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무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001) 에 농사를 권면하는 유시(諭示)를 내리기를,
"농사를 권면하는 방도에는 여섯 가지 요령이 있는데, 그것은 농사철에 부역을 시키지 말 것, 백성으로 하여금 안정된 삶을 누리게 할 것, 농량(農糧)을 보조하여 줄 것, 농기구와 농우(農牛)를 갖추어 지급하여 줄 것, 제언(堤堰)과 관개(灌漑) 시설을 갖출 것, 나태한 마음을 경칙(警飭)시킬 것 등이다. 대저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하냐 못하냐 하는 것은 농사의 근만(勤慢)에 달려 있으니, 경칙하지 않으면 게을러지고 경칙하면 부지런히 하기 마련인 것이다. 만일 경칙 면려시켰는데도 그에 대한 효험이 없다면, 이는 나의 말이 미덥지 못한 것이다. 아! 그대들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나의 이런 지극한 뜻을 본받아 나태함이 없이 더욱 면려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승지(承旨)에게 명하기를,
"《농가집성(農家集成)》의 판본(板本)이 있는 곳을 물어서 그 책을 인출(印出)하여 널리 반포함으로써 우리 성조(聖祖)께서 백성을 위하여 찬집(撰輯)한 성대한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각 고을의 정조 호장(正朝戶長)002) 을 불러들여 민간의 고통과 고을의 폐단을 캐어묻고 등대(登對)해서 아뢰게 했다.
사간(司諫) 조명택(趙明澤), 지평(持平) 남태량(南泰良)이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옥(徐宗玉)의 소장(疏章)에 대한 비답(批答)에 이목(耳目)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적요(寂寥)하기만 하다는 전교가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모두 진계(陳啓)하고 인피하였다. 남태량의 계사(啓辭)에 대략 말하기를,
"성심(聖心)에 뉘우치심이 있어 윤음(綸音)을 내리시면서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는 안색에 대해 깊이 경계하시고 직언(直言)하는 길을 환히 열어 놓으셨으니, 이는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고치고 근본을 추구(推究)하여 수용함에 있어 신공(臣工)이 미더워지기도 전에 의심하여 멀리하고 노여움으로 꾸짖어 쌓여온 두려움이 이미 많으니, 군신(群臣)들이 감히 할말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연유되지 않았다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殿下)께서는 바야흐로 순월(旬月) 사이에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서 사람들에게 짧은 기간 내에 완성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잠시의 열띤 지기(志氣)는 계속 잘 이어가기 어려운 걱정이 없을 수 없고, 한 마디 말로써 평단(評斷)하는 것은 구례(舊例)에 기대어 경시(輕視)하는 병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신(臣)은 이목(耳目)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돌아가면서 서로 독촉 핍박하여 앞을 다투어 민첩하게 굴며 구차스럽게 책임만 메울 계책만을 세울 뿐 충언(忠言)과 지계(至計)는 끝내 전하의 앞에 진달되지 않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사퇴(辭退)하지 말라고 비답(批答)하였다.
교리(校理) 오원(吳瑗), 수찬(修撰) 김약로(金若魯)·윤득화(尹得和)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날로 성덕(聖德)을 새롭게 하시어 천운(天運)을 본받으시고 주야로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으로 천계(天戒)를 삼가소서. 그리하여 호령(號令)을 발표 시행함에 있어 반드시 천심(天心)에 합당하게 하시고 정직한 사람을 기용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버려서 천칙(天則)을 어김이 없게 하시며, 형벌(刑罰)은 분명하고 신중하게 함으로써 천토(天討)를 봉행하시고 현능(賢能)한 이를 널리 구하여 천작(天爵)003) 을 함께 하소서. 그리고 검덕(儉德)을 더욱 힘써서 재용(財用)을 절약함으로써 천물(天物)을 아끼시고 조속히 폐정(廢政)을 수거(修擧)하여 폐막(弊瘼)을 고침으로써 하늘이 낸 많은 백성을 보활(保活)하소서."
하고, 끝에 또 말하기를,
"심건이(沈建伊)는 그 정절(情節)이 요악(妖惡)스럽기 그지없으니,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기 위해 재계(齋戒)한다는 것 때문에 시각을 지체시켜 토죄(討罪)를 늦추어서는 안되니, 속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핵문(覈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국청을 설치하라는 일은 따르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수강(受講)할 때 《칠서(七書)》의 언해(諺解)는 일체 구해(舊解)를 따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언해에 신본(新本)과 구본(舊本) 두 가지가 있었는데, 등사(謄寫)하여 전하는 즈음에 저절로 와오(訛誤)가 생겼기 때문에 승지(承旨)가 진달한 데 따라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진계(陳戒)하면서 증전(曾傳)004) 의 훈계를 본받아 자신의 덕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서는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방도에 대해 더욱 힘쓸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면계(勉戒)가 절실하니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본(原本)은 유중(留中)하여 반우명(盤盂銘)으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1월 2일 기묘
경상도(慶尙道) 대구부(大邱府)에서 어떤 도적이 진영문(鎭營門) 밖에 있는 후주(帿柱)의 위에 괘서(掛書)한 일이 발생하였다. 감사(監司) 김시형(金始炯)이 치계(馳啓)하기를,
"괘서(掛書)의 내용에 있는 몇 개의 전어(轉語)들은 매우 흉악하고 패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밑에 또 권비(權裨)와 군기(軍器)라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른바 권비라는 것은 신의 막비(幕裨)인 권순성(權順性)을 가리킨 것 같았습니다. 권순성을 모해하기 위해 흉악하고 패려스러운 말을 하면서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언급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에 감히 흉서(凶書)를 굳게 봉함하여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직접 묘당(廟堂)에 바치게 하는 한편 죄인은 지금 기포(譏捕)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대신(大臣)이 뜯어본 뒤에 비국(備局)의 낭청(郞廳)에게 건네주어 승정원(承政院)으로 보내게 하였다. 승지 홍상빈(洪尙賓)이 청대(請對)하여 진달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명하여 그 괘서(掛書)를 불태우게 하였다. 홍상빈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불살라버린다면 비록 죄인을 잡더라도 고거(考據)하여 철저히 핵실할 방도가 없으니, 불살라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우선 그대로 두라고 허락하였다.
1월 3일 경진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는데, 이는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기 위한 것이다.
1월 4일 신사
임금이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서 지금부터 여러 집사(執事)들은 사직단으로 올라올 때에는 정로(正路)를 경유하고 내려갈 때에는 협로(夾路)를 경유하는 것을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기곡제를 지내기 위해 동가(動駕)할 때에 백관(百官)은 야주가(夜珠街)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보행(步行)으로 따르고, 회가(回駕)할 때에는 종침교(琮琛橋)에 이르러 말을 탈 것이며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은 하마(下馬)하지 말 것을 영구히 항식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홍현보(洪鉉輔)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사간(司諫)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지평(持平)으로, 이유(李瑜)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이수항(李壽沆)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송징계(宋徵啓)·박필균(朴弼均)을 수찬(修撰)으로, 김상규(金尙奎)를 승지(承旨)로, 이덕중(李德重)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1월 5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수찬(修撰) 정형복(鄭亨復)이 왕명을 받들고 가서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서원(書院)에 치제(致祭)하였다. 복명(復命)하고 나서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그 적손(嫡孫)인 전 현감(縣監) 이수겸(李守謙)은 가계(家計)가 말할 수 없이 빈곤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을 정도이니, 전부(銓部)로 하여금 선발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명정문(明政門)에 나가니 백관(百官)들이 예법(禮法)대로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지난밤에 숙장문(肅章門)의 시각을 알리는 군사가 실화(失火)로 인하여 불에 타서 죽었는데, 병조(兵曹)에서 잘 검칙(檢飭)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해당 낭청(郞廳)은 사태(沙汰)시키고 죽은 사람은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를 불러 하유하기를,
"인명(人命)을 중시하는 도리에 있어 오늘의 조참(朝參)은 인정문(仁政門)에서 행할 수 없으니, 명정문(明政門)으로 옮겨서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는 인정문이 숙장문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기 위해 행사(行事)하는 즈음에 예문관(藝文館)의 의막(依幕)005) 에 불이 나서 사직단(社稷壇) 곁의 소나무에까지 연급(延及)되었었다. 그랬는데 이때에 이르러 군사가 또 금문(禁門) 안에서 불타 죽었다. 재이(災異)의 경계가 이와 같았는데도 정신(廷臣) 가운데 진계(陳戒)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저(李著)를 사간(司諫)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경기(京畿)와 삼남(三南)에 재해를 입은 것이 우심(尤甚)한 고을에 대해서는 계축년006) 조의 물고자(物故者)의 신포(身布)를 감면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성지(聖志)를 확립할 것과 수령(守令)을 가릴 것과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것, 이 세 가지에 대해 경계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성지(聖志)가 해이하여 국세(國勢)가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말로써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반드시 실제적인 효험이 없게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비상한 일을 행한 뒤에야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급박하게 하문하기를,
"무슨 일로써 크게 위로할 수 있겠는가?"
하자, 이광좌가 머뭇거리면서 말하기를,
"조금 전에 신포를 감면시키신 일 같은 것이 이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의 이른바 비상한 일이란 것은 반드시 지칭(指稱)하는 것이 있었을 것인데도 임금이 독촉하여 힐문(詰問)하게 되자 이에 신포를 감면하는 것을 가지고 대답하였으니, 그의 성실치 못함이 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0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재정-역(役)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의 이른바 비상한 일이란 것은 반드시 지칭(指稱)하는 것이 있었을 것인데도 임금이 독촉하여 힐문(詰問)하게 되자 이에 신포를 감면하는 것을 가지고 대답하였으니, 그의 성실치 못함이 이와 같았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갑산 부사(甲山府使) 이광덕(李匡德)을 함경 감사(咸鏡監司)에 의차(擬差)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심수현이 전에 이미 이광덕을 추천했었는데 그때 임금이 허락했었으나, 곧 유신(儒臣) 김약로(金若魯)의 말로 인하여 도로 정지시켰었다. 이때에 이르러 심수현이 거듭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억지로 허락하면서 이르기를,
"다만 묘당(廟堂)에서 의논하여 추천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천망(薦望)이 들어옴에 이르러서는 낙점(落點)을 하지 않았다. 이는 이광덕이 누차 궁방(宮房)에 관한 일을 말하여 임금의 마음에 증오를 쌓았기 때문이었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삼남(三南)의 어염 선세(魚鹽船稅)는 이미 본조(本曹)에서 구관(句管)하도록 명하였으니, 본조(本曹)와 제도(諸道)의 별장(別將)·차인(差人)을 혁파(革罷)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각 궁방(宮房)과 각 아문(衙門)의 별장들도 일체 금단시켜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광덕(李匡德)이 건의한 정사인데 또한 많은 폐단이 있다. 먼저 호남(湖南)에서부터 시작하여 편부(便否)를 시험하여 보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에게 이르기를,
"예로부터 낙점(落點)을 천점(天點)이라고 일컬어 왔고 전관(銓官)을 천관(天官)이라고 일컬어 온 이유는 임금이 삼무사(三無私)007) 를 봉행함에 있어 전관(銓官)이 이를 체행(體行)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전관이 된 도리는 그 요점이 공(公)이라는 한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경(卿)의 단점(短點)을 내가 우선은 말하지 않겠으니, 경은 의당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하니, 김재로가 겸손하게 사죄(謝罪)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제 호서백(湖西伯)008) 의 천망(薦望)은 역시 나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했다."
하고, 이어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서종섭(徐宗燮)의 경우는 일찍이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쳤고, 엄경하(嚴慶遐)의 경우는 지망(地望)이 또한 합당했기 때문에 과연 의망(擬望)했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망이 비록 합당할지라도 어찌 모두 인재(人材)이겠는가? 진실로 그가 인재라면 통례(通禮)009) 라도 의망할 수가 있지마는, 어떻게 일찍이 이조 참의를 거쳤다고 하여 모두 방백(方伯)에 의망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지평(持平) 이수해(李壽海)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윤수(尹邃)를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고 이어 엄중히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으며, 남태적(南泰績)을 도배(島配)시키라는 명을 환수하고 이어 엄중히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며, 역적 이탄(李坦)010) 을 노적(孥籍)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명언(李明彦)을 다시 잡아다가 추국할 것을 청하였으며, 김중기(金重器)를 도로 배소(配所)로 출발하게 한 명을 환수하고 이어 엄중히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며, 권섭(權攝)을 감사(減死)시켜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이어 엄중히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며, 물고(物故)된 죄인(罪人) 이엽(李燁)·이전(李)의 아들들을 조사하여 내어 도배(島配)시킬 것을 청하였으며, 이형(李炯)·이식(李烒)을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도로 중지하고 이어 엄중히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며, 목천현(睦天顯)·목성관(睦聖觀)을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시키게 한 것을 도로 중지하고 이어 엄중히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하택(李夏宅)은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중히 형신(刑訊)을 가할 것을 청하였으며, 인신(印信)을 위조(僞造)한 죄인 정도신(鄭道信)에 대해 감사(減死)하고 도배(島配)시키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숙장문(肅章門)의 군졸이 불타 죽은 것은 실로 전에 없던 변고(變故)입니다. 병조(兵曹)와 위장(衛將)이 전적으로 궁성(宮城) 안에 순검(巡檢)을 돌면서 불을 금하는 것을 관장하고 있는데도 전혀 검찰(檢察)하지 않았습니다. 낭관(郞官)은 지금 이미 태거(汰去)하였으니, 병조의 당상관과 위장은 파직(罷職)시키고 부장(部將)과 수문장(守門將)은 잡아다가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참의 서종옥(徐宗玉)이 부평 부사(富平府使) 김상성(金尙星)을 내직(內職)으로 옮기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고(大誥)가 있은 뒤 진언(進言)한 사람은 유독 김상성 한 사람뿐이었다."
하고는, 드디어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에 선유(宣諭)하기를,
"만일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
하니, 종실(宗室) 남원군(南原君) 이설(李)이 나아가 아뢰기를,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아직도 저사(儲嗣)가 없으니, 양가(良家)를 선택하여 저사를 구하는 길을 넓히소서."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난들 어찌 생각하고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설(李)이 말한 것은 실로 당시의 급선무인데 대신(大臣)이 된 사람이 이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는데도 그말이 설에게서 나왔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0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이설(李)이 말한 것은 실로 당시의 급선무인데 대신(大臣)이 된 사람이 이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는데도 그말이 설에게서 나왔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통례(右通禮) 문덕린(文德麟)이 나아가 아뢰기를,
"백성들에게 종자와 식량이 없어 장차 폐농(廢農)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종자와 식량을 보조하여 주라고 명하고 특별히 포유(褒諭)를 내렸다.
사신은 말한다. "비록 구언(求言)하는 명이 있기는 했어도 전후에 말을 한 사람들의 내용이 혹 조정(朝政)의 득실에 관계되는 경우에는 경알(傾軋)011) 한다고 하면서 죄를 주기도 하였고, 혹 의리(義理)와 시비(是非)에 관계된 경우에는 당습(黨習)이라고 하면서 척출(斥黜)시키기도 했다. 때문에 아랫사람으로서 진달한 내용은 문덕린처럼 조경(助耕)에 대한 말에서 그쳤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그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하였는데, 사실이구나."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0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농업-권농(勸農)
[註 011] 경알(傾軋) : 질투하는 마음으로 간계를 부려 남을 모함함.
사신은 말한다. "비록 구언(求言)하는 명이 있기는 했어도 전후에 말을 한 사람들의 내용이 혹 조정(朝政)의 득실에 관계되는 경우에는 경알(傾軋)011) 한다고 하면서 죄를 주기도 하였고, 혹 의리(義理)와 시비(是非)에 관계된 경우에는 당습(黨習)이라고 하면서 척출(斥黜)시키기도 했다. 때문에 아랫사람으로서 진달한 내용은 문덕린처럼 조경(助耕)에 대한 말에서 그쳤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그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하였는데, 사실이구나."
좌승지(左承旨) 홍호인(洪好人)을 체직(遞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대가(大駕)가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갔을 적에 배종(陪從)하는 백관(百官)들에게 말에서 내려 걸어서 따르라고 명했는데, 여러 시신(侍臣)들 가운데 앞서 가던 사람들은 말에서 내리라는 명령을 미처 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례(吏隷)들이 전호(傳呼)하느라 가전(駕前)이 요란스러웠었다. 임금이 처음에는 시신들을 잡아다가 조처하라고 명했다가 곧이어 무겁게 추문하라고 고쳤다. 이리하여 교리(校理) 오원(吳瑗) 등이 소장(疏章)을 진달하고 곧바로 나가면서 후사(喉司)012) 에서 잘 주선하지 못한 탓이라고 강력하게 지척(指斥)했으므로 임금이 엄중한 비답을 내려 파직시켰었다. 이때에 이르러 홍호인이 비지(批旨) 가운데 교만하고 방자하고 망령되다는 등의 하교는 대성인(大聖人)의 사령(辭令)에 흠점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고치기를 청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옥당(玉堂)이 군부(君父)에 대해 노여움을 품고 승정원(承政院)에다 화풀이를 하였으므로 내가 일부러 죄를 준 것인데, 홍호인이 이에 감히 말을 늘어놓으면서 영호(營護)하고 나서는가? 특히 그를 체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춘제(李春躋)가 처음에 홍호인과 합사(合辭)로 진청(陳請)할 것을 약속했었는데, 홍호인이 죄를 얻게 되자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도 없이 물러나왔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대사헌(大司憲) 홍현보(洪鉉輔)가 상소하여 네 유신(儒臣)을 파직시키라는 명을 정지시킬 것을 청하고, 이어 비지(批旨) 가운데 ‘교만하고 건방지고 망령되고 방자하다’[驕蹇妄恣]는 네 글자를 고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대고(大誥)가 있은 뒤 달리 면계(勉戒)하는 말도 없이 유신만을 극력 비호하고 나서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전라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주자(朱子)가 번수(藩帥)들을 위하여 봉사(封事)를 올렸던 전례에 의거, 전지(傳旨)에 응하여 상소(上疏)했는데, 그 조목이 여섯 가지였다.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하는 것, 곤내(梱內)013) 를 화협(和協)하게 하는 것, 조정을 바루어 사방을 바르게 하는 것, 민력(民力)을 펴게 하는 것,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는 것, 군제(軍制)를 이정(釐正)하는 것이었다. 본원을 함양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전하(殿下)께서는 총명하심이 전고에 뛰어나시고 예지(睿智)는 하늘에서 타고 나시었는데,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시어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셨습니다. 그러나 기질(氣質)의 변화에는 혹 다하지 못한 점이 있고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 데에는 혹 이르지 못한 점이 있는 탓으로 정령(政令)을 발표함에 있어 착오를 면하지 못하고 사기(辭氣)를 냄에 있어 화평에 흠결이 많습니다. 과격한 번뇌가 극도에 이르렀을 경우에는 왕왕히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써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시다가도 일이 지나간 뒤에는 번번이 뉘우치시는 뜻을 보이시니, 초야(草野)에서 사적으로 비평하는 사람이나 천고에 사필(史筆)을 잡은 선비가 어떻게 일일이 전하에 대해 곡진하게 정상을 살펴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학문에 있어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질(氣質)에 대해서는 변화시키려 하고 천리(天理)와 인욕에 대해서는 천리는 보존하고 인욕은 막으려 하고 정령(政令)을 발표함에 있어서는 올바르게 하려고 하고 사기(辭氣)를 냄에 있어서는 과묵(寡默)하게 하려는 것인데, 전하의 학문은 어찌하여 이와 다릅니까? 무릇 본원을 함양하는 방술은 ‘경(敬)’이라는 한 글자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고, 곤내(梱內)를 화협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기를,
"아내에게 본보기가 된 뒤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고 집안을 다스린 뒤에야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대개 인도(人道)의 큰 단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등류의 이야기는 신이 말씀 올리기도 이미 지리할 정도이고 전하께서도 또한 싫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닥 비통한 마음이 있으면 부모 앞에서는 딱하게 여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이 지신사(知申事)014) 로 대죄(待罪)하고 있을 적에 각전(各殿)에서 으레 향낭(香囊)을 반하(頒下)하는 전례가 있어 반하할 때 유독 내전(內殿)에서 내온 것은 빛깔과 품질이 다른 전(殿)에 내온 것에 견주어 차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는 반드시 우연한 일이었을 것이요, 반드시 그렇게 하려고 한 까닭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받들어 완상(玩賞)하여 오면서 저절로 아픈 마음을 느끼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마음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므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제 저사(儲嗣)를 보기를 기원하는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같이 느끼는 마음인 것이므로 성자(聖子)의 탄생을 더욱 임사(妊姒)015) 에게 기대하게 됩니다. 신이 엄한 자리여서 감히 그에 대한 말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만, 전하께서도 혹 생각이 여기에 미치신다면 신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개도(改圖)할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고, 조정을 바루어서 사방을 바르게 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기를,
"대신(大臣)은 백료(百僚)의 모범인 것입니다. 따라서 대신의 임무는 진실로 전곡(錢穀)이나 갑병(甲兵)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재주가 있고 덕망이 있는 자를 모두 기용하여 장점과 단점을 서로 보완되게 한 뒤에야 사공(事功)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발(周勃)016) 이 문식(文識)이 부족하자 진평(陳平)017) 에게 보조하게 하였고, 방현령(房玄齡)018) 은 모책(謀策)을 잘 세우지만 두여회(杜如晦)019) 에게 결단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정치가 성대하게 되었던 이유입니다.
대각(臺閣)은 군주의 이목(耳目)인 것입니다. 전하(殿下)의 문변(文辯)은 간언(諫言)을 막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간언을 고리를 굴리듯이 따르는 도량에는 끝내 부족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승여(乘輿)를 지척(指斥)하는 말을 진실로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조정의 득실(得失)에 이르러서는 색목(色目)이 같은 사람의 경우는 비록 알고 있더라도 차마 말을 못하고, 색목이 다른 사람의 경우는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색목이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호창(呼唱)하여 출입(出入)하는 것은 전일의 소장을 전등(傳謄)하여 억지로 인피(引避)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직간(直諫)할 수 있는 문을 널리 열으시어 성궁(聖躬)의 궐실(闕失)을 지척(持斥)하는 사람에 대해 다시는 정직함을 자랑하고 이름 얻기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지 마시고 언자(言者)의 색목을 따지지 말고 그 말의 득실(得失)만을 분별한다면, 대간(臺諫)이 침묵을 지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조(吏曹)·병조(兵曹)는 전형(銓衡)을 담당하고 있는 곳인데, 근래 전형의 격례(格例)가 점차 무너져서 사로(仕路)가 혼잡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음관(蔭官)의 경우는 겨우 승륙(陞六)020) 하자마자 주군(州郡)에 부임하여 가기도 하고, 무관(武官)의 경우는 처음 출신(出身)했는데도 갑자기 곤수(閫帥)021) 에 제수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잡기관(雜技官)들도 자목(字牧)022) 의 직임에 널려 있고 노예(奴隷)가 의관(衣冠)023) 의 반열에 설치기까지 하니, 전선(銓選)을 맡은 신하를 자주 경책(警責)해야 합니다.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는 옥송(獄訟)을 담당하고 있는 곳인데, 가난한 것을 싫어하고 번잡한 사무를 피하기 때문에 구차스럽게 충원한 사람이 더욱 많습니다. 그리하여 당상관(堂上官)은 2품의 무재(武宰)가 돌려가며 잠시 임명되는 자리가 되었고, 낭청(郞廳)은 늙고 쇠잔한 음관(蔭官)이 오래 맡고 있는 곳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교활한 서리(胥吏)들이 무문 농법(舞文弄法)하여 형법(刑法)이 엄중하여지지 못하게 되어 입락(立落)이 관절(關節)024) 에 의해 이루어지고 금시(金矢)025) 가 항양(桁楊)026) 보다 많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야 도하(都下)의 인심이 복종되지 않고, 사방에서 보고 듣기에 괴이하게 여기고 있으니 사송(詞訟)을 맡는 관원은 더욱 삼가서 가려야 합니다.
신 등과 같은 무리도 방백(方伯)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니 오늘날의 전선(銓選)은 한심스럽다고 할 만합니다. 혹은 덕망(德望)이나 혹은 풍릉(風稜)027) 이나 혹은 법을 지켜 공정하게 봉행하는 것이나 혹은 총명하고 재주가 영민(英敏)한 것을 제목(題目)으로 만들어 대신(大臣)과 육경(六卿)에게 문의한 다음 따로 이름을 기록하여 두었다가 자리가 비는대로 차송(差送)하기를 숙종조(肅宗朝) 때 대주첩(代柱帖)을 만들어서 했던 것과 같게 한다면 감사(監司)를 적임자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휴척(休戚)028) 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으니, 수령에 적임자를 얻지 못하는 것은 경사(京司)에 전최(殿最)029) 하는 법이 엄중하지 못한 탓인 것입니다. 외방의 수령은 낭서(郞署)에서 나가는데, 낭서에 적임자를 얻지 못하는 것은 초사자(初仕者)의 보거(保擧)030) 하는 법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 탓인 것입니다. 따라서 보거하는 법이 행해진다면 초사자들이 혼잡스럽지 않게 될 것이며, 전최(殿最)하는 법이 엄중하게 되면 낭서(郞署)가 함부로 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가서 수령이 되는 사람 가운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고,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양역(良役)의 역가(役價)를 베 2필(疋)로 한 것은 이것이 본디 고통스럽고 과중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를 시행한 지 백년이 되어도 백성들이 아직껏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사사로이 모집하는 문로(門路)가 넓어지면서부터 1필(疋)의 역가(役價)가 나오게 되었는데, 1필과 2필은 그 고달프고 헐한 것이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그 사술(詐術)을 이용하고, 부자들은 그 재물(財物)을 써가며 서로 이끌고 그리로 들어가게 되니, 양민(良民)들은 날로 더욱 감축됩니다. 그리하여 노약자(老弱者)와 병든 자가 뒤섞여 양역(良役)에 충당되는가 하면, 도망자·물고자(物故者)와 잡탈(雜頉)이 난 자들에 대해 제때에 대정(代定)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인족(隣族)과 백골(白骨)에 대한 폐단이 생기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추가로 설치한 군문(軍門)을 혁파시켜 긴요하지 않은 병액(兵額)을 감손함으로써 경외(京外)에서 투입(投入)하는 연수(淵藪)031) 를 막아 차단시킨 다음, 도승법(度僧法)을 회복시키고 누적(漏籍)에 대한 법금을 신명(申明)시킨다면 양정(良丁)이 넉넉하게 되어 인족(隣族)의 징포가 해소되게 될 것입니다. 전결(田結)에 의한 역사(役事)와 연호(煙戶)의 세금 등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일정한 법규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경중(輕重)과 다과(多寡)가 일국(一國)을 통틀어 보면 도(道)마다 각기 다르고 일도(一道)를 통틀어 보면 고을마다 각기 다릅니다. 이는 모두 따로 착취할 구멍을 뚫어 교묘하게 명색(名色)을 붙인 탓으로 세금의 징수가 제한이 없어 폐단이 매우 혹독합니다. 마땅히 비당(備堂)032) 가운데 심계(心計)가 있고 외방의 일을 익히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목(條目)을 헤아려 정하고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운 다음 이를 각도(各道)에 반포하여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 장률(贓律)로 논죄하게 한다면, 횡포스런 징렴(徵斂)이 지식될 것입니다."
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전하께서 풀로 옷을 해 입고 나무 껍질을 먹어야 한다는 전교(傳敎)가 윤음(綸音)에 발론되었는데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잘 도양(導揚)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신이 개탄스럽게 여기는 이유인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금년부터 1년에 수입(收入)되는 재부(財賦)의 다소(多少)를 논할 것 없이 그것을 다섯으로 나누어 그중 5분의 1은 덜어서 남겨 두고 나머지 5분의 4로 1년의 경용(經用)에 충당하게 해서 5년 동안 계속한다면 1년의 저축이 이루어질 것이고, 15년 동안 계속한다면 3년의 저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1년의 수입으로써 1년의 경비를 잇댈 수 없는 형편인데 5분의 4로 어떻게 경비를 지탱해 갈 수 있겠는가?’ 하는데, 이는 진실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용관(冗官)·용리(冗吏)를 태거(汰去)시킨다면 헛되이 녹(祿)을 먹는 사람들이 적어질 것이고, 또 성상의 공궤(供饋)하는 것에서부터 아래의 봉록(俸祿)과 요포(料布)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감면시켜 모름지기 5분의 4의 수량에 준(準)하도록 한다면 잇대기 어려운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무릇 이미 이렇게 잘했다면 미포(米布)가 축적됐을 것입니다. 매년 왜인(倭人)이 공납(貢納)하는 생동(生銅)이 거의 수십 만 근이 넘는데, 이것이 궁각계(弓角契)033) 에 녹아 없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이를 모아 해를 걸려 주조(鑄造)하게 하는 한편, 산과 바다 안에서 생산되는 어염(魚鹽) 가운데 사문(私門)으로 들어가는 것도 모두 탁지(度支)034) 에서 주관하게 한다면, 바다에서 굽고 산에서 주조하는 것의 이익이 흥성될 것입니다. 은(銀)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삼(蔘)을 캐는 잠상(潛商)을 철저히 방지하고 팔포(八包)035) 가 외람되이 가지고 가는 것을 엄중히 금한다면 왜은(倭銀)이 날로 이르게 되고 중국으로 들어가는 수량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화(銀貨)를 이루 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군제(軍制)를 이정(釐正)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국가에서 훈련 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御營廳)에 대해 중임(重任)을 위임한 것은 균등하게, 제도(制度)와 규모(規模)는 서로 다른 점이 있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훈국(訓局)036) 에 소속된 경병(京兵) 가운데 반을 어영청에 소속시키고, 어영청에 소속된 향군(鄕軍)의 반을 훈국에 소속시켜 고르게 분배(分排)하여 이를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으로 만드소서. 그리고 경리청(經理廳)을 폐지시켜 기영(畿營)에 예속시킴으로써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과 함께 좌(左)·우(右)·후(後) 삼보(三輔)로 만든 다음, 원근(遠近)과 내외(內外)의 군현(郡縣)에 모두 단독의 진(鎭)을 설치하여 신지(信地)037) 를 정해 둔 뒤 적(賊)이 쳐들어 올 경우 스스로 싸우게 한다면 흉포스런 적을 방어하는 술책이 갖추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병선(戰兵船)의 제도를 조금 고쳐 윤차로 돌려가면서 조운(漕運)하게 할 것 같으면, 공군(供軍)하는 비용을 감축할 수 있는 반면, 노젓기에 능하여 물에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구준(丘濬)038) 의 차(車)에 대한 제도를 증감(增減)하여 전진(戰陣)에 사용하게 한다면, 경외(京外)의 군문(軍門)에서 징발하는 복마(卜馬)의 폐단을 제거할 수가 있고 거마창(拒馬槍)039) 의 대용(代用)으로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끝에 또 논하기를,
"사대부(士大夫)의 서얼(庶孽) 가운데 출신(出身)한 사람을 삼청(三廳)040) 가운데 한 곳에 나누어 소속시킨다면, 누적되어 온 억울함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묵은 구포(舊逋) 가운데 이미 죽어서 귀록(鬼錄)에 오른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탕감시키는 명령을 내리신다면, 거꾸로 매달린 듯이 급박한 원고(怨苦)를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역적(逆賊)의 족속 가운데 법외(法外)에 연좌된 사람과 시종(侍從) 가운데 일을 말하다가 찬배(竄配)된 사람들에게 모두 소석(疏釋)시키는 은전(恩典)을 보이신다면, 효경(梟獍)041) 처럼 사나운 마음을 순하게 길들일 수 있고 입을 다문 까마귀처럼 말을 하지 않는 풍조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고 이르기를,
"여섯 가지의 면계(勉戒)에 있어 꺼리지 않은 것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2부(二府)042) 의 관원을 택차(擇差)하고 공경(公卿)에게 녹천(錄薦)하게 하는 일은 마땅히 유의(有意)하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 원소(原疏)는 유중(留中)하게 하고 백성의 힘을 펴게 하는 방법을 논한 그 이하를 등서(謄書)하여 묘당(廟堂)에 내려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대신(大臣)과 금당(禁堂)043) 에게 추국(推鞫)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직산현(稷山縣)에 심건이(沈建伊)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라에 대상(大喪)이 있을 것이라는 유언 비어를 본현(本縣)의 장교(將校) 김진찬(金晋贊)에게 말을 전하였고 김진찬은 향소(鄕所)의 이환(李瑍)에게 전하였고 이환은 현감(縣監) 이위보(李渭輔)에게 고하였고 이위보는 감사(監司) 정언섭(鄭彦燮)에게 치고(馳告)하였다. 정언섭이 그 말한 근거를 핵실(覈實)하니, 심건이는 이양제(李亮濟)와 감덕(甘德)에게서 들었다고 했으므로 정언섭이 장문(狀聞)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잡아왔으므로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안국(按鞫)하게 하였다. 심건이는 죄인(罪人) 이항(李杭)044) 의 가노(家奴)이고, 감덕은 곧 심건이의 생질녀(甥姪女)인데 이항의 아들 이현(李炫)의 첩(妾)이다. 그리고 이양제는 현의 이종(姨從)이다. 국청(鞫廳)에서 이환을 신문하니, 이환이 공초(供招)하기를,
"지난해 12월 17일 김진찬(金晋贊)이 와서 이 말을 전하면서 ‘심건이에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김진찬을 신문하니, 공초 내용이 이환의 말과 같았다. 심건이를 신문하니, 심건이가 공초하기를,
"이양제(李亮濟)가 최어자리(崔於自里)의 집에 와서 머물고 있었는데, 감덕도 공주(公州)에서 와서 모였기 때문에 신이 가서 만났더니, 이양제가 경서(京書)를 보고서 안색을 변하면서 경탄(驚歎)하기에 신이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답하기를, ‘국가에 미령(未寧)한 징후가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돌아가기에 임하여 감덕이 신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국가에 변고가 있는데 저사(儲嗣)도 없고 가까운 종실(宗室)도 없기 때문에 우선 발설(發說)하지 않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신이 돌아와서 김진찬에게 전하였습니다."
하였다. 감덕(甘德)을 신문하니, 감덕이 공초하기를,
"신이 심건이에게 조가(租價)를 받으려고 하니, 심건이가 ‘유명한 점장이가 나의 수명을 점치기를 「내년에 죽게 될 것이다.」 했으니, 나를 피곤하게 하지 말기 바란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유명한 점장이가 만약 영험(靈驗)이 있다면 예로부터 어찌 국상(國喪)이 있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밖에 다른 말은 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양제를 국문하였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았으므로, 이로부터 추국(推鞫)을 연달아 행하였다.
1월 6일 계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을 불러 보고 지금의 급선무에 대해 하문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죄를 받고 폐기되어 있지마는, 이보다 먼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감히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한번도 채납(採納)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 다시 무슨 기이한 계책이 있어 성심(聖心)에 만족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양역(良役)을 변통시킬 방책을 하문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외읍(外邑)의 놀고 먹는 사람들을 지금 단시일(短時日)에 태정(汰定)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비국(備局)의 군관(軍官)이나 액외(額外)의 교생(校生)으로 호칭하는 자들을 시사(試射)하여 몰기자(沒技者)045) 는 급제(及第)를 주며, 무기(武技)에 우등을 받은 자와 고강(考講)에 순통(純通)을 받은 자에게는 특별히 납포(納布)를 면제하고 능통하지 못한 자에게는 각각 1필(疋)씩 거둔다면, 양민(良民)이 치우치게 고통당하는 폐단을 제거할 수도 있겠습니다. 결미(結米)에 이르러서는 그 이름이 올바르지 못하니, 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힘써 만류하였다.
동지(同知) 이익한(李翊漢)이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당고(黨錮)의 폐단은 이미 고칠 수 없는 고질로 굳어져 있습니다만, 한번 무신년046) 의 변란이 있은 이후 전하의 뜻이 탕평(蕩平)에 있으시어 정사(政事)를 통용하기에 힘써 피차(被此)를 함께 진용(進用)했으니, 이는 진실로 5,60년 이래 있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혹 표리(表裏)가 각기 다르고 언의(言議)가 상반되는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땅히 더욱더 칙려(飭勵)하여 점차 해소하게 된다면, 탕평의 실효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봉조하(奉朝賀)로 있는 세 신하는 모두가 세 조정을 섬긴 노성(老成)한 신하로서 평소 일세(一世)의 명망을 받고 있는 이들입니다. 최규서(崔奎瑞)는 일찍 스스로 염퇴(恬退)했었으나 나중에 큰 공훈을 세웠습니다. 민진원(閔鎭遠)은 친함이 원구(元舅)047) 와 같고 의리는 휴척(休戚)048) 을 함께해야 할 처지이므로 나라를 향한 정성은 반드시 다른 사람의 배가 될 것이며, 이광좌(李光佐)는 전하께서 또한 일찍이 해를 꿰뚫는 충성이 있다고 포양(褒揚)한 적이 있는데, 나이가 아직 늙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퇴휴(退休)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 두 신하를 좌우(左右)에 두시고 국사에 대해 참여하여 모의(謀議)하게 하도록 하고, 또한 최규서도 도성(都城)에 머물게 하여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의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양역(良役)을 변통시키는 데에는 끝내 좋은 계책이 없으니, 마땅히 각각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이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함으로써 그 효과를 요구하게 하소서. 병조(兵曹)의 기보포(騎步布)도 마땅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차원(差員)을 정하여 압령(押領)하여 오게 하고, 삼남(三南)의 전결(田結)도 마땅히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직접 답험(踏驗)하게 한 다음 도신(道臣)이 그 성책(成冊)을 조사하여 재해를 입은 사실을 사정(査定)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사치의 폐단은 실로 나라를 망치는 단서가 되는데 상방(尙方)의 직기(織機)는 비록 철거했지마는, 연시(燕市)049) 의 채단(綵緞)을 금하지 않는다면 칙려(飭勵)하는 의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사행(使行)이 있을 때 채단을 사가지고 오는 한 조항은 엄중히 막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시(司䆃寺)에서 공봉(供俸)하는 궁인(宮人)의 요미(料米)는 궁인이 죽은 뒤에 또 그의 대신을 선출하여 요미를 더 지급받는가 하면 죽은 자의 요미도 전대로 계속 받고 있다고 하니, 마땅히 변통시키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각 고을 수령의 전최(殿最)를 감사(監司)와 병사(兵使)가 서로 의논하여 봉계(封啓)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황해 병사(黃海兵使) 박찬신(朴纘新)이 아뢰기를,
"수령의 군사에 대한 행정의 근만(勤慢)을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서로 의논하여 출척(黜陟)시키는 것이 본래의 고규(故規)인데, 근래에는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가 당초부터 참여하여 듣지 않으니, 지금부터는 가부를 함께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정필영(鄭必寧)을 승지(承旨)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응교(副應敎)로, 김상석(金相奭)을 교리(校理)로, 정형복(鄭亨復)을 부교리(副校理)로, 오언주(吳彦胄)를 수찬(修撰)으로, 김시혁(金始㷜)을 발탁하여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1월 7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 5경(五更)에 목성(木星)과 화성(火星)이 서로 범하였다.
전(前) 선전관(宣傳官) 이인식(李仁植)이 승정원(承政院)에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제일 첫머리에 역란(逆亂)을 토평(討平)한 것을 이유로 성덕(聖德)을 찬송(贊頌)하고 이를 관현(管絃)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또 동조(東朝)050) 에게 진호(進號)할 것을 청하였는데, 승정원에서 퇴각시켰다. 임금이 듣고서 이는 간언(諫言)을 오게 하는 방도가 아니라고 여겨 승지들을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그 소장을 봉입(捧入)하려 할 적에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이 무리들이 감히 무엇을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마땅히 그 소장을 퇴각시키고 그 사람은 죄를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윗 조항의 소청은 진실로 불가한 것이지만 동조(東朝)의 존호(尊號)는 전례이니, 봉입(捧入)하지 않으면 될 뿐이지 어찌 죄줄 필요까지 있겠는가?"
하였다. 서명균이 청하기를,
"지금부터는 소장의 내용이 찬송(讚頌)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 퇴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 이를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정하라고 명하고, 승지(承旨)를 추고하란 명은 도로 정지하게 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서명빈(徐命彬)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박필재(朴弼載)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고(故)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을 효성이 있다는 이유로써 정려(旌閭)하였는데, 종신(宗臣)이 상소(上疏)하여 청한 것을 따른 것이다.
주인(主人)을 시해(弑害)한 죄인 만재(萬才)가 복주(伏誅)되었다. 만재는 영월(寧越) 사람 김대종(金大宗)의 종이다. 김대종이 일찍이 만재의 아비를 살해했는데, 만재가 장성하여 김대종을 시해함으로써 아비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성국(省鞫)051) 을 설치하여 자복을 받고서 정형(正刑)052) 에 처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영남(嶺南)의 괘서(掛書) 죄인(罪人)인 서무필(徐武弼) 등을 친히 국문하였다. 이보다 먼저 대구부(大邱府)에 괘서(掛書)의 변고가 있었는데, 감사(監司) 김시형(金始炯)이 상금을 내걸어 서무필을 체포하였고 안문(按問)하여 자복을 받았다. 그리고 아울러 간련인(干連人) 신두병(申斗炳)·김원성(金遠聲)을 뇌옥(牢獄)에 가두고 계문(啓聞)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모두 금오(金吾)053) 로 잡아와서 드디어 친히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서무필이 누차 공사(供辭)를 바꾸어서 ‘김원성과 신두병이 포적(逋糴)에 대한 독촉을 받았기 때문에 영비(營裨) 권순성(權順性)을 원망하여 해치려고 그랬는데, 김원성이 글을 짓고 신두병이 썼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 말하기를, ‘신을 체포하여 바친 사람인 방재유(方載維)도 동모(同謀)했는데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신을 무함하여 끌어들인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교(營校) 하도문(河圖文)·김수(金壽) 등이 영비(營裨)를 모해(謀害)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다.’고도 했다. 신두병을 신문하니, 신두병도 공사(供辭)를 바꾸어 말하기를,
"곤장을 견딜 수가 없어 처음에 무복(誣服)했습니다만, 흉서(凶書)를 지어 신에게 내다 걸게 했다는 것은 실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고, 김원성을 신문하니, 공초(供招)하기를,
"괘서(掛書)는 지난번 12월 22,23일 사이에 있었는데, 그때 신두병은 칠곡(漆谷)에 가 있었으므로 실제로 참여하여 듣지 못했습니다. 신이 비록 포부(逋負)가 있기는 합니다만, 영비(營裨)에게 일찍이 곡진히 보호받은 적이 있으니, 은혜는 있을망정 원망은 없습니다. 따라서 서무필의 말은 거짓입니다."
하였다. 김원성을 서무필과 대질(對質)시켰으나, 둘 다 서로 굴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정국(庭鞫)을 명하게 된 것이다.
1월 8일 을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좌윤(左尹) 오광운(吳光運)이 상소(上疏)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에 대해 말하기를,
"양역(良役)을 변통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게 되고, 잘 변통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에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만전(萬全)하여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호전(戶錢) 한 가지 일이 있을 뿐이라고 여겨집니다. 대개 예로부터 양법(良法)은 조(租)·용(庸)·조(調)054) 만한 것이 없는데, 이른바 호전(戶錢)은 곧 조(調)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대부(士大夫)들은 그들 몸에는 용(庸)이 없습니다만, 전지(田地)와 가옥(家屋)은 똑같은 것이니, 전지에 이미 조(租)가 있다면 가옥에 조(調)가 있는 것이 어찌 명분(名分)에 손상이 되겠습니까? 지금 호포(戶布)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인가를 통틀어 계산하고 또 일국(一國)의 호구(戶口)가 얼마인가를 계산해서 그전의 경비를 헤아려 새로 받아들일 것을 분배(分排)한다면, 대체적으로 소호(小戶)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1냥에 불과하지만 전일 양포(良布)의 수량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호포(戶布)라고 하지 않고 호전(戶錢)이라고 하는 것은 베[布]로 받으면 소호(小戶)에서 1필(疋)을 내게 되어 과중할 뿐만이 아니라 거두어 들이는 즈음에 조종하여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돈으로 받으면 분배하기도 편리하고 또 이서(吏胥)들이 농간을 부리는 단서가 없어지게 됩니다. 대개 가호(家戶)는 숨기기가 어렵지만 인구(人口)는 숨기기가 쉽기 때문에 구전(口錢)이 호전(戶錢)만 못한 것입니다. 만일 유포(遊布)를 매기기 위해 대대적으로 군적(軍籍)을 만들 때처럼 한다면 인심이 경동(驚動)하여 진정시키기 어려울 것이니, 결국은 호전(戶錢)만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차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이 사령(赦令)으로 인하여 도내(道內)에 정배(定配)된 죄인 권영(權瑩)·이만유(李萬維)가 석방시키는 데에 해당되는지의 여부에 대해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조현명은 추고하고 두 사람은 그대로 정배시키라고 명하였다.
헌납(獻納) 김정윤(金廷潤)이 상소(上疏)하여 민호(民戶)에 대동법(大同法)을 행할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민호(民戶)를 통틀어 계산하여 대(大)·중(中)·소(小)로 나눈 다음 각각 3,4 두(斗)의 쌀을 받으면 군포(軍布)의 수량을 충당시킬 수가 있는데, 그런 다음 2필(疋)을 전부 감면시키는 것이 상책(上策)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두수(斗數)를 가볍게 하여 1필(疋)을 면제시키는 것도 또한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등극(登極)하신 처음에는 장법(贓法)을 약간 엄중하게 했으므로, 윤식(尹植)·심세준(沈世俊)의 경우는 여러 해 동안 찬배(竄配)되었고 지금까지도 폐고(廢錮)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근래에 점차 해이해져서 비록 윤식의 무리보다 10배의 장죄를 범한 자가 있더라도 한번 사사(査事)를 거치면 거개가 말끔히 벗어나게 되니, 돌아보건대, 어떻게 탐오를 징계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발현(發現)되는 대로 더욱 엄중하게 징계시키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문과 출신(文科出身)으로서 적체(積滯)되어 있는 사람이 3, 4백 명의 다수(多數)에 이르게 되고 홍패(紅牌)만 안고 있다가 굶어 죽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삼조(三曹) 각사(各司)에 일찍이 문관(文官)의 자리가 있었던 것은 모두 그 구규(舊規)를 회복시키고 우관(郵官)055) 과 수령(守令)은 반드시 문관(文官)·남행(南行)·무관(武官)으로 교대해서 차임하게 하소서. 초사자(初仕者)에 이르러서는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유음 자손(有蔭子孫)은 지손(支孫)과 적손(嫡孫)을 가리지 말고 택용(擇用)하라는 것은 《전록통고(典錄通考)》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고, 또 선조(先朝)의 수교(受敎)가 있는데도 근래에는 다만 적장(嫡長)만을 취하고 있는데, 적장이 반드시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양역(良役)에 대한 일과 문관(文官)을 승천(陞遷)시키는 일은 묘당(廟堂)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유음(有蔭)의 지손(支孫)을 기용하는 일은 법식(法式)을 정한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데 어떻게 경솔하게 고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9일 병술
경상도의 괘서(掛書)한 적(賊) 서무필(徐武弼)이 복주(伏誅)되었다. 서무필에게 누차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이날 임금이 다시 인정문(仁政門)에 나가 서무필을 국문했는데, 먼저 압송하여 온 영교(營校)에게 그를 체포하게 된 상황을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서무필은 요언(謠言)과 익명서(匿名書)를 잘 짓는데, 영비(營裨)에게 곤장을 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의심하여 체포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이에 의거 서무필을 엄중히 신문하라고 명하니, 서무필이 공초(供招)하기를,
"흉서(凶書)는 과연 내 스스로 했기 때문에 신두병(申斗炳)과 김원성(金遠聲)은 실제로 참여하여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그가 무복(誣服)할까 염려하여 그로 하여금 그 흉서의 내용을 외어보게 하니, 서무필이 임금을 무함하는 구어(句語)를 외었다. 임금이 또 하문하기를,
"이 흉언(凶言)을 어디에서 들었는가?"
하니, 서무필이 공초하기를,
"최태망(崔台望)이란 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만호(萬戶)를 역임한 적이 있고, 이의현(李宜顯)의 문하에 출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신년056) 전에는 변산(邊山)을 왕래하였고 또 장후상(張后相)과 백수일(白守一)의 아들과 서로 친하였기 때문에 최태망이 장후상에게서 듣고 전하였습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유엄(柳儼)이 나아가 말하기를,
"장후상은 본디 배윤명(裵胤命)과 더불어 모두 요악(妖惡)스럽다고 일컬어졌으니, 체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장후상은 인동(仁同)의 대족(大族)인데, 체포하여 신문했다가 실상이 드러나지 않으면 난처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무필의 말에 최태망이 이의현과 서로 알고 있다고 하니, 진실로 의심할 것도 없다. 백수일의 아들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시위(侍衛)하고 있던 여러 무신(武臣)들이 모두 백수일은 아들이 없다고 말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자복한 것이 거짓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하고, 더 형신할 것을 명하였다. 서무필이 공초하기를,
"방재유(方載維)가 저를 체포하여 바친 혐의가 있는데, 최태망과 방재유는 구생(舊甥)의 사이이기 때문에 무인(誣引)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서무필은 임금을 무함하는 부도죄(不道罪)를 범했다는 것으로 정형(正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신두병과 김성원은 방면하게 하고 이어 활인서(活人署)에 명하여 치료해서 보내게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서명빈(徐命彬)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음붕(淫朋)의 폐해는 결국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하고서야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사람들마다 모두 붕당(朋黨)을 타파시켜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 근본을 따져본다면 전하께서 위에서 창언(倡言)하셨기 때문에 군하(群下)들이 따라서 말하는 것뿐입니다. 군주는 단지 대체(大體)만을 총괄해야 되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강유(綱維)를 잘 이끌지 못하시고 그저 말단적인 언어(言語)와 사위(事爲)에만 유념하고 계시므로, 마침내 폭노(暴怒)가 자주 되풀이됨을 면하지 못하고 은상(恩賞)이 번번이 외람된 데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신료(臣僚)들을 진퇴시키는 데 있어서도 속박하고 다그쳐서 그들이 염우(廉隅)057) 를 펼 수 없게 되니, 사대부(士大夫)들의 풍절(風節)이 이 때문에 점차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저쪽과 이쪽을 함께 진용(進用)함으로써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사환(仕宦)하게 하는 것을 요법(要法)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저쪽과 이쪽이 각기 이른바 의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합쳐 하나가 된 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양쪽을 뒤섞어 상대적으로 기용하는 것만을 가지고 탕평(蕩平)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탕평의 가죽이요 터럭일 뿐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색목(色目)에만 구애되지 마시고 군하(群下)들로 하여금 진실로써 임금을 섬기게 하다면 세도(世道)가 청명(淸明)해질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윤순(尹淳)의 충군 애국(忠君愛國)하는 정성과 청렴 결백한 지조는 실로 책임을 맡기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이인식(李仁植)은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는 계책을 품었으니, 마땅히 죄책을 가해야 됩니다. 일전에 유신(儒臣)의 상소(上疏)에 대한 비답(批答)에 사령(辭令)이 화평스러움을 잃고 있었는데, 이는 본원을 함양하는 공부에 미진함이 있어서 그런 것 같으니, 바라건대, 아울러 유념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가 절실하여 내가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소장을 올린 사람의 죄를 다스리지 말게 한 것은 와서 간하는 길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해서인 것이다. 유신(儒臣)에 대한 일은 사체(事體)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오래도록 폐기시키겠는가?"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사간(司諫) 이저(李著)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각(臺閣)은 시정(時政)에 대해 한 가지 일도 몰라서는 안되는 것인데, 군국(軍國)·형옥(刑獄)에 대한 정사와 제도(諸道)의 장문(狀聞)에 대한 일을 모두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탓으로 문견(聞見)이 넓지 못하니, 이는 눈과 귀를 막고서 보고 듣기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자신의 연유(宴遊)와 침식(寢食)을 간관(諫官)이 좌우(左右)에서 참여하여 의논하지 못하게 한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당(唐)니라의 제도를 다 실행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승정원(承政院)에서 계하(啓下)되는 문서와 거조(擧條) 가운데 조보(朝報)에 나오지 않은 것은 모두 대각(臺閣)으로 보내어 대각에 나아오는 신하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소서. 이미 비국(備局)이나 해조(該曹)에 내린 것일지라도 또한 가져다 볼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청(視聽)을 넓히고 언의(言議)에 이바지 하는 방도로 삼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사헌부의 직책은 원왕(冤枉)을 신리(伸理)시키고 남위(濫僞)를 금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무릇 원왕에 해당되는 일은 반드시 사헌부를 경유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격고(擊鼓)058) 하여 상언(上言)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바로 구법(舊法)인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구전(舊典)을 거듭 밝혀서 사헌부에서 퇴장(退狀)059) 을 받지 않고 곧바로 격고나 상언하는 것을 일체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고 하여 모두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이저(李著)가 또 말하기를,
"어제 대신(大臣)들에게 책자(冊子)를 만들어 써서 올리라고 한 명령은 진실로 천장각(天章閣)060) 에서 서찰(書札)을 준 뜻에 맞는 처사였습니다. 청컨대, 승정원으로 하여금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의 일에 대해 말한 소장(疏章)을 모두 가져다가, 그 가운데 군덕(君德)과 치도(治道)에 관계가 있는 것을 뽑아서 책자로 만들고 이 뒤의 장주(章奏)도 계속 붙이게 하여 여러 사람들의 말을 모으고 좋은 계책을 쓰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왕부(王府)의 문서(文書) 가운데 판부(判付)된 것을 중관(中官)이 잘못 전하여 문서가 바뀌는 일이 있었으니, 해당 중관은 마땅히 잡아다가 조처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전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대각(臺閣)의 풍채(風采)를 보게 되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저(李著)가 논한 내용은 모가 난 것도 없고 핍박하는 것도 없어서 임금의 뜻에 매우 맞았으므로 훌륭한 포유(褒諭)를 받았다. 그러나 식자(識者)들은 사적으로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떤 재신(宰臣)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저를 비난하기를, ‘모릉(模稜)한 내용의 계사(啓辭)를 어떻게 하면 많이 얻을 수 있겠는가?’ 했는데, 이로부터 사람들이 모두들 이저를 모릉계 대간(模稜啓臺諫)이라고 지목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0면
【분류】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사법(司法)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註 058] 격고(擊鼓) : 임금의 거둥 때에 원통한 일을 임금에게 상소하기 위하여 복을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림.[註 059] 퇴장(退狀) : 소장(訴狀)을 반려(返戾)시킴.[註 060] 천장각(天章閣) : 송 진종(宋眞宗)의 장서각(藏書閣) 이름. 천희(天禧) 4년에 진종이 어제(御製) 7백 22권을 내어 재신(宰臣)들에게 맡긴 일이 있음.
사신은 말한다. "이저(李著)가 논한 내용은 모가 난 것도 없고 핍박하는 것도 없어서 임금의 뜻에 매우 맞았으므로 훌륭한 포유(褒諭)를 받았다. 그러나 식자(識者)들은 사적으로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떤 재신(宰臣)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저를 비난하기를, ‘모릉(模稜)한 내용의 계사(啓辭)를 어떻게 하면 많이 얻을 수 있겠는가?’ 했는데, 이로부터 사람들이 모두들 이저를 모릉계 대간(模稜啓臺諫)이라고 지목하였다."
1월 10일 정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유(李瑜)를 부제학(副提學)으로, 한현모(韓顯謨)를 응교(應敎)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여러 승지(承旨)들을 인견하고 제반 공사(公事)를 재결(裁決)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금년에는 제도(諸道)의 실결(實結)이 신축년061) 에 견주어 다를 것이 없어 1년의 지출을 사용할 길이 없습니다. 관서(關西)의 세수미(稅收米) 절반을 가져다 쓰게 하여 경비에 보태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궁가(宮家)에 후사(後嗣)가 없는 경우에는 그 제수(祭需)를 본조(本曹)에서 거행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예전(禮典)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전의 법식(法式)을 가져다 상고하여 보아도 별로 전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용성 대군(龍城大君)과 숙신 공주(淑愼公主)의 경우에는 대수(代數)가 오래 되었고, 이미 해궁(該宮)에서 구관(句管)하여 봉사(奉祀)하고 있는데도 또 본조(本曹)에서 거행하게 하는 것은 예법에 있어서도 미안스러운 일이니, 예법을 잘 아는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교하겠다."
하였다.
지금부터 모든 익명서(匿名書)는 즉시 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워버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서무필(徐武弼)이 복주(伏誅)되고 나서, 호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이는 틀림없이 나라를 원망하고 틈을 엿보는 무리들이 유언 비어를 날조하여 선동하기 위한 것인데, 매양 철저하게 규명하지 않고 거칠게 하기 때문에 와주(窩主)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은 흉도(凶徒)들 가운데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달은 자도 있고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자도 있으며 폐기된 데 대해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있는 자들도 있으니, 진실로 조정(朝廷)의 거조(擧措)가 사의(事宜)에 알맞아 용사(用捨)가 고르게 된다면 모두 마음을 고쳐 교화를 따라 원망이 봄눈처럼 녹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감록(勘錄)을 이미 반포했는데도 또 감히 괘서(掛書)하여 사람을 무함하였다. 작년 호서(湖西)·영남(嶺南)의 괘서(掛書)의 변(變)도 그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자가 그 근본을 잘 다스려 그 말단을 바로잡지 못한 탓인 것이다. 그러므로 치화(治化)를 수명(修明)하여 회색(晦塞)된 끝의 이륜(彛倫)을 바로잡는다면 불령배(不逞輩)들이 저절로 마음을 고칠 것이다. 이런 것을 하지 않고서 이에 군부(君父)로 하여금 날마다 차마 듣고 볼 수 없는 흉서(凶書)를 보도록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사헌부에서 【지평(持平) 이수해(李壽海)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괘서(掛書) 죄인을 본도(本道)에서 명백하게 사핵(査覈)하지 못한 채 혼동하여 압송(押送)하여 왔었습니다. 만일 성상(聖上)께서 직접 신문하지 않았다면, 신두병(申斗炳)과 김원성(金遠聲)은 장차 함께 화를 당하는 탄식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경상 감사 김시형(金始炯)은 의당 추고(推考)하여 무겁게 다스려야 됩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내주(鄭來周)는 본디 행정 능력[吏能]이 있었는데, 본부(本府)에 제수하게 되자 치성(治聲)이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그리고 병들어 혼암한 것이 특별히 심한 탓으로 간교한 비장(裨將)과 교활한 서리(胥吏)들이 이를 인연하여 폐단을 만들고 있으니, 정내주는 체차(遞差) 시켜야 됩니다.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민창기(閔昌基)는 본성이 남을 시기하고 정사가 포악하여 영기(營妓) 가운데 바야흐로 잉태(孕胎)하고 있는 기녀를 핍박하여 간통하려 하다가 그가 따르지 않는 것에 노여움을 품고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즉시 죽게 하였으니, 민창기는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그런데 정내주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오원(吳瑗)·유최기(兪最基)·윤득화(尹得和)·김약로(金若魯) 등 네 유신(儒臣)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1월 11일 무자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생서(典牲署)의 직장(直長)인 유정무(柳鼎茂)가 대책(對策)에서 뒷날 경연(經筵)에서 마땅히 소회를 다 진달하겠다고 한 말이 있자 어비(御批)로 급제를 내렸다. 이 때에 이르러 등대(登對)하게 되었는데 임금이 그에게 소회를 다 진달하라고 하니, 유정무가 황공하여 대답할 바를 몰랐다. 임금이 굳이 하문하자, 이에 양역(良役)을 변통시키는 방도에 대해 말하면서 아뢰기를,
"문무(文武)의 거자(擧子)가 그 수효가 거의 10만 명이나 되니, 그들로 하여금 각기 본도(本道)에서 시취(試取)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부경(赴京)하기 위해 도로(道路)에서 쓰는 경비를 제(除)하여 이것을 예전(禮錢)으로 대납(代納)하게 한다면, 양역의 역가(役價)의 절반에 해당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답하지 않았다. 그 뒤 유정무가 대답을 잘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상소(上疏)하여 일에 대해 말하였으나, 또 성람(省覽)하지 않았다.
종실(宗室) 낙창군(洛昌君) 탱(樘)이 상소(上疏)하여 동조(東朝)께 진호(進號)할 것을 청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말하기를,
"옛날 우리 영고(寧考)062) 께서는 위로 장렬 성후(壯烈聖后)063) 를 받들고 계셨었는데 국모(國母)로 계신 지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써 존호(尊號)를 더 올렸었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본받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국제(國制)에 3년을 지내고 난 뒤에는 헌수(獻壽)하게 되어 있으니, 여기에 응당 시행할 절차를 마땅히 곧바로 거행하게 해야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존양(尊揚)하고 싶은 정성이야 어찌 조금인들 해이된 적이 있겠는가? 그러나 자성(慈聖)께서 항상 겸퇴(謙退)를 고집하고 계시고 또 사복(私服)이 겨우 끝났으므로 자심(慈心)이 아직 슬픈 상태이니, 나의 쌓인 마음을 진달하지 못했었다. 이제 경(卿)의 소장을 보고 나서 누누이 거듭 청하여 보았으나 끝내 허락을 내리지 않으시니, 답답한 마음만 깊을 뿐이다."
하였다. 이어 우승지(右承旨) 홍경보(洪景輔)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인식(李仁植)과 낙창군(洛昌君)의 소장 내용으로써 반복하여 진청(陳請)하였으나 사양하면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나도 감히 억지로 청할 수가 없다."
하니, 홍경보가 말하기를,
"이인식이 상소하여 청한 것은 외의(外議)도 또한 대부분 행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답답하다는 하교를 내린 것은 나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임금의 뜻은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청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신은 말한다. "이탱(李樘)이 말한 내용 가운데 진연(進宴)064) 은 가한 것이지만 존호(尊號)는 불가한 것이다. 홍경보(洪景輔)가 이인식(李仁植)의 말을 거론하면서 외의(外議)가 그러하다고 돌린 것은 서명균(徐命均)이 죄주기를 청한 것과 견주어 보건대 과연 어떠한가?"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1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註 062] 영고(寧考) : 숙종(肅宗)을 이름.[註 063] 장렬 성후(壯烈聖后) : 인조(仁租)의 계비(繼妃) 장렬 왕후.[註 064] 진연(進宴)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
사신은 말한다. "이탱(李樘)이 말한 내용 가운데 진연(進宴)064) 은 가한 것이지만 존호(尊號)는 불가한 것이다. 홍경보(洪景輔)가 이인식(李仁植)의 말을 거론하면서 외의(外議)가 그러하다고 돌린 것은 서명균(徐命均)이 죄주기를 청한 것과 견주어 보건대 과연 어떠한가?"
비국(備局)에 하유하여 제도(諸道)에서 남형(濫刑)하는 것을 금하도록 신칙시키게 하였다. 이때 국청(鞫廳)에서 방송(放送)시킨 김원성(金遠聲)이 도중에서 죽었는데,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측은하게 여겨 해조(該曹)로 하여금 시신(屍身)을 운송하여 장사지내 주게 하였다. 그리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그의 처자(妻子)를 구휼하여 주게 하였다. 이어 하유하기를,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 짓은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성(亞聖)065) 이 훈계한 것이다. 근년 이래로 흉역(凶逆)과 변서(變書)가 없는 해가 없었으니, 그들을 징토(懲討)하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옥사(獄事)이다. 이번의 친국(親鞫)은 그 의도가 비록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하자는 데 있는 것이었으나, 슬픈 마음은 날이 갈수록 풀리지 않고 있다. 아! 김원성(金遠聲)은 곧 먼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이므로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할 것은 곧 죄없는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옛사람이 이른바 형벌을 받아 죽은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번의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마땅히 이것을 간책(簡策)에 기록하여 뒷 임금들은 나의 경우를 거울삼아 형신(刑訊)을 삼가도록 하려 한다. 이로 인하여 계칙(戒飭)할 것이 있다. 군주의 준엄함으로도 어리석은 백성을 잘못 살해하면 오히려 이러한 마음이 드는데, 더구나 도(道)를 안찰(按察)하는 방백(方伯)과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守令)들이겠는가? 남형(濫刑)에 대해서는 일찍이 신칙한 적이 있었지만 다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이런 내용으로 각별히 제도(諸道)에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전 중부(中部)의 참봉(參奉)인 백규창(白奎昌)이 상소(上疏)하여 시폐(時弊)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 첫째는 공거(貢擧)를 정밀(精密)하게 하는 것으로, 정시(庭試)와 알성시(謁聖試)에 모두 초시(初試)를 설치하여 과유(科儒)의 요행을 바라는 폐단을 막기를 청하였으며, 그 둘째는 탐관 오리(貪官汚吏)를 징계하는 것으로, 보민청(保民廳)과 보역청(補役廳) 등을 혁파함으로써 수령들이 마구 거들어 들이는 구멍을 막을 것을 청하였으며, 그 셋째는 양역(良役)을 균등하게 하는 것으로 각영(各營)의 군관과 향교·서원의 생도(生徒)는 모두 시사(試射)와 강경(講經) 시험을 보여 잘하지 못한 사람은 벌포(罰布)를 내개 해서 양역(良役)에 대신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 넷째는 사치(奢侈)를 금하게 하는 것으로, 연경(燕京)에서 채단(綵緞)을 사오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 다섯째는 무익(無益)한 것을 제거하게 하는 것으로, 남초(南草)066) 를 금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 여섯째는 쓸데없는 것을 폐지시키는 것으로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 일곱째는 방역(坊役)을 너그럽게 하는 것으로, 각청(各廳)에 외람되이 투속(投屬)된 자들을 폐지시켜 그 신역(身役)을 고르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양세(兩稅)의 소출(所出)이 1결(結)에 12두(斗)에 불과하고 수령들의 아록(衙祿)과 잡비(雜費)도 또 이 수량에 불과한데 호수(戶首)가 받아들이는 것은 혹 40, 50두(斗)에 이르고 있으니, 팔부 작결법(八夫作結法)을 폐지하고 산호(散戶)로써 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전세(田稅)를 실어나르는 데에는 반드시 지토선(地土船)067) 을 쓰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심건이(沈建伊)를 추국하였는데, 공사(供辭)는 전과 같았다.
1월 12일 기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안상휘(安相徽)를 헌납(獻納)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신덕하(申德夏)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전라도 장흥(長興)의 유학(幼學) 위세봉(魏世鳳)이 상소(上疏)하여 호남(湖南)의 큰 폐단에 대해 논하였다. 그 첫째는 교육(敎育)이 폐이(廢弛)된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향인(鄕人)을 훈도(訓導)로 삼아 학교에 대한 정책을 수거(修擧)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 둘째는 습속(習俗)이 동요되기 쉬운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의거하여 방약(坊約)을 세울 것을 청하였으며, 그 셋째는 저축이 되어 있지 않은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주자(朱子)의 사창(社倉) 제도에 의거하여 이창(里倉)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 넷째는 양전(良田)이 황폐되어가는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진전(陳田)에 따라 급전재(給田災)068) 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그 다섯째는 전선(戰船)의 노군(櫓軍)을 산골 백성들로 충정(充定)하는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앞으로는 해변(海邊)에서 모군(募軍)할 것으로 환정(換定)하기를 청하였으며, 그 여섯째는 재준(才俊)들이 침체되어 있는 답답한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영남(嶺南)과 서북(西北)의 예(例)에 의거하여 조용(調用)해 줄 것을 청하였다. 또 실제로 하늘을 공경하여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는 기미를 살피고, 실제로 학문에 힘써 다스려지는 데로 나아가는 길의 단서로 삼고, 실제로 정사에 근면하여 다스림을 강구하는 방술을 다하게 하고, 실제로 간언(諫言)을 받아들여 다스림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고, 실제로 붕당(朋黨)을 타파하여 다스림을 병들게 하는 근원을 치료하고, 실제로 검소함을 숭상하여 다스림을 좀먹는 뿌리는 제거하고, 실제로 백성을 사랑하여 다스림을 보존하여 가는 터전을 공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실입지(實立志)’라는 세 글자를 나아가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포장(褒奬)하고 여섯 조항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으며 일곱 개의 ‘실(實)’자 이하에 논한 내용은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써서 들여오게 하여 성람(省覽)할 수 있게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1월 13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윤필은(尹弼殷)이 상소(上疏)하여 시폐(時弊)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는 전화(錢貨)에 대한 것인데, 농사를 게을리하고 사치를 숭상하며 재물과 곡식을 허비하는 것이 모두 돈에 연유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양정(良丁)에 대한 것인데, 섬이나 육지로 피해 옮겨 다니는 무리들을 조사하여 수괄(搜括)해서 베[布]를 징수해야 됩니다. 또 하나는 농사를 권면하는 데 대한 것인데, 신구(新舊)의 제언(堤堰) 가운데 저수(儲水)에 마땅하지 않은 것은 백성들에게 농사지어 먹는 것을 허락하게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는 해마다 제때에 수봉(收捧)하여 이른 봄에 포장·운송하게 함으로써 태풍에 전복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부산(釜山)의 여러 섬에다 화포(火砲)와 철릉(鐵菱)을 많이 설치하여 왜적을 막는 대비책으로 삼으소서. 해서(海西)의 산산진(蒜山鎭)에는 소나무와 뽕나무를 많이 심고, 한강(漢江)의 하류에는 특별히 방어소(防禦所)를 설치하고, 강도(江都)의 길상장(吉祥場)은 목장(牧場)을 폐지시킨 다음 거민(居民)을 모집하고,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군향(軍餉)을 각 고을에 봉류(捧留)하여 곡식을 훔치는 데 도움을 주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리고 폐사군(廢四郡)·울릉도(鬱陵島)·대청도(大靑島)·소청도(小靑島) 등지는 모두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것을 허락하여 관방(關防)을 공고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충청도 한산(韓山)의 유학(幼學) 이정(李涏)이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지금 국가가 위망(危亡)할 조짐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기강(紀綱)이 확립되지 않은 것, 첨정(簽丁)이 허술한 것, 경비(經費)가 크게 모자라는 것, 사치가 날로 번성하는 것입니다. 민생(民生)이 고통에 허덕이는 단서가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백골(白骨)의 징포(徵布)와 적지(赤地)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과 수령(守令)의 침탈(侵奪)과 부민(富民)들의 징채(徵債)인 것입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의 군관(軍官)은 선천(宣薦)069) 가운데 당상관(堂上官)·당하관(堂下官)으로서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을 계청(啓請)하여 데리고 가게 하소서. 그리고 능부(能否)에 따라 포폄(褒貶)을 하여 능자(能者)는 경군문(京軍門)에서 천전(遷轉)시키는 예(例)에 의거하여 병조(兵曹)에서 즉시 해당되는 자리에 부직(附職)시키게 하소서. 권세가(權勢家)의 묘하(墓下)에 거주하는 백성과 사대부(士大夫)의 울밑에 있는 노복(奴僕)들은 외읍(外邑)에서 감히 충역(充役)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일체 모두 군안(軍案)에 입속(入屬)시키소서. 국가의 공거법(貢擧法)은 시(詩)·부(賦)·책(策)·논(論)의 사륙문(四六文)에 불과한데 그 실상은 쓸모가 없는 것이니, 마땅히 정자(程子)·주자(朱子)의 공거의(貢擧議)를 채택하여 덕행과(德行科)를 세워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지(傳旨)에 응한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1월 14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명빈(徐命彬)을 승지(承旨)로, 오원(吳瑗)을 수찬(修撰)으로, 윤득화(尹得和)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홍현보(洪鉉輔)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잇달아 추국(推鞫)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 옥사(獄事)의 핵심은 오로지 언근(言根)을 밝혀 내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심건이(沈建伊)가 이미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써 김진찬(金晉贊)에게 전하였는데, 전후 초사(招辭)에도 어긋나는 단서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잇달아 4차의 형신(刑訊)을 시행하였으나 끝내 다른 말이 없으니, 계속 가형(加刑)하여 곧장 죽는 지경에 이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양제(李亮濟)와 감덕(甘德)의 공초(供招)를 살펴본건대 의심스러운 정적(情跡)이 많이 있으니, 옥체(獄體)로써 헤아려 보더라도 신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양제와 김덕을 일체 엄중히 신문(訊問)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양제와 감덕의 공초에 설사 수상한 점이 있을지라도 이 때문에 경솔히 엄중한 형신을 가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사간(司諫) 이저(李著)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도리는 귀중히 여기는 것이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조금이라도 물어보아야 할 단서가 있으면 할 만한 방법을 다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최한(崔漢)의 처(妻)와 이양제(耳亮濟) 등은 모두 간증인(干證人)이 됩니다. 그리고 이른바 잉상(芿相)이란 자는 심건이가 또한 서찰을 전한 종이라고 하였으니, 모두 잡아다가 구핵(究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은 모두 본 사건에 관계되지 않는 사람들이니, 버려두어도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비당(備堂)070) 을 팔도(八道)의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나누어 차임(差任)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양역(良役)은 변통시키지 않을 수 없는데, 결역(結役)과 일필역(一疋役)은 모두 행할 수가 없다. 다만 모름지기 수령을 잘 가려서 그들로 하여금 첨정(簽丁)을 수괄(搜括)하게 하되, 또 기국의 당상관들로 하여금 각도(各道)를 나누어 구관(句管)하게 하여 왕래하면서 심찰(審察)한다면, 사정을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나누어 구관하게 한 다음엔 비록 왕래하지 않더라도 도내(道內)의 수령과 사민(士民)들을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수한(水旱)과 질고(疾苦)를 날마다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다만 양역(良役)뿐만이 아니라 소복(蘇復)시키고 개혁(改革)하는 모든 정사에 실로 도움이 있게 될 것이다."
하고, 이어 이에 대한 편부(便否)를 하문하니, 여러 신하들이 혹은 그것이 편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그것이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왕래하게 되면 주전(廚傳)071) 에 폐단이 있고 또 서울에 있게 되면 멀리서 감사(監司)의 권한을 나누어 가지게 되므로 불가한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1필(疋)의 역가(役價)로는 반드시 부족할 것이고, 부족하게 되면 뒤에 반드시 더 거두어 들이게 되는데, 더 거두어 들이는 것은 이것이 난(亂)을 재촉하는 것이다. 오늘 여러 의논이 비록 갑론 을박(甲論乙駁)했었으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의(謀議)는 여러 사람들과 하고, 결단은 혼자서 하려 한다.’고 했는데, 나는 결단을 내려 행하려고 한다. 구관 당상(句管堂上)에 누가 적합하겠는가?"
하니,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마땅히 각기 일찍이 도백(道伯)을 역임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사정을 익숙하게 잘 아는 이로 차임해야 됩니다."
하였다. 드디어 김재로(金在魯)·송인명(宋寅明) 등 8인을 팔도의 구관 당상으로 삼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부자(夫子)072) 가 이르기를, ‘백성들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하면 존립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아! 백성의 부모가 되어 속일 수가 있겠는가?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한 지 오래지 않아 중지하였으니, 백성을 속인 것이 많았다. 지금 구관 당상은 이름이 비록 크기는 하지만, 만일 시작은 있고 결과가 없게 된다면 또 장차 백성을 속이는 것이 될 것이다. 구중 궁궐과 부옥(蔀屋)073) 의 사이는 하늘과 땅처럼 격하여 있는데 묘당(廟堂)과 도신(道臣)이 서로 의심하는 것이 이와 같고서, 민정(民情)을 어떻게 도달(導達)시킬 수 있겠으며, 양역을 어떻게 균일하게 할수 있겠는가? 비록 도신이 있을지라도 모든 민막(民瘼)에 관계되는 것을 상의하여 강정(講定)하는 데에는 구관(句管)만 한 것이 없다. 더구나 중조(中朝)에는 13과도(科道)가 있지 않은가? 이것이 어찌 안찰(按察)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이제 이미 팔도(八道)에 나누어 차임했으니, 도내(道內)의 군역(軍役)은 각기 주관(主管)하는 당상관과 도신(道臣)이 서로 의논하여 채취(採取)해서 대정(代定)한다면, 일족(一族)을 침탈하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고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대들 주관하는 당상들은 부지런히 면려하여 나의 칙려(飭勵)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처음 김재로(金在魯)가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었을 적에 관서(關西)의 무명[木] 4백여 동(同)을 청하여 얻었는데, 정랑(正郞) 안윤중(安允中)이 김재로에게 굳이 청하여 먼저 호조의 무명 4백여 동을 내어 시인(市人)들에게 주고서 그들에게 은으로 바꾸게 하였다. 그런데 백목전(白木廛)에 불이 나게 되자 안윤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울까 두려워하여 매질을 해 가면서 바치기를 독촉하였으므로, 시인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말을 퍼뜨리기를, ‘안윤중이 7백 금(金)을 뇌물로 받았다.’하니, 안윤중이 피혐(避嫌)하기 위해 호조에 정장(呈狀)하기를, ‘노계한(盧啓漢)이란 자가 중간에서 뇌물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에 호조에서 노계한을 잡아가지고 뇌금(賂金) 약간을 징수하고는 형조(刑曹)로 이송시켜 다스리게 하였다. 이날 이정제(李廷濟)가 노계한의 죄율(罪律)은 곤장을 맞고 귀양보내는 데 불과하지만 그 정상이 절통하다는 것을 이유로 마땅히 중률(重律)을 적용해야 된다고 하니, 3차의 형신을 가하고 연수(年數)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1월 15일 임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김약로(金若魯)를 수찬(修撰)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수찬으로, 송교명(宋敎明)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복상(卜相)을 명하여 김흥경(金興慶)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때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은 늙고 혼암하며 용렬하였고,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은 청망(淸望)을 지녔다는 명성은 있었으나 재능이 없었다. 김흥경은 아첨하고 겉치레만 하면서 자신만을 위하여 경영할 뿐 건명(建明)하는 것이 없었는데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을 이유로 다시 정사(鼎司)074) 로 들어갔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근심하였다.
이성룡(李聖龍)을 승지(承旨)로, 신만(申晩)을 수찬(修撰)으로, 오원(吳瑗)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도승지 이춘제(李春躋)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지난번 대계(臺啓)로 인하여 임어(臨御)하신 뒤의 일에 대해 말한 소장(疏章)을 책으로 엮어서 들이라고 명하셨는데, 본원(本院)에서는 초선(初選)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옥당(玉堂)의 임무이다."
하였다. 뒤에 옥당에서 또 그것의 불편함을 아뢰자,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근래 초야(草野)의 상소(上疏)가운데 위세봉(魏世鳳)의 것이 조금 나은 편인데 백규창(白奎昌)의 말도 칭찬할 점이 있다. 지금 대신(臺臣)은 말을 하지 않고 있는데 백규창이 능히 말을 하였으니, 주저하며 결정하지 못하는 이목(耳目)의 관원보다 낫지 않을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신하가 부당하게 내리는 형벌을 바로잡지 않고, 잠자코 언책(言責)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언로(言路)의 통색(通塞)은 그 관건이 오직 임금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위에 간언을 받아들이는 임금이 있는데도 아래에서 할말을 다하는 선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말 때문에 죄를 받은 사람이 전후 서로 잇따랐으니, 말하지 않은 책임이 어찌 유독 신하에게만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2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신하가 부당하게 내리는 형벌을 바로잡지 않고, 잠자코 언책(言責)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언로(言路)의 통색(通塞)은 그 관건이 오직 임금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위에 간언을 받아들이는 임금이 있는데도 아래에서 할말을 다하는 선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말 때문에 죄를 받은 사람이 전후 서로 잇따랐으니, 말하지 않은 책임이 어찌 유독 신하에게만 있겠는가?"
예조 참의(禮曹參議) 이성룡(李聖龍)이 상소(上疏)하여 여덟 가지의 잠언(箴言)을 진달했는데, 첫째는 대체(大體)를 살필 것, 둘째는 미문(彌文)을 제거할 것, 셋째는 규모(規模)를 넓힐 것, 넷째는 사령(辭令)을 중히 할 것, 다섯째는 현사(賢邪)를 분변할 것, 여섯째는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일곱째는 유학(儒學)을 숭상할 것, 여덟째는 무비(武備)를 정비할 것에 대한 것이었다. 임금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이어 원잠(原箴)은 유중(留中)시켜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게 할 것을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지평(持平) 송교명(宋敎明)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도신(鄭道信)에 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김광세(金廣世)는 새로 헌관(憲官)에 제수되어 특별한 사정이 없는데도 무단히 세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겼고 끝내 거기에 좌죄되어 파체(罷遞)당했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휘릉(徽陵)의 참봉(參奉)인 장지대(張至大)는 술을 즐겨 광패스런 짓을 자행하면서 전혀 숙직에 나아가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태거(汰去)해야 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에서 【헌납(獻納) 안상휘(安相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천(三千)의 일과 이징서(李徵瑞)의 일과 승정원(承政院)에서 문서를 보내어 보이게 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중인(中人)들에게 외람되이 관직을 추증(追贈)한는 것에 대해 이미 선조(先朝)의 칙교(飭敎)가 있었는데, 근래 동교(東郊)와 서교(西郊)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분묘(墳墓)에 비석을 세워서 표시한 것은 거개가 판서(判書)나 참판(參判)의 증직(贈職)입니다. 이는 명기(名器)075) 를 더럽히는 처사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중인들에게 외람되이 관직을 추증하는 데에서 오는 폐단을 엄하게 막게 하소서. 백성들이 생활을 유지하는 근원은 농사에 있고 농사를 짓는 것은 소[牛]에 있으니, 이것이 국전(國典)에서 소를 도살(屠殺)하는 법금을 중하게 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 법금을 신명(申明)시켜 경외(京外)에서 법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징속(徵贖)을 허락하지 말고 법에 따라 형배(刑配)에 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응교(應敎) 한현모(韓顯謨)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전일 네 유신(儒臣)을 파직시킨 것에 대해 가만히 생각건대, 처분(處分)이 과중함을 면치 못한 처사라고 여깁니다. 시신(侍臣)들에게 말[馬]에서 내리라는 전교(傳敎)가 이미 있었으니, 시신이 된 사람으로서 무엇을 꺼려 그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창졸간에 내린 것이므로 즉시 듣지 못한 것이고 또 그것은 승지들이 잘 주선하지 못한 것에 연유된 것이니, 청대(請對)하여 죄주기를 요구한 것은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잡아가두라고 명하였다가 끝에 가서는 또 특별히 파직시키라고 하였으니, 성명(聖明)의 이 거조는 역시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첨시(瞻視)를 존엄하게 지니면 마음이 곧 전일하게 된다.’고 했으니, 제사지내기 하루 전에 재계하고 깨끗하게 하며 제복(祭服)을 단정하게 입고 신명(神明)을 대하듯이 한다면 전하의 마음도 또한 전일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게 되면 밖으로 나타나는 것도 당연히 절도에 맞게 되는 것인데, 전하의 사기(辭氣)는 폭노(暴怒)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이와같이 하신다면 깊숙한 궁궐에 한가히 있을 때는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은 삼가 근심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신(儒臣)에 대한 일은 사체(事體)에 관계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본디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긴요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1월 17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알현하였는데, 그 의주(儀註)는 다음과 같았다. 임금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백관(百官)은 흑단령(黑團領)으로 배종(陪從)한다. 태묘 문밖에 이르러서는 수레에서 내려 보련(步輦)을 타고 재실(齋室)로 들어간다. 조금 있다가 임금은 면복(冕服)을 갖추고, 백관의 4품 이상은 조복(朝服)을 입고, 5품 이하는 흑단령 차림으로 묘정(廟庭)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한다. 계단을 올라가 묘당 안으로 들어가는데, 승지(承旨)·사관(史官)·내관(內官)각각 1명씩이 수행한다. 봉심(奉審)을 끝내고 나서는 영녕전(永寧殿)으로 나아가 태묘에서 행한 예(禮)와 똑같이 전배(展拜)와 봉심(奉審)을 행하며, 백관들은 남문(南門) 밖에서 행례(行禮)한다. 이날 각실(各室)의 책보(冊寶)를 봉심하고 나서 이어 이 뒤로 봄·가을로 봉심할 적에는 책보도 함께 봉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1월 18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는 달이 우각성(右角星)을 범하였다.
교리(校理) 조상명(趙尙命)이 상소(上疏)하여 전번에 네 유신(儒臣)의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가운데 ‘교만하고 건방지고 망령되고 방자하다[驕蹇妄恣]’는 네 글자를 고칠 것을 청하니, 그 비답을 도로 들여다가 지워버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려 하였으나 시독관(侍讀官) 조상명(趙尙命)이 병 때문에 나오지 않자,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려 체직(遞職)시키게 했다. 이리하여 옥당(玉堂)에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소대(召對)를 정지시켰다.
수찬(修撰) 박필균(朴弼均)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일 내리신 하교에 모든 흉서(凶書)는 즉시 물에 던져 버리거나 불에 태워 없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 흉서를 진실로 불에 태운다고 해서 중지될 성질의 것이라면, 정미년076) 이후에는 불에 태우지 않은 적이 없는데도 어찌하여 갈수록 더욱 많이 나오고 더욱 흉악하여지면서 중지할 줄을 모른단 말입니까? 만일 신국(訊鞫)할 즈음에 언근(言根)을 끝까지 조사해 내어 속히 천주(天誅)를 행하였다면, 불에다 태워버리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흉언이 일찍 이미 종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리저리 굽혀 용서해줌으로써 역적들의 기세만 돋구어 주었으니, 신은 삼가 근심하고 있습니다. 조속히 전일에 내리신 명을 도로 중지시켜야 합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무신년077) 이후 아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5년 동안 종식되었었는데, 지난 봄에 유신(儒臣)들이 유언 비어를 진달한 뒤부터 호서(湖西)·영남(嶺南)에서 서로 잇달아 유언 비어가 일어났으며, 끝에 가서는 괘서(掛書)까지 나왔다. 따라서 조정의 동정(動靜)은 진실로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대의 말처럼 한다면 법금(法禁)을 설치하지 말고 기다려야만 옳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늙고 병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차자(箚子)를 올려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재(李縡)가 체면(遞免)되었다. 이재는 임하(林下)에 물러가 살고 있었는데, 전후로 제수하는 소명(召命)이 있을 때마다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었다. 그랬는데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체면을 허락하였다.
집의(執義) 양득중(梁得中)이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니, 비답하기를,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내가 바야흐로 칙려(飭勵)하고 있는데, 더구나 이 말을 한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대는 모쪼록 이 뜻을 체득(體得)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이는 양득중이 일찍이 조종에 나아왔을 적에 ‘사실에 의거 진리를 탐구하라[實事求是]’는 네 글자를 가지고 임금에게 면려하자 양득중에게 그것을 써서 들여오게 하여 좌우(座右)에 붙여 두게 했었기 때문에 이 전교가 있게 된 것이다.
지평(持平) 이수해(李壽海)와 헌납(獻納) 안상휘(安相徽) 등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일 두 대신(臺臣)의 상소에서 거론한 말은 오로지 언근(言根)을 조사하고 국체(鞫體)를 중히 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신 등은 삼가 생각하건대, 심건이(沈建伊)는 우선 정형(停刑)시키고 감덕(甘德)·이양제(李亮濟)는 마땅히 형신(刑訊)을 가하여 철저한 조사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處分)을 내렸다."
하였다. 이날 추국을 행하였는데, 심건이를 형신하니 공초(供招)가 전과 같았고, 감덕을 형신하니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1월 19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박사수(朴師洙)를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서명빈(徐命彬)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김유경(金有慶)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신만(申晩)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김약로(金若魯)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부수찬(副修撰) 오원(吳瑗)을 파직시켰다. 이보다 앞서 오원 등이 상소(上疏)하여 여러 승지들을 공척(攻斥)할 적에 홍경보(洪景輔)·이광보(李匡輔) 등이 교대로 대장(對章)을 올려 논했는데, 혹 ‘갑(甲)의 노여움을 을(乙)에게 옮겨 오로지 혼동하여 공척하기만을 일삼고 있는데 풀지 못한 분노를 기필코 추가로 보복하려는 앙심을 품고 온 정원(政院)을 거론하여 농간하는 수단을 부린다고 단정하였다.’고도 하고, 혹 ‘청조(淸朝)078) 의 경악(經幄)의 반열에 있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 이런 놀라운 거조를 하고 있다.’고도 하였다. 좌윤(左尹) 오광운(吳光運)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오원에게 공척당한 것을 이유로 상소하여 인혐(引嫌)했는데, 말하기를,
"저 사람이 신에게 말 못하게 하는 이유는 ‘위복(威福)’이라는 두 글자에 있습니다. 대저 위복이란 두 글자는 홍범(洪範)079) 이후로 전현(前賢)들의 학설(學說)에 나타난 것이 자주 있어 왔는데, 그 위복의 권한이 위에 있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신하된 도리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신의 말을 자신에게 아주 해로운 말로 여기고 있는 것은 대체 무슨 심정이겠습니까? 아! 곡영(谷永)080) 이 임금의 잘못만을 전적으로 공척한 것은 당로자(當路者)들에게 아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신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임금을 섬기면서 예의를 다하는 것을 사람들이 아첨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라는 명칭에 이르러서는 이는 옥석(玉石)과 경위(涇渭)081) 와 같은 것이므로, 부녀자와 아이들도 분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괴이한 것은 군자는 소인을 가리켜 소인이라고 하고 소인은 또한 군자를 가리켜 소인이라고 하는 그것입니다. 사마광(司馬光)은 장돈(章惇)·채경(蔡京)의 무리에게 간사한 사람이라는 지목을 받았었고, 진덕수(眞德秀)는 양성대(梁成大)에게 진소인(眞小人)이라는 지목을 받았었으며, 석예(石豫)가 윤화정(尹和靖)082) 을 공격할 때와 심계조(沈繼祖)가 채원정(蔡元定)을 공격할 때는 간사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요망한 사람이라고도 했으니, 이 명칭의 유래가 예로부터 이미 그러했습니다. 신의 평생의 언행(言行)은 한가지도 옛사람과 방불(彷彿)한 것이 없는데도 시인(詩人)에게 이런 제목(題目)을 얻게 되었으니, 신은 실로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한편 스스로 조롱(嘲弄)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오원이 부수찬(副修撰)이 되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 등이 승정원(承政院)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한 것은 직책에 충실하고 사체(事體)를 보존시키기 위한 것인데 여러 승지들이 교대로 일어나서 공척을 가하기 때문에 대변(對辨)하는 상소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지(聖旨)가 너무도 준엄하여 노여움을 옮긴다는 하유가 있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만에 하나라도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귀신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승지들이 대소(對疏)를 올린 것을 보건대, 이광보(李匡輔)가 비난을 가한 것은 너무나도 추패(麤悖)스러워 진실로 윤리(倫理)가 없고 홍경보(洪景輔)가 공교하게 참혹한 질타를 가한 것은 그 의도를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스스로 조심하지 않고 이러한 일류(一流)와 더불어 곡직(曲直)을 책망(責望)하였었으니, 소급하여 생각해 본다면 부끄러워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지경인데, 다시 어찌 그들과 분변하겠다고 나서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오광운(吳光運)의 상소에 대해 더욱 위태롭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신은 늘 생각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행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권면하고 좋은 말을 진달하여 임금을 허물이 없는 데로 인도하면서 자기 일신을 위하여 도모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임금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임금의 마음을 엿보아 영합(迎合)하여 임금을 완희(玩戲)에 빠지게 하면서 자신의 사욕(私慾)을 성취시키기를 도모하는 사람은 참으로 임금에게 무례(無禮)한 짓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왔었습니다. 아! 소인의 기량(技倆)은 오직 아첨한 참소뿐이므로 자신의 계교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금의 뜻에 들도록 아부하고, 남을 위해서는 반드시 임금의 노여움을 이용하기 때문에 아첨하는 자는 반드시 참소를 하는 법이고 참소하는 자는 반드시 아첨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오광운이 이른바 자신은 곡영(谷永)의 한 짓을 차마 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는 말입니다. 옛사람이 곡영을 비난하는 것은 그당시 왕봉(王鳳)의 무리들이 국가의 권병(權柄)을 훔쳐 마음대로 휘둘러 한실(漢室)을 위태롭게 하였는데도 곡영이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임금의 잘못만을 전적으로 공척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이제 오광운이 과연 조정에 왕봉과 같은 자들이 있다고 여긴다면, 대고(大誥)가 내렸으니 봉서(封書)를 올려 일을 말해야 하는데도 어찌하여 이것에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염치를 지니고 스스로의 지조를 지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는 선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심(聖心)에 자주 거슬려서 가책(訶責)과 견벌(譴罰)이 이미 누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광운이 헤아릴 수 없는 말로 죄를 얽어내어 무함하고 있으니, 어찌 임금의 노여움을 이용하여 자신의 화심(禍心)을 시행하려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오광운이 과연 그 가운데 참으로 위복(威福)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고 여긴다면, 어찌하여 이름을 거론하여 직간(直諫)함으로써 전형(典刑)을 바룰 것을 기대하지 않고서, 머리와 꼬리를 감춘 채 그 말을 애매 모호하게 하는 것입니까? 저 사람이 뜻이 어긋나서 시의(時議)와 합치되기 어려운 두서너 명의 재야(在野) 인사를 여기에 지목하여 올린 것이라면, 반드시 온 세상 사람이 모두 물건 위의 덮개를 열고 나무를 흔들어 잎을 떨어뜨리듯이 대단히 처리하기가 용이하게 된 후에야 바야흐로 위복(威福)이 아래에 있지 않다고 여기겠습니까? 신은 실로 의혹스럽기 그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질책하기를,
"승선(承宣)083) 의 상소 내용에 설사 말을 가리지 않은 것이 있을지라도 다만 본사(本事)만을 가지고 쟁론(爭論)하면 되는 것인데, 더구나 이러한 일류(一流)와 함께 한다는 말은 더욱 오늘날 칙려(飭勵)하는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을 지목하여 소인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대거(對擧)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 내용에 염치를 지니고 스스로 지조를 지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여긴다는 등의 말은 19일 이전에는 될 수가 있지마는, 19일 이후에는 스스로 지조를 지킨 사람이 누구이며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긴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지난번 오광운의 일로 진달할 때에도 내가 이미 곡진하게 하유하였었다. 그리고 대고(大誥)와 칙려(飭勵)가 있은 뒤에 이미 응대하여 소장을 올렸고 ‘공(公)’자의 어운(御韻)에 따라 또한 이어서 시(詩)를 지어 올렸으니, 그의 징려(懲勵)가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우선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재로(金在魯), 승지(承旨) 이성룡(李聖龍)에게 이르기를,
"오원(吳瑗)의 상소에서 이른바 두서너 재야(在野) 인사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내가 잘 모르겠으나, 그의 의도는 이들을 고사한 품성을 지닌 청류(淸流)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19일의 하교가 있은 뒤에 어떻게 감히 다시 그럴 수가 있겠는가? 지난번 조명익(趙明翼)이 말하기를, ‘신하는 임금을 가려서 섬겨야 한다는 하교를 듣고서 번연(飜然)히 깨우쳤다.’고 했는데, 신하된 사람은 당연히 이와 같아야 되는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오원(吳瑗)과 홍경보(洪景輔)가 다툰 것은 그 일이 지극히 미세한 것이었는데 갈수록 과격하여져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오광운과 다툰 것에 이르러서는 임금도 그에 대한 시비(是非)의 소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드러내어 말하려고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나아가기 어렵게 여긴다는 두서너 신하라는 데에다 죄를 돌렸으며, 문득 19일에 있었던 하교를 칼자루로 삼았다. 대저 19일에 있었던 하교는 특히 하나의 조제책(調劑策)이었을 뿐이니, 어찌 참으로 의리(義理)의 정도(正道)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그 정도(正道)를 얻지 못한 것이라면 저 나아가기 어렵게 여긴다는 의리는 진실로 그대로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찌 자신의 옳은 의견을 버리고 임금의 명령을 따르려 하겠는가? 저 조명익(趙明翼)이란 자는 처음 성무(聖誣)를 분변한 것 때문에 의리가 있다고 일컬어지긴 했지만 임금이 ‘분변할 것이 없다.’고 하면 조명익도 ‘분변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네 신하를 신리(伸理)시킨 것 때문에 의리가 있다고 일컬어졌지만 임금이 ‘신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면 조명익도 ‘신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했으니, 이것이 어찌 깨우치고 깨우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곧 임금의 마음에 영합하기만을 일삼아 총애와 이권을 도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임금이 이것을 가지고 인신(人臣)의 준칙(準則)으로 삼으려 하니 어찌 옳은 처사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3면
【분류】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사법(司法)
사신은 말한다. "오원(吳瑗)과 홍경보(洪景輔)가 다툰 것은 그 일이 지극히 미세한 것이었는데 갈수록 과격하여져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오광운과 다툰 것에 이르러서는 임금도 그에 대한 시비(是非)의 소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드러내어 말하려고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나아가기 어렵게 여긴다는 두서너 신하라는 데에다 죄를 돌렸으며, 문득 19일에 있었던 하교를 칼자루로 삼았다. 대저 19일에 있었던 하교는 특히 하나의 조제책(調劑策)이었을 뿐이니, 어찌 참으로 의리(義理)의 정도(正道)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그 정도(正道)를 얻지 못한 것이라면 저 나아가기 어렵게 여긴다는 의리는 진실로 그대로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찌 자신의 옳은 의견을 버리고 임금의 명령을 따르려 하겠는가? 저 조명익(趙明翼)이란 자는 처음 성무(聖誣)를 분변한 것 때문에 의리가 있다고 일컬어지긴 했지만 임금이 ‘분변할 것이 없다.’고 하면 조명익도 ‘분변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네 신하를 신리(伸理)시킨 것 때문에 의리가 있다고 일컬어졌지만 임금이 ‘신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면 조명익도 ‘신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했으니, 이것이 어찌 깨우치고 깨우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곧 임금의 마음에 영합하기만을 일삼아 총애와 이권을 도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임금이 이것을 가지고 인신(人臣)의 준칙(準則)으로 삼으려 하니 어찌 옳은 처사이겠는가?"
임금이 육조(六曹)의 장관(長官)을 인견(引見)하고 제도(諸道)의 복계(覆啓)를 재결(裁決)하였다.
사간원에서 【사간(司諫) 이저(李著)이다.】 전일의 계사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현도(縣道)를 통하여 올리는 소장은 이미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명했는데, 어제 장령(掌令) 이유(李濰)의 상소(上疏)는 그 내용이 이미 일을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유독 봉입했으니, 해당 승지는 마땅히 무겁게 추고해야 됩니다. 이렇게 대고(大誥)를 내려 구언(求言)하는 때를 당하여 초야(草野) 선비들의 상소도 모두 위에 진달되고 있는데, 조신(朝臣)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올리는 상소는 친병(親病) 이외에는 봉입을 허락하지 말게 하였으니, 밖에 있는 신하라도 어찌 보고 듣는 것 가운데 제때에 부진(附陳)할 것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스스로 진달할 길이 없으니, 마땅히 앞서 내리신 명을 정지하셔야 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지평(持平) 이수해(李壽海)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내주(鄭來周)를 체차(遞差)시키라는 전일의 계사(啓辭)를 고치기를,
"비록 탐학(貪虐)스런 정사는 없었으나 병들어 혼미한 데서 오는 잘못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관리가 잡아들인 사람이 섬돌을 따라서 기어나가 그 도주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원통한 사연을 품은 백성들이 문을 두드리면서 호소해도 그 정상을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체차(遞差)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격고(擊鼓)하여 상언(上言)한 것이 1년이 지났는데도 복주(覆奏)하지 않고 있으니, 해당 당상관(堂上官)의 지체시킨 죄를 마땅히 무겁게 추고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그뒤 정내주가 들어와서 승지(承旨)가 되어 금중(禁中)을 출입했는데 혼암한 정상을 볼 수가 없었는데도, 이수해가 이미 스스로 발계(發啓)084) 하고서 또 그 말을 바꾸어 준청(準請)된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사람들이 협잡(挾雜)이라 여겼다.
교리(校理) 김약로(金若魯)가 상소(上疏)하여 홍경보(洪景輔)의 소장에 대해 변해(辨解)하기를,
"홍경보의 소장 내용 가운데 을(乙)에게 옮겼다느니 풀지 못했다느니 하는 등의 말은 성교(聖敎)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거침없이 쉽사리 말했으니, 그 의도가 교묘하고 참혹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꺼리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인신(人臣)인데 말의 무엄함이 어쩌면 그리도 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20일 정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좌부승지(左副承旨) 홍경보(洪景輔)가 상소(上疏)하여 오원(吳瑗)·김약로(金若魯) 등의 소장에 대해 변해하기를,
"을(乙)에게 노여움을 옮겨 전적으로 뒤섞어 공척하였고 풀지 못한 분노를 풀기 위해 기필코 추후 보복하려는 앙심을 품었다고 한 것은, 대개 해방(該房) 때문에 노여움을 일으켜 그 예봉(銳鋒)을 여러 관료(官僚)들에게 돌렸다는 말이고 그 분노를 청대(請對)에서 풀지 못하자 기필코 추후 소론(疏論)으로 앙심을 풀려고 했다는 것을 가리켜 한 말인 것입니다. 상하의 문세(文勢)를 보면 저절로 깨닫기 쉬운 것인데, 경악(經幄)을 담당하고 있는 박식(博識)한 선비들이 문자(文字)를 보는데 대한 아둔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불러보았다. 호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여러 궁방(宮房)의 면세(免稅)가 구전(舊典)에 견주어 더 많으니, 후세에 본보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창의궁(彰義宮)은 내가 이미 엄중히 금하였다. 유독 수진(壽進)·어의(於義)·명례(明禮)이 세 궁은 동조(東朝)에 예속된 것으로 면세된 것이 1만 결(結)에 가까우니, 나는 후세에서 나의 본뜻을 모를까 염려하여 일찍이 어필(御筆)로 구처(區處)하였다. 공주(公主)와 옹주(翁主)의 면세는 각기 정해진 수량이 있어서 8백 결(結)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문서가 응당 지부(地部)085) 에 있을 터인데, 어찌 경(卿)이 보지 못했다는 것인가? 뒷날 여러 궁방(宮房)에서 만일 법식(法式)을 어기고 외람되이 청하는 경우엔, 내가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본조(本曹)에서는 계산하여 8백 결을 제외하고는 일체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이때 어떤 궁차(宮差)가 임금의 전지(傳旨)라고 속여 고성(高城)의 유점사(楡岾寺)에서 폐단을 부렸었는데, 송인명이 그 말을 듣고 아뢴 것이다. 추조(秋曹)086) 에 명하여 엄중히 신문(訊問)한 다음 처단(處斷)하게 하였다.
발로(撥路)087) 의 지체되는 폐단을 단속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내주(鄭來周)의 장계(狀啓)에서 발군(撥軍)의 전달이 지체되는 것에 대해 대대적으로 진달하면서 승정원(承政院)에서 제도(諸道)에 엄중히 단속하여 지방관(地方官)을 무겁게 추구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이어 발군(撥軍)에 노약자(老弱者)를 충정(充定)시킨 수령(守令)은 군정 노약 충정률(軍丁老弱充定律)에 의거하여 드러나는 대로 감단(勘繼)하도록 사목(事目)을 전할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이 도내(道內)에 농우(農牛)가 적다는 이유로써 제주(濟州) 목장(牧場)의 소 1천여 두(頭)를 보내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제주(濟州)의 소는 본디 1천 두에 불과한데 매년 빛깔이 검은 소로 20두씩을 가려서 경사(京司)로 보내어 희생(犧牲)에 제공하고 있으니 사체상 옮겨다 지급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관서(關西)의 둔전(屯田)에 있는 소 1천여 두를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한성 판윤(漢城判尹) 장붕익(張鵬翼)이 조현명(趙顯命)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인혐(引嫌)하였는데,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임금에게 아뢰어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그리고 종2품 가운데서 그의 대임(代任)에 통의(通擬)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서명균이 일찍이 윤양래(尹陽來)를 발탁 기용하라는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남양 부사(南陽府使) 유척기(兪拓基)는 외직(外職)에 보임한 지가 이미 3년이 되었으니, 마땅히 다른 관직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김재로가 또 이병상(李秉常)과 권적(權𥛚)도 오랫동안 외직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병상에 대해서는 경(卿)이 다시 말하지 말라. 지금 비록 소환(召還)하더라도 어찌 출사(出仕)하려 하겠는가? 오원(吳瑗)이 나아가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은 쉽게 여긴다는 것으로 허여(許與)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를 쓰고 싶지 않다. 더구나 남을 무함하는 권적을 어떻게 방환(放還)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준원전(濬源殿) 참봉(參奉)의 한 자리는 서울 사람으로 차임하고 각묘(各墓)의 수위관(守衛官)은 35세 이상이 된 사람을 쓰되, 사일(仕日)이 50개월이 찬 뒤에야 비로소 승천(陞遷)할 것을 허락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의 청을 따른 것이다.
제도(諸道)의 군병(軍兵) 가운데 도망했거나 죽은 사람은 삼영(三營)에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이다.】 예속되어 있는 지나친 액수(額數)를 사태(沙汰)시켜 충정시키고,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과 각둔(各屯)의 아병(牙兵)도 또한 지나친 명액(名額)이 많으니 묘당(廟堂)에서 군안(軍案)을 조사하여 사정(査正)하되 일체 본도(本道)의 삼영(三營)에 예속된 사람으로 대정(代定)하는 예(例)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박사수(朴師洙)의 청을 따른 것이다.
사간원에서 【사간(司諫) 이저(李著)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교동(喬桐)의 송가도(松家島)는 처음에 태복시(太僕寺)에서 구관(句管)했었고 중간에는 수영(水營)에 예속되었는데, 지금 호조(戶曹)에서 수세(收稅)하는 것은 1결(結)에 벼 1두(斗)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수영에서 태복시의 구례(舊例)라고 핑계하면서 외람되이 1두(斗) 5승(升)을 징수하였습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게 하여 더 징수한 수량은 도로 백성들에게 지급하게 하고 그때의 수사(水使)는 논죄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감사(監司)·병사(兵使)·수령(守令)을 나처(拿處)하였을 경우에는 대임자가 부임하는 기간을 15일로 한정하였고, 파직(罷職)시켰을 경우에는 대임자가 부임하는 기간을 30일로 한정하였으니, 그 기한 안에 사조(辭朝)해야 하는 것은 분명히 정식(定式)이 있습니다. 구전(舊典)을 신명(申明)시켜 기한이 넘도록 부임하지 않는 사람은 드러나는 대로 즉시 품계(稟啓)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지(傳旨)라고 속인 궁차(宮差)는 포도청(捕盜廳)으로 이송시켜 엄중히 신문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지평(持平) 송교명(宋敎明)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인륜(人倫)을 범한 죄인 김협(金浹)에게 2차의 형신(刑訊)만을 시행한 채 아직껏 철저히 핵실하지 않고 있으니, 해당 금당(禁堂)088) 을 무겁게 추고하여 기어이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근일 대소(大小) 문무관(文武官)이 한 고을을 맡아서 나아갈 것 같으면 번번이 한 명의 기녀(妓女)를 데려다 살고 있는데, 돌려가면서 서로가 모방하여 점차 고질적인 폐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각도(各道)의 관비(官婢)가 남아 있는 것은 다만 노약자(老弱者)들뿐입니다. 이들을 일체 쇄환(刷還)시킬 것은 물론 법을 범한 사람은 그 가장(家長)을 죄주고 도신(道臣)과 수령(守令)도 모두 논죄하소서. 궁가(宮家)에서 타량(打量)한 문서에 대한 관문(關文)은 지부(地部)089) 를 경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궁차(宮差)가 폐단을 부린 것은 그때 지부의 여러 당상관(堂上官)들에게도 또한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특별히 전 승지(承旨) 이광보(李匡輔)를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않았다. 이보다 먼저 박사순(朴師順)의 아들 박수원(朴洙源)이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격고(擊鼓)하고 원통함을 호소하면서 나홍언(羅弘彦)의 공사(供辭)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스스로 해명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를 묻게 하였는데, 이는 이광보(李匡輔)가 승지로 있을 때 국청(鞫廳)의 일기(日記)를 등시(謄示)하면서 그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임금이 입시(入侍)한 대신(臺臣)들에게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해 어찌 아직껏 듣지 못했는가?"
하였으니, 임금의 의도는 대신(臺臣)들로 하여금 이광보를 논핵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도 양사(兩司)에서 끝내 논핵하지 않았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무거운 율(律)을 적용할 것을 청하니, 이에 임금이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이어 지금부터 국청 일기를 궤에 넣어 봉폐(封閉)하여 두고 비록 승지일지라도 공사(公事)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감히 보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
1월 21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正言) 이석표(李錫杓)가 상소(上疏)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과거(科擧)에 급제하던 날 시권(試券)에 남의 글을 따라 지었으므로 서차를 정할 즈음에도 주객(主客)이 전도되었다는 것을 그때의 고관(考官) 가운데에도 이미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뒤 비난하는 의논이 또다시 분연(紛然)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저 선비들의 욕망은 과제(科第)보다 더 큰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도 또한 제때에 시권을 바치는 일에 서두른 나머지 다른 사람의 글을 답습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 그 부끄러움은 실로 남의 물건을 훔쳐서 제 것으로 만든 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노창(臚唱)090) 하는 날 자수(自首)하지 못하였고 또 입사(入社)한 뒤에도 즉시 진변(陳辨)하지 못하였으니, 위로는 임금을 속였고 아래로는 제 마음을 속였습니다. 따라서 장차 안수(晏殊)091) 의 죄인이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이 점이 더욱 부끄러워 죽으려 해도 죽을 곳이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소장을 올려 진달하면서 인혐(引嫌)해야 할 일이 아니니,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석표는 평소부터 시문(詩文)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공령(功令)092) 은 그가 잘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공령을 익힌 사람들과 함께 뇌동(雷同)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주객(主客)이 전도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석표가 이런 소장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노창할 때나 입사할 처음에 사퇴하지 않고서 대직(臺職)을 염피(厭避)하기 위해 사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일로써 단점으로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4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 사법(司法)
[註 090] 노창(臚唱) : 조선조 때 의식(儀式)의 절차(節次)를 소리높여 창도(唱導)하는 일. 통례원(通禮院) 종6품 벼슬인 인의(引儀)가 의식의 절차를 고저 장단(高低長短)에 맞추어 읽음.[註 091] 안수(晏殊) :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 사람. 신동(神童)이란 이유로써 천거(薦擧)되었는데, 정중(廷中)에서 시험볼 적에 붓을 당겨 즉시 문장을 만들었음. 벼슬은 동중서 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음.[註 092] 공령(功令) : 과문(科文).
사신은 말한다. "이석표는 평소부터 시문(詩文)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공령(功令)092) 은 그가 잘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공령을 익힌 사람들과 함께 뇌동(雷同)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주객(主客)이 전도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석표가 이런 소장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노창할 때나 입사할 처음에 사퇴하지 않고서 대직(臺職)을 염피(厭避)하기 위해 사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일로써 단점으로 여겼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전하께서 윤순(尹淳)의 일로 인하여 ‘청(淸)’자를 내가 매우 증오한다는 하교를 하셨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격정이 북받쳐 그렇게 말하였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옛날 효종(孝宗) 초년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 등이 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이 조정을 탁란(濁亂)시킨 끝을 당하여 소명(召命)을 받들고 조정으로 나아가 정색(正色)하고 올바른 말을 아뢰어 청의(淸議)를 극력 유지켰습니다. 그리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국맥(國脈)이 이를 힘입어 유지되었다고 했었습니다. 근래에는 습속(習俗)을 떨치지 못하여 선비들의 취향이 저속하기 짝이 없으니, 이때야말로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청론(淸論)이 행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폐단을 미리 걱정하여 도리어 싫어하는 뜻을 내어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탁류(濁流)를 제거하는 청(淸)과 자신을 단속하는 청(淸)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시 이비(似是而非)093) 한 것을 증오하는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청류(淸流)를 싫어하는 것은 진실로 임금의 큰 병근(病根)인데, 윤순(尹淳)을 진정한 청류(淸流)로 여기지 않은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명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윤순이 일찍이 약원(藥院)의 제거(提擧)로 있을 적에 어공(御供)하는 찬물(饌物)을 자기 집의 비녀(婢女)를 시켜 음식을 만들어 들이게 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총애를 요구했다고 했으니, 청류(淸流)한 사람이 진실로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4면
【분류】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재정-진상(進上)
[註 093] 사시 이비(似是而非) : 외형(外形)만은 같되 실속은 같지 않은 것.
사신은 말한다. "청류(淸流)를 싫어하는 것은 진실로 임금의 큰 병근(病根)인데, 윤순(尹淳)을 진정한 청류(淸流)로 여기지 않은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명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윤순이 일찍이 약원(藥院)의 제거(提擧)로 있을 적에 어공(御供)하는 찬물(饌物)을 자기 집의 비녀(婢女)를 시켜 음식을 만들어 들이게 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총애를 요구했다고 했으니, 청류(淸流)한 사람이 진실로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교리 김약로(金若魯)가 상소(上疏)하여 홍경보(洪景輔)를 공척(攻斥)하였고, 또 오원(吳瑗)과 죄는 같은데 벌은 다르다는 이유로써 인혐(引嫌)하니, 하교하기를,
"오원에 대한 처분은 대의(大義)가 이미 다른 것인데 함께 죄받기를 달갑게 여기니, 쌓여온 습관이 너무도 심하구나. 이 소장은 도로 돌려주라."
하였다.
좌윤(左尹) 오광운(吳光運)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에 말하기를,
"오원(吳瑗)이 연석(筵席)에서 추욕(醜辱)을 가한 것은 오로지 능멸하기 위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대소(對疏)에서의 욕설은 또 전보다 배나 더하였습니다. 그것은 한바탕 득실(得失)을 다투는 가운데 임기 응변의 마음을 교묘하게 기울여 스스로 임금의 마음을 엿보아 영합(迎合)하기 위한 것으로, 아첨하고 승봉(承奉)하고 참소 무함하는 등 비부(鄙夫)의 작태를 다하여 분수를 지키기 위해 자취를 숨기고 있는 사람에게 덮어씌운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냉소(冷笑)를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른바 임금을 완희(玩戲)에 빠뜨렸다고 한 것은 이것이 어떠한 죄악입니까? 과연 오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은 당연히 부도죄(不道罪)로써 복주(伏誅)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말이 신을 무함한 데서 나왔다면 오원이 당연히 반좌율(反坐律)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애매 모호한 상태에 버려 둔 채 인간의 세상에서 숨을 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을 사패(司敗)094) 에 내려 오원과 대질하게 함으로써 완희(玩戱)란 말의 허실(虛實)에 대해 분변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런 등류의 어맥(語脈)은 본디 그 사람의 병통의 근원이니, 경(卿)이 지나치게 싫어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1월 22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신택하(申宅夏)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릉(貞陵) 근처에 투장(偸葬)한 사람들을 끝내 조사하여 아뢰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사대부(士大夫)의 묘역(墓域)에 투장했을 경우에도 관(官)에서 그것을 파서 옮긴다는 것이 분명히 전헌(典憲)에 있는데, 더구나 원침(園寢)의 지극히 가까운 곳으로 경성(京城)의 금표(禁標)가 있는 안쪽이겠습니까?
마땅히 해부(該府)에 신칙하여 즉시 조속히 파서 옮기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호조 정랑(戶曹正郞) 안윤중(安允中)이 억지로 4백 동(同)의 목면(木綿)을 청하여 미리 전인(廛人)에게 주었다가 추잡한 소문이 낭자하게 퍼져 대론(臺論)이 장차 발론되려 하자 이에 기일을 정하여 불에 타서 울부짖고 있는 가운데 독촉하여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대신(大臣)이 그로 하여금 자처(自處)하게 하니, 안윤중이 정장(呈狀)하기를, ‘어떤 시인(市人) 하나가 스스로 후궁(後宮)의 지친(至親)이라고 일컬었는데도 일례(一例)로 엄중히 독촉하였으므로 대신(大臣)의 말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하였으니 과연 그 말이 사실이라면 권세를 빙자한 시인(市人)도 진실로 이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안윤중이 또 감히 이를 빙자하여 꾸밈으로써 자신의 추태를 교묘하게 숨기고 대신(大臣)과 심하게 버틴 정상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으니, 안윤중은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후궁의 지친(至親)이라고 일컬은 자도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사해 죄를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그 거간(居間)하여 촉탁한 사람인 노계한(盧啓漢)이 한 점포에서 2천 전(錢)씩을 거두어들였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누군들 그 말을 듣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번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할 때를 당하여서는 그 일에 대해 엄중히 진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마침내는 노계한에게 죄를 돌렸고, 결국 사형(死刑)을 면하고 유배(流配)시키는 데에서 그치고 말았으니, 어떻게 뒷사람을 징계시킬 수 있겠습니까? 노계한은 마땅히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철저히 조사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시형(金始炯)은 본도(本道)에 거듭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써 재읍(災邑)에 귀양와 있는 죄인을 다른 곳으로 이배(移配)시킬 것을 계청(啓請)하면서 다만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만 하였을 뿐 ‘해부(該府)’라는 두 글자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해조의 복계(覆啓)를 빙자하여 금부(禁府)의 죄인 한사억(韓師億)까지 뒤섞어 호남(湖南)으로 이배(移配)시켰습니다. 금오(金吾)095) 에서 이미 추고할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문비(問備)096) 에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김사형은 마땅히 파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법연(法筵)에 출입하는 데에는 본디 상도(常度)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계복(啓覆)하는 날을 당하여 도승지 이춘제(李春躋)가 이미 정청(政廳)으로 가겠다고 청하고서는 곧바로 연석(筵席)으로 들어감으로써 정관(政官)의 말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크게 사테를 손상시킨 처사입니다. 이춘제는 마땅히 파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작년(昨年) 19일의 처분(處分)은 의리(義理)가 정당하고 윤강(倫綱)을 더 중히 한 것으로 성인(聖人)을 기다려 질정해도 의혹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김유경(金有慶)은 사납고 괴팍한 성품으로 원망하는 붓을 방자하게 휘둘러 감히 의리가 회색(晦塞)되고 윤강이 역패(斁敗)되었다는 등의 말로써 장독(章牘)에 올렸습니다. 이것이 성상(聖上)께서 그 이름을 조적(朝籍)에서 삭제시키고 세 글자의 전임(銓任)은 더욱 물의(物議)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김유경의 이조 참판의 직임은 마땅히 개정(改正)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임피 현감(臨陂縣監) 이태상(李泰祥)은 본디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어 물정(物情)에 흡족하지 못하고 있는데 또 교자(轎子)를 타는 법금을 범했으니, 이태상은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배천 군수(白川郡守) 구정훈(具鼎勳)은 일찍이 고을을 다스려 본 경력이 없는데도 곧바로 명군(名郡)에 제수했으니, 정례(政例)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구정훈은 마땅히 개차(改差)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 선전관(宣傳官) 이인식(李仁植)은 한 통의 소장을 올려 성렬(聖烈)을 성대하게 칭송함으로써 감히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는 계책을 하였으니, 마땅히 이인식을 엄중히 물리침으로써 겸손한 덕을 더욱 밝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구정훈을 곧바로 군수(郡守)에 제수했다는 이유로써 전관(銓官)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신택하(申宅夏)가 하루에 아홉번을 아뢰었으니, 나약하고 침묵을 지키는 습관을 풍려(風勵)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가 19일의 하교(下敎)를 가지고 성인(聖人)을 기다려 질정해 보아도 의혹될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아첨이 아니면 망령된 처사이다. 대개 건저(建儲)·대리(代理)의 계책을 건의한 사람은 이미 충신(忠臣)이 되었다가 다시 역적(逆賊)이 되기도 하고,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의 무리는 이미 역적이 되었다가 다시 역적이 아닌 것으로 되기도 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건저(建儲)·대리(代理)케 한 사람들이 이미 충신이 되었다면 그 당(黨)이 모두 충신인 것이다. 그 가운데 비록 음사(陰邪)하고 부정(不正)한 무리가 있었을지라도 이것은 그 사람만이 역적인 것이요 그 당이 모두 역적인 것은 아니니, 그 사람만 죄주고 그 당에 대해서는 의심함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김일경·목호룡·박필몽·박필현이 이미 역적이 되었다면 그들의 의논을 따른 그 당(黨)은 모두 역적인 것이니, 그 가운데 비록 이의를 제기하여 스스로 떨치어 나온 사람이 있었을지라도 이것은 그 사람만이 역적이 아닌 것이지 그당이 모두 역적이 아닌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사람만 기용할 것이요 그 당은 부지(扶持)시키는 일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 들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한 가닥의 음(陰)을 가지고 전체의 양(陽)을 음(陰)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한 가닥의 양(陽)을 가지고 전체의 음(陰)을 양(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19일의 하교는 제당(諸黨)에 모두 역적이 있다는 내용으로 끝내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이 혼동되는 데로 귀결되는 것인데 신택하가 이에 ‘의리가 정당하고 윤강이 더 중하게 되었다.’고 했으니, 그의 미혹(迷惑)이 심한 편이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정론-간쟁(諫諍) / 재정-국용(國用) / 상업(商業) / 변란(變亂)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풍속-예속(禮俗)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095] 금오(金吾) : 의금부.[註 096] 문비(問備) : 관원에게 비위(非違)의 혐의가 있을 때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글로 묻고 힐문받은 자가 승복하거나 변명하는 사연을 갖추어 답하는 것. 사헌부에서 힐문하고 피의자가 답하는 글은 함서(緘書)로 왕래하므로 또한 함문(緘問), 함답(緘答)이라 함.
사신은 말한다. "신택하(申宅夏)가 하루에 아홉번을 아뢰었으니, 나약하고 침묵을 지키는 습관을 풍려(風勵)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가 19일의 하교(下敎)를 가지고 성인(聖人)을 기다려 질정해 보아도 의혹될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아첨이 아니면 망령된 처사이다. 대개 건저(建儲)·대리(代理)의 계책을 건의한 사람은 이미 충신(忠臣)이 되었다가 다시 역적(逆賊)이 되기도 하고,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의 무리는 이미 역적이 되었다가 다시 역적이 아닌 것으로 되기도 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건저(建儲)·대리(代理)케 한 사람들이 이미 충신이 되었다면 그 당(黨)이 모두 충신인 것이다. 그 가운데 비록 음사(陰邪)하고 부정(不正)한 무리가 있었을지라도 이것은 그 사람만이 역적인 것이요 그 당이 모두 역적인 것은 아니니, 그 사람만 죄주고 그 당에 대해서는 의심함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김일경·목호룡·박필몽·박필현이 이미 역적이 되었다면 그들의 의논을 따른 그 당(黨)은 모두 역적인 것이니, 그 가운데 비록 이의를 제기하여 스스로 떨치어 나온 사람이 있었을지라도 이것은 그 사람만이 역적이 아닌 것이지 그당이 모두 역적이 아닌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사람만 기용할 것이요 그 당은 부지(扶持)시키는 일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 들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한 가닥의 음(陰)을 가지고 전체의 양(陽)을 음(陰)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한 가닥의 양(陽)을 가지고 전체의 음(陰)을 양(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19일의 하교는 제당(諸黨)에 모두 역적이 있다는 내용으로 끝내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이 혼동되는 데로 귀결되는 것인데 신택하가 이에 ‘의리가 정당하고 윤강이 더 중하게 되었다.’고 했으니, 그의 미혹(迷惑)이 심한 편이다."
응교(應敎) 한현모(韓顯謨)와 수찬(修撰) 박필균(朴弼均)이 누차 부르고 누차 가두고 하였으나 버티고 응하지 않았다. 임금이 의금부(義禁府)에 판부(判付)를 내리고 하교(下敎)하여 책망하기를,
"이렇게 명을 어기니, 이는 곧 지금의 조정에서는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였으나, 한현모와 박필균은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뒤에 김상중(金尙重)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지금의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겠다[不立今朝]’는 네 글자를 고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매양 신료(臣僚)들에게 출사(出仕)할 것을 면려할 즈음에 반드시 옥박지르고 다그치기 때문에 사령(辭令)의 실수(失手)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임금이 팔도(八道)의 구관 당상(句管堂上)과 육조(六曹)의 장관(長官)을 희정당(熙政黨)에서 인견(引見)하였다. 형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의익(李義翼)이 중추부(中樞府)의 녹사(錄事)와 강화(江華) 수첩군(守堞軍)의 장교(將校) 가운데 경내(境內)에 사는 사람을 모두 괄출(括出)하여 궐액(闕額)097) 에 충당시켰다고 합니다. 마땅히 여러 고을에서도 이를 본받아 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이 진실로 좋은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뒤로 중추부와 강화에서 혹시 불편함을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다. 지금부터 무릇 군정(軍政)에 관계된 모든 것은 전부 비국(備局)을 경유한 뒤에 아뢰게 하라."
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양포(良布)098) 는 으레 2필(疋)을 거두게 되어 있고,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잡색(雜色)은 다만 1필만을 거두어 사용(私用)에 충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원망은 국가로 돌아오고 이익은 사가(私家)로 돌아가게 되므로 매우 마땅한 것이 아니니, 마땅히 모두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병조 판서 윤유(尹游)는 말하기를,
"박문수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폐지하는 것은 또한 불가한 일입니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윤유가 관서(關西)를 안찰하고 있을 적에 또한 일찍이 사용(私用)을 그 동생(同生)인 사촌(四寸)에게 주었었기 때문에 지금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국가에 이익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윤유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박문수가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있을 적에 유독 그 동생인 사촌에게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하였다. 박문수가 눈을 부릅뜨고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신은 경상 감사로 있을 적에 일찍이 이에 대해 논계(論啓)하여 폐지할 것을 청했었습니다만, 결국 조문명(趙文命)에게 저지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윤유처럼 사용(私用)을 달갑게 여겨 폐지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니, 윤유는 더욱 노하여 점점 더 꾸짖고 박대하면서 심지어는,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능멸할 수 있는가?’라고까지 하여 전상(殿上)이 시끄러웠다. 승지 홍상빈(洪尙賓)이 모두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은 마땅히 차등이 있어야 된다고 하교하고 단지 박문수만 추고하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천위(天威)099) 의 지척에서 재상(宰相)이 욕설을 하며 꾸짖게 되매 사기(辭氣)가 비루하고 패려스러웠으니, 연석(筵席)의 체통이 엄중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뒤 박문수가 또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윤유의 탐오스럽고 추잡한 정상을 대면(對面)하여 책망하면서 패려스러운 말로 서로 욕을 하기에 이르렀었다. 윤유가 감히 태연히 공직(供職)할 수 없어 사양하는 뜻을 조금 보이기는 했으나 곧이어 무릅쓰고 출사(出仕)했으므로 예대(隷儓)들도 모두 타매(唾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5면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사학(史學)
[註 097] 궐액(闕額) : 모자란 인원.[註 098] 양포(良布) : 양역(良役)의 가포(價布).[註 099] 천위(天威) : 임금의 위엄.
사신은 말한다. "천위(天威)099) 의 지척에서 재상(宰相)이 욕설을 하며 꾸짖게 되매 사기(辭氣)가 비루하고 패려스러웠으니, 연석(筵席)의 체통이 엄중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뒤 박문수가 또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윤유의 탐오스럽고 추잡한 정상을 대면(對面)하여 책망하면서 패려스러운 말로 서로 욕을 하기에 이르렀었다. 윤유가 감히 태연히 공직(供職)할 수 없어 사양하는 뜻을 조금 보이기는 했으나 곧이어 무릅쓰고 출사(出仕)했으므로 예대(隷儓)들도 모두 타매(唾罵)하였다."
형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상사(上司)에서 수금(囚禁)하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면서 일체 금지시킬 것을 청하였다. 승지 홍상빈(洪尙賓)이 말하기를,
"액례(掖隷)가 다른 사람에게 구타당했는데도 해조(該曹)에서 구타한 사람을 다스리지 않을 경우 승정원(承政院)에서 수금(囚禁)하는 것은 전례입니다. 지난번 액례가 반료(頒料)할 때 감례(監隷)가 작은 말[斗]을 사용했기 때문에 또한 승정원에서 그 감례를 잡아가두어 다스렸습니다. 이런 등류의 수금을 어떻게 폐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당연히 액례(掖隷)들이 멋대로 방자한 짓을 할까 염려해야 되는 것인데 도리어 구타당할 것을 걱정하였으며, 급료(給料)를 감한다는 것은 또한 이런 이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홍상빈이 실언(失言)하였으니,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송인명이 바야흐로 경연(經筵)의 직임을 겸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억지로 그를 따랐다.
사신은 말한다. "홍상빈은 술을 즐기는데다 혼몽하고 용렬하여 전혀 일을 살피지 않았는데 극력 액례들을 비호하고 나섰다. 그가 일찍이 승지로 있을 적에 무인(武人)으로 액례와 서로 싸운 자에게 죄줄 것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또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액례들이 우리의 승지라고 지목하기까지 하였다. 이때문에 잠시 체직되었다가는 곧이어 제수되기도 하면서 항상 승정원을 떠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5면
【분류】정론(政論) / 신분(身分)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홍상빈은 술을 즐기는데다 혼몽하고 용렬하여 전혀 일을 살피지 않았는데 극력 액례들을 비호하고 나섰다. 그가 일찍이 승지로 있을 적에 무인(武人)으로 액례와 서로 싸운 자에게 죄줄 것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또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액례들이 우리의 승지라고 지목하기까지 하였다. 이때문에 잠시 체직되었다가는 곧이어 제수되기도 하면서 항상 승정원을 떠나지 않았다."
임금이 구관 당상(句管堂上)들에게 하유하기를,
"구관하라는 명령은 그 의도가 진실로 깊은 것이다. 만약 오로지 양역(良役)만을 위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나의 본뜻이 아니다. 모든 수재(水災)·한재(旱災)·비어(備禦)와 흉년의 진제(袗濟)에 대해 조정 안에서는 구관 당상이, 지방에서는 제도(諸道)의 방백(方伯)들이 미리 상의하여 선처(善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에 허덕이는 것은 오로지 양역(良役)에 연유된 것인데, 오늘 비록 1필(疋)을 감하더라도 내일 어찌 침족(侵族)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저 군액(軍額)의 색목(色目)이 점점 번다(繁多)해져서 양정(良丁)이 이로 인하여 크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제도(諸道) 가운데 양역이 더욱 심한 곳은 먼저 구제(舊制)에 따라 조사하여 개혁시켜야 하는데, 이 방법을 행하려고 하면 두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곧 조사하여 개혁할 즈음에 사심을 버리고 공심을 가지도록 힘쓴 후에야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이지 않는 것이고 태정(汰定)할 때에는 먼저 상사(上司)에서부터 시행한 후에야 백성들이 복종하게 되는 것이니, 각기 마음을 다져 먹고 봉행(奉行)토록 하라."
하였다.
국청(鞫廳)의 죄인 심건이(沈建伊)가 물고(物故)되었다. 이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가서 좌의정 서명균(徐命均), 판의금(判義禁) 신사철(申思喆), 지의금(知義禁) 조상경(趙尙絅), 동의금(同義禁) 윤양래(尹陽來)·이보혁(李普赫), 사간(司諫) 이저(李著), 지평(持平) 이수해(李壽海) 등을 인견하고 옥정(獄情)에 대해 하문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신이 호서(湖西) 사람에게 듣건대, 지난 겨울 이미 이런 유언 비어가 있었다고 했습니다만, 진실로 그것이 반드시 감덕(甘德)에게서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심건이는 세 번이나 말을 바꾸었는데도 대부분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양제(李亮濟)가 말한 보중탕(補中湯)이란 이야기는 또 부도(不道)한 것이 아니니, 마땅히 모두 참작해서 조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각기 의견을 진달하게 하였다. 신사철·조상경·윤양래가 모두 말하기를,
"심건이가 전한 흉언(凶言)은 결코 상놈[常漢]으로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니, 이양제를 신문(訊問)해야 됩니다."
하고, 이보혁은 말하기를,
"신문해서 자복하지 않을 경우에는 체포해 죽이기가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저는 말하기를,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법규에, 고자(告者)를 4차 형신(刑訊)하여 말을 바꾸지 않으면 으레 피고자(被告者)를 형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심건이는 8차의 형신에도 말을 바꾸지 않고 죽었으니, 감덕과 이양제를 신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수해는 말하기를,
"신은 지난번 이미 상소(上疏)하여 감덕을 신문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대신(大臣)은 곧바로 참작하여 조처할 것을 청하였고, 이보혁은 미리 체포하여 죽이기 어려운 것을 우려하였으니, 이는 모두 잘못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만약 이소(李炤)의 족속(族屬)이라는 이유로써 이양제를 의심한다면 이는 그의 화심(禍心)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비록 백방(白放)100) 시켜도 좋겠지마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참작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드디어 하교하기를,
"비록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되는데, 죽었다면 마음에 불쌍히 여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지난번 김원성(金遠聲)이 죽은 것에 대해 지금까지도 측은한 슬픔이 있다. 지금 이양제는 이미 죽일 만한 죄가 없으니, 비록 이소(李炤)의 이종(姨從)이지마는 결연(結連) 때문에 의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폐족(廢族)이라고 나라를 원망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심건이는 곧 이소의 종이니, 그도 또한 나라를 원망하겠는가? 이런 등의 부류들을 언근(言根)의 출처 때문에 반드시 모두 철저히 다스려야 한다면, 우어(偶語)101) 를 금하는 법을 또한 마땅히 시행해야 되는 것이다. 그의 말에 어긋나는 단서는 ‘국가에 일이 있음을 바란다.’는 말에 불과하니, 원래 그리 대단하게 의심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의심하는 것도 폐단이 있다고 여긴다. 내가 처음 김성원을 의심했던 것을 지금에 와서도 후회하고 있다."
하고, 드디어 죄수들을 참작하여 조처해서 혹 정배(定配)하기도 하고 혹은 방면시키기도 하였다.
사헌부에서 【지평(持平) 이수해(李壽海)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감덕(甘德)의 명복(名卜)에 대한 이야기와 이양제(李亮濟)의 탕제(湯劑)에 대한 말은 모두 의심스러운 데에 관계되는 것이니, 마땅히 참작하여 조처하는 것을 중지하고 다시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군위 현감(軍威縣監) 황택하(黃宅河)는 위엄이 위급을 대처하기에 부족하고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이 비등하여 서리(胥吏)들은 구임(久任)을 바라고 백성들은 속히 떠나가기를 원하고 있으니, 마땅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3일 경자
사간(司諫) 이저(李著)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늘날 반드시 나라가 망할 조짐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민심(民心)과 세도(世道)와 국체(國體)인 것입니다. 대저 역변(逆變)이 있은 이후로 인심이 어지러워지고 천리(天理)가 멸절되어 흉서(凶書)가 가시(街市)에 계속 나붙고 있어 역적의 종자들이 주려(州閭)에 섞여 있으면서 군주(君主)를 비난하고 무함함에 있어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음은 물론, 강상(綱常)의 변고가 군읍(郡邑)에서 잇따라 발생하고 있어 삼성 추국(三省推鞫)이 왕부(王府)102) 에서 그칠 날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자(父子)와 형제(兄弟) 사이도 오히려 서로 보전할 수가 없는데 윗사람을 친애(親愛)하고 관장(官長)을 위하여 죽는다는 의리가 어디에서 발생하겠습니까? 이제 이런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오직 잘 살펴 철저히 국문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원(本源)을 교화시키는 데 이르러서는 일찍이 유념한 적이 없으니, 이것이 다스려도 더욱 혼란하여지고 금해도 금지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형벌을 줄이고 부세를 가볍게 하여 그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여 주시고, 인(仁)으로써 무마하고 의(義)로써 감화시켜 그 습관을 변화시킴으로써 이미 어지러운 민심으로 하여금 점차 의리로 향할 줄 알게 한 후에야 치도(治道)를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도(世道)의 오륭(汚隆)103) 은 오직 사대부(士大夫)들의 습상(習尙)에 달려 있는 것인데, 사대부들의 습상은 다만 군주의 인도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붕당(朋黨)의 습성이 끝내는 하늘을 뒤덮을 역란(逆亂)을 빚어내고 말았으므로, 전하께서는 기필코 이를 통렬히 개혁시키기 위해 탕평(蕩平)에 전념(專念)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19일의 하교가 있은 뒤에도 융통성이 없는 습성은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전에 붕당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고 하고 있고, 지금 붕당을 하는 사람들은 이에 나는 충신이고 너는 역적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붕당을 하는 사람들은 표리(表裏)가 모두 사적(私的)이어서 그 자취를 보기가 쉬웠는데, 지금 붕당을 하는 사람들은 속으로는 사적이고 밖으로는 공적임을 표방하고 있어서 그 마음을 분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때문에 사람을 논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양쪽의 사람을 나란히 거론하게 되었고 사람을 기용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양쪽의 사람을 상대적으로 기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따라간다면 설령 저쪽에 거간(巨奸)·대특(大慝)이 있을지라도 이쪽에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장차 논할 수 없을 것이고, 이쪽에 고재(高才)·이등(異等)인 사람이 있을지라도 저쪽에 그와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장차 거용(擧用)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처사이겠습니까? 이것은 전하(殿下)께서 신하들을 의심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고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 급속했던 탓인 것으로, 일세(一世)의 풍절(風節)을 쓸어버리고 사대부(士大夫)들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순치(馴致)시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군신(君臣) 상하(上下)는 바야흐로 흡족한 마음으로 스스로 기뻐하면서 탕평책의 극진한 공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하나의 ‘당(黨)’자를 마음속에 가로질러 넣어두고서 기필코 피하려고 한다면, 이런 마음도 이미 좋지 않은 것인데 오히려 어떻게 왕도(王道)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세(國勢)가 유지되어 기울지 않게 하는 것은 기강(紀綱)이요 체통(體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래에는 백집사(百執事)가 있고 위에는 대부(大夫)와 공경(公卿)이 있는 것이며 군주는 그 위에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군주의 존엄함은 천지(天地)와 같고 밝음은 일월(日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만일 천지의 조화가 품물(品物)에 따라 그 모양새를 이루어 주고 일월의 빛이 깊숙한 곳을 찾아서 후미진 곳도 다 비추어 주듯이 하려 한다면, 그 조화는 수고롭고 그 빛은 협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석(衡石)으로 헤아리고104) 군사에게 밥을 가지고 오게 하는 것105) 이 부지런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떨어진 돗자리를 펴고106) 쥐똥을 분석한 것107) 이 총명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군신(群臣)들 가운데 자신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사사 건건이 살피려고 하시고 신칙(申飭)하려고 하시는가 하면 전주(銓注)에 있어서도 명령을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어필(御筆)로 단자(單子)에 쓰기까지 하시니, 이는 아래로 이조(吏曹) 낭청(郞廳)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반드시 장전(帳殿)에서 직접 국문하려 하시니, 이는 아래로 국청(鞫廳) 대신(大臣)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 경조(京兆)108) 에서 금지해야 될 것과 어사(御史)가 탄핵해야 될 것도 또한 직접 살펴 몸소 신칙시키시는 일이 많은데, 이것은 아래로 유사(有司)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윤음(綸音)을 내리고 명령(命令)을 내리는 즈음에 간혹 세밀히 하는 데 지나쳐서 간중(簡重)함이 모자라기도 하니, 이는 임금은 수고롭고 신하가 편안한 것이므로 또한 도치(倒置)된 일이 아닙니까?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당폐(堂陛)가 근엄하지 못한 탓으로 무신(武臣)이 문재(文宰)의 잘못을 본받아 감히 천패(天牌)를 어기는가 하면, 종신(宗臣)이 대신(大臣)에게 성을 내어 부리(府吏)를 상대적으로 가두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일개 의관(醫官)이 제조(提調)에게 품의(稟議)하지 않고서 방자하게 탑전(榻前)에서 진달하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국가에서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데에는 본디 체통이 있는 것인데, 지금은 조정에서 독책(督責)하는 것이 서관(庶官)과 다름이 없고 승정원(承政院)에서 호척(呼斥)하는 것이 낭료(郞僚)들을 대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각(臺閣)으로 하여금 과연 진(晋)나라의 사례(司隷)인 부현(傅玄)이 다음날 아뢸 백간(白簡)을 받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잠을 제대로 못자고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밤이 새도록 쟁론했던 것처럼 한다면, 이런 것이 어찌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널리 정직한 선비를 구하여 대성(臺省)에 포열(布列)시킨 다음 너그러이 용납하고 감싸주어 그들의 염절(廉節)을 배양한다면 선비들이 모두 벼슬하기를 원할 것이고 따라서 저절로 꺼리지 않는 기풍이 조성될 것입니다.
근일 여러 궁방(宮房)의 절수(折受)를 폐지하고 상방(尙方)에서의 직조(織造)를 정지시킨 등의 일은 성덕(聖德)을 크게 빛낸 조처였습니다. 그러나 작년에도 과외(科外)의 면세(免稅)를 폐지하였었습니다. 염분(鹽盆)·어전(漁箭) 등의 사세(私稅)를 철폐시켜 모두 지부(地部)에 예속시킨 지 불과 수년(數年)인데 또다시 전과 같은 상황이니, 오늘날이 또 작년과 같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직기(織機)를 폐지시킨 것은 진실로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만, 만일 궁중의 복어(服御)를 아주 변경시킬 수 없다고 하여 대내(大內)로 들여가는 사단(絲緞)의 수량을 전일보다 감축시키지 않는다면, 지부(地部)에서 이를 사오는 비용이 도리어 직기를 설치하는 것이 나은 것만도 못할 것입니다. 하늘이 재물(財物)을 생산함에 있어 그것이 나라에 있지 않으면 백성에게 있게 마련인 것인데, 지금은 그것이 국가에도 있지 않고 백성에게도 있지 않고서, 중간에서 새어버리는 것은 구멍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멍으로 새어나가는 폐단을 막지 않는다면, 위에서 비록 궁전의 지붕을 띠풀로 이고 섬돌을 흙으로 만들며 대포(大布)109) 와 대백(大帛)110) 으로 옷을 해 입는다고 하더라도 끝내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양역(良役)의 폐단은 지금 제일의 고질적인 뿌리가 되고 있으니, 만일 오랜 폐단을 제거하려 한다면 재능과 계획을 갖춘 두서너 신하와 함께 종용히 강구하여 행할 만한 것에 따라 이를 행한다면 될 것입니다. 어찌 구관(句管)의 호칭을 설치하고 변혁(變革)시킨다는 명목을 전파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일 혹시 소문만 앞세우고 실상은 뒤로 미루어 시작은 있고 결과가 없는 데로 귀착된다면 어디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호포(戶布)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양역(良役)에 대한 원망을 온 나라에 두루 확산시키려 하고 있으니, 너무도 생각하지 못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파정(罷定)하는 계책에 대해서도 또한 헤아려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양정(良丁) 가운데 도산(逃散)된 사람은 신포(身布)만 피했을 뿐이 아니라 또한 그 명목도 피한 것인데, 이제 일체 파정(罷定)시켜 버린다면 아침에 충당시키고 나면 저녁에 흩어져 버리게 되어 한갓 시끄러운 것만을 초래시킬 뿐인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제도(諸道) 군관(軍官) 이하의 여러 가지 명색(名色)에 대해서 입역자(立役者)를 작정(酌定)하여 영읍(營邑)으로 돌려보내고 그 나머지에게는 모두 신포(身布)를 거두게 하여 군수(軍需)를 돕게 하는 한편 그 명목은 변경시키지 않는다면, 조금은 편의(便宜)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고 원소(原疏)는 유중(留中)하게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홍현보(洪鉉輔)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는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는 의리를 진달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 그때의 처분은 중도에 지나쳤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서(收敍)한 뒤에는 구직(舊職)의 경력으로 회복시켜 주는 것이 본래의 정례(政例)인 것인데, 지금 간신(諫臣)이 일필(一筆)로 단정하여 곧바로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로 몰아넣었습니다. 진실로 그의 말과 같다면 유방(流放)하고 찬극(竄殛)시키는 것이 불가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에 개정(改正)할 것을 청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세 글자의 하교(下敎)를 원용(援用)했다는 것으로 말을 하여 협제(脅制)하는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이와 같은 대간(臺諫)의 기풍은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처사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서용하셨고 또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이제 대계(臺啓)에 대해 곧 윤가(允可)를 내리신다면, 신은 삼가 개연(慨然)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지신사(知申事)와 영백(嶺伯)의 일에 이르러서는 주착(做錯)에 불과한 것인데, 모름지기 호대(戶對)의 자료로 삼아 겉으로는 공평하고 정직함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상대를 죄에 밀어넣어 빠뜨리려는 계교를 성취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이런 정상(情狀)에 대해 신은 실로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마땅히 견책을 시행하여 그런 습관을 징계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근래 이목(耳目)의 관원에게 이러한 폐단이 없지 않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일의 시비(是非)만을 살펴야 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사람을 의심하는 표적으로 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홍현보가 하교(下敎)를 원용(援用)하여 협제(脅制)를 가하려 했다는 이유로써 신택하(申宅夏)를 공척(攻斥)한 것은 그 말이 옳다. 그러나 명쾌한 언론(言論)으로 의리의 근원을 분변하여 임금의 하교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저 겉껍데기만 따라서 말하였을 뿐이니, 또한 그것이 대간(臺諫)의 기풍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사법(司法)
사신은 말한다. "홍현보가 하교(下敎)를 원용(援用)하여 협제(脅制)를 가하려 했다는 이유로써 신택하(申宅夏)를 공척(攻斥)한 것은 그 말이 옳다. 그러나 명쾌한 언론(言論)으로 의리의 근원을 분변하여 임금의 하교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저 겉껍데기만 따라서 말하였을 뿐이니, 또한 그것이 대간(臺諫)의 기풍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1월 24일 신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持平) 이수해(李壽海)가 상소(上疏)하여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을 탄핵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국가의 치란(治亂)은 반드시 보상(輔相)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의 지사(志士)들이 임금은 있는데 신하는 없다고 탄식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근래 전지(傳旨)에 응하여 진언(進言)하는 것이 날마다 공거(公車)111) 에 가득 차는데, 그 내용은 모두가 임금의 잘못을 공척하는 것일뿐, 감히 재보(宰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기(夔)·용(龍)이 삼정승(三政丞)의 자리에 있고 팔원(八元)·팔개(八凱)가 팔좌(八座)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당초 지적할 만한 하자가 하나도 없는 데 반하여 유독 전하만이 허다한 과실이 있음을 면치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는 풍릉(豐陵)112) 을 계승하는 일로써 의지하고 있는 대신(大臣)에게 면유(勉諭)하였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까? 전하께서는 걸핏하면 요순(堯舜)을 본받으신다고 하시면서 어찌하여 대신(大臣)들에게 멀리 직(稷)·설(契)을 뒤따르게 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풍릉(豊陵)을 본받게 하십니까? 대신들도 또한 젊은 날에는 청신(淸愼)을 스스로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에 이르러 명위(名位)가 점점 높아지고 혈기(血氣)가 쇠약하여 감에 따라 앞뒤에서 권유(勸誘)하는 것은 모두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격하라는 말이고 좌우에서 종용하는 것은 모두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을 편들라는 계책뿐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선입견이 자리를 잡고 있는 탓으로 시비(是非)에 대해 매양 분명히 분변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고, 밖으로는 부의(浮議)에 동요되어 명의(名義)를 혹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끌어들이기에 급급한 경우에는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도 거개 씻어주고 보살펴 주는가 하면, 영호(營護)에 빠졌을 경우에는 탄핵을 받은 수령(守令)도 다시 장황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신백(伸白)합니다. 따라서 묘당(廟堂)의 의천(議薦)은 인아(姻婭)를 끌어들이는 경우가 자주 있게 되고, 군읍(郡邑)의 차제(差除)에는 매양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저지하는가 하면, 미리 앞서서 진백(陳白)하고 뒤따라 천거하여 의망(擬望)하기에 이르고 있으니, 아무리 은혜를 팔고 당여를 심는다고 해도 스스로 변해(辨解)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지방의 곤수(閫帥)로 나가 있게 되는 것은 모두가 묘당(廟堂)의 추천에 달려 있는 것인데 그들이 거의 순수한 일색(一色)뿐이니, 재능이 있는 사람만을 기용한다는 방법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종신(宗臣)이 의정부(議政府)의 서리(胥吏)를 대신 수금(囚禁)하고 훈재(勳宰)가 면대해서 정직하지 않음을 공척(攻斥)한 데 이르러서는 그 득실(得失)의 여하는 논할 것 없이 모두가 우러러보는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러한 이전에 없던 치욕(恥辱)을 받았으니, 너그러운 도량으로서 비록 발끈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조정의 체통은 이로 말미암아 모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이뒤로 사심을 버리고 공심을 넓혀 국사에 마음을 다하게 한다면 신의 이 말은 그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기에 족할 뿐이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소장을 중서(中書)113) 에 내려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칙려(飭勵)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한번 발론하여 아홉 번의 계사(啓辭)를 올린 간관(諫官)이 갑자기 풍채(風采)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볼 만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 지의(旨意)를 상세히 따져본다면 한번의 웃음거리를 제공하기에 족한 것일 뿐입니다. 일찍이 이러한 잗단 계략으로 일세(一世)의 이목(耳目)을 속인 적이 있었습니까? 영백(嶺伯)이 좌죄(坐罪)된 것은 주착(做錯)에 불과한 것인데, 어찌하여 그것이 논박받아 파직되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형제(兄弟)가 바야흐로 남북(南北)에 방백으로 나가 있어 물의(物議)가 없지 않기 때문에 이런 거조를 하여 장차 체직(遞職)을 요구하는 사람은 체직시키고 부임(赴任)을 요구하는 사람은 부임시키려고 했으니, 비록 스스로 교묘한 계책이라고 여기겠지마는 다른 사람이 누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아전(亞銓)을 개정(改正)한 것은 더욱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날 세 글자의 하교는 전하에 있어서도 큰 실언(失言)이 되는 것이니, 대각(臺閣)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광구(匡救)하는 방도를 다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에 도리어 칭양(稱揚)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또 뒤따라 죄를 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런 풍습을 신은 삼가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엄한 하교를 내려 이수해를 체직시키게 하고 이어 내쳐 경성(鏡城)의 판관(判官)에 보임시키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서명균(徐命均)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청렴하고 검소하여 상당히 시예(時譽)를 얻기는 했으나, 이미 정무(政務)를 아는 재능이 없는데다가 또 사당(私黨)에 편든다는 비방이 있었다. 그러나 심수현(沈壽賢)에게 견주어 보면 나은 점이 있을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수해가 심수현은 논핵하지 않고 먼저 서명균을 논핵하였으니, 사람들이 진실로 협잡(挾雜)이란 것을 의심했다. 그리고 그의 논설(論說)은 억양(抑揚)과 비합(捭闔)114) 에 있어 전혀 직절(直切)한 기풍이 없다. 또 임금은 있고 신하는 없다는 말과 어찌 전하께서만 궐실(闕失)이 있겠는가라고 하는 말들은 자못 아첨하는 작태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 사법-탄핵(彈劾) / 인사(人事)
[註 111] 공거(公車) : 소장(疏章)), 또는 소장을 접수하는 곳.[註 112] 풍릉(豐陵) : 풍릉부원군 조문명(趙文命).[註 113] 중서(中書) : 의정부를 가리킴.[註 114] 비합(捭闔) : 밀치고 여는 것.
사신은 말한다. 서명균(徐命均)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청렴하고 검소하여 상당히 시예(時譽)를 얻기는 했으나, 이미 정무(政務)를 아는 재능이 없는데다가 또 사당(私黨)에 편든다는 비방이 있었다. 그러나 심수현(沈壽賢)에게 견주어 보면 나은 점이 있을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수해가 심수현은 논핵하지 않고 먼저 서명균을 논핵하였으니, 사람들이 진실로 협잡(挾雜)이란 것을 의심했다. 그리고 그의 논설(論說)은 억양(抑揚)과 비합(捭闔)114) 에 있어 전혀 직절(直切)한 기풍이 없다. 또 임금은 있고 신하는 없다는 말과 어찌 전하께서만 궐실(闕失)이 있겠는가라고 하는 말들은 자못 아첨하는 작태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대소(臺疏)로 인하여 도성(都城)을 나가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좌승지 홍상빈(洪尙賓)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결포(結布)·구전(口錢)·호포(戶布)는 시행해서는 안되고 군문(軍門)은 폐지해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각도(各道)에 신칙시켜 도산(逃散)과 물고(物故)를 충정(充定)시킴으로써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구관 당상(句管堂上)은 문무(文武) 가운데 간사(幹事) 1,2명을 자벽(自辟)하게 하여 호적(戶籍)을 조사하여 수괄(搜括)하게 함으로써 기어이 공효를 이루게 하소서."
하고, 끝에 또 전정(田政)도 순차적으로 이정(釐正)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사간원에서 【사간(司諫) 이저(李著)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언(正言) 이석표(李錫杓)가 과명(科名)을 이유로 피혐한 것은 이미 말이 조리에 맞지 않습니다. 두 번이나 시패(試牌)를 어기고 한결같이 오만하고 뻣뻣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으니, 이석표는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않아야 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지평(持平) 송교명(宋敎明)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헌납(獻納) 김정윤(金廷潤)은 인품이 용렬하고 나약한데다가 몸가짐이 비천(卑賤)하고 비루합니다. 전번에 올린 한 통의 소장은 원래 볼 만한 것이 없었는데 이미 취직(就職)했다가 곧이어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했으니, 전일의 계사를 규피(規避)한 자취가 현저히 드러났습니다. 김정윤을 의당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5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는 달이 입성(立星)을 범하였다.
홍호인(洪好人)을 북병사(北兵使)로, 김흡(金潝)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송진명(宋眞明)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상규(金尙奎)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광식(李光湜)·이이제(李以濟)를 장령(掌令)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지평(持平)으로, 심성희(沈聖希)를 헌납(獻納)으로, 조상명(趙尙命)·이현망(李顯望)을 정언(正言)으로, 윤양래(尹陽來)를 도승지(都承旨)로, 조명신(趙命臣)·이광세(李光世)를 승지(承旨)로, 황재(黃梓)를 응교(應敎)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副應敎)로, 윤득화(尹得和)를 교리(校理)로, 유건기(兪健基)·유최기(兪最基)를 수찬(修撰)으로, 이일제(李日躋)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이흡(李潝)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기를,
"엊그제 사간원(司諫院)에서 올린 아홉 건의 계사(啓辭) 가운데 태반의 것이 신의 죄에 관한 것입니다. 김유경(金有慶)이 지난 여름에 올린 한 통의 소장은 단지 스스로 나아가기 아려운 실정을 열거한 것뿐인데, 성교(聖敎)가 비상했던 것은 실로 뜻밖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아랫사람이 비록 광구(匡救)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반한(反汗)115) 하여 은명(恩命)을 내려 서용(敍用)한 뒤에 뒤따라 저지시켜 막았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신(臺臣)들은 도리어 오랫동안 발바닥에 박혀 있던 못[趼]으로 여겨 예의(例擬)한 것을 놀랍게 여기고 있습니다. 진실로 깊이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하여 직접 중률(重律)을 청하지 않고서 개정(改定)으로 제목을 삼는다는 말입니까? 이태상(李泰祥)은 일찍이 세 고을을 맡아서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는데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으로 구실을 삼았으며, 구정훈(具鼎勳)은 관진(觀津)의 세벌(世閥)인데다 재주와 국량을 겸하였고 음사(蔭仕)한 지 20년 만에 지금 비로소 고을을 얻었으니, 또한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신사(知申事)의 죄는 신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니, 신이 어떻게 감히 혼자만 면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안윤중(安允中)의 일은 실지로 신이 지부(地部)에 대죄(待罪)하고 있을 적에 있었으니, 호랑이가 우리에서 튀어나오고 구옥(龜玉)이 궤 속에서 파괴된 그 책임은 져야 될 사람이 있는 것이니, 어떻게 모른 체하고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간중(簡重)함을 안다고 잘못 인정을 받았으므로, 명을 받은 이래 즉시 사심을 버리고 공심을 넓히며, 관방(官方)을 삼가고 명기(名器)를 아끼고 간청(干請)을 물리치고 조경(躁競)을 억제한다는 등의 말을 벽에 써놓고 마음에 새겨 기필코 조금이나마 직책(職責)에 마음을 다하려고 했었습니다만, 죄과(罪過)가 거듭 발생하게 되니, 자신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고 부끄러워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간략히 개석(開釋)시키는 뜻을 보였다.
사신은 말한다. "김재로가 벽에다 써놓고 스스로 면려하고 있다는 뜻을 연주(筵奏)와 장독(章牘)에서 누차 진달했었다. 과연 그 내용대로 잘할 수 있다면 어찌 벽에다 써 놓을 필요가 있겠으며, 그 내용대로 할 수 없다면 벽에 써놓은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무릇 이미 잘하지 못하면서 외람되이 군부(君父)의 앞에서 진달하였으니, 스스로 자랑하여 총애를 받으려는 데에 가까운 짓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7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115] 반한(反汗) : 임금이 명령을 취소함.
사신은 말한다. "김재로가 벽에다 써놓고 스스로 면려하고 있다는 뜻을 연주(筵奏)와 장독(章牘)에서 누차 진달했었다. 과연 그 내용대로 잘할 수 있다면 어찌 벽에다 써 놓을 필요가 있겠으며, 그 내용대로 할 수 없다면 벽에 써놓은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무릇 이미 잘하지 못하면서 외람되이 군부(君父)의 앞에서 진달하였으니, 스스로 자랑하여 총애를 받으려는 데에 가까운 짓이 아니겠는가?"
1월 26일 계묘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辭職)하기를,
"대소(臺疏)에서 보상(輔相)이 적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논했는데, 신은 늙고 혼암하여 능동적으로 한번 물러가는 결단을 못내린 탓으로 사람들의 비평을 받았으니, 참으로 부끄러워 죽고만 싶습니다. 진실로 좌규(左揆)116) 가 잘 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곧 신의 죄인 것입니다. 거취(去就)와 진퇴(進退)를 의리상 혼자서만 달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7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가서 육선공(陸宣公)117) 의 주의(奏議)를 강(講)하였다.
1월 28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좌승지 조명신(趙命臣)이 등대(登對)하여 말하기를,
"외방의 저축이 다 없어졌으니,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저축을 많이 하도록 힘쓰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호남(湖南)에는 도서(島嶼)가 많은데다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고 있어 일에 우려스러운 점이 있으니, 청컨대 각각 그곳의 수령들로 하여금 왕래하면서 살피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어 하유(下諭)하기를,
"육지(陸贄)의 글 가운데 다세(茶稅)·염세(鹽稅)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 대비하게 한다는 등의 말은 진실로 절실(切實)한 것이다. 제도(諸道)로 하여금 염곡(鹽穀)을 별도로 저축하게 하여 그것을 비국(備局)에서 구관(句管)하게 한 다음 수재와 한재에 대비하게 하되 절대 다른 데에는 쓰지 말게 하라."
하였다. 이날 여러 신하들이 바야흐로 좌석(座席)을 떠나 나아가 일을 아뢰고 있을 적에 까치가 전상(殿上)으로 날아들어와서 석모(席毛)를 쪼아 물고서 날아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저런 미물(微物)도 제때에 둥지를 틀려고 하니, 백성의 일을 늦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옛날 정자(程子)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는 일로 인하여 임금을 면려하였고, 제선왕(齊宣王)은 소가 죽음을 두려워하여 떠는 것을 보고 착한 마음이 싹텄었는데, 지금 전석(前席)에서 이런 일을 보니 느낌이 촉발된다. 아! 미물도 시기를 알아서 둥지를 트는데, 불쌍한 나의 적자(赤子)들은 입지도 먹지도 못한 채 도로에 잇따라 쓰러져 있으니, 모름지기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는 정사를 제거하게 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살고 있는 곳을 편안하게 여겨 농사를 짓게 하라. 환과 고독(鰥寡孤獨)118) 에 이르러서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맨 먼저 돌보았던 것인데, 장년(壯年)이 되었는데도 아내가 없고 늙었는데도 남편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양춘(陽春)을 당하여 더욱 칙려(飭勵)하여 안으로는 경조(京兆)와 밖으로는 방백(方伯)이 각별히 방문(訪問)하여 소문을 들은 즉시 돌보아 보조하여 주고나서 거행한 형지(形止)를 등문(登聞)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부호군(副護軍) 이해(李楷)가 상소하여 백골(白骨)에게 징포(徵布)하는 폐단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이제 만약 옛날의 1정전(井田)에서 1졸(卒)을 내게 하던 법을 모방하여 1자정(字丁) 안에 1장(長)을 선출하여 두고서 이를 결장(結長)이라고 명명한 다음 무릇 결내(結內)에서 인력을 내어 농사를 돕는 것과 재결(災結)과 실결(實結)을 관청에 보고하는 등등의 일을 일체 위임시킨다면 결민(結民)이 결장(結長)을 감히 속이지 못하게 되고 결장도 또한 감히 관가(官家)를 속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또 결내(結內)에서 낼 세금의 십분의 일을 감하여 결병(結兵)의 비용으로 쓰게 하고 봄 가을로 조련(操鍊)시켜 기사(騎射)를 익히게 한 다음 본도(本道)에 예속시키기도 하고 혹은 경성(京城)에 상번(上番)시키기도 한다면, 토지가 없던 군병이 토지가 있는 군병이 되고 쓸데가 없던 군병이 쓸데가 있는 군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병(結兵)에 따라 책자(冊子)를 만들어 과거(科擧)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무부(武夫) 가운데 출신(出身)하는 사람들은 모두 결병을 경유(經由)하게 될 것이며, 시골에서 재주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결장(結長)에게 귀속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가가 편안할 때에는 쉬게 한다면 천하의 상농부(上農夫)가 될 것이고, 국가에 난리가 있을 때에는 거용(擧用)한다면 천하의 정예병(情銳兵)이 될 것입니다. 국가를 넉넉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는 계책을 이를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정확하게 상의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이광식(李光湜)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신덕하(申德夏)는 겉으로는 아첨하고 속으로는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침탈(侵奪)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전일에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나가 있을 적에는 백성들의 비방이 길에 가득했었고 상(喪)을 당하여 해직(解職)되어 돌아올 때에는 마군(馬軍)과 말 50여 필(匹)을 조발(調發)하여 미전(米錢)과 어염(魚鹽)을 실어날랐으므로 온 경내(境內)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침뱉고 비루하게 여기고 있으니, 융곤(戎閫)의 직임에 둘 수 없습니다. 신덕하는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용인 현령(龍仁縣令) 유겸명(柳謙明)은 민전(民田)의 결복(結卜)에 대한 세금을 공공연히 더 받아들여서 남는 것의 절반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습니다. 그리고 군정(軍政)의 세초(歲抄)를 일체 간리(奸吏)에게 위임시키고 있어 뇌물을 받는 문이 크게 열려 있으며, 다시 적곡(糴穀)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끄럽게 지나쳤으며 백성을 부리는 것이 가혹하니, 유겸명은 마땅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조상명(趙尙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신(朝臣)에 대해 하루에 세 번 패초(牌招)하는 것은 특명(特命)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감히 청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네 번 패초한 것이겠습니까? 엊그제 승정원(承政院)에서 정관(政官)의 패초를 청함에 있어 이에 감히 말하기를, ‘하루에 네 번 패초하는 것이 사체(事體)에 손상된 점은 있습니다만’이라고 하면서 마치 전례에 따라 품지(稟旨)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매우 왕명의 출납을 진실하게 해야 한다는 체통에 어긋난 처사였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를 추고(推考)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 겨울 식년 전시(式年殿試) 때 직부(直赴)한 사람인 윤영래(尹迎來)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해조(該曹)의 품달(稟達)로 인하여 금방(金榜)의 끝에 그의 이름을 썼습니다. 전례가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지마는,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을 금방에 썼으니, 끝내 구간(苟簡)119) 스러운 데 관계가 됩니다. 병조(兵曹)의 해당 당상관(堂上官)을 추고(推考)하고 죽은 거자(擧子)는 금방에서 빼어버리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일제(李日躋)는 재기(才器)가 통민(通敏)하여 진실로 변방의 중임(重任)을 맡기기에 합당한 사람인데, 영변(寧邊)에서 강계(江界)로 옮겼다가 또 얼마 안되어 만윤(灣尹)120) 에 제수하였습니다. 강계(江界)와 의주(義州)는 중진(重鎭)임은 똑같은데 자주 체직시키는 것은 폐단이 있으니, 청컨대 만윤(灣尹)에 제수하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였으니, 따르지 않았다.
1월 29일 병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가서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유건기(兪健基)가 글의 뜻에 대해 논하면서 말하기를,
"도심(道心)에서 나온 것은 모두 선(善)하고 인심(人心)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악(惡)합니다. 무릇 인심에 관계되는 것은 모두가 없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배고프면 밥먹고 목마르면 물마시는 것이 모두가 인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도심에 합치되는 것이니, 이것도 약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인심은 위태롭다.’고 했으니, ‘위(危)’자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심이 반드시 모두 악한 것은 아니니, 욕심(慾心)에 흘렀을 경우에 악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위태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으나, 유건기는 그래도 말하기를,
"성(性) 속에는 본디 인심(人心)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무인심 옥당(無人心玉堂)’이라고 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병을 핑계하고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며, 우의정 김흥경(金興慶)도 또한 네 번이나 사직(辭職)하는 소장을 올리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독하게 면려하였다.
예조(禮曹)에 명하여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사(廟祠)에 전배(展拜)할 길일(吉日)을 가려서 들이게 하였다. 이는 선조(先朝) 때 이미 전례가 있었던 것인데, 사복(嗣服)한 뒤 아직껏 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의절(儀節)과 종신(宗臣)들의 행례(行禮)를 한결같이 고례(古例)에 따랐다.
이때 제도(諸道)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도신(道臣)들이 그 사실을 계문(啓聞)하였다. 그런데 기내(畿內)가 더욱 극심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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