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 1735년 2월

싸라리리 2025. 9. 1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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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계묘

임금이 옛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교정(校正)한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원자의 탄생이 마침 《선원보략》을 수정(修正)할 때를 당했으니, ‘사원자(嗣元子)’로서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위에 기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구보(舊譜)에는 원종 대왕(元宗大王) 아래에 소주(小註)를 달기를, ‘비(妣) 인빈(仁嬪)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경종[景廟]에 대한 소주(小註)도 또한 이러한 예에 의하여야 마땅하지만, 비(妣)란 곧 고(考)의 배우자를 칭하는 말이므로 예(禮)에 있어서 아마 옳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妣)’라는 글자를 사친(私親)에게 가한다면 《예경(禮經)》에 크게 어긋날 것이다."
하고, 이것을 고쳐서 쓰도록 명하였다.

 

서종옥(徐宗玉)을 승지로, 조명경(趙命敬)을 지평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수찬으로, 황재(黃梓)를 응교로, 신만(申晩)을 교리로 삼았다.

 

고사(故事)에서는 정1품의 종신(宗臣)은 대신(大臣)과 더불어 서로 읍(揖)하였고, 종1품 이하의 종신은 곧 절[拜]을 하였었는데, 이날 양평군(陽平君) 장(檣)이 종1품으로서 합문(閤門) 밖에서 절을 하지 않자,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그를 추고(推考)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종신과 외조(外朝)049)  의 대신은 원래 다른 반열(班列)이다."
하고, 지금부터 정1품 종신은 대신과 더불어 서로 읍하게 하되 합문 밖에서는 읍하지 않으며, 종신 가운데 총관(摠管)과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된 자는 마땅히 절해야 하나, 만약 직사(職事)가 아니라면 비록 당하관이라 하더라도 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판부사 이의현(李宜顯)과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억울함을 신원하여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한 사람은 내가 그 억울한 것을 알기 때문에 신원하여 줄 수가 있다. 만약 두 사람을 아울러 신원해 주려고 한다면, 나도 완급(緩急)에 대한 집착성(執着性)은 있다."
하자, 이의현 등이 굳이 청하였고, 응교 오원(吳瑗)이 계속해서 이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막 출륙(出陸)한 궁녀(宮女)를 가지고 유신(儒臣)들은 그녀가 최필웅(崔必雄)과 결탁한 흔적이 있다고 간쟁(諫爭)하였었는데, 이 두 사람 가운데 만약 환시(宦寺)들과 결탁했던 자가 있었다면 유신들이 또한 장차 그를 신원하자고 청하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김창집은 바로 신의 생모(生母)의 백부(伯父)이기 때문에 신은 그가 한번 죽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던 마음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위가 상신(相臣)에 올라서 나라의 큰 일을 담당하였으니, 그 사람됨이 자중(藉重)함은 이치에 당연한 일입니다. 비록 몹시 귀로 듣기가 두려운 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람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 마음을 살피지 않고 그를 의심하니 어찌 억울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몹시 귀로 듣기가 두려운 말을 나도 또한 믿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 환득 환실(患得患失)하는 무리들이 화(禍)를 조장(助長)하는 일이 없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장중(掌中)의 글자를 지적하여 죄안을 만들었으니, 억울한 것이다."
하였다. 이의현이 말하기를,
"김창집은 사람됨이 밝고 곧으니, 어찌 깊이 숨겨진 일이 있을까봐 그를 의심하겠습니까? 신축년050)  에 위태롭고 의심스러울 즈음에 신은 일찍이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라를 위해 우는 모습을 목격하였으니, 비록 항간(巷間)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도 모두 그가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찌 성상께서는 한 장의 허함(虛銜)을 이끼십니까? 또 박상검(朴尙儉)이 변란을 일으키던 날 김창집은 자기 몸이 장차 죽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동궁(東宮)만 보전된다면 눈을 감고 죽을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가 평상시에 숙종[肅廟]을 위하여 한번 죽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숙종의 혈맥을 보호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이르러 그를 신원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아래 있는 자가 감히 청할 것이 못된다. 기유년051)  과 지난 〈계축년052)   1월〉 19일에 유시한 글은 내 마음이 돌과 같다. 여기에서 만약 마음이 흔들리어 뜻을 빼앗긴다면 군신(君臣)의 의리가 장차 밝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신원하는 것이 군신의 의리에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내가 따를 수가 없는 일을 여러 번 청하니, 어찌 개연(慨然)하게 여기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오원이 거듭 청하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그가 번거롭게 다시 청한다고 하여 그를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한번 나라에 경사가 있은 이후로 김흥경 등이 여러번 대사(大赦)를 청하였는데, 대개 이것을 방자하여 두 신하를 신원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전후에 실언(失言)이 매우 많았으나, 모두 논쟁하지 않고 유독 두 신하의 일로서 누누이 번갈아 청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애절(哀切)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혹 이것을 병폐로 여겼으니, 두 신하를 신원하는 것은 사유(赦宥)를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평 김석일(金錫一)이 상소하여 서명형(徐命珩)이 파직을 청한 계사(啓辭)에 대하여 변명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리고 이어 하교하기를,
"서명형이 김석일을 공격하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김도(金䆃)가 도리어 서명형을 배척하여 서로 승부를 겨루니, 그 기상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물며 김석일은 지난해 대책문(對策文)에 대하여 이미 그에게 신칙과 격려를 보였으니 나의 뜻을 몸받도록 하라."
하였다.

 

2월 3일 갑진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취함(尹就咸)을 장령으로, 유건기(兪健基)를 교리로, 권혁(權爀)을 부교리로 삼았다.

 

2월 4일 을사

정언 김도(金䆃)가 인피(引避)하면서 말하기를,
"김석일(金錫一)이 논한 바는 무신 수령과 탐오한 관리들을 위하여 변명한 데에 지나지 않았는데, 서명형(徐命珩)은 좋은 트집거리로 삼아 그를 공격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안면(顔面)에 이끌려 은혜를 베풀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천하의 일은 본래 양시(兩是)·양비(兩非)는 없습니다. 서명형이 김석일을 논죄한 것이 옳다면 신의 계달은 잘못된 것이며, 신이 서명형을 논죄한 것이 옳다면 서명형이 잘못된 것입니다. 어찌 전하께서 시비의 분별을 보이시지 아니하시고 지레 억제를 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열어 사건을 논할 수 없게 만듭니까? 전하의 뜻이 비록 조정을 조정하려는 데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이 오직 구차스러운 방편(方便)으로써 양책(良策)을 삼으니, 이는 전하께서 길을 터놓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5일 병오

양평군(陽平君) 장(檣)을 진주 겸사은사(陳奏兼謝恩使)로, 서종급(徐宗伋)을 부사(副使)로, 신치근(申致謹)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정(任珽)을 부교리로, 김상성(金尙星)을 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들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진주사(陳奏使) 서명균(徐命均) 등이 청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국경을 범월(犯越)한 사건은 청나라에서 이미 의처(議處)함을 면제하기로 허락하고, 우리 나라에서 죄인을 완결짓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재자관(䝴咨官)을 보내어 이러한 일들을 감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사양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제학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비록 재자관을 보내더라도 〈죄인의〉 의처를 면제함에 대하여 사례함이 마땅하니, 사신을 보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의논을 따랐다.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하여 만민(萬民)이 목을 길게 늘이어 기대하고 있으니, 마땅히 큰 은혜를 베풀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원자에게 마음이 돌아가게 해야 하는데, 은혜를 베푸는 방도는 군향(軍餉)의 수봉(收捧)을 정지하고 옛날의 포흠(逋欠)을 감면하는 데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송나라 태종(太宗)이, ‘나를 어느 곳에 두려고 하는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으니, 내가 일찍이 개연(慨然)스럽게 여겼다. 지금 만약 백성들이 모두 원자에게 마음이 돌아간다면, 나라의 근본은 더욱 튼튼해질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유시를 내리기를,
"지금 이번의 경사는 전의 사첩(史牒)에 드문 바이니, 하늘의 휴명(休命)에 보답하는 도리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으뜸이 된다. 안으로는 낭묘(廊廟)로부터 밖으로는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나의 뜻을 몸받아서 만약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가 있으면 작다고 일러 소홀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군정(軍政)을 바로잡으라는 교지를 내린 지 이미 오래인데, 정군(正軍)에게 다른 역(役)을 침징(侵徵)하지 말도록 하는 것은 곧 옛날 법규이니, 아울러 특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지금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의 죄안을 보건대, 수십 년이 지난 자가 있으니, 지금 이번의 사죄(赦罪)하는 은택을 받아서 모두로 하여금 유신(維新)의 뜻에 참여하게 하고자 한다. 전토(田土)를 가진 자에게는 농사를 권면하고 긍휼히 여겨서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평민 가운데 의지할 만한 데가 없는 자에게는 본향(本鄕)에 도착한 뒤에 더욱 어루만지고 불쌍히 여겨 기필코 그들을 편안하게 거주하도록 하라. 그들 가운데 타향에 그대로 머물러 사는 자에게는 특별히 고휼(顧恤)을 더하여 그들로 하여금 살 곳을 얻도록 하라. 아!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지키는 조건은 모두 갖추게 되는데, 이러한 무리는 혹은 기근의 곤란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여 스스로 헌장(憲章)이 위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그들의 사정을 살펴보면 어찌 불쌍하고 측은하지 아니하겠는가? 아! 너희 도신(道臣)들도 또한 이러한 뜻을 본받도록 하라. 삼양(三陽)이 회태(回泰)하고 나라의 경사가 새로운 때에 대소 여러 신료들은 그 마음을 곧고 깨끗하게 하여 우리 만백성을 보호하라. 양춘(陽春)의 기운을 인도하고 순후(淳厚)한 기풍을 만회(挽回)하여 우러러 높은 하늘에 계신 열성(列聖)께서 보살펴 주고 도와주는 음덕에 부응하고, 아래로 억조 생민(億兆生民)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마음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법외(法外)에 연좌된 죄인들을 뽑아서 보고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법외에 연좌된 사람들은 모두 흉악한 죄인들이니, 의논할 만한 자들이 못됩니다. 그러나 이희지(李喜之)는 형장을 맞아 죽고 노적(孥籍)을 행하였으며, 심성연(沈成衍)은 물고(物故)되었으나 역적의 율을 시행하였고, 임상극(林象極)의 아들은 교형에 해당하였으나 교형시키지 않고 그 형과 조카들과 같이 유배시켰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이희지의 삼촌 이익명(李益命)도 또한 법외에 연좌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심성연·임상극·이희지를 석방하고 연좌에 해당한 사람 이익명도 또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죄인의 부부[夫妻]를 각각 따로 유배한 일로 실로 화기를 해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아내는 남편을 따라서 옮겨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김흥경이 또 홍치상(洪致祥)의 관직을 회복시켜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선대 왕조에서 허락하지 아니한 바라고 하여 그대로 두게 하였다. 송인명이 이봉상(李鳳祥)의 검시관(檢尸官) 황상정(黃尙鼎)이 죄를 받은 사건을 상고하여 보고하였는데, 대개 그 종 가운데 그와 모양이 비슷한 자가 죽어서 그를 대신 검시하였다고 하였다. 또 김창집(金昌集) 등을 신원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전관(銓官)에게 이르기를,
"신처수(申處洙)·박장윤(朴長潤)·최치중(崔致重)은 비록 이미 서용(敍用)되었다고 할지라도 검의(檢擬)에 천거(薦擧)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니, 김흥경이 말하기를,
"죄의 경중이 비록 다르다고 하지만 어찌 아울러 벼슬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이미 서용한 뒤이니 사람을 쓰거나 버리는 것은 마땅히 전관에게 이를 맡겨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송성명(宋成明)이 조정에서 물러나서 강상(江上)에 거주하다가 하례에 참여하기 위하여 도성(都城)에 들어오니, 임금이 특별히 그를 비국 당상(備局堂上)에 임명하였다.

 

2월 8일 기유

응교        오원(吳瑗)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나라에 대각(臺閣)을 설치한 것은 장차 그들로 하여금 법을 지키고 대항(對抗)해 논란(論難)하여 군상(君上)과 더불어 그 가부(可否)를 다투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날 양사(兩司)에서 여러 죄수들을 국문(鞫問)하자고 계청(啓請)한 것은 그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대하니, 전하께서 결코 정론(停論)하도록 핍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대각의 신하들이 오로지 임금의 뜻을 받들기에 힘써 일곱여덟 차례나 올린 백간(白簡)을 서로 잇따라 모두 정계(停啓)하였으니, 몇 백년 동안 대각에서 직분을 지켜 오던 법도가 실로 두서너 신하 때문에 허물어졌습니다. 아! 국문 중에 있던 여러 죄수들은 지금 이미 발락(發落)을 지었습니다. 권익관(權益寬)은 이미 관직을 회복하였고, 안박(安鑮)·한성흠(韓聖欽)은 이미 출륙(出陸)하였으며, 윤연(尹㝚)은 이미 완전히 석방되었고, 최필번(崔必蕃)도 또한 가까운 땅으로 양이(量移)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이 원래 법망(法網)에서 벗어난 것도 이미 실형(失刑)이 된 것인데, 날이 갈수록 느슨하고 달이 갈수록 해이해져 아무런 방한(防限)이 없으니, 어떻게 흉적(凶賊)의 무리를 징즙(懲戢)하며 나라의 법전을 엄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성명(聖明)께서는 전후의 대각 관원들에게 엄하게 견책을 더하소서. 장령        윤취함(尹就咸)이 전번에 엄한 교지를 받았던 것은 실로 대각에서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간관(諫官)의 직임에 제수되자, 한번도 겉치레인 사면(辭免)을 하지 않은 채 의기 양양하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출사(出仕)하였으니, 마땅히 그를 교체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상소가 궁궐에 들어가자, 임금이 바야흐로 소대(召對)를 행하고 있었는데, 오원이 시강관(侍講官)으로서 입시하니, 임금이 오원에게 이르기를,
"금일에 의논한 바가 지난날 곡진하게 보호하던 것에 비교하여 공평한가 공평하지 아니한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두 신하가 자기 몸을 잊어 버리고 순국하였는데, 어찌 이러한 무리들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신하가 임금을 고른다[臣擇君]’라는 세 글자를 가지고 하교를 하였는데, 신하가 임금을 고른다는 것이 어찌 충성스럽다고 이를 수가 있겠는가? 유신들은 언제나 말하기를, ‘너무 두려운 말이므로 믿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권익관의 무리들도 또한 두려운 말이 아닌지를 어찌 알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모역(謀逆)의 단서가 낭자하게 드러났습니다. 두 신하는 마침내 순국하였지만 아직도 죄인의 문적에 실려 있으니, 이는 신이 그들을 신원하자고 청하는 까닭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이것이 범진(范鎭)053)                  이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하얘진 고사(故事)와 같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만, 그들은 곧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 것이니, 마치, ‘사람의 일생의 진위(眞僞)를 그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과 같다. 〈지난 계축년054)                   1월〉 19일에 하교한 글은 이미 사책(史冊)에 실려 있으니, 후일에 이것을 열람하는 자들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君君臣臣]’라는 뜻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육진(六鎭)의 유생 한여두(韓汝斗)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성조(聖祖)의 왕업을 일으키신 사적이 경흥(慶興)의 적지도(赤池島)와 경원(慶源)의 용당(龍堂)에 있으니, 마땅히 비석을 세워서 이것을 표시하고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하고, 또 훈장(訓長)을 설치하고 병마 평사(兵馬評事)를 구임(久任)시키고, 문·무관(文武官)을 교대로 임명하자는 등의 일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비국(備局)에 회부하였으나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2월 9일 경술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여 사헌부의 계달과 사간원의 상소가 자기와 관계된다고 하여 인의(引義)하고 사직하였는데, 이어서 말하기를,
"두 신하의 순국(殉國)한 충성은 순일(純一)하여 다른 뜻이 없는데도 이름이 죄적(罪籍)에 실려 있으니, 그윽한 원한이 오랫동안 쌓여 있었습니다.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이 내리는 아래에서 은전의 물결이 오로지 이 사람들에게만은 막혀 있습니다. 신이 입이 닳도록 힘써 간쟁하는 것은 두 신하를 위하는 것이 아닌데, 신의 어리석은 충정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니, 의리상 마땅히 조정에서 몸을 거두어서 물러 가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어제 이미 하교하였는데, 지금 또 나를 곤란하게 한다. 여러 재상들을 거느리고 입시하여 나의 유시를 듣도록 하라."
하였다.

 

지사(知事) 신사철(申思喆) 등 54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나라의 경사가 전대에 드문 바이고 용서하는 은택을 널리 베푸시니, 대소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원[伸理]의 은전(恩典)이 반드시 사직(社稷)을 위해서 죽은 여러 신하들에게 먼저 미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막상 그 사유(赦宥)하는 명령을 크게 시행함에 미쳐서는 오히려 저들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 쓴 자들은 은전에서 누락되었습니다. 아! 신축년055)  에 나라가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커다란 계책을 도와서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키고 종묘와 사직을 위험에서 구출하여 편안하게 만들어 금일의 아름다운 세상에 이르게 하였던 것은 모두 그 당시 대신들의 힘이었습니다. 아! 당초에 죄를 뒤집어 씌워서 장살(戕殺)한 것은 건저(建儲)하는 차자(箚子)에 연명(聯名)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에 추후하여 삭탈 관직한 까닭도 또한 연명한 차자 때문에 옥안(獄案)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유년056)  에 이 사건을 처리할 때에 이미 차자에 연명한 것은 광명 정대하였다고 하교하셨으니, 그 밝기가 해와 별과 같았습니다. 비록 그때에 다른 의논을 주장하던 자들도 또한 모두 ‘예, 예’하고 따랐으니, 공의(公議)를 정하는 데 1백 년을 기다리지 아니한 것은 바로 이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또한 이것을 구분하여 나누어서 혹은 신원하고 혹은 신원하지 않았으며, 비록 신원된 두 신하도 옛날의 시호(諡號)를 다시 내릴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신원되지 못한 두 신하는 아들과 손자들이 죄범이 있다고 구실을 잡아 처지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또 두 신하를 두 갈래로 나누어 이이명(李頤命)에게는 이미 신원해 주려는 뜻을 보이셨으나, 김창집(金昌集)에게는 새로운 죄목을 추가하여 신원될 수가 없다는 단서로 삼으시니, 신 등의 의혹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저 조정에서 신원하는 방도는 오로지 처음에 벌을 받은 죄명이 무엇인가를 보아서 신원할 만하면 이를 신원해 줄 따름이니, 본래의 사건 이외에 대해서 다시 수사하여 그 신원할 만한 억울한 사정을 그대로 덮어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과연 김창집에게 화를 뒤집어 씌운 것이나 그 관직을 추후하여 삭제한 것이 그가 처음에 건저하는 차자에 연명한 죄에다 두지 아니하였습니까? 전하께서 김창집에게 죄를 주신 까닭은 이미 을사년057)   초에는 듣지 못하였던 하교였으며, 또 정미년058)   이후에 관직을 추탈하던 옥안도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몸인데 죄명이 때에 따라서 변하여 장차 천지(天地)에 사무친 원한을 다시 신설(伸雪)할 날이 없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 김창집이 조정에 서게 된 본말(本末)을 보면 숙종께서 그를 의지하고 중하게 여기셨던 바이며, 전하께서도 이것을 잘 알고 계셔서 흰 머리에 정성스런 마음이라는 포장(褒奬)이 빛나서 바로 어제의 일과 같았으니, 이것은 또한 그 옳은 사람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줄곧 서로 버티면서 아직까지 이 일을 처리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사악한지 정직한지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도 아니하며, 오로지 단단히 결심을 정하시고 굳게 이것을 거절하는 것만으로써 주장을 삼으셨습니다. 아! 김창집이 가슴속의 단충(丹衷)을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치 아니하였으니, 그가 목숨이 떨어지던 날을 당하여서도 오로지 나라의 근본이 외롭고 위태로운 것만으로써 눈을 감지 못하는 여한(餘恨)으로 여겼습니다. 사람을 대하여 피를 토하며 원통함을 머금고 땅속에 묻혔으니, 당시의 권고(睠顧)하던 충성으로써 오늘날의 나라의 경사를 알게 된다면, 생각건대, 그는 구천지하(九泉之下)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춤을 출 것입니다. 만약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를 밝게 신원(伸冤)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아! 상전 벽해(桑田碧海)가 여러 차례 변하고 은전과 법률이 서로 상반(相反)되어 죄가 종사에 관계되는 자에게는 비애와 영광이 갖추 이르게 되었고, 몸이 나라를 위해 죽은 자는 그윽한 원통을 신설(伸雪)할 날이 없으니, 대신들이 입이 닳도록 힘써 간쟁하고 신 등이 피땀을 흘리면서 번거롭게 하소연하는 것은 또한 세상의 교화를 위한 것이요 나라의 일을 위한 것입니다. 원컨대 성명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리시어 두 신하의 관질(官秩)을 도로 회복하여 의리가 빛나고 밝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미 대신의 비답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2월 10일 신해

사간(司諫) 김상성(金尙星)이 오원(吳瑗)의 상소 때문에 소장을 올려서 인혐(引嫌)하고, 또 말하기를,
"재상(宰相)의 차자(箚子)가 아침에 제출되고 진신(搢紳)의 상소가 저녁에 이르렀는데, 일맥(一脈)의 정신은 모두 힘써 자기들 사당(私黨)의 세력을 키우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대 왕조에 간범(干犯)되는 죄를 하찮게 보아 넘기며, 성상의 해와 별 같은 하교마저도 마치 귀를 틀어막은 듯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 반드시 한 시대에 이미 정해진 단안(斷案)을 허물러뜨리고 만고(萬古)에 바꿀 수 없는 큰 기강을 허물어뜨리고자 하고 있으니, 신이 전의 상소에 이른바, ‘군신(君臣)의 윤리와 기강이 날로 점차 타락되어 간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김창집(金昌集)은 공명(公明)하고 결백하여 털끝만큼도 사사로이 왜곡하거나 음험한 태도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무리들이 비록 그 몸에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고자 하였으나, 건저(建儲)하자는 연명 차자(聯名箚子) 이외에는 일찍이 다른 사실을 더 적발하여서 죄안(罪案)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나, 말로(末路)의 인심(人心)이란 본래 스스로 험하고 위험한데, 하물며 나라가 위급하고 의심스러운 즈음에 처했을 때이겠습니까? 옛날의 원통한 죄 이외에도 또 새로운 죄안(罪案)을 덧붙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습니까? 아! 신축년059)  의 흉악한 역모(逆謀)는 고금에 드문 일이었으니, 성궁(聖躬)의 위험한 것이 거의 위기 일발과 같았습니다. 김창집이 곧 의연하게 홀(笏)을 바로잡고 삶과 죽음을 도외시한 채 먼저 나라의 큰 계책을 세워서 종묘와 사직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하였으며, 나라의 근본이 부탁할 데가 있게 하였으니, 그의 충성스러움과 역량(力量)은 옛사람에게 비하여 부끄러울 바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시세(時勢)가 한번 변하게 되자, 김일경과 박필몽 등이 흉심(凶心)을 드러내어 이미 그 몸을 죽이고 또 그 집안을 멸망시켰는데, 이것도 오히려 마음에 시원하지 못하여 또 추가하여 형벌하자고 청하였으나, 다행히 경종[景廟]의 어질고 거룩한 조치에 힘입어서 이를 다툰 지 3년 동안 끝내 한 마디 말도 윤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을사년060)  에 이르러 다행히 복관(復官)될 수가 있었지만, 어찌 족히 그 당시 입은 참화를 보상받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뒤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다시 그 관직을 삭탈당하였는데, 나라의 법전에 몸이 죽어서 추후하여 관직을 삭탈되는 것은 몸이 살아서 극형을 당하는 것과 형률이 같은 것이니, 조정의 형정(刑政)이 각박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이제 온 나라에서 다 같이 경사스러운 날을 당하여 윤리 강상을 어겨 사형[大辟]을 당하게 된 자들도 사유(赦宥)를 받은 자가 많은데, 홀로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사람에 대해서는 죄를 고집하고 용서해 주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한장의 헛된 직첩(職牒)을 아끼시니, 아마도 성조(聖朝)의 관대한 은전이 못될까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마땅히 입시(入侍)할 때에 유시를 내리겠다."
하였다.

 

이재후(李載厚)를 지평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자기의 사당(私黨)을 구제하고자 하여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니,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4신(四臣)061)  이 똑같은 마음으로 일하다가 순국(殉國)하였는데, 오로지 이 두 사람만이 아직도 그윽한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신이 감히 신원(伸冤)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교지를 받으니, 황공(惶恐)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고른다[臣擇君]’라는 세 글자에서 나는 이미 그 줄거리를 거론 하였는데, 경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니, 내가 마땅히 그 절목(節目)을 다시 유시(諭示)하여야 하겠다."
하니,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말하기를,
"신 등은 〈지난 계축년062)   1월〉 19일의 하교를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다만 성상께서 밝게 유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조 참판 신방(申昉)·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에게 이르기를,
"이조 판서는 일찍이 이것을 들었으나, 여러 신하들은 아직 듣지를 못하였다. 지금 만약 밝게 유시한다면, 타첩(妥帖)063)  될 수가 있겠는가?"
하니, 송인명 등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밝게 유시한다면 반드시 사사로이 당파를 위하는 마음을 품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잠시 동안 밖으로 물러가게 하였다가 조금 있다가 다시 불러들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덕수(徐德修)는 곧 나의 처조카인데, 서덕수의 사건은 어찌 내전(內殿)에 걸리는 바가 있지 아니하겠는가? 나라에 경사가 있은 뒤로 양궁(兩宮)의 사이에 화기가 애애(藹藹)하기를 바라는데, 지금 만약 서덕수의 사건을 다시 제기한다면, 내전이 어찌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말을 아직 끝마치지도 아니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뢰기를,
"어찌하여 이처럼 차마 귀로 들을 수가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원컨대 속히 이 말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었는데, 대비전[東朝]을 위험한 말로 두렵게 하던 자가 말하기를, ‘연잉군(延礽君)064)  이 정궁(正宮)을 박대하고 주색(酒色)에 빠져 있는데, 지금 만약 그를 책립(策立)한다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065)  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었다.…"
하고, 말을 끝마치기도 아니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또 귀로써 차마 듣지 못할 말씀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전하는 것이고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경들이 모두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다시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이미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말씀을 받으니, 어찌 감히 다시 이 문제를 제기 하겠습니까?"
하고, 판부사 이의현(李宜顯)이 말하기를,
"일후에는 비록 알 수가 없지만, 이미 이러한 하교를 받들었는데, 어찌 감히 다시 제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으로써도 오히려 마음이 시원하지 못하다."
하였다. 지사(知事) 신사철(申思喆)·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조 참판 신방(申昉) 등이 모두 말하기를,
"감히 다시는 이를 말하지 아니하겠습니다."
하였으나, 판돈녕부사 심택현(沈宅賢)이 홀로 이의현의 말과 같았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으로써도 또한 마음이 시원하지 못하다."
하였다.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이 말하기를,
"신이 병들고 귀가 먹어 자세히 듣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다시 말하겠습니까?"
하고, 판부사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19일의 하교에서 대리 청정(代理聽政)을 청한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대하여 이미 변석(辨釋)하였는데, 지금의 상소에서는 오히려 상세하게 알지 못하여서 그러한 것 같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이정제(李廷濟)는 말하기를,
"오늘의 하교를 사관(史官)들이 어찌 차마 이를 쓰겠습니까? 사초(史草)의 책자를 마땅히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하고, 승지 이중협(李重協)이 또 하교한 것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책(史冊)에 쓰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위복(威福)의 큰 권한을 잡고 있으니, 비록 대관(大官)이라 할지라도 어찌 문책하고 징벌하기가 어렵겠는가? 그러나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이렇게 직접 유시하는 것은 대개 조정에서 겨우 화합하자마자, 또 장차 어그러져 분리될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신료들이 모두 이를 깨달아 알았다니, 도리어 다행스럽다 할 수 있겠다."
하고, 또 김흥경에게 이르기를,
"대신들은 마땅히 자신을 신칙하고 힘써야 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이 말씀을 가지고 감히 불쾌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다만 작년에 당하였던 바로서는 의리상 체직(遞職)해야 당연하기에 여러 번 매복(枚卜)066)  하기를 청하였으나, 오랫동안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장차 인입(引入)하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김흥경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경의 말을 따라서 매복할 것이니, 경도 또한 모름지기 나의 말을 따르고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인하여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그 중에 한 사람은 내가 구별하고자 한다."
하니, 이의현이 말하기를,
"지금 이미 밤이 깊었으니, 다시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로써 이것을 처리하더라도 무엇이 방해되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임금의 뜻은 홀로 이이명(李頤命)만을 지목하고 있었으나, 이의현의 뜻은 두 사람을 아울러 신원하려는 데에 있었던 까닭이다. 여러 신하들이 내전에서 물러나가자, 밤은 이미 4고(四鼓)였다. 이중협이 합문(閤門) 밖에 서서 사관(史官) 허후(許逅)·김상적(金尙迪)·임술(任述)·김태화(金兌和)로 하여금 사초의 책자를 가져와서 추려 내니 임금이 하교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그들이 겨우 승정원에 돌아가자, 임금이 다시 승지와 사관을 불러서 사초(史草)에 관한 일을 물었는데, 이중협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경종[景廟]과 전하께서 왕위를 주고받은 것이 광명 정대하니, 백세토록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세제(世弟)에 책봉(冊封)되던 날 신과 윤순(尹淳)·박사익이 똑같이 궁관(宮官)이 되었었는데,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시기를 마치 비오듯이 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우리 동방의 무궁한 복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또 다시 편파적인 당론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또 성상의 하교를 받고 여러 사람들의 심정이 석연(釋然)하였으니, 누가 감히 다시 사사로이 당파를 위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이후로는 언제나 ‘여러 신하들이 석연했다.[諸臣釋然]’라고 일컬었는데, 대개 이중협의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하교가 내전(內殿)에까지 언급되었기 때문에 물러가서 사사로이 말하면서 깊은 심려(心慮)가 있다고 하였는데, 전하는 말들이 떠들썩하여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 하였다. 드디어 정형복(鄭亨復)의 상소가 있었는데, 그날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으므로 역사를 편찬하는 자들이 그날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가지고 참고하여 추후해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2월 12일 계축

김시형(金始炯)을 대사헌으로, 이태징(李台徵)을 장령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정언으로, 김약로(金若魯)를 부응교로, 윤경룡(尹敬龍)을 수찬으로, 윤휘정(尹彙貞)을 부수찬으로, 정언섭(鄭彦燮)을 승지로 삼았다.

 

빈청(賓廳)에서 상신(相臣)을 선임하였는데, 이의현(李宜顯)을 영의정으로 삼고, 서명균(徐命均)을 좌의정으로 삼았다. 이의현은 정미년067)  부터 인의(引義)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었는데, 임금도 또한 그를 다시 등용할 뜻이 없었으므로 정승의 자리[台席]가 갖추어지지 않았는데도 오랫동안 매복(枚卜)하지 않았다. 이의현이 임금의 밝게 유시하는 말씀을 받들고, ‘신하들이 감히 다시는 이를 제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함에 미쳐, 임금이 비로소 그를 다시 등용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서명균이 일찍이 상부(相府)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궁방(宮房)의 일을 말하였으므로 임금이 자못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이수해(李壽海)의 상언 때문에 그를 면직하여 도태시켰었다. 그러나 임금도 또한 이를 애석하게 여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두 사람을 모두 상신에 임명하였다. 이의현과 서명균은 비록 재상이 될 만한 자질은 없었으나, 모두 청렴하고 검소하다는 명망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이 이들을 존중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經)이 김상성(金尙星)의 상소 때문에 상소하여 변명하여 말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한밤중에 나의 하교를 경 등이 이미 석연히 이해하였는데, 이에 무엇을 괘념(掛念)할 것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3일 갑인

이광부(李光溥)를 사간으로 삼았다.

 

전 검열(檢閱) 이덕중(李德重)과 전 대교(待敎) 정이검(鄭履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 등은 직명(職名)이 비록 삭탈되었다고 하더라도 직책(職責)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사건이 사필(史筆)의 법에 관계되므로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군상(君上)의 언동과 시정(時政)의 득실과 인물의 선악(善惡)을 모두 사책(史冊)에 써서 천하 후세에 전하는 까닭에 비록 인주(人主)의 위엄과 존엄으로써도 그 사책에 기록한 바를 감히 보지 못하고 그 사책에 쓰는 것을 금지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대개 당시의 임금이 이 사책[簡書]을 두려워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 등이 듣건대, 일전에 경연(經筵)의 신하가 사초(史草)를 불태워버리자고 청해서 전하께서 이것을 허락하시었다고 하는데, 좌우의 사관(史官)들이 또한 두손을 맞잡고 가만히 서서 그 불태우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신 등은 연중(筵中)에서 서로 주고받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 이미 여러 신하들에게 하교하시었다면 그것을 기록하고 기록하지 아니하는 것은 오로지 사관에게 달려 있을 뿐이니, 전하께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 옛날에 사관이 된 자들은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사필은 굽힐 수가 없다[頭可斷 筆不可斷]’라는 말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은 이미 성상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남의 말을 따라서 이것을 불태워버렸으니,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겸춘추(兼春秋)에 명하여 이것을 추후해서 기록하게 하고 신 등에게 회부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청은 직책을 수행(遂行)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미 본래의 사초가 없어졌으니, 어찌 추후하여 기록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으나, 그 뒤에 임금도 또한 이것을 뉘우치고 ‘사초를 불태운 것은 내가 명령한 것이 아니라’는 하교가 여러 차례 있었다.

 

2월 14일 을묘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경연사 송인명(宋寅明) 등이 지난날 연석에서의 하교가 너무 경솔했다고 경계를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참고 말하지 않은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대신과 진신(搢紳)들이 서로 잇따라 상소하니, 군신(君臣)의 사이에서 숨기고 기휘(忌諱)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박문수(朴文秀)가 선전관(宣傳官)을 의논하여 천거한 것이 공정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임금에게 말하기를,
"병조 판서가 오로지 자기 당파에 치우쳐서 무관[武弁]을 등용한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온 조정이 모두 당파인데, 어찌 홀로 병조 판서만이겠는가? 경의 이러한 말도 또한 파당 행위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또 경술년068)  에 곤장을 맞아 죽은 심유의(沈游義)를 위해서 그의 원통한 사정을 신원하고자 하여 소매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어 바치다가 승지들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송인명도 또한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계달에서 오로지 강세윤(姜世胤)만을 정지시키지 아니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그때 연석에서의 주문(奏聞)하는 것이 이처럼 자질구레하고 참람한 사건들이 많았는데, 박문수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혹은 그 목소리와 얼굴빛마저 거칠어지기도 하고 혹은 쓸데없는 우스갯 소리까지 섞기도 하여 전혀 공경하거나 삼가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미관 말직(微官末職)의 통색(通塞) 문제로 임금 앞에서 진달하기에 이르렀으나 속마음은 병판(兵判)을 아울러 중상(中傷)하는 것 같았고, 또 감히 죄인을 위하여 원통하다고 일컬으면서 사사로이 기록한 글을 가지고 임금에게 올리려 하였으니, 이것을 듣는 자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나라를 위해 순절(殉節)한 신하인 진주(晉州)의 김시민(金時敏)·동래(東萊)의 송상현(宋象賢)의 사당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무신년069)  에 나라를 위해 순절한 사람인 거창(居昌)의 이술원(李述原), 진천(鎭川)의 김천장(金天章), 청안(淸安)의 장담(張潭)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게 하였으니, 박문수(朴文秀)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지평        이재후(李載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천하의 모든 죄악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이를 책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직 군신(君臣)의 대륜(大倫)만은 반드시 한마음이 처음 일어난 데로 좇아 무장(無將)070)                  이라고 말하면서 징토(懲討)했으니, 인신(人臣)이 한번이라도 장(將)이라는 지목을 받게 되면 성필(聖筆)의 주토(誅討)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위로 군상(君上)이 지켜보고 아래로 길 가는 사람들마저 알고 있을 만큼 그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 ‘장(將)’ 한 글자뿐만이 아닌데야 이를 것이 있겠습니까? 전후 연교(筵敎)에서, ‘차마 귀로 듣지 못하겠다[不忍聞]’라는 세 글자의 지목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君君臣臣]’라는 말씀이 밝기가 마치 해와 별과 같았는데,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이것을 징토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이에 따라서 보호할 방책을 꾀하였으니, 그들이 임금에게 북면(北面)할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효경(梟獍)071)                  과 같은 무리는 상식과 도리의 이외에서 나왔으니, 비록 그 친척(親戚)이라도 반드시 그 정상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당파의 색목(色目)으로 몰아 댈 수가 있겠습니까? 역적은 자연히 역적이 되고 충신은 자연히 충신이 되는데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 누가 되겠기에 반드시 숨기고 덮어 주어 자기 당파에서 역적이 생기는 것도 보호해 주려고 했으니, 《춘추(春秋)》에 그 당여를 주토하는 뜻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대개 기사년072)                  에 민암(閔黯)과 민종도(閔宗道)가 사단을 빚은 이래로 갑의 반역이 을의 반역을 나오게 하고 앞서의 변란이 뒤의 변란을 일어나게 하여, 무신년073)                  의 변란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아! 타고난 품성(稟性)을 지키려는 마음은 사람들이 똑같이 가지는 것인데, 토적(討賊)의 의리를 대체로 누구인들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2백 년 동안 당파의 습속(習俗)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죄인을 징토하는 뜻과 죄악을 방비하는 의논이 다른 당류에게는 엄하면서도 자기 동료에게는 느슨하고 반대편에게는 밝으면서도 자기편에게는 어두웠으며, 사사 당파를 보호하려는 마음은 무거우나 군부(君父)를 향하는 의리는 가벼우니, 오늘날에 임금의 기강이 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조정의 붕당(朋黨)이 깨어지지 아니하는 데에서 비롯되지 않았겠습니까? 가만히 듣건대, 한밤중에 전석(前席)에서 성상의 하교가 너무나 진실하였으므로,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를 깨달아 알았다.’고 하였으나, 궁전의 계단을 한 발자국만 멀어지면 견제하는 말이 사방에서 이르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자기 한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순국(殉國)하였으니, 그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신원[伸理]해야 한다는 따위의 말이 다시 상소에서 나오게 된다면 전하께서 이를 측은하게 여기신다는 하교가 그 어디에 효과가 있으며, 여러 신하들이 ‘이를 깨달아 알았다’는 말이 어찌 임금의 면전에서 속인 데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신의 이 상소를 조당(朝堂)에 내리시어 그들에게 신칙하고 권려하는 뜻을 밝게 보이소서. 또 사유(赦宥)라는 것은 소인(小人)들에게는 요행인데, 은전을 함부로 베풀게 되면 죄악을 방지하는 것이 점차 해이해집니다. 이익명(李益命)과 임상극(林象極)의 조카는 간악한 역적에 연좌되어 그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니, 함부로 석방할 수 없습니다. 신정모(申正模)는 범법한 죄가 가볍지 아니한데, 갑자기 유배지를 양이(量移)하시니, 마땅히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어 나라의 법을 엄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이틀 만에 비로소 비답을 내리기를,
"지난번에 진신(搢紳)의 상소를 내가 어찌 옳다고 하였겠는가? 그러나 한밤중에 전석(前席)에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석연하게 이해하였는데, 어찌 하교한 전의 일을 가지고 말투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오늘날의 신하들은 결코 억지로 옳다고 우기거나 억지로 그르다고 우기지 않아야 하니, 피차가 어찌 다르겠는가? 이것은 곧 위에 있는 자로 하여금 여러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여 신칙하고 권려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 그대가 나를 이처럼 인도하는 것이 옳은지를 알지 못하겠다. 시기에 앞서지도 아니하고 뒤서지도 아니하여 조용한 조정을 어지럽히고자 하니, 진실로 해괴하다."
하고, 이어서 임금이 유시를 내리기를,
"몇 년 동안 굳게 응어리졌던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또한 이미 석연하게 풀려졌는데, 오늘날의 신자(臣子)가 되어서 이쪽 편이나 저쪽 편에서 어찌 다시 옛날의 습성을 되살릴 수가 있겠는가? 그 군신(君臣)의 관계를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는 방도에 있어서 어찌 하교를 상세하게 알지 못했다고 하여 신칙하고 면려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지평        이재후는 특별히 그 관직을 교체시키게 하라."
하였다.

 

진신(搢紳)의 소하(疏下)074)  의 여러 신하들이 이재후에게 배척당하였다 하여 어지럽게 상소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배척을 당한 것이 석연하게 풀어버리기 전에 있었다면 황공하고 위축되는 것이 옳을 것이지마는, 이미 석연하게 풀어버린 후에 있었으니, 어찌 지나치게 혐의스러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는 상소는 다시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또한 이재후(李載厚)의 상소 때문에 명소(命召)를 바치고 성문을 나가니,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그 명패(命牌)를 도로 그에게 주고 돈독하게 유시하게 하였으나, 김흥경이 사양하고 들어오지 않았다.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이 영상(領相)에 임명되었다는 왕명을 듣고서 즉시 양주(楊州) 땅으로 나가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돈독하게 유시하게 하였다.

 

2월 15일 병진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난날에 진신(搢紳)의 상소는 진실로 잘못된 것이며, 어제 대간의 상소도 또한 심하였습니다. 비록 중벌을 시행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처분을 모름지기 명시하여야 조정의 분위기를 진정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밤중에 밝게 유시하여 여러 신하들도 석연하게 이해하였는데, 이재후(李載厚)가 반드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게 하고자 하였으니, 심히 불가하다."
하였다. 응교(應敎)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상소는 당초에 신원(伸冤)하기를 청하는 뜻을 추후하여 아뢰면서 김상성(金尙星)의 배척하는 상소에 변명하려고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이재후의 말뜻이 불측하여 반드시 진신들을 일망 타진하고자 하였으니, 마땅히 엄하게 그를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엄하게 하든지 엄하지 않든지 오로지 임금에게 달려 있다."
하였다. 부교리 임정(任珽)이 말하기를,
"이재후의 말이 비록 과당(過當)하였다고 할지라도 대신이 상소한 말에 대해서는 신도 또한 개연스럽게 여깁니다."
하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말하기를,
"대신이 이미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전석(前席)에서 대답하였는데, 또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순국하였다.’는 따위의 말을 가지고 다시 상소하는 글장에 번거롭게 썼으니, 어찌 개연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들이 자기가 의견을 아뢰는 것은 혹 옳다고 하겠으나, 재상[卿宰]들이 대신을 직접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고,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김시형(金始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2월 17일 무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일찍이 이수해(李壽海)의 상소에서 배척을 당하였다고 하여 상소를 올려서 사직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려 이를 윤허하지 않고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재후(李載厚)의 소장은 기회를 틈타 느닷없이 올린 것으로서 그 뜻이 불측하여 하나는, ‘북면(北面)할 마음이 없다.’고 하였고, 하나는, ‘임금을 향한 도리를 가볍게 여긴다.’고 하면서 바로 몰아서 망측(罔測)한 죄과(罪科)에 빠뜨렸습니다. 그가 말한 것의 윤리가 없음이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일전에 간관(諫官)의 상소에 대하여 신이 대거리로 변명함에 있어 글을 만드는 데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재후가 그 말의 구절을 잡아내어 지적하여 면전에서 임금을 속인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한 재상이 신을 전석(前席)에서 깊이 배척하였다고 하니, 시의(時議)가 어떠한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원컨대 신의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이때 임금이 열무(閱武)를 친히 행하고자 하였는데, 기일이 황단 대제(皇壇大祭)와 상치(相値)되었으므로 21일에 앞당겨 행하게 하였으나, 일이 미비(未備)된 점이 많았다. 이에 승정원과 옥당(玉堂)·약방(藥房)에서 모두 날짜를 물려서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2월 18일 기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이때 진신소(搢紳疏)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혹은 대명(待命)하기도 하고 혹은 인퇴(引退)하여 들어가기도 하니, 지경연사(知經筵事) 송인명(宋寅明)과 시강관(侍講官) 김약로(金若魯)가 이재후(李載厚)에게 죄를 더하여 조정의 분위기를 진정시키자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관(臺官)의 직책을 체차(遞差)하는 것도 또한 가벼운 형벌이 아니다."
하였다. 여러 번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 이광부(李光溥)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융병(戎兵)에 관한 일은 숙살(肅殺)075)  의 뜻이 있으므로, 옛날의 성왕(聖王)은 반드시 가을과 겨울철에 이를 행하였습니다. 지금 양춘(陽春)이 돌아왔는데, 농부들이 밭갈이하는 것을 보살펴서 보조(補助)하는 은전(恩典)을 먼저 행하지는 아니하시고 갑자기 군사를 훈련하고 역도(役徒)를 선발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백성들이 만약 이러한 거조가 오락(娛樂)을 크게 벌리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찌 성덕(聖德)에 손상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봄과 가을철의 강무(講武)는 예전(禮典)에 실려 있는 것이다. ‘오락을 크게 벌린다. [豫大]’라는 두 글자를 내 마음에 항상 두고 스스로 권면하겠다."
하였다.

 

2월 19일 경신

비가 심하게 내렸으므로, 임금이 열무(閱武)하는 것을 물려서 행하라고 명하였다.

 

서명연(徐命淵)과 한사득(韓師得)을 승지로, 심악(沈)을 정언(正言)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지평으로, 김상익(金尙翼)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정언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길거리에서 떠도는 말을 듣건대, 지난날 야대(夜對)에서 성상의 하교가 비상(非常)하여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몸둘 바를 알지 못하고 드디어 즉시 모두가 물러났으며, 사초(史草)를 불태워 없애버렸는데 전해지는 말은, ‘차마 들을 수가 없다[不忍聞]’라는 세 글자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였고 이미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귀로 듣지 못할 내용이었으니, 그것이 성상의 지나친 행동이었던 것을 대개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날 여러 신하들이 능히 궁전의 계단에 머리를 짓찧으면서 지성으로 올바르게 성상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쓸데없이 상심하다가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물러 나왔으니, 임금을 보필하고 바로잡는다는 뜻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까? 전하께서 한 마디 말씀을 겨우 궁궐[厦氈] 위에서 실언(失言)하시자마자 흉도들의 교활한 마음이 이미 상소의 글장 사이에 드러났는데, 저 이재후(李載厚)란 자는 직책이 대관(臺官)의 반열에 있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워하는 마음이 없이 곧, ‘한밤중에 전석(前席)에서 성상의 하교가 순순(諄諄)하였다.’라는 따위의 말로써 마치 듣기를 즐거워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는 곧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의 남은 여당(餘黨)으로서 ‘차마 들을 수 없다[不忍聞]’ 세 글자를 은연중에 상소에 삽입하여 성상의 덕을 가리고 막아버리는 근거로 삼으려고 하였으니, 그가 진신(搢紳)을 일망 타진하려던 계획과 같은 것은 특별히 자질구레한 작은 일입니다. 마땅히 그를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전을 시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재후의 사건은 그가 ‘질투하여 모함하였다.’라고 한다면 가하지만, 그가 ‘임금을 바로잡아 구제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한다면 이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석연하게 이해한다는 뜻인가?"
하였다.

 

2월 20일 신유

비가 개었다. 임금이 또 내일 열무(閱武)할 것을 명하였는데, 삼사(三司)에서 차자(箚子)와 소를 올려 중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승정원과 약원(藥院)에서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는데, 번갈아 그 날짜를 물려서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조정의 분위기가 마치 흐트러진 머리털과 같아서 나랏일을 제대로 시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융병(戎兵)이라도 다스려 보고자 한 것이다. 어제 비록 비 때문에 정지하였으나, 돌이켜 이를 또 생각해보니, 삼군(三軍)이 이미 정돈하여 기다리는데 도로 이것을 중지한다면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비올 때에 사냥하였다는 고사(故事)076)  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 등이 연명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달 10일 밤중의 경연에서 ‘내가 만약 밝게 유시한다면 세도(世道)가 진정될 수도 있고 여러 신하들도 모두 이를 깨달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계셨기 때문에 신 등은 판부사 이의현(李宜顯)·서명균(徐命均), 우의정 김흥경(金興慶),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와 더불어 일체로 성상께서 밝게 유시하도록 우러러 청하였던 것인데, 그때 성상께서 하교하시게 되자, 사람들은 일제히 똑같은 목소리로 중지하시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와 같은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성상의 하교로 말미암아 이것을 기록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중간에 떠돌아다니는 말들은 심지어 ‘두서너 사람들이 임금에게 하교하기를 강청하였다.’라고까지 하여 그 말이 지극히 음험했으니, 이것은 오로지 사초(史草)에 증빙할 수가 없는 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신 등은 성상께서 하교하신 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진실로 지당하다고 여깁니다마는, 아래 사람들에게 순문(詢問)할 때에 여러 신하들이 대답한 말에 이르러서는 당후관(堂后官)으로 하여금 사실대로 기록하게 하고서 한편으로 성상께서 예람(睿覽)하시는 과정을 거쳐서 《승정원일기》에 넣어서 기록하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건의한 바는 결단코 다른 뜻이 없었다. 세도(世道)가 비록 어지럽게 떠든다고 하더라도 〈지난 계축년077)   1월〉 19일에 하교를 반시(頒示)한 것은 여러 신하들이 모두 청하였던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두서너 신하들을 지적하여 배척하니, 이 또한 무슨 뜻인가?"
하였다. 대개 이때에 사초를 이미 불태워버렸으나 연석에서 한 말이 전파되어 사람들이 마음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멀지 않아서 반드시 말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하고, 또 혹자는 말하기를, ‘송인명 등이 이미 19일 하교를 들었는데도 오히려 다시 유시(諭示)하기를 청한 것은 그 뜻이 하교한 것을 감히 들을 수가 없다고 여기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었다.’고 하였는데, 이윽고 정형복(鄭亨復)의 상소가 나왔으므로 송인명 등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임금이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대찬(代撰)하게 하였다가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곧 지제교(知製敎) 임정(任珽)에게 맡겼다. 임정은 일찍이 연석에서 김흥경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임정이 곧 글을 지어 바쳤는데, ‘일전에 대거리로 변명한 글에서 이미 경이 맡아서 살피는 데에 우연히 실수가 있음을 양해하였는데, 뜻밖에 경을 배척하는 의논으로 인하여 경을 불안하게 만들게 되었다. 지나간 일은 모조리 선천(先天)에 맡겼으니, 지금 아무런 의논할 것이 없다. 한밤중의 하교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석연하게 풀렸는데, 어찌 다시 이를 혐의스러워할 것이 있는가?’라는 귀절이 있었다.

 

2월 21일 임술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세번이나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힘써 조정에 나오게 하니, 곧 배명(拜命)하였다.

 

임금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말을 타고 노량 교장(露梁敎場)에 거둥하여 하루 종일 무사들을 사열하였다. 임금이 자주 암호 명령을 내려서 전사(戰士)들이 서로 습격하여 사람과 말이 상한 것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명하여 삼군문(三軍門) 대장(大將)들에게 내구마(內廐馬)를 내려 주고, 장사(將士)들에게는 상(賞)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별군직(別軍職) 구세지(具世智)가 남보다 뛰어나게 용감하고 말을 잘 달렸으므로 임금이 명하여 수령(守令)으로 제수하였다. 초경(初更)에 비로소 환궁하였다.

 

헌부 【대사헌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열무(閱武)하시는 성대한 일에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이 병들었다고 하여 끝내 조련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종중 추고하여야 합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서명형(徐命珩)의 사건은 정지하였다.

 

2월 22일 계해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시강관(侍講官)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정형복(鄭亨復)은 다만 길거리에서 떠도는 말을 듣고서 진소하였으니, 진실로 경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두려워하고 놀라워한다는 말을 다만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 무슨 실언(失言)이 있었다는 말인가?"
하니, 동경연사(同經筵事)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비록 그대로 옮겨 전하였다고 하더라도 또한 실언입니다. 전하는 말은 쉽게 와전(訛傳)되므로 말의 내용을 반드시 살펴보고 조심을 더해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정형복은 반드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오히려, ‘임금을 바로잡아 구원하지 못하였다.’고 배척하였으니, 이재후(李載厚)를 어찌 해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니,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재후의 상소에서, ‘북면(北面)할 마음이 없다.’라는 따위의 말은 곧 하나의 급서(急書)입니다."
하였다.

 

헌부 【지평 김상로(金尙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재후(李載厚)의 기회를 틈타서 소를 올린 의도는 헤아리기가 어려우나, 사단(事端)을 빙자하여 화를 남에게 전가시키려는 뜻을 이루고자 하여 겉으로 말을 꾸며 만들어서 감히 한번 시험해 보려는 계책으로 삼고, 그 방자한 뜻을 제마음대로 부려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렸으니, 세도(世道)를 위한 걱정이 거의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습니다. 나라의 걱정거리를 염려하는 방도는 미리 그 조짐부터 막아버리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니, 그를 삭탈 관직함이 마땅합니다. 일전에 연석(筵席)에서 내린 하교는 원래 바로잡아 논의할 나위가 없었는데, 정형복(鄭亨復)이 다만 길거리에서 들은 말을 가지고 번거롭게 소장을 올리기에 이르러 매우 망령되고 경솔한 데에 관계되었으니, 마땅히 그를 파직시켜야 합니다. 함경도 도사(都事) 홍상인(洪尙寅)이 일찍이 대간(臺諫)의 관직에 있었을 때 고의적으로 김영해(金寧海)의 계사(啓辭)를 뽑아내어 교묘하게 도피시키려는 흔적이 분명하니, 그 마음이 간악스럽고 그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를 북도(北道)의 좌막(佐幕)078)  에 제수하자, 그는 뻔뻔스럽게 어전에 사폐(辭陛)079)  하였으니, 마땅히 그를 파직시켜야 합니다. 전조(銓曹)의 직책은 관리들을 격려하여 사기를 분발시키는 데에 있는데, 그를 좌막에 의망(擬望)하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그들을 추고해야 합니다. 변방의 땅을 싫어하고 회피하는 것이 근래의 고질화된 폐단인데, 이일제(李日躋)는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옮겨지자 임지에 부임한 지 얼마 아니되어 마침내 장계(狀啓)를 올려 파직하기에 이르렀으니, 명관(名官)이 변방을 회피하려고 꾀하는 습성과 도신(道臣)이 그 청을 굽어 따라주는 잘못을 모두 경계하고 신칙해야 합당합니다. 이일제는 마땅히 파직해야 하며 감사 박사수(朴師洙)도 또한 마땅히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합니다. 어가를 모시고 호위하는 것은 엄숙한 자리인데, 전 병사(兵使) 장태소(張泰紹)는 반열의 행렬에서 함부로 말을 달려서 뻔뻔스럽게도 지레 돌아갔습니다. 그 행동이 비뚤어지고 망령되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으니, 마땅히 그를 파직시켜야 합니다. 임금의 말씀을 대찬(代撰)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한데 대신에 대한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자기 의견과 맞지 않는다 하여 글을 지어 올리기를 즐겨하지 않고 소장을 올려서 사면하였으니, 후일의 폐단에 관계가 있습니다. 마땅히 그를 종중 추고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이재후는 다만 파직만 하도록 명하고 홍상인은 너무 지나치다고 하교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아울러 그대로 윤허하였다.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이재후(李載厚)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여 말하기를,
"신의 마음에 원통한 바가 있어서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상소를 하고 아뢰기도 하여 마음속에 아무런 숨김이 없는 뜻을 사사로이 붙였던 바입니다. 그런데 지금 곧바로 악역(惡逆)으로 몰아붙이니, 만약 그의 말대로 한다면 신의 몸뚱어리는 온전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지난밤에 소대(召對)한 일은 모두 황송하고 두려워서 입을 다물고 감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다만 성상의 하교를 선포하지 말도록 청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곧 이것을 기회로 보고 말을 이리저리 둘러대어 사람들을 협박하고 억누르며 자기가 주장이 다른 자들을 제거하려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더욱 위험과 공포를 절실히 느낍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2월 24일 을축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2월 25일 병인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진순(李眞淳)이 말하기를,
"양역(良役)을 바로잡으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일찍이 2필(疋)을 감할 수가 없다는 유시(諭示)를 하셨던 것은 대개 나라의 경비가 부족할까봐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이를 연구하고 헤아려 보니 서울과 외방에서 2필을 바치는 군정(軍丁)이 49만 3천여 인이었고, 그 군포(軍布)는 98만 6천여 필이었습니다. 만약 1인당 반필을 줄인다면, 마땅히 74만여 필이 될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1년의 경비를 배정하여 계산한다면 부족한 것은 1만 6천여필이 되니, 조정에서 만약 8천 결(結)의 전세(田稅)를 덜어내어 보충한다면 족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책자를 만들어서 바치게 하였다. 뒤에 이진순이 책자를 바쳤으나, 임금이 또한 이를 채택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하직하는 수령(守令)들을 불러서 보고 신칙하고 격려하여서 그들을 보내었다.

 

사간(司諫) 이광부(李光溥)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금일에 조정의 공론이 이재후(李載厚)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은 형세에 있어 당연히 이르게 되어 있으나, 전 정언(正言) 정형복(鄭亨復)이 논죄하여 열거한 것은 본정(本情) 밖에서 나왔습니다. 지난날 밤에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말들은 엄격하고 비밀스러웠으며, 사초(史草)를 불태워 없애버렸으니, 부자 형제사이라도 그 말이 서로 전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 비답(批答)하신 내용을 가지고 보건대, ‘성상께서 밝게 유시하시고 여러 신하들이 깨달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외간에서 헤아려 짐작한 바로 〈지난 계축년080)   1월〉 19일의 하교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재후의 상소에서 이른바, ‘한밤중에 전석(前席)에서 성상의 하교가 순순(諄諄)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대개 또한 그 비답한 내용에 나타난 바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었으며, 만약 그,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不忍聞]’라는 세 글자는 정형복의 상소가 나온 뒤에 비로소 나타난 것입니다. 신이 군부(君父)의 하교에 대하여 ‘순순(諄諄)’이라는 따위의 글자는 으레 사용하고 있으나, 지금 이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不忍聞]’는 세 글자를 끄집어내어 이를 즐겨 듣고 찬탄(贊歎)했다고 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정형복의 상소도 진실로 괴상하지만, 이재후의 상소도 또한 어찌 괴상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6일 정묘

박문수(朴文秀)를 대사헌으로, 이유(李瑜)를 대사성으로, 윤양래(尹陽來)를 형조 판서로, 김기석(金箕錫)을 헌납으로, 조진세(趙鎭世)와 김종태(金宗台)를 정언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부수찬으로, 황재(黃梓)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헌부 【지평 김상로(金尙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당진 현감(唐津縣監) 이정집(李廷楫)은 단지 관작과 벼슬이 귀중한 줄 만을 알고 명교(名敎)가 무슨 물건인지를 알지 못하여 의리를 지키는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누추(陋醜)하게 여기니,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해야 합니다. 영관(瀛館)081)  은 지극한 청선(淸選)으로서 의리를 지키는 것이 남다른데, 유신(儒臣)들이 상소하여 논할 적에 드러나게 지척(指斥)한 바가 있어서 박필재(朴弼載)가 지난번에 한번 나온 것도 오히려 비난과 물의를 일으켰으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병조 좌랑 임술(任述)은 스스로 선대(先代)의 단점을 진달하다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하였는데 탄핵(彈劾)을 무릅쓰고 관직에 머물러 있어 전혀 염치(廉恥)가 없었으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춘천 부사(春川府使) 민창기(閔昌基)는 일찍이 영남 지방의 곤임(閫任)을 맡았다가 음형(淫刑)을 함부로 시행하였는데, 방어(防禦)의 중대한 임무를 그에게 다시 맡길 수가 없으니, 마땅히 그를 파직해야 합니다. 형조 정랑 신도동(辛道東)은 잔열(殘劣)하고,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이섭(李燮)은 혼모하며,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 조윤벽(趙潤璧)은 어리석습니다. 모두 그대로 사판(仕版)의 반열에 둘 수가 없으니, 마땅히 아울러 그들의 관직을 도태시켜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았고, 임술과 신도동 등의 일만 의윤(依允)하였다.

 

유학(幼學) 김상태(金相泰) 등이 상소하여 고 상신 최규서(崔奎瑞)를 서원에 제향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연달아 조지(朝紙)를 접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 신하들이 석연하게 양해(諒解)했다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대개 신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전에 진청(陳請)한 바가 있었지만, 연석(筵席)에 입시하면 문득 신자(臣子)들이 감히 귀로써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리셨으므로 신 등은 일제히 같은 목소리로 이를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니, 대개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러서는 다른 일들을 말할 겨를이 없었던 때문입니다. 이미 ‘감히 들을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서 송구스러운 마음이 있거니와 어찌 감히 석연한 뜻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신은 그날에 약간 면계(勉戒)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말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가슴에 불안한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말씀은 실[絲]과 같고 그 나오는 것은 솜[綸]과 같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말씀을 하실 때에 신중하지 아니하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계속해서 더욱더 삼가고 신칙하기를 더하여 외간 사람들로 하여금 함부로 엿보아 헤아리지 못하게 하시고, 또한 자질구레한 생각을 흉중에 머물러 두지 마소서. 하물며 지금 전에 없던 나라의 경사가 생기고 좋은 운회(運會)가 바야흐로 새로워서 온 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화기로운 기운이 넘쳐 흐르며 묵은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내고 암울한 세상을 활짝 열어서 천지가 교태(交泰)하고 내외가 화합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옥당(玉堂) 김약로(金若魯)와 지평 김상로(金尙魯) 등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지난날 하교한 뒤에도 만약 석연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면, 장차 여러 신하들을 어떻게 쓰겠으며 나도 또한 어떻게 남면(南面)할 수가 있겠는가? 지난날에 영상[首揆]도 또한 말하기를, ‘석연하게 알았다.’라고 하였었다. 영상이 이 당습(黨習)에 대하여 깨끗이 벗어나지 못했는데도 그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므로, 나의 생각으로는 이때가 바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때라고 여겨서 드디어 그를 중복(重卜)082)  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런데 오늘 이 상소에서는 비단 석연하지 못하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나의 말을 부실(不實)한 것으로 돌린단 말인가?"
하고, 또 김상로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헌부의 신하들이 정형복(鄭亨復)을 망령스럽고 경솔하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대신들은 정형복에게 굽신굽신 허리를 굽혀서 사죄하고 있으니, 이목(耳目)의 관원들은 대신 이하를 모두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이의현의 상소를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정형복의 상소는 잘못 들은 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가 따뜻하게 비답하여 이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이 상소에서 나는 군군 신신(君君臣臣)의 뜻을 밝히고자 한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비록 죄를 주더라도 반드시 그를 예로써 진퇴(進退)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그 이튿날 임금이 비로소 비답을 내리기를,
"비록 나이가 어려서 망령되고 경솔한 무리라고 하더라도 한밤중에 하교한 뒤에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흰 머리의 늙은 고굉지신(股肱之臣)이겠는가? 경이 이미 나를 저버렸으니, 내가 어찌 달리 유시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함께 오라고 한 사관을 철수하라 명하고, 또 하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곧은 자를 들어서 쓰고 굽은 자를 버린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세상에서 곧은 자들은 몇 사람이겠으며 굽은 자들은 몇 사람이겠는가? 대관(大官)도 오히려 굽었는데, 다른 사람이야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하교하기 전에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하면서 서로 이기려고 한 것은 오히려 혹 가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밝게 유시한 뒤에도 만약 석연하게 깨달아 알지 못하고 전처럼 자기 당파나 비호한다면 금일의 신자가 아니다. 만약 오히려 석연하지 못하다고 하여 이를 의심한다면 이것은 여러 신하들을 불충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에게는 곡진(曲盡)하다고 이르면서도 그 스스로는 석연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더욱 이상스러운 점은 그때 하교한 것은, ‘불령(不逞)하게 선동(煽動)한다.’는 말을 외운 정도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영상의 말에는 마치 내가 달리 감히 귀로써 듣지 못할 말을 하여서 신료들을 꼼짝 못하게 억누르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은 깊은 밤중에 등대(登對)하느라고 정신이 혼미하고 착오된 결과가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외간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되게 엿보고 헤아리지 못하게 하며 자질구레한 생각을 흉중에 머물러 두지 말라.’는 따위의 말을 하였으니, 이 무슨 말인가? ‘천지가 교태하고 내외가 화합한다.’라는 따위의 말에 이르러서는 또한 한없이 이상하고 의심스럽다. 이재후(李載厚)의 상소는 하교를 상세히 알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조정를 욕하였으니, 그 마음이 비록 간악스럽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그를 용서하였다. 정형복의 상소도 또한 와전(訛傳)된 말을 잘못 듣고서 경거 망동하여 함부로 아뢴 것에 지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모두 이미 정상을 참작하여 처분하였다. 그러나 관직이 삼사(三事)083)  에 있어 이미 나의 하교를 듣고서도 오히려 또 감히 어지러운 말들을 아뢰어서 분수와 의리를 문란시켰으니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게 되었으며, 인심을 현혹(眩惑)시켰으니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게 되었다. 왕자(王者)가 법을 쓸 때에는 마땅히 대관(大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태아(太阿)084)  가 수중에 있으니, 어찌 언제나 어물어물 넘기고 말겠는가? 나라의 뜻을 먼저 보이지 아니할 수가 없다."
하였다.

 

2월 27일 무진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만 유복명(柳復明)과 구수훈(具樹勳)의 사건만을 윤허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상소는 귀가 어두워 잘못 들은 데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태(交泰)하고 화합한다.’는 말은 모름지기 체념(體念)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하교한 이후로는 피차에 〈옛날 구습(舊習)을〉 모두 버려야 한다."
하니,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고른다[臣擇君]’라는 세 글자에 대하여는 전후(前後)의 하교에서 끝내 밝게 유시하시지 아니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공조 판서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마땅히 이름을 들어서 밝게 하교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이를 말하고 싶었으나, 영상으로 인하여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의 말로써 그치고 말았다."
하였다.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영상이 친히 하교를 받들었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 상소를 하였으니, 사건의 지나간 뒤에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신은 크게 두려워합니다. 지금 마땅히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물어 보시고, 성상의 생각에는 다른 뜻이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유시하심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밝게 알도록 하고, 사초(史草)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게 하여 서울과 외방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윤순이 또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상소는 비록 자기 주장을 고집해서 말한 바가 있기는 합니다만, 대개 그 마음씨가 능히 일을 맺고 끊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된 것입니다."
하고,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마음을 같이해서 나라를 섬겨야 하는데, 공공연히 사단을 일으켜서 성상의 마음으로 하여금 괴로워하게 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였으니, 이러한 모의를 한 자는 그 또한 불인(不仁)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특별히 불인한 것뿐이겠는가? 바로 무장(無將)의 무리들이다."
하였다.

 

2월 28일 기사

오원(吳瑗)을 응교로, 윤휘정(尹彙貞)을 부교리로, 김재로(金在魯)를 판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의 관작(官爵)을 삭탈하라고 명하였고, 심지어는 ‘관직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의(公議)를 배반하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겨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데에 돌아갔다.’고 하교하였는데, 뒤에 연신(筵臣) 송인명의 말로 인하여,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데에 돌아갔다.[自歸誣上]’라는 네 글자는 삭제하여 버리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아! 신축년085)  의 일은 우리 자성(慈聖)의 밝으신 하교로써 우리 황형(皇兄)께서 전수(傳授)한 것이 정정 당당한 일이었다. 그때 대신들 가운데 비록 이를 도와 준 자가 있었지만, 이것이 진실로 직분상의 일이었지 무슨 공이 될 만한 일이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범진(范鎭)086)  은 어찌 공훈을 칭할 수가 없다고 하겠으며 한기(韓琦)087)  도 또한 어찌 공훈을 감정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책명(策名)을 정하는 일을 빙자하여 공훈을 희구하고자 한 자는 김창집(金昌集)이었으며, 이이명(李頤命)을 없애버리고자 하고 그 재능을 시기하여 의심한 자도 또한 김창집이었다. 그 사이에서 반복하여 불측(不測)한 말을 만들어 낸 자는 역적 목 호룡(睦虎龍)이었고, 다투어 불궤(不軌)한 음모를 세우고 목호룡과 관계를 맺어 이로 인하여 무신년088)  의 역란(逆亂)을 빚어낸 자는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이었다. 아! 삼조(三朝)의 혈맥(血脈)은 다만 황형과 과궁(寡躬)이 있을 뿐이었으니, 만약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오직 몸을 바쳐서 충성을 다하여야 마땅할 것인데, 어찌 공을 탐하여 기회를 엿볼 수가 있었겠는가? 만약에 그들이 감탄(感歎)하여 은혜를 잊지 못할 마음을 가졌다면 어찌 다투어 불궤한 음모를 세울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바로 시상(時象)으로 본다면 서로 빙탄(氷炭) 사이라고 하겠으며, 그 마음으로 본다면 서로 관통(貫通)한 것이다. 아! 과궁이 사성(慈聖)의 가엾게 여기고 슬퍼하시는 뜻에 감동하고 황형이 대업을 남기신 뜻을 이어받아서 지금에 이르렀다. 황형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왕위를 전해 주었고 나도 또한 공정한 마음으로 이를 받았는데, 어찌 그들이 협잡하고 희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의 조정에 쓰여질 수가 있겠는가? 김일경과 박필몽이 임금을 속였다는 말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마는,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아니하고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것을 방비하기를 엄하게 하여 난신들의 권력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진계하였고, 그 역적들을 토벌하기를 엄하게 하여 난적들이 임금을 속인 죄를 주멸하였다. 무신년 이후에 김일경과 박필몽이 반역한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았고, 한밤중에 임금이 하교한 뒤에 여러 사람들이 마음으로 이를 깨달아서 알았으니, 전일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던 자들도 마땅히 황송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흰 머리의 늙은 대신이 오히려 김창집을 사랑하고 아껴서 이처럼 괴이한 상소를 올렸으니, 그게 무슨 마음이겠는가? 하물며 지난밤에 나의 하교는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위협하여 버티던 말을 그대로 옮겨서 전한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말하기를, ‘차마 귀로써 들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문득 말하기를, ‘차마 귀로써 들을 수 없는 하교였다.’라고 하였으니, 그것도 또한 임금을 속이는 것이 심하다. 여러 신하들이 만약 그 할아비나 그 아비와 세록(世祿)을 그대로 가지려는 마음이라면 모두 이 하교를 듣고 마음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나를 섬겨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지평 조명경(曹命敬)이 상소하였는데, 말하기를,
"한두 사람의 역신(逆臣)을 다시 신원하여 복작(復爵)하려는 것이 곧 한쪽편 사람들이 10년 동안 추진해 오는 집안의 계획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가린다[臣擇君]’라는 세 글자에 대하여 성상의 뜻이 있는 바를 은밀히 보여 주었는데도 그칠 줄을 알지 못하였고, 〈지난 계축년089)   1월〉 19일에 연석(筵席)에서의 하교는 그 뜻의 밝기가 해와 별과 같았는데도, 그만둘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저 지난번 밤에 임금의 전석에서 모두가 감히 다시 제론하지 않겠다고 앙대(仰對)하였으나, 오히려 그만둘 줄을 알지 못합니다. 항간(巷間)의 필부(匹夫)라도 한번 적(敵) 이하의 사람에게 그리 하겠다고 쾌히 승낙하였으면 오히려 감히 그 말을 이리저리 변명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이미 군부(君父)의 앞에서 말을 그리하여 놓고도 공공연히 이를 저버렸습니다. 차라리 지존(至尊)을 면전에서 속일지언정 차마 자기의 사사로운 당파(黨派)를 끊어버리지 못하니, 군강(群綱)이 날로 허물어지고 신하의 도리는 날로 높아집니다. 조금이라도 생각과 욕심이 차지 아니하면 문득 감히 분노와 원망을 남보다 먼저 자행(恣行)하여 정형복(鄭亨復)의 상소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조현명(趙顯命)과 김약로(金若魯) 등이 연석에서 주달(奏達)한 글을 보건대, 그날 성상의 하교는 처음부터 신하들이 힘써 간쟁할 만한 지나친 일이 없었는데, 정형복이 어디에서 소문을 듣고서 이따위 말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는 와전된 말이 중간에서 의심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의 마음이 당황하고 현혹되니, 그가 이른바, ‘마음이 황황(遑遑)하여 안정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가 실지로 먼저 창도(倡導)한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빨리 그를 먼 변방에 귀양보내는 형벌을 시행하여 그가 거짓말을 하여 임금을 무고한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이 무슨 기밀 관계가 있기에 서로 공격한단 말인가? 저편이든 이편이든 감히 군부(君父)의 앞에 이를 아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따위 말에 대한 방비를 엄하게 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하고, 조명경의 관직을 교체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10일에 입시(入侍)했던 여러 신하들을 다시 불렀는데, 김흥경(金興慶)과 박사익(朴師益)만이 유독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과 부응교 김약로(金若魯) 등이 말하기를,
"이의현(李宜顯)의 상소는 오로지 귀가 어두워 잘못 들은 데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벌이 너무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창집(金昌集)의 일에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여 울불(鬱怫)한 때문에 이러한 소장을 올린 것이니, 귀가 어두워 잘못 들은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지사(知事)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이의현이 또한 귀가 어두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요, 정형복(鄭亨復)이 임금을 바로잡아 구원하지 못하였다고 그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 허물을 인책하고 이어서 면계(勉戒)의 말을 붙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다만 경에게 그가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는지의 여부를 물었을 뿐이니, 이의현을 비호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다. 임금이 또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전교(傳敎)를 이미 보았는가? 정유년090)  에 독대(獨對)091)  한 것이 그때에 있어서는 혹 그를 그르다고 하겠지만, 그 뒤에 있어서는 그를 그르다고 할 수 없는데 이것을 가지고 이이명(李頤命)을 천극(栫棘)092)   하자고 청했으니, 그 마음이 불측스럽다. 그때 홍치상(洪致祥)이 써 보낸 사람들의 성명(姓名) 가운데에 김창집(金昌集)의 이름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두 사람을 구별하여 밝게 유시하는 뜻이다."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은 오로지 황형(皇兄)과 나뿐이었으니, 대신이 된 자가 건저(建儲)하기를 직접 청하는 것이 옳은데, 어찌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필요가 있었겠는가? 내가 위로 자성(慈聖)의 밝은 교지와 황형(皇兄)의 부탁을 받들었으니, 어찌 저들의 구실(口實) 거리가 되겠는가?"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정형복의 상소는 비록 망령되고 경솔하였다고 하나, 조명경이 심지어 임금을 무고했다고 죄를 얽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실로 세도(世道)의 걱정이 됩니다. 마땅히 조명경에게 죄를 더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9일 경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조진세(趙鎭世)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성상께서 국시(國是)를 밝히고 조정의 분위기를 가라앉히려는 것으로써 제일주의로 삼았으나, 여러 신하들은 자신의 사사로운 당파를 비호하고 성상의 하교를 저버리는 것을 능사로 삼았습니다. 옛날 정의에 이끌려 이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특히 사사로운 붕당을 중하게 여기며 군신(君臣)의 도리를 가볍게 여김을 깨닫지 못했으니, 어찌 그다지도 현혹되었단 말입니까? 아! 저들은 흑백(黑白)을 현란시키고 상하의 사람들을 억제하여 사방의 이목(耳目)을 가리우고자 하며 만세(萬世)의 공의(公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비유컨대, 마치 교만한 아이들과 같아서 조금도 거리끼거나 두려워하는 바가 없어서, 비록 책망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다시 그전과 같습니다. 전하께서 자비롭게 양해하시는 것이 엄중하게 꾸짖는 것보다 지나치시고, 측은하게 여기시는 것이 강의(剛毅)하게 대하는 것보다도 앞서시므로 아침에 견책과 벌을 베풀었다가 저녁에 도로 거두시고 풀어 주시니, 저들이 어찌 거리끼는 바가 있어서 그만두겠습니까?"
하고, 이재후(李載厚)와 조명경(曹命敬)을 구원하고자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밝게 유시하기 전에는 힘써 상대편을 이기려 하는 것은 오히려 가하지만, 남의 신하가 된 자가 이러한 하교를 보고서도 오히려 붓을 들어 글장을 올리고자 하니, 이 또한 무슨 뜻인가?"
하고, 그 상소를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민응수(閔應洙)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불러서 보았다. 민응수가 영남 지방을 진정시키고 인재를 장려하여 선발할 뜻을 힘써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원군(豐原君)093)  도 또한 진정시킬 방도를 일찍이 말하였는데, 경은 묵묵히 이 뜻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라. 영남 지방의 일은 하나같이 경에게 부탁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김성탁(金聖鐸)은 곧 학문하는 선비이니, 경은 모름지기 내가 그를 잊지 못한다는 뜻을 전해 주어 그를 권유하여 벼슬길에 나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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