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경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장령 허집(許集)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이광도(李廣道)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판서로, 이광세(李匡世)를 대사간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사간으로, 오원(吳瑗)을 응교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응교로, 심성진(沈星鎭)을 부수찬으로, 이철보(李喆輔)와 유최기(兪最基)를 교리로, 정형복(鄭亨復)을 부교리로, 박추(朴樞)를 집의로, 오수채(吳遂采)와 김도(金䆃)를 정언으로 삼고, 조현명(趙顯命)을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서명구(徐命九)와 윤휘정(尹彙貞)을 승지로 삼았는데, 윤휘정은 특별히 발탁한 것이었다.
충청도를 공홍도(公洪道)로, 전라도를 전광도(全光道)로, 강원도를 강춘도(江春道)로 하였다. 충주·청주·나주·원주의 네 고을이 모두 반역의 변란으로 그 호(號)를 강등(降等)했기 때문에 아울러 도의 이름을 고친 것이다.
5월 2일 신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3일 임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몸은 하나요 머리가 둘이었다.
5월 5일 갑진
수찬 임정(任珽)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정형복(鄭亨復)이 지난번에 한 장의 소를 올려서 저지른 범죄가 지극히 무거웠으므로, 오래도록 벼슬길이 막혔으니, 공의(公議)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전에 전조 당상(銓曹堂上)이 맨먼저 검의(檢擬)하였으니, 마땅히 견책과 벌을 주어야 하며, 부교리 정형복도 또한 마땅히 교체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그릇 듣고 잘못 전해진 것인데, 어찌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세상에서 남을 도와주거나 억압하는 것이 모두 지나치므로, 내가 일찍이 이것을 그르게 여겼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8일 정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9일 무신
삼남(三南) 지방이 오래도록 가물었다.
5월 10일 기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5월 11일 경술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빙고 별검(氷庫別檢) 최운흥(崔運興)은 바로 고 상신 최규서(崔奎瑞)의 손자이니, 임금이 옛일에 감회(感懷)가 있는 뜻을 그에게 유시하고, 제수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그때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재(黃梓)가 여러 날 동안 왕명에 응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비국(備局)에서 그에게 죄를 주자고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묘천(廟薦)을 없애고 출보(黜補)하게 하매, 황재가 마침내 임지에 부임하였다. 또 이조 참의 이광덕(李匡德)이 하루에 세 차례나 소명(召命)을 어겼는데, 파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지평 김상로(金尙魯)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조정의 체면이 번잡스러우니, 마땅히 아울러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자, 임금이 체통을 얻었다고 허여(許與)하고,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5월 12일 신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지평 김상로(金尙魯)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허집(許集)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윤급(尹汲)의 사건은 혹은 벼슬길이 막히기도 하고 혹은 통하기도 하였는데, 전조(銓曹)의 장관(長官)은 이를 조정(調停)하고자 힘썼습니다. 성상의 하교에서도 이에 대하여 체통을 얻었다고 하셨는데, 처음에는 양쪽에서 모두 출사(出仕)하라고 권면하였다가 나중에는 양쪽을 모두 견책하여 파직시켰으니, 이 어찌 일에는 차이가 있는데 벌에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까? 황재는 비록 특별히 외방에 보직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었지마는, 마땅히 변방 수령의 부임을 싫어하여 회피하는 형률을 적용해야 합니다. 윤심웅(尹心雄)은 차사원(差使員)이 되었을 적에 하나의 비루한 사건으로 인하여 참혹하게 곤장을 쳐서 사람을 죽였는데도 도배(徒配)에 그쳤으니, 의금부의 당상을 마땅히 추고하고 윤심웅을 마땅히 유배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그 뒤에 황재가 대간의 말 때문에 파주(坡州)에 머물면서 명령대로 따르지 아니하니, 의주(義州)에 충군(充軍)시켰다.
평안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5월 14일 계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5월 15일 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북도(北道)에 범월(犯越)하여 산삼(山蔘)을 채취한 자가 있었는데, 사건이 발각되자 공사(供辭)가 변방 수령 이만백(李晩白)과 정연(鄭淵) 등에게 연루되니, 의금부에서 이만백 등을 신문(訊問)하였으나, 오랫동안 자복하지 아니하였다. 범월하여 사형을 당하게 된 자가 40여 인으로 본도에 가두었는데, 이날 임금이 대신과 여러 재상들에게 이것을 물어보니, 모두 말하기를,
"허다한 사람을 다 죽일 수가 없습니다. 또 큰 사유(赦宥)를 겪었으니, 마땅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등급을 나누어 처결하여 방면해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이종백(李宗白)을 심리 어사(審理御史)로 삼았다. 이조 참판 이덕수(李德壽)를 체차하고 홍현보(洪鉉輔)로써 이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묘당(廟堂)에서 추천한 것이다.
5월 16일 을묘
웅천(熊川)에서 소가 뿔이 다섯 개인 송아지를 낳았다. 황해도에 해일이 있었다.
5월 17일 병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5월 18일 정사
이종백(李宗白)을 부응교로, 김기석(金箕錫)을 장령으로, 이광운(李光運)을 헌납으로, 이석신(李碩臣)을 정언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수찬으로, 민형수(閔亨洙)를 교리로, 유건기(兪健基)를 수찬으로, 김재로(金在魯)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상성(李相晟)을 황해도 병사로, 정석오(鄭錫五)와 오원(吳瑗)을 승지로 삼았는데, 오원은 특별히 발탁한 것이었다.
5월 19일 무오
조적명(趙迪命)을 응교로, 박필균(朴弼均)을 교리로, 심성진(沈星鎭)을 부교리로, 남태량(南泰良)을 수찬으로, 신택하(申宅夏)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5월 20일 기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무신년117) 의 역란(逆亂)을 겪은 뒤로부터 도성(都城)의 문을 닫고 순라군을 발송하는 것을 모두 황혼으로 시점(時點)을 삼았었는데,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다시 야종(夜鍾)의 시각으로써 한정하자고 청하였다.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명을 듣고서 즉시 교외로 나가서 오랫동안 입궐하여 사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임금이 이를 체차하라고 명하였는데, 조현명은 김재로가 인혐(引嫌)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여 그를 파직하자고 청하였다. 윤유(尹游)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5월 21일 경신
임금이 심리 어사(審理御史) 이종백(李宗白)을 인견하고 유시를 내리기를,
"변방의 백성으로 금법(禁法)을 범한 자가 거의 반백 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나의 부덕으로 인하여 정치가 변방의 땅에 미치지 못하고 위엄이 온 나라 지역에 떨치지 못한 까닭이다. 더구나 지금 금법을 범한 것은 수령들의 무상(無狀)한 데에서 비롯되었는데, 또한 내가 전조(銓曹)를 신칙하고 격려하지 못하여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임명하여 보낸 결과이다. 아! 그대 어사(御史)는 나의 뜻을 몸받도록 하라. 그들 가운데 사형[大辟]을 받게 된 자가 40여 인인데, 그 정상을 심문하고 살펴서 죄의 경중을 나누어 계문하도록 하라. 그리고 육진(六鎭)의 사람들에게 유시를 선포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하고, 또 인재를 널리 탐문(探問)하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재형(李載亨)을 만나서 내가 그를 만나보고자 한다는 뜻을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종백이 말하기를,
"지금 먼곳으로 떠나가는 때를 당하여 사사로이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있습니다. 전 대제학 윤순(尹淳)은 세 번 소명(召命)을 어겼다고 파직되었으나, 홍문관 제학 송인명(宋寅明)은 세 번 소명을 어겼어도 파직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김중희(金重熙)는 제주(濟州)에 부임하지 아니하여 그 땅으로 유배되었으나 황재(黃梓)는 의주(義州)에 부임하지 아니하였지만 특별히 보직하여서 보냈으니, 조정에서 형벌을 쓰는 것이 이처럼 고르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종백이 또 말하기를,
"이의천(李倚天)은 화(禍)를 즐기는 데 싫어함이 없어서 조정의 진신(搢紳)들을 일망 타진하려 하였고 심지어 장독(章牘)의 사이에서도 말이 선대 왕조에까지 범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조(政曹)에서 곧 승선(承宣)에 의망(擬望)하였으니, 이의천을 의망에서 뽑아 버리고, 정조의 관원들도 또한 마땅히 견책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2일 신유
이일제(李日躋)를 승지로, 김용경(金龍慶)을 이조 참의로, 신방(申昉)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부교리로, 윤취함(尹就咸)을 장령으로, 조영국(趙榮國)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23일 임술
양서(兩西) 지방에 해일이 있었고, 전광도(全光道)에 우박이 떨어졌다.
5월 24일 계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5월 25일 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그때 중국 사람의 배가 풍천(豐川)에 와서 정박하고 뭍으로 내려와서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심지어 추포장(追捕將) 초도 첨사(椒島僉使)를 구타하기까지 하였다. 도신(道臣)이 이 사실을 계문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청(淸)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자고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강희(康熙)118) 때 이미 무기[干戈]를 가지고 종사(從事)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 그들을 능히 금지하고 방어할 수가 없었다. 만약 다시 우리 나라를 욕먹이는 일이 있다면 장차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특별히 도신(道臣)은 무겁게 추고하고 수사(水使)는 파직할 것이며, 지방의 관원 및 초도 첨사는 잡아 올려 신문하고 초도(椒島)의 장교(將校)로서 첨사를 구하지 못한 자들은 유배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를 위하여 이현궁(梨峴宮)의 제택(第宅)을 수리하였는데, 경복궁(景福宮)의 옛 궁궐의 소나무를 베어 쓰도록 하니, 일을 담당하는 자들이 이것을 빙자하고서 이익을 도모하여, 심지어는 이것을 관재(棺材)로써 발매(發賣)하기에 이르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임금에게 묻기를,
"이것이 과연 전하의 명령입니까? 조종의 옛터에서 그 나무를 벨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나무 가운데 말라 죽은 것은 비록 시어소(時御所)라고 하더라도 으레 혹은 베어서 쓰기도 한다."
하자, 서명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전하께서 다만 말라 죽은 소나무만 베라고 허락한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람에 쓰러진 것도 아울러 베라고 허락하였다. 바람에 쓰러진 것은 정말 살아 있는 나무와 같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일을 주장하는 자가 함부로 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장(衛將)이 있었는데, 어떻게 감히 함부로 벨 수가 있었겠는가? 불을 땔 나무들을 취한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이조 참판 홍현보(洪鉉輔)가 이종백(李宗白)에게 배척을 당한 것으로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6일 을축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말이 변방(邊方)의 일에 미치자, 승지 이일제(李日躋)가 말하기를,
"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갔을 때에 변방의 사정을 대략 탐지하였습니다. 대개 여진족(女眞族)의 소굴은 백두산(白頭山)의 북쪽 숙신(肅愼)의 옛땅에 있었으니, 우리 나라의 경계와 한 줄기 강물이 간격(間隔)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東人]들이 언제나 걱정하기를, ‘저들이 사변이 생길 것 같으면 장차 우리에게 길을 빌려서 영고탑(寧古塔)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지만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영고탑은 곧 금(金)나라 사람들의 옛 소굴이었고, 건주(建州)는 바로 청(淸)나라가 개국(開國)한 터전이기 때문에 저들은 건주를 흥경(興京)이라고 일컬으며, 심양(瀋陽)을 성경(盛京)이라고 일컫습니다. 또 듣건대, ‘영고탑진(寧古塔鎭)을 오랄진(烏喇鎭)의 선창(船廠)에 옮겼다.’고 하는데, 그 땅은 성경과 영고탑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서로의 거리는 각각 7백 리입니다. 가령 청나라 사람들이 곤란하여 자기들 소굴로 돌아간다면, 하필 오랄(烏喇) 지방의 쉽게 알고 있는 길을 버리고 남의 경계에 잘 알지도 못하는 땅을 거치겠습니까?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의 연안은 지나가는 길이 너무나 험하니, 만약 저들이 우리의 내지(內地)로 들어와서 설한령(薛罕嶺)을 넘게 된다면 더욱 멀리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해에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양국(兩國) 경계(境界)를 정한 것은 생각건대, ‘장차 여도(輿圖)를 만들기 위한 것이요, 후일에 길을 빌리려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걱정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근래 변방의 소란이 없었는데, 이것은 실로 청나라 사람들이 중국 땅으로 들어가서 그 동북 지역에 살던 여러 종족들이 뒤따라 남쪽으로 옮겨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들으니, 저들의 관외(關外)에 있는 난민(亂民)들이 무리를 모아서 산삼을 채취하고 짐승을 사냥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의 관방(關防)이 허술하니, 이쪽의 형편을 익숙히 알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 땅에서의 산물(産物)은 옥수수가 아니면 기장인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큰 주발에 가득히 담은 쌀밥을 먹는 것을 바라보고서 침을 흘리며 욕심 내기를 마지 않고 있는 실정이니, 만일 중원(中原)에서 사변이 생기면 고려 말엽의 홍건적(紅巾賊)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비록 평안도 일로(一路)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적유령(狄踰嶺) 아래 계반(鷄盤) 9계단의 험로를 따라서 일찍이 하나의 성보(城堡)도 쌓은 것이 없으며, 강계부(江界府)의 성(城)은 겨우 부잣집의 담장과 같을 뿐입니다. 우리 동방에서는 산성(山城)을 쌓기 좋아하고 요로에서 적을 막기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도신(道臣) 박사수(朴師洙)는 매양 말하기를, ‘요해지에 돌을 쌓아서 보루를 만들고 나무를 꽂아서 목책(木柵)을 설치한다면 오히려 오랑캐 기병들의 표략(剽掠)을 방어할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송인명(宋寅明)을 예문관 제학으로, 윤지운(尹志遠)과 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임정(任珽)을 부교리로 삼았아.
5월 27일 병인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이어서 법온(法醞)을 내려 주었는데, 임금이 가주서(假注書) 이성중(李成中)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비가 일찍이 야대에서 토론한 것이 많았었다. 지금 네가 또 야대에 들어왔으니, 내 생각이 창연(愴然)하다."
하고, 이어서 술 한잔을 더 내려 주었다. 대개 이성중의 아비 이현모(李顯謨)가 계방(桂坊)119) 에서 지우(知愚)를 받았는데, 뒤에 옥당(玉堂)으로서 변방 고을에 출보(黜補)하였다가 죽었으므로, 임금이 마음으로 애도하고 가엾게 여겨서 이성중에게 여러 차례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어 보였으며, 심지어 그를 옛 친구의 아들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5월 28일 정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지평 김상로(金尙魯)가 상소하여 옛 궁궐에서 소나무를 베어낸 사건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삼가 현령(三嘉縣令) 허상(許鋿)·삼등 현령(參登縣令) 원경운(元慶運)·낙안 군수(樂安郡守) 임시화(林時華)·공주 판관(公州判官) 윤호(尹浩)가 잘 다스리지 못하니,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도록 하소서. 종묘령(宗廟令) 김상면(金相冕)·사옹 직장(司饔直長) 송계주(宋啓胄)·평시 봉사(平寺奉事) 양하길(梁夏吉)·효릉 참봉(孝陵參奉) 나경도(羅景道)·빙고 별검(氷庫別檢) 이희익(李希益)은 병들어 연약하니, 청컨대 모두 관직을 도태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말라 죽은 소나무를 베라고 명령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며, 호조의 비용 조달을 번잡하게 하지 않으려고 옛날 발[簾]을 내려 주던 뜻을 따랐는데, 대신들이 이를 먼저 말하고, 너희들도 또 이것을 논쟁거리로 삼고 있으니, 왕가(王家)의 자녀가 아직 번성하지 않은 것이 또한 다행하다고 하겠다. 세 고을의 수령에 대해서는 풍문(風聞)을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을 판윤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으로, 박준(朴㻐)을 헌납으로, 홍성보(洪聖輔)를 승지로 삼았다.
전광도(全光道)에 홍수가 크게 나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73인이었고, 인가(人家)가 표류하거나 무너진 것이 4백 84호였다.
5월 29일 무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수찬 유건기(兪健基)가 말하기를,
"김상로(金尙魯)의 상소에 대한 비답의 귀절은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귀로써 듣지 못할 내용이 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수양하는 데에 아직 미진한 소치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에 이미 자손이 있는데, 어찌 집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호조[地部]를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절약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지난번에 내가 김상로에게 표피(豹皮)를 내려 주었던 것이 어찌 그에게 이와 같은 상소를 올리게 하고자 해서였겠는가?"
하였다.
이때 8도(八道)에 모두 호환(虎患)이 있었는데, 영동 지방이 가장 심하여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은 자가 40여 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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