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9권, 영조 10년 1734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1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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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계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병자 호란(丙子胡亂) 이후 호구(戶口)의 가감(加減)된 수효를 써 들이라고 명하였다. 숭덕(崇德)기묘년578)  에 호수가 44만 1천 8백 27이요, 인구가 1백 52만 1천 2백 65명이었는데, 그 후에 점점 수가 늘어서 당저(當宁) 임자년579)  에 이르러서는 호수가 1백 71만 3천 8백 49이고, 인구 7백 27만 3천 4백 46명이었다.

 

이보다 앞서 종실(宗室) 원계군(原溪君) 엽(㮿)이 상소하여 고(故) 운흥군(雲興君) 영()이 찬수(撰修)한 열성(列聖)의 팔고조도(八高祖圖)를 간행하기를 청하니,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고교(考校)하게 하였다. 이날 제조(提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본시(本寺)의 보각(寶閣)에 간직한 도첩(圖帖)과 운흥군 집에서 올린 도첩을 서로 고준(考準)하였는데, 보각본(寶閣本)에는 정종(定宗)·문종(文宗)·예종(睿宗)·인종(仁宗)의 팔고조도가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저 보각본에는 직파(直派)로써 소중히 여긴 듯하였고, 운흥본(雲興本)에는 모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직파가 아니더라도 모두 쓰는 것이 옳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팔고조도 가운데 고조모(高祖母)가 보각본에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써 있고, 운흥본에는 임천 조씨(林川趙氏)로 써 있었는데, 여러 집의 보첩(譜牒)을 상고하니 운흥본이 확실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착오된 곳을 상세히 살펴 빨리 개정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간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보첩만 있을 뿐이었다. 경신년580)   무렵에 낭선군(朗善君)이 보략(譜略) 1권을 찬술(撰述)하였고, 그 후에 낙창군(洛昌君)이 또 4권을 잇달아 만들었다. 더구나 팔고조도는 더욱 귀중하니 간행하지 말고 다만 다섯 벌을 정서(精書)하여 경외(京外) 다섯 곳에 있는 선원각(璿源閣)에 봉안(奉安)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보략과 어첩(御牒) 및 열성(列聖)의 지장(誌狀)이 서로 어긋나는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지장 가운데 정종의 휘호(徽號)은 온인(溫仁) 아래와 순효(順孝) 위에 또 ‘공용(恭勇)’ 두 글자가 있었고, 태종(太宗)이 선위(禪位)를 받은 초기에 또 인문 공예(仁文恭睿)의 휘호를 올렸으며,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지문(誌文) 가운데에는 인수(仁粹)란 호(號)가 있었고, 정현 왕후(貞顯王后)의 지문 가운데에는 자순 화혜(慈順和惠)란 호가 있었는데, 어첩과 축판(祝板)에는 모두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 태묘(太廟)의 삭망 제향(朔望祭享) 때에 신주(神主)에 써 있는 바를 봉심(奉審)하고 이로써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구보(舊譜) 가운데 순회 세자빈(順懷世子嬪)은 덕빈(德嬪)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전례를 상고하니, 빈궁(嬪宮)의 시호(諡號)는 모두 두 글자인데 덕빈이란 칭호는 자못 의심스러웠습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상고해보니 덕빈은 생존시의 칭호요, 공회(恭懷)가 곧 그 시호였습니다. 또 소혜 왕후(昭惠王后)는 처음에 수빈(粹嬪)을 봉(封)했으니, 수빈 또한 생존시의 칭호입니다. 이번 교정(校正)할 때에 덕빈은 공회빈(恭懷嬪)으로 개록(改錄)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빈궁이 생존시에 칭호가 있음은 전례가 분명한데 지금 빈궁은 아직도 칭호가 없으니, 이는 궐전(闕典)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東宮)이 만약 생존해 있다면 빈궁의 칭호가 구애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무신년581)   이후에 마땅히 칭호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궐전인 듯하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예조 참의 유언통(兪彦通)이 아뢰기를,
"보략(譜略)과 다른 문적(文籍)을 상고해 보니 수빈(粹嬪)의 작호(爵號)와 덕빈(德嬪)의 작호는 가례(嘉禮)의 초기에 있었으니, 성교(聖敎) 가운데 무신년582)   이후 궐전(闕典)이라는 뜻과는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선조실록》을 상고해 보니 공회빈(恭懷嬪)은 10세에 덕빈을 봉하였는데 다음해에 세자(世子)가 졸(卒)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국조(國朝)에서 세자빈을 책봉할 때는 모두 작호가 있었습니다. 정안 왕후(定安王后)는 처음에 덕빈을 봉하였고, 원경 왕후(元敬王后)는 처음에 정빈(貞嬪)을 봉하였으며, 소헌 왕후(昭憲王后)는 처음에 경빈(敬嬪)을 봉하였는데, 유독 현덕 왕후(顯德王后)는 빈을 봉할 때에 작호가 없었습니다. 이후로부터 혹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하순(下詢)하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일자(一字)의 가호(加號)는 미안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사체(事體)로서 논한다면 작호가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되 작호가 혹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한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별겸춘추(別兼春秋)로 하여금 실록(實錄)을 상고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황명회전(皇明會典)》과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널리 상고하여 품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민응수(閔應洙)를 대사헌으로, 심성희(沈聖希)를 사간으로 삼았다.

 

11월 3일 갑술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4일 을해

밤에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위로 지나갔는데, 빛깔은 붉은색이었고, 빛이 땅에 비쳤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윤유(尹游)와 부사(副使) 홍경보(洪景輔) 및 서장관(書狀官) 남태온(南泰溫)이 대궐에 나아가 배사(拜辭)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또 범월(犯越)에 대한 일로 인하여 청(淸)나라 예부(禮部)에 회자(回咨)하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안건(案件)은 원래 소방(小邦)의 변방 백성들이 어리석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화(物貨)를 몰래 교역(交易)하다가 그 범인들이라는 지칭을 받게 되어 이미 정형(正刑)에 처하였는데, 배진만(裵進萬)의 포흠(逋欠)에 관한 배상(賠償) 문제로써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모두 소방이 평일에 단속하고 신금(訊禁)함이 허술하여 간사한 조짐을 미리 방지하지 못한 소치이니, 칙교(勅敎)를 저버림이 부끄러워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황상(皇上)께서 소방을 긍휼히 여겨 호탕성(胡湯成) 등을 법에 비추어 삼엄하게 감처(勘處)하였고, 후일에 다시 금령(禁令)을 어기고 월경(越境)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정례(定例)에 의하여 범월한 자는 가차없이 잡아 압송(押送)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변경의 금령을 엄중히 하고 원방(遠方) 사람을 회유(懷柔)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큰 은혜에 감사하여 마음에 잊을 수 없습니다. 자문(咨文) 내용의 사리(事理)로써 변방 관원을 신칙하여 범월의 금령을 엄중히 지켜 칙려(飭勵)하는 성의(聖意)에 저버림이 없게 하여 조금이나마 근간(懃懇)한 미성(微誠)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에 회자하여 감사의 정성을 펴니, 바라건대, 귀부(貴部)에서 소상히 살펴 상주(上奏)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명신주의(名臣奏議)》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당 문종(唐文宗)의 조정(朝廷) 붕당(朋黨)에 대한 말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문종(文宗)이 진실로 그 정도(正道)를 얻었다면, 당파를 제거하는 일이 어찌 어려웠겠는가? 우(牛)·이(李)583)  의 다툰 바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에 지나지 않았으니, 오히려 충신과 역적으로써 서로 다투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은 탕평(蕩平)의 공효(功効)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이 하교가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탕평의 논의는 또 한 당파를 이루어 임금의 총명을 가리우고 사의(私意)를 자행(恣行)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고 정사(政事)에 해를 끼침이 거의 남인(南人)·서인(西人), 노론(老論)·소론(少論)의 당파보다 심했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은 이를 걱정하였다.

 

11월 5일 병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했는데,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 김성탁(金聖鐸)이 명을 받들고 함께 입시하였다. 김성탁은 안동(安東) 사람으로서 문사(文士)라는 명성이 약간 있었으므로, 박문수(朴文秀)와 조현명(趙顯命)이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에 그 명성을 듣고 찾아갔었는데, 김성탁은 문득 두메의 오두막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접견(接見)하여 안빈(安貧)의 뜻을 보였다. 그 후에 도신(道臣)과 어사(御史)가 번갈아 상소하여 힘써 천거하므로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번번이 출사(出仕)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는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올라왔다. 임금이 인견하고 치국(治國)의 방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 백성이 피폐(疲弊)하였으니, 마땅히 형벌을 간략하게 하고 부세(賦稅)를 감하며 기강(紀綱)을 세우는 세 가지로써 급선무(急先務)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임금이 함경도(咸鏡道) 범월 죄인(犯越罪人) 이만백(李晩白)의 사장(査狀)을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북도(北道)의 변민(邊民)이 범월하는 것은 수령을 잘 선임(選任)하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다."
하고, 곤수(閫帥)에 적합한 자를 육진(六鎭)의 수령에 차송(差送)할 것이며, 한번 육진의 수령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곤수에 의망(擬望)하되 일찍이 곤수를 겪은 자는 이 규식에 구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사헌부 【지평(持平) 김기석(金箕錫)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만백(李晩白)은 곤궁한 백성을 위협하고 나라의 금령을 범했으니, 사핵(査覈)하여 치죄하는 즈음에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종일 개좌(開坐)하고 엄중히 조사하여 법을 바르게 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이만백의 옥사(獄事)에 간련(干連)된 사람을 사출(査出)함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데, 북병사(北兵使)가 거행하기를 늦추었는데도 자신이 도신(道臣)이 되어 검칙(檢飭)하지 못했으니, 감사(監司) 이기진(李箕鎭)을 마땅히 엄중히 추고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한위(趙漢緯)를 사간으로, 심성진(沈星鎭)을 헌납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윤지원(尹志遠)이 상소하여 시무(時務)를 진달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각도(各道)의 각 고을을 먼저 연해(沿海)와 육지(陸地)로 나누어, 연해에 있는 자는 수군(水軍)에 편입하고 산군(山郡)에 있는 자는 육군(陸軍)에 편입해야 할 것입니다. 어영군(御營軍)이 있는 고을은 모두 어영청(御營廳)에 소속시키고 금위군(禁衛軍)이 있는 고을은 모두 금위영(禁衛營)에 소속시킬 것이며, 그 밖에 양역(良役)과 속오 아병(束伍牙兵)에 이르러서도 모두 구분을 정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호적(戶籍)에 3세 된 아이를 누락시킨 자는 모두 효시(梟示)하고 공문(公文)이 없이 이사(移徙)하는 자는 그 신역(身役)을 힐문(詰問)하여 즉시 그 신역을 정할 것이며, 통(統) 안에 있는 자를 만약 숨기는 자가 있으면 피차를 모두 효시해야 할 것입니다. 각 고을의 군병(軍兵)과 장인(匠人)의 보(保)는 관(官)에서 포목(布木)을 거두어 나눠 주고, 각릉(各陵)의 수호군(守護軍)과 향탄 산직(香炭山直)은 각기 그 고을에서 충정(充定)하도록 할 것이며, 서원(書院)을 거듭 설치하여 그 원역(員役)에 모입(募入)되었거나 혼잡된 인원은 또한 모두 추려서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긴요하지 않은 용병(冗兵)은 정리하여 군액(軍額)을 감한다면 군정(軍丁)의 원액(元額) 이외에 반드시 남는 인원이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포목으로써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다시 1필(疋)의 척수(尺數)를 정하여 그 용도에 맞추고 그 역(役)을 균평하게 한다면, 고르지 않아서 원통함을 호소하는 폐단은 없을 것입니다. 무변(武弁) 출신(出身)은 별달리 대오(隊伍)를 편성하여 변란에 대비할 것이며, 해사(該司)의 합할 만한 것은 합하고 낭관(郞官)의 감할 만한 것은 감하며, 서리(胥吏)의 고군(雇軍) 또한 모두 태감(汰減)해야 할 것입니다. 외방에는 도사(都事)나 경차관(敬差官)을 차송(差送)하지 말고 감사와 수령을 정선(精選)하여 답험(踏驗)하는 일을 전적으로 맡길 것이며, 향시관(鄕試官)은 도내의 문신 수령(文臣守令)을 선택하여 차송하고, 작은 고을은 두 고을을 합하여 시소(試所) 하나를 설치하며 혹은 세 고을을 합하여 시소 둘을 설치한다면 잔읍(殘邑)의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사(御史)는 별달리 선택하여 보내되 출두(出頭)를 하지 못하게 하고 진달한 서계(書啓)를 누설하지 못하게 하며, 또 다른 어사 3인을 보내어 아뢴 바가 합치된 연후에 출척의 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각사(各寺)의 승도(僧徒)는 각 고을에 나눠 보내어 군액을 보충하게 하고, 강도(江都) 부근의 연변(沿邊) 고을은 모두 강도에 소속시켜 평일에는 그 절제(節制)를 받게 하고 변란이 있을 때에는 모두 성중(城中)에 들어와 지키게 하며, 진로(津路)의 성보(城堡)는 각별히 유의(留意)하여 수축하고, 경기 감영(京畿監營)은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으로 옮겨야 합니다.
명경과(明經科) 초시(初試)는 증광과(增廣科)의 예(例)에 의하여 논(論)·표(表)·부(賦)·책(策)을 출제(出題)하고 칠서(七書)584)  를 임강(臨講)585)  함에 있어 각 권(卷)에서 한 장적(章籍)을 추생(推栍)하여 순통(純通)한 연후에 회시(會試)는 별시(別試)의 예에 따라 우등(優等)을 취하여 합쳐 한 과목(科目)을 삼고, 증광 별시(增廣別試) 또한 이에 의하여 설행해야 할 것입니다. 절제(節製)에서 뽑혀 급분(給分)586)  한 사람은 경서(經書)의 공부가 있어 자원하는 자 이외는 다음 증광 별시에 붙일 것입니다. 태학(太學)에서는 매월 삭망(朔望)에 순제(旬題)를 내어 거재 유생(居齋儒生)을 시험보이고 연말(年末)에 성적의 획수를 계산하여 수석을 차지한 2, 3인은 증광 별시에 직부 회시(直赴會試)하게 할 것입니다. 향교(鄕校) 유생의 고강(考講)에 불통(不通)한 자는 포목을 징수하고 영원히 군역(軍役)에 충정하지는 못하게 할 것이며, 해마다 고강하여 강경(講經)의 성적이 우수한 자는 승보(陞補)시켜야 합니다.
재물을 낭비함은 술보다 더함이 없으니 양주(釀酒) 규모의 크고 작은 것을 물론하고 판매의 행위를 일체 엄금할 것이며, 남초(南草)587)  의 해독은 술에 비하여 더욱 심하니 과조(科條)를 엄중히 제정하여 시골에서는 심지 못하게 하고 점포에서는 판매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대부(士大夫)의 나이 50세 이상 및 당상관 이외의 조관(朝官)과 유생은 모두 비단옷을 금지하며 사천(私賤)으로서 갓[笠]을 쓰는 것 또한 엄하게 금해야 합니다. 삼남(三南)의 제언(堤堰)은 각별히 굴축(掘築)을 가할 것이요, 각사(各司)의 〈노비(奴婢)에 관한〉 추쇄관(推刷官)은 길이 차송(差送)하지 못하게 하고 각 고을에서 수사(搜査)하여 원수(元數)에서 감축(減縮)이 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8도(八道)의 여러 고을에 각기 진창(賑倉)을 설치하고 그 고을의 환상(還上)에 속한 모곡(耗穀)을 획급(劃給)하되 분급(分給)하고 거두어 들이기를 한결같이 조적(糶糴)의 예와 같이 하여 진휼곡(賑恤穀)에 보충하게 하며, 금년 8도의 오랜 포흠은 일체 모두 후일로 물려 받게 하여 곤궁한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서 흩어지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재국(才局)에 따라 직책을 맡기고 그 임무를 전담시켜 단시일 내에 공효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큰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으나, 그 가운데 원래 일정한 제도가 있어 신칙할 만한 것 이외에는 모두 시행하지 않았다.

 

11월 7일 무인

오원(吳瑗)을 수찬으로, 박필재(朴弼載)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 김성탁(金聖鐸)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과장(科場)에서 대술(代述)한 사람 전 현감(縣監) 이세춘(李世瑃)을 변방의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였다.

 

11월 8일 기묘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9일 경진

별겸춘추(別兼春秋) 김한철(金漢喆)과 조영국(趙榮國)이 한림(翰林)의 추천(推薦)을 의논하였는데, 김한철은 이석신(李碩臣)을 천거하려 하였으나 조영국이 저지하였고, 조영국은 송익휘(宋翼輝)를 천거하려 하였으나 김한철이 저지하여 마침내 타협을 보지 못한 채 모두 소(疏)를 올리고 물러 나갔다. 이에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이들을 책망하고 나처(拿處)하도록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0일 신사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신(臺臣)이 무신년588)   적변(賊變) 때에 정양빈(鄭暘賓)이 한 곳에 머무르고 전진하지 않은 죄를 논핵하니,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사핵(査覈)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정양빈이 실로 한 곳에 머무르고 전진하지 않은 자취가 있습니다."
하니, 정양빈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정양빈이 처음에는 비록 한 곳에 머무르고 전진하지 않았으나 마침내 적(賊)을 토벌하여 공훈을 이루었는데, 일찍이 이정필(李廷弼)이 고을을 버리고 도망친 정상을 입증(立證)하였으므로, 이정필을 두둔하는 자들의 미움을 받아 공적을 숨기고 뒤쫓아 죄를 주었으니, 사람들이 더러 원통하게 여겼다. 임금이 조현명(趙顯命)에게 이정필의 일을 물었는데, 조현명이 그 당시 영남 감영(嶺南監營)의 문첩(文牒)을 상고해 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이정필이 죽었으므로, 마침내 그 일을 결말짓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9책 3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59면
【분류】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註 58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사신은 말한다. 정양빈이 처음에는 비록 한 곳에 머무르고 전진하지 않았으나 마침내 적(賊)을 토벌하여 공훈을 이루었는데, 일찍이 이정필(李廷弼)이 고을을 버리고 도망친 정상을 입증(立證)하였으므로, 이정필을 두둔하는 자들의 미움을 받아 공적을 숨기고 뒤쫓아 죄를 주었으니, 사람들이 더러 원통하게 여겼다.
임금이 조현명(趙顯命)에게 이정필의 일을 물었는데, 조현명이 그 당시 영남 감영(嶺南監營)의 문첩(文牒)을 상고해 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이정필이 죽었으므로, 마침내 그 일을 결말짓지 못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일곱 빛깔[七色] 표하보(標下保)의 원군(元軍) 1명에 대하여 그 보(保)가 몇명인가?"
하니, 공조 참판 조현명이 말하기를,
"혹은 1명, 혹은 2, 3명으로서 일정한 수효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도를 정하지 않으면 장차 한정이 없을 것이다. 표하군(標下軍)의 수효는 대신(大臣)이 장신(將臣)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액수(額數)를 정한 후에 원군 1명에 대하여 다만 보(保) 1인을 주되 자신이 충정(充定)하고 관(官)에서 대정(代定)하는 일이 없도록 규식을 정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표하(標下)의 원군(元軍)은 수어청(守禦廳)이 8백 50여 명이며 총융청(摠戎廳)이 1천 65명이니, 이제 만약 수어청의 예에 의하여 감액(減額)한다면 나머지가 마땅히 2백여 명이 될 것이고 그에 소속된 보(保)를 합한다면 나머지가 1천 2백여 명이 될 것이니, 이를 나누어 양청(兩廳)의 보인(保人)을 삼는다면 순편(順便)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헌부 【장령(掌令) 윤지원(尹志遠)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적(賊)의 형세가 바야흐로 떨쳐 풍우(風雨)가 몰아치듯 급박했으니 마땅히 용감하게 앞으로 가서 힘을 다하여 적을 토벌해야 할 것인데도, 정양빈(鄭暘賓)은 여러 날 한 곳에 머물고 있으면서 현저히 두려워 회피하는 뜻이 있었으니 파직에 그칠 수 없으므로, 마땅히 군역(軍役)에 충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고(故) 참봉(參奉) 김시온(金是榲)에게 3품관(三品官)을 증직(贈職)하도록 명하였다. 김시온은 김성탁(金聖鐸)의 증조(曾祖)이니,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 오랑캐와 강화(講和)한 후 은거(隱居)하여 벼슬에 나오지 않았으며, 묘비(墓碑)에 숭정 처사(崇禎處士)라고 쓸 것을 유명(遺命)하였다. 김성탁이 소명(召命)을 받들고 서울에 들어와 임금의 예우(禮遇)을 받게 되자, 연신(筵臣)이 그를 위하여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11월 11일 임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흥경(金興慶)이 제조(提調) 윤순(尹淳)은 의술(醫術)에 정통한 이유로서 구임(久任)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영남 사람은 비록 의망(擬望)이 되더라도 낙점(落點)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 청컨대 현주(懸注)589)  의 규식을 회복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13일 갑신

사헌부 【장령(掌令) 윤지원(尹志遠)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양빈(鄭暘賓)의 일에 대하여는 의윤(依允)하였다. 윤지원이 또 말하기를,
"교하(交河)·파주(坡州)의 사이에 화적(火賊)이 횡행(橫行)하여 북을 치면 전진하고 징을 치면 퇴각하는 것이 마치 행군(行軍)하듯이 하면서 인민을 타상(打傷)하고 마을을 불 태웁니다. 그리고 또 호환(虎患)이 극성을 부려 사람과 가축을 물어 죽이고 있습니다. 마땅히 좌우 포청(左右捕廳)으로 하여금 도적을 각별히 염탐하여 체포하게 하고,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포수(砲手)를 보내어 특별히 〈호랑이를〉 사냥하여 잡도록 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훈국(訓局)의 포수는 능소(陵所)의 거둥이나 동병(動兵)이 아니라면 징발할 수가 없다. 화적에 관한 일은 다만 토포영(討捕營)으로 하여금 뒤쫓아 잡게 하겠다."
하였다.

 

이춘제(李春躋)를 도승지로, 김약로(金若魯)를 부수찬으로, 권일형(權一衡)을 지평으로, 정희보(鄭熙普)를 헌납으로 삼았다.

 

이날 정사(政事)에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조익명(趙翼命)과 신치운(申致雲)을 승지(承旨)에 거듭 의망(擬望)하였고 윤흥무(尹興茂)를 새로이 헌납(獻納)에 의망하였다. 이들은 모두 물의(物議)에 허여(許與)한 바가 아니었는데 참판(參判) 신방(申昉)에게 문의하지도 않고 단독으로 의망하니, 신방이 이르기를, ‘이는 요석(僚席)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상소(上疏)하여 사직하였다. 송인명이 대소(對疏)하여 말하기를,
"승지는 전망(前望)을 검의(檢擬)한 데에 지나지 않았으니, 정사에 참여하지 않은 요당(僚堂)590)  에게 어떻게 문의할 수가 있겠습니까? 헌납의 의망에 이르러서는 요당이 비록 일이 많은 데 관련되나 신 또한 경솔한 실수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으며, 참의(參議) 이종성(李宗城) 또한 윤흥무의 의망에 참여하였으므로 소를 올려 그 허물을 자책(自責)하니, 임금이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려 화해(和解)시켰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前) 판서(判書) 권이진(權以鎭)이 졸(卒)하였다. 권이진은 남인(南人)에 가담하여 숙종 때에는 환로(宦路)에 막힘을 당하였고, 임인년591)   이후에는 이광좌(李光佐)에게 붙었으므로 그의 발탁(拔擢)한 바가 되어 드디어 경(卿)의 반열에까지 이르렀었는데, 죄로 인하여 파직되어 집에 물러가 있다가 죽었다.

 

11월 14일 을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협(金浹)을 함경 북도 병사(咸鏡北道兵使)로 삼았다.

 

11월 15일 병술

밤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11월 17일 무자

밤에 화성(火星)이 우림성(羽林星)에 들어갔고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평안도(平安道)에 천둥하였다고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11월 18일 기축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화적(火賊)을 염탐하여 체포하는 일과 범을 잡는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19일 경인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역관(曆官)을 청(淸)나라에 보내어 역서(曆書)를 만드는 신법(新法)을 알아 오도록 하였는데, 미처 돌아오기 전에 청력(淸曆)이 이미 반포(頒布)되어 왔으니, 명년에는 윤4월을 두었다. 대저 역법(曆法)은 중기(中氣)가 없는 달에 윤월(閏月)을 두는데, 청력에는 소만(小滿)의 중기가 4월 29일 밤 자시초(子時初) 2각(刻) 11분(分)에 있으므로 그 다음달에 중기가 없어 윤월이 되지만, 우리 나라는 분야(分野)와 절후(節候)가 조금 다르므로 소만의 중기가 29일 야분(夜分) 후 자정(子正) 1각 8분에 있어 문득 다음달 초 1일에 속하니, 신법으로써 미루어 본다면 청나라의 4월은 당연히 우리 나라의 윤3월이 되겠으나, 《역상고성(曆象考成)》의 옛법으로서 미루어 본다면 우리 나라에서도 또한 윤4월을 두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청력을 따른다면 절후가 어긋나게 되고, 따르지 않는다면 저들과 문서를 왕복할 적에 불편함이 있으므로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신사철(申思喆)이 품지(稟旨)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신하에게 순문(詢問)하니,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옛법을 따라 윤4월을 두어 청력과 같이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 또한 모두 김흥경의 말과 같았는데, 유독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윤3월을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김흥경의 말을 따랐다.

 

11월 20일 신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1일 임진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조(吏曹)의 세 당상(堂上)이 누차 불러도 나오지 않으니, 하교를 내려 절책(切責)하였다.

 

김기석(金箕錫)을 장령으로, 조명경(曹命敬)을 지평으로, 오원(吳瑗)을 수찬으로, 김약로(金若魯)·남태량(南泰良)을 부수찬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부교리로 삼았으니, 참의(參議) 이종성(李宗城)의 정사이었다. 특별히 김재로(金在魯)를 예조 판서로, 송진명(宋眞明)을 호조 참판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삼았으니, 세 사람은 일찍이 전관(銓官)으로서 외방에 보직(補職)되었다가 이때에 와서 소환(召還)된 것이다.

 

11월 22일 계사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11월 23일 갑오

날씨가 춥기 때문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평안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유신(儒臣) 유건기(兪健基)가 녹시(錄示)한 연석(筵席)의 설화(說話)를 보건대, 유신 임정(任珽)이 감사의 염탐하는 폐단을 강성하게 진달하고 심지어는 파견된 자가 혹은 뇌물을 받으며, 혹은 원한을 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건기는 신의 성명을 지적하면서 임금의 하교에, ‘방백(方伯)이 수령을 자주 접견하고 그 문보(文報)를 보면 잘 다스렸는가 못 다스렸는가를 알 수가 있는데, 어찌 구태여 염탐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했다 하니, 신이 이에 있어서 황공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간(臺諫)에게는 풍문(風聞)을 쓰도록 허락하고 감사(監司)에게는 염탐을 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풍문과 염탐을 어찌 모두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대간과 감사가 일마다 친히 듣고 눈으로 직접 보기가 어려우니,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규정(糾正)하고 안핵(按覈)하는 직무를 수행(遂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감사로 하여금 염탐을 폐지한다면 이는 눈을 빼버리고서 밝게 보기를 요구하고 귀를 막고서 듣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감사의 구실을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깊이 혐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때에 유건기가 조현명(趙顯命)과 박문수(朴文秀)의 기찰(譏察)하는 폐단을 진달하였고 아울러 박사수에게까지 미쳤으므로, 박사수의 상소가 이와 같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5일 병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때에 전라도 전주(全州)의 주성(州城)을 완축(完築)하였으므로 판관(判官) 구성필(具聖弼) 및 장교(將校) 12인에게 공로가 있다고 하여 모두 가자(加資)하였는데, 옥당(玉堂) 김약로(金若魯)가 그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며 고쳐 복계(覆啓)하였으나 오히려 지나친 자가 많았다. 공조 참판 조현명(趙顯命)이, ‘정언섭(鄭彦燮) 또한 동래부(東萊府)의 성(城)을 수축한 공로가 있는데도 의례적인 은전(恩典)을 입지 못했으니 억울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뒤에 마침내 이로 인하여 가자되었다. 이 두 성은 모두 조현명이 도백(道伯)으로 있을 때에 수축하였는데, 정언섭과 구성필이 아부하여 상관(上官)의 뜻을 잘 받아들였으므로 조현명이 모두 포장(褒奬)을 가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조현명을 단점으로 여겼다.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이 아뢰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수축한 후에 각 군문(各軍門)의 군기(軍器) 및 군향(軍餉)을 옮긴 것이 매우 많았는데 주관(主管)하는 대장(大將)이 없으니, 한결같이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수어청(守禦廳)에 소속시킨 예에 의하여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검찰(檢察)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경리청 제조(經理廳提調)가 있으니, 서로 견제(牽制)되는 일이 없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비록 총융사(摠戎使)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더라도 각 군문에서 그 절제(節制)를 받겠는가? 우선 후일을 기다려 충분히 상의하여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 김기석(金箕錫)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서(曆書)를 만들어 절후(節候)를 알게 하는 것은 나라의 소중한 일인데, 윤월(閏月)을 둔 것이 청력(淸曆)과 어긋나서 심지어는 추후하여 간행(刊行)하고 날짜를 물려 반포(頒布)한 거조가 있으니, 관상감(觀象監)의 관원들을 중한 데 따라 치죄함이 마땅합니다. 포도 대장(捕盜大將) 신광하(申光夏)는 병조(兵曹)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노여움을 품고 소를 진달했으니, 지극히 외람된 데에 관계됩니다. 그리고 도적을 치죄하는 이외에 경솔히 난장(亂杖)을 치는 것 또한 법례에 어긋나서, 신광하를 엄중히 추고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금위영(禁衛營)의 군졸(軍卒)이 포도청(捕盜廳) 군관(軍官)과 더불어 싸움이 벌어져 욕설이 대장(大將)에게까지 미치니, 신광하가 군졸에게 난장을 시행하였다. 이에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포도청 군관을 곤장으로 다스리고 신광하를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신광하가 상소하여 변명함이 매우 장황(張皇)하므로 사헌부에서 이를 논핵하였다.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이 또 연석(筵席)에서 신광하를 배척하고 또 말하기를,
"곤장을 맞은 군관이 죽었으니, 마땅히 조상경을 죄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신광하와 조상경을 모두 파직하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상경의 파직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니 도로 정지시켰다. 그러나 포도청의 군관은 실상 죽지 않았으므로 그 후에 이종성을 추고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26일 정유

밤에 달이 항성(亢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교정청 당상(校正廳堂上)을 인견하였다. 여천군(驪川君) 증(增)이 아뢰기를,
"어첩(御牒) 가운데 존호(尊號)에 대하여 태묘(太廟)의 위판(位板)을 봉심(奉審)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제 위판을 보았는데,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휘호(徽號) 가운데 헌무(獻武)의 ‘헌(獻)’자는 헌(憲)으로 써 있었으니 위판에 따라 ’헌(憲)’자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며, 소혜 왕후(昭惠王后)의 휘호 가운데 휘숙(徽肅)의 ‘숙(肅)’자가 어첩(御牒)과 축판(祝板)에 '숙(淑)'자로 잘못 쓰여 있으므로 이제 '숙(肅)'자로 개정하려 합니다. 열성(列聖) 가운데 추상 존호(追上尊號)의 연조(年條)는 다만 태조(太祖)·정종(定宗)·단종(端宗) 및 숙종(肅宗)의 어첩 아래에 기재되어 있고, 열조(列朝)는 모두 기재되어 있지 않아서 혹은 상세하기도 하고 혹은 소략하기도 하여 아마도 소루(疏漏)한데 관계될 듯싶으니, 낱낱이 추보(追補)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7일 무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11월 28일 기해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9일 경자

동지사(冬至使)의 행차가 비로소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정사(正使) 윤유(尹游)가 여색(女色)에 빠져 유련(留連)하다가 도강(渡江)할 날짜가 급박하여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밤낮을 달리니, 역졸(驛卒)들의 수족(手足)이 얼어 터지고, 죽은 자가 자그마치 10여 인에 이르렀다.

 

11월 30일 신축

천둥하였다. 삼남(三南) 지방에도 또한 천둥하면서 큰비가 내렸다.

 

송진명(宋眞明)을 부제학으로, 윤취함(尹就咸)을 헌납으로, 김광세(金光世)를 정언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지평으로, 정수송(鄭壽松)을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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