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1권, 영조 12년 1736년 1월

싸라리리 2025. 9. 1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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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신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여 농사를 권장하도록 하고, 또 가혹하거나 임시 방편의 정치를 경계하였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친림(親臨)하여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았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세자를 일찍 세우도록 청하자,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옛날 현종[顯廟] 때 숙종[肅廟]께서 탄생하셨는데 고(故) 상신(相臣)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국본(國本)001)  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을 하자, 대신(大臣) 정태화(鄭太和)가 말하기를, ‘원자가 탄생한 날은 바로 국본이 이미 정해진 날이니, 어떻게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당시 그것을 격식(格式)이 될 만한 의논으로 여겼으며, 6, 7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책례(冊禮)를 행하였으니, 대체로 복(福)을 아끼는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숙종께서는 50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태평(太平)한 정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또 모든 예(禮)를 상고하여도 말을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는 어린 때에 어떻게 책례를 행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현종조의 고사에 의거하여 천천히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의 중의(衆議)를 따라 전교하기를,
"원자를 세자로 삼아 3월에 날을 가려 책례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을 세자사(世子師)로, 김재로(金在魯)를 세자부(世子傅)로, 정제두(鄭齊斗)를 이사(貳師)로, 윤순(尹淳)·이진망(李眞望)·조현명(趙顯命)·유척기(兪拓基)를 빈객(賓客)으로, 심육(沈錥)을 찬선(贊善)으로, 조한위(趙漢緯)를 보덕(輔德)으로, 신만(申晩)을 겸보덕(兼輔德)으로, 남태온(南泰溫)을 필선(弼善)으로, 김상익(金尙翼)을 겸필선(兼弼善)으로, 유건기(兪健基)를 문학으로, 이주진(李周鎭)을 겸문학(兼文學)으로, 홍중일(洪重一)을 사서(司書)로, 심성진(沈星鎭)을 겸사서(兼司書)로, 정준일(鄭俊一)을 설서(說書)로, 이성중(李成中)을 겸설서(兼說書)로, 최석문(崔錫文)을 자의(諮議)로, 윤순(尹淳)을 대제학(大提學)으로, 홍응항(洪應恒)·이광회(李匡會)를 세마(洗馬)로, 김치만(金致萬)·남유용(南有容)을 시직(侍直)으로, 민창수(閔昌洙)·원경하(元景夏)를 부수(副率)로, 조귀명(趙龜命)·권양성(權養性)을 익위(翊衛)로, 민익수(閔翼洙)·정후일(鄭厚一)을 사어(司禦)로, 이정섭(李廷燮)·조명국(趙鳴國)을 익찬(翊贊)으로, 김신행(金愼行)·윤무교(尹懋敎)을 위솔(衛率)로 삼고, 시강원(侍講院)과 익위사(翊衛司)에 새로 제수된 모든 관원은 유문(留門)002)  하여 입직(入直)하게 하였다.

 

1월 2일 정유

여러 승지(承旨)들에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육전(六典)을 정리해 명확히 하도록 하였으며, 또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편리한 정책을 채택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1월 4일 기해

세자(世子)의 이름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심방(心傍)의 글자를 따르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신(大臣)과 경재(卿宰)가 빈청(賓廳)에 모여 삼망(三望)003)  을 의의(議擬)하여 올리니, 임금이 첫 번째 의의한 ‘선(愃)’자에 낙점(落點)하여 결정하였다.

 

임금이 저승전(儲承殿)에 나아가 세자를 곁에 두고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좌의정[左相]은 바로 세자부(世子傅)이니 예절(禮節)에 구애됨이 있기 때문에 경(卿)만 부른 것이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덕스런 모습이 숙성(夙成)해 보이니, 실로 동방(東方)의 한없는 복(福)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송나라 태종(太宗)이 소년 천자(少年天子)란 말을 비웃었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번의 궁료(宮僚)는 모두 가려 뽑은 사람입니다만, 자의(諮議)의 말망(末望)인 조진빈(趙震彬)은 고(故) 상신(相臣) 조태억(趙泰億)의 아들로서 바야흐로 학문에 뜻을 두고 몸가짐을 삼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함(前銜)이 있거나 생원(生員)·진사(進士)도 아니며 또 도신(道臣)의 추천[薦剡]도 없었으니, 정격(政格)에 위배됩니다. 이조 참판 조원명(趙遠命)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자의의 의망(擬望)은 고치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하게 여겼다. 이에 조원명이 또 상소하여 의망을 고치는 잘못을 분변하였다.

 

김성응(金聖應)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1월 5일 경자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이주진(李周鎭)이 아뢰기를,
"진주사(陳奏使)가 자문(咨問)도 받지 않고서 상(賞)을 먼저 받았다가 쫓겨남을 당하는 데 이르었으니, 사명(使命)을 욕되게 함이 큽니다. 파직(罷職)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하게 여겼다.

 

1월 6일 신축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8일 계묘

임금이 태묘(太廟) 및 영녕전(永寧殿)에 알현(謁見)하였다.

 

감귤을 태학에 내려 주고 겸해서 인일제(人日製)004)  를 행하여 진사 황진(黃)과 생원(生員) 이영록(李永祿)을 직부 전시(直赴殿試)005)  하도록 명하였다.

 

1월 10일 을사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국가에 큰 경사(慶事)가 있으니, 청컨대〈풍환(馮驩)의〉 분권(焚券)006)  한 일에 의거하여 해가 오래된 공·사채(公私債)를 견감해 주어 곤궁한 백성을 위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말한다. "대체로 서울과 지방의 공채(公債)는 부유한 장사꾼과 교활한 역관(譯官)들에게 많이 있는데, 일을 맡은 자는 고적(顧籍)007)  하는 데 구애되어 끌려들어간 데다 대신이 따라서 견감하도록 청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름답지만 그 일은 풍환(馮驩)과 다르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경술년008)   죄인 심유의(沈游義)와 박만보(朴萬普)는 연신(筵臣)이 여러 번 그들의 원통함을 말하였으니, 바야흐로 큰 경사를 당하여 만일 그 원통함을 씻게 하신다면 은혜가 백골에 미칠 것입니다." 하니, 판금오(判金吾)009)  에게 명하여 죄안(罪案)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92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 금융-식리(殖利) / 구휼(救恤) / 사법-행형(行刑)


[註 006] 〈풍환(馮驩)의〉 분권(焚券) : 풍환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이었는데, 맹상군의 심부름을 설(薛) 땅의 빚을 거두러[收債] 갔다가 군명을 핑계하고 백성들이 변상해야 할 채권을 모두 합하여 불에 태워 버렸으므로, 뒤에 맹상군이 궁지에 몰려 설(薛)로 돌아갔을 때 백성들이 크게 환영하였음.[註 007] 고적(顧籍) : 자기 몸을 살펴 소중하게 여김.[註 008] 경술년 : 1730 영조 6년.[註 009] 판금오(判金吾)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사신은 말한다. "대체로 서울과 지방의 공채(公債)는 부유한 장사꾼과 교활한 역관(譯官)들에게 많이 있는데, 일을 맡은 자는 고적(顧籍)007)  하는 데 구애되어 끌려들어간 데다 대신이 따라서 견감하도록 청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름답지만 그 일은 풍환(馮驩)과 다르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경술년008)   죄인 심유의(沈游義)와 박만보(朴萬普)는 연신(筵臣)이 여러 번 그들의 원통함을 말하였으니, 바야흐로 큰 경사를 당하여 만일 그 원통함을 씻게 하신다면 은혜가 백골에 미칠 것입니다."
하니, 판금오(判金吾)009)  에게 명하여 죄안(罪案)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금년의 경기(京畿) 대동 수미(大同收米)를 감(減)하였는데, 북사(北使)010)  가 연달아 도착하였기 때문으로,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경재(卿宰)로서 나이가 많거나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 음식물을 내려 주고, 동돈녕(同敦寧)011) 홍수렴(洪受濂)의 나이가 95세이고 전 감사(監司) 이기익(李箕翊)의 나이가 83세라 하여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대신(大臣)이 말한 때문이다.

 

1월 11일 병오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김용경(金龍慶)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윤택정(尹宅鼎)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1월 15일 경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안음(安陰)은 정희량(鄭希亮)이 군사를 일으킨 곳이기 때문에 그 고을을 혁파하도록 명하였습니다만, 이곳은 명유(名儒)가 살았던 고장이며 또 호남과 영남의 요해[關阨]이니, 수령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대체로 고을을 혁파하는 폐단을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상세히 말하였으며, 처음에는 10년을 기한으로 하다가 중간에 5년으로 줄였는데, 안음은 지금 벌써 9년이 되었고 결성(結城) 또한 마찬가지이니 아울러 다시 설치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방(申昉)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정석오(鄭錫五)를 승지(承旨)로, 조태언(趙泰彦)·이광운(李光運)을 장령(掌令)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지평(持平)으로, 한익모(韓翼謨)·김광세(金光世)를 정언(正言)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수찬(修撰)으로, 유건기(兪健基)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정형복(鄭亨復)을 부교리(副校理)로, 정유량(鄭羽良)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18일 계축

권적(權𥛚)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정(趙侹)을 장령(掌令)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월 19일 갑인

겸보덕(兼輔德) 윤급(尹汲)이 상소하여 전랑(銓郞) 때의 일을 추가하여 아뢰기를,
"대저 당상관 이상은 낭관(郞官)이 진실로 통청(通淸)012)  할 수 없기 때문에 신 또한 주의 할 즈음에 간여하지 않았으며, 뜻에 맞지 않을 경우가 있으면 의망(擬望)을 따라 바로 막는 것이 본래의 정규(定規)이므로, 비록 본조(本曹) 당상관의 의망이라 하더라도 선배(先輩)가 붓을 잡고 쓰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한번 정사(政事)에 다섯 사람이나 통망한 것에 이르러서는 옛날에는 이런 사례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전랑(銓郞)을 통의(通擬)함에 있어 전망(前望)이 있으면 새로 통의할 수 없으며, 또한 한두 사람을 벗어나지 않아야 하니, 이망(二望)에 통의하여 올린 때에 이르러서는 그 정규(政規)의 엄격함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일찍이 낭관을 거친 이가 연고 없이 서울에 있을 경우에는 새로 통의할 때에 문의(問議)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그런데 전 낭관 신만(申晩)이 서울에 있을 때에 장석(長席)이 마음대로 통의하려다가 마침내 정리(政吏)에게 바로잡히는 바가 되었으며, 신만이 북쪽으로 나간 뒤에야 비로소 통의하였는데, 저쪽에서 말하기를, ‘기필코 피차(彼此)의 물정(物情)을 균평(均平)하게 하려고 한다면 숫자를 많게 하여 양쪽을 똑같이 천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사람의 기국(器局)이 어떠한가는 묻지도 않고 한갓 피차를 균평하게 하려고 벼슬길의 최상의 선발을 쌍(雙)으로 맞천거하여 사람마다 기쁘게 해주려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이른바 물정을 균평하게 하는 방도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신사철(申思喆)이 사조(辭朝)013)  하니, 임금이 그를 불러 보고, 또 유시(諭示)하기를,
"박사수(朴師洙)가 변금(邊禁)에 지나침이 있어 소요(騷擾)를 초래하는 데 이르렀으니, 변민(邊民)들이 ‘감화권(感化圈) 밖이라 소홀히 여긴다.’고 하지 않도록 하라. 뒷날 나를 위하여 전구(前驅)014)  가 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경(卿)은 마땅히 관대한 행정으로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하였다.

 

1월 21일 병진

보덕(輔德) 조한위(趙漢緯), 익찬(翊贊) 조귀명(趙龜命)이 세자궁(世子宮)에 병풍 2벌을 써서 올렸는데, 문왕 세자(文王世子) 등편(等編)을 초(抄)해 베낀 것이었다.

 

조명택(趙明澤)을 부응교(副應敎)로, 오언주(吳彦胄)를 교리(校理)로, 박필간(朴弼榦)을 정언(正言)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설서(說書)로 삼았다.

 

1월 22일 정사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당시 청주(淸主)가 새로 즉위하였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당연히 사신을 파견하여 진하(進賀)해야 하며, 옹정(雍正)015)   및 태후(太后)의 시호(諡號)를 올리는 데에도 의당 함께 하례(賀禮)해야 할 것이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경종[景廟]이 왕위에 오른 뒤에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추책(追冊)016)   및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책례(冊禮)를 주청사(奏請使)에게 함께 부쳐서 청하도록 하였더니, 예부(禮部)에서 길사(吉事)와 흉사(凶事)를 함께 청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사신이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이 여기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말하여 그제야 청원을 인준받았습니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일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는데, 더구나 그 나라의 일이겠습니까?"
하고,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양존시(兩尊諡)에 대한 진하를 동지사(冬至使)에게 추부(追付)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가하게 여겼다. 당시 청(淸)나라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우리 나라로 하여금 칙사(勅使)에게 으레 주는 선물을 모두 절반으로 줄이도록 하였는데, 대신이 청하여 원래의 예단(禮單)은 저들의 자문에 따라 절반으로 줄이고 별증(別贈)과 밀증(密贈)은 모두 그전대로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故) 충신(忠臣) 송상현(宋象賢)·정발(鄭橃)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를 동래부(東萊府)의 성 안팎에 각기 세웠었는데, 서차(序次)가 전도(顚倒)되어 비로소 한 사우에다 합향(合享)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배식(配食)017)  하는 김희수(金希壽)·문덕겸(文德謙) 등 다섯 사람도 각각 증직(贈職)하고,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하였으니, 대신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봄추위가 아직도 매섭다 하여 사직(社稷) 춘향(春享)을 친행(親行)한다는 명을 정지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경(卿)들의 청으로 인해서 비록 섭행(攝行)하도록 명하기는 하였었지만, 나는 재계(齋戒)하고 목욕(沐浴)하고는 잠을 자지 않기를 한결같이 몸소 행하는 때처럼 하였는데도 지금까지 부족하고 서운하다. 돌아보건대, 지금 날씨가 점차로 따뜻해지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김재로가 또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민응수(閔應洙)가 대구성(大邱城)을 쌓도록 청하였는데, 그곳의 지형(地形)이 비록 성을 지키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울타리로 막는 장치는 없을 수 없습니다. 조현명(趙顯命)도 일찍이 그 곳에 성을 쌓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하게 여겼다.

 

당시 고유한(高有漢)이란 자가 있었는데, 밤에 남별영(南別營)의 남루(南樓)에 올라가 호황손(胡皇孫)이라고 자칭(自稱)하며 요사스럽고 허탄한 말을 많이 하다가 포교(捕校)에게 체포되었다. 임금이 그가 미쳐서 마음이 변했다 하여 먼 섬에다 형배(刑配)하게 하였다.

 

장령(掌令) 조태언(趙泰彦)이 상소하기를,
"이명언(李明彦) 부자(父子)의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이 역적의 초사(招辭)에 낭자한데도 이석표(李錫杓)가 의복을 준 것을 핵실하도록 청한 것은 깨끗이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사대부를 논핵(論劾)하는 데 이르러서는 오로지 뒤집어씌우는 것을 일삼고 진의를 감추고 말해 그의 지향하는 바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애석합니다. 수규(首揆)018)  가 사사로이 그 과명(科名)을 논하였다가 놀랄 만한 사기(事機)를 앉아서 초래하였고, 또 배척을 당한 여러 사람도 만일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아니면 틀림없이 자기 당(黨) 가운데에서 지론(持論)이 조금 느슨한 자입니다. 더구나 그의 소(疏)에 이어 또 별본(別本)이 나왔는데, 원본(原本)에 없었던 사실을 보태어 넣었으므로, 사람마다 의심하여 뒤를 돌아다봅니다. 그런데도 전하(殿下)께서는 지나치게 포양하고 권장을 더하시어 이를 당개(唐界)019)  에게 비교하시니, 그윽이 미혹이 됩니다. 그리고 이종성(李宗城)의 지체와 명망이 어떠하며 성상의 사랑과 돌보아주심이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습니까? 그 남다른 은혜에 감격하여 충성을 다하여 보답을 도모하여야 마땅한데도 일을 행함에 거의 방자함이 많고 마음가짐이 당론(黨論)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민형수(閔亨洙)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의리로 진실로 통렬하게 진달하고 숨김이 없어야 마땅한데도 앞서 사직소(辭職疏)에 섞여서 들어갔다고 말을 하였으니, 신은 그것이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종성이 민형수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리기도 전에 소(疏)를 올려 욕설을 퍼붓고 꾸짖으며 그 어버이까지 침범하여 욕하였는데, 한 대신(臺臣)을 향하여 대신(大臣)의 연주(筵奏)를 반대하고 힘을 허비해 가며 변명하고 비호하는 것을 신은 참으로 가슴 아파하고 분개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정언(正言) 박필간(朴弼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외척(外戚)의 집안이 비록 모후(母后)의 본종(本宗)이라 하더라도 군상(君上)에 견주어 본다면 그 계급이 현격하게 동떨어집니다. 돌아보건대, 오늘날 세대에 유독 ‘금·장(金張)020)  ’ 두 글자만 구태여 쓰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이것을 가지고 사람을 죄주고 금령을 설정하였으니, 그 척리(戚里)의 입장을 위하는 것으로는 지극합니다. 하지만 유독 성화(聖化)에 누(累)가 되고 강직한 기상을 꺾어 버린다는 것만은 생각하지 못하셨습니까? 신이 대신(大臣)에게는 실로 발탁해 준 은혜를 입었고, 본래 헐뜯는 논의를 할 생각은 없으나, 변함없는 우직(愚直)한 충성은 단지 우리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려는 것뿐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또 차자(箚子)를 올려 대변(對卞)하니, 임금이 말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으로 유시하였다. 박필간이 과거에 급제할 때에 김재로가 고관(考官)이 되었었기 때문에 발탁해 준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비웃었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선온(宣醞)021)  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조태언(趙泰彦)과 박필간(朴弼榦)이 서로 비호하기도 하고 억제하기도 하니 모두 극도로 옳지 않으며, 박필간의 분별없이 혼동해 하는 말과 조태언의 논의는 모두가 귀착(歸着)해 떨어짐이 없다."
하였다.

 

1월 24일 기미

청(淸)나라 사신 산질 대신(散秩大臣) 봉의공(奉義公) 갈이산(噶爾散)과 두등 시위(頭等侍衛) 반장살(班長薩)이 와서 옹정(雍正) 시호(諡號)를 반포하였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맞이하고, 먼저 인정전(仁政殿)으로 돌아와 조칙(詔勅)을 받는 의식을 행하고는 두 사신을 접견하고 차[茶] 대접하기를 전례와 같이 하였다.

 

김취로(金取魯)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정언(正言)으로, 윤득경(尹得敬)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성룡(李聖龍)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박황(朴璜)을 경상도 좌수사(慶尙道左水使)로 삼았다.

 

1월 25일 경신

권정례(權停禮)로 반교(頒敎)하기를 전례와 같이 하였다.

 

임금이 관소(館所)에 나아가 두 사신을 접견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신방(申昉)이 졸(卒)하였다. 신방은 고(故) 상신(相臣) 신완(申琓)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신성하(申聖夏)는 임인년022) 맹제(盟祭)023)  에 참여하여 자못 제류(儕流)들의 헐뜯는 바가 되었다. 신방은 문장[文字]을 스스로 좋아하여 좋은 벼슬을 두루 거쳤으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1월 26일 신유

경기(京畿) 유학(幼學) 이위(李蘤) 등이 상소하여 두 선정(先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도록 거듭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1월 27일 임술

대신(大臣)이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합사(合辭)하여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아뢰어 진연례(進宴禮)를 행하도록 청하니, 자전(慈殿)이 언서(諺書)로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회답하여 내렸는데, 이로부터 빈청(賓廳)에서 날마다 두 차례씩 아뢰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빈청의 대신을 인견(引見)하고 자전의 뜻을 하유(下諭)하기를,
"인선 왕후(仁宣王后)024)  께서는 현종조[顯廟朝]를 당하여 한 번도 진연(進宴)을 받지 않았으며, 장렬 왕후(莊烈王后)025)  께서는 효종·현종 두 조정을 거치면서도 진연을 받지 않으셨는데, 내가 무신년026)  에 마지못해 받기는 하였다. 그러나 매번 「진연(進宴)」 두 글자를 들을 적마다 갑절이나 슬픈 감회가 든다.’고 하교하셨으니, 결단코 마음을 돌려 들어줄 가망이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동조(東朝)027)  께 칭상(秤觴)028)  하는 것은 진실로 성상의 효성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성상께서 하루 세 번씩 문안드릴 즈음에 정성을 쌓아 진달하여 윤허(允許)를 얻는다면, 대신(大臣)과 유사(有司)는 단지 예(禮)를 갖추어 봉행(奉行)하는 것만이 타당할 뿐이다. 그런데 빈청(賓廳)에 모여서 논의하고 자전(慈殿)께 곧바로 아뢴다는 것은 그러한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의리와 분수를 손상시킴이 있지 않겠는가? 대신이 된 자가 바른 도리로 임금을 잘 섬기지 못하고 오직 명령에 순종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뜻을 삼아 갑자기 전에 없던 일을 새로 만들어서 뒷날의 폐단을 열게 하였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93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註 024] 인선 왕후(仁宣王后) : 효종비(孝宗妃) 장씨(張氏).[註 025] 장렬 왕후(莊烈王后) : 인조 계비(仁祖繼妃) 조씨(趙氏).[註 026]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027] 동조(東朝) : 대비. 곧 대왕 대비인 인원 황후를 가리킴.[註 028] 칭상(秤觴) : 헌수(獻壽).
사신은 말한다. "동조(東朝)027)  께 칭상(秤觴)028)  하는 것은 진실로 성상의 효성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성상께서 하루 세 번씩 문안드릴 즈음에 정성을 쌓아 진달하여 윤허(允許)를 얻는다면, 대신(大臣)과 유사(有司)는 단지 예(禮)를 갖추어 봉행(奉行)하는 것만이 타당할 뿐이다. 그런데 빈청(賓廳)에 모여서 논의하고 자전(慈殿)께 곧바로 아뢴다는 것은 그러한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의리와 분수를 손상시킴이 있지 않겠는가? 대신이 된 자가 바른 도리로 임금을 잘 섬기지 못하고 오직 명령에 순종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뜻을 삼아 갑자기 전에 없던 일을 새로 만들어서 뒷날의 폐단을 열게 하였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원접사(遠接使) 송진명(宋眞明)이 재차 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니, 아경(亞卿)029)   중에서 계자(階資)를 더하여 차견(差遣)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김재로 등이 이기진(李箕鎭)을 추천하자, 임금이 ‘이기진의 사직소(辭職疏)에 「때에 따라서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고집스럽고 막혀 있어 발탁하여 기용할 수 없다.’ 하고, 이유(李瑜)의 직질(職秩)을 더하여 발탁하라 명하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국사(國事)에 부지런히 노고하는 사람이다."
하였다.

 

1월 28일 계해

이유(李瑜)를 원접사(遠接使)로, 윤급(尹汲)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임금이 이진망이 늙고 병들었음을 민망하게 여겨 김취로(金取魯)를 파견하려고 하자, 송진명(宋眞明)이 김취로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있다고 아뢰니, 임금이 마지못해 그대로 따랐다. 대체로 송진명은 우의정[右相]의 종형(從兄)이고, 김취로는 좌의정[左相]의 종제(從弟)였다. 그런데 서로 그들의 사사로움을 진달하여 왕사(王事)를 억지로 회피하고서 늙고 병이 들어 한산한 자리로 물러난 사람을 파견하게 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불평(不平)하였다.

 

권혁(權爀)을 부응교(副應敎)로, 박필재(朴弼載)를 교리(校理)로, 김상익(金尙翼)을 응교(應敎)로, 유건기(兪健基)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종실(宗室)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등이 상소하여 되풀이해서 개진(開陳)하여 자전(慈殿)의 마음을 돌리게 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조최수(趙最壽)가 이석표(李錫杓)의 상소 때문에 가재(家財)를 모두 거두어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석표의 상소 가운데 언급한 바가 없었다."
하자,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들으니, 초본(初本)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등철(登徹)030)   된 소본(疏本)이 아니니, 논박을 입은 자가 혐의스럽게 여기는 것은 부당합니다. 청컨대 추고(推考)하여 올라오도록 재촉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하게 여겼다.

 

1월 29일 갑자

정석오(鄭錫五)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숙(李潚)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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