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병인
밤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가 3,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한강 주변에 사는 백성들은 말[馬]이 있기 때문에 공가(公家)에서 물건을 수송할 경우에 역(役)에 응해야 하는데, 대개 방민(坊民)들이 점차 줄어들고 그 역을 피하는 자가 많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에 변통하여 마계(馬契)를 모으고 말을 빌린다고 이름하는데, 방민은 매년 1호(戶)에서 3백 전(錢)을 내고, 호조(戶曹)에서는 한 바리[駘]의 쌀에 각각 6승(升)을 지급하여 말을 빌리는 값을 보상하였습니다. 그 뒤에 태가(駘價)를 그 즉시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호(役戶)가 날로 점차 줄어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말을 빌리는 사람들이 도성 가운데 말을 가진 백성들을 유인하여 그 역을 분담하게 되니, 그 입마(立馬)하는 수가 한강 주변의 백성보다 갑절이나 되었습니다. 금년 봄에 본부에서 품의(稟議)하여 호전(戶錢)을 더 정하고 한결같이 가차(家次)에 따라 책립(責立)하였는데, 갑자기 호민(豪民)들이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도로 즉시 폐지되었습니다. 이에 말을 빌리는 사람들이 근래 더욱 딱한 사정을 호소하지만, 이것을 선처할 방책이 없습니다. 내년부터 그들이 호소하는 바에 의하여 1년에 운송하는 바리를 1만 필로 정하고, 봄철과 가을철로 나누어서 쌀을 지급하되, 한결같이 양서(兩西) 지방에서 공물(貢物)을 운송하는 예대로 한다면, 호조에 있어서는 값을 지급하는 수량이 처음부터 손해되는 바가 없을 것이고, 공인(貢入)에 있어서는 말을 세우는 방도를 계속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사직하는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언제나 왕실(王室)을 생각하여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근심의 단서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장 걱정되는 것은 임금의 마음이 공평한 체통을 잃어버리고 언제나 자신의 생각대로 고집하는 병통이 많으며, 민생은 곤궁하고 위급한 형세가 있으니, 진실로 민심의 이합(離合)과 향배(向背)에 관계되는 기회입니다. 체통이 허물어져 떨쳐 일으킬 방도가 없고 관료의 자리는 흩어져서 불러 모을 가망이 없으며, 허위와 가식 때문에 명분과 실상이 서로 혼돈되고 이익과 욕심에 골몰하여 풍습이 점차 험악해지니, 신은 임금을 보필하는 책임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곧바로 전패(顚沛)를 자취(自取)하여 성간(聖簡)에 누를 끼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오늘날 낭묘(廊廟)의 형세로 보아 어찌 경이 관례대로 사양할 수가 있는 시기이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승지 이광보(李匡輔)가 말하기를,
"신 등은 직책이 금밀(禁密)에 있으면서 아직도 원자(元子)를 뵙지 못했으니,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보양청(輔養廳)의 전례를 보건대, 옛날 중종조[中廟朝] 때에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진청(陳請)하여 승지와 사관(史官) 및 나이 젊은 유신들이 번갈아 들어가서 원자궁(元子宮)을 알현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선정신이 건의하였는가? 과연 아름다운 제도이니, 이것을 준행(遵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12월 2일 정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사간 허옥(許沃)이 이흡(李潝)의 소 때문에 인피(引避)하고, 이흡을 가리켜 ‘참언(讒言)하지 않으면 아첨한다.’고 하니, 이흡이 또 대변(對辯)하는 소장을 올리기를,
"이석표(李錫杓)의 상소에서 비록 이하택(李夏宅)의 한 가지 일로써 말하더라도 범연히 캐어물어 핵실하기를 청하면서 남몰래 죄인을 신원하고 구제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그가 특별히 대신(大臣)에게만 경알(傾軋)하였을 뿐이겠습니까? 지금 아간(亞諫)이 신에게 감정을 품고 트집을 잡으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한구절 말을 끄집어내어 신의 입을 막는 권병(權柄)을 삼았고 상궁(上躬)에게까지 대략 언급하였는데, 임금을 바로잡고 보필할 만하였기 때문에 아울러 다른 공평하지 못한 자들과 정직하지 못한 자들을 한결같이 포장하였으므로 감히 그의 잘못을 논할 수 없단 말입니까? ‘참언과 아첨[讒諛]’ 두 글자는 너무도 무엄(無嚴)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3일 무진
윤심형(尹心衡)을 사간으로, 김시환(金始煥)을 공조 판서로, 김취로(金取魯)를 판윤으로 삼았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나와서 숙사(肅謝)하고 입시(入侍)하여 실정(實政)에 힘쓰고 정신(精神)을 아끼며 대체(大體)를 유지하고 기강을 진작(振作)하는 방도를 아뢰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12월 4일 기사
이춘제(李春躋)를 대사간으로, 윤취함(尹就咸)을 사간으로, 이주진(李周鎭)을 헌납으로, 김상로(金尙魯)와 조영국(趙榮國)을 정언으로 삼았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사은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보필하는 상신의 자리에 있는 자는 책임이 너무나 막중합니다. 무릇 시행하고 조치하는 바가 어찌 능히 사람들의 바람에 다 만족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대간이 상소하여 논란하고 배척하는 것은 그들이 비록 나이가 젊고 기개가 날카로운 소치라고 하더라도 실지로는 너무 지나칩니다. 또 영상[首揆]이 왕실과 혼인을 맺기 전에 이미 매복(枚卜)에 들어갔는데, 지금 그들의 말뜻은 마치 인척(姻戚)을 빙자한 것처럼 했으며, 또 귀주(貴主)와 도위(都尉)를 거론하여 말한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영상의 여러 아들들은 수졸(守拙)하여 남과 교유(交遊)하기를 일삼지 아니하는데, 어찌 차마 ‘남의 뇌물을 받았다.’는 따위의 말들을 가볍게 그들에게 뒤집어씌울 수가 있겠습니까? 근래 조정의 고위직에 있는 자는 비방하고 헐뜯는 무함을 쉽게 받는데, 이런 말을 쓰는 자는 매우 쉽겠지마는 이런 일을 당하는 자는 어찌 억울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을 매복한 것은 경의 자품이나 명망 때문이 아니요, 경의 공정한 마음 때문이니, 경은 마땅히 공정한 마음을 체득하도록 하라. 지금 조정이 비록 서로 모여 합하는 것 같지만 문란하고 어지러운 것은 전일보다 심하다. 내가 이석표(李錫杓)를 처치한 것이 스스로 적중(適中)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흡(李潝)은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를 구속하고 억제한다.’라고 하니, 이것은 이석표의 본심이 아니다."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비록 상소의 원본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가 이하택(李夏宅)의 일을 말한 것이 과연 이흡이 아뢴 말과 같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대저 조정의 진신(搢紳)들을 언급하는 경우에는 많이 은어(隱語)를 사용하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마음이 불안하며 군상(君上)께서도 또한 지나치게 의심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전체의 상소에서 또한 가상한 데가 많다고 합니다. 이흡은 오로지 참언(讒言)과 사첨(邪諂)을 가지고 지목하였으니, 피차에 언의(言議)가 장차 서로 어긋나고 과격해질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물건을 각기 물건에 붙이면 이는 물건을 부리는 것이요, 물건에게 부리는 바가 되면 이는 물건에게 부림을 받는 것이 됩니다. 전하께서는 마음을 부리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령(政令)의 하자[疵類]를 스스로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부자(孔夫子)가 가르친 바, ‘남이 속인다고 억측(臆測)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고 억측하지도 아니한다.’고 한 말이 전하께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병통은 소명(小明)의 병이 없지 아니한데, 내가 이것을 알지만 능히 고칠 수가 없다. 시대의 분위기가 서로 어긋나고 과격해지는 것은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알아주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비록 영성군(靈城君)181) 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그를 광패(狂悖)하다고 말하지만, 경이 홀로 그를 알 뿐이다. 대관(大官)이 진정되면, 조정(朝廷)에서도 어찌 의심하고 저지하는 데에 이르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이 어제 상소에서 이르기를, ‘민생이 곤란하고 위급한 형편에 있다.’라고 한 것은 한번 순포(純布)를 시행하도록 명령한 뒤부터 도성(都城)의 백성들이 또한 모두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이종성(李宗城)의 순포 시행을 주청한 잘못을 주달하고 또 말하기를,
"어유영(魚有瀛) 등 일곱 유생(儒生)들은 나이가 20이 되지 않았으므로, 족히 무거운 죄를 줄 수가 없으니, 청컨대, 정배(定配)하라는 분부를 도로 거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때 도성의 백성들 가운데 순포의 폐단 때문에 격고(擊鼓)하여 등문(登聞)한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순포를 파하라고 명하고서 외람되다고 하여 그 사람들을 죄주었다.
12월 5일 경오
허집(許集)을 사간으로, 이성효(李性孝)와 권현(權賢)을 정언으로, 조명교(曺命敎)를 대사성으로 삼고, 이정제(李廷濟)를 발탁하여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이정계는 약간 재간이 있었으나 경망스러워 인망이 없었는데, 갑자기 높은 품질로 발탁되니, 여러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임금이 대신(大臣)들과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이병정(李秉鼎)과 송문상(宋文相)의 불법한 죄를 율에 의하여 고쳐서 감단(勘斷)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청나라 연경(燕京)에서는 동전(銅錢)이 있으나 공가(公家)에서는 사용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항(閭巷)의 매매에서만 사용된다.’고 하였는데 내가 이것을 듣고 흥미로워 했다. 언제나 동전을 혁파함이 옳다고 말하지만, 단지 동전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다. 국초(國初)에 시행하던 저화(楮貨)도 결코 다시 시행하기가 어려우며, 면포(綿布)도 또한 그러하다.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동전을 천하게 여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크게 물건을 매매하고자 한다면 은화(銀貨)와 미곡(米穀)을 사용하도록 하라. 동전을 쓰는 것을 금지하고 싶지만 우리 나라에 은이 적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선혜청 당상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비록 은이 나기는 하나 근래 연경에 가는 역관(譯官)들이 금물(禁物)을 가지고 책문(柵門)을 나갈 때 정은(情銀)을 많이 허비하여 한번 사신의 행차에 지급하는 은화가 3, 4천 냥을 밑돌지 아니합니다. 우리 나라의 은화로써 중국의 금단(錦緞)과 채단(綵緞) 따위를 무역해 오는 데에 지나지 않는데, 동방(東方)의 풍습이 사치가 날로 심하여 심산 궁협(深山窮峽)의 전가(田家)에 사는 부녀자들까지도 한 벌의 비단옷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지난날에는 전토(田土)와 제택(第宅)은 모두 은으로써 값을 치렀는데, 한번 은화가 연경(燕京)에 통하는 것이 열리면서부터 동전이 따라서 귀해지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연경에 가는 역관(譯官)의 숫자를 조금 감하여 줄이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전을 천하게 하려면 은이 없고 은화를 천하게 하려면 동전이 없으니, 역관이 된 자도 진실로 강구(講究)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영성군(靈城君)의 견해는 몇 사람의 역량(力量)을 겸할 수가 있다는데, 일찍이 한번 물어 보고자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경이 모름지기 이것이 편한지의 여부를 그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어사(御史) 이종백(李宗白)이 회령(會寧) 사람 오석종(吳碩宗)을 천거하였는데, 전조(銓曹)에서 해남 현감(海南縣監)으로 제수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그의 역사(歷辭)로 인하여 그로 하여금 머물러 대기하고 임지에 부임하지 말도록 하고, 아뢰기를,
"극북(極北) 출신의 사람을 극남(極南)의 고을에 보내는데, 그가 비록 ‘관가에 도착한 다음에는 마땅히 관북(關北)에 사람을 보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을의 큰 폐단이 될 것이므로, 신은 이것을 고칠 것을 청하려고 하였으나, 먼 변방 사람을 까닭없이 갑자기 체거(遞去)하는 것도 또한 특별히 임명하는 뜻에 어긋나니, 청컨대 다른 고을로 바꾸어 임명하여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비록 관북 지방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왔다고 하겠으나, 백도(白徒)가 함부로 외람되게 받은 은혜는 이미 지극히 다행한 일입니다. 길이 멀기 때문에 바꾸어 임명하는 것도 사체(事體)가 구차스럽고 어려우니, 청컨대 선조(選曹)로 하여금 우선 그 관직을 체차시키고 다른 자리를 기다렸다가 제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지평 김도(金䆃)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석표(李錫杓)가 비분 강개하여 소장을 올려서 그 화복(禍福)을 헤아리지 아니하자, 여대(輿儓)들도 그 이름을 칭송하였고, 진신(搢紳)들은 안색이 바뀌었으니, 그는 진실로 아침 해가 먼저 비치는 산 동쪽의 한 마리 봉황이며 비바람 속에 한 마리 외로운 닭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맑은 조정의 간쟁(諫諍)하는 기관의 우두머리가 홀로 무슨 심장(心腸)으로써 공공연히 주먹을 휘두르면서 ‘안으로는 귀주(貴主)의 정분에 이끌리고 밖으로는 도위(都尉)의 안면에 구애된다.’는 말을 끄집어내어 지적하고, ‘앞서지도 아니하고 뒤서지도 아니하였다.’는 하교를 빙자하여, 성상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당로(當路)에 아부하였던 것입니다. 청컨대 그의 관직을 파면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서로 논쟁할 수가 없다.’고 비답하였다.
임금이 초복(初覆)182) 을 행하였다. 장령 남태온(南泰溫)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진하 서장관(進賀書狀官) 김우철(金遇喆)은 사람된 바탕이 본래 경박하니, 마땅히 체차시켜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사간 허집(許集)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7일 임신
김성탁(金聖鐸)을 정언으로, 임정(任珽)을 등극 진하 서장관(登極陳賀書狀官)으로, 홍경보(洪景輔)를 승지로, 이종백(李宗白)을 공홍도 관찰사로, 신사철(申思喆)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유선(諭善) 심육(沈錥)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특별히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그 뜻이 있으니, 즉시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함경남도 병사 신덕하(申德夏)가 계청하기를,
"추솔(騶率)을 간편하게 하고 주방(廚房)과 전사(傳舍)를 없앤 뒤에 단천(端川)으로 가서 진보(鎭堡)를 혁파할 것인지 그대로 둘 것인지의 여부와 봉화대를 옮겨 설치할 곳과 혁파할 곳을 살펴보게 하소서."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은 이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지난해 이삼(李森)이 남도 병마사가 되었을 때에 산 계곡이 험하고 좁으면 말을 타지 않고 미투리[芒鞋]를 신은 채 보행(步行)으로 여러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었는데, 그 뒤에 부임해 간 자들은 이와 같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덕하도 반드시 그 형세를 돌아보고 요해처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니, 이것을 허락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그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일은 함은군(咸恩君)183) 에게서 들었다.’고 하였으니, 옛날 장수를 흠모하는 뜻을 볼 수가 있다."
하고, 임금이 명하여 내년 봄까지 기다렸다가 현지에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다. 황해도 감사 유척기(兪拓基)가 이뢰기를,
"김시혁(金始爀)이 일찍이 황해도의 방백(方伯)이 되었을 때 소속된 별무사(別武士)들에게 매년 도시(都試)184) 를 보여서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는 급제(及第)를 내려 관직을 맡기고, 2등을 차지한 자에게는 변장(邊將)에 제수할 일로써 장문(狀聞)하여 제도(制度)로 정하였는데, 근래에는 수용되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낙심하여 흩어지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청컨대 신의 감영에서 관할하는 각둔(各屯)의 별장(別將) 5, 6인의 자리[窠]에 합격한 사람들을 채워서 임명하고, 인수(印綬)를 차도록 허락하여 무사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진주(晋州)의 촉석(矗石)은 곧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의 요충지이지만, 서울과의 거리가 멀어서 과거에 나오는 자가 드뭅니다. 그러므로 장사(將士)들이 궁시(弓矢)를 익히지 아니하니, 만약 서북 지방의 예와 같이 친기위(親騎衛) 3백인을 두고서 도시를 설치하여 그들을 격려한다면, 국가가 위급할 때에 그들을 믿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병사(兵使) 윤택정(尹宅鼎)도 이것을 가지고 청하니, 마땅히 이 제도를 베풀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과거(科擧)의 제도가 너무 문란해진다고 하여 이것을 어렵게 여겼다. 호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한두 번의 무과(武科) 액수로써 중난(重難)하게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친기위는 으레 모두 전마(戰馬)를 스스로 준비하는데, 남부 지방에는 소가 많고 말이 적으므로 3백 명이라는 숫자를 모집하여 채우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약 이웃 고을에서 말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응모해서 아울러 시험을 보게 한다면, 그 법이 시행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병법에서는 ‘우리의 장점을 가지고 적의 단점을 대적하다.’라고 하였으니, 포수(砲手)는 서북 지방을 방어할 수 있고, 궁마(弓馬)는 왜적을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반대로 서북 지방에 궁마를 설치하고 동남 지방에는 이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1년에 한번의 무과를 아껴서 3백 인의 무사들을 위로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만약에 진주에 이것을 창설한다면 호남·호서와 경기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장차 서로 잇따라 이것을 청할 것이다. 이제 진주 사람들이 처음에는 홍패(紅牌)를 바라다가 후일에는 반드시 실직(實職)을 바랄 것이며, 이를 얻지 못한다면 반드시 윗사람을 원망할 것이니, 차라리 처음부터 그 원망이 생기는 계제(階梯)를 없애는 것이 옳다."
하였다. 사간 허집(許集)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9일 갑술
윤순(尹淳)과 유척기(兪拓基)를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삼았는데, 대신들이 천거한 것이었다.
12월 10일 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대전(大錢)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의논이 결정되지 않았다. 호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이 상소하여 그것을 반드시 시행할 수가 있다는 것을 역설(力說)하였고, 조정의 신하들도 그것을 시행할 수가 있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다. 이일제(李日躋)가 전법(錢法)을 익히 잘 안다고 하여 특별히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종성(李宗城) 등과 더불어 온종일 논란(論難)하였다. 홀로 조원명(趙遠命)만이 이것을 시행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며, 임금도 또한 이것을 어렵게 여기고 다시 상량(商量)을 가하여 혁파하게 하였다. 이종성이 경계하는 말을 올리기를,
"전하께서 만약 여러 신하들을 신칙 격려하고 조정의 옛법을 익숙하게 강론(講論)하신다면, 어찌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방책이 없겠습니까? 지금 대전(大錢)·소전(小錢)의 한 가지 일을 가지고 큰 변통(變通)을 삼으시니, 나라를 다르시는 요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송인명이 창고의 환곡(還穀)을 모조리 백성들에게 지급하고 그 모곡(耗穀)을 취해서 사용하는 자는 바로 장오(贓汚)의 율을 적용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관물을 모두 들여다가 사사로이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장오의 율로써 이것을 처단할 수가 없다."
하였는데, 호조 판서 이정제(李廷濟)의 주청에 따라 그들을 잡아들여 신문한 뒤에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정제가 또 주청(奏請)하기를,
"수령이 창고를 털어서 백성에게 주는 자들이 어찌 모두 그 모곡을 이롭게 여기기 때문이겠습니까? 재상(災傷)을 당한 고을에서는 이것에 구애받을 수가 없으니, 마땅히 상량하여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기의 고을에서는 환곡이 너무나 적으므로 금법(禁法)을 범하는 자들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지난날 대간(臺諫)을 사판(仕版)에서 영구히 삭제하라는 명령은 아마도 언관(言官)에게 죄주는 율이 아닌 듯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판에서 삭제하는 것과 관직을 삭탈(削奪)하는 것은 같은 형률인데, 경이 여러 차례 이것을 말하므로 내가 마땅히 이에 따르도록 힘써서 관직을 삭탈하는 것으로써 고치겠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신이 경술년185) 에 외방 고을에서 교체되어 돌아와서 옥당(玉堂)의 관원으로서 진수당(進修堂)에 등대(登對)하였을 때에 감히 서북 변방의 우려될 만한 일들을 아뢰고, 잇따라 사람을 가려서 구임(久任)하라는 뜻을 주달하였었는데, 성상의 뜻도 또한 이것을 옳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을 쓰는 데에 있어서 실지로 개탄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원필규(元弼揆)의 사건에 대하여 대계(臺啓)에서는 ‘삼가지 않았다.’고 논하였는데, 중신(重臣)들은 도리어 대간의 말을 공격하였고, 원필규를 포장해 아뢰어 재촉하여 임지(任地)에 내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도신(道臣)에게 듣건대, ‘북보(北報)186) 가 왔는데 원필규는 이때에 힘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로소 그를 교체시켜 바꾸도록 하였다.’고 했으니, 진실로 나라가 위급할 적에 힘쓸 수가 없었다면 중요한 진영(鎭營)에서 다만 한가로이 거닐게 한 것이었습니까?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명신(趙命臣)의 장계(狀啓)에서, ‘청나라의 사정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하자, 그를 체차시키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국가에서 이미 범월(犯越)을 금지하였으니, 저들 가운데 소식을 어떻게 들어서 알 수가 있겠습니까? 변방 위에서 변란(變亂)을 기다리는 자리를 이미 그에게 위임하였는데, 갑작스럽게 그를 교체시켰습니다. 대저 미리 위험한 것을 방비함에는 성지(城池)와 기계(器械)에 달려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그 적임자를 얻는 데에 달려 있는데도 금일에 사람을 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진수당(進修堂)에서 들었던 하교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필규의 사건에 대해서는 영상[首揆]이 말하기를, ‘사건이 사람들을 경동(驚動)시키는 데에 관계되니, 조용하게 이것을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랐던 것뿐이요, 처음에 강제로 보냈다가 끝내는 지레 체차시킨 것이 아니다. 조명신의 경우에는 임용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자상(慈詳)한 것이 너누 지나쳤기 때문에 나는 그 기질을 교정하여 고치라고 면전에서 신칙하였던 것인데, 그의 장계 가운데 ‘신황제(新皇帝)는 누가 섰는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말한 것은 정말로 답답한 때문이다."
하자, 병조 참판 조원명이 말하기를,
"청나라 서울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는 그 사정을 값을 주고서라도 탐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연경(燕京)이 우리 나라와의 거리가 3천 리인데, 어찌 정확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간 허집(許集)과 장령 남태온(南泰溫)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1일 병자
경상도의 유생(儒生) 조세부(曹世溥)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12일 정축
임금이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사형 죄수 10인 가운데에서 사형으로 단죄한 자가 5인이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신칙하여 말하기를,
"지금 듣건대, ‘사람들이 운명(殞命)하는 것은 곤장을 치는 대수의 많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 관장(官長)으로 있는 자가 인명(人命)의 중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는 ‘뜻밖에 죽었는데,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죽은 자의 유가족인 고아(孤兒)와 과부는 어찌 불쌍하고 비참하지 아니하겠는가? 이러한 교서(敎書)를 중앙과 외방에 반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허집(許集)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김예만(金禮晩)에게 사형을 감하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언양 현감(彦陽縣監) 유문룡(柳文龍)은 뇌물을 받아서 비방을 당하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남태온(南泰溫)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보성 군수(寶城郡守) 전만추(田萬秋)는 사비(私婢)에 유혹되어 공무(公務)를 폐지하였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문화 현령(文化縣令) 홍우해(洪禹諧)는 늙고 병들어 말도 하지 못하니, 마땅히 개차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13일 무인
김용경(金龍慶)을 대사간으로, 신만(申晩)을 교리로, 민형수(閔亨洙)를 부교리로, 유건기(兪健基)를 수찬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황해도 관찰사로, 박필부(朴弼傅)를 지평으로 삼았다. 송진명(宋眞明)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로 삼고, 이성룡(李聖龍)을 우윤(右尹)으로 삼았는데, 묘당(廟堂)에서 추천한 것이었다. 이성룡은 문지(門地)와 명망이 본래 가벼웠는데,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발탁되었으니, 사람들이 외람되다고 하였다. 박필부는 곧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손자였는데, 학문과 조행(操行)으로 천거되어 등용된 것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14일 기묘
이성룡(李聖龍)과 오원(吳瑗)을 승지로, 김상적(金尙迪)을 정언으로, 박필재(朴弼載)를 부교리로, 조현명(趙顯命)을 수어사(守御使)로, 이광덕(李匡德)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12월 15일 경진
사간 허집(許集)과 헌납 이주진(李周鎭)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유문룡(柳文龍)의 사건만을 윤허하였다.
공홍도(公洪道)의 유학(幼學) 윤득형(尹得亨)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도록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사관(史官) 이성중(李成中)이 이석표(李錫杓)의 궁중에 머물러 둔 상소[留中疏]를 내려 주어 《시정기(時政記)》에 기재하자고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2월 18일 계미
이중경(李重庚)을 장령으로, 신방(申昉)을 예문관 제학으로, 송진명(宋眞明)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경상도의 유학(幼學) 채경침(蔡景沈)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배향(配享)하도록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2월 19일 갑신
부교리 민형수(閔亨洙)가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분위기가 차마 양면 수단(兩面手段)을 쓰는 데에 능하여 인군(人君)에게 고하기를, ‘붕당(朋黨)을 반드시 깨뜨릴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도 말하기를, ‘붕당을 어찌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관직을 의망(擬望)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공의(公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당파를 심고 권세를 파는 짓을 제일 급한 일로 삼고 있는데, 혹은 삼사(三司) 사이에서 전하를 취하여 이것을 말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진실로 그 지휘(指揮)에 따르고 서로 기맥이 통하는 자들이 아니면, 반드시 신 등과 같이 감히 일을 말하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밖으로는 탕평(蕩平)의 명목을 핑계하고, 안으로는 남을 구속하고 억제하려는 사사로운 계획를 이루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도리어 의망하는 전조(銓曹)를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사체(事體)인가?"
하였다. 민형수의 상소는 대개 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을 지목한 것이었다. 이종성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당파를 심고 심지 않는 것과 권세를 팔고 팔지 않는 것은 세상의 공의(公議)가 있어서 스스로 간파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론(黨論)에서 큰 권세를 가지고 온 세상을 부추겨서 자기들을 따르게 하는 정상(情狀)은 누가 유신(儒臣)과 같겠습니까? 그러나 전혀 스스로 반성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러한 지목(指目)을 다른 사람에게 가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민현수가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종성이 전조에 들어간 이래로 한번도 공정한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그의 인아(姻婭)가 아니면 그의 문객(門客)들입니다. 경조(京兆)의 이관(貳官)187) 과 장례원(掌隷院)의 장관(長官)은 사당(私黨)의 인물을 이끌어 들였고, 사학(四學)의 교수(敎授)는 혹은 양사(兩司)의 관원으로 의망을 통과시켰으며, 아직 유신에게 이 자리를 의망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심악(沈)을 외람되게 그 첫번째 의망에 두었었으며, 승지의 통색(通塞) 문제는 반드시 그 장관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법인데도 저번날 의망할 때에 아무런 까닭없이 저지한 바가 많았으며, 이중술(李重述)·이거원(李巨源)·김홍석(金弘錫) 등을 차례로 의망에 점검하여 돌아보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여 책망하기를,
"종이에 가득히 써서 아뢴 바가 옛날의 습성이 아닌 것이 없다. 진실로 엄하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시종안(侍從案)에 쪽지[韱]를 붙이도록 명하였다가, 다음날 그를 파직시키고 그 상소를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이종성이 또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금일제(金日磾)188) 와 장안세(張安世)189) 같은 자는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집안이고 세상에 으뜸되는 가문으로 그 문생(門生)과 고리(故吏)들이 거의 나라의 절반을 차지하여 그들이 상을 찡그리고 웃음을 웃으며 호흡하는 데 따라 분주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이 어떠한 당원(黨援)이며 이 어떠한 권력입니까?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이 파다하고 유식한 자들의 근심하고 분개하는 바가 스스로 돌아가는 곳이 있을 줄로 신은 생각합니다."
하였다. 그 사학(私學)의 교수(敎授)에 대한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심악은 판부사(判府事)의 아들이고 심육(沈錥)의 아우입니다. 안으로 조행(操行)이 순수하게 갖추었고 마음가짐이 단정하고 고결하며 높은 문학과 넓은 식견은 그 제배(儕輩)에서 뛰어났습니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몸을 거두어서 겸손하고 은퇴하여 자기 몸을 단속하기를 마치 처녀와 같이 하였으니, 그 한갓 부형(父兄)의 음덕(蔭德)을 빙자하고 친구들과 떼를 지어 교유(交遊)하여 언의(言意)에 오르내리는 자에게 비교한다면 제등(齊等)하게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그 승지에 대한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조명익(趙明翼)은 애당초 서명형(徐命珩)의 사서(私書)를 그의 장주(章奏)에 베껴 썼었는데, 서명형의 상소한 말이 추잡하고 패려하여 맑은 조정의 예양(禮讓)하는 풍습이 아니었으므로, 전후의 주의(注擬)에서 두 번씩이나 모두 빠졌던 것입니다. 옛날의 대간(臺諫)은 그 말이 승여(乘輿)에 미치게 되면 천자(天子)도 이를 위하여 얼굴빛을 고쳤다고 합니다. 이흡(李潝)은 교묘하게 꾸민 말이 심지어 승여에까지 미쳤으며 말을 다한 대신(臺臣)을 논척(論斥)하였으니, 이는 급암(汲黯)190) 을 참소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주운(朱雲)191) 을 목 벨 만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에 잠시 전의 의망(擬望)을 정지하여 공의(公議)를 약간 보였습니다."
하고, 그 이중술(李重述) 등에 대한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대저 방비(防備)한다는 것은 바로 나라를 방비한다는 것이지 자기 당파 사람들을 방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의 죄악은 한 가지인데, 이중술과 이거원(李巨源)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엄하게 배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의(公議)에 버림받았던 것입니다. 신은 임징하(任徵夏)를 구원하는 자에 대하여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방비가 탕연(蕩然)함을 민형수도 또한 근심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허나 습성을 이미 통찰하여 알고 있는데, 그 어찌 이처럼 자기 주장만을 서로 고집하는가?"
하였다.
12월 20일 을유
사간 허채(許采)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병정(李秉鼎)은 일찍이 서원(西原)192) 을 맡고 있으면서 불법한 짓을 많이 행하였는데, 가까운 경기에다 도년(徒年)의 율에 처한 것은 그 처벌이 실당(失當)하여 너무 가벼우니, 마땅히 멀리 유배시켜야 합니다. 호조 정랑 정윤선(鄭潤先)은 탐오하고 혼모(昏耗)하며, 예조 정랑 김대(金岱)는 근본이 비천하고 한미하니, 마땅히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도태시키소서."
하고, 또 안흥(安興)의 역사(役事)를 혁파하고, 이선(李譔)이 공적을 바라서 일을 그르친 죄를 엄하게 처분하도록 청하니,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공홍도(公洪道)의 유학(幼學) 이영덕(李英德) 등과 황해도의 생원(生員) 신욱(申煜)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으나, 아울러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선(諭善) 심육(沈錥)이 왕명을 받들고 나오니, 임금이 그를 인견하고 원자(元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에 힘쓰도록 하였다.
12월 23일 무자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민형수(閔亨洙)를 처분한 것이 너무 과중합니다. 이종성(李宗城)이 스스로 변명한 상소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가 공정(公正)하지 못하였던 점을 굽어 통촉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오원에게 한편으로 치우쳐서 죄를 덮어 준다고 질책하고, 또 말하기를,
"당파를 심고 권세를 판다는 죄목을 어떻게 이종성에게 가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이종성이 들어와서 성상께 고하고 나와서 바깥 사람들에게 말할 적에는 문득 이르기를, ‘한편으로 치우친 의논을 반드시 제거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으나, 그가 하는 짓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이것과 상반되었습니다. 또 옛날 금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가 대대로 부귀 영화를 누렸다.’라고 한 것은 민형수의 가문과 세대를 헐뜯고자 하는 것이며, ‘방비(防備)하는 것이 탕연하다.’라고 한 것은 민형수의 아비와 형을 헐뜯고자 하는 것이니,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고 그 관계된 바가 너무나 큽니다."
하니, 임금이 이종성의 상소를 주면서 그로 하여금 두루 의견을 진술하게 하였는데, 오원이 또 전에 한 말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엄하게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마음을 버리지 아니한다면 결단코 너를 다시는 쓰지 않겠다. 내가 너의 아비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요, 네가 스스로 이를 잊어버린 것이다."
하였다. 이에 오원이 오열(嗚咽)하면서 다른 말을 하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지휘하여 그를 내보내도록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스스로 힘쓰겠다는 말을 듣고자 하였는데, 오로지 자기편 사람을 비호하는 짓만 일삼으니, 마땅히 징계하는 뜻을 보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오원의 관직을 파면시키라고 명하였다.
12월 24일 기축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5일 경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근일에 민형수(閔亨洙)와 이종성(李宗城)이 번갈아 서로 소를 올렸는데, 그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며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이종성은 세상에 수용(需用)할 재능이 있어 제배(儕輩)들보다 뛰어난데, 그 논의하는 바가 본래 스스로 느즈러지지 아니하며 정사의 주의(注擬)에서는 한편에 치우친 바가 없지 않으므로, 신이 일찍이 이것을 힘써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종성이 어찌 사정(私情)을 행하려는 데에 뜻이 있겠습니까? 대개 관리를 등용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뒤로부터 전주(銓注)하기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삼사(三司)에서 자기의 일을 논하였는데, 비답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먼저 대변(對辯)하면서 남의 집안과 세대를 헐뜯다가 그 말이 그 아비와 형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 사체(事體)를 크게 잃게 된 것이니, 마땅히 이종성을 죄주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자못 그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이종성의 관직을 파면시키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이를 진정시키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송인명이 또 김상적(金尙迪)과 민형수(閔亨洙)의 관직을 파면시켜서 서로 남의 조상을 헐뜯는 풍습을 징계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대개 김상적이 사관(史官)으로 천거되었을 때에 민형수가 한원(翰苑)193) 의 선생안(先生案) 소주(小註)에 실려 있는 김선여(金善餘)의 사건으로써 이를 저지하였었다. 그 뒤에 김상적이 대관(臺官)이 되자 상소하여 그 무고한 것을 변명하니, 민형수가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김상적이 한원의 선생안을 대하면 능히 이마에 진땀을 흘리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김상적이 또 말하기를,
"난대(蘭臺)194) 의 첩자(帖子)에 주(註)를 달았던 것은 홀로 신의 가문(家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이마에 땀을 흘렸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것은 대개 민형수의 선조인 민수(閔粹)가 사초(史草)를 지우고 고쳤기 때문에 국문(鞫問)을 당하여 노예로 삼았던 일이 또한 제명(題名)의 첩자에 기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송인명이 이종성의 일로 인하여 두 사람에게 다 죄를 주자고 청하였다.
조원명(趙遠命)을 이조 판서로, 서명빈(徐命彬)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7일 임진
임금이 형관(刑官)에게 사형수 가운데 용서하여 줄 만한 자를 뽑아서 품재(稟裁)하라고 명하였다. 형조 판서 송진명(宋眞明)과 형조 참의 김유(金濰)가 문안을 가지고 와서 아뢰니, 임금이 친히 이를 판결하였는데, 사형을 감한 자가 16인이나 되었다.
12월 28일 계사
윤순(尹淳)을 공조 판서로, 한현모(韓顯謨)를 강춘도 관찰사로, 정수송(鄭壽松)을 평안도 병사로, 조엄(趙儼)을 경상우도 병사로 삼았다.
12월 29일 갑오
윤순(尹淳)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는데, 장차 출발하려 하자, 부수찬 이주진(李周鎭)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윤순은 지방에서 원자의 보양관(輔養官)에 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멀리 떠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송진명(宋眞明)으로써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12월 30일 을미
정언 이현망(李顯望)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이종성(李宗城)의 상소 가운데 ‘김(金)·장(張)195) ’이라는 두 글자는 말이 성모(聖母)196) 에 관련된다고 말하여 그 본가(本家)에서 그를 견책하라고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시류의 폐단이 가볍지 아니합니다."
하니,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변명하기를,
"김·장이라고 일컬은 것은 원래 정창(鄭昌)197) 이 갑관요(蓋寬饒)198) 와 송사(訟事)한 글에서 나왔는데, 김·장·허·사(金張許史)199) 를 아울러 호화 세족(豪華勢族)의 집으로 일컫게 되었습니다. 국구(國舅)의 집안과 세대는 본래 조행(操行)이 있는 유문(儒門)으로서 예법(禮法)으로 이름이 드러났는데, 그 중간에 변고가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일찍이 이러한 따위의 절목을 더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후손에다 성내어 그들을 기롱하고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파직시킨 가벼운 벌도 오히려 신원하여 풀어주고자 하는데, 도리어 신을 허물한단 말입니까?"
하니, 아울러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해에 경중(京中)은 5부(五部)의 원호(元戶)가 3만 3천 8백 36호(戶)였고, 인구는 남녀 아울러 18만 7천 7백 56구(口) 내였다. 【남자는 9만 1천 2백 19구였고, 여자는 9만 6천 5백 37구였다.】 팔도(八道)는 원호가 1백 58만 4천 3백 36호였으며, 인구는 남녀 아울러 6백 79만 2천 42구 내였다. 【남자는 3백 38만 1백 23구였으며, 여자는 3백 41만 1천 9백 19구였다.】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5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91면
【분류】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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