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 1735년 7월

싸라리리 2025. 9. 1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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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김상신(金相紳)이 상소하여 대동세(大同稅)의 순포(純布)를 거두는 폐단을 논하고, 이어서 논하기를,
"박해정(朴海正)·김중기(金重器)가 가쇄(枷鎖)를 벗어버리고서 왕래하였던 정상이 의심스러우니, 마땅히 아울러 국문(鞫問)해야 합니다. 남위로(南渭老)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여러 해 동안 벼슬길이 막히게 되었었는데, 갑자기 대간(臺諫)의 자리에 천거하여 의망(擬望)하였으니, 마땅히 전조(銓曹)를 신칙해야 합니다. 신겸재(申兼濟)는 무신년125) 박도창(朴道昌)의 옥사(獄事)를 당하였을 때 경조(京兆)의 당상관을 논죄하여 파직시켰는데, 그 정적(情迹)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마땅히 그 관직을 삭탈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7월 4일 신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흥경(金興慶)·수찬 유건기(兪健基)가 태묘(太廟)에 친향(親享)하는 것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장령 신겸제(申兼濟)가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겸제가 북병사(北兵使)를 탄핵하여 주문(奏聞)한 지 불과 며칠이 아니되었는데, 김상신(金相紳)이 지난번에 무죄 백방(無罪白放)된 일을 들추어내어 은연 중에 그를 쫓아내고자 했으니, 그러한 마음을 어찌 감히 속일 수가 있겠는가?"
하고, 김상신의 관직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한익모(韓翼謨)를 부응교로, 권혁(權爀)을 헌납으로, 심악(沈)·박필간(朴弼榦)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5일 임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남태제(南泰齊)를 지평으로, 조명택(趙明澤)을 교리로, 이철보(李喆輔)를 부교리로, 윤경룡(尹敬龍)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6일 계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7월 9일 병오

임금이 태묘(太廟)의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친히 행하였다.

 

7월 11일 무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진주 겸사은사(陳奏兼謝恩使)        양평군(陽平君) 장(檣)과 부사(副使)        서종급(徐宗伋)·서장관(書狀官)        신치근(申致謹)을 인견하고 길을 떠나기에 임하여 선온(宣醞)을 내렸다 그 주문(奏文)에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의정부·육경(六卿)과 의금부·형조·도승지·양사(兩司)의 장관을 회동(會同)하고, 각 범죄자를 잡아 올려 문책한 결과 공초(供招)하였는데, 범월(犯越)하여 사람을 창살(搶殺)한 것은 전의 공초와 한결같이 같았으므로, 신이 드디어 범죄를 상량(商量)하여 형을 확정하였습니다. 김세정(金世丁)·김영창(金永昌)·서부성(徐富成) 세 사람은 나라의 법이 무서운 줄을 모르고 함부로 국경(國境)을 넘어 들어가서 창살하기를 주모(主謀)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인삼(人蔘)을 약탈하여 왔으니, 그들의 범죄한 정상을 논하면 바로 수괴(首魁)에 해당하므로 모두 입참(立斬) 및 노적(孥籍)의 형률에 적용합니다. 김귀동(金貴同) 등 열 여섯 사람은 함께 만주 내지(內地)에 들어가서 살인과 약탈을 방조(幇助)하였으니, 비록 수범(首犯)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또한 입참의 형률을 적용합니다. 서운필(徐云必) 등 아홉 사람은 분란을 일으킬 적에 비록 함께 참여하지는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함께 함부로 월경(越境)하였으니, 실로 용서하여 주기가 어려우므로, 또한 입참의 형률에 적용합니다. 고산리 첨사(高山里僉使)        이태상(李泰祥)과 강계 부사(江界府使)        김준(金浚)은 규찰과 단속을 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중한 징계를 면하기가 어려우므로 응당 관직을 파면하고 유(流) 2천 리에 처합니다. 관찰사        권이진(權以鎭)과 절도사        이수량(李遂良)은 공초를 받은 뒤에 모두 이미 작고하였으므로, 율을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어서 삼가 생각하건대, 신이 교도(敎導)가 부족하여 간사한 무리를 징즙(懲戢)하지 못하였으니, 종전처럼 각별히 규찰하고 단속하는 뜻을 스스로 밝힐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삼가 황상(皇上)의 하늘처럼 넓고 큰 도량으로 너그럽게 용서하심을 힘 입으니, 산과 같은 은혜와 바다와 같은 덕(德)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흉악한 범월(犯越)의 사건에 대해서도 신으로 하여금 사건을 완결(完結)하게 하시니, 소방(小邦)을 불쌍히 여기시고 너그럽고 간편한 예에 따르는 지극한 뜻을 더욱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흉악한 범월 사건을 법으로 처리하는 것은 오로지 중국 조정에 품(稟)하여야 하는데, 아직 형률 적용에 대한 주문(奏聞)을 하지 않았으니, 신이 감히 갑자기 사건을 완결짓지 못하고, 삼가 강희(康熙) 44년의 조례(條例)에 비추어 이에 먼저 형률 적용을 정하고서 주문합니다. 삼가 밝은 명을 기다리며 성지(聖旨)의 뜻을 삼가 받둘어 각 범죄에 형률을 적용하여 처단하겠습니다. 겸하여 특별히 너그러운 은전을 받기를 아룁니다. 공손히 황상(皇上)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삼가 갖추어 주문합니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경기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7월 12일 기유

주강(晝講)을 행하고, 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14일 신해

임금이 대신과 의금부·형조의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그때 북도 어사(北道御史) 이종백(李宗白)이 여러 죄수들을 심문하여 죄의 등급을 나누었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에게 이것을 회부하여 의논하게 하였는데, 죄인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8인에게 효시(梟示)의 형벌을 명하고, 그 나머지 24인에게는 유배의 형벌을 차등 있게 시행하게 하였다. 전광도(全光道) 무안현(務安縣) 사람 봉원(奉元)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서 다른 사람과 서로 싸웠는데, 그 형이 이를 만류하려다가 잘못 부딪쳐서 죽었다. 옥안이 이루어지매 잘못하여 살인한 형률[誤殺律]을 의거해 봉원을 사형에 해당시켰다. 형조 참판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친형제 사이에는 본래 서로 죽일 의사가 없는 것이니, 잘못 살인한 율을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사형에서 감하여 외딴섬으로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황해도 해주(海州)에 장찬주(張贊周)라는 사람이 있어 그 누이가 김세기(金世奇)의 아내가 되었는데, 음부(淫夫)가 있어서 김세기를 살해하였다. 장찬주의 어미가 그 딸의 더러운 행동을 통분하게 여겨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는데, 장찬주는 어미의 죽음이 그의 누이 때문이라 하여 그 아비에게 고하고 자기 누이를 목졸라 죽였다. 형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의거할 만한 율문(律文)이 없다고 품지(稟旨)하니, 임금이 명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사형에서 감형되었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대비전[東朝]에 오래도록 잔치를 드리지 못하였는데, 또 나라의 경사가 있었으니, 청컨대 성상께서 진청(陳請)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묵묵히 한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겸연쩍고 한편으로는 개연스럽다. 작년에 종신(宗臣)들이 상소하여 존호(尊號)를 올리자고 청하였는데, 대개 회갑이 돌아오면 존호를 올리는 것이 바로 선조(先祖)의 고사였으나 조정의 신하들은 잠잠하게 있으면서 아뢰지 아니하였다. 지금 이름 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아첨하는 것으로 볼 것이니, 설령 대비전에 청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15일 임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과 이광좌(李光佐)가 승후(承候)하기 위하여 대궐에 나아갔는데, 이광좌가 민진원과 더불어 같이 입시하기를 꺼려하여 다리에 병이 있다고 핑계대고는 지레 돌아갔었다. 임금도 또한 그런 내용을 알고 있었는데, 민진원이 그 모친을 모시고 시골로 내려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힘써 만류하고 또 부부인(府夫人)에게 이러한 뜻을 유시하라고 명하였다.

 

정언 박필간(朴弼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성상께서 훌륭한 정치를 일으키려고 도모하고 범상한 군주가 되기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지마는, 간언(諫言)을 듣는 도리에 오히려 마음을 넓히고 크게 포용하는 도량이 부족하여 아첨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는 자는 혹 포상과 칭찬을 받고 간절하게 바른 말을 하는 자는 억압과 좌절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진시(搢紳)들 사이에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으며, 대각(臺閣)의 위에는 직언(直言)하기를 경계하게 되어서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을 제기하는 자가 없습니다. 심지어 양사(兩司)의 관직을 차라리 혁파(革罷)함이 마땅하다고 하니, 말을 하자면 개탄스럽고 한심하여 어찌 눈물만 흐를 뿐이겠습니까? 간혹 한두 사람의 청빈한 선비들이 상소한 한 마디 말이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갑자기 이름 나기를 좋아하고 객기를 부린다는 죄과에 빠뜨리며, 연신(筵臣)이 진달함에 미쳐서는 억지로 관대하게 용서하지마는 신충(宸衷)의 꺼림칙한 마음은 실지로 해소되거나 풀리지 아니하여 비록 벼슬에 임명하는 명령을 내리실지라도 싫어하는 뜻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를 살펴보건대, 진실로 완곡한 표현이 많아서 옛날의 직신(直臣)에 비교한다면 오히려 부끄러움이 없지도 아니한데, 임금의 뜻을 거듭 거스리는 것이 이와 같이 심합니다. 만약 급암(汲黯)과 위징(魏徵)의 무리들이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다욕(多慾)의 기롱126)  과 헌릉(獻陵)의 대답127)  을 전하께서 능히 수용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원컨대, 먼저 두 신하를 거두어 다시 옛 반열에 두고 전부(銓部)에 밝게 유시하여 언관(言官)을 선정(選定)해서 곧은 기절(氣節)을 널리 펼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7월 16일 계축

정언 박필갑(朴弼榦)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에 방만규(方萬規)가 흉악한 상소를 올렸는데,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 조극량(趙克亮)이 왕래하면서 심부름을 하여 그를 도와준 흔적이 뚜렷하게 있으니, 마땅히 속히 도태시켜야 하며, 그를 의망(擬望)한 정관(政官)도 마땅히 추고해야 합니다. 근일에 순포(純布)의 명령은 대개 백성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승수(升數)와 척량(尺量)이 원래 정해진 액수가 없어서 경사(京司)의 서리(胥吏)들이 조작하는 일이 많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승수와 척량을 적당하게 정하여 중앙과 외방에 반포하도록 하소서. 승지 홍성보(洪聖輔)는 본래 비방을 많이 당하여 여러 차례 탁핵을 받았는데, 지난번 호남(湖南)의 고시(考試)에서도 잘못된 글제를 출제하여 여러 사람들의 감정을 크게 일으켰으므로 대간의 소장과 유신들의 상소에서 그에게 죄를 주자고 청한 일이 낭자하였는데, 승선(承宣)의 직(職)에서 뻔뻔스럽게 공무를 행하고 있으니, 홍성보는 마땅히 체차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7일 갑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9일 병진

임금이 사폐(辭陛)하는 곤수(閫帥)·수령·변장을 인견하고 힘써 유시하여 보내었다. 임금이 안동 부사(安東府使) 황정(黃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김성탁(金聖鐸)을 만나거든 잘 타일러서 속히 올라 오도록 하고, 또 인재(人材)들을 장려하도록 하라."
하니, 승지 이흡(李潝)이 말하기를,
"안동은 별달리 구별(區別)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128)  의 사건은 내가 이미 잊어버렸으니, 수령이 된 자는 또한 구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7월 22일 기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조명신(趙命臣)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지평 김성탁(金聖鐸)이 현도(縣道)를 통해 상소하였는데, 원자를 잘 효유하고 수령을 선택하며 어진 인재를 발탁하고 염치(廉恥)를 숭상하며 기강을 떨치고 재용(材用)을 절약하며 상벌을 밝게 하고 군법을 개혁하며 예법을 거듭 밝히고 숙덕(淑德)과 간특(奸慝)을 구분하는 10개항을 아뢰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7월 23일 경신

주강(晝講)을 행하고,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7월 24일 신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주강(晝講)을 행하고,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감시(監試)의 복시(覆試)에서 생원(生員) 이광회(李匡會)와 진사(進士) 이존중(李存中) 등 각각 1백 명씩을 뽑았다.

 

7월 25일 임술

신방(申昉)을 이조 참판으로, 정석오(鄭錫五)를 대사헌으로, 홍경보(洪景輔)와 오원(吳瑗)을 승지로, 조한위(趙漢緯)를 부응교로, 민형수(閔亨洙)를 부수찬으로, 이광운(李光運)을 헌납으로, 주형리(朱炯离)를 장령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지평으로, 권집(權䌖)을 정언으로, 정계두(鄭齊斗)·이진망(李眞望)·이재(李縡)를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이진순(李眞淳)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원자는 마땅히 보양관이 있어야 하는데, 숙종[肅廟]께서는 탄생한 지 5세 때에 비로소 보양관 4원(員)을 임명하였고 이어서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하였으며, 경종[景廟]께서는 원자에 봉해진 지 7개월 만에 비로소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여 3원을 임명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사년129)  의 예에 의하여 3원을 임명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서 대신들이 추천하여 임명하였다.

 

장령 여광헌(呂光憲)이 상소하여 중종조[中廟朝]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영남지방에서 《소학(小學)》의 책자를 간행하여 유생(儒生)들에게 공부하도록 권장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7월 26일 계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보양관(輔養官)에게 특별한 유시를 내리고,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재(李縡)는 비록 출사(出仕)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번의 직임은 반드시 어명을 받들 것이다."
하였으나, 이재가 끝내 오지 않았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7월 27일 갑자

금산군(金山郡)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눈이 세 개이고 코가 두 개이며 입이 두 개였다.

 

7월 28일 을축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에 세조의 어진[眞像]이 세월이 오래 되어 흐리고 해어졌으므로, 임금이 친히 봉심(奉審)하고서 한 장의 그림을 모사(模寫)하고자 하였다.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곧 모사 도감(模寫都監)을 설치하여 김흥경(金興慶)을 도제조로 삼았다. 길일(吉日)을 골라서 고유(告由)하고 동가제(動駕祭)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숙종(肅宗)의 후궁이었던 귀인(貴人) 김씨(金氏)가 졸하니, 2등의 예우로써 그를 장사지내도록 명하였다.

 

7월 29일 병인

장령 주형리(朱炯离)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사령(辭令)을 내리시는 사이에 편벽되게 치우침이 없지 않습니다. 비록 관사(官師)끼리 서로 규정(規正)하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 시비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색목(色目)이 같은지 다른지를 보며, 무신과 문신이 서로 다투면 반드시 무신을 높이고 문신을 낮추는데, 어찌 무신이 반드시 옳고 문신이 반드시 그르겠습니까? 인군(人君)의 대중(大中)과 지정(至正)의 본체는 아마도 이와 같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그때 임금이 모두 신료들의 말에 대하여 문득 그들이 서로 경알(傾軋)하거나 서로 보복할까봐 의심하였는데, 김상신(金相紳)이 신겸제(申兼濟)를 논죄하니 그것이 홍호인(洪好人)을 위한 보복인가 의심하였고, 박필간(朴弼榦)이 조극량(趙克亮)의 사건을 가지고 서전(西銓)을 논핵하니 그것이 김상신이 동전(東銓)을 논박한 대거리인가 의심하였으며, 평안도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장계(狀啓)하여 병사(兵使)가 수령(守令)을 장계로써 파직시키는 것은 규례가 아니라고 논박하니, 문신(文臣)이 곤수(閫帥)를 배척하는 것으로 의심하였기 때문에, 대간(臺諫)이 상소에서 이것을 언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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