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 1735년 9월

싸라리리 2025. 9. 1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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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정유

진시(辰時)에 일식(日食)하였다. 임금이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나가서 인정전(仁政殿)에 임하여 유막(帷幕)을 철거하고 해를 향하여 앉아서 구식(救食)하였다. 정오가 되어서 해가 다시 둥글게 되자, 곧 내전으로 돌아왔다.

 

9월 2일 무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3일 기해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4일 경자

간원 【 헌납 이주진(李周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일에 순포(純布)에 대한 명령은 대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왔으나, 승수(升數)와 척량(尺量)에 대해 교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서 도리어 민폐를 끼칩니다. 청컨대 승수와 척량을 적당하게 작정하여 중앙과 외방에 반포하도록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장령 권현(權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영정(影幀)을 옮겨서 봉안하는 것은 실로 성대한 의례인데, 신하들의 배종(陪從)한 반열이 희소(稀疏)하였던 것은 진실로 괴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종적(蹤跡)의 내외(內外)와 직명(職名)의 유무(有無)를 논하지 아니하고 하나같이 모두 잡아들였으므로 감옥에 머리를 나란히 한 자가 50여 인에 이르렀는데, 수십 년동안 은퇴하여 있던 사람과 천리 바깥의 외방에서 나라의 예우(禮遇)를 받고 있던 신하들도 또한 그 중에 들어가 있습니다. 아! 임금의 도가 날로 지나쳐서 신료(臣僚)들을 가볍게 여겨 산림(山林)에 은퇴(隱退)해 있는 유신(儒臣)에까지 소와 말을 부리듯 억압을 가하니, 전하께서 신하들을 예의(禮義)로 대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하였다. 승지를 추고하라."
하였다.

 

9월 5일 신축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6일 임인

조현명(趙顯命)을 평안도 관찰사로, 김성응(金聖應)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9월 7일 계묘

신방(申昉)을 대사간으로, 심육(沈錥)을 집의로, 조정(趙侹)을 장령으로, 이광제(李光躋)를 지평으로, 임정(任珽)을 교리로, 남태량(南泰良)을 부교리로 삼았다.

 

9월 8일 갑진

밤에 달이 입성(立星)을 범하였다.

 

9월 9일 을사

김재로(金在魯)를 형조 판서로, 박준(朴㻐)을 장령으로, 이현량(李顯良)을 헌납으로, 김상익(金尙翼)을 부응교로, 정형복(鄭亨復)을 부수찬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이조 좌랑으로, 이광도(李廣道)를 동지 서장관(冬至書狀官)으로, 김흡(金潝)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헌부 【지평 이광제(李光躋)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서번(西藩)134)  의 관방(關防)을 맡은 관직은 진실로 신중하게 간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양국(兩局)의 대장(大將)은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한데, 이들로써 서번에 내보냈다는 말은 전에 듣지 못한 일입니다. 평안도 감사 조현명(趙顯命)은 마땅히 그 관직을 도로 거두어야 합니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성응(金聖應)은 과거에 급제한 지 2주년이 되지 아니하였는데, 갑자기 이 관직에 발탁되었습니다. 재능을 가꾸어 명망을 쌓는 도리에 있어서 이처럼 너무나 갑작스럽게 임명할 수가 없으니, 그에게 새로 제수한 명령을 또한 마땅히 도로 거두어야 합니다."
하였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그때 승지 김시형(金始炯)이 만력(萬曆)임진년135)   이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수보(修補)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10일 병오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서 세조의 영정(影幀)을 봉심(奉審)하였다. 그 전날 저녁에 비가 심하니,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서 봉심하는 시기를 물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날 임금이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인견하고 2경에 환궁하였다.

 

9월 11일 정미

임금이 앞에 원자(元子)를 앉히고, 보양관(輔養官) 정제두(鄭齊斗)·이진망(李眞望)을 불러 보았다. 그때 원자가 이미 일어설 수가 있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정제두는 요순(堯舜)의 정일(精一)함과 성탕(成湯)의 큰 덕과 문황(文王)의 집희(緝熙)136)  로써 몸소 실천하고 자손에게 끼쳐 주는 근본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으며, 이진망도 또한 솔선 수범하는 도리에 힘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정제두가 노병(老病)으로써 물러가기를 고하니, 임금도 또한 그가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손을 잡으면서 서글프게 말하기를,
"경이 이미 늙었다. 이로부터 경을 다시 볼 수가 없을 터이니, 모름지기 잘 가서 지내도록 하라."
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보냈다. 그때 이재(李縡)가 홀로 오지 아니하고, 여러 번 상소하여 벼슬을 사면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9월 12일 무신

남태량(南泰良)·김한철(金漢喆)을 정언으로, 신사경(申思冏)을 공홍도 수사(公洪道水使)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3일 기유

헌부 【장령 조정(趙侹)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조현명(趙顯命)과 김성응(金聖應)의 일은 정계하였다.

 

청나라 황제[淸主]가 8월 24일에 죽었는데, 이날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이르렀다. 전례에는 청나라에서 상사가 있으면, 부칙(訃勅)의 패문(牌文)137)  이 반드시 먼저 도착하였으나, 지금은 예부에서 먼저 통보하였고, 또 인장의 빛깔도 붉은 빛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푸른 빛을 사용하였으니, 관례가 아니었다. 임금이 대신들과 예당(禮堂)을 불러서 물어보았는데, 모두 저들 가운데 내란이 일어났는가 염려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거애(擧哀)하는 예는 마땅히 칙패(勅牌)138)  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윤양래(尹陽來)를 원접사(遠接使)로, 민형수(閔亨洙)를 문례관(問禮官)으로 삼았다.

 

9월 14일 경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 송인명(宋寅明)이 나아가 말하기를,
"한 번 이종성(李宗城)과 김상로(金尙魯) 등이 준엄한 하교를 받은 뒤로부터 선비의 기풍이 사라졌으니, 성상께서 마땅히 석연한 뜻을 보이시어 언로(言路)를 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이름 나기를 좋아하는 폐단이 심지어 대비전[東朝]에 잔치를 올리는 것으로써 호화(豪華)를 극진히 한다고 하였으니, 내가 비록 그 사람들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이름 나기를 좋아하는 명칭은 정말로 미워한다."
하였다.

 

9월 15일 신해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장령 조정(趙侹)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오명서(吳命瑞)를 승지로, 윤취함(尹就咸)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16일 임자

칙패(勅牌)가 비로소 당도하였는데, 그때 세조의 영정을 도로 봉안할 시일이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임금이 우의정 김흥경과 예조 판서 김취로 등을 불러서 거애(擧哀)의 선후(先後)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내일 영정을 도로 봉안하고 모래 거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여러 대신들과 봉조하(奉朝賀)에게 물으니, 의논이 모두 연신(筵臣)의 말과 같았고, 홀로 이광좌(李光佐)만이 이를 어렵게 여겼는데, 임금이 마침내 연신의 말을 따랐다. 승지 오명서(吳命瑞)는 오달제(吳達濟)의 손자였는데, 아뢰기를,
"신은 저 나라에 대하여 조상의 원수가 있으니, 차마 손으로 그 글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른 승지에게 명하여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9월 17일 계축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드디어 세조의 신구 영정(新舊影幀)을 받들고 영희전(永禧殿)으로 돌아왔다. 세조의 신련(神輦)의 앞에는 고취(鼓吹)를 의식과 같이 베풀었으나, 임금의 대가(大駕)에는 베풀지 아니하였으니, 청나라 황제[淸主]의 상사(喪事) 때문이었다. 구 영정을 도로 봉안하고 신 영정을 궤(櫃)에 담았다. 구 영정을 봉안한 뒤에 또 작헌례를 행하고 환궁하였다. 영정 도감(影幀都監)의 당상 낭청과 집사인(執事人)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내려 주었다.

 

9월 18일 갑인

밤에 달이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청나라 황제[靑主]의 상사에 권정례(權停禮)로 거애(擧哀)하였다.

 

9월 19일 을묘

신치운(申致雲)을 대사간으로, 이유(李瑜)를 대사성으로, 낙창군(洛昌君) 탱(樘)을 진위 겸진향정사(陳慰進香正使)로, 김상옥(金相玉)을 부사(副使)로, 윤흥무(尹興茂)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는데, 그 뒤에 윤흥무를 교체시켜 이유(李裕)로써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때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인입(引入)하고 출사(出仕)하지 아니하였는데, 임금도 또한 그를 힘써 출사시킬 생각이 없었다. 청나라에서 국상을 당하게 되자, 묘당(廟堂)에서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여러 번 이를 청하니, 임금이 이에 유시를 내려서 돈독하게 권면하였으나, 서명균은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청나라 황제[淸主]의 상사를 위한 성복(成服)을 하기 전에 정시(庭試)를 베푸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여러 대신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거애(擧哀)하고 호소(縞素)를 입어 성복하기 전에는 나라의 체면에 있어서 과거를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고,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일찍이 임인년139)  에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죽었다는 북보(北報)가 왔을 때에 임금이 명하여 제학(提學)을 불렀었기 때문에 신이 진언(進言)하기를, ‘성복하기 전에 시사(試士)하는 것은 마음이 편안치 않다.’라고 하여 드디어 이를 중지하였었는데, 하물며 지금의 정시는 절제(節製)에 견줄 바가 아님이겠습니까?"
하고, 심수현(沈壽賢)은 말하기를,
"청나라 예부의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유조(遺詔)가 도착하는 날 거애하고 호소(鎬素)를 입은 지 4일 만에 평상시처럼 일을 보라.’고 하였는데, 이것에서 본다면 유조가 도착한 뒤에 비로소 나라의 일을 폐지할 것이니, 과거를 베푸는 것은 아마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우리가 저들에게 군신(君臣)의 예를 행하는 것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니, 당연한 성례(誠禮)에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많은 선비들이 다 모였으니, 시기를 물릴 수가 없습니다."
하니, 이태좌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9월 20일 병진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9월 22일 무오

이기진(李箕鎭)을 대사헌으로, 신방(申昉)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9월 24일 경신

부교리 심성진(沈星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강역(疆域)의 사정은 잘 살피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지금 저들에게 큰 상고(喪故)가 있으나 소식이 자세하지 못합니다.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한 번 계문한 뒤에 그 동정(動靜)에 대한 보고가 없으니,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빈상(儐相)의 직임은 옛날부터 준선(峻選)이라고 일컬었는데, 원접사(遠接使)의 경력(經歷)이 본래 얕아 물정(物情)에 알맞지 않으며, 절사(節使)와 서장관(書狀官)은 비단 몸이 쇠약할 뿐만 아니라 또한 소활(疏濶)한 병통이 있으니, 아울러 마땅히 체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여 다만 의주 부윤과 서장관만을 체차시키게 하였다.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수항(李壽沆)을 진위 부사(陳慰副使)로, 구택규(具宅奎)를 동지 서장관(冬至書狀官)으로, 심택현(沈宅賢)을 강화도 유수로, 송인명(宋寅明)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언상(李彦祥)을 충청도 수사로, 신방(申昉)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전광도(全光道)의 생원 소대진(蘇大晉)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27일 계해

윤경룡(尹敬龍)을 발탁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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