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 1735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1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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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병인

임금이 익선관(翼善冠)·백포(白袍)·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를 갖추고, 영은문(迎恩門)에 거둥하여 청나라의 부칙(訃勅)을 맞이하였다. 임금이 먼저 인정전(仁政殿)으로 돌아와서 부칙을 선포한 다음 호곡(呼哭)하고 배례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임금이 칙사와 더불어 다례(茶禮)를 행한 다음 청나라 사신은 관소(館所)로 돌아갔고 임금은 내전으로 돌아왔는데, 전득우(田得雨)가 배종(陪從)의 반열에 있음을 보고서 말하기를,
"오늘 이 사람으로 하여금 반열에 참여하게 할 수가 없다."
하고, 특별히 명하여 반열에 참여하지 말게 하였다. 전득우는 곧 명나라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전응양(田應揚)의 5대손이었기 때문이다.

 

장령 윤취함(尹就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종성(李宗城)과 김상로(金尙魯)가 함께 한 마디 말을 하여 왕지(王旨)를 거스림으로써 경연의 자리에서 미안한 하교가 많았고, 정사(政事)의 주의(注擬)에서 싫어하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저들은 모두 귀중하고 친근한 신하이며 그 말도 또한 평온(平穩)하였는데, 전하께서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시니, 가령 바른 말이 소적(疏逖)한 데에서 나와 곧바로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서 이를 닥달한다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이름을 좋아하고 직언의 명예를 구하는 인사들도 또한 많이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사건을 만나서 감히 바른말을 하는 것이 국가에 무슨 손해가 되겠으며, 성덕(聖德)에 어찌 해롭겠습니까? 일전에 옥당(玉堂)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중관(中官)과 조신(朝臣)을 모두 대하여 아울러 질책했으며, 오늘날 여러 신하들을 작록(爵祿)으로 입을 다물게 하였습니다. 세상에 자중(自重)하는 인사는 드무니, 그들이 군부(君父)에게 모욕을 받는 것은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마는, 전하께서 신하들을 대우하는 것이 또한 너무나 야박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준엄한 비답을 내렸다. 이에 윤취함이 인피(引避)하면서 말하기를,
"아! 전하께서는 거만하게 성인(聖人)으로 자처하여 다시 아무것도 무서워하거나 꺼려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귀주(貴主)의 제택(第宅)은 긴급하지도 않은 것을 독촉하여 이를 짓게 하시고, 궁궐의 나무는 벨 수가 없는 것을 마구 베어서 주었으며, 또 외람되고 난잡스러운 환관과 액례(掖隷)들을 아울러 두둔하였고, 나라 일을 바로잡으려고 하던 몇몇 신하들을 소원하게 대하거나 싫어하시었으며, 또 문득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귀로서 들을 수가 없는 하교를 내려 신하들을 꺾어 억누르고 거절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니, 어찌 전하께서는 이처럼 한(漢)·당(唐)의 평범한 군주들도 하지 않던 일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헌부 【장령 이시희(李時熙)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해미 현감(海美縣監) 남익엽(南益燁)은 전장(田庄)과 노비[臧獲]들이 모두 경내에 있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홍원 현감(洪原縣監) 황만갑(黃萬甲)은 문지(門地)가 본래 비천하고 이력도 또한 얕으니, 마땅히 개차(改差)하여야 합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윤경룡(尹敬龍)은 기국(器局)과 문필이 어떤 자리인들 불가하겠습니까마는, 다만 대함(臺銜)과 관직(館職)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뒷걸음질을 하여 일찍이 몇 줄의 논열(論列)이나 몇 마디의 계옥(啓沃)도 없었으니, 조정에서 관리를 임용하는 방도로서는 마땅히 싫어하고 회피하는 습성을 징계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개차하소서."
하였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일 정묘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과 더불어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10월 3일 무진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단지 남익엽(南益燁)과 황만갑(黃萬甲)의 사건만을 윤허하였다.

 

수찬 이도원(李度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편과 저편의 당인(黨人)들에 대하여 부추기고 억제함이 너무 치우치신데, 이는 사랑하고 미워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성상의 밝은 예감(睿鑑)을 가리는 바가 있어서 그러합니다. 시류(時流)의 무리들이 성상의 앞에 입대(入對)할 적에는 탕평책(蕩平策)을 찬양하고 당론(黨論)을 배척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으나, 물러가서 그 사생활을 살펴보면, 그들이 주무(綢繆)하고 영위(營爲)하는 것이 자기 당파를 구제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는데도 전하께서는 이것을 깨달아 실피지 못하십니다. 어느 한편의 사람들은 세력이 점점 없어지고 자취가 더욱 기구(崎嶇)하여 그 사건이 시류의 무리들에게 관계되는 경우에는 아예 전하의 앞에서 아무도 감히 이것을 제기하여 논하지 못하므로, 언로(言路)는 이로 말미암아 막혀버리고 시론(時論)은 이로 말미암아 기세를 부리게 되며, 정사의 주의(注擬)는 물의(物議)가 해괴하게 여기는 것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치운(申致雲)을 대사간(大司諫)의 자리에 의망(擬望)함은 사건이 사문(斯文)에 관계되므로 신이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신은 곧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상소를 되돌려 주면서 말하기를,
"이도원이 나에게 벼슬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항상 이러한 마음을 품어서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71번이나 사직하는 글을 올리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와 같이 강박하는 것은 예의(禮儀)로써 부리는 도리가 아니므로, 지금 일시 면부(勉副)하여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하였다.

 

이때에 태묘(太廟)의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당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관소(館所)에 있으므로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말하기를,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마땅치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에 제사드리는 것은 중대한 예인데, 어찌 청나라 옹정제(雍正帝)의 상고(喪故) 때문에 이것을 폐지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관례대로 이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0월 4일 기사

임금이 청나라 황제[淸主]를 위해서 성복(成服)하였다. 임금은 생포 익선관(生布翼善冠)·생포 단령(生布團領)·생마대(生麻帶)·백피화(白皮靴)를 갖추었고, 백관 가운데 4품 이상은 생포모(生布帽)·생포 불집변 단령(生布不緝邊團領)·생마대를 입었으며, 5품 이하는 백포(白袍)·오모(烏帽)·오각대(烏角帶)를 입고서 권정례(權停禮)를 거행하였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관소(館所)의 문을 지키는 군졸과 낭관(郞官)을 죄주자고 청하였다. 그때 청나라 사신의 역관이 물건을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으며, 예단(禮單)의 잡물(雜物)을 모두 은화(銀貨)로 만들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영접 도감에서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청나라 사신의 가정(家丁) 세 사람이 몰래 관소(館所)를 빠져나와서 분호조(分戶曹)의 문서를 빼앗아 갔는데, 역관의 무리들이 비록 이것을 찾아서 돌려받았으나, 그들이 몰래 빠져 나가는 길을 대개 본국 사람들이 가리켜 준 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5일 경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는데, 그들이 임금에게 청하여 교외(郊外)까지 전송 나오지 말게 하였다. 백관들이 성복(成服)을 입은 채로 그들을 전송하였으며, 박사익(朴師益)을 반송사(返送使)로 삼았다.

 

10월 7일 임신

권정례(權停禮)로써 청나라 황제[淸主]를 위한 성복(成服)을 벗었다.

 

서명균(徐命均)을 판부사(判府事)로 삼았다.

 

10월 8일 계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윤경룡(尹敬龍)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교리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였는데, 이도원(李度遠)의 상소를 되돌려 준 잘못을 상소의 첫머리에서 아뢰었고, 또 말하기를,
"금일에 방비(防備)를 엄하게 하지 아니하여서 전조(銓曹)의 주의(注擬)가 공평하지 못합니다. 박사순(朴師順)·유수원(柳壽垣)·이보욱(李普煜)·임광(任珖)은 공의(公議)에 저지당한 자들인데 소통(疏通)하였다고 가탁(假托)하고 대성(臺省)과 군읍(郡邑)에 차례로 의망(擬望)을 메꾸었으니, 식견이 있는 자들이 이것을 한탄하였습니다. 유신(儒臣)의 상소에서는 일찍이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도 또한 거듭 억눌러 꺾임을 당했으니, 신은 전관(銓官)들이 더욱 거리낌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 9일 갑술

간원 【장언 이석신(李碩臣)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명언(李明彦) 부자의 이름이 함께 여러 역적들의 공초(供招)에 나왔었는데, ‘호복(胡服)으로 거사한다.’라는 말과 옷 속에 밀서(密書)를 넣어 꿰맨 일은 그 흉악하기가 지극하였으며, 더구나 그는 망명(亡命)한 역적 황진기(黃鎭紀)와 더불어 친족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황진기가 저 청나라로 도망쳐 들어갔다는 말은 파다할 뿐만이 아니니, 이명언을 압록강 일대의 땅에다 안치(安置)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그를 잡아다가 국문(鞫問)하고 법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공홍도 감사 유엄(柳儼)이 일찍이 홍양(洪陽)의 수령으로 있었을 때에 무신년140)  의 변란을 당하자, 밤중에 놀라서 자기 몸만 도망쳐 성밖으로 나와 몰래 숨었는데, 골육(骨肉)의 혈족도 돌보지 않고 내버렸으니, 충효의 도리를 모두 저버렸습니다. 더구나 지금 그가 다스리는 도(道)는 바로 그가 의리를 소멸하고 은혜를 저버렸던 땅이니, 그가 무슨 얼굴로 사민(士民)들을 다스리고 교화를 펼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너무 지나치고 각박하게 논란한다.’고 비답하였다. 이석신이 인피(引避)하면서 유엄의 사건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자기 어미와 처자를 버리고 도주하였던 자이므로 신은 충효를 함께 저버렸다고 말하였는데, 그를 충성스럽고 후덕한 사람으로 부추겨 올리고 도리어 각박하게 논란한다는 교지를 받들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자기 아내를 배반한 전씨(田氏) 성을 가진 사람을 발탁하여 수하(手下)의 비장(裨將)으로 삼았으며, 그가 권세에 빙자하여 뇌물을 받아들였으니, 그 폐단은 한정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10일 을해

정시(庭試)를 베풀고 신수(申燧) 등 7인을 뽑았다.

 

10월 12일 정축

반송사(伴送使) 박사익(朴師益)을 그대로 등극 칙사(登極勅使)의 원접사(遠接使)로 차정하고 송교명(宋敎明)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삼았다.

 

10월 15일 경진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지평 이동환(李東煥)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석신(李碩臣)이 논란하여 아뢴 것은 또한 스스로 고집할 만한 바가 있으니, 청컨대 그를 출사(出仕)시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석신을 체차시키라고 명하였다.

 

10월 16일 신사

밤에 금성(金星)과 화성(火星)이 서로 범하였다.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으로, 유만중(柳萬重)과 신사영(申思永)을 승지로, 임정(任珽)을 사간으로, 안성(安晟)과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이주진(李周鎭)을 헌납으로, 이광제(李光躋)를 정언으로, 정형복(鄭亨復)을 교리로, 오언주(吳彦胄)를 부교리로, 유건기(兪健基)를 수찬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좌참찬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우참찬으로, 김상익(金尙翼)을 부응교로 삼았다.

 

감제(柑製)를 베풀었다. 생원(生員) 안집(安𠍱)이 수석을 차지하니,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8일 계미

김시찬(金時粲)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간원 【 헌납 이주진(李周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유엄(柳儼)의 사건은 정계하였는데, 대개 이주진의 아들이 장차 유엄의 사위가 되기 때문이었다.

 

유시를 내려서 여러 신하들을 신칙하기를,
"나라의 기강은 혈맥(血脈)과 같고 호령(號令)은 호흡과 같다. 나의 덕이 사람들을 복종시키지 못하고 나의 위엄이 아래 사람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신료들이 한갓 염의(廉義)만 일삼고 〈임금이 부를 때에〉 수레를 기다리지 않는 분의는 생각하지 아니하며, 온종일 수작하고 대응(對應)하는 것은 패초(牌招)를 어기는 일에 지나지 아니한다. 옛날 진(晉)나라 왕술(王述)은 관직을 받고 쓸데없이 사양하지 아니하였으며 사양한 경우에는 반드시 관직을 받지 않았다. 안타깝도다! 지금의 여러 신하들이여. 비국(備局)의 문은 오래도록 닫히었고, 빈청(賓廳)의 소대(召對)에도 인원(人員)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이웃 나라에 이를 듣게 할 수 없다."
하였다.

 

10월 19일 갑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그때 청나라 황제[淸主]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동지사(冬至使)의 사행(使行)에는 생일을 하례하는 방물(方物)을 없애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부사 이덕수(李德壽)가 말하기를,
"다만 가지고 갔다가 저들이 만약 강희제(康熙帝)의 상례(喪例) 때처럼 받는다면 이것을 바칠 것이고, 비록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새 황제[新主]의 생일이 혹시 세수(歲首)에 있으면 표문(表文)을 고치고 날짜를 메워서 바꾸어 바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새 황제의 생일이 설혹 가까운 시일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다면, 바치지 아니하더라도 그게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중로(中路)에서 날짜를 써넣어 글자를 채우는 것은 지극히 성실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사신 등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가도록 허락하였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역서(曆書)를 반포할 기일이 멀지 않은데, 들은즉 ‘역(曆)’ 자(字)가 새 황제[新主]의 이름141)  을 범(犯)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것을 시헌서(時憲書)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관서(關西) 지방의 수세미(收稅米)를 3분(三分)하는 법을 정하였다. 호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경비를 이어 나갈 수가 없다고 하면서 강변(江邊)의 저장한 쌀을 취하여 은전(銀錢)으로 바꾸자고 청하였는데,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세미(稅米)를 취하는 법은 모문룡(毛文龍)142)  이 가도(椵島)에 머물렀을 때에 시작되었는데, 1호(戶)에서 3두(斗)를 거두었으나 지금은 5분의 1을 감하였으므로 강변에 저장된 쌀이 많지 아니하니, 취하여 오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송인명(宋寅明)이 그 곡식을 3분으로 나누어 1분은 지출(支出)하는 데에 대비하고, 1분은 저장을 하며 1분은 호조에 지급하는 일로써 규식을 정하기를 청하였다.

 

이광보(李匡輔)와 심육(沈錥)을 승지로, 윤양래(尹陽來)를 형조 판서로, 정형익(鄭亨益)을 판윤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수찬으로, 이주진(李周鎭)을 교리로, 허채(許采)를 지평으로 삼았다.

 

10월 20일 을유

진위 겸진향정사(陳慰兼陳香正使) 낙창군(洛昌君) 탱(樘)과 부사 이수항(李壽沆)과 서장관(書狀官) 이윤신(李潤身)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보내었다. 표문(表文)에 배례(拜禮)할 때에 헌현(軒懸)은 베풀기만 하고 연주지 말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신치운(申致雲)이 상소하여 이도원(李度遠)의 상소에 대변(對辯)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그가 정황하게 부르짖고 노여워하며 피를 머금고 남에게 뿜어 마치 아비나 할아비의 원수를 갚듯이 하는 것은 그 스승을 위하려는 것입니다. 대저 스승이라는 것은 도(道)가 있는 바인데, 도란 것은 천하의 공기(公器)이니 한 사람이나 한 집안에서 사사로이 서로 가차(假借)하며 자랑하고 과시하여 남을 위협하고 호령하려는 수단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진실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연 진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된다면 다른 사람들도 진짜 정자와 주자로 돌릴 것이며, 과연 진짜 정자와 주자가 아니라면 또한 다른 사람들도 진짜 정자와 주자가 아닌 데로 돌릴 것이니, 진실로 다른 사람이 이에 참여할 성질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번에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에 대한 시비와 득실의 다툼은 하나같이 모두 그 본분(本分)으로 돌려버리고 내버려 둔 지 오래 되었습니다. 저 당인(黨人)들은 오히려 또 이미 내버려둔 물건들에 대하여 화를 내면서 과도하게 입씨름을 벌려 신과 더불어 논란(論難)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이른바 허공에 주먹을 내두르는 격이고, 꿈속에서 허수아비에게 잠꼬대하는 격이니, 이것은 신이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대개 신치은은 증조(曾祖) 신면(申冕)이 김자점(金自點)에게 아첨하여 붙었다가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에게 탄핵을 당하여 뜻을 잃고 원망하였는데, 슬그머니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과 더불어 청나라 오랑캐의 진중과 몰래 내통하여 효종[孝廟]이 청나라에 복수할 계획을 밀고 하였었다. 청나라 오랑캐의 사신이 와서 협박하여 거의 큰 화가 일어날 뻔하였는데, 사건이 발각되어 임금이 친국(親鞫)할 때에 곤장을 맞아 물고되었다. 그뒤에 신면의 아들 신종화(申宗華)가 허적(許積)에게 빌붙어서 그 아비의 관직을 회복하였는데, 경신년143)  에 이르러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갖혀 있다가 방면되었다. 신종화의 아들 신유(申輶)는 또 그 종가(宗家)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꾀하여 그 형의 아들 신치원(申致遠)이 불효하다고 무고하였다. 신치운은 신유의 아들로서 대대로 허물이 낭자하게 드러나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다. 신축년144)  ·임인년145)  에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이 용사(用事)할 때를 당하여 그들의 압객(狎客)이 되어서 박필몽이 그를 추천하여 한원(翰苑)에 들어갔다. 대간(臺諫)의 관직에 오름에 미쳐서는 고 상신 권상하(權尙夏)의 은일(隱逸)을 삭탈하자고 청하였고,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무고하여 여러 세대 동안 쌓여 온 묵은 감정을 풀려고 하였었다. 을사년146)   개기(改紀)할 때에 미쳐 여러 신하들이 그의 죄를 바로잡자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동양위(東陽尉)147)  의 후손이라고 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미년148)  에 또 다시 기용(起用)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사간이 되어서 드디어 이러한 상소가 있었으니, 여론(與論)이 해괴하고 분통하게 여겼다.

 

윤취함(尹就咸)을 집의로, 박준(朴㻐)을 헌납으로 삼았다.

 

10월 22일 정해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서 《시경(詩經)》의 사제장(思齊章)을 강하였다. 지경연사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옛날에 성왕(聖王)들은 간하지 아니하여도 또한 받아들였으나, 후세의 인군(人君)들은 비록 간하여도 받아들이지 아니했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에 반성해야 합니다. 근년 이래로 말이 임금[承輿]에게 미치는 자들은 문득 그 의견을 꺾어서 억눌렀습니다. 윤취함(尹就咸)의 상소로써 말하건대, 임금의 덕을 지적하여 논한 매우 말이 절실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도리어 배척한 뒤 모든 주의(注擬)에 대하여 일체 낙점(落點)하지 아니하시니, 여러 아랫사람들이 싫어하는 기색이 있는가 의심하였는데, 어제 대각(臺閣)의 관직을 제수하매 여러 사람들의 물정이 석연하였습니다. 대저 여러 신하들이 말을 한 것이 한 번만 성심(聖心)에 맞지 아니하면 문득 그 구절과 말들을 끄집어 내어서 이를 그르다고 배척하였으니, 듣는 자들이 혹은 전하께서 간쟁(諫諍)하는 자들을 박대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소한 말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나도 또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지평 허채(許采)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명언(李明彦)과 유엄(柳儼)의 계사는 자신의 의견에 따라서 잇따라 정지 하였으나, 무슨 불가(不可)한 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간 김기석(金箕錫)은 어버이가 병환이 있다고 소를 올려 회피하려고 핑계대는 흔적이 현저히 드러났으니, 마땅히 그를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경상도에 신해년149)  과 임자년150)  에 유망(流亡)한 사람들의 전세(田稅)를 호남 지방의 예에 의하여 면제하거나 감면하게 하고, 그 진전(陳田)은 백성들을 모집하여 들어가서 경작하게 하며, 낙동강(洛東江) 일대의 수침(水沈)당한 진전은 10년 이상 또한 조세를 감하도록 명하였다.

 

10월 23일 무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김흥경(金興慶)이 공홍도 감사 유엄(柳儼)이 탄핵을 당하여 관아의 일을 폐지한 정상을 말하니, 임금이 그를 체차시키도록 허락하였다. 제조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권부(權扶)는 유엄이 그 어미를 데리고 나가서 도피한 것을 죄로 삼았는데, 지금 말하는 자들은 그가 그 어미를 버린 것으로써 죄를 삼았습니다. 입시(入侍)한 지신사(知申事)는 그때의 어사(御史)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신다면 그 실상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신이 대략 듣건대, ‘성중(城中)에서 사람들이 밤중에 경동(驚動)하자 유엄이 그 어미를 데리고 성밖에다 피신시켜 두고는 돌아와서 군사의 일을 다스렸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무신년151)  의 일을 어찌 추후하여 제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유엄이 무신년을 당하여 홍주(洪州)를 지키고 있다가 성언(聲言)하기를, ‘경성(京城)이 이미 함락되고 적병이 대거(大擧)하여 이른다.’고 하면서 유엄은 편의(便衣) 차림으로 성을 나가서 바닷가의 민가(民家)에 숨었었고, 그 가속(家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며칠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모이게 되어 이에 관가로 돌아오니, 사람들의 말이 매우 많았었다. 장령 이기헌(李箕獻)과 지평 허채(許采)가 아뢰기를,
"전 정언 이석신(李碩臣)이 유엄을 논죄하여 이미 치대(置對)152)  하기를 거친 사건을 추후하여 제기하였으니, 무고하여 죄를 날조하려는 것입니다. 들은즉, 그의 지친(至親)이 관하의 수령이 되어서 탐오하고 불법한 짓을 하였기 때문에 유엄이 그 이속(吏屬)을 형장으로 신문하여 사건을 조사함이 끝나지 아니하였는데, 그는 곧 자기 지친을 위하여 공격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서 보복하였으니, 이석신을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과연 그와 같다면 마땅히 그를 엄하게 징계하고, 조정의 관적[朝籍]에서 그 이름을 삭제해야 한다."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공홍도의 수령 가운데 상경한 자에게 물었었는데, 이는 직산 현감(稷山縣監) 이위보(李渭輔)로 곧 이석신의 종질이었다. 뒤에 이규보(李珪輔)의 상소가 제출됨으로 인하여 임금이 이위보가 그 족친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 해당 관부에 특별히 명령하여 엄하게 조사하게 하였으나, 마침내 그 실상이 없었으므로 그를 석방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동지 경연사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근래에 형벌과 은사(恩赦)가 정당성(正當性)을 잃었습니다. 지난날 관소(館所)에 있던 오랑캐가 함부로 바깥으로 나왔을 때에 소통사(小通事) 하나라도 목을 베었더라면 어찌 정주(定州) 역졸(驛卒)의 사건이 일어났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서백(西伯)의 장계(狀啓)를 보고 관반(館伴)보다도 낫다고 말하였다."
하였다. 그때 청나라 칙사가 돌아가다가 정주에 이르렀는데, 역졸이 사사로운 물화를 칙사의 배낭 속에 감추었다가 사건이 발각되매,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그를 조리돌리고서 목을 베었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부수찬        남태량(南泰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10년 동안 성의에 행하고자 하였던 바를 여러 신하들의 올린 간언(諫言)으로 인하여 이것을 정지한 적이 있었습니까? 전하의 생각이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니며 신하들의 간언이 반드시 다 그른 것은 아닌데, 전하께서 말을 꾸며대어 거절하시니, 위로는 보필하는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대간(臺諫)에 이르기까지 오직 임금의 뜻을 구차스레 받들어 복종하는 짓만을 일삼습니다. 나라의 일을 맡은 신하들 가운데 비록 성심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성상의 뜻이 싫어하는 바를 깊이 알고, 혹은 지나친 행동을 격동(激動)해 일으킬까 염려하여 항상 미봉하여 처리하고 조화되어 즐겁게 하려는 생각만을 가지면서 잘못을 바로잡고 구제하는 데에 과격하고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는데, 이러한 습성이 한번 이루어지자, 드디어 다시 바로잡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배우고 힘쓰시는 것이 점차 줄어들고 의지(意志)와 기개(氣槪)가 점차 해이해지시니, 감정에 따라서 사사로운 자애(慈愛)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십니다. 궁방(宮房)과 귀주(貴主)의 제택(第宅) 때문에 성상의 덕을 손상시키는 일이 해마다 증가하게 되었으며, 한번 바른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종신토록 싫어하고 박대(薄待)하십니다. 집안의 사사로운 일에 대한 생각이 1분을 나아가게 되면, 백성과 나라에 대한 걱정을 1분을 물러나게 되니, 이것이 지사(志士)들의 깊이 근심하는 바입니다. 대저 사류(士類)란 반드시 이름 나기를 좋아하고 반드시 바른 말로 간쟁하는 것이니, 이것은 조종조(祖宗朝) 아래로 배양된 풍토입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이름 나기를 좋아하는 선비들을 좋아하지 아니하신다면 이는 조정에 한 사람의 사류도 없어진 다음이라야 가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구차스레 형적(形跡)을 피하고 한마음으로 왕명을 받들어 순종하면서 모두 완악하고 우둔하여 이악만을 탐한다면, 국가가 어디에 의존하겠습니까? 아! 아첨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고 사적으로 친압한 자들이 조정에 나오는 조짐이 있으며, 과실(過失)의 소문이 자주 퍼지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우울(憂鬱)해 합니다. 그리하여 곧은 마음과 바른 기절(氣節)은 날마다 안에서 굽혀지고 아름다운 소문과 어진 명성이 날로 바깥에서 줄어들 것이니, 말이 이에 미치매 곧바로 통곡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비록 나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대체로 사연이 절실하니, 내가 이것을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상소를 궁중에 머물러 두라고 명하였다.

 

10월 25일 경인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10월 27일 임진

판부사 서명균(徐命均)이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매사에 신중히 하시는데, 대동법(大同法)의 순포(純布)는 어찌 변통(變通)하는 것이 이처럼 갑작스럽습니까? 대저 전화(錢貨) 사용을 금지한 다음이라야 순포(純布)의 법이 시행될 수가 있을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도성의 백성들이 반드시 유산(流散)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정령(政令)이 비록 앞뒤가 뒤바뀐 것 같으나, 폐단이 생긴다면 그대로 시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 차대(次對)할 때에 다시 상량(商量)함이 옳다."
하였다. 대개 대동법의 수세(收稅)는 전(錢)과 포(布)를 참반(參半)153)  으로 거두어 들여 각각 백성들의 소원을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종성(李宗城)이 건의하여 순포로써 받아들이자, 서울에서는 전황(錢荒)154)   현상이 일어나서 도성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었기 때문에 서명균이 말한 것이다. 뒤에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어보고 참반의 법을 그대로 두었다.

 

유명응(兪命凝)을 대사간으로, 박필주(朴弼周)를 집의로, 허옥(許沃)를 사간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정언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응교로, 이기진(李箕鎭)을 예문관 제학으로, 송수형(宋秀衡)을 공홍도 관찰사로, 윤경주(尹敬周)를 주서(注書)로, 조호신(趙虎臣)을 공홍도 수사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평 허채(許采)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8일 계사

지평 허채(許采)가 상소하여 상신(相臣)을 가리는 데에 잘 살피지 않는 것과 관리를 임용하는 데 전일(專一)하지 못한 것과 탕평책(蕩平策)의 이익이 다하고 폐단이 생기는 것과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병이 들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10월 29일 갑오

정선 군수(旌善郡守) 성진령(成震齡)이 상소하여 본군(本郡)의 전정(田政)에 대한 폐단을 아뢰니, 임금이 해조로 하여금 이를 품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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