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 1734년 6월

싸라리리 2025. 9. 1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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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을사

동지(冬至) 삼사신(三使臣)인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과 전 참판(參判) 민응수(閔應洙)와 전 정(正) 윤휘정(尹彙貞)을 특서(特敍)하였다. 처음에 직(樴) 등이 봉사(奉使)하여 나갔다가 나라를 욕되게 한 것에 연좌되어 그 직(職)을 삭탈당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런 분부가 있었다.

 

평안도 이산(理山) 등 여섯 고을에 우박(雨雹)이 떨어졌는데, 크기가 계란만 하였다.

 

6월 2일 병오

시종신(侍從臣)을 보내어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옥(徐從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수령(守令)의 직임을 문과(文科)·무과(武科)와 생원과(生員科)·진사과(進士科) 이외에 음로(蔭路)나 잡기(雜技)로써 진출한 자는 7서(七書)를 시강(試講)한 이후에 비로소 검의(檢擬)를 허락하여야 하는데, 근래에는 백도(白徒)342)  로 가자(加資)된 자가 만일 오위 장(五衛將)이나 첨사(僉使)의 이력(履歷)을 얻으면 간혹 차제(差除)343)  되는 경우가 많으니, 국가의 전장(典章)은 장차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무신년344)  의 군공 별단(軍功別單)은 본디 이준례에 있지 않지만 그 나머지의 백도들은 이미 벼슬을 역임하고 안하고를 물론하고 마땅히 일체 방색(防塞)하여 길이 정식(定式)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남행(南行)345)  으로 6품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낭서(郞署)·금오(金吾)와 사송 아문(詞訟衙門)을 역임해야만 수령에 제수될 수 있게 되어 있으니, 그것은 사무(事務)를 낱낱이 시험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을 무겁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호조(戶曹)·형조(刑曹)와 경조(京兆)346)  ·사헌부(司憲府)·장례원(掌隷院)은 스스로 달수[朔數]가 있는데, 공조(工曹)나 의금부(義禁府) 같은 경우는 아침에 그 직임을 역임했다가 저녁에 외읍(外邑)으로 옮기며, 또 더러는 숙사(肅謝)347)  를 하지도 않았는데 이를 이력(履歷)으로 삼는 경우도 있으니, 어디에 그 적임(適任)을 시험해 보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공조와 의금부도 또한 여섯 달로써 기준을 삼고 중간에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자는 마땅히 전후(前後)를 통틀어 계산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여러 도(道)의 찰방(察訪)은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의 세 갈래길이 있습니다. 이른바 음기(蔭歧)란 바로 6품과(六品窠)인데, 연한(年限)이 이미 경과한 자가 차견(差遣)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전(大典)》에는 말하기를, ‘나이가 65세가 지난 자는 외직(外職)에 서임(敍任)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찰방도 또한 외서(外敍)348)  입니다. 관직이 낮다고 해서 다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문관·무관·음관을 물론하고 또한 30삭(朔)의 준례를 따라서 정하여 연한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소소한 각사(各司)의 관원(官員)은 의례히 30삭(朔)으로서 과한(瓜限)349)  을 삼는데, 과한이 만기가 되면 또 다른 관사(官司)로 옮겨서 심지어는 서너 번 옮긴 자도 있습니다. 6품직의 벼슬자리가 모자라는 폐단이 또한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삼조 낭관(三曹郞官)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와 사송 아문(詞訟衙門) 이외에 다른 각사(各司)는 단지 승품(陞品)만을 허락하고 옮겨 제수하는 것은 허락하지 말아야 된다고 여깁니다. 만일 대정(大政)350)  으로 소통(疏通)할 때는 마땅히 이 준례에 구애되지 말아야 합니다.
생원·진사는 나이 30세가 되고 유학(幼學)은 나이 40세가 되어야 비로소 입사(入仕)가 되는데, 공신(功臣)·명현(名賢)과 전망(戰亡)·청백리(淸白吏)의 자손(子孫)은 유독 나이가 차야만 되는 제도가 없어 관(冠)을 쓸 수 있는 자이면 간혹 인수(引綬)를 차는 경우까지 있기 때문에 분경(紛競)351)  이 습관을 이루어 사로(仕路)가 혼탁함이 많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공신의 적자(嫡子)·장자(長子) 이외는 한결같이 생원·진사·유학의 준례에 따라 마땅히 그 연한을 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헌납(獻納) 서명형(徐命珩)이 이철보(李喆輔)를 논죄(論罪)한 일에 대해서 진실로 개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이철보가 분부를 받고 나서 세동(細洞)이 누락을 당하고 김창온(金昌溫)을 작처(酌處)한 것은 지금 와서 살펴보면 소루(踈漏)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시초에는 또한 모두가 반복해서 참험(參驗)하고 여러 공초(供招)를 가지고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신은 모르긴 하지만, 엄중하게 징계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이며 삭탈(削奪)할 수 있는 것이 어떤 죄입니까? 대개 그가 입을 열면 기휘(忌諱)를 저촉하여 세상에 표적이 되어 있기 때문에 헐뜯고 배격하기를 극도로 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이 예전에 상소한 가운데 한 귀절의 말을 가지고 그를 조롱하고 꾸짖는 근거로 삼으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어찌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른 것입니까? 그리고 삼가 듣건대, 어제 훈국(訓局)의 장교(將校)가 별군직(別軍職)들과 함께 북영(北營)에서 연음(宴飮)을 하여 창우(倡優)352)  가 온갖 놀음놀이를 하고 가취(歌吹)가 비등(沸騰)하여 시끄럽게 잡담하는 소리가 금달(禁闥)353)  에까지 미치고 부녀자들의 관광(觀光)은 황단(皇壇)354)  에까지 핍근(逼近)하였는데, 그들의 무리는 품지(稟旨)로써 말을 하는가 하면 생기(省記)355)  의 입직(入直)한 자도 모두가 다 모였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이 연희(讌戱)가 얼마나 외설(猥屑)스러운 것인데 이에 감히 임금의 앞에 진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같은 종류를 미루어 말한다면 그 단서가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성(反省)하여 공부를 더하시고 훈국 장교(訓局將校)와 별군직(別軍職)은 적발하여 징계해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서명형의 상소는 그 마음을 내가 이미 통찰하여 아는 바이다. 말단(末端)의 일인 별군직은 남들의 경우와는 다름이 있다. 그러나 면계(勉戒)함이 절실하니, 장교와 별군직의 우두머리 된 자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과치(科治)토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가 이충정(李忠定)의 주의(奏議)를 강(講)하였다. 이어서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윤유(尹游)를 불러서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요사이 이강(李綱)356)  의 차자(箚子)를 읽어보니, 그가 논한 상평법(常平法)은 백성과 나라에 모두 편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 나라도 또한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고 있으나 그 명칭만 있지 그 실상은 없으므로, 평상시의 저축한 바가 1, 2년의 대비책도 되지 못하여 한번 흉년을 지나고 나면 공(公)·사(私)가 번번이 허겁지겁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니, 상평(常平)의 의미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강의 이른바 ‘풍년에는 가격을 높여서 곡식을 판매하여 농민이 피해를 입지 않게 하고 흉년에는 가격을 내려서 곡식을 판매하여 식생활이 곤란을 겪지 않도록 하면 국고(國庫)에는 비축이 있고 백성은 기곤(飢困)이 없게 된다.’는 것은 진실로 지론(至論)이라고 할 수 있다. 경(卿)이 바야흐로 진휼청(賑恤廳)의 일을 주관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상평의 제도에 마음을 다하여 우선 현재 있는 전화(錢貨)를 가지고 편리한 방법에 따라 곡물로 바꾸어 더 저축하도록 노력하여 수재(水災)나 한재(旱災)에 대비하고, 도민(都民)으로 하여금 곡식이 귀해서 먹고 살기가 곤란한 우환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명리(趙明履)를 지평으로, 윤휘정(尹彙貞)을 교리로, 김상익(金尙翼)을 부수찬으로, 이광도(李廣道)를 헌납으로, 신덕하(申德夏)를 남병사(南兵使)로, 최도장(崔道章)을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삼았으니, 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유(尹游)의 정사(政事)이었다. 윤유는 3년 동안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오로지 사의(私意)만을 따랐고, 차제(差除)하는 무렵에는 중첩(衆妾)들이 용사(用事)하여 뇌물을 받고 작위를 판매한다는 비방이 일세(一世)에 충일(充溢)하였다. 심지어는 곤수(閫帥)와 변장(邊將)이 모두 정가(定價)가 있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6월 3일 정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을 끝마치자, 지경연(知經筵) 조상경(趙尙絅)이 북로(北路)의 강변(江邊) 봉대(烽臺)의 일을 진달하기를,
"처음에 후주진(厚州鎭)으로써 화저(火底)로 삼았던 것은 대개 그곳이 청(淸)나라와 지역이 서로 연접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을축년357)  에 있어서 그 진(鎭)을 개혁하여 그 지역을 비워둔 채 드디어 장진(長津)의 강(江) 가에 어면진(魚面鎭)을 설치하여 후주(厚州)의 백성과 군졸들은 모두 어면(魚面)에 소속시켰습니다. 그러므로 화저도 또한 따라서 이동하였습니다. 장진은 후주와의 거리가 2백여 리나 됩니다. 변강(邊疆)의 사변이 있고 사변이 없는 것은 막연히 서로 관섭하지 않고서 단지 봉수(烽燧)만 든다는 것은 일이 몹시 허술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호기(胡騎)가 장진에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후주에 길을 찾아 장진의 빙판길을 경유하여 온다면 3, 4일도 걸리지 않고 함흥(咸興)에 당도할 수가 있을 것이니, 이 점을 또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함흥의 감영(監營)에서 대죄(待罪)할 때에 수신(帥臣)과 서로 의논하여 어면의 봉대(烽臺)를 옛 갈파지진(乫坡知鎭)에 이설(移設)할 것을 장청(狀請)한 바가 있습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이종성(李宗城)도 또한 잇달아 그 형편을 진달하기를 조상경의 말과 같이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문의하여 품지(稟旨)해서 처리하게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조명리(趙明履)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윤연(尹㝚)·이태익(李泰翼)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충훈부(忠勳府)의 유사(有司)의 직임은 비록 친훈신(親勳臣)이 현재(見在)한 시기일지라도 벼슬을 이어받은 사람이 또한 구관(句管)하는 경우도 많으니,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이 관례에 따라 그대로 겸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김종태(金宗台)가 이에 ‘방도(放倒)·탐연(貪戀)’ 등의 말로써 부당하게 후욕(詬辱)을 가하였으니, 김종태를 마땅히 파직(罷職)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전계 가운데서 이봉상(李鳳祥)의 일과 승지(承旨)를 파직시키라는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강(講)을 끝마치자, 참찬관(參贊官) 이종성(李宗城)이 나와서 말하기를,
"왕자(王者)의 신중히 할 바는 오직 형벌(刑罰)일 뿐입니다. 신이 지난해에 북방(北方)으로부터 돌아와 친국(親鞫)할 때의 혹장(酷杖)의 형구(刑具)가 그때까지도 대궐 뜰에 남아 있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서 마음속으로 몹시 불쌍하게 여겨 중간에 일찍이 어리석은 소견을 대략 진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국수(鞫囚)를 포도청(捕盜廳)으로 이송(移送)한 것과 이번에 범월(犯越)한 죄인(罪人)을 추조(秋曹)358)  와 포도청으로 하여금 합좌(合坐)하여 안치(按治)하게 한 것은 비록 죄인의 완고하게 참으면서 자복(自服)하지 않는 것에 연유한 것이지만, 끝내 법례(法例)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어찌 국문하는 죄수로써 포도청에 이송할 수가 있겠으며 또 어찌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하여금 사구 아문(司寇衙門)에 합좌하여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로써 시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이제부터 규식을 정하고 후일에는 예(例)를 원용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이 뒤에 마땅히 처분(處分)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6월 4일 무신

소대를 행하였다.

 

6월 5일 기유

재신(宰臣)을 보내어 거듭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정언섭(鄭彦燮)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지평(持平) 김광세(金光世)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조제(調劑)하는 방책을 하기에 힘쓰시고 오로지 진정(鎭定)시키는 방도를 일삼으시어, 말이 동색(同色)에서 나오면 괴리(乖離)라 여기고 말이 자기 의사와 달리하는 데 관련된 바가 있으면 배알(排軋)이라고 여깁니다. 일이 낭묘(廊廟)에 관련되면 경함(傾陷)이라 말하고 논핵이 전지(銓地)에 미치면 뒤흔든다 말하며, 한 통의 계사(啓辭)를 내게 되면 미리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았는가 억측하고 한 가지 일을 제시하면 바로 당습(黨習)에 오염된 것으로 돌려서 크게는 협사(挾私)의 죄목을 가하는가 하면 작게는 야료(惹閙)의 의혹을 자아냅니다. 무릇 이러한 몇 개의 제목(題目)들은 실로 사대부(士大夫)의 수치(羞恥)가 되는 것인데, 누가 하자 없는 몸으로서 불결(不潔)한 명칭을 받기를 즐겨하겠습니까? 오늘의 대각(臺閣)에 있는 자는 그 방술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고지(故紙)를 등전(謄傳)하여 시일(時日)을 끌며 지나가는 것이고, 둘째는 양측을 천거하여 상대(相對)시켜서 잘 미봉(彌縫)을 하는 것이며, 셋째는 동(東)일 수도 있고 서(西)일 수도 있어 저쪽에도 이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언의(言議)를 어렵사리 찾아내고 흑(黑)같기도 하고 백(白)같기도 하여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구애됨이 없는 문자(文字)를 교묘하게 만들어서 구차하게 완결시켜 요행히 무사(無事)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대각에 있기 어려움이 오늘날처럼 어려운 때가 없다.’고들 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크게 경오(警悟)를 가하시어 무릇 청납(聽納)하는 즈음에 억측을 두지 마시고 강직한 선비들을 권장해 진출시키시어 무력(無力)한 기풍을 크게 변화시키소서.
일전에 두 종신(宗臣)이 서로 잇달아 장주(章奏)를 진달하여 동조(東朝)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한 것은 대개 장렬 왕후(莊烈王后)359)  의 고사(故事)를 원용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영고(寧考)360)  께서 위로 장렬 대비(莊烈大妃)를 받들어 무릇 여러 가지 돈효(敦孝)의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은 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인조(仁祖)께서 즉위(卽位)하신 해가 비록 선왕(先王)이 어세(御世)하시는 동안에 돌아왔지만 게휘(揭徽)361)  의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모후가 주갑(周甲)이 된 해에 이르러서 비로소 존숭(尊崇)의 전례(典禮)를 거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오늘에 있어 규례(規例)로 원용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휘덕(徽德)이 더욱 높아 마지못해 따라 주지도 않으시니, 겸손의 미덕(美德)은 족히 간책(簡冊)에 빛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를 받들어 순종한다면, 그것이 성효(聖孝)에 빛남이 있음이 어찌 단지 몇 글자로 존호를 가하는 비교에 그치겠습니까?
이봉상(李鳳祥)을 당초에 감률(減律)한 것은 이미 형벌 적용을 잘못한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이배(移配)를 한다는 것은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대각에서 잇달아 환수(還收)를 청한 것은 스스로 이것이 집법(執法)의 논의인데, 헌신(憲臣)이 국법(國法)의 지엄함을 생각치 않고 중발(重發)한 논의를 멋대로 정계(停啓)하여 전연 돌아보거나 기탄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마땅히 견벌(譴罰)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수건(首件)의 일은 마음은 비록 억울(抑鬱)하지만, 자성(慈聖)의 겸양의 덕을 받드는 것을 어찌 그대들의 청을 기다려야겠는가? 인용한 바 고사(古事)는 사체(事體)가 미안하다. 이봉상의 일은 일찍이 이미 누차에 걸쳐 하유(下諭)하였으니, 이는 이와 같이 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지의금(知義禁)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정익하(鄭益河)를 조사하는 일은 옥체(獄體)로써 헤아려 볼 때에 경정(逕庭)362)  의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이유신(李裕身)이 당초에 논핵한 바를 성상께서 사람을 암매(黯昧)한 처지에 놓아두려고 하지 아니하여 드디어 조사를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본도(本道)의 핵문(覈聞)과 의금부[金吾]의 의계(議啓)를 통해서 ‘탐오(貪汚)·불법(不法)’의 설이 저절로 사실 무근한 것으로 돌아가 심지어 특별히 석방하라는 분부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가위 이미 완결된 안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수원(讎怨)이 있는 자의 매번 추정(追呈)한 것으로 인하여 오늘 다시 조사하고 내일 다시 조사한다면 다만 출장(出場)시킬 시기가 없을 뿐만 아닙니다. 왕부(王府)363)  의 사체(事體)는 지극히 엄중하니, 만일 전일의 조사한 것으로써 미진함이 있다고 여긴다면 도신(道臣)과 사관(査官)을 먼저 논죄(論罪)한 뒤에 정익하를 잡아다가 신문하여 조사를 시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방(外方)의 안핵(按覈)에 대해 사람들의 비평하는 말이 있기가 쉬울 것이니, 마땅히 추조(秋曹)364)  로 하여금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잡아들여서 곧바로 조사하여 결말짓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정익하의 일은 과연 진달한 바와 같으니, 마땅히 하교할 것이다."
하였다. 뒤에 연석(筵席)에서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사처(査處)를 지났으니, 다시 조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드디어 앞서 내린 분부를 중지시켰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강(講)을 끝마치자, 임금이 참찬관(參贊官) 이종성(李宗城)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지난번에 명신(名臣)의 주의(奏議)를 강하려고 할 때에 이강(李綱)의 주의(奏議)로써 나에게 권고한 자가 부제학(副提學)이 아니었던가? 부제학이 이 글로써 나에게 권고한 것은 그 의도가 인재(人才)를 얻는 데 있었으니, 이제 강(講)을 끝마침에 당하여 깊이 느낀 바가 있다."
하고, 이어서 어제시(御製詩) 한 편을 이종성에게 내려 주었는데, 그 시(詩)에 이르기를,
"나라 위한 일편단심 사리를 봄이 분명하니, 고종(高宗)은 어찌 깊은 정성에 감동하지 않았으리. 지금 펼쳐 읽으매 사람들에게 탄식을 자아내게 하니, 황권(黃券)의 편서(編書) 속에 위대한 이름 남기었다."
하였다.

 

6월 6일 경술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조한위(趙漢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봉상(李鳳祥)의 죄는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고 양사(兩司)의 계사(啓辭)는 공의(公議)가 일제히 떨치고 일어난 것인데, 조명리(趙明履)가 제멋대로 정계(停啓)를 시켰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있는 몸으로서 도리어 법을 멸시하는 논의를 하였으니, 조명리는 마땅히 파직(罷職)시켜 서용(敍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7일 신해

정언(正言) 김기석(金箕錫)이 상소하여, 문구(文具)365)  가 너무 지나치고 나라의 체모가 존엄하지 못하며 정령(政令)이 몹시 번거로운 폐단을 왕성하게 진달한 것이 누누이 수백언(數百言)이었다. 또 말하기를,
"금년에 몹시 가뭄이 들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경구(警懼)하고 억손(抑損)하여야 하는데, 도하(都下)에 성대한 향락의 거조가 종전에 비하여 더함이 있어서 꼭두각시[傀儡]의 놀음이나 술마시고 노래부르는 놀이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마땅히 조속히 금단(禁斷)할 것을 명하여 재앙을 만나 수성(修省)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봉상(李鳳祥)에 대한 계사(啓辭)는 하나의 대각(臺閣) 위에서 서로 논쟁하는 단서가 되어 지식(止息)될 기약이 없습니다. 정계(亭啓)한 헌신(憲臣)이 이미 박론(駁論)을 입었으니, 원계(原啓)가 다시 나오는 것을 아마 혹시 금지하기 어려울 듯하니, 현재로서 이를 수습하는 방도는 조속히 본원(本院)의 계사를 윤허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광식(李光湜)이 남태제(南泰齊)를 논핵함에 있어 심지어 ‘한 명의 재상(宰相)을 논핵하는 것이 이것이 무슨 큰 죄가 되겠습니까?’라는 등의 말로써 대신(大臣)을 침핍(侵逼)하여 능답(凌踏)하는 의도가 현저히 있었으니, 마땅히 견벌(譴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함이 절실(切實)하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봉상의 일은 그 당시에 법외(法外)의 형률(刑律)로 바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가 교문(敎文)을 실증하고자 처음 만들어 시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헌부(司憲府)의 계사로도 부족하여 또 사간원(司諫院)의 계사가 있었으니, 이러한 과격한 습관은 바로 내가 취하지 않는 바이다. 그러나 위와 아래가 서로 버티고 있어 한갖 조정의 모양으로 하여금 아름답지 못하게 함이 과연 그대의 상소한 바와 같으니, 우선 양이(量移)하라는 분부를 중지하고, 이광식은 파직(罷職)시키라."
하였다.

 

6월 8일 임자

재신(宰臣)을 보내어 거듭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6월 9일 계축

소대(召對)를 행하고 비로소 《좌전(左傳)》을 강(講)하였다.

 

장령(掌令) 여광헌(呂光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능침(陵寢)에 있는 수목(樹木)을 함부로 베어 가는 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장배(杖配)를 시행하는 것은 법의 규정인 것입니다. 인빈방(仁嬪房)의 묘(墓)의 종[奴]이 흉악하고 방자하여 광릉(光陵)366)  에 있는 여러 아름 되는 나무를 제멋대로 베어가 능관(陵官)이 품보(稟報)하여 편배(編配)로써 적용하니, 속전을 주고 빠져 나와서는 같은 악당들을 모아가지고 능졸(陵卒)을 엿보아 포박하여 포학하게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흉완(凶頑)한 사람은 마땅히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엄중하게 국문(鞫問)하여 극률(極律)에 처해야 합니다. 화양정(華陽亭) 한 구역은 국초(國初)에 설치한 것인데 그 울짱[柵]을 높이고 도랑을 깊게 파서 사람들의 경작이나 목축을 금지한 것은 바로 망아지[駒]를 훈련시키는 일을 중요시한 까닭입니다. 근래에는 태복시(太僕寺)의 제원(諸員)의 무리가 화양정 뒤에 실가(室家)를 멋대로 지어 거의 백여 호(戶)나 되고 기름진 땅을 빙 둘러 쌓아 농사짓는 장소로 삼고 있으니, 마땅히 맨 먼저 제창한 사람을 적발하여 조속히 사변(徙邊)367)  의 형률(刑律)을 시행한 뒤 그 가옥을 철거하고 그 축조한 것을 헐어서 방목(放牧)의 장소로 삼게 해야 합니다.
국가(國家)의 수용(需用)을 시인(市人)과 공인(貢人)에게 많이 요구하게 되니 무릇 그들의 질고(疾苦)에 대해 마땅히 무휼(憮恤)을 가해야 하는데, 시민(市民)은 각사(各司)·군문(軍門) 및 여러 궁가(宮家)에서 억지로 매입하는 폐단이 그 단서가 하나뿐이 아닙니다. 공인(貢人)은 관원(官員)이 행차함이 있으면 건마(健馬)를 독촉하여 마련하게 하고 일이 있으면 불러서 사역(使役)을 담당하게 하니, 근자에 상점[床廛]을 훼철한 것과 장사하는 아이[賈兒]가 울면서 호소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마땅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낭청(郞廳) 두 사람을 가려서 정하여 이 일을 전담케 하고 따로 염찰(廉察)하여 발견되는 대로 논죄(論罪)하여야 합니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은 유액(誘掖)368)  의 도리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데, 매월마다 시강(試講)하는 법(法)이 매우 소활(疏闊)해진 뒤로부터 교관(敎官)의 구수(口授)가 점차 나태해지고, 과후(科後)에 고안(考案)하는 규정이 한 번 폐지되고 나서부터 생도(生徒)의 학문을 조성함이 더욱 게으릅니다. 마땅히 재주와 학문을 갖춘 사람을 선택하여 교도(敎導)의 뜻으로써 부여하며 월강(月講)의 법을 밝히고 고안(考案)하는 규정을 신칙(申飭)하여야 합니다. 무사(武士)가 적체(積滯)된 우환(憂患)이 요사이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않은데, 해조(該曹)에서는 실로 추이(推移)하여 조서(調敍)하는 방도가 없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매양 과방(科榜)이 나올 적마다 오군문(五軍門)으로 하여금 그 일방(一榜)을 들어서 모조리 분속(分屬)시켜 편비(偏裨)로써 명칭을 붙이고 궐원(闕員)에 따라 들어 쓰게 한다면 거의 적체를 소통시키는 한 방도가 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 중에 비국 낭청(備局郞廳)이 전적으로 주관하게 하는 일은 번쇄(煩瑣)하여 시행하기가 어렵다. 동몽 교관의 일은 다시 별도로 신칙을 가하라. 무과(武科)를 군문(軍門)에 조용(調用)하는 일은 앞서 이미 하교(下敎)하였으니, 하필 분속시킬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기를,
"이봉상(李鳳祥)의 본률(本律)은 단지 유배(流配)일 뿐이니, 오랜 세월이 지낸 뒤에 가까운 지방으로 이배(移配)할 것을 청한 것은 그 정리(情理)가 가긍(可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故) 상신(相臣)’ 운운(云云)한 것에 있어서는 대개 신이 평일에 원민(冤愍)하는 뜻이 마음속에 맺혀 있기 때문에 주대(奏對)하는 즈음에 저절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되는 대로 지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계(臺啓)가 장황한 것은 전적으로 신의 몸을 지적한 것인데, 맨 나중에 가서 파직(罷職)하라는 청은 도리어 후원(喉院)369)  의 신하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덮어씌우고자 하는 죄는 신이 실로 우두머리가 됩니다. 저 한결같이 연주(筵奏)한 바에 따라 거조(擧條)를 봉입(捧入)한 자가 무슨 죄가 있기에 신의 연고로 인해서 대신 그 칼날[鋒]을 받는 것입니까? 더구나 또 정계(停啓)한 사람은 이에 논파(論罷)를 당했고 이배(移配)의 분부도 또한 반한(反汗)하게 하였으니, 신의 황공하고 위축됨은 더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신의 관직을 삭탈(削奪)하여 대각(臺閣)의 의논에 사의(謝意)를 표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답하였다.

 

야대(夜對)를 행하여 《좌전(左傳)》을 강(講)하였다.

 

6월 10일 갑인

함경도(咸鏡道) 무산(茂山)에 서리와 눈이 번갈아 내리니,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으로, 이성효(李性孝)와 윤득징(尹得徵)을 지평으로, 윤급(尹汲)을 교리로, 오원(吳瑗)을 부교리로, 신택하(申宅夏)를 수찬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6월 11일 을묘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사관(史官)을 특별히 보내어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을 돈소(敦召)하여 그와 더불어 함께 들어오도록 하니, 김흥경이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사복시(司僕寺) 도제조(都提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장령(掌令) 여광헌(呂光憲)의 상소로 인하여 살곶이[箭串] 마장(馬場)에 있는 인가(人家)를 훼철하라는 분부가 있으셨는데, 선조(先祖) 임오년370)  에 고(故) 상신(相臣) 신완(申琓)이, 외방(外方)의 제원(諸員)으로써 살곶이의 둔전(屯田)에 거주를 허락하여 난리를 당하였을 때 마부(馬夫)를 책립(責立)하는 방도로 삼기를 청한 것은 계책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 입주(入住)를 허락한 가옥은 지금 혼합하여 다 헐어버리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부수찬(副修撰) 유최기(兪最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헌신(憲臣)을 처치(處置)함에 있어 그 의도는 대신(大臣)에게 있으면서도 승지(承旨)에게 옮겨서 공격한 일의 잘못된 이유로써 드디어 낙과(落科)에 두었습니다. 지금 대소(臺疏)가 신의 죄를 성토(聲討)한 것은 몹시 낭자(狼藉)하니, 파삭(罷削)의 청도 또한 말감(末減)에서 나온 것이나, 다만 매우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은 이봉상(李鳳祥)이 죽을 죄에 이르지는 않았는데 반드시 극률(極律)로써 베푸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지금 시기가 달라지고 일이 지나간 뒤에도 다시 장독(戕毒)의 남은 투식을 답습하여 너무 심한 참독(憯毒)한 논의를 실현시키려고 하니, 세도(世道)를 위하여 우려와 탄식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6월 12일 병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김기석(金箕錫)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봉상(李鳳祥)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지평(持平) 윤득징(尹得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날에 신만(申晩)의 상소는 실로 일국(一國)의 공공(公共)의 의논을 따른 것인데, 견파(譴罷)·수서(收敍)한 이후에 한결같이 삼사(三司)에 저지를 당하는 것은 대개 언자(言者)를 억제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 진실로 이미 해괴스러운 일입니다. 이철보(李喆輔)의 과명(科名)은 관계가 사소한 것이 아니니, 통색(通塞)의 가부(可否)를 오직 당연히 동석(同席)에서 소상히 하여야 하는데, 매양 수당(首堂)이 나오지 않았을 때를 당해서 번번이 모두 검의(檢擬)하여 무고(無故)한 사람과 똑같이 여기고 의리(義理)를 만들어 공의(公議)와 극력 대결하니, 그것이 정격(政格)에 있어서 이미 몹시 어긋난 일입니다. 그리고 또 김상성(金尙星)이 방자하게 영호(營護)한 것은 진실로 몹시 무엄한 일인데도 나중에는 이에 홍계유(洪啓裕)에게 분풀이를 하여 공공연히 추욕(醜辱)을 하기에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으니,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지난번에 성범석(成範錫)이 거조(擧條)의 봉입(捧入)을 빙자해서 특파(特罷)의 고사(故事)를 불쑥 인용하여 대신(大臣)으로 있는 이를 논열(論列)하고 후사(喉司)에 있는 이를 감벌(勘罰)하였으니, 그의 협잡(挾雜)·회호(回互)한 정상을 엄폐(掩蔽)할 수가 없습니다. 옥당(玉堂)의 처치(處置)는 실로 공론(公論)에서 나온 것인데, 전후(前後)에 대각(臺閣)에 들어간 자가 혹은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소(疏)를 올리기도 하면서 오로지 협지(脅持)할 계획만을 하였습니다. 일전에 간신(諫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심지어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무리가 교문(敎文)을 실증(實證)하려고 하였다.’는 하교를 하기까지 하였으니, 성상께서는 이미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야료(惹閙)의 우려를 위하여 다투어 이기려는 말을 부당하게 따라서 끝내는 처분(處分)이 전도(顚倒)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리고 윤득징을 파직시켜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6월 13일 정사

헌납(獻納) 이광도(李廣道)가 상소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을 상세히 논하고, 이어서 여러 가지 군역(軍役)을 모조리 혁파하고 국전(國典)의 저화(楮貨)의 제도에 따라 전(錢)을 금지하고 저화를 사용하여 수량을 계산해 인쇄 제조해서 군포(軍布)의 수효를 충당하고 민생(民生)의 시급함을 해결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구애되는 점이 있어서 시행하기 어렵다."
하였다. 그 상소에 또 말하기를,
"광양(光陽)의 백성이 그 두 아들을 데리고 그 족인(族人)에게 구걸하러 갔는데, 그 일가 사람이 첨정(簽丁) 징포(徵布)를 두려워하여 그들이 머물러 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두 아이가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불행히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장차 부모(父母)로 하여금 굶어 죽게 만들겠다.’하고 드디어 칼로써 스스로 생식기를 잘랐습니다."
하였다. 본도(本道)에 조사하여 아뢰라 명하니, 그 일은 과연 그러하였는데 광양(光陽)이 아니고 바로 낙안군(樂安郡)이었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몹시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양역(良役)의 해독이 이러한 처지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고, 해단 군(郡)의 군액(軍額)을 감면할 것을 명하였다.

 

경기(京畿) 이천(利川)의 유생(儒生) 이시환(李始煥) 등이 상소하여, 본부(本府)의 삼현사(三賢詞)에 사액(賜額)할 것을 청하였다. 삼현(三賢)은 바로 여조(麗朝)의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와 본조(本朝)의 징사(徵士) 이관의(李寬義)와 좌찬성(左贊成) 김안국(金安國)이다. 비답하기를,
"서원(書院)의 사액은 단지 그 문식(文飾)에 지나지 않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허문(虛文)을 버리고 내실(內實)을 닦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전 승지(承旨) 이광보(李匡輔)의 문출(門黜)을 방면(放免)할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이광보가 국안(鞫案)을 등전(謄傳)한 것에 연좌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부제학(副提學) 이종성(李宗城)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이광보가 등전(謄傳)한 것은 국안(鞫案)이 아니고 바로 사변 일기(事變日記)입니다. 그리고 또 노모(老母)가 있으므로 정리(情理)가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초(鞫招)를 등전(謄傳)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처벌을 시행한 지 이미 오래고 정리가 불쌍히 여길 만하다."
하고, 드디어 이 분부가 있었다.
사신은 말한다. 이광보의 연좌된 것은 본래 경미한 것이 아니다. 사변 일기(事變日記)는 유독 국안(鞫案)이 아닌가? 한 사람의 유신(儒臣)이 방자하게 사면을 청하니, 물의(物議)가 해괴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41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이광보의 연좌된 것은 본래 경미한 것이 아니다. 사변 일기(事變日記)는 유독 국안(鞫案)이 아닌가? 한 사람의 유신(儒臣)이 방자하게 사면을 청하니, 물의(物議)가 해괴하게 여겼다.

 

6월 14일 무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의금부(義禁府)의 보수 죄인(保授罪人)371) 조빈(趙儐)이 죽었다. 조빈은 바야흐로 총융사(摠戎使)를 맡고 있었는데 관가(官家)의 재화(財貨)를 사사로이 사용한 이유로써 무겁게 대각(臺閣)의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내려졌다. 병(病)으로 인해 보방(保放)되었는데, 공초(供招)를 바치지 못하고 죽었다. 임금이 이 사실을 듣고 죽시 석방하여 사면할 것을 명하였는데, 얼마 후 그 아들의 격고(擊鼓)로 인하여 신원(伸冤)되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사수(朴師洙)가 아뢰기를,
"서토인(西土人)372)  이 경성(京城)의 인물(人物)을 초인(招引)373)  한 자에 대해서는 일률(一律)로써 적용한다는 명령이 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매(轉賣)한 사실이 일찍이 발각되지 않았는데 일체로 호인(胡人)과 매매(賣買)한 것으로써 단정하여 수사(殊死)374)  로써 논죄하는 것은 자못 왕정(王政)의 마땅히 있을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강변 칠읍(江邊七邑)375)   이외에 죄가 초인(招引)에 연계된 자는 일률(一律)로써 감처(勘處)하지 마시고 강변(江邊)의 경우 매매(賣買)한 자는 그 죄를 같게 하여 몰래 매매하는 우환을 방지하소서."
하였다. 뒤에 비국(備局)의 복주(覆奏)로 인하여 특별히 ‘인물(人物)을 구협(驅脅)·초인(招引)하는 자는 청천강(淸川江) 이남과 이북을 물론하고 한결같이 구례(舊例)에 따라 동일한 죄로써 처단하고 강변의 매매한 자는 모두 차율(次律)로써 논단(論斷)할 것을 명하였다.

 

평안도의 상승(商僧) 석훈(釋訓) 등이 돈과 비단[錢帛]을 소에 싣고서 창성(昌城) 경계를 지나가다가 소가 갑자기 발을 잘못 딛어 강(江)으로 떨어졌는데, 이를 청인(淸人)들이 건지게 되었다. 전(錢)은 금지하는 물품이므로 청인(淸人) 등이 자못 성내어 공갈하니, 부사(府使) 신만(申漫)이 우주(牛酒)와 양찬(糧饌)을 뇌물로 주고 꾀어서 드디어 그 전(錢)을 되돌려 받았다. 도신(道臣)이 사유를 갖추어 치문(馳聞)하고 이어서 지방관(地方官)의 변방을 지킴이 엄중하지 못한 죄를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물었다. 모두가 말하기를,
"신만은 마땅히 공(功)을 가지고 죄를 결단해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파직은 시키지 말 것을 명하였으며, 승인(僧人)은 정배(定配)시켰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송진명(宋眞明)이 윤득징(尹得徵)의 상소로 인하여 상소하여 대변(對辯)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만(申晩)의 돌연히 청신(請伸)의 논의를 한 것은 아주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옛날대로 검용(檢用)하자니 물정(物情)에 거스림이 있었으므로, 약간 규경(規警)을 보여 천천히 소통(疏通)을 의논하는 것이 실로 전형(銓衡)을 공평히 하는 도리가 되겠습니다. 더구나 개의(改擬)하라는 분부가 있은 이후에 품재(稟裁)를 거치지 않고 곧 다시 억지로 의망(擬望)한다는 것은 더욱 미안(未安)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장석(長席)과 더불어 쟁란(爭難)한 바 있고 수차에 걸쳐 저지하였으니, 그 당(黨)의 테두리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괴상하게 비쳐졌다는 것도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이철보(李喆輔)의 일에 있어서는 그 형 승선(承宣)의 의망과 다른 사람 문함(文銜)의 제수에는 다시 이의(異義)가 없었는데 유독 이철보의 관직(館職)의 의례적인 의망에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이른바 횡결(橫決)함이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어찌 이철보가 문아(文雅)하고 강직하여 시기와 질투를 치우치게 당한 탓에 그런 것이겠습니까?"
하니,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옥(徐宗玉)도 또한 상소하여 대변하였는데, 송진명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응교(應敎)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에 남태제(南泰齊)가 대신(大臣)을 논핵한 상소는 일신(一身)의 이해(利害)를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바를 말하였는데, 전하께서 이에 도리어 꾸짖어 절해(絶海)의 장려(瘴癘)가 있는 물가로 내쫓으시니, 이는 무슨 까닭이십니까? 특별히 환수(還收)를 명하신다면 닫혔던 언로(言路)가 거의 다시 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남태제의 척보(斥補)는 또한 말감(末減)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영호(營護)하니, 몹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고 《시전(詩傳)》을 강(講)하였다.

 

진구(賑救)를 거친 제도(諸道)의 방백(方伯)에게 별유(別諭)를 내리기를,
"내가 바야흐로 《모전(毛傳)》을 강(講)하고 있는데, 백혜장(伯兮章)376)   주설(註說)에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의(文義)로 인하여 탄식을 일으키게 되었다. 아! 예로부터 수역(戌役)은 비록 멀고 가까움의 같지 아니함이 있으나 또한 귀가(歸家)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해 흉년이 듦으로 인해서 구학(溝壑)을 메우고 죽어간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올 날이 어느 때인가? 그리고 그 고자(孤子)·과처(寡妻)가 아버지를 부르고 지아비를 부르며 의지할 만한 데가 없는 것은 도리어 기세(飢歲)의 진민(賑民)보다 심함이 있는데, 전후에 걸쳐 진구(賑救)를 베풀 때에는 그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 비록 혹시 마음을 다함이 있을 것이나, 진구를 끝마친 이후에는 그것을 방과(放過)하지나 않는가? 작년에 본토(本土)에 하송(下送)하여 농업(農業)으로써 허락하였는데, 도로(道路)에서 기아(饑餓)에 허덕이며 능히 환집(還集)하지 못한 무리들을 방백(方伯)·수령(守令)된 자들이 그것을 보조해서 구휼하여 각각 그 터전에 안주하고 각각 그 직업에 종사하게 하는가? 이제 하유(下諭)함을 당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측은함을 느끼게 되니, 이 심중(心中)으로부터 우러나온 하교를 깊이 인식하고 힘써 열읍(列邑)에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6월 15일 기미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또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역대 명신(名臣)의 주의(奏議)를 뽑아 올리게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이종성(李宗城)이 김상성(金尙星)·김약로(金若魯)·남태량(南泰良)·유최기(兪最基) 등과 더불어 군덕(君德) 【5편(五篇).】 ·성학(聖學) 【4편(四篇).】 ·경천(敬天)  【1편(一篇).】 ·인민(仁民) 【5편(五篇).】 ·근정(勤政) 【1편(一篇).】 ·상벌(賞罰) 【3편(三篇).】 ·지인(知人) 【5편(五篇).】 ·청언(聽言) 【7편(七篇).】 ·계일욕(戒逸慾) 【3편(三篇).】 ·근명기(謹名器) 【2편(二篇).】 를 가려 뽑아 별단(別單)에 적어 올리고 이어서 차자(箚子)를 올려 면계(勉戒)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원차(元箚)는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

 

6월 16일 경신

소대를 행하였다.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만(申晩)의 상소는 진실로 할말을 다 말하여 숨기지 않는 데서 나왔습니다. 신만과 같은 지망(地望)과 문학(文學)으로서는 마땅히 먼저 이끌어 복직(復職)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두어 차례의 정사(政事)에서 연이어 옛 직위에 의망(擬望)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료(亞僚)와 정사를 같이함에 있어서 아료가 처음에 지명(指名)하여 서로 논란하는 일이 없기에 드디어 신만으로써 종전대로 비의(備擬)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원책(怨嘖)을 당하여 인입(引入)함에 미쳐서 누차의 정사가 지났는데도 신만이 의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가 고의로 저지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아료(亞僚)가 같이 의망을 하였다가 곧바로 저지한 것은 어떻게 된 연유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철보(李喆輔)의 과명(科名)에 있어서는 관계가 매우 중대합니다. 비록 처분(處分)은 자주 바뀌었지만 방호(榜號)는 그대로 있으니, 끝내 하자[疵]가 없는 방(榜)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문직(文職)은 오히려 준례에 따라 의망할 수 있지만 만일 청도(淸塗)나 극선(極選)의 경우는 결단코 그것이 중난(重難)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전후(前後)의 관직(館職)에 일찍이 검거(檢擧)하지 않았는데, 양료(兩僚)가 정사에 나오면 번번이 다시 의망하여 네가 앞으로 가면 나도 앞으로 간다는 듯이 하여 문득 일부(一副)의 당연한 도리(道理)를 이루게 되니, 구구(區區)의 고심(苦心)은 다만 방편(方便)으로 미봉(彌縫)하여 다시 시끄러움을 야기시키지 않는 데 있었는데, 대소(臺疏)가 갑자기 나와서 심지어는 정격(政格)으로써 책망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은 부끄러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애(撕捱)함이 너무 지나치고 고집하는 바도 또한 정도에 지나치다."
하였다.

 

6월 17일 신유

선정전(宣政殿)에서 친히 유생(儒生)들에게 시강(試講)을 했는데, 진사(進士) 안택중(安宅重)이 수석(首席)을 차지하였으므로,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이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좌우(左右)의 동료[寮寀]가 봉책을 펼치며 패국(敗局)으로 몰고 가는 것이 바로 신(臣)의 고심(苦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능각(稜角)377)  과 규진(畦畛)378)  은 한결같이 생략하고 골돌(鶻突)379)  ·호도(糊塗)380)  한 채로 저들의 조소(嘲笑)를 따랐습니다. 비록 신만(申晩)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애초에는 미루어 왔으나 어긋나게 떠벌리는 데에서는 경계하여 종용(從容)히 하려고 노력하였고, 논쟁을 벌이다가 되지 않으므로 물러나 앉아서 다시 참여하여 듣지 않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이 독정(獨政)381)  을 함에 미쳐서는 굳이 뜻을 굽혀서 구차하게 뇌동(雷同)할 필요가 없기에 과연 수차(數次)에 걸쳐서 저지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개 아침에 의망(擬望)을 바꾸고 저녁에 또다시 의망한다는 것은 아마도 도리가 아닌 듯하였습니다. 신이 품재(稟裁)하기를 기다려 천천히 소통(疏通)을 의논하려 하였던 것은 또한 스스로 매우 상량(商量)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장료(長僚)가 같이 의망하였다가 곧바로 저지한 것으로써 신을 나무라니, 이른바 너무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그것을 느리게 하고 급하게 하는 바가 오직 위에 있는데, 어찌 정관(政官)이 이와 같이 서로 다투는가?"
하였다.

 

이때 개정(開政)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조(吏曹)의 3당상(三堂上)이 모두 진소(陳疏)하고 다같이 응명(膺命)하지 않았다. 임금이 엄중한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정주(政注)를 통색(通塞)하는 것은 비록 정관(政官)에게 있지마는, 시의(時議)의 관련된 바 그 느리게 하고 급하게 하는 것은 오직 위에 있다. 지난 일을 추구(推究)해 볼 때 누가 그르고 누가 옳은가 하는 것을 이것이 〈지난해 1월〉 19일에 하교한 바인 것이다. 다만 오늘날을 살펴보건대, 부억(扶抑)하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이것이 무슨 모양인가? 전관(銓官)의 이러한 시애하는 장주(章奏)는 다시는 봉입(捧入)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8일 임술

신광하(申光夏)를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무릇 네 번에 걸쳐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출사(出仕)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니, 김흥경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병상(李秉常)은 애초에 좌죄(坐罪)된 바가 단지 관직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은 것일 뿐인데, 먼 고을에 출보(黜補)하여 한 해가 이미 지났습니다. 일찍이 총재(冢宰)382)  를 역임한 사람을 오랫동안 출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내직(內職)에 비의(備擬)할 것을 명하였다.

 

관서(關西) 범월인(犯越人)의 사초(査招)가 청(淸)나라의 조사한 것과 서로 틀리게 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추이(推移)해서 문안(文案)을 작성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교린(交隣)의 방도는 성실(誠實)을 귀중하게 여긴다. 이미 그 사실이 아닌데 억지로 그 문안을 작성했다가 저들이 만일 모두 극률(極律)에 처한다면, 어찌 왕자(王者)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하고, 다른 날 또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사죄(死罪)이다. 만일 상세히 실피지 않고 곧바로 사죄로써 처단한다면, 그것이 서명(西銘)383)  의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라는 뜻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한 명의 무고(無辜)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天下)를 얻는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무리들은 비록 무고한 사람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는 파리나 개미와 같은 미물에 대해서도 오히려 차마 밟아 죽이지 못하는데, 더구나 사람의 목숨이겠는가? 저 나라에서 만일 사람 수효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트집을 잡는다면 나는 차라리 만족한 마음으로 곤란을 받을 것이니, 결단코 차마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卿) 등은 부디 신중히 하라."
하였다.

 

소대를 행하고 《좌전(左傳)》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항의신편(抗議新篇)》을 보니,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이 그 당시에 명칭(名稱)이 드러나지 않았고 직질(職秩)도 또한 낮았는데 능히 나가서 창의(倡義)하여 7백 의사(七百義士)와 함께 난리384)  에 임하여 순절(殉節)하였으니, 어찌 드높고 거룩하지 않는가? 전횡(田橫)385)  의 5백 의사(五百義士)를 지난 역사에서 의롭게 여기는데, 조헌의 창솔(倡率)한 사람이 동시에 목숨을 바침이 7백 명이라는 많은 수효에 이르렀고 또 그는 초야(草野)에서 일어나 몸을 떨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또한 전횡과 동등하게 말할 수 없다."
하고, 특별히 유신(儒臣)을 보내어 조헌이 순절(殉節)한 유허(遺墟)에 치제(致祭)하고 7백 의총(七百義塚)에는 따로 제문(祭文)을 지어 같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 며칠 뒤에 시강관(侍講官) 김상성(金尙星)이 아뢰기를,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이 조헌과 함께 한 사우(祠宇)에 배향(配享)되어 있으니, 일체 사제(賜祭)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어 조헌의 후손은 적손(嫡孫)·지손(支孫)을 물론하고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니, 김상성이 말하기를,
"후손을 수록(收錄)하라는 분부는 족히 용동(聳動)시키는 정사가 됩니다. 그러나 조가(朝家)의 영전(令典)은 스스로 일정한 한계가 있으니, 적장(嫡長) 이외에 또 지파(支派)까지 허락한다면 아마 나중에 은혜를 요구하는 관습을 열어 주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문성(李文成)386)  ·조문열(趙文烈)387)   두 사람은 다른 명현(名賢)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전후에 걸쳐 이런 분부가 두 번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유신(儒臣)의 말이 진실로 체모를 얻었으니, 이 두 사람 이외에는 다시는 선례(先例)로 원용(援用)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전관(銓官)이 모두 소패(召牌)를 어기고 나오지 않으므로, 임금이 하교하여 책망하기를,
"과거(科擧)는 당인(黨人)의 과거가 아니니, 그것을 고치거나 그대로 두거나 하는 것은 나의 처분(處分)에 달려 있다. 관직(館職)은 지금 처음으로 의망(擬望)하는 것이 아닌데 어찌 그다지도 지난(持難)하는 것인가? 신만(申晩)의 관직(館職)에 있어서도 처음 의망하는 것이 아닌데 또한 어찌 논란을 벌이는 것인가? 서로가 이기기를 힘쓰니, 마땅히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3당상(三堂上)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그 이튿날 전관(銓官)이 또 소패(召牌)를 어기니, 임금이 또 하교하여 몹시 꾸짖고, 이어서 이 뒤에는 소패를 어기면 다시 번거롭게 품의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이에 전관(銓官) 등이 직무에 나아갔다.

 

6월 19일 계해

소대를 행하였다.

 

구성임(具聖任)을 총융사(摠戎使)로 삼고, 최명상(崔命相)을 발탁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집의(執義) 윤동원(尹東源)이 향리(鄕里)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방도는 직명(職名)의 유무(有無)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체직(遞職)을 허락하였다.

 

6월 20일 갑자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권업(權𢢜)을 상주(尙州)에 부처(付處)할 것을 명하였으니, 부임(赴任)하기를 즐겨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처음에 권업이 호향(湖鄕)에 물러나 있으면서 전후의 제명(除命)을 번번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영번(嶺藩)388)  에 제수함에 미쳐서는 임금이 누차에 걸쳐서 엄중한 하교를 내리어 반드시 그로 하여금 응명(膺命)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권업이 끝내 부임하지 않은 까닭에 이런 분부가 있었다. 처음에는 바로 그 지역에다가 부처할 것을 명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자 상주로 고쳐서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 참판(參判) 송진명(宋眞明), 참의(參議) 서종옥(徐宗玉) 등이 대궐에 나아와서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군주가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데 있어 스스로 그 도(道)가 있는 것이며 신하를 부리는 데 있어서도 또한 반드시 예(禮)로써 해야 하는데, 요사이 보면 전하께서는 일의 대소(大小)나 의리의 합당하고 아니함은 불문(不問)하시고 일체 출사(出仕)를 독촉하는 것으로써 위주로 하시어, 혹은 그 사소(辭疏)를 봉입(捧入)하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그 소패(召牌)를 어기는 것을 품의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하여, 회전(回轉)하지 못하게 한 후에야 그만두게 됩니다. 신 등과 같은 무리는 또 두려워 겁을 먹고 함부로 나왔기 때문에 전하의 마음에는 바야흐로 또 자기를 따르는 것에 기뻐하고 명령을 순종하는 것에 이롭게 여기시지마는, 국체(國體)의 휴손(虧損)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후로 이런 점을 개정할 것을 마음에 두시고 다시는 오늘의 하는 일과 같이 하지 마소서. 일전에 내리신 하교에 있기를, ‘전주(銓注)를 통색(通塞)하는 것은 비록 정관(政官)에게 있으나 시의(時議)의 관련된 바 느리게 하고 급하게 하는 것은 임금에게 있다.’ 하였습니다. 아! 조가(朝家)에서 만일 통색(通塞)과 취사(取捨)로써 모두 시의에 돌리고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성상의 뜻에 따라 하고는 그 의견을 행하지 못하게 한다면, 한 사람의 정리(政吏)만 있어도 만족할 것입니다. 오히려 어찌 3전관(三銓官)을 임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만 군상(君上)에게 있어 침관(侵官)이 될 뿐만 아니라, 신 등에게 있어서도 실직(失職)이 될 것입니다. 또한 후일의 무궁한 폐단이 이로부터 발단이 될까 염려되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현명하신 하교를 내리시어 전법(銓法)으로 하여금 실수가 없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전후에 걸쳐 돈박(敦迫)한 것은 정관(政官)을 협제(脅制)한 것이 아니라 바로 기강(紀綱)이고 분의(分義)이다. 정주(政注)를 통색(通塞)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바로 정관의 해야 할 바이지만, 시끄러운 단서가 연이어 발생하여 조제(調劑)될 시기가 없으니, 위에 있는 이가 어찌 묵묵히 있으면서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일제(李日躋)가 연강(沿江)의 형편을 두루 관람한 뒤 비어 방략(備禦方略)을 성대히 진술하여 도신(道臣)에게 이첩(移牒)하니, 도신 박사수(朴師洙)가 장계(狀啓)를 갖추어 아뢰고 이어서 자기의 의견을 첨부하여, 강변(江邊)의 6읍(六邑)과 각 진보(鎭堡)·영애(嶺隘)·강구(江口)에 목책[柵]을 세우고 보루[壘]를 쌓아서 위급한 사태를 당해서 물러나 지키는 장소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일이 묘당(廟堂)에 내려지니, 그 청한 바와 같이 시행하였다.

 

6월 21일 을축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주문(奏文)을 짓고 조사를 담당한 여러 신하들과 진주 정·부사(陳奏正副使)를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김영창(金永昌)·김세정(金世丁) 등의 범월(犯越)에 대한 옥사(獄事)가 비로소 결말이 나서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을 명하여 주문(奏文)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주문이 완성되었으므로, 입대(入對)하여 품재(稟裁)하도록 하였다.

 

이현보(李玄輔)를 승지로, 이병상(李秉常)을 예조 판서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로, 심성희(沈聖希)를 사간으로, 이태징(李台徵)을 장령으로, 이재후(李載厚)와 박필균(朴弼均)을 지평으로, 이석표(李錫杓)를 정언으로, 윤급(尹汲)과 오원(吳瑗)을 수찬으로, 신택하(申宅夏)를 부수찬으로, 서명빈(徐命彬)을 경상 감사로, 이광덕(李匡德)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처음에 이광덕이 어떤 일로 인해서 갑산(甲山)에 출보(黜補)되어 연신(筵臣)이 번갈아 유환(宥還)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러한 제명(除名)이 있었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강(講)을 끝마치자, 검토관(檢討官) 유최기(兪最基)가 아뢰기를,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이 옛적에 만력(萬曆)389) 갑술년390)  에 있어 질정관(質正官)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조회할 때에 일기(日記) 한 책(冊)을 손수 쓰고 그 아래에는 조천록(朝天錄)으로써 덧붙였는데, 중국 조정의 전례(典禮)와 연도(沿途)의 보고 들은 것을 채록(採錄)한 것이 자못 상세합니다. 임진 왜란과 병자 호란의 양란(兩亂)을 겪었는데도 책이 오히려 그 집에 보존되어 있으니, 진실로 귀중한 자료입니다. 지금 만일 간행(刊行)한다면 비풍(匪風)391)  의 생각을 붙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도신(道臣)에게 간행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6월 22일 병인

임금이 소대에 나아가 《좌전(左傳)》을 강(講)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문공(晉文公)이 개자추(介子推)에 대해서 그 환난(患難)을 주선해 준 공로는 잊을 수 없는 점이 있었는데도 끝내 개자추로 하여금 면산(綿山) 위에서 불타 죽도록 하였으니392)  , 이 점이 바로 군주된 이의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곳이다. 더구나 지금 무신년393)  의 군공(軍功)은 내가 친히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단지 별단(別單)에만 빙고(憑考)하는 것이니, 이미 소루(疏漏)한 염려가 없지 않을 터인데, 세월이 조금 오래 지나게 되면 인정(人情)이 소홀하기 쉬워서 비록 녹공(錄功) 가운데 있는 자일지라도 점차 유망(遺忘)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별도로 조용(調用)을 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남(嶺南) 사람 병조 정랑(兵曹正郞) 김성용(金聖鎔) 등이, 전 경상 감사 권업(權𢢜)의 전후에 걸친 세 통의 상소에 ‘영남 사람이 원독(怨毒)이 뼈에 사무쳐 구무(構誣)가 번갈아 나왔다.’는 말이 있고, 또 ‘투속(偸俗)394)  이 불화를 만드니 남이 알지 못한 근심[隱憂]이 있다.’는 등의 설이 있음으로 인해서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비답하기를,
"권업의 상소는 의리가 없고 정도에 지나치니, 영남 사람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3일 정묘

유엄(柳儼)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함경도(咸鏡道)가 남쪽으로 안변(安邊)에서 북쪽으로는 경원(慶源)에까지 두 달 동안이나 큰 물이 졌으므로, 도신(道臣)이 알리었다.

 

신방(申昉)을 예문 제학으로, 유건기(兪健基)를 부수찬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응교로,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으로, 김재로(金在魯)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6월 24일 무진

소대를 행하고 《좌전(左傳)》을 강(講)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이현보(李玄輔)가 사직소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해괴한 일이 바야흐로 벌어지고 나쁜 말이 번갈아 비등하여, 신만(申晩)의 비난과 윤득징(尹得徵)의 지껄임은 한마디[一節]가 한마디보다 깊어졌으며, 전장(銓長)의 상소가 나옴에 이르러 어의(語意)는 더욱 긴박해지고 의리(義理)는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심합니다. 인심(人心)의 함닉(陷溺)됨과 당의(黨議)의 타파하기 어려움이여!"
하였으니, 대개 이현보는 계묘년395)   방중(榜中)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았다. 이에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대변(對辯)하기를,
"이현보의 상소는 신이 그 과명(科名)을 논한 것으로써 노색(怒色)을 띠고 기색이 대단히 변하여 도리어 꾸짖었습니다. 아! 계묘과(癸卯科)의 분변은 스스로 백세(百世)의 공의(公議)가 있는데, 어찌 방중(榜中)의 사람이 의리로써 자칭하면서 관계의 지극히 중대함을 생각하지 않고 이에 혼합하여 당론(黨論)으로 돌려서 그 하자된 점을 해명하려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이 애석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계묘과의 의망(擬望)을 저지하는 것은 실로 정도에 지나친 바 있으나 그 과거에 참여한 자가 바로 의리를 삼으니, 이와 같이 서로 계교하는 것은 나도 또한 그르게 여긴다."
하였다.

 

이조 참의 서종옥(徐宗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어제 정사(政事)에서 권혁(權爀)을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삼았습니다. 명관(名官)이 수재(守宰)로 나가는 것은 본디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권혁은 이미 전랑(銓郞)을 통과하였으니, 책벌(責罰)의 경우가 아니라면 외직에 보임(補任)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리고 또 신은 비록 정사에 나가지는 못했으나 이러한 일은 마땅히 함께 들어야 하는데 끝내 서로 묻지 않았으니, 바라건대, 조속히 성명(成命)을 환수하시어 정격(政格)을 보존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옥서(玉署)396)  ·전랑(銓郞)에 모두 바야흐로 낙점(落點)이 안되었는데, 외관(外官)으로 제수해 내보내는 것을 어찌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5일 기사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아뢰기를,
"근래에 수령(守令)이 죄에 걸려 누차 세초(歲抄)397)  를 경유했으나, 수서(收敍)를 입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이현필(李顯弼)의 좌죄(坐罪)된 바는 단지 영장(營將)과 서로 계교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아직까지 세초(歲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면이란 것은 소인(小人)의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세초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일년에 재차 시행하면 더욱 이는 명분이 없는 사면이 된다. 이현필·성덕윤(成德潤)·이중술(李重述)은 내가 일체 용서해 주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사람이 조정에 나와 임금을 섬긴다는 것이 그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진실로 그것이 한찮은 과오일 경우는 영구히 폐지하는 것이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봉징(李鳳徵)과 같은 무리도 또한 세초 단자(歲抄單子)에 삽입한다면 그것을 장차 하찮은 과오라고 말하여 아울러 사면해야겠는가? 내가 여기에 엄중하고 신중히 하려 하기 때문에 항상 그 지나치게 되는 것을 염려하고 누락되는 것을 우려하지 않는다. 경(卿) 등은 물러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여 죄과(罪科)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전옥서(典獄署)에 가서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키도록 했으니, 날씨가 더운 때문이었다.

 

6월 26일 경오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여러 강관(講官)들이 ‘입정(立政)에 부지런히 하고 택인(擇人)에 부지런히 하라.’는 것으로써 문의(文義)를 부연(敷衍)하여 경계를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밥 먹을 여가도 없었던 것과 수(隋)나라 문제(文帝)의 위사(衛士)를 시켜 찬(餐)을 전달한 것은 부지런하였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그 가운데는 스스로 성심(誠心)으로 하고 허위로 한 구분이 있다. 대저 밥 먹을 여가도 없는 것이 비록 문왕이 한 일과 같다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성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문제의 찬(餐)을 전달하게 한 것에 돌아갈 뿐이며, 위사를 시켜 찬을 전달한 것이 비록 문제의 한 일과 같다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성심으로 하는 것이라면 문왕의 밥 먹을 겨를도 없었던 것에 따라갈 수가 있으니, 이것은 하나의 ‘근(勤)’자로써 범범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였다.

 

6월 29일 계유

황해 병사(黃海兵使) 박찬신(朴纘新)이 아뢰기를,
"삼가 사폐(辭陛)할 때의 성지(聖旨)에 따라 사리를 이해하는 수령(守令)들과 황주(黃州)의 극성(棘城)에 모이기로 약속을 하여 형편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흙으로 축조한 옛 성지(城址)는 그 높이가 겨우 열자 남짓 밖에는 안되고 그 중간에는 또 무너진 곳이 있었습니다. 지금 만일 그 성지에 나아가서 절반은 옛날에 축조한 것을 사용하고 절반은 돌을 깎아서 쌓고 성(城)의 안두(岸頭)에는 한 개의 포루(砲樓)를 설치하며 성의 우측을 석통포(石筒浦)라 하는데 그 옛 포구(浦口)를 수백보(數百步)쯤 파서 조수(潮水)로 하여금 성 밑에 이르도록 하고, 성의 좌측은 대야통(大也筒)이라 하는데 대야통 둘레의 안팎을 열 자쯤을 파서 높은 곳을 언덕으로 만들고 우묵한 곳을 호(濠)로 만들게 하며, 또 산산진(蒜山鎭)의 첨사(僉使)를 폐지하고 본영(本營)의 우후(虞候)로써 절충과(折衝窠)로 삼아 겸하여 관장하게 하여 극성의 안에 옮겨 거처하게 하고, 겨울 삼삭(三朔) 동안은 병사(兵士)가 산산(蒜山)에 머물러 방어하고, 우후는 돌아와 본영(本營)을 지키게 한다면, 급박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일이 비국(備局)에 내려졌다.

 

전라도 전주부(全州府)의 성역(城役)이 3개월이 경과하여 완성되었으므로, 도신(道臣)이 알렸다.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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