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임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하례를 받았다.
임금이 유시(諭示)를 내려서 8도와 양도(兩都)에 농사를 권장하였다.
헌부 【지평 김석일(金錫一)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원단(元旦)의 아침에 경사스러움을 하례드리는 것은 의례 가운데 큰 것인데, 한성 판관(漢城判官) 이세담(李世聃)이 술에 취하여 고함을 지르는 등 행동거지가 거칠고 난폭하였으니, 마땅히 도태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졸(卒)하였다. 최규서는 어려서부터 한때의 명망이 있었으며, 지위가 재상[卿宰]에까지 이르렀으나 성묘(省墓)한다고 핑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숙종(肅宗)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있으면서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경종조[景廟朝]에 이르러서 임인년의 옥사(獄事)001) 가 일어나자, 곧 한 소장을 올렸는데, ‘40년 동안 쌓여 오던 화(禍)가 비로소 오늘날에 와서 터졌다.’라는 말이 있었으니, 그때의 사람들이 앙화를 일으킬 마음이라고 말하였다. 무신년의 역변(逆變)002) 이 일어남에 미쳐 도성에 달려와서 적의 동정(動靜)을 고발하여 사건이 평정되자, 훈명(勳名)을 힘써 사양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한 가닥 절의로서 나라를 붙들었다.[一絲扶鼎]’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서 주어 그를 포장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서울의 사제(私第)에서 졸하였는데, 임금이 부음(訃音)을 듣고 애도하여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청렴하고 근신(謹愼)하는 지조와 기미(機微)를 먼저 알아보는 명석함으로써 몸을 깨끗이 하여 고향에 은거하였으며, 신축년003) 임인년의 분경(奔競)하던 때를 당하여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나쁜 것에 더럽히지 않아서 그 마음이 맑고 깨끗하였다. 하물며 종사와 나라를 깊이 사랑하여 먼저 적당(賊黨)의 간담을 꺾어버려 세상에 다시 없는 큰 공을 세웠는데도 힘써 훈명을 사양하여 항구 불변의 우아한 지조를 이룩하였으니,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고 나아가는 것이 진실로 처신(處身)하는 의리에 마땅하였다. 아! 원로(元老)가 서거(逝去)하였으니,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상장(喪葬)의 여러 가지 필요한 물품과 3년 동안의 녹봉(祿俸)을 규례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고 사철에 군색함을 돌보아 주어 필요한 물자를 생시(生時)의 예에 의하여 수송하도록 하라. 또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상소(喪所)에서 왕지(王旨)를 선포하게 하였다.
1월 2일 계유
헌부 【지평 김석일(金錫一)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3일 갑술
임금이 〈중국에서〉 돌아온 진주사(陳奏使) 세 사신을 인견(引見)하였다. 정사(正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저들이 말하기를, ‘본국(本國)으로 하여금 율(律)을 의논하게 한 것은 곧 그대 나라를 대우하려는 도리이다. 일찍이 별사(別使)를 파견하지 말도록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왔는가?’라고 하였으니, 율을 의논한 뒤에 다만 재자관(䝴咨官)만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부사(副使) 박문수(朴文秀)는 말하기를,
"청나라 황제의 사람됨은 성현(聖賢)으로 자처(自處)하면서도 가혹한 정치를 많이 행하여 강희 황제(康熙皇帝)004) 때의 옛 신하들 가운데 죽은 자가 수백 인입니다. 오성 어사(五星御史)를 두어 비밀히 조정의 신하들을 사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으며, 돈을 모으는 데에 골몰하여 원성(怨聲)이 길거리에 가득 찼습니다. 나이가 60세에 가까운데도 태자(太子)를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장차 우리 나라의 근심이 될 것인데, 지금 서로(西路)는 하나의 풍류(風流)를 즐기는 난장판을 이루어 방어의 도리가 허술하여 믿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즐겁게 놀아 보지 않았는가?"
하자,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권적(權𥛚)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감히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만리(萬里)의 사신 행역(行役)에 옛 습관을 버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가상하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고(故) 병사(兵使) 정봉수(鄭鳳壽)와 의병장(義兵將) 이입(李立)이 정묘년005) 의 호란(胡亂)을 당하여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서 장사준(張士俊)을 목베고, 수천 명의 잔약한 병사로써 수만 명의 오랑캐를 공격하여 죽였으므로, 황해도와 평안도의 양서(兩西) 지방이 그에게 힘입어서 편안하였습니다. 명(明)나라에서도 또한 그 공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명하여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그 은패(銀牌)와 표문(票文)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성상의 예람(睿覽)에 대비하고자 하여 삼가 이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이어서 그것을 바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은패와 인문(印文)을 보니, 명나라 도독부(都督府)에서 찍은 인장(印章)이다. 생각지도 않게 오늘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게 되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고, 남이흥(南以興)의 충민사(忠愍祠)에도 또한 일체로 사제(賜祭)하도록 하라."
하고, 그 후손들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전 참판 조정만(趙正萬)이 나이가 80세였으므로 전례에 따라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승진시키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품계를 뛰어서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킬 것을 굳이 청하니, 임금이 이를 특별히 허락하였다.
1월 4일 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그때 부상(富商)들이 인삼을 왜인(倭人)들에게 몰래 팔았기 때문에 인삼 값이 크게 뛰어올라서 인삼 1냥이 쌀 2석 10두의 값에 해당하였는데, 공인(貢人)들이 상언하여 공물(貢物)의 값을 올려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들이 이것을 진달하였는데, 공조 참판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전부터 동래부(東萊府)에서 오로지 삼세(蔘稅)를 관장하기 때문에 잠상(潛商)의 금지를 지극히 엄하게 하였으나, 요즈음 호조(戶曹)에서 세를 거둔 다음부터 동래부에서 이권(利權)을 잃어버리자 잠상의 금지를 내버려 두어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삼세를 전의 예대로 동래부에 주고 잠상들을 전관(專管)하게 한다면 금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이어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공물의 값을 적당히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영돈녕 부사 정호(鄭澔)·찬성 정제두(鄭齊斗)·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대개 세수(歲首)에 노인들을 우대하는 특별한 은전이었다. 행 사직(行司直)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안흥(安興)에서 방수(防水)하는 역사(役事)는 신이 하읍(下邑)에 있을 때에 가서 살펴보고 비국(備局)에 보고하였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이것을 정파(停罷)하자는 의논이 있으니, 한번 품정(稟定)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일이 되어가는 형편이 어떠한가?"
하자, 송진명이 말하기를,
"이형좌(李衡佐)와 박문수(朴文秀)는 모두 완성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신이 역사하는 곳을 두루 살펴보건대, 인력(人力)을 많이 쓴다면 방수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삼남(三南) 지방의 조운(漕運)하는 길이 통하느냐 막히느냐 하는 문제에 관계되며, 공역(功役)이 거의 절반이나 이루어졌는데도 까닭 없이 갑자기 중지한다면 조정의 명령이 전도(顚倒)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시작된 역사를 어찌 의논에 흔들려서 그만두겠는가? 이선(李譔)이 그 역사를 준공한다면 상(賞)을 주고, 일을 실패한다면 죄를 줄 뿐이니, 경이 그 일을 맡아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 【지평 김석일(金錫一)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부총관(副摠管) 박황(朴璜)은 명성과 인망이 본래 없어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떠들썩합니다. 무신(武臣)이 상소하여 사직하는 것은 더욱 지극히 외람되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 참판 조정만(趙正萬)에게 품계(品階)를 뛰어넘어 가자(加資)한 일은 전에도 들어 보지 못한 일이며 또 후일의 폐단에도 관계되니, 내리신 명령을 정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박황만 체차(遞差)하도록 명하고 조정만의 일은 따르지 않았다.
1월 5일 병자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임정(任珽)이 말하기를,
"고(故)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는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구신(舊臣)으로서 또 종사(宗社)에 큰 공이 있었습니다. 지난해에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의 상사(喪事)에는 성상께서 금교(禁橋)에서 곡림(哭臨)하는 거조가 있었으니, 지금 이번에 봉조하의 상사에도 마땅히 이와 다를 바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대비전[東朝]을 받들면서 이번 신정(新正)을 당하였다. 어제와 오늘의 길흉(吉凶)이 판이하게 다르니, 마음이 편안치 못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예관(禮官)의 품정(稟定)을 정지시켰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유건기(兪健基)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듣건대, 봉조하 최규서가 은퇴(隱退)한 뒤에 글을 친구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시절이 조용하면 채군모(蔡君謨)006) 가 되고 세월이 어지러우면 강만리(江萬里)007) 가 되겠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가 이미 두 가지 일을 넉넉히 해낼 수 있는 자입니다. 그 이름과 절개를 온전히 지켜서 당대의 일인자가 될 수가 있었으니, 마지막으로 은졸지전(隱卒之典)008) 을 베풀어서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보임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이 차자(箚子)를 올려 늙고 병든 몸으로 서추(西樞)009) 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정의 모의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아뢰니, 답하기를,
"차대(次對)에 입시(入侍)하는 것은 옛 관례이다. 옛날의 아름다운 제도를 경은 모름지기 허물지 말라."
하였다.
1월 6일 정축
윤동형(尹東衡)을 대사간으로, 황정(黃晸)을 충청도 관찰사로, 이현보(李玄輔)를 강원도 관찰사로, 서명형(徐命珩)을 헌납(獻納)으로, 홍중일(洪重一)을 지평(持平)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수찬(修撰)으로, 김약로(金若魯)를 부수찬으로, 허인(許繗)을 함경 북도 병사로, 윤광신(尹光莘)을 전라도 병사로, 정익하(鄭益河)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1월 7일 무인
임금이 태묘(太廟)와 영녕전(永寧殿)에 전알(展謁)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내정(朴乃貞)의 사건은 정계(停啓)하였다.
그때 장릉(長陵)의 수도(水道)를 막는 역사가 오래 되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으므로, 윤순(尹淳)의 의논에 따라서 경기 감사에게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책임지고 역사를 완성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봉심 대신(奉審大臣)을 인견하고 이어서 각 도의 차사원을 불러 각 고을의 일을 물어 보았다. 이어 소대(召對)를 행하고 난 뒤에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론(講論)하였는데, ‘백성들이 편안하고 즐거운 것은 곧 갑옷과 병기(兵器)이다.’라는 글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전에 무기를 수선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으로써 두 수령을 추고(推考)하게 하였는데, 서민들이 편안하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성벽처럼 굳게 뭉치면 비록 갑병(甲兵)이 없더라도 그 누가 우리를 업신여기겠는가? 수령들의 추고를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0일 신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이 구임(久任)이 마땅함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효종조[孝廟朝]의 대신은 정태화(鄭泰和) 한 사람뿐이었고,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과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命)은 그 관직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을 얻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는 찬미를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가 문득 돌아가면서 제수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사람을 고르지 아니한 것은 바로 나의 허물이니, 마땅히 깊이 반성하겠다."
하였다. 공조 참판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구임을 시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신중하게 관직을 제수해야 합니다."
하고, 이종성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은 명망이 불가한 점이 없었으나 끝내 호조 판서를 의망(擬望)하지 않았었으니, 선대 조정에서 사람을 어떻게 썼는지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지금의 전조(銓曹)는 미봉(彌縫)해 나갈 방책이 없으니, 구임시키기가 어찌 어렵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어찌 이를 담당할 뜻이 없는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조현명은 청요(淸要)의 관직을 힘써 사양하였으니, 심히 의의(意義)가 없습니다. 듣건대, 그가 사사로이 박문수를 문책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사간원의 관직을 맡는다면 나도 또한 이것을 피하지 아니할 것이다.’라 하였다고 하니, 조현명에게 마땅히 언책(言責)의 직임을 제수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 말은 사실(私室)에서 주고받은 것인데, 옛친구를 협박하는 것입니다."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말이 이미 입 밖으로 나왔는데, 도리어 스스로 변명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였는데, 대신이 연석(筵席)의 체모가 엄숙하지 못한다 하여 아울러 추고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관서(關西) 지방의 일로(一路)에는 관부(官府)의 사용(私用)으로 징세하고 수렴(收斂)라는 것이 한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그 고을의 규칙에 따라 조금 이정(釐正)을 더하여 결호(決戶)에 일정한 법규를 정하고, 부역(賦役)에 있어서 괴롭고 수월한 정도를 고르게 하였으며, 여러 창고(倉庫)에는 공용과 사용을 구분하여 절목(節目)을 상세히 정하고 계문하여 법식을 정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심려(心慮)를 다하여 열 달 동안에 실마리가 잡혔고, 이것을 시행한 지 수년이 되었으나 조금도 그 피해가 없었는데, 이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비방하는 자가 많아서 감히 법식을 어김이 있으니, 청컨대, 대동법(大同法)의 사목(事目)에 의하여 논죄하도록 하소서."
하자,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인하여 어사(御史)의 봉서(封書) 중에 이것을 첨서(添書)하도록 명하고, 또 양서(兩西) 지방에 을사년010) 이후 세운 비(碑)와 생사당(生祠堂)을 철거하라고 하였으니, 박문수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또 대신들에게 명하여 어사를 뽑아서 아뢰게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옛날에 효종조에 있어서 대신(臺臣)이 수령을 논죄하면 버려 두고 가부간에 즉시 어사를 파견하여 염찰하게 하였는데, 만약 사실과 다르면 그것을 말한 자를 도리어 죄주었었다. 고(故) 상신(相臣) 이상진(李尙眞)이 휴가를 받고 전주(全州)에 갔을 때에도 또한 봉서를 내려 주어 수령들의 잘잘못과 민간의 질고(疾苦)를 살펴보도록 하였으니,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하고, 이어서 전관(銓官)에게 유시하기를,
"어제 저녁에 당 태종(唐太宗)이 이정(李靖)을 보내어 기전(畿甸)을 안찰(按察)한 고사를 강(講)하였는데, 정관(貞觀)011) 의 정치가 진실로 개안(開眼)한 것이다. 근래에 도신(道臣)들을 내가 구임시키고자 한다. 이수항(李壽恒)이 바야흐로 과한(瓜限)이 차서 교체하게 되었는데 기년(期年) 동안에 어찌 능히 그 재주를 펼 수 있겠는가?"
하고, 이수항에게 그대로 충청도 감사에 유임(留任)하도록 명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세 전관(銓官)이 지금 모두 소환(召還)되었으니, 이태징(李台徵)도 또한 마땅히 내직(內職)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헌납 서명형(徐命珩)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아뢰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김중희(金重熙)는 이미 유시하는 글을 받고도 곧 ‘원수의 땅이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방자하게 장문(狀聞)하였으니, 감률(勘律)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근래에 변장(邊將)들이 취임하기를 싫어하여 기피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윤광신(尹光莘)은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제배(除拜)되었는데도 여러달 동안 미루다가 곤수(閫帥)의 직임으로 옮겼으니, 엄하게 징벌을 가함이 마땅합니다. 청컨대 그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윤광신을 파직시킨다면 그 뜻을 적중시키는 것이니, 마땅히 그대로 강계에 잉임(仍任)시켜 그로 하여금 속히 부임하도록 하소서."
하자, 윤허하였다.
신겸재(申兼濟)를 장령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지평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응교(應敎)로, 심성진(沈星鎭)을 부수찬으로, 정언섭(鄭彦燮)을 승지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공조 판서 이삼(李森)이 졸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애도하면서 유지를 내리기를,
"나의 좋은 장수를 잃었도다. 상례와 부의(賻儀)를 예에 의하여 시행하고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1일 임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고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하였는데,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것을 논한 곳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신문(訊問)하기도 전에 먼저 그에 대한 선입감(先入感)이 있으면 그를 신문하기에 미쳐 죄에 몰아넣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자들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이다. 형옥(刑獄)이란 실로 사람의 목숨에 관계되어 털끝만한 차이에 생사(生死)가 곧 판정되는데, 만약 선입감을 가진다면 어찌 다 공평하고 진실하게 판결하여 원옥(冤獄)과 남형(濫刑)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이 교지를 가지고 형옥을 맡은 신하들에게 반시하라고 명하였다.
1월 12일 계미
숙종[肅廟]의 후궁 영빈 김씨(寧嬪金氏)가 졸하였다. 김씨는 도정(都正) 김창국(金昌國)의 딸로서 궁궐에 뽑혀 들어와 후궁이 되었는데, 숙종의 예대(禮待)가 다른 빈어(嬪御)와는 달랐으므로 임금도 또한 그를 예로써 높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대 왕조의 후궁은 다만 이 한사람만 남았었다. 일찍이 인현 성모(仁顯聖母)와 더불어 기사년012) 의 환란을 만났었다가, 갑술년013) 성모께서 복위(復位)되었을 때에 그도 또한 복작(復爵)되었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 항상 어머니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그 상을 당한 소식을 들으니 슬픈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겠다. 예장(禮葬)은 안빈(安嬪)의 예에 따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가, 이윽고 명령을 바꾸어 명빈(䄙嬪)의 예를 쓰도록 하였다.
1월 13일 갑신
윤순(尹淳)을 공조 판서로, 조현명(趙顯命)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강원도 감사 조최수(趙最壽)가 아뢰기를,
"울릉도(鬱陵島)의 수색 토벌을 금년에 마땅히 해야 하지만 흉년에 폐단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김취로(金取魯) 등이 말하기를,
"지난 정축년014) 에 왜인들이 이 섬을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 엄하게 배척하고 장한상(張漢相)을 보내어 그 섬의 모양을 그려서 왔으며, 3년에 한 번씩 가 보기로 정하였으니, 이를 정지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월 16일 정해
김정윤(金廷潤)을 장령으로, 김석일(金錫一)을 지평으로, 이필구(李必耉)를 전라도 병사로 삼았다.
1월 17일 무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윤양래(尹陽來)를 승문원과 비국(備局)의 양쪽 제조로 임명하기를 청하자, 응교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윤양래의 자질과 명망이 양쪽 직임에 아울러 임명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양래의 재주와 도량이 진실로 비국 당상에는 합당하다. 그러나 괴원(槐院)에는 마땅히 문한(文翰)의 인사를 뽑도록 하라."
하고, 다만 비국 당상에만 차정하라고 명하였다. 김약로가 또 말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은 장임(將任)과 경연관(經筵官)에 아울러 임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조현명이 겸임한 부제학을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김정윤(金廷潤)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조정만(趙正萬)·박황(朴璜)의 사건은 정계(停啓)하였다. 헌납 서명형(徐命珩)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의금부 도사 정득천(鄭得天)은 잡기(雜技)로써 출세를 하였기 때문에 동렬(同列)들이 나란히 서기를 부끄럽게 여기니, 마땅히 도태시켜야 합니다. 삼조(三曹)의 낭관(郞官)은 음직(蔭職)의 청선(淸選)인데, 공조 좌랑 조계(趙階)는 부관(部官)에서 6품으로 승진되어 관방(官方)이 가볍고 설만하니, 마땅히 그를 도태시켜야 합니다. 부산(釜山)은 남방 요새의 중요한 진(鎭)인데, 첨사(僉使) 최형(崔炯)은 노쇠하고 혼미하여 오래도록 맡겨둘 수가 없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최성(崔晟)은 잔열하여 자목관(字牧官)으로 적합하지 아니하니, 개차(改差)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18일 기축
경상도 성주(星州) 사람 하감발(河甘發)의 딸 수양대(首陽臺)가 밤에 그 어미와 함께 자는데 호랑이가 그 어미를 물어 뜯자 어미를 끌어안고 고함을 지르니,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를 쫓아버렸으므로 그 어미의 시체를 잃지 아니하였으며, 경주(慶州) 군관(軍官) 박남구(朴南耉)는 호랑이가 그 어미를 물어 뜯자, 호랑이와 더불어 서로 격투하여 호랑이가 곧 어미를 내버리고 가버렸으므로 어미가 죽음을 모면하였는데, 도신(道臣)이 이것을 계문(啓聞)하니, 정문(旌門)을 세워 포장하게 하였다.
1월 20일 신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형조 판서 장붕익(張鵬翼)이 아뢰기를,
"지난 겨울에 별군직(別軍職) 윤필은(尹弼殷)이 상소하여 전선(戰船)의 제도를 바친 것으로 인하여 신이 왕명을 받들고 이삼(李森)과 더불어 전선과 거북선[龜船]을 개조하였는데, 전선의 2층 위에 장식이 너무 무거워서 바람을 만나면 제어하기가 어렵겠으므로 위층의 방패(防牌)를 별도로 제도를 만들어서 때에 따라 눕혔다 세웠다가 하고, 선두(船頭)에는 곡목(曲木)을 덧붙여서 그 모양이 마치 오리의 목과 같으나 조금 뽀족하여 비록 풍랑을 따라서 나가더라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주 빠르며, 혹시 암석에 부딪히더라도 곡목이 먼저 파손되기 때문에 매우 편리합니다."
하니, 그 제도의 모형을 내전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한 뒤에 비국(備局)에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장령 김정윤(金廷潤)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한세유(韓世愈)·장응규(張應奎) 등의 사건은 정계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제 내시사(內試射)에서 합격하지 못한 자에게 특별히 급제(及第)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는데, 어찌 충신의 후손과 조카라고 하여 함부로 규격(規格) 이외의 은전(恩典)을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한범(李漢範)에게 급제를 내려준 명을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한범은 바로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서 이봉상(李鳳祥)의 조카였다. 헌납 서명형(徐命珩)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명신(趙命臣)·윤용(尹容)을 승지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1월 21일 임진
영빈 이씨(暎嬪李氏)가 원자(元子)015) 를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였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여러 재신과 옥당(玉堂)에서 모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이들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종(三宗)016) 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에 배알(拜謁)할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원자를 보양(保養)하는 절차를 진실로 극진하게 해야 마땅한데, 석복(惜福)의 도리에 더욱 마땅히 뜻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니,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석복의 도리는 검약(儉約)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옛날 경종[景廟]께서 처음 태어났을 때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취하여 아들로 삼았었는데, 지금도 또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고, 여러 대신들이 원자의 호(號)를 빨리 정하여 종묘에 고하고 반사(頒赦)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경들의 청대하기를 요구한 뜻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대비전[東朝]에 이것을 품지(稟旨)하였다."
하였다. 이어서 유시를 내리기를,
"삼종의 혈맥을 지금 부탁할 데가 있으니 즐겁고 기쁜 마음을 어찌 말하랴? 내전(內殿)에서 아들로 취하고 원자의 호를 정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는가? 즉시 이를 거행하여 위로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아래로 8도에 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무릇 원자궁(元子宮)에 종사하는 자들은 궁인(宮人)과 내관(內官)을 물론하고 반드시 근후(謹厚)한 자를 골라서 좌우에 둔다면 자연히 습관과 성격이 잘 이루어지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내전에서 아들로 취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하니, 마땅히 화기가 궁궐의 사이에 넘쳐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신이 여러 번 이러한 말씀을 우러러 권면하였으나, 아직도 그 효과가 없으니, 능히 천지(天地)의 큰 도량에 유감(遺憾)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경이 어떻게 아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진실로 화평스러운 미덕(美德)이 있었으면 이남(二南)017) 의 교화(敎化)가 반드시 이미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미쳤을 터인데,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권면하기를 더하겠다."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당론(黨論)은 실로 망국(亡國)의 기초가 되는데, 지금 국가에서는 단지 한 살 먹은 원량(元良)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 신하들이 만약 당파의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이 어찌 나라를 체념(體念)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이미 탕평(蕩平)을 이루었다.’고 하시나, 능히 민진원·이광좌로 하여금 머리를 맞대고 일은 집행하도록 하지 못하시니, 이것은 가짜 탕평[假蕩平]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종의 혈맥이 지금 다행이 다시 이어졌으니, 원자를 도와주어서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경들이 삼가 협조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원자를 보양(保養)하는 절목은 내전에서 모두 직접 맡아서 관리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원자궁(元子宮)의 공상(供上)은 기사년018) 의 예에 의하되 반사(頒赦)한 뒤에 즉시 진공(進供)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서 백관들의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또 당론(黨論)을 없애고 서로 협조하라는 뜻을 여러 대신들에게 힘써 신칙하였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바야흐로 나라의 큰 경사를 당하여 옛날의 포조(逋租)를 받아들이는 것을 아울러 중지시켜서 민심을 위로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면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기뻐해야 하는데, 백성들과 더불어 같이 즐거워해야 할 때가 바로 금일이다. 여러 도의 군향(軍餉)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즉시 중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무신년019)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 의병(義兵)의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하였으며, 그 자제들도 아울러 충익위(忠翊衛)에 충당시키고 곧 1필의 군역(軍役)에 응하게 하였는데, 마땅히 빨리 이를 조사하고 바로잡아서 군포(軍布)를 거두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기고, 박문수에게 그 일을 맡아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나이가 1백 세 이상인 자는 사대부와 서인을 물론하고 매년 세수(歲首)에 찾아가 존문(存問)하고 아뢰면, 이조(吏曹)에서 복주(覆奏)하여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또 재상의 어버이 가운데 나이 90세 이상인 자에게 음식물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또 여러 도에 하유(下諭)하여 백성들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권면하게 하고, 그 중에서 남보다 아주 뛰어난 자를 조정에 보고하게 하고,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자들을 깨우쳐 주고 경계하게 하되, 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조정에 보고한 뒤 중한 형률로써 다스리게 하였다. 또 홍문관(弘文館)과 운각(芸閣)020) 에 명하여 《삼강행실속록(三綱行實續錄)》을 반포한 이후에 행실이 남보다 뛰어난 자를 엄정하게 골라서 이 책에 첨가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장령 김정윤(金廷潤)과 헌납 서명형(徐命珩)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취로(金取魯)를 예조 판서로,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로, 남태량(南泰良)을 수찬으로 삼았다.
1월 22일 계사
임금이 대신(大臣)과 이조 판서·예조 판서를 인견하여 효장 세자빈(孝章世子嬪)의 작호(爵號)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원자(元子)의 탄생을 위한 증광 경과(增廣慶科)를 먼저 시행(施行)하고, 식년 회시(式年會試)는 가을철을 기다려 물려서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부교리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금년은 영고(寧考)021) 께서 즉위하셨던 초원(初元)에 해당되고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후 일기(一紀)022) 째입니다. 금일은 곧 삼양(三陽)이 회태(回泰)하는 좋은 절기요023) , 만방(萬方)에 경사가 있는 아름다운 시기로서 음(陰)은 쇠하여 줄고 양(陽)은 성하여 늘어나니, 이것이 바로 일초(一初)의 기회입니다. 성상의 하교에서 이른바, ‘큰 붕새[大鵬]가 날지 아니하면 뭇새들과 다를 바가 없으나 그 높이 날아 올라갈 때에 미쳐서는 그 먼 것을 알게 된다.’라고 하셨던 것은 마치 오늘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은 전하의 역량이 큰 사업(事業)을 이룩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전하의 자질이 수성(守成)하기에는 넉넉하나 쇠퇴한 것을 진작시키는 데에 부족하며, 여러 아랫사람들의 재주가 시폐(時弊)를 구하기에는 넉넉하지만 나라의 환란을 구제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당(唐)나라 육지(陸贄)024) 의 장주(章奏)를 읽으시고 개연(慨然)히 덕종(德宗)을 한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령 육지가 있더라도 진실로 그를 등용하지 못했다면 어찌 덕종에게 비웃음을 끼치지 않았겠습니까? 전하께서 송(宋)나라가 이강(李綱)025) 의 주의(奏議)를 읽으시고 개연히 고종(高宗)을 한탄하셨는데, 설령 이강이 있더라도 또한 그를 등용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고종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에 이른바 크게 분발하고 면려한다는 것은 반드시 먼저 나라의 큰 규모(規模)를 세운 다음이라야 이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떳떳한 윤리가 날로 점차 허물어지고 있는데 먼저 교화(敎化)를 밝혀서 풍속을 크게 고쳐야 할 것이며, 사대부와 진신(搢紳)의 풍습이 날로 점차 타락하여지는데 먼저 권선 징악(勸善懲惡)을 행하여 상벌(賞罰)을 크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황극(皇極)을 세우려면 반드시 커다란 탕평(蕩平)을 이루어 그 가지런하기 어려운 것을 먼저 가지런하게 할 것이고, 인재(人才)를 등용하려면 반드시 크게 인재를 수습하여 그 초치(招致)하기 어려운 자를 먼저 초치해야 할 것이고, 백성들의 숨은 폐단을 강구(講究)하려면 먼저 양역(良役)을 고쳐서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해야 할 것이고, 관리들의 정치를 교화로서 면려하려면 먼저 순량(循良)을 높이고 탐오(貪汚)한 자를 크게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들이 오늘날 국세(國勢)를 만회(挽回)하는 커다란 강령(綱領)이 될 것인데, 그 절목이 이와 같고 그 말들이 너무나 장황합니다. 비록 그렇게 만사(萬事)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라도 반성하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한 번 임금이 바루어지면 천하(天下)에 족히 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구중(九重)의 궁궐에 연거(燕居)하여 유일(愉佚)에 만족하시면서 사방의 백성들이 곤궁하여 어디에다 고할 데 없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인데 어찌 보존(保存)할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천속(天屬)을 자애(慈愛)하시어 반드시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도록 하려고 하시면서 사방의 백성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에 시기를 놓친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인데 어찌 돌보고 구제할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내탕(內帑)의 사장(私藏)이 있고 별궁(別宮)의 사재(私財)를 저축하면서 조정 신하들의 전원(田園)과 옥백(玉帛)이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자신부터 먼저 혁파하겠다고 어찌 말하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이국(異國)의 기이한 완물(玩物)을 사랑하시고 태복시(太僕寺)의 뛰어난 준마(駿馬)를 구하시면서 조정 신하들의 여마(輿馬)와 복식(服飾)이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자신부터 먼저 물리치고 멀리하겠다고 어찌 말하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이미 액례(掖隷)와 궁속(宮屬)을 엄중히 단속하고 신칙하지 아니하여 혹은 세력을 믿고 여항(閭巷)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니, 종척(宗戚)의 동복(僮僕)이 방자한 짓을 하는 것도 또한 전하의 허물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빈어(嬪御)들이 사치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고 억제하지 못하여 혹은 궁양(宮樣)의 기이하고 교묘한 것을 전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니, 사대부와 서민들이 나라의 금제(禁制)를 무시하는 것도 또한 전하의 과오입니다. 전하께서 궁정(宮庭)의 안에 문안(問安)하고 궤헌(饋獻)하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시니, 진신들의 널리 포저(包苴)026) 를 받는 풍습이 반드시 궁내에서부터 시작하여 외부로 미치게 되는 것이며, 전하께서 신료들 사이에 대하여 안면(顔面)의 후박(厚薄)이 없지 않으니, 조정의 신하들이 한결같이 사랑과 미움의 편성(偏性)을 품는 것이 반드시 위에서부터 행하여서 아랫사람들이 이를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 크게 성지(聖志)를 정하시고 힘써 행하시는 데에 뜻을 기울여서 인순(因循)하는 폐습을 엄격히 씻어버리고 먼저 한편에 치우치는 잘못을 버리시어, 바로 요(堯)·순(舜)으로서 법을 삼으셔서 말씀할 때에는 그 행실을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는 그 말씀을 생각하여 총명(聰明)과 예지(睿智)의 자질로 하여금 도리어 중주(中主)와 더불어 같은 결과로 돌아가지 말게 하시고, 정대(正大)와 뇌락(磊落)의 자세로 하여금 도리어 잡스러운 패도(霸道)와 더불어 아울러 쓰지 말도록 하심으로써 세도(世道)를 크게 변화시켜 우리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 준다면, 이것은 실로 국가와 종사에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기쁜 가운데에 이처럼 면계(勉戒)하는 글을 보니, 깊이 이를 가상히 여긴다.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나의 마음도 유쾌하게 풀렸으니, 더욱 유의하여 마땅히 스스로 면려(勉勵)하겠다."
하였다.
1월 23일 갑오
원자(元子)가 탄생한 지 7일 안에는 대궐 안에서 포(砲)의 소리가 나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 하여 군병(軍兵)의 중일 습포(中日習砲)027) 를 잠시 정지하도록 명하였으니, 도총부(都摠府)에서 이것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증광과(增廣科)는 으레 원점(圓點)과 강경(講經)이 있는데 관시(館試)를 설치함에 있어 지금 쓸데없는 비용을 모두 제거하기 위하여 단지 두 곳에만 설치하였습니다. 청컨대 관소(館所)에서 시취(試取)하는 액수를 두 곳에 나누어 소속시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평양부(平壤府)의 뱃사람 백귀득(白貴得) 등 6인이 중국 산동(山東)의 성산지(成山地)에 표류하여 도착하였는데, 청나라의 관에서 의복과 양식 및 노자[盤費]로 은 5냥을 주고 이자(移咨)하여 우리 나라로 내보내었다.
1월 24일 을미
원자궁(元子宮)의 공상(供上)을 세자궁의 예에 의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월 25일 병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는 것으로써 백관(百官)들의 하례를 받았고, 교문(敎文)을 선포하여 읽었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동궁(東宮)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바야흐로 만백성의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일월(日月)의 빛이 거듭 밝았으니, 이에 넉넉함을 주는 아름다움을 기쁘게 여기노라. 이미 먼저 원자의 명호(名號)를 바로하였으니, 어찌 널리 이것을 고(告)하는 의식을 늦추겠는가? 생각하건대, 나 같은 과덕(寡德)이 왕위을 받들었으니, 언제나 두려워하여 사방으로 돌아보면서 후사(後嗣)를 계승할 걱정을 깊이 품었다. 집안과 나라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매어둘데가 없을까봐 염려되었고, 내 나이 점점 늙어가니 선조의 대통(大統)을 전할 데가 없음이 두려웠었다. 동룡문(童龍問)028) 이 닫힌 지 거의 10년의 나머지에 다행히 하루아침에 매신(禖神)이 아들을 점지(點指)하는 길사(吉事)를 얻었다. 대개 나라의 존망과 성쇠의 판가름이 이 순간에 닥쳤는데, 천지와 사직의 신령이 이와 같은 아들을 내려 줌을 힘입었다.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다시 잇게 되었으므로, 내가 종묘에 배알(拜謁)할 면목이 서게 되었고, 팔도[八路]의 온 백성들이 모두 기뻐 일어나니 나라는 철류(綴旒)029) 의 형세를 만회(挽回)하게 되었도다. 이에 궁정에 가득찬 환호의 요청에 따라서, 즉시 종묘에 제사를 드리는 아름다운 의식을 거행하였다. 태뢰(太牢)의 예로써 조상에게 고하였으니 예경(禮經)에 실린 아름다운 전장(典章)을 상고하였고, 원자를 중궁[中壼]에서 기르게 되었으니 밝은 부덕(婦德)의 고사(故事)를 이에 따랐다. 마침내 원량(元良)에게 명호(名號)를 더하였으니 이는 분약(奮若)·도유(屠維)030) 에 후사(後嗣)를 잇던 경사와 같고, 또 글로써 태묘(太廟)에 고하였으니 조종(祖宗)의 공덕(功德)이 뻗치어 의지함이 오래일 것이다. 바른 상부(祥符)를 수식(修飾)함이 마땅하니, 이에 죄인들을 용서하는 너그러운 은택을 골고루 베푸는 바이다. 이달 25일 새벽 이전부터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죄를 면제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資級)을 더하며, 자궁(資窮)인 자는 대가(代加)하게 한다. 아! 지금에 이르러 나라의 근본이 길이 굳어졌으니, 오히려 지나간 일을 생각하매 감격과 기쁨이 아울러 일어난다. 자손에게 끼쳐 줄 대모(大謨)가 더욱 깊었으니 몽양(蒙養)하는 도리를 다할 것을 생각하였고, 대붕(大鵬)이 날으는 데에 비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니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개혁과 새로운 정치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생각하건대, 신민들은 마땅히 이 사실을 자세히 알지어다."
하였다. 【대제학 윤순(尹淳)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67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語文學) / 사법(司法) / 인사-관리(管理)
[註 028] 동룡문(童龍問) : 태자(太子)의 궁문(宮門).[註 029] 철류(綴旒) : 깃대의 반대쪽 위아래 두 끝에 불꽃처럼 댄 긴 오리. 보기에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위험스러움을 비유함.[註 030] 분약(奮若)·도유(屠維) : 분약은 태세(太歲)가 축년(丑年)에 있음을 이르고, 도유는 태세가 기년(己年)에 있음을 이름. 곧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이 세제(世弟)로 책봉된 해인 신축년(1721)과 효장 세자(孝章世子:뒤의 진종(眞宗))이 탄생한 해인 기해년(1719)을 가리킴.
송성명(宋成明)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1월 26일 정유
이보다 앞서 여러 차례 죄인을 사유(赦宥)하는 은전을 내렸었으나 박장윤(朴長潤)·신처수(申處洙)의 유배와 이양신(李亮臣)·이대원(李大源)의 삭탈에 대하여는 문득 용서하는 은전을 아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용서하여 주고, 드디어 유시를 내리기를,
"후대의 자손에게 너그러운 규모를 물려주는 것이 제왕(帝王)의 큰 법도인데, 어찌 시류(時流)의 형편에 따라서 서로 다투는 문제를 후손에게 물려 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이미 이러한 문제를 후손에게 물려주지 아니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찌 이러한 마음을 남겨 두어 후일을 기다릴 수가 있겠는가? 아! 여러 신하들은 옛것을 없애버리고 새롭게 하기에 힘써서 우리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고 나의 후사(後嗣)인 원량(元良)을 복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윤봉조(尹鳳朝)에게만 유독 직첩을 돌려주는 은전을 아꼈었는데, 곧 이를 용서하였다. 이리하여 임금이 대신(臺臣)들로 하여금 전에 계달하던 것을 모두 정지하게 하고자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무신년031) 에 있었던 반역의 옥사에서 석방할 만한 자들이 아직도 작처(酌處) 중에 있으며 작처해야 할 자들이 아직도 영어(囹圄)에 갇혀 있으니, 인신(人臣)이 되어서 충신과 역적 사이에 있게 된다면 그 마음인들 어떠하겠는가? 아! 너희 이목(耳目)의 관원들은 내가 널리 사죄(赦罪)하려는 뜻을 몸받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 【지평 김석일(金錫一)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수(尹邃)와 권섭(權攝)·엽(燁)·전(琠)·형(炯)·식(烒)과 목천현(睦天顯) 등의 사건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숙(李潚)이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위임시키고 백성들을 침탈하여 자기의 사복을 채웠으니, 마땅히 그에게 파직하는 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신(道臣)이 간곡하게 비호(庇護)를 가하였는데, 수령을 출척(黜陟)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것을 용납할 수가 없으니, 함경도 감사 이기진(李箕鎭)도 또한 중하게 추고함이 마땅합니다. 능주 목사(綾州牧使) 윤동설(尹東卨)은 오로지 탐오한 짓만을 일삼아서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으니, 마땅히 그를 파직시켜야 합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정익하(鄭益河)는 충원(忠原)032) 에 관한 한 가지 사건으로도 오히려 상당한 비난이 있었는데, 묘당(廟堂)에서 그를 추천하여 발탁하니, 여러 사람들의 공의(公議)에 어김이 많습니다.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중신(李重新)은 여러 번 남방의 곤임(閫任)을 거치면서 탐라(耽羅)에서 무역을 하여 물품을 실어서 당로(當路)에 보냈으며, 또 그 나이가 많고 정신이 혼모(昏眊)하여 직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두 체차(遞差)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이를 윤허하였다. 김석일이 죄인을 사유(赦宥)하는 은전으로 인하여 반역의 옥사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계달(啓達)을 모두 정지하여 임금의 뜻을 맞추고자 하였으니, 의논하는 자들이 매우 그르게 여겼다.
1월 27일 무술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원자(元子)가 탄생한 지 제7일째가 된다고 하여 2품 이상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문안(問安)을 하였는데, 이것은 예가 아니었다.
대사헌 윤혜교(尹惠敎)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어제 지평 김석일(金錫一)이 신의 집에 찾아와서 옛날의 계사(啓辭)를 정지하자고 의논하기에, 신이 부득이 억지로 따르게 되었고, 새로운 계사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사색(辭色)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헌부에 나옴에 미쳐 급급히 정계(停啓)하였고, 저녁 늦게 간통(簡通)하여서 드디어 옛날의 법규로 하여금 허물어지게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신의 관직을 교체시켜 주소서."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응교 김약로(金若魯)가 상소하여, 대신(臺臣)이 윤수(尹邃)에 관한 전계(前啓)를 정지시킨 잘못을 논박하고 견책과 처벌을 더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한익모(韓翼謨)가 상소하여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올리었고, 또 헌신(憲臣)이 전계를 정지시킨 잘못을 논박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약방(藥方)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널리 사죄(赦罪)하는 은전(恩典)은 살아 있는 사람이든지 죽은 사람이든지 마땅히 차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신축년033) 의 두 신하034) 에 대하여 지금까지 은전을 아끼고 있습니다. 대저 저 두 신하의 순일(純一)하게 진심에서 나온 정성은 이미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인데, 그 이름이 단서(丹書)035) 에 있어 아직도 신원하지 못했으니 반조(半朝)의 인사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또 지금 전에 없던 나라의 경사를 죽은 자들도 알고 있어 또한 반드시 지하에서 기뻐하면서 춤을 출 것이니, 커다란 은전을 베푸는 아래에서 모두 성은(聖恩)을 받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신해년036) 과 임자년037) 사이에 군미(軍米) 신포(身布)를 거두지 못한 것과 계축년038) 7월 이전에 기포(騎布)·보포(步布)를 거두지 못한 것을 감해 주도록 명하였으니, 김흥경(金興慶)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1월 28일 기해
대신과 의금부 및 형조의 당상관과 이조 판서·병조 판서를 인견하고 여러 죄인들을 소결(疏決)하였는데, 방성규(方聖規)의 사건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형제간에〉 유하혜(柳下惠)와 도척(盜蹠)039) 이 있었으니, 깊이 죄를 줄 필요가 없다."
하고, 직첩을 주도록 명하였다. 이봉상(李鳳祥)의 사건에 이르러서는 유배지에서 양이(量移)하라고 명하였는데, 판부사 이의현(李宜顯)이 그를 완전히 석방해 주기를 청하자, 형조 참판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연좌(緣坐)에 해당하여 의율(擬律)하였는데, ‘이미 죽었다’고 일컬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대신 검시시켰었습니다. 망명(亡命)한 지 3년이나 되었으니, 족히 단안(斷案)을 내릴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의 당(黨)은 흉악하니, 이봉상은 나라에 대하여 망명한 것이 아니라 곧 조정의 분위기 때문에 망명한 것이다."
하고, 대신 검시한 보고서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익명(李益命)의 사건에 이르러서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그는 법외(法外)에 연좌된 사람이라’고 아뢰니, 임금이 여러 법외에 연좌된 사람들을 모두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홍치상(洪致祥)의 사건에 이르러서 김흥경이 말하기를,
"그 손자 홍익삼(洪益三)이 일찍이 상언(上言)한 적이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갑술년040) 에 숙종께서 홍치상의 관직을 복관하라는 말씀이 특교(特敎)에서 나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선대 왕조에서 하교하신 것을 자세히 보고서 이 사건을 차리하겠다."
하였다. 또 도형(徒刑)과 유형(流刑) 가운데 미처 장문(狀聞)을 올리지 못하였으나 그 죄가 사유(赦宥) 전에 있었던 자들은 모두 석방하게 하고 도년(徒年) 이상으로 망명(亡命)한 자는 모두 죄를 탕척(蕩滌)해 주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윤씨(尹氏)·이씨(李氏)·민씨(閔氏)의 3족을 편배(編配)시키자는 청은 바로 법외의 형벌이었으니, 모두 석방하여 보내라."
하였다. 윤씨·이씨·민씨는 곧 윤휴(尹鑴)·이의징(李義徵)·민암(閔黯)을 말한 것이다. 임금이 또 형조의 죄인들을 친히 소결(疏決)하고자 하였는데, 김흥경이 형관(刑官)으로 하여금 계품(啓稟)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김석일(金錫日)이 탐라(耽羅)에서 무역을 하여 물건을 실어서 당로(當路)에 보냈다는 것으로써 이중신(李重新)을 논죄하였으므로 당로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이중신을 마땅히 잡아다가 핵문(覈問)하도록 하소서."
하고, 김흥경도 또한 그렇게 하자고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흥경이 또 말하기를,
"재자관(䝴咨官)과 재주관(䝴奏官)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으니, 품정(稟定)하기를 청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재자관과 재주관은 다른가?"
하니, 김흥경이 말하기를,
"주문(奏文)은 자문(咨文)보다 중하기 때문에 으레 당하관의 무신(武臣)을 골라서 보내고, 이를 이름하여 ‘재주관’이라고 합니다."
하고, 서명균(徐命均)은 말하기를,
"이미 별사(別使)를 제거(除去)하였으니, 금번에는 마땅히 재주관을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국경을 범하고 넘어들어간 사람[犯越人]이 노략질한 인삼 1근을 누구에게 책임지워서 징수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호조로 하여금 준비하여 청나라가 보내게 하소서."
하니, 이유(李瑜)가 말하기를,
"호조에서 마련하게 한다면 이것은 거의 호조에서 스스로 준비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강계(江界)와 위원(渭原) 등의 고을에 나누어 배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김정윤(金廷潤)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서명형(徐命珩)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형(炯)·식(烒)과 황익재(黃翼再)·권중경(權重經) 등의 사건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그저께 사헌부의 계사(啓辭)는 은밀한 흉을 들추어내는 일이 많이 있어 이숙(李潚)이 통수(統帥)하는 관직에 천망(薦望)된 것을 논하고자 하여 동쪽을 가리키면 서쪽을 말하였고, 윤동설(尹東卨)의 무신년041) 에 세운 공적을 배척하고자 하여 말은 꾸며서 맞춘 내용이 많았으며, 정익하(鄭益河)가 등용되어 벼슬에 나아가는 길을 막고자 하여서는 사핵(査覈)하여 백탈(白脫)된 사건에 대하여 남은 비방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의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서 원한을 갚으려고 하는 태도를 이미 숨길 수가 없었으며, 장료(長僚)에게 물어보지도 아니하고 아무도 몰래 비밀히 발의하여 계문하였으니, 이것은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지평 김석일을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김석일이 비록 남의 은밀한 흉을 들추어냈으나, 지금의 비난하고 배척한 것은 바로 남을 꾸짖는 데에는 밝고 자기를 꾸짖는 데에는 어두운 격이다."
하였다. 응교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죄인을 사유(赦宥)하는 은전은 비록 널리 용서하는 일을 주로 하지만 악역(惡逆)에 관련된 권익관(權益寬) 같은 경우에는 그를 서용(敍用)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큰 경사를 당하여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오원이 말하기를,
"당론(黨論)이라면 잊어버리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죄인을 징토(懲討)하는 의리를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산(理山)에 경작할 만한 금산(禁山)이 있었는데,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부사(府使) 김후(金垕)에게 부탁하여 유 감사(柳監司)의 가노(家奴)의 이름으로써 입안(立案)을 내어서 산지를 일구어 경작하니,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장문(狀聞)하여 김후의 죄를 청하였다. 대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바로 유복명(柳復明) 집안의 서족(庶族) 인척(姻戚)이었는데, 우족(右族)을 빙자한 계획을 유씨 집안에서는 실지로 알지 못하였었으나, 여기에까지 이르자 임금이 유복명을 아울러 핵문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유복명은 전라도 감사로서 장차 잡혀오게 되었는데, 유복명의 집안에서 서둘러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형조에 잡아 바쳐서 이를 핵문하게 하였더니, 과연 아무런 실상이 없었다. 우의정 김흥경이 임금에게 아뢰어서 유복명은 그대로 유임하게 하였다.
구수훈(具樹勳)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1월 29일 경자
간원 【정언 김도(金䆃)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 유복명(柳復明)이 범한 죄는 이미 불법에 관계되는데, 그 허실을 논하지 아니하고 희미한 가운데에 둘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그대로 유임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그를 잡아 올려 밝게 조사하소서. 지평 김석일(金錫一)이 아뢴 바 몇 가지 일들은 모두 대간(臺諫)의 체모를 갖추었었는데 간신(諫臣)이 그를 파직하자고 청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논열(論列)한 내용은 탐오한 관리와 무신의 수령을 위하여 변명한 말이 아님이 없으니 헌납 서명형(徐命珩)은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통제사(統制使) 구수훈(具樹勳)은 사람됨이 어리석어 일찍이 북방의 곤수(閫帥)를 지냈으나 또한 청렴하다는 명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삼도 통제사를 맡길 수가 없으니, 마땅히 개차(改差)하여야 합니다.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서 커다란 사유(赦宥)의 은전을 바야흐로 시행하여야 하는데, 각도의 살옥(殺獄)에 관련된 오랜 죄수(罪囚)들은 마땅히 공명 정대한 관리를 골라 감영 아래에 모여 처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마지막에 계달한 것만 옳게 여겼다.
1월 30일 신축
응교 김약로(金若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역적을 다스리는 데에 엄하게 하지 않아서 그 방어가 해이해집니다. 이러한 규모(規模)를 가지고 이러한 도철(塗轍)을 따른다면 한번 굴러서 사형에 해당하는 자가 옥을 나오게 되고, 두번 굴러서 유배에 처해 있던 자가 완전히 석방될 것이니, 얼마 후에는 그들이 조정에 다시 나아오지 아니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오직 말하는 자의 색목(色目)042) 으로써 일에 앞서 의심하시며, 심상(尋常)한 규경(規警)이라도 만약 그 동류(同類)에게 미치면 공정한 마음이라고 허여(許與)하고, 토복(討復)에 대한 큰 의리라도 만약 자신과 다른 당파에 관련된다면 사사로운 뜻이라고 의심하여 의리로써 시비를 재정(裁定)하지 않으니, 신은 가만히 민망하게 여길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우리 나라의 역서(曆書)가 《역상고성(曆象考成)》이 나온 이후부터 조금도 어긋나지 아니하였는데, 갑인년043) 에 이르러서 절기가 어긋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관상감(觀象監) 관원 안중태(安重泰)를 연경(燕京)에 보내어 이것을 질문하게 하였더니, 구법(舊法)은 강희(康熙)044) 갑자년045) 을 상원(上元)으로 삼았고 신법(新法)은 옹정(雍正)046) 원년047) 을 상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전표(日躔表)》·《월리표(月離表)》·《칠요역법(七曜曆法)》 등의 책을 사오게 하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병진년048) 부터 추보(推步)하여 역서를 만들게 하여 한결같이 이 역법을 쓰도록 하였으며, 관상감 관원 등에게 전례를 고찰하여 상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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