, 절수하는 일이 아니면 궁차(宮差)에 관계된 일입니다. 어찌 일찍이 나랏일을 통탄해 천위(天威)를 스스로 떨치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성상께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으며, 한 불충(不忠)한 신하를 죄주어 나라 사람들의 노여움에 사과하고, 한 불법(不法)한 관리를 징치(懲治)하여 우리 백성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을 보았겠습니까? 단지 이 출치(出治)의 근본이 애초부터 순수하게 정도(正道)에서 한결같이 나오지 않았으니, 정령(政令)과 시조(施措) 사이에 절로 마음에서 일어나 일을 해치는 병이 있게 된 것입니다. 위에서는 자량(慈諒)을 인(仁)으로 삼는데 아래서는 세월만 보내는 것으로 일을 삼고, 위에서는 총찰(聰察)로써 밝음을 삼는데 아래서는 각핵(刻核)을 능한 것으로 여기며, 위에서는 거짓을 억측함으로써 지혜로 삼는가 하면 아래서는 엿보고 추측(推測)함을 슬기로움으로 여기고, 위에서는 받들어 봉행하는 것을 충(忠)으로 여기는가 하면 아래서는 무조건 따르는 것을 공손하다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일을 행하고 다스림을 이룩하며 기강을 세우고 떨침에 있어 모두 구차하게 얽어매고 고식적으로 끌어다 채우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신하를 부리는 방도에 대해 주의(主意)를 잘못 두고 계십니다. 은수(恩數)로써 얽어맬 수 있고, 위령(威令)으로써 두렵게 할 수 있고 권술(權術)로써 부릴 수 있다고 여기시기 때문에 작록으로써 유언할 수 없으면 은수로 이어대고 은수로써 얽어맬 수 없으면 위령으로 이어대며, 위령으로써 두렵게 할수 없으면 권술로 이어댑니다. 무릇 일체 끌어대고 버티는 즈음에 있어서 십분 박절(迫切)한 환경을 만들고는 농락(籠絡)함으로써 묘계(妙計)를 삼고 마구 몰아댐으로써 기이한 술책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국가의 체통이 높지 못하게 되고 군신간의 분의(分義)가 엄숙하지 못하게 되어,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군상(君上)을 두려워할 줄을 알지 못하게 하니, 가령 번진(藩鎭)이 교만하고 사나우며 외척이 방자하게 마구 날뛰는 것이 당(唐)·한(漢)의 말기와 같아진다면 전하께서는 능히 그들을 꺾어 복종시키고 제어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위급한 때에 의지할 만한 자가 유사시(有事時)에 오직 좌우에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시지만, 국가가 한가한 때에 이르면 초개(草芥)처럼 버립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해 보소서. 자신을 잊고 토벌을 청한 원훈(元勳)의 경우야말로 어떤 충의(忠義)이며, 적(賊)을 꾸짖고 굴복하지 아니한 진수(鎭帥)야 말로 어떤 절열(節烈)이었습니까? 그런데 해마다 존휼(存恤)하는 은전(恩典)은 까마득하여 들어본 적이 없고, 남아 있는 고아(孤兒)를 녹용(錄用)하라는 명도 또한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종정(從征)했던 선비들은 한갓 자기 집안의 훈귀(勳貴)만을 누렸고, 초(楚)나라 재상의 의관(衣冠)으로 풍자한 것이 하나같이 어찌 우맹(優孟)630)                  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항상 새것을 좋아하면서 옛것을 싫어하며, 정(情)은 많지만 은혜는 적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찡그리고 웃는 것이 모두 예쁘지만, 소원해지면 면목(面目)조차 모두 잊어버립니다. 이는 참새 그물을 펼친 문정(門庭)에 옛 신하들이 주저하고 초피(貂皮)를 꽂은 반행(班行)에 새로 귀하게 된 자가 잇따른 바입니다. 위벌(威罰)은 반드시 소원(疏遠)한 사람에게 행해지고 총영(寵榮)은 언제나 귀근(貴近)한 사람에게 우선하니, 치우친 곳은 너무 치우치고 지나친 곳은 너무 지나칩니다. 똑같이 전하의 신하건만 또한 어찌 피차에 후박(厚薄)을 달리함이 있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또 살피길를 좋아하고 의심이 많아 언제나 군하(群下)를 믿지 못하는 병폐가 있습니다. 억측함이 너무 지나치고 가혹하게 따짐이 너무 심하니, 유능한 사람은 몸을 못펴고 유능하지 못한 사람은 수족을 둘 곳이 없습니다. 지휘하고 부림에 있어 오직 전하의 뜻만을 우러러보기 때문에 큰 경우는 뜻을 품(稟)하고 작은 경우는 명을 받듭니다. 비록 종[奴]이 돼지나 가축을 꾸짖고 말과 소를 매듯 하더라도 웃고 꾸짖음을 그의 뜻대로 따르는데, 관작(官爵)은 내가 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 뭇 신료(臣僚)들을 멸시하고 사부(士夫)들을 능멸하며 부앙(俯仰)하는 자들을 어질다 여기고 고첨(顧瞻)하는 자들을 유능하다고 하며, 정도(正道)를 지키고 돌아오지 않는 신하는 먼저 소원해져 버림을 당하고 충심(忠心)을 품고 자호(自好)하는 선비들은 각각 위축되어 물러날 것을 생각함을 어찌 괴상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저축이 바닥나고 백성의 재산이 고갈되는데 이르러서는 부자는 더욱 사치하여 날로 다투고, 가난한 자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날로 곤궁해지니, 눈앞의 근심이 진실로 백성과 나라가 함께 망하는 형상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궁부(宮府)를 하나로 보고 내외(內外)의 차이를 없게 하며, 검소를 좇는 것은 반드시 성궁(聖躬)에서부터 먼저 하고, 사치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귀주(貴主)로부터 먼저 해야 하실 것입니다. 설령 없애기 어려운 옛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급히 혁파함을 꺼리지 말고, 무릇 급하지 않은 쓸데없는 일에 관계되는 것이면 언제나 헛된 낭비를 아깝게 여겨야 합니다. 마땅히 묘당(廟堂)의 신하에게 명하시되 먼저 온 나라 재부(財賦)의 근원(根源)을 헤아리고, 한 해의 세출·세입의 수를 총계하여 반드시 재감(裁減)한 것이 가장 심할 때를 견주어 정규를 삼아야 하고, 만약 풍년이 들어 넉넉한 때가 되면 흉년에 대비하며, 군국(軍國)의 수요(需要)에 대하여는 임금도 감히 못쓰고 유사(有司)가 감히 범하지 못하게 한 뒤에야 쓸데없는 비용이 절로 감소되고 나라의 저축이 절로 넉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공경(公卿)의 제도를 넘는 지나친 사치와 사서인(士庶人)의 분수를 넘는 지나친 사치는 마땅히 이목(耳目)631)                  의 신하에게 신칙하여 통렬히 규핵(糾劾)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적절한 사람을 얻은 뒤에야 일이 이루어지고 정사(政事)가 거행될 것이며, 적절한 사람을 얻어 오래도록 맡긴다면 진실로 실효(實効)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절한 사람을 얻지 못하고 오래도록 맡긴다면 도리어 실제의 해(害)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전하께서 이른바 ‘오직 인재를 써야 한다’는 말이 이미 곡진한 것입니다. 다만 인재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전하께서 또한 사람마다 반드시 다 아는 것은 아니니, 곧 이는 묘당과 전조(銓曹)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하고 유능 여부가 서로 뒤섞여 한갓 대대의 문음(門蔭)을 빙자해서 한번 청선(淸選)을 거치면 정사(政事)와 문학(文學)에 적절히 마땅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는 이미 관방(官方)에 어긋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로(一路)를 안찰(按察)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임무에 관계됩니다. 옛날의 구준(寇準)632)                  이 추밀부사(樞密副使)로서 무승군 절도(武勝軍節度)가 될 것을 요구하자, 왕조(王朝)에서 오히려 ‘사상(使相)의 직책을 어찌 망령되어 구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직위(職位)가 숭품(崇品)에 이르더라도 마치 몸을 구부려 물건을 줍듯 하여 구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어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데, 전하께서 또 새 규례를 창출(創出)하시어 외보(外補)도 벼슬의 한 자리로 여기시니, 어찌 옛날의 사람 쓰는 도리와 한결같이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원일(元日)의 대조회(大朝會) 때에 마땅히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을 명초(命招)하여 묘당의 여러 재신(宰臣)들과 더불어 조신(朝臣)들의 재능 여부를 상확(商確)하게 하고, 전하께서 이미 맡겨 부렸던 사람들의 경우는 전하께서 친히 견별(甄別)하시어, 문학(文學)에 가합(可合)한 경우는 문학의 반열(班列)에 두시고, 정사(政事)에 마땅한 경우는 정사의 반열에 두며, 혹 문학과 정사를 구비한 사람일 경우는 또한 통재(通才)로 쓰신다면, 한 가지 재예(才藝)도 모두 기록되어 각각 그 적절한 곳에 있게 되고, 뭇 재능이 죄다 쓰여져 모두 그 직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암혈(巖穴)에서 독서하는 선비에 이르러서는 더욱 마땅히 지성으로 불러 경악(經幄)의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고 성심(聖心)의 계옥(啓沃)에 바탕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방면(方面)을 맡기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생민(生民)의 휴척(休戚)에 관계되는 것이니, 이것은 내직(內職)과 중직(重職) 여부를 논할 것 없이 따로 신중한 선택을 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타 수령(守令)·낭료(郞僚)의 선발은 본디 유사(有司)가 있으나, 미리 순방(詢訪)을 더하여 사의(私意)를 따르지 말고 재주에 따라 조용(調用)한다면, 어찌 매번 신칙(申飭)을 더하여 한갓 문구(文具)에 가까운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아! 오늘날 양역(良役)의 폐단을 끝내 변통(變通)할 수 없다면, 필경 망국(亡國)의 화근은 반드시 여기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기로(畿路)를 안렴(按廉)할 때에 대개 일찍이 이 상황을 통렬히 논하였고, 연석(筵席)에 돌아와 아뢰던 날에도 전하께서 이 한 가지 일을 마무리지어 주실 것을 바라는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한바탕 강구(講究)한 것이 또한 비국(備局)의 쓸데없는 휴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비록 신의 고을로 말하더라도 2필(疋)의 양군(良軍)이 거의 9백여 명에 이르는데, 해를 이어 물고(物故)된 부류는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작년에 비국에서 신의 별단(別單) 가운데 모록(冒錄)을 사정(査正)한 일을 여러 고을에 한 부씩 베껴 보냈습니다. 그래서 헐역(歇役)에 나아가 가탁한 자와 돈으로 신역(身役)을 속(贖)하여 한유(閑遊)하는 자들을 비록 간신히 찾아 모았으나, 구차하게 미봉(彌縫)하여 나간 것을 보충하고 빠진 것을 메우는 진실로 이른바 한때의 책망을 면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반드시 백성으로 하여금 그 힘을 펴게 한 뒤에야 일분이나마 구제할 수 있을 것인데, 만약 조가(朝家)의 큰 변통(變通)을 기다린다면 장차 그럴 날이 없을 듯합니다. 때문에 연호(煙戶)의 결역(結役) 가운데서 수령(守令)이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에 시험삼아 재탁(裁度)을 가하되, 널리 편부(便否)를 물어서 매년 1결(結)의 잡역(雜役)으로 다만 3민(緡)을 바치게 하고 1호(戶)의 잡역에는 다만 1민만을 바치게 한다면 전날 역(役)에 응하던 비용과 비교하여 비단 너무 가벼울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비록 흉년에 재감(災減)하고 난 뒤 나머지 결(結)에서 호역(戶役)으로 바칠 것을 함께 계산한다 하더라도 그 수 또한 많을 뿐만이 아닐 것인데, 이 바치는 돈으로 한 고을의 양민 가운데 2필의 절반을 감해 줄 수 있고 관거의 잡비(雜費)도 또한 족히 여유가 있을 것이니, 흉년에는 이와 같이 하고 풍년을 만나면 반드시 증가될 것입니다. 다만 결역(結役)·호역(戶役)으로 응역(應役)하는 가운데서 또 다소의 비용을 감한다면 결역자(結役者)가 편리하게 여기고 호역자(戶役者)가 편리하게 여길 것이며, 양역자(良役者)도 또한 편리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수령 역시 불편함이 없어 절목(節目)을 강구하여 작성하고 한 번의 명령으로 안배해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곧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도 수재(守宰)가 역시 편리함을 따라 설시(設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고을은 비록 이와 같지만 다른 고을은 각각 같지 않으니, 한 고을 가운데서 구제할 수 있었던 방법을 따라 조금이나마 급함을 펴게 한다면, 조정에서 비록 크게 변통을 더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좌시(坐視)하면서 구제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조정에서 평년(平年)의 책봉(責捧)은 전세(田稅)의 두 대동[兩大同]에 불과하나 작년에는 봄·가을을 논하지 않고 한결같이 정퇴(停退)하였는데, 금년에는 정퇴를 논할 것 없이 한결같이 징독(徵督)한다면, 비록 ‘금년의 대동은 다만 가을분만 받는다.’고 말하더라도 실제로는 한 가을 안에 네 대동을 책봉(責捧)하는 셈이 됩니다. 채찍을 치며 독촉함이 날로 급하지만 유포(流逋)는 날마다 잇달아 조정에서 재읍(災邑)을 관휼(寬恤)한다는 명목만 있고 궁민(窮民)을 관휼하는 실상은 없으니, 이는 ‘비록 어질다는 소문이 있으나, 어진 정치가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왕정(王政)은 반드시 경계를 구획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는데, 신의 고을의 진전(陳田)의 세(稅)는 실로 백징(白徵)의 원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 온 가족이 죽어 절호(絶戶)가 된 전지(田地)가 많을 뿐만이 아닌데, 유망(流亡)한 부류에 대하여도 또한 이징(里徵)·족징(族徵)하는 곳이 많습니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개간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도 매년 부세(賦稅)를 물리니, 왕정(王政)으로 헤아려 보건대, 실로 차마 할 수 없는 바입니다. 신은 내년 가을 검전(檢田)할 때에는 결단코 기경(起耕)하는 것에 따라 세(稅)를 거두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직책(職責)이 외읍(外邑)에 있으면서 마음에 간절한 정성이 있어 응지(應旨)하여 면계(勉戒)하였으되, 위로는 궐유(闕遺)를 보충(補充)하고 아래로는 세도(世道)를 개탄하여 조목조목 진술한 것이 명백(明白)하고 면계한 것이 절실(切實)하다. 그 중에서 나의 병통(病痛)을 지적한 것은 더욱 분명하니 마음속으로 가상하게 여긴다. 맹렬히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진달(陳達)한 바는 어제 이미 처분(處分)하였다. 예로부터 능히 개혁(改革)할 수 없었던 것은 또한 사세(事勢)가 부득이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품처(稟處)할 수 있는 것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원소(原疏)는 사관(史官)에게 맡겨 사책(史冊)에 쓰도록 하여 훗날의 임금으로 하여금 나의 과오를 알게 하고 경계할 거울이 되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로 들여와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어 아침 저녁으로 살펴보고 스스로 힘쓰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부평 부사(富平府使)        김상성(金尙星)은 경악(經幄)을 거쳐 외읍(外邑)의 직임에 있으면서 응지(應旨)하여 거리낌 없이 맨먼저 면계(勉戒)를 진달했으니, 그 정성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아마(兒馬) 1필(匹)과 새서(璽書)를 하사하여 나의 뜻을 표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후로는 여러 궁가(宮家)에서 다시는 절수(折受)하지 말라. 비록 이미 계하(啓下)했더라도 아직 거행하지 않은 것은 모두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0일 정묘

이흡(李潝)을 사간(司諫)으로, 심택현(沈宅賢)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양역(良役)에 대한 일은 영성(靈城)이 들어왔다고 들었기에 소상(昭祥)히 해설(解說)하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미 상의하였는가?"
하니,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무릇 일을 행할 때에는 말하는 때와 같지 않습니다. 밖의 의논은 호포(戶布)·결포(結布)는 끝내 시행할 수 없다고 하고, 구전(口錢)에 이르러서는 혹 행할 수 있다고 말하여 의논이 여러 갈래이니, 오늘날의 기강(紀綱)으로는 아마도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합니다. 1필(疋)을 줄이는 것이 비록 좋기는 하지만, 지금의 용도(用途)는 국초(國初)에 비교해 갑절이나 증가되었습니다. 만약 용만(龍灣)과 남한(南漢)633)  에 있을 때의 규모를 쓸 수 있다면 혹 지탱해 나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1필로는 끝내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김상성(金尙星)의 상소 가운데 진달한 바는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곧 사람마다 항상하는 말입니다. 양역(良役) 2필에서 1필을 감해주고 결역(結役)·호역(戶役)의 잡비(雜費)로 1결(結)에 3냥, 1호(戶)에 잡비 1냥을 대신 받아 숫자를 채우자는 것에 이르러서도 또한 장애가 되는 단서가 있습니다. 부평(富平)의 양역은 단지 9백여 명이라고 하니, 혹 이에 의해 변통할 수 있겠지만 다른 고을은 졸지에 행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김상성(金尙星)으로 하여금 한 고을에서 먼저 시행해 보도록 하소서."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생민(生民)의 질고(疾苦)로 양역(良役)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능히 변통할 수 없었던 것은 대개 좋은 대책이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祖) 때도 또한 이에 대한 의논이 있어서 혹자는 ‘호포(戶布)’로, 혹자는 ‘구전(口錢)’으로, 혹자는 ‘결포(結布)’로 하자 하여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고 이해(利害)를 가지고 서로 견제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구전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나 이 또한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김상성의 상소 가운데 ‘1결(結)에 3민(緡)을 수봉(收捧)하고 1호(戶)에 1민을 수봉하여 1필(疋)의 수에 충당한다.’고 한 것도 또한 편중된 데 관계됩니다. 포(布)를 바치는 군사(軍士)에게 감해 준다면 비록 좋기는 하겠지만, 애초부터 포를 바치지 않던 백성이야 어찌 억울함을 호소(呼訴)하지 않겠습니까? 이 또한 균일(均一)하게 하는 정책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역의 변통에 대한 말은 문득 상하의 한담(閑談)이 되었고, 선조(先祖) 때 변통하고자 하였으나 결과를 보지 못했다. 양역을 끝내 변통하지 못한다면 조선(朝鮮)은 반드시 망할 것이요, 호포·결포·구전이 모두 폐단이 있다고 하지만, 만약 현명하고 명철한 임금으로 하여금 맡게 한다면 어찌 변통할 방도가 없겠는가? 금일 차대(次對)는 이 일을 묻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군역 당상(軍役堂上)에 대하여 수규(首揆)634)  가 이미 건백(建白)하였으나 신은 절목(節目)을 강구해 정한 뒤에 당상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변통의 방도가 있다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당상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명목(名目)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일찍이 선조 때부터 인순(因循)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영상(領相)이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慨然)해 했습니다. 구관(句管)할 사람을 차출하여 다시 강확(講確)할 계책을 세워야 하는데, 당상 윤순(尹淳)은 자리에 없고 오늘 영상이 또 들어오지 않아 품정(稟定)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祖) 때의 북한산성(北漢山城)에 관한 일로 말하자면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으나, 고(故) 상신(相臣) 이유(李濡)가 홀로 담당했었다. 무릇 일이란 담당하는 사람이 있고 난 뒤에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호포·결포·구전 등에 관한 의논은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 때부터 전해져 왔으나 아직도 가능한지 시험해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군액(軍額)은 옛날에 비해 점차 넓어졌고 양병(養兵)이 이미 많아졌으나 끝내 좋은 대책이 없습니다. 먼저 백성의 산업을 제정한 뒤에야 시행할 만한 방도가 있을 것이니, 백성의 산업을 제정하지 아니하면 비록 1필에 그치더라도 가난한 백성이 어떻게 마련해 바칠 수 있겠습니까? 먼저 힘써야 할 것으로 권농(勸農)만한 것이 없으니, 조목(條目)을 강정(講定)하여 전지(田地)가 많은 백성으로 하여금 전지가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되, 관(官)에서 종자(種子)를 지급하고 또한 삼과 목면을 경작하도록 권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심고 키워 모두 능히 포를 짠다면, 포를 바치는 길이 또한 마땅히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외에는 달리 다른 방도(方道)가 없습니다."
하니,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산업을 제정하고 권농하는 것은 곧 그 근본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은 또한 민력(民力)을 여유 있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옛부터 말이 많아서 대동(大同)을 처음 정할 때도 의논이 매우 많았지만, 단연코 시행했기 때문에 지금 백성들이 그 편리함을 칭송합니다. 양전(量田) 때도 역시 여러 의논이 많았지만, 이미 양전한 뒤에는 역시 폐단이 없었습니다. 만약 의논이 한 가지로 귀착되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성취할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오늘날의 기강(紀綱)과 같다면 그때 북한산(北漢山)에 결코 성(城)을 쌓지 못했을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이 마음속으로 요량(料量)한 것이 있습니다. 결포(結布)는 지금 결역(結役)이 매우 무거우니 겹쳐서 낼 수가 없습니다. 대동에 대해 2,3두(斗)를 줄이고 그 대신 결전(結錢)으로 바치게 하되, 팔도(八道)에서 모두 6두의 대동으로 한다면, 선혜청(宣惠廳)에서는 옛날 그대로 줄어드는 것이 없게 될 것이며, 영남(嶺南)에서는 결(結)마다 3두의 쌀이 남고 호남(湖南)에서는 결마다 2두의 쌀이 남게 됩니다. 외방 군관(外方軍官)의 제번전(除番錢)을 아울러 모두 조사해 내어 고을의 대소(大小)에 따라 얼마의 액수를 정해 주고, 그 나머지 번전(番錢)을 1필(疋) 대신으로 옮겨 충당시킨다면 거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윤유가 말하기를,
"병조(兵曹)와 선혜청(宣惠廳)은 비록 1필(匹)을 줄여도 혹 지탱할 수 있겠지만 삼군문(三軍門)의 경비(經費)에 이르러서는 만약 1필을 줄인다면 대신 채우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구전(口錢)에 이르러서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구전은 어떤 폐단이 있는가?"
하니, 윤유가 말하기를,
"빈잔(貧殘)한 사족(士族)은 식구가 많은데 일일이 돈을 징수한다면 어찌 견디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 양역(良役)의 폐단을 상하(上下)가 근심하고 탄식했음을 신 또한 익히 들었습니다. 신묘년635)   경에 양역에 대해 상소하여 논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으나, 모두 난편(難便)하다 하여 가능한지를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도 또한 구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고 상신 조상우(趙相愚)가 그것을 시행할 수 없음을 상소하여 진달하자 마침내 정지되었습니다. 비유하건대, 병을 치료하는 데 약을 증상에 맞춰 쓰지 않으면 한갓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죽음을 재촉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백성들의 폐단은 전날에 비해 더함이 없으나, 기강과 세도(世道)는 선조 때에 비해 몇 등급이 떨어졌으니, 흑립(黑笠)을 충정(充丁)하는 것은 진실로 더욱 어렵습니다. 구전 역시 시행할 수 없으니, 가난한 백성이 만약 식구가 많은데도 돈을 징수하는 것이 몇 냥에 이르게 된다면 비록 1년 내내 경영(經營)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바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도피(逃避)한다면 또 어찌 수괄(搜括)하는 폐단이 없겠습니까? 지금의 인심과 세도(世道)로는 하나도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박문수(朴文秀)의 ‘각진(各鎭)을 혁파하자.’는 의논은 이해(利害)를 또한 확실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윤유가 말하기를,
"만호(萬戶) 80과(窠)와 첨사(僉使) 70과를 만약 혁파하면 구근(久勤)한 사람들을 어떻게 구처(區處)할 것입니까? 또 그 둔전(屯田)은 1필(疋)의 대신으로 충당하기에 부족합니다."
하자, 영성군(靈城君) 박문수가 말하기를,
"만약 40여 진보(鎭堡)를 혁파할 경우 바치는 포(布)의 수를 계산한다면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정(閑丁)을 얻어 도고(逃故)에 채운다면 그 효과가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삼군문(三軍門)의 군액(軍額)을 헤아려 줄이면 역시 쉽게 충정(充定)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문수의 진보를 혁파하자는 말은 대개 연해(沿海)의 백성을 위해 침징(侵徵)의 폐단을 우선 늦추어 주자는 것이다. 40 진보(鎭保)를 혁파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관안(官案)을 열람해 보고 용관(冗官)을 다 줄인다면 또한 불가할 것도 없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경사(京司)에는 용관이 없습니다."
하니, 서명균이 말하기를,
"직책에 걸맞지 않는 것은 모두 용관입니다. 묘당(廟堂)으로 말하자면 신처럼 능력이 없어 능히 보상(輔相)하지 못하는 자 역시 용관입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부터 이유(李濡)·이인엽(李寅燁) 등과 같은 사람들이 좋은 대책을 강구(講究)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인순(因循)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대저 2필의 역(役)은 본래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 아니나, 신이 일찍이 외방(外方)의 2필을 바치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의지할 곳 없는 잔약(殘弱)한 백성들이었고, 감영(監營)·병영(兵營)과 각 관청의 1필의 역에 응하는 자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부실(富實)한 양호(良戶)였습니다. 반드시 먼저 헐역(歇役)으로 투입(投入)하는 길을 막은 연후에 균등하게 2필을 징수한다면,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역(役)이 아닐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상성(金尙星)의 상소를 경들이 상세히 보지 않은 듯하다. 1결에 3민이 과중하다는 것은 옳다. 내가 한 나라의 부모(父母)가 되어 백성을 구제할 수 없다면 사책(史冊)의 비난과 의론은 우선 논할 것이 없다 해도 어찌 잘 다스리는 일개 수령(守令)에 대해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느냐? 경 등은 모름지기 영상(領相)에게 가서 물어보고, 오늘 강구하고 내일 강구하여 그 이(利)와 해(害)를 극진히 따지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신은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여러 의논이 하나로 귀착되기란 매우 어려우니 갑자기 거행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1필의 의논을 민간(民間)에 미리 퍼뜨릴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부터 일을 행할 때 어찌 갑론 을박(甲論乙駁)이 없겠느냐?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재단(裁斷)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절목(節目)을 문의(問議)한 뒤 다시 여러 재신(宰臣)들과 상확(商確)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각각 염근(廉謹)한 사람 2인을 추천하라 하셨는데, 염근의 명목이 뒤에 마땅히 청백리(淸白吏)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수령(守令)을 거쳐 법을 지키고 자신을 단속한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가볍게 염근의 명목(名目)을 더할 수는 없으니 제목(題目)을 개정(改定)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살아 있는 자는 염근이라 하고 죽은 자는 청백(淸白)이라 합니다. 염근이라 칭하는 것을 가볍게 의논함은 부당하니 고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염리(廉吏)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이 해도(海島)의 고을을 설치하는 것의 편부(便否)에 대해 논열(論列)한 바가 있는데, 해도에는 절수(折受)한 둔장(屯場)이 많으니, 모두 혁파를 시행한 뒤에야 고을을 설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령 또한 적절한 사람을 얻기 어려우니, 만약 옥당(玉堂)의 문신(文臣)을 뽑아 보낸다면 진안(鎭安)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구히 하는데 어려움을 느껴 만약 피잔(疲殘)하고 세력없는 자를 보낸다면 그 해(害)가 도리어 심할 것이며, 또 절수(折受)한 둔장도 역시 혁파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의논은 ‘특별히 첨사(僉使)를 설치하되, 일찍이 곤수를 거친 사람을 차송(差送)해서 그대로 감목(監牧)을 겸임시키고, 궁장(宮莊)과 목장(牧場)은 모두 전례에 의거해 세금을 거두어 본진(本鎭)을 이루어 읍치(邑治)와 다를 것이 없고 족히 여러 섬을 진무(鎭撫)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워하는 바는 수령에 적절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첨사를 설치하였다가 혹시라도 나주 목사(羅州牧使)와 서로 버티는 일이 있다면 도민(島民)이 또한 그 해를 받을 것이다."
하였다. 승지(承旨)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첨사는 비록 진졸(鎭卒)을 거느리지만 판적(版籍)이 지방관(地方官)에 소속되어 있으니 일개 첨사가 결코 겸하여 총괄할 세력이 없습니다. 만약 바다 방비를 우려한다면, 장관(長官)을 설치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후의 나주 목사 가운데 여러 섬을 모두 다 본 사람이 없으나 유독 전(前) 현감(縣監) 이형곤(李衡坤)만이 7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두루 여러 섬의 형편을 살펴보고 일찍이 고을을 설치하는 것이 매우 편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형곤으로 하여금 형편을 구획(區劃)하여 책자(冊子)로 써서 올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평안 도사(平安都事) 정희보(鄭熙普)의 장계(狀啓)에 말하기를, ‘이산(理山)의 죄인 김성지(金星智)·김처현(金處玄) 등이 김민걸(金民乞) 등 5인을 장살(戕殺)하고 살인한 죄를 모피(謀避)하여 몰래 피국(彼國)의 경내로 넘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잡혔습니다. 범월(犯越)한 죄는 살인죄보다 더 무거우니, 청컨대, 율(律)에 의거해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명균이 또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내주(鄭來周)의 장계에 말하기를,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와서 아명 도서(兒名圖書)를 청하기에, 여러 번 물리치고 여러 번 다투었습니다. 지금 훈도(訓導)와 역관(譯官)이 이해(利害)로써 책망한 것으로 인해 도서(圖書)를 이제 막 혁파해 버렸는데, 아명 도서가 한번 온 뒤로 그 폐단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힘을 다 바친 역관(譯官)에게 상전(賞典)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례(前例)를 상고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서명균이 또 아뢰기를,
"요사이 추위가 지독해서 혹 얼어 죽는 사람이 있으니, 청컨대, 기곡제(祈穀祭)의 친행(親行)을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춥고 따뜻함이 고르지 아니하여 궁한 백성들로 하여금 얼어죽게 하는 데 이르렀으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탐문(探問)하게 하라. 만약 시골 백성이 길에서 죽었다면 즉시 거두어 묻어 주고 도민(都民)의 경우는 그 가속(家屬)들을 고휼(顧恤)하게 하라."
하고, 또 박문수의 말로 인해 무신년636)  에 사절(死節)한 사람인 김천장(金千章)·이술원(李述源)·장담(張譚) 등의 가족에게 본도(本道)에서 해마다 사시(四時)에 고휼(顧恤)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1일 무진

윤순(尹淳)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유경(金有慶)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차차(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들으니 정치(政治)를 하는 법은 요도(要道)를 얻어 힘써 행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요도’란 출치(出治)의 규모를 먼저 정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만약 능히 그 규모를 정하지 못하고 한갓 일과 행위의 말단에만 구구하게 한다면, 그 폐단은 끝내 문구(文具)에 돌아갈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 반드시 정밀함에 힘쓰시고 다스림을 구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제치(制治)할 규모를 세우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이 장로(長老)들의 말을 들으니, ‘아조(我朝)의 인문(人文)은 명종(明宗)·선조(宣祖) 양조(兩朝) 때 지극히 성대하였으나 드디어 문폐(文弊)가 생겼고, 문폐가 지극해지자 붕당(朋黨)이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인묘(仁廟)께서는 질박함으로 폐단을 고치셨으니, 부문(浮文)과 언어(言語)를 숭상하지 않고 한결같이 질각(質慤)하고 진실(眞實)된 도리로 신민(臣民)에 임어(臨御)하셨기 때문에 당시 상하(上下)간에 지성(至誠)으로 서로 믿고 같은 조정의 신하들은 정의(情意)가 꼭 맞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체통(體統)은 서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섰고 붕당은 타파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파되어 백성의 뜻이 저절로 정해지고 국세(國勢)가 저절로 무거워졌으니, 이것은 곧 요도를 얻었던 소치였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익헌공(翼憲公) 정태화(鄭太和)는 일찍이 ‘아조(我朝)의 군상(君上)은 멀리 요순(堯舜)을 본받을 필요가 없다. 오직 우리 인묘(仁廟)를 본받으면 족하다.’고 하였으므로 신은 항상 명언(名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날 세도(世道)로 보자면 또한 문폐가 극심하다고 말할만합니다. 이를 구제하는 도리는 반드시 인묘께서 다스리시던 규모를 따르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나라의 형세가 엄중(嚴重)해질 수 있고 붕당이 바야흐로 소멸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여기에 뜻을 더 두소서.
비록 그러하나 지금은 인묘의 시대와 거리가 이미 백 년이란 차이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치체(治體)의 본말(本末)을 듣고자 하시더라도 돌아보건대, 어디서부터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한가한 틈에 인조 때의 《정원일기(政院日記)》를 가져다 올리라 하시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궁구해 보시되, 사령(辭令)과 비지(批旨) 사이에서 사실이 실려 있는 바와 정신(精神)이 깃든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길이 몸받아 삼가 행하신다면, 반드시 절실하게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는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조(聖祖)의 마음을 얻은 뒤에야 바야흐로 성조의 다스림을 행할 수 있는 법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조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침중(沈重)·엄의(嚴毅)하셨고 마음을 제어하심이 지극히 고명(高明)·공정(公正)하셨습니다. 호령(號令)을 내고 비지(批旨)로 훈유(訓諭)하심은 지극히 간질(簡質)·전중(典重)하였으며, 정사(政事)를 꾀하여 제정하고 신공(臣工)을 어루만져 다루심은 정신(靜愼)·주밀(周密)하셨습니다. 그래서 군공(群工)과 조서(兆庶)가 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실하게 복종하지 않음이 없어 힘과 근면을 다 바쳐 중흥(中興)의 다스림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금 성조(聖祖)를 본받고자 하신다면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이나 한 가지 일과 하나의 정사(政事)를 상세히 익히고 깊이 살펴 진실하고 간절하게 따르고 본받지 아니함이 없게 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성조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정사(政事)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을 거의 낱낱이 들기 어려우나 양역(良役) 한 가지 폐막(弊瘼)이 더욱 궁박한 백성들의 망극한 원통과 국가가 멸망할 우환이 되고 있습니다. 신은 지난번에 동료 재상들과 반복해 서로 의논했는데, 군역(軍役)을 구관(句管)할 책임자를 차출해 그 일을 전적으로 주관하게 하고, 제도(諸道)의 사안(査案)이 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나은 대책을 강구(講究)하며 편리함을 따라 개혁해 나가되, 오직 역(役)을 균등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편리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면, 거의 조금이나마 구제할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관하는 두 신하는 그 식견과 재주가 또한 한때의 극선(極選)이라 할 만하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일을 두 신하에게 전적으로 책면(責勉)하여 성효(成效)가 있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반드시 며칠이라는 기한을 정하여 오늘은 어떤 일을 하고 내일은 어떤 일을 하여, 하루에 하루의 할 일이 있고 이틀에 이틀의 할 일이 있게 함으로써 공담(空談)으로 날을 보내지 않는다면 국가에 거의 의지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 윤순(尹淳) 같은 사람은 비록 긴급한 직무상의 일이 없다 하더라도 하루도 조정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주관하는 임무는 그 중대함이 어떠합니까? 그런데 한결같이 강외(江外)에 물러나 있으면서 변동할 것은 생각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인신(人臣)이 나라를 걱정해 자신을 잊는 의리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급히 지휘(指揮)를 내리시어 속히 조정으로 돌아와 직사(職事)에 마음을 다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箚子) 가운데 진달(陳達)한 바가 나의 뜻에 꼭 맞는다. 유의하여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역(良役)에 대한 일은 구관(句管)하는 신하에게 힘쓸 것을 신칙(申飭)하는 것을 내가 어찌 소홀히 하겠느냐? 그러나 만약 부지런히 강구(講究)하여 점차로 착수(着手)하지 않는다면 금일의 이 이름이 장차 또 문구(文具)로 돌아갈 것이니, 경(卿) 또한 힘써야 할 것이다. 중신(重臣)은 이미 조정(朝廷)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할 것을 명하였으나,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다시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2일 기사

하교(下敎)하기를,
"저 상고(上古)에 기장[黍]을 불에 굽고 돼지고기를 찢어 먹으며 땅을 파 술통 대신으로 쓰고 손으로 술을 움켜 마실 때에도 또한 귀신(鬼神)에게 공경을 다할수 있었고 짐승을 잡아먹고 가죽옷을 입을 때에도 또한 존비귀천(尊卑貴賤)이 행해졌다. 뒤에 성인(聖人)이 계속 출현해 비록 대사(臺榭)·궁실(宮室)이 있고 구워 먹고 삶아 먹으며 베옷과 비단옷을 입기는 하였으나, 또한 띠집의 추녀를 자르지 않았으며 몇개의 흙 계단이 있을 뿐이었다. 삼대(三代) 이후로 인문(人文)이 점차 번성하여 의절(儀節)이 상세히 갖추어졌으나, 근세의 사치스러움과 같은 적은 있지 않았다. 아! 사람의 부모가 되어 자손(子孫)이 있으니 남자는 장가들이고 여자는 시집보내는 것이야말로 예(禮) 중에서 큰 것이고 정(情)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혹 과년(過年)해서도 시집가지 못하고 늙어서도 장가가지 못하니, 그 폐단의 이유는 곧 사치스러운 데에는 오는 소치이다. 남의 자손이 되어 그 아비와 할아비를 달이 넘도록 장사지내지 못하며 혹 예(禮)로써 제사지내지 못하기도 하니, 이는 또한 다름이 아니라 사치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어찌 미혹된 것이 아니랴? 간략하게 갖추어 혼인해 인륜(人倫)의 중대한 일을 이루는 것이 어찌 사치스럽고 성대(盛大)하게 하는 데에 구애되어 후손을 끊어지게 만드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 데는 각각 등급(等級)이 있고 또한 각각 빈부(貧富)가 있다. 예를 따라 넘침이 없고 집안 재산의 유무(有無)에 알맞게 하여 그 아비와 할아비를 달을 넘김 없이 장사지내고 또 제사를 폐하지 않는 것이 곧 사람으로서 자식된 윤상(倫常)이건만, 어찌하여 번문(繁文)·부치(浮侈)에 구애되어 능히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는 이른바 미혹함이 심한 것이다. 대개 바람이 불면 풀이 쏠리고 그림자는 겉모양을 따른다. 필서(匹庶)의 사치는 곧 조사(朝士)를 본받은 것이고, 조사의 사치는 곧 귀척(貴戚)을 본받은 것이며, 귀척의 사치는 왕공(王公)에 근본을 두고 있다. 아! 내가 비록 덕(德)은 박(薄)하나 미워하는 것은 사치다. 그 쏠리는 것이 이와 같고 그 그림자가 이와 같으니, 어찌 다시 ‘본래 사치를 미워한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내가 더욱 더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이나, 몸소 실천해 교도(敎導)함은 또한 말로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그 미혹의 이유를 먼저 깨우치지 않을 수 없다. 아! 사서(士庶)들은 편리함을 좇겠는가? 어려움을 좇겠는가? 이치를 따르겠는가? 사사로움을 따르겠는가? 편리함과 이치란 무엇인가? 곧 검소함이요, 어려움과 사사로움이란 무엇인가? 곧 사치함이다. 과궁(寡躬)이 몸소 실천하지 못하여 상방(尙方)637)  에 대해 소홀히 했다고 말하지 말라. 매년 직조(織造)하는 물품은 근래에 다 그만두라 했으니, 거의 옛날 직방(織坊)을 철파(撤罷)한 일에 가깝다.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베틀을 철거하게 하되 다시는 품(稟)하지 말게 하라. 아! 이 풍습이 고쳐지지 않으면 나라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맹척(猛惕)을 거듭하노니, 이 유시(諭示)에 어긋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승지(承旨)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엊그제 차대(次對)에 8인의 많은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입시(入侍)한 것은 근래 보지 못하던 바였으므로, 신은 반드시 장차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건백(建白)한 바가 끝내 사람의 눈과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 없었으니, 신은 가만히 개연스레 여겼습니다.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은 여러 신하들이 진달한 다섯 가지 일을 벗어나지 않으니 성상께서 호포(戶布)·결역(結役) 등의 이해(利害)를 순문(詢問)하시어 영구히 준행(遵行)할 수 있게 하실 것이며, 사소하게 견제되는 단서는 다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역의 변통은 여러 해를 지났으나 끝내 좋은 계책이 없다. 호포(戶布)는 위로 왕자(王子)·대군(大君)부터 아래로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일체 시행한 연후에야 대동(大同)의 역(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호포는 시행할 수 있는 법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또 이 봉조하(李奉朝賀)의 흑립(黑笠)에 대한 말을 듣고 보니, 백성을 구제하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어지러움을 재촉하는 계제가 되겠으므로 호포 한 가지 일은 다시 유의하지 않겠다. 대저 2필(疋)은 원래 고역(苦役)이 아닌데, 단지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을 능히 가려 뽑지 못한 데서 비롯되어 인족 침징(隣族侵徵)의 폐단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만약 능히 수령을 잘 가려서 결원(缺員)이 생기는 대로 채워 인족에게 침징하는 일이 없다면, 앞서 혼자 10필의 포(布)를 낸 자가 단지 2필만 내게 될 것이니, 그 효과가 어찌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일시에 변통할 수 없는 것이니 상하가 오랫동안 공부(工夫)를 쌓고 도신과 수령 또한 가려서 보낸 뒤에야 효과를 책임지울 수 있을 것이다. 어제의 차대(次對)처럼 느슨하다면 무슨 일을 해 나갈 수 있겠느냐? 만약 이와 같으면 비록 1필의 역(役)으로 하더라도 인족 침징의 폐단은 마땅히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조선(朝鮮)의 개벽(開闢)’이니 ‘초의(草衣)·초식(草食)’이니 하는 분부는 대개 양역(良役)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조종조(祖宗朝)에서 고려(高麗)의 사치한 풍속을 한결같이 씻어버리고 전적으로 검약(儉約)을 숭상하였으나, 기자(箕子)가 8조(八條)로 가르친 때와 비교해 본다면 오히려 부유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것은 전혀 나라에 기강이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약 기자(箕子)의 시대와 같이 한다면 비록 1필을 징수해도 또한 여유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1필의 역을 2필을 비교한다면 어찌 갑절이나 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전과 같은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군부 당상(軍部堂上)을 경솔하게 앞질러 차출(差出)한 것이 도리어 민망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달(奏達)한 바가 진실로 그러하다. 비록 1필을 감한다 하더라도 몇 년 뒤에는 백성들이 반드시 반 필로 감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신이 남번(南藩)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에 하도(下道)를 순찰해 보았더니, 지방이 멀리 떨어져 있어 백성들의 풍속이 매우 완악(頑惡)하였습니다. 광주(光州)·금성(錦城) 등지(等地)에 한 개의 행영(行營)을 설치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때때로 혹 가서 머물면서 왕화(王化)를 선포(宣布)하게 한다면 거의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행영을 설치한다면, 또 한 개의 감영(監營)이 생기는 것이니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근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는 곳에 본래 당호(堂號)가 없다. 외간(外間)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느냐?"
하니, 한림(翰林)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별저상(別儲廂)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당(堂) 아래에 낭사(廊舍)가 있는데, 환시배(宦侍輩)들이 부르기를, ‘고방(庫房)’이라고 한다. 대개 광해(光海) 때에 재물(財物)을 저장하던 곳이었고, 별저상이 그 곁에 있으므로 이런 이름이 있게 된 것인데, 의의(意義)가 없고 또 문적(文跡)도 없다. 선조(先朝) 때부터 간혹 임어(臨御)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내가 늘 거처하면서 공사(公事)의 수응(酬應)과 약방의 입진을 모두 이 방에서 하고 있으니, 곧 만기(萬機)를 재결(裁決)하는 장소이다. 명칭이 몹시 아름답지 못하니, 옥당(玉堂)과 정원(政院)에서는 당호(堂號)를 의논하여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자, 이에 ‘극수재(克綏齋)’라고 이름을 정하였다.

 

 

 

12월 23일 경오

대사성(大司成) 송진명(宋眞明)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다스리는 데는 본디 대체(大體)와 요도(要道)가 있고 일을 행하는 데에 역시 강령(綱領)과 조리(條理)가 있습니다. 만약 그 대체를 살펴 그 요도를 제정하고 그 강령을 통솔하여 그 조리를 찾아 행정(行政)·출령(出令)하는 방법으로 삼지 않으면서 껍데기나 걷고 귀착되는 곳이 없는 말로 각각 하전(廈氈)의 위에서 변론(辯論)을 늘어놓아 중의(衆議)가 솜털처럼 어지러워 마치 모여서 송사하는 것과 같은데 끝내는 한 바탕의 설화(說話)로서 그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릇 다스림을 구하는 것이 너무 날카로워 소리를 앞세우고 실질을 뒤로 하는 것은 진실로 옛사람이 경계하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다만 마땅히 윤음(綸音)을 내리실때의 첫 마음을 굳게 지키시어 시종(始終) 한결같이 하시고, 묘당(廟堂)에서는 정신(精神)을 모아 종일 강마(講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도모하여 그 선책(善策)을 취하고 홀로 결단하시어 조금이라도 꺾이지 않게 할 것이며, 오늘 한 가지 일을 해 나가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해 나가며 나라의 폐단과 백성들의 폐막(弊瘼)을 차례로 개혁(改革)한다면, 양역(良役)의 변통(變通) 등과 같은 일은 단지 거조(擧措) 중의 한 가지 일일 뿐입니다. 생각건대, 분망(奔忙)하고 소란(騷亂)하여 통서(統緖)도 전혀 없이 헛된 말이 무익(無益)한 데로 돌아가게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추맹씨(鄒孟氏)의 ‘잊지도 말고 조장(助長)하지도 말라.’고 한 가르침에 유의하시고, 또한 이것으로써 군하(群下)를 책려(責勵)하여 일을 도모하는 데에는 철두철미하게 하고 일을 행함에 있어서 처음이나 끝을 다 생각케 함으로써 마침내 성효(成効)가 있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것은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조명택(趙明澤)을 사간(司諫)으로, 윤급(尹汲)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왕(帝王)의 출치(出治)에는 대체(大體)가 있고 절목(節目)이 있습니다. 지금 사치를 억제하는 것은 폐단을 구제하는 일 가운데 있는 한 가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치를 억제하고 검소를 숭상하는 것에는 또한 본말(本末)이 있으니 본(本)만 들고 말(末)을 버려 본말로 하여금 서로 상응하지 않게 한다면, 다스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성궁(聖躬)은 일국(一國)의 근본이며, 궁위(宮闈)·조정(朝廷)·여항(閭巷)·향읍(鄕邑)은 곧 말(末)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사치와 검소의 나뉨을 통찰(洞察)하시어 먼저 상방(尙方)의 직조(織造)를 혁파하셨으니, 그 근본을 바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우려하는 바는 전하께서 알지 못하는 가운데 궁중(宮中)에서 사릉(紗綾)·문금(紋錦)·주패(珠貝)·금옥(金玉)을 사들여 머리를 장식하고 몸을 치장하기를 옛날과 다름없이 하고 있습니다. 궁위는 사방(四方)의 표준이니 궁위가 변하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사방을 채찍질하여 그 변할 것을 책한다 하더라도 끝내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미 성궁(聖躬)으로부터 비롯하여 직조(織造)하는 것을 혁파하는 데 이르렀습니다만, 또 반드시 궁위가 변하고 귀척(貴戚)·조사(朝士)가 본받으며 여항(閭巷)·향읍(鄕邑)이 본받게 한 뒤에야 비로소 본말이 서로 상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여 궁위에서 머리를 장식하고 몸을 치장하는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반드시 멀리는 연시(燕市)에서 무역해 오고 가까이는 경사(京肆)에서 취해 올 것이므로, 따라서 역관(譯官)들이 말하고 시민(市民)들이 알며 귀척·조사·여항·향읍도 또한 모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에 또 가만히 의논하고 돌아와 비난하기를, ‘직조를 혁파한 것은 무슨 일인가? 베틀을 철거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이 실질적인 것인가 문구(文具)인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아서 경동(警動)했던 자들이 도로 게을러지고 호치(豪侈)하는 자들이 복종하지 않게 되어 오직 고쳐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다시 심해질 것입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궁위에 통유(洞諭)하시어 무릇 사릉·문금·주패·금옥 등속을 다시는 시전(市廛)에서 구해 갖지 말게 할 것이며, 구해 갖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전날 이미 소유했던 것도 아울러 일체 사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귀척 이하에 이르러서도 역시 일체 버리게 하시되, 만약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 한결같이 법으로 다스리게 한다면 사방에서 풍문을 듣고 말하지 않아도 교화될 것이니, 몇 달 사이에 크게 변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어찌 재물이 소모되고 백성이 곤궁하게 되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신은 또 간곡한 정성으로 명주(明主)를 위해 염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릇 천하의 일이란 나아감이 날카로운 자는 물러나는 것도 빠른 것입니다. 인주(人主)의 마음은 처음에 부지런하다가 끝에 가서 게을러지는 법이니, 따라서 시일(時日)이 조금 오래되어 도양(導揚)할 사람이 없으면 일이 뜻과 같지 않으며 다스리는 데도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성심(聖心)은 멍해져 즐거워하지 않고 집어치운 채 스스로 해이해져 오늘날 확연(確然)한 것은 능히 굳게 지키지 못하고 온갖 사악한 것들이 어지럽게 사이를 비집고 틈으로 끼여든다면, 혁파한 절수(折受)가 훗날에 그대로 존재하고 철거된 직기(織機)가 몇년 뒤에 다시 설치되지 않은 줄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와같다면 사방에 웃음거리를 전하고 후세에 기롱을 받게 될 것이니, 애당초 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조명택(趙明澤)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 유징서(柳徵瑞)가 지난번에 용천 부사(龍川府使)가 되었는데, 적인(賊人) 천재(天載)가 어사(御史)를 가칭해 서변(西邊)에서 횡행하자, 유징서가 기세를 보고 빌붙었다가 이에 연좌되어 파직·폐고(廢錮)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변읍(邊邑)에서 또 장오(贓汚)로 논박을 받았는데, 곤임(閫任)에 발탁·제수되었으니 물정(物情)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찌 오래된 일을 뒤따라 제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시 상세히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4일 신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극수재(克綏齋)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예조(禮曹)의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신이 김재로(金在魯)와 함께 영상(領相)을 찾아가 만났더니, 이르기를, ‘양역(良役)은 갑자기 좋은 대책이 없다. 전후로 변통하고자 했지만 끝내 장애되는 것이 많아 설행(設行)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숙묘조(肅廟朝)에 신의 아비도 또한 묘당(廟堂)에 있었는데 능히 변통을 하지 못하였고, 항상 ‘먼저 그 근본을 바로잡은 뒤에야 말단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결전(結錢)을 죄다 지부(地部)에 소속시키고 군병(軍兵)을 죄다 병조(兵曹)에 소속시키며, 삼군문(三軍門)의 군액(軍額)을 제감(除減)시켜 하나로 귀결시킨다면, 백성들의 힘이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비와 용도가 혹 부족하다면, 군관(軍官) 등의 명목(名目)을 창립(創立)하여 1필을 받아 보태 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약해서 쓰는 것이 근본이니 다시 무슨 계책이 있겠습니까? 끝내 편언(片言)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상(領相)이 뒷날 차대(次對) 때 마땅히 진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심성희(沈聖希)를 헌납(獻納)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삼았다.


 

12월 25일 임신

소대(召對)를 행하여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법(法)에 의거하여 임금의 악(惡)을 제거하는 것은 인신(人臣)의 상지(常志)요, 정상(情狀)을 살펴 뭇사람의 위험을 안정시키는 것은 인주(人主)의 대권(大權)이다’고 한 것이야말로 어찌 적실한 논의가 아니겠는가? 접때 유엄(柳儼)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역적(逆賊)은 중국(中國)과 다르니 죄다 죽어야 마땅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몹시 옳지 않다. 인주(人主)가 의심을 쌓으면 장차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내가 무신년638)  뒤에 사람을 의심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매번 위험하다는 말을 하여 반측(反側)하는 무리로 하여금 위구(危懼)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게 함으로써 경술년의 화(禍)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니 어찌 참혹하지 아니한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작록(爵祿)으로 영남(嶺南)의 선비들을 위로하시고자 하시는데, 노(魯)나라에 군자(君子)가 많았으나 언제 일찍이 작록을 기쁘게 여겼습니까? 대저 조정에서 전혀 거두어 녹용(錄用)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잘못입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영남의 선비들을 대우하심은 마땅히 예의(禮義)로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정의 사람들도 또한 성심(誠心)을 열고 정지(情志)를 통해 즐겁게 일을 같이 한다면, 인재(人才)를 거두고 엄체(淹滯)된 것을 진작(振作)시킴이 절로 그 가운데 있게 됩니다."
하자, 승지(承旨) 홍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옳습니다. 근래 영남 사람이 경사(京師)에 오면 서울 사람들이 기꺼이 맞아 접대하려 하지 않는데, 그 중에서 의논(議論)이 옛날과 바뀐 자로 안연석(安鍊石)·나학천(羅學川)과 같은 부류를 처음으로 모두 수용(收用)했기 때문에 영남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서로 비방하여 폐습(弊習)이 또 생겨났으니, 이는 또한 조정에서 시킨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매, 검토관(檢討官) 윤득화(尹得和)가 말하기를,
"승선(承宣)이 실언(失言)하였습니다. 어찌 그 가운데에서 안연석·나학천 등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영남에 이런 폐단이 없지 않으니, 승선은 실언한 것이 아니다."
하니, 홍경보가 말하기를,
"무신년 이후로 안연석·나학천의 무리들이 스스로 좋은 계책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인하여 공척(功斥)하니, 폐풍(弊風)이 또 커졌습니다. 비록 이런 사람을 쓴다 하더라도 영남 사람을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김한철(金漢喆)의 뜻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하자, 오원은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영남의 일로 상소해 반측자(反側子)를 안심시키는 것으로 영남 사람을 대우할 수 없음을 논하였는데, 성상께서는 영남 사람의 당론(黨論)을 자극(刺戟)시켜 이루는 것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의 뜻은 조정에서 마땅히 그 색목(色目)을 잊고 성실한 마음으로 서로 함께하며 재능이 있는 자라면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매, 홍경보가 말하기를,
"접때 연중(筵中)에서 유신(儒臣)이 오광운(吳光運)을 소인(小人)이라 했는데, 소인의 지칭(指稱)이 어떠한 제목(題目)입니까? 그런데 졸지에 인신(人臣)에게 더했으니, 원통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의 소견은 잘못된 것이다. ‘임금은 있고 신하는 없다[有君無臣]’는 네 글자는 근래 장주(章奏)에서 이 문자를 많이 쓰고 있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신은 승선(承宣)의 소견과 다릅니다. 비록 구해(救解)하고자 하지만 신은 마땅히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하자, 홍경보가 말하기를,
"오광운은 신과 함께 전하의 장려하여 발탁하심을 입었습니다. 오광운의 상소를 신이 일찍이 극력 만류하니, ‘나 또한 시배(時輩)에게 미움받을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나 반드시 소견을 다 바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인(小人)이란 명목을 더하고 심지어 위태롭고 불길하다고까지 했으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오광운의 인품(人品)은 비록 편벽되고 좁은 것 같으나, 상소의 뜻에는 결단코 다른 뜻이 없었다."
하였다. 윤득화가 말하기를,
"소인이란 말은 신 또한 승복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원소(原疏)의 본말(本末)은 글자마다 정태(情態)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단 유신(儒臣)뿐만이 아니라 좌규(左揆)도 또한 일찍이 말했다."
하였다.

 

장릉 도감(長陵都監)의 제조(提調)를 파직(罷職)하고 낭청(郞廳)을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본릉(本陵)의 석물(石物)이 손상되고 이지러졌다고 누차 보고했기 때문에 이 명(命)이 있었던 것인데, 그때 제조가 바야흐로 상직(相職)에 있어 곧장 현고(現告)를 바칠 수가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은 현고를 바칠 수 없다. 바야흐로 묘당(廟堂)을 칙려(飭勵)해야 할 때를 당하였는데 상신(相臣)을 파직하는 것은 민망스럽다."
하였다.

 

12월 26일 계유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시형(金始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남(嶺南) 일로(一路) 70주(州)에 독서하고 자호(自好)하는 선비로 암혈(巖穴)에서 말라 죽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기예(技藝)를 파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병폐(屛廢)된 것을 유감으로 여기지 않으니, 대개 그 풍속이 옛부터 그러합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특별히 안렴(按廉)하는 신하에게 유시(諭示)하시어 표이(表異)한 선비를 존문(存問)하게 한 것은 매우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조(銓曹)에서 수용(收用)한 것은 성이홍(成爾鴻) 한사람에 불과하였습니다. 김성탁(金聖鐸)·이만(李槾)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끝내 검의(檢擬)한 일이 없어 용사(用捨)하는 곳에서 능히 봉행(奉行)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전조(銓曹)에 신칙해야 할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서원(書院)에 근시(近侍)를 보내 치제(致祭)하게까지 하시고, 또 도산(陶山)의 고택(古宅)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는 명(命)이 있었는데, 윤음(綸音)이 한 번 전파되자 사림(士林)들이 흥기(興起)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봉사손(奉祀孫)은 파관(罷官)된 지 여러 해가 되었고 가난하여 제사를 받들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유의(留意)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만은 또 제직(除職)하였으니 돈독히 권유하여 올려 보낼 것이며, 문순공의 봉사손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신이 평상시에 헤아린 바가 있으니, 마땅히 먼저 그 대강을 진달하겠습니다. 정미년639)                   사이에 양역(良役)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신은 1필(疋)로 할 것을 말하였으나 사람들의 견해가 각각 달라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사세(事勢)는 정미년에 비해 크게 다릅니다. 듣건대 경기(京畿)의 군액(軍額)이 크게 줄어서 군안(軍案)을 수정할 즈음에 독촉하고 추착(推捉)하여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백성들이 모두 도망해 달아나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족과 아울러 함께 달아나 장차 백성이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정사(政事)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4도(道)의 도고(逃故)를 대신 정하는 것과 인족에게 포(布)를 징수하는 것을 한결같이 정지하고, 그 해당되는 사람에게는 단지 그 해당자의 포(布)만 징수하되 4도의 도망간 숫자를 통계하여 포를 바치는 숫자와 비교한다면 3분의 1에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이 숫자를 열두 달의 경비로 계산하면 부족한 것은 석 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병조의 기병(騎兵)·보병(步兵)과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두 영(營)의 옛 저축을 가져다 절약해 쓴다면 충분히 지탱해 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훈국(訓局)의 여름철 군병(軍兵)의 의자(衣資)는 변통(變通)하기 어려움이 있으니, 다른 아문(衙門)에서 1백 동(同)의 포(布)를 추이(推移)하여 그 숫자를 채우고, 4도(道)의 군정(軍政)은 잠시 조용히 그냥두어 침요(侵撓)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도신(道臣)에게 신칙(申飭)해서 유민(流民)을 안집(安集)시켜 착실히 권농(勸農)하게 하였다가 가을 추수 때까지 기다려 명년[甲寅年] 10월 이전까지 한정해 잇대어 쓰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한량(閑良)·군관(軍官)·교생(校生) 등의 명목(名目)같은 것은 1필(匹)의 역(役)으로 만들되, 각읍(各邑)에서 수봉하는 연역미(煙役米) 5두(斗) 내에서 1두(斗)를 거두어 바친다면 3만여 석(石)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1필의 역(役)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면 그 신색(新色)으로 바치는 것 및 잡역미(雜役米)로써 도고(逃故)의 채우지 못한 대신을 보충하게 해서 1,2년을 시행한다면, 거의 두서(頭緖)가 있게 되어 나머지 백성들은 유산(流散)하는 데 이르지 않고 국용(國用)도 또한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구관 당상(句管堂上)을 차출하기를 청한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과 같다면 갑인년 조(條)는 한결같이 모두 정봉(停捧)하고 갑인년 이후는 1필로 하자는 것인가?"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갑인년 10월 이전은 옛날에 저축했던 것을 잇대어 쓰고 10월 이후로는 을묘년에 쓸 것을 봉납(奉納)할 것입니다. 그리고 을묘년부터는 병진년에 쓸 것을 봉납하여 차차 변통해 나간다면 끝내 크게 변통(變通)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아뢴 바가 만약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거의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년(明年) 안에 실마리가 잡히지 못하고 그 사이에 이의(異議)가 혹 생긴다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잡역미(雜役米) 1두(斗)에 이르러서는 끝내 장애가 되는 단서가 있고 1필의 역(役)도 또한 그 들어오기를 원하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 의논이 모두 시행할 수 있다고 하니 성상께서 단연코 행하신다면 어찌 할 수 없겠습니까?"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은 백성과 나라의 큰 일입니다. 수상(首相)이 강구하여 요량한 것이 이미 익숙하고 또 세밀하여 신은 감히 망령된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끝내 의심스럽고 어려운 바가 있으니, 시험삼아 도고(逃故)의 경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명년(明年)까지 한정해서 대신 충정(充定)하지 않게 한다면 수령(守令)들은 반드시 손을 묶고 앉아서 보기만 하고 조정에다 성사시킬 것을 책임지울 것이니, 그것이 편리한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잡역미(雜役米)의 수봉(收捧)도 또한 폐단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비록 백성에게 거두는 정사(政事)가 없다 하더라도 각 고을에서 마구 징수하는 것이 그 한정(限定)이 없을까를 걱정하는 판인데, 하물며 조정에서 1두(斗)를 거둔다면 그 폐단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1필(匹)의 역(役)을 신설(新設)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들어오기를 원하는 것의 여부를 또한 알 수 없습니다."
하니, 형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지금 양역(良役)의 폐단은 거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는 것과 같으니 이 폐단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백성과 나라가 모두 망할 것입니다. 원로 대신(元老大臣)이 변통(變通)할 방도를 강구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마는, 도고(逃故)를 한결같이 모두 대정(代定)하지 않도록 한다면 수령(守令)들은 반드시 앉아서 보기만 할 것이며, 또한 외람되게 보고하는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또 병조(兵曹)와 삼군문(三軍門)에 남아 있는 저축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며, 설혹 접제(接濟)한다 하더라도 올해의 도고가 점차 많아진다면 1필의 역을 아마도 죄다 충정(充定)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잡역미(雜役米)에 이르러서는 1결(結) 안에 전세(田稅)와 대동(大同)이 있고, 또 빙정(氷丁)·시초(柴草)·치계(稚鷄) 등의 값이 있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1두(斗)를 더 거둔다고 한다면 민정(民情)이 반드시 불편해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와 유신(儒臣)·대신(臺臣)에게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 명하니, 혹은 시행할 수 있다고 말하고 혹은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혹은 구례(舊例)를 따라 도신(道臣)에게 신칙(申飭)하여 빠진 자가 생기는 대로 대정(代定)할 것을 말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신(臣)도 역시 일시에 갑작스레 변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점차 착수하여 앞으로의 효과를 책임지우고 몇 년을 지난다면 그 편부(便否)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을 시험해 보려고 한 것이니, 대개 절박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의논이 이처럼 일치하지 않으니,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신은 마땅히 물러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고집이 이와 같으니 나랏일을 이룰 수 있겠다. 1필의 역이 어찌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정사(政事)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경이 원보(元輔)로서 이처럼 주장하니 이것은 곧 좋은 기회다. 마땅히 단연코 시행하리라. 그리고 호포(戶布)의 경우 ‘흑립(黑笠)이 기꺼워하지 않는다고 시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나라에 기강이 없는 데서 연유한 것이나, 이성억(李聖檍)의 옛 제도를 준수하자는 말도 또한 옳다. 2필(疋)은 본래 높고 무거운 것이 아닌데, 도고의 폐단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물며 요행의 문(門)이 크게 열리면 백성들이 반드시 다시 반필(半疋)을 바랄 것이니, 장차 어떻게 책응(責應)하겠는가?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조세(租稅)의 반(半)을 감해 준 것은 절검(節儉)하고자 그랬던 것이니, 서한(西漢)의 말엽(末葉)에 백성들이 한(漢)을 생각했던 것은 또한 인후(仁厚)의 효과에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만약 영상(領相)의 말에 의해 1필을 감해 준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옛날에는 유정지공(惟正之供)을 백성들이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인심(人心)이 크게 달라져 봉납(奉納)을 어렵게 여기는 폐단이 반드시 여전할 것이다. 요순(堯舜)의 시대에도 오히려 널리 베푸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으니, 초실(稍實)·우심(尤甚)을 물론하고 한결같이 모두 봉납하지 말도록 하는 것은 분수(分數)가 없는 듯하다. 그 중에서 우심한 고을은 경(卿)의 의논을 따라 도고의 대신을 일체 봉납하지 말게 하라. 그 나머지 고을은 한나라 문제가 조세(租稅)를 반으로 감했던 전례(前例)에 의해 1필을 감하도록 허락하여 백성들의 힘을 휴식시키는 것이 좋겠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성교(聖敎)로 특별히 감해 주셨으니, 은혜가 백성에게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안(査正案)이 올라온 뒤에 묘당(廟堂)에서 마땅히 참작하고 헤아려 재정(裁正)하겠습니다. 다만 이미 봉납한 것을 도고(逃故)라 하여 1필을 감해 준다면 중간에서 어찌 소모(消耗)되는 폐단이 없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도고(逃故)를 물론하고 이미 봉납(捧納)한 자는 상납(上納)하고 봉납하지 아니한 자는 우선 징수(徵收)하지 말 것이며, 조적(糶糴)을 나누어 줄 때의 장부를 가지고서 백성의 이름을 구별하여 내년 봄부터 수괄(搜括)해서 대신 충정(充定)하되, 신설(新說)한 것으로써 봉납하는 1필 및 잡역미(雜役米)로 을묘년까지 지탱해 쓰고, 점차 이정(移定)한다면 몇 년 뒤에는 거의 효과가 있을 듯합니다. 혹자는 3백 년이나 된 옛 제도를 갑자기 변경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것은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는 논의입니다. 국초(國初)에는 군액(軍額)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에게 미치는 해(害)도 적었습니다만, 지금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으니, 백성과 나라의 병통이 이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으므로, 옛 제도를 말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반드시 이 폐단을 혁파한 뒤에야 백성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설(新說)하는 1필(疋)의 역(役)에 백성들이 어찌 들어오기를 원하겠는가?"
하자, 심수현이 말하기를,
"1필(疋)을 신설하는 것은 별다른 명목을 창출한 것이 아닙니다. 양정(良丁)·보인(保人) 및 제번 군관(除番軍官) 등의 명목으로 한 것이니,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는 들어오고 원하지 않는 자는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몇 년을 지나면 짐작해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문수(朴文秀)는 우심(尤甚)한 고을의 도고(逃故)는 감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하매, 심수현이 말하기를,
"박문수의 소견은 신과 같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포(戶布)는 오히려 시행할 수 있으나 구전(口錢)은 시행할 수 없다."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호포 또한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호(戶)에도 대(大)·중(中)·소(小)·잔(殘) 네 등급을 두고 난 뒤에야 행할 수 있는데, 만약 호포를 행한다면 소호(小戶)가 점차 줄어들어 채 3,4년이 되기 전에 대대호(大大戶)가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또 장차 호(戶)를 나누어야 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시행할 수 없는 방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필(疋)의 법을 정한다면 마땅히 어떤 이름을 지을 것인가?"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주(州)·부(府)·군(郡)·현(縣)으로 그 차서(次序)를 정하되, 향군관(鄕軍官) 및 액외 교생(額外校生)은 면강포(免講布)로 명목을 삼아 1필(疋)을 바치게 하고 입번(入番)을 그만두게 한다면 그들에게는 손상된 것이 없고, 2필(疋)을 바치는 것에 비해 이해(利害)가 아주 다르기 때문에 2필(疋)과 군역(軍役)을 면하려고 하는 자들이 반드시 많이 몰려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혁파할 만한 각 진보(鎭堡)는 또한 영성(靈城)의 말과 같이 한다면, 시행한 지 몇 해 만에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찌 미리 폐단을 염려하여 시작도 해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필경에는 마땅히 1필(疋)의 대동(大同)의 역(役)으로 해야 하겠는가?"
하자, 심수현이 말하기를,
"2필(疋)을 바치는 자들은 1필(疋)로 들어오기를 원할 것이니 끝내는 대부분 1필(疋)의 역(役)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포(戶布)의 명목이 정당한 것만 못하다."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끝내 백성을 편하게 하고 역(役)을 균등하게 하는 데 이른다면 왕정(王政)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면강포란 명목에 한량(閑良)이 투입(投入)되리라고는 진실로 기필할 수가 없다. 또 포(布)를 바치고 강(講)을 면제한다면, 아마도 독서하는 사람이 없게 될 듯하다."
하매, 심수현이 말하기를,
"면강포란 실제로 액외 교생의 경우입니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만약 1필에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한다면, 달리 변통할 도리는 없고 도고(逃故)를 충정(充定)하는 길을 넓히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여야 할 것이니,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신이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로 나라를 위해 이 폐단을 구제하려고 하는데, 여러 의논이 일치되지 않으니 또한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필의 역(役)은 설혹 시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고(逃故)는 먼저 뽑아 보고 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비록 1필을 시행한다 하더라도 삼군문(三軍門)의 번상(番上)하는 군사에 대한 한 가지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의논에 의해 10년을 한정한다면 또한 효과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天下)의 일은 알 수 없을 것이니, 그 사이에 또 어떠한 폐단이 생길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고를 대정(代定)하지 말도록 할 것이나,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한다면 장차 군사가 없어진 뒤에야 그칠 것이니, 우선 대정하도록 하고 인족(隣族)을 침징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 묘당(廟堂)에서는 절목(節目)을 상정(詳定)하도록 경(卿)은 양역(良役)의 폐단을 걱정하여 반드시 변통하고자 하는데, 나도 또한 그 후폐(後弊)를 말하겠다. 경의 대책은 패도(霸道)에서 왕도(王道)로 나아가는 것이고 왕도(王道)에서 패도(霸道)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강정(講定)한 뒤에 끝내 만약 일이 낭패된다면 비록 수규(首揆)라 할지라도 또한 용서 할 수 없을 것이다. 주관 당상(主管堂上) 윤순(尹淳)을 대신할 사람을 천거함이 마땅하다."
하니, 심 수현이 말하기를,
"윤유(尹游)가 좋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윤유는 의견이 같은가?"
하매, 심수현이 말하기를,
"같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으로는 호판(戶判)이 좋을 듯하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의 의견은 수규(首揆)와 크게 다릅니다."
하자, 심수현이 말하기를,
"송인명은 그의 뜻을 지키고 반드시 청종(聽從)하지 않을 것입니다. 윤유는 의견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인품(人品)이 쾌활하니 만약 사리(事理)를 안다면 청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송인명과 이정제(李廷濟)는 애초부터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같이 일을 하기 어렵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판(戶判)·이판(吏判) 또한 편부(便否)를 우상(右相)과 최(崔)·이(李) 두 봉조하(奉朝賀)에게 문의(問議)하여 품정(稟定)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자리가 비었는데, 그 대신할 사람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이광덕(李匡德)의 재주와 국량이 실로 이 직임에 합당한데, 지금 바야흐로 척보(斥補)되어 있으므로, 감히 갑작스레 의망(擬望)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묘당(廟堂)에 맡기라."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정언섭(鄭彦燮)이 남포(藍浦)에서 비석(碑石)을 채취했는데, 민정(民丁)을 많이 징발하여 소란과 원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남포에서 돌을 채취하는 데 대해서는 일찍이 금령(禁令)이 있었는데, 하물며 재세(災歲)을 당하여 어찌 백성을 사역(使役)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파직시킴이 마땅합니다. 이형종(李亨宗)은 개인적인 일로 인해 패(牌)를 내어 사람을 구속했으니 실로 도민(都民)의 폐해가 됩니다. 청컨대, 경칙(警飭)을 더하소서."
하니, 아울러 모두 따랐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校理) 오원(吳瑗)과 수찬(修撰) 김약로(金若魯)·윤득화(尹得和)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삼가 성지(聖旨)를 보았더니, 인구(引咎)하고 스스로 반성하심이 절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뜻을 다해 지적하여 진계하도록 허락하셨으니, 군하(群下)에 있는 자들이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오늘날 관방(官方)의 난잡함과 형상(刑賞)의 어긋난 것과 염치가 무너진 것과 기절(氣節)이 사그러진 것에서 시작하여 생민(生民)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과 정사(政事)·폐단의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절실하고 지극히 큰 것이 아님이 없으니 이루 손꼽아 세기가 어렵습니다. 그 까닭을 찾아보면 또한 기강이 떨쳐지지 아니하고 청납(聽納)이 넓지 않은 데에 지나지 아니하니, 성지(聖旨)에도 또한 그 강령(綱領)을 이미 제기하셨습니다만, 이에 그 귀취(歸趣)는 또 기질(氣質)을 변화시켜 깊이 스스로 책면(責勉)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신 등은 청컨대, 전하의 기질의 병이 발전해 기강을 진작시키고 언로(言路)를 넓히는 데에 해(害)가 되는 것을 대략 진달하고 이어 수치(修治)의 조목을 올리고자 합니다.
그 내용인즉 ‘성실(誠實)로 근기(根基)를 세우고, 강의(剛毅)로 지기(志氣)를 격려하며, 광원(宏遠)으로 규모(規模)를 정하고, 엄중(嚴重)함으로 체통(體統)을 높이는 것이니, 이 네 조목은 기강을 진작시키는 근본입니다. 그 다음으로 ‘마음을 비워 정지(情志)에 부합(孚合)하고, 자기의 뜻을 버려 천개(遷改)에 용감하며, 도량을 넓혀 기휘(忌諱)를 제거하고, 뜻을 겸손히 가져 규익(規益)을 받는 것이니, 이 네 조목은 청납(聽納)을 넓히는 요체입니다. 생각건대 이 여덟 가지는 실로 근본을 단정히 하고 나가 다스리며 사람을 취해 선(善)을 행하게 하는 절실한 일이 되는 것인데, 그 큰 근원을 궁구해 보면 또한 성학(聖學)을 힘쓰는 데에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래와 같이 조목으로 진달하는 바입니다.
이른바 ‘성실(誠實)로써 근기(根基)를 세운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誠)이란 하늘의 실리(實理)이며 사람의 실덕(實德)입니다. 세대가 점차 내려오면서 경박함과 거짓이 심히 불어나 사람들이 밤낮 악착같이 추구하는 것이 밖으로 달리고 거짓을 만드는 일이 아님이 없습니다. 진짜와 가짜가 눈을 어지럽히고 상하가 허물을 뒤집어 쓰고 있으니, 세상을 돌아보건대 하나의 빈 물거품과 껍질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평일에 성실로써 스스로 힘쓰시지 않는 바 아니나, 수작(酬酌)할 즈음에는 변폭(邊幅)에 구애됨이 많아 혹 환하게 막힘이 없는 뜻이 적으며, 사륜(絲綸)을 내리실 적에는 지나치게 번다하여 혹 실천(實踐)이 앞서고 말이 뒤따른다는 가르침에 소홀하십니다. 영리(營利)를 꾀하려는 생각이 혹 하늘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의리보다 앞서고 사람들이 헐뜯어 의논할까봐 염려함이 혹 실리(實理)를 준행하는 마음을 뺏기도 합니다. 신린(臣隣)을 대우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혹 사람의 기색에 따라 정(情)에 지나친 말로써 건성으로 위로하고, 가부(可否)에 있어는 혹 중심(中心)을 밝게 드러내지 않으며, 상벌(賞罰)에 있어서는 혹 안정(顔情)에 따르는 데 이르기도 합니다. 구속하며 제어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혹 권수(權數)를 가하기도 하고 몰아서 부리는 방도는 혹 억누르고 속박하는 데에서 나오니, 옛 성왕(聖王)의 성신(誠信)으로 아랫사람을 접대하던 규례에 비추어 어찌 어긋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이 성심(誠心)의 발동을 미루어 확장시켜 안배(安排)를 빌지 마시고 꾸밈을 기다림이 없게 하소서. 일의 타당 여부와 말의 따르고 어김에 이르러서는 알면 반드시 행하고 행하면 반드시 실질로써 하소서. 이와 같이 하고도 호령(號令)이 펼쳐지지 않고 정교(政敎)가 거행되지 아니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강의(剛毅)로서 지기(志氣)를 격려한다.’는 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강의가 아니면 족히 자립(自立)하지 못합니다. 인주(人主)가 경부(傾否)의 운회(運會)를 만나 만회(挽回)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더라도 만약 강(剛)으로써 스스로 힘쓰고 의(毅)로써 스스로 격려하지 못하면 그 어찌 능히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오늘날 세도(世道)는 더러운 데로 떨어지고 속습(俗習)은 위미(委靡)하며, 인욕(人慾)은 횡류(橫流)하고 공의(公議)는 민절(泯絶)되고 있습니다. 위로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필서(匹庶)에 이르기까지 사의(私意)의 도가니에 빠져 머리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여 스스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개연스레 분발하지 않는 때가 없으나 견제의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려(振勵)하는 뜻이 견고하게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국용(國用)을 절약하고자 하면서도 조저(曹儲)의 내입(內入)을 오히려 끊지 못하시고, 액례(掖隷)를 단속하고자 하나 방자하게 날뛰는 옛 습성을 금하지 못하십니다. 노여움의 진첩(震疊)은 절기(切己)의 사사로움과 자질구레한 단서에 말미암는데, 군하(群下)로서 총청(聰聽)을 속이고 가리며 공(公)을 배반하고 사(私)를 행하는 자를 전하께서 과연 그 드러나는 대로 혁연(赫然)하게 죄를 주어 위엄을 보이시는지요? 독촉하고 몰아대는 엄격함은 단지 소원한 신하나 보잘것없는 말단의 아전에게 베풀어지는데, 대신(大臣)으로서 빈둥빈둥 날만 보내고 노는 것이 습관이 된 자에게 능히 법도로 인도하고 책려(策勵)하셨는지요? 삼가 원하건대 이제부터 분발해 힘쓰시는 뜻을 늦추지 마소서. 무릇 사의(私意)로써 나의 순정(純正)·지강(至剛)한 기운을 해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맹성(猛省)하여 통렬하게 끊으시고 반드시 확고하게 지켜 혹시라도 흔들리지 마시며, 오랫동안 유지하여 혹시라도 저상(沮喪)되지 마소서.
이른바 ‘규모(規模)를 크고 멀리 정한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인(君人)은 대병(大柄)을 장악(掌握)하고 나라를 다스림에는 큰 규모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총명(聰明)은 단지 자질구레한 일에만 미치고 도리어 대체(大體)를 빠뜨리고 계십니다. 여러 신하들을 정독(程督)함은 부서(簿書)와 기회(期會) 사이에 지나지 않고, 서정(庶政)을 칙려(飭勵)함에는 유사(有司)의 일을 많이 행하고 있습니다. 패초(牌招)의 왔다갔다하는 것의 더디고 빠름과 반상(泮庠)의 과제(課製)를 행하는가 아니하는가 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이 얼마나 자질구레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위로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여 누차 하교(下敎)를 내리시니, 다른 일은 대개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여가(閭家)를 빼앗아 들어가는 데에 대한 금령(禁令)으로써 말씀드리자면, 전하께서 국가의 큰 강령(綱領)과 원대한 계책에 있어서 실심(實心)으로 해 나가시기를 여염집에 대한 금령과 같이 하신다면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진 것이 어찌 이에 이르겠습니까? 전하께서 매번 ‘마음이 이미 상했다’ ‘일에 접촉해 느낌이 일어난다.’고 하시며 조회(朝會)에 임하시어 아랫사람들을 대하여 심지어 눈물을 흘리고 오열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아! 전하께서 겪어 오신 바와 국세(國勢)의 지극히 외롭고 위태함을 신 등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뜻을 더욱 크게 넓히시어 영원한 계획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환하게 멀리 보시고 활짝 스스로 깨달으시어 슬픔으로 심기(心氣)를 손상시키지 말고 작은 일로 정신을 수고롭지 않게 하소서. 정사(政事)를 닦고 백성을 구제하는 크나큰 강목(綱目)과 방국(邦國)을 공고히 하고 후세에 모범이 되는 원대(遠大)한 계책에 대해 깊이 살피시어 날마다 여러 신하들과 강확(講確)·토론(討論)하셔서 성효(成效)가 있을 것을 기필하소서. 그 나머지 자질구레한 일들은 유사(有司)가 마땅히 받들어 시행할 것이니 이것들로써 대체(大體)를 해치지 않게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른바 ‘엄중(嚴重)으로 체통(體統)을 높인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인(君人)의 체통은 마땅히 무겁게 해야 하고 가볍게 할 수 없으며, 마땅히 엄하게 해야 하고 설만(褻慢)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풍속은 가볍게 바뀌고 오랫동안 참지 못하여, 은수(恩數)가 지나치게 분수를 넘는 것과 청촉(請囑)이 외람되고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러서는 요즈음과 같은 때가 없으니, 전하의 자애로움과 이해심이 너무 지나쳐 능히 제재하고 억제하며 금지해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가까운 반열에 있는 자가 한 사람을 위해 은혜를 바라면 곧 ‘내가 마땅히 아뢰겠다.’하고, 한 사람을 위해 허물을 씻어주려고 하면 곧 ‘내가 마땅히 아뢰어 신설(伸雪)하겠다.’고 합니다. 아래에서 이미 엄중하고 두려운 줄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위에서도 또한 어렵게 여기지를 않으니, 은혜는 참람되고 위엄은 외설스러워지며 상은 분수에 넘치고 법은 굽혀집니다. 그리하여 은혜를 받은 자는 그것이 영광스러운 줄을 알지 못하고 죄과(罪科)를 범한 자들은 반드시 요행히 모면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이어 가시려는지요? 삼가 원하건대, 깊이 군인(君人)의 체통을 생각하시고, 현위(弦韋)의 경계에 더욱 힘쓰소서. 얼굴을 찌푸리거나 웃는 것을 반드시 억제하시어 안으로 궁정(宮庭)에서부터 밖으로 신료(臣僚)에 이르기까지 은혜와 위엄이 중도(中道)를 얻고 상과 벌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하고서도 교령(敎令)이 행해지지 않고 기강(紀綱)이 진작되지 않을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마음을 비워 정지(情志)에 부응한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이 체(體)가 됨은 지극히 허명(虛明)합니다. 전하께서는 밝음과 슬기는 여유가 있으나 이치를 살핌이 깊지 못해 군신들 중에 언사(言事)를 좋아하는 자가 있으면 교격(矯激)인가 의심하고, 사람을 논하는 데 능한 자가 있으면 배알(排軋)인가 의심하십니다. 편당(偏黨)을 제거하고자 하심이 전하의 지극히 공정한 혈성(血盛)에서 나왔으나, 성심(聖心) 가운데 ‘붕당(朋黨)을 미워한다[惡朋黨]’는 세 글자를 미리 두고 계시기 때문에 시비(是非)·종위(從違)에 있어서 반드시 피차간의 색목(色目)을 보고 비례하여 분배하며 견주어 헤아리니, 공정하게 듣고 아울러 보는 도리가 상실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지(情志)가 날로 막혀 가끔 예사롭지 않은 견벌(譴罰)이 있는가 하면 차마 듣지 못할 엄한 분부가 있기도 합니다. 아! 임금의 명성(明聖)은 이치로 빼앗을 수 있고 아랫사람의 어리석음은 이치로 깨우칠 수 있으니, 오로지 그 말이 공정한 것인가 사사로운 것인가를 살펴 가부를 판단함이 마땅합니다. 어찌하여 의심과 노여움으로 임하고 억눌러서 막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더욱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살피는 공부에 힘을 쓰시어 나의 마음 가운데가 환하게 막힘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군신(君臣) 상하가 한 마음으로 서로 부응하게 될 것이고, 교태(交泰)의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자신을 버리고 천개(遷改)에 용감하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인(聖人)에게는 ‘나’란 것이 없고 오로지 선(善)을 스승으로 삼습니다. 전하께서 면계(勉戒)하는 말에 대해 가장(嘉奬)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나, 성심(聖心)이 향하는 바를 일찍이 굳세게 행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진달한 바가 혹 성궁(聖躬)에 절핍(切逼)하면 안색(顔色)이 곧 기뻐하지 아니하며, 장주(章奏)가 혹 사실(事實)을 지적해 진달하면 비지(批旨)에 둘러대고 가리는 것이 많았으니 잠규(箴規)는 오랫동안 끊어지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오늘 자신을 책망하는 뜻을 미루어 사의(私意)를 제거하도록 하소서. 그러면 장차 아름다운 말이 숨겨지지 않고 뭇 선(善)이 죄다 모이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른바 ‘도량을 넓혀 기휘(忌諱)를 제거한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은 신하에 대해 등위(等威)가 지극히 엄중합니다. 온화한 안색으로 대하더라도 오히려 그 말을 다하지 못하는데, 만약 한 마디 말이라도 기휘에 저촉되면 따라서 꾸짖고 배척하니, 누가 기꺼이 말하려 하겠습니까? 작년 번신(藩臣)의 상소 가운데 있었던 ‘혈연고립(孑然孤立)’이란 한 구절이 어찌 망발에 이른 것이겠습니까만, 전하께서는 오히려 이것을 가지고 몹시 준엄하게 견책(譴責)하셨습니다. 하물며 그 죄다 말하여 꺼림이 없는 경우야 의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척연(惕然)히 ‘언로(言路)는 성문(城門)과 같다.’는 경계를 깊이 생각하시어 말하는 자가 비록 저촉해 거스린다 하더라도 포함(包涵)하는 도량으로 용납하시고 온화한 낯빛으로 대우하소서. 그리하여 임금을 광정(匡正)하는 꾀가 오히려 절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오히려 격렬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신다면, 충직(忠直)은 다투어 권장되고 덕화(德和)는 날로 밝아질 것입니다.
이른바 ‘뜻을 겸손히 하여 규익(規益)을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인(聖人)은 성인으로 자처(自處)하지 아니하므로 더욱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전하의 영명(英明)하신 슬기는 아주 뛰어나시나 여러 신하들을 경시하는 폐단이 있으며, 자신만 옳다고 여김이 너무 지나쳐 천근(淺近)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는 뜻이 없습니다. 총찰(聰察)의 병(病)을 스스로 알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나, 자랑하고자 하는 습관을 오히려 고치지 못하시어, 신료(臣僚)에게 맡기고 부리실 즈음에는 조금이라도 고지식한 사람은 좋아하지 아니하며 유약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많이 취하십니다. 이렇게 하고도 위태롭거나 망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지요? 삼가 원하건대, 이로 인하여 일깨우고 반성(反省)하며 더욱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데 힘쓰소서. 그리하여 자신을 굽히고 선비를 예(禮)로 대우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어진 이를 구해 좌우(左右)에 두어 자문(諮問)하고 살펴 받아들이신다면, 덕(德)은 날로 진보되고 업적은 날로 높아지며 치교(治敎)는 날로 융성해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직임이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조목별로 전달하여 면계(勉戒)한 것이 참으로 절실하니,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맹성(猛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차(原箚)는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7일 갑술

영월(寧越)의 사노(私奴) 만재(萬才)가 복주(伏誅)되었다. 만재는 어렸을 때에 그 아비가 그 주인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만재가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면서 그 주인을 몽둥이로 때려 죽였던 것이다. 일이 발각되자 삼성 추국(三省推鞫)640)  을 설치해 안문(按問)했는데, 취복(取服)하자 정법(正法)하였다.

 

김정윤(金廷潤)을 헌납(獻納)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지평(持平)으로, 정형익(鄭亨益)을 좌참찬(左參贊)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좌우 포청(左右捕廳)에서 말하기를,
"이 달 17일에 어떤 사람이 금부(禁府)의 문(門) 밖에 와서 비밀스런 일이 있다며 금당(禁堂)을 만날 것을 청하였는데, 나장(羅將)이 마침 고(告)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뒤지고 찾아 이제 춘천(春川) 땅에서 잡았는데, 곧 윤정현(尹廷顯)이라 이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본청(本廳)에서 합좌(合坐)하여 구문(究問)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동필(金東弼)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김동필이 말하기를,
"지금 천폐(天陛)를 멀리 떠날 때를 당하여 다시 성지(聖志)를 굳게 정하실 것을 원합니다. 먼저 대체(大體)를 세우고 다시는 전날처럼 인순(因循)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이어 말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이광덕(李匡德)은 본래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모두 나라를 향한 정성이 있어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를 많이 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밖에 그냥 둘 수 없으니, 모두 소환(召還)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장차 모두 부르겠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윤득화(尹得和)가 말하기를,
"김동필은 외임(外任)으로서 마땅히 청할 바가 아니니, 추고(推考)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거류(居留)는 비당(備堂)을 겸하고 있으니, 어찌 옳지 않음이 있겠느냐?"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당(禁堂)을 소견(召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금백(錦伯)의 장계(狀啓)는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입궐(入闕)하고서야 비로소 그 대강을 들었는데, 마음속으로 지극히 놀랐습니다."
하니,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효경(梟獍)641)  과 같은 무리들이 끝내 마음을 고쳐 먹지 않고 요악(妖惡)한 변(變)이 생기게 하였으니, 깊이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불궤(不軌)의 무리가 국가가 불행하기를 바라고 근거없는 부도(不道)한 말을 지어내었으니, 어찌 통분(痛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술년642)   이후로 이 무리들이 써 먹을 계책이 없게 되자 이번 일에까지 이른 것이니, 너무나 심하다 할 만하다."
하였다. 서명균 등이 급속히 발포(發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술년 이전에는 여러 역적들이 또한 ‘문안(問安)이 빈번하고 나라에 저이(儲貳)가 없다.’고 말했었다. 내가 매번 조정에 혹 문후(問候)하는 일이 있으면 문득 정지시켰던 것은 실로 뜻이 있어 그랬던 것이다."
하였다. 교리(校理)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만약 미령(靡寧)한 때를 당하면 법(法)대로 문안하고 평상시처럼 회복되면 정지할 것이니, 정대(正大)하게 행해 나간다면 인심(人心)은 저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무신년643)  의 변란(變亂)을 당해서도 나는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어찌 이 따위의 일로 마음이 동요되겠는가? 하지만 통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가 못하는 짓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수찬(修撰) 윤득화(尹得和)가 장계(狀啓)로써 청대(請對)할 때 대신(大臣)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하여 승지(承旨)를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고(故) 상신(上臣) 이세백(李世白)이 신사년644)   국휼(國恤) 때 역적 항(杭)이 재궁 상자 서사관(梓宮上字書寫官)으로서 장차 들어가 글씨를 쓰게 되었고 해창위(海昌尉)를 예차(預差)로 삼았었는데, 이세백이 곡반(哭班)에 앉아 목소리를 돋구어 말하기를, ‘상자(上字)는 해평위가 써야 마땅하니 동평군(東平君)이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매, 항(杭)이 이 말을 듣고는 안색이 흙빛처럼 되어 나갔는데 얼마되지 않아 변고(變故)가 생겼으니, 미연에 싹을 꺾어 버렸다고 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의 일이 있을 때를 당하면 대신(大臣)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진복(鎭服)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12월 28일 을해

조명익(趙明翼)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제향(祭享) 때 향관(享官)의 제의(祭衣)를 주견(紬絹)을 써서 세탁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래되면 때가 타서 더러워져, 바르고 밝게 성복(成服)하는 뜻이 아니니, 저포(苧布)를 써서 더러워지는 대로 세탁하여 《예경(禮經)》의 백(帛)을 세탁하는 뜻을 모방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자, 대신(大臣)과 예(禮)를 아는 유신(儒臣)들에게 물었다. 영의정 심수현이 말하기를,
"승제(承祭)의 복색(服色)은 정결(精潔)한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제향(祭享)의 예폐(禮幣)는 저포(苧布)로써 백(帛)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제복(祭服)에 이르러서도 어찌 유독 불가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대신(大臣)들도 다른 의견이 없으니, 임금이 영상(領相)의 의논에 의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9일 병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어제(御製)의 작은 시(詩)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상하가 새 날에 힘써야 할 바는 반드시 공(公)을 앞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 내가 새해를 위해 축원(祝願)하노니 멀고 가까운 것이 함께 인협(寅協)하는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즉석에서 화답하여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감개(感慨)한 것은 육서(陸書)에서 나온 것이 많다. 글을 읽는 것이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오늘 상하(上下)가 공(公)으로서 서로 면려(勉勵)하니, 이것은 실로 생민(生民)의 복(福)입니다."
하였다. 오원에게 명하여 ‘극수재잠(克綏齋箴)’을 지어 올리게 하고 연신(筵臣)들에게 필묵(筆墨)을 내렸다. 장차 물러나려고 하는데, 새벽을 알리는 북[鼓] 소리가 이미 울렸다.
12월 30일 정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홍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근래에 사대부(士大夫)들이 가끔 방납(防納)645)  하여 모리(牟利)하는 폐단이 있어 이익을 독점하고 재물을 소모시켜 폐해가 백성들에게 미칩니다. 그 폐단은 우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풍습의 더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고(故) 명신(名臣) 임숙영(任叔英)이 시골집에서 곤궁하게 사는데, 그 벗으로 관동백(關東伯)이 된 사람이 찾아가 보고 방편(方便)을 써서 곤궁을 구제하려 하니, 임숙영이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방납이란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의 사대부들은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은 말하기를,
"고 부제학(副提學) 이단상(李端相)이 현묘조(顯廟朝) 때에 양주(楊州)에 물러나 살았는데, 기한(饑寒)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벗인 고 판서(判書) 김우형(金宇亨)이 해서백(海西伯)이 되어 이 사실을 듣고서 그 종에게 몰래 환곡(還穀)을 꾸어주고는 방납(防納)의 예(例)로써 이윤(利潤)을 취하되 주인에게 말을 하지 말게 하였었는데, 종이 그 말대로 하여 다른 말로 핑계하고 그 주인에게 바쳤습니다. 뒤에 이 단상이 이를 깨닫고는 빨리 그 곡식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니, 옛사람은 조행(操行)을 단속함이 이와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옥(徐宗玉)이 10폐소(十弊疏)를 올렸는데, 첫째 ‘건극(建極)’ 둘째 ‘입강(立綱)’ 셋째 ‘구현(求賢)’ 넷째 ‘장직(槳直)’ 다섯째 ‘탁재(度才)’ 여섯째 ‘휼은(恤隱)’ 일곱째 ‘수융(修戎)’ 여덟째 ‘이재(理財)’ 아홉째 ‘태용(汰冗)’ 열째 ‘정심(正心)’이었다.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원소(原疏)는 궁중에 머물러 두어 내리지 않았다.

 

하교(下敎)하기를,
"증자(曾子)는 대현(大賢)이었으나 하루에 오히려 세 번 반성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학문하는 것은 본래 두 가지 도리가 아닌데,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끝내는 나태해져서는 하는 일 없이 놀고 인순(因循)하는 것은 모두 반성하지 아니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늘날 군신(君臣)은 대고(大誥)로 경척(警惕)한 마음에 이지러짐이 없는가? 내가 만약 해이해진다면 일에 따라 진면(陳勉)할 것이고 여러 신하들이 만약 해이해지거나 소홀해진다면 내가 마땅히 서로 면려하겠다. 새해와 묵은해가 바뀜이 단지 이 하룻밤 사이에 있으니, 그대들 대소(大小) 신료(臣僚)는 증성(曾聖)의 세 번 반성한 것을 체념(體念)하고 과궁(寡躬)의 안타까운 마음을 생각하라. 허물과 때를 말끔히 씻고 새해와 더불어 새롭게 되어 나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춘대(春臺) 가운데 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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