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병오
일식(日食)이 있었는데, 지하(地下)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4월 2일 정미
하교(下敎)하기를,
"이 뒤로부터는 비록 문관(文官)일지라도 곤임(閫任)221) 으로서 등대(登對)하는 사람은 반드시 융복(戎服)을 착용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이는 대개 북병사(北兵使) 홍호인(洪好人)이 사폐(辭陛)할 때 융복을 착용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송인명(宋寅明)에게 반궁(泮宮)222) 에서 시사(試士)할 것을 명하였으니, 대개 삼일제(三日製)를 추행(追行)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최명상(崔命相)·장령 안상휘(安相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정현(尹廷顯)에 대한 전계(前啓)를 정지하였으니, 윤정현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었다. 남격(南格)에 대한 전계(前啓)를 고치기를,
"적(賊)의 도목(都目)223) 을 불에 던졌다는 말이 이미 윤정현의 공초(供招)에서 발현되었는데 능히 스스로 밝히지 못하였으니, 윤정현이 죽었다고 해서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남격을 마땅히 멀리 유배(流配)시켜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국수(鞫囚)가 도피한 초기에 의금부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들에 대해서는 심지어 잡아다 국문하라고 명하기까지 하셨는데, 의금부의 이졸(吏卒)들에게는 성급하게 가벼운 형벌을 시행하셨습니다. 아! 김흥서(金興瑞)의 무리가 뇌물을 받은 정상은 이미 오태희(吳泰禧)의 공초(供招)에서 나타났고 지엽(枝葉)을 고의로 놓아준 것도 또한 역적 남극(南極)의 결안(結案)에서 드러났는데, 경솔하게 앞질러 작처(酌處)한 것은 제방(堤防)을 엄중히 하고 후일의 폐단을 방지하는 이유가 아닙니다. 김흥서의 무리를 작처하라는 본부도 마땅히 모두 환수(還收)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중하게 형벌을 가하여 자백을 받아내도록 하되 무거운 형률로써 다스려야 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김한철(金漢喆)·홍계유(洪啓裕)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정현(尹廷顯)에 대한 전계를 정지하였다. 남격(南格)에 대한 전계를 고치기를,
"윤정현이 고(告)한 바가 비록 허망하다고 하지만 적(賊)의 도목(都目)을 불에 던졌다는 말은 이미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였으니, 윤정형이 죽었다고 해서 무단히 완전 석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남격을 마땅히 멀리 유배(流配)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혜청 낭청(宣惠廳郞廳) 정윤선(鄭潤先)은 대동미(大同米)를 봉납(捧納)할 즈음에 감색(監色)·고지기[庫直]와 부동하여 뇌물을 받고 법금(法禁)을 무릅쓰고 바꿔치기하다가 해당 당상관인 박문수(朴文秀)에게 발각되었습니다. 본댁(本宅)에서 분부하였다는 말이 이미 여러 공초(供招)에서 나왔는데도 염치(廉恥)를 무릅쓰고 그대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다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깁니다. 정윤선은 마땅히 잡아다 문초하여 정죄(定罪)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총융사(摠戎使) 조빈(趙儐)은 방자(放恣)하고 기탄(忌憚)함이 없어 은전(銀錢)의 고지기[庫直]를 시중드는 하인으로써 임용하였고, 신영(新營)의 감관(監官)을 사인(私人)으로써 차임(差任)하였으며, 봉부동(封不動)224) 의 은자(銀子)를 제멋대로 가져다가 쓴 것이 2천 냥(兩)이나 되는 많은 수에 이르렀고, 제번(除番)225) 의 수미(需米)와 강창(江倉)의 양곡을 함부로 친구(親舊)들에게 주고 사사로이 스스로 범용(犯用)하였습니다. 교사(驕肆)하고 남활(濫猾)한 습관을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조빈을 마땅히 먼저 파직(罷職)시킨 뒤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핵실(覈實)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조빈은 장차 공초를 기다려 감처(勘處)하기 위해 우선 파직시키지 말 것을 명하였다.
집의(執義) 최명상(崔命相), 정언(正言) 홍계유(洪啓裕)가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 국수(鞫囚)를 방송(放送)하는 날에 죄인 배윤휴(裵胤休)가 갑자기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의 일은 한 달이면 애매(曖昧)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애매한 것을 다시 어찌 꼭 한 달을 지연하여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알겠습니까? 별반(別般) 사단(事端)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숨겨 있는 것 같은 점이 있으니, 한번 구핵(究覈)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형조(刑曹)에 명하여 배윤휴를 엄중히 심문하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3일 무신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안상휘(安相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분관(分館)226) 을 신칙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는데 지금까지 거행을 하지 않으니, 승문원(承文院)의 상박사(上博士)를 마땅히 잡아다 추고(推考)하고 분관을 각별히 재촉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장령(掌令) 민치룡(閔致龍)은 이미 별다른 정세(情勢)가 없고 거처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도 국옥(鞫獄)이 바야흐로 일어났을 때 곧바로 올라오지 않았으니, 민치룡을 마땅히 체차(遞差)시켜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김한철(金漢喆)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악(經幄)의 여러 신하들이 종일토록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는데, 김약로(金若魯)가 출사(出仕)하기 이전에는 유건기(兪健基)가 몰염치(沒廉恥)하게 먼저 출사하는 것은 결코 부당합니다. 더구나 그의 경학(經學)의 천거는 한번 웃음거리가 되었었는데도 뭇사람의 조롱과 여러 사람의 비난은 한쪽편에 내던져 버리고 옥서(玉署)227) 의 벼슬자리에 뻔뻔스런 얼굴로 앞에 나와서 염우(廉隅)를 무너뜨리고 진신(搢紳)에 수치를 남겼으니, 유건기를 마땅히 개차(改差)하여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유건기가 당초에 인혐(引嫌)한 것은 이미 너무 지나친 점이 있었으니, 하필 거취(去就)를 같이하겠는가?"
하였다.
4월 4일 기유
권업(權𢢜)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조정(趙侹)을 장령(掌令)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응교(應敎)로, 정형복(鄭亨復)을 교리(校理)로, 이승원(李承源)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관학 유생(館學儒生)을 불러 제술(製述)과 강경(講經)으로 나누어 시험을 보여, 강경에는 이창유(李昌儒)를 뽑고 제술에는 민제악(閔齊岳)·박창윤(朴昌潤)을 뽑아서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228) 하게 하였다. 삼일제(三日製)의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김굉(金硡)도 또한 직부 전시하게 하였다.
4월 7일 임자
임금이 태묘(太廟)에 거둥하였으니, 하향(夏享)을 행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망묘례(望廟禮)를 행하고 각실(各室)의 책보(冊寶)를 봉심(奉審)하였으며, 이를 마치고 이어서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망묘례를 행하고 책보를 봉심하였다. 예종묘(睿宗廟)에는 세자(世子) 때의 금보(金寶)가 있었는데 손을 대자 곧 부서졌으니, 대개 백철(白鐵)인 때문이었다.
4월 8일 계축
임금이 태묘(太廟)에 친히 제사지냈다.
4월 9일 갑인
동지 상사(冬至上使) 밀창군(密昌君) 직(樴)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분부를 환수하고 단지 그 관직만을 삭제하였다. 직(樴)의 품계(品階)가 1품으로서 대신(大臣)과 동등하기 때문이었다.
경상 감사 권업(權𢢜)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18년 전에 이 지방에서 대죄(待罪)229) 할 때에 영남(嶺南)의 유생(儒生)들이 과장(科場)에서 난동을 부린 일을 가지고서 장문(狀聞)하여 죄를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일도(一道) 유생의 원독(怨毒)이 뼈에 사무치고 여러 사람의 감정이 똑같은 목소리로 반드시 신을 망측한 곳에 두고자하여 무함이 번갈아 나왔으니, 신이 영남 땅에 다시 한걸음도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 판별되었습니다."
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부터 제관(祭官)은 모두 대전(大典)230) 에 의해서 옥(玉)을 차고 행사(行事)할 것을 명하였으니,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호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덕원(德源)에 은혈(銀穴)이 있으니, 청컨대 은점(銀店)을 설치하여 채용(採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폐단이 있다."
하였다. 송인명이 굳이 청하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장령(掌令) 조정(趙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윤상(倫常)이 두패(斁敗)되어 난역(亂逆)이 멋대로 횡행하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방금(防禁)이 해이해지는 바람에 지중(至重)한 죄를 범한 자도 또한 발탁[甄錄]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작년에 한두 가지를 약간 논하였는데, 그 때에 아전(亞銓)231) 의 상소가 신을 비난하기에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 신축년232) ·임인년233) 사이에 이익을 즐겨하고 수치심이 없는 무리들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들러붙어 그의 응견(鷹犬)234) 이 되기를 달갑게 여겼고 참독(憯毒)한 논의에 팔을 걷어붙이고 담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저 윤대영(尹大英)이라는 자도 바로 그중의 하나입니다. ‘칼을 보내서 참수(斬首)를 행하자.’는 논의도 그의 입에서 나와 그 독수(毒手)와 화심(禍心)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齒]를 갈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 이후로부터 공의(公議)에 저지를 당하여 온 지가 6, 7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 이정필(李廷弼)은 무신년235) 에 변란(變亂)이 일어날 때를 당하여 봉강(封疆)의 신하가 된 몸으로 병부(兵符)를 버리고 인(印)을 내던지고 시골의 골짜기로 몸을 숨겨 적세(賊勢)로 하여금 충척(充斥)236) 하게 하였으니, 만일 당조(唐朝)의 6등(等)의 죄과로서 기준을 삼는다면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그에게 있어서는 또한 다행한 일인데, 어찌 정주(政注)의 사이에 거론할 수가 있겠습니까? 박윤동(朴胤東)의 ‘갑진년237) 에 국가를 만회(挽回)했다.’는 말과 을사년238) 에 정세윤(鄭世胤)의 집 연석(宴席)에서 수창(酬唱)한 시(詩)에 이르러서는 말을 지어낸 것이 흉참(凶慘)하고 마음씀이 불측(不測)하니, 결단코 용이하게 검의(檢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과연 논열(論列)하였던 것인데, 이현망(李顯望)이 인피(引避)하는 장주(章奏)에서 칼날을 옮겨 저격(狙擊)하였습니다. 신의 논열한 바가 그에게 무슨 관련이 있기에 이와 같이 후욕(詬辱)을 하는 것입니까? 그가 이현장(李顯章)의 아우로서 엄하게 성토(聲討)하는 논의를 듣기 싫어하고 반드시 복수해야 될 사수(私讎)처럼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수찬(修撰)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여 관학(館學) 재생(齋生)의 경의(經義)에 밝지 못한 폐단을 논하고 모두 시강(試講)한 이후에 비로소 입재(入齋)를 허락할 것을 청하였다. 또 평안 도사(平安都事) 김징경(金徵慶)의 구차하게 전차(塡差)됨을 논하여 전조(銓曹)의 당상관을 추고(推考)하고 김징경을 체차(遞差)할 것을 청하였다. 또 먼 지방에 있는 문관(文官)들의 오래 근무하는 폐단을 논하여 말하기를,
"이번 대정(大政)에서 수령의 자리에 문사(文士)는 전연 참여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전조에 신칙하여 빈자리에 따라 견용(甄用)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수령을 택차(擇差)할 때에 문·무(文武)에 구애하지 않으니, 혹 많기도 하고 혹 적기도 한 것은 사세가 본디 그러한 것이다."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홍계유(洪啓裕)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건기(兪健基)의 일은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주 목사(定州牧使) 황응수(黃應洙)는 일찍이 남읍(南邑)에 부임하였을 때 사람들의 비평이 많이 있었는데, 외람되게 본직(本職)을 제수하니 여론이 시끄러웠습니다. 대계(臺啓)를 정지한 것은 성급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에 스스로 처신(處身)할 바를 생각하지 않고 서둘러 몰염치하게 부임하였으니, 황응수를 마땅히 파직시켜 서용(敍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계(臺啓)는 체모가 중대하여 수쇄(收殺)하기 이전에는 비록 조령(朝令)일지라도 거행할 수가 없는데, 평안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황응수는 이미 정계(停啓)하였으니 재촉해 발송(發送)하라.’고 청한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대각(臺閣)을 경시하고 사체(事體)를 손상한 것은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박사수를 마땅히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부승지(右副承旨) 조진희(趙鎭禧)는 몸가짐이 비루하고 패려(悖戾)하여 전연 사대부(士大夫)의 규모(規模)가 없습니다. 때를 따라 부앙(俯仰)하며 여러 형태로 몸을 변화시켜 공의(公議)에 버림을 받은 지 오래인데, 이 직임을 제수하게 되자 여론이 시끄러웠으니, 조진희를 마땅히 개정(改正)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박사수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고, 황응수와 조진희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조진희는 젊었을 때부터 언행(言行)이 비루하고 패려하였으며 창루(娼樓)에 출입하였다. 등제(登第)한 초기에 ‘청루(靑樓)의 남은 꿈이 용문(龍門)에 올랐다[靑樓餘夢登龍門]’는 민요(民謠)가 있었는데, 언론(言論)을 변환(變幻)하며 동서(東西)에 분주하였다. 노론(老論)이 당국(當局)하였을 때는 홍계적(洪啓迪)과 교분을 맺었고 군흉(群凶)이 용사(用事)할 때는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에게 들러붙어 그들의 응견(膺犬)이 되었다. 을사년239) 이후에는 또 다시 노론에게 정성을 바치다가 도 무신년240) 부터는 조문명(趙文命)의 무리에게 이[蝨]처럼 들러붙어 만윤(灣尹)241) 에 발탁하기까지 하였는데, 대계(臺啓)가 한번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3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註 239]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240]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241] 만윤(灣尹) : 의주 부윤(義州府尹).
사신은 말한다. 조진희는 젊었을 때부터 언행(言行)이 비루하고 패려하였으며 창루(娼樓)에 출입하였다. 등제(登第)한 초기에 ‘청루(靑樓)의 남은 꿈이 용문(龍門)에 올랐다[靑樓餘夢登龍門]’는 민요(民謠)가 있었는데, 언론(言論)을 변환(變幻)하며 동서(東西)에 분주하였다. 노론(老論)이 당국(當局)하였을 때는 홍계적(洪啓迪)과 교분을 맺었고 군흉(群凶)이 용사(用事)할 때는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에게 들러붙어 그들의 응견(膺犬)이 되었다. 을사년239) 이후에는 또 다시 노론에게 정성을 바치다가 도 무신년240) 부터는 조문명(趙文命)의 무리에게 이[蝨]처럼 들러붙어 만윤(灣尹)241) 에 발탁하기까지 하였는데, 대계(臺啓)가 한번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삭녕(朔寧)의 유학(幼學) 이석보(李碩輔) 등이 상소하여 본군(本郡)의 백지(白地)에 세금을 징수하는 폐단을 말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전라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금성 현감(錦城縣監) 이형곤(李衡坤), 남원 현감(南原縣監) 서종진(徐宗鎭), 흥양 현감(興陽縣監) 권상직(權相稷) 등의 장물(贓物)을 탐한 불법적인 일들을 적발하여 조목별로 나열해서 죄주기를 청하니, 일이 의금부(義禁府)에 내려졌다. 해부(該府)에서 장차 경미하게 감죄(勘罪)하려고 하자 조현명이 또 조목별로 사계(査啓)하니 해부에서 부득이 장류(杖流)로써 적용하였는데, 끝에 가서 또 경감하여 도배(徒配)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그 형률 적용이 잘못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4월 10일 을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여 북자(北咨)의 일을 의논하였다. 예조 판서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전례를 상고한다면 칙서(勅書)를 사실(査實)하기 이전에는 사신(使臣)을 보내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자문 가운데의 ‘의처(議處)’라는 두 글자는 우리 나라 신민(臣民)의 마음에 있어서는 비록 몹시 분통스럽지만 저들에게 있어서는 문서(文書)의 사이에 으레 쓰는 용어(用語)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욕(辱)되게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재자관(䝴咨官)을 먼저 보내어 ‘금방 사구(査究)하겠다.’는 뜻으로써 보고하고 사행(使行)을 우선 정지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의처(議處)하겠다.’는 말이 있었으니, 어찌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아뢰기를,
"금년 우리 나라의 책력(冊曆)이 청(淸)나라의 책력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명년(明年)에 윤달을 넣는 것도 또한 장차 부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관상감(觀象監)의 관원을 사행(使行)에 보내서 책력을 만드는 새로운 법(法)을 얻어 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개 순치(順治)242) 이래로부터 저 나라에서 시헌력법(時憲曆法)을 사용하고 우리 나라에서도 또한 이 법을 사용하였다. 강희(康熙)243) 말년에 이르러 저 나라에서 《역법고성(曆法考成)》이란 책을 만들었는데, 그 역법이 시헌력법과 대략 동일하였다. 그런데 금년부터 저 나라에서 또 새로운 역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책력(冊曆)의 절후(節候)와 시각(時刻)이 모두 참차(參差)244)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새로운 역법을 얻어 올 것을 청하였으나,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비로소 인쇄한다면 세전(歲前)에는 책력을 반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 구법(舊法) 그대로 하고 다만 3,4월 수판(數板)은 인쇄하지 않았다가 윤달을 당기고 물리는 방도로 삼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내년 책력이 저 나라와 동일한 것은 단지 윤달을 넣는 것과 월삭(月朔)의 대소(大小)일 뿐이며, 절후는 일(日)·시(時)가 모두 같지 않았다.
전주(全州)에 있는 예종(睿宗) 태봉(胎峰) 비석(碑石)의 절상(折傷)된 것과 대흥(大興)에 있는 현종(顯宗) 태봉의 붕괴된 곳을 모두 수축(修築)할 것을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윤순(尹淳)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이 부신(符信)을 빼앗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니, 공경히 받을 즈음에 반드시 공복(公服)을 입는 것은 대개 어압(御押)을 공경하는 까닭입니다. 권이진(權以鎭)이 취나(就拿)할 적에 백의 편복(白衣便服)으로써 표신(標信)을 받았으니, 군명(君命)을 업신여기고 체통을 무너뜨림이 이미 몹시 한심한 일입니다. 심지어는 일산(日傘)을 펼쳐들고 길을 인도하기까지 하여 거의 무고(無故)하게 체귀(遞歸)하는 사람과 같이 하기도 하였는데, 비록 의금부[金吾] 하리(下吏)의 말로 인해서 곧바로 중지하기는 하였지만 그 조금도 조심하고 두려워함이 없는 정상은 더욱 몹시 해괴한 것입니다. 권이진을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협시 내관(夾侍內官)은 좌우(左右)에서 떠나지 않고 성궁(聖躬)을 부호(扶護)하는 것이 바로 그 직임입니다. 그런데 일전에 태묘(太廟) 문 밖에서 전하께서 발을 잘못 디뎠을 때 비록 다행히 성체(聖體)는 손상이 없으셨지만 협시 내관이 곧바로 부축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잡아다가 문초하여 정죄(定罪)해야 합니다. 그날 배종(陪從)하였던 여러 승지(承旨)들은 전하께서 발을 잘못 디뎠을 즈음에 약원(藥院)에 전보(轉報)하지 않았으니, 가까운 곳에서 모신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 승지들도 마땅히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총융사(摠戎使) 조빈(趙儐)은 오늘 옥에 갇혔다가 내일 아침에 보석[保放]될 것입니다. 죄인(罪人)은 납공(納供)하기 이전에는 감히 보방(保放)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준례입니다. 질병이 있는 것으로 핑계를 대어 초기(草記)245) 로 번거롭게 청하니,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의금부의 해당 당상관을 마땅히 종중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윤허하였다.
정언(正言) 김한철(金漢喆)이 상소하여 붕당(朋黨)을 제거하는 요령을 논하기를,
"붕당을 타파한다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제목(題目)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 요령을 얻지 못하게 되면 이따금 나라를 망치는 데 이르게 되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는 쉽사리 할 수 있으니, 다만 마땅히 충역(忠逆)의 분간을 엄중히 하고 사정(邪正)의 분변을 명백히 하여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능히 한 시대의 준걸(俊傑)들을 모아 백년의 폐단을 제거하여, 색목(色目)에 구애되지 않고 오직 인재들만을 뽑는다면, 임금의 표준을 세우는 아름다움을 오늘에 볼 수가 있고 빙탄(氷炭)이 한 그릇에 같이 있다는 비난이 성세(聖世)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미에 또 백성을 보호하고 재물(財物)을 절약하는 방도를 말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이때 임금이 바야흐로 ‘붕당을 제거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으로써 구호[號]를 삼았기 때문에 김한철이 두 가지 일을 들어서 말을 하였는데, 말이 다 우회(迂廻)하여 뜻이 분명하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비웃었다.
4월 11일 병진
임금이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시강(試講)하였다. 전적(典籍) 이동원(李東元)이 수석(首席)을 차지하였으므로 숙마(熟馬)를 하사하고, 불통(不通)된 자들은 모두 파직시켰다.
윤순(尹淳)을 판의금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형조 판서로, 유숭(兪崇)을 공조 참판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정제(李廷濟)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교리(副校理)로, 신치근(申致謹)을 수찬(修撰)으로, 김약로(金若魯)를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지평(持平)으로 삼았으니, 이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의 정사이었다. 신치근은 남태징(南泰徵)의 말[馬]을 추송(推送)하여 일찍이 송진명의 가로막은 바가 되었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다시 관직(館職)을 제수하니 송진명의 인사 행정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양제(李亮濟)·감덕(甘德)에 대한 전계는 정지하였다.
정언(正言)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수인(囚人) 안종해(安宗海)의 공사(供辭)를 보니, 문후(問候)한 일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 중관(中官)246) 이 왔을 때 안종해가 은근히 위로하며 문후한 상황은 같이 앉아 있던 사관(史官) 송교명(宋敎明)이 보고 해괴하게 여기어 돌아가 제우(儕友)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지금 안종해가 유독 낭료(郞僚)·중관(中官)만을 들어서 증인으로 삼고 사관(史官)은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밀창군(密昌君) 직(樴)은 이미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있는데 상사[上价]의 책임은 더욱 마땅히 각별해야 합니다. 자급(資級)의 고하(高下)는 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마땅히 똑같이 잡아다 처단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으로써 문목(問目)을 첨가하여 다시 추고하라. 종신(宗臣)을 아울러 나처(拿處)하라는 청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바이다."
하였다.
형조(刑曹)에서 배윤휴(裵胤休)를 추문(推問)하니, 배윤휴가 공초(供招)하기를,
"그 때는 실성(失性)했었기 때문에 말한 바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나중에 남성운(南聖雲)의 말을 들어보니 과연 ‘1월의 설’이 있었다 합니다."
하였다. 형조 참의 유엄(柳儼)이 남성운을 추문(推問)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성운은 이미 하향(下鄕)을 하였으니 불문에 붙일 것이나, 그가 애매(曖昧)한 것 같다. 하필이면 한 달을 기다린 뒤에야 이에 알겠는가? 장차 다시 영남(嶺南)을 암담(黯黮)한 가운데 두게 될 것이니, 엄격히 다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위엄을 베풀어 엄중하게 심문하라."
하였다. 배윤휴가 수차에 걸쳐 심문해도 굴복하지 않으니, 드디어 사형을 감면하여 섬으로 유배(流配)시킬 것을 명하였다. 배윤휴는 배정휘(裵正徽)의 서자[孼子]였다.
경상도·강원도·평안도에 서리가 내리고 우박(雨雹)이 떨어졌다. 전라도에 우박이 떨어지고 눈이 왔으며, 간성(杆城)에는 지진(地震)이 있었다.
4월 12일 정사
헌납(獻納) 신만(申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군주의 덕(德)이 성취(成就)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있는데, 삼강(三講)247) 과 양대(兩對)248) 를 매양 정지시키니, 하루 햇볕을 쪼이고 열흘을 춥게 하는 것 같아 이미 그에 대해 우려되는 바가 많습니다. 비록 개강(開講)할 때라 하더라도 문의(文義)만 약간 설명하고 그만두니, 어찌 개발(開發)하고 성취(成就)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료(臣僚)를 진접(晉接)하는 것은 단지 상참(常參)과 차대(次對)가 있을 뿐인데, 상참을 설행(設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차대는 탈품(頉稟)249) 이 태반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인대(引對)에 있어서는 종일 강론(講論)하는 것이 몇 개의 장계(狀啓)에 지나지 않으니, 국사(國事)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매양 재이(災異)를 당하시면 번번이 도움을 요구하는 하교를 내리시는데, 재앙이 지나간 뒤에는 이 마음이 계속되지 않고 기상(氣像)이 종전과 같으니, ‘하늘을 공경하되 실상으로써 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뿐이겠습니까? 지난 겨울에 있어서는 육지(陸贄)250) 의 주의(奏議)에 흥감(興感)하여 대고(大誥)를 발포하고 언로(言路)를 널리 열었는데, 이미 공거(公車)251) 의 쌓인 것이 없고 추요(蒭蕘)252) 의 말을 선택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지척(咫尺)의 앞자리에서 오로지 찬송(贊頌)만 일삼고 동류(同類)를 추켜세워 은덕을 베푼 기색을 보이려 하면서 나라의 일을 보기를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수척(瘦瘠)한 것을 보는 것과 다름없이 하니, 이래가지고서야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조회에 임하여 탄식을 하면서 언로(言路)로서 근심을 한 것이 그것이 과연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라면, 전일에 말을 한 것으로 인해 죄를 얻어 오랫동안 폐고(廢錮)된 자들은 모조리 다 소석(昭釋)하여 발탁[甄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거의 사기(士氣)는 스스로 진작되고 바른 말은 모두 진언(進言)될 것이므로 연신(筵臣)이 이것으로써 말을 한 자가 많았습니다. 전하께서는 강경하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심지어는 적소(謫所)에 있는 여러 신하들을 품질(稟秩)에 둔 것을 가지고서 도신(道臣)을 특별히 추고(推考)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조가(朝家)에서 언자(言者)를 징계하여 다스림이 이와 같이 엄중하니, 인정(人情)이 어찌 뜨거운 국[羹]에 입을 데어 놀란 나머지 찬 나물도 불면서 먹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하께서는 말을 들으실 즈음에 그 말의 옳고 그름은 살피지 않으시고 단지 그 사람의 어떠한 것만을 봅니다. 소원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면 말이 비록 옳더라도 싫어하여 배척하고, 친근(親近)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면 그 말이 비록 그르더라도 너그럽게 용납합니다. 혹은 그당시 꺼리는 일을 촉범(觸犯)하여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기라도 하면 참인(讒人) 등의 하교를 쉽사리 가(加)하니, 전하께서 어찌 이러한 등의 사령(辭令)으로써 대각(臺閣)의 신하에게 가볍게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대신(四大臣)의 일은 두 신하는 비록 이미 소설(昭雪)되었지만 함께 일한 일체(一體)의 사람의 아직도 단서(丹書)253) 에 있어 유원(幽冤)을 풀 길이 없습니다. 죄가 종사(宗社)에 있고 일이 흉역(凶逆)에 관련된 무리들은 생전(生前)과 사후(死後)에 관질(官秩)이 그대로 같아서 처분(處分)의 도치(倒置)됨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선(善)을 권장하고 악(惡)을 징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해 1월〉 19일 하교(下敎)에 있어서는 비록 부자(父子)간이라 하더라도 서로 전(傳)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여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일종의 숙습(宿習)에 고질화되어 그 마음을 함닉(陷溺)한 자들이 이에 감히 이를 구실로 삼아 거리낌없이 날뛰고 이철보(李喆輔)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더욱 기탄함이 없으니, 아!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와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은 이것이 어떠한 흉역(凶逆)인데도 이것으로써 녹훈(錄勳)하고 이것으로써 설과(設科)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과와 녹훈(錄勳)은 비록 다르지만 사실은 일관(一貫)되는 것으로서 김일경과 목호룡이 복법(伏法)되어 공훈이 이미 파삭(罷削)되었다면 과명(科名)이 오히려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을사년254) 의 삭방(削榜)은 처분(處分)이 지극히 엄중한 것인데, 성상의 의지가 견고하지 못하시어 수시(隨時)로 흔들림을 보여 처음에는 고쳐서 별과(別科)로 삼았다가 뒤에는 다시 그 애초의 이름을 회복하였고, 맨나중에는 이에 승선(承宣)의 망단(望單)을 특서(特書)하여 발탁을 가로막은 정관(政官)을 무겁게 처벌하였습니다. 이 무리들이 갑절이나 기세(氣勢)가 증가되어 의리(義理)로써 자부(自負)하고 혹은 역명(逆名)으로 배척하면서 멋대로 말을 하면서 조금도 아랑곳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의 말과 같다면, 김일경의 관작을 회복할 수 있고 목호룡의 공훈을 그대로 둘 수 있으며 과명(科名)도 또한 하자가 없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또한 전하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오늘의 조정에 이와 같이 무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사람들이 바야흐로 그 과명(科名)을 지의(指議)하고 있으니, 방중(榜中)의 사람들은 다만 마땅히 송축(悚縮)하여야 할 터인데, 이에 감히 팔뚝을 걷어붙이고 갑자기 뛰어나와서 공공연히 멋대로 지껄여대며 피를 뿜으니, 이와 같은 도리(道理)는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듯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찮은 일과 소소한 잘못이 될 것이니, 어찌 족히 깊이 나무랄 것이 있겠습니까? 애석한 것은 전하께서 끝내 엄정한 말씀으로 엄격히 물리쳐서 분명히 전헌(典憲)을 베풀지 않으시어 군강(君綱)은 존엄하지 못하고 신기(臣紀)는 더욱 무너지니, 신은 삼가 가슴 아프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여 책망하기를,
"신만의 상소는 살피고 힘쓸 곳이 없지 않으나, 지의(旨意)를 알겠다. 아! 〈지난해 1월〉 19일 하교한 뒤에 오늘의 신자(臣子)된 자가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신만이 예전에 제배(除拜)가 있을 적마다 번번이 다 시애(撕捱)하다가 이제는 그 구습(舊習)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한심한 일이다. 체차(遞差)시키고 그 상소는 도로 돌려주라."
하였다.
사간원 【정언 홍계유(洪啓裕)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사행(使行)은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있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반자(班資)의 높고 낮음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정사(正使) 밀창군(密昌君) 직(樴)을 마땅히 똑같이 나처(拿處)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치근(申致謹)은 지난날 북로(北路) 한 가지 일이 물의(物議)를 크게 일으켜 오랫동안 청관(淸官)의 자리에 진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수년(數年) 동안 외직(外職)에 보임된 것으로써 그 하자를 말끔히 씻을 수 없는데도 곧바로 관직(館職)을 제수하여 듣는 이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신치근을 마땅히 개차(改差)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유건기(兪健基)는 탄핵하는 글의 먹물이 마르지도 않아서 숙견(宿趼)을 바로 의망(擬望)하였으니, 일은 비록 매우 하찮은 것이지만 관련된 바가 작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오랫동안 청관(淸官)의 자리에 나가지 못했던 신치근을 갑자기 관직(館職)에 검의(檢擬)한 것은 더욱 정례(政例)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이조(吏曹)의 해당 당상관을 마땅히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겸대(兼臺)255) 의 사체(事體)는 시대(時帶)와 차이가 없습니다. 서장관(書狀官) 윤휘정(尹彙貞)을 나처(拏處)하라는 분부가 내려진 이후에 곧바로 겸대(兼帶)를 감(減)할 것을 청하지 않고 겸임한 대함(臺銜)을 가지고 취리(就理)256) 토록 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으니, 해당 승지(承旨)를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호족(豪族)이나 귀족(貴族)의 세력이 있는 집안에서 침학(侵虐)하는 사단이 많아서 혹은 사문(私門)에서 징채(徵債)하여 사람들과 이익을 나누기도 하고 혹은 점포[廛]의 물건을 먼저 사용한 뒤 그 값을 치르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법사(法司)에서는 그 죄를 다스릴 수가 없고 궁민(窮民)은 그 직업을 보전할 수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사문(私門)에서 징채(徵債)하는 것과 점포의 물건을 먼저 사용하는 등류를 마땅히 엄격히 금단(禁斷)을 가해서 발각되는 대로 무겁게 추궁하고 비록 종척(宗戚)이나 중신(重臣)일지라도 일체 너그럽게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만(申晩)의 상소는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는데도 전하께서 성급하게 당습(黨習)으로써 의심하시고 심지어는 정외(情外)의 하교를 내리기까지 하시니, 전하의 대각(臺閣)을 대우하심이 어찌 그다지도 야박하십니까? 신만은 젊은 나이로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에 출입한 지 이제 몇 해가 되었습니다. 매양 정세(情勢)를 핑계대고 제수함에 있어 번번이 사양을 하여 일찍이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고 관사(官司)의 부정(不正)을 규정(糾正)하는 것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지 않기에 신은 일찍이 개탄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한 통의 상소가 조금 직분(職分)을 다하게 되자 이에 도리어 꾸짖어 물리치고 꺾어 눌러서 조금도 유난(留難)하지 아니하셨으니, 언로(言路)의 통색(通塞)에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신만을 체차(遞差)시키라는 분부를 마땅히 다시 환수하여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승지를 추고(推考)하는 것과 사문(私門)에서 징채(徵債)하고 점포의 물건을 먼저 사용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고, 나머지는 모두 따르지 않았다. 신만의 일에 이르러서는 하교하기를,
"신만이 제직(除職)만 하면 번번이 다 시애(撕捱)하다가 그 마음을 인내하지 못한 나머지 결국 구습(舊習)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비록 해괴하지만 오히려 용서할 수 있으나, 사대신(四大臣)의 일에 이르러서는 〈지난해 1월〉 19일 하교(下敎) 이후에 오늘의 신자(臣子)된 자가 어찌 감히 입을 놀릴 수가 있겠는가? 단지 체직(遞職)만 시킨 것도 또한 말감(末減)한 것인데, 홍계유(洪啓裕)가 영호(營護)한 것은 몹시 무엄한 데에 관계되니, 이것은 처분(處分)을 경이하게 한 까닭이다. 신만은 파직시켜 서용(敍用)하지 말고 홍계유는 먼저 체직시킨 다음 파직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지난날 신축년257) 에 있어서 국세(國勢)가 늠연(澟然)하여 마치 한 가닥의 터럭과 같았다. 이 시기를 당해서 저사(儲嗣)를 세워 대리(代理)하는 것은 하루라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는 것이니, 대신(大臣)이 된 자는 마땅히 화복(禍福)을 돌아보지 않고 몸소 스스로 건청(建請)했었어야 할 것인데, 이에 이정소(李廷熽)·조성복(趙聖復)의 무리로 하여금 대신 청하게 하였다. 그리고 연명 차자[聯箚]가 이미 올라가 조태구(趙泰耉)가 잠입(潛入)함에 미쳐서는 또 그 뒤를 따라서 중지하기를 청하여 저 무리들의 구실을 삼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가 《소희행례기(紹熙行禮記)》 발문(跋文)을 쓰기를, ‘애석하도다! 신축년258) ·임인년259) 의 대신(大臣)들이 능히 이 일을 처리하지 못하였도다.’ 하였다. 만일 이것으로써 사대신(四大臣)을 추구(追咎)한다면 의리(義理)와 사면(事面)이 정대(正大)하고 광명(光明)할 것이며 저 사대신들도 또한 처벌을 사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단죄하는 이유가 이에 도리어 연차(聯箚)에 있으니, 대저 연차로서 죄를 삼는 것은 이는 대리(代理)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국시(國是)가 밝지 못한 이유이며 난역(亂逆)이 구실을 삼는 이유이다. 그리고 교통(交通)하여 사사로이 만나뵈온 것에 있어서는 만일 제일의(第一義)로써 기준한다면 진실로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대개 또한 종사(宗社)를 위해 저사(儲嗣)를 세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형수(兄嫂)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건진다.’는 의리가 되기에 방해로움이 없으니, 진실로 깊이 추구(推究)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설은 그 유무(有無)·허실(虛實)은 본디 알 수가 없다. 가령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위호(位號)가 결정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니, 이것을 또 어찌 족히 죄줄 것이 있겠는가? 대저 종사(宗社)를 보호하고 저사(儲嗣)를 세우는 대절(大節)이 결국 여러 신하들의 협력(協力)을 힘입었고 머리를 나란히 하여 함께 죽은 것은 또한 군흉(群凶)의 영독(逞毒)에 연유한 것이니, 도리어 어찌 반드시 가혹하게 적발하고 뒤따라 심리하여 그 죽음으로 섬겨 사직(社稷)을 붙들은 대절을 가리울 필요가 있겠는가? 성립되지도 않는 죄를 억지로 덮어씌워 오랫동안 단서(丹書)의 가운데 두고 아울러 대리(代理)의 의리까지 세상에 명백하지 못하게 한 것은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대하다. 이제 이 신원(伸冤)하자는 논의는 어찌 다만 사대신의 처지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신만의 말은 말인즉 옳으나 그 말을 처음 대각(臺閣)에 들어간 날에 하지 않고 이미 명환(名宦)을 역임하고 난 뒤에 하게 되니, 이것이 식자(識者)가 신만을 단점으로 여기는 바이다. 홍계유의 계사(啓辭)는 대체(臺體)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한꺼번에 모조리 당습(黨習)으로 배척하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31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외교-야(野)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상업(商業) / 변란-정변(政變)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 사법-탄핵(彈劾) / 인사-관리(管理) / 재정-잡세(雜稅) / 금융(金融)
[註 255] 겸대(兼臺) : 대간(臺諫)의 직책을 겸임함. 이를테면 중국에 가는 사행(使行)에 서장관(書狀官)이 대간의 직무를 겸임하는 것을 말함.[註 256] 취리(就理) : 죄지은 벼슬아치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음.[註 25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25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259] 임인년 : 1722 경종 2년.
사신은 논한다. 지난날 신축년257) 에 있어서 국세(國勢)가 늠연(澟然)하여 마치 한 가닥의 터럭과 같았다. 이 시기를 당해서 저사(儲嗣)를 세워 대리(代理)하는 것은 하루라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는 것이니, 대신(大臣)이 된 자는 마땅히 화복(禍福)을 돌아보지 않고 몸소 스스로 건청(建請)했었어야 할 것인데, 이에 이정소(李廷熽)·조성복(趙聖復)의 무리로 하여금 대신 청하게 하였다. 그리고 연명 차자[聯箚]가 이미 올라가 조태구(趙泰耉)가 잠입(潛入)함에 미쳐서는 또 그 뒤를 따라서 중지하기를 청하여 저 무리들의 구실을 삼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가 《소희행례기(紹熙行禮記)》 발문(跋文)을 쓰기를, ‘애석하도다! 신축년258) ·임인년259) 의 대신(大臣)들이 능히 이 일을 처리하지 못하였도다.’ 하였다. 만일 이것으로써 사대신(四大臣)을 추구(追咎)한다면 의리(義理)와 사면(事面)이 정대(正大)하고 광명(光明)할 것이며 저 사대신들도 또한 처벌을 사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단죄하는 이유가 이에 도리어 연차(聯箚)에 있으니, 대저 연차로서 죄를 삼는 것은 이는 대리(代理)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국시(國是)가 밝지 못한 이유이며 난역(亂逆)이 구실을 삼는 이유이다. 그리고 교통(交通)하여 사사로이 만나뵈온 것에 있어서는 만일 제일의(第一義)로써 기준한다면 진실로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대개 또한 종사(宗社)를 위해 저사(儲嗣)를 세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형수(兄嫂)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건진다.’는 의리가 되기에 방해로움이 없으니, 진실로 깊이 추구(推究)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설은 그 유무(有無)·허실(虛實)은 본디 알 수가 없다. 가령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위호(位號)가 결정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니, 이것을 또 어찌 족히 죄줄 것이 있겠는가? 대저 종사(宗社)를 보호하고 저사(儲嗣)를 세우는 대절(大節)이 결국 여러 신하들의 협력(協力)을 힘입었고 머리를 나란히 하여 함께 죽은 것은 또한 군흉(群凶)의 영독(逞毒)에 연유한 것이니, 도리어 어찌 반드시 가혹하게 적발하고 뒤따라 심리하여 그 죽음으로 섬겨 사직(社稷)을 붙들은 대절을 가리울 필요가 있겠는가? 성립되지도 않는 죄를 억지로 덮어씌워 오랫동안 단서(丹書)의 가운데 두고 아울러 대리(代理)의 의리까지 세상에 명백하지 못하게 한 것은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대하다. 이제 이 신원(伸冤)하자는 논의는 어찌 다만 사대신의 처지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신만의 말은 말인즉 옳으나 그 말을 처음 대각(臺閣)에 들어간 날에 하지 않고 이미 명환(名宦)을 역임하고 난 뒤에 하게 되니, 이것이 식자(識者)가 신만을 단점으로 여기는 바이다. 홍계유의 계사(啓辭)는 대체(臺體)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한꺼번에 모조리 당습(黨習)으로 배척하니, 애석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근사록(近思錄)》을 강(講)하였다.
4월 13일 무오
집의(執義) 최명상(崔命相)이 상소하여 신만(申晩)과 홍계유(洪啓裕)를 특파(特罷)하라는 분부를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만의 상소는 그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바로 여론(輿論)이 동일한 바입니다. 개절(剴切)한 말이 많아 족히 볼만한 것이 있는데, 전하께서 이에 도리어 엄중하게 물리치시고 홍계유가 곧바로 환수(還收)를 청한 것은 실로 언로(言路)가 길이 막힐 것을 우려한 것인데, 또다시 격뇌(激惱)를 하시어 두 대관(臺官)이 서로 잇달아 전패(顚沛)되었으니, 듣는 이가 모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지나치신 거조가 이에 이르시는 것입니까? 신치근(申致謹)은 평사(評事)를 체귀(遞歸)하여 오는 길에 역적 남태징(南泰徵)의 달마(㺚馬)를 붙잡은 사람을 중형(重刑)에 처하였고, 무신년260) 에 있어서 그 말 두 필(匹)이 적진(賊陣)에서 붙잡힘을 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치근의 한 바가 도리어 어떠한 것인데도 관직(館職)을 개차(改差)하라는 청을 도리어 당습(黨習)에 돌리는 것입니까?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엄중한 비답을 내려 꾸짖기를,
"오늘날 이 나라는 이른바 당(黨)만 있고 임금은 없는 나라라 할 수 있다. 한(漢)나라의 대불경(大不敬)을 유독 백의(白衣)인 권이진(權以鎭)에게만 논죄하고 당을 비호하는 무리들에게는 논죄하지 않는 것인가? 이미 그가 몸을 단속할 줄을 알 것인데 어찌 그런 것을 범하겠는가?"
하였다. 대개 최명상이 권이진을 배척함에 있어 ‘대불경(大不敬)’이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비답이 이와 같았다.
소대를 행하였다.
송징계(宋徵啓)를 부교리로, 임정(任珽)을 부수찬으로, 정희보(鄭熙普)를 장령으로, 조명리(趙明履)와 심악(沈)을 정언으로 삼았다.
승정원(承政院) 【좌승지 이성룡(李聖龍), 우승지 어유룡(魚有龍)이다.】 에서 신만(申晩)·홍계유(洪啓裕)를 견파(譴罷)하라는 분부를 환수(還收)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엄중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는 것은 오로지 삼강(三綱)에 있는데 지금은 거의 무군(無君)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뒤에는 이와 같은 자는 결단코 ‘불경(不敬)’의 율(律)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제신(諸臣)들로 하여금 먼저 한(漢)나라의 법을 읽고 무거운 법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성룡(李聖龍)은 탕평(蕩平)의 의논에 아부하여 외람되이 대사간(大司諫)과 안찰사(按察使)의 직(職)을 역임하고 군주(君主)의 의사를 잘 받들어 오랫동안 근밀(近密)한 반열에 있었다. 그가 의리(義理)를 보기를 변모(弁髦)261) 와 같이 할 뿐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마지못해 이런 계사(啓辭)를 올리기는 하였지만 본사(本事)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32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註 261] 변모(弁髦) : 변(弁)은 치포관(緇布冠)으로서 관례(冠禮)를 행하기 전에 잠시 쓰는 것. 모(髦)는 총각의 더펄머리. 관례가 끝나면 모두 소용없게 되므로 무용지물(無用之物)의 비유로 쓰임.
사신은 말한다. 이성룡(李聖龍)은 탕평(蕩平)의 의논에 아부하여 외람되이 대사간(大司諫)과 안찰사(按察使)의 직(職)을 역임하고 군주(君主)의 의사를 잘 받들어 오랫동안 근밀(近密)한 반열에 있었다. 그가 의리(義理)를 보기를 변모(弁髦)261) 와 같이 할 뿐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마지못해 이런 계사(啓辭)를 올리기는 하였지만 본사(本事)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4월 15일 경신
임금이 소대를 행하여 이충정(李忠定)262) 의 주의(奏議)를 강(講)하였다.
4월 16일 신유
지평(持平) 김상중(金尙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늘날의 대의리(大義理)는 별이 높이 뜨고 해가 밝은 것과 같습니다. 성상께서 속으로 숨기고 참으로 발설하지 않다가 비로소 〈지난해 1월〉 19일에 발설한 것은 군신(君臣)의 분수를 엄정히 하기 위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견제되어 차마 베어서 끊지 못할 것인즉, 이것으로서 거취(去就)의 대관(大關)을 삼는 자들은 신하의 분수가 모두 어그러지고 사람의 도리가 모두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신만(申晩)은 수차에 걸쳐 삼사(三司)에 들어왔다가 한결같이 퇴축(退縮)되었던 자가 갑자기 드러내어 시비(是非)를 따지며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은 또한 구습(舊習)이 별안간 발동하여 참을래야 참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혹시 대세(大勢)가 조수(潮水)처럼 몰아쳐서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간관(諫官)의 계사(啓辭)와 헌신(憲臣)의 상소가 수미(首尾)에 상응(相應)하여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철보(李喆輔)가 오랫동안 비난을 받아 온 것은 단지 나쁜 방명(榜名)을 숨긴 것에 지나지 않는데, 처음에는 이미 고색(錮塞)되고 나중에는 모욕을 보였으니, 당한 자가 한 차례 통변(痛辨)을 당하는 것이야 사리(事理)가 본래 그렇지만 또 뒤쫓아 죄를 얽어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가령 홍계유(洪啓裕)가 갑자기 시론(時論)에 들어붙어 신공(新功)을 바치고자 하여 의논이 격렬해서 본색(本色)을 없애는 데 스스로 달갑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변환(變幻)을 도리어 책망한 것이 이미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건기(兪健基)가 상의하여 분부에 응한 것을 가지고 한 차례 반박하고 재차 반박하여 마치 관계가 지극히 중대함이 있는 것처럼 하고, 신치근(申致謹)이 준례에 따라 검의(檢擬)한 것을 가지고 백간(白簡)에 올려서 차례로 격거(擊去)한 것은, 첫째는 행공(行公)하는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반드시 시애(撕捱)하게 하려고 한 것이며 둘째는 좌전(佐銓)의 두 신하로 하여금 함께 여파(餘波)를 당하게 하려고 한 것이니, 배포(排布)가 이미 교묘하고 풍색(風色)이 또 두렵습니다. 조정(趙侹)에 있어서는 이현망(李顯望)에게 원한을 품고서 심지어는 그 망형(亡兄)을 들어서 욕(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풍화(風化)를 힘써 숭상하는 때를 당하여 어찌 이목(耳目)263) 의 반열에 둘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삭파(削罷)를 명하여 영원히 대선(臺選)에 검의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처분(處分)하는 바는 오직 윗사람에게 있으니, 굳이 이와 같이 할 필요는 없다. 지난 일을 통절히 징계할 때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19일 하교(下敎)한 이후에 스스로 백대(百代)의 공안(公眼)이 있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자기를 옳다고 할 필요가 있겠으며, 또 어찌 반드시 다른 사람을 비난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비록 어둡지만 이러한 세태(世態)에 대해선 마음속에 환하게 알고 있으니,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의리’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구습(舊習)을 행하려 하는 자는 삼척(三尺)의 법(法)이 나에게 있다. 조정의 일은 어찌 다만 조정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현망이 자초한 것이다. 사람을 침해하다 모욕을 당하였는데 도리어 모욕한 자를 다스리는 것은, 비록 백리(百里)의 고을을 다스리는 자일리자도 오히려 하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나라를 다스리는 자이겠는가?"
하였다. 소대할 때에 이르러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비지(批旨) 가운데 ‘사람을 침해하다 모욕을 당하였다[侵人致辱].’는 이하의 말은 사륜(絲綸)의 체재(體裁)에 흠됨이 있습니다. 그리고 되받아 꾸짖는 자가 남의 형을 욕하는 것은 풍화(風化)에 관계됨이 있으니, 청컨대 개하(改下)하여 조정을 죄주소서."
하니, 드디어 비답을 도로 들여오라고 명하여, ‘조정의 일은, 윤대영(尹大英)이 배척을 당한 뒤에 이현망의 다시 검의(檢擬)하지 말라는 청은 마치 윤대영을 위하여 조정을 배척한 것 같은 점이 있으니, 이러한 관습은 평소 옳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나, 남의 형에게 욕을 하는 것은 또한 풍화(風化)에 관계된다.’고 개정하고, 드디어 조정을 파직시켜 서용(敍用)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외방(外方)의 공도회(公都會)264) 를 승보(陞補)265) 의 준례에 따라 해마다 시행하되 해를 넘긴 경우는 그대로 두고 시행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예조(禮曹)의 계청(啓請)에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여 이충정(李忠定)의 주의(奏議)를 강(講)하였다.
4월 17일 임술
소대를 행하였다.
이때 임정(任珽)이 북평사(北評事)로부터 부수찬(副修撰)에 이배(移拜)되었는데 수차 불러도 나오지 않았고, 수찬(修撰) 박필재(朴弼載)도 또한 오랫동안 응명(膺命)하지 않으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려 ‘임정을 도로 북평사에 보임(補任)하고 박필재를 산음 현감(山陰縣監)에 보임할 것’을 명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이종성(李宗城)이 차자(箚子)를 올려 분부를 모두 환수(還收)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고, 임정·박필재가 즉시 응명(膺命)하였다. 박필재의 관록(館錄)266) 은 바로 권혁(權爀)이 일찍이 배척한 바인데, 모몰 염치(冒沒廉恥)하고 출사(出仕)하니, 사람들이 다 해괴하게 여겼다.
관서(關西)의 범월 죄인(犯越罪人) 김세정(金世丁) 등이 다시 자백을 하였는데, 단지 나다동(羅多洞)의 사람을 살해하고 국경(國境)을 넘어간 일만 자복을 하고 세동(細洞)의 일은 자백하지 않았으며, 인명(人命)을 살해하고 국경을 넘어간 숫자도 심양(瀋陽)의 조사한 것과 같지 않았다. 안핵 어사(按覈御史) 이철보(李喆輔)가 사계(査啓)하여 아뢴 것이었다.
4월 18일 계해
주강(晝講)을 행하여 《예기(禮記)》를 강(講)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여 《예기》를 강하였다.
이때 윤경룡(尹敬龍)이 죄로 인해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보임되었는데, 말미를 받아 상경(上京)하여 오랫동안 관직에 돌아가지 않았다. 도신(道臣)이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려 재촉해 임지에 돌아가게 하고 드디어 내직에 의망하는 분부를 중지하였으며, 이어서 이제부터 특별히 제수한 수령(守令)은 절대로 말미를 허락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서명빈(徐命彬)과 정언섭(鄭彦燮)을 승지로,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심성희(沈聖希)를 집의로, 이저(李著)를 사간으로, 민원(閔瑗)을 장령으로, 윤급(尹汲)을 교리로, 정형익(鄭亨益)을 우참찬으로, 김한철(金漢喆)을 지평으로 삼았다. 정언섭은 일찍이 충청 감사가 되었을 때 윤연(尹㝚)을 품질(稟秩)에 배치하고 강세윤(姜世胤)의 귀장(歸葬)을 허락하여 공의(公議)에 죄를 얻어 논박을 입고 체직(遞職)되었기 때문에 감히 응명(應命)하지 못하였다.
4월 19일 갑자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이때 임금이 《예기(禮記)》를 초선(抄選)하여 강하였는데, 참찬관(參贊官) 이종성(李宗城)이 뽑힌 분량이 오히려 많다고 하여, 또 그 중의 한두 편을 정선(精選)하여 진강(進講)하고 잇달아 《시전(詩傳)》을 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충청도 온양군(溫陽郡)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가옥(家屋)이 흔들리고 소리가 천둥하는 것 같았으며, 잠시 후에야 그쳤다.
4월 20일 을축
조강(朝講)을 행하여 《예기》를 강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정만(趙正萬)이 말하기를,
"방기(坊記)267) 의 방자(坊字)는 바로 사욕(私慾)을 방지한다는 뜻입니다. 신(臣)이 일찍이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송준길이 ‘알욕 존리(遏慾存理)’라는 네 글자를 써서 신에게 주었고, 신의 벗인 김창흡(金昌翕)은 또 일찍이 신이 병통이 있다는 이유로써 ‘청심 과욕설(淸心寡慾說)’을 지어서 경계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사우(師友)에게 얻은 것인데, 방기(坊記)의 뜻과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신이 감히 이 여덟 글자로써 올리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또 조정만에게 ‘알욕 존리(遏慾存理)’ 네 글자를 써서 올리라 명하여 말하기를,
"‘청심 과욕(淸心寡慾)’ 네 글자는 이미 선조(先祖)의 어필(御筆)이 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여, 이제부터는 환곡(還穀)을 봉납(捧納)하지 않은 수령(守令)은 비록 포계(褒啓)가 있더라도 정식(定式)하여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이저(李著)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진희(趙鎭禧)의 일과 밀창군(密昌君) 직(樴)의 일과 신치근(申致謹)의 일과 이조(吏曹) 해당 당상(堂上)의 일과 신만(申晩)의 일은 모두 정지하였다.
지평(持平) 김한철(金漢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19일 하교(下敎)한 뒤에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교를 하십니다. 신이 그 때에 우사(右史)에 대죄(待罪)하면서 수서(手書)를 받기까지 하였는데, 전하께서 이미 파고(播告)하지 않으시고 또 ‘부자(父子)간에도 서로 전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한편을 억제하여 말을 못하게 하자 일종의 승망(承望)268) 하는 무리가 그것을 빙자해 날뛰고 있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전하께서는 사건을 말하다가 전하의 비위를 거스린 것으로 인하여 신만(申晩)을 죄주었고, 언자(言者)를 신구(伸救)한 이유로써 홍계유(洪啓裕)를 파직시켰으며, 심지어는 ‘대불경(大不敬)’이란 세 글자로 간신(諫臣)을 꺾어 누르고 언로(言路)를 두절(杜絶)시켰으니, 신은 위(衛)나라에서 감히 잘못을 바로잡는 자가 없었던 것269) 과 불행히 가까울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후의 엄지(嚴旨)를 모두 환수(還收)할 것을 명하소서. 신은 김상중(金尙重)이 홍계유를 막되게 비난한 데 대해서 놀라움과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대각(臺閣)이 적요(寂寥)할 때를 당하여 오직 홍계유만이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진술하여 작연(綽然)히 옛 간신(諫臣)의 기풍(氣風)이 있었는데, 이제 이에 ‘갑자기 시의(時議)에 붙어 신공(新功)을 세우려 한다.’는 등의 조목으로써 억지로 후욕(詬辱)을 가해도 끝내 견책(譴責)이 없으니, 신은 삼가 우려와 탄식을 자아내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19일의 하교를 듣고서 그대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니, 다른 사람은 어찌 말하겠는가?"
하였다.
생원(生員)·진사(進士)·유생(儒生)의 관복(冠服)의 제도에 대해 여러 유신(儒臣)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수렴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앞서서 조명익(趙明翼)의 상소로 인하여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널리 고증하게 하니, 교리(校理) 유최기(兪最基)가 말하기를,
"난삼(襴衫)과 복두(幞頭)는 바로 중국의 제도로서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구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서 그 제도를 알게 되었는데, 지금 예(禮)를 좋아하는 가문에서도 또한 자못 관례(冠禮)할 때에 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중국의 제도를 사용하고자 하시니, 신은 실로 감탄하는 바이나, 이번에는 응방(應榜)의 기일(期日)이 이미 박두하여 그 기한 내에 마련하여 준비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그 관복(冠服)의 제도를 산림(山林)의 여러 유신(儒臣)들에게 널리 물어보도록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유신들의 의견을 수렴한 것이 모두 명백히 근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에 마땅히 널리 자문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4월 21일 병인
주강(晝講)을 행하여 《예기》의 방기(坊記)를 강하였다. ‘이(利)와 녹(祿)은 사자(死者)에게 먼저 한다.’는 조문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270) 에 군공(軍功)이 있는 자가 또한 이미 죽은 사람도 많으니, 마땅히 ‘사자(死者)에게 먼저 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고, 전조(銓曹)에 명하여 그 자손들을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이때 남연년(南延年)의 아들 남덕하(南德夏)가 아직 죄적(罪籍)에 있었는데, 또한 직첩(職牒)을 줄 것을 명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오명항(吳命恒)의 아우 오명신(吳命新)은 이름이 적(賊)의 공초(供招)에서 나왔다는 이유로써 한번 배척을 당한 뒤 복직(復職)이 되지 않고 있는데, 또한 마땅히 수용(收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신치근(申致謹)이 방금 대언(臺言)을 만났으나, 신이 어사(御史)가 되었을 떼 북도(北道)에서 들으니 실은 이러한 일이 없었고, 송진명(宋眞明)이 옥당(玉堂)에 의망(擬望)을 빼버린 것도 영원히 신치근의 진출을 저지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홍계유(洪啓裕)의 말과 같다면 어찌 다만 옥당(玉堂)에 의망(擬望)을 가로막았을 뿐이겠는가?"
하였다. 이 뒤에 송인명(宋寅明)이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또 옥당(玉堂)에 신치근의 진출을 가로막았다. 대개 오명신은 이감(李椷)의 처남(妻娚)으로 이감의 원인(援引)한 바 되었다. 신치근이 ‘추마(推馬)했다’는 설은 북도(北道) 사람들이 다 말하는데 이종성의 말이 이와 같으니, 심하도다. 당사(黨私)의 제거하기 어려움이여!
송수형(宋秀衡)을 집의로, 서명형(徐命珩)을 헌납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정언으로, 조명익(趙明翼)을 형조 참판으로, 홍상빈(洪尙賓)과 정필녕(鄭必寧)을 승지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응교로, 김약로(金若魯)를 교리로, 유건기(兪健基)를 수찬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교리로, 조동빈(趙東彬)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이날의 정사(政事)에서 이조(吏曹)에서 좌파(坐罷)한 옥당(玉堂)들을 서용(敍用)할 것을 청하여 홍봉조(洪鳳祚)·오원(吳瑗)·권혁(權爀)·신만(申晩) 등이 모두 서명(敍命)을 입었으니, 이들은 모두 임금이 일찍이 서용하기를 주저하던 자들이었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4월 22일 정묘
정언(正言) 남태제(南泰齊)가 상소하여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을 논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영상(領相)이 연로(年老)하고 혼미해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데도, 감히 전하를 위하여 한마디 말하는 자가 없습니다. 대저 충후(忠厚) 노성(老成)한 이에게 전하께서 반드시 책임을 맡기고자 하시니, 성상의 뜻은 매우 거룩합니다. 신이 감히 전하의 이 마음을 저지할 수는 없으나, 다만 덕망(德望)이 본래 무겁고 지려(志慮)가 쇠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한갓 반식(伴食)271) 의 꾸짖음이 있고 실상은 사물(事物)을 진정시키는 공효는 없으니, 이것이 신이 우탄(憂歎)하는 바입니다. 애석하게도 그가 부끄러워할 줄 아는 소양(素養)이 있었는데, 의리를 지킴이 견고하지 못하여 두 차례 인입(引入)하였을 때 모두 엄명(嚴命)에 핍박되어 다시 기용(起用)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전하의 허물입니다. 신은 마땅히 예(禮)로써 진퇴(進退)하게 하여 종시(終始)의 은혜를 온전히 하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남태제의 직(職)을 체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얼마 후에 또 하교하여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출보(黜補)하고 즉시 사조(辭朝)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남태제(南泰齊)의 상소로 인하여 성(城)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예기》의 방기(坊記)를 강하였는데, ‘동성(同姓)에게 장가들지 않는다.’는 조문에 이르러 검토관(檢討官) 박필재(朴弼載)가 말하기를,
"오맹자(吳孟子)272) 라고 말한 것은 노(魯)나라 사람들이 숨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의 사패(司敗)273) 에게 답함에 있어서는 ‘소공(昭公)이 예(禮)를 안다.’고 하고, 《춘추(春秋)》에는 곧바로 썼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군상(君上)의 과오는 당시에는 비록 감히 말하지 못하더라도 간책(簡策)에 기록되어 후세(後世)에 전해지게 되는 것이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대개 박필재가 실은 이씨(李氏)가 궁중(宮中)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의(文義)를 대충 논하였는데, 이 뒤로 정사(政事)의 의망(擬望)에서 누차에 걸쳐 낙점(落點)이 안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박필재의 죄는 문의(文義)에서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민원(閔瑗)이다.】 에게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후릉 참봉(厚陵參奉) 문도제(文道濟)는 몽매해서 사리를 알지 못하여 능례(陵隷)와 양도(兩都)274) 의 백성들이 계방(契房)을 만들어 가재(家材)와 염시(鹽柴)를 멋대로 작출(斫出)해가도 금지시키지를 못합니다. 문도제를 마땅히 태거(汰去)시켜야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 이태익(李泰翼)은 사람됨이 천박하고 비루하여 불법(不法)을 많이 행하였는데 나문(拿問)하게 되자 말을 꾸며서 미봉(彌縫)하니, 동렬(同列)들이 그와 어울리기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이졸(吏卒)들도 모두 원망하여 욕설을 퍼붓습니다. 이태익을 마땅히 사판(仕版)275) 에서 삭거(削去)하여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근거없는 비방을 믿기 어려우니, 나처(拿處)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순안 현령(順安縣令) 윤상원(尹尙遠)은 사람됨이 암매(暗昧)하고 용렬하여 멍청하게 일을 살피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관속(官屬)들과 마주앉아 잡기(雜技)를 하여 주육(酒肉) 내기를 하며 뻔뻔스럽게 조금도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합니다. 윤상원(尹尙遠)을 마땅히 파직(罷職)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상원이 음관(蔭官)인가?"
하자, 이종성(李宗城)이 나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윤지선(尹趾善)의 봉사손(奉祀孫)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문(風聞)을 다 믿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어제 남별궁(南別宮)의 서연청(西宴廳)이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무너졌고 관서(關西)의 천둥하고 바람이 몰아친 변고도 또한 비상(非常)한 것이며, 범월(犯越)을 조사하는 일도 아직 결말이 나질 않았습니다. 영상(領相)이 또 남의 말을 들었는데, 한 대간(臺諫)이 혼자서 대신(大臣)을 논한 것은 체통을 무너뜨림이 심합니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근래에 사람들이 모두 자주 변화하니, 그것은 이익에 마음이 쏠려가는 까닭으로서 다만 남태제(南泰齊)뿐이 아닙니다. 만일 엄중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장차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이종성의 의사는 대개 홍계유(洪啓裕)를 가리킨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홍계유도 또한 그러하였다. 내가 비록 혼미하지만 어찌 그 정태(情態)를 알지 못하겠는가? 김상중(金尙重)의 상소도 또한 잘못된 것이다."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김상중의 말은 단지 충후(忠厚)한 면이 부족하긴 하나 옳기는 옳습니다. 〈지난해 1월〉 19일 하교(下敎)는 의리(義理)가 소연(昭然)한데, 당(黨)을 비호하는 무리들이 성상의 하교를 믿지 않습니다. 비록 어제 옥당(玉堂)의 서명(敍命)을 살펴보더라도 조정(朝廷)을 괴란(壞亂)시킨 무리들에게 다시 등용되는 길을 열어 주었으니, 잇달아 일어나는 자가 반드시 분연(紛然)할 것입니다."
하였다. 장령(掌令) 민원(閔瑗)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당론(黨論)으로써 경계를 하시었는데, 지금 이종성이 김상중을 두둔하고 오원(吳瑗)·권혁(權爀)·홍봉조(洪鳳祚)는 서용(敍用)할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당론입니다."
하니, 박필재(朴弼載)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이미 전계(傳啓)하였으면 마땅히 곧바로 퇴출(退出)하여야 하는데, 일부러 지류(遲留)하고 있다가 이에 당론으로써 이종성을 배척하였습니다."
하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말하기를,
"민원은 본디 잘못이지만, 박필재가 민원을 배척한 것은 마치 이종성을 위해서 서로 배척한 것 같은 감이 있으니, 박필재도 또한 잘못이다."
하고, 민원과 박필재의 직(職)을 체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홍계유가 이종성과 혼인 관계를 맺은 까닭에 이종성이 이끌어서 자기의 당(黨)으로 삼고자 하여 창방(唱榜)하지 않은 때 기랑(騎郞)276) 에 차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홍계유가 대각(臺閣)에 들어온 뒤로 논의가 격렬하니, 이종성이 미워하기를 다른 사람보다 심하게 하여 반드시 배제(排擠)하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33면
【분류】과학-천기(天氣) / 역사-사학(史學)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註 276] 기랑(騎郞) : 병조 낭관.
사신은 말한다. 홍계유가 이종성과 혼인 관계를 맺은 까닭에 이종성이 이끌어서 자기의 당(黨)으로 삼고자 하여 창방(唱榜)하지 않은 때 기랑(騎郞)276) 에 차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홍계유가 대각(臺閣)에 들어온 뒤로 논의가 격렬하니, 이종성이 미워하기를 다른 사람보다 심하게 하여 반드시 배제(排擠)하려고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임정(任珽)이 상소하여 남태제(南泰齊)를 외직(外職)에 보임하라는 분부를 중지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남태제가 소원(疏遠)한 신진(新進)으로서 일신(一身)의 이해(利害)를 돌보지 않고 충성을 바치기에 급급하여 감히 중요한 자리에 있는 수상(首相)을 논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일편 적심(一片赤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에 도리어 엄중한 말로 해도(海島)의 장연(瘴煙)이 있는 곳에 견척(譴斥)하시니, 크게 성덕(聖德)의 누(累)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지금 사의(私意)가 함부로 유행하여, 견제되어 두려워하고 고첨(顧瞻)하며 동요되는 기풍(氣風)이 이미 조정의 고질(痼疾)을 이루고 있는데, 시속(時俗)에 구애받지 않고 화복(禍福)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구하여 감히 전하를 위하여 한 나라의 공의(公議)를 진달한 자는 단지 남태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남태제의 해괴한 정상에 대하여 이미 하유(下諭)하였는데, 감히 홍계유(洪啓裕)가 신만(申晩)을 비호한 습관을 답습하니, 진실로 해괴한 일이다."
하고, 임정의 직(職)을 체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4월 23일 무진
종신(宗臣) 하릉군(夏陵君) 적(樀)이 상소하여, 숙종[肅廟]이 즉위한 회갑(回甲)이 되었다는 이유로써 동조(東朝)277) 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경(卿)의 상소를 보니, 사모하는 마음이 몹시 간절하나, 겸읍(謙挹)하신 성덕(盛德)을 억지로 번거롭게 하기가 어려우니, 오직 마음에 억울할 뿐이다."
하였다.
교리(校理) 김약로(金若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에 북자(北咨)로 인하여 진주사(陳奏使)를 차출(差出)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기한을 작정하여 발행(發行)해야 할 터인데, 삼가 듣건대, 어제 연신(筵臣)이 사신(使臣)을 보내는 일로써 전례(前例)가 없다고 말하며, 심지어는 저들의 질책한 말을 가지고 이것은 본디 의례적으로 사용하던 것이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그 뒤에 대신(大臣)은 잇달아 사행(使行)을 우선 정지하고 역관[譯舌]을 먼저 보낼 것을 잇달아 청하였으니, 대신도 또한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 연신(筵臣)의 생각에는 필시 ‘저들이 이미 번복(藩服)으로써 우리를 대접하고 우리는 또한 뜻을 굽혀서 그들을 섬기니 질책과 모욕이 오는 것은 형세상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작고 힘이 미약하여 폐백[皮幣]으로써 섬기는 것만 해도 오히려 지극히 분통스러운 일인데, 더구나 변민(邊民)의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사처(査處)의 의논이 군부(君父)에게까지 미쳤으니, 신자(臣子)된 자가 전례(前例)나 고증(考證)하며 편안히 좌시(坐視)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대의(大義)가 세상의 숨기는 바 된 지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금세(今世)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능히 평일에 ‘인통 함원(忍痛含冤)’이란 네 글자를 흉중(胸中)에 간직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의 사태를 눈으로 직접 보고도 오히려 또한 심기(心氣)를 저하(低下)시켜 그것이 수욕(羞辱)이 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수십 년 전에 있었더라면 인심(人心)의 분통(憤痛)·강개(慷慨)해 함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니, 신은 삼가 세도(世道)를 위하여 비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고, 말미에 또 역관의 무리가 김상명(金常明)을 연줄로 하여 교통(交通)하고 뇌물을 주는 폐단을 말하기를,
"김상명이 저 나라의 총신(寵臣)으로서 외국(外國)과 교통(交通)하여 중간에 서서 뇌물을 받아들이니, 그 사람이 필시 음사(陰邪)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단이 발생한다면 우리 나라에 연루(連累)될까 두려우니, 마땅히 미리 사신(使臣)을 내정하여 행기(行期)를 혹시 조금이라도 지체하지 않도록 하고, 이어서 역관에게 신칙(申飭)하여 김상명과 교통하는 길을 막아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행(使行)의 일기(日期)를 하필 앞당겨 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말단(末端)의 일은 마땅히 표문(表文)을 받드는 날에 신칙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세후(趙世垕)를 장령으로, 이석표(李錫杓)를 정언으로, 조한위(趙漢緯)와 조상명(趙尙命)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제주목(濟州牧)에서 탱자[枳子]를 봉진(封進)하니, 대개 규례가 아니었다. 임금이 하유(下諭)하기를,
"옛적에 공자(孔子)는 제철이 아니면 잡숫지 않았다. 탱자는 바로 불시(不時)의 과일이요 천신(薦新)의 물건도 아니니, 일이 외설(猥屑)스러운 바가 있고 한갓 민폐(民弊)만 끼쳤을 뿐이다. 주원(廚院)으로 하여금 하송(下送)하도록 하고 이뒤로는 다시 봉진(封進)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이어서 목사(牧使) 정도원(鄭道元)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4월 24일 기사
숙종조[肅廟朝]의 정식(定式)에 따라 비록 훈척 대신(勳戚大臣)일지라도 천장(遷葬)할 때 예장(禮葬)을 허락하지 말고 단지 장수(葬需)와 담군(擔軍)만 참작해서 제급(題給)할 것을 명하였으니,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의 말에 따른 것이다.
안핵 어사(按覈御史) 이철보(李喆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다시 서도(西道)의 일을 안찰(按察)하였는데, 끝내 심양(瀋陽)의 보고와는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종전과 같은 취초(取招)를 얻어서 돌아와 바야흐로 이에 도성(都城)에 들어왔는데, 신만(申晩)의 상소가 신을 공격한 것은 전연 도리(道理)가 없습니다. 대개 그의 여러 가지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이 모두가 임금을 망각하고 역당(逆黨)을 비호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이는 또한 망령된 사람일 뿐입니다. 신에게 있어 무슨 분노하고 또 무슨 변명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사신은 말한다. 이철보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단련(鍛鍊)한 무옥(誣獄)을 옳다고 하여, 도리어 임금을 망각하고 역당을 비호한 죄목(罪目)으로써 신만에게 덮어씌우니, 어찌 패려(悖戾)한 일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34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이철보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단련(鍛鍊)한 무옥(誣獄)을 옳다고 하여, 도리어 임금을 망각하고 역당을 비호한 죄목(罪目)으로써 신만에게 덮어씌우니, 어찌 패려(悖戾)한 일이 아니겠는가?
4월 25일 경오
사간(司諫) 이저(李著)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해 1월〉 19일 하교(下敎)는 황극(皇極)을 세우고 인륜(人倫)을 밝히려는 뜻에서 나왔는데, 한편의 의혹은 갈수록 더욱 심하니, 이것이 어찌 다만 당습자(黨習者)의 죄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전하께서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 때 하교가 신하[臣隣]들에게 반시(頒示)된 것은 단지 ‘피차(彼此)에 모두 불령(不逞)의 무리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면(裏面)의 상실(詳悉)한 하교는 들은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김한철(金漢喆)과 신만(申晩)의 상소로써 살펴보더라도 모두가 ‘듣지 못하였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진실로 만일 알았다면 감히 이와 같이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 군신(君臣)을 바르게 하고 난역(亂逆)을 엄중히 하는 대처분(大處分)을 단지 두세 명의 신료(臣僚)와 더불어 반야(半夜)의 전석(前席)에서 조용히 논의하고 다만 외정(外庭)에서 혹시라도 알게 될까 두려워하는 공언(公言)의 의리가 아닌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 김상중(金尙重)의 소비(疏批) 가운데의 ‘백세 공안(百世公眼)’이라는 하교에 대해서도 또한 개연(慨然)한 바가 있습니다. 대저 백세(百世)를 기다리고자 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지위를 얻지 못했을 때 하는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할수 있는 형세에 처하였고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셨는데, 도리어 오늘날에 능히 행하지 못하시고 백세를 가다리려고 하는 것입니까? 신은 마땅히 ‘그날 하교를 비밀에 부쳐 서로 전하지 말라.’는 본부를 중지하여 구습(舊習)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당(私黨)의 비호할 수 없음을 환하게 알게 한 후에야 고질적인 폐단을 개혁할 수가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19일 하교는 간략하지만 상세한데, 거짓 모르는 체하면서 한갓 이기기만 힘쓰기를 일삼는 것은 무엄한 일이다. 이들이 이기기를 힘쓰는 것으로 인하여 반드시 저들을 견제하려고 하는 것도 또한 반성하는 것이 아니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겠는가?"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김한철(金漢喆)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의금부[金吾]의 이졸(吏卒)과 윤상원(尹尙遠)의 일은 정지하였고, 이태익(李泰翼)의 일은 나문(拿問)하는 동안 우선 정지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계(臺啓)는 체통이 중한데, 장령(掌令) 민원(閔瑗)이 전계(傳啓)하는 즈음에 엽(燁)·전(㙉) 제자(諸子)의 일을 무단히 누락시켰으니, 민원을 마땅히 파직(罷職)시켜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윤순(尹淳)이 김약로(金若魯)가 소척(疏斥)한 것으로 인하여 상소해서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그가 신이 말하지 않은 것을 끄집어내고 잇달아 신의 의중(意中)의 일을 억측하여 하나의 구타하고 공격할 화병(話柄)278) 을 만들어 사람들이 주욕(主辱)279) 을 경시하고 대의(大義)를 망각한 죄과에 밀어 넣었습니다. 신이 그날 언제 ‘질책한 말이 의례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아! 나라는 작고 힘은 미약하여 거만한 글로 금백(金帛)을 요구하는 모욕이 전후(前後)에 서로 이어졌는데, 그 당시에 있어서 비록 거유(鉅儒)와 신신(藎臣)280) 이 조야(朝野)에 가득했었지만, 다만 준례에 따라 미봉(彌縫)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심기(心氣)가 저하(低下)된 것은 유독 오늘날의 비탄스러움이 될 뿐이 아닌데, 그가 말한 바 ‘일이 수십년 전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 것은 그가 고실(故實)을 상세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다분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의리(義理)를 핑계하고 속으로는 기괄(機括)을 감추어 전적으로 신의 몸에만 있지 않습니다. 천일(天日)이 위에 있는데, 신이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사신은 말한다. 윤순이 지난 일을 원거(援據)하여 사신(使臣)을 보내지 말 것을 청하고, 또 ‘의처(議處)’란 두 글자로써 의례적으로 사용한 말로 삼은 것이 어찌 반드시 대의(大義)를 망각하고 주욕(主辱)을 경시한 데서 나왔겠는가? 그런데 김약로가 지나치게 지척(詆斥)을 가함에 미쳐서는 윤순이 또 이미 발설한 말을 숨기고자 하여 있는 사실을 없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너무 정직하지 못하다. 그리고 또 ‘거유(鋸儒)·신신(藎臣)’이라는 한 귀절은 대의(大義)를 지킨 선현(先賢)을 비난하고 업신여김으로써 김약로의 백부(伯父)를 침핍(侵逼)하려 하였으니, 어찌 그다지도 패려(悖戾)한가?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34면
【분류】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사법(司法) / 외교-야(野)
[註 278] 화병(話柄) : 이야기 거리.[註 279] 주욕(主辱) : 임금이 욕을 보게 됨.[註 280] 신신(藎臣) : 충신.
사신은 말한다. 윤순이 지난 일을 원거(援據)하여 사신(使臣)을 보내지 말 것을 청하고, 또 ‘의처(議處)’란 두 글자로써 의례적으로 사용한 말로 삼은 것이 어찌 반드시 대의(大義)를 망각하고 주욕(主辱)을 경시한 데서 나왔겠는가? 그런데 김약로가 지나치게 지척(詆斥)을 가함에 미쳐서는 윤순이 또 이미 발설한 말을 숨기고자 하여 있는 사실을 없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너무 정직하지 못하다. 그리고 또 ‘거유(鋸儒)·신신(藎臣)’이라는 한 귀절은 대의(大義)를 지킨 선현(先賢)을 비난하고 업신여김으로써 김약로의 백부(伯父)를 침핍(侵逼)하려 하였으니, 어찌 그다지도 패려(悖戾)한가?
4월 26일 신미
도배 죄인(徒配罪人) 이추(李樞)로써 진주사(陳奏使)를 따라가게 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이추가 막 배소(配所)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정사(正使) 서명균(徐命均)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축년281) 에 신의 종조부(從祖父) 서문중(徐文重)이 연경(燕京)에 갔다가 일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때 수역(首譯) 변이우(卞爾遇)가 죄를 입고 배소로 출발하였는데,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이 이어서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도 마땅히 이 준례를 적용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을 석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죄를 입은 채 데리고 갈 것을 허락하였다. 대개 이때에 저 나라의 김상명(金常明)이라는 자가 우리 나라 사람의 후예(後裔)임을 자칭(自稱)하였다. 그러므로 역관(譯官) 이추(李樞)·김시유(金是瑜)란 자가 김상명의 족당(族黨)임을 자칭하며 그를 연줄로 하여 왕래하였고, 심지어는 김상명의 부조(父祖)의 사당[廟]에 참배하기까지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목(耳目)을 속이어 뇌물을 주고 일을 도모하였다. 그러므로 매양 사행(使行)이 있으면 반드시 두 역관을 데리고 갔다.
공조 참판 유숭(兪崇)이 졸(卒)하였다. 유숭은 뒤늦게 과명(科名)을 회복하여 요행한 기회를 인연하여 지위가 재신(宰臣)의 반열에까지 올랐지만 녹록(碌碌)하여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지평(持平) 김한철(金漢喆)이 아뢰기를,
"신의 전에 올린 상소는 19일 하교의 일을 약간 논하였는데 아간(亞諫)의 상소는 갑자기 다시 신의 몸에 비난이 미쳤고, 전하께서도 또 ‘누가 옳고 누가 그르겠는가?’ 하는 것으로 하교하셨습니다. 신이 상소에서 논한 것은 단지 ‘그날의 연교(筵敎)가 본래 이 무리들의 자중(藉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려 한 것일 뿐이며 원래 서로 겨루어 다투거나 공격해 이기려는 뜻이 없었는데, 간신(諫臣)이 침척(侵斥)을 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신이 상세하게 논하지 않는 것은 대개 ‘서로 전달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집의(執義) 송수형(宋秀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인군(人君)의 언동(言動)은 실로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소홀하여지는 데 관련됩니다.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신데도 군하(群下)의 한마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꺾어 눌러 제어하는가 하면 출보(黜補)하고 찬축(竄逐)시키며, 더러는 정외(情外)의 각박한 하교를 내리기까지 하십니다. 비록 근일에 제신(諸臣)을 견파(譴罷)한 일로써 말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오직 마땅히 평심(平心)하고 서찰(恕察)하여 쓸 만하면 쓰고 죄줄 만하면 죄주면 될 뿐인데, 어찌하여 번번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려서 사방(四方)의 듣는 이를 놀라게 하는데 이르는 것입니까? 사령(辭令)이 중도에 지나치심은 실로 성덕(聖德)의 누(累)가 되는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한 사람도 나와서 바로잡는 자가 없고, 이따금 기회를 타고 투소(投疏)하여 전하의 노여움을 격발시킴이 있는데, ‘당인(黨人)’이란 두 글자로써 한편에다 돌립니다. 신은 모르긴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자는 과연 능히 일호(一毫)도 당사(黨私)의 습관이 없으면서 사람을 짓밟음이 이와 같은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4월 27일 임신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기를,
"신이 거의 죽게 된 헐떡이는 몸을 이끌고 반항(班行)에 분주(奔走)하니, 그 구차하고 수치심이 없음이 심합니다. 대소(臺疏)가 준발(峻發)하였는데 그 말이 애당초 한 글자도 실상에 지나친 것이 없었으니, 나라의 체모로써 헤아려 볼 때 어찌 한 시각인들 헛되이 자리에 눌러 있어 국인(國人)의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김을 더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듣건대, 김약로(金若魯)의 상소에 ‘우선 사행(使行)을 정지하고 먼저 역관(譯官)을 보낸 것’으로써 비난을 하였다 합니다. 이것도 또한 신이 일을 생각함에 있어 혼미하여 착오를 일으킨 소치입니다."
하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돈유(敦諭)하여 함께 오도록 하였다.
4월 29일 갑술
관서(關西)의 범월(犯越)한 여러 죄수를 경옥(京獄)에 잡아 올 것을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범월한 죄인과 그 지명(地名)이 심양(瀋陽)의 조사한 바와 부합되지 않았다. 봉성(鳳城)에 문의함에 미쳐서 봉성의 보고한 바가 이에 우리가 조사한 것과 서로 부합하였는데, 사람들의 수효가 오히려 꼭 맞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안핵 어사(按覈御史)를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또 어사(御史)를 보낸다면 왕래하는 데 한갓 시일(時日)만 허비할 것이니, 범월한 여러 죄수들을 경옥(京獄)으로 잡아 와서 핵실(覈實)하도록 하라."
하였다.
청(淸)나라에서 범월(犯越)한 사람 서귀강(徐貴江)을 잡아 보냈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변경(邊境)에서 효시(梟示)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수찬(修撰) 유건기(兪健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본래 궁술(弓術)이나 익히던 몸으로서 또 더구나 질박(質朴)한 처지에 있었으니, 과연 김한철(金漢喆)의 모욕이 미친 것입니다. ‘기조(譏嘲)’ 등의 설이 과연 누구의 입에서 조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령 그 인아(姻婭)가 묵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스스로 물의(物議)를 만들어 암암리에 농간을 부린다면 신이 어떻게 깨닫겠으며 또한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신이 작년에 대원(臺垣)에 있을 때 이미 사람들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초래하였고, 일전의 연백(筵白)에서는 또 그 진신(進身)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필경 원한을 풀려는 독봉(毒鋒)이 과연 친인(親姻)의 자리와 전법(傳法)의 정신(精神)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모름지기 일에 대하여 대변(對辯)할 따름이니, 하필 이러한 등의 조목으로써 사람을 비난하는 것인가?"
하였다.
조명익(趙明翼)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이덕수(李德壽)를 이조 참판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이조 참의로, 윤양래(尹陽來)를 형조 판서로, 심성희(沈聖希)를 부교리로, 남태량(南泰良)을 부수찬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삼고, 송수형(宋秀衡)을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으니,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의 정사이었다. 이덕수는 전일에 연좌된 바가 사소한 일에 비교할 것이 아닌데, 구애됨이 없이 온통 아전(亞銓)에 의망(擬望)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송수형은 겨우 분명치도 않은 상소를 올렸는데 곧 바로 탁배(擢拜)하는 총애(寵愛)를 입게 되니, 사람들이 많이 비난하였다.
4월 30일 을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이날 양사(兩司)에서는 한 사람도 입시(入侍)한 자가 없었다. 사직(司直) 송진명(宋眞明)이 나와서 말하기를,
"고사(故事)에 차대(次對)는 삼사(三司)에서 반드시 인원수를 갖추어야 하며 만일 갖추어지지 못하면 비국(備局)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 차대라고 이름하지 않았습니다. 근래에는 인원수가 갖추어지는지의 여부를 물론하고 다 ‘차대’라고 말하니, 마땅히 구식(舊式)을 거듭 밝혀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어서 승지에게 전례(前例)를 취하여 상고할 것을 명하니, 그 뒤에 승지 김성응(金聖應)이 아뢰기를,
"옛날 규정에는 차대를 반드시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이 입참(入參)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의 말을 따른 것으로서 만일 장관이 없을 경우는 비록 차관(次官)일지라도 또한 입참하게 하였습니다. 근래에는 차관도 또한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비록 삼사(三司)가 없더라도 차대는 준례에 따라 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옛날에는 차대를 한 달에 세 차례 행하였는데, 숙종조[肅廟朝] 때로부터 여섯 차례로 개정(改定)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전례가 있으니, 삼사가 인원을 갖추는 것은 법식을 정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임금이 쌍령(雙嶺)의 전망(戰亡)한 자리에 비석(碑石)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이어서 아뢰기를,
"병자년282) 의 척화신(斥和臣) 가운데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세 사람의 절의(節義)가 더욱 탁이(卓異)합니다. 지금 오달제와 윤집의 자손은 모두 입사(入仕)한 자가 있는데도, 홍익한(洪翼漢)의 손자 홍우석(洪禹錫)은 노직(老職)인 첨지(僉知)를 체직당한 뒤로는 집이 가난하여 제사를 받들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특별히 녹(祿)을 주는 것이 충신을 포장하는 도리에 빛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어서 홍우석에게 영원히 군직(軍職)을 부여할 것을 명하였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또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가 이충정(李忠定)283) 의 주의(奏議)를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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