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신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날씨가 차다고 하여 황단(皇壇)094) 의 친제(親祭)를 중지하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황단에 신하의 예를 행하여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군신(君臣)의 뜻을 알게 하려고 한다."
하였다. 서명균이 황단에 나오지 아니하는 여러 신하들을 추고(推考)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 밝게 유시한 후에 그들이 만약 나를 임금으로 여긴다면 오늘 어찌 참석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신하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당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부서(簿書)의 정사를 하겠는가?"
하고, 다만 능침(陵寢)의 일만을 품신하게 하였다. 그 후 빈청(賓廳)의 소대(召對)에 진신소(搢紳疏)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진참(進參)하였는데, 홀로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이 들어오지 않으니, 책유(責諭)를 내리고 그 관직을 파면시켰다.
3월 2일 임신
어유룡(魚有龍)·정필녕(鄭必寧)·송수형(宋秀衡)을 승지로, 이광운(李光運)을 헌납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지평으로, 이석표(李錫杓)를 정언으로, 한현모(韓顯謨)를 부응교로, 유최기(兪最基)를 교리로 삼았다.
3월 3일 계유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으로, 임정(任珽)을 부교리로 삼았다.
3월 4일 갑술
별겸춘추(別兼春秋) 송교명(宋敎明)이 이하종(李夏宗)·서명신(徐命臣)·김상적(金尙迪)을 한림(翰林)으로 추천하였다. 전 한림 민형수(閔亨洙)가 이르기를,
"이하종은 이명언(李明彦)의 당질(堂姪)로서 또 별다른 명성(名聲)도 없었으며, 김상적은 그의 고조(高祖) 김선여(金善餘)가 한림으로서 임진년095) 에 임금이 파천(播遷)할 때를 당하여 사초(史草)를 불사르고 도망쳐 버렸으니, 그 후손은 한림에 천거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아울러 저지하였다. 지사(知事) 김시환(金始煥)이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사초를 불태워 버렸는지의 여부는 기자헌(奇自獻)의 신축년096) 상소에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으며, 친상(親喪)을 당하여 사초를 전한 정상과 그가 도주한 허실은 유근(柳根)의 금석문(金石文)에서 같은 때에 어가(御駕)를 호종한 사실을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본말을 밝게 알았는데, 무슨 무고(誣告)와 억울함이 있겠는가?’라고 비답하였다.
3월 5일 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양궁(兩宮)을 화협하게 할 것을 앙면(仰勉)하고, 또 사사로이 액정(掖庭)을 비호한다고 경계의 말을 올리니, 임금이 다만 ‘그렇다. 그렇다.’하였다.
서종옥(徐宗玉)을 전라도 관찰사로, 김약로(金若魯)를 교리로, 임정(任珽)을 부교리로, 서명구(徐命九)를 승지로 삼았다.
3월 6일 병자
홍상빈(洪尙賓)을 승지로 삼았다.
3월 7일 정축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보련(步輦)을 타고서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였다.
3월 10일 경진
김상규(金尙奎)를 승지로, 이저(李著)를 사간으로, 유건기(兪健基)를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전라도 좌도 감시(左道監試)의 초시(初試)를 파장(罷場)하였다. 그때 도사(都事) 한덕량(韓德良)이 ‘특서자동생(特書子同生)’으로써 부(賦)의 글제로 삼았는데, 여러 유생들은 원자(元子)의 탄생을 위한 경과(慶科)에서 노(魯)나라 장공(莊公)의 고사(故事)097) 를 인용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덕량이 글제를 장차 다른 제목으로 바꾸고자 하니, 여러 유생들이 기와와 돌을 던져 시관(試官)들을 때리고 쫓아냈다. 사건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조현명(趙顯命)의 말을 따라서 한덕량과 참시관(參試官) 홍성보(洪聖輔)·서명걸(徐命杰) 등이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본도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그의 죄를 성토하니, 임금이 무심히 한 일을 가지고 허물을 씌운다고 하여 따르지 아니하였다.
부제학 윤혜교(尹惠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날 야대(夜對)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사실대로 기록한 사필(史筆)은 완전히 인멸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이것을 불태워 없애버리라는 성상의 하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승선(承宣)의 유윤(惟允)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힘써 이를 간쟁(諫爭)하여야 마땅한 법인데, 하물며 임금께서 내리신 명령이 없는데도 임의로 불태워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 당시의 승선들에게 비록 먼 지방에 유배시키는 형벌을 베풀더라도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겸춘추(兼春秋)의 임무는 그 말을 기록하고 행동을 기록하는 것이 좌우의 사관(史官)들과 다름이 없는데,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받들기만 하여 그 불살라 버리는 데에 맡겨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날의 겸춘추 또한 마땅히 도태시켜 버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단지 승지만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부교리 임정(任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조진세(趙鎭世)가 헌신(憲臣)을 논박할 적에 억지로 그 허물을 찾아냈으며, 김기석(金箕錫)은 이미 유신들과 더불어 연석에 나아가서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아니하다가 물러나와 인피(引避)하였습니다. 조진세와 김기석에게 아울러 견책하여 파직시키는 형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어사(御史)로 선발된 사람 이석표(李錫杓)는 즉시 상경(上京)하여 왕명을 기다리지 아니하니, 마땅히 잡아와서 처치해야 합니다. 교리 유최기(兪最基)는 지난번에 어버이의 병으로써 소를 올리고 지레 길을 떠났는데, 갑자기 또 사람들을 따라 상소하는 데에 참여했으니, 그 행동이 해괴합니다. 마땅히 견책하는 형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김성응(金聖應)을 평안도 병사로, 이명상(李命祥)을 전라도 병사로 삼았다.
3월 11일 신사
임금이 최숙빈(崔淑嬪)과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묘(廟)에 거둥하였다. 이날 비가 심하게 내리므로 여러 승지들이 이를 정지하도록 청하려고 청대(請對)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임금이 여가(輿駕)를 타고 나오면서 말하기를,
"경들은 날씨가 궂은지 맑은지를 가려가면서 어버이를 뵙는가?"
하고, 아울러 이들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3월 12일 임오
정형익(鄭亨益)을 판윤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정언으로, 이종백(李宗白)을 교리로 삼았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여러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므로, 임금이 비답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경이 처음에는 비록 상세하게 알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이미 밝게 유시하는 말을 듣고서 즉시 들어와 사례하는 글을 올렸으니, 이재후(李載厚)가 경을 배척한 것은 스스로 경알(傾軋)하는 행위로 돌아갔는데, 어찌 경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한갓 염우(廉隅)만을 따르려고 하는가? 만 가지 보약(補藥)을 복용하는 것도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만 같지 못한데, 언제나 신하들의 사직 상소를 보면, 나는 마치 질병이 더해지는 것과 같다. 경이 약원(藥院)의 관직을 띠고 어찌 차마 이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송화 현감(松禾縣監) 이원곤(李元坤) 등 10인이 상소하기를,
"스승 전 부수(副率) 이세환(李世瑍)은 학문의 연원이 단정하고 학식이 정밀하고 깊으며, 궁핍하게 살면서 학문을 전수(傳授)하여 과거에 오르거나 사적(仕籍)에 실린 자가 많으니, 청컨대, 고례(古例)에 의하여 가자(加資)하여 주소서."
하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이세환은 어려서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를 따라다니면서 수학하였으며,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었을 때에 사부(師傅)가 되었었다. 이에 이르러 문하생 가운데에서 급제한 사람이 4인이었고 생원과 진사는 19인이었으므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켰다.
3월 13일 계미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이 졸(卒)하였다. 장붕익은 거칠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는데, 젊은 나이에 무술을 닦아서 자못 교만하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훈련 대장에 제배되자 그 호령이 엄하고 밝아서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장사들이 그를 추모하여 마지 않았다.
어유귀(魚有龜)를 훈련 대장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어유귀는 한갓 임금의 척친이라 하여 양국(兩局)을 두루 거쳤으며, 조현명은 상벌을 밝게 하고 기율을 엄하게 하여 군영 중에 전곡(錢穀)을 털끝만큼도 사용(私用)한 일이 없었다.
3월 14일 갑신
김성응(金聖應)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그때 옥당(玉堂)에서 모두 인입(引入)하였는데, 임금이 부제학 윤혜교(尹惠敎)의 소비(疏批)에서 그를 간절하게 질책하니, 윤혜교가 드디어 관직에 나아와서 비로소 개강(開講)하게 되었다.
3월 15일 을유
초저녁에 월식(月食)하였다.
3월 16일 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그때 임금이 호조로 하여금 목면(木綿)을 화순 옹주방(和順翁主房)에 보내게 하였는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그것이 관례가 아니라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하고, 즉시 수송하게 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근래에 씀씀이[用度]를 옛날과 비교하면 점차 많아지는 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이 나라의 정사에 어찌 낭비하기 위하여 널리 취하여 쓰겠는가?"
하였다.
정형익(鄭亨益)을 우참찬으로, 이중진(李重震)을 헌납으로, 유순장(柳純章)을 황해도 수사로 삼았다.
효장 세자빈(孝章世子嬪) 조씨(趙氏)를 책봉하여 현빈(賢嬪)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면 효장 세자빈을 빈궁(嬪宮)이라고 칭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실록(實錄)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는데, 모두 고징할 수가 없었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순회 세자빈(順懷世子嬪)은 덕빈(德嬪)이라고 칭하였는데, 공회빈(恭懷嬪)은 그 시호이며, 소혜 왕후(昭惠王后)도 또한 수빈(粹嬪)에 봉해졌으니, 세자빈(世子嬪)은 살았을 적에는 한 글자의 작호(爵號)를 가지지만, 죽었을 적에는 두 글자의 시호를 가지는 것이 나라의 전례인 것 같습니다. 지금 빈공에게도 마땅히 한 글자의 작호만을 더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두루 상고하게 하였는데, 공회빈을 덕빈에 봉한 사실과 소혜 왕후를 수빈에 봉한 사실은 모두 이것이 가례(嘉禮) 초기에 있었던 일이요, 정안 왕후(定安王后)는 처음에 덕빈(德嬪)에 봉해졌고, 원경 왕후(元敬王后)는 처음에 경빈(敬嬪)에 봉해졌으며,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폐빈(廢嬪) 김씨(金氏)와 봉씨(奉氏)도 또한 모두 작호가 있었는데, 예종(睿宗)과 인종(仁宗)이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빈궁들이 비로소 작호가 없었다. 임금이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예절을 아는 유신(儒臣)들에게 문의하였는데,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의논하기를,
"일후에 세자를 책봉(冊封)할 때에 빈궁에게도 마땅히 따로 작호를 내려 주어야 합니다. 정부(政府)와 관각(館閣)으로 하여금 모여서 이를 의논하게 하여 사체(事體)를 중하게 하여야 합니다. 소혜 왕후의 수빈(粹嬪)이라는 은인(銀印)은 아직도 태실(太室)에 있습니다만, 그 교명(敎命)에는 단지 세자빈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마땅히 옥인(玉印)은 있어야 하겠지만, 교명(敎命)과 죽책(竹冊)은 아마도 뒤따라 시행하기가 곤란할 듯합니다."
하고,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은 의논하기를,
"빈궁의 작호를 국초(國初)에는 책봉할 때에 으레 정하였었는데, 중고 시대에 이를 폐지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이 빈궁은 단지 효장빈(孝章嬪)이라고 일컫더라도 아마 해롭지 아니할 것 같습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심수현(沈壽賢)은 의논하기를,
"인조조(仁祖朝) 이후에는 모두 한 글자의 작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예를 궐하거나 생략하게 될 것을 염려한 소치이니, 그때에 품정(稟定)한 것이 있을 듯합니다. 그 교명과 죽책과 옥인 등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형편으로는 뒤따라 시행하기가 곤란하겠습니다."
하고, 우참찬 정제두(鄭齊斗)는 의논하기를,
"한 글자의 칭호는 지금 내명부(內命婦)의 빈의 작호와 다를 바가 없으니, 중고 시대에 이를 폐지하였던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빈궁은 처음 책봉할 때에 이미 저궁(儲宮)이라는 존호를 사용하였으니, 지금 어떻게 다시 내명부의 관례를 쓰겠습니까? 다만 춘궁(春宮)께서 정위(正位)하는 날을 기다렸다가 빈궁의 저소(邸所)에도 따로 궁호(宮號)를 지어 주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연석(筵席)의 신하들에게 물어 보았는데,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한 글자의 작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명하여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양관(兩館)·정부(政府)·육조 참판 이상을 불러 빈청(賓廳)에서 회의하게 하였는데, 효빈(孝嬪)·철빈(哲嬪)·소빈(昭嬪)이라는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리니, 의망(擬望)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또 장빈(莊嬪)·단빈(端嬪)·사빈(思嬪)으로써 의망을 더하였으나, 임금이 여러 글자의 음과 뜻이 모두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손수 ‘현(賢)’자를 써서 내리고, 명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해 예조·공조의 판서와 낭청(郞廳) 각각 한 사람씩을 당상(堂上)·낭청(郞廳)으로 차정하고 옥인(玉印)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으며, 내전(內殿)에서 선사(宣賜)하였는데, 교명(敎命)과 죽책문(竹冊文)은 없었다.
사간 이저(李著)가 상소하여 인대(引對)를 여러 차례 번거롭게 하고 사령(辭令)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는 것으로서 경계하였다. 또 말하기를,
"총융사(摠戎使) 김성응(金聖廳)은 출신(出身)한 지 아직 2년이 차지 아니하였는데, 그를 등용하는 것이 너무 파격적입니다. 아직 전에 제수한 서도(西道)의 곤임(閫任)을 맡아서 변방의 일을 차근차근 익히도록 하여 위엄과 명망을 쌓게 한 다음에 점차로 그를 승진 발탁하게 하소서."
하고, 또 사초(史草)를 불태워 버린 승지와 사관을 파출(罷黜)하고, 전라도의 시장(試場)을 어지럽힌 수창자(首倡者)를 먼 변방에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엄중한 비답을 내리고 따르지 않았다.
3월 18일 무자
이만선(李萬選)을 판윤으로, 박필균(朴弼均)을 교리로, 정우량(鄭羽良)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윤혜교(尹惠敎)가 말하기를,
"수령(守令) 가운데 종핵(綜核)098) 한다고 일컫는 자들은 모두 명예를 추구하고 재능을 자랑하는 무리들이니, 지금 마땅히 실질(實質)에 힘써서 이러한 폐단을 없애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3월 20일 경인
여러 승지들이 입시(入侍)하였는데, 공조 판서 윤순(尹淳)과 비국 당상(備局堂上) 이종성(李宗城)도 같이 입시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제택(第宅)이 정해진 제도보다 지나칩니다. 한번 수령(守令)을 지내면 문득 큰 제택을 지으니, 청컨대 엄하게 신칙을 가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대신(臺臣)에게 명하여 각기 들은 대로 의논하고 아뢰도록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안흥(安興)의 역사(役事)는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투입(投入)하였으나 아직도 그 공역을 끝마치지 못하였으니, 신이 한 번 가서 이를 보고서 결정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그 뒤에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그가 대신들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임의로 가서 보기를 청하였다고 하여 그를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춘천 부사(春川府使) 민창기(閔昌基)를 파직시키자는 일은 그대로 윤허하였다.
3월 21일 신묘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여러 번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특별히 유시(諭示)을 내려 도승지로 하여금 이을 전하여 선포(宣布)하게 하고, 이어서 함께 오게 하였다.
3월 22일 임진
여러 신하들이 시골에 있으면서 올라오지 않았는데, 임금이 유시(諭示)를 내려서 신칙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도리는 여러 어진이들을 조정에 모으는 것만 같음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 조정의 분위기로 말미암아 각자 스스로 돌아보고 관망하면서 시골에 가서 거주하는 것을 일신에 편한 길로 여기는데, 처음부터 만약 이와 같은 마음이 있었다면 그 어찌 출신(出身)하기를 허락하였는가? 비국(備局)에서 그들을 신칙 격려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3일 계사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3월 24일 갑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25일 을미
조최수(趙最壽)를 대사헌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지평(持平)으로, 남태량(南泰良)·신택하(申宅夏)를 수찬(修撰)으로, 조정만(趙正萬)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조정만은 젊어서부터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남에게 아첨을 잘하였으므로 식자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는데, 나이가 늙어서 아들이 귀하게 되자, 갑자기 숭반(崇班)에 올라서 마침내 육조의 장관이 되었다.
이날 삼일제(三日製)를 설행하였는데, 대제학 윤순(尹淳)이 세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겼으므로 특별히 그를 파직시키고, 홍문관 제학 송인명(宋寅明)을 불러서 선비들을 시취(試取)하게 하였다. 진사(進士) 이성중(李成中)이 수석을 차지하니, 직부 전시(直赴殿試)099) 하도록 명하였다.
헌부 【장령 이태징(李台徵)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진산 현감(珍山縣監) 이한겸(李漢謙)은 두 눈이 어두워서 전혀 물건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니, 마땅히 그를 파직시켜야 합니다. 단천 부사(端川府使) 조태상(趙台相)은 역관(譯官) 정도원(鄭道源)에게 뇌물을 주고 은밀히 공모하여 마패(馬牌)를 도둑질해 내어서 역마를 타고 관가에 이르렀는데, 물의(物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영저인(營邸人)을 의심하여 그 아우를 가두고 형장을 함부로 시행하여 물고(物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태상을 마땅히 잡아 올려 조사하고 형률에 의하여 처단해야 하며, 정도원과 해당 아전에게는 마땅히 중한 신문을 가하여야 하며, 초료(草料)를 만들어서 지급한 당상(堂上)·낭청(郞廳)도 또한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모두 이를 윤허하였다.
간원 【 헌납 이중진(李重震)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사간 윤동형(尹東衡)은 춘천(春川)에서 체임(遞任)된 뒤에 어버이가 병들었다고 상소하고 막비(幕裨)로 하여금 대신 밀부(密符)를 바치게 하였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판결사(判決事) 박필정(朴弼正)은 그 직임에 있은 지 너무나 오래 되어 일이 많이 착오되니, 마땅히 체차(遞差)하여야 합니다."
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병조 참지(兵曹參知) 김형발(金馨發)은 명성과 논리가 본래 가볍고 그 경력도 또한 얕으니, 마땅히 교체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5일 을미
영희전(永禧殿)에 있는 세조(世祖)의 어용(御容)이 세월이 오래되어 종이가 해어지고 그림이 흐려졌는데, 좌의정 서명균(徐命均)과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화사(畫師)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봉심(奉審)하고서 가을철을 기다렸다가 임금에게 친심(親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3월 26일 병신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게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27일 정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장령 이태징(李台徵)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만 이재후(李載厚)와 이정집(李廷楫)의 사건만을 윤허하였다. 교리 임정(任珽)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재후에게 대하여 그의 파직을 주저하시다가 지금 삭탈 관직하자고 청하는 의견을 따르셨는데, 후일에 만약 그에게 형률을 더하자고 한다면, 또 장차 이를 따르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재후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수습(收拾)하고자 할 것일 뿐이다."
하였다.
이광보(李匡輔)를 대사간으로, 임집(任)을 정언(正言)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부수찬으로, 원필규(元弼揆)를 평안도 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고(故) 처사(處士) 허격(許格)에게 3품의 관직을 증직(贈職)하라고 명하였다. 허격은 절의를 숭상하고 문장에 능하였는데, 병자 호란[丙子虜難]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다가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시를 읊었으니,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들은 차마 숭정 황제(崇禎皇帝)100) 의 무릎 아래 꿇어앉고,[君臣忍屬崇禎膝] 부로(父老)들은 다투어 만력 황제(萬曆皇帝)101) 의 은혜를 머금었다.[父老爭含萬曆恩]’고 하였다. 드디어 그는 단양(丹陽) 지방으로 들어가서 은둔하면서 스스로 ‘창해(滄海)’라고 호(號)하였으니, 그때 그의 나이 30이었다. 이때부터 항상 《춘추(春秋)》를 읽었으며 눈으로 청(淸)나라의 달력을 보지 않았고 시를 지어 스스로 즐겨하였다. 일찍이 연경(燕京)으로 사신 가는 자에게 기증한 시에서 이르기를, ‘천하에 산이 있어서 나는 이미 숨어 사는데,[天下有山吾巳遯] 온 지역(地域) 가운데 황제는 없거늘 그대는 어디에 조회(朝會)하는가?[域中無帝予誰朝]’하였다. 그는 또 명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어필(御筆)로 쓴 ‘만절필동(萬折必東)102) ’이라는 네 글자를 구해서 얻어 가지고 가평(加平)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다 본떠서 새겨놓고, 매년 3월 19일에 명나라 의종 황제(毅宗皇帝)에게 분향하고 통곡하였다. 나이 80여 세에 죽으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그의 명정(銘旌)에 ‘대명 처사(大明處士)’라고 쓰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의 문인 권만형(權萬亨) 등이 상소하여 청하였으므로, 이러한 명령이 있었으니, 교지(敎旨)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게 하였다.
3월 29일 기해
이도원(李度遠)·조명택(趙明澤)·민형수(閔亨洙)·정익하(鄭益河)·이종백(李宗白)을 별겸춘추(別兼春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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