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9권, 영조 10년 1734년 9월

싸라리리 2025. 9. 16. 09:18
반응형

9월 1일 계유

식년(式年)의 감시 초시(監試初試)를 설행하였다.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상참(常參)536)  에 나아갔다. 판결사(判決事) 박필정(朴弼正)이 장례원(掌隷院)의 쇠잔한 폐단을 강성하게 진달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혁파하여 형조에 붙일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변통하는 도리를 강구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번쇄(煩瑣)함이 많다 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신칙하도록 하였다.

 

행 도승지 이덕수(李德壽)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근일에 《좌전(左傳)》 및 《시경(詩經)》을 강(講)하였습니다. 연릉 계자(延陵季子)537)  는 열국(列國)의 악장(樂章)만 들어도 그 흥망 성쇠를 알았다고 합니다. 만약 연릉 계자가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우리 나라 유생의 시(詩)를 보고 반드시 망국(亡國)의 풍조라고 할 것이니, 그것이 첨교(尖巧)하고 단촉(短促)하여 옹용(雍容)하고 혼후(渾厚)한 기상(氣象)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대사성(大司成)에 참으로 쓸 만한 인재(人材)를 골라서 오랫동안 위임시킨다면 그 폐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이어 명일에 문형 권점(文衡圈點)538)  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특진관(特進官) 이삼(李森)이 아뢰기를,
"순령기(巡令旗)는 모두가 청색(靑色)입니다. 신이 일찍이 통영(統營)에서 홍대단 영기(紅大緞令旗)가 있음을 보았는데, 이는 임진년539)  에 명(明)나라 장수가 충무공(忠武公)과 더불어 독전(督戰)할 때에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전(御前)의 순령기는 각 군문의 순령기와 빛깔이 같으므로 분별할 수가 없으니, 이제 만약 홍색(紅色)으로 바꾼다면 상하를 분별하는 도리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병판(兵判) 및 다른 장신(將臣)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다시 품달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후에 어전의 순령기는 마침내 홍색으로 바꾸었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집의(執義) 이종백(李宗白)이 북관(北關)의 어사(御史)로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상소하여 북로(北路)의 일을 진달하였다. 그 첫째는 북청(北靑)의 전(前) 부사(府使) 주형리(朱炯离)는 복관(復官)시키고 그 밖에 병산(屛散)된 자들은 또한 과궐(窠闕)에 따라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였고, 그 둘째는 고(故) 좌랑(佐郞) 문덕교(文德敎)는 임진 왜란 때에 창의(倡義)한 공적이 있으니 포증(褒贈)을 더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 셋째는 남도(南道)의 전 영장(營將)을 북청부(北靑府)의 겸영장(兼營將)으로 옮기기를 청하였으며, 그 넷째는 금년의 환곡(還穀)은 다른 곡식으로 바꾸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 다섯째는 추노(推奴)의 금령(禁令)을 구식(舊式)에 의하여 신명(申明)하기를 청하였고, 그 여섯째는 무산(茂山)·삼수(三水)·이성(利城) 세 고을의 수령을 폄출(貶黜)하여 파직하고 후임은 도정(都政)540)  을 기다릴 것 없이 즉일 차출하여 역마를 달려 발송하기를 청하였는데, 모두 묘당(廟堂)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9월 2일 갑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순(尹淳)을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으로 삼았다. 윤순이 재차 문형(文衡)을 담당하였는데, 과시(科試)를 주관함에 엄정하지 않았으므로 사론(士論)이 매우 답답하게 여겼다.

 

전라 감영에 《동현주의(東賢奏議)》 및 《속경연고사(續經筵故事)》를 간행하여 올리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문간공(文簡公) 이희조(李喜朝)가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이하 육현(六賢)의 소(疏)·계(啓)를 간추려 모아 8권으로 편집하고서 《동현주의》라고 제명(題名)하여 선왕조(先王朝)에 올렸으며,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는 또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이하 오현(五賢)의 경연 강의(經筵講義)를 간추려 2권으로 편집하고서 《속경연고사》라고 제명하였다. 이때에 와서 옥당(玉堂)의 김약로(金若魯)가 정서(淨書)하여 올리고 이어 간행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김기석(金箕錫)을 지평으로, 이춘제(李春躋)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3일 을해

소대를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4일 병자

사헌부 【지평(持平) 김기석(金箕錫)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과(大科)·소과(小科)에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에서 기록한 명수(名數)가 반드시 서로 비등한 것이 예(例)입니다. 그런데 금번의 감시(監試)에는 이소의 거자(擧子)가 일소에 비교하여 거의 2천 명이나 많았으니, 이 때문에 분답(紛沓)하고 서로 짓밟아 부상(負傷)한 자가 많았습니다. 이소의 녹명관(錄名官)과 금란관(禁亂官)은 마땅히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소대를 행하고 《좌전(左傳)》을 강(講)하였다.

 

9월 5일 정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군액(軍額)의 이정(釐正)한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뽑은바 양정(良丁)이 4천여 명에 이르렀다. 임금이 경기(京畿)·호서(湖西) 두 도(道) 가운데 백성은 적고 군액이 많은 고을을 추려 그 군액을 감하고 뽑은 바 양정의 군포(軍布)로써 그 대신에 충급(充給)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사간(司諫) 신사영(申思永)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전(御前)의 지척(咫尺)의 자리에서 쌍스러운 말이 오가니 외설(猥屑)함이 막심하고, 서로 다투며 싸우니 거조가 해괴합니다. 심한 경우는 남의 은밀한 일을 발고(發告)하며 간구(干求)하는 청탁도 있으니, 마땅히 지금부터 엄중히 경칙(警飭)해야 할 것입니다. 당후(堂后)의 가주서(假注書)는 참하(參下)541)   가운데 청선(淸選)의 품계인데, 근래에 와서는 간혹 정선(精選)하지 않고 용잡(冗雜)한 자가 많으니, 엄중히 신칙하여 가려서 차출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은 비록 모호하나 대체는 옳다. 모두 윤허한다."
하였다. 신사영의 두 번의 계사(啓辭)는 드러나게 지적함이 있었으나 그 이름을 숨기고 얼버무려 계사의 체제(體制)를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어유룡(魚有龍)을 대사간으로, 남태경(南泰慶)을 집의로, 이진순(李眞淳)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조현명(趙顯命)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우심(尤甚)한 아홉 고을에서 전 가족이 사망한 자의 신포(身布)와 환곡(還穀)을 모두 탕감하도록 허락하였다.

 

지금부터 무신(武臣)은 반드시 육진(六鎭)의 수령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곤수(閫帥)542)  에 의망(擬望)하도록 길이 법식으로 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는 대저 육진은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싫어하는 회피하는 자가 많은 때문이었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9월 6일 무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 권상일(權相一)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번 감시(監試)의 이소(二所)에 속한 〈거자(擧子)〉 전(前) 현감(縣監) 박내장(朴來章)·이세춘(李世瑃)은 일찍이 사대부(士大夫)의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외장(外場)543)  에서 제술(製述)한 일이 드러났으니, 그 처신(處身)하는 마음씨가 장차 하지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박내장 등을 마땅히 엄형으로써 감률(勘律)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장시관(掌試官) 또한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우니, 이소의 시관(試官)과 감시관(監試官)을 모두 엄중히 추고(推考)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부호군(副護軍) 허양(許樑)이 상소하여 결역(結役)과 군정(軍丁)의 폐단을 진달하고, 말단에 장릉(長陵)을 교하(交河)로 옮긴 후에 구포(舊浦)의 구곡수(九曲水)는 도로 옛 수로(水路)로 돌려 낼 것을 말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고, 수로에 관한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시전(詩傳)》을 강론하다가 보우장(鴇羽章)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 보우장을 강론하니, 그 뜻이 척호장(陟岵章)과 비슷하다. 이른바 ‘부모님은 누구를 믿으며, 부모님은 무엇을 자시고, 부모님은 무엇을 맛보시려는가?’라고 한 것은 출정(出征)한 백성이 그 부모를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비록 오랫동안 출정하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부모를 뵐 수 있지마는 부모가 없는 자는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이는 슬픈 감회가 치받쳐 오르는 장면이다. 대저 효성과 우애의 마음은 제왕(帝王)으로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다름이 없으니, 내 마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흉년에 가난한 백성들이 타향으로 유리 표박(流離漂泊)하면서 고향의 친족을 그리워하고 염려하는 생각이 어찌 이렇지 않겠는가? 오막살이집에서 원망하고 근심하는 정경을 수령(守令)이 된 자도 소상히 알 수 없는데, 하물며 구중 궁궐(九重宮闕) 안에 있어 어떻게 상세히 알수 있겠는가? 조종조(祖宗朝)께서 섭이중(聶夷中)544)  이 지은 농가(農家)의 시(詩)를 읊으면서 감읍(感泣)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국조보감(國朝寶鑑)》에 기재되어 있다. 다만 여러 도(道)의 가난한 백성들이 객지로 유리 표박했다는 말만 들었고 한 사람도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 가운데 군역(軍役)을 모피(謀避)해서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자는 비록 얄밉지마는, 그 근본을 추구한다면 또한 양역(良役)이 백성을 괴롭히는 데에 말미암았으니 어찌 가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낙안(樂安)에서 어린아이가 스스로 거세(去勢)한 일은 눈앞에 보이는 듯하니, 잠시도 잊을 수가 없다. 신해년545)  ·임자년546)   이후로 살길을 잃고 유리 표박한 자가 몇 호(戶)나 고향으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새로이 돌아온 백성들에게는 혹은 그 조세(租稅)를 탕감해 주고 혹은 그 호역(戶役)을 감해 주어 소생시키는 방도에 온갖 힘을 다한 후에야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도(道)의 감사에게 신칙하여 유망(流亡)한 자와 돌아온 자를 모두 비국(備局)에 보고하도록 하여 이들을 안정시키고 보호하는 방책을 강구하게 하라."
하였다. 그 후에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룀에 의하여 유민(流民)으로서 도로 돌아온 자에게는 3년을 한정하여 전세(田稅)와 신역(身役)을 탕감해 주었다.

 

9월 7일 기묘

소대(召對)를 행하고 《좌전(左傳)》을 강론하였다.

 

9월 8일 경진

소대를 행하고 《명신주의(名臣奏議)》를 강론하였다.

 

9월 9일 신사

천둥하고 번개 쳤다.

 

장령 권상일(權相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기 지방에 흉년이 연달아 들어 백성의 힘이 피폐(疲弊)하였습니다. 저번에 전하께서 가뭄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조칙(詔勅)을 내리셨는데, 이번 능소(陵所)에 거둥함에 있어 만냥의 은자(銀子)를 소모했으니 전교의 뜻과는 아주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염려하는 바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성주(聖主)께서 선조(先祖)를 추모하는 감회는 알지 못하고, 임금의 말도 또한 믿을 수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지(諭旨)를 내려 연로(沿路)의 민폐(民弊)를 순문(詢問)하여 제거한다면 인정(仁政)의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고, 또 여러 도(道)의 오랫동안 포흠(逋欠)된 환곡(還穀)에 대하여 모두 정봉(停捧)하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재변(災變)이 자주 나타나는 것과 흉년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 탐장(貪贓)이 낭자한 것과 뇌물이 자행(恣行)되는 것, 용사(用捨)의 공정하지 못한 것과 사류(士類)의 습속이 점차 달라지는 것, 분경(奔競)이 풍습을 이룬 것과 강상(綱常)이 허물어지는 것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진계(陳戒)하니, 비답하기를,
"조목(條目)으로 나누어 전계한 것이 절실하니, 어찌 유의하지 않겠는가? 오랜 포흠에 관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결하게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持平) 김기석(金箕錫)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참의(參議) 유명응(兪命凝)의 집 여종이 사장(射場)의 무부(武夫)와 더불어 서로 다투었는데, 무부의 무리들이 작당(作黨)하여 유명응의 집에 갑자기 뛰어들어가서 유명응에게 후욕(詬辱)을 가하였습니다. 이에 형조에서 잡아들여 치죄하자, 그 도당들이 또 그 사위 권가(權哥) 성(姓)을 가진 사람의 집에 갑자기 뛰어들어가서 권가의 부처(夫妻)를 마구 때렸으니, 이는 전에 없었던 변괴입니다. 마땅히 이들을 적발하여 형률(刑律)에 따라 엄중히 감죄(勘罪)해야 할 것이나, 해조(該曹)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였다.

 

9월 10일 임오

사헌부 【집의(執義) 남태경(南泰慶)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명응(兪命凝)의 집에서 소란을 피운 사람들에 대한 계사는 우선 정지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주서(注書)를 형편에 따라 변통하여 입시(入侍)시키는 것은 원래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차대(次對)에서는 남에게 미룸으로 인하여 사관(史官)이 갖추어지지 않아 번거로이 상달하기에 이르렀으니, 해당 승지를 엄중히 추고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사간원 【사간(司諫) 신사영(申思永)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주서 서명신(徐命臣)은 해당 가주서(假注書)의 후임을 차출하지 않았다고 핑계대며 즉시 입시하지 않았으므로 불러들여 등대(登對)시키라는 분부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서명신을 엄중히 추고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박사수(朴師洙)를 대사헌으로, 서명빈(徐命彬)을 부제학으로, 서명형(徐命珩)을 헌납으로, 임정(任珽)을 수찬으로, 심성희(沈聖希)를 응교로, 유건기(兪健基)를 수찬으로, 윤급(尹汲)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수령과 찰방(察訪)으로서 차원(差員)으로 올라온 자를 불러 보고 민폐(民弊)와 군정(軍政)에 대하여 순문(詢問)하였다.

 

봉교(奉敎) 이정보(李鼎輔)·대교(待敎) 정이검(鄭履儉)·검열(檢閱) 이덕중(李德重)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검열 김상로(金尙魯)와 한림(翰林)에 천거된 사람 조명경(曹命敬)·홍중일(洪重一)·한익모(韓翼謨)·민통수(閔通洙) 등은 모두 6품에 승급(陞級)시키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김상로 등이 사관(史官)의 천거를 완료한 지 거의 수개월 만에 조명경이 ‘회천(回薦)547)  할 때에 신치근(申致謹)이 저희(沮戱)한 말이 있다.’라고 비로소 말하면서 인혐(引嫌)하여 진강(進講)에 응하지 않으니, 이정보 등이 상소하여 변명하였다. 임금 또한 사관이 천거를 완료한 후에 신치근이 말썽을 일으킨 것으로써 여러 차례 견책(譴責)을 내리고 이내 여러 한림으로 하여금 벼슬에 나오게 하였는데, 이정보 등이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신치근이 대소(對疏)를 올리기를,
"지난번에 한림이 천기(薦記)를 회시(回示)하였습니다. 무릇 한림을 천거하는 규례는 수천(首薦)이 일천(一薦)의 머리가 되고, 말천(末薦)은 장래 천거의 일을 주장하며, 그 대번(對番)은 천거에 대하여 서로 상의하는 것이요, 그 나머지는 모두 한만(汗漫)한 자리입니다. 한편의 사람들이 이미 수천과 말천을 차지하였고, 또 제4대번(第四對番)에 두어 후일 천거를 주장하는 터전을 삼았으며, 다른 사람은 모두 중간에 두어 눈가림의 자료로 삼았으니, 그 차례를 배포(排布)한 것이 이상 야릇한 낌새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편은 많이 뽑고 한편은 적게 뽑아 형세가 매우 상적(相敵)하지 않으므로, 신이 과연 이덕중을 정이검으로 착인(錯認)하고 말하기를, ‘금번의 천거에 있어서 저편은 많고 이편은 적으니 어찌 그렇게도 균등하지 않는가? 우리들의 본색(本色)이 매사에 있어 남에게 굽히는데 금번에도 또한 굽히게 되었다.’라고 하니, 이덕중이 말하기를, ‘나는 정한림(鄭翰林)이 아니고, 곧 하번(下番)이다.’ 하면서 ‘천거에 들은 사람들이 어떠한가?’ 하고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천거에 들은 사람들은 모두 좋은 듯하다.’하고 인하여 묻기를, ‘한익모는 한현모(韓顯謨)와 어떻게 되는 사람인가?’ 하니, 이덕중이 말하기를, ‘한현모의 아우이다.’하면서 즉시 천기(薦記)를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정보의 상소 가운데 동호(董狐)548)  와 사마천(司馬遷)549)  이라고 말한 경우는 과연 누구를 지적한지는 알지 못하나, 참으로 그 말과 같다면 한갓 이정보만이 애호(愛護)하는 것이 아니라, 신 또한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렇지 않고 다만 장자의 집 아들이 한때 실세(失勢)함으로 인하여 이런 말이 나왔다면 이정보의 마음씀이 또한 너무 수고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대변(對辨)할 즈음에 거실 권귀(巨室權貴)들에게 핍박됨을 모면하지 못했으니, 장차 크나큰 한 가지 죄안(罪案)을 더 첨부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대개 이정보의 전소(前疏)에 ‘천거를 완료한 후에 만약 남의 말썽이 있게 된다면 비록 동호의 필법(筆法)과 사마천의 문장(文章)일지라도 다시 천거하지 못하게 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신치근의 상소에 언급된 것이다. 이에 비답하기를,
"이제 진달한 바를 보니 그 연유를 알겠는데, 그들이 갈등을 일으킨 것은 온당함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하루 뒤에 임금이 사국(史局)이 오래 비어 있음을 깊이 염려하고 대신(大臣)에게 순문하여 드디어 삭직(削職)과 승륙(陞六)의 분부가 있었으며, 이어 별겸 춘추(別兼春秋)를 차출하여 새로이 천거하도록 명하였다.

 

9월 11일 계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폐(辭陛)하는 수령(守令)을 인견하고 면칙(勉飭)하여 보냈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9월 12일 갑신

주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5일 정해

임금이 장릉(章陵)에 거둥하여 김포군(金浦郡) 관사(館舍)에서 유숙하였다. 밤에 대신(大臣) 및 여러 신하들과 차사원(差使員), 수령(守令)들을 인견하고 분부하기를,
"신미년550)  에 선조(先朝)께서 시행한 전례에 의하여 지방관(地方官) 및 병참읍(並站邑)에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에 물어 올 가을에 새로이 받을 대동미(大同米)에서 매결(每結) 2두(斗)씩을 특별히 감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방관은 또 숙소(宿所)의 역(役)을 담당했으니, 더욱 고휼(顧恤)함이 마땅하다. 올 봄에 정퇴(停退)한 대동미를 또한 견감(蠲減)하고 그 밖에 연조(年條)가 오래 되어 탕감할 만한 것은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포군(金浦郡)에 있는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의 서원(書院)과 증(贈) 영의정 윤섬(尹暹)·증 판서(判書) 윤계(尹棨)의 묘소와 과천현(果川縣)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묘소, 육신사(六臣祠)와 금천현(衿川縣) 명빈(䄙嬪) 박씨(朴氏)의 묘소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또 몸소 제문(祭文)을 짓고 금천현 연령군(延齡君) 헌(昍)의 묘소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9월 16일 무자

임금이 능소(陵所)에 나아가 익선관(翼善冠)·참포(黲袍)·오서대(烏犀帶)를 갖추고 능(陵)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나아가 배례(拜禮)를 행한 다음, 능소 위에 가서 봉심(奉審)하였다. 행례 시각에 이르자 의식(儀式)과 같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날 환궁(還宮)하였다.

 

대가(大駕)가 김포(金浦)에 이르자 고을의 여러 유생(儒生)을 불러 보고 성현(聖賢)을 존중히 여기며 경전(經傳)을 독실히 강습(講習)하라고 면려하였다. 그리고 본군(本郡)의 향교(鄕校)에는 유독 위전(位田)이 없으므로 도신(道臣)에게 규례에 의하여 획급(劃給)하도록 명하였으며, 또 기로(耆老)에게 식물(食物)을 하사하고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노량진(鷺梁津)에 이르러 열무(閱武)551)  하고 배종(陪從)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 삼사(三司) 및 반수 종신(班首宗臣)을 모두 진중(陣中)에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병조 좌랑 홍상조(洪相朝)와 겸사복장(兼司僕將) 이우(李玗) 등을 잡아들여 곤장을 쳤으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과 의절(儀節)을 갖추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낭관(郞官)이 죄가 있으면 파직할 수도 있고 정배(定配)할 수도 있으니 굳이 군율(軍律)로써 시행할 필요는 없는 것인데, 임금은 일찍이 사대부(士大夫)를 업신여기고 낭관 보기를 군교(軍校)와 같이 여겨 걸핏하면 곤장으로서 형벌을 가하니, 견식이 있는 사람은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9월 17일 기축

전라도 구(舊) 감사(監司) 조현명(趙顯命)이 궐문(闕門)에 나아가 부절(符節)을 바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일로(一路)의 풍속과 변산(邊山)의 형편을 물은 다음 비국(備局) 유사 당상(有司堂上)의 직무에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대사헌 박사수(朴師洙)를 체직(遞職)하고, 평안 감사는 잉임(仍任)하라고 명하였으니, 도신(道臣)을 자주 바꾸어 폐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간(司諫) 신사영(申思永)이 상소하기를,
"어제 대가(大駕)가 교장(敎場)에서 환궁할 때에 대기(大旗)가 바른 길로 가지 않고 좁은 길로 접어들어 백관(百官)의 반차(班次)가 창황히 옮기게 되고 전도(顚倒)하여 체모를 잃었으니,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해당 장관(掌官)을 나문(拿問)하여 치죄하고 여러 차비 원역(差備員役)들도 또한 과죄(科罪)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사관(史官)의 천거는 사체가 중대하여 사사로운 뜻으로 참착(參錯)하게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인데, 신치근(申致謹)의 이른바 저쪽은 많고 이쪽은 적다는 것과 우리들의 본색(本色)이 매사에 굽힘을 당했다는 등의 말은 지극히 해괴합니다. 천거에 들은 사람이 저의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곧장 가부(可否)를 논하더라도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조가(朝家)의 공기(公器)를 사당(私黨)의 물건처럼 여겨 많고 적은 것을 비교했으니, 진실로 무엄합니다. 심지어 장자(長者)의 집 아들이니, 거실 권귀(巨室權貴)라는 말을 갑자기 끌어들였으니, 그 말을 꾸민 솜씨가 아주 패리(悖理)합니다. 당초에 그의 거조를 조신(朝臣)들이 놀라서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으므로 천거의 일이 완료된 후에 허다한 말을 꾸며내어 스스로 은폐할 계획을 삼았고 말썽을 일으켜 공공연히 저희(沮戲)를 자행했으니, 신치근은 마땅히 견파(譴罷)의 벌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경상도 안동(安東) 유생 권석규(權錫揆) 등이 상소하기를,
"본부(本府)에 재이(災異)와 변란(變亂)이 잇달은 것은 오로지 고(故) 부사(府使) 신경윤(愼景尹)이 수로(水路)를 고쳐 파서 고을의 기지(基地)를 파손한 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청컨대 지리(地理)를 인증(引證)하여 수로를 고쳐 옛 모습대로 복구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일은 너희 고을의 불행이 아니라 곧 국가의 불행이니, 어찌 풍수설(風水說)에 미혹한단 말인가? 너희들은 학업(學業)에 더욱 힘쓰고 정도(正道)에 어긋난 요청으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9월 18일 경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론(講論)을 마치고 말이 영남(嶺南)의 인물에 미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옛날 인조(仁祖)께서 장현광(張顯光)에게 효종(孝宗)의 학문에 대하여 물었는데, 장현광이 대답하기를, ‘꾀가 많아 가르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순박하고 정직하지 않은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다만 장현광이 순박하고 정직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성조(聖祖)의 정직함을 받아들이는 도량(度量)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영남 사람으로는 전(前) 주부(主簿) 성이홍(成爾鴻), 전 참봉(參奉) 김성탁(金聖鐸)·정주원(鄭胄源)이 가장 명망(名望)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세 사람의 성명을 써 올리라고 분부하였다. 또 전조(銓曹)에 명하여 이미 승륙(陞六)한 자는 벼슬을 제수하고 승륙하지 않은 자는 승륙하도록 하였다.

 

육신묘(六臣墓)의 영역(塋域)이 허물어지고 표석(標石)이 기울어졌으므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다시 봉축(封築)하게 하였고, 민절사(愍節祠)에 소속된 선척(船隻)으로서 선혜청(宣惠廳)에 이관(移管)된 것을 또한 본사(本祠)에 환속(還屬)시키도록 하였는데, 연신(筵臣)의 주달(奏達)에 따른 것이었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사간(司諫) 신사영(申思永)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원(園)·능(陵)에 친향(親享)하는 제문(祭文)이 얼마나 엄중한데, 지어 올릴 즈음에 삼가 살피지 못하여 그릇된 실수가 있게 되었으니, 대제학 윤순(尹淳)을 엄중히 추고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고 해방 승지(該房承旨)까지 추고하라 하였다.

 

헌납(獻納) 서명형(徐命珩)이 상소하기를,
"연로(輦路)의 넓고 좁은 것은 원래 일정한 제도가 있는데도 기강이 해이하여 범경(犯耕)하는 백성이 많습니다. 마땅히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범경한 자는 적발하여 치죄하고 해당 수령은 중한 데에 따라 논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친림(親臨)하여 열무(閱武)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데, 한편에서는 호령(號令)하고 한편에서는 기(旗)를 내려 마치 아이들 장난과 같았으니, 해당 제집사(諸執事)는 엄중히 징계를 가함이 마땅합니다. 저번에 승지(承旨)를 파직시키고 사실대로 고백하게 했을 때에 입시(入侍)한 승선(承宣)이 승정원의 규례를 무시하고서 요원(僚員)에게 책임을 떠넘겨 사실이 상반(相反)되고 죄벌이 바뀌었으니, 마땅히 책벌(責罰)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전관(銓官)을 배척하여 외방으로 보직(補職)했을 때에 대신(臺臣)이 이미 환수(還收)하라는 계청을 올렸으니, 그 사람은 비록 내쳤지마는 그 계사(啓辭)는 오히려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승정원에서 잘 주선하지 못하여 성상께서 규례를 어기고 강행하여 바야흐로 발단된 대계(臺啓)를 한편에 맡겨 놓고 억지로 하직(下直)하게 하여 3백 년 동안 없었던 거조를 터놓았으니, 옛 헌장(憲章)을 허물고 대각(臺閣)을 업신여김이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그때의 담당한 승선을 마땅히 파직시켜 뒷날의 폐단을 방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고, 또 청하기를,
"육신(六臣)의 묘소를 수축(修築)하여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연로(輦路)를 범경(犯耕)하는 자는 도신으로 하여금 신칙하게 하라. 해당 집사(執事)를 징계하라 하였는데, 이것은 집사의 허물이 아니다. 〈육신묘를〉 수축하는 일은 이미 하교한 바가 있었다. 그 나머지 소청(所請)은 모두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이다."
하였다.

 

여러 훈신(勳臣)들을 영화당(映花堂)에서 인견하고 중관(中官)을 시켜 선온(宣醞)하였다. 이어 조현명(趙顯命)에게 은배(銀盃) 1좌(坐)를 하사했으니 잔(盞) 복판에 글자를 새겨 과음(過飮)을 경계하였고, 또 충훈부(忠勳府)에 은배 1좌를 하사하였다. 또 어시(御詩) 절구(絶句) 1수(首)를 내려 각기 즉석에서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또 전양군(全陽君) 이익필(李益馝)을 특별히 서용하게 하였고, 또 고(故)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과 고 풍릉 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집에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다. 여러 훈신들이 장차 물러갈 즈음에 임금이 면계하기를,
"옛날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거(莒)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552)  고 하였는데, 나도 경(卿) 등에게 또한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경상우도의 감시 초시(監試初試)를 삼가현(三嘉縣)에서 개장(開場)하였는데, 거자(擧子) 유태명(柳台明) 등이 그 도당(徒黨) 4, 50인을 불러 모아 시제(試題)를 바꾼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핑계대고 시장(試場)에서 소란을 피워 고함을 치고 욕설을 하면서 기왓장과 돌을 마구 던져 고시관(考試官)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드디어 시장을 파(罷)하였다고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9월 20일 임진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청하기를,
"지금부터 승자(陞資)의 법을 밝혀 변방 수령으로서 10개월이 차기 전에 지레 체차(遞差)되는 자는 자급(資級)의 은전(恩典)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현명(趙顯命)을 총융사(摠戎使)로,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으로, 김취로(金取魯)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시형(金始炯)을 예조 참판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이조 참의로, 이광덕(李匡德)을 부제학으로, 박필건(朴弼健)을 한성좌윤(漢城左尹)으로, 이성룡(李聖龍)·서명빈(徐命彬)을 승지로, 홍득후(洪得厚)를 지평으로, 유건기(兪健基)를 부교리로, 김광(金洸)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이조 좌랑 윤급(尹汲)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홀로 정사(政事)를 맡아 임의로 오원(吳瑗)·김약로(金若魯)·김상익(金尙翼)·임정(任珽)·심성진(沈星鎭) 다섯 사람을 전랑(銓郞)에 의망(擬望)하니, 물의(物議)가 떠들썩하였다. 이때에 와서 윤급이 전랑으로서 정사에 참여하여 먼저 남취명(南就明)·오광운(吳光運)을 좌윤(左尹)에 의망하는 것을 막았고, 또 홍득후(洪得厚)·한봉조(韓鳳朝)를 지평(持平)에 새로이 의망함에 대하여 송인명과 힘써 다투니, 송인명이 이미 불평을 품고 있었다. 윤급이 또 이현보(李玄輔)를 승지에 의망하는 것을 막았는데 송인명이 듣지 않으므로, 윤급이 붓을 던지고 일어나 이조 서리(吏曹書吏)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전랑(銓郞)이 한번 정사에 다섯 사람을 의망하는 것은 옛날에 없었던 일이다. 오원·김약로 같은 자는 의망하여도 가하지만 그 나머지는 물의가 많으니, 이후에는 다시 의망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송인명이 크게 노하여 윤급의 파직을 계청하니, 임금이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한번 정사에 다섯 사람을 전랑에 의망한 것은 오로지 권귀(權貴)에 아부하여 사당(私黨)을 갑자기 등용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서 정례(政例)를 무너뜨렸으니, 사람들이 분통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윤급이 말함에 듣는 이들이 통쾌하게 여겼으나, 오히려 그가 억지로 구별을 가한 것을 애석히 여겼다.

 

지평(持平) 김기석(金箕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 감시(監試)의 난잡한 폐단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칼을 뽑아 자상(刺傷)을 입힌 데에 이르러서는 국가에서 과시(科試)를 설행하여 인재를 선출하는 일이 도리어 다투고 싸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폐단의 근원을 추구한다면 실로 사수(寫手)553)  를 딸리고 차술(借述)하는 자의 손을 빌려 예백(曳白)554)  하는 자가 없는 데에서 말미암았으니, 오늘날 박내장(朴來章)과 이세춘(李世瑃)의 무리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묘당에 순문(詢問)하여 엄중히 금령(禁令)을 제정하여 비록 세가(勢家)의 자제(子弟)일지라도 한번 금령을 범하면 일체 법으로 다스림이 마땅합니다. 또 〈시장(試場)의〉 문을 늦게 열었기 때문에 분답(紛沓)을 일으켰으니, 금후에는 문을 일찍 열고, 문에 들어와 녹명(錄名)하는 규례를 하락하지 않을 것이며, 출입할 때에 호패(戶牌)를 고찰(考察)하는 법을 특별히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영남 우도에는 시장에 소란이 일어나 고시관(考試官)이 상처를 입은 데에 이르렀습니다. 아! 필부(匹婦)가 원수(元帥)를 칼로 찌른 것과 유생(儒生)이 시관(試官)을 돌로 친 것이 일은 비록 다르나 변괴는 같으니, 형벌이 정배(定配)에 그칠 수는 없습니다.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각별히 중형(重刑)으로 다스리게 할 것이며, 시관이 검칙(檢飭)하지 못했으니, 또한 파직시킴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금령을 엄중히 제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9월 21일 계사

소대(召對)를 행하고 《명신주의(名臣奏議)》를 강론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현종(顯宗)의 수교(受敎)를 상고하였는데, 나인[內人] 귀열(貴烈)이 그 형부(兄夫)와 몰래 간음(姦淫)하여 아들을 낳은 데 대하여 결안(結案)하여 아뢰니, 판부(判付)의 내용에 ‘이 죄는 산후(産後) 백일 만에 행형(行刑)하는 법에 비할 수 없으니 곧 거행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지난번에 홍점(紅點)은 분만(分娩)한 다음날에 곧바로 행형했으니, 윤상(倫常)을 범한 음옥(淫獄)은 산후에 곧 처형하는 것이 이미 정례(定例)가 있습니다. 이제 간음 죄인 아지(阿只)는 다시 번거롭게 문의할 필요가 없으니, 청컨대 곧바로 정법(正法)555)  에 처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식년(式年)의 문무과 초시(文武科初試)를 설행하였다.

 

9월 22일 갑오

소대(召對)를 행하고 《명신주의(名臣奏議)》를 강론하였다.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으니, 오원(吳瑗)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9월 23일 을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충청도 옥천(沃川) 유생 홍계연(洪啓淵) 등이 상소하여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의 표충사(表忠祠)를 조헌의 신영(新塋) 아래에 옮기고 또 조헌의 아들 조완기(趙完基)로써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이우보(李遇普)가 상소하여 8조목(八條目)을 진달하였다. 그 첫째는 도성(都城)의 부서(部署)를 단속하여 내정(內政)을 안정시킬 것이요, 그 둘째는 친위병(親衞兵)을 가까이 옮겨 비상(非常)에 대비할 것이며, 그 셋째는 공명첩(空名帖)을 폐지하여 명기(名器)를 소중하게 할 것이요, 그 넷째는 새로 설치한 시장(市場)을 혁파하여 민속(民俗)을 돈후(敦厚)하게 할 것이며, 그 다섯째는 성문(城門)을 지키는 장교(將校)와 군졸의 구분을 엄중하게 할 것이요, 그 여섯째는 향민(鄕民)의 출입을 제한하도록 신칙할 것이며, 그 일곱째는 게으른 농부의 이앙(移秧)에 관한 금령(禁令)을 신명(申明)할 것이요, 그 여덟째는 장부(帳簿)와 호적(戶籍)을 정리하기 위하여 별도로 설치한 아전의 경비(經費)를 제거하는 것이었는데, 비국(備局)에 내려 품처하게 하였다.

 

9월 24일 병신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사헌부 【지평(持平) 홍득후(洪得厚)이다.】 와 사간원 【헌납(獻納) 서명형(徐命珩)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능소(陵所)에 거둥할 때에 액례(掖隸) 이시필(李時弼)이 외람되게 어승마(御乘馬)를 탔으니, 왕법(王法)에 비추어 결단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절도 정배(絶島定配)는 너무 관대한 데에 속하니, 이시필은 형률에 의하여 처단함이 마땅합니다. 근래 과장(科場)이 엄정(嚴正)하지 못하니 감시(監試) 이소(二所)에서 드러난 외장(外場)의 변괴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시관(試官)을 추고(推考)에만 그칠 수 없으니, 모두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창녕 현감(昌寧縣監) 홍치기(洪致期)는 원래 행검(行檢)이 없는데 외람되이 군현(郡縣)을 맡아 백성의 고통을 고휼(顧恤)하지 않고 오로지 상관(上官)을 섬기는 데에 힘써 교묘하고 이상한 부채를 만들어 권문 세가(權門勢家)에게 뇌물로 선사했으니, 홍치기를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않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홍치기가 대모(玳瑁)로 부채를 만들어 윤유(尹游)에게 선사하였으므로 서명형이 논핵하였는데, 사문하자 마침내 그런 사실이 없는 것으로 귀결(歸結)되었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송인명(宋寅明)으로 하여금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을 시험 보이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장차 반제(泮製)556)  를 시행함에 있어 대제학 윤순(尹淳)을 여러 차례 불렀으나, 윤순이 병이 있어 응하지 못하고 소를 올려 규례를 인용하여 제학(提學)으로 하여금 대행(代行)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송인명 또한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므로 이날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려 비로소 시장(試場)을 설행하였다.

 

함경도 삼수부(三水府)에 행색(行色)이 수상하게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부사(府使) 한사정(韓師正)이 잡아들여 추문(推問)하니, 그 사람이 혹은 박세만(朴世萬)이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박세원(朴世元)이라 일컫기도 하며, 혹은 예천(醴泉) 사람이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충주(忠州) 사람이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또 자복하기를,
"무신년557)   전에 역적 조세추(曹世樞)·정희량(鄭希亮)의 심부름으로 서찰을 가지고 서울에 왕래하면서 혼수감으로 채단(綵緞)을 무역(貿易)하였고 무신년에 적진(賊陣)이 패산(敗散)함에 미쳐 탈신 도주(脫身逃走)하여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이에 한사정이 감영(監營)으로 잡아 보냈는데, 관찰사(觀察使) 이기진(李箕鎭)은 이미 적당(賊黨)에 관련이 되었으면 외신(外臣)이 다스릴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서울로 압송(押送)하였다. 이에 승지 황정(黃晸)이 장계를 가지고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장계를 보고 하교하기를,
"박세만은 채단을 무역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조정에 품의하지 않고 곧바로 올려 보내어 인심을 미혹시켰으니, 일이 극히 경솔하게 되었다."
하고, 인하여 이기진을 엄중히 추고(推考)하게 하고 박세만은 포청(捕廳)에 내려 합좌(合坐)하여 구문(究問)하게 하였다. 이에 포청에서 박세만은 추문하니, 박세만이 공초하기를,
"정미년558)  에 조세추의 심부름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최정신(崔丁信)에게 서찰을 전달하고 남단(藍緞) 2필을 무역해 갔습니다. 무신년 봄에 조세추가 나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큰 일을 도모하는데 네가 벼슬을 하고자 하는가?’ 하고 또 정희량에게 서신을 전달하게 하므로, 내가 조세추의 말로서 정희량에게 물으니 정희량은 단지 말하기를, ‘벼슬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고 도모하는 바가 무슨 일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또 안동 서원(安東書院) 원장(院長) 권부(權孚)의 집에 찾아갔더니 조세추가 어떤 사람과 더불어 칼을 찬 채 들어와 권부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큰 일을 도모하는데 네가 따르겠는가?’ 하니, 권부가 말하기를, ‘내가 비록 이런 얘기는 들었으나 결단코 따라갈 수는 없다. 네가 내 머리를 베어 가라.’ 하고 엎드려 목을 늘이고 있을 즈음에 권부의 세 아들이 안으로부터 나오니 조세추 등이 흩어져 가고 나 또한 겁이 나서 나왔습니다. 그 후에 정희량·조세추와 함께 함양(咸陽) 적진(賊陣)에 들어갔다가 정희량 등은 체포되고, 나는 탈신 도주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삼수(三水)·갑산(甲山)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포청에서 또 적진 가운데 망명(亡命)한 자의 성명은 물으니, 박세만이 공초하기를,
"안동 사람 권시상(權始相)과 예천 사람 박동수(朴東秀)·최업(崔業)을 적진에서 만났고, 그 전에 또 조세추가 예천 사람 김규령(金奎齡)과 모의(謀議)하는 것을 보았으나 모의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포청에서 박세만이 고한 바 거주 성명(居住姓名)에 의하여 최정신을 수소문하여 잡으려고 하였으나 그런 사람이 없었다. 박세만에게 무릇 다섯 차례 난장(亂杖)을 쳤으나 끝내 다른 초사(招辭)는 없었다. 승지 황정이 권부도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목을 베라는 말로써 살펴보건대, 역모(逆謀)에 가담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권부가 이미 조세추의 말을 듣고도 발고(發告)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죽을 죄가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박세만은 끝내 곤장 아래에서 죽었는데, 권부는 혹은 권후(權煦)라고도 한다 하였다.

 

9월 25일 정유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생원(生員) 박필리(朴弼理)가 반제(泮製)에서 으뜸을 차지하니, 직부 전시(直赴殿試)559)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관무재(觀武才)560)  에 친림(親臨)한다는 명이 있었는데, 종전에 관무재에는 으레 문신(文臣) 유생(儒生)의 정시(庭試)로써 윤회(輪回)하여 대거(對擧)561)  하였고 별시재(別試才)에는 대거하는 규례가 없었다. 금번에도 마땅히 유생을 시험보여야 할 것인데, 무신년562)   별시재에는 특교(特敎)로써 이미 유생 정시(儒生庭試)를 행했으므로, 예조(禮曹)에서 계품(啓稟)하니, 대신(大臣)에게 내려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유생 정시를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26일 무술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가서 《시전(詩傳)》 비풍편(匪風篇)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오늘 말장(末章)을 보고 효종(孝宗)의 뜻과 일을 추상(追想)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창(感愴)한 마음이 일어난다. 오늘날의 군신(君臣) 상하가 비풍편의 뜻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오원(吳瑗)을 이조 좌랑으로, 임정(任珽)·조한위(趙漢緯)를 부수찬으로, 오언주(吳彦胄)·이철보(李喆輔)를 수찬으로, 조명택(趙明澤)을 부응교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로, 윤지원(尹志遠)을 장령으로, 김상로(金尙魯)·이성효(李性孝)를 지평으로 삼았다. 이 때에 김상로가 한림(翰林)으로서 6품에 올랐다. 한림이 역사(歷史)를 편수(編修)하지 못하면 으레 관직을 제수할 수 없는데도,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김상로를 병조 좌랑으로 삼으니, 정조(政曹)의 서리(書吏)가 전례에 의거하여 말하였으나, 송인명이 듣지 않았다. 김상로가 이미 지평을 지내게 되자 비로소 규례에 벗어난 이유로써 인책(引責)하였으니, 송인명이 김상로 형제에게는 그들의 하고자 하는 바를 감히 어기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조 참판 조현명(趙顯命)이 전문(箋文)을 올려 은배(銀盃)를 하사한 은혜에 대하여 사례(謝禮)하였다. 또 상소하여 여섯 가지 나오지 못할 조건을 들어 총융사(摠戎使)의 직책을 사임(辭任)하기를,
"전하께서 신에게 총융사의 직책을 맡긴 것은 실로 신이 청현직(淸顯職)을 지나치게 사양한 데서 말미암았습니다. 당초에 청현직을 사양하므로 군권(軍權)을 장악하였고 이미 군권을 장악한 다음 다시 청현직에 참여하여 문·무(文武) 두갈래로 이익을 도모했으니, 염의(廉義) 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신을 탐부(貪夫)라고 하여 취(取)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만약 훈척(勳戚)을 취한다면 경(卿)을 버리고 누구를 쓰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마침내 명에 응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9월 27일 기해

어기(御器)를 도둑질하여 팔아먹는 궁녀(宮女)가 있었는데, 일이 발각되었다. 법으로서는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였으나 특별히 사형에서 감등하여 섬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9월 28일 경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공조 참판 조현명(趙顯命)이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오명항(吳命恒)은 국가에 큰 공훈이 있었으나 몸이 죽은 후에 의심하고 헐뜯음이 세상에 가득하였고, 그 가운데에는 또한 신의 망령된 거조로 인하여 덧붙여 말을 만들어 낸 자도 있었습니다. 대저 오명항이 신축년563)  ·임인년564)   사이에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서로 맞서서 김일경이 전조(銓曹)에 들어가는 길을 막았고, 이중환(李重煥)이 병조 낭관(兵曹郞官)에 제수되는 것도 엄중히 배척하였습니다. 무신년565)   변란이 일어남에 미쳐 먼저 병판(兵判)에 제수했다는 말이 적도(賊徒)의 초사(招辭)에서 나왔고 또 진중(陣中)에 자객(刺客)의 변고가 있었으니, 그가 흉적(凶賊)과 서로 버티고 있던 정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가도사(假都事) 김성옥(金聲玉)이 데리고 있는 평택(平澤)의 장교(將校)가 차고 있는 통개(筒箇)566)  를 보니 병영(兵營)의 표지(表識)가 분명히 있기에 신이 오명항에게 청하기를, ‘장교를 짐짓 놓아주어 지나가게 하고 요로(要路)에 포수(砲手)를 잠복(潛伏)시켜 죽이는 것이 가하다.’고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깜깜한 밤에 군병을 동원시킬 수가 없으니, 그들이 범진(犯陣)하기를 기다려 방어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군중(軍中)에 암호(暗號)를 내려 계엄(戒嚴)하고 기다렸습니다. 변란이 일어남에 미쳐 신이 장검(長劍)을 짚고 대장(大將)의 장막 안에 들어가 오명항을 대면하여 꾸짖어 말하기를,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과연 어떠한가?’ 하였는데, 또 보니, 갑주(甲胄)가 그 앞에 있으므로 신이 칼로 땅을 치며 말하기를, ‘공(公)이 이 갑주를 입고 싸우려 하는가, 아니면 도망치려 하는가?’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도망치겠는가? 군리(軍吏)들이 겁을 먹고 내어 놓은 것이다.’하고, 그 갑주를 치우라고 분부하였습니다. 또 신이 데리고 있는 서리(書吏)가 신에게 말하기를, ‘타고 온 역마(驛馬)가 포성(砲聲)을 듣고 놀라 달아났습니다.’ 하였는데, 새벽에 보니, 말은 실제 달아난 것이 아니고 원수(元帥)의 장막 앞에 매어 있었으므로 군중(軍中)에 전해져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적(賊)을 평정하고 돌아옴에 미쳐 오명항이 말하기를, ‘내가 이 훈공과 명성으로써 만약 또 사졸(士卒)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면 내가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다.’하고 논공(論功)을 심히 간략하게 하니, 이에 사졸들이 원망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이어 헐뜯음을 만들어 말하기를, ‘진위(振威)에서 야경(夜警)할 때에 도순무사(都巡撫使)가 갑옷을 입고 말을 대기시켜 장차 도망치려 하였는데 조현명이 칼을 뽑아 다투었다.’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의혹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오명항에게 의심을 둔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신의 마음이 이 일로써 가슴이 막혀 답답한 까닭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오명항을〉 의심하였겠는가마는, 이제 경(卿)의 말을 들으니, 더욱 미심쩍은 것이 확 풀린다."
하였다.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오명항의 가운(家運)이 불행하고 또 오명신(吳命新)의 사건이 있었으므로 그의 온 가문(家門)이 한편 사람의 버린 바가 되었으니, 진실로 민망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이조 참의 이종성이 청하기를,
"지평(持平) 김기석(金箕錫)의 소청(疏請)에 의하여 비국(備局)에서 절목(節目)을 만들어 과장(科場)에 난입(攔入)하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밝히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약로(金若魯)를 이조 좌랑으로, 남태량(南泰良)을 교리로, 심성진(沈星鎭)을 부교리로, 김상성(金尙星)을 응교로, 이저(李著)를 집의로, 김한철(金漢喆)을 지평으로, 정언섭(鄭彦燮)을 승지로, 박내정(朴乃貞)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전 제주 목사(濟州牧使) 손명대(孫命大)는 일찍이 무신년567)  에 운봉(雲峰)에서 전공(戰功)을 세웠는데, 해도(海島)에서 죽었으니 심히 측은한 일이므로 2품의 관직을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교리(校理) 송징계(宋徵啓)가 관직(館職)에 대하여 고집을 부려 오랫동안 소명(召命)을 어기니,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보직(補職)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윤경룡(尹敬龍)과 신택하(申宅夏)가 외방에 보직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하여 관직(館職)에 회복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기강(紀綱)이 이들로 인하여 모두 허물어져버렸는데, 외방에 보직한 지 겨우 7삭(朔) 만에 갑자기 주천(奏薦)을 청한단 말인가?"
하고, 송인명을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 【헌납(獻納) 서명형(徐命珩)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시관(試官)을 파직하는 일에 대하여는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남(嶺南) 세선(稅船)에 속한 선인(船人)들이 선혜청(宣惠廳)의 관문(關文)을 받아 새로 만든 곡자(斛子)를 각 고을에 두루 보내 주었습니다. 양산(梁山)에 당도함에 미쳐 본쉬(本倅)568)  가 옛 곡자와 비교해 보았는데, 거의 1두(斗)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본쉬가 곤장을 치며 힐문(詰問)하니, 선인들이 말하기를, ‘선혜청에 거짓 호소하여 〈곡자를〉 새로 만들었으나 오히려 크지 않음을 걱정하여 철정(鐵釘)을 더 첨부하였다.’고 했습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사핵(査覈)하여 화수율(和水律)569)  에 의하여 감단(勘斷)함이 마땅합니다. 선혜청에서는 〈곡자를〉 개조(改造)함에 있어 다만 선인들의 말만 따랐고, 또 선인들에게 맡겨 임의로 농간을 부려 거의 무궁한 폐단을 빚어내게 하였습니다. 양산에서 순영(巡營)에 낱낱이 보고하였는데, 선혜청의 관문이라고 핑계대어 끝내 치죄하지 않았으니, 선혜청 해당 당상(堂上)과 그때의 도신(道臣)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함이 마땅합니다. 전 병사(兵使) 이의풍(李義豐)은 함부로 곤장을 쳐서 사람을 죽였다가 한낱 여인(女人)에게 상해(傷害)를 당하였으니, 그 방위의 허술함과 위인의 용렬함은 남들이 다 부끄러워할 정도입니다. 더구나 도정 별장(都正別將)은 무변(武弁)의 극선(極選)인데 아무런 구애됨이 없었으니, 물정(物情)이 모두 해괴하게 여깁니다. 금군 별장(禁軍別將) 이의풍을 파직시켜 서용하지 않은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선인(船人) 및 선혜청 당상과 영백(嶺伯)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9월 29일 신축

심성희(沈聖希)를 사간(司諫)으로, 김정윤(金廷潤)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9월 30일 임인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사절신(死節臣) 남연년(南延年)의 아들 남덕하(南德夏)를 조용(調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덕하는 이미 수사(水使)를 지냈고 주천(奏薦)에 의하여 탁용(擢用)하였는데, 이후에 만약 또 전과 같이 한다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개 남덕하가 일찍이 하직(下直)할 때에 이삼(李森)을 찾아 인사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의 하교가 이와 같았다.

 

김상익(金尙翼)·임정(任挺)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때에 사나운 호랑이가 횡행(橫行)하여 사람과 가축을 상해하였으므로 팔도(八道)의 정계가 거의 없는 날이 없었으니,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총계가 1백 40인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