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신축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헌납(獻納) 이중진(李重震)이 전계(前啓)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이훈좌(李勛佐)는 일찍이 충주 목사(忠州牧師)에 부임(赴任)하여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는데, 본직을 제수(除授)함에 미쳐 괴상하고 어긋나는 행동이 많았으니, 마땅히 도태시켜야 합니다. 길주 목사(吉州牧師) 성윤혁(成胤爀)은 일찍이 서도 지방의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군기(軍器)를 조잡하게 만들어 영문(營門)에 거짓으로 보고하여 외람되이 은자(恩資)를 받았고 방어(防禦)하는 직책에 갑자기 제수되었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성윤혁은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허집(許集)을 장령으로, 김약로(金若魯)를 응교로, 신만(申晩)을 부응교로, 김상익(金尙翼)을 부교리로, 오언주(吳彦胄)를 부수찬으로, 심택현(沈宅賢)을 경기 관찰사로, 유엄(柳儼)을 충청도 관찰사로, 김후연(金後衍)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김후연은 다른 재능이 없었으나, 다만 임금의 척친이었기 때문에 그를 등용한 것이었다.
4월 2일 임인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를 불러서 보았다. 이광좌는 고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고사를 인용하여 날이 따뜻하기를 기다려 원자(元子)를 진현(進見)하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또 묘당(廟堂)의 시책(施策)이 마땅한지의 여부와 여러 신하들이 연주(筵奏)하는 것의 득실 관계를 그에게 물었는데, 임금이 은권(恩眷)을 기울이는 뜻을 보이었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여 이의현(李宜顯)과 똑같은 벌을 달라고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비답하였다. 김흥경이 처음에 이의현과 똑같은 일을 하다가 그가 죄를 받게 되자, 한 장의 소장도 올려서 글 변명하지 아니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억지로 인혐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경박하게 여겼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성윤혁(成胤爀)의 사건은 정지하였다.
4월 4일 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그때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를 위하여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이현궁(梨峴宮)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그 궁은 바로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옛집으로서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서 오래도록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경계하는 말을 올리자,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이 집은 내 사친(私親)의 옛집인데, 근래 포수(砲手)의 무리들이 거주하는 바가 되었으니, 차라리 왕녀(王女)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니,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 궁가(宮家)는 어의궁(於義宮)보다도 큽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그 뒤에 마침내 그 역사를 중지하였다. 서명균이 또 말하기를,
"전 시직(侍直) 이정섭(李廷燮)과 전 세마(洗馬) 민우수(閔遇洙)는 재능과 식견이 있으니, 마땅히 6품의 관직을 제수해야 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또 아뢰기를,
"조귀명(趙龜命)은 문학이 있고 전 현감 박필부(朴弼傅)는 경학이 있으며, 사인(士人) 신경(申暻)과 윤득운(尹得運)은 부호가(富豪家)의 자제로서 학문을 향하는 뜻이 있으니, 또한 마땅히 조용(調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정섭과 조귀명은 본래 문명(文名)이 있었고, 민우수는 바로 민진후(閔鎭厚)의 아들로서 학식이 있었다. 박필부는 바로 박세채(朴世采)의 아들이요, 신경은 신방(申昉)의 아우였으며, 윤득운은 윤유(尹游)의 아들이었는데 모두 경술에 어두웠으나, 혼동(混同)하여 조용(調用)하기를 청했으니, 사람들이 몰래 비웃는 자가 많았다.
임금이 지돈녕부사 김재로(金在魯)에게 영남 지방의 인재를 물었는데, 대개 김재로가 영남 지방의 방백(方伯)을 새로 지냈기 때문이었다. 김재로가 경학으로서 김성탁(金聖鐸)과 성이홍(成爾鴻)을 천거하고, 문한(文翰)으로서 권만(權萬)을 천거하였다.
경성(鏡城) 사람 이재형(李載亨)은 젊어서부터 학문에 독실하고 조행(操行)에 힘쓰니,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북로(北路)에 왕래하는 자들이 입을 모아서 그를 칭찬하였다. 임금이 그 이름을 듣고 특별히 전조(銓曹)에 명하여 그를 검용(檢用)하게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만 이훈좌(李勛佐)의 사건만 윤허하였다.
4월 6일 병오
약방(藥方)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흥경(金興慶)이 비로소 연석(筵席)에 나와서 ‘이의현(李宜顯)을 삭탈 관직한 것은 너무 죄가 무겁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청한 바를 준허(準許)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심회가 몹시 울불하여 물러가서 뒷말을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신 등은 다만 감히 다시 제기(提起)하지 않겠다고 우러러 대답하였을 뿐이요, 일찍이 ‘석연하게 풀렸다.’고 말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제조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의현은 스스로 면계(勉戒)하는 데에 붙여서 그 말이 조현명(趙顯命)과 박문수(朴文秀) 등이 일찍이 말한 정도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홀로 이의현에게만 지나치게 의심하고 노여움을 더하시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군신(君臣)의 의리를 밝히고자 하여 정녕하게 면전에서 타일렀으나, 차마 버려두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절조(節操)인가?"
하였다.
원자(元子)가 수두(水痘)를 앓는 증세가 있어서 약방(藥房)에서 다시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인견하여 북소(北所)103) 로 옮겨 가서 숙직하도록 명하였으니, 그곳이 원자의 궁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때에 임금이 장차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친행하려고 하였으나, 대신을 보내어 섭행(攝行)하라고 명하였다. 또 긴급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승정원에 머물러 두고, 의금부와 형조는 개좌(開坐)하지 말도록 하며, 내외(內外)의 중일 시사(中日試射)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4월 7일 정미
우박이 내렸다.
4월 8일 무신
심성진(沈星鎭)을 지평으로, 김광세(金光世)와 이성효(李性孝)를 정언으로, 오원(吳瑗)을 응교로, 임정(任珽)을 부교리로 삼고, 김상성(金尙星)을 특별히 발탁하여 수원 부사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동지사(冬至使) 윤유(尹游) 등이 중국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서 보았다.
4월 12일 임자
약방(藥房)에서 집복헌(集福軒)에 입진했는데, 원자(元子)의 수두증세가 매우 순조로워 거의 회복 단계에 이르렀다. 임금이 원자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원자가 충실하고 커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13일 계축
약방(藥房)에서 오늘부터 돌아가면서 본원에 숙직하였다. 예조에서 원자가 수두에서 회복되었다고 하여 이 사실을 종묘에 고하고 하례(賀禮)를 베풀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임금이 명하여 약방 도제조 김흥경(金興慶)에게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고, 그 아들과 사위 가운데 한 사람에게 관직을 제수하게 하였으며, 제조 김재로(金在魯)와 부제조 이춘제(李春躋)에게 각각 숙마(熟馬)를 내려 주었고, 의관(醫官) 이하에게는 상으로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김흥경은 상사(賞賜)와 은전이 전에 비하여 많다고 하여 여러 차례 이를 사양하니, 은전을 고쳐서 내구마(內廐馬)를 내려 주고 아들이나 사위에게 관직을 제수하라는 명령은 정지하였다. 수두(水痘)는 본래 중한 병이 아니기 때문에 의관의 무리들도 실은 약을 쓴 공로가 없었는데, 가자(加資)한 것이 자그마치 5인에 이르고 원역(員役)과 액속(掖屬)으로서 상사를 받은 자도 전에 비하여 갑절이 많으니, 식자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4월 14일 갑인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4월 15일 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약방(藥房)에서 상으로 물건을 받은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청컨대 억제하여 줄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관(醫官)들에게는 수령(守令)을 제수하지 아니하고 다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을 뿐이다. 또 원자(元子)는 세자(世子)와 차이가 없는데, 어찌하여 ‘억제하여 줄이라.’고 하는가?"
하고, 미안스러운 하교가 있었다. 이에 응교(應敎) 오원(吳瑗)이 나아가 말하기를,
"대신들의 말이 그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는데, 성상의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하고, 우의정 김흥경(金興慶)도 또한 이를 위해서 자세히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동래부(東萊府)에서 표류한 우리 나라 사람을 영솔하여 오는 왜차(倭差)에 관한 일을 계품(啓稟)하였다. 대개 임술 약조(壬戌約條)에서 우리 나라의 표류하는 백성들이 일본에 이르러 왜차가 거느리고 오는 경우에는 우리 나라에서 그들을 접대하고, 만약 표류민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른 경우 배가 파손되고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왜차를 보내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대마도의 왜인들이 그 접대받는 것을 이롭게 여겨, 배가 파손된 것과 목숨을 잃은 것을 두 가지 조항으로 나누어서 다만 배가 파손된 경우에도 왜차(倭差)가 또한 오게 되므로, 우리 나라에서 부득이 그들을 접대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회답하는 서계(書契)에서 말하기를, ‘뒤로는 이를 예로 삼지 말라.’고 하였더니, 왜인들이 그 서계를 고쳐 달라고 청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돈녕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이것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이 억지로 왜차(倭差)를 보내 오는 것은 진실로 이익을 도모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 이를 들어주지 않는 것도 또한 비용을 아끼려는 것이다. 그들이 후의(厚意)를 바란다고 일컫고 온다면 마땅히 교린(交隣)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동래부로 하여금 그들을 타이르게 하고 전과 같이 접대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6일 병진
윤순(尹淳)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8일 무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서 하례(賀禮)를 받고 교서(敎書)를 반포하였으며 사유(赦宥)를 반포하였으니, 원자(元子)의 수두(水痘)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홍계유(洪啓裕)를 정언(正言)으로, 박필재(朴弼載)를 교리로 삼았다.
예조에서 경과(慶科)를 품의하자, 정시(庭試)를 베풀라고 명하였다.
4월 19일 기미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헌납(獻納) 이중진(李重震)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삼례 찰방(三禮察訪) 김언보(金彦輔)는 법도를 무시하고 교자(轎子)를 탔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길주 목사(吉州牧使) 성윤혁(成胤爀)은 비록 사유(赦宥)로 인하여 방면(放免)되었다 하더라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또한 마땅히 그를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고, 다만 김언보의 사건만을 윤허하였다.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대사헌 조최수(趙最壽)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조도원(趙道源)의 사건은 정지하였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4월 20일 경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그때 대사간 이광보(李匡輔)가 말하기를,
"평안도 병사 원필규(元弼揆)가 지난번에 영남 지방의 곤임(閫任)으로 있었을 적에 군사의 장비라고 가탁(假托)하고는 은(銀)으로 갑린(甲鱗)을 만들어서 돌아올 때의 전대를 두둑하게 채워 전토(田土)를 광범위하게 차지하고 제택(第宅)을 크게 지었습니다. 서쪽 지방의 곤임의 직책을 그에게 맡길 수가 없으니, 원필규는 마땅히 교체시켜야 하며, 새로 교대시킬 사람을 특별히 정선해야 합니다. 이중직(李重稷)·신후삼(愼後三)·강백(姜栢) 세 사람은 범죄를 저질러서 용서받기가 어려웠는데, 지난번에 석방되었고 지금 또 서용되었으니, 빨리 내리신 명령을 거두어 공법(公法)을 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경상도 유생(儒生) 김성윤(金成胤) 등이 상소하여 고(故) 지사(知事) 이현보(李賢輔) 및 증(贈) 도승지 김영(金坽)의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증광 감시(增廣監試)의 복시(覆試)에서 생원 박만원(朴萬源)과 진사 임박(任璞) 등 각각 1백 인을 시취(試取)하였다.
4월 21일 신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는데, 시강관(侍講官)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이번 나라의 경사로 말미암아 사유(赦宥)한 것과 거두어 서용한 것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경사는 다른 경사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였다. 지경연사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모두 서용되었으니,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고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로지 전조의 권한에 달려 있다. 비록 현관(顯官)을 지내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을 고친 자들을 어찌 등용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4월 22일 임술
교정청(校正廳)에서 《선원보략(璿源譜略)》과 《열성팔고조도(列聖八高祖圖)》와 《국조어첩(國朝御牒)》을 바쳤다. 이보다 앞서 도조(度祖)의 왕후의 아비 안변 부원군(安邊府院君)을 《선보(璿譜)》에서는 박광(朴光)이라고 일컬었으나, 도신(道臣)이 본보를 등사하여 올린 글에서는 박한보(朴閑甫)라고 일컬었으며, 환조(桓祖)의 왕후의 아비 영흥백(永興伯)을 《선보》에서는 최한기(崔閑奇)라고 일컬었으나 등본(謄本)에서는 한기(漢奇)라고 기록되었다. 좌의정 서명균이 아뢰기를,
"본보는 간본(刊本)이 아니기 때문에 《선보》를 갑자기 고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주(註)를 달아서 의심되는 점을 후세에 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의현(李宜顯)을 판부사로, 이태중(李台重)을 지평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수찬으로, 민형수(閔亨洙)를 부수찬으로, 임정(任珽)을 교리로 삼았다. 이의현은 사유(赦宥)로 말미암아 비로소 서용된 것이었다.
4월 24일 갑자
임금이 전라 감사 서종옥(徐宗玉)을 불러서 보았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호남 지방의 전결(田結)은 옛날에 19만 결(結)이 되었는데, 이광덕(李匡德)이 감사로 있었을 때 3만 결을 얻었으며, 남위로(南渭老)가 경차관(敬差官)이 되었을 때는 23만 결이나 되었습니다. 더 찾아낼 만한 여지가 없으므로 수령들이 손을 쓸 곳이 없어 전결의 조세를 갑자기 더해서 징수하게 되니, 이것이 호남 지방의 큰 폐단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덕이 어찌 백성들을 해치고자 하였겠는가? 그러나 다만 세금을 긁어 모은 것이 너무 지나쳤으니, 이것이 도리어 폐단이 되었다. 느슨하게 하거나 빡빡하게 하는 것은 경에게 달려 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호남 지방의 풍속에는 좌도(左道)의 술수(術數)를 믿는 자가 많다고 하니,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긴다. 그러나 풍속을 바꾸는 방도는 관의 위엄으로써 이것을 바로잡을 것이 아니니, 마치 옛사람들이 ‘이미 소를 사고 송아지를 산다’104) 는 것과 같은 정치를 베풀면 거의 고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지평 이태중(李台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임금의 도리가 엄하지 아니하여 의리가 점차 어두워져서 궁액(宮掖)과 가까운 척친이 우매한 사건을 벗어나지 못하며, 충신의 원통이 밝혀지지 못하여 참소하는 말들이 함부로 나돌아, 선대 왕조의 원로(元老)들이 아직도 단서(丹書)의 죄적(罪籍)에 있습니다. 징토(懲討)를 느슨하게 하여 법망을 빠져나간 자들이 수두룩하며, 음양(陰陽)이 서로 뒤섞이어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몰두하니, 이것이 금일에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세도(世道)가 퇴폐해지는 원인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와서 대기하라고 명하였다.
4월 25일 을축
임금이 이태중(李台重)을 불러서 보고 묻기를,
"네가 이른바 가까운 척친과 원로(元老)란 누구를 말하는가?"
하니, 이태중이 말하기를,
"가까운 척친은 서덕수(徐德修)이며, 원로는 바로 사신(四臣)입니다."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을사년105) 이후에 조정의 신하 가운데 감히 서덕수의 억울함을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네가 어찌 감히 그를 신원하고자 하는가?"
하자, 이태중이 말하기를,
"곤궁(坤宮)을 국모(國母)로 섬기면서 서덕수를 반역의 죄안(罪案)에 두게 된다면, 어찌 신자(臣子)가 감히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감히 아비와 어미 사이를 상하게 하려는가? 홀로 《감란록(勘亂錄)》의 서문(序文)을 보지 아니하였는가?"
하였다. 이태중이 임인년106) 옥사가 무고(誣告)였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질책하여 이를 중지시키면서 말하기를,
"신축년107) ·임인년의 옥사는 모두 너희들이 만든 것인데, 내가 어찌 알겠는가? 두 신하가 이미 복관되었는데, 네가 어찌하여 4신이라고 일컫는가?"
하니, 이태중이 말하기를,
"4신이 처음에 죄안(罪案)이 같았는데도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은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으며, 이미 복관된 자도 또한 아직 시호(諡號)를 회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울러 이들을 일컬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신하가 임금을 고르다.’고 말하였으니, 만약에 북면(北面)하여 나를 섬길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곧 이와 같이 하겠는가? 너 같은 자는 임금도 무시하는 사람이고, 김창집과 서덕수를 아비로 여기는 자라고 할 수가 있으니, 마땅히 너의 머리를 장안 거리에 매달아야 하겠다."
하였다. 이태중이 말하기를,
"김창집은 수상으로서 큰 일을 담당하였으니, 의심되는 난역을 꾸미는 말이 없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감히 이를 다시 말하는가? 또 네가 너의 숙부 이병상(李秉常)이 벼슬살이하지 않는 것을 본받으려고 하는가?"
하였는데, 이태중이 말하기를,
"신이 원래 벼슬살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마땅히 당로(當路)에 간구하고 성상의 비위를 맞추어서 좋은 벼슬[好官]을 하였을 터인데, 하필 친척도 아니요 이미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스스로 천위(天威)를 저촉하겠습니까? 신의 정성을 다 드러내지 아니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갑자기 당론(黨論)이라고 의심하시니, 죽더라도 장차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일을 처분하여 중앙과 외방에 분명하게 보였으니, 북면하여 임금을 섬기는 자라면 어찌 감히 옛날 습성을 되살리려고 하겠는가? 이태중은 군부(君父)를 업신여기며 역신(逆臣)을 두둔하였다. 그의 말이 옳다면 임금의 하교는 저절로 남을 무고하는 결과로 돌아갈 것이요, 임금의 하교가 옳다면 그의 상소는 저절로 임금을 멸시하는 결과로 돌아갈 것이니, 비록 대불경(大不敬)의 형률을 그에게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법률이 가볍다고 할 것이다. 《감란록》의 서문(序文)을 지은 뒤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감히 그들을 구해 주거나 풀어 줄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지난날 하교할 때에 내가 한마디의 말도 서덕수에게 미친 바가 없었는데, 그가 무슨 심장으로써 감히 ‘우매하다’는 따위의 말을 제 마음대로 상소에 삽입할 수 있겠는가? 그가 비록 난적(亂賊)을 군부(君父)처럼 본다고 하더라도 의릉(懿陵)108) 의 상설(象設)을 바라다보고 시군(時君)의 부월(鈇鉞)을 두려워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이 상소는 바로 그이 결안(結案)이니, 마땅히 나라의 형벌을 바루어서 당류(黨類)를 보호하기를 달갑게 여기는 자들로 하여금 태아(太阿)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그가 비록 무상(無狀)하더라도 그 관직은 대각(臺閣)이며, 더구나 큰 사유(赦宥)를 당하여 마땅히 죄의 등급을 감하는 은혜를 베풀어야 하겠다. 먼저 그 관직을 체차시키고 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되, 길을 갑절이나 빨리하여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지금의 처분은 너무 너그럽다고 하겠으니, 조정에서 북면하는 자들은 누가 감히 그를 구해서 풀어 주겠는가? 마땅히 반역자를 보호한 형률을 적용할 것이요, 또 감히 이 일을 가지고 만약에 기회를 보아서 논쟁의 단서를 일으킨다면, 내가 어찌 임금을 돕고 그를 억제한다고 하여 용서하겠는가? 모두 모름지기 이 사실을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명리(趙命履)는 일찍이 이태중을 한림(翰林)에 천거하였다고 하여 그 관직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서명연(徐命淵)을 승지로, 김시형(金始炯)을 대사헌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병조 참판으로, 남태온(南泰溫)을 지평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수찬으로 삼고, 윤광신(尹光莘)을 승지로 의차(擬差)하였다. 윤광신은 윤동형(尹東衡)의 아들로서 힘이 뛰어나 권무 군관(勸武軍官)이 되었는데, 사람됨이 잔혹하고 탐오하며 사치스러웠다. 그런데 승선(承宣)의 자리에 함부로 오르게 된, 사람들이 모두 이를 해괴하게 여겼다.
정언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태중(李台重)은 초야(草野) 출신의 신진(新進)으로서 마음에 품은 바를 숨기지 아니하고 말하였으니, 비록 나라의 금법(禁法)에 저촉되었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 사이에 자기의 사사로운 이해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었는데, 야대(夜對)의 자리가 겨우 파하자마자 엄한 명령을 갑자기 내렸습니다. 더구나 저 흑산도(黑山島)는 험난한 바다와 악독(惡毒)한 장기(瘴氣)가 다른 정배지(定配地) 보다 가장 심한데, 이태중으로 하여금 귀양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후세의 사서(史書)에 반드시 전하께서 언관(言官)을 쫓아내어 죽였다고 할 것이니, 그것이 성명(聖明)의 세대에 커다란 누가 될 것입니다. 또 그를 주천(主薦)한 사람의 관직을 삭탈한다면 갑의 죄를 을에게 옮겨 씌우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천천히 강구하고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먼저 홍계유의 관직을 체차시키고, 또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밝게 유시(諭示)한 뒤에 이태중이 서덕수(徐德修)와 김창집(金昌集)을 편들었으니, 위리 안치하라는 명령은 죄의 등급을 말감(末減)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북면(北面)한 자들이 어찌 감히 그를 비호할 수가 있겠는가? 홍계유는 진도군(珍島郡)에 안치(安置)하되, 길을 갑절이나 빨리하여 보내도록 하라."
4월 27일 정묘
충청도 유생(儒生) 김양래(金陽來)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옛날 임진년109) 의 의사(義士) 이강(李)은 창의장(倡義將) 조헌(趙憲)과 더불어 앞장서서 적진에 나아가 동시에 순절하였으니, 청컨대 작위(爵位)를 추증(追贈)하고 정문을 세워서 교화를 세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였다.
4월 28일 무진
안태사(安胎使) 송인명(宋寅明)과 종사관(從事官) 윤흥무(尹興茂)를 보내어 원자(元子)의 태(胎)를 풍기(豐基)에 갈무리하게 하였다.
4월 29일 기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이태중(李台重)을 처분할 때에 ‘김창집(金昌集)을 아비로 여긴다.’는 하교는 왕언(王言)으로서 체모가 서지 않는다고 누누이 경계하는 말을 올리고, 또 말하기를,
"조명리(趙明履)의 관직을 삭탈하는 것은 옳지 아니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사헌 김시형(金始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서명형(徐命珩)을 헌납으로, 이태징(李台徵)을 장령으로, 심악(沈)을 지평으로, 박필기(朴弼琦)를 사간으로, 김상구(金尙耉)와 김상신(金相紳)을 정언으로, 이일제(李日躋)를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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