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정축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고 《근사록(近思錄)》을 강(講)하였다.
3월 2일 무인
밤에 별이 북두성(北斗星) 아래로 지나갔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상소(上疏)하여 사면(辭免)시켜 줄 것을 청하였고, 또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연석(筵席)에 나가서 비답을 내리며 말하기를,
"경(卿)이 만약 시종 지나치게 사양한다면, ‘신의가 없으면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니, 부자(夫子)179) 께서 말하신 것을 다시 무슨 면목으로 군신(群臣)들에게 명령을 내릴 것이며 억조 창생(蒼生)들을 동솔(童率)하겠는가?"
하였는데, 검토관(檢討官) 유건기(兪健基)가 말하기를,
"대신(大臣)에게 출사(出仕)를 면려시키는 도리는 반드시 성의(誠意)를 앞세워야 하는 것인데 비교(批敎)가 너무 독박(督迫)에 가까우니, 대신이 반드시 불안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마땅히 고쳐서 내려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악(經幄)에 있는 신하는 회포가 있으면 진달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비답을 감히 이와 같이 박정(駁正)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유건기를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또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辭職)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판의금(判義禁) 김시환(金始煥)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국수(鞫囚)가 옥에 가득했는데, 판의금은 날마다 개체(改遞)되어 한 사람도 공무(公務)를 행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김시환이 대신하게 되자 또 종일토록 패소(牌召)를 어겼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3월 3일 기묘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임금의 비답으로 인하여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곧이어 또 도성(都城)을 나가니, 승지(承旨)를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
김시형(金始炯)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심택현(沈宅賢)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조명익(趙明翼)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성룡(李聖龍)을 승지(承旨)로, 김성응(金聖應)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유(尹游)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김성응을 너무 빨리 진용(進用)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놀랍게 여겼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안상휘(安相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방송(放送)된 죄인 윤연(尹㝚)은 그의 이름이 역적 하의련(河宜璉)의 공초(供招)에 나와 있었는데, 그때 함께 원인(援引)된 자들은 거의 다 승복하여 정죄(正罪)하였습니다. 그런데 윤연에게는 유독 1차의 의례적인 형문(刑問)을 가하고 나서는 경솔히 바로 참작하여 조처하였으니, 이미 실형(失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완전히 석방하라는 명이 있으니, 이는 왕장(王章)180) 이 엄중하지 못한 것으로 물정(物情)이 갈수록 과격해지고 있습니다. 윤연은 마땅히 전대로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덕천(德川)에 종이 되어 있는 죄인 돌만(乭萬)은 역적 민암(閔黯)의 손자입니다. 변군(邊郡)에 정속(定屬)되어 있는 몸으로 그 이름을 변환(變幻)하여 경성(京城)을 왕래하면서 인물(人物)을 불러들여 몰래 서변(西邊)에다 팔았으니, 다만 적소(謫所)에서 도피한 형률(刑律)만 시행해서는 안됩니다. 돌만은 마땅히 엄중히 형신하여 절도(絶島)에 정속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잘 검찰(檢察)하지 못한 해당 군수(郡守)도 마땅히 잡아다가 국문한 다음 정죄(定罪)해야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정주 목사(定州牧使) 황응수(黃應洙)는 사람됨이 교만하고 망령스러워 하자와 비평이 세상에 지나치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호읍(湖邑)에서 탐오스러운 짓을 한 것이 이미 대간(臺諫)의 탄장(彈狀)에 드러나 있으니, 황응수는 마땅히 체차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삼척(三陟)의 영장(營將)인 윤득상(尹得商)은 인망이 가볍고 자급(資級)도 낮은데, 승진 제수한 것은 너무 빠른릅다. 눈으로 정자(丁字)도 몰라서 정무(政務)를 하리(下吏)들에게 위임시키고 있으니, 윤득상은 마땅히 파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돌만(乭萬)과 윤득상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교리(校理) 김약로(金若魯)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 남태량(南泰良)이 성학(聖學)을 면려한 상소의 내용은 매우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연석(筵席)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질책하는 하교(下敎)를 받았으니, 곧바로 나가서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박필균(朴弼均)이 받은 판부(判付)는 실로 인신(人臣)으로서는 감히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대신(臺臣)이 환수할 것을 청한 것은 진실로 사체(事體)에 맞는 일입니다. 이 두 신하가 혹은 추고하도 하고 혹은 파직시키기도 한 것은 모두가 가벼운 벌에 관계되지마는, 신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죄주어서는 안 되는데 죄준 경우에는 경중을 논할 것 없이 균일하게 중도에 지나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환수하라고 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掌令) 이이제(李以濟)가 상소(上疏)하여 군덕(君德)을 면려하였다. 또 말하기를,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은 작년에 대신(大臣)의 진달에 따라 혁파(革罷)시켰었는데 1년도 안되어 무단히 도로 회복시켰고, 새로 차임된 사람은 이훈좌(李勛佐)입니다. 이훈좌는 지친(至親)과 의견을 달리하여 오로지 당론(黨論)만을 일삼는 사람인데, 일찍이 군읍(郡邑)에 부임했을 때에도 청렴하다는 명성이 부족했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이 자리를 회복시킨 데 대해 그것이 옳은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유복명(柳復明)은 한번 관동(關東)을 맡아 나갔었는데 그때 사람들의 비평을 많이 들었었고, 남은 비방이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어 공의(公議)가 비웃어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보령 현감(保寧縣監) 권현(權賢)은 흉년에 진구(賑救)함에 있어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하였으며, 조곡(糶轂)을 막아 남는 것을 취하였으므로 이익은 자기의 주머니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마땅히 모두 체파(遞罷)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훈좌의 일은 중도에 지나친 것이고 유복명의 일은 너무 심하며 권현의 일은 자세하지 않다는 이유로써 모두 따르지 않았다.
집의(執義) 양득중(梁得中)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성비(聖批) 가운데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라고 한 말을 마음속으로 더욱 음미하고 있다.’고 하교하였는데 삼가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지금 선비들 가운데 과명(科名)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긴다는 호칭에 압도되어 다만 벼슬하지 않는 것을 고상한 지취(志趣)로 여겨 위초(僞楚)181) 를 은일(隱逸)에 충당시킨 꼴이 되어 있고, 과목(科目)을 거쳐 나아간 사람은 《관자(管子)》의 사유론(四維論)182) 에 압도당하여 다만 패초(牌招)를 어기고 사진(仕進)하지 않는 것을 염우(廉隅)와 같은 것이겠으며, 급암(汲黯)183) 의 염우가 어찌 지금 사람만 못해서 금달(禁闥)에 출입할 것을 자청했겠습니까? 신이 작년에 소명(召命)에 응하여 달려갔더니 도하(都下)의 사람들이 떼 지어 놀라고 비웃는 것이 마치 포사(褒姒)가 거짓 봉화(烽火)를 보고서 달려온 제후(諸侯)들을 보고 웃은 것184) 처럼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대신 부끄럽게 여기면서 정녀(鄭女)가 치마를 걷고 유수(洧水)를 건너는 모양185) 으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실사(實事)의 본의(本意)를 밝히려다가 끝내는 허위(虛僞)로 귀착됨을 당한 채 낭패되어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지금 정신(廷臣)들은 바야흐로 ‘염치(廉恥)’라는 두 글자에 고민을 당하여 움직이려 하여도 되지 않는데,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패초(牌招)와 추고(推考)에 골몰하여 날마다 겨를이 없는 실정입니다. 신은 삼가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어 다시 광언(狂言)을 올립니다마는, 또한 반드시 조정이 다시 한번 놀라는 상황이 야기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사신은 말한다. "양득중은 선비로 이름이 났으면서도 전일의 거취(去就)는 전도(顚倒)되었고 오늘의 상소도 또한 이처럼 광란(狂亂)스러웠으니, 그가 당세에 수치를 안겨 주고 유림(儒林)을 욕보인 것이 심한 편이다. 그런데도 임금이 특별히 가상히 여겨 포장(褒奬)하는 뜻을 보였으므로, 사람들이 임금이 좋아하는 것은 진유(眞儒)가 아니고 따라서 진유는 좋아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24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치안(治安)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사상(思想) / 역사-사학(史學)
[註 181] 위초(僞楚) : ‘거짓 미치광인 체한 초(楚)나라 사람[佯狂楚人]’이란 말로, 육통(陸通)을 지칭함.[註 182] 사유론(四維論) : 국가를 유지(維持)시켜 가는 데 필요한 네 가지 큰 법칙에 대한 논의를 말하는 것으로, 예(禮)·의(義)·염(廉)·치(恥)를 중요 논제로 하고 있음.[註 183] 급암(汲黯) : 한무제(漢武帝) 때의 직신(直臣).[註 184] 포사(褒姒)가 거짓 봉화(烽火)를 보고서 달려온 제후(諸侯)들을 보고 웃은 것 : 포사(褒姒)는 주(周)나라 유왕(幽王)의 총희(寵姬). 유왕이 포사가 웃는 것을 보기 위해 아무런 일도 없이 봉화(烽火)를 올려 제후(諸侯)들을 모이게 하여 포사를 웃겼다고 한 고사(故事).[註 185] 정녀(鄭女)가 치마를 걷고 유수(洧水)를 건너는 모양 : 정녀(鄭女)는 정(鄭)나라의 음탕한 여자를 가리킴. 《시경(詩經)》 정풍(鄭風) 건상장(褰裳章)에 의하면, 음녀(淫女)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유수(流水)를 건너 달려가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임. 여기서는 남의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뜻으로 쓰였음.
사신은 말한다. "양득중은 선비로 이름이 났으면서도 전일의 거취(去就)는 전도(顚倒)되었고 오늘의 상소도 또한 이처럼 광란(狂亂)스러웠으니, 그가 당세에 수치를 안겨 주고 유림(儒林)을 욕보인 것이 심한 편이다. 그런데도 임금이 특별히 가상히 여겨 포장(褒奬)하는 뜻을 보였으므로, 사람들이 임금이 좋아하는 것은 진유(眞儒)가 아니고 따라서 진유는 좋아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중협(李重協)이 상소(上疏)했는데, 첫머리에 윗사람의 것을 덜어내어 아랫사람에게 보태 줌으로써 백성과 더불어 이익을 함께 한다는 의리에 대해 말하면서 흉년이 들었으니 전세(田稅)를 물려서 받게 해 줄 것을 청하였고, 또 온 식구가 죽어 절호(絶戶)된 집의 포적(逋糴)을 감면시켜 죽 것을 청하였다. 또 검소함을 숭상하는 방도를 가지고 면려하였는데,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서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의 일에 대한 처분(處分)이 방금 있었다. 이중협은 직무가 외읍(外邑)에 있는데 그가 면계(勉戒)한 것은 비록 매우 가상(嘉尙)하지마는, 일이 정공(正供)에 관계된 전세를 감히 물려줄 것을 청하였으니, 사체에 있어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이중협을 잡아다 조처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조명리(趙明履)가 상소(上疏)하여 세 가지 조목을 진달하였다. 성학(聖學)을 돈독히 하는 데 대해 논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가 이미 미진하신데다 또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방법도 또 지극하지 못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양(涵養)한 것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여 전일하지 못한 탓으로 심찰(審察)하는 것이 혼잡(混雜)하여 정밀(精密)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정령(政令)과 시조(施措)사이에 사의(事宜)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대개 계교(計較)하여 안배(安排)하는 법규를 쓰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것이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도리에는 합치되지 않고, 주편(周便)한 고식적인 정사를 힘써 행할 뿐 법규(法規)를 밝히고 엄격함을 숭상하는 법칙은 준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총명함을 스스로 훌륭하게 여기게 되어 검허하게 받아들이는 의리는 적으며, 억지의 제재를 굳게 정함으로써 순응(順應)하는 방도를 어기게 되며, 사기(辭氣)가 과격할 때에는 침착하고 중후(重厚)한 법도에 아주 손상됨이 있으며, 권모 술수(權謀術數)를 휘두를 적에는 명백하고 성직(誠直)한 뜻이 문득 부족합니다. 그리고 잗단 일에 너무 구애되어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센 체통이 드러나지 않고, 상격(常格)만을 너무 따르기 때문에 변통시키는 방법이 부족합니다. 현사(賢邪)의 분별이 현란하여 취사(取捨)에 착오가 생기는 것은 자못 돌을 옥으로 알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의도(儀度)에 걸려서 치밀한 것에 지나치니, 한결같이 바탕을 숭상하여 문식(文飾)을 구제하는 것에 위배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절약하는 도리가 극진하지 못한 탓으로 사치스런 폐단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인애(仁愛)하는 마음이 간혹 해이해짐에 따라 곤궁하여 굶주림에 시달리는 원망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전하께서 자신에 돌이켜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호오(好惡)를 공평하게 해야 된다는 데 대해 논하기를,
"전하께서 사람을 기용할 즈음에 지켜야 할 제방(隄防)이 무너져 버려서 간사한 무리들이 방자하게 나아와서 잡다하게 뒤섞여 있는 탓으로 조정의 형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훈유(薰蕕)186) 와 빙탄(氷炭)187) 이 한그릇 속에 섞여 있는 것 같을 뿐이겠습니까? 일이 악역(惡逆)에 관계되어 정적(情跡)이 의심스런 부류들이 법률(法律)을 피한 경우가 많아서 살아 있는 자는 의기(意氣)가 전과 같고 죽은 자는 관질(官秩)이 변함이 없는가 하면, 비분 강개하여 과감히 말하면서 속이거나 숨기는 것이 없는 선비들은 견척(譴斥)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 앞의 사람은 창황한 모습으로 귀양지로 달려가고 뒤의 사람은 전도(顚倒)되어 저상(沮喪)당하고 있습니다. 성교(聖敎)에서 일찍이 ‘역변(逆變)은 시상(詩象)에 연유된다.’고 말하신 적이 있는데, 이른바 시상이라고 하는 것을 일대(一隊)의 편사(偏邪)스럽고 음휼(陰譎)한 습관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이것은 바로 역변의 원인인 것이니 진실로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만약 사류(士類)들이 시비(是非)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시상이라 여겨 견척을 받아 폐기(廢棄)된 자가 뜻을 얻지 못하여 드디어 역변을 일으킨 것으로 여긴다면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곧 하늘에서 부여받은 상도(常道)인 것이니, 비록 지금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언로(言路)는 바로 그것에 의해 국맥(國脈)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꺾어누르고 업신여겨 꾸짖으면서 마구 휘둘러 찬축(竄逐)시킨 탓으로 드디어 조정의 진신(搢紳)들로 하여금 머리를 움츠리고 숨을 죽인 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함으로서 비위를 맞추면서 아첨하는 습관이 풍속을 이루게 했으니, 이것이 어찌 치세(治世)의 기상(氣象)이겠으며 그 폐단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민생(民生)을 구휼하는 데 대해 논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논자(論者)들의 설명은 모두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호포(戶布), 결포(結布), 구전(口錢), 유포(遊布)입니다. 이 네 가지 법은 모두 양역(良役)의 편중(偏重)을 돌보기 위해 다른 백성들에게 더 부세(賦稅)하여 고통을 나누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저 정치를 함에 있어 그 근본은 바로잡지 않은 채 그 말단만 바루려고 한다면 어떻게 제대로 구제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에 계책을 세운다면 용도(用度)를 절약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먼저 궁액(宮掖)의 제반 수요(需要)를 가져다가 동조(東朝)를 봉양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의(事宜)를 헤아려 둘 것은 두고 폐지할 것은 폐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신(朝臣)들 가운데 성품이 강명(剛明)하고 사무에 밝은 사람 10여 인을 가려서 대신(大臣)에게 영솔하게 하여 모든 경사(京司)의 비용 가운데 지극히 긴요한 것이 아닌 것은 일체 재손(裁損)하게 하며, 외방(外方)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각도(各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제읍(諸邑)의 1년 공용(公用)의 숫자를 회계(會計) 점검하여 상세히 진보(陳報)하게 한 다음 똑같이 삭감(削減)시키게 하소서. 또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백성은 적은데도 고을은 많고 나라는 적은데도 벼슬은 많아서 경외(京外)의 용관(冗官)이 그 수효가 적지 않습니다. 진실로 명백히 구핵(究覈)을 가하여 혹은 합병시키기도 하고 혹은 사태(沙汰)시키기도 한다면, 거기에서 남는 전포(錢布)와 속미(粟米)가 또한 많지 않겠습니까? 대저 이와 같이 한다면 양역(良役)의 가포(價布)를 양감(量感)하여 실제적인 혜택이 널리 흡족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서인(士庶人)의 사치스런 풍습과 수령(守令)들의 탐욕스런 행실과 이서(吏胥)들이 속이는 간계(奸計)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또 재정(財政)을 소모 시키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 가운데 큰 것이니, 반드시 더욱 경칙(警飭)을 가한 연후에야 백성을 보양(保養)하는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3월 4일 경진
국청(鞫廳)의 죄인 남극(南極)이 도망갔다. 하교하기를,
"국수(鞫囚)가 도망친 것은 과거의 사첩(史牒)에는 없었던 일이다. 의금부(義禁府)에서 공무(公務)를 행하는 여러 당상관(堂上官)들과 입직(入直)한 도사(都事)를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엄중히 조처하게 하고, 이졸(吏卒)들은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엄중히 국문하게 하라."
하고, 이어 현상금(懸賞金)을 걸고 체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3월 5일 신사
포도청(捕盜廳)의 군관(軍官) 유식(柳植)이 남극(南極)을 체포하여 바쳤다. 남극이 광주(廣州)의 서리(胥吏)라고 사칭(詐稱)하면서 머릴를 풀고 상사(喪事)에 달려가는 형상을 꾸미고 밤에 고양(高陽)의 점사(店舍)에서 유숙하고 있었는데, 유식이 물색(物色)하여 추포(追捕)하였다. 유식에게 한 자급(資級)을 올려주고 군졸들에게는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3월 6일 임오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친제(親祭)하였다. 또 택일(擇日)하여 양경리(楊經理)와 형군문(邢軍門)188) 의 사당에 제사지내게 할 것을 명하였다.
3월 7일 계미
여광헌(呂光憲)을 장령(掌令)으로, 송인명(宋寅明)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이, 대계(臺啓)에서 전주(全州)의 축성(築城)에 대한 역사(役事)를 정지시킬 것을 청한 일로 인하여 상소(上疏)하여 축조할 수 있는 상황을 말하면서 재용(財用)의 비용과 정부(丁夫)의 수효와 역사를 마칠 기일을 조목별로 열거하였다. 또 말하기를,
"큰 역사(役事)는 한번 정지시키면 다시 시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축되어 있는 재물은 점점 소모되어 가는데 이렇게 1년, 2년 미루다가는 결국에는 정파(停罷)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신(臺臣)들이 풍년을 기다린다는 말은 거의 황하(黃河)가 맑기를 기다리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천하의 사변(事變)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니, 만일 불행한 기회가 있어 남문(南門)을 믿고 의지할 수 없게 된다면, 대신(臺臣)들이 반드시 《춘추(春秋)》를 읽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만, 그때는 또한 어떻게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이 축조하려는 것은 실제로 의견이 있는 것이다. 이미 시작한 역사(役事)를 어떻게 중도에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남극(南極)를 형신하였다.
3월 8일 갑신
추국을 행하여 남극(南極)과 민원귀(閔元龜)를 형신하였다.
3월 9일 을유
추국을 행하여 남극과 민원귀를 면질(面質)시켰다.
3월 10일 병술
임금이 사친(私親)인 숙빈(淑嬪)의 묘사(廟祠)에 거둥하여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을 보내어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묘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승지 이성룡(李聖龍)이 말하기를,
"관원을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는 의절(儀節)은 당연히 본묘(本廟)의 네 계절 향의(享儀)와는 차이가 있어야 하니, 배례(拜禮)하는 한 철차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국왕이 관원을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는 데에는 으레 배례(拜禮)가 없는 것인데, 지금은 특별히 제사지내게 하는 데에 관계된 것이니, 상시(常時)의 제의(祭儀)에 의거하여 행하게 하라."
하였다.
3월 11일 정해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장령(掌令) 안상휘(安相徽)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엊그제 대가(大駕)가 사묘(私廟)에 거둥하였을 적에 가까이에서 호위하고 있는 군사들이 술파는 여자를 포장(布帳) 안에 숨겨 주었었으니, 해당 대장(大將)·장관(將官)과 금훤랑(禁暄郞)·이졸(吏卒)은 마땅히 모두 논죄(論罪)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윤유(尹游)가 상소(上疏)하여 겸무(兼務)하고 있는 경연직(經筵職)을 사퇴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진망(李眞望)·이병상(李秉常)·송진명(宋眞明) 등 몇몇 신하는 당금의 문학(文學)하는 선비라고 할 만합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을 불러다 벼슬자리에 두고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오늘날 영관(瀛館)189) 의 학사(學士)들은 진실로 모두 훌륭하다고 할 만합니다. 김상성(金尙星)·이철보(李喆輔)·오원(吳瑗)·남태량(南泰良) 등에 이르러서도 이들을 옥당(玉堂)에 두기에 실로 부끄러운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라건대 의금부의 추문으로써 파직(罷職)시켜 그들의 나가기를 독촉하지 마시고 특별히 사진(仕進)할 수 있는 문을 열어서 응명(膺命)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소서. 또 생각하건대, 산림(山林)에서 독서(讀書)하는 선비인 윤동수(尹東洙)·어유봉(魚有鳳)·박필주(朴弼周)·윤동원(尹東源)·심육(沈錥)·박필부(朴弼傅) 등 여러 사람은 혹 연원(淵源)의 학문이 있기도 하고 혹은 궁리 격물(窮理格物)의 공부가 있기도 하니, 원컨대, 더욱 성실한 예의를 갖추어 기필코 불러오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마땅히 유의(留意)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상소(上疏)하여 이이제(李以濟)의 상소에 대해 변해(辨解)하기를,
"이훈좌(李勛佐)는 여러 번 주군(州郡)을 맡았었는데, 번번이 성적(聲績)이 있었기 때문에 부정(副正)에 의차(擬差)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臺臣)이 곧 지친(至親)과 의견을 달리하고 오로지 당론(黨論)만 일삼는다는 이유로써 이훈좌를 탄핵하였습니다. 근세(近世)에 와서는 지친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거의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들을 모두 다 죄줄 수 있겠습니까? 유복명(柳復明)은 본디 재국(才局)이 있다는 것으로 추천받은 사람인데, 지난번 욕을 당한 것은 이것이 별건(別件)의 일에 관계된 것이며, 또한 이미 소설(昭雪)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다투어서 기필코 공격 제거하려고 하였으니, 신의 의려(意慮)로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친히 황단(皇壇)에 제사지내고 나서 어제(御製)를 내려 승지로 하여금 잇따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또 ‘강한(江漢)은 바다에 흘러들어간다[江漢朝宗海]’라는 것으로 출제(出題)하여 십운(十韻) 배율(排律)로 짓도록 명하였다. 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송인명(宋寅明)을 불러서 어제(御製)에 화답하여 올리게 하고, 이어 여러 작품의 성적을 매겨 차등 있게 상을 내리게 하였다.
청국(淸國)의 예부(禮部)에서 우리 나라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국경을 넘은 일 때문에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전번에 조사한 바 있는 조선국인(朝鮮國人) 김세정(金世丁) 등이 함부로 내지(內地)에 들어와서 사람을 창살(搶殺)한 데 대한 안건(案件)은, 그때 피살(被殺)된 사람들은 혹 기인(旗人)190) 에 소속된 자도 있고 혹은 민인(民人)에 소속된 자도 있으니, 응당 성경(盛京)의 장군(將軍)과 영고탑(寧古塔)의 장군에게 확실히 조사하여 상세히 아뢰게 하였다. 이어 해국(該國)의 국왕(國王)에게 신칙하는 바이니, 도피 중에 있는 김영창(金永昌) 등을 철저히 조사하여 힘써 나획(拏獲)하도록 하고 동(同) 김세정(金世丁) 등도 똑같이 확실히 조사하여 상세히 주달하고 청지(請旨)하라. 그리고 방비(防備)를 소홀하게 한 해당 지방관(地方官)과 국인(國人)들과의 약속을 엄중하게 하지 못한 해국 국왕에 대해서는 명백한 조사 내용이 도착되기를 기다려 일체 똑같이 예부(禮部)에 맡겨 전례를 참조해서 조사 참작한 다음 의처(議處)하겠다는 내용으로 옹정(雍正)191) 12년(1734) 2월 초4일에 아뢰었더니, 본일(本日)에 받은 성지(聖旨)에 의논한 대로 하라고 하였다."
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지 사신(冬至使臣)들이 저들에게 가 있으면서 먼저 수역관(首譯官) 이추(李樞)를 시켜 예부(禮部)에게 주본(奏本)의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탐문하게 했더니, 서반(序班)의 무리들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이고 국경을 넘은 일은 마땅히 강희(康熙) 29년(1690) 때의 일을 원용(援用)할 것이다."
하였다. 사신 등은 그때의 회자(回咨) 내용은 매우 엄중하였었으므로 지금에 원용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겨 역관으로 하여금 다시 주선(周旋)하게 했더니, 서반(序班)들이 또 초고(草稿)를 짓는 낭중(郞中) 장약륭(張若窿)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를,
"마땅히 산절(刪節)하여 평순(平順)한 족을 따르도록 힘쓰겠다."
하였다. 그랬는데 자본(咨本)을 보게 되자, 나라를 욕되게 하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사신 등이 예부(禮部)에 청탁하여 돌아가는 당상관(堂上官)들을 만류시켜 놓고 상명(常明)을 인하여 청인(淸人) 상서(尙書)인 삼태(三泰)에게 통하였더니, 삼태가 즉시 장약륭을 불러서 산개(刪改)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인(漢人) 상서(尙書)인 오양(吳襄)은 말하기를,
"결단코 구례(舊例)를 전부 없앨 수는 없다. 기필코 산개(刪改)하려 한다면 나는 서압(署押)할 수 없다."
하고, 인하여 또 핍박하여 들어가 아뢰도록 했으며, 마침내 의논한 대로 하라는 준허(準許)가 내렸다. 이에 도승지(都承旨) 이유(李瑜) 등이 아뢰기를,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일에 대한 회자(回咨) 속에 약속(約束)이 엄중하지 못했다느니 조사 참작한 다음 의처(議處)하겠다느니 하는 말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국경을 나가서 사신으로 간 신하가 진실로 능히 강력하게 다투었다면, 패려하고 욕된 말을 어찌 산거(刪去)할 방도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멍청하게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으니,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는 의리에 매우 어긋나는 처사였습니다. 마땅히 무거운 견벌(譴罰)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처분(處分)을 내리겠다."
하였다.
3월 12일 무자
영의정 심수현(沈壽賢), 우의정 김흥경(金興慶)과 비국(備局)의 당상관, 삼사(三司)를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청(淸)나라의 자문(咨文)을 내어 보이니, 심수현 등이 말하기를,
"국욕(國辱)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분스런 마음을 어떻게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대신(大臣)으로써 진주사(陳奏使)에 차임하여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호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죄인들을 평양(平壤)으로 옮겨서 수금(囚禁)하게 한 다음 다시 어사(御史)를 보내어 관찰사(觀察使)와 함께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은 이철보(李喆輔)를 다시 어사(御史)에 차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수찬(修撰) 김약로(金若魯)와 유건기(兪健基) 등이 나아가 말하기를,
"이번의 삼사신(三使臣)은 【정사(正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부사(副使) 민응수(閔應洙), 서장관(書狀官) 윤휘정(尹彙貞)이다.】 그들의 오만스런 글을 받고서도 능히 쟁집(爭執)하지 못하였으니, 엄중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삭직(削職)시키라고 명하였다. 김약로(金若魯)가 그것은 너무 가볍다고 아뢰니, 다시 잡아다가 조처하고 수역관(首譯官) 이추(李樞)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라고 명하였다.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김영창(金永昌)은 마땅히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수량(李遂良)에 대해 변경(邊境)의 백성들이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일로 인하여 잡아다가 추문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파직시키라는 명이 있었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김준(金浚)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사간(史諫) 민정(閔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중협(李重協)이 정공(正供)을 물려서 받아들이게 할 것을 청한 것은 그것이 외람스러운 데에 관계된 것이기는 하지만, 진실로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잡아오라는 명이 있기에 이른 것은 하정(下情)을 통하게 하고 언로(言路)를 넓히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마땅히 곧 도로 중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북쪽에서 온 자문(咨文)의 오만스런 내용은 인신(人臣)으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봉사(奉使)한 여러 신하들을 이미 잡아다 조처하라고 명하였고 이추(李樞)도 또한 잡아다가 추국하라고 명하였으니, 사행(使行)의 수역(首譯)도 마땅히 똑같이 잡아다가 국문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직산 현감(稷山縣監) 이위보(李渭輔)는, 심만(沈萬)의 아내가 법부(法府)에 정소(呈訴)한 것에 대해 노하여 그의 집에다 구류(拘留)시켰다고 합니다. 이위보는 종을 추쇄(推刷)하는 일을 주관하고 있으면서 정범(正犯)을 치우치게 비호하여 시친(屍親)192) 을 수금(囚禁)함으로써 원통함을 호소하는 길을 끊으려고 했으니,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위보는 마땅히 잡아다 추문하여 정죄(定罪)해야 되고, 정범(正犯) 조천빈(趙天彬)·보보(寶甫) 등도 마땅히 경옥(京獄)으로 잡아와서 엄중히 조사하여 형률(刑律)에 의거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두 해의 기근(饑饉)과 여역(癘疫)을 치른 끝이라서 백성들이 아직도 소복(蘇復)되지 않았는데 조정의 지엄한 명령으로 인하여 한정(閑丁)을 수괄(搜括)하느라고 민간(民間)을 소란스럽게 만들어 경종(耕種)이 시기를 어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도(諸道)의 첨정(簽丁) 등에 관한 일은 마땅히 추수(秋收) 때까지 한정하여 우선 천천히 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란이 일게 한 것은 바로 수령(守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다. 제도(諸道)의 감사(監司)를 무겁게 추고하고 수령은 엄중히 신칙시키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안상휘(安相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의금부(義禁府)의 현재 갇혀 있는 죄인 임이원(任爾元)의 공사(供辭)와 이산 부사(理山府使) 우하형(禹夏亨)의 함답(緘答)이 서로 차이가 나니, 우하형은 마땅히 잡아다가 엄중히 핵실(覈實)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문목(問目)을 첨부하여 다시 조사하게 하라."
하였다. 뒤에 판의금(判義禁) 송인명(宋寅明)의 품지(稟旨)로 인하여 비로소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아뢰기를,
"이중협(李重協)의 상소(上疏) 내용은 그 의도가 백성을 위하려는 데 있는 것인데 처분(處分)이 너무 지나쳤으니, 이는 사방에 보일 것이 못되는 처사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말을 하니, 내가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잡아오라는 명을 정지시키고서 파직만 시켰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성덕윤(成德潤)이 그 경내(境內)에 살고 있는 총융청(摠戎廳)의 장교(將校)를 잡아 끌고 갔으므로 총융사(總戎使) 조빈(趙儐)이 계문(啓聞)하고 죄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마땅히 분간(分揀)해야 된다고 아뢰니,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폐습(弊習)을 내가 아직도 미워하고 있다."
하고, 상관(上官)을 능멸한 형률(刑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일찍이 문사(文士)들이 교만 방자하다고 의심하여 번번이 최억(摧抑)을 가(加)했기 때문에 통제사(統制使) 김집(金潗)이 감히 구택규(具宅奎)를 곤장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고, 조빈(趙儐)이 또 본청(本廳)의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성덕윤(成德潤)을 죄줄 것을 함부로 청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25면
【분류】정론(政論) / 군사(軍事) / 사법(司法)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일찍이 문사(文士)들이 교만 방자하다고 의심하여 번번이 최억(摧抑)을 가(加)했기 때문에 통제사(統制使) 김집(金潗)이 감히 구택규(具宅奎)를 곤장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고, 조빈(趙儐)이 또 본청(本廳)의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성덕윤(成德潤)을 죄줄 것을 함부로 청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서명균(徐命均)을 진주정사(陳奏正使)로, 박문수(朴文秀)를 부사(副使)로, 황재(黃梓)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윤순(尹淳)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상경(趙尙絅)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민치룡(閔致龍)을 장령(掌令)으로, 이도겸(李道謙)을 평안 도사(平安都事)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에 의한 정사(政事)였다. 이도겸은 일찍이 무신년193) 에 호서 어사(湖西御史)로 나갔다가 그 난리를 도피하였던 죄로 충군(充軍)되었던 것인데, 이제 서변(西邊)에 사변이 있을 때를 당하여 폐기되었던 자를 기용(起用)했기 때문에 물의(物議)가 그르게 여겼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남극(南極)·박신명(朴信命)을 면질(面質)시켰고, 민원귀(閔原龜)를 형신(刑訊)하였다.
3월 13일 기축
정수기(鄭壽期)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이기진(李箕鎭)을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윤득화(尹得和)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권업(權𢢜)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윤순(尹淳)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안상휘(安相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황응수(黃應洙)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조명리(趙明履)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완영(完營)194) 의 성역(城役)에 대한 일과 이중협(李重協)에 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안(鞫案)을 비밀로 하여 누설시키지 못하게 하는 일은 법례(法例)가 지극히 엄중한 것인데도 전 참의(參議) 이광보(李匡輔)는 제멋대로 등서(謄書)하여 전하였으니, 일이 매우 방자스럽습니다. 이광보는 당연히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역옥(逆獄)에 관련된 일은 마땅히 반복하여 구핵(究覈)해야만 하는 것인데도 강원 감사(江原監司) 조최수(趙最壽)가 조사하여 올린 장계(狀啓)는 매우 초략(草略)한 데에 관계되니, 조최수는 무겁게 추문해야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윤정현(尹廷顯)이 고발한 죄인을 원영(原營)195) 에서 조사하도록 명하신 것은 진실로 성의(聖意)에 의도하는 바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국옥(鞫獄)에 관련된 일을 일개 번신(藩臣)에게 맡겨서 조사하게 한 것은 사방에 보일 만한 처사가 아닙니다. 마땅히 금오(金吾)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중히 조사하게 해야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국수(鞫囚)를 심문함에 있어서는 잠시도 천천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지의금(知義禁) 박사익(朴師益)은 출사(出仕)하고 난 뒤에 곧 다시 병이 들었다고 하고 있으니, 자못 병을 무릅쓰고 수레를 타고 적을 토벌했던 의리에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박사익은 마땅히 무겁게 추문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금오(金吾)의 낭관(郞官)은 본디 음선(蔭選)하는 것으로 일컬어 왔습니다. 그러나 도사(都事) 이창린(李昌麟)은 사람이 똑똑하지 못하여 순례적(循例的)인 직사(職事)도 매양 하리(下吏)가 이창린을 지도(指導)하기를 기다려야 하니, 마땅히 태거(汰去)시켜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사주(李思周)는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긴요하게 거론된 것이 남태적(南泰績)과 다를 것이 없는데도 찬극(竄殛)을 면하였습니다. 이것만도 그 자신에게는 이미 다행한 것인데 지금 갑자기 불식(拂拭)시켜 주고 총관(摠管)의 직임에 임명하였으니, 보고 들은 사람들이 놀랍고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사주는 마땅히 사적(仕籍)에서 삭제시켜 버려야 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평안도(平安道) 봉천(奉川)에 지진(地震)이 발생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민원귀(閔元龜)·박신명(朴信命)·오태희(吳泰禧)에게는 형신(刑訊)을 가하고, 권각(權恪)을 신문하였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3월 14일 경인
밤에 달이 좌각성(左角星)을 범하였다.
진주사(陳奏使)의 정사(正使)인 서명균(徐命均)이 상소(上疏)하여 정승직을 사퇴하면서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한 이러한 때에 당하여 마땅히 속히 행장을 꾸려야 될 것이요, 정승직에서 해면(解免)되기 전에는 결단코 감히 다시 궐문(闕門)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남극(南極)과 권각(權恪)을 면질(面質)시켰고, 황도중(黃道重)을 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남극과 황도중을 다시 면질시켰다.
3월 15일 신묘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선정전(宣政殿)에서 상참(尙參)을 행하였다. 관서(關西)의 안핵 어사(按覈御史)인 이철보(李喆輔)도 입시(入侍)하였다. 이보다 앞서 양국(兩國)에서 금법(禁法)을 어기고 넘어간 일을 조사했는데, 우리 나라에서 조사한 지명(地名)과 인수(人數)가 심양(瀋陽)에서 조사한 것과 합치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묘당(廟堂)의 의논은 모두가 끌어대서 합치시키려 하였다. 이철보가 말하기를,
"저들은 삼도구(三渡溝)에서 살략(殺掠)당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나다동(羅多洞)에서 살략된 일로 거기에 해당시켰으니, 앞으로 나다동의 일을 또 발론한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의 의견은 사실대로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 우의정 김흥경(金興慶) 등은 말하기를,
"방편에 따라 미봉(彌縫)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봉성(鳳城)에 탐문하여 삼도구(三渡溝)와 나다동(羅多洞)이 있는 지방(地方)을 상세히 안 다음 힘써 조사하여 밝히게 하였다. 도승지 이유(李瑜)가 말하기를,
"나라를 위한 계획으로 이웃 나라와 교제(交際)하는 데에는 권도(權道)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대신(大臣)들과 조용히 상세하게 의논해야 되는 것인데 지금 법전(法殿)의 대조회(大朝會)에서 말을 하였으니, 이는 이철보가 잘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충신(忠信)한다면 오랑캐 지방에서도 대접받을 수 있다고 했으니, 성의가 없다면 성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조사한 뒤에 사실에 의거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석표(李錫杓)를 정언(正言)으로, 정우량(鄭羽良)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상성(金尙星)을 교리(校理)로, 남태량(南泰良)을 부교리(副校理)로, 신택하(申宅夏)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국청(鞫廳)의 죄인 민원귀(閔元龜)가 물고(物故)되었다.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안상휘(安相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고산리 첨사(高山里僉使) 이태상(李泰祥)이 진졸(鎭卒)들을 잘 검속(檢束)하지 못했던 탓으로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일이 발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북쪽에서 보내 온 자문(咨文)에서 국가를 모욕한 것은 오로지 여기에 연유된 것인데, 그에 대한 조율(照律)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은 마땅히 무겁게 추문해야 되고, 이태상도 마땅히 먼 곳에 정배(定配)시켜야 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에서 【사간(司諫) 민정(閔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가도사(假都事)가 감형(監刑)한 일은 예전에는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당상관(堂上官)이 대신 가는 것을 허락했으니, 또한 책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해당 당상관은 마땅히 무겁게 추문해야 됩니다. 국청(鞫廳)의 죄인 민원귀(閔原龜)는 두어 차례의 형신을 받고 갑자기 죽어버렸으니, 일이 매우 괴이하고 놀랍습니다. 입직(入直)한 도사(都事)는 마땅히 잡아다가 추문해야 하고 구료관(救療官)도 마땅히 무겁게 죄를 매겨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아뢰기를,
"진주 부사(陳奏副使) 박문수(朴文秀)는 병이 있으니, 마땅히 체임(遞任)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개체(改遞)시키라고 명하였다. 박문수가 즉시 청대(請對)하여 조사하는 일의 편부(便否)에 대해 아뢰고 이어 스스로 가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이 청대를 요구한다는 말을 듣고 이미 가기를 청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의 병으로써 어떻게 멀리 가는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도 박문수가 극력 청하여 마지 않으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비국(備局)의 부제조(副提調)로 삼았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남극(南極)과 정몽석(鄭夢錫)을 면질(面質)시켰고, 이상기(李尙起)와 황도중(黃道重)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3월 16일 임진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민원귀(閔元龜)의 시체(屍體)를 한성부(漢城府)에서 검험(檢驗)하니 독약(毒藥)을 마신 흔적이 드러나 있습니다. 본부(本府)의 나졸(羅卒)과 수직(守直)한 군졸은 모두 포도청(捕盜廳)으로 이송(移送)시켜 엄중히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안상휘(安相徽)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국청(鞫廳)의 죄수가 도주한 것은 곧 전고(前古)에는 없었던 변고입니다. 나졸들이 뇌물을 받고 고의로 놓아준 정상이 이미 현저히 드러났는데, 이것은 갇혀 있던 민원귀가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곧 삼가 듣건대, 죄인 남운기(南雲紀)의 아우인 남운병(南雲炳)이 변복(變服)을 하고 밤을 이용하여 왕래하다가 순군(巡軍)에게 체포되어 방금 포도청(捕盜廳)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남운기는 곧 역적 민암(閔黯)의 사위요 민원귀의 고모부(姑母夫)인데, 그의 아우가 변복(變服)을 하고 밤에 다녔다는 것은 매우 수상합니다. 마땅히 포도청으로 하여금 엄중히 구문(究問)을 가하게 해야 됩니다. 민원귀가 옥중(獄中)에서 뇌물을 써서 남극을 탈옥(脫獄)시킨 것도 이미 매우 음흉한 것인데, 독약을 마시고 죽은 자취가 또 경조(京兆)의 검장(檢狀)에서 드러났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남극이 도주할 때에 있었던 나졸들 가운데 이미 승복한 자는 우선 정법(正法)하게 하고, 그 나머지도 모두 철저히 다스려 자복(自服)을 받아 내게 하소서. 민원귀의 공초(供招)에서 모주(謨主)로 발고(發告)된 자와 남극의 공초 안에서 성명(姓名)이 서로 부합(符合)된 자는 즉시 포졸을 보내어 체포해서 엄중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구핵(究覈)해야 될 사람은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정법(正法)해야 될 사람은 구핵한 후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이상기(李尙起)와 황도중(黃道重)을 면질(面質)시켰고 남극(南極)과 남운기(南雲紀)를 면질시켰으며 이욱형(李郁馨)을 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3월 17일 계사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안상휘(安相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남태적(南泰績)에 대한 전일의 계사(啓辭)를 고쳐서 아뢰기를,
"남태적은 남태징(南泰徵)의 근족(近族)으로 역적의 공초에서 긴요하게 거론되었는데도 정실(情實)을 구핵(究覈)하지 않은 채 너무 갑자기 처분(處分)을 내렸으니, 그 명을 환수하라고 청한 것을 여러 해가 되도록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격(南格)의 일로 인하여 다시 국문하라는 명이 있으니, 청컨대, 일의 문목(問目)을 첨입(添入)시켜 엄중히 국문하게 해서 실정을 알아내어 정죄(正罪)하게 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게 하였다.
김시혁(金始㷜)과 어유룡(魚有龍)을 승지(承旨)로, 조상경(趙尙絅)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남극(南極)을 신문하고 남운기(南雲紀)를 형신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3월 18일 갑오
우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또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면부(勉副)196) 하였다. 서명균은 이수해(李壽海)의 비평을 받은 후로부터 모두 일곱 번의 단자(單子)를 올렸고 열 세 번의 소장(疏章)을 올린 끝에 이제야 체직된 것이다.
김성응(金聖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서명빈(徐命彬)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조상명(趙傷命)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와 참판 송진명(宋眞明)에 의한 정사(政事)였다. 김성응을 승지에 의망(擬望)하고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副提學)에 의망하였는데, 사람들은 임금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의논하기를,
"전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이진(權以鎭)이 변방 백성들을 잘 금즙(禁戢) 시키지 못한 죄는 병사(兵使)의 전례에 의거하여 파직시키소서."
하니, 그렇게 하게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이양제(李亮濟)를 1차 형신(刑訊)하고 감덕(甘德)을 3차 형신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남운기(南雲紀)를 2차 형신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3월 19일 을미
서명균(徐命均)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심악(沈)을 정언(正言)으로, 윤택정(尹宅鼎)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고, 양득중(梁得中)을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이날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이 출사(出仕)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니,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수해(李壽海)의 상소(上疏)는 신의 단점을 꼭 집어서 지적했는데, 전하께서 이수해를 죄주신 것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이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니, 즉시 소환(召還)시켜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당개(唐介)197) 같은 사람도 먼 변방에 보임(補任)시켰는데, 하물며 이수해와 같은 경우이겠는가? 경(卿)이 문언박(文彦博)의 고사(故事)를 본받으려 하지만 결단코 이를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이양제(李亮濟)와 감덕(甘德)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3월 20일 병신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인견(引見)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서명균이 사행(使行) 때 은화(銀貨)를 가지고 가서 주선(周旋)할 때의 비용으로 쓰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쪽에 있는 상명(常明)이 이른바 ‘사신이 오지 말라.’고 한 말은 그 의도가 뇌물을 요구하는 데 있으니, 이런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그들의 한정이 없는 욕심을 충족시키기가 어렵게 되어 국가가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상명(常明)은 저 나라의 총신(寵臣)인데, 스스로 우리 나라의 피로인(被虜人)의 후손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사행(使行)들이 매양 상명을 중간에 내세워 모든 일을 도모했었다. 그런데 상명이 일찍이 ‘내가 마땅히 주선할 것이니 사신이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므로, 임금의 하교가 이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26면
【분류】재정-국용(國用) / 외교(外交)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상명(常明)은 저 나라의 총신(寵臣)인데, 스스로 우리 나라의 피로인(被虜人)의 후손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사행(使行)들이 매양 상명을 중간에 내세워 모든 일을 도모했었다. 그런데 상명이 일찍이 ‘내가 마땅히 주선할 것이니 사신이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므로, 임금의 하교가 이러하였다."
이보다 앞서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는 망명자(亡命者)를 체포하여 바치면 출신(出身)이나 한량(閑良)의 경우는 가자(加資)하고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의 경우에는 면천(免賤)시킨 뒤 가자(加資)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이 그 상이 너무 박하다는 것을 아뢰니, 천금(千金)의 상을 더 준다는 내용으로 반포(頒布)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고(故)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과 공주(公主)를 천장(遷葬)하려 하자, 임금이 지부(地部)에 명하여 돈 2천 냥과 포목(布木) 20동(同)을 내수사(內需司)에 보내어 소방상(小方床)198) 의 비용으로 쓰게 하도록 하였다. 호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그것이 너무 많다고 아뢰니, 반으로 줄여서 주라고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안상휘(安相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국청(鞫廳)의 죄수를 잡아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도 가도사(假都事)를 차견(差遣)함으로써 혹은 잡아오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이름을 바꾸어 잡아오기도 하였으니, 신칙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도사를 마땅히 잡아다가 조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에서 【사간(司諫) 민정(閔珽)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언(正言) 이석표(李錫杓)는 대직(臺職)의 숙사(肅謝)와 서경(署經)이 있은 뒤에 비로소 과명(科名)을 핑계대면서 억지로 혐의스런 단서를 꾸며 대직(臺職)을 규피(規避)하려 하니, 이석표는 마땅히 체차(遞差)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제두(鄭齊斗)를 발탁하여 우찬성(右贊成)으로 삼았는데, 중비(中批)199) 에 의한 것이었다. 이유(李瑜)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진순(李眞淳)을 도승지(都承旨)로, 최명상(崔命相)을 집의(執義)로, 홍계유(洪啓裕)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정제두는 평소에 양명학(陽明學)200) 을 했는데, 인품이 공손하고도 근신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향원(鄕愿)201) 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총애하여 특별히 우대하려 했기 때문에 이 제수(除授)가 있게 된 것이다.
3월 21일 정유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홍계유(洪啓裕)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서방[平安道]의 백성들이 흔단을 야기시켰고 청국(淸國)의 말다툼이 끝이 없으니, 이는 오로지 변방의 수신(守臣)이 엄중하게 금방(禁防)하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지역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은 마땅히 모두 사형을 감하여 도배(島配)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이양제(李亮濟)·윤정현(尹廷顯)·남격(南格)·남태적(南泰績)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3월 22일 무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이양제를 2차 형신(刑訊)하고 윤정현·남격·남태적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신중태(申重泰)·윤상갑(尹尙甲)·김영(金𠇟)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임금이 국청(鞫廳)의 대신(大臣)과 국문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고 죄수들을 참작하여 결단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헌부에서 이양제(李亮濟)·감덕(甘德) 등에 대한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는 옥수(獄囚) 남극(南極)이 도주하여 금오(金吾)의 이졸(吏卒)들을 신문(訊問)하게 되었고 또 이양제와 감덕이 몰래 서로 서신을 통한 일이 순경군(巡更軍) 박신명(朴信命)에 의해 발고(發告)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국청(鞫廳)에서 다시 이양제를 신문하니, 이양제가 공초(供招)하기를,
"전일에 옥졸(獄卒)에게 쌀을 꾸어다가 감덕에게 보내어 죽을 쑤어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차에 걸쳐 서신을 통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고, 감덕을 신문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이양제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개오동나무 잎에 글을 써서 죽을 더 먹을 것을 권한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다시 감덕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양제의 처음 서신에 ‘심건이(沈建伊)가 이미 죽었으니 우리들이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했으며, 두 번째의 서신에서는 쌀을 보내면서 신에게 ‘죽을 쑤어 보내 달라.’고 했으며, 세 번째 서신에서는 돈을 보내면서 또 ‘쌀을 사서 죽을 쑤어 보내 달라.’고 했는데, 신은 1차 답을 했을 뿐입니다."
하고, 다시 이양제를 신문하니, 공초 내용이 감덕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한 다음 이어 이양제와 감덕은 모두 전일의 작처(酌處)한 것에 의거하여 시행(施行)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처음 포도청(捕盜廳) 죄인 윤정현(尹廷顯)을 이미 원영(原營)202) 으로 압송(押送)시키고 나서 감사(監司) 조최수(趙最壽)로 하여금 안험(按驗)하게 했었는데, 윤정현이 고한 것이 포도청에서 공초(供招)한 것과 대략 같았다. 그러나 남격(南格)은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조최수가 박필장(朴弼長)의 이웃에 사는 사람과 태인(泰仁) 고을의 관인(官人)을 체포하여 박필현(朴弼顯)이 박필장을 찾아보았는지의 여부에 대해 문의하니, 모두 찾아본 일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또 무신년203) 춘천(春川)의 중군(中軍)인 홍하성(洪夏成)이 데리고 있던 군교(軍校)들을 체포하여 양응표(梁應標)가 역적들의 도목(都目)을 가지고 있었는지의 유무를 신문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양응표를 체포한 일은 없었고 또한 역적의 도목을 불에다 던진 일도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윤정현·남격과 간련인(干連人)을 국청(鞫廳)으로 잡아오게 된 것이다. 국청에서 윤정현을 신문하니, 공초가 포도청에서 고한 것과 같았다. 그런데 양응표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여 보니 성은 양(梁)이지만 이름은 응표가 아닌 것 같았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성이 신(申)이라고도 하였으나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역적들의 도목을 불에다 던져 태웠다는 말도 그것을 와서 전하는 사람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남격(南格)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박필현은 본디 춘천(春川)에 오지도 않았으며 신도 또한 박필장·남태적과 의리로 맺어 형제(兄弟)가 된 일도 없습니다. 더구나 남태적은 무신년 초에 춘천에 내려오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양응표는 원래 체포된 일이 없었으니, 도목의 유무는 다시 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남태적에게는 본죄(本罪)와 윤정현이 고한 일을 가지고 신문하니, 본죄에 대한 것은 무신년에 공초한 것과 같았고, 윤정현이 고한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남격·박필장은 과연 서로 친한 사이이지만 형제의 의리를 맺은 일은 없습니다. 박필현은 처음 이홍조(李弘肇)의 집에서 만났었고, 그뒤에는 박필기(朴弼夔)의 집에서 만났으며, 또 서관(西關)에서 올라올 적에 순안(順安)에 들렀는데 그때 만나보았습니다."
하였다. 다시 윤정현(尹廷顯)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성이 신(申)이라고 한 사람에 대해서는 원영(原營)에서 면질(面質)할 적에 남격(南格)이 ‘어떤 신가(申哥)가 왕래했었다.’고 했기 때문에 말한 것뿐입니다."
하고, 다시 남태적(南泰績)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처음의 공초에서 박필현과 안면을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바로 박필현이 남쪽 지방의 고을로 내려갈 적에 서로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 평소에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는 것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안국(按鞫)한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기를,
"남태적의 어긋난 단서는 역적 박필현을 알지 못한다고 한 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신년에 작처(酌處)한 사람을 지금에 와서 다른 일을 가지고 신문(訊問)하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작처(酌處)하려고 한다."
하니,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남태적이 역적 박필현을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이야말로 대단히 의심스러운 단서인데 어떻게 경솔히 작처(酌處)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무신년의 역적 하의련(河宜璉)의 공초(供招)에 ‘남태징(南泰徵)은 어리석고 남태적은 속였으니, 속인 자는 반드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하였으니, 여기에서도 그가 공모(共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니, 판의금(判義禁)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남태적의 이번 일이 비록 애매하기는 합니다만, 무신년의 본죄(本罪)는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윤수(尹邃)는 죽이지 않고 남태적만 죽인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남태적을 전일에 의거하여 작처(酌處)하라고 명하였다. 【대계(臺啓)가 있었다는 것으로 전지(傳旨)를 받들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27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변란(變亂)
[註 202] 원영(原營) : 강원 감영.[註 203]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이날은 국기(國忌)204) 때문에 재계(齋戒)하고 있었으므로, 양사(兩司)에서 전례에 따라 연계(連啓)할 수 없었다. 집의(執義) 최명상(崔命相)이 소회를 아뢰기를,
"이양제(李亮濟)의 옥사(獄事)의 핵심은 경서(京書)의 출처(出處)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건이(沈建伊)와 이양제와 전후 공초(供招)한 내용에는 실정을 숨긴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양제와 감덕(甘德)은 작처(酌處)를 중지하고 이어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남태적(南泰績)은 남태징(南泰徵)의 근족(近族)으로서 역적의 공초에서 거론된 것이 긴중한데도 아직껏 목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금 윤정현(尹廷顯)의 공초에 따라 다시 국문을 가하여야 하는데, 끝을 보기도 전에 갑자기 작처(酌處)하게 한 것은 커다란 실형(失刑)인 것입니다. 남태적은 마땅히 작처를 중지시키고 이어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해야 됩니다."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홍계유(洪啓裕)가 아뢰기를,
"남태적은 정절(情節)이 낭자하여 숨기기 어려운데도 완강히 참고 승복하지 않고 있으므로 여러 사람의 심정이 오래도록 답답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더구나 지금 윤정현에게 발고(發告)당한 것이겠습니까? 전후의 공초가 서로 어긋한 정도뿐만이 아니었는데도 작처(酌處)하라는 명이 또 뜻밖에 나왔습니다. 남태적은 마땅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그대로 엄중히 국문하여, 정법(正法)에 처해야 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24일 경자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이성룡(李聖龍)이 말하기를,
"전결(田結)의 등수(等數)가 너무 높기 때문에 전지(田地)가 진폐(陳廢)된 것이 많습니다. 지금 등수를 낮춘다면 반드시 모두 경작하게 되어 백성들은 전지가 없는 가운데 전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고 조정에서는 세금의 수입이 없는 가운데 세금의 수입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3월 25일 신축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임하(林下)의 사람들 가운데 정제두(鄭齊斗) 같은 사람은 경연(經筵)에 불러와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윤유가 전일의 상소(上疏)에서 어유봉(魚有鳳) 등 6인을 두루 천거하면서도 정제두에게는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특별히 정제두를 발탁하여 찬성(贊成)을 삼자 윤유가 이에 뒤따라 천거하여 임금의 뜻을 받들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신하여 수치스럽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27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사학(史學) / 인사(人事)
사신은 말한다. "윤유가 전일의 상소(上疏)에서 어유봉(魚有鳳) 등 6인을 두루 천거하면서도 정제두에게는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특별히 정제두를 발탁하여 찬성(贊成)을 삼자 윤유가 이에 뒤따라 천거하여 임금의 뜻을 받들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신하여 수치스럽게 여겼다."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관서(關西)에 반포하여 유교(儒敎)를 권장(勸奬)하게 하였으니, 송진명(宋眞明)의 아룀에 따른 것이다.
심성희(沈聖希)를 부응교(副應敎)로, 신만(申晩)을 헌납(獻納)으로, 박문수(朴文秀)를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조원명(趙遠命)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김한철(金漢喆)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3월 26일 임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특진관(特進官) 홍현보(洪鉉輔)가 말하기를,
"동몽 교관(童蒙敎官)을 설치한 것은 그 의도가 우연한 것이 아닌데도 근래에는 교수(敎授)하는 일이 없으므로 옛 법규가 모두 무너졌습니다."
하니, 임금이 지금부터는 산림(山林)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학식(學識)이 있는 사람으로 택차(擇差)하라고 명하였다.
각 군문(軍門)의 삭사(朔射)에서 1차에 만점을 받은 사람은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고 누차에 만점을 받은 경우에는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는 윤유(尹游)의 말을 따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한 죄인 남극(南極)이 복주(伏誅)되었다. 가산(家産)도 법대로 적몰(籍沒)하였다. 처음 국청(鞫廳)에서 남극을 신문하니, 그의 공초가 대략 호영(湖營)205) 에서 고한 것과 같았다. 또 안동(安東) 사람 남상룡(南相龍), 동래(東萊) 사람 이춘택(李春澤), 평해(平海) 사람 김수만(金遂萬)을 원인(援引)하여 청량회(淸涼會)에 든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또 비안(比安) 사람 김광좌(金光佐)를 원인하여 별계목(別契目) 60인 가운데 첫머리에 쓰여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 안동(安東) 사람 유징(柳澄)을 원인하면서 말하기를,
"남정명(南挺明)의 서신을 전해왔는데, 그 서신을 보따리 속에 넣어 남성운(南聖雲)이 묵고 있는 여관 주인인 김상문(金尙文)의 집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고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김상문을 신문하니 상문이 아니고 바로 창손(昌孫)이었는데, 김창손이 공초하기를,
"원래 남극(南極)의 보따리를 받아서 둔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남정명을 신문하니 정명이 아니고 곧 두정(斗精)이었는데, 남두정이 공초하기를,
"당초 남극과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입니다."
하였다. 권각(權恪)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남극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난해에 남정명(南挺明)이란 사람이 스스로 일컫기를, ‘나는 일찍이 수찬(修撰)을 지낸 사람인데, 귀양갔다가 방면되어 오다가 길에서 강도를 만났다.’고 하면서 신의 집에 왔었습니다."
하고, 남운기(南雲紀)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곧 민암(閔黯)의 사위인데, 남극(南極)·남정명(南挺明)은 모두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또한 청량산(淸涼山)을 왕래한 일도 없었습니다."
하였다. 유광우(柳光遇)를 신문하니 광우가 아니라 곧 광필(光弼)이었는데, 유광필이 공초하기를,
"신은 곧 무신년206) 의 역적 이윤행(李允幸)의 사위인데, 남극·남정명은 모두 본디 모르는 사람이고 또한 청량산의 모임에 간 일도 없었습니다."
하였다. 남극을 남두정(南斗精)과 면질(面質)시켰으나 서로가 알지 못하는 사이였으며, 또 권각(權恪)과 면질시키니 남극의 말에 황탄(謊誕)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남두정(南斗精)을 남운기(南雲紀)라고 하였으며 유징(柳澄)·한성천(韓聖天)과 임 선달(任先達)에 이르러선 금오랑(金吾郞)207) 이 두루 수포(搜捕)하였으나, 모두 그런 사람이 없었다. 다시 남극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남두정은 남정명이 아니고, 남정명은 따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유징은 안동(安東)에서 여러 번 보았고, 임 선달은 사리포(沙里浦)를 왕래하였고, 한성천(韓聖天)은 곧 유명한 점장이인 황성천(黃聖天)입니다."
하였다. 남극을 유광필·남운기와 면질시켰으나 모두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민원귀(閔元龜)를 신문하였는데, 민원귀는 곧 민암(閔黯)의 서손자(庶孫子)이었다. 민원귀가 공초하기를,
"처음부터 남극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또한 일찍이 청량회(淸涼會)에서 만난 적도 없습니다."
하고, 정몽석(鄭夢錫)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처음부터 남극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또 사리포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으며, 또한 배를 부린 일도 없습니다."
하였다. 남극이 스스로 발고한 것이 허망(虛罔)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밤을 이용하여 탈옥(脫獄), 도주하였다. 이는 나졸(羅卒) 김흥서(金興瑞)가 민원귀(閔元龜)에게서 조전첩(租錢帖)을 받고서 서리(書吏) 김태휘(金兌輝)와 밖에서 수직(守直)하는 나졸 오태희(吳泰禧)에게 몰래 청탁하여 민원귀와 남극의 칼[枷]을 벗겨 주게 하였는데, 남극이 이를 이용하여 도주한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뒤 곧 체포되었다. 국청(鞫廳)에서 다시 신문하니, 남극이 공초하기를,
"신이 도주한 것은 모두 민원귀가 시킨 것입니다."
했다가, 곧이어 또 말을 바꾸기를,
"신이 청량회(淸涼會)를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다만 황도중(黃道重)의 무리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권각(權恪)이 역모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민원귀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지난해 이협(李浹)의 집에서 남극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모여 있던 15, 16명은 모두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남극·이협과 함께 청량산에 가기로 약속했었습니다만, 신은 일이 있어서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잠시 남극을 만났었기 때문에 처음의 공초에서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남극을 민원귀와 면질시켰는데, 남극이 청량회 안의 사람들을 거론한 것이 또 전일에 공초한 것과 어긋나는 것이 많았다. 다시 민원귀를 신문하니, 민원귀가 공초하기를,
"조전첩(租錢帖)을 과연 만들어 주었는데, 신의 사촌(四寸)이 김시찬(金時贊)의 집에 와서 유숙하고 있으면 그로 하여금 찾아가지고 가도록 했습니다."
하였다. 김시찬은 곧 이우정(李宇鼎)의 묘지기 종인데, 이른바 사촌은 이우정의 손자이다. 곧 무신년에 나포(拿捕)된 이도문(李道文)의 아들로 아명(兒名)이 득희(得喜)인데, 민원귀의 적고모(嫡姑母)의 아들이다. 포도청(捕盜廳)에서 희득(喜得)을 잡아왔는데, 이름이 욱형(郁馨)이라고 하였다. 민원귀가 또 말을 바꾸기를,
"어찌 남극의 무리와 대사(大事)를 함께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기장 현감(機張縣監) 권적(權𥛚)이 신을 시켜 이협(李浹)에게 글을 보내게 했는데, 그때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박문수(朴文秀)의 외보(外補)를 방해한 것은 사충(四忠)208) 이 아직도 신원(伸冤)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서신을 보내는 것이다. 나학천(羅學川) 같은 사람도 정호(鄭澔)를 위하여 상소(上疏)하였다. 우리들에게는 성의가 있고, 또 이만유(李萬維) 같은 사람이 오래도록 제주(濟州)에서 귀양살고 있으니,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이 합세(合勢)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울산 부사(蔚山府使) 안경운(安慶運),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내주(鄭來周), 이름을 모르는 양산 군수(梁山郡守) 등도 함께 모의했다. 그 모주(謀主)는 이협(李浹)과 김서한(金瑞翰)인데 이협이 8월에 임금의 능행(陵幸)이 있을 적에 군사를 몰고 북으로 진격한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제야 국청의 대신(大臣) 이하의 관원이 청대(請對)하여 품지(稟旨)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의란(疑亂)시키려는 계책에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일찍이 무신년에도 윤순(尹淳)들을 무고(誣告)한 사람이 있었는데도 특별히 묻지 말라고 명하셨으니, 지금 민원귀가 끌어들인 것을 가지고 또한 경솔히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권적(權𥛚)을 비록 외보(外補)시켰지마는, 내가 어찌 역모를 한 것으로써 의심할 수 있겠는가?"
하고, 민원귀를 다시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민원귀가 말을 바꾸기를,
"청량회(淸涼會)에 신이 과연 가서 참여했는데, 배윤휴(裵胤休) 등도 함께 모여 역모를 꾀했습니다."
했다가, 또 말을 바꾸기를,
"신은 과연 가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권적(權𥛚) 등을 무고(誣告)한 것은 한때 연명(延命)하기 위한 계책이었습니다."
하였다. 민원귀가 물고(物故)되고 나서 국청(鞫廳)에서 다시 남극을 신문하고 또 황도중(黃道重)과 면질(面質)시켰는데, 어긋나는 말이 많았다. 또 정몽석(鄭夢錫)과 면질시켰으나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었으므로, 정몽석을 방송(放送)시키라고 명하였다. 또 남운기(南雲紀)와 면질시켰으나 모두 전일에 공초한 것과 같았다. 신중태(申重泰)·김영(金𠇟)·이협(李浹)·윤상갑(尹尙甲) 등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남극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고, 또 청량산에서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남극을 윤상갑·이협과 면질시켰으나, 모두 서로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권치(權緻)·남성운(南聖雲)·배윤휴(裵胤休) 등을 신문하니, 모두 남극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므로 남극과 면질시켰는데, 서로 쟁힐(爭詰)하여 입락(立落)209) 을 할 수 없었다. 남극을 4차나 형문(刑問)하니, 비로소 승복하기를,
"신이 스스로 지은 죄가 지극히 중하기 때문에 목숨을 연장할 계책을 쓰려고 청량산에서의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입니다. 신이 어릴 때 청량산을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지형(地形)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기 쉬운 점을 사용한 것입니다. 계(契)의 도목(都目)을 통문(通文)한 일은 모두 지어낸 것이고, 청음 서원(淸陰書院)에 대한 일은 신이 연전에 이런 의논이 있단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를 빙자하여 말을 만든 것입니다. 육국(六國)210) 과 위타(尉佗)211) 라는 이야기는 신이 문자(文字)를 대강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외효(隗囂)212) 의 말을 인용하여 영남(嶺南)에서 각립(角立)하는 뜻을 실증한 것입니다. 삼로(三路)를 방수(防守)한다는 일은 신이 영남(嶺南)에 조령(鳥嶺)·죽령(竹嶺)과 상주(尙州)·보은(報恩)으로 서로 통하는 길이 있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단지 영남(嶺南)만 거론한다면 달리 모착(摸捉)213) 하는데 빠질 것 같기에 삼로(三路)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이를 실증한 것입니다. 천금(千金)을 가지고 역사(力士)를 얻는다고 한 것은 그 일을 떠벌리려고 한 것이었으며, 수상선(水上船)에 대한 일은 이것도 갑자기 지어낸 말이었습니다. 발고한 사람들은 혹은 그 이름을 듣기도 하고 혹은 그 얼굴을 알기도 하고 혹은 없는 이름을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모두가 이름이 알려진 인사(人士)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두루 거론하여 그 모임에서 역모를 의논했다는 일을 실증한 것입니다. 시구(詩句)는 모두 신이 지은 것으로 ‘첩사(牒寺)의 한(韓)’이라는 시(詩)는 신이 진영(陳營)에 있을 적에 급박한 상황에서 갑자기 지은 것인데, ‘한(韓)’자로 압운(押韻)하여 운(韻)을 맞추었습니다. 유명한 점장이 황성천(黃聖天)을 비록 알고 있었습니다만, 바꾸어 한성천(韓聖天)이라고 한 것은 운(韻)에 맞춘 뜻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첩사(牒寺)는 원래 지명(地名)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마침 형방(刑房)이 첩보(牒報)를 고하는 소리를 듣고 일사[事] 자를 고쳐 절사[寺] 자로 만든 것입니다. ‘심회가 피차 같다[心懷彼此同]’고 한 시(詩)는 그 초본(草本)이 권각(權恪)의 집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권각의 집에서 시(詩)를 본 자취를 숨기기 위해 청량산에서 지은 것이라고 했으며, 다음 글귀는 그대와 내가 다름이 없다[君我將無同]고 고쳤는데, 곧 이는 김영(金𠇟)이 권각을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읊어 남겨둔 시(詩)입니다. 전후 공초한 것은 모두가 거짓이었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남극을 정형(正刑)에 처하고 나서 임금이 안국(按鞫)했던 신하들을 불러 본 것이다. 하교하기를,
"민원귀(閔元龜)가 죽은 것은 끝내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러나 남극(南極)이 이미 무고(誣告)임을 스스로 승복했으니, 피고인(被告人)들은 마땅히 작처(酌處)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권각(權恪)·남성운(南聖雲)·배윤휴(裵胤休)에게는 해서(該署)로 하여금 약물(藥物)을 제급(題給)하여 구료(救療)해서 보내게 하라고 명하였으며, 유광필(柳光弼)·남두정(南斗精)·황도중(黃道重)·신중태(申重泰)·윤상갑(尹尙甲)·김영(金𠇟)·이협(李浹)·권치(權緻)는 모두 방송시키게 하였으며, 남운기(南雲紀)는 민암(閔黯)의 딸이 계집종이 된 뒤에 취처(娶妻)했으면서도 민암을 역적이라고 일컫지 않았으니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이유로써 먼 곳으로 정배(定配)하게 하였으며, 오태희(吳泰禧)·김흥서(金興瑞)·김태휘(金兌輝) 등은 추조(秋曹)로 옮겨 감처(勘處)하게 하였으며, 포도청(捕盜廳)에 수금(囚禁)되어 있는 사람은 모두 방송시키게 하였다.
이날 또 하교하기를,
"윤정현(尹廷顯)이 고발한 것은 이미 허황(虛荒)한 것으로 귀결이 났으니,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사형(死刑)을 감하고 섬으로 귀양보내게 하고, 남격(南格)은 방송시키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때 국옥(鞫獄)이 자주 일어나서, 초봄에는 심건이(沈建伊)·이양제(李亮濟)의 흉언(凶言)에 대한 옥사(獄事)가 있었고, 또 서무필(徐武弼)의 괘서(掛書)에 대한 옥사가 있었으며, 또 김세진(金世進)의 부지군(負持軍)에 대한 옥사가 있었고, 또 윤정현(尹廷顯)·남격(南格)의 옥사가 있었으며, 또 남극(南極)·민원귀(閔元龜)의 옥사가 있었는데, 남극과 민원귀가 원인(援人)한 사람이 대다수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남인(南人)의 대가(大家)이고 역얼(逆孽)의 폐족(廢族)들이었으므로 국청(鞫廳)에서 체포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관전(寬典)을 시행하여 혹은 체포하기도 하고 혹은 체포하지도 않았으며, 체포한 사람도 모두 백방(白放)시킴으로써 이심(異心)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안정시켰다. 이때에 이르러 모든 옥사가 비로소 끝이 났다."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28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이때 국옥(鞫獄)이 자주 일어나서, 초봄에는 심건이(沈建伊)·이양제(李亮濟)의 흉언(凶言)에 대한 옥사(獄事)가 있었고, 또 서무필(徐武弼)의 괘서(掛書)에 대한 옥사가 있었으며, 또 김세진(金世進)의 부지군(負持軍)에 대한 옥사가 있었고, 또 윤정현(尹廷顯)·남격(南格)의 옥사가 있었으며, 또 남극(南極)·민원귀(閔元龜)의 옥사가 있었는데, 남극과 민원귀가 원인(援人)한 사람이 대다수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남인(南人)의 대가(大家)이고 역얼(逆孽)의 폐족(廢族)들이었으므로 국청(鞫廳)에서 체포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관전(寬典)을 시행하여 혹은 체포하기도 하고 혹은 체포하지도 않았으며, 체포한 사람도 모두 백방(白放)시킴으로써 이심(異心)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안정시켰다. 이때에 이르러 모든 옥사가 비로소 끝이 났다."
하교(下敎)하기를,
"영오(囹圄)214) 를 깨끗이 쓸게 하는 것은 고례(古禮)에도 있다. 더구나 근래에는 국수(鞫囚)가 없는 달이 없어 영오를 깨끗이 쓸 때가 없었으나, 지금은 국사(鞫事)가 이미 완료되었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즉시 깨끗이 쓸게 함으로써 감옥을 깨끗하게 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해당 당상관(堂上官)인 정형익(鄭亨益)·이춘제(李春躋)·조명익(趙明翼) 등의 죄에 대하여 말하기를,
"당상관(堂上官)은 죄수를 감시(監視)하는 직임이 아니니, 죄인을 체포한 뒤에는 당연히 분간(分揀)해야 됩니다."
하고, 도사(都事) 홍계백(洪啓百)의 죄에 대해 말하기를,
"죄인을 이미 잡았다는 이유로써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따로 법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분간(分揀)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써 정형익 등을 파직시키라 명하고, 홍계백은 도년(徒年)으로 감처(勘處)했다가 감등(減等)시켜 고신(告身)을 빼앗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집의(執義) 최명상(崔命相)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다. 남태적(南泰績)에 대한 전일의 계사(啓辭)를 고치기를,
"대계(臺啓)가 여러 해 동안 쟁집(爭執)을 계속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심정의 울분을 신리(伸理)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고발당한 것이 비록 부실(不實)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공초(供招)한 것을 살펴보면 전후가 상반(相反)되어 실정을 숨긴 것이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남태적을 작처(酌處)하라는 명은 마땅히 중지시켜야 하고 이어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윤정현(尹廷顯)이 끝내 허황했다는 이유로써 스스로 승복하지 않고 있으니, 숨기는 자취가 환히 드러났습니다. 윤정현을 마땅히 섬으로 귀양보내라는 명을 중지시키고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남격(南格)이 역적들의 도목(都目)을 불에 던져 태웠다고 한 이야기는 그가 이미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였고, 옥사(獄事)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석방시켰으니, 남격은 우선 방송시키지 말고 결말이 나기를 기다리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홍계유(洪啓裕)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윤정현을 지금 만약 경솔하게 작처(酌處)한다면, 거론당했던 사람들이 끝내 스스로 변백(辯白)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뒷날의 폐단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윤정현을 작처(酌處)하라는 명은 즉시 도로 정지시키고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윤정현이 고발한 것이 비록 허망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끝내 승복을 받지 못하였으니, 고발당한 사람들을 경솔히 석방할 수는 없습니다. 남격은 마땅히 그대로 가두어 두고 결말이 나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평안 도사(平安都事) 이도겸(李道謙)은 어사(御史)로 있을 때의 일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저지되었었는데, 이제 갑자기 첫머리에 의망(擬望)되어 낙점(落點)을 받았으니, 자못 택차(擇差)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이도겸은 마땅히 체차(遞差)시켜야 하고 전당(銓堂)215) 도 마땅히 무겁게 추고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옥천 군수(沃川郡守) 안종해(安宗海)는 행신(行身)이 거칠고 패리(悖理)하여 지난번 진청(賑廳)의 낭관(郞官)이 되어서는 적간(摘奸)을 나온 중관(中官)에게 문후(問候)하였으므로 하리(下吏)들이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군(本郡)에 임명되자 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많았으니, 이종해는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야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재령 군수(載寧郡守) 윤세관(尹世觀)은 성품이 거칠고 광망(狂妄)하므로 고을 백성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엿보고 있는 기녀(妓女)는 곧 좌수(座首)의 딸인데, 밤낮으로 그 기녀에게 빠져 있으므로 정사가 모두 그 좌수의 손에서 나오고 있으니, 윤세관은 마땅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하교하기를,
"낭관(郞官)이 문후(問候)한 일도 이미 놀랍고 괴이한 일인데 중관(中官)이 아뢰지 않았으니, 해당 중관도 파직시키라."
하였다.
3월 27일 계묘
밤1경(一更)에 별이 문창성(文昌星) 위로 지나갔다. 5경에는 별이 북두성(北斗星) 아래로 지나갔다.
임금이 우의정 김흥경(金興慶), 판의금(判義禁) 송인명(宋寅明), 형조 참의(刑曹參議) 유엄(柳儼)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의금부(義禁府)의 뇌물을 받은 이졸(吏卒)들에 대한 죄상(罪狀)의 경중(輕重)을 하문하니, 김흥경 등이 아뢰기를,
"이미 고의로 놓아준 일은 없고 단지 민원귀(閔元龜)의 뇌물을 받았을 뿐이니, 죽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하자, 임금이 김태휘(金兌輝)·오태희(吳泰禧)·김흥서(金興瑞)와 군졸들은 모두 엄형(嚴刑)을 가하여 섬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교리(校理) 김약로(金若魯)가 송인명(宋寅明)과 윤유(尹游)가 옥당(玉堂)의 문학(文學)하는 선비들을 별천(別薦)할 적에 자기 이름이 그 가운데 들지 않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숭반(崇班)의 재신(宰臣)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일이 있은 뒤부터 조속히 자처(自處)하려고 했었습니다만, 나타내지 않고 참으면서 발론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신(重臣)의 상소가 또 나왔으니, 공의(公議)는 준엄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신이 충후(忠厚)한 뜻에서 짐짓 드러내어 공척(攻斥)하지 않은 것은 신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수치스러움을 알고서 떠나게 하려는 것이니, 신이 어떻게 감히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인혐(引嫌)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이에 부교리(副校理) 남태량(南泰良)과 부수찬(副修撰) 유건기(兪健基)가 소장을 올리고 곧바로 나갔으니, 이들 두 사람은 송인명과 윤유가 천거한 사람들이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유복명(柳復明)이 면직되었다. 유복명은 대간(臺諫)의 말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체직을 허락하였다.
관서 안핵 어사(關西按覈御史) 이철보(李喆輔)와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사수(朴師洙)가 다시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죄수들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말을 바꾸어 승복(承服)하지 않았으므로, 이철보 등이 장문(狀聞)하였다.
3월 28일 갑진
진주 부사(陳奏副使) 박문수(朴文秀)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이를 인견(引見)하고 박문수에게 이르기를,
"어제 어사(御史)의 장계를 보니, 김세정(金世丁)은 곧 법금(法禁)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자들의 괴수(魁首)인데도 말을 바꾸면서 승복하지 않고 있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전례를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비록 사람의 수효가 합치되지 않더라도 반드시 사칙(査勅)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지명(地名)까지도 합치되지 않는데 만약 사칙(査勅)이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다 먼저 간 사행(使行)은 모두 사칙이 있은 뒤에 출발했었습니다. 그러나 경인년216) 초에는 사신을 보낸 전례가 없으니, 지금 사신을 비록 보내지 않더라도 불가할 것은 없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아직은 사칙의 소식이 없지만, 어떻게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임금이 친히 지내는 대제(大祭)에는 4일 동안을 산재(散齋)217) 하고 3일 동안을 치재(致齋)218) 했었다. 그런데 숙종(肅宗) 말년에는 오랫동안 친히 제향(祭享)하지 않았고, 지금 임금이 정미년219) 에 와서 비로소 친히 제향하였다. 그런데 다만 치재만 하고 산재는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잘못된 규례가 이루어졌다. 이날 승지(承旨) 이성룡(李聖龍)이 품지(稟旨)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근래에는 치재도 3일을 하지 않고 다만 국기(國忌)의 전례처럼 2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부터는 정일(正日)을 제외하고는 기일에 앞서 3일 동안 치재하게 하라. 그러나 산재에는 시사(視事)하게 되어 있으니, 탈품(頉稟)220)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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