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9권, 영조 10년 1734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1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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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계묘

일식(日蝕)하였는데, 지하(地下)에 있어 보이지 않았다.

 

북도(北道)의 범월(犯越)한 지방관(地方官)의 죄를 감단(勘斷)하여 온성 부사(穩城府使) 서행진(徐行進)의 고신(告身)을 수탈(收奪)하고, 황척파 권관(黃拓坡權管) 김자윤(金自允)은 아주 먼 변방에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10월 2일 갑진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조 좌랑 오원(吳瑗)과 김약로(金若魯)가 윤급(尹汲)의 말로 인하여 인혐(引嫌)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 등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윤급이 두 사람에게는 처음에 이미 구별하였는데, 뜬 의논이 저지하였으므로 오원 등이 감히 나오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견책(譴責)을 내려 모두 엄중히 추고하고, 세 당상(堂上)을 독촉해 나오게 하여 또한 모두 추고하였다. 대개 낭관(郞官)이 서로 연달아 구대(求對)하는 것은 사체(事體)에 관계가 되는데도, 오원 등이 오히려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여러 차례 엄중히 독촉을 가하였는데, 명에 응하여 개정(開政)함에 미쳐서는 날이 이미 저녁이 되었다.

 

10월 3일 을사

김시형(金始炯)을 대사헌으로, 조석명(趙錫命)을 예조 참판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수찬으로, 오언주(吳彦胄)를 부수찬으로, 서명형(徐命珩)을 헌납으로 삼았다. 정사(政事)를 파한 후에 밤을 이용하여 개정(開政)한 것은 3백년 동안 없었던 일이므로 특별히 이조 좌랑 오원 등을 잡아들여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10월 4일 병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서(兩西)570)   및 개성부(開城府)에 우박이 내리고 천둥하였다.

 

10월 5일 정미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사헌부 【집의(執義) 이저(李著)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명응(兪命凝)의 집에서 소란을 피운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정의 기강이 해이하여 관장(官長)된 자가 낭료(郞僚)를 검칙(檢飭)하지 못하고 매양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위에서 허다한 분부를 내린 후에 비로소 거행하게 되니, 이번 도정(都政)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이조(吏曹)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은 이미 처분하였으나, 지금부터 엄중히 신칙하여 무릇 공회(公會)에는 반드시 미리 정대(整待)하여 일마다 번거로이 품의하고 임시에 와서 구간(苟簡)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7일 기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觀武才)에 친림(親臨)하였다. 공조 판서 김취로(金取魯)를 보내 모화관(慕華館)에 나누어 시험을 보였으니, 응사자(應射者)가 많은 때문이었다.

 

사헌부 【집의(執義) 이저(李著)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친림(親臨)하여 무재(武才)를 시험 보이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데, 서북 별부료(西北別付料)에 낙방(落榜)한 무리들이 서로 연달아 땅에 부복(俯伏)하였으니, 외람됨이 막심합니다. 마땅히 적발하여 치죄하고, 병조의 해당 낭관 또한 엄중히 추고함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장릉(章陵)에 거둥하였을 때에 우찬성(右贊成) 정제두(鄭齊斗)가 중로(中路)에서 맞아 상소하여 질병으로 사임(辭任)하고 돌아가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홍경보(洪景輔)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8일 경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 위에서 검사(劍士)를 친히 시험 보였는데, 어좌(御座)와 거리가 너무 가까우므로, 좌승지(左承旨) 이성룡(李聖龍)은 그것이 불가함을 사사로이 이야기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정언섭(鄭彦燮)은 조금 물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선조(先祖) 때부터 춘당대 위에서 시험을 보였다. 저 군병들은 곧 나의 애휼(愛恤)하는 자들이니, 이제 만약 조금 물린다면 어찌 의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겠는가? 이성룡과 정언섭을 파직시켜 장사(將士)들에게 사과의 뜻을 보이라."
하였다. 이에 부교리 유건기(兪健基)·수찬 남태량(南泰良)이 차자(箚子)를 올려 정지하기를 청하였고, 우승지 홍경보(洪景輔)·집의 이저(李著)는 서로 잇달아 진청(陳請)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홍상빈(洪尙賓)·이현보(李玄輔)를 승지로 삼았는데, 이현보가 명에 응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은 두려워하지 않고 윤급(尹汲)을 두려워하는가?"
하였으나, 이현보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아뢴 무신년571)  의 공훈에 관한 일로 인하여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의 아들 최상정(崔尙鼎)을 가까운 고을에 제수하여 어버이를 봉양하도록 분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최규서가 상소하여 사양하기를,
"비록 구체(口體)의 봉양을 받는다 하더라도 신(臣)은 마음속으로 원하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판(吏判)이 무신년의 일을 제기(提起)하였으나, 내가 최상정을 녹용(錄用)함은 오로지 기로(耆老)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10월 9일 신해

김시혁(金始㷜)을 승지로, 이광부(李光溥)를 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0일 임자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유생을 시험 보여 이명곤(李命坤) 등 5인을 뽑았고, 무과(武科)는 김의숙(金義淑) 등 50인을 뽑았다. 그리고 군병이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입격(入格)한 자는 복제(服制)를 마치기를 기다려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고, 무예(武藝)가 월등한 사람은 혹은 가자(加資)하기도 하고, 혹은 수령(守令)이나 변장(邊將)을 차등이 있게 임명하였다. 급제한 자를 창방(唱榜)하고 진하(陳賀)할 때는 백관(百官)이 우중(雨中)에 서 있었는데, 4품 이상의 관원이 조복(朝服)을 입지 않은 자가 많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정자(程子)의 문하(門下)에서 설중(雪中)에 서 있던572)   뜻을 알지 못하는가?"
하고, 이방 승지(吏房承旨)와 예방 승지(禮訪承旨) 및 압반 감찰(押班監察)을 추고 하도록 명하였다.

 

문신(文臣)과 종신(宗臣)에게 사후(射帿)573)  하기를 명하였는데, 문신으로 활 쏘기를 원하는 자는 다만 홍상빈(洪尙賓)과 조윤제(曹允濟) 두 사람뿐이었다. 조윤제는 글을 알지 못하면서 등제(登第)하였고, 그의 재종제(再從弟) 조윤성(曹允成)은 활 쏘기는 못하면서 권무 군관(勸武軍官)이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잘못 합격시켰다고 하였다. 이는 대저 무장(武將)은 조윤제를 얻고자 하였으나 잘못하여 조윤성을 얻었고, 시관(試官)은 조윤성을 물색(物色)했으나 잘못하여 조윤제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1일 계축

지평(持平) 이성효(李性孝)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10년 동안 나라 일에 근심하고 부지런하였으나 정치가 진전되지 않은 것은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는 때문입니다.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겉으로는 학문에 부지런하신 듯하나 한번 송독(誦讀)하는 데에 그쳐 한갓 형식에 응하여 수효를 채우는 결과가 되고 있으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알고 실천한다.[知行]’는 두 글자로 면려(勉勵)를 가하소서. 우리 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길은 다만 과거(科擧)만 경유하고 오로지 문벌(門閥)만을 숭상하므로, 이름이 통적(通籍)에 오른 자도 오히려 초야(草野)에서 늙어 죽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니, 그 밖에야 또 어찌 이루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무신년574)  에 3품 이상의 관원은 각기 두 사람을 천거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거룩한 거조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있고 끝이 없어 영남(嶺南)과 서북(西北) 사람을 조용(調用)하라는 하교는 한갓 형식으로 돌아갔으니, 마땅히 인재를 천거하는 법을 신명(申明)하여 일정한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녹용(錄用)해야 할 것입니다. 무사(武士) 출신(出身)은 근래에 더욱 많은데, 한번 선달(先達)의 이름을 얻은 후에는 길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있습니다. 마땅히 각도(各道)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로 하여금 도내의 출신을 모아 우등(優等) 1인을 시취(試取)하여 위에 계문(啓聞)하게 하고, 오군문(五軍門)의 초관(哨官) 및 교련관(敎鍊官)에서 궐원(闕員)이 있는 데 따라 보충한다면, 거의 원울(冤鬱)한 기운을 소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구관 당상(句管堂上)을 차출(差出)하는 거조는 다만 한때의 구급(救急)하는 행정(行政)에 지나지 않으니,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기 소견(所見)을 진달하게 하고 또 일찍이 헌의(獻議)한 데에서 그 편의한 방책을 채용하여 과단성 있게 시행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절약과 검소에 유의(留意)하여 제도(諸道)의 공헌(貢獻)과 일용(日用)의 어공(御供)을 재감(裁減)한 바가 많았으며, 상방(尙方)의 직조(織造)를 폐지하고 세탁(洗濯)한 의복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나 궁중(宮中)에 오히려 긴요하지 않은 경비가 많으니, 원하건대, 더욱 절약에 힘써 성덕(聖德)을 빛나게 하소서. 전하께서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도량(度量)이 없지 않으니, 소장(疏章)이 들어오는 날에 반성하겠다는 비답과 유중(留中)하라는 하교를 번번이 내리지마는 빈말로 그치는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언론의 자리가 문득 싫어하고 회피하는 장소가 되어 모호하고 흐리멍덩한 것이 이미 일종(一種)의 규례가 되었으며, 가끔 교묘하게 사피(辭避)하고 인혐(引嫌)하여 체직(遞職)되기를 기필하고 있으니, 이는 태평한 시대의 기상(氣象)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세 전관(銓官)을 물리쳐서 외방에 보직(補職)한 것은 성상의 마음이 비록 분쟁을 지식(止息)시키려는 데에서 나왔으나 처분이 마침내 어물어물 넘어갔으니, 자못 착한 일을 권장하고 데에서 나왔으나 처분이 마침내 어물어물 넘어갔으니, 자못 착한 일을 권장하고 나쁜 일을 징계하는 뜻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조정에 인재가 핍절했으니, 빨리 소환함이 마땅합니다. 또 재신(宰臣)은 처음부터 성심을 다하여 시국(時局)을 안정시키는 데에 힘썼으나 힘이 딸려 마침내 조정(調停)하지 못했는데, 혼동하여 외방에 보직시켰으니 더욱 고휼(顧恤)하심이 마땅합니다. 근래에 전랑의 선임(選任)이 문득 한편 사람의 사유물(私有物)이 되었으니, 공의(公議)가 이미 불만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윤급(尹汲)은 사랑하고 미워함을 전적으로 자신의 사사로움에 맡겨 취향(趣向)이 다른 자로 하여금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러한 기습(氣習)은 단연코 자라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대각(臺閣)의 직책은 마땅히 어렵게 여기고 신중하게 가려야 할 것인데도, 홍득후(洪得厚)와 한 봉조(韓鳳朝) 두 사람은 원래 인망(人望)이 가볍고 명성(名聲)이 드러나지 않았으며, 또 전관(銓官)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한결같이 낭관(郞官)의 손에 맡겨서 〈명기(名器)를〉 허물어뜨리고 농간하게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해당 당상과 낭관을 엄중히 추고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이흡(李潝)은 당초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을 적에 동료(同僚)의 수고한 적공(積功)을 가로채어 6품의 상정(賞典)을 외람되이 받았으니, 마땅히 삭직 태거(削職汰去)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10월 12일 갑인

이보욱(李普昱)을 사간으로, 임정(任珽)을 교리로, 정형복(鄭亨復)을 부교리로, 김상석(金相奭)·박필재(朴弼載)를 수찬으로, 정우량(鄭羽良)·김성운(金聖運)을 승지로, 홍중일(洪重一)을 지평으로 삼았으니,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의 심복이 되어 어진 이를 죽이고 정인(正人)을 해친 의논이 그 손에서 많이 나왔으며, 심지어 이만성(李晩成)으로 하여금 옥중(獄中)에서 병들어 죽게 하였으므로 오랫동안 환로(宦路)에 막혔었는데, 갑자기 대간(臺諫)의 직책에 임명되었으니 물의(物議)가 해괴하게 여겼다.

 

10월 13일 을묘

정필녕(鄭必寧)을 승지로, 민응수(閔應洙)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원계군(原溪君) 엽(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故) 종신(宗臣) 운흥군(雲興君) 영()이 열성(列聖)의 팔고조도(八高祖圖)를 찬수(撰修)하여 위로는 태조(太祖)로부터 아래로는 선조(先朝)에 이르기까지 내외 사대성원(內外四代姓源)을 정간(井間)에 열서(列書)하여 소장(疏章)과 함께 숙종조[肅廟朝]께 올리니, 특별히 우악(優渥)한 포장(褒奬)을 내리고 해시(該寺)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마침 국상(國喪)을 만나 간행(刊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아들 이정업(李廷㸁)이 또 열성 왕비(列聖王妃)의 팔고조도(八高祖圖)를 속찬(續撰)하였으니, 삼가 원하건대, 해시(該寺)로 하여금 찾아 들이게 하여 한번 예람(睿覽)을 거친 후에 똑같이 간행하여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부록(附錄)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일은 해시(該寺)로 하여금 가져와 들이게 하겠다. 왕비의 팔고조도는 곧 돈녕부(敦寧府)에서 주관(主管)할 일이니, 종부시(宗簿寺)에서 간행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개정(開政)하라는 분부가 계셨는데, 본조 좌랑(本曹佐郞) 오원(吳瑗)과 김약로(金若魯)는 비록 대소(臺疏)로써 인혐(引嫌)한다 하지만 신칙이 내렸는데도 변동할 뜻이 없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제 이성효(李性孝)의 원소(原疏)를 보니, 그가 고집을 부리는 바가 전일에 비하여 자별(自別)하니, 파직에 그칠 수 없다.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4일 병진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금훤 낭청(禁喧郞廳)에 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10월 15일 정사

정우량(鄭羽良)을 승지로, 김상규(金尙奎)를 대사성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지평으로 삼았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무예(武藝)에 입격(入格)한 장교(將校)와 사졸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오군문 대장(五軍門大將)에게 선온(宣醞)을 내리고 친히 별유(別諭)를 지어 군병을 애휼할 것과 기율을 엄격히 할 것과 교습(敎習)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세 가지로써 면려(勉勵)하라는 내용의 수서(手書)를 하사하였다. 이날 차가운 비가 종일 내리므로 여러 신하들이 임금에게 환궁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마땅히 사졸들과 더불어 감고(甘苦)를 함께 할 것이니, 어찌 혼자만 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금군장(禁軍將) 남덕하(南德夏)를 태거(汰去)하라고 명하였다. 남덕하는 충신(忠臣) 남연년(南延年)의 아들인데, 일찍이 하직함에 있어 이삼(李森)을 찾아 인사하지 않았던 이유로써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에 배소(配所)에서 돌아와 윤유(尹游)를 만났는데, 윤유가 〈이삼을〉 찾아보지 않은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삼은 역적 조세추(曹世樞)가 끌어들였던 바이므로 차마 만나 볼 수 없다."
하였다. 이삼이 이 말을 듣고 상소하여 변명하니, 임금이 엄교(嚴敎)하기를,
"충신의 아들이 역적을 토벌한 훈신(勳臣)을 도리어 배척하니, 이는 불충 불효(不忠不孝)한 자이다.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곤장 50도(度)를 치게 하고, 금군장을 태거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삼과 남덕하가 관무재(觀武才)에서 상(賞)을 받게 되었는데도 두 사람이 모두 오지 않으니, 임금이 남덕하에게는 상을 주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어 시종신(侍從臣)에게 말하기를,
"남덕하의 일은 반드시 문관(文官)이 사주(使嗾)한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성왕(聖王)은 사람에 대하여 일찍이 그 뜻을 빼앗지 않았는데, 더구나 원수의 처지에서 강제로 화합(和合)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가령 남덕하가 원수로 보지 않을 사람을 원수로 여기더라도 어찌 죄를 가할 필요가 있겠는가? 임금이 남덕하를 처치한 것은 세 가지 실수가 있으니, 아비의 원수를 찾아보게 한 것이 첫째요, 아비가 순절(殉節)한 곳에 귀양 보낸 것이 둘째요, 원수를 피하는 일마저 그 자유에 맡겨 두지 않은 것이 셋째이다.


【태백산사고본】 29책 39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56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가족(家族)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성왕(聖王)은 사람에 대하여 일찍이 그 뜻을 빼앗지 않았는데, 더구나 원수의 처지에서 강제로 화합(和合)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가령 남덕하가 원수로 보지 않을 사람을 원수로 여기더라도 어찌 죄를 가할 필요가 있겠는가? 임금이 남덕하를 처치한 것은 세 가지 실수가 있으니, 아비의 원수를 찾아보게 한 것이 첫째요, 아비가 순절(殉節)한 곳에 귀양 보낸 것이 둘째요, 원수를 피하는 일마저 그 자유에 맡겨 두지 않은 것이 셋째이다.

 

대사헌 김시형(金始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 원래 전해오는 규모가 있었으니, 소중한 것은 인재요, 긴급한 것은 민사(民事)입니다. 인조조[仁廟朝]에 이르러서 이원익(李元翼)·최명길(崔鳴吉)·이경여(李敬輿) 등의 노성(老成)하고 덕망이 있는 신하가 정성을 다하여 보필(輔弼)하고 정경세(鄭經世)·박정(朴炡)·유백증(兪伯曾) 등의 강직하고 직언(直言)하는 신하가 일에 따라 바로잡았으니, 사대부(士大夫)가 평일에 강구(講究)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걱정과 나라를 위한 계책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당론(黨論)이 분열되고 사심(私心)이 발작됨으로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집안을 걱정하는 마음만 같지 못하고, 백성을 사랑함이 자신을 사랑함만 같지 못하며, 좋아하고 미워함은 취향이 다르며, 동당인(同黨人)을 두둔하고 이당인(異黨人)을 공격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으니, 이는 전하께서 조정(調停)하려고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시험삼아 보신다면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비국(備局)에서는 화협(和協)하는 기풍(氣風)이 있는 듯하고, 부정을 반박하는 대각(對閣)의 장소(章疏)에는 배척하는 습속이 없는 듯하니, 외면(外面)으로 말하건대, 일에 다다르고 직무에 부지런한 자가 적지 않은 듯하나 어찌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진정 시국을 담당하는 자가 있었으며, 한 가지 일이라도 진심으로 시행하는 자가 있었습니까? 비유하건대, 1만 석(石)을 실은 큰 배가 중류(中流)에 떠 있는데 사공(沙工)과 격군(格軍)들이 떼를 이루어 오직 배부르게 먹고 실컷 잠만 자면서 마음을 함께하여 힘써 일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이에 강개(慷慨)하고 충성을 품은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조금만 두각을 드러내면 질투가 일어나고, 은총(恩寵)이 조금만 융숭하면 참소가 먼저 이르러 반드시 배척하여 내친 후에야 그만두게 되니, 이런 까닭으로 조수(操守)하는 자들은 모두 물러가 은둔(隱遁)하는 것으로서 양책(良策)을 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속하는 자들은 여러 사람과 함께 나아가고 함께 물러가서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며, 또 더욱 심한 자들은 겉치레에만 아주 능하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오직 저쪽 사람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고 이쪽 사람에게도 환심을 사서 한갓 공명(功名)을 낚을 줄만 알고 기절(氣節)과 염의(廉義)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니, 이 어찌 단시일에 고칠 수 있겠습니까? 양사(兩司)의 전계는 절반 이상이 국옥(鞫獄)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6,7년 동안을 서로 버티고 있어 한갓 대각(臺閣) 위에 휴지(休紙)가 되고 있습니다. 가령 죽어야 마땅할 사람이 지금까지 목숨을 보전했다면 징토(懲討)의 법을 잃은 것이요, 죄가 의심스러운데 끝내 작처(酌處)하지 않았다면 이는 흠휼(欽恤)575)  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마땅히 대신(大臣)·옥관(獄官) 및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로 하여금 반복해서 상세히 살펴 살릴 사람은 살리고 죽일 사람은 죽여 원울(冤鬱)한 기운이 하늘의 화기(和氣)를 다스리지 않도록 하고 조신(朝臣)들로서 찬적(竄謫)되어 있는 자들도 적당히 헤아려 석방한다면, 어찌 불쌍한 자를 애휼하는 큰 정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말단에 또 수령(守令)의 명예를 요구하는 폐해와 인재의 엄체(淹滯)되는 폐단을 말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10월 16일 무오

임금이 상참(常參)에 나아갔다. 호조(戶曹)와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전문(錢文) 10만 냥을 내어 삼남(三南)에 나누어 주고 쌀을 무역해서 남겨 두어 홍수(洪水)와 가뭄에 대비하도록 명하였으니, 조현명(趙顯命)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본조 낭관(本曹郞官) 오원(吳瑗) 등의 공사(供辭)에 대하여 몹시 의혹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이성효(李性孝)의 상소에 홍득후(洪得厚)를 논핵하고 신이 한결같이 낭관에게 일을 맡겼다고 허물하였는데, 신이 홍득후에게는 이미 인척(姻戚) 관계가 있으니,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고 이름은 이미 실상이 아니고, 윤급(尹汲)이 전해 말한 바 ‘전례가 없다.[無前例]’는 세 글자에 대해서는 종전에 새로이 의망(擬望)하는 자의 1, 2, 3, 4의 차서는 당초에 일정한 규례가 없었으니, 전례의 유무(有無)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진실로 그의 말과 같다면 전랑의 극선(極選)을 신이 감히 함부로 의망하여 이전에 없었던 일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조상경(趙尙絅)을 병조 판서로, 김상성(金尙星)을 응교로, 남태량(南泰良)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윤유(尹游)가 장차 연경(燕京)에 들어갈 예정이므로 사임(辭任)하니, 조상경이 후임에 임명되었다.

 

10월 17일 기미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0월 18일 경신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조현명(趙顯命)이 옛날 주공(周公)이 〈유언(流言)을 피하여〉 동쪽 땅[洛陽]으로 가 있던 일로 인하여 진계(陳戒)하기를,
"명신 석보(名臣碩輔)들이 아침에는 한 전당(殿堂)에서 나라 일을 의논하다가 저녁에 영해(嶺海)로 귀양가는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이는 명철(明哲)한 자가 기미(機微)를 보아 물러가 그 신명(身命)을 보존하려고 꾀하는 것이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하들로 하여금 보신(保身)할 계책을 품게 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10월 20일 임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때에 액례(掖隷)들이 오만하고 버릇이 없어 내국 의관(內局醫官)에게 꾸짖어 욕을 보였으므로 이날 제조(提調) 송인명(宋寅明)이 액례를 치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보통 있는 일이다."
하며, 억지로 따랐다.

 

이하원(李夏源)을 대사간으로, 김상익(金尙翼)을 헌납으로, 권일형(權一衡)을 지평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응교로 삼았다.

 

10월 21일 계해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때에 방백(方伯)들이 사인(私人)을 시켜 수령의 유능(有能)·무능(無能)을 염탐하는 일이 많았는데, 심지어는 간혹 뇌물을 받고 좋은 평판을 널리 퍼뜨리기도 하고 감정을 품고 중상(中傷)하는 자도 있었다. 이날 옥당관(玉堂官)이 임금 앞에서 그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묻기를,
"방백으로 염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현명(趙顯命)·박사수(朴師洙)·박문수(朴文秀)가 방백으로 있을 때에 염탐하기를 더욱 좋아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방백이 수령에 대하여 이미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았고 또 그 문보(文報)를 보았으니 그들의 유능·무능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인데, 하필 이렇게 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22일 갑자

박추(朴樞)를 집의(執義)로, 이현량(李顯良)을 지평(持平)으로, 이철보(李喆輔)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0월 23일 을축

송수형(宋秀衡)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26일 무진

밤에 달이 좌각성(左角星)을 범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기신(忌辰)이다. 내가 비록 조섭(調攝) 중에 있으나 밤에 옷을 벗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였다. 광성(光城)576)  의 집이 근자에 심히 쇠잔(衰殘)하다고 하니, 내가 민망히 여긴다."
하고, 그 봉사손(奉祀孫)에게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7일 기사

사폐(辭陛)하는 수령(守令)을 극수재(克綏齋)에서 불러 보았는데,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명을 받들고 함께 들어왔다. 임금이 송인명에게 신치운(申致雲)과 권일형(權一衡)이 벼슬길에 막힘을 당한 연유를 물으니, 송인명이 대답하기를,
"신치운은 송시열(宋時烈)을 소척(疏斥)한 이유로써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영구히 막히기야 하겠습니까? 권일형은 시관(試官)에 의망된 것을 윤급(尹汲)이 무단히 저지하였는데, 신은 서로 비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써 다투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권익순(權益淳)과 여선장(呂善長)은 무슨 일로 좌죄(坐罪)되었는지 물으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명의(李明誼)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서 차본(箚本)을 받아 가지고 나왔는데, 이 두 사람이 연명(聯名)하여 참여하였으므로 벼슬길에 막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선장은 사람의 됨됨이가 애석하니 끝내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여선장은 먹물로써 당후 일기(堂后日記)를 더럽혔기 때문에 막힘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니, 송인명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광보(李匡輔)가 국안(鞫案)을 등사(謄寫)하여 전한 일로써 삭출(削黜)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송인명이 그의 무죄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보의 인품이 깨끗하지 않은데, 근자에는 조금 나은가?"
하고 직첩(職牒)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명택(趙明澤)을 부교리로, 심성진(沈星鎭)·남태량(南泰良)을 수찬으로, 김기석(金箕錫)을 지평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28일 경오

강원 감사 조최수(趙最壽)가 상소하여 영남의 환곡(還穀) 1만 석을 옮겨 관동(關東) 백성을 구출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 윤지원(尹志遠)·지평(持平) 김기석(金箕錫)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희지(李喜之)의 영정시(永貞詩)577)   1수(首)는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하였으니, 예로부터 난적(亂賊)의 무욕(誣辱)을 함부로 자행한 것이 이에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금 듣건대, ‘이현지(李顯之)가 감히 상언(上言)하여 아비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장(疏章)에 심지어 이희지의 흉시(凶詩)를 가지고 시안(詩案)으로 돌렸다고 하니, 아! 통분합니다. ‘시안’이란 두 글자는 그 뜻이 음흉하고 참혹하여 마치 시인(詩人) 직사(直士)가 문자로써 앙화를 입은 것처럼 하여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니, 엄격히 제방(隄防)을 가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승선(承宣)이 예(例)에 따라 계하(啓下)한 것도 더욱 지극히 해괴합니다. 이현지는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고 해당 승지는 파직시켜 서용하지 않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이이명(李頤命)의 아우 이익명(李益命)이 그 조카 이희지의 죄로 연좌(緣坐)되어 8년을 적소(謫所)에 있었는데, 그 아들 이현지가 아비의 원통함을 호소함에 있어 시안(詩案)의 말을 썼으므로 윤지원 등이 논핵한 것이었다. 그 후에 김흥경(金興慶)·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이 모두 말하기를,
"이희지는 승복(承服)하지 않았으니, 이익명이 연좌된 것은 진실로 원통한 일이며, 이현지를 절도(絶島)에 정배한 것 또한 지나친 일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10월 29일 신미

무지개가 나타났다.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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