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기사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김상로(金尙魯)의 상소에 대한 비답과 연석(筵席)에서 하교한 것이 중도(中道)를 잃었다고 하여 면계(勉戒)의 말을 대략 아뢰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은 지나치고 김상로는 어리석다. 장래의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장령 권현(權賢)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부제학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김상로(金尙魯)가 상소한 말은 비록 너무 지나친 것 같으나, 내관(內官)과 궁례(宮隸)들 가운데 성상의 교지를 빙자하여 살아 있는 소나무를 벤 자들에게 죄를 주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마땅히 유사(攸司)에 명하여 그 허실을 조사하여 그들을 징계할 뿐인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대신들이 이것을 말하였는데도 들어주지 아니하셨고, 대각(臺閣)에서 이것을 말하였는데도 또 들어주지 아니하시었습니다. 간언을 받아들여 널리 말을 들어주시고 개과 천선(改過遷善)하시기를 신속하게 하신다면 주상의 성덕은 더욱 빛이 나서 후세에 훌륭하다고 칭찬할 것이며,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널리 들어주지 아니하여 개과 천선하는 데에 인색하신다면 주상의 덕은 날로 쇠퇴하여 팔도[八方]에서 실망할 것이니, 두 가지가 성궁(聖躬)에 무엇이 이롭겠습니까? 지금 이 이현궁(梨峴宮)을 수리하는 데 유사(攸司)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내부(內府)에서 재목을 마련하였으니, 비용을 절약하려는 성상의 뜻을 누구인들 감탄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귀주(貴主)의 혼례는 아직도 멀었는데, 이처럼 백성들이 궁핍하고 재물이 고갈된 때를 당하여 여러 달 공사를 일으키니 모두 긴급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일찍이 누구 한 사람 전하에게 이것을 계문하는 자가 없었으니, 언로(言路)의 막힘이 너무 심합니다. 하물며 궁궐의 나무를 베어 낸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도 ‘왕가(王家)의 자녀가 번성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는 등의 하교가 계셨으니, 이것은 천만번 도리를 잃은 말씀입니다. 전하께서 사책(史冊)을 두루 상고하시더라도 제왕의 자녀들의 제택(第宅) 문제에 있어서 곧바로 규모를 깎아 낮추거나 줄이라고 청한 경우가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 일찍이 그 근본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이것을 질책한 일이 있었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효종·현종·숙종 시대에 공주의 제택을 가지고 말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혹은 이미 지어 놓은 집을 도로 헐어버리라고 청하기도 하고 혹은 구 제택에 견주어서 크게 줄이자고 청하기도 하였으나, 열성조(列聖祖)께서 어찌 이것을 꾸짖어 물리치지 않고 곡진하게 널리 간언을 받아들이셨으며, 그 사이에는 새로 지은 50칸의 집을 즉시 헐어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일이 궁방(宮房)에만 관계되면 일체 완강하게 거절하시고 혹은 차마 귀로써 들을 수가 없는 말씀을 더하시니, 진실로 지극히 자비로운 정리 때문에 반드시 그 집에 대한 일을 성취시키고자 하신다면 성상의 생각은 진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정리는 귀천(貴賤)이 일반이니, 지금 여항(閭巷)의 보통 선비들로써 말하더라도 그 자녀를 사랑하는 자는 그 복을 아끼기를 더욱 심하게 합니다. 천왕가(天王家)에서 태어남은 그 귀한 것이 이미 지극하니, 부족한 것이 제택과 산업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귀주에 대하여 오로지 마땅히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숭상하고 근신(謹愼)하는 자세를 권장하여 선(善)을 쌓고 복(福)을 쌓도록 하여서 그 후손이 번창하게 할 것이니, 지난 백년 동안에 여러 공주의 제택을 가지고 어찌 거울 삼지 아니하십니까? 성상의 마음에는 혹시 여러 신하들이 교격(矯激)한 행동을 하여 명예를 얻으려 한다고 여긴다면 또한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말들이 성궁(聖躬)에 도움이 되고 나라의 일에 보탬이 된다면 좋은 일입니다. 교격한 행동을 하여 명예를 얻는 것이 전하에게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10년 동안 학문을 닦으시고 또 10년 동안 정치를 도모하시었으나, 춘추(春秋)가 점점 많아지자 뜻이 점점 해이해져서 마음에 우러나고 말로써 선포하여 정치에 해가 되는 것이 해마다 더하고 날마다 더합니다. 여러 신하들은 바야흐로 구차스레 용납 받는 것을 마음을 삼으며,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는 것으로 계책을 삼으니,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하여 바른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헌신(憲臣)에 대한 비답은 다만 나의 뜻을 유시한 것뿐이다. 너희가 나를 바로잡아 보필하는 데에 한결같이 어찌 힘을 허비하는가? 장황하게 자기 이름을 변호하니, 참으로 해괴하다."
하였다.
6월 2일 경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유건기(兪健基)가 이종성(李宗城)에 대한 소비(疏批)를 고쳐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이종성과 이름나기를 좋아하는 폐단을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그 상소는 크게 심력을 허비하였으니, 내가 장차 간언을 거절한 임금이 될 것이요, 이종성은 바른 말을 한 신하가 될 것이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일제(李日躋)가 말하기를,
"전하의 본래의 뜻은 비용을 줄이자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아랫사람들이 언제나 ‘절약하여 줄이자’고 말하는데, 그 말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문득 이름 나기를 좋아하는 행위라고 의심하시니, 이것은 위아래가 모두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처음에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김상로(金尙魯)의 상소가 있게 되었던 것이며, 김상로의 간언을 듣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종성의 상소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두 신하들의 소비(疏批)를 만약 고쳐서 내려주지 아니한다면 삼사(三司)의 관직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 모두 장차 잇따라 이를 진언(進言)할 것인데, 그들을 모두 이름 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여 죄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지경연사 이진망(李眞望)도 또한 이것을 고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것을 매우 옳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이미 상하였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의 이기기를 좋아하는 태도를 보면 개연스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도 또한 나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그러나 왕자·왕녀의 제택을 짓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말라 죽은 소나무를 베어서 쓰는 것은 또한 어찌 불가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반드시 궁방(宮房)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는 이름을 얻고자 하는데, 저 기운을 참지 못하는 김상로와 글을 쓰지 않고는 못배기는 이종성을 내가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 지금 만약에 고쳐서 주지 아니한다면 그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두 비답을 도로 들여오라고 명하여 귀절을 산삭(刪削)하고 고쳤다. 이날 정언 오수채(吳遂采)와 임집(任)이 모두 소를 올려서 고칠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비록 이를 고쳐서 주었으나 생각은 실지로 풀리지 아니하였다. 지평 한익모(韓翼謨)가 처음에는 소명을 어기고 말하지 않다가 비답을 고쳐서 준 뒤에 이르러 비로소 상소하여 고친 뒤의 비답 가운데 한 구절을 고치도록 청하였는데, 상소 가운데 이르기를,
"나무가 썩어 구멍이 나서 개미들이 사는 집이 되었으니, 이를 취하여 궁실의 용도로 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이 말을 퍼뜨리며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6월 3일 신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고서 태묘(太廟)의 친향(親享)을 정지하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6월 4일 임신
경기에 해일이 있었다.
6월 5일 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장령 권현(權賢)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은 사람 둘남(斗乙南)은 적용(適用)할 율이 있는데도, 해조에서 사례를 끌어다가 너무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니, 마땅히 이를 율에 의거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또 윤허하지 않았다. 둘남은 바로 궁궐 안에서 고용한 품팔이꾼이었다. 저물녘에 들어오는데 궁문(宮門)이 이미 닫혀버리자 무너진 담장을 타고 넘어 들어가다가 발각되어서 형률이 사형에 해당하였다. 숙종조에는 궁궐의 담장을 넘어 들어간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명하여 가볍게 처리하였었다. 형조에서 본율과 선왕조의 사례를 인용하니, 임금이 특별히 곤장을 쳐서 방면하라고 명하였으므로, 대신(臺臣)이 이를 논한 것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전후에 내린 하교가 준엄하여 직위에 있기가 불안하므로 상소하여 사면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어유룡(魚有龍)을 승지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으로, 김광세(金光世)와 이덕재(李德載)를 정언으로, 박사순(朴師順)을 지평으로 삼았다. 박사순은 금고(禁錮)되어 유폐된 지 여러 해였었는데, 송인명(宋寅明)과 윤유(尹游)가 힘써 복직시켜서 헌부의 관직에 그를 의망하니, 물의(物議)가 해괴하고 분통하게 여겼다.
6월 9일 정축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11일 기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박사정(朴師正)을 이조 참의로, 김시형(金始炯)과 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2일 경진
이조 참판과 이조 참의가 함께 거듭 소명(召命)을 어기니, 이들을 파직시키고, 송진명(宋眞命)을 참판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참의로 삼았다.
지난 겨울철의 도정(都政)을 친히 행하였다. 조명익(趙命翼)과 김호(金澔)를 승지로, 성은석(成殷錫)을 전광도 우수사(全光道右水使)로, 이한필(李漢弼)을 황해도 수사로, 이우(李玗)을 공홍도 수사(公洪道水使)로, 유경장(柳經章)을 경상도 좌수사로 삼았다. 임금이 입시한 주서(注書)와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을 6품의 관직으로 승진시키라고 명하였으니, 고사에 따른 것이다.
6월 13일 신사
권업(權𢢜)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김상석(金相奭)을 검상(檢詳)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정언으로, 신만(申晩)을 교리로 삼았다.
이때 이조 좌랑 권혁(權爀)이 이양신(李亮臣)을 전랑(銓郞)에 통하게 하고자 하여 겸교서 교리(兼校書校理)로 내보내자고 청하였으나 세 당상(三堂上)이 모두 이양신이 일찍이 이광좌(李光佐)를 논박한 것을 미워하여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으매, 권혁은 곧 붓을 던지고 나가버리니, 여러 당상들이 그를 잡아다가 처지하기를 계청하였다. 임금이 이조·병조의 당상 낭청과 이방 승지 및 병방 승지를 인견하고 이어서 선온(宣醞)을 내려 주면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거룩한 일인데, 권혁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 한스럽도다."
하고, 이어서 서로 다툰 일을 물으니, 이조 판서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권혁이 이양신을 겸교리에 의망하여 소를 올린 공로를 갚으려 하였는데, 신 등이 이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니, 그가 붓을 던지고 일어났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말하기를,
"이양신이 그 바탕과 명망이 어디에 불가할 것이 있어서 공로를 갚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하고, 조명익(趙明翼)이 말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전하께서도 또한 일찍이 이미 잊어버렸다고 말씀하셨고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도록 권면하셨는데, 윤유가 곧 헐뜯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가 이윽고 도로 정지하였다. 임금이 친히 시 한 귀절을 짓고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구(聯句)를 짓도록 명하였다. 가주서(假注書) 이형만(李衡萬)이 지은 시에서 ‘임금의 마음이 10년 동안 하나 같았다. [君心如一十年中]’라는 귀절이 있었는데, 임금이 지극하게 포장을 더하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의 괴로운 마음이 전후에 한결같았는데, 지금 너의 시를 보니, 마음에 감격함이 있도다."
하고, 직모 마안(織毛馬鞍)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조명익이 또 두 절구를 따로 지어서 바쳤는데, 모두 아첨하여 임금의 은총을 얻으려는 뜻이었으므로, 보는 자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겼다. 임금이 병조 참판 이덕수(李德壽)와 이형만(李衡萬)에게 명하여 각각 한 절구를 짓게 하였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책에 힘쓰고 있었으므로 시 가운데에도 서로 공경하여 협조하도록 면려한 것이었다.
6월 14일 임오
그때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잇따라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렸는데, 임금이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에게 말하기를,
"원자(元子)의 호(號)를 정할 때 좌상(左相)이 내전(內殿)에서 아들로 취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이라야 가하다고 말하였는데, 비록 아들로 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호를 정할 수가 없겠는가? 또 ‘억제하고 줄여야 한다.’는 말도 지극히 내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 지란(芝蘭)과 들풀[野草]은 어디에서 생기든지 그 향기가 변하지 않는 것이니, 금지 옥엽(金枝玉葉)이라고 일컫는 것은 대개 이러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니, 김흥경이 말하기를,
"‘억제하여 줄여야 된다.’고 한 것은 복(福)을 아끼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데, 좌상은 언어가 둔하고 어눌하여 자기 뜻을 잘 밝히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릉(豐陵)120) 이 일찍이 좌상을 일컬어서 충성스러운 신하[藎臣]’라고 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를 버리고자 하지 않는다. 경이 모름지기 가서 나의 뜻을 전하여 그에게 출사(出仕)하도록 권하라. 이와 같이 하는데도 그가 출사하지 않는다면, 이는 좌상이 나를 버리는 것이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5일 계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6월 16일 갑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이제(李以濟)를 장령으로, 오언주(吳彦胄)를 교리로 삼았다.
6월 17일 을유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또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하고, 명하여 함께 오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으니, 날이 무더워졌기 때문이었다.
양서(兩西) 지방에 큰 홍수가 났다.
6월 18일 병술
헌부 【장령 신겸계(申兼濟)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 북병사(北兵使) 홍호인(洪好人)은 영리(營吏)와 군관으로 하여금 무산(茂山) 등지의 고을에 가서 여러 죄수들의 공사(供辭)를 취하여 죄를 높이고 낮추는 권한이 그 손아귀에 달려 있으니, 여러 죄수들이 세포(細布)·녹비(鹿皮)·수체(首髢)를 가지고 뇌물로 주어 법망(法網)을 벗어난 자가 많았습니다. 또 임의로 유포(留布) 1백여 동(同)을 사용하고 필(疋)을 감하여 군민(軍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철에 이르러 이에 준하여 거두어 들였으며, 군관(軍官)의 번포(番布)는 관례로 4승포를 받아들이는데 그는 곧 8승포를 징수하니, 변방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합니다. 마땅히 그를 잡아 올려 심문하고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군자감 정(軍資監正) 이희춘(李喜春)은 명망도 없고 자질과 경력도 얕으니, 마땅히 도태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9일 정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그때 원자궁(元子宮)의 별감(別監)이 내국(內局)에서 약을 구하였는데, 그곳에서 약을 주지 않는 데에 노하여 의관(醫官)을 꾸짖었다. 도제조가 중관(中官)에게 말을 전하여 금지하도록 하였는데, 중관이 임금에게 계문하니, 임금이 의관을 불러서 합문(閤門) 밖에 세워 두고 이를 질책하는 하교가 심히 엄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이 그 허물을 인책하여 스스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자궁은 다른 궁과 다른데, 의관이 하찮은 일을 들추어내어 하소연하는 것은 진실로 무상(無狀)하다. 그러나 대신이 이미 이것을 말하였다."
하고, 형조에 명하여 그 별감을 추고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임금이 숙종[肅考]에게 배례하는 꿈을 꾸고서 가을철에 명릉(明陵)에 거둥할 것을 미리 정하였다.
6월 20일 무자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고, 홍호인(洪好人)의 사건은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이희춘(李喜春)은 개차하라고 명하였다.
북청 부사(北靑府使) 정내주(鄭來周)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본부는 파발(擺撥)이 5참(站)입니다. 청컨대, 각 군영의 곡식에서 1천 2백 곡(斛)을 덜어내어 매년 조적(糶糴)121) 하여 모곡(耗穀)122) 을 취한 다음에 요미(料米)를 지급하여 입역(立役)을 모집하여서 백성들의 전결(田結)에서 역가(役價)를 징수하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소서."
하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6월 21일 기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흡(李潝)을 승지로, 박사익(朴師益)을 대사헌으로, 이수항(李壽沆)을 대사간으로, 여광헌(呂光憲)을 장령으로, 김상신(金相紳)을 지평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사간으로, 김상익(金尙翼)을 헌납으로, 홍중일(洪重一)과 남위로(南渭老)를 정언으로, 송징계(宋徵啓)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2일 경인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여러 차례 상소하고 출사하지 아니하니, 임금이 그에게 직접 유시할 것이 있다고 일컫고 잇따라 승지를 보내었는데, 서명균이 왕명을 받들고 나오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성상의 후사가 탄생하던 초기는 바로 원자(元子)의 호를 정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제왕가(帝王家)에서 법도를 명덕 마황후(明德馬皇后)의 고사(故事)123) 에서 많이 취하였습니다. 신은 그날에 여러 사람들을 따라 우러러 청했을 따름이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자를 책봉하면 저절로 정궁(正宮)의 아들이 되는 법인데, 다만 아들로 취한 다음에야 비로소 호를 정할 수가 있다니, 그 말은 폐단이 있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억제하고 줄이라는 것은 복을 아끼라는 것과 그 뜻이 한 가지입니다."
하니, 임금은 뜻이 끝내 석연하게 풀리지 아니하여서 말하기를,
"정월 이후로는 군신(君臣) 상하가 마땅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하니, 절목(節目)에 대하여 따지고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말라 죽은 소나무의 사건은 신이 궁중과 정부가 일체라는 뜻으로써 감히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건은 내가 다시 말하지 아니하겠다. 그러나 대신이 세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다. 그가 물러감에 임하여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금일의 대화는 일기(日記)에 모두 기재할 필요가 없다."
하였는데, 대개 불평하는 하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 판윤 송인명(宋寅明)이 오랫동안 도성 밖에 나가 있었는데, 임금이 그가 거주하는 곳을 물으니, 도승지 조명익(趙明翼)이 말하기를,
"송인명은 여러 차례 좋은 관직을 지냈지마는 아직도 제택이 없습니다. 그가 잠시 호부(戶部)에 부임하매, 부고(府庫)가 차고 넘쳤으며, 오래도록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공(公)을 넓히고 사(私)를 물리쳤으니, 그는 실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송인명은 재산을 모으는 데에 유의하지 않고 오로지 공명(功名)만을 마음에 두었으므로, 그 거주하는 곳은 비록 사치하고 호화스럽지는 못하였지만 또한 일찍이 제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조명익이 그에게 붙좇고 아부하였으니, 이를 듣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김상익(金尙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인군(人君)이 그 행동을 조심하는 것은 후세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며, 대신이 체모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조정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등통(鄧通)124) 은 천자를 희롱하는 신하였으나 신도가(申屠嘉)가 관부에 좌정하여 격문(檄文)으로 꾸짖었습니다. 옛날에 고 상신 이준경(李浚慶)은 패(牌)로써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이를 꾸짖었는데, 선조[宣廟]께서 이를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물며 저들 자주색 옷을 입은 중관(中官)의 무리들이겠습니까? 대신이 사사로이 내관(內官)에게 전언을 보낸 것은 이미 낭묘(廊廟)의 체통을 잃어버린 것이지만, 또한 액례(掖隷)를 규찰하는 뜻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대신은 궁방(宮房)의 일 때문에 왕지(王旨)를 거슬렀고, 한 사람의 대신을 액례(掖隷) 사건 때문에 질책을 당하였으며, 하찮은 일을 들추어내어 하소연했다는 하교가 아래로 위장(衛將)과 의관(醫官)의 무리들에게까지 미쳤으니, 애석하다고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높이지 아니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비록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겠다.’고 비답하였으나, 의관의 죄를 심각히 논하여 심지어는 엄중하게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6월 23일 신묘
정언 홍중일(洪重一)이 상소하여 의관(醫官)을 엄하게 국문하라는 명령을 정지하라고 청하였는데, 임금이 엄중한 비답을 내리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4일 임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5일 계사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승지 조명익(趙明翼)이 말하기를,
"지난날 액례(掖隷)를 추문(推問)하여 치죄하라고 명하였는데, 대간(臺諫)의 상소는 진실로 괴이한 일입니다."
하였다. 조명익은 아첨하는 것이 본성을 이루었는데, 심지어는 규찰하라는 말로써 괴이한 일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듣는 자들이 모두 분노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김상익(金尙翼)의 상소에서 자기를 배척하였다고 하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개석(開釋)하였다.
6월 26일 갑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8일 병신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그때 국문(鞫問)을 받는 죄수들이 오래도록 적체되어 이들을 지키는 자들이 더욱 해이해지니, 죄인 박해정(朴海正)이 김중기(金重器)와 더불어 벽을 뚫고서 왕래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박해정을 엄중히 심문하게 하고, 아울러 도사(都事)를 잡아오고 나졸(邏卒)들을 죄주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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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 1735년 5월 (0) | 2025.09.17 |
|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 1735년 윤4월 (0) | 2025.09.17 |
|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 1735년 4월 (0) | 2025.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