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9권, 영조 10년 1734년 12월

싸라리리 2025. 9. 1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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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임인

임금이 대신(大臣)·형관(刑官)·삼사(三司)를 인견하고 경외(京外)의 사수(死囚)에 대하여 초복(初覆)592)  을 행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치기(洪致期)에 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12월 3일 갑진

교리(校理) 유건기(兪健基)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팔도(八道)의 구관(句管)593)  은 한갓 명목만 남아 있을 뿐이고 폐단을 개혁할 기약은 없습니다. 육조(六曹)·제사(諸司)에 묘사 신파(卯仕申罷)594)  의 규정을 비록 신칙했으나 여전히 게으르고 안일(安逸)한 데에 빠져 있으니, 승선(承宣)의 육전(六典)은 묶어서 시렁에 높이 얹어 두고, 대각(臺閣)의 고지(故紙)는 이미 그릇된 습속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모두 형식만을 숭상하고 실상에 힘쓰지 않은 폐단이니, 어떻게 하늘의 노여움을 풀 수가 있으며 천재(天災)를 중지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인하여 형식을 버리고 실상에 힘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지평(持平) 이현량(李顯良)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발신(發身)의 초두에 갑자기 횡액(橫厄)을 만나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말이 먼저 대관(臺官)의 탄핵하는 장계에서 나왔고, 전방(全榜)을 저지하는 의논이 잇달아 괴원(槐院)595)  의 정문(呈文)에서 일어났으며, 박성원(朴聖源)의 공사(供辭)에 이르러서는 말 만듦이 위험했으니, 뒤좇아 생각하여도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만족한 모양을 하면서 반열(班列)에 나아가 남의 비웃는 손가락질을 받겠습니까?"
하니, 사임(辭任)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형조 참의 정우량(鄭羽良)이 상소(上疏)하기를,
"죄인 선옥(仙玉)은 나이 70세가 지났으니, 법에 있어 마땅히 형장(刑杖)으로 신문(訊問)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중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 정우량을 엄중하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사인(士人) 권취신(權取身)이 우정구(禹鼎九)의 딸을 후취(後娶)로 맞아들여 5개월 만에 낙태(落胎)하였고 그 후에 또 딸을 낳아 4년을 동거(同居)하였는데, 권취신의 조부(祖父) 참봉(參奉) 권후(權厚)의 첩이 그 여종과 더불어 선언(宣言)하기를, ‘전에 낙태한 것이 진짜 소산(所産)이다.’ 하니, 권후와 그 아우 권부(權孚)가 이 말을 믿고 권취신으로 하여금 이혼(離婚)하게 하였다. 이에 우정구의 딸이 자살(自殺)하자, 우정구는 딸을 불쌍히 여겨 친히 문목(問目)을 발송하여 그 의심스러운 단서를 분변하였으니, 전후의 판부(判付)가 거의 누천언(屢千言)에 이르렀다. 권후의 첩과 여종은 모두 형신(刑訊)을 입었는데 선옥은 나이 70세가 넘어 법에는 마땅히 형신할 수 없으므로 정우량의 상소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선옥은 우정구의 딸을 무함하여 정상이 간악(奸惡)하므로 임금이 특별히 형신을 명한 것이다. 그 후에 여종과 첩이 모두 자복(自服)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순문(詢問)하니 모두 우정구의 딸을 원통하게 여겨 작처(酌處)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임금이 드디어 하교(下敎)하여 그 원통함을 밝게 살펴 권후와 권부를 사적(仕籍)에서 삭제(削除)하여 원방에 귀양보내고, 권취신은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여종과 첩 등은 차등 있게 유배(流配)하였다.

 

12월 5일 병오

밤에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로 지나갔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겨울 천둥의 재변으로써 사면(辭免)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정미년596)   이전의 참하 문관(參下文官)을 모두 6품에 승진시키도록 명하였으니, 김흥경(金興慶)의 청에 따른 것이다.

 

12월 6일 정미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장복(章服)의 등차(等差)는 정해진 제도가 있는데, 근래에는 너무 문란하다. 비록 흉배(胸褙)로 말하더라도 문신(文臣)은 날짐승[飛禽]을 수놓고 무신(武臣)은 길짐승[走獸]을 수놓았으니 그 뜻을 따온 것이 각기 조리(條理)가 있는데, 근래에는 무신이 간혹 학흉배(鶴胸褙)를 착용하니, 금후에는 각별히 신칙을 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掌令) 김기석(金箕錫)이 뇌변(雷變)으로 인하여 상소하기를,
"하늘은 위에서 노여워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원망하고 있으니 군신(君臣) 상하가 척연(惕然)히 경계하고 두려워함이 마땅한데, 조정의 위에서는 의심하고 멀리 하는 것이 전과 같으니 아마도 오늘날의 탕평(蕩平)은 한갓 이름만 있고 그 실상은 찾아볼 길이 없을 듯합니다. 이병상(李秉常)·이진망(李眞望)·송성명(宋成明)·권업(權𢢜)·이재(李縡) 등 여러 사람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벼슬이 청현(淸顯)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혹은 무단히 물러가기도 하고 혹은 억지로 인혐(引嫌)하기도 하면서 조정에 나올 뜻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재가 핍절된 때를 당하여 저 몇몇 신하들은 그 문학(文學)과 재능(才能)을 한결같이 한가하게 폐기(廢棄)하는 데에 맡겨 버렸으니, 신은 가만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근래에 벼슬길이 문란하여 지름길을 뚫어 외람스레 수령에 제수되며, 이서(吏胥)에 이르러서도 외람되게 관직에 의망(擬望)되고 있으니, 신은 원컨대 양전(兩銓)597)  에 신칙하여 삼가고 아끼는 뜻을 보이도록 하소서. 공사(公私)의 노복(奴僕)도 면천(免賤)하는 지름길이 많아 천역(賤役)에서 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혹은 정관(政官)의 망(望)에 오르기도 하니, 또한 엄중히 신칙하여 그 폐단을 방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12월 8일 기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12월 9일 경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10일 신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무신(武臣)으로서 이미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수령을 겪은 자는 육진(六鎭)의 규례에 의하여 곤수(閫帥)에 의망(擬望)하도록 허락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 후에 또 이미 평안도 강변 칠읍(江邊七邑)598)  의 수령을 지낸 자도 또한 곤수에 의망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의풍(李義豐)에 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남양 부사(南陽府使) 최종주(崔宗周)가 상소하여 고을의 폐단을 진달하였고, 잇달아 강도(江都) 이전미(移轉米)에 관한 임자조(壬子條)의 옛 포흠을 우선 정퇴(停退)하여 장차 사방으로 흩어지려는 백성을 무마하고 보호하기를 청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도록 비답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이제(李濟)가 재변(災變)으로 인하여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하의 모든 일이 실상에 힘씀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실상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패망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실상에 힘쓰지 않고서 그 치적(治績)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정성이 순일(純一)하지 못하면 실지로 하늘을 공경함이 아니요, 백성을 애휼한다고 한면서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하면 실지로 백성을 애휼함이 아닙니다. 숨겨진 간악(奸惡)을 적발하면서 총명하다고 한다면 실지로 총명한 것이 아니요, 고식적인 은혜를 베풀면서 인자(仁慈)하다고 한다면 실지로 인자한 것이 아니며, 어진이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능히 맡기지 못한다면 실지로 어린이를 좋아함이 아니요, 바른말을 구한다고 하면서 채용(採用)하지 않는다면 실지로 바른 말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이보다 앞서는 재변을 만나면 일찍이 바른 말을 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근년에 이르러서는 간혹 잊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지난 가을 군병을 사열(査閱)함에 있어서 때아닌 천둥과 우박은 놀랍고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는데, 바른말을 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올리고 춘당대(春塘臺)에서 유생을 시험 보였으니, 이는 문득 태평시대에 하는 성대한 일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하늘을 대하는 정성이 조금이라도 간단(間斷)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안일(安逸)한 행사를 하셨겠습니까? 이로써 말한다면, 하늘을 공경함에 있어 그 실상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불쌍한 백성을 애휼한다 하지마는 구중 궁궐(九重宮闕)에서 한갓 생각만 간절할 뿐이요, 오막살이집 아래에는 실지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흉년에 조세(租稅)를 감제(減除)한 것은 간교한 아전들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오랜 포흠을 탕감한 것은 토호(土豪)들이 요행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신해년599)  과 임자년600)  에 거듭 흉년이 드니 전하께서 내탕금(內帑金)을 기울여 도와주었으나, 일을 맡은 자들이 삼가지 아니하여 건량(乾糧)에 입록(入錄)된 자의 태반이 유령 호구(幽靈戶口)이며 간활(奸猾)한 아전의 주머니에 거의 한정이 없이 들어갔으니, 구제된 자의 수효는 사망한 자의 비교가 되지 않는데도, 마침내 논상(論賞)함에 있어서는 품계(品階)가 올라 금옥 관자(金玉貫子)가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에 있어 그 실상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장(疏章)의 합잡한 말을 범연히 보아 넘기지 않았고 여염(閭閻)의 은밀한 일도 모두 통촉하시며, 금번 우녀(禹女)의 옥사(獄事)에 있어서도 12조(條)의 문목(問目)은 모두 형관(刑官)들의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니, 이는 전하의 명철(明哲)함이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큰 근본과 큰 체통이 안위 존망(安危存亡)의 기미(機微)에 관련되는 것은 일체 방치(放置)해 버리고 깨닫지 못하시는 듯하니, 명철의 실상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가난한 백성이 죽어서 매장(埋葬)하지 못한 자에게는 관(官)에서 쌀과 베를 주게 하고, 나이 70이 넘은 노인에게는 해마다 어육(魚肉)을 하사했으니, 이는 전하의 인자함입니다. 그러나 불쌍한 백성들이 정공(正供) 이외의 횡렴(橫斂)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전하께서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인자의 실상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어진이를 좋아하는 것이 귀중한 것은 그 도(道)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성(贊成) 신(臣) 정제두(鄭齊斗)는 전하의 예우(禮遇)를 받은 지 이미 10년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일어나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전하께서 좋아하면서도 맡기지 않는 때문이니, 어진이를 좋아하는 실상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두 대신(大臣)의 물러감을 허락함에 이르러서는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미 물러감을 허락하려 했다면 어찌 도성(都城)에 들어오라고 재촉할 필요가 있으며, 이미 도성에 들어오게 했다면 또 어찌 갑자기 물러감을 허락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의 진퇴(進退)는 나라의 안위(安危)에 관계가 되는데, 처분이 황홀하여 거의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니, 가만히 전하를 위하여 애석히 여깁니다. 전하께서 매양 응지(應旨)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하기를, ‘내가 가상히 여긴다.’고 하며 혹은 ‘어찌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나, 그 말을 실지로 채용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해사(該司)로 하여금 품처하라는 명은 있었으나 막연히 물이 마른 우물에 돌을 던지듯 하였으니, 바른 말을 구하는 실상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대각(臺閣)의 말에 이르러서는 조금만 뜻을 거스리면 가벼운 자는 꺾어버리고 무거운 자는 귀양을 보내니,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심하여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는 것이 풍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설령 실덕(失德)과 허물이 있으며, 조신(朝臣)이 설령 간교(奸巧)하고 패악(悖惡)한 자가 있더라도 어디로부터 들을 길이 있겠습니까? 옛날 우(禹)임금이 순(舜)임금에게 경계하기를, ‘단주(丹朱)601)  와 같이 오만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순 임금이 허탄(虛坦)한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급암(汲黯)은 한무제(漢武帝)를 면대(面對)하여 욕심이 많다고 지척(指斥)했으니 한무제가 사직을 맡길 만한 신하라고 허여(許與)하였습니다. 가령 이 두 신하가 오늘날에 살아 있어 전하를 만나 기탄없이 바른말을 한다면 전하께서 능히 받아들이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마도 전하께서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죄수의 국문(鞫問)을 정지하라는 장계에 대해서는 해를 넘겨 서로 버티고 있으니, 형옥(刑獄)이 생긴 이래로 7년이 지나도록 살리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 죄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대신(大臣) 및 재신(宰臣)에게 널리 하문하여 빨리 판결을 니리는 것이 실로 왕정(王政)의 큰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실상에 힘쓰는 도리를 다하지 못했으므로 조정의 위에 백가지가 헛되고 한 가지도 실상이 없으니, 신은 청컨대 대략을 진달하겠습니다.
옛날에 관직을 명함에 있어 후직(后稷)602)  에게는 농사(農事)를 맡겼고 공공(共工)603)  에게는 공사(工事)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서는 요행히 한 번 급제(及第)한 자는 비록 뛰어난 재능이 없더라도 진실로 내세울 문벌(門閥)만 있다면 한 사람이 백 가지 관직을 역임할 수 있으니, 이는 인재를 등용하는 규모가 이미 옛 법을 잃은 것입니다. 전관(銓官)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의 인재를 들어 쓰는 권병(權柄)을 맡았는데, 그 마음이 공정하지 못하면 쓰고 버림이 편벽되며, 그 지감(知鑑)이 밝지 못하면 현명한 사람과 우매한 자가 혼잡됩니다. 한미(寒微)한 자는 권문 세가(權門勢家)에게 굽히고 소원(疏遠)한 자는 친근(親近)한 자에게 빼앗기며 평온하고 조용한 자는 분경(奔競)하는 자에게 가리워지니, 정석(政席)이 열리기 전에 물색(物色)이 먼저 정해지고, 제수(除授)된 문첩(文牒)이 나오기 전에 성명(姓名)이 이미 전파되니, 신은 알지 못하지마는 전후에 전관(銓官)을 맡은 자가 과연 모두 적임자이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보건대, 전하께서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기능(技能)을 먼저 하고 간국(幹局)을 뒤로 돌리며 경민(警敏)함을 귀중히 여기고 박실(朴實)함을 천하게 여기며, 온유(溫柔)한 자를 기뻐하고 강직한 자를 싫어하니, 전후의 전관을 맡은 자가 어찌 모두 산도(山濤)604)  와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옛날에는 서북 사람에게도 또한 청환(淸宦)의 자리를 주어 재신의 반열에 오른 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삼남(三南)이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하지마는 과제(科第)로 인하여 나오는 자는 벼슬이 한낱 찰방(察訪)과 현령(縣令)에 지나지 않으며, 음직(蔭職)으로서 벼슬하는 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 온 나라 사람이 누군들 왕신(王臣)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안팎으로 나누어 내지(內地) 사람을 등용하고 외방 사람은 버리는데, 또 내지 사람들 가운데서 당색(黨色)을 구분하여 당색이 같은 자는 채용하고 다른 자는 버리니,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키고 물정(物情)을 평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힘써 그치지 않는 것은 탕평(蕩平)의 정사인데, 이른바 탕평은 그 도(道)가 지극히 호대(浩大)합니다. 군주가 먼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법칙을 위에서 세워 조정을 바로잡고 백관(百官)들을 바로잡는 근본을 삼지 않고 한갖 구구(區區)한 정령(政令)의 말단(末端)으로서 천촉(川蜀)605)  의 분열된 당인(黨人)들을 몰아 옛날 팔원 팔개(八元八愷)606)  의 화협(和協)한 풍습으로 돌리려 한다면, 아래에 있는 자들은 반드시 방편에 따라 윗사람의 총명을 가리우는 의논을 하여 음(陰)도 아니고 양(陽)도 아니며, 백색(白色)도 아니고 흑색(黑色)도 아니어서 바르지 못하게 몸을 굽혀 수종(隨從)하여 그 사욕(私慾)만을 몰래 차리려 할 것이니, 이것이 과연 참된 탕평이겠습니까? 신의 소견으로는 다만 사대부(士大夫)의 심술(心術)만 허물어뜨리고 세도(世道)의 해독만 될 뿐입니다. 무신년607)   이후에 인심이 크게 변하여 역적 보기를 거리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으르는 듯이 하며, 국옥(鞫獄) 보기를 송사(訟事)하는 마당에서 심문(審問)하는 것처럼 여겨 저쪽에서 이쪽을 공격할 적엔 반드시 ‘역적에 가담하였다.’ 하고, 이쪽에서 저쪽을 공격할 적엔 또한 ‘역적을 두둔했다.’고 하여, 마치 아들의 훔친 것이 금(金)인지 쇠[鐵]인지 정론(定論)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검은 까마귀와 흰 갈매기가 거의 그 본색(本色)을 잃을 지경입니다. 이리하여 선악(善惡)이 혼동되고 시비(是非)가 문란하여 아교(阿膠)와 칠(漆)을 한 그릇에 담은 것과 같으니, 아! 이것이 어떠한 세계(世界)입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탕평의 이름만 구하지 말고 그 실상에 힘쓰게 하소서.
수령으로서 장죄(贓罪)를 범한 자가 한번 사핵(査覈)을 겪으면 무죄 백방(無罪白放)이 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무릇 대각(臺閣)과 어사(御史)의 염찰(廉察)이 혹시 실지와 어긋나는 일도 있겠지마는, 10인이 사핵을 거쳐 10인이 모두 무죄 백방이 된다면 어찌 매우 해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탐관(貪官)은 백성의 재물을 수탈(收奪)하여 위로 권귀(權貴)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손을 살찌우는데도 사핵에서 무죄가 되어 관직이 여전하며, 세력이 없는 잔약한 이서(吏胥)들은 장부(帳簿)에 조금만 실수가 있어도 도리어 장죄로 논하여 영구히 서용되지 않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곤수(閫帥)와 수령이 아부하고 결탁하는 자는 죄를 장죄와 똑같이 논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절선(節扇)과 세찬(歲饌) 이외에 무시(無時)로 궤유(饋遺)를 받는 자는 대각으로 하여금 듣는 대로 논핵하여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형벌을 매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것은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인데, 양정(良丁)은 원래 많지 않음이 아니라 피역(避役)하는 곳이 많으므로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감영(監營)·병영(兵營)의 아병(牙兵)과 수첩(守堞) 등의 군관(軍官)이 그 첫째요, 영장(營將) 및 수령에 속한 액수(額數) 외의 군관이 그 둘째이며, 향교(鄕校)의 교생(校生)과 서원(書院)의 모입(募入)이 그 셋째요, 각읍 향청(各色鄕廳)의 관속(官屬) 차비(差備)가 그 넷째이며, 대왕(大王) 및 공신(功臣)의 자손에 모속(冒屬)함이 그 다섯째요, 유학(幼學) 및 업유(業儒)608)  를 모칭(冒稱)함이 그 여섯째이며, 사천(私賤)이라고 가칭(假稱)하여 양반(兩班)에게 투속(投屬)함이 그 일곱째요, 군적에서 누락되어 한가로이 노는 것이 그 여덟째이며, 비국(備局)의 여정(餘丁)에 이르러서도 그 수효가 또한 수백 명 뿐이 아니니 양정을 얻기 어려움이 대개 이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묘당(廟堂)에서 그 군안(軍案)을 거두어 들여 모두 혁파할 수 없는 것은 그 액수를 정하고 그 수효 이외에는 모두 수령에게 맡겨 도망치고 물고(物故)된 대신에 보충할 것이요, 그 모속과 모칭과 누적(漏籍)된 무리는 수령으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 낸다면 양정을 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수령을 신중히 선택하고 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 고을을 염찰(廉察)하게 하여 만일 인족 침징(隣族侵徵)609)  하는 자가 있으면 나타나는 즉시 계문(啓聞)하여 파직시키고 원정(元定)의 폄목(貶目)을 삼는다면, 수령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한 마음이 진실하면 만가지 일이 모두 참되고 한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만가지 일이 모두 거짓이 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조정(調整)하고 변통하는 것은 다만 전하의 한 마음의 진실한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리고 품처할 것을 비국(備局)에 내리라고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제(李濟)의 말한 것은 시폐(時弊)에 적중(適中)함이 많았으나, 그가 나이 늙고 자취가 소원(疏遠)한 때문에 임금이 그다지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고,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한 것도 또한 채용한 실상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29책 3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6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역(軍役) / 재정-전세(田稅)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인사-관리(管理) / 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구휼(救恤) / 사법(司法) / 윤리-강상(綱常)


[註 599] 신해년 : 1731 영조 7년.[註 600] 임자년 : 1732 영조 8년.[註 601] 단주(丹朱) : 요(堯)임금의 아들.[註 602] 후직(后稷) : 순(舜)임금의 신하.[註 603] 공공(共工) : 순(舜)임금의 신하.[註 604] 산도(山濤) : 진(晉)나라 죽림 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 진 무제(晉武帝)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그 사람의 재간(才幹)과 국량(局量)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였음.[註 605] 천촉(川蜀) : 송(宋)나라 철종(哲宗) 무렵에 심한 정쟁(政爭)이 있었던 세 당파 가운데 천당(川黨:蜀黨이라고도 함)을 가리킴. 세 당파는 소식(蘇軾)·여도(呂陶) 등의 천당, 정이(程頤)·주광정(朱光庭) 등의 낙당, 유지(劉贄)·유안세(劉安世) 등의 삭당(朔黨)인데, 천촉(川蜀)은 천당을 촉당(蜀黨)이라고 부른 데서 인용된 것임.[註 606] 팔원 팔개(八元八愷) : 여덟 사람의 선량한 사람과 여덟 사람의 화합(和合)한 사람. 팔원은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 백분(伯奮)·중감(仲堪)·숙헌(叔獻)·계중(季仲)·중웅(仲熊)·숙표(叔豹)·계리(季貍)이며, 팔개는 고양씨(高陽氏)의 재자 창서(蒼舒)·퇴고(隤鼓)·대림(大臨)·방강(尨降)·정견(庭堅)·중용(仲容)·숙달(叔達)임.[註 607]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608] 업유(業儒) : 유학을 닦는 서자(庶子). 손자나 증손(曾孫) 대에 와서야 유학(幼學)이라 불림. 숙종 22년(1696)에 정했음.[註 609] 인족 침징(隣族侵徵) : 지방 고을의 이속(吏屬)들이 공금(公金)이나 관곡(官穀)을 포흠(逋欠)해 내었거나 군정(軍政)이 도망·사망하여 군포세(軍布稅)가 축났을 때, 이를 대충하기 위하여 강제로 그 이웃·일족(一族)에게 추징(追徵)하는 일.
사신은 말한다. 이제(李濟)의 말한 것은 시폐(時弊)에 적중(適中)함이 많았으나, 그가 나이 늙고 자취가 소원(疏遠)한 때문에 임금이 그다지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고,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한 것도 또한 채용한 실상이 없었다.

 

12월 11일 임자

김취로(金取魯)를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응교(副應敎)로, 임정(任珽)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진주사(陳奏使) 서명균(徐命均) 등이 일을 마치고 돌아옴에 미쳐 먼저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달려와서 청(淸)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올리게 하였으니, 그 예부의 의(議)에 이르기를,
"이제 조선 국왕(朝鮮國王)의 주문(奏文)에 의거하건대, 금령(禁令)을 어기고 흉악한 일을 행한 김세정(金世丁) 등 여러 범인들을 이미 모두 잡아들이고 그 공사(供辭)를 책록(責錄)한 다음 굳게 가두고 감수(監守)하여 예단(睿斷)을 기다린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신 등이 삼가 강희(康熙)610) 44년611) 조선국(朝鮮國) 사람 김예진(金禮進) 등이 월경(越境)하여 사람을 살해한 안건(案件)에 대하여 제준(題准)한 것을 조사해 보니, 범인 김예진 등과 그 관할 지역의 방위를 맡은 각 관원들을 모두 해국왕(該國王)으로 하여금 논죄(論罪)하고 의처(議處)하여 완결을 지어 주문(奏聞)하게 하였는데, 그때에 해국왕이 흉범(凶犯)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므로 그 의처(議處)할 것을 면제해 준 문안(文案)이 있습니다. 이제 그 나라 사람 김세정 등이 국경을 넘어 흉악한 일을 행하여 인명(人命)을 위협하고 살해했으니, 응당 강희 44년의 규례에 비추어 범인 김세정 등에 대하여 해국왕이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분별하여 헤아려 치죄하도록 하고 방위를 맡은 각 관원도 규례에 비추어 의처하여 일체 완결을 지어 주문하게 되었는데, 해국왕이 그 범흉(犯凶)한 여러 사람들을 즉시 모두 잡아들이고 아울러 누락된 자도 없었으니, 응당 강희 44년의 규례에 비추어 그 의처를 면제해 달라는 일에 대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어 논의한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서명균 등이 역관(譯官)들로 하여금 청나라 예부 상서(禮部尙書) 삼태(三泰) 및 자문을 지은 한인(漢人) 낭중(郞中) 장청도(莊請度)와 장인(掌印)한 청인(淸人) 낭중(郞中) 상보(常保)에게 잘 주선하여 의처를 면제한 규례를 인용(引用)하게 한 것이었다.

 

12월 12일 계축

대신(大臣) 및 형관(刑官)을 인견하고 사수(死囚)에 대하여 초복(初覆)에 논급(論及)되지 못한 자는 추후에 복심(覆審)하게 하였다.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재자관(䝴咨官)의 복물(卜物)이 나오는 것은 일이 비록 자질구레하나, 관계되는 바가 참으로 중합니다. 당초에 사신(使臣)이 의주부(義州府)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복물을 내보내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를 억측해 본다면 두 가지 단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역관(譯官)이 이익을 다투어 그 먼저 물건을 파는 것을 미워한 것이 아니면 필시 역관(曆官)의 복물이 너무 많으므로 직접 수검(搜檢)하고자 한 것입니다. 동지사(冬至使)의 짐바리가 책문(冊門)에 이르러 되돌아오게 된다면 돌아오는 인편에 붙여 나오게 하는 것이 곧 전례인데, 그 당시에는 불가할 것이 없었겠으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결단코 허락할 수 없습니다. 무릇 청(淸)나라 채은(債銀) 문제로써 나라에 치욕(耻辱)을 입힌 후로부터 복물을 들여보내는 데에 대한 금령(禁令)을 발포(發布)하여 청나라와 우리 나라 잠상(潛商)들이 이익을 읽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들은 기회를 엿보아 물화(物貨)를 교역(交易)하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낮으로 이익을 도모하려는 무리들을 놓아 많은 수효의 판로(販路)를 구하는 잠상의 무리들을 모이게 하는 것은 간사한 길목을 막아 끊어버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는 역관의 복물을 우선 머물러 두었다가 사신의 행차를 기다려 함께 나오게 할 것이며, 진주사(陳奏使)의 행차 가운데 역관(譯官)들이 이익을 다투어 고소(告訴)하는 자들 또한 엄중히 징계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의주 부윤(義州府尹) 윤득화(尹得和)가 재자관의 복물을 책문 밖에 머물러 둔 일로써 계문(啓聞)하였는데, 임금이 내보내라고 허락하였으므로 이종성의 상소가 이와 같았다. 그 후에 좌참찬(左參贊) 김취로(金取魯)가 말하기를,
"지난해에 채은(債銀) 문제로써 나라에 치욕을 입힌 후에 법식을 정하여 사행(使行) 및 재자관에 복물을 물론하고 모두 되돌려 오게 하였습니다. 이제 듣건대, 복물을 책문 밖에 머물러 두었다고 하는데, 진주사의 회기(回期)가 멀지 않으니 당연히 사행(使行)과 더불어 함께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12월 14일 을묘

황감제(黃柑製)612)  를 설행하였는데, 진사(進士) 유언국(兪彦國)이 으뜸을 차지하니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라고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15일 병진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이삼(李森)을 공조 판서로, 김약로(金若魯)를 헌납으로, 민응수(閔應洙)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6일 정사

사수(死囚)를 삼복(三覆)하였는데, 죄를 경감하여 목숨을 살려준자[傅生者]가 5명이요, 사형(死刑)에 처한 자가 10명이었다.

 

사헌부 【장령(掌令) 김기석(金箕錫)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죄인 한세유(韓世愈)가 왕언(王言)을 거짓 꾸며 남을 속인 죄는 진실로 사형을 모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관차(官差)라고 핑계하고서 외읍(外邑)에 폐해를 끼쳤으니, 이를 용서한다면 장차 징계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장응규(張應奎)와 최성중(崔聖中) 등이 혹은 인장(印章)을 위조하여 물고(物故)된 자에게 주기도 했으며, 혹은 거짓 부신(符信)을 만들어 이를 빙자하여 포(布)를 거두었으니, 목편(木片)과 죽간(竹簡)으로써 구분을 두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감사(減死)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모두 형률에 의하여 처단함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헌납(獻納) 김약로(金若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박영만(朴永萬)의 살인(殺人)한 정상은 문안(文案)에 환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색(元色)이 이미 관비(官婢)에 소속되었고 그가 또 정장(呈狀)을 올려 끊어 버렸으니, 간소(奸所)에서 살해(殺害)한 형률로써 생의(生議)에 붙일 수는 없습니다. 박영만에 대한 감사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함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형으로써 논단(論斷)하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니, 형관(刑官)은 마땅히 형률에 비추어 재복(再覆)할 때에 신중히 살펴야 할 것인데, 이제 삼복(三覆)에 임하여 하문(下問)하는 아래에서 혹은 의율(擬律)을 조금 가볍게 해야 한다고 하며, 혹은 생의(生議)에 붙임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니, 사체가 미안합니다. 형조 판서 장붕익(張鵬翼)과 참판 김시형(金始炯)을 마땅히 모두 추고해야 할 것입니다. 과차(科次)의 시권(試券)은 으레 빈청(賓廳)에서 곧바로 출납(出納)하는데, 어제 황감제(黃柑製)의 시권이 미처 빈청에 내리기 전에 합문(閤門)에 나아간 승지(承旨)가 지레 취하여 보고 방성(榜聲)613)  이 먼저 전파되었으니, 도승지 이춘제(李春躋)와 좌승지 정필녕(鄭必寧)을 마땅히 모두 엄중히 추고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수찬(修撰) 오원(吳瑗)이 아뢰기를,
"오늘 친림(親臨)하시어 죄수들을 복심(覆審)했으니, 호생(好生)의 덕의(德意)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화(敎化)는 곧 정치를 하는 근본이고 형벌은 정치를 보조하는 도구이니, 만약 덕의로써 인도하고 예절(禮節)로써 다스려 백성이 스스로 범죄하지 않는다면 형벌을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번에 계복(啓覆)이 많은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옛날에는 승지(承旨)가 추문(推問)한 문안(文案)을 읽으면서 흐느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가 있었으니, 대개 사생(死生)의 판단이 1각(刻)의 사이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여러 신하들이 심상(尋常)하게 여겨 문득 형률에 의거하기를 청하는데 오늘도 형률에 의거한 것이 9건(件)이지마는 죽는 자는 10인이 된다. 10인이 하루 동안에 죽은 것은 실로 나의 교화(敎化)가 밝지 못하여 국법을 범한 소치이니, 측은한 나머지에 또한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어첩(御牒) 가운데 전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휘호(徽號)를 이제 장차 써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시 참고해 보니, 정종(定宗)의 지문(誌文) 및 시책(試冊)에는 모두 온인 공용(溫仁恭勇)이라고 써 있는데 ‘공용(恭勇)’이란 두 글자는 어첩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태종조(太宗朝)에서 인문 공예(人文恭睿)의 호(號)를 올렸는데도 또한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며, 숙종조(肅宗朝)에서는 의문 장무(懿文莊武)를 가상(加上)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만약 공용 인문 공예(恭勇仁文恭睿)를 모두 어첩에 쓴다면 ‘공·인·문(恭仁文)’ 세 글자는 모두 중첩(重疊)이 됩니다. 예조(禮曹)의 《상시등록(上諡謄錄)》을 상고해 보니, 거기에 ‘「정종 대왕(定宗大王)은 전에 온인 공용 순효(溫仁恭勇順孝)라고 일컬었었는데 지금 황제(皇帝)가 공정(恭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공(恭) 자는 아울러 사용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공용(恭勇)’이란 두 글자는 제거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예조의 계사(啓辭)이니, 이로써 본다면 인문 공예(人文恭睿)도 또한 반드시 ‘인(仁)’자, ‘공(恭)’자의 중첩으로써 쓰지 않은 것이요, 당초에 빠뜨려서 기재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지문 가운데 ‘후덕(厚德)’이란 글자는 어첩에 기재된 창덕 소열(彰德昭烈)과 더불어 ‘덕(德)’자의 중첩이 있으며,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지문 가운데 ‘숙신 명혜(淑愼明惠)’란 네 글자는 어첩에 기재된 선소 의숙(宣昭懿淑)과 더불어 또한 ‘숙(淑)자의 중첩이 있으니, 어첩에 추가 기재하는 것은 매우 미안할 듯합니다. 소혜 왕후(昭惠王后)의 휘호에 이르러서는 ‘인수(仁粹)’란 두 글자가 어첩에 기재된 휘숙 명의(徽肅明懿)와 더불어 중첩됨이 없으며, 정현 왕후(貞顯王后)의 존호(尊號)는 연산조(燕山朝)에서 ‘자순 화혜(慈順和惠)’란 네 글자를 가상(加上)했는데 어첩에 기재된 소의 흠숙(昭懿欽淑)과 더불어 또 중첩됨이 없으니, 이는 마땅히 어첩에 추가 기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때에 ‘첩(疊)’자로써 쓰지 않은 것이 만약 특교(特敎)에서 나왔거나 혹은 대신(大臣)의 헌의(獻議)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마땅히 전주(前註) 가운데에 현주해야 할 것이요, 만약 다만 예조의 계품(啓稟)으로 인하여 한 것이라면 준수할 필요가 없으니, ‘첩’자에 구애하지 말고 모두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12월 17일 무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윤순(尹淳)이 임금과 면대(面對)하여 문형(文衡)을 사임(辭任)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이 직책을 해임하지 않는다면 결단코 보전하지 못할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송인명(宋寅明)이 문형을 얻고자 하였으나 심수현(沈壽賢)의 저지한 바 되었는데 얼마 가지 아니하여 남태제(南泰齊)가 심수현을 탄핵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송인명이 사주(使嗾)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또 윤순이 송인명과 더불어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윤순이 반드시 문형을 사면(辭免)하고자 하였다.

 

포도청(捕盜廳)에 판결이 지체된 죄수가 많으므로, 소석(疏釋)하고자 하여 승지(承旨)로 하여금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계문(啓聞)하도록 명하였다.

 

12월 18일 기미

윤혜교(尹惠敎)를 대사헌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응교로, 오원(吳瑗)을 부응교로, 임정(任珽)을 교리로, 남태량(南泰良)을 부수찬으로, 윤화정(尹和鼎)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한범석(韓範錫)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0일 신유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비로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판(唐板)인 《여사서(女四書)》는 《내훈(內訓)》과 다름이 없다. 옛날 성왕(聖王)의 정치는 반드시 가문(家門)을 바로잡는 일로써 근본으로 삼았으니, 규문(閨門)의 법은 곧 왕화(王化)의 근원이 된다. 이 서적을 만약 간행(刊行)하여 반포(頒布)한다면 반드시 규범(閨範)에 도움이 있을 것이나, 다만 언문(諺文)으로 해석한 후에야 쉽게 이해(理解)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교서관(校書館)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으며, 제조(提調) 이덕수(李德壽)로 하여금 언문으로 해석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 경차관(全羅道敬差官) 정형복(鄭亨復)이 재차 상소하여 말하기를,
"전라좌도에 진전(陳田)이 많으니, 청컨대 전번의 상소에 의거하여 재결(災結)을 더 지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大臣)에게 하교하겠다."
하였다.

 

12월 21일 임술

미시(未時)로부터 큰 안개가 사방을 가려 지척(咫尺)을 분변할 수 없었는데 해가 저물기에 미쳐 더욱 심했으니, 사람들이 서로 부르면서 소리를 따라 길을 가게 되었다.

 

전라도의 몰전(沒田)과 진전(陳田)을 합한 2천 7백여 결을 견감(蠲減)하라고 명하였으니, 전(前) 감사(監司) 조현명 및 경차관(敬差官) 정형복(鄭亨復)의 말을 따른 것이다.

 

신만(申晩)을 이조 좌랑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교리로, 이철보(李喆輔)를 부수찬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정언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2일 계해

도승지 이춘제(李春躋) 등이 겨울에 안개가 낀 일로 인하여 장계를 올리고 수성(修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응교(應敎) 오원(吳瑗) 등이 또한 차자(箚子)를 올려 겨울에 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끼며 무지개가 나타나고 천둥이 치는 재변을 말하여 대략 진계(陳戒)를 올리고 ‘실(實)’이란 한 글자로써 마음을 바루고 정사(政事)를 확정하는 근본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12월 23일 갑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했으니, 재변을 만나 공구(恐懼)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겨울 기후가 따스하고 안개가 끼는 일로써 차자(箚子)을 올려 사면(辭免)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조 참판 조현명(趙顯命)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 바른말 하는 자에게 죄를 준 일은 있으나, 바른말 하는 자에게 상(賞)을 내린 일은 전혀 없습니다. 저번에 이제(李濟)의 상소는 명소(名疏)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특히 소원(疏遠)한 이유로써 위에서는 발탁하는 은전이 없었고 아래에서는 조용(調用)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수해(李壽海) 같은 자는 한 대신(大臣)을 논핵하여 외방에 보직(補職)되었고, 남태제(南泰齊)에 이르러서는 감히 요로(要路)에 있는 대신을 논핵했으니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더구나 심수현(沈壽賢)은 노병(老病)이 진실로 그의 말과 같으니, 마치 봉황(鳳凰)이 아침 해에 우는 것처럼 직언(直言)하는 선비라고 할 수가 있는데도 멀리 해도(海島)에 내쳤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고, 특별히 이수해와 남태제를 내직(內職)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이제를 조용(調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인품(人品)이 그 말과 같지 못하다."
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송진명(宋眞明)이 나아가 말하기를,
"충청 감사는 솔권(率眷)614)  을 허락하지 않고 1년을 한정하였으므로, 자주 체차(遞差)하는 것이 폐단이 되어 있습니다.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와 묘당(廟堂)의 복주(覆奏)로 인하여 2년으로 한정했으나, 감사(監司)가 매양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창설(創設)되는 것을 혐의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각별히 선정(選定)하여 차송하되 그로 하여금 솔권하도록 하고 임기를 2년으로 한정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금위영(禁衛營) 군병을 남별영(南別營)에서 조련하는 것을 지금부터 남벌원(南伐院)으로 옮겨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남별영은 종묘(宗廟)의 대안(對案)이 되어 포성(砲聲)이 서로 응하는 때문이었으니,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의 말을 따른 것이다.

 

헌납(獻納)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지평(持平) 이현량(李顯良)은 외읍(外邑)으로부터 옮겨 제수된 지 이미 3개월이 찼고, 또 응피(應避)할 혐의가 있으므로 곧 올라와 자처(自處)함이 마땅한데도 아무런 동정(動靜)이 없으니, 이현량은 체차함이 마땅합니다. 충청 감사 이수항(李壽沆)은 전최(殿最)615)  를 정함에 있어 제목(題目)이 누락되었으면 깨달은 후에 장소(章疏)를 올려 인책(引責)함이 옳을 것인데도 뒤좇아 써서 치계(馳啓)하여 거조가 전도(顚倒)되었으니, 이수항은 엄중히 추고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김약로가 또 말하기를,
"이수해(李壽海) 등을 이미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으니, 윤득징(尹得徵)·김종태(金宗台)·홍계유(洪啓裕) 등 또한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하였고, 송인명(宋寅明)이 "이대원 또한 오래도록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득징 등 3인은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으나, 이대원은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은 때문이었다.

 

12월 24일 을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5일 병인

사간원 【헌납(獻納) 김약로(金若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한성부(漢城府) 장관(長官)은 지위와 인명이 자별(自別)한데, 판윤(判尹) 박내정(朴乃貞)은 인망이 가볍고 이력(履歷)이 얕으며 늙고 정사에 게을러서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있으니, 박내정은 체차함이 마땅합니다.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는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데, 좌승지(左承旨) 이봉익(李鳳翼)은 병이 깊고 노쇠(老衰)하여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니, 이봉익은 체차시켜야 합니다.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정소(李廷熽)는 정공(正供) 이외에 함부로 거둬들이고 정령(政令)이 자질구레하며 여색(女色)에 미혹되어 거조가 해괴하니, 이정소는 마땅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명천 부사(明川府使) 김석기(金錫基)는 인품이 용렬하여 전혀 사리(事理)를 알지 못하고, 안협 현감(安峽縣監) 박필훈(朴弼勛)은 노망(老妄)하고 흐리멍덩하여 정사가 문란하며, 진잠 현감(鎭岑縣監) 이필범(李必範)은 인망과 문벌이 보잘것없는데도 갑자기 마구 제수되었으니, 김석기·박필훈·이필범은 마땅히 파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정관정요》를 살펴보건대 명(明)나라 헌종(憲宗)이 서문(序文)을 지어 그 머리에 기재했으니, 나는 후서(後序)를 지어 흥감(興感)의 뜻을 표현하려고 한다."
하고, 이내 친히 서문을 지어 교서관(校書館)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올리도록 명하였다.

 

여러 승지(承旨)로 하여금 문서(文書)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헌납(獻納) 김약로(金若魯)를 불러들여 그 공직(公直)함을 포장(褒奬)하였으며, 인하여 개유(開諭)하기를,
"당초부터 포상(褒賞)하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이르기를, ‘내가 친근한 자에게 상(賞)을 준다.’고 하겠으므로 그 상을 머물러 두어 소원(疏遠)한 자의 직언함을 기다린다."
하였다. 대개 이봉익(李鳳翼)과 이정소(李廷熽)는 모두 김약로와 당색(黨色)이 같으므로 임금이 그 공직(公直)함을 포장하였다. 그러나 수령의 탐학(貪虐)함과 승지의 노혼(老昏)함이 이보다 심한 자가 있는데도 김약로가 유독 이 두 사람을 논핵하여 임금의 포장을 입었으니, 이를 비웃는 이가 많았다.

 

고(故) 병사 김수(金洙)의 사촌 서제[同堂庶弟]인 현감(縣監) 김협(金浹)이 김수의 첩 홍도(紅桃)를 간음하였는데, 일이 발각되매 대시(待時)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였다.

 

사간(司諫) 조한위(趙漢緯)가 재변(災變)으로 인하여 현·도(縣道)를 거쳐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오늘날 백성의 곤궁함과 언로(言路)의 막힘과 기강(紀綱)이 무너진 것과 저축의 탕갈된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나, 사기(士氣)가 날로 쇠퇴(衰頹)해짐은 실로 망국(亡國)의 조짐이 되고 있는데, 전하께서 또한 일찍이 그 연유를 알고 계십니까? 신은 탕평(蕩平)의 빌미라고 생각합니다. 시상(時象)을 따르고 세속(世俗)에 혼동하여 자신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은 진실로 말세(末世)의 공통된 심정(心情)이니, 피차(彼此)의 사이에 서로 어울리고 당파의 같고 다른 처지를 관망(觀望)하여 오직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고 시비(是非)의 분별도 없이 온화한 얼굴로 말하고 웃으며 관록(官祿)만을 보존함으로써 방편(方便)의 법문(法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서 점차 물들고 풍습을 이루어 날로 자라나 그치지 않으니, 극단의 폐단을 말한다면 장우(張禹)616)  와 풍도(馮道)617)  가 이것입니다. 19일 하교(下敎)618)   같은 것은 관계가 지극히 중대한데, 전하께서 이미 단서를 제기하고도 오히려 분명히 말하고 드러나게 지적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환하게 알지 못하도록 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시비(是非)인데 애매한 사이에 둘 수 있겠습니까? 아! 나라의 소중함이 오직 명기(名器)이며 양전(兩銓)의 장관(長官)은 책임이 어떠한데, 의망(擬望)하는 사람을 모두 10인으로 갖추었고, 전조(銓曹)의 참판(參判)·참의(參議)와 옥당(玉堂)의 장석(長席)도 일찍이 의망하는 데에 참여하여 또한 모두 10인을 갖추었으며, 심지어 한 번 정사(政事)에 전랑(銓郞) 5인을 의망한 데 있어서는 극단(極端)에 달했으니, 이는 모두 탕평의 연유입니다. 당초에 그 인품의 우열(優劣)은 논하지 않고 반드시 양편의 대등(對等)을 유지하고자 하여 한 번 의망하고 두 번 의망함으로써 이토록 범람한 수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윤급(尹汲) 같은 자는 또 대등한 가운데에서 주객(主客)을 분별하여 반드시 전랑의 극선(極選)으로써 사유물을 삼고자 하였으니, 더욱 분통한 일입니다. 신해년619)  ·임자년620)  의 연속된 흉년이 있은 후에 그 여액(餘厄)이 아직도 소생(蘇生)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硼翼)의 생일 연회에 극도로 사치하여 주육(酒肉)의 풍성함과 풍악의 성대함을 도성(都城)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하여 인산 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고 하니, 장신(將臣)이 근신(謹愼)을 생각하지 않음은 진실로 해괴합니다. 인하여 또 조관(朝官)을 두루 초청하여 초헌(軺軒)이 문(門)을 메웠고 밤을 지새워 연회를 베풀었으며 기녀(妓女)들의 가무(歌舞)가 현란(眩亂)했으니, 보고 듣는 자들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런 방탕한 습관을 결단코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前) 교리(校理) 신치근(申致謹)은 사천(史薦)의 균등하지 못함을 목격하고 드디어 불평한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처벌할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대계(臺啓)가 연달아 일어나 억륵(抑勒)하여 죄를 만들었고 파직한 지 여러 달이 되었으나 아직도 서용(敍用)하지 않았으니, 신은 즉시 조용(調用)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근일에 목민(牧民)의 책임자를 전혀 선택하여 차출하지 않습니다. 지난번 아산 현감(牙山縣監)의 자리에는 이엽(李燁)을 수망(首望)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중히 선택하는 뜻을 잃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해당 전관(銓官)은 마땅히 규경(規警)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또 듣건대, ‘대신(大臣)이 이엽의 낙점을 받지 못한 문제로 연석(筵席)에서 우러러 질문하였는데, 성교(聖敎)에 착인(錯認)했다고 대답하였다.’했으니, 신의 생각에는 군신(君臣)이 모두 실수했다고 여깁니다. 대신의 도리는 신하로서 임금을 섬김에 있어 진실로 준재(俊才)를 천거하여 임금이 채용하지 않는다면, 변통해서 다시 나오게 하더라도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늙은 의관(醫官)의 수령에 제수되지 못한 것으로써 심지어는 성의(聖意)의 있는 바를 질문했으니, 전에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성교에 이른바 착인했다는 말이 만약 대답하기 어려워서 우선 임시 변통에서 나온 말이라면, 전하께서도 대신을 대우함이 또한 성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시상(時象)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여러 언사(彦士)들을 모아야 되는데, 그대는 그 많은 것을 걱정하나 나는 오히려 인재가 적은 것을 염려한다. 신치근이 한 일은 잘못된 것인데, 어찌하여 부추기고 억제하는가? 대신이 진달한 바는 원래 깊은 뜻이 없으며 나의 하교도 또한 임시 변통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요(寂寥)한 가운데에 면계(勉戒)가 절실하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12월 26일 정묘

박문수(朴文秀)를 대사간으로, 이제(李濟)를 승지로, 정익하(鄭益河)·조명리(趙明履)를 지평으로, 김상익(金尙翼)을 부교리로, 김정윤(金廷潤)을 장령으로 삼았다.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에게 특별히 초모(貂帽)를 하사하고 개유(開諭)하기를,
"이 판부사(李判府事)621)  는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빈객(賓客)으로서 보도(輔導)하였고 좌상(左相)에 제배(除拜)된 후에도 이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아들이 어버이의 교훈을 받아 그 임금을 바른 데로 인도하였고 일에 따라 결흠(缺欠)을 보필(輔弼)하였다. 간혹 그 말이 중도(中道)에 지나쳐 마음에 겸연(歉然)한 적이 있었으나, 뒤에 생각하면 말은 비록 중도에 지나쳤지마는 성실함으로써 임금을 사랑했으므로 강석(講席)이 적막할 때면 반드시 생각이 났다. 매양 정령(政令)이 지나친 곳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종성의 뜻에는 어떠할까 하였는데, 그후 입시(入侍)할 때에 과연 그 결흠을 보충하였다. 이제 초모(貂帽)를 내리니, 승정원에서 불러들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종성이 옹주(翁主)를 위하여 치산(治産)한 것을 너무 지나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하자, 임금이 노여워하여 조회(朝會)를 파한 일이 있었는데, 조금 후에 하유하기를,
"당 태종(唐太宗)은 ‘모름지기 이 전사옹(田舍翁)을 죽이겠다.’622)  는 말이 있었으나, 나는 이런 뜻이 없다."
하였다. 대개 이종성은 기민(機敏)하고 담론을 잘하여 연석(筵席)에 올라 일을 논할 적에는 임금의 뜻에 맞은 것이 많았고, 또 양궁(兩宮)의 화협(和協)에 힘쓰게 하였으며 궁방(宮房)의 폐단을 말하였다. 임금도 또한 권애(眷愛)하여 시문(詩文)을 내려 은총을 베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특이(特異)한 포상(褒賞)을 내렸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과 참판 신방(申昉)이 사간(司諫) 조한위(趙漢緯)가 상소하여 전랑(銓郞) 5인을 한 번에 의망한 것을 논핵한 일로써 모두 상소하여 인책(引責)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27일 무진

밤에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로 지나갔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조한위(趙漢緯)가 상소하여 이엽(李燁)을 논핵한 일로 인하여 인혐(引嫌)하니, 비답하기를,
"이목(耳目)의 직책을 맡은 대간(臺諫)이 비록 양해하지 않더라도 군신(君臣)이 마땅히 스스로 면려(勉勵)해야할 것인데,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이 초모(貂帽)를 하사한 데 대하여 사례(謝禮)했으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듣건대, 임금이 간쟁(諫諍)하는 말을 따르는 것이 상책(上策)이 되고 간하는 자를 상(賞)주는 것이 차책(次策)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외면(外面)을 수식(修飾)하는 것이 아니요, 장차 실용(實用)이 되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은 칼을 끌어당겨 매달린 종고(鍾皷)를 끊기도 했으며, 혹은 밥상을 치우고 인장(印章)을 없애기도 했으니623)  , 이는 초 장왕(楚莊王)과 한 고조(漢高祖)가 한 세대(世代)의 치평(治平)을 이룩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천금(千金)의 상을 주고 만종(萬鍾)의 녹봉(祿俸)을 주더라도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신이 연석(筵席)에서 올린 차자(箚子)가 거의 천만언(千萬言)이 되는데, 성상께서 사심(私心)을 이기는 공부가 날로 새롭지 못하고 시사(時事)의 위태로움이 날로 심한 데에 이르렀으니, 변변치 못한 충성을 원하는 성심은 쓸데없는 말이 되어 도움이 없는 데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한휴(韓休)624)  ·이강(李綱)625)  에 견준 포장(褒奬)과 어필(御筆) 신장(宸章)의 하사는 옛날에도 부족함이 아니었는데, 다만 그 몸에 상(賞)만 내리고 그 말은 채용되지 않으니, 이는 신이 은혜를 받고 부끄러움을 품어 영광을 죄책으로 삼는 바입니다. 아! 짙은 안개가 끼어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재변은 결단코 심상한 재앙이 아니니, 십분(十分)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통렬히 회개(悔改)함으로서 혁연(赫然)히 분발하여 나라의 경사(慶事)를 맞이하도록 도모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느릿한 걸음으로 산만하게 대처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둥과 같은 용맹을 떨치고 경륜(經綸)의 방책을 넓혀 백성을 물과 불에서 건지고 나라의 운명을 반석(盤石)에 두어 후세로 하여금 오늘날을 우러러보는 것이 오늘날에서 정관(貞觀)626)   시대를 보듯이 한다면, 신이 비록 용렬하더라도 또한 미성(微誠)을 다하여 아름다운 왕명(王命)을 선양(宣揚)할 것이니, 천추(千秋)의 후세에 거의 위징(魏徵)의 죄인됨을 모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지평(持平) 조명리(趙明履)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에 정계(停啓)한 일로써 김광세(金光世)·조한위(趙漢緯)로부터 심각한 논핵을 입었습니다. 대개 지난해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이봉상(李鳳祥)의 아버지는 이미 승복(承服)하지 않았으니, 이제 이봉상에게는 당연히 시행할 법을 쓰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며, 인하여 형률을 상고하게 하였는데, 《대명률(大明律)》 죄인거포조(罪人拒捕條)에 유(流) 3천 리란 말이 있었으므로, 성교에 이르기를, ‘도배(島配) 또한 유배(流配)와 같으니, 그대로 두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육지(陸地)로 나오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이 지난번에 헌직(憲職)에 있을 때 의계(議啓)에 인용한 율조(律條)를 상고해 보니, ‘무릇 죄를 범하고 도망치다가 거포(拒捕)한 자는 각기 본죄(本罪)에 2등을 첨가한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거포는 체포하려는 자에게 거역(拒逆)함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해(註解)의 말단에 이르기를, ‘만약 죄를 범하고 도망쳤으나 일찍이 거포하지 않은 자는 가등(加等)의 한정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봉상은 일찍이 거포한 일이 없으니 가등(加等)의 형률은 해당되지 않을 듯하며, 또 이봉상은 섬으로 유배(流配)된 지 거의 10년이 되었으니, 비록 옮기더라도 옛 규례에 어긋남이 없을 듯하므로, 드디어 그 장계를 정지한 것입니다. 신이 비록 용렬하나 어찌 이봉상에게 사심(私心)을 두어 법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그 혐의한 바가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된다."
하였다.

 

12월 28일 기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9일 경오

소대를 행하였다.

 

12월 30일 신미

유만중(柳萬重)을 승지(承旨)로, 김석일(金錫一)을 지평(持平)으로, 신만(申晩)을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유건기(兪健基)가 말하기를,
"흉년이 연속된 나머지 국고(國庫)가 탕갈되었으므로 호조(戶曹)의 경용(經用)을 신해년627)  부터 강품(降品)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금년에는 마땅히 승품(陞品)해야 하는데도 성상께서 아직 그대로 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강품한 후로부터 경용이 이를 힘입어 많이 저축이 되었는데, 이제 만약 전례에 의하여 다시 1, 2년만 강품한다면 경용에 유익함이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병(軍兵)에 지급하는 것은 강품할 수 없으나, 그 이외는 강품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승품하는 일은 우선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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