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7권, 영조 10년 1734년 2월

싸라리리 2025. 9. 1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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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정미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갔다. 참찬관(參贊官) 정필영(鄭必寧)과 검토관(檢討官) 유건기(兪健基)가 《근사록(近思錄)》을 강하다가 악(惡)도 성(性)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구절에 이르러 임금이 하문하기를,
"이 말이 순경(荀卿)의 성(性)은 악하다고 논한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그것은 기질(氣質)을 겸해서 말한 것임을 밝히지 못하고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천(伊川)의 말은 병패(病敗)가 없을 수 없습니다. 명도(明道)라면 반드시 이런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진실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마땅히 그에 맞게 뜻을 살려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2월 2일 무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기진(李箕鎭)이 상소(上疏)하여 겸무(兼務)한 예문 제학(禮文提學)을 사직하면서 말하기를,
"듣건대, 어떤 재상(宰相)이 신을 외람되이 감쌌다는 이유로써 금액(禁掖)에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우데 면대하여 전관(銓官)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선배(先輩)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보면 문임(文任)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서 비평을 듣게 되면 그것이 비록 옥하(屋下)의 사담(私談)일지라도 인혐(引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받은 것은 바로 공조(公租)에서 드러내어 공척(攻斥)한 것이니, 비록 무릅쓰고 사진(仕進)하려 해도 사람들의 비웃고 손가락질하는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인혐(引嫌)한 것이 너무 지나친 데에 관계가 된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박문수(朴文秀)가 오광운(吳光運)이 관각(館閣)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일찍이 임금 앞에서 이미 관각을 지낸 사람들의 성명(姓名)을 낱낱이 거론하면서 그 고하(高下)를 비교한 적이 있었고, 다음날 또 합외(閤外)에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말했었기 때문에 이기진의 상소(上疏)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8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박문수(朴文秀)가 오광운(吳光運)이 관각(館閣)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일찍이 임금 앞에서 이미 관각을 지낸 사람들의 성명(姓名)을 낱낱이 거론하면서 그 고하(高下)를 비교한 적이 있었고, 다음날 또 합외(閤外)에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말했었기 때문에 이기진의 상소(上疏)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사직(司直) 박태항(朴泰恒)이 상소(上疏)하여 민호(民戶)의 대동법(大同法)을 행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주상(主上)의 후사(後嗣)가 아직도 지연되어 의탁할 국본(國本)이 없습니다. 옛날 〈노(魯)나라의〉 칠실(漆室)의 여인이 기둥에 기대어 긴 한숨을 내쉬면서 태자(太子)가 어린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여항(閭巷)의 어리석은 부녀자이지만 그의 길쌈은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나라의 일에 대해 걱정하였는데, 더구나 신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지위가 숭반(崇班)에 올라 있는 처지이겠습니까? 바라건대, 묵묵히 성려(聖慮)를 움직이시어 기명(基命)을 튼튼히 하는 터전을 만들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말단의 일은 오늘날 말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박태항은 일찍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빌붙어 선류(善類)들을 해쳤으니 그 죄는 죽여도 남을 것인데, 지금 이 한 통의 상소에는 그래도 한가닥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담겨져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장차 죽을 때 하는 선한 말이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재정(財政) / 군사-군역(軍役) / 역사(歷史) / 인물(人物)
사신은 말한다. "박태항은 일찍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빌붙어 선류(善類)들을 해쳤으니 그 죄는 죽여도 남을 것인데, 지금 이 한 통의 상소에는 그래도 한가닥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담겨져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장차 죽을 때 하는 선한 말이라’고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상소(上疏)하여 면직(免職)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2월 3일 기유

우박이 내렸다.

 

신무일(愼無逸)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한위(趙漢緯)를 헌납(獻納)으로, 민원(閔瑗)을 장령(掌令)으로, 김상석(金相奭)을 지평(持平)으로, 심성희(沈聖希)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정우량(鄭羽良)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이유(李瑜)를 도승지(都承旨)로, 윤양래(尹陽來)를 발탁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삼았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또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辭職)하였으며,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처음 정사(呈辭)하였으나, 모두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이양(李瀁)이 상소(上疏)하여 열 가지 조항을 아뢰었다. 그 첫째는 성학(聖學)을 함양하여 치도(治道)를 강구하는 것이며, 둘째는 현로(賢路)를 넓히어 인심을 수습하는 데 대한 것인데, 대략 말하기를,
"명환(名宦)과 숭질(崇秩)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호화로운 세족(世族)들이고, 웅주(雄州)와 거읍(巨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부귀(富貴)한 집안의 자제(子弟)들 뿐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먼 시골에서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권(黃卷)을 들고 헛되이 늙게 만들고 홍패(紅牌)를 안고서 길이 눈물만 흘리게 만듭니다."
하였으며, 그 셋째는 대체(大體)를 힘쓰고 까다롭고 잗단 것을 생략하는 데 대한 것인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총명하심을 너무 드러내시어 살피기 좋아하시는 병통이 있으시고 기질(氣質)이 너무 날카로워 함용(含容)하시는 아름다움이 적습니다. 그리하여 사령(辭令)에는 혹시 간중(簡重)함이 부족하기도 하고 수작(酬酢)에는 지리(支離)한 데에 손상되기도 합니다."
하였으며, 그 넷째는 무너진 기강을 엄숙하게 하여 나약함을 진작(振作)시키는 것이며, 그 다섯째는 관방(官方)을 중히 여겨 반드시 신중을 기하여 가리는 것인데, 대략 말하기를,
"용사(用捨)가 전도(顚倒)되어 인재의 발탁에 절제가 없으며 전형(銓衡)은 중임(重任)인데도 마치 거쳐가는 전사(傳舍)121)  와 같이 여기며 번얼(藩臬)은 중요한 기탁(寄托)인데도 마치 주사위를 굴리듯이 선용(選用)하고 있습니다."
하였으며, 그 여섯째는 수령(守令)을 임명하고 자주 체직시키지 말라는 것인데, 대략 말하기를,
"순량(循良)122)  한 수령의 치효(治効)가 나타나기도 전에 자주 체직시키는 폐단이 먼저 일어나고 있으니, 그 원인은 어사(御史)를 자주 파견하는 데에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어사는 한때의 색책(塞責)을 위하여 출척(黜陟)을 혹독하게 가하는데도 전하께서는 몰래 다니면서 염탐하는 것을 기무(奇務)로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였으며, 그 일곱째는 부비(浮費)를 줄이어 국용(國用)을 돌보는 것이며, 그 여덟째는 사전(祀典)을 삼가고 향관(享官)을 가리는 것인데, 대략 말하기를,
"근대(近代)에 대해서는 근신(謹愼)을 하면서 원대(遠代)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점이 있습니다."
하였으며, 그 아홉째는 염치(廉恥)를 숭상하고 사경(邪逕)을 억제하는 것인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사로(仕路)에 오르는 자가 벼슬자리 하나가 나면 열 사람이 이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촌록(寸祿)에 붙여지기 위해 온갖 계교로서 뚫어 봅니다. 그러고도 오히려 훌륭한 거마(車馬)와 많은 추종(騶從)을 거느리고 가리(街里)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가 하면, 사마(駟馬)에 인수(印綬)를 늘어뜨리고 앉아서 주현(州縣) 사이를 내노라고 치달리고 있습니다."
하였으며, 그 열째는 문폐(文弊)를 제거하고 실화(實化)를 펴는 것이었는데, 임금이 성람(省覽)하지 않은 채 유중(留中)하라고 명하였다.

 

2월 4일 경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전적(典籍) 유정무(柳鼎茂)가 상소(上疏)하여 시무(時務) 여덟 가지에 대해 논하였다. 첫째는 조정(朝廷)을 화평하게 할 것, 둘째는 인재(人才)를 가릴 것, 셋째는 직임(職任)을 오래 맡길 것, 넷째는 병제(兵制)를 고칠 것, 다섯째는 사치(奢侈)를 금할 것, 여섯째는 체옥(滯獄)을 소결(疏決)시킬 것, 일곱째는 문체(文體)를 변경할 것, 여덟째는 심학(心學)을 힘쓸 것이었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조목별로 진달한 내용이 절실하니, 그대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그 내용 가운데 품처(稟處)하게 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조상명(趙尙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 가을 성균관(成均館)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낭속(郞屬)들을 보내어 전지(田地)를 조사하여 조세(租稅)를 거두어 들이게 했습니다만, 폐단을 끼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호서(湖西)에서는 양민(良民)이 대대로 경작해 온 전지를 혹은 기상(記上)123)  이라 핑계하기도 하고 혹은 절수(折受)라고 핑계하기도 하면서 강제로 절반을 나누게 하였으므로, 수백 명의 양민들이 생업(生業)을 잃고 울부짖으면서 번거롭게 격고(擊鼓)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담당 당상관(堂上官)은 마땅히 무겁게 추고(推考)하고 해당 낭관(郞官)은 마땅히 잡아다가 추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절반으로 나눈 전조(田租)는 마땅히 즉시 내주어야 합니다. 액례(掖隷)의 급료(給料)를 줄인 것에 대해 승정원(承政院)에서 직접 두량(斗量)을 검속한 것은 이미 사체에 있어 손상이 되는 처사인데 번거롭게 연석(筵席)에서 주달하기까지 하였으니, 더욱 잗단 짓입니다. 따라서 예추(例推)로 해서는 안되니, 승지 홍상빈(洪尙賓)은 마땅히 파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전일의 계사(啓辭) 가운데 이일제(李日躋)를 만윤(灣尹)124)  으로 이배(移拜)하는 명을 환수하는 일도 또한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예기》에 이르기를, ‘천자(天子)는 한 번 먹고는 배부르다 하고, 제후(諸侯)는 두 번, 대부(大夫)와 사(士)는 세 번 먹고서 배부르다고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은 수없이 먹는다.’고 했는데, 자신의 힘으로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란 농(農)·공(工)·상고(商賈)가 그것이다. 이런 것을 살펴보면 특별히 느낌이 있게 된다. 따라서 나의 경우는 점심(點心)을 먹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농·공·상고의 부류들은 먹는 데 수가 없이 하여야 하는데도 근년 이래로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백성의 부모가 된 처지에 있는 심사로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윤득화(尹得和)가 말하기를,
"신의 고조(高祖)인 해숭위(海崇尉)는 일찍이 선조조(宣祖朝) 때 직접 선조께서 태환(太丸)을 진어(進御)하시면서 하교하기를, ‘이것이면 넉넉히 요기(療飢)할 수가 있다.’고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점심을 그만두라고 명하였으니, 선왕(先王)의 검소한 덕을 본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서명빈(徐命彬)이 면직되었다. 처음에 이수해(李壽海)가 서명균(徐命均)을 탄핵할 적에 번곤(藩閫)이 순색(純色)이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서명빈이 버티면서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야 체면(遞免)되었다.

 

유척기(兪拓基)를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유엄(柳儼)과 박사정(朴師正)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유엄은 무신년125)   이후 탕평론(蕩平論)에 빌붙었는데, 인품이 영리하고 아첨하여 임금의 뜻을 잘 살펴서 알았기 때문에 임금이 자못 그를 총애하였다.

 

2월 5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광보(李匡輔)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때 임금이 사치스러운 풍속을 개혁시키려고 힘썼기 때문에 신료(臣僚)들을 접견할 적에 때묻어 더러워진 의대(衣襨)와 해진 흑화(黑靴)를 신은 경우가 많았으며, 여러 신하들이 곡배(曲拜)126)  하는 곳의 돗자리가 떨어졌어도 바꾸지 않았었다. 이때문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봉영(逢迎)에 약삭빠른 사람은 속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목면(木綿)으로 된 단령(團領)을 입었으므로, 이서(吏胥)들과 구별이 없었다. 시독관(侍讀官) 윤득화(尹得和)가 글의 뜻을 인하여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속으로는 사치하면서 겉으로는 검소를 표방하는 까닭에 장복(章服)의 구별이 없어져 귀천(貴賤)을 표시하는 의의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임금이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에게 이르기를,
"상방(尙方)의 직조기(織造機)를 지난번 이미 철거하여 버렸다. 그러나 면복(冕服)을 짜는 기계는 따로 설치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대답하기를,
"과연 난처한 단서가 있기 때문에 창고 속에 봉치(封置)하였습니다. 봉해 놓고 열지 않는다면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당 현종(唐玄宗)이 처음에는 직금방(織錦坊)을 폐지하였으나 끝내 사치 때문에 나라를 잃게 되었다.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것이 소중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사치를 금하는 조항을 비국(備局)에서 경조(京兆)에 분부(分付)하여 언문(諺文)으로 번역하게 해서 방방곡곡(坊坊曲曲)에 효유(曉喩)하게 하라."
하고, 곧이어 또 하교하기를,
"다만 금하는 조항만을 반포하면 겉치레에 가깝게 되니, 비국으로 하여금 특별히 문자(文字)를 만들어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하게 하라."
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이 파직되었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 호남(湖南)의 연해변에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써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특별히 순행(巡行)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현명이 전세(田稅)와 군미(軍米)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로써 정퇴(停退)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재이(災異)를 만나 전세(田稅)를 견감시켜 주는 것은 임금으로서는 의례적인 것인데, 더구나 정퇴(停退)하는 것이겠습니까? 마땅히 허락해야 됩니다."
하고, 도승지(都承旨)        이유(李瑜)는 말하기를,
"남쪽 백성들은 속이는 사례가 많습니다. 흉년이 들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니, 윤허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는 이것이 정공(正供)에 관계된 것이므로 번신(藩臣)으로서는 사체(事體)에 있어 의당 감히 정퇴시킬 것을 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윤유(尹游)는 평소에 박문수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이에 말하기를,
"박문수는 조현명과 서로 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그의 청을 허락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도(道)는 이미 허락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유독 호남(湖南)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특별히 순시(巡視)하게 하여 백성의 고통을 조사하여 아뢰게 했으니, 그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번신(藩臣)으로서 정공(正供)을 정퇴(停退)할 것을 청하였고 또 먼저 민간에게 이를 허락하였으니, 사체에 크게 손상되는 처사였다."
하고, 이어 재이(災異)를 당한 것이 우심(尤甚)한 고을의 전세(田稅)와 군보미(軍保米) 가운데에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특별히 탕감(蕩減)시키게 하고 조현명은 파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관서(關西)·관북(關北) 두 도(道)의 중군(中軍)은 일찍이 곤수(閫帥)127)  를 지낸 사람 가운데서 가려서 차임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면대해서 교귀(交龜)128)  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 윤유(尹游)의 청을 따른 것이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무신년129)  에 절개를 기키다가 죽은 사람인 진천(鎭川)의 파총(把摠) 김천장(金天章), 청안(淸安)의 별장(別將) 장담(張譚)에게 모두 거창(居昌)의 이술원(李述原)의 예(例)에 따라 그 자손을 녹용(錄用)에게 하라고 명하였다. 박문수(朴文秀)의 청을 따른 것이다.

 

2월 7일 계축

이제(李濟)와 서명빈(徐命彬)을 승지로 삼았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을 파직시키하는 명을 정지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삼남(三南)의 재읍(災邑) 가운데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았으므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모두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지내 주게 하였다.

 

2월 8일 갑인

임금이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130)                  의 묘사(廟祠)에 거둥하여 전배(展拜)하였는데, 그 《의주(儀註)》는 다음과 같았다. 악차(幄次)를 묘문(廟門) 밖에 설치하고, 전배하는 위차(位次)는 묘사의 전각(前閣) 중앙에서 북쪽을 향하게 한다. 임금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출궁(出宮)할 때와 환궁(還宮)할 때는 백관(百官)이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지영(祇迎)131)                  ·지송(祗送)132)                  한다. 전후(前後)의 고취(鼓吹)는 출궁(出宮)할 때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않으며, 환궁할 때에는 연주한다. 어가(御駕)가 동구(洞口)에 이르러서는 연(輦)에서 내려 소여(小輿)를 타고          【길이 좁기 때문이다.】         악차(幄次)로 들어가고, 조금 있다가 판위(板位)로 나아가서는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의식(儀式)에 따라 봉심(奉審)한다. 종신(宗臣) 2원(員)이 을해년133)                  의 전례에 의거하여 따라 들어간다. 그런 다음 즉시 묘사의 문을 닫고는【                                        창빈(昌嬪)134)            의 신주(神主)가 있기 때문이었다.】                승지(承旨)·사관(史官)과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묘정(廟庭)에 엎드린다. 출궁할 때와 환궁할 때에는 주인(主人) 이하가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문 밖에 나아와서 지영·지송하며, 전배(展拜)할 때에도 입시(入侍)한다. 임금이 전배를 마치고 도로 악차(幄次)로 들어가서 하교하기를,
"전배(展拜)만 행하고 술 한 잔을 올리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매우 서운하다."
하고, 이어 해조(該曹)에 명하니 택일(擇日)해서 함평군(咸平君) 홍(泓)을 보내어 대원군(大院君)과 창빈(昌嬪)에게 제사지내게 하고, 제문(祭文)의 두사(頭辭)을 을해년의 전례에 따라 ‘국왕(國王)은 삼가 신하를 보낸다’는 사연으로 하게 하였다.

 

돈녕 도정(敦寧都正) 이형종(李亨宗)과 함평군(咸平君) 홍(泓), 양평군(陽平君) 장(檣)에게 각기 한 계급씩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이형종은 대원군의 봉사손(奉祀孫)이고 홍 등은 전배(展拜)할 때 입참(入參)했던 종신(宗臣)인데, 을해년의 전례를 적용한 것이다. 이형종의 서제(庶弟) 1인에게도 상당한 직책을 제수하라고 명했는데, 이것도 또한 을해년에 주인(主人)의 자질(子姪) 가운데 1인에게 직책을 제수하게 한 전례를 적용한 것이다.

 

송진명(宋眞明)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2월 9일 을묘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친정(親政)135)  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 병조 판서 윤유(尹游)에게 이르기를,
"경(卿) 등은 모름지기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가릴 것이요, 사람을 위해 관직을 가리지 말라."
하였다.

 

구성익(具聖益)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이의익(李義翼)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김성응(金聖應)을 훈련원 정(訓鍊院正)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김성응은 임금의 척리(戚里)136)  이다. 비록 통상으로 조용(調用)하는 무변(武弁)과는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발탁하는 것이 순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신(出身)한 지 겨우 두어 달이 되었는데 전조(銓曹)에서 갑자기 이 관직에 제수하였고, 다음날 또 전주(全州)의 영장(營將)으로 승진시킴으로써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였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비루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136] 척리(戚里) : 외척(外戚).
사신은 말한다. 김성응은 임금의 척리(戚里)136)  이다. 비록 통상으로 조용(調用)하는 무변(武弁)과는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발탁하는 것이 순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신(出身)한 지 겨우 두어 달이 되었는데 전조(銓曹)에서 갑자기 이 관직에 제수하였고, 다음날 또 전주(全州)의 영장(營將)으로 승진시킴으로써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였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비루하게 여겼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또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의 선부(先父)137)  가 옛날 영고조(寧考朝)138)  때 여러 번 정승의 직임에 제수되었었는데,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평판이 있으면 반드시 극력 사퇴하였고 선왕(先王)께서도 어여삐 여겨 허락을 내렸습니다.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지마는, 거취(去就)의 절차에 대해서는 감히 선부(先父)의 전통을 실추시켜 지하에 계신 선부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0일 병진

별이 관색성(貫索星)의 아래로 지나갔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정우량(鄭羽良)이 어버이의 나이가 70세라는 이유로써 소장을 올려 사면(辭免)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서 친정(親政)을 행하였는데, 어제의 의식(儀式)과 같게 하였다.

 

김상익(金尙翼)을 교리(校理)로, 박필균(朴弼均)을 수찬(修撰)으로, 김약로(金若魯)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봉교(奉敎)로, 정이검(鄭履儉)을 대교(待敎)로, 유복명(柳復明)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광제(李光躋)를 주서(注書)로, 이훈좌(李勳佐)를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유복명은 일찍이 관동(關東)139)   감사(監司)로 있을 적에 서울에다 큰 집을 짓는 공사를 일으켰다가 대각(臺閣)의 논핵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또 웅번(雄藩)에 제수되었으며, 이광제는 혼암 용렬하고 학문이 없는 사람인데도 외람되이 천선(薦選)을 받았으며, 선공감 부정은 본디 음선(蔭選)인 것이긴 하지만 광포하고 탐욕스러운 이 훈좌를 의차(擬差)하였으니, 공의(公議)가 이를 그르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139] 관동(關東) : 강원도.
사신은 말한다. "유복명은 일찍이 관동(關東)139)   감사(監司)로 있을 적에 서울에다 큰 집을 짓는 공사를 일으켰다가 대각(臺閣)의 논핵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또 웅번(雄藩)에 제수되었으며, 이광제는 혼암 용렬하고 학문이 없는 사람인데도 외람되이 천선(薦選)을 받았으며, 선공감 부정은 본디 음선(蔭選)인 것이긴 하지만 광포하고 탐욕스러운 이 훈좌를 의차(擬差)하였으니, 공의(公議)가 이를 그르게 여겼다."

 

특지(特旨)로 박내정(朴乃貞)을 발탁하여 지중추(知中樞)로 삼았다. 이때 박내정이 병조 참판으로서 정사(政事)하는 자리에 입시(入侍)해 있었는데, 임금이 그에게 등과(登科)한 해를 하문하자 박내정이 갑술년140) 중곤(中壼)141)  이 복위(復位)되었을 때의 경과(慶科)에 합격하였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드디어 발탁하여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정경(正卿)의 품질(品秩)은 연로(年老)했다는 것을 이유로 외람되이 임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갑술년의 경과(慶科)는 또 박내정 한 사람 뿐만이 아닌데 이제 이에 명분 없는 자급(資級)을 더하였으니, 옛날 군주가 한번 웃고 한번 찡그리는 것도 아낀다는 의리에 흠됨이 많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9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140] 갑술년 : 1694 숙종 20년.[註 141] 중곤(中壼) : 중전(中殿).
사신은 말한다. "정경(正卿)의 품질(品秩)은 연로(年老)했다는 것을 이유로 외람되이 임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갑술년의 경과(慶科)는 또 박내정 한 사람 뿐만이 아닌데 이제 이에 명분 없는 자급(資級)을 더하였으니, 옛날 군주가 한번 웃고 한번 찡그리는 것도 아낀다는 의리에 흠됨이 많다."

 

형조 참판 박문수(朴文秀)가 이기진(李箕鎭)이 문원(文苑)142)  을 사퇴한 것과 이수해(李壽海)가 훈재(勳宰)라고 인용한 것 때문에 상소(上疏)하여 변해(辨解)하기를,
"신이 지난번 문원(文苑)의 선발에 대해 언급하면서 오광운(吳光運)의 이름을 우연히 거론하여 윤순(尹淳) 등과 비교하여 가면서 논한 것은 실로 오광운을 원인(援引)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개한 것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놀라서 분개한 것은 실로 이수해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 너무도 심각합니다. 몰래 연주(筵奏)의 망발(妄發)을 기록해 두었다가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을 축출하는 도끼로 만들었으므로, 대신(大臣)이 이 일 때문에 도성(都城)을 나갔으니, 신은 실로 통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11일 정사

좌포도청(左捕盜廳)의 군관(軍官)의 어떤 남자 하나가 이불과 바지를 훔쳐서 파는 것을 보고 체포하여 신문하니, 곧 금위영(禁衛營)의 아기수(兒旗手) 김세진(金世進)이었다. 김세진이 스스로 말하기를,
"이달 5일에 친하게 지내는 박지번(朴枝蕃)의 집에 갔었는데 어떤 사람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만나보지 못하고 되돌아 나와 상방(尙方)의 직방(直房)에 갔다가 이 이불과 바지를 훔쳤습니다. 또다시 박지번의 집으로 가서 사랑채의 대청마루 밑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박지번이 김필웅(金弼雄) 등 5,6인과 방안에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하기를, ‘기유년143)  에 동구(洞口) 안에 사는 사람이 역적을 모의했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지금 임금께서 제릉(劑陵)·후릉(厚陵)의 거둥이 있을 경우 우리들이 10보(步) 안에서 변란을 일으킨다면, 천병 만마(千兵萬馬)가 있은들 어떻게 감히 우리를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또 지난날 그믐밤에 도둑질하기 위해 내관(內官) 김장번(金長番)의 집에 몰래 갔었는데 창문 안에서 어떤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으므로 몰래 엿들었더니, 그 가운데 박귀석(朴貴碩)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기유년의 옥사(獄事)에 박세만(朴世萬)이 자기의 당여(黨與)들을 고발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우리들이 그에 힘입어 살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박세만을 제사지내 주어야 한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마땅히 박세만을 위해서 원수를 갚아야 한다. 이번 능행(陵幸) 때 우리들이 부지군(負持軍)이 되어 있으니, 마땅히 주정소(晝停所)에서 변란을 일으켜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좌포장(左捕將) 장붕익(張鵬翼)이 그의 공초(供招)를 가지고 청대(請對)하여 아뢰니, 임금이 우포장(右捕將) 신광하(申光夏)와 함께 합좌(合坐)하여 다시 김세진을 신문하게 하였는데, 공초는 전과 같았다. 또 말하기를,
"내관(內官)의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곧 그의 비부(婢夫)인 박귀석(朴貴碩)과 이수대(李守大)·천성귀(千聖龜)인데, 그들의 목소리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밖에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들이 경술년144) 최필웅(崔必雄)의 여당(餘黨)인가 의심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중히 국문하게 하였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연시(延諡)145)  가 있을 때 음악을 내리고 선온(宣醞)146)  하게 하였다.

 

국청 대신(鞫廳大臣)이 승지에게 말하기를,
"국수(鞫囚)가 이미 능행(陵幸)이 있을 때 변란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고하였으니, 능행은 마땅히 정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제야 도승지(都承旨) 이유(李瑜) 등과 옥당(玉堂)의 김약로(金若魯)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유 등이 임금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에 핑계해서 말하기를,
"오늘 직접 신안(訊案)을 열람하시고 나서 내일 능(陵)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재계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경 등이 겁내어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있다. 내가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일찍이 어가(御駕)를 수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윤취상(尹就商)이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었고 김일경(金一鏡)이 수어사(守禦使)가 되었는데, 앞서 가던 부곡(部曲)147)  이 갑자기 뒤로 물러나 움츠리는 듯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측근 사람이 모두 얼굴빛이 변하였지마는, 나는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무뢰배들의 거짓말 때문에 과연 행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굳이 청하여 마지 않았으나, 임금은 끝내 윤허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이제 만약 능행을 정지했다가 사책(史冊)에다 ‘부지군(負持軍)들이 변란을 일으킨다는 말로 인하여 능행을 정지하였다.’라고 쓴다면, 후세에서 이를 보고 어떻다 하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장령(掌令) 이유(李濰)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늘날 백성을 보양(保養)하는 정치는 오직 전하(殿下)의 성불성(誠不誠)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전(廈氈)148)  의 편안함에 나아가실 적에는 궁벽한 마을의 바람이 치고 비가 새는 집의 고통을 생각하시고, 비단 무늬의 옷을 입으실 적에는 곤궁한 백성들이 누덕누덕 지은 옷을 입고 추위에 떠는 것을 생각하시고, 대포(大庖)의 찬선(饌膳)을 드실 적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쌀알이 드문 거친 나물죽을 먹고 사는 어려움을 생각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는 인심을 수습하는 데 있고 인심을 수습하는 근본은 빨리 덕(德) 있는 이를 공경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정사(政事)를 시행하는 즈음에 통달하고 광명하고 자상하고 온화하신 의사(意思)가 비교적 많은 데 반하여 침잠하고 신밀하고 엄중하고 진실한 기상(氣象)이 비교적 적은 편이므로, 교화(敎化)를 돈독히 하는 대덕(大德)에 조금이나마 흠궐(欠闕)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가져다가 잠심(潛心)하여 완미(玩味)함으로써 이를 체인(體認)하여 대본(大本)을 확립하고 달도(達道)를 행하는 추요(樞要)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원소(原疏)는 유중(留中)하게 하였다.

 

2월 13일 기미

임금이 의릉(懿陵)에 거둥하여 전배(展拜)하고 봉심(奉審)하였다. 곧 이어 정자각(丁字閣)으로 나아가 의식(儀式)대로 제사를 지내었다.

 

이날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길옆에서 지영(祇迎)하니, 임금이 말을 멈추고 도승지 이유(李瑜)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그로 하여금 따라서 능소(陵所)로 나아오게 하였다. 서명균이 직명(職名)을 벗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또 하유하기를,
"경(卿)이 수가(隨駕)하지 않으면 나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다."
하였다. 모두 아홉 번 왕복한 뒤에야 서명균이 비로소 명을 받들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거가(車駕)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 재실(齋室)에서 불러 보니, 서명균이 정승 직책을 극력 사퇴하였다. 임금이 누누이 위유(慰諭)하고 이어 거가(車駕)를 따라 도성(都城)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였으나, 서명균이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서명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내가 경의 승락을 얻은 뒤에야 손을 놓겠다."
하였는데, 이때 해가 이미 서쪽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서명균이 마지못해서 하교를 받들겠다고 답하자, 임금이 비로소 손을 놓았다.

 

2월 14일 경신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또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기를,
"신이 직접 성교(聖敎)를 받들었으므로 감히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그것은 다시 여지없이 국체(國體)를 손상시키고 사절(士節)을 저상시킨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정언섭(鄭彦燮)이 체포하여 보낸 죄인 남극(南極)을 금오(金吾)에서 추국(推鞫)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계축년149)  에 단양(丹陽) 땅에 사는 어떤 사람이 스스로 남정랑(南正郞)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남교리(南校理)라고 일컫기도 하였는가 하면, 자신의 이름을 변환(變幻)시켜 스스로 정명(挺明)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시채(時采)라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오택(五宅)이라고 일컫기도 했는데, 남자 종 하나와 여자 종 하나를 거느리고서 고을 사람 정연갑(鄭延甲)의 집에 이르러 본고을의 수령과 서로 친하다고 하면서 그의 아들의 군역(軍役)을 면제시켜 주겠다고 한 다음, 드디어 거짓말을 하고 그의 말을 탈취하여 갔었다. 군수(郡守) 허옥(許沃)이 그 사건을 듣고서 영장(營將) 정항빈(鄭恒賓)에게 보고하였는데, 정항빈이 체포하여 신문하여 보니 곧 괴산(槐山) 사람 남극(南極)이었다. 그는 곧 무신년150)  의 역적 이조겸(李祖謙)의 사위인데, 그가 거짓 관함(官銜)을 사칭(詐稱)하고 명자(名字)를 변환(變幻)한 것과 어보(御寶)와 관인(官印)을 위조하여 공명첩(空名帖)을 만들어 몰래 판 자취가 낭자하여 숨기기 어려웠으므로 이미 모두 승복(承服)하였다. 또 영남(嶺南) 사람과 모여서 역적 모의를 했다는 이야기를 써서 공사(供辭)로 바쳤다. 정항빈이 이 사실을 관찰사 정언섭에게 전보(轉報)하니, 정언섭이 잡아다가 철저히 신문하였다. 남극이 스스로 말하기를,
"경술년151)   10월에 남정명(南庭明)과 함께 청량산(淸涼山)에 갔었는데, 거기에 권각(權恪)·권치(權緻)·이증간(李增榦)·우치범(禹致範)·남운기(南雲紀)·남성운(南聖雲)·남여형(南汝亨)·장용채(張龍采)·유광우(柳光遇)·권침(權忱)·정윤석(鄭允碩) 형제와 민원귀(閔遠龜)·이태제(李泰齊)·배윤휴(裵胤休)·배윤영(裵胤榮) 형제, 신중태(申重泰)·남두광(南斗光)·남두추(南斗樞)·남두표(南斗彪)와 이름을 모르는 임 선달(任先達), 애꾸눈인 김성(金姓)을 가진 사람들이 와서 모였었으며, 모인 사람은 모두 7,80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청음 서원(淸陰書院)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라고 핑계했습니다만, 그 실상은 당여(黨與)를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좌중(坐中)의 권각이 창언(倡言)하기를, ‘영남(嶺南)에서 각립(角立)한다면 잘되면 육국(六國)152)  의 임금처럼 될 수 있고 잘못되더라도 위타(尉佗)153)  처럼 될 수는 있다.’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시(詩)를 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연구(聯句)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애꾸눈인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뒷날 을묘년154)  을 기다리자.’는 싯귀를 지었는데, 이는 그 모의(謀議)를 을묘년에 거사하기로 기약한 것입니다. 김성(金姓)을 가진 사람이 또 권각에게 증여(贈與)한 시(詩)에 ‘중간에 환난을 당한 일이 그대와 내가 똑같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권각의 오촌(五寸) 권세룡(權世龍)이 무신년에 역적으로 복주(伏誅)되었으며 김성을 가진 사람의 처부(妻父) 정가(鄭哥)도 국청(鞫廳)에서 죽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환난(患難)이 서로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권각의 족인(族人)이 남운기(南雲紀)에게 증여한 시(詩)에 ‘뒷날 이 산에 있었던 것을 매우 부끄러워할 것이다’하였는데, 그 아랫 글귀에 ‘반세 동안 경영한 남방의 일에 대해 그 성패를 의당 첩사의 한가를 찾아 물어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황도중(黃道重)이 말하기를, ‘성주(星州)의 첩사동(牒寺洞)에 유명한 점장이 한성천(韓聖天)이 있는데 민원귀(閔元龜)의 무리가 모사(謀事)의 성패에 대해 물어보려 했기 때문에 시귀의 내용이 이러했다.’ 했습니다. 그 다음날 좌중(座中)의 사람들이 모두 책자(冊子)에 이름을 썼으며, 그날 저물녘에 남성운·남운기·권각 등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화를 당한 둥지에 남아 있는 새알과 같은 처지이지만, 임 선달(任先達)은 선척(船隻)을 가지고 있는데 하동(河東)에 있는 전화(錢貨)가 장차 1만여 전(錢)에 이르게 되고, 권각은 또 집이 부유(富裕)하니, 충분히 각립(角立)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2일을 머문 뒤 또 권각(權恪)·유광우(柳光遇)·배윤휴(裵胤休)·이증간(李增榦)·황도중(黃道重)·장용채(張龍采)·민원귀(閔元龜)·남운기(南雲紀) 등이 도로 남성운의 집으로 왔는데, 권각이 말하기를, ‘수상선(水上船)이 온다면 계책을 성취시킬 수 있다.’ 하였습니다. 수상선이란 순흥(順興)의 역적이 정가(鄭哥)의 삼촌(三寸) 정몽석(鄭夢錫)이 울산(蔚山)에 살았는데 큰 배를 가지고 있었고, 그 배위에 집을 지어놓고 항상 그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배가 지금 하동(河東)의 사리포(沙里浦)에 있었고 그곳에는 임 선달의 배가 정박하는 곳이었으며, 정몽석은 흉모(凶謀)를 꾸민 영수(領首)이기 때문에 한 말인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정언섭이 이런 사실을 장문(狀聞)하고 남극(南極)과 그의 남종 막남(莫男), 여종 예영(禮英)을 압송(押送)하였다. 드디어 왕부(王府)155)  에 국청(鞫廳)을 설치하라고 명하고 노비(奴婢)는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엄중히 수금(囚禁)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민원(閔瑗)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교자(轎子)를 타는 데 대한 법금은 비록 시종(侍從)일지라도 감히 그 법을 범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궁마(弓馬)로 발신(發身)한 사람이겠습니까? 정주 목사(定州牧使) 유순장(柳純章)은 부임할 적에 방자하게 교자를 탔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잡아다가 조처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과(武科) 시험에서 차사(借射)하거나 대사(代射)한 사람은 모두 전가 사변(全家徙邊)156)  시킨다는 분명한 수교(受敎)가 있으니, 이번에 대사한 부류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추조(秋曹)에 신칙하여 법에 따라 감처(勘處)해야 됩니다. 이번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압송(押送)한 죄인의 변서(變書)는 흉악하고 참혹하였으며, 또 어보(御寶)까지 위조하였으니, 모두 극죄(極罪)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도 동의금(同義禁) 이보혁(李普赫)은 그 노비(奴婢)를 경주인(京主人)에게 송부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큰 실언(失言)을 했습니다. 마땅히 무겁게 추고(推考)해야 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조상명(趙尙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본부(本府)의 계사(啓辭) 가운데 경상 병사(慶尙兵使) 신덕하(申德夏)에 대한 것은 그가 남양(南陽)에서 체직(遞職)되어 돌아올 적에 군마(軍馬)를 조발(調發)하여 그의 장오(贓汚) 물품들을 실어날랐으니, 그 죄는 파직을 청하는 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잡아다 추문하여 정죄(定罪)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15일 신유

임수적(任守迪)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명택(趙明澤)을 교리(校理)로, 남태량(南泰良)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민원(閔瑗)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서(曆書)를 반포하여 농시(農時)를 알려 주는 것은 왕정(王政)에 있어 중대한 것인데, 금년의 입춘(立春)의 일시(日時)는 중국의 시헌력(時憲曆)과 혹은 앞서기도 하고 혹은 뒤지기도 하는가 하면, 기타 절후(節候)의 진퇴(進退)와 월삭(月朔)의 대소(大小)도 또한 서로 어긋나는 것이 많습니다. 현발(現發)된 본감(本監)의 관원을 추조(秋曹)로 이송시키면 속전(贖錢)을 징수하고는 곧 석방시키기 때문에 잘못된 근본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되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청컨대, 관상감 정(觀象監正) 김진위(金振渭)를 잡아다가 조사하여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막 이미 과죄(科罪)하여 다스렸다. 벌을 어떻게 중첩되게 시행할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6일 임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포도청(捕盜廳)의 죄인 윤정현(尹廷顯)을 강원 감영(江原監營)으로 압송시켜 남격(南格)과 함께 철저히 조사하여 장문(狀聞)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어떤 사람이 의금부(義禁府)에 나아와 비밀의 일을 고발할 것을 청하였으나 나졸(羅卒)이 이를 물리쳤었다. 그뒤 연신(筵臣)이 그 일을 아뢰니, 포도청에 명하여 기포(譏捕)하게 했는데, 이때에 와서 체포하였으니, 그가 바로 윤정현이었으며, 춘천(春川) 사람이었다. 윤정현이 말하기를,
"무신년157)  의 역적 박필현(朴弼顯)의 육촌(六寸)인 박필장(朴弼長)이 춘천(春川)에 살고 있었는데, 박필현이 춘천의 수재(守宰)로 나갈 때에 여정(旅程)을 둘러서 박필장의 집으로 가서 3일을 머물다가 갔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변란이 일어났으니, 박필장이 동모(同謀)한 것이 매우 명백합니다. 그리고 박필장이 남격(南格)·남태적(南泰績)과 의리로써 맺어 형제(兄弟)가 되었으니, 그 정적(情跡)이 수상합니다. 의금부에 나아가 고발하려고 했던 것은 이를 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신년의 변란(邊亂) 때 중군(中軍) 홍하성(洪夏成)이 본부(本府)에 유진(留陣)하고 있었는데, 여주(驪州) 사람 양응표(梁應標)란 자가 역적들의 도목(都目)을 가지고 춘천(春川)에 왕래하다가 고을의 장교(將校)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에 홍하성이 그 도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격(南格)은 생각하기를 ‘많은 사람이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라’고 여겨 빼앗아 불에 태워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했었으며, 홍하성은 이 일로 인하여 걱정 끝에 병이 되어 죽었습니다. 이것으로 살펴본다면 남격 등의 역모(逆謀)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포도청에서 이런 내용을 아뢰었으므로 드디어 이번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또 의리로써 맺어 형제가 되어 악역(惡逆)을 공모(共謀)한 일로써 남태적을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남태적은 무신년의 국수(鞫囚)로 바야흐로 금오(金吾)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태적이 공초(供招)하기를,
"남격이 박필장과 함께 춘천에 있었기 때문에 신이 그들과 정의가 깊었었습니다. 신의 어미의 상사(喪事) 때 남격이 호상(護喪)이 되어 돌보아 주었으니 정의가 형제와 같았다는 것은 될 수가 있지마는, 어찌 의리로써 맺어 형제가 된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박필현과는 처음부터 얼굴을 모르는 사이이니, 박필장의 집에 와서 유숙한 것의 여부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국청(鞫廳)에서 다시 추국할 것을 청하였으나 우선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이는 바야흐로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장문(狀聞)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김세진(金世進)·박귀석(朴貴碩) 등을 추국하였다.

 

2월 18일 갑자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김약로(金若魯)가 능(陵)에 거둥하던 날 대관(臺官) 가운데 편복(便服)으로 지영(祇迎)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니, 임금이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서 체차(遞差)시키라고 명하였다. 대관(臺官) 가운데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실제로는 없었는데 김약로가 망령되이 말하기 때문에 스스로 현고(現告)하는 대관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이 명이 정지되었다. 그뒤 사간(司諫) 민정(閔珽)이 김약로에게 견책을 가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사복(嗣服)158)  한 처음에 이광좌(李光佐)가 스스로 장씨(張氏)159)  를 추존(追尊)한 죄를 숨기고 또 임금의 뜻에 아첨하기 위해 임금의 사친(私親)을 추존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친(私親)의 부모(父母)에 대해서도 벼슬을 추증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의 문집(文集)을 열람하다가 비로소 창빈(昌嬪)·인빈(仁嬪)의 아버지에게 모두 의정(議政)을 추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옥(徐宗玉)을 불러 하교하기를,
"나는 선왕(先王)의 측실(側室)의 아들로서 외람되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데, 외가(外家)가 한미하여 친속(親屬) 가운데 태복시(太僕寺)에서 복역(服役)하다가 그 일신을 마친 사람이 있으니, 내가 외가(外家)를 대우한 것이 너무 야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친(私親)에 대한 겸공(謙恭)하는 뜻을 본받으려고 한 때문이다. 그리고 사친의 아버지를 증직(贈職)시키는 일은 이미 선조(先朝)의 구례(舊例)가 있으니, 마땅히 따라서 행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인빈(仁嬪)의 아버지 김한우(金漢祐)의 예(例)에 의거하여 영의정에 추증하게 하고 나서 이어 조보(朝報)에는 내지 말게 하였으니, 이는 더 크게 떠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날 임금이 서종옥을 면대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말을 마치고 나서 또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조금 전에는 마음이 편치 못하여 즉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엊그제 능상(陵上)에서 함원(咸原)160)  을 대하였을 적에도 슬퍼서 말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나도 또한 그러는 것이 지나친 것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대개 임금이 자인(慈仁)은 여유가 있으나 강단(剛斷)은 아주 부족했기 때문에 말이 선고(先故)에 미치게 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고, 말이 시사(時事)에 미치게 되어도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 대신(大臣)에게 출사(出仕)할 것을 면려할 때에도 눈물을 흘렸다. 이날의 전교(傳敎)에 처음에는 ‘외친(外親)’이라고 썼었는데, 유신(儒臣)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마땅히 ‘사친부(私親父)’라고 일컬을 것이요, ‘외친(外親)’이라고 일컫는 것을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사친(私親) 고비(考妣)’라 고쳐 쓰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전교가 내리자 연신(筵臣)들이 아무도 감히 복주(覆奏)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김약로가 능히 말하였으니, 직책을 잘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2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인사-관리(管理)


[註 158] 사복(嗣服) : 선대(先代)의 사업을 이어받음.[註 159] 장씨(張氏) : 장희빈(張禧嬪).[註 160] 함원(咸原) : 함원 부원군 어유귀(魚有龜).
사신은 말한다. "전교가 내리자 연신(筵臣)들이 아무도 감히 복주(覆奏)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김약로가 능히 말하였으니, 직책을 잘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2월 19일 을축

수찬(修撰) 남태량(南泰良)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옛날의 학자(學者)들은 자신을 위해서 노력했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이 알아 주는 것을 위해서 노력한다.’고 했는데, 이 두 가지의 사이에 그 단서는 한 마음의 공(公)·사(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전후의 비망기(備忘記)를 읽어 보건대, 모두 경전(經傳)의 뜻을 인용한 것으로 백성을 걱정하고 세상을 개탄하면서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뜻이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의리(義理)가 너무 많고 두서(頭緖)가 너무 번거로워, 총명은 세밀히 살피는 데에서 지나치게 되고 위엄은 말이 많은 데에서 지저분하게 되었으며, 정치의 득실(得失)에 대해서는 논할 것 없고 문자(文字) 사이에서만 맴돌고 있으니, 또한 성학(聖學)이 그다지 득력(得力)하지 못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칙려(飭勵)하여 시행하려는 자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만, 진실로 영구 원대한 기반을 쌓은 것은 항상 흠궐(欠闕)이 있는 듯합니다. 심지어 도리(道理)에 대해 강경하게 말하고 신린(臣隣)을 의심하여 조정의 일이 일체 무력하고 흐지부지하여 제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전하께서는 혹 남에게 보이기 위한 마음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언어(言語)와 문자(文字)로 궁극(窮極)의 사업을 삼으면서 마음과 뜻을 겸허하고 공손하게 하는 바를 강구하여 실제적인 병통을 제거하고 실제적인 공부로 나아가는 데 이르러서는 일찍이 하루도 힘을 쓰지 않으신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다면 아무리 부지런히 학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겉치레일 뿐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신을 위하는 것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의 구분을 잘 살피시어 종전의 잘못을 깊이 경계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사심을 힘써 제거하심으로써 내외(內外)와 본말(本末)이 순수해져서 한가지도 지성(至誠)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게 한다면, 성학(聖學)의 공효를 그제사 천하 후세에 알릴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정언(正言) 이현망(李顯望)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판윤(判尹) 윤양래(尹陽來)를 지난번 관서백(關西伯)161)  에 임명했었습니다만, 논박을 받아 개체(改遞)되었으니, 공의(公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탄핵한 글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갑자기 정경(正卿)으로 승진시킴으로써 마치 말을 한 대관(臺官)과 승부를 겨루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사(知事) 박내정(朴乃貞)의 특자(特資)에 이르러서는 만일 강녕(康寧)한 것을 귀히 여겨서라면 노건(老健)한 신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또 방년(榜年) 때문에 느낌이 있어서라면 동방(同榜)인 사람이 한둘 뿐만이 아니니, 어떻게 사람마다 은전(恩典)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새 자급(資級)은 마땅히 모두 환수(還收)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장령(掌令) 민원(閔瑗)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죄인 남태적(南泰績)이 역적을 모의한 정절(情節)이 무신년162)   역적들의 공초(供招)에서 다 드러났는데도 경솔하게 앞질러 참작하여 조처하였었습니다. 그리하여 대계(臺啓)가 발론된 지가 이미 7년이 지났는데도 한결같이 윤허를 아끼고 계십니다. 지금 포도청(捕盜廳) 죄인의 공초에도 또한 ‘남격(南格)·박필장(朴弼長)·남태적(南泰績)이 의리로써 맺어 형제가 되었다.’고 했고, 엊그제 그가 바친 공사(供辭)에서도 곧 승복했는데도 버려두라는 명이 뜻밖에 갑자기 내렸습니다. 그리고 남격에 대해 본도(本道)로 하여금 사핵(査覈)하게 한 것은 옥체(獄體)에 아주 어긋난 처사였습니다. 그리고 박필장(朴弼長)에 대해서도 철저히 신문하라는 명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남태적은 엄중히 신문하고 박필장은 잡아다가 국문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좌승지 조명신(趙命臣)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천하의 형세는 강한 경우도 있고 약한 경우도 있는 것인데, 강한 것이 너무 심하게 되면 부러지고 약한 것이 너무 심하게 되면 굽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정하여 부러지거나 굽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하는 방법은 위세(威勢)와 은혜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인자(仁慈)는 여유가 있으시지만 과감한 강단은 부족한 탓으로 은혜에 익숙하여 상(賞)이 혹 공이 없는 사람에게 가해지기도 하고 위세에 굽어 죄있는 사람에 대해 벌을 아끼기도 합니다. 따라서 관사(官事)를 낭패시킨 벌이 제대로 신명되지 않고 징토(懲討)하는 형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국옥(鞫獄)이 잇따라 일어나도 인심이 편안한 데에 익숙해져서 전혀 엄중하게 여기는 체통이 없습니다. 군신(君臣)의 사이에 이르러서도 안면(顔面)과 정의(情誼)가 익숙할수록 용서가 더욱 지극한 탓으로 연석(筵席)에서는 엄숙하고 화목한 위의(威儀)가 모자라고 주대(奏對)에서는 버릇없는 습관이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약한 데에 잘못된 것입니다. 바라거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강단과 과감을 위주로 하시어 정치는 반드시 시행되게 하고 형벌은 반드시 실시되게 한다면, 거의 국체(國體)가 존엄해지고 기강(紀綱)이 엄숙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2월 20일 병인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먼저 계축년163)   겨울 조정에서 청(淸)나라에 우리 나라 사람이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쪽에서 먼저 발론하기 위하여 이에 강계(江界)에 사는 김세정(金世丁) 등이 금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일을 가지고 중국 가는 사신(使臣)에게 부주(附奏)하게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성경(盛京)164)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도착되었으므로 비로소 저쪽에 체포되어 있는 사람이 김세정이 아니고 곧 표해상(票海常)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표해상은 곧 우리 나라의 음(音)으로 박해창(朴海昌)이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정(黃晸)이 안문(按問)하여 보니, 박해창은 실제 강계(江界)사람 서귀강(徐貴江)이었는데 성명을 바꾸어 심양(瀋陽)에 고한 것이었다. 황정이 이런 사실을 장문(狀聞)하였는데,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사신(使臣)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조처할 것을 청하였다.

 

민정(閔珽)을 사간(司諫)으로, 심성희(沈聖希)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동필(金東弼)이 문수산성(文殊山城)이 강도(江都)를 굽어보고 있는데, 수비(守備)가 단약(單弱)하여 적에게 검거당하기 쉽다는 것을 이유로 통진(通津)의 부치(府治)를 문수(文殊)로 옮겨 단독의 진(鎭)으로 만든 다음 덕포진(德浦鎭)을 거기에 예속시키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양천(陽川)·김포(金浦)를 합쳐 양천의 현치(縣治)에다 하나의 웅부(雄府)를 설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사간원에서 【헌납(獻納) 조한위(趙漢緯)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춘추(春秋)》에 성랑(城郞)165)  이라고 쓴 것은 제때에 축성(築城)하지 않은 것을 비난한 것입니다. 수년 동안 기황(飢荒)을 겪은 뒤로 재정(財政)이 고갈되고 민생(民生)이 곤궁한데, 호남(湖南)이 제일 극심합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우선 성(城)을 축조하는 역사(役事)를 정지하게 하여 농시(農時)를 빼앗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도신(道臣)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주 목사(定州牧使) 김성응(金聖應)은 비록 지벌(地閥)과 재망(才望)이 있지마는, 등제(登第)한 지 반년도 못되었는데 한번의 정사(政事)에 세번이나 등급을 뛰어 승진하였으니, 자못 옛사람이 재능을 단련시키게 한 뜻에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김성응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정언섭(鄭彦燮)이 장계(狀啓)를 올려 도내(道內)에 있는 죄인들 가운데 석방해야 될 사람과 그대로 두어야 할 사람을 논하면서 윤연(尹㝚)·박치원(朴致遠)을 품청하는 서열에 올렸다. 윤연은 좌죄(坐罪)된 것이 매우 중하여 양이(量移)166)  한 것도 이미 실형(失刑)이었다. 그런데 윤연은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의 처조카[妻姪]이기 때문에 민진원의 여러 아들들이 정언섭에게 촉탁하여 품청하는 서열에 넣게 한 것이었다. 판의금(判義禁) 신사철(申思喆)이 복주(覆奏)하기를,
"윤연은 그대로 두고 박치원은 석방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질책하여 하교하기를,
"법을 집행하는 관원은 모든 언의(讞議)에 있어 마땅히 율명(律名)의 경중을 가지고 따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년(徒年)167)  에 처해진 윤연은 그대로 두라고 하고 연수(年數)를 한정하지 말게 한 박치원은 석방하라고 청하니, 이것이 어찌 칙려(飭勵)하는 뜻이겠는가? 윤연은 석방하고 박치원은 그대로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과 수찬(修撰) 김약로(金若魯)가 모두 윤연은 석방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고사(故事)에 태묘(太廟)에 수개(修改)하거나 이안(移安)하는 일이 있으면 임금이 정전(正殿)에 거처하지 않았었는데, 이날 태묘(太廟)에 수개하는 일이 있었는데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홍현보(洪鉉輔)가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후사(喉司)168)  에서 전례를 인용하여 진품(陳稟)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경책(警責)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이를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종묘(宗廟)에 수개(修改)나 이안(移安)이 있는 날에는 정전(正殿)에 앉지 말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임수적(任守迪)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총예(聰睿)하고 인애(仁愛)한 것이 진실로 전하의 성덕(盛德)이긴 합니다. 그러나 다만 총찰(聰察)을 현명함으로 삼아 정신(精神)을 지나치게 쓰셨으며 돌보아 감싸주는 것을 은혜로 삼아 군주의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것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잗단 일을 가혹하게 적발함으로써 대체(大體)를 혹은 변모(弁髦)로 돌리는가 하면, 사사로운 마음에 이끌림으로써 은전(恩典)이 설만(屑慢)함을 면하지 못하였고 정령(政令)과 거조(擧措)가 정대(正大)하고 공평(公平)한 데에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너진 기강(紀綱)을 정비하여 쇄신시키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의 긴요한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정비하여 쇄신시키는 방법은 근본은 버리고 말단만을 일삼고 있으며, 명분만 따르고 실상을 없는 탓으로 교령(敎令)이 믿음을 받지 못하고 동작(動作)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양역(良役)의 변통에 대한 일을 재상(宰相)들이 나누어 구관(句管)하게 하여 명호(名號)를 떠벌렸으나, 무관심(無關心)한 것은 그전과 같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여러 궁방(宮房)의 절수(折受)를 이미 감하였고 상방(尙方)의 직조(織造)도 폐지했습니다만,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때로 솜옷을 입으신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제왕(帝王)의 성대한 일에 속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궁중(宮中)에서 상투를 높게 만들면 사방에서는 한층 더 높여 한 자나 되도록 높게 만들기 마련이므로, 예로부터 사치스런 풍속이 궁금(宮禁)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혹 전하께서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누인 검은 비단을 입었던 교화가 없이 그저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거친 옷을 입은 것과 위(衛)나라 문공(文公)이 거칠은 베옷을 입은 것만을 본받으려 한다면, 혹시 이름만 내세우는 데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작년 전교(箭郊)에서 열무(閱武)할 때 훈국(訓局)의 대포와 화살이 승여(乘輿)의 가까운 앞에서 갑자기 발포되었으며, 금려(禁旅)가 군령(軍令)의 지휘를 기다리지도 않고 경솔히 발동했었으니, 그때의 훈장(訓將)169)  과 금군(禁軍)의 별장(別將)은 마땅히 파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을 파직시키고 나서 곧이어 그대로 유임시킨 것은 다만 조정의 체통이 구간(苟簡)스러울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염우(廉隅)에 있어서도 태연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잉임(仍任)시키라는 명을 정지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훈장(訓將)과 호남백(湖南伯)의 일은 따르지 않았다. 이때 임금이 밖으로 검약(儉約)함을 보이고 있었으나 궁중(宮中) 사람들의 사치스런 습관은 그전과 같았다. 그리하여 대내(大內)로 들어가는 물품이 전보다 감손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임수적(任守迪)의 상소에서 언급한 것이다.

 

2월 21일 정묘

안상휘(安相徽)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제(李濟)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조정을 살펴보건대, 엄숙하지 못한 기풍이 쌓여 습관을 이루고 도목정(都目政)을 물려서 거행하는 것이 근례(近例)를 이룬 탓으로 수령(守令)의 제배(除拜)와 서경(署經)을 매번 번거롭게 품달(稟達)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비국(備局)의 당상관이 죽 늘어서 있어도 참좌(參坐)하는 사람은 매우 적고 홍문관록(弘文館錄)이 잇따라 있어도 숙직(宿直)을 비우는 날이 늘 많은데, 더구나 형옥(刑獄)과 사송(詞訟)이 여러 해 동안 지체된 것이야 이루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가을 성균관에서 제술(製述)할 때는 사람들의 말썽이 시끄러웠었는데,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에 이르러서는 대사(代射)·대강(代講)하는 부류가 전일에 견주어 더욱 많아졌으니, 마땅히 엄명(嚴明)하게 신칙시켜야 할 것입니다. 과장(科場)의 글은 본디 정식(程式)이 있는 것인데, 근래의 과유(科儒)들은 오로지 표절(剽竊)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포서(鋪敍)170)  에는 반드시 촉급(促急)한 것을 요구하고 제작(製作)에는 다만 신속(神速)함만을 재촉하게 되므로, 문체(文體)가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대개 시험을 관장하는 사람이 감별(監別)에 현란되어 단지 시권(試券)을 비치는 것의 조만(早晩)만을 살펴 취사(取捨)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과(大科)·소과(小科)의 고관(考官)은 마땅히 각별히 가려서 의망(擬望)해야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대해 바야흐로 신칙시키고 있다."
하였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옛날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이 경연(經筵)에서 선현(先賢)의 이름을 휘(諱)할 것을 청한 것이 연보(年譜)에 기재되어 있으니, 지금도 마땅히 휘해서 읽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정해진 법식(法式)이 있으니, 휘해서 읽게 하라"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단지 정자(程子)·주자(朱子)만 휘(諱)하였을 뿐,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자·주자를 휘한다면, 안자·증자·자사·맹자를 어떻게 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시혁(金始㷜)이 이수해(李壽海)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인혐(引嫌)하고 부임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체면(遞免)되었다. 전조(銓曹)에서 그의 자급(資級)을 환수(還收)하고 낮추어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삼을 것을 아뢰어 청하였다.

 

2월 22일 무진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상소(上疏)하여 마땅히 체직시켜 주어야 하는데 대한 의리를 여섯 번째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3일 기사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또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4일 경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상소(上疏)하여 주급(周急)171)  하라고 한 명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치사(致仕)한 대신(大臣)에게 으레 주급(周急)해 주는 은전(恩典)이 있었으므로, 봉조하 최규서(崔奎瑞)가 이미 상름(常廩)을 받고 있는데다가 또 주급을 받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사양하고 받지 않았는데, 임금이 이를 특별히 허락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민진원이 이러한 전례를 인용하여 사양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것은 곧 구전(舊典)인 것이다. 더구나 경(卿)은 부부인(府夫人)을 받들고 있으므로 경을 그렇게 대우하는 것이지 특별히 대신(大臣)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마땅히 안심하고 영수(領受)해야 한다."
하였다. 이뒤에 이광좌(李光佐)도 상소(上疏)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5일 신미

김약로(金若魯)를 교리(校理)로, 남태량(南泰良)과 윤득화(尹得和)를 수찬(修撰)으로, 유건기(兪健基)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진희(趙鎭禧)를 승지(承旨)로, 서종섭(徐宗燮)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한위(趙漢緯)를 헌납(獻納)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한 죄인 김세진(金世進)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국청(鞫廳)에서 김세진이 고발한 여러 사람들을 체포하여 신문하였는데, 김필웅(金弼雄)이 공초(供招)하기를,
"일찍이 박지번(朴枝蕃)과 함께 짝지어 독서(讀書)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근일에는 본디 왕래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고, 박지번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일찍이 김세진(金世進)과 서로 알고 지냈었는데, 재작년에 대판 싸움을 하고서는 절교(絶交)했었습니다. 이달 5일에 함께 공부하던 사람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왔다기에 문을 열고 내다보았더니 곧 달아나 버렸는데, 그래서 행랑 할멈에게 물어보았더니 바로 김세진이었다.’ 했습니다. 따라서 원래 5, 6인이 모인 일은 없었으며, 또 대청 마루밑은 돌덩이로 메워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하고, 이수대(李守大)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박귀석(朴貴碩)·천성귀(千聖龜)와 함께 부지군(負持軍)이었습니다. 정월 16일 무렵에 신이 천성귀와 함께 박귀석의 집에 가서 단지 부지가(負持價)의 다소(多少)에 대해 논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하고, 천성귀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김세진이 부지군(負持軍)이 되고 싶지 않은 차에 그의 어미에게 책망을 받자 초4일 그의 어미의 돈을 훔쳐 가지고 나간 뒤에 그대로 돌아오지 않은 채 도둑질을 하다가 체포되었다고 했습니다. 역변(逆變)을 일으킨다고 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김세진이 고발한 박귀석의 가주(家主)는 실제로 김장번(金長番)이 아니라 바로 내관(內官) 최경태(崔敬泰)입니다."
하고, 최경태를 신문하니, 최경태가 공초하기를,
"박귀석은 신의 행랑채에 살고 있었는데, 아무날 아무와 서로 만난 일에 대해서는 신은 실제로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김세진이 여러 사람들과 면질(面質)한 결과 말이 대부분 꿀려지자 드디어 말을 바꾸기를,
"신이 과연 그들과 더불어 동모(同謀)했으나, 처음부터 숨어서 엿들은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그뒤 또 말을 바꾸어 장융복(張戎福)을 끌어들여 증거대었으므로, 장융복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김세진과는 본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하였다. 김세진에게 모두 3차의 형신(刑訊)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박지번(朴枝蕃)·김필웅(金弼雄)은 늘 신을 업신여겼고, 박귀석은 신이 그의 집에 갔었으나 영접하여 앉게 하지도 않았고, 천성귀·이수대(李守大)·장융복은 전에 신에게 능욕(凌辱)을 가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신이 이 일로써 무고(誣告)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김세진을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처단(處斷)하고 김필웅 등 여러 사람은 모두 방송(放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서 정시(庭試)를 설행하여 문과(文科)에는 김상구(金尙耉) 등 6인을 뽑았고, 무과(武科)에는 양현위(梁賢渭) 등 87인을 뽑았다.

 

2월 27일 계유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종형제(從兄弟)들이 번갈아가면서 전병(銓柄)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써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며, 병조 판서 윤유(尹游)는 대정(大政)을 세 번이나 지냈다는 이유로써 사직하였는데, 심지어 말하기를,
"만일 다시 떠나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 남긴 음식도 먹지 않을 것은 물론,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모두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김재로와 윤유가 모두 출사(出仕)하였다. 처음 김취로(金取魯)가 김재로를 대신하여 병판(兵判)이 되었을 적에 김재로가 당종(堂從)이 서로 대신하는 것이라는 이유로써 김취로에게 출사(出仕)하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김취로가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김재로가 김취로를 대신하여 이판(吏判)이 되었을 적에 김재로는 기필코 사양할 뜻이 없었으나 이미 앞서 말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양하다가 나중에야 출사하였다. 대개 김재로는 참하(參下)로 있을 때부터 청관 화직(淸官華職)을 역임(歷任)했는데 반하여 김취로는 인품이 시인(猜忍)하고 광패(狂悖)하여 사류(士類)들에게 결점이 지적되어 명도(名塗)에 오르는 것을 저지당했기 때문에 김재로를 시기하여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탕평책(蕩平策)을 쓴 이후 시배(時輩)들에게 빌붙었던 관계로 김재로와 관위(官位)가 대등하게 되었다.

 

2월 28일 갑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관서 어사(關西御史) 이철보(李喆輔)를 불러 보았다. 이때 관서(關西)에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가는 변고가 있었으므로 이철보에게 명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명(復命) 하였다. 임금이 조사한 일에 대해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나다동(羅多洞)에서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가서 사람을 살해하고 노략질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백합니다만, 세동(細洞)의 일에 이르러서는 의심스런 단서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부자(父子)와 형제(兄弟)가 함께 범한 경우가 있으니,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의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마땅히 구별하는 방도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뒷날 차대(次對) 때 입시(入侍)하여 다시 진달하게 하였다.

 

지평(持平) 김상중(金尙重)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경외(京外)에서 기찰(譏察)하는 것은 비상한 변고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고 왕부(王府)에서 신국(訊鞫)하는 것은 불궤(不軌)172)  를 징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찰하여 의심스런 점을 알아내었으면 고문(拷問)을 가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그 결과에 따라서 상변(上變)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상변했으면 어떻게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실상을 살펴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찰은 폐지할 수 없는 것이고 기찰하는 데서 오는 폐단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도(諸道)의 투서(投書)에 이르러서는 또 환하게 드러나 알기 쉬운 점이 있습니다. 가령 흉역(凶逆)이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다만 역모의 정상이 환하게 드러날까를 두려워하고 있는데 또 무엇 때문에 기필코 그들이 스스로 드러내려 하겠습니까? 이것은 인심을 현혹시키려는 유언 비어에 불과한 것이니, 지난 번의 처분이 참으로 천고에 탁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호원(胡元)173)  의 1백년 운수를 하늘이 이미 싫어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청하는 것을 저이 곡진하게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안색을 변하여 서로 축하하면서 마치 큰 은혜를 받은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사신(奉使臣)이 또 부당한 경로(經路)로 연줄을 타서 미봉책(彌縫策)을 바라고 있으니, 통역배들이 우리의 사정을 드러내지 않을 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역종(逆種)들이 법망을 빠져나가고 잠상(潛商)들이 국경을 넘는 법을 범하여 나라의 걱정이 진정되지 않고 변방의 흔단(釁端)이 자주 발생하고 있으니, 마땅히 중외(中外)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신하에게 신칙하여 융비(戎備)174)  에 유의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번에 의금부에서 옥당(玉堂)을 추문한 데 대한 판부(判付) 안에 ‘지금 조정에 벼슬하지 않겠다[不立令朝]’는 등의 하교가 있으니, 진실로 두 신하의 행위가 과연 성교(聖敎)와 근사한 점이 있었다면, 유방(流放)시키거나 찬극(竄殛)해도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독면(督勉)하는 뜻으로서 모름지기 궁지(窮地)에 핍박하는 지경을 만들려는 행위는 신료(臣僚)들을 예우(禮遇)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는 이런 엄중한 하교를 받았으면 당연히 소장을 진달하고 감단(勘斷)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필균(朴弼均)은 뻔뻔스럽게 좌기(坐起)를 어겼으니, 진실로 몹시 미안한 일입니다. 하지만 신의 의견에는 판부(判付) 가운데 네 글자는 마땅히 환수하라고 명해야 되고 박필균도 또한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좌상(左相)이 참소하는 무함을 받았으니, 전하께서 돈면(敦勉)하심에 있어서는 성의(誠意)를 축적하기만을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상(路上)에 연(輦)을 멈추게 하고서 거류(去留)를 함께 하겠다는 하교를 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시소(試所)에 나아가라는 명령도 또 인입(引入)했을 때 있었으니, 대신(大臣)을 공경한다는 도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광덕(李匡德)이 버티면서 머뭇거린 것은 진실로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만, 먼 변새(邊塞)에 보임(補任)시킨 것은 중도에 지나친 처사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조급하게 다투고 나아가기를 탐하는 자들은 오로지 추조(趨造)로써 공손함으로 여기고 분명히 계칙하여 이름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만하다는 이유로써 죄를 받았으니, 이는 성조(聖朝)에서 염치를 면려하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안윤중(安允中)이 뇌물을 받은 것은 그 사실이 낭자하여 숨기기 어려우니, 마땅히 잡아다 조사하여 무겁게 감죄(勘罪)해야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호신(趙虎臣)이 스스로 고을을 바꾸어 주기를 바란 것은 엿보아 체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끝내 체포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삭직(削職)시켜야 합니다. 금성 현감(錦城縣監) 구택규(具宅奎)는 통교(統校)를 잡아 끌고 다녔으므로 통수(統帥) 김집(金潗)이 구택규를 곤장칠 것을 청하였습니다. 문관(文官)의 오만한 습성은 진실로 징계해야 되지만, 무신(武臣)의 교만 방자한 풍습도 또한 자라게 해서는 안됩니다. 구택규는 이미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명하였으니, 김집에게도 또한 경책(警責)을 가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해남 현감(海南縣監) 조동하(趙東夏)는 시역(試役)을 염피(厭避)하여 뻔뻔스레 누워 있으면서도 참입(參入)하지 않았습니다. 남읍(南邑)에 임명하게 되자 그 고을이 조잔(凋殘)한 것에 분노하여 이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은 가운데에서 감히 말하기를, ‘굶주린 대간(臺諫)이 어떻게 나를 탄핵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교만하고 망령스러운 자는 특별히 재제(裁制)를 가해야 됩니다.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전일의 판부(判付)는 고쳐서 내렸다.

 

교리(校理) 이철보(李喆輔)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눈을 부라리는 것이 점점 심해지고 그에 따라 비방도 더욱 가중되고 있는데, 서종섭(徐宗燮)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어의(語意)가 매우 패려(悖戾)하였습니다. 대저 계묘년175)  의 과거(科擧)를 부정(不正)하다고 하는 것은 그 의도가 어찌 역적이 아닌데도 억지로 역적이라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역적이 아니고 충량(忠亮)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여긴다면, 곧바로 신리(伸理)시킬 것을 청하여 한번 전일의 옥안(獄案)을 번복시킨 연후에 이른바 토역과(討逆科)도 또 뒤따라 파삭(罷削)시키는 것이 어찌 진실로 광명 정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역적이란 이름이 그대로 있는데도 감히 신리(伸理)시키지 못하고 과명(科名)도 또한 그대로 있는데도 감히 논하지 못하고서 단지 공언(空言)으로 그 방(榜)만을 공척(攻斥)하고 있으니, 신은 공척하는 것이 무슨 일이며 내세우는 것이 무슨 의리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거기다가 또 가히 교문(敎文)의 내용을 끌어내어 협박하기 위한 자료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 신은 이 과거(科擧)의 설행(設行)이 토역(討逆) 때문인지 반교(頒敎)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과거를 설행한 것이 참으로 반교 때문이었다면 교문 가운데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흉언(凶言)은 그 자신이 역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데, 도리어 어찌 과사(科事)에 참여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일은 혐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무옥(誣獄)을 단련(鍛鍊)시켜 국본(國本)176)  을 모해하려 한 것은 역적 김일경이었으며, 교문(敎文)을 대찬(代撰)하면서 흉모(凶謀)를 한 것도 역적 김일경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옥사(獄事)를 다스렸고 이런 마음으로 훈공(勳功)을 감정(勘定)하였고 이런 마음으로 교문(敎文)을 반사하였고 이런 마음으로 과거(科擧)를 설행하였으니, 그당시 진하(陳賀)하는 반열에서 교문을 듣고 시사(試士)하는 궐정(闕庭)에서 시권(試券)을 바친 사람들은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조가(朝家)에서 조처함에 있어 일찍이 의리를 명백히 바루지 않았던 탓으로 동악자(同惡者)를 이미 죄주지 못하였고 위과(僞科)도 파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철보(李喆輔)가 이에 감히 토역(討逆)과 반교(頒敎)로써 나누어 두 가지 일로 만든 것이다. 대저 이른바 토역이라고 한 것은 한편을 장해(戕害)하는 데에서 그쳤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토역과 반교를 과연 어떻게 나눌 수 있겠는가? 이철보의 이른바 ‘역적 김일경 그 자신이 역적이 되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니, 이것이 어찌 과사(科事)에 관계될 것인가?’라는 것은 다만 말이 조리에 맞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털끝만큼도 통박(痛迫)스럽게 여기는 뜻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을 대개 알 수가 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2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역사(歷史)


[註 175] 계묘년 : 1723 경종 3년.[註 176] 국본(國本) : 영조를 가리킴.
사신은 말한다. "무옥(誣獄)을 단련(鍛鍊)시켜 국본(國本)176)  을 모해하려 한 것은 역적 김일경이었으며, 교문(敎文)을 대찬(代撰)하면서 흉모(凶謀)를 한 것도 역적 김일경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옥사(獄事)를 다스렸고 이런 마음으로 훈공(勳功)을 감정(勘定)하였고 이런 마음으로 교문(敎文)을 반사하였고 이런 마음으로 과거(科擧)를 설행하였으니, 그당시 진하(陳賀)하는 반열에서 교문을 듣고 시사(試士)하는 궐정(闕庭)에서 시권(試券)을 바친 사람들은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조가(朝家)에서 조처함에 있어 일찍이 의리를 명백히 바루지 않았던 탓으로 동악자(同惡者)를 이미 죄주지 못하였고 위과(僞科)도 파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철보(李喆輔)가 이에 감히 토역(討逆)과 반교(頒敎)로써 나누어 두 가지 일로 만든 것이다. 대저 이른바 토역이라고 한 것은 한편을 장해(戕害)하는 데에서 그쳤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토역과 반교를 과연 어떻게 나눌 수 있겠는가? 이철보의 이른바 ‘역적 김일경 그 자신이 역적이 되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니, 이것이 어찌 과사(科事)에 관계될 것인가?’라는 것은 다만 말이 조리에 맞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털끝만큼도 통박(痛迫)스럽게 여기는 뜻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을 대개 알 수가 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2월 29일 을해

이일제(李日躋)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비국(備局)의 당상관과 관서 어사(關西御史) 이철보(李喆輔)를 인견하였다.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사람의 감률(勘律)에 대한 경중(經重)을 하문하니, 이철보가 말하기를,
"마땅히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분해야 할 것이므로 모두 극률177)  을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김홍경(金興慶)도 또한 말하기를,
"영장(領將)은 당연히 효시(梟示)해야 하지만, 그 나머지는 마땅히 엄형(嚴刑)을 가하여 노예를 삼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철보가 또 말하기를,
"김창온(金昌溫)이란 사람은 실제로 범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시키라고 명하였는데, 그 뒤에 김창온은 배소(配所)에 나가지 않았다. 또다시 조사할 때에는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정절(情節)이 낭자하였으므로, 이철보가 여러 달 동안 안핵(按覈)하였다. 그가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 이러한 것이었다.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강변(江邊)의 여러 고을에 곡식을 저축시킨 것이 너무 많으므로, 구적(寇賊)에게 빌려 주는 물자가 쉽게 될 것이니, 마땅히 일찍이 이에 대해 구획(區劃)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에 명하여 도신(道臣)에게 분부(分付)해서 좋은 쪽으로 구획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철보가 또 말하기를,
"만포(滿浦) 상류(上流)의 구비강(仇非江) 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이는 본디 우리 나라의 땅으로 수목(樹木)이 꽉 우거져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저들이 막(幕)을 치고 거접(居接)해 사는 사람이 많으니, 마땅히 그 나무들을 베어 내어 이런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동필(金東弼)이 장계(狀啓)를 올려 청하기를,
"본부(本府)의 군향(軍餉) 가운데 썩은 것은 전례에 따라 탕감(蕩減)시키고 분량이 줄어든 것은 모곡(耗穀)으로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으나, 이뒤로는 이를 전례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대개 강화(江華)는 해도(海島)의 장습(瘴濕)으로써 창고의 곡식이 부패되거나 줄어들기가 쉽기 때문에 탕감시킨 전례가 있어 왔다. 그리던 것을 계묘년178)   이후로는 전수(典守)한 사람에게서 나누어 징수하도록 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정식(定式)이 되었다. 뒤에 본부(本府)의 이노(吏奴)들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모곡(耗穀)으로 그 축(縮)나는 곡식을 보충하도록 허락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동필이 이런 전례를 원용(援用)하여 청한 것인데, 임금이 그의 청을 들어주었으나, 전례로 삼는 것은 금하였다. 이어 정식(定式)을 만들되 다시는 허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장릉(莊陵)에 비석(碑石)을 세우는 역사(役事)가 있었는데도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상전(賞典)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시상(施賞)할 것을 청하였으나,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 등은 안된다고 말하였으므로 임금이 전례를 조사하여 서계(書啓)하게 하였다. 뒤에 또 저지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단지 말[馬]만 주라고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사간(司諫) 민정(閔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직산(稷山) 사람 조천빈(趙天彬)이 본현(本縣)의 심만(沈萬)과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서 큰 도적으로 거짓 꾸며 밤을 이용하여 갑자기 들어가 그의 무리인 보보(寶甫)를 시켜 심만을 찔러 죽이게 했는데, 검험(檢驗)하여 그런 사실을 알아 내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조천빈의 족당(族黨)이 번성하다는 이유 때문에 추관(推官)이 즉시 엄중하게 심문하지 못했습니다. 심만의 아들이 포도청(捕盜廳)에 정소(呈訴)하였으므로 추핵(推覈)하여 실정을 알아내었으나, 일이 살옥(殺獄)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본도(本道)로 되돌려 보냈는데, 추관이 또다시 느슨하게 다스리고 있으니, 전후의 추관은 마땅히 모두 잡아다가 추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천빈과 보보는 마땅히 본도로 하여금 엄격히 조사하여 형률(刑律)에 따라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사람에 대해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별하는 것은 너무 너그럽게 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으로, 변금(邊禁)을 엄중히 하고 뒷 폐단을 징계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승복(承服)한 무리들은 수범과 종범을 논할 것 없이 마땅히 모두 효시(梟示)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니, 따르지 않았다.

 

교리(校理) 이철보(李喆輔)가 상소(上疏)하여 논하기를,
"강변(江邊) 일곱 고을은 병력(兵力)이 단약(單弱)하니, 미포(米布)를 바치는 군관(軍官)을 단속(團束)하여 대오(隊伍)를 편성하게 한 다음 양영(兩營)에서 순행하여 시재(試才)한 후에 상을 주어 권면하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강변(江邊)의 각 진보(鎭堡)에 이미 성책(城柵)을 설치하였고 군기(軍器)와 군량을 저축해 두었는데, 또 변란이 발생하면 퇴보(退保)하라는 명령이 있으니, 뒷날 구도(寇盜)들의 도움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청컨대, 그 명령을 되돌리고 약속(約束)을 신명(申明)시켜 적을 보고 도주하는 사람은 군율(軍律)로 처단하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강변(江邊)의 인재(人才)들이 침체(沈滯)되고 있으니, 청컨대, 육진(六鎭)과 제주(濟州)의 전례에 의거하여 수시로 근신(近臣)을 보내어 문(文)·무(武)를 시취(試取)하게 하소서. 아울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가운데 준이(俊異)한 사람을 가려서 매양 전최(殿最) 때 아뢰어 장용(奬用)하게 하소서. 또 일곱 고을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늠료(廩料)를 후하게 주고 비국(備局)에 예속시켜 형편을 순방(詢訪)하게 하소서. 강계(江界)·창성(昌城)의 별무사(別武士)도 또한 의주(義州)의 전례에 의거하여 도시(都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여 각각 한 사람씩 뽑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강계(江界)에서 삼(蔘)을 캐기 위해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가는 폐단을 청컨대, 일체 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묘당(廟堂)에 내렸다. 이뒤 복주(覆奏)하자 단지 전최(殿最) 때 아뢰게 하는 한 가지 일만을 윤허하고 나머지는 모두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2월 30일 병자

여러 승지들에게 입시(入侍)하여 여러 가지 공사(公事)를 재결(裁決)받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각사(各司)의 구임(久任) 낭관(郞官)을 불러 보았다.

 

이종성(李宗城)과 박사정(朴師正)을 승지(承旨)로, 홍창한(洪昌漢)을 지평(持平)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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