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병신
홍성보(洪聖輔)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책례 도감 제조(冊禮都監提調) 김재로(金在魯) 등을 양정합(養正閤)에서 인견(引見)하였는데, 동궁 책례(東宮冊禮)를 장차 이 합(閤)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경극당(敬極堂)에 입시(入侍)하여 세자를 보게 하였다.
3월 4일 무술
밤에 유성(流星)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이었으며, 빛깔은 흰색이었따.
이날 청(淸)나라 사신 산질 대신(散秩大臣) 신용공(信勇公) 조덕(照德), 두등 시위 진국 장군(頭等侍衛鎭國將軍) 종실(宗室) 십가보(什家保)가 와서 건륭 황태후(乾隆皇太后)의 존호 조칙(尊號詔勅)을 반포하니,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맞이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조칙을 반포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3월 5일 기해
임금이 관소(館所)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접견하고, 나와서는 관반(館伴)의 모든 당상관을 악차(幄次)에서 인견(引見)하고 유시하기를,
"황단(皇壇)074) 의 수향(受香)075) 이 마침 이날에 있으니, 내 마음이 더욱 창연(愴然)함을 깨닫겠다."
하였다.
3월 6일 경자
이광부(李光溥)를 사간(司諫)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장령(掌令)으로, 송교명(宋敎明)을 지평(持平)으로, 조명택(趙明澤)을 겸보덕(蒹輔德)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석(金相奭)을 수찬(修撰)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으로 삼았다.
3월 7일 신축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이날 청(淸)나라 사신이 삼전도(三田渡)의 비(碑)를 가서 보려고 종묘(宗廟)를 지나가니, 사잇길을 따라가는 것을 피해서였다.
좌의정·우의정이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니,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백련봉(白蓮峰)에 호랑이 자취가 있다고 합니다. 청컨대 성첩(城堞)을 수축(修築)하여 넘어 들어오는 것을 막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옛날 사서(史書)를 보니, 호랑이가 북쪽의 황하(黃河)를 건너간 기록076) 이 있었다. 지금의 이 호환(虎患)은 바로 위에 있는 자가 덕(德)이 적어서 그런 것이니, 덕을 닦는 것이 근본이 되고 성(城)을 수축하는 것은 말절(末節)이 될 뿐이다."
하였다. 이날 신시(申時)가 되기 전에 청대(請對)하였는데, 중관(中官)이 즉시 아뢰지 않아서 해가 진 뒤에야 비로소 들어갔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중관을 엄히 조처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도록 청하니, 중관을 잡아다 조처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오언주(吳彦胄)가 아뢰기를,
"조정(趙侹)의 소(疏) 가운데에 ‘이석표(李錫杓)의 소(疏) 한 본(本)이 이철보(李喆輔)의 집에서 나왔다.’고 일컬은 것은 지목하는 의미가 매우 교활합니다. 이것은 바로 이석표의 원초(原草)가 잘못 전파된 것이지 별초(別草)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 또한 한 붓끝으로 양쪽을 중상하려는 계책임을 알고 있다."
하였다.
3월 8일 임인
김약로(金若魯)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정형익(鄭亨益)을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3월 9일 계묘
전 대사성(大司成) 김상규(金尙奎)가 졸(卒)하였다. 김상규는 판서(判書) 김시환(金始煥)의 장자(長子)로, 약관(弱冠)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이 정밀하고 세련되었으며, 자신을 단속하기를 가난한 선비처럼 하고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았다. 무신년077) 역란(逆亂)에는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지키면서 제어하고 방비하기를 적당하게 하였는데, 나이와 지위를 오래 누리지 못함을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며 애석하게 여겼다.
3월 10일 갑진
밤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이기진(李箕鎭)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가 고쳐서 윤혜교(尹惠敎)를 도승지로 삼고, 정우량(鄭羽良)을 좌승지(左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칙사(勅使)를 모화관(慕華館)에서 전송하였다. 당시 통관(通官)의 무리가 선물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하여 시간이 늦었는데도 나오지 않으므로, 도감(都監)에서 역관(譯官)을 독촉하여 미시(未時)078) 가 되어서야 출발하였으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관반(館伴)의 말로 인하여 수역(首譯)을 죄주었다.
3월 11일 을사
헌납(獻納) 김정윤(金廷潤)이 상소하여 진주(晋州)의 사절인(死節人)을 동래(東萊)의 사절인의 예에 의거해 증직(贈職)하고, 남강(南江)의 진전(陳田)을 등급을 낮추어 세(稅)를 감해 주며, 조선(漕船)을 고의로 패몰(敗沒)시킨 사람을 효시(梟示)하도록 청하니,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칠곡 부사(漆谷府使) 이진환(李震煥), 진해 현감(鎭海縣監) 고처량(高處亮), 신녕 현감(新寧縣監) 김상녕(金相寧)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견책(譴責)해서 파면하도록 청하고, 또 유관현(柳觀鉉)·유정원(柳正源)·한덕부(韓德孚)가 괴원(槐院)079) 에서 도태당한 일을 다투었으나, 단지 수령(守令)에 관한 일만 윤허하였다.
진선(進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또 부직(付職)080) 된 것이 조카인 이조 참의(吏曹參議) 박사성(朴師正)이 독정(獨政)한 날에 있었다고 하여 인혐(引嫌)하니, 유지를 내려 빨리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고 김정윤(金廷潤)이 논한 바 괴원(槐院)의 일이 어떤가를 물으니,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참으로 원통한 자가 있으면, 대신(大臣)이나 혹은 전관(銓官)이 진달하여 괴원에서 조용(調用)하도록 하소서."
하고,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최용현(崔龍賢)은 바로 고(故) 명신(名臣) 최항(崔恒)의 후손인데 괴원에서 누락되었으니, 역시 애석하게 여길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사람을 모두 괴원의 전계에 따라 조용하도록 명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전 목사(牧使) 김태연(金泰衍)은 바로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종질(從姪)로서 매우 침착하고 기국(器局)이 있으니 발탁하여 기용함이 마땅하며, 전 판관(判官) 구성필(具聖弼)은 일을 처리하는 재능이 있으니 마땅히 주목(州牧)에 시험하여 급박할 때 기용할 수 있도록 양성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팔도와 양도(兩都)의 수신(守臣)에게 명하여 각각 효행이 있고 청렴한 자를 추천하게 하고, 일찍이 2품 이상을 지낸 자에게는 각각 주목(州牧)을 감당할 만한 자를 두 사람씩 추천하게 하되, 이들을 서경(署經)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도록 하니, 송인명(宋寅明)이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12일 병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시경(詩經)》 대아편(大雅篇)의〉 억장(抑章)을 강하다가 특진관(特進官) 조현명(趙顯命)이 ‘계책을 크게 하고 호령[命]을 살펴서 정한다.’는 글의 뜻으로 인해서 경계하기를 진달하고, 궁위(宮闈)081) 를 화목(和穆)하게 하여 좌우(左右)로 하여금 서로 교묘하게 틈을 얽게 하지 못하도록 하며, 간(諫)함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고 충지(忠志)의 인사를 임용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경상도 생원(生員) 이인지(李麟至) 등 4천여 인이 상소하여 두 선정(先正)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케 하려는 의논을 비방하며 배척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그 소(疏)를 물리치니, 이인지 등이 또 옹폐(壅蔽)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자, 이날 승지(承旨) 정우량(鄭羽良)이 등대(等對)하여 아뢰기를,
"영남 유생[嶺儒]의 소가 올라왔는데, 갑인년082) 과 기사년083) 의 남은 논의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소를 들여오게 하여 보고 나서 특별히 되돌려주도록 명하고 인해서 유시하기를,
"옛날의 처분은 그 분명하기가 일성(日星)과 같았으니, 선대(先代)의 사업을 계승하는 도리로서는 선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간사한 말을 배척하고 종향[從祀]의 윤허를 아끼는 것은 바로 그 일이 중대해서이다. 영남의 유생이 아무리 불만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예론(禮論)을 제기하고 선정(先正)을 무함해 욕하면서 감히 지난날의 처분을 현혹시키고 어지럽혀서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려는 나의 본뜻을 손상시키려고 하니, 뒷날의 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소두(疏頭)084) 이인지(李麟至)를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그 상소에 또 예천 현감(醴泉縣監) 민통수(閔通洙)가 상소한 유생을 채찍으로 때렸다고 말하자, 임금이 엄히 신칙하여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을 참찬(參贊)으로, 심택현(沈宅賢)을 판돈녕(判敦寧)으로, 이재(李縡)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김흥경(金興慶)이 명을 받고 올라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전후(前後) 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금·장(金張)〉두 글자를 대신이 일찍이 극력 고집하면서 여러 번 말하였다.’고 하는데 이른바 비난하면서 깎아 내렸다는 것이 어느 전기(傳記)에 나왔습니까? 대저 금·장은 당초 척완(戚畹)085) 의 집안이 아니며, 일곱 세대를 내려오면서 계속하여 벼슬하고 현달하여 한(漢)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교목(喬木)이 되었는지라, 반고(班固)086) 이하 17대(代)의 정사(正史)에서 비난하여 깎아 내린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주(筵奏)와 차어(箚語)에 번번이 운운(云云)하여 걸핏하면 조태언(趙泰彦)과 조정(趙侹) 무리의 끌어대는 바가 되니, 신은 그윽이 대신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문생(門生) 이하 반전(反轉)한 말에 이르러서는 문장에는 돌려서 엄호함이 적었으나 말에는 껄끄러운 모가 있었으니, 대체로 신이 실제 저들의 수수께끼 같은 말과 분노를 드러내는 데 세게 부딪쳐 점검(點檢)할 수 없어서 감히 한 마디도 변명하여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3월 13일 정미
사헌부(司憲府)087)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이인지(李鱗至) 등이 선정(先正)을 추잡하게 욕하였으므로 가벼운 귀양으로 그치게 할 수 없으니 먼 변방에 귀양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14일 무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15일 기유
오시(午時)088) 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정사(正使)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흥경(金興慶)과 부사(副使)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동필(金東弼)을 보내고 원자(元子)를 책봉(冊封)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그날 전의(典儀)가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의 자리를 인정전의 동쪽과 서쪽 뜰에 설치하고, 사자(使者)의 자리를 궁전 뜰에 설치하였으며, 안(案)을 드는 사람의 자리를 사자의 뒤에 설치하였다. 고(鼓)가 초엄(初嚴)089) 을 알리니 병조(兵曹)에서 제위(諸衛)를 통솔하고 노부 의장(鹵簿儀仗)090) 을 진열하였고 예조(禮曹)에서는 채여(彩輿)를 진열하였으며, 사복시(司僕寺)에서는 세자의 연(輦)과 의장을 진열하였고, 종친과 문무 백관(文武百官) 및 사자는 각기 그 의복을 갖추어 입었다. 【4품(品) 이상은 조복(朝服)을 입고, 5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을 입었다.】 고(鼓)가 이엄(二嚴)을 알리니 문외위(門外位)로 나아갔다. 예조 낭관(禮曹郞官)이 교명함(敎命凾)·책함(冊凾)·인수(印綬)를 받들어 각각 안(案)에 놓았고,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이 보(寶)를 받들고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갔으며, 임금은 면복(冕服)을 갖추고 선정전(宣政殿)으로 나아갔다. 고(鼓)가 삼엄(三嚴)을 알리니 종친과 문부 백관이 들어와 자리로 나아갔다. 고(鼓) 소리가 그치고 임금이 여(輿)를 타고 의장을 갖추고 나오니 고취(鼓吹)가 울렸고, 인정전 문에 장차 들어가려 하자 악(樂)이 연주되고 고취는 그쳤다. 임금이 여에서 내려 홀[珪]을 잡고 자리에 오르니 향로(香爐)에서는 연기가 올랐으며, 상서원의 관원이 보(寶)를 받들어 안(案)에 놓으니 악이 그쳤다. 종친과 문무 백관이 악이 연주되면서 네 번 절하니 악이 그쳤다. 전교관(傳敎官)091) 홍경보(洪景輔)가 꿇어앉아 전교(傳敎)를 아뢰는데, 집사자(執事者)가 교명안(敎命案)·책안(冊案)·인안(印案)을 마주 들고 【안(案)은 두 사람이 받는다.】 전교관의 남쪽에 섰다. 전교관이 교서(敎書)가 있다고 말하여 정사 김흥경, 부사 김동필 이하가 꿇어앉았다. 홍경보가 교서를 선포하기를, ‘원자를 책립(冊立)하여 왕세자로 삼노니, 경(卿)들에게 전례(展禮)092) 를 명한다.’ 하였다. 선포하기를 마치고 악이 연주되면서 김흥경 이하가 네 번 절하니 악이 그쳤다. 집사자가 교명안(敎命案)을 바치니 홍경보가 교명함을 받아 김흥경에게 주었고, 김흥경이 나아가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받아서 교명함을 안(案)에 놓았다. 홍경보가 책함과 인수를 받아 김흥경에게 주니 악이 연주되고, 김흥경 이하가 네 번 절하니 악이 그쳤다. 김흥경 이하가 동문(東門)을 경유하여 나오고,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 이하가 사자(使者)를 따라 배행(陪行)하여 나아가, 인정문(仁政門)을 나와 김흥경이 교명함·책함·인수를 채여(彩輿)에 놓았다. 세장(細仗)093) 과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니, 【집현문(集賢門) 밖에 이르러 악이 그쳤다.】 교명여(敎命輿)가 맨 앞에, 다음이 책여(冊輿), 다음이 인여(仁輿), 다음이 여(輿), 다음이 연(輦)이었으며, 김흥경 이하가 수행(隨行)하였다.
이날 액정서(掖庭署)에서 먼저 교명안·책안·인안을 양정합(養正閤)에 설치하고 향안(香案)을 그앞에 설치하였으며, 왕세자의 수책위(受冊位)를 향안 남쪽에 설치하고 또 배위(拜位)를 뜰에 북쪽을 향하여 설치하였다. 정사·부사의 자리는 향안 동쪽에 설치하고, 교명·책·인을 대신 받을 보덕(輔德)·필선(弼善)·익찬(翊贊)의 자리는 왕세자 자리의 서쪽에 설치하고, 선책관(宣冊官)의 자리는 수책위의 왼쪽에 설치하였으며, 왕세자의 소차(小次)를 흥광문(興光門) 안에 설치하였다. 채여가 장차 이르려고 하니 사복시에서 여(輿)와 연(輦)을 시민당(時敏堂) 뜰 가운데 설치하였고, 병조에서는 의장(儀仗)을 연 앞에 진열하였다. 시간이 되니 필선 남태온(南泰溫)이 꿇어앉아 내엄(內嚴)094) 을 청하였고, 사부(師傅)·빈객(賓客) 및 궁관(宮官)이 먼저 내반(內班)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였다. 김흥경이 교명·책·인을 가져다가 집사자에게 주고는, 들어가서 김흥경이 교명·책·인을 안(案)에다 놓았다. 왕세자는 쌍동계(雙童髻)·공정책(空頂幘)·칠장복(七章服)을 갖추고, 상례(相禮) 이응찬(李膺贊)이 소차에서 나오기를 청하고 왕세자를 인도하여 배위(拜位)로 나아갔으며, 찬의(贊儀)가 창(唱)하여 왕세자가 네 번 절하고 수책위(受冊位)로 올라갔다. 【사부(師傅) 이하는 계하(階下)에서 멈춘다.】 선책관(宣冊官) 홍경보(洪景輔)가 전교가 있다고 말하여 왕세자는 꿇어앉고 선책관이 함(凾)을 열어 책명(冊命)을 선포하였다. 그 책명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미리 왕세자[宗儲]를 세우는 것은 바로 나라를 튼튼히 하는 데 제일 먼저 힘써야 할 일이며, 명호(名號)를 올려 더하는 것은 곧 천명(天命)을 계승하여 터전을 잡는 큰 계책인지라, 이에 전장(典章)095) 에 따라 부탁하기를 빛나게 한다. 아! 너 원자(元子) 선(愃)은 내가 어찌 그리 다행스럽게도 늦게 얻었던지 하늘이 또 특이한 자질을 부여하였구나. 품에 안겨 있으면서 지각과 사려가 먼저 열리어 엄연히 생각하는 듯 말은 하지 않아도 깨우쳤으며, 바라보는 모습에서 그 기국과 도량이 이미 드러나 우뚝하게 덕을 성취하기에 부합하도다. 돌아보건대, 그 태어나면서부터 높고 깊음이 비상(非常)하였으니, 그 장성하여 총명하고 인효(仁孝)함을 기필할 수 있겠도다. 삼종(三宗)096) 을 이었으니 10년 동안 한밤의 근심을 감추게 되었고 팔도(八道)가 기뻐 노래 부르니 온 조정이 중리(重離)097) 의 경사(慶事)에 우쭐하도다. 비록 원자(原子)의 이름이 정해지고 국본(國本)이 돌아갈 곳이 있기는 하지만 왕세자의 자리가 비어 있어 여정(輿情)이 오래도록 답답해 하였다. 이미 첫돌이 지났으니 기쁜 마음이 갑절이나 간절하며, 시기로 보면 일찍이 책봉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도다. 때문에 여러 신료와의 계모(計謀)가 빨리 이루어졌으나, 또한 나의 뜻에도 진정 흡족하였다. 이에 너를 명하여 왕세자로 삼노니, 너는 많은 복을 받고 어린이의 의절(儀絶)을 힘써 닦아서,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여 대인(大人)의 학문에 나아가도록 하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서는 비근(卑近)한 습속(習俗)에 물들지 말 것이며,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를 익힘에 있어서는 반드시 빈사(賓師)가 인도하는 바른 길을 따라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되 성실함과 공경함을 좇아 공부를 더하고 일취 월장(日就月將)하여 높고 밝음이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조종(祖宗)의 정일(精一)한 법도를 잘 계승하여 부모(父母)가 높이 기대하고 희망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때문에 이를 교시(敎示)하노니, 의당 모두 알기를 바란다."
하였는데,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이 지어 올렸다.】 읽기를 마치고 도로 함(凾)에 받들어 두었다. 그리고는 김흥경이 교명함(敎命凾)을 가져다가 왕세자에게 주었다. 그 교명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아! 상제(上帝)께서 우리 나라를 내려다보시고는 조종(祖宗)이 여러 대를 쌓아 온 어짊은 마땅히 그 후손에게 이어져야 한다고 여기시고 신명(神明)과 사람들이 오래도록 바라왔으니 마땅히 그 정성에 답해야 한다고 여기시어, 이에 이 박덕[涼德]함을 돌보시어 드디어 자손이 태어나게 하시니, 나라의 운수가 처음에는 비색(否塞)하였다가 나중에는 형통하게 되고 왕실의 계통이 끊어질 뻔하다가 다시 이어졌도다. 이미 태어난 초기에 바로 원자(元子)의 명호(名號)를 정하니, 온 나라 사람들의 노래가 돌아갈 데가 있고 만대를 기해 부탁할 데가 있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우리 동방(東方)의 더없이 큰 경사인 것이다. 이듬해 정월 초하루에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모두 대궐 뜰에 나아와 똑같은 말로 청하기를, ‘오직 우리 원자께서 태어나시니 재능이 뛰어나고 덕용(德容)이 엄연하여, 겨우 첫돌이 되었는데도 옥(玉) 같은 자질이 일찍 성취되고 사물을 당하여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뛰어난 지혜가 점점 넓어지시니,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아끼고 도우시어 성사(聖嗣)를 후하게 탄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미리 세우는 법도를 따라 일찍 왕세자의 지위에 나아가도록 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에 답하고 백성들의 희망을 매이게 함이 타당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도 오직 종사(宗社)가 소중하므로, 서둘러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좋은 날을 가려서 드러나게 책봉함을 선포하고 너 원자 선(愃)을 왕세자로 삼도록 명하니, 오래 잠겨 있던 동루(銅樓)098) 가 거듭 열리니 한없는 보록(寶籙)099) 이 더욱 끊임이 없으리라. 오직 그 철명(哲命)을 처음 내리면서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우리 성조(聖祖)와 성고(聖考)께서 정일(精一)로써 서로 전하셨으므로, 이에 오직 우리 가법(家法)을 지금 내가 너에게 전하여 주노니, 어리다고 이르지 말고 잘 공경하여 받들며, 약하다고 하여 희롱만을 좋아하지 말고 올바른 도리로써 어린 마음을 기르고, 숭고(崇高)하다고 하여 오만함을 키우지 말며, 화려하다고 하여 방탕한 데로 흐르지 말고, 어린 마음을 버리고 덕성(德性)을 기르며, 정직한 인사를 가까이하여 묻고 배우기를 의뢰하도록 하라. 천만 가지 변화가 반드시 한마음에서 근원함을 알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것도 반드시 자기 몸을 수양하고 가정을 가다듬는 데 그 근본을 둠을 알아서, 잘 공경하고 밝혀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덕(德)으로 우리 선대의 공렬(功烈)을 빛나게 하고 내가 기대하고 희망하는 바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니, 힘쓸지어다. 때문에 이를 교시(敎示)하노니, 의당 모두 알기를 바란다."
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지어 올렸다.】 보덕(寶德) 조한위(趙漢緯)가 꿇어앉아 대신 받았다. 김흥경이 또 책함(冊凾)을 가져다 왕세자에게 주니 필선(弼善) 남태온(南泰溫)이 꿇어앉아 대신 받았으며, 김흥경이 또 인수(印綬)를 가져다 왕세자에게 주니 익찬(翊贊) 조명국(趙鳴國)이 꿇어앉아 대신 받았다. 왕세자가 내려가 본래의 자리에 가서 네 번 절하고 안으로 되돌아 가니, 김흥경과 김동필(金東弼)도 인정전(仁政殿)으로 되돌아 와서 복명(復命)하기를, ‘전교를 받들어 왕세자에게 물품을 갖추어 전책(典冊)을 주고 예(禮)를 마쳤습니다.’ 하고, 네 번 절하고 물러났다. 처음에 예조에서 올린 책례 의주(冊禮儀注)에 ‘사부(師傅)는 뒤에 서고 궁관(宮官)은 곁에 있게 한다.’ 하였는데, 임금이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이 춘방(春坊) 관원의 아랫자리에 서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겨 마침내 사부는 앞줄에 서고 빈객은 그 줄을 따라 조금 뒤에 서게 하고, 춘방은 뒷줄에, 계방(桂坊)은 그 줄을 따라 조금 뒤에서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보덕 조한위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요속(僚屬)이 동궁(東宮)에게는 대조(大朝)의 승지(承旨)·사관(史官)과 같아서 모든 출입(出入)과 기거(起居)에 반드시 뒤따라야 하지만, 사부와 빈객은 요속과 다르니 자리를 달리하여 따로 서게 하는 것이 타당하며 관직의 차례가 높고 낮은 것으로 앞뒤 줄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16일 경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고 반교(頒敎)하였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존귀함을 표지(標識)하여 맏아들로 삼아 그 호칭을 달리하는 것은 민심을 매이게 하는 것이며, 책봉(冊封)을 내리고 저궁(儲宮)에 올려 일찍 세운 것은 종묘(宗廟)를 소중히 여기는 데에서이다. 이에 찬란한 명호를 드날리어 아름다운 빛을 꾸미도록 하노라. 아! 빛나도다. 우리 집이 큰 명(命)을 받았으니, 대체로 조공 종덕(祖功宗德)100) 이 억만년토록 다함이 없을 것인데, 성자 신손(聖子神孫)101) 이 계승하여 20세(世)를 지금까지 전수(傳授)하였으니, 무릇 오래도록 편안하고 길이 다스려지게 하는 술책에 있어서는 언제나 근본을 튼튼히 하여 왕통(王統)을 전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것이다. 아! 내 나이 40이 되도록 아직도 정길(貞吉)함이 부족하였으니, 지나간 해의 일들은 추억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는지라 말을 하려 하면 한탄스럽기만 하였으니, 선령(先靈)이 혹시 강림해 보실 것이니 오직 이치만은 기필할 수 있었다. 어찌 그리 다행스럽게도 작년 봄에 〈집안을〉 윤택하고 빛나게 하는 경사가 과연 기수(箕宿) 분야에 복덕(福德)이 비쳐 임함과 부합하였던지 〈원자가 태어나〉 용모가 뛰어나고 키가 자라서 이미 옷을 지어 입히게 되었으며, 말을 배우고 걸음을 배워 일주년의 돌잡이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갓 자정(慈情)을 날마다 모이게 할 뿐이겠는가? 참으로 특이한 자질은 하늘에서 타고났도다. 복스러운 이마의 중앙에 해 모양의 뼈가 튀어나온 모습은 내가 진실로 모든 근심이 없음을 알겠고, 산같이 높고 못같이 깊어 보이는 자태(姿態)는 사람들이 모두 한 번 보면 결정지을 수 있다고들 하였다. 비록 처음 태어난 즉시 원사(元嗣)로 명하기는 하였지만, 돌아보건대, 그 지위를 동궁(東宮)으로 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황조(皇朝)의 구전(舊典)에는 오히려 첫돌이 되기 전에 책봉을 받은 경우가 있었고, 영고(寧考)의 휘규(徽規)에 있어서도 품에서 벗어나자 책봉을 더한 바 있었다. 여러 사람의 모의가 이미 경사(卿士)와 융합하는지라, 성대한 의식을 화창한 봄날에 거행하였다. 비록 맞아 오지는 못하였지만 대신(大臣)을 대신해서 명을 전달하게 하였더니 능히 꿇어앉고 일어나는지라, 아보(阿保)102) 를 떼어 버리고도 의식을 이루었다. 종묘의 부탁이 이에 더 융성하니 기업(基業)의 도모가 영구히 굳어졌고, 왕세자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게 되니 환희하고 고무함이 오직 균일할 뿐이로다. 바야흐로 임금[一人]을 경하하는 때를 당하여 팔도[八域]에 은택을 내리기를 생각하였으니, 새벽 먼동이 트기 이전의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그 죄를 덜어 주도록 하라. 아! 전장(典章)으로 말하면 백 왕(百王)이 함께 하는 바이나, 이 기이한 경행(慶幸)은 오랜 옛날에도 드물었던 바이다. 몇 년 동안 말하기 어려운 근심을 지니고 있다가 이제 이렇게 원자[丕子]를 두어 만대토록 뽑히지 않는 기업을 전하게 되었으니, 내가 감히 그 시초를 잊겠는가? 때문에 이를 교시(敎示)하노니, 의당 모두 알기를 바란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이 지어 올렸다.】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에게 차등 있게 상(賞)주었다.
3월 17일 신해
당시 칙사(勅使) 일행이 돌아가던 중 봉산군(鳳山郡)에 이르러 상사(上使) 조덕(照德)이 칼로 자신을 찔러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반송사(伴送使)가 급히 알리니, 대신(大臣)과 관반(館伴)의 여러 당상관(堂山官)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는, 승지(承旨) 정우량(鄭羽良)을 문위사(問慰使)로 파견하여 가서 사정을 탐지하도록 하였다. 정우량이 급히 달려가서 물었으나 저들 모두가 숨기고 말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통관(通官) 유만권(劉萬權)에게 선물을 후하게 주자, 그제야 글을 써서 보이기를,
"그대 나라에서는 이 일에 간여됨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날 사유(赦宥)로 인해서 도류인(徒流人)들을 석방하라는 명이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도배(徒配)를 그 집에서 가까운 곳에 하는 것을 금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당연히 경국(京國)103) 과 멀고 가까움을 보아야 할 터인데, 하필이면 그들의 집을 논하겠는가?"
하였다.
3월 18일 임자
임금이 사친(私親)인 숙빈묘(淑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대가(大駕)가 돌아오다가 길 왼쪽의 고각(高閣)을 바라보고 하문하니 바로 기로소(耆老所)의 영수각(靈壽閣)이었으므로, 마침내 둘러보도록 명하였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가 동구(洞口)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기로소 대청(大廳)에 나아가니, 시임·원임 대신 및 여러 승지와 옥당(玉堂)의 간원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영수각에 배례(拜禮)하는 것이 적합한가를 물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자, 임금이 말하기를,
"종부시(宗簿寺)의 선원각(璿源閣)에는 숙배(肅拜)하는 예절이 있는데, 이 각(閣)에는 어첩(御帖)을 봉안(奉安)하였으니 배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협문(夾門)을 거쳐 들어가 영수각 뜰에서 네 번 절하였으며, 여러 신하들도 네 번 절하였다. 임금이 각(閣) 안의 앞 마루에 앉아 어첩궤(御帖櫃)를 받들고 나오도록 명하니, 민진원·이태좌가 기로소 신하로서 각 안에 서 있었다. 임금이 어첩을 꺼내어 공경히 구경하고는 부복(俯伏)하여 감격한 눈물을 흘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선조(先祖)께서 기해년104) 에 ‘태조(太祖)의 성대한 자취가 장차 없어지게 되었다.’는 말에 감동함이 있어 즉시 여러 사람의 청을 윤허하였고, 나도 일찍이 옛날의 제왕(帝王)이 오래 살기를 탐하여 장수(長壽)하려는 것을 비웃은 바 있는데, 만약 양조(兩朝)의 고사(故事)를 능히 이어서 원량(元良)이 경종[景廟]을 계승하여 어첩에 쓴다면 영광스럽고 다행함이 극도에 이르겠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의 오래도록 국명(國命)을 누리는 도리로 권면(勸勉)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도로 기로소 대청에 나아가 기해년의 기로소 경회첩[耆社慶會帖]을 가져다 열람하다가 어첩의 첫머리에 숙종[肅廟]의 어제 칠률(御製七律)이 있는 것을 보고 슬픈 감정에 오래도록 잠겨 있다가 사관(史官) 이성중(李成中)에게 명하여 이를 베껴서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기로소선생안[耆社先生案]》을 열람하고 인해서 전교하기를,
"기로소 신하들에게 내일 편전(便殿)에서 선온(宣醞)할 것이니, 기로 대신 가운데서 아들이 시종(侍從)을 거친 자가 있으면 각기 아들 한 사람을 데리고 입시(入侍)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윤혜교(尹惠敎) 등이 아뢰기를,
"삼가 금오(金吾)105) 의 방면(放免)하고 방면하지 않은 판결 내용을 보건대, 손형좌(孫荊佐)가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과 모여서 의논하고 소찰(小札)을 서로 통한 것과, 김세윤(金世潤)이 바다를 건너 역적을 따라가서 이유익(李有翼)에게 말[馬]을 준 것과, 이징(李徵)이 역적 남태징(南泰徵)의 겸종(兼從)으로서 역적 이사성(李思星)에게 통모(通謀)한 것과, 박경순(朴景淳)이 김홍수(金弘壽)의 처남(妻娚)으로서 모이기를 한세홍(韓世弘)과 약속한 것과, 윤상정(尹相靖)·윤상헌(尹相憲)이 이인좌(李麟佐)·이호(李昈)와 연결하여 적관(賊關)을 전언[傳說]한 것과, 차세징(車世徵)이 박도창(朴道昌)의 생질(甥姪)로서 언찰(諺札)을 전해 준 것과, 김옥(金沃)이 역적 엽(燁)의 고모부[姑夫]로서 역적 박필몽(朴弼夢)에게 길러진 것과 같은 자들을 더러는 육지로 나가게 하고 더러는 양이(量移)하게 하며 더러는 감등(減等)하게 하고 더러는 서용(敍用)하게 하였으니, 이는 법(法)의 본의에 크게 이그러집니다. 이 부류에 대하여 애당초 참작하여 처리한 것이 이미 실형(失刑)한 것인데, 어떻게 사령(赦令)에 뒤섞어 넣어 징계하고 성토함이 엄하지 않아서 제방(隄防)을 더욱 무너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3월 19일 계축
밤에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기로소[耆社]의 신하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 지사(知事) 이기익(李箕翊)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오례의(五禮儀)》의 향로의(享老儀)에 ‘여러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면 찬자(贊者)가 일어나기를 청한다.’는 절목이 있다 하여 두 대신(大臣)에게는 각기 그 아들을 시켜 붙들고 들어오도록 명하고, 이기익은 액례(掖隷)106) 로 하여금 붙들고 들어오게 하였다. 이에 민진원의 아들 민형수(閔亨洙)와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李宗城)이 각기 그 아비를 부축하여 섬돌에 올라 문에 이르자, 곡배(曲拜)하지 말도록 명하고 임금이 비로소 의자에 올라앉아 위유(慰諭)하고 관곡(款曲)하게 대접하였으며, 인해서 선온(宣醞)하였는데, 두 대신이 한 잔씩 마신 뒤에는 각기 그 아들로 하여금 대신 마시게 하니, 승지(承旨) 홍경보(洪景輔)가 아뢰기를,
"오늘은 바로 성대한 거사입니다. 두 대신의 아들이 이미 함께 들어왔으니, 청컨대 따로 한 잔씩 내려 주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두 잔을 가져다가 그들로 하여금 마주 대하여 마시면서 유감을 풀도록 하고 이르기를,
"어찌하여 서로 다투느냐?"
하자, 이종성이 취하여 아뢰기를,
"민형수의 아비가 신의 아비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갔으니, 신의 아비는 바로 그의 아비와 같습니다. 그의 상소에 신의 아비를 기롱한 말이 있었는데, 이는 불초(不肖)한 자식입니다."
하고, 이에 ‘저 당(黨)’이나 ‘이 당(黨)’이니 하면서 서로 용권(用權)하였다고 배척하면서 서로를 양보하지 않았는데, 이종성은 이미 너무 취하여 더 마실 수 없으므로 마침내 부축하여 나가도록 명하고, 민형수에게 두 잔을 모두 마시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한 잔은 이종성을 대신하여 마시도록 하라."
하였다. 민형수가 어렵게 여기자, 임금이 민진원에게 권하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신이 본래 술을 좋아하니, 신이 신의 자식을 대신하여 마시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민형수가 어쩔 수 없이 두 잔을 모두 마셨다. 자리를 파(罷)함에 이르러 임금이 민진원·이태좌에게 의자 앞으로 나와서 서도록 명하고 손을 잡고 위유(慰諭)하고는 인해서 문피(文皮)를 내렸는데, 이기익에게도 내렸다. 세 신하가 물러나자 임금이 또 의자에서 내려와 전송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이의만(李宜晩)이 상소하여 늙고 병(病)이 들어 등대(登對)할 수 없다고 아뢰자, 임금이 부축하여 들어와도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비답하니, 이의만이 마침내 추후로 들어왔다.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선온(宣醞)하고 문피(文皮)를 내리기를 모두 처음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또 기해년107) 기로소의 여러 신하의 아들과 손자로서 사적(仕籍)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資級)을 더하게 하고 자궁자(資窮者)108) 는 아마(兒馬)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광운(李光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민윤창(閔允昌)·윤지(尹志)·신윤정(申潤廷)·박경순(朴景淳)을 육지로 나오게 하고, 김성택(金聖澤)·신정모(申正模)·윤상정(尹相靖)·윤상헌(尹相憲)을 양이(量移)하며, 황익재(黃翼再)를 완전히 석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啓請)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교리(校理) 오언주(吳彦胄), 부교리(副校理) 이주진(李周鎭)이 차자(箚子)를 올려 ‘새로 책례(冊禮)를 행하였으니 하나의 초정(初政)에 힘씀이 적당하며, 영수각(靈壽閣)을 둘러보고 배례(拜禮)하였으니 당연히 국명(國命)이 오래 가도록 기구(祈求)하는 도리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고, 끝부분에 또 국옥(鞠獄)의 죄인이 사유(赦宥)로 인해 용서받게 되는 것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으나, 끝부분에 진달한 일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이종성(李宗城)과 민형수(閔亨洙) 두 사람이 〈임금의〉 앞 좌석에서 예의를 잃었다 하여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청하였으니,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석표(李錫杓)의 상소에 말이 광망(狂妄)하고 우매(愚昧)한 곳이 많으나 그 뜻을 취할 만한데도, 이석표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심지어 이하택(李夏宅)을 구원하려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억제[抑勒]하는 말입니다. 지금 국가에 큰 경사(慶事)가 있으니, 특별히 〈함열 현감(咸悅縣監)으로〉 보외(補外)한 것을 풀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소(疏)의 대체(大體)는 옳지만 그가 말한 대신(大臣)에 관한 일은 그르다. 이미 승일(乘馹)109) 의 직임에 명하였고 지금 또 대사면[大霈]을 거쳤으니 나 또한 용서하고 싶지만, 소척(疏斥)을 당한 대신이 바야흐로 다시 도성(都城)을 나갔으니 아직은 풀어줄 수 없다."
하였다.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신은 항상 언로(言路)를 여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제일의 급선무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석표가 말한 대신에 관한 일은 일필(一筆)로 잘라 끊었으므로 그의 부자(父子)가 참혹한 탄핵을 면하지는 못하였으나, 대체는 성상의 과실(過失)이나 조정의 허물을 논한 것이 다른 사람으로는 말하기 어려운 바가 많습니다. 대신이 바야흐로 소환(召還)하도록 청하였는데, 신은 이석표를 공격하는 것을 쪼개고 깨뜨려 버리는 것이 소환하는 것보다 시급하다고 여깁니다. 이흡(李潝)의 소(疏)는 실로 오늘날 세상의 도의(道義)에 해(害)가 됨이 ‘한마디의 말이 나라를 상실하게 한다’는 것110) 에 너무도 가깝습니다. 전하(殿下)께서 만세(萬世)토록 태평 성대를 열려고 하신다면, 반드시 이런 등류의 사람들을 통렬히 배척한 뒤에야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나이 젊은 신진(新進)들이 탕평책(蕩平策)에 대해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닙니다. 신 등은 여러 번 살육(殺戮)을 겪었기 때문에 이런 탕평에 대한 논의를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기운이 점차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래도 살육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5, 60년을 지나지 않아서 시들어져 진작시켜 일으킬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정경(正卿) 이상은 죽은 뒤에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이 바로 국가의 제도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고(故) 대신(大臣)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는 관작이 회복된 뒤에 아직까지 시호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고(故) 상신(相臣) 홍치중(洪致中)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시행하도록 명하였지만 머뭇거리면서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호를 내린 고명(誥命)이 아직도 그 집에 있으니 지금 다시 내릴 필요는 없으며, 단지 시호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무런 말이 없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우의정의 뜻은 어떠하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미 의정(議政)의 관작을 회복하게 하였다면, 시호를 회복시키거나 혹은 시호를 다시 내리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이광운(李光運)이 전계(前啓)를 더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1일 을묘
조최수(趙最壽)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박필기(朴弼琦)를 집의(執義)로, 이태징(李台徵)을 장령(掌令)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지평(持平)으로, 이주진(李周鎭)을 헌납(獻納)으로, 홍창한(洪昌漢)·심악(沈)을 정언(正言)으로, 권혁(權爀)을 응교(應敎)로, 윤취함(尹就咸)을 보덕(輔德)으로, 조한위(趙漢緯)를 승지(承旨)로, 민형수(閔亨洙)를 부교리(副校理)로 삼고, 홍경보(洪景輔)를 도승지(都承旨)로 서승(序陞)111)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을 명소(命召)하여 반궁(泮宮)112) 에서 시사(試士)하게 하니, 3월 상순(上旬)의 별제(別製)이었다. 진사(進士) 이규채(李奎采)가 으뜸을 차지하였으므로,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22일 병진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홍성보(洪聖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응교(應敎)로, 이명곤(李命坤)을 지평(持平)으로, 이광제(李光躋)·김한철(金漢喆)을 정언(正言)으로, 임상원(林象元)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우찬성(右贊成) 정제두(鄭齊斗)가 상소하기를,
"자신이 소사(小師)113) 의 직임을 띠고 병들어 초야에 엎드려 있으니, 예(禮)를 궐(闕)한 죄를 받기를 원합니다."
하고, 끝부분에 주공(周公)114) 이 〈성왕(成王)에게〉 ‘〈왕이 천명(天命)을 받음이 한없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또한〉 한없는 근심이 되니,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한 말을 인용하여 거듭 경계할 것을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지나간 해의 일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으며 작을 때 징계하고 삼가라는 경계를 뒤쫓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 이에 대하여 반드시 슬퍼하시어 마음을 상하시고 두렵게 여기시고 경계하여 마땅히 거듭 경계와 근신을 더하시어, 안으로는 아보(阿保)의 임무를 잘 바로잡게 하고 밖으로는 빈부(賓傅)의 책임을 무겁게 하여 좌우(左右)·전후(前後)에 올바른 사람 아닌 이가 없도록 해서, 사특한 기운이 그 사이에 간여할 수 없게 하여 한없이 보호하고 돕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그가 말한 지나간 해의 일이란 바로 무신년115) 중동(仲冬)116) 에 궁비(宮婢)가 흉물(凶物)을 묻은 변고(變故)를 가리킨 것이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심성진(沈星鎭)이 아뢰기를,
"우리 조정에서는 사대부(士大夫)를 예우(禮遇)하여 결장(決杖)을 시종(侍從)에게 더하지 않으니, 대체로 임금이 가까이서 모시고 또 염치(廉恥)를 기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즈음 박사창(朴師昌)의 일로 인하여 비로소 이 제도를 창설하였으니, 아마도 옛날의 규정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국가에서 법을 적용하는데 원신(遠臣)과 근신(近臣)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시종하는 신하에게 적정(糴政)117) 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나, 남솔(濫率)118) 하는 경우 결장(決杖)하는 것은 바로 옛날의 제도이고 지금 창설하여 시행하는 것이 아니다. 국법(國法)을 유독 무관(武官)이나 음관(蔭官)에게만 시행하여야 가하겠느냐?"
하였다.
3월 23일 정사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목(綱目)》119) 의 당 현종기(唐玄宗紀)를 강(講)하다가 임금이 강관(講官)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요(堯)·순(舜)이 천하를 어짊으로 통솔하자 백성들이 그대로 따랐으며, 걸(桀)·주(紂)가 천하를 사나움으로 통솔하자 백성들이 그대로 따랐었다.120)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경우는 허탄하고 망령된 것으로 천하를 통솔하였으니, 천하가 어떻게 허탄하고 망령된 것을 다투어 숭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어진이를 사모하였기 때문에 양필(良弼)이 꿈에 나타났고,121) 현종은 오래 사는 것[長生]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꿈에 현원(玄元)122) 이 나타났으니, 정치하는 데 귀감과 경계가 될 만하다."
하였다.
3월 24일 무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요즈음 이른바 공의(公議)를 신은 감히 알지 못하지만, 만약 법을 굽혀가며 사정을 따르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경책(警責)을 가한 연후라야 뭇신하들이 두려워할 바를 알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며칠 전에 조현명(趙顯命)이 이흡(李潝)을 준엄하게 배척하였는데도, 이조 참의(吏曹參議) 박사정(朴師正)이 즉시 이흡을 대사간[諫長]으로 주의(注擬)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박사정을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송인명이 또 저자 백성[市民]의 폐단을 아뢰기를,
"해조(該曹)에서 모든 필요한 물품이 있을 경우 이를 저자 백성들에게 요구하는게 되는데, 죄를 모면하기에 급하여 값을 따질 겨를도 없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후한 값으로 바꿔서 거둬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조에서는 헐값으로 책임만 메꾸려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지금부터 장인(匠人)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상방(尙方)123) 에서 공진(供進)하고 저자 백성들에게 책임지우지 말도록 명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조현명이 아뢰기를,
"지난날 우의정이 옥천군(沃川郡)의 불에 탄 대동포(大同布)를 탕척(蕩滌)해주도록 청하였는데,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되니 성명(成命)을 정지함이 적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이 아뢴 것이라 하여 어렵게 여기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를 형배(刑配)하여 뒷사람을 징계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기진(李箕鎭)이 새로 북변[北藩]에서 왔다고 하여 북도[北路]의 민사(民事)를 물으니, 이기진이 아뢰기를,
"기유년124) 재해(災害)에 특별히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북도의 백성을 진구(賑救)하도록 해서 구렁에 뒹구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고 지금까지 감축(感祝)하고 있었습니다. 신이 임지에 도착하는 때를 당하여 백성들이 그 당시에 특별히 내리신 유지[別諭]를 돌에다 새겨 후세에 전하려고 하기에 신이 즉시 허락하였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송경(宋璟)125) 은 인신(人臣)이었는데도 오히려 광주(廣州)에다 비(碑) 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었는데, 이기진은 돌을 세워 덕(德)을 칭송하는 일을 임금 앞에서 진달하였으니, 대체로 전일의 ‘고집스럽고 막혀 있다.’는 하교를 두려워하여 맨 먼저 기쁨을 사려는 말을 진달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9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재정-공물(貢物) / 상업-상인(商人)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편사(編史) / 구휼(救恤)
[註 123] 상방(尙方) : 상의원(尙衣院).[註 124] 기유년 : 1729 영조 5년.[註 125] 송경(宋璟) :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광주 도독(廣州都督)을 지냈음.
사신은 논한다. "송경(宋璟)125) 은 인신(人臣)이었는데도 오히려 광주(廣州)에다 비(碑) 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었는데, 이기진은 돌을 세워 덕(德)을 칭송하는 일을 임금 앞에서 진달하였으니, 대체로 전일의 ‘고집스럽고 막혀 있다.’는 하교를 두려워하여 맨 먼저 기쁨을 사려는 말을 진달한 것이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25일 기미
밤에 유성(流星)이 포과성(匏瓜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尺)이었다.
응교(應敎) 윤심형(尹心衡)을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교리(校理) 유건기(兪健基)를 금화 현감(金化縣監)으로, 수찬(修撰) 송징계(宋徵啓)를 토산 현감(兎山縣監)으로, 부수찬(副修撰) 윤경룡(尹敬龍)을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김상석(金相奭)을 목천 현감(木川縣監)으로 출보(黜補)시켰다. 당시 임금이 장차 주강(晝講)을 행하려고 하는데 부교리(副校理) 민형수(閔亨洙)가 그의 어버이 병(病) 때문에 소(疏)를 올리고 곧장 나갔으므로, 다른 옥당(玉堂) 관원을 패초(牌招)하였으나 모두 두 번씩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26일 경신
세자(世子)와 부(傅)·빈객(賓客)이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임금이 양정합(養正閤)에 나아가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서명균(徐命均) 및 세자부(世子傅) 김재로(金在魯)를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세자와 함께 보았다. 이광좌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을 몸소 먼저 가르쳐 세자로 하여금 보고 본받아 성취하게 하도록 청하고, 이 태좌는 조종(祖宗)의 정일(精一)한 전통을 힘쓰도록 청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정언(正言) 이광제(李光躋)가 상소하기를,
"양신(兩臣)126) 에 대하여 단지 관작만 회복하도록 하고 시호(諡號)의 추증(追贈)은 허락하지 않으시니, 완급을 조절하는 성상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좌의정[左揆]이 갑자기 진청(陳請)하자, 성상께서 이를 우의정[右揆]에게 물으신 것은 대체로 신중하게 살피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우의정이 우러러 대답하면서 관례[循例]의 일처럼 보고 변별(辨別)하는 말이 부족하여 마침내 여러 해를 두고 아끼고 어려워하던 처분이 한마디의 말에 흔들리고 빼앗기게 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그윽이 두 대신[大僚]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다시 더 헤아려 보고 대신에게 널리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장(銓長)이 하루에 세 번 〈패초(牌招)를〉 어기고 대궐 밖에 이르러 미품(微稟)127) 한 것은 위로 은총만을 믿은 것으로서 너무 거만한 데 관계되니, 마땅히 견책(譴責)하여 파면하는 벌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종성(李宗城)과 민형수(閔亨洙)는 〈임금이 내리신〉 은혜로운 술잔을 지나치게 마시고 서로 떠들면서 다투었으니, 간략하게나마 바르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칙(上勅)128) 이 자신의 목을 찌른 것은 곧 변괴(變怪)에 관계되니, 반송사(伴送使)는 그 관직을 파면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하였다. 당시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유(李瑜)가 면유(面諭)를 받들기 위하여 패초에 따라 대궐 밖까지 나아왔다가 병을 끌어대고 곧장 물러나갔기 때문에 대간(臺諫)의 상소에 언급되었던 것이다. 비답하기를,
"맨 먼저 진달한 일은 당초에는 윤허를 아꼈다가 지금 시행하도록 허락한 것은 모두 의도한 바가 있다. 그리고 정관(政官)이 이미 실제로 병이 있었는데, 이 청은 지나치다. 이종성과 민형수의 일은 이미 우의정에게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정언(正言) 김성탁(金聖鐸)이 상소하여 마음을 바로잡는 학문에 더욱 힘쓰고, 백성을 보전하는 정치를 더욱 강구하며, 절약과 검소를 더욱 숭상하고 예의와 교화를 더욱 밝혀 성사(聖嗣)에게 물려주는 교훈의 도리로 삼도록 청하고, 중간에 사림(士林)과 당론(黨論)의 폐단을 말하면서 ‘각기 높이는 바를 높이고 각기 좋아하는 바를 사사롭게 하여, 성무(聖廡)129) 에 종사(從祀)하는 전례(典禮)로써 당론의 승부(勝負)를 결정지으려고 관부(官府)를 뒤흔들고 남의 손을 빌려 독(毒)을 풀려하니, 예천(醴泉)과 함창(咸昌)의 유생(儒生)이 혹은 형장(刑杖)을 맞고 혹은 갇히기도 한 것과 같은 일은 바로 오늘날 세상 도의의 일대 변고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3월 27일 신유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광제(李光躋)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기를,
"신이 피차(彼此)의 시론(時論)에 대하여 명분과 의리가 확실한 곳이 아닐 것 같으면 남들이 아무리 뛰어난 절개로 인정하더라도 신은 진실로 미봉하여 꾸민 글귀로 보며, 더구나 관작을 회복시키는 이 논의를 애당초 신이 발설하였고, 이미 죄가 없어 관작이 회복되었으면 법으로 보아 당연히 시호(諡號)를 받아야 하는데도, 이 일을 엄준하게 하는 자는 의당 신의 말에 불쾌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관작을 회복시켰으니, 이것은 특히 말절(末節)의 일이다. 힘써 뛰어난 절개가 있는 사람에게 배척당했다고 하는데, 경(卿)은 어찌 자기 주장을 서로 고집하면서 뛰어난 절개 운운(云云)하는가?"
하니, 대체로 송인명의 차자 가운데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경상도(慶尙道) 개령현(開寧縣)에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몸뚱이 하나에 머리가 둘, 눈이 넷, 입이 넷이었다.
3월 28일 임술
정언(正言) 이광제(李光躋)가 인피(引避)하기를,
"애당초 성상의 전교에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셨고, 또 이르시기를, ‘만약 분의(分義)를 다한 충성이라고 이른다면 지나치다.’ 하셨으며, 끝부분에 또 ‘시호를 내리는 일은 논하지 말라.’고 하교하셨으니, 성상의 마음이 금석(金石)같이 굳게 정해져 있었는데, 지금 흔들리고 빼앗기기를 어찌 그렇게도 쉽게 하십니까? 우의정에 이르러서는 요상(僚相)130) 이 단서를 발설한 데 구애되어 두 가지 모두 내려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유달리 변별(辨別)하기에 부족하였습니다. 대체로 의리(義理)의 분변은 인심(人心)의 공통된 바인데, 어찌 반드시 뛰어난 절개가 있은 뒤라야 이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이 미봉하여 꾸민 글귀로 간주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19일 하교(下敎)131) 에 이미 상세히 다 말하였다. 시호의 회복을 처음에는 아꼈다가 나중에 허락한 것은 각기 완급[弦韋]이 있어서인데, 이와 같이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대간(薹諫)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기를,
"신이 이미 전례(典禮)와 사리(事理)에 당연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먼저 요상(僚相)과 의논하였더니 역시 불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감히 진품(陳稟)하였던 것인데 대간의 말이 여기에 이른 것은 실로 뜻밖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미 우의정에게 유시(諭示)하였다는 것으로 비답을 내렸다. 뒤에 또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인피(引避)하는 말 가운데 성상의 전교를 빙자(憑藉)한 것으로 관찰하건대, 그 뜻을 대략 헤아릴 수 있습니다만, 혹시 두 대신(大臣)이 당일에 한 일을 가지고 ‘충(忠)’ 자의 시호를 내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지난날 흉적의 무리가 〈4대신(大臣)이〉 연차(聯箚)하여 대리(代理)를 청한 것을 반역이라고 지목한 말에 가까우니 어찌 그리 기유년132) 에 억울함을 씻고 관작을 회복하게 한 성상의 뜻과 반대되고 어긋남이 심합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태좌(李台佐)가 상소하여 치사(致仕)133) 하기를 원하자, 그대로 윤허하고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예(禮)로써 신하를 부리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가르친 바이고 마음과 뜻이 서로 진실된 것은 임금과 신하가 귀중하게 여기는 바이므로, 특별히 허락하여 옛날의 약속을 이루도록 하노라."
하였다.
3월 29일 계해
이춘제(李春躋)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민형수(閔亨洙)를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이태좌(李台佐)를 봉조하(奉朝賀)로, 이이제(李以濟)를 장령(掌令)으로, 황상로(黃尙老)를 지평(持平)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정언(正言)으로, 남태량(南泰良)을 교리(校理)로, 이철보(李喆輔)를 수찬(修撰)으로, 민사연(閔思淵)을 함경 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로 삼았다.
장령(掌令) 이광운(李光運)이 이광제(李光躋)를 처치(處置)하여 아뢰기를,
"두 대신(大臣)의 관질(官秩)을 추복(追復)한 것은 실로 그 충의를 가엾이 여긴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 이론(異論)이 감히 어떤 이간질도 하지 못할 것이니, 시호(諡號)를 회복시키는 것은 곧 차제(次弟)의 일일 뿐입니다. 며칠 전에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즉시 윤허를 내리신 것은 실로 당연히 행해야 할 전례(典禮)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몇 해 전 연교(筵敎)에서 이미 연차(聯箚)를 광명 정대(光明正大)하다고 하셨으니, 지금 전례에 따라 시호를 회복시키는데 누가 감히 이의(異議)를 가지겠습니까? 그런데 이광제가 홀연히 앞장서서 이미 상소를 하고 또 인피(引避)하여 기필코 저지해 막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면서, 다시 참혹한 여론(餘論)을 답습하여 당벌(黨伐)134) 의 독수(毒手)를 쓰려고 하니, 예사 체임에 그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파직시켜 서용하지 못하게 하심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유(下諭)하기를,
"시호의 회복은 관례를 따라 거행하는 것에 불과하며, 먼저는 아꼈다가 뒤에 허락한 것은 간략히 완급을 보인 것인데, 이광제가 마치 뛰어난 절개나 있는 듯이 대신을 비난하고 배척한 것도 또한 극히 무엄하거니와, 이광운은 사사로운 뜻을 마음에 품고 사기(辭氣)를 많이 허비해 가면서 감히 지난날의 풍습을 행하니 그것 또한 극히 방자하다. 아울러 파직시켜 거리낌없이 원한을 갚으려는 무리를 면려토록 하라."
하였다.
3월 30일 갑자
먼동이 틀 무렵에 서리가 내렸다.
칙사(勅使)가 강(江)135) 을 건너 되돌아갔다. 상칙(上勅) 조덕(照德)은 성미가 조급하면서도 좁고, 부칙(副勅) 십가보(什家保)는 부랑(浮浪)스럽고 기(氣)가 많은 데다 종실(宗室)의 세력을 업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였는데, 가정배(家丁輩)들도 덩달아 서로 선동하였으므로 조덕이 매우 한스럽게 여기다가 마침내 자신의 목을 찔러 거의 죽게 되었고, 그의 가정(家丁) 한 사람도 자신의 목을 쩔러 죽기까지 하였다. 조덕이 이미 다시 살아나서 돌아가는 길에 올랐는데, 그 나라에 이르러서는 두 사람이 서로 소송(訴訟)하여 선물로 받은 것 등의 비밀스런 일을 발설하였으므로, 청(淸)나라 황제가 매우 노여워하여 그들의 관직을 모두 혁파하고 이어서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은밀히 선물하여 청구하는 것 등을 모두 없애도록 하고, 상례(常例)의 예단(禮單)은 앞서의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절반을 감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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