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1권, 영조 12년 1736년 2월

싸라리리 2025. 9. 1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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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을축

예조(禮曹)에서 각릉(各陵)의 봄철 전알(展謁)031)  을 계품(啓稟)하니, 이달 12일에 광릉(光陵)을 전알하도록 명하고, 백성들의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특별히 향군(鄕軍)의 호위(扈衛)를 정지시키고 도로를 또한 간략하게 다듬도록 하였다.

 

2월 2일 병인

임금이 칙사(勅使)를 모화관(慕華館)에서 전송하였다. 악차(幄次)에 들어가 관반 제신(館伴諸臣)을 인견(引見)하고 금훤(禁喧)을 엄중하게 하지 않았다고 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 정권(鄭權)을 잡아들이게 하였다.

 

2월 4일 무진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성룡(李聖龍)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권면하여 유시하였다. 이성룡이 양전(量田)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하게 여겼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강계부(江界府) 마마해보(馬馬海堡) 진영(鎭營)의 군졸들이 삼세(蔘稅)를 줄이려고 밤을 틈타 포(砲)를 발사하여 권관(權管)을 공갈(恐喝) 했습니다."
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앞장선 두 사람은 효시(梟示)하고 수종(隨從)한 자들은 섬으로 귀양 보내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수찬(修撰) 이주진(李周鎭)이 상소하여, 수개월 사이에 칙사(勅使)의 행차가 네 차례나 이르러 경기(京畿) 안의 민력(民力)이 다하였다고 말하고, 능행(陵幸)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평안도[西藩]로부터 체임되어 도성(都城) 밖에 이르러 소(疏)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임금이 대면(對面)하여 신칙할 일이 있다고 해서 즉시 도성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윤순(尹淳)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정언(正言)으로, 이춘제(李春躋)를 승지(承旨)로, 이우(李玗)를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홍원익(洪元益)을 경상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로 삼았다. 홍원익은 무신년032)   역란(逆亂)에 기복(起復)033)  되어 북도(北道)의 안무사 군관(按撫使軍官)이 되었었는데, 고기를 먹고 기생을 끼고 놀기를 일반 사람과 다름없이 하였으며, 역란이 진정됨에 이르러서도 놀아나는 데 빠져 즉시 돌아오지 않았다가 이것으로 명교(名敎)034)  에 죄를 얻어 잇달아 주곤(州閫)035)  에 의망(擬望)되었으나 모두 막힘을 당했다가 이때에 이르러 병곤(兵閫)036)  에 발탁되니, 물의(物議)가 놀랍게 여겼다.

 

자의(諮議) 최석문(崔錫文)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2월 6일 경오

빈청(賓廳)에서 날마다 두 차례씩 자전(慈殿)에 아뢰었는데, 이에 이르러 하답(下答)하기를,
"기쁨을 표하는 방법이 어찌 진연(進宴)하는 데에만 있겠는가? 비록 오순(五旬)037)  이라 하여 청한다 하더라도 들을 때마다 슬픈 감회가 더욱 새로워지니,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어찌 진연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얼마 있다가 임금이 빈청의 대신을 불러 보고 전교하기를,
"자전(慈殿)께서 나로 하여금 직접 유시(諭示)하게 하시니,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명을 받고 물러났다.

 

이일제(李日躋)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2월 8일 임신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기를,
"서울에서 광릉(光陵)에 이르는 길에 신현(新峴)이란 곳이 있는데, 바로 육릉(六陵)에서 내려온 맥(脈)입니다. 옛날에는 전석(磚石)이 깔려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깎이고 손상되었으니, 보수하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자세히 살펴보고 오게 하였다.

 

황해도 유학(幼學) 이정휘(李正彙)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김시형(金始炯)·조원명(趙遠命)·이용(李榕)을 승지(承旨)로, 이주진(李周鎭)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2월 9일 계유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박규문(朴奎文)의 흉언(凶言)이 있는 뒤로부터 걱정되고 두려워 병(病)을 이루었으며, 차마 물러날 계획을 결정하였습니다. 인신(人臣)의 진퇴(進退)는 모름지기 명백하고 근엄함에 힘써야 하고 구차스러움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신이 처음에 이미 물러날 것을 아뢰고도 아직까지 머뭇거리는 것은 진실로 구차하고 간략함을 면하기 위함이었으나, 오직 물러나 구학(丘壑)038)  을 지키면서 한평생을 후회 없이 지낼 뿐입니다."
하였으나,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2월 10일 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능행(陵幸) 뒤에는 호사(犒士)039)                  하는 것이 전례인데, 거기에 쓰이는 소[牛]가 수백 마리에 이릅니다. 바야흐로 만물이 발생(發生)하는 때를 당하여 도살(屠殺)을 많이 하는 것은 불가하니, 청컨대 마른 물품을 지급하도록 하소서."
하니, 군문(軍門)에 명하여 전례를 상고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는 아뢰기를,
"병진년040) 만과(萬科)041)                  의 무과 급제(武科及弟)의 연갑(年甲)이 다시 돌아왔으니, 청컨대 고(故) 판서(判書)        이광적(李光迪)의 고사(故事)에 따라 꽃을 내려 영화롭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또 쌀·고기·통술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이때 형관(刑官)이 민가[閭家]를 빼앗아 들어가 금법(禁法)을 범하는 일을 가지고 면전에서 아뢰면서 이야기가 분분하자,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동필(金東弼)이 아뢰기를,
"다스리는 도리는 대체(大體)를 유지하는 것이 귀중하니, 대체를 이미 얻게 되면 모든 세목(細目)은 저절로 펴집니다. 신이 선조(先朝)에 여러번 당후(堂后)042)                  로 입시하였는데, 차대에서의 주어(奏語)가 군덕(君德)과 시정(時政)에 관한 것이 아니면 바로 관방(關防)의 큰 계책이나 생민(生民)의 묵은 폐단으로서 상하의 논설이 실질적인 일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개 유사(有司)의 잗단 일을 가지고 번거롭게 연품(筵稟)까지 하는 데 이르고 있으니, 이는 국가에 보탬이 없고 한갓 사체(事體)만 손상시킬 뿐입니다."
하니, 임금도 그렇게 여겼다.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준(朴㻐)을 헌납(獻納)으로, 김상신(金相紳)·이광제(李光躋)를 정언(正言)으로, 송징계(宋徵啓)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윤득화(尹得和)를 전광도 관찰사(全光道觀察使)로 삼았다.

 

2월 11일 을해

채응복(蔡膺福)을 헌납(獻納)으로, 남태량(南泰良)·이태징(李台徵)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2월 12일 병자

임금이 광릉(光陵)에 거둥하였다.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특별히 병조 정랑(兵曹正郞) 이덕중(李德重)을 불러 거둥 때 수령이 백성을 소요스럽게 하는 일을 염탐하여 살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능(陵)에 나아가 예(禮)를 행하고, 관원을 보내어 인빈(仁嬪)과 용성 대군(龍城大君)의 묘(墓)에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중관(中官)을 보내어 영빈(寧嬪)의 묘에 치제하도록 하였다.

 

2월 13일 정축

임금이 대궐로 돌아오다가 토원 주정소(兎院晝停所)에 이르러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진순(李眞淳)과 양주 목사(楊州牧使) 유언통(兪彦通) 및 어사(御史) 이덕중(李德重)을 인견(引見)하고, 또 길가의 부로(父老)를 불러 위유(慰諭)하였다.

 

대가(大駕)가 석관현(石串峴)에 이르자, 병방 승지(兵放承旨) 한사득(韓師得)을 불러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성응(金聖應)에게 전령(傳令)하여 현무진(玄武陣)으로 사하리(沙河里)에서 결진(結陣)하여 기다리게 하였는데, 대가가 이르니 기고(旗鼓)043)  로써 영접하였다. 임금이 사하리에 이르러 장단(將壇)에 오르니, 훈련 대장(訓鍊大將) 어유귀(魚有龜)·어영 대장 김성응이 갑주(甲胄)044)   차림으로 참관[參見]하였다. 임금이 암령(暗令)을 내어 금군(禁軍) 1초(哨)로 하여금 어영진(御營陣)을 추격하게 하였는데, 승지 한사득과 선전관 이홍(李泓)이 전명(傳命)을 잘못하여 금군 7번이 한꺼번에 모두 출동하였으므로, 임금이 놀랍게 한사득은 파직(罷職)하고 이홍은 곤장으로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2월 14일 무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는데, 경기 어사(京畿御史) 이철보(李喆輔)가 함께 입시하여 수령(守令)으로 법을 업신여기는 자의 죄를 차등 있게 논하였다. 이철보가 아뢰기를,
"양역(良役)의 폐단으로 백성들이 바야흐로 절박한 형세에 놓여 있으니, 마땅히 빨리 호포법(戶布法)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성상의 마음이 처음 정치하실 때보다 점점 해이해지고 사륜(絲綸)045)  도 실제 효과에 부족함이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경기(京畿)의 봄철 대동미(大同米)를 1결(結)에 1두(斗)를, 양주(楊州)는 2두를 감하게 하였는데, 연달아 칙사(勅使)의 행차를 맞이한데다 또 능행(陵幸)을 겪었기 때문이다.

 

2월 15일 기묘

권업(權𢢜)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상규(金尙奎)를 승지(承旨)로, 민정(閔珽)을 사간(司諫)으로, 김정윤(金廷潤)을 헌납(獻納)으로, 유최기(兪最基)를 지평(持平)으로, 박필재(朴弼載)·김성탁(金聖鐸)을 정언(正言)으로, 김상익(金尙翼)을 부응교(副應敎)로, 유건기(兪健基)를 교리(校理)로, 이주진(李周鎭)을 수찬(修撰)으로, 윤유(尹游)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정제(李廷濟)와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진순(李眞淳)을 파직하였으니, 과천(果川)에서 거둔 대동미(大同米)를 본 고을에 보관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뒤에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려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이진순의 파직은 정지하였다.

 

형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을 파직하였다. 이보다 앞서 송진명이 아뢰기를,
"귀인방(貴人房)의 간산(看山)046)  과 능행(陵幸) 때 문안 중사(問安中使)가 길에 끊이지 않았는데, 경기(京畿) 내의 역(驛)이 거의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 처음에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했다가 전지를 받고 입계(入啓)함에 이르러 아뢴 말들을 첨가해 고쳤다고 하여 크게 책망하고 죄주도록 하였는데, 좌의정[左相]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벌(罰)이 너무 무겁다고 진달하자 정지시켰다.

 

등극 진하 정사(登極進賀正使) 함평군(咸平君) 이홍(李泓), 부사(副使) 정석오(鄭錫五), 서장관(書狀官) 임정(任珽)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보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2월 16일 경진

신만(申晩)을 부응교(副應敎)로, 정형복(鄭亨復)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2월 17일 신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2월 18일 임오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춘방(春坊)047)  의 관원을 처음 차출(差出)할 때에 이조 참판(吏曹參判) 조원명(趙遠命)이 전랑(銓郞) 이주진(李周鎭)과 상의하여 참하관(參下官)의 천망[望]을 새로 통의(通擬)하자,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아전(亞銓)이 혼자서 신통(新通)을 주관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합문(閤門) 밖에서 심하게 꾸짖자, 조원명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으며, 신통을 받은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의리를 끌어다 출사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재로가 임금에게 아뢰어 혐의하지 말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당시 장릉(長陵)048)  의 능졸(陵卒)이 침랑(寢郞)049)  을 예조 및 비국에 알고(訐告)050)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또 어사에게 호소하였는데, 어사 이철보(李喆輔)가 〈침랑의〉 비루하고 잗달게 침탈한 상황을 진달하니, 임금이 졸례(卒隷)의 호소로 인하여 관장(官長)을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에 관계 된다고 말하고 그대로 두게 하였다.

 

강춘 감사(江春監司) 한현모(韓顯謨), 평안 병사(平安兵使) 정수송(鄭壽松)이 사조(辭朝)하니, 인견(引見)하고 권면하여 유시하였다.

 

사간(司諫) 민정(閔珽)이 상소하기를,
"신이 근년에 이 직임을 욕되게 하고 있으면서 말미를 받아 기한이 지나고서야 올라와서 인피(引避)하니, 부제학(副提學) 이종성(李宗城)이 처치(處置)하여 체임하도록 논박하면서 규피(規避)하는 데 교묘하다고 말했으며, 작년에 변방 고을에 부임해서는 또 심리 어사(審理御史) 이종백(李宗白)의 탄핵을 받아 체임되었으니, 신이 당로(當路)051)  에게 죄를 얻어 잇달아 이종백의 동당 형제(同堂兄弟)052)  에게 번갈아가며 주먹으로 맞고 발길에 채인 꼴이 되었습니다."
하고, 끝부분에 또 북로(北路)의 수령을 가끔 문신(文臣)으로 차임하도록 하고, 북쪽의 상인들이 남쪽의 노비를 불러다 끌어들이는 폐단은 뒷쫓아 체포하여 법을 적용하도록 청하니, 답하기를,
"지난 일을 모아서 도로 원한을 갚으려고 배척하니, 이런 등류의 풍습은 내가 취하지 않는다. 덧붙여 진달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2월 20일 갑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해은군(海恩君) 이당(李爣)이 민가[閭家]를 빼앗아 들어간 죄에 맞는 형률을 근거할 데가 없으니, 청컨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도(徒) 3년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고 널리 알려 법령으로 삼게 하였다.

 

묘(廟)·능(陵)·전(殿) 및 모든 친제(親祭) 때 임금이 출입하거나 위(位)에 있을 적에 백관(百官)이 반열에서 돌아서서 몸을 굽히지 말도록 명하니, 이는 압존(壓尊)053)  되기 때문이었다.

 

김약로(金若魯)를 승지(承旨)로, 권혁(權爀)을 사간(司諫)으로, 정홍제(鄭弘濟)를 정언(正言)으로, 김상익(金尙翼)·이주진(李周鎭)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순(尹淳)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취로(金取魯)를 공조 판서(工曺判書)로 삼았다.

 

전광도(全光道)의 생원(生員) 박중거(朴重擧)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향(從享)하도록 거듭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을 왕세자 책례 정사(王世子冊禮正使)로, 김동필(金東弼)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소대를 행하였다.

 

2월 22일 병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당시 장령(掌令) 조정(趙侹)·조태언(趙泰彦)이 인피(引避)하여 물러가서 기다린 지 30일이 지났어도 처치하지 않았는데, 이날 시독관(侍讀官) 오언주(五彦胄), 검토관(檢討官) 이주진(李周鎭) 또한 모두 억지로 인피하자, 임금이 오언주를 책망하고 처치하도록 하니, 오언주가 차자를 올려 조정은 출사하게 하고 조태언은 체임하도록 청하였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흡(李潝)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남에게 주먹으로 맞고 발길에 채임을 당한 것은 오로지 이석표(李錫杓)를 배척한 ‘교묘한 말이 또한 군주에게도 미쳤다.[如簧之舌 亦及乘輿]’는 여덟 글자 때문이었습니다. 이석표의 상소는 지면에 가득하도록 장황하였으며, 종횡(縱橫)으로 닫고 열고 하여 갑자기 보면 비록 근사(近似)한 듯하지만 언사(言事)의 배치[排布]가 실상은 그 기괄(機栝)054)  을 감추었으며 정신을 쏟은 바는 모두 이하택(李夏宅)을 구원하려는 한 가지 일에 있었기 때문에, 신이 과연 그 정상을 엿보아 깨뜨렸으나 말을 구사할 즈음에 매듭지어 이르기를 〈위에 이른바 여덟 글자로〉 운운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원본(原本)과 초본(草本)을 보태거나 삭제하는 등 변환(變幻)을 일으켜 추잡하고 졸렬함이 모두 드러났고, 배격하려 죄에 빠뜨리고 추천하여 끌어 올리는 것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대로 하였는데도 끝내 하나의 ‘직(直)’자로 엄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소에 이미 전사옹(田舍翁)055)  등의 말로 이종성(李宗城)을 권장하고 추켜 세웠는데, 이종성을 급암(汲黯)056)  과 주운(朱雲)057)  에다 비교하며 찬미하는 데 이르렀으니, 신은 그윽이 놀랍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호유(湖儒)의 상소에 반인(泮人)058)  이 성묘(聖廟)059)   가까운 곳에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거재 유생(居齋儒生)이 가서 관람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거재 유생을 죄주고 성균관의 관원은 잡아다 조처하며 당상관은 추고(推考)하도록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2월 23일 정해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주진(李周鎭)이 아뢰기를,
"조현명(趙顯命)이 훈신(勳臣)은 청관(淸官)과 화관(華官)을 사임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예로부터 훈척(勳戚)으로 전관(銓官)이 된 자가 많습니다. 조현명은 주옥(州獄)에서 명을 기다리는 데 이르렀으니, 거듭 사체(事體)를 손상시켰습니다."
하였다. 뒤에 대신(大臣)의 아룀을 따라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않도록 하였다.

 

2월 24일 무자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김약로(金若魯)가 나아가 아뢰기를,
"계축년060)   겨울에 대고(大誥)하고 갑인년061)   겨울에 신칙하고 격려한 뒤로부터 신민(臣民)들이 날마다 이상적인 정치를 희망하였으며, 또 이종성(李宗城)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대붕(大鵬)062)  에 비유한 유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년, 2년을 지나 지금까지도 이루어진 성과가 없으니, 신은 실로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대고(大誥) 등의 말을 들으면 마음에 늘 부끄럽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일찍이 이종성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썼기 때문에 늘 대할 때마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내가 어찌 오늘날의 정치를 매우 만족하게 여기겠는가? 단지 정치가 뜻을 기다리지 않음으로 인연하여 자연 퇴보하고 위축되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붕에 비유한 유시는 실제 나의 마음이니, 어찌 한갓 사륜(絲綸)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조정의 신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2월 25일 기축

박추(朴樞)를 집의(執義)로, 조명택(趙明澤)을 사간(司諫)으로, 홍득후(洪得厚)를 장령(掌令)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지평(持平)으로, 윤양래(尹陽來)를 판윤(判尹)으로, 이유(李瑜)를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유경(金有慶)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김상규(金尙奎)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조정(趙侹)이 상소하기를,
"박필간(朴弼榦)의 상소는 그 말에 담긴 뜻이 몹시 패악합니다. 대저 ‘금·장(金張)’ 두 글자는 출처(出處)가 어떠한 것이며 지의(旨意)가 어떠한 것인데 이종성(李宗城)이 감히 견주지 못할 처지에다 감히 견주었으니, 오늘날의 신자(臣子)로서 명릉(明陵)063)  의 마음을 일삼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의당 엄중히 배척하여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지금 박필간이 감히 ‘직기(直氣)’ 두 글자로 극구 권장하고 추켜 세우니, 그 노마(路馬)064)  에도 끼지 못한다는 의리에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삭출(削黜)하는 벌을 시행함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이석표(李錫杓)의 소(疏)는 유중 불하(留中不下)065)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이철보(李喆輔)의 집에서 한 본(本)이 나와 서로 돌려가며 베껴 전하면서 겉으로는 잘못을 바로 잡는다고 칭탁하고 속으로는 경알(傾軋)066)  하는 계책을 이루려고 하며, 배척을 당한 사람도 자신의 의견과 다르지 않으면 모두 그 내부의 완론(緩論)으로 여겨 정신을 쏟는 바는 오로지 이하택(李夏宅)을 변명하여 구원하는 데에 두고 있으므로, 등철(登徹)된 소본(疏本) 외에 또 별본(別本)으로 흘러 전해지는 것이 있어서, 조정에 가득한 신료(臣僚)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느라 말들이 분운(紛紜)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그 소(疏)를 빨리 내리시어 중외(中外)에 분명하게 보여서 의혹을 깨뜨려야 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춘방(春坊)의 참하관(參下官)은 바로 최상의 선발에 관계되므로 차관(次官)이 통청(通淸)할 수 없는 격례(格例)가 매우 엄격하니, 대신(大臣)이 진품(陳稟)한 것은 실로 그 선발을 중하게 여겨서입니다. 그런데 승지(承旨) 홍경보(洪景輔)는 대신이 물러나가는 것을 곁에서 엿보고 있다가 근거 없는 말로 면전에서 아첨하였으니, 그 마음과 태도가 미워할 만합니다. 파직하는 벌을 시행함이 타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먼저 조정(趙侹)을 체직(遞職)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있다가 유시를 내려 책망하기를,
"조정의 상소 가운데는 금·장(金張) 등의 설과 박필간에 대한 처분은 이미 하교하였는데, 인신(人臣)이 된 자가 어찌 감히 다시 이를 제기하며, 노마(路馬)에도 끼지 못한다는 말은 비유가 너무 해괴하고 패악한 데 관계된다. 그리고 승선(承宣)067)  이 진달한 바가 다른 뜻이 없었는데 ‘곁에서 엿보고 있다가 면전에서 아첨하였다.’는 등의 말은 극히 교활하고 참혹하며, 그 부축하고 억제하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겨 미워하는 바를 배격하고 모함하니 인신(人臣)의 예(禮)가 없다. 삭직(削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김약로(金若魯)가 조정(趙侹)을 삭출(削黜)한 일은 중도(中道)에 지나치다고 말하고, 지사(知事) 조상경(趙尙絅)도 말을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석표(李錫杓)·민형수(閔亨洙)·이종성(李宗城) 등의 처분은 내가 자못 마음이 넓고 여유가 있다고 여겼다. 박필간(朴弼榦)은 과연 괴이하기는 하였지만 이미 처분하였는데, 조정이 어찌 감히 이 일을 다시 제기하는가? 이는 기필코 극죄(極罪)에 몰아놓으려고 한 것인데 그것이 도리어 감히 말하지 못할 처지를 침범하여 핍박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하게 추문하여도 불가함이 없다. 승지(承旨)가 어떻게 감히 구원하려 드는가?"
하고, 김약로를 추고하도록 명하였다가 도로 또 유시를 내리기를,
"김약로는 시종(侍從)하면서부터 그의 사람됨을 아는지라 그가 공의를 배반하고 사사로움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이번의 조정의 상소는 인신(人臣)의 예(禮)가 없다고 말할 만한데 감히 앞장서서 비호하니, 김약로를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6일 경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 등이 아뢰기를,
"조정(趙侹)이 도리어 이종백(李宗白)을 욕하며 꾸짖은 것은 풍속과 교화에 관계됨이 있으니,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김재로 등이 또 아뢰기를,
"조정의 상소 가운데의 말도 무엄(無嚴)하지만, 사륜(絲綸) 또한 정도에 지나친 데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왕세자[儲宮]를 책봉하여 세우는 일이 어찌 면전에서 아첨할 자리이겠는가? 전계(傳啓)할 수 없는 조정이 어찌 이것을 분변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지휘하고 부탁한 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조정을 죄주도록 한 것은 바로 성인의 어떤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는다는 뜻에서이다. 그런데 지금 경(卿)들의 말을 들으니, 전교(傳敎)의 한 귀절의 말에 사람들에게 넓지 못함을 보이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마땅히 삭제하여 내려야 하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민형수(閔亨洙)·이종성(李宗城)·조명익(趙明翼)·서명형(徐命珩)·김상적(金尙迪)을 아울러 서용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오원(吳瑗)을 서용하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당시 능행(陵幸) 때 일곱 고을에서 도로를 수선하거나 다리를 만든 백성에게 봄철의 대동미(大同米) 1,2말씩을 감(減)해 주라는 명이 었었는데, 양주 목사(楊州牧使) 유언통(兪彦通)이 이르기를, ‘세(稅)를 감해 주는 혜택은 소민(小民)으로 전지(田地)가 없는 자에게는 보탬이 없으니, 그 부역(赴役)한 인명을 계산하여 응당 감해 주어야 할 쌀을 옮겨 지급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여 도신(道臣)이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시경(詩經)》 대아편(大雅篇)의〉 공유장(公劉章)을 강(講)하고, 8도에 특별히 유지를 내려 농정(農政)을 권과(權課)068)  하게 하였다.

 

이유(李瑜)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서종급(徐宗伋)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윤용(尹容)을 승지(承旨)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副應敎)로, 조상경(趙尙絅)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안경운(安慶運)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2월 27일 신묘

임금이 종신(宗臣)을 친히 시험하여 선정전(宣政殿)에서 강경(講經)하게 하고 낙천군(洛川君) 이온(李縕) 등 9인이 능통(能通)하였다 하여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흥경(金興慶)이 고향에 있으면서 여러번 상소하여 면직(免職)시켜 줄 것을 간절히 원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상소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유지를 전하기를,
"내가 이와 같이 부지런히 하고 간절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참소하는 자의 계책에 말려든 것 같다. 지금 국가에는 대례(大禮)가 있고 자신이 전명(傳命)을 겸하고 있는데, 기일(期日)이 이미 가까웠으므로 특별히 마지못하여 허락하니,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김취로(金取魯)를 수어사(守禦使)로, 신사영(申思永)을 승지(承旨)로, 이유(李瑜)를 동지경연(同知經筵)으로, 김동필(金東弼)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민형수(閔亨洙)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2월 28일 임진

신시(申時)069)  에 무지개가 나타나고, 밤에는 유성이 천시 동원(天市東垣) 안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이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장령(掌令) 안경운(安慶運)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9일 계사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용경(金龍慶)이 사조(辭朝)하니, 인견(引見)하고 보내었다.

 

윤급(尹汲)을 사간(司諫)으로, 유최기(兪最基)를 교리(校理)로, 권혁(權爀)을 필선(弼善)으로, 이주진(李周鎭)을 겸사서(兼司書)로, 이창의(李昌誼)를 설서(說書)로 삼았다.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를 명소(命召)하였다. 이광좌가 ‘동궁(東宮)을 교양(敎養)하여 문왕(文王)이 근심이 없었던 것처럼 이루어야 하며070)  , 바야흐로 춘추(春秋)가 만년[晩暮]을 당하였으니 더욱 하는 일 없이 편안히 지내며 힘이 쇠약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더욱 힘쓰고 분발하여 국가의 형세를 진작시키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귀를 기울여 듣고 받아들였으며, 기강(紀綱)이 진작되지 않고 당습(黨習)이 제거되지 않은 것을 걱정하니, 이광조가 《대학(大學)》의 지본장(知本章)을 인용하여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학문이 더욱 밝아지고 역량(力量)이 더욱 확대되어 나가면 실정이 없는 자는 그 말을 다할 수 없으며, 거조(擧措)를 이치에 맞게 하고 그 중정(中正)의 도(道)를 세우면 남을 모략해 빠뜨리려는 자도 당연히 감화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또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이광좌가 아뢰기를,
"옛법은 갑자기 변경시킬 수 없으니 변경하는 데 급급하지 마시기 바라며 인재(人材)를 가려 뽑아 그에게 위임하여 실질적인 성과가 있게 하소서."
하였다. 이어 근일의 대전(大錢)071)  에 대한 의논이 어떠한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 또한 갑자기 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도 그렇게 여겼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기를 마치고 선온(宣醞)하였다. 임금이 참찬관(參贊官) 윤용(尹容)의 아버지 고(故) 판서(判書) 윤지인(尹趾仁)의 청백(淸白)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하여 칭송하고 장려하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며, 인해서 윤용은 사람됨이 쓸만하지만 세도(世道)에 구애되어 쓸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대체로 윤용의 종형(從兄) 윤연(尹筵)이 일찍이 무신년072)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므로 세상에서 막힌 바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이날 밤에 ‘야대가 주방보다 낫다.’는 칠언 율시(七言律詩)를 어제(御題)로 내려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 및 춘방(春坊)에 입직(入直)한 기성관(騎省官)에게 지어서 올리도록 명하였다.

 

2월 30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당시 칙사(勅使)의 행차가 평양부(平壤府)에 도착하여 진하사(進賀使)와 만나게 되자 수역(首譯)을 불러서 묻기를,
"이번의 사신 행차는 겸하였는가 겸하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수역이 대답하기를,
"존숭(尊崇)에다 진하(進賀)를 겸하였습니다."
하자, 통관(通官)이 말하기를,
"존숭에 관한 일은 엄(俺) 등이 바야흐로 조칙(詔勅)을 받아서 오는데, 어찌 겸해서 부칠 수 있겠는가?"
하므로, 수역(首譯)이 ‘옹정(雍正)계묘년073)   황태후(皇太后)를 존숭할 때 조칙이 없었기 때문에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진하(進賀)한 전례’를 끌어대니, 통관이 놀라며 말하기를,
"이 사례는 크게 가깝지 않다. 계묘년 존숭할 때에는 이미 자문을 보내고 미처 조칙을 보내기 전에 황태후가 붕(崩)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조칙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이 사례를 인용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예부(禮部)에서 반드시 받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 등이 아뢰기를,
"계묘년에 존숭 자문(尊崇咨文)이 온 뒤 반년이 되도록 칙사를 보내지 않았던 것은 상사(喪事)를 인하여 정지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말이 이미 이와 같으니, 전례를 끌어 쓰려다가 기휘(忌諱)하는 것을 저촉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칙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표문(表文)을 고쳐 쓰고 3월 초 6일로 기한을 물려서 사신 행차에 추가하여 부치도록 명하였다.

 

장령(掌令) 안경운(安慶運)이 상소하기를,
"조정(趙侹)의 소(疏)는 본디 소홀하고 경솔함이 많아서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가하는 데 이르렀습니다만, 얼마 안 되어 다행하게도 성명(聖明)께서 특별히 이를 삭제하여 고치도록 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애당초 고쳐야 할 만한 일이 없었던 것보다는 못합니다. 그리고 이석표(李錫杓)의 소(疏)는 겉으로는 바로잡아 구원하는 명목을 빌리고 속으로는 협잡(挾雜)하는 뜻을 품었는데도, 처음에는 당개(唐介)로써 칭찬하였다가 끝에 가서는 참소하는 자로써 배척하시니, 한 사람의 이석표가 당개가 되기도 하고 참소하는 자가 되기도 하는 것을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홀하고 경솔하다는 지목은 더욱 한심한 데 관계된다. 조정의 식견이 없음은 비록 아주 그르다고 하기에 부족하다 하더라도 비망기(備忘記)가 어떠한 것인데 감히 붙들어 보호하려 하느냐?"
하였다. 안경운이 인피(引避)하니, 옥당(玉堂)의 이주진(李周鎭)이 처치하여 체임시켰다.

 

신만(申晩)을 겸문학(兼文學)으로, 민형수(閔亨洙)를 부수찬(副修撰)으로, 박필주(朴弼周)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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