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병신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관학의 유생(儒生) 이규보(李珪輔)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치운(申致雲)이 대변(對辯)하는 소장을 올렸는데, 그가 말한 바 ‘스승[師]’이라는 글자는 바로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권상하의 도(道)는 그의 스승인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에게서 나왔으니, 그가 권상하를 배척하는 것은 곧 송시열을 아울러 배척하는 것입니다. 대개 그 뜻은 ‘선정신의 도(道)는 천하에서 공적으로 일컫는 도(道)가 아니고 특히 이는 한 사람 한 가문(家門)에서 사사로이 서로 가차(假借)하고 자랑하여 과시한 것이어서 비록 이것을 도(道)라고 하더라도 한 세상 사람들을 위협하고 호령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의 거짓되고 패려함이 너무 심합니다. 신치운이 계묘년155) 겨울철에 대간(臺諫)의 관직을 외람되게 차지하고는 권상하를 거짓으로 얽어 무함하고도 부족하여 악명(惡名)을 그가 스승으로 받드는 대현(大賢)에게까지 더하기에 이르렀으며, 더러운 비방을 동덕(同德)의 여러 신하들에게까지 아울러 입혔으니, 지금 이른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다툼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바 ‘군자’라는 것은 누구이겠으며 ‘소인’이라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그가 말한 바 ‘그 본분(本分)으로 돌린다.’는 것은 군자의 본분이겠습니까, 소인의 본분이겠습니까? 그는 흉악한 종자이고 역적의 서얼로서 자기 허물을 덮을 방도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에 도리어 그 선대(先代)의 간악함을 감싸주고 흉역(凶逆)에 편들어 유현(儒賢)을 헐뜯고 욕하면서 조금도 두려워 하거나 꺼려하는 바가 없었으니, 마땅히 그에게 귀양 보내는 형벌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유림(儒林)이 그른가 옳은가? 가만히 있는 유림을 조정에 부추겨 올라오게 하여 조정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어서 서로 다투어 이기기를 힘썼다. 처음에는 ‘군자와 소인이라’고 말하더니, 끝에 가서는 충신과 역적이라고 말하여 우리 나라 영역 안을 곧 자기들이 공(功)을 탐하는 장소로 만들고 임금[九五]의 자리를 감히 자기들의 손아귀에 넣고 농락하려 하였다.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상대편을 이기려고 힘쓰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남의 선대 조상을 욕하여 바람도 없는 데 풍랑을 일으키는 자는 바로 이도원(李度遠)이다. 그 대변(對辯)하는 기회를 틈타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거조는 신치운이 선정신을 욕한 것이 아니라, 이도원이 실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지난해에 내가 세 가지 조문을 힘써 신칙하였는데, 그대들이 그것을 따르지 아니하니, 내가 저절로 겸연(慊然)스러워진다."
하였다.
11월 2일 정유
동지 정사(冬至正使) 여선군(驪善君) 학(壆)과 부사 이덕수(李德壽)와 서장관(書狀官) 구명규(具命奎)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그들을 불러 보고 길을 떠남에 임하여 선온(宣醞)을 내렸다.
정언 홍창한(洪昌漢)이 상소하여 이규보(李珪輔)를 포장하고 전조(銓曹)에서 사사 당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풍습을 경계하며 신치운(申致雲)의 유현(儒賢)을 무함한 죄를 추가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준엄한 비답을 내리고 홍창한의 관직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11월 3일 무술
태학(太學) 유생(儒生)들의 식점(食點)156) 이 너무 적다고 하여, 임금이 유시를 내려 그들을 책망하였다. 반점(半點)인 자는 2년 동안 정거하게 되어 있는데, 이규보와 홍봉한(洪鳳漢)은 그 이름이 반점에 있었으므로 특별히 5년 동안 정거하게 하였다.
태학생(太學生)들이 이규보(李珪輔)에 대한 소비(疏批) 때문에 권당(捲堂)157)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장차 이것을 가지고 임금을 협박하려는가?"
하고, 들어가도록 권유하라고 명하였다.
11월 4일 기해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김취로(金取魯) 등이 태학(太學)에 나아가서 임금의 유시를 선포하였으나, 여러 유생들이 임금의 하교와 이규보(李珪輔)가 정거(停擧)를 당한 것으로써 인혐(引嫌)하고 학당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나의 하교가 이미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는데도 이와 같이 장황히 논열(論列)하였고, 정거시킨 것은 곧 다른 일과 관련된 것인데도 이것을 가지고 그 말미에 아뢰었으나, 사유(師儒)의 장(長)이 어찌 이것을 가르치고 신칙하지 아니하였는가?"
하고, 이어서 성균관의 동지사(同知事)와 대사성(大司成)을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5일 경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김취로(金取魯)와 대사성 이유(李瑜) 등이 상소하여 자기들을 견책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이에 태학(太學)의 유생 홍종해(洪宗海) 등이 신문(神門)에 배사(拜辭)하고 가버리니,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동지관사(同知館事) 이하의 관원들을 불러 보았다. 김취로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신치운(申致雲)에게 잘못되고 망령되다고 책망하고 여러 유생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신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뜻을 꺾어 억누르기 때문에 점차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고, 이유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효종[孝廟] 때에 많은 선비들이 오늘과 같이 권당을 하였는데, 효종께서 처음에는 진노하시다가 나중에는 종백(宗伯)158) 을 보내어서 그들을 권유하여 들어가게 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아름다운 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 유생들이 비록 비답을 고친다는 분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해명하는 하교는 없었으니, 반드시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신 등도 또한 어찌 이것을 권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그 근본되는 일을 먼저 말해야 하겠다. 대저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없어진 뒤에는 다만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 있었을 뿐인데, 또 그 가운데에서 나누어진 까닭은 사문(斯文)159) 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가례원류(家禮源流)》가 없었다면, 발문(跋文)이 어디에서부터 등철(登徹)160) 할 수가 있었겠는가? 옛날 성고(聖考)께서 이것을 예람하시고 불태워 버렸는데, 화염(火焰)이 옥수(玉手)에까지 거의 미칠 뻔하였으므로, 내가 빨리 이것을 받아서 태워버렸던 것이다."
하고, 임금이 인하여 오열(嗚咽)하면서 말하기를,
"성고(聖考)의 환후(患候)가 더해졌던 것도 실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아픈데, 사문이 어찌 충신과 역적의 본거지가 아니겠는가?"
하니, 김취로가 말하기를,
"사문도 또한 어찌 모두 어질겠습니까? 또한 무상(無狀)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무릎을 치면서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다면 어찌 신축년161) 의 일이 있었고, 을사년162) ·병오년163) 의 일이 있었겠는가? 사람들이 나라를 해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서로 보복하였기 때문에 세도(世道)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에 노론(老論)·소론(少論)이 없었다면 어찌 역적이 있었겠는가? 금일의 여러 유생들은 매우 그르다. 내가 어찌 굽혀 따르겠는가?"
하고, 성균관의 당상관들은 아울러 체직시키고 수창(首倡)한 재임(齋任)은 3년 동안 정거(停擧)시키게 하였다. 사학(四學)의 유생 임매(任邁) 등이 또 소장을 올리니, 도로 돌려주게 하고, 정거시키라고 명하였다.
이광덕(李匡德)을 이조 참의로 삼았으나,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종성(李宗城)으로 바꾸어서 제수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6일 신축
공홍도(公洪道)의 유생 정윤상(鄭允相)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청하였고, 또 신치운(申致雲)의 유현(儒賢)들을 무함한 죄를 논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의금부의 죄인 김중기(金重器)가 죽었다. 김중기는 무신년164) 의 역란이 일어났을 때 총융사(摠戎使)를 삼아 수원(水原)에 나가서 진무하게 하였는데, 말[馬]이 없다고 핑계대어 나아가지 않고 두류(逗遛)하였었다. 역적의 괴수 이유익(李有翼)은 곧 그 아들의 처남(妻男)이었는데, 그가 김중기의 묘사(墓舍)에 망명하여 숨어 있다가 잡혀서 몇 년 동안 갇혀 있었으나, 끝내 법대로 치죄(治罪)하지 못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분통하게 여겼다.
11월 8일 계묘
정우량(鄭羽良)을 대사성으로 삼아 다른 유생들을 학당에 들어가도록 권유하게 하였는데, 정우량이 생원과 진사 3인 및 기재생(寄齎生) 5인에게 권유하여 들어가게 하였다.
윤휘정(尹彙貞)을 대사간으로, 심성진(沈星鎭)을 헌납으로, 김성탁(金聖鐸)을 정언으로, 한억증(韓億增)을 지평으로, 이주진(李周鎭)을 교리로, 임정(任珽)을 부교리로, 윤경룡(尹敬龍)을 수찬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승지로, 김동필(金東弼)을 판의금부사로, 이성중(李成中)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11월 9일 갑진
헌부 【지평 한억증(韓億增)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치운(申致雲)은 효경(梟獍)의 유종(遺種)으로서 선정(先正)과 유현(儒賢)을 무함하여 해치고도 대변(對辯)한다고 일컬으면서 다시 함부로 헐뜯었으니, 마땅히 빨리 먼 지방으로 유배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공의(公議)를 저버리고 국법을 허물어뜨리면서 갑자기 그를 대사간(大司諫)에 의망(擬望)한 전조(銓曹)의 당상관도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기축년165) 에 부지하고 억누르던 수단이며, 을사년166) 에 상대편을 이기려고 힘쓰던 나머지 수법이다. 처음부터 이와 같은 자리에 들어와서 봉공(奉公)할 결심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교를 심상하게 보니, 지극해 해괴하다."
하였다.
11월 10일 을사
문례관(問禮官) 송교명(宋敎明)이 3품 역관(譯官)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었다고 동지사(冬至使)가 정장(呈狀)하여 아뢰니, 송교명의 관직을 파면 시키라고 명하였다.
11월 12일 정미
청(淸)나라 사신으로부터 병부 시랑(兵部侍郞) 진국 장군(鎭國將軍) 종실(宗室) 덕패(德沛)와 산질 대신(散秩大臣) 각라(覺羅)167) 해격(海格)이 와서 청나라의 새로운 황제[新主] 건륭제(乾隆帝)가 등극한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는데, 임금이 곤복을 입고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맞이하고 먼저 인정전(仁政殿)에 돌아와서 조서를 선포하는 예를 행하였다.
11월 13일 무신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을 만났다. 행차가 종가(鐘街)에 이르자 고취(鼓吹)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반사(頒赦)하기를 관례대로 하였다.
11월 14일 기유
달이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11월 15일 경술
처음에 도감(都監)에서 말하기를,
"청나라 황제[淸主]가 새로 즉위하였으므로 칙사(勅使)로서 종실(宗室)이 왔으니, 마땅히 특별한 우대를 더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계묘년168) 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게첩(揭帖)을 증정하여 정성을 보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괴원(槐院)169) 으로 하여금 이것을 상고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청나라 사신이 그의 시(詩) 6, 7편과 사폭(謝幅) 3, 4행을 써서 임금에게 전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도감에서 관례에 의거하여 이것을 받지 아니하였다. 혹자는 게첩을 준 뒤에 저들이 만약 사례(謝禮)하는 의식이라 일컫고 문자(文字)를 전달하도록 부탁하면 일이 난처할 것이라고 염려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김흥경(金興慶)이 사뢰고 청하여 이것을 정지시켰다.
11월 16일 신해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7인이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재임(齋任)·재생(齋生)과 조관(朝官) 2인의 이름을 죽 벌이어 써서 신문(神門)에 붙이고 벌을 주니, 수재생(守齋生)들이 권당(捲堂)하였다. 대사성이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내가 처분을 내린 데에 감정을 품고 이러한 거조를 빚었으니, 어찌 현관(賢關)170) 을 더럽힐 수가 있겠는가? 사학의 유생 7인은 아울러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수창(首倡)한 자는 6년 동안 정거(停擧)시키며, 수종자(隨從者)는 4년 동안 정거시키도록 하라."
하고, 대사성 정우량(鄭羽良)에게 다른 유생들을 권유하여 학당에 들어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학의 유생들이 새벽에 모여서 벌을 줄 사람의 명단을 게시하고, 또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와 대사성 정우량의 이름을 먹으로 지워버렸다. 임금이 명하여 이도원(李度遠)을 파직시키고 신치운(申致雲)은 관직을 삭탈하였으며, 원점(圓點)을 벗어난 두 유생들은 정거시키고 신문(神門)에 벌을 줄 명단을 게시한 자 및 조관(朝官)의 이름을 먹으로 지워버린 사학 유생 구택원(具宅遠) 등은 아울러 정거시켰다. 김상규(金尙奎)를 대사성으로 삼았는데, 김상규가 반궁(泮宮)171) 에 들어가서 유시를 선포하고 학당에 들어가도록 권유하니, 여러 유생들이 비로소 분부를 받들었다. 어유영(魚有瀛) 등 7인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미 저희들도 더불어 같이 참여 하였으니, 함께 죄를 받기를 바랍니다."
하니, 강변 칠읍(江邊七邑)172) 에 나누어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윤휘정(尹彙貞)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가만히 듣건대, 비국(備局)에서 계청하여 칙사(勅使)가 돌아갈 때에 도성(都城)의 부로(父老)들을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공덕(功德)을 칭송하게 한다고 하는데, 대저 다른 나라 사람과 교접(交接)할 때에 모든 행동을 잘 살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도성의 백성들이 스스로 서로 모인다면 우리 나라에 기강이 없는 것을 엿보이게 될 것이고, 또 조정에서 시켰다고 한다면 한갓 남에게 성실하지 못한 점만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서 신은 그것이 무익하고 도리어 수치스럽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젊어서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는데, 사문(斯文)이 무함을 당하였습니다."
하고, 곧 윤화정(尹和靖)173) 의 고사를 인용하여 사직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정필녕(鄭必寧)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11월 17일 임자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사(勅使)를 전송하였다.
11월 18일 계축
송인명(宋寅明)을 이조 판서로, 김재로(金在魯)를 판의금부사로, 윤유(尹游)를 공조 판서로, 심성진(沈星鎭)을 교리로, 유건기(兪健基)를 부교리로, 송징계(宋徵啓)를 수찬으로, 오언주(吳彦胄)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0일 을묘
교리 심성진(沈星鎭)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가 그 이름을 먹으로 지워버린 욕을 당하였으니, 청컨대 사학의 유생들을 엄중히 처단하고 유현(儒賢)에게 특별히 유시하여 그를 위안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패려한 유생들의 해괴한 행동이 유현에게 어찌 누가 되겠는가? 그를 위로하는 유시는 유현을 높이는 것이 못된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재로(金在魯)를 좌의정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김흥경(金興慶)이 차서대로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처음에 상신을 매복(枚卜)하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지니, 김흥경(金興慶)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물러나와 매복한 다음에 들어왔다. 송인명은 탕평책(蕩平策)의 이론을 주장하여 임금의 뜻을 교묘하게 맞추어서 과거에 급제한 지 겨우 17년 만에 갑자기 상신의 자리에 올랐다. 김재로는 변변치 못한 재주로써 까다롭고 잗단 성품으로 아첨하며 간사한 짓을 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지론이 과격하지 않다고 하여 송인명과 함께 아울러 상신의 자리에 승진시켰으니, 대개 탕평책을 책임지워 이루려 한 것이었다. 이날 조현명(趙顯命)을 이조 판서로 삼았는데, 조현명도 또한 탕평책을 주장하는 자였다.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1월 22일 정사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 이진망(李眞望)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그를 인견하였다. 이진망이 말하기를,
"일찍이 격언(格言)을 뽑아서 편집하라는 어명이 계셨는데, 춘방(春坊)에 본래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합초(合抄)한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올리라고 명하였다.
진사 황정아(黃挺河) 등이 상소하여 사정(邪正)의 근원을 살피고 시비의 근본을 구별하여 충신과 역적을 사문(斯文)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나의 하교는 사문(斯文)을 배척한 것이 아니고, 이에 말류(末流)의 폐단을 말하였던 것이다. 그대들이 사문을 높이고자 한다면 이러한 폐단을 통렬히 미워하여 빨리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11월 23일 무오
지평 이석표(李錫杓)가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함열 현감(咸悅縣監)에 보임하였는데, 그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부임하게 하였다. 이석표는 판서 이인엽(李寅燁)의 손자였는데, 그 아비 이하곤(李夏坤)은 포의(布衣)로서 문장에 능하여 훌륭한 명망이 있었다. 이석표도 또한 일찍이 명성을 지고 연달아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차례 대간의 자리에 들어갔으나 한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사람들은 혹시 그가 순묵(循默)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만언소(萬言疏)를 올려서 임금의 결점과 사폐(時弊)를 극언(極言)하였는데, 절실하고 곧아서 아무런 숨김이 없었다. 그 절목에 말하기를,
"첫째, 궁중(宮中)을 화목하게 하여 거룩한 교화(敎化)를 독실하게 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후궁(後宮)에 대하여 총애하는 것이 지나치게 융숭하여 상사(賞賜)를 너무 자주 행하는데, 상사가 너무 잦으면 사람들의 마음과 뜻이 사치스러워지고 은총이 지나치게 융숭하면 권세가 무거워집니다. 사치하는 마음으로써 무거운 권세를 의지하게 되면 포주(抱裯)의 교훈174) 을 삼가 지켜 밤을 당하여 시침(侍寢)하는 기롱(譏弄)을 범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둘째, 원자(元子)를 가르쳐서 덕성(德性)을 길러야 합니다. 원자가 새로 탄생하신 초기에 금화(錦靴)와 문관(紋冠)을 만들어 들여오게 하셨는데, 이것은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숭상하여 후사(後嗣)에게 평안함을 남겨주는 모책(謀策)이 아니니, 지난날 대신들이 절약하라고 청한 것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셋째, 근시(近侍)와 액례(掖隷)를 억눌러서 내전(內殿)을 엄숙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액례가 교만하고 방자한데도, 언제나 용서와 보호를 받아서 점차 변하여 약원(藥院)의 일까지 빚어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요구하는 것은 청죽(靑竹)에 그쳤지마는 청죽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우황(牛黃)에 이르게 되며, 우황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인삼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한 자는 장무(掌務)에 그쳤지마는 장무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제조(提調)에 이르게 되며, 제조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대신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넷째, 여러 신하들을 분별하여서 그 직임(職任)을 정선(精選)하여야 합니다. 전하의 병통은 직언(直言)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시기 때문에 윤순(尹淳)이 절수(折受)하는 일을 말하였다가 왕지를 거스렸으며, 이종성(李宗城)이 귀주(貴主)의 제택(第宅)에 관한 일 때문에 왕지를 거스렸던 것입니다. 전하의 뜻을 거스린 자가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 좋아하는 바는 그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유(李瑜)는 비밀히 상소하여 성상의 은총을 받았고, 윤혜교(尹惠敎)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관직(館職)을 보존하였던 것입니다. 저들 귀척 대신(貴戚大臣)들이 4년 동안 낭묘(廊廟)의 자리를 차지하여 조처를 시행한 것이 어떤 시책이었으며, 3주(三晝) 동안 궁궐[厦氈]에 머물면서 건백(建白)한 것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전각(殿閣)에 오르면 한마음으로 왕명을 받들고 순종하기를 거의 왕규(王珪)의 삼지 재상(三旨宰相)175) 과 같으며, 논박을 당하면 잠깐 물러갔다가 도로 출사(出仕)하는 것은 또한 유면화(劉綿花)와 비슷하였습니다. 교활한 역관(譯官)을 시켜 권문(權門)을 초치하였고 어리석은 아들을 시켜 뇌물을 받았으며, 심지어 궁방(宮房)의 재목까지도 손수 물목(物目)을 써 주었고, 해당 창고의 월름(月廩)에 있어서도 몸소 두량(斗量)을 점검하여 일들이 지극히 자질구레했으니, 장차 어떻게 백료(百僚)들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안으로는 귀주(貴主)의 정분(情分)에 이끌리고 밖으로는 도위(都尉)의 안면(顔面)에 구애되어 잠정적으로 얽매어 두는 것인데, 마땅히 예로써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 언로(言路)를 넓히고 선비의 기풍을 장려해야 합니다. 대각(臺閣)에서 입을 다물고 묵묵히 말을 하지 않는 폐단은 군상(君上)께서 간언(諫言)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태중(李台重)의 상소에 대하여 큰소리로 꾸짖은 것은 온전히 그 체모(體貌)를 잃어버렸고, 김상로(金尙魯)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한 말은 더욱 실언(失言)하였으며, 이종성(李宗城)처럼 극언하면서 논란하기를 다한 자에 대해서 혹은 비웃기도 하고 혹은 조롱하기도 하여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헐뜯는 것 같기도 하였으니, 그 전사옹(田舍翁)을 죽일 뜻176) 이 이미 싹트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염치(廉恥)를 권장하여 명분과 절개를 높여야 합니다. 지금의 문사(文士)들은 하나같이 돈을 사랑하고 작위(爵位)를 사랑하는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영관(瀛館)의 자리는 죽어도 회피하면서 전랑(銓郞)의 자리는 즉시 취임하고, 해조는 극력 사양하면서 홀로 이조 참의의 자리에 나오며, 제조(提調)는 부탁하여 도모할 자리가 아닌데도 재상이 친히 절간(折簡)을 보내고,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은 넘겨다볼 수 있는 직위(職位)가 아닌데도 명관(名官)들이 〈자주 찾아와〉 전조(銓曹)의 자리가 다 해어질 지경입니다. 여름철의 부채와 겨울철의 책력은 그 수량이 많은지 적은지를 비교하여 헤아리고 삭봉(朔俸)과 세궤(歲餽)는 그 물량의 풍부한지 부족한지를 견주어 참량(參量)해서, 혹은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러서도 여러 곤임(閫任)들에게 절간을 보내어 친히 혼인과 영향에서 쓰이는 물품들을 토색질하기도 하며, 혹은 몸이 전조의 자리에 있으면서 무신의 수령을 임명하여 보낼 적에 가격이 싼 말을 후하게 값을 받고 팔아먹기도 합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사람을 쓰실 때에 그 작록(爵祿)을 사랑하는 자들을 물리치시고 그 작록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나아오게 하며, 그 의리를 사랑하는 자들을 승진시키고 재리(財利)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치신다면, 세상에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재(李縡)는 10년 동안 산림(山林)에 있었고 김진상(金鎭商)은 젊은 나이에 편안하게 은퇴하였으니, 마땅히 이들을 더욱 포장하여 잠깐 벼슬길에 나왔다가 잠깐 물러가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소서.
일곱째, 사치를 없애고 검소한 덕을 밝혀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복어(服御)에 대하여 천박하고 누추한 것을 혐의스러워 하지 아니하시지만, 후궁(後宮)들 사이에서는 기라(綺羅)로써 어지럽게 사치하고 있습니다. 그 공봉(供奉)하는 데에 있어서도 전하께서는 소박(素朴)하고 검소함을 수치스러워하지 아니하시지만 귀주(貴主)의 집에서는 진수 성찬이 끊이지 아니하니, 이것은 특히 바깥으로 검소하고 질박한 뜻을 보여 여러 아랫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가리려는 데에 지나지 아니할 따름입니다. 통탄할 만한 것은 겨우 조정의 사적(仕籍)에 오르기만 하면 거개 조랑말을 타고,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오르면 문득 강가에 정자(亭子)를 세웁니다. 진신(搢紳)의 부류(部類)들이 위에서 참람한 짓을 하니, 여항(閭巷)의 사이에서 갑자기 서로 이를 본받습니다.
여덟째, 기강을 진작(振作)하여 퇴패한 풍속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왕옥(王獄)에서 지레 풀려 나온 학사(學士)는 그 죄가 고신(告身)177) 을 거두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과장(科場)에서 간계를 쓴 유생(儒生)은 그 형벌이 겨우 한 차례 형신(刑訊)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해조의 아관(亞官)은 음직 당상(蔭職堂上)을 돌아가면서 차정(差定)하는 자리가 되었고, 대간(臺諫)의 청선(淸選)은 시임 재상들이 생색(生色)을 내는 자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호남·호서 지방의 번임(藩任)은 중요한 직임인데도 천박하고 어리석은 자제들을 외람되게 등용하였고, 낭서(郞署)의 자리는 현질(顯秩)인데도 시골 출신의 평범한 무리들을 구차스럽게 보충하였습니다. 송문상(宋文相)의 탐오한 장물죄(贓物罪)도 또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결과로 돌아갔고, 이하택(李夏宅)의 역절(逆節)을 아직도 밝게 핵실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신(武臣)들의 교만한 습성은 점차 제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애당초 총관(摠管)을 제수하면 문득 사직하는 소를 올리고, 한 번 시망(試望)에 들어가면 언제나 패소(牌召)를 어기니, 윗사람을 능멸하고 아랫사람에게 오만한 태도는 문관(文官)보다도 심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어찌 정중부(鄭仲夫)178) 의 전철을 다시 밟는 데에 이르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처음에 ‘임금의 덕이 점차 처음과 같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이르기를,
"한 사람의 몸이 판연히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고, 한 사람의 말이 마치 두 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고, 끝에 마음을 바루어 병폐를 제거하는 근본을 삼으라고 하였으며, 동중서(董仲舒)의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서 조정(朝廷)을 바로잡으라.’는 말과 주자(朱子)의 ‘일만 가지 일이 임금의 한 마음에 근본한다.’는 말로써 결말(結末)을 지었다. 말단에 또 말하기를,
"무신들이 전에 이미 전하께 아첨하는 말을 올렸고 종신(宗臣)들도 지난번에 또 대비전[東朝]에 아첨하는 말을 올렸는데, 일후에 무신에게서 나온 것이 문신에게서도 나오지 않으며, 대비전에 아첨하는 자들이 전하께도 아첨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행여나 이와 같은 마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한 번 흔들린다면 대본(大本)과 대원(大原)이 바른 데로 돌아가는 그러한 날이 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나이 젊은 신진(新進)이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숨김 없이 말하여 실상(實狀)에 지나친 바가 있으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상소의 원장(原章)을 궁중에 머물러 두라. 내 자신에 허물이 없으면 더욱 힘쓸 것이요, 허물이 있으면 맹성(猛省)하겠다. 영상[首揆]의 일에 이르러서는 미세한 일들을 모조리 주워 모아서 대신의 허물을 들추어 내었는데, 이것이 과연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하였다. 그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소대(召對)를 열었는데, 그 상소가 들어가자 즉시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영상(領相)을 돈유(敦諭)하였다. 또 유시를 내리기를,
"문언박(文彦博)은 현명한 상신이었고 당개(唐介)는 바른 말을 하는 신하였는데, 문언박은 특별히 영주(英州)에 보임(補任)하였고 당개는 별가(別駕)에 제수179) 하여 황문(黃門)180) 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으니, 대개 특별히 보임한 것은 대신을 공경하였기 때문이고, 호송한 것은 바른 말을 하는 신하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석표(李錫杓)가 진술한 말은 모두가 간절하고 곧으니, 대신을 배척한 한 가지 일로써 그를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오직 그가 앞서지도 아니하고 뒤서지도 아니하여 관리들을 승진시켜 제배(除拜)하는 때에 경알(傾軋)하였으니,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그가 조정의 체모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를 신칙하기만 하고 포장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이석표를 함열 현감에 제수하고, 특별히 역마(驛馬)를 타고 가도록 하여서 내가 나라의 체모를 중하게 여기고 바른 말을 하는 신하를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이석표의 봉장(封章)은 그대로 쌓아둔 지 본래 오래 되었는데 조목별로 기록한 내용이 많았다. 장차 상소문을 정서(淨書)하기에 미쳐 ‘당파의 습성을 깨뜨리자’는 한 가지 조목은 뽑아 버렸다. 그리고 이미 그 상소가 궁중에 들어가자, 그는 스스로 무거운 견책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서신으로 그의 숙부 이명곤(李明坤)에게 고별하고, 또 그 원초(原草)를 보내어서 이것을 비밀히 간직하도록 하였다. 이명곤이 그때 영월 부사(寧越府使)로 있었는데, 상소의 원본을 궁중에 머물러 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경솔히 도백(道伯)에게 이것을 보였기 때문에 드디어 널리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송징계(宋徵啓)와 조최수(趙最壽) 등이 인혐(引嫌)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임금이 상소 중에는 그 내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을 금지시켰다. 그 ‘당파의 습성을 깨뜨려서 실효를 꾀하자’는 한 가지 조문은 비록 예람(睿覽)을 거치지 아니하였으나, 이미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으므로, 사관(史官)이 이것을 추후하여 기록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생각하건대, 전하의 탕평책(蕩平策)은 아직도 미흡하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쓸 때에는 반드시 노·소(老少) 양당에서 천거하게 하여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자 하고, 간언을 들을 때에는 일찍이 그 옳은지 그른지를 분별하지 아니하며, 형벌과 상사(賞賜)를 자신의 임의로 하지 못하고,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도 스스로 주관하지 못하여 일단의 의견이 오로지 일을 미봉(彌縫)하는 데에 있으니, 비록 당파를 깨뜨리고자 하더라도 진실로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선왕조 때에 망명(亡命)한 사람들을 죄가 있다고 이른다면 마땅히 죽여야 하고 죄가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석방하여야 하는데, 처음에는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여 두었다가 나중에는 곧 양이(量移)하며, 평생토록 의지하고 기대는 신하에게는 그 은총이 악수(握手)하는 데에까지 미치고 그 포상이 해를 꿰뚫을 만큼 지극하지만, 그들이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빨리 치사(致仕)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전하께서 형벌과 상사를 과연 스스로 임의로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수원(柳壽垣)의 학식이 어찌 송징계(宋徵啓)만 못하여 홀로 영선(瀛選)에서 누락되었고, 오광운(吾光運)의 문한(文翰)이 또한 어찌 조최수(趙最壽)에 미치지 못해서 국자감(國子監)의 의망(擬望)에 통과되지 못했으며, 홍경보(洪景輔)의 재주와 명망이 어찌 유복명(柳復明)보다 못해서 도리어 번임(藩任)의 제수에 저지되었고, 홍정명(洪廷命)의 주벌(胄閥)이 어찌 박치문(朴致文)에 비교가 되지 않겠습니까마는 대성(臺省)의 의망(擬望)에 아직도 저지되었으니, 전하께서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을 스스로 주장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파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말하기를,
"홍성보(洪聖輔)·윤광천(尹光天)처럼 이익을 좋아하고 수치를 모르는 무리들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없지만, 곧 평일에 고담 준론(高談峻論)을 하며 스스로 청탁을 분별한다는 자들도 또한 때에 따라서 변화하니, 홍성보의 무리와 더불어 오십 보 백 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저 김일경(金一鏡)이 역적질한 것이 우리 편의 결백함에 무슨 허물이 되겠으며 저쪽 편의 더러움에 무슨 신선함이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반드시 우리 편의 두면(頭面)을 바꾸어 저쪽 편의 비위를 받들도록 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그들의 함정에 빠지고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사대부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초조하게 가슴을 태우는 조명익(趙明翼)과 왕명을 순순히 받드는 이춘제(李春躋)를 오래도록 근밀(近密)에 두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11월 24일 기미
도승지 김시형(金始炯) 등이 이석표(李錫杓)를 배척하고 보임(補任)한 분부를 도로 거두도록 계청하면서 말하기를,
"이석표는 명가(名家)에서 글을 읽은 자제로서 스스로 높고 깨끗함을 자처하였고 또 평일에 당론(黨論)을 즐겨하지 아니하던 자입니다. 전하의 대관(臺官)이 되어서 전하의 국사를 논의하여 안으로 궁부(宮府)로부터 밖으로 조정에 이르기까지 통렬하게 논란하여 숨김이 없었습니다. 그 직언(直言)하는 기풍은 맑은 조정의 간신(諫臣)이 됨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이에 성상께서 이를 장려하여 옛날의 직언하던 신하의 기풍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자리에 은혜스러운 보임(補任)은 중국 영주(英州)의 별가(別嘉)에 견줄 바가 아니며 역마를 타고 가는 행차는 중사(中使)가 호송(護送)하는 것보다 거의 지나칩니다. 그러나 다만 그 논열한 것이 모두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였으며, 대신을 논한 일은 특별히 우려하고 개탄할 만한 한 가지 일인데, 이것을 경알(傾軋)한다고 지목한다면 그를 가상히 여겨서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며, 배척하여 보임한다고 이름을 붙인다면 그를 우대하여 용납하려는 것이 아니니, 중앙과 외방에서 반드시 말하기를, ‘전하께서 밖으로는 비록 가차(假借)한다고 하지만 안으로는 실제로 그를 멀리해서 버리는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25일 경신
간원 【사간 허옥(許沃)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석표(李錫杓)는 풍채와 곧은 명성이 근일에 아첨하는 풍습을 깨끗이 씻어 버렸으며, 족히 선비의 기풍을 고무시켜 나라의 기맥을 북돋우었으니, 그를 배척하여 보임(補任)하는 분부를 마땅히 빨리 도로 거두소서."
하고, 부수찬 윤경룡(尹敬龍)도 또한 상소하여 이를 말하였으나,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이 이석표(李錫杓)의 상소에서 배척을 당하였다고 하여, 즉시 그날 도성(都城)을 나가서 시골로 향하니, 임금이 잇따라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로하고 유시한 뒤에 그와 함께 오게 하였다. 김흥경이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였는데, 몹시 분개하는 말이 많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전하여 이를 비웃었다.
11월 26일 신유
달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남태온(南泰溫)을 장령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지평으로, 조현명(趙顯命)과 김취로(金取魯)를 지경연으로, 박필재(朴弼載)를 부수찬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1월 27일 임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호랑이가 북부(北部)의 삼천동(三川洞) 굴 속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떼를 지어 다니면서 개와 돼지를 남김없이 물어갔고, 또 전 현감 박필부(朴弼傅)의 집에 들어와서 마굿간의 말을 물어 죽였다.
11월 29일 갑자
서명빈(徐命彬)을 부제학으로, 이흡(李潝)을 대사간으로 임정(任珽)을 응교로, 이철보(李喆輔)를 교리로, 윤유(尹游)를 형조 판서로, 김동필(金東弼)을 예조 판서로, 심육(沈錥)과 어유봉(魚有鳳)을 유선관(諭善官)으로, 윤동원(尹東源)과 박필주(朴弼周)를 보양청(輔養廳)의 요속(僚屬)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이진망(李眞望)이 말하기를,
"보양청에 강학관(講學官)과 요속을 두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유신들로 하여금 이것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판부사 이태좌(李台佐)가 헌의하여 태종조(太宗朝)의 고사(故事)에 좌우 유선관(諭善官)이 있었음을 끌어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비들을 징소(徵召)하여 선임(選任)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유시하기를,
"심육의 사람됨이 순실(淳實)하다."
하고, 특별히 그에게 이 직임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30일 을축
대사간 이흡(李潝)이 상소하여 이석표(李錫杓)를 배척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석표는 신진(新進)의 대관(臺官)으로서 진언하면 분명한 말로써 곧바로 아뢰어야 할 터인데, 지금 곧 의사(疑似)한 조목을 배열하여 암매(黯昧)한 안건(案件)을 꾸며서 만들었으니, 그 계획은 반대파를 일망 타진하려는 데에 있었으며, 그 일은 유언 비어에 가깝습니다. 비록 영상[首揆]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가 앞서지도 아니하고 뒤서지도 아니하였던 것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안으로는 귀주(貴主)의 애정에 이끌리고 밖으로는 도위(都尉)의 안면(顔面)에 구애되었다.’라는 따위의 말은 은연중에 말을 둘러대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조절(操切)하는 묘책을 삼았으며, 교묘하게 꾸며댄 말이 또한 승여(剩輿)에까지 미쳤습니다. 비록 일월(日月)같이 밝은 성감(聖鑑)으로도 간사한 계책에 빠지셔서 마치 곧은 당론(讜論)처럼 보았기 때문에 엄하게 배척을 내리시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포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분부를 도로 거두라는 청이 여러 사람들의 물정(物情) 밖에서 나왔으니, 신이 어찌 구차스레 이 논의에 동참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석표가 대신을 경알(傾軋)한 것이 비록 해괴하다고 하지마는 지금 그대는 다른 일과 아울러 혼동해서 그를 배척했으니, 또한 지나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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