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 1734년 8월

싸라리리 2025. 9. 16.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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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진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서 《시전》을 강(講)하였다.

 

청(淸)나라 예부(禮部)에서 청나라 사람 호탕성(胡湯成) 등이 사사로이 조선(朝鮮) 국경(國境)을 넘어와 거짓으로 쌀 양식을 요구하고 포병(鋪兵)479)  을 포박한 일을 사감(査勘)하여 회계(回啓)한 뒤에,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사수(朴師洙)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청나라 호탕성 등을 붙잡은 여러 사람들에게 경중(輕重)을 구분하여 시상(施賞)하였다.

 

8월 2일 을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갔으니, 비오기를 빌기 위해서였다.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며칠 사이에 연달아 제사 지내는 일을 행하시니, 성궁(聖躬)을 손상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섭행(攝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돌아보건대, 우리 백성[元元]들은 조종(祖宗)께서 물려주신 백성이 아님이 없다. 연사(年事)가 장차 크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다 죽게 된다면 뒷날 장차 무슨 낯으로 돌아가 조종(祖宗)을 뵙겠는가? 비록 몸으로 대신하고자 하더라도 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이덕수(李德壽)가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가뭄 때문에 거듭 큰 기우제를 행하였다.’ 하였는데, 선유(先儒)가 이를 비난하기를,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서 제사를 자주 지낸다.’ 하였으니, 대개 군주가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오직 마음으로 대월(對越)480)  하는 데 있고 제사를 자주 지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항상 제사를 자주 지내는 것으로써 경계를 삼아 왔다. 그렇지만 사람이 괴로운 고통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父母)를 부르게 되는 것이니, 지금 내 마음은 괴로운 고통일 뿐이 아니다. 태묘(太廟)에 고하지 않으면 어디에다 호소 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청하였지만,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8월 3일 병오

임금이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 지냈다. 의주(儀註)에 ‘제사 지내기 하루 전에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서 태묘에 나아가, 재전(齋殿)에 들어가서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망묘례(望廟禮)를 행하고 전(殿)에 올라가 봉심(奉審)하기를 의식(儀式)과 같이 하고, 다시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또한 그와 같이 한다.’고 되어 있었다. 다음날 그 시각이 이르자 면복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기를 예(禮)와 같이 하고, 예를 마치자 환궁(還宮)하였다.

 

8월 4일 정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바야흐로 해가 가물어 백성이 곤궁한 때를 당하여 중추 기관의 위치에 매양 인재가 부족한 것이 걱정이 되는데, 또 내직(內職)은 중요하고 외직(外職)은 가벼운 구별이 있습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사수(朴師洙), 황해 감사(黃海監司) 유척기(兪拓基), 철원 부사(鐵原府使) 윤혜교(尹惠敎)를 마땅히 모두 내직으로 옮겨야 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는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이 세상의 존숭하는 바가 되었는데도 후손이 쇠잔하여 그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마땅히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따라서 그 제사를 주관하는 후손을 수록(收錄)해야 합니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흥경(金興慶)은 말하기를,
"사람을 임용하는 방도는 비록 재주와 지식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경력(經歷)한 뒤에야 사무(事務)를 익숙하게 알 수 있으니, 당하(當下)의 명관(名官)은 마땅히 선부(選部)481)  에 신칙하여 구식(舊式)에 따라 외현(外縣)에 돌려가며 차송(差送)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 대신(臺臣)의 소계(疏啓) 가운데 ‘영원히 검의(檢擬)하지 말라.’는 청은 일이 매우 옳지 못합니다. 이응(李膺)은 이미 조서(調敍)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심명열(沈命說)이 논핵한 권해(權賅)·이기헌(李箕獻)·이자(李滋) 세 사람은 또한 마땅히 똑같이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부제조(副提調) 이덕수(李德壽)도 나아가 말하기를,
"전 감찰(監察) 이붕운(李鵬運)과 이명준(李命峻)은 하찮은 과실로써 대관의 탄핵을 받았는데, 삭탈 관직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마땅히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라 이붕운 등의 직첩(職牒)을 돌려주었다. 대저 두 무신(武臣)은 미천한 관리이고 삭판(削版)482)  은 중대한 형률인데, 일개 승지[承宣]가 방자하게 은택을 구하는 청을 하니,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다.

 

고(故) 헌납(獻納) 김두남(金斗南)에게 증직(贈職)하고 그 아들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였다. 대신(大臣)이 김두남의 청백(淸白)한 지조를 말하며 마땅히 포상(褒賞)을 가해야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소대를 행하였다.

 

심성희(沈聖希)를 사간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집의로, 이도원(李度遠)과 유건기(兪健基)를 지평으로, 김도(金䆃)를 정언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부수찬으로, 윤취함(尹就咸)을 헌납으로 삼았다.

 

8월 5일 무신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본도의 폐막(弊瘼)을 진달하고, 또 전세(田稅)와 수조(收租)의 일정한 제도가 없는 것과 군읍(郡邑)의 징렴(徵斂)하는 사단이 많은 것을 논하여 별도의 단자를 갖추어 올렸다. 또 옛 관찰사(觀察使) 이광덕(李匡德)의 선정(善政)을 왕성하게 칭찬하여 말하기를,
"무릇 이런 횡렴(橫斂)의 조목은 모두 이광덕이 혁파하여 감(減)한 것입니다. 신이 사폐(辭陛)할 때에 전하께서 이광덕의 지나치게 삭감(削減)한 것으로써 영읍(營邑)의 조폐(凋弊)를 깊이 진념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편의(便宜)에 따라 복구(復舊)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의 파즐(爬櫛)483)  은 이광덕 보다 심하니, 전하의 ‘편의에 따라 복구하라’고 하신 하교에 아주 위배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말미에 진달한 바는 억양(抑揚)을 면치 못한다. 별단(別單)의 조건(條件)들도 또한 대부분 자질구레하지만 뜻이 백성을 위하는 데 있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묘당에서 아뢰어 시행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전(前) 남병사(南兵使) 이의풍(李義豐)이 도중에서 병을 핑계삼아 편비(偏裨)484)  를 시켜서 대신 밀부(密符)를 반납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용서하려고 하였다가 연신(筵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일이 뒤의 폐단에 관련됩니다."
하니, 파직(罷職)할 것을 명하였다.

 

검열(檢閱) 이덕중(李德重)이 조명경(曹命敬)의 공사(供辭)로 인하여 또 상소하여 대변(對辯)하기를,
"신의 지난번 상소에 이른바 ‘서로가 논란을 많이 벌이다가 마지못해 요의(僚議)를 따랐다.’고 한 것은 바로 천거 인원수[薦數]는 다섯 사람으로 결정하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으려 하다가 끝내는 구차하게 충당되었다는 죄안[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조명경이 또 말하기를, ‘회천(回薦) 할 때에 선진(先進) 신치근(申致謹)이 말이 있었다.’ 하였는데, 대저 회천의 규정은 반드시 사람을 물리치고 서로 대면하여 천기(薦記)를 내 보여서 선진(先進)이 말하기를 ‘아주 좋다’고 하면 이것이 추천 완료가 되고, ‘불가하다’고 하면 이는 패천(敗薦)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말하기를, ‘아주 좋다’고 하여 천기(薦記)가 소매 속에 들어간 뒤라면, 비록 혹시 천거하는 일과 관련된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모두 옥하 사담(屋下私談)으로 돌아가, 천거하는 일의 성패(成敗)와는 무관합니다. 지난번 신치근에게 회천(回薦)할 적에 대교(待敎) 신(臣) 정이검(鄭履儉)이 가서 만나지 못했는데, 그 다음날 신이 또 나아가서 천기(薦記)를 내어 보였더니, 신치근이 보고 말하기를, ‘아주 좋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것을 소매 속에 집어 넣은 뒤에 신치근이 말하기를,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도 서로 알지 못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보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의 천기 인원수는 어째서 저편보다 한 사람이 줄어들게 되었습니까?’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다만 그 사람의 합당하고 안한 것만을 볼 뿐이지, 어찌 피차(彼此)의 많고 적음을 거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치근이 말하기를, ‘회천(回薦)은 이것이 하번(下番)의 일인데 그대가 상번(上番)으로서 온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길래, 신이 답하기를, ‘내가 바로 하번이고, 어제 왔던 사람이 곧 상번 정이검입니다.’ 하니, 신치근이 시무룩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과연 잘못 알았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치근이 또 묻기를, ‘한익모(韓翼謨)가 한현모(韓顯謨)에게 형제간이 됩니까?’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바로 한현모의 아우입니다. 그대가 이것을 묻는 까닭은 무슨 의도입니까?’ 하니. 신치근이 말하기를, ‘내가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그날 주고받은 말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았는데, 무릇 이런 문답(問答)이 어찌 패천(敗薦)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조명경(曹命敬)의 시애(撕捱)하는 것은 매우 의의가 없으니, 그대는 무엇을 혐의스러워하는가?"
하였다.

 

8월 6일 기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하유(下諭)하기를,
"능(陵)을 참배하는 일은 중대하니, 예(禮)를 마땅히 조속히 행해야 하지만, 양조(兩朝)485)  의 행행(行幸)한 시일(時日)로써 보면 백성을 위하는 성대한 뜻을 우러러 헤아릴 수가 있다. 지금 도로(道路)를 보고 수본(手本)486)  을 살펴보며 화곡(禾穀)을 마땅히 아껴야 할 것이다. 이후에 예조(禮曹)로 하여금 다시 9월로 미루어 가려 뽑아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장릉(章陵)487)  을 참배하려고 하여 처음에는 8월로 날을 가렸다가 곡식을 상할까 염려하여, 이런 명령이 있었다.

 

함경도에 황재(蝗災)가 있어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8월 7일 경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여, 기강(紀綱)이 갈수록 무너지고 당습(黨習)은 더욱 고질화되며 나라 일은 분산(分散)되고 생민(生民)은 곤궁하고 초췌한 것으로써 누누이 인구(引咎)하고 반복해서 뉘우쳐 자백하였다. 드디어 하교하기를,
"아! 이것은 여러 신하들의 허물이 아니고 바로 나의 성의(誠意)가 미덥지 않아서이고, 나의 일을 처리함이 튼튼하지 않아서이고, 나의 백성을 사랑함이 실상이 없어서이고, 나의 강의(剛毅)488)  가 충분하지 못해서이다. 근원이 맑으면 흐름이 깨끗하고 외표가 단정하면 그림자가 바른 법이다. 내가 능히 임금이 해야 할 도리를 다했다면, 어찌 이런 막다른 데까지 이르렀겠는가? 죄(罪)가 과궁(寡躬)에게 있으니, 몸을 꾸짖어 빌고 호소하기를 과궁이 하지 아니하고 누가 하겠는가? 지난 무신년489)   가을에 수한(水旱)이 너무 지나친 재앙으로 인하여 10일 동안을 감선(減膳)하였는데, 이번의 바람과 가뭄은 그때에 비교할 것이 아니다. 특별히 낭묘(廊廟)490)  의 신하들을 모아서 바야흐로 상하(上下)의 칙면(飭勉)을 힘쓰니, 나 자신을 반성하며 자책(自責)하는 도리를 조금이라도 늦추어짐을 용납할 수가 없다. 내일부터 30일 동안 감선(減膳)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장차 선농단(先農壇)에 친히 기도하려 하는데, 여러 신하들이 힘써 섭행(攝行)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취로(金取魯)가 눈물을 흘리며 간쟁하니, 임금이 드디어 마지못해 따르고 단지 친히 향축(香祝)만 전할 것을 명하였다.

 

8월 8일 신해

대신(大臣)을 보내서 선농단(先農壇)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는데,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이날 임금이 그대로 성복(盛服)을 갖추고서 궁전의 뜰에 앉아 향을 피우고 한데서 밤새워 기도하였는데, 다음날 하늘이 비를 내렸다.

 

8월 9일 임자

해서(海西)491)  의 창린도(昌麟島)를 도로 수영(水營)에 소속시키는 일을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으니, 황해 수사(黃海水使) 김성응(金聖應)의 청에 따른 것이다. 대개 이 섬은 서해(西海)에 있어서 황당선(荒唐船)이 드나드는 인후(咽喉)가 되는데, 지역이 바로 태복시(太僕寺)의 관할로서 소강(所江)의 방영(防營)에 이차(移借)한 지가 60년에 이르렀는데 그 곳의 거민(居民)들이 요망(瞭望)하여 포(砲)을 쏘고 노(櫓)를 잘 젓는 군졸들인 때문이었으나 방영을 폐지하게 되자 태복시에 도로 소속시켰으니, 관방(關防)이 소우(疎虞)한 까닭이었다.

 

8월 10일 계축

선농단(先農壇)의 헌관(獻官)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에게 구마(廐馬)를 하사하고, 여러 집사(執事)에게도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여 어필(御筆)로 칙유(勅諭)를 써서 내려 묘당(廟堂) 및 육조(六曹)에 나누어 주었다. 묘당에는 말하기를,
"조정을 존중하여 방본(邦本)을 공고히 하고, 일은 시작할 때에 도모하되 정령(政令)을 중히 하고 세세히 살핌을 버리고 대체(大體)를 간직하기에 힘쓰고, 백성의 실정을 살피기를 모름지기 부지런히 하고 왕사(王事)에 힘써서 그 인순(因循)492)  을 탈피하라."
하고, 이조(吏曹)에는 말하기를,
"일심(一心)으로 공무를 집행하고 관직을 위해서 사람을 선택하라."
하고, 호조(戶曹)에는 말하기를,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축적하고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
하고, 예조(禮曹)에는 말하기를,
"오례(五禮)를 닦아 밝히고 옛 법도를 떨어뜨림이 없게 하라."
하고, 병조(兵曹)에는 말하기를,
"무사(武士)들을 어루만져 구휼하고 숙위(宿衛)를 엄중하게 하라."
하고, 형조(刑曹)에는 말하기를,
"아주 공평하고 지극히 정당하게 하여 삼가 법문(法文)을 준수하라."
하고, 공조(工曹)에는 말하기를,
"그 직분을 공경하고 삼가되 마땅히 주관(周官)493)  을 본받으라."
하였다. 또 묘당에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몸을 반성(反省)하여 스스로 힘쓰니 어느 겨를에 칙려(飭勵)하겠는가마는, 서로가 권면하지 않으면, 되레 고식(姑息)에 돌아가고, 알면서도 깨우치지 않으면 또한 성실(誠實)함이 아니다. 수필(手筆)494)  로 써서 내리되 권권(眷眷)한 다섯 조항은 조정(朝廷)을 존중하는 것으로써 처음을 삼고, 왕사(王事)에 힘쓰는 것으로써 끝을 삼았으니, 아! 우리 낭묘(廊廟)의 여러 신하들은 마땅히 이 뜻을 본받고 또한 과궁(寡躬)을 권면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노심 초사(勞心焦思)하면서 자신(自身)을 꾸짖고 도움을 구하는 때에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감히 병을 핑계하고 누워서 편히 쉬어서는 안되는데, 오늘 빈대(賓對)에 처음에는 탈이 났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나왔으니, 그 실지 병이 없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비국 당상의 나오지 않은 자들을 마땅히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합니다. 근장 군사(近仗軍士)들이 해당 낭관의 엄중한 신칙(申飭)으로 인해서 서로 이끌어 도망가 숨었으니, 이는 예전에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군사들을 마땅히 엄중히 조사하고, 입직(入直)한 당랑(堂郞)도 또한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어제 전라 감사(全羅監司) 유복명(柳復明)을 칙려(飭勵)하는 명령을 재차 번거롭게 특교(特敎)를 내렸는데, 마침내 동정(動靜)이 없으니, 조령(朝令)이 존엄하지 못하고 국체(國體)가 손상됨이 있습니다. 유복명을 마땅히 종중 추고해야 합니다. 신이 어제 대청(臺廳)에 이르러 듣건대, 승지(承旨)를 추고하라는 하교가 있어 원리(院吏)로 하여금 베껴 오게 하니, 후원(喉院)의 관리가 ‘일이 본원(本院)에 관계된 것이라 핑계하고 조보(朝報)495)  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국가(國家)에서 대각(臺閣)을 설치한 것은 반드시 그 일에 따라 참여하여 알리고자 함이니, 이런 등의 잘못된 법규는 진실로 의의(意義)가 없습니다. 해당 승지를 마땅히 추고하고 지금으로부터 이후로는 비록 후원에 관계된 것일지라도 조보를 내개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승지는 특별히 파직할 것을 명하였다.

 

지평(持平) 유건기(兪健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조정이 편안하지 않고 당습(黨習)이 억제되지 않아서, 저쪽과 이쪽을 물론하고 모두가 한바탕 크게 뜻을 얻어서 그 감추어 축적한 기운을 배설하려고 합니다. 비록 감히 분명하게 말하고 드러내놓고 방자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몰래 기괄(機栝)496)  을 설치하여 서로간에 알력으로 마찰을 빚습니다. 그래서 나라 위해 일하고 국사를 맡은 사람이 매양 먼저 그 봉망(鋒鋩)497)  을 입게 되는데, 성상께서 임무를 맡겨 책임을 지우는 바도 또한 오랫동안 두터운 도움을 주지 못하여 1, 2년 안에 그 은총과 소원함이 아주 달라지게 되고, 사람들이 헐뜯고 칭찬하는 사이에 그 의심하는 모습을 현저히 나타내 보이십니다. 오직 지난번 두 대신(大臣)의 직위를 버린 것으로 보더라도 또한 세속(世俗)의 화평하기 어려움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권업(權𢢜)이 영남(嶺南)에 부임하지 않은 것과 김흡(金潝)과 장태소(張泰紹)의 교만하게 소명(召命)을 어긴 것 같은 것에 있어서는 또 기강(紀綱)이 해이된 조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그 좋아함과 싫어함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어, 그 위중(威重)함을 손상됨이 없게 하소서.
대비과(大比科)498)  를 8도에 고루 베풀었는데, 국가에서 제공하는 비용이 참으로 헤아릴 수 없고, 거자(擧子)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멀리 오는 것도 또한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흉황(凶荒)의 나머지에 또 한재(旱災)를 만났으니, 공사(公私)의 경비(經費)를 마땅히 준절(撙節)히 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은 식년(式年) 대·소과(大小科)의 초시(初試)는 모두 마땅히 내년 가을로 물려서 행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이의풍(李義豐)은 당당(堂堂)한 원수(元帥)로서 한 여자의 칼에 찔림을 당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주밀하게 방비하는 지혜와 위맹(威猛)의 용기가 없다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변강(邊壃)에 소문이 나게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리고 또 그 밀부(密符)를 대신 반납한 것은 사체(事體)를 아주 읽었으니, 신은 저와 같은 나약하고 겁많은 무부(武夫)는 다시는 변곤(邊閫)에 의망해서는 안될 것으로 여깁니다. 종용사(從容祠)499)  에 치제(致祭)하고 두 신하의 후손은 수록(收錄)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듣건대, 그 자손들이 영체(零替)하여 향화(香火)가 처량하다 합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전부(銓部)에 명령하여 마땅히 곧바로 녹용(錄用)해야 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優答)을 내렸다. 대·소과(大小科)를 물려서 행하는 것이 마땅한지 않는지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는데, 과거볼 기한이 이미 박두함으로 인해서 드디어 물려서 행하지 못하였다.

 

황정(黃晸)을 승지로, 김상익(金尙翼)을 수찬으로, 윤휘정(尹彙貞)을 부교리로 삼았다.

 

8월 11일 갑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유건기(兪健基)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우금(牛禁)500)  은 지극히 엄중한데도 천안 군수 김득대(金得大)는 도살을 낭자하게 하여 시장에 내다 팔았으니, 김득대를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여선군(驪善君) 학(壆) 및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의 계사(啓辭)는 정지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정언섭(鄭彦燮)이 말미를 받아 고향에 내려가면서 도중에서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천승(天陞)을 떠나 종남산(終南山)501)  이 점점 멀어지니, 북쪽을 바라보고 우러러 축원하기를, ‘재차 수고롭게 거동하신 나머지 병침(丙枕)502)  이 편안하신가? 소대(召對)와 주강(晝講)의 예(禮)는 간단이나 없으신가? 날마다 어진 사대부를 접견하여 재앙을 바꾸어 상서가 되게 하는 방법을 강구(講究)하시는가? 밤비가 부슬부슬 내려 윤흡(潤洽)의 희망이 없지 않은데, 모르긴 하지만 서울에도 또한 그러하여 조금이나마 소간(宵旰)503)  의 우려를 푸시는가?’ 하며 여관(旅館)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에 잊지 못하여 근심하고 사모합니다."
하니, 임금이 상소를 보고 가상히 여겨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사신은 말한다. 정언섭이 변명하고 말 잘하는 재주가 조금 있어서 연석(筵席)에 드나들면서 오로지 측미(側媚)504)  를 일삼아, 임금을 찬양하고 임금의 뜻을 잘 맞추어, 상주(上奏)할 일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려 번번이 홀로 머물러서 사사로이 말하니, 임금이 몹시 아끼고 사랑하였다. 이 상소에도 알랑거리며 아첨하는 작태가 말의 표면에 넘치니, 온 세상에서 침을 뱉고 더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50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註 501] 종남산(終南山) : 남산.[註 502] 병침(丙枕) : 임금이 침소에 드는 시각, 또는 그 침소에 드는 일.[註 503] 소간(宵旰) :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정복을 입고, 해가 진 후 저녁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을 비유. 소의간식(宵衣旰食).[註 504] 측미(側媚) : 마음이 간사하여 아첨을 잘함.
사신은 말한다. 정언섭이 변명하고 말 잘하는 재주가 조금 있어서 연석(筵席)에 드나들면서 오로지 측미(側媚)504)  를 일삼아, 임금을 찬양하고 임금의 뜻을 잘 맞추어, 상주(上奏)할 일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려 번번이 홀로 머물러서 사사로이 말하니, 임금이 몹시 아끼고 사랑하였다. 이 상소에도 알랑거리며 아첨하는 작태가 말의 표면에 넘치니, 온 세상에서 침을 뱉고 더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8월 13일 병진

전 수찬(修撰) 민형수(閔亨洙)를 특별히 사면하였다. 처음에 민형수가 이광좌(李光佐)를 소척(疏斥)한 것에 연좌되어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갔는데, 조금 후에 또 가극(加棘)505)  을 하였다. 어느날 민형수가 정언섭(鄭彦燮)에게 편지를 보내 지주(地主) 이광덕(李匡德)을 왕성하게 칭찬하고 또 그 주인과 손님이 상득(相得)506)  한 상황을 자랑하였다. 이때 정언섭이 후원(喉院)에 있었는데 민형수에게는 스스로 압객(狎客)507)  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여 이미 들어가 임금에게 고하고 또 당시의 재신(宰臣)을 만나면 번번이 이 일을 말하여 그 힘을 빌리기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송인명(宋寅明)과 정우량(鄭羽良) 등이 번갈아 아뢰기를,
"민형수가 귀양살이 하면서 징창(懲創)508)  하여 이광덕과 막역(莫逆)한 친구가 되어, 다시는 당론(黨論)을 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서울에 편지를 보내, 심지어 이광덕을 당대의 제일인(第一人)으로 인정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오랫동안 귀양살이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며칠이 안되어 하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재거(齋居)하며 멀리 원릉(園陵)을 바라보니, 척신(戚臣)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몇 안된다."
하고, 특별히 울타리를 철거하여 방송(放送)할 것을 명하였으니, 대개 이 날이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8월 15일 무오

임금이 상참(常參)에 나아갔다. 교리(校理) 김약로(金若魯)가 나아가 말하기를,
"상참(常參)하는 날에는 각사(各司)가 근무를 그만두는데, 상참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에서 날마다 행하던 예절입니다. 지금 만약 날마다 상참을 행한다면 각사(各司)는 장차 업무를 볼 날이 없게 될 것이니, 비록 〈이런 제도가〉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의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또한 김약로의 말과 같았다. 드디어 지금부터는 다시 상참 때문에 현탈(懸頉)509)  하여 근무를 그만두지 말 것을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유건기(兪健基)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군문(軍門)의 방납(防納)510)  이 실로 외방(外方)의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됩니다. 훈국(訓局)511)  의 차인(差人) 권화경(權和經)이 함부로 사납게 폐단을 만들어 혹은 원가(原價)에 첨부하여 강제로 징수하며 그것을 인연해서 뇌물을 받고 혹은 세목(稅木)을 점퇴(點退)512)  하여 헐값으로 사사로이 구입하니, 관동(關東) 백성들의 원통한 부르짖음이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 마땅히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중히 핵실하여 정죄(正罪)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그 주장(主將)은 또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 백성의 해독이 되는 것은 양역(良役)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마침내 폐단이 생기는 근원에 나아가 손을 써서 바로잡지 못하기 때문에, 만방(萬方)으로 변통(變通)하는 의논이 도무지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감히 재물과 곡식을 절약하여 국용(國用)을 절제하는 내용으로써 겨우 명명(明命)513)  에 따라 조항을 열거해서 올리겠습니다. 대개 듣건대, 선왕(先王)의 정사(政事)는 그 해의 풍흉을 보아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한다 하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 해의 수입이 한 해의 지출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몇 년을 거듭 굶주림에 진휼할 수 있는 곡식이 없는데, 다시 홍수와 가뭄을 만난다면 장차 어떻게 손을 쓰겠습니까?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서는 재물을 해치는 일을 제거하는 길뿐입니다.
그 해로움이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사치(奢侈)와 용비(冗費)514)  입니다. 하늘이 재물을 낸 것이 관(官)에 있지 않으면 민(民)에 있는데, 지금은 이미 관에도 있지 않고 민에도 있지 않으며 또 모두 탐관 오리에게 돌아간 것도 아니니, 이는 필시 사치해서 소모한 것입니다.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 풍속(風俗)이 날로 변해져서 그 제택(第宅)으로 말하면 화려하게 짓고 담장을 높이 쌓아 토목(土木)으로 요사(妖邪)를 부리고, 그 복식(服飾)으로 말하면 풍성한 담비 가죽과 아름다운 비단으로 하여, 기완(器玩)515)  이 점차 공교로워집니다. 무장(武將)이 초거(軺車)516)  를 타기까지 하고 학사(學士)들이 대부분의 달마(㺚馬)를 타고 다닙니다. 혼례와 상례의 수용과 음식의 비용에 이르기까지 신기(新奇)함을 시새워서 다투어 그 미려(美麗)함을 극도로 추구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힘을 다해 뒤쫓아 가고 미천한 사람은 분수도 잊은 채 잘못된 것을 흉내내어, 옷 한 벌에 열 벌의 가격을 허비하고 음식 한 그릇에 열 그릇의 값을 허비합니다. 그리고 국용(國用)을 지탱하지 못하는 것에 있어서는 대부분 용비(冗費)에 있는데, 이른바 용비라는 것은 과구(窠臼)517)  가 이미 많고 공혈(孔血)518)  이 지극히 번다합니다. 시험삼아 호조의 별례(別例)인 한 궁방(宮房)으로 말한다면, 옛날에는 1년에 기록한 장부[簿]가 수십 장(張)에 불과했는데, 지금에는 거의 수백 장에 이릅니다. 금어(禁御)519)   두 영(營)으로 말한다면, 옛날에는 군보(軍保)의 쌀을 10초(十哨)로 상번(上番)했어도 오히려 남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에는 감하여 5초가 되었는데도 도리어 그 핍절(乏絶)을 걱정합니다. 외방(外方)으로 말한다면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체등(遞等)520)  에 내려 주는 것이 적어도 3천금(三千金)에 밑돌지 않고, 경외(京外)의 늠료(廩料)로 말한다면 아문(衙門)은 날로 그 과액(窠額)을 더하고, 소현(小縣)은 각각 그 청호(廳號)를 베풀어 혹은 군교(軍校)를 후대하고 혹은 아전과 노예를 기릅니다. 심지어는 탁지(度支)의 재물은 전혀 산택(山澤)을 읽어버린 채 이익은 사문(私門)에 돌리며, 온 나라의 금(金)은 모두 연시(燕市)521)  로 보내져 더욱 해로운 사치를 부추깁니다. 한 번 흉년을 만나면 백관(百官)과 삼군(三軍)을 양성시키지 못할 것이고 8도의 많은 백성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니, 불행히 전쟁이라도 난다면 싸우려고 하고 지키려고 하더라도 벌써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뒷날에 미칠 수 없는 것보다는 어찌 지금에 급히 도모하는 것만 같겠습니까? 이는 오직 전하께서 몸소 행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건대, 궁액(宮掖) 사이에 은례(恩例)가 점점 넓어져서 사여(賜與)함이 절제가 없고, 기완(器玩)이 날로 사치스러워져서 공비(工費)가 매우 번거로우며, 종신(宗臣)들이 중국에 가는 길에 패옥(貝玉)과 장렴(粧奩)522)  의 도구들을 많이 사오고, 옹주(翁主)가 사여(賜與)받은 저택 옆에는 여염집을 많이 사서 장차 개척(開拓)하여 집을 지으려 한다고 합니다. 모르긴 하지만 전하께서 과연 이런 일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일찍이 엿보건대, 전하께서 어복(御服)은 여러 번 빨아 입으시고 어인(御茵)은 항상 빛이 바랬습니다. 스스로 보양(保養)한 것으로는 가난한 선비에 부끄럽지 않으시지만 자애(慈愛)의 정을 쏟는 데에서는 그것이 온 세상을 사치의 습관으로 인도하는 줄을 깨닫지 못하시고, 자신의 사사로운 일로는 재물의 용도를 극히 절약하시지만 은택(恩澤)의 시초에서는 군하(群下)들에게 용비(冗費)의 풍조를 부추기게 됨을 면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혹시 전하께서는 깊이 스스로 덜고 줄이시어, 자신으로부터 집에 이르기까지 무릇 공봉(供奉)·공헌(貢獻)에 관계된 것은 크게 견감(蠲感)을 행하고, 후정(後庭)의 귀주(貴主)의 기용(器用)과 복식(服飾)을 한결같이 검소함을 따라, 만일 과연 기이한 모양이나 이상하게 만든 것이 있으면 궁정의 뜰에서 불태워 엄격하게 계칙(戒飭)을 가하여 온 나라의 앞장이 되게 하소서.
또 부시(婦寺)523)  ·액례(掖隷)524)  의 무리로부터 은사(恩賜)의 규정을 모두 조종(祖宗)의 옛 제도를 따르시고, 처음에 자성(慈聖)께 고하기를, ‘모름지기 크게 절약함이 있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시면, 자성께서는 반드시 일시적인 감생(減省)으로써 미안(未安)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전하께서 엎어지는 것을 붙잡고 위태함을 구제하려는 계책이 있다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 자성(慈聖)께 고하신 것으로써 종묘(宗廟)에 고하여 제향(祭享)의 의식과 물품을 한 해에 한해 적절히 경감하신다면, 역대 임금의 오리내리시는 신령께서도 또한 반드시 전하께서 부탁(付托)한 소임을 잘 맡아 하시는 것을 칭찬하시어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 정밀하고 자상하며 유능한 신하 몇 사람을 선택하여 경외(京外)의 부기(簿記)를 가져다가 새로운 법규의 잘못된 관례는 일체 혁파(革罷)하도록 명하시고, 또 백관(百官)들을 불러 모아 하유(下諭)하시기를, ‘과궁(寡躬)이 입고 쓰는 것으로부터 동조(東朝)의 공봉(供奉)과 태묘(太廟)의 향전(享典)에 이르기까지 재제하여 줄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시면, 무릇 인심(人心)이 있는 자라면 누가 감히 성상의 뜻을 본받지 않겠습니까? 대저 그러한 뒤에야 지난번 신이 거론한 기·보병(騎步兵)의 제도를 조금 변화할 수 있을 것이고, 대동(大同)을 목면(木綿)으로 하는 법(法)을 시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변통(變通)할 조목(條目)을 덧붙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소문의 잘못된 것이 없지 않지만 마음에 있는 생각을 숨김이 없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그 가운데 관계가 중대한 것은 신자(臣子)가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바가 아니고, 그 나머지 일은 비국(備局)에 의논하여 처리케 하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서 차자를 궁중에 머물러 둘 것을 명하였다.

 

김상규(金尙奎)·임수적(任守迪)·한사득(韓師得)을 승지로, 이철보(李喆輔)를 부수찬으로, 어유기(魚有琦)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삼았다.

 

8월 16일 기미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광덕(李匡德)을 체직(遞職)시켰다. 이때에 이광덕이 갑산부(甲山府)에 있어 체대(替代)되지 않았는데, 판서(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도목 정사[都政]가 장차 비원(備員)되지 못할 것이다 하여 체직하기를 아뢰었다. 송인명이 신통(新通)에 급급하여 사례(事例)를 돌아보지 않고 체직하기를 청하였는데 요당(僚堂)525)  이 조금도 논란함이 없었으니, 공의(公議)가 이를 그르게 여겼다.

 

소대를 행하였다.

 

8월 18일 신유

평안도 상원군(祥原郡)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조명리(趙明履)를 지평으로, 임정(任珽)을 헌납으로 삼았다.

 

8월 19일 임술

병조 참지(兵曹參知) 신치운(申致雲)이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태묘(太廟)에 제사지내는 의식에 피의(跛倚)526)  하여 조심하지 않은 실수가 있음을 논하고, 또 오랫동안 가물어 한데서 기도드리시는 때에 쇠를 달구어 두드려 주조하는 것은 모든 양(陽)을 막아버리는 뜻이 있다 하여 주전(鑄錢)을 파(罷)하기를 청하였는데, 다만 이 두 가지 일로 인해서 의기(疑忌)가 뒤따라 일어났습니다. 부묘(祔廟)527)  의 예(禮)가 아침에 끝나자 가로막는 의논이 저녁에 일어났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런 일을 하필 지나치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대저 전랑(銓郞)이 통색(通塞)하는 것은 스스로 온 세상의 공의(公議)가 있으므로 저지를 당한 사람이 감히 관여할 바가 아닌데도, 신치운의 상소에는 다른 일을 끌어다 인용하여 교묘하게 들추어내서 헐뜯으면서 조금도 돌아보거나 기탄함이 없으니, 또한 세태의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8월 20일 계해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병조 판서 윤유(尹游)가 아뢰기를,
"명안 공주(明安公主)가 출합(出閤)528)  할 때의 구례(舊例)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목면(木綿) 2백 40동(同) 남짓과 돈[錢] 2천 냥(兩) 남짓을 나누어 보냈는데, 병조에서 지출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렇게 백성이 곤궁하고 재정이 고갈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절약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5도위(五都尉)가 제택(第宅)은 비록 넓지만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니, 내가 어찌 석복(惜福)529)  의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병조에서 목면 6동과 호조에서 목면 6동, 쌀 1백 20석(石)을 참작하여 획송(劃送)할 것을 명하였다. 대개 화순 옹주(和順翁主)가 장차 이 해에 출합(出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계 가운데 범월(犯越)한 지방 수령(守令)인 강계 부사(江界府使) 김준(金浚)과 변장(邊將)인 고산리 첨사(高山里僉使) 이태상(李泰祥)의 일은 그 형률을 고쳐서 감사 도배(感死島配)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 용강현(龍崗縣) 사람 조찬경(趙贊敬)의 아버지가 죽자 계모(繼母)가 그 지아비의 종질(從姪)과 간음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어느날 조찬경이 울분을 이용하여 계모를 구타하였는데, 도신(道臣) 박사수(朴師洙)가 중종조(中宗朝)의 수교(受敎)에 ‘적모(嫡母)나 계모가 몰래 다른 사내와 간음하면 어미의 도리가 이미 단절된 것이니 그 고소(告訴)를 허락한다.’는 조문을 인용하여 묘당(廟堂)과 의논해서 처리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어미의 도리가 이미 단절되었으니, 엄중히 심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관(官)에 고하기 전에는 모자(母子)의 이름이 그대로 있으니, 마땅히 엄중한 형률을 적용해야 됩니다."
하였다. 드디어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할 것을 명하니,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과 판부사(判府事) 심수현(沈壽賢)은 말하기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고, 봉조하 이광좌(李光佐)와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은 말하기를,
"마땅히 차율(次律)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이광좌 등의 의논을 따라 감사 도배(減死島配)할 것을 명하였다.

 

내년부터 8도(八道)의 대동(大同) 및 여러 가지 군포(軍布)를 구전(舊典)에 따라 순전히 목면(木綿)을 사용할 것을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군민(軍民)의 신역(身役)을 돈[錢]과 목면으로 반반씩 관청에 내게 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인명(宋寅明)과 부제학(副提學) 이종성(李宗城) 등이 말하기를,
"전화(錢貨)가 뛰어올라 백성들이 감당하여 지탱하지 못합니다."
하면서 변통(變通)의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편리하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불편하다고 말하였는데, 마침내 두 신하의 말을 수용하였다.

 

8월 21일 갑자

밤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송인명(宋寅明)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의 세도(世道)와 시상(時象)이 갈수록 더욱 위험하게 되었으니, 지금의 정관(政官)이 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이 혹시라도 패국(敗局)을 미륜(彌綸)530)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시어 전형(銓衡)의 권한을 주었으니, 우선 신의 전포(展布)를 용납하여 성과(成果)를 요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만약 한두 정주(政注)를 가지고 번번이 편계(偏係)의 사정(私情)이 있는가 염려하신다면, 이는 전하께서 의심(疑心)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니, 신이 어떻게 손발을 놀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도제조(都提調) 김흥경(金興慶)은 말하기를,
"지난번 이현보(李玄輔)의 승지(承旨) 천망을 어필(御筆)로 첨서(添書)하신 것은 아래로 전관(銓官)의 일을 행하신 것이 됨을 면치 못합니다. 이런 종류의 취사(取捨)는 마땅히 전관(銓官)에게 위임해야 되고 위에 있는 사람의 지교(指敎)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홍문관에 의망(擬望)했던 사람을 지금에는 의망하지 않고, 예전에는 승지에 의망했던 사람을 지금에는 의망하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쓰고 버리는 권한이 군상(君上)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하니, 김흥경이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일은 시비(是非)가 있고 공의(公議)가 있는데, 지금 만약 그 시비와 공의를 묻지 않고서 오로지 탕평(蕩平)531)  만을 주장한다면 또한 전형(銓衡)의 방도에 어긋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경상도 관찰사[嶺伯]는 당의(黨議)에 심한 자가 아닌데도 오히려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의 무리들을 역적이라 말하지 않고 무상(無狀)이라고 하였으니, 이 사람도 이와 같은데 다른 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니, 김흥경이 말하기를,
"당시에 여러 신하들이 종사(宗社)를 위해서 대책(大策)을 세웠는데, 김일경(金一鏡) 무리의 모함한 바 되어 모두가 참혹한 화를 당했으니, 나라 일을 하다가 흉적(凶賊)에게 살해를 당한 사람들을 어찌 역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8월 22일 을축

소대를 행하여 《좌전(左傳)》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문의(文義)로 인해서 하교하기를,
"일식(日食)의 재앙을 옛사람들을 가장 삼갔는데, 요사이는 한갖 홍수와 가뭄의 재앙이 되는 것만 알고 태양(太陽)의 박식(薄蝕)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보통일처럼 여기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경계를 삼가는 도리이겠는가? 구식(救食)532)  하는 데에 친히 임어(臨御)하였었다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어 있는데, 지금은 그만둔 지가 오래 되었다. 지금부터는 일식(日食)을 당할 적마다 국기(國忌) 및 연고 있는 날이 아니면 내가 장차 친히 나아갈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 시기에 당해서 품의하여 행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3일 병인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소대를 행하였다.

 

함경도 이성(利城)·단천(端川) 등의 고을에 큰 물이 져서 산기슭이 무너져 사태가 나고 언덕과 골짜기가 변이(變移)되어 인물(人物)이 빠지거나 깔려 죽은 것이 많았으며 가옥이 침수되어 가라앉은 것도 1백 가구를 헤아렸다. 도신(道臣)이 이를 알리니,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여, 본도(本道)의 곡식 백 석을 획급(劃給)하여 진휼하고, 빠져 죽은 사람의 휼전(恤典)을 기유년533)  의 예(例)와 같이 할 것을 명하였다. 또 별도로 도신에게 하유(下諭)하여 몸소 가서 위무(慰撫)하게 하였다.

 

8월 26일 기사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8월 28일 신미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도목 정사[都政]가 한 달을 넘게 지체되었는데 전당(銓堂)534)  이 날마다 미적거리고 방만하여 전혀 칙려(飭勵)하는 뜻이 없으니, 전당(銓堂)을 마땅히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합니다. 벼슬아치[搢紳]들 사이에 스스로 편하려는 습관은 진실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제관(祭官)에 전차(塡差)535)  하거나 시관(試官)에 의망(擬望)되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벗어나려고 하여 곧바로 하향(下鄕)을 핑계하니, 마땅히 후원(喉院)으로 하여금 나타나는 대로 논책(論責)하게 해야 합니다. 이번에 능(陵)을 참배할 때에 민폐(民弊)를 몹시 진념하여 힘써 절약함을 따랐으니, 수령(守令)의 〈능 참배를〉 빙자(憑藉)하여 폐를 끼치는 자는 마땅히 발각되는 대로 엄중히 조사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8월 29일 임신

신사영(申思永)을 사간으로, 심성진(沈星鎭)을 헌납으로, 이석표(李錫杓)와 김상신(金相紳)을 지평으로, 민응수(閔應洙)를 대사성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응교로, 신치근(申致謹)을 부교리로, 유건기(兪健基)를 부수찬으로, 정언섭(鄭彦燮)을 승지로 삼았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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