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을축
조명택(趙明澤)을 부응교(副應敎)로, 정형복(鄭亨復)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4월 3일 정묘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하향(夏享)을 행하였다. 하루 전에 대가(大駕)가 나아가 제향(祭享)에 쓸 희생(犧牲)을 살펴보고 재전(齋展)에 들어갔으며, 때가 이르자 행사(行事)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4월 4일 무진
진사(進士) 이해로(李海老) 등이 상소하기를,
"이인지(李麟至)가 두 선정(先正)을 무함하여 욕하였으니, 종사(從祀)하는 전례를 빨리 거행하고, 이인지의 죄를 엄히 성토할 것을 청합니다."
하고, 끝부분에 또 김성탁(金聖鐸)이 상소한 말은 음비(陰秘)하고 흉칙하며 교활하다고 논하고, 조속히 이를 막아서 배척하고 끊어 버림을 분명히 보이는 것이 적당하다고 하니, 비답하기를,
"선정(先正)을 위한 한 번의 상소는 분명하게 진달하는 것이 가하나, 어찌하여 그 사연의 말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여러 유생을 위하여 개연하게 여긴다."
하였다.
황해도(黃海道) 곡산부(谷山府)의 47가구에 화재가 났으므로, 본도에 명하여 불쌍히 여겨 구제해 주도록 하였다.
4월 5일 기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지난달〉 보외(補外)된 다섯 사람의 유신(儒臣) 가운데 윤심형(尹心衡)은 그의 숙부(叔父) 윤봉조(尹鳳朝)의 일로 황공하게 여겨 출사(出仕)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체로 윤봉조가 당한 것이 비록 불행하다 하더라도 이미 직접 범(犯)한 것도 아니고, 또 일기(一紀)136) 가 지났으니 소통(疏通)하게 함이 적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윤봉조가 만약 서용함을 받는다면, 윤심형은 인피(引避)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사명(李師命)의 관작이 회복되지 않았을 때에 그의 아우 이이명(李頤命)이 일찍이 종사(從仕)하였었으니, 윤심형이 어떻게 그의 숙부 때문에 의리를 들어 인피할 수 있겠는가? 윤봉조의 일은 내가 전후(前後)로 동요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말을 하면 부끄럽다. 지난 일을 비록 다시 꺼내어 말하지 않겠으나, 이런 종류에 대한 처리는 엄격히 함이 마땅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두어 서용하기를 아꼈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은 김재로가 진달한 바는 그 사체(事體)가 미안(未安)하다고 말하였고,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도 실언(失言)이라고 말하니 김재로가 마침내 정지하였다.
황재(黃梓)를 부응교(副應敎)로, 이주진(李周鎭)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교리(副校理)로, 이광도(李廣道)를 헌납(獻納)으로, 전광 우수사(全光右水使) 성은석(成殷錫)을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는데, 전임지(前任地)인 벽동(碧潼)에 있을 때 축성(築城)한 것과 치적(治績) 때문이었다.
소대를 행하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윤순(尹淳)이 소(疏)를 남겨 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 소에 대략 이르기를,
"신이 요즈음 시호(諡號)를 회복하는 일에 대하여 매우 분개하며 한탄하는 바가 있습니다. 대체로 기유년137) 8월의 처분(處分)을 내리던 때를 당하여 하룻밤 사이에 행한 삼변(三變)138) 의 거조(擧措)는 그 마음이 이미 정청(庭請)에서도 순일하지 못하였고 또한 연차(聯箚)에서도 순일하지 못하였음을 신이 낱낱이 진달하였던 바, 성상의 하교에 신의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대저 오늘날 회복시킨 시호는 바로 을사년139) 의 이른바 ‘네 사람 충신[四忠]’이라는 그 ‘충(忠)’ 자입니다.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군상(君上)에게 순일하지 못한 자가 과연 충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 이것은 실로 천경 지의(天經地義)140) 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당일에 처분한 사시(祠諡)141) 를 회복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대체로 일을 당하여 분의(分義)를 다히지 못했음을 이른 것인데, 이미 또 명제(命題)에도 나타내서 금석(金石)같이 지켜 왔으므로 뭇신하들이 공경하고 감탄해 온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8년 동안 굳게 유지해 오던 성상의 마음이 도리어 갑자기 한마디 말하는 사이에 흔들리고 빼앗겨서 장차 잇달아 일어날 의논들이 더욱 돌아다 보고 꺼려하는 바가 없음을 보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만일 신이 평소에 충신이 아니라고 드러내어 배척했던 것을 물러남을 고하는 것으로써 핑계대며 한마디 위복(違覆)142) 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전하(殿下)를 저버리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일찍부터 품어온 마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아! 세 번 변경한 것이 무리(無理)가 됨은 천지(天地)에 질정할 만하며, 더구나 그 당시 차자(箚子)가 올라간 뒤에 일찍이 한 아침도 지나지 않았고 비답을 미처 받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다시 〈등대(登對)하는〉 사람을 따라 빠르게 들어가 번거롭게 인죄(引罪)143) 하면서 도로 거두도록 간청하기를 세 번, 네 번에 이르러 마침내 도로 거두는 데 이르게 한 뒤에야 나갔습니다. 아! 이 일이 얼마나 지중(至重)하며, 그 창졸간에 변화함이 마치 두 사람의 소행처럼 하였으니, 그 연차(聯箚)에도 어찌 상반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지금까지 그 차자를 무릅쓰고 올린 사람의 이름을 하나의 의리를 지키는 데 생사를 건 것처럼 하니, 이런데도 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신(人臣)이 되어 반복하여 순일한 마음이 없는 자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할 수 있겠습니까? 떠남에 임해서 염려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말씀드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명(名)144) 과 번영(繁纓)145) 을 바로잡는 의리에 깊이 유념하시어 빨리 시호를 회복하게 하신 명을 거두소서."
하고, 사부(師傅)와 빈객(賓客), 춘방(春坊)의 관원을 날짜를 나누어서 동궁(東宮)에 입시(入侍)하도록 청하고, 또 몸소 가르쳐서 성자(聖子)에게 원대한 계책을 물려주도록 힘쓰라고 청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누누이 말하기를,
"내가 시상(時象)에 대하여 고집하는 바가 이미 견고하니, 비록 시호를 회복하도록 허락한다 하더라도 어찌 다시 사우(祠宇)를 설립하게 하겠는가? 그 당시 〈시호의〉 회복을 아꼈던 것은 경(卿)의 말 때문에 한 것만은 아니며, 나 또한 그 완급을 유시(諭示)하였다. 지금 몇 년이 지나 상신(相臣)의 아룀으로 인해서 시행하도록 허락한 것이 어떻게 동요됨이 있겠는가? 끝부분에 이 일을 진달하고 그 거취를 결정하는 것같이 하니, 그 또한 너무 지나치다. 빨리 되돌아 도성(都城)으로 들어와서 내가 〈경이〉 오기를 기다리는 하교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윤순(尹淳)은 윤유(尹游)의 아우로, 문사(文詞)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한 세대에 이름을 날리었다. 신임 사화(辛壬士禍) 뒤로 높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깨끗한 논의를 유지하다가,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에게 배척당하는 바가 되어 고향에서 기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정미년146) 초기에 맨 먼저 대제학[文盟]이 되었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발탁되어서는 또 탕평(蕩平)에 참여하지 않은데다 남에게 경알(傾軋)을 입어 또 고향으로 돌아갔었는데, 당시 엄한 명에 핍박되어 조정에 들어오니, 사람들이 간혹 그 진퇴에 의로움이 없음을 병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결연히 돌아간 것이다.
4월 6일 경오
소대를 행하였다.
4월 7일 신미
소대를 행하였다.
4월 8일 임신
밤에 달이 헌원 우각성(軒轅右角星)을 범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이태좌(李台佐)가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이태좌가 성궁(聖躬)을 아끼고 보호하며 성학(聖學)에 부지런히 힘쓰며 성사(聖嗣)를 가르치고 양육할 것을 우러러 권면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진향사(進香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등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청나라[彼中]의 사정을 물었다.
4월 9일 계유
이유(李瑜)를 우참찬(右參贊)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김상성(金尙星)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유척기(兪拓基)를 부제학(副提學)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지평(持平)으로, 심악(沈)을 정언(正言)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당시 이유(李瑜)가 논박을 당하여 전직(銓職)에서 체임되고 조현명(趙顯命)을 대신하게 하니, 〈조현명이〉 명을 듣고 즉시 교외(郊外)로 나갔었는데, 대체로 훈척(勳戚)이라 하여 권력이 있는 중요한 직임을 사양한 것이었다. 연신(筵臣)이 조현명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청하니, 들어오도록 재촉하게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을 올려 윤순(尹淳)의 상소를 왕성하게 분변하기를,
"신축년147) 에 대리(代理)하라는 전교가 며칠 사이에 두 차례나 내려지고 전하(殿下)께서 새로 왕세제(王世弟)의 자리에 오르시어 위태한 말이 선동되었으므로, 국정(國政)을 맡아보는 대신도 한 번 발을 움직이고 한 번 말을 함에 따라 문득 함정을 파 놓고 서로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천고(千古)에 없었던 지극히 어려운 때였습니다. 비록 충성심이 주공(周公)과 같고 지혜가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천천히 그 마음을 살펴서 그 자취를 용서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대저 이른바 세 번 변경하였다는 것은 변한 것이 아니고 한결같은 것입니다. 즉위한 원년[初元]에 갑자기 업무를 놓아 버리려고 하신다면 모두가 나아가 일제히 호소하여 왕명을 거두도록 굳게 청하는 것은 신하의 직분으로 당연한 것이며, 마지막 비지(批旨)에 이르러서는 〈감동시키기 어려운〉 돼지와 물고기도 울게 할 만하였으니, 심지어 전하와 좌우(左右)를 차등해 대한다면 어찌 한갓 평상의 신절(臣節)만을 따라서 간곡하고 긴박한 전교를 본받지 아니하고 한없는 국사(國事)를 그대로 방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대신들이 힘써 받들어서 궁정(宮庭)에서의 호소하던 거사가 정지되기를 기필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정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튿날 연차(聯箚)의 비답이 아직 내리지도 않았는데 인접(引接)한다는 명이 갑자기 내렸으니, 이것이 얼마나 비상한 거조인데 보상(輔相)의 직책을 맡은 자가 자리에서 물러나 방관만 하며 그 처분을 직접 받들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 날 입대(入對)를 구한 나머지 비로소 입시(入侍)함을 얻어 천안(天顔)148) 을 쳐다보게 되면 다시 근심하며 허둥대는 심정을 펴는데, 전번의 내린 명을 도로 정지하도록 바라는 것은 또한 신하의 도리와 사람의 정의에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니, 대저 그 마음이 순일하다면 일의 가닥이 아무리 많더라도 순일함이 되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궁정에서 호소하고 차자로 진달하면서 더러는 다투고 더러는 받든 것이 모두가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에서 나왔고 단지 종묘와 국가를 편안하고 태평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국가에 대한 순일함이 충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오직 저 기회를 틈타 으르렁거리며 깨물려는 무리는 전혀 돌아보거나 두려워함이 없이 감히 연차(聯箚)로 대리(代理)하게 한 것을 지목하여 ‘역적’이라 이르고, 비록 마음속으로는 그 말이 분수를 범(犯)한 것인 줄 알면서도 한마디도 스스로 다르게 말하지 않아서 마침내 모두 악한 화란 속으로 몰아넣어 종묘와 국가 또한 거의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시고서야 억울한 무함임을 통촉하시고 관작을 회복시키고 시호(諡號)를 내리는 등 가엾이 여기는 전례를 갖추어 거행하게 하였는데, 한 해도 채 안되어 그 안(案)을 번복해 추탈(追奪)하게 하였으니, 그들이 죄로 삼는 것은 역시 연차였습니다. 무신년149) 역변(逆變)을 겪고 나서 성감(聖鑑)으로 밝게 살피시고 마침내 연차를 가지고 죄를 삼을 수 없다 하시고 특별히 두 대신(大臣)의 관작을 회복하게 하시니, 지난날 고집하여 대안(大案)으로 삼던 것이 이에 이르러 힘만 쓰고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또 바로 별반(別般)의 의리(義理)를 새로 만들어 내어 삼변(三變)한 것이 순일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말을 하니, 이는 여러 대신(大臣)의 죄가 연차에 있지 아니하고 바로 한 가지 도리를 순일하게 지키지 못한 데 있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때의 대신이 당초 비망기(備忘記)를 내릴 때 한마디도 다투어 논난(論難)함이 없다가 뒤에 또 등대(登對)할 즈음에 대리하도록 극력 청하였다면, 중신(重臣)과 같은 자가 과연 순일한 마음으로 분의를 다한 충성이라고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심상(尋常)하게 남의 시호를 논하면서 ‘충(忠)’ 자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는 것은 혹 불가하지 않겠지만, 대신들이 당시에 죽은 것과 같은 일은 관계됨이 지대하여 충신이 아니면 역적이고 역적이 아니면 충신인데, 이미 역적이 아니라고 하여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허락하고, 또 충신이 아니라 하여 그의 시호를 회복시키는 일을 미워해서 충신도 아니고 역적도 아닌 사이에다 두려고 하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의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사사로운 의리로 말한다면, 궁정에서 호소할 때에 응답한 자도 신이었고 등대할 때에 따라 들어간 자도 신이었으며, 시호를 논의할 때에 주장한 자도 신이었으니, 그 두렵고 놀라움이 현재 배척을 당하는 데 그칠 뿐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난번 시상(時象)이 괴이하고 놀라웠을 때를 당하여 서로가 의리를 조작하였으므로 곤욕을 당한 일이 많았고, 기유년150) 에 합문(閤門)을 닫게 한 것도 대체로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분명히 유시(諭示)한 뒤에도 오히려 기관(機關)을 만들어 〈마음을〉 단단히 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분의(分義)이겠는가? 경(卿)에게는 털끝만큼도 시애(撕捱)151) 할 단서가 없다."
하였다.
임금이 전광 감사(全光監司) 윤득화(尹得和)를 인견(引見)하였다. 말이 박사수(朴師洙)가 관서(關西)를 맡았을 때의 일에 이르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이 일찍이 박사수 관하(管下)가 되었으니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리 ‘힘을 다하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폐단이 있었다고 여긴다."
하자, 윤득화가 아뢰기를,
"신이 의주(義州)에 부임할 때 성상의 하교에 ‘너그러울 관(寬)’ 자로 힘쓰라고 하셨기 때문에 신이 박사수에게 말하였더니, 박사수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박사수가 죽이기를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황해도 관찰사[海伯]가 되었을 적에는 진실로 생경(生梗)하였고 관서를 안무(按撫)함에 미쳐서는 법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았었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자가 비방하는 말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박사수에게 항상 ‘세 번 이르면 북을 던진다[三至投杼].’152) 는 것으로 경계를 하였는데, 그 부서(簿書)153) 의 사이에서도 오히려 지나치게 각박한 것이 있었으며, 수령(守令)을 체임시키거나 파직시키는 계문(啓聞)에도 간혹 ‘바라보니 사람 같지 않다.[望之不似人]’고 말하였으니, 수령도 사람인데 어떻게 이와 같이 박절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윤득화가 아뢰기를,
"박사수가 만약 탐오함이 있었다면, 반드시 짓이겨져 가루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자기 자신을 단속하였다면, 비록 원망을 한다 하더라도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고, 이어서 윤득화에게 경계하기를,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이 칭찬을 바라는 폐단은 모두 명예를 좋아하는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였다.
4월 10일 갑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윤순(尹淳)이 소(疏)를 놓아 둔 채 고향으로 내려간 것을 가지고 견책(譴責)하여 파직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근일(近日)의 대신을 낱낱이 들어 이르기를,
"심수현(沈壽賢)은 지키는 바가 있어 분육(賁育)154) 의 〈용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으므로 내가 궤장(几杖)을 내리고 임명해 쓰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남태제(南泰齊)에게 침척(侵斥)당하는 바가 되어 구명(究明)하여 쓸 수 없었다. 민진원(閔鎭遠)과 이광좌(李光佐)의 휴치(休致)155) 를 허락한 것은 내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거조가 아니면 조정의 모양이 반드시 오늘날과 같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태좌(李台佐)는 나라를 향한 마음이나 물정을 진정시키는 도량이 마땅히 여러 대신(大臣) 가운데서 제일인 자가 될 것이며, 조문명(趙文命)·조태억(趙泰億)·홍치중(洪致中)은 모두 마음을 다하여 애쓰다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생각하면 창연(愴然)하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취로(金取魯)를 판의금부사로, 김약로(金若魯)를 대사간으로, 김유(金濰)를 승지로 삼았다.
4월 11일 을해
문신(文臣)을 친시(親試)하고 선정전(宣政殿)에서 경서(經書)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에게 묻기를,
"경(卿)은 윤순(尹淳)의 소(疏)를 어떠하다고 여기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전해 내려온 의논(議論)이며 별반(別般)으로 새로 만들어 낸 말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순(尹淳)이 아마도 내가 동요된 바가 있을까 싶어서 그렇게 한 듯한데, 큰 한계처(限界處)야 내가 어찌 굳게 지키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대체로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 두 대신(大臣)을 지목한 것이었다.
유만중(柳萬重)을 승지로 삼았다.
4월 12일 병자
넷째 옹주(翁主)가 요사(夭死)하였다. 옹주가 홍역을 앓았는데, 병이 심해지자 의관(醫官)이 ‘여염(閭閻)의 아이들도 병이 있으면 친족(親族)의 집으로 옮겨서 피하게 하는 규정이 있다.’는 것으로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비록 종신(宗臣)의 집이라도 만약 어린 자식이 있으면 보내고 싶지 않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새벽에 밀창군(密昌君)156) 의 집으로 내보냈는데, 겨우 금위영(禁衛營) 문 앞에 이르러 운명(殞命)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과 약방 제조(藥房提調) 조상경(趙尙絅)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넷째 옹주가 당진(唐疹)으로 요사(夭死)하였으니, 동궁(東宮)을 신중히 보호하는 도리에 있어서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게 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3일 정축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15일 기묘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호조 판서 윤유(尹游)가 청대(請對)하여 인견(引見)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농사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드는 것은 소식 영허(消息盈虛)157) 와 같아서 반드시 순환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청컨대 사마광(司馬光)158) 의 말대로 조금 풍년이 들었을 적에 제도(諸道)로 하여금 진휼곡[賑穀]을 거둬 모으게 하고 연말이 되기를 기다려서 책(冊)을 만들어 비국(備局)에 보고하도록 하되 그 많고 적은 데 따라 상벌(賞罰)을 시행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하게 여겼다.
당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흥경(金興慶)이 강외(江外)에 있으면서 여러번 상소하고 오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또 도승지(都承旨)에게 명하여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고 돈독하게 권면하여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고 하니, 김흥경이 즉시 도성(都城)으로 들어와 명을 기다렸다. 임금이 입시(入侍)하도록 재촉하고 간곡히 유시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니, 김흥경이 마지못해 명을 받들었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금부 도사(禁府都事) 조경빈(趙景彬)이 글을 올려 신을 욕하였으니, 청컨대 법에 의거하여 감처(勘處)하소서."
하니, 임금이 조경빈을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송씨(宋氏)가 외롭고 한미(寒微)하여 세력이 없었는데, 송정명(宋正明) 형제가 조태구(趙泰耉) 일가(一家)와 교분이 깊자 여러 조씨(趙氏)가 힘써 추천하여 뒤를 밀어 주었다. 송인명이 높은 지위에 오르자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여 온 나라의 권력을 휘어잡았는데, 조씨는 쓸쓸하게 쇠퇴하여 송씨에게 빌붙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조씨는 오히려 송씨를 깔보면서 번번이 ‘우리 집안에서 수립(樹立)해 준 것이다.’고 하였다. 조경빈은 바로 조태일(趙泰一)의 아들이고 조태억(趙泰億)의 조카였다. 언론(言論)을 좋아하고 성질이 매우 급하고도 좁아서 송씨와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을 쌓아 오다가 송인명이 국정을 맡아 〈권력을〉 작용(作用)하는 것을 직접 보고는 미워하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송인명이 조경빈의 연고로써 무신년159) 주목(州牧)의 추천에서 거두어 기용하기를 여러번 청하였고 심지어 정조(政曹)160) 의 관원을 추고하는 데 이르니, 조경빈이 더욱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기다가 금부 도사에 임명되자 출사(出仕)하지 않겠다는 글을 올렸는데,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기량(技倆)이 오로지 기관(機關)과 권모 술수에 있어 상하(上下)를 엄폐하고 전지(銓地)161) 를 뒤흔들어 자기 당여를 배치하고는, 권력을 휘어잡아 경탈(傾奪)한 나머지 이익이 갑자기 이 몸에까지 미쳐서, 3백 년에 이르도록 순수하고 청백한 세족(世族)이 갑작스럽게 권력 있는 재상(宰相)의 추천과 덮어씌움을 받았으니, 실로 불결한 것을 덮어쓰고 저자에서 매를 맞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이를 보고 크게 노여워하여 마침내 차자를 올려 죄를 청하게 된 것이었다.
4월 16일 경진
이덕수(李德壽)를 홍문관 제학으로, 유척기(兪拓基)를 예문관 제학으로, 서명빈(徐命彬)을 부제학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정언으로, 조익명(趙翼命)을 승지로 삼았다.
정언(正言) 심악(沈)이 상소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두 사람의 시호(諡號)를 회복시키도록 허락하신 것은 어떠한 명분에서 나왔습니까? 만약 두 사람을 충신이라고 한다면 처음에는 어찌 충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전교가 있었으며, 서원(書院)을 세우고 시호를 내리는 논의는 하지 말라는 명이 문득 백세(百世)토록 밝게 게재할 안(案)으로 만들어졌는데, 갑자기 변경되어 문득 쓸모 없는 것으로 돌아가게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더구나 이렇게 지극히 중대한 일을 을사년162) 에 한 번 변경되었고 정미년163) 에 두 번 변경되었으며 기유년164) 에 세 번 변경되었는데, 오늘날 네 번째 변경시켜 시호를 회복하게 하였으니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전후(前後)하여 동요됨이 마치 전혀 주장하는 바가 없는 듯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인심을 감복시키고 후세에 전해 드리울 수 있겠습니까? 그 흐름의 폐단은 장차 인신(人臣)이 되어 두 마음을 품은 자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알 수 없게 하여, 마침내는 난적(亂賊)이 멋대로 행하여 국가가 왕성해질 수 없는 데 이르게 될 뿐입니다. 상신(相臣)의 차자(箚子)에 이르러서는 실로 도리[倫脊]가 없습니다. 거기에 이르기를, ‘그 마음을 살펴서 그 자취를 용서하여야 하며, 세 번 변경하였다는 것은 변한 것이 아니고 한결같은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무슨 말입니까? 이른바 세 번 변경된 실상은 만인(萬人)이 보았고 백대(百代)에 전해질 것이니, 속일 만한 것이 아닙니다. 변경한 자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진실로 무리(無理)가 되는데, 더구나 한결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일찍이 이주(伊周)165) 의 일을 인용하여 하교하셨는데, ‘이 마음이 없는데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서 엇걸려 섞였다면, 이는 바로 장심(將心)166) 이다.’라고 하셨으니, 이 하교야말로 환하게 꿰뚫어서 그 밝기가 일성(日星)과 같았습니다. 신이 모르기는 합니다만, 대신(大臣)이 과연 네 사람의 마음이 이주(伊周)와 같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비록 세 번 변경한 자취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은 진실로 주벌(誅罰)할 만합니다. 더구나 하룻밤 사이에 반복(反復)하여 변환(變幻)함이 하늘과 땅처럼 판이 하였는데, 어떻게 그 이른바 한결같다는 것을 보겠습니까? 지금 삼단(三段)을 날조해 합하여 억지로 한결같다고 이름짓는 것 또한 흰 것을 가리키며 검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거기에 말한 ‘즉위한 원년[初元]에 갑자기 업무를 놓아 버리려고 하신다면 모두가 나아가 일제히 호소하여 왕명을 거두도록 굳게 청하는 것은 신하의 직분으로 당연한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다투어 고집한 것을 지극히 당연한 도리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마지막 비지(批旨)는 〈감동시키기 어려운〉 돼지와 물고기도 울게 할 만하였으니, 그 어찌 한갓 평상의 신절(臣節)만을 따라서 간곡하고 긴박한 전교를 본받지 아니하고 한없는 국사(國事)를 그대로 방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는 받드는 것으로써 지극히 당연한 도리로 삼은 것입니다. 이미 평상의 신절을 따르지 아니하고 비망기(備忘記)를 받들었다고 말하였다면, 또 어찌하여 〈등대(登對)하는〉 사람을 따라 들어가 입대하기를 구하여 지난번의 명을 정지하도록 청하였단 말입니까? 하룻밤 사이에 한없는 국사가 안정을 이루게 하는 바가 없었으니, 평상의 신절을 따르지 아니하고 비망기를 받든 그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세 번 변경한 자취에서도 그 마음이 한결같지 않음은 불을 보듯 환하니, 한결같지 않다면 두 마음인 것은 이치가 본시 그러한 것입니다. 인신(人臣)으로 두 마음을 가졌다면 충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모두가 쳐다보는 자리의 논의(論議)가 이와 같으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유(下諭)하기를,
"기유년에 하교(下敎)한 뒤 연차(聯箚)한 일은 분명히 두 가지 일인 듯하지만, 시호를 회복하게 한 것은 전례를 따른 데 불과하다. 이광제(李光躋)를 처분(處分)한 뒤에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며, 그 말이 대신(大臣)을 배척하고 과격하게 한쪽의 편을 들었으니 사체(事體)로나 분의(分義)에 있어 모두 극도로 한심스럽다. 아! 내가 비록 밝지는 못하지만 어떻게 두 신하를 고적(顧籍)하여 충성을 포양(褒揚)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 지난일은 듣기만 하여도 더욱 마음 아픈데, 이와 같이 기관(機關)을 만드는 자는 이것이 무슨 뜻에서인가? 원소(原疏)는 돌려 주고 심악은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7일 신사
평안도(平安道) 유학(幼學) 계만장(桂萬長) 등이 상소하여 용천(蘢川)의 의병장(義兵將) 이입(李立)을 안주(安州)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食]하도록 청하니, 해조(該曹)호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4월 18일 임오
이정제(李廷濟)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기진(李箕鎭)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성적(金尙迪)·한억증(韓億增)을 정언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사간으로, 김시찬(金時粲)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이주진(李周鎭)이 ‘조경빈(趙景彬)이 출사하지 않겠다는 글을 올리며 대신을 욕보이기를 한이 없었다.’고 말하고, 인해서 그 말한 내용을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조경빈이 무신년167) 이후로부터 사모(紗帽)를 쓰고 종사(從仕)하지 않았는데, 대개 우의정[右相] 등 여러 사람에 대하여 유감이 쌓여서입니다. 정미년168) 이후로 성상(聖上)께서 지금의 우의정 및 조문명(趙文命)·홍치중(洪致中)과 신의 아비 이집(李㙫)에게 조정할 책임을 위임하였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지금은 거의 모두 죽고 단지 우의정 한 사람만 남아 있고, 형세가 고단(孤單)하여, 피차간의 준절(峻絶)한 논의를 펼치는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하고 꺼려함이 없습니다. 대체로 우의정과 지금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는 단지 조현명(趙顯命)·박사수(朴師洙) 등 몇 사람뿐이고, 그 밖의 나이 젊은 무리들은 거의 모두 준절한 의논을 펼치고 있어 우의정이 젊은 무리들에게 비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조경빈이 이러한 때를 틈타 멋대로 무함하고 욕하기를 권세(權勢)라느니 당여(黨與)라느니 하였는데, 권세와 당여는 인주(人主)가 듣기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참소하고 이간시키는 계책을 삼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아뢰는 바를 들으니, 조경빈은 매우 교활하고 끔찍하다. 그러나 비록 1백 명의 조경빈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흔들리거나 미혹되겠는가?"
하고는, 임금이 시호(諡號)를 회복시키는 일에 이르러 누누이 만여 마디나 하였는데, 임금의 하교에 이르기를,
"기유년169) 에 합문(閤門)을 닫기 전에 연차(聯箚)의 대리(代理)를 의심하였던 것은 교문(敎文) 중의 뜻과 같아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니, 합문을 닫은 뒤에 19일 하교(下敎)가 없었다 하더라도 저절로 분명하게 되었다. 윤순(尹淳)의 말은 바로 경상(經常)의 의논이므로 처음에는 받아들여 시행하려고 하다가 갈등이 생길까 염려하여 그만두었던 것이다. 신축년170) 의 일은 가령 내가 그 당시 대신(大臣)들을 위하여 역시 대리(代理)를 청하는 것도 타당하였겠지만, 사람이 반드시 모두 다 착한 것은 아니므로 옛날부터 이런 일에 혹시 어떠한 뜻이 있었더라도 단지 그 끝가지를 관찰하여 그 사업(事業)이 광명(光明)한 자만이 참으로 순일한 충신이며, 조화(造化)와 기권(機權)171) 을 허비해 가면서 초(楚)나라도 위하고 조(趙)나라도 위하여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위하지 않는 자는 역적인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기지(機智)와 술수(術數)가 있었고 일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면 역적이 아니다. 사람 가운데에는 진실로 비록 역적은 아니라 하더라도 직분을 다하는 충신이 아닌 경우도 있으며, 또 비록 충신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역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자도 있는데, 지금의 경우 서로가 ‘충신이다.’ ‘역적이다.’ 말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 내가 이미 한계를 정하고 그 역적과 역적이 아닌 것을 분변하였으니, 관작을 회복시킨 자는 역적이라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간혹 신원되지 않은 두 사람을 아울러 역적이 아니라고 이르는 자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나에게 지키는 바가 있으니, 지난날 동요되던 것과는 다르다. 지금 비록 시호를 회복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어떻게 다시 사우(祠宇)를 세우게 하겠으며, 한밤중에 하교한 뜻 또한 어떻게 변경해 고치겠는가? 대저 신축년의 일은 당초 첫머리에 정청(庭請)하며 다투고 고집한 것은 도리로 보아 당연하나, 그 끝가지의 일을 가지고 관찰하면 거짓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그 정청이 만약 윤허를 받았다면,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정청과 연차가 비록 한결같은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조태구(趙泰耉)가 청대(請對)할 때에 따라서 들어간 것은 매우 괴이하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그 당시의 대신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다면, 국가가 장차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고, 임금이 인해서 언성을 높여 이르기를,
"무신년의 역변(逆變)이 어디를 좇아서 나왔는가? 황형(皇兄)172) 과 나는 모두 피차(彼此)의 괴악(怪惡)한 무리들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다. 우리 황형을 저버리고 저들을 충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무신년의 역변이 빚어졌으며, 기유년에 하교한 뒤로는 모두 확연하게 잊어버리는 것이 타당하다. 내가 어찌 이 두 사람이 나를 위하였다고 하여 돌보며 애석히 여기는 마음을 두겠는가? 만약 내가 이들을 충신이라고 이른다면 뒷날의 폐단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겠는가? 참으로 한심스럽다. 기유년에 합문(閤門)을 닫았고 지난해에 하교한 뒤에도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이미 연차(聯箚)를 가지고 단단하게 하며 버리지 않는 것도 부당하며, 또 두 사람을 신설(伸雪)하도록 청하는 것도 부당하다. 윤순(尹淳)이 눈물을 흘리면서 진달한 말에 마치 내가 역적을 신설하여 준 듯한 것이 있으니, 보고 듣는 데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심악(沈)의 상소는 나는 〈심악이〉 심 판부사(沈判府事)의 아들이기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라고 여긴다. 기유년과 을묘년173) 의 하교 뒤에도 오히려 이것을 의리(義理)로 삼아 굳게 잡고 버리지 않는 자는 신자(臣子)가 아니다. 신임 옥사(辛壬獄事)와 무신년 역변의 인물들이 어찌 처음부터 모두 효경(梟獍)174) 이었겠는가? 단지 과격한 폐단 때문이었다."
하였다.
전 현감(縣監) 이중태(李重泰) 등이 상소하기를,
"주(周)나라에는 태백(泰伯)과 우중(虞仲)175) 이 있고 우리 조정에는 양녕(讓寧)과 효령(孝寧)이 있으니, 이것이 공자[夫子]가 지극한 덕(德)이라고 칭송을 하고 숙종[肅廟]께서 지덕사(至德祠)를 건립하게 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공자가 태백을 칭송함에 청권(淸權)이라는 찬양이 아울러 우중에게도 미쳤었는데, 숙종께서 양녕의 사우를 건립함에 그 표현(表顯)하는 거조가 유독 효령에게만 빠뜨려져서 쌍(雙)으로 이룬 덕(德)을 지금까지 함께 찬미하여야 할 거조가 결여되고 있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사우를 건립하고 편액(扁額)을 내려, 주(周)나라에서만 아름다움을 독점하게 하지 마소서."
하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비답(批答)하였다.
4월 19일 계미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이 지난번의 차자(箚子)에서 진실로 차마 지나간 일들을 추후해 제기하여 우리 성상(聖上)을 슬프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이미 낱낱이 진달하였으므로 대변(對辯)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신하가 군상(君上)에 대하여 처음에는 그것이 다툴 만하다고 여겨 다투다가 뒤에는 그것이 따를 만하다고 여겨 따른 경우를 옛부터 어떻게 한정을 짓겠습니까? 비록 근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을유년176) 선위(禪位)의 전교는 끝내 되돌릴 것[繳還]을 기필하고 정유년177) 대리(代理)의 거조는 곧바로 받들어 행하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시기적으로는 같지 않음이 있으나 형세로는 그만두지 못할 바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대리의 거조가 진실로 역순(逆順)에 관계되는 대방(大防)이었다면 을유년에 애써 다투던 신료(臣僚)들이 어찌 유독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겠습니까? 궁정(宮廷)에서 호소하고 차자(箚子)로 진달하면서 더러는 다투기도 하고 더러는 받들기도 하는 것이 사리(事理)가 분명하여 죄삼을 만한 것이 없었은즉, 이에 등대(登對)하였을 때에 정지하도록 청한 것을 하나의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니, 신은 그 마음의 미워하는 바가 과연 이어받드는 데 있는지 아니면 도로 거두도록 하는 데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날마다 입대(入對)가 막혔다가 비로소 들어가 뵐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첫 대면이었으니, 어찌 그 첫머리부터 다시 가다듬으면서 도로 정지하도록 바라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만약 연중(筵中)에서의 하교가 측달(惻怛)하고 간박(懇迫)함이 한결같이 전일 저녁의 비답과 같았다면 또한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어받들고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의 기회가 갑자기 어긋나고 다시 변경되어 특별히 불행한 때를 만나서 대신이 일마다 몸을 굽혀가며 각기 당연한 법칙을 따랐으니,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임이 균일하고, 설령 옛날의 대현인(大賢人)이라도 이러한 입장을 당해서는 아마도 다른 도리가 없었을 듯합니다. 그런데 마침내 이로써 함께 뜻밖의 화(禍)를 당하여 자신이 국가의 액운(厄運)을 따라 죽었으니, 이것이 하인과 부녀자·어린아이들까지도 가련하게 여기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는 까닭입니다. 신의 지난번 차자에서 이른바 ‘변한 것이 아니고 한결같다.’는 것은 바로 일의 기회가 비록 어긋나고 변경됨을 만났다 하더라도 그 종묘와 국가를 위한 고심과 혈성이 하나로 관철되어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현이 사람을 논(論)함에 있어 ‘그 마음을 관찰하여 그 자취를 용서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지난날의 문적(文籍)에서도 반반(斑斑)178) 합니다. 어찌 일찍이 당인(黨人)들이 그 마음과 시기가 어떠한가는 묻지 않고 오직 없는 죄를 얽어 만들어서 쳐 없애는 것으로 통쾌함을 삼는 것과 같겠습니까? 아! 신축년179) 이래로 여러 대신들의 죄를 날조하려는 자가 번번이 연차(聯箚)의 대리(代理)를 가지고 반역으로 몰고 가려고 하였지만,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여 다스리면서 즉시 그 원통함을 펴게 하고 통쾌히 그 죄안을 씻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만 일종의 위협을 지닌 말이 가만히 전하의 혐피(嫌避)하는 마음을 열어 이미 때에 따라 흔들리고 고치게 함을 면하지 못하였고, 또 그 근원을 환하게 분변하려고 하지 않으시니, 군신(君臣)의 분수가 거의 무너지고 어둡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유년180) 에 이르러 성상께서 변고를 겪으심이 이미 많았고 사리의 관찰도 더욱 익숙해져서 맨 먼저 ‘연차는 죄줄 수 없다.’ 하시니, 모든 신하가 따라서 뇌동(雷同)하여 간혹 광명 정대(光明正大)하다고 허여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이에 두 대신의 관작(官爵)이 비로소 회복되었고 국시(國是)도 조금 안정이 되는 듯하였습니다. 지금 첫머리의 형세를 관찰하니, 그 시호(諡號)를 회복한 것을 미워할 뿐만 아니라 지난날에 관작을 회복하게 한 것까지도 아울러서 깊은 불만을 품고 있으며, 심지어는 인신(人臣)으로서 두 마음을 품었다는 배척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애당초 흉적(兇賊)의 무리가 반역으로 몰아붙인 것과 흡사한 것으로서 그 말의 뜻이 동일합니다. 이른바 두 마음이란 그 어느 곳에다 두 마음을 품었다고 이르는 것입니까? 죄를 구청(求請)하기에 급하여 전혀 말을 가리지 않음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놀랄 만합니다. 또 전하께서 몇 해를 아픔을 참으면서 합문(閤門)을 닫고 자책하시다가 겨우 감정을 돌리셨고 조정의 신하들도 조금은 시상(時象)을 진성시키는 데 이르렀는데, 이에 도리어 겉으로는 따르고 마음속으로는 어기며 기꺼이 마음을 놓지 않고 그전대로 감추고 쌓아 두었다가 곳에 따라 드러내니, 이는 전하께서 사령(辭令)하실 즈음에 분명히 밝히기를 꺼려하시고 마침내는 뇌락(磊落)181) 함이 부족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 비답에 이미 유시하였고 전석(前席)에서도 환하게 유시하였다. 일을 좋아하는 무리들의 일을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 여선군(驪善君) 이학(李壆)과 부사(副使) 이덕수(李德壽), 서장관(書狀官) 구택규(具宅奎)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20일 갑신
책례 경과 정시(冊禮慶科庭試)를 춘당대(春塘臺)에서 행하여 조하망(趙夏望) 등 15인을 뽑았다. 이때 임금이 한(漢)나라의 군신(群臣)이 장락궁(長樂宮)182) 이 이루졌음을 축하하는 표문(表文)을 게시하도록 명하였는데, 거자(擧子)들이 《통감강목(通鑑綱目)》의 본해(本解)를 가지고 지어 올리는 자가 많았으며, 더러는 상황(上皇)을 효도로 봉양하는 뜻으로 지어 올린 자도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몇 해 전에 장락궁의 상수(上壽)183) 하는 부(賦)에 동조(東朝)를 효도로 봉양하는 뜻으로 지어 올린 자가 급제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남의 좋지 못한 일을 흉내내는 일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장락궁이 이루어진 것이 분명히 주자(朱子)의 《통감강목》에 있으니 거자들이 억지로 별도의 뜻을 내게 된 것은 야박하다고 이를만한데, 시관(試官)이 ‘제술(製述)한 바가 일치하지 않아서 취사(取捨)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하여 계품(啓稟)하자, 임금이 두 가지 모두 뽑도록 명하였다. 이미 출방(出榜)184) 하고는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여러 시관(試官)을 인견(引見)하고 과방(科榜) 가운데 시골 사람이 적다고 하여 후정시(後庭試)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과방 가운데 시골에 적을 둔 사람이 4인이나 있었는데도 먼 시골에서는 없다고 여겨 경사를 함께 하는 뜻을 넓히도록 요구한 것이었으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송인명(宋寅明)이 대신으로 시험을 주관하였으면서도 다투어 간하지 않았으므로, 식자(識者)가 이를 근심하였다.
4월 21일 을유
윤급(尹汲)을 사간으로, 홍중일(洪重一)·송질(宋瓆)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22일 병술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자전(慈殿)이 먼저 출발하고 대가(大駕)가 그 다음으로, 동궁(東宮)이 또 그 다음으로 떠났는데, 무신년185) 뒤 10년에 가깝도록 처음으로 학가(鶴駕)186) 의 위의(威儀)를 보았으므로, 구경하는 자가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임금은 홍화문(弘化門)을 좇아 나아갔는데, 향실관(香室官)이 의궤(儀軌)와 채여(彩與)를 받들고 돈화문(敦化門)을 경유하여 나아가다가 파자전교(芭子廛橋)에서 마주쳤다. 임금이 연(輦)에서 내려서서 의궤와 채여가 먼저 출발하도록 명하자, 여러 신하들이 간혹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으며 말하기를,
"영수각(靈壽閣)의 어첩(御帖)에 이미 배례(拜禮)를 행하였으니, 향실(香室)과 축식(祝式)이 어찌 어첩과 차이가 있겠는가? 또 근래에 윤이(倫彛)187) 가 분명하지 않아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겨 윗사람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온 세상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천승(千乘)188) 의 존엄으로도 또한 낮추고 굽히는 곳이 있음을 알게 하여, 더욱 윗사람 섬기는 의리를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돈의문(敦義門)이 경덕궁(慶德宮)에 가까워서 인마(人馬)의 시끄러운 폐단이 많다고 하여 병조에서 봉폐(封閉)하기를 계청(啓請)하였으므로, 단지 매일 경영고(京營庫)에서 공상(供上)할 때만 문부장(門部將)이 문의 열쇠를 내주도록 청하여 잠깐 열었다가 곧바로 닫도록 하였는데, 대체로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4월 23일 정해
임금이 주강(晝講)을 자정전(資政殿)에서 행하였다. 〈《시경(詩經)》 대아편(大雅編)의〉 상유장(桑柔章)을 강(講)하다가 임금이 유시하기를,
"삼대(三代)189) 이후로는 오직 한(漢)나라가 관대함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에는 곡물이 붉게 변질될 정도로 묵어 쌓인 채 서로 잇달았는데 그 망함에 이르러서도 백성들이 오히려 은덕을 칭송하면서 사모하였고, 송(宋)나라 역시 인후(仁厚)함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사해(四海)가 부유하였으며, 이미 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나 한쪽 모퉁이 강남(江南)으로 건너가 나머지 왕업(王業)을 보전하였으니, 이는 모두 각박하게 하지 않고 취렴(聚斂)190) 하지 않은 효험이다."
하였다.
김약로(金若魯)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4월 24일 무자
중궁전(中宮殿)과 현빈궁(賢嬪宮)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윤급(尹汲)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심악(沈)이 두 대신의 시호(諡號)를 회복하게 한 일을 가지고 방자하게 상소하여, 곧바로 연차(聯箚)를 두 마음을 품은 죄과(罪科)에다 몰아넣었습니다. 애당초 연차를 가지고 대신의 죄안(罪案)을 만들고 곧바로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에다 핍박을 가한 것이 바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무리의 흉언(凶言)이었습니다. 김일경과 박필몽은 비록 주벌(誅罰)되었다 하더라도 심법(心法)은 오히려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니, 국가와 세도(世道)를 위한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엄한 말씀으로 통렬하게 배척하여 그 죄를 바로잡아야 하는데도 비망기(備忘記)에 엄절(嚴截)함이 너무도 부족하였고 그 책벌(責罰)이 특별히 체임하는 데 불과하였으니, 이로써 어찌 의리를 밝히고 흉언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의 처지로는 더욱 의리를 두려워하고 은덕을 품고서 더욱 은혜를 갚기 위하여 힘을 다하면서 징계되기를 생각함이 마땅한데, 오늘날 나라를 저버리고 분수를 범(犯)하는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달갑게 여기니, 심악은 지극히 먼 변방에다 귀양 보내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심악이 진달한 바가 비록 놀랍게 여길 만하다고 하더라도 청하는 것이 지나치다. 심악은 삭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설서(說書) 김시찬(金時粲)이 상소하고 곧바로 나오면서 말하기를,
"신이 바야흐로 입직(入直)하러 나아가서야 비로소 대직(對直)해야 할 관원이 바로 청의(淸議)에 죄를 얻은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신은 그와 더불어 주선(周旋)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바로 필선(弼善) 신치근(申致謹)을 가리킨 것이었다. 상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정말로 이와 같다면 함께 입직(立直)하는 것뿐만 아니라 애당초 어떻게 같은 조정에서 벼슬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을 시상(時象)이 뱃속에 가득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가 소신(小臣)으로서 신칙하여 면려하는 전교를 돌아보지 않고 이와 같이 할 수 있느냐?"
하고, 그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그 소(疏)를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뒤에 신치근이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지난번에 두 사람을 신원(伸冤)하는 일로 조금 바로잡은 것이 있었는데 크게 당인(黨人)들의 꺼려하는 바가 되었으며, 심지어 남태징(南泰徵)에게 말을 찾아준 사람에게 형벌을 베풂으로써 도리어 신을 망측(罔測)한 죄과(罪科)로 얽어 넣으려고 하였으니, 그가 죄로 죽은 사람의 친당(親黨)으로서 신을 골수에 사무치는 원수로 보는 것이 괴이할 것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흥정당(興政堂)에서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고 선온(宣醞)하였는데, 검토관(檢討官) 조명겸(趙明謙)이 아뢰기를,
"가만히 여항(閭巷)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혹은 성상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한다는데, 신은 그 허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오직 바라건대, 조심하고 염려하며 경계함을 보존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목을 마를 때에 간혹 오미자차(五味子茶)를 마시는데, 남들이 간혹 소주(燒酒)인 줄 의심해서이다."
하였다.
4월 25일 기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능(陵)의 직장(直長)을 고쳐 영과(令窠)로 만들고 문관(文官)을 차임하여 적체된 것을 소통(疏通)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윤순(尹淳)과 심악(沈) 등의 일을 언급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이 지나간 일을 다시 제기하여 서로 돕고 억제하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자,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윤급(尹汲)이 아뢴 말은 더욱 위험스러우니, 억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급이 만약 조정의 절반을 모두 몰아붙였다면 내가 당연히 죄를 주었겠지만, 말솜씨가 능숙한 자로 한 사람의 심악을 논한 데 불과하였기 때문에 죄주지 않았을 뿐이다. 이병태(李秉泰)가 일찍이 말하기를, ‘역적(逆賊) 외에는 성씨(姓氏)를 제거할 수 없다.’고 하였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데 심악은 양인(兩人)이라고 호칭(號稱)하려 하지 않고 양신(兩臣)이라고 호칭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잘못이다. 그가 만약 역적으로 본다면 관작을 회복시킬 때에 어찌 홀로 ‘예예’ 하고는 지금에서야 이와 같이 하는가? 이것 또한 국법(國法)이 없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광제(李光躋)가 인피(引避)한 말에 비로소 그 본의(本意)를 약간 드러냈는데, 윤순의 소(疏)는 심각하게 논하였기 때문에 신이 대변(對辯)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심악의 소(疏)에 이르러서는 가장 비상(非常)하였기 때문에 통변(痛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인해서 길게 탄식하고 이르기를,
"무신년191) 의 변고를 빚어내게 한 자가 누구이던가? 《감란록(勘亂錄)》 서문(序文)에 이미 말한 바 있거늘, 하필이면 지나간 일을 다시 제기한단 말인가? 윤순 역시 그르다. 그것은 대체로 오랫동안 비방과 중상(中傷)을 받아왔기 때문에 떠날 것을 결심하였을 때에 마음에 쌓이고 맺혔던 바를 모두 말한 것이겠지만, 노성(老成)한 사람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근일에 조정이 조금 안정되었으니 이러한 시기야말로 정형(政刑)을 가다듬고 민사(民事)에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시급한 업무로 삼아야 하며, 당론(黨論)에 이르러서는 피차(彼此)가 일체 서로 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한데, 뜻밖에 다툼하는 단서가 다시 일어나서 지식(止息)될 기약이 없으니, 단지 목전(目前)의 사비(是非)에 대해서만 처분할 뿐입니다."
하니, 승지(承旨) 김유(金濰)가 나아가 아뢰기를,
"윤순과 심악의 소(疏)는 각기 평일의 소견(所見)을 진달한 데 불과하지만, 윤급이 아뢴 말 가운데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심법(心法)이란 한 귀절은 바로 하나의 급서(急書)이니, 많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찌 어긋나고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수찬(修撰) 조명겸(趙明謙)이 김유의 말을 대단하게 배척하면서 사설(辭設)이 분분하자, 임금이 연석(筵席)의 지척(咫尺)에서 서로 돕고 억제한다 하여 특별히 두 사람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이덕수(李德壽)를 명소(命召)하여 반궁(泮宮)192) 에서 후정시(後庭試)를 베풀어 홍계만(洪啓萬) 등 10인을 뽑았는데, 승지에게 명하여 각기 그 거주지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뒤에 홍계만·김태검(金兌儉)은 시골의 호적[鄕籍]이 없다고 하여 빼어 버리고, 윤광리(尹光理)·이진의(李鎭儀)는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詩)하게 하고, 나머지는 절제(節製)193) 의 예(例)에 의하여 급분(給分)194) 하도록 명하였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전광도(全光道) 담양(潭陽)에 40여 호(戶)가 불에 타고 또 수재(水災)를 입었으므로, 대동미(大同米)를 물려서 받도록 하고 군포(軍布)의 3분의 1을 양감(量減)하도록 명하였다.
4월 26일 경인
장령(掌令) 이태징(李台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심악(沈)의 상소는 극도로 무엄하여, 삭직의 벌은 너무 관대하게 하는 실수가 되니, 어떻게 대의(大義)를 밝히고 남은 분(憤)을 씻겠습니까? 그리고 윤순(尹淳)은 기유년195) 연석(筵席)에서 직접 성상의 유시(諭示)를 받들어 이미 연차(聯箚)를 죄삼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시호를 회복하게 한 데 유감을 품었고, 또 삼변(三變)의 설을 장황하게 논열(論列)하면서 기필코 불충한 죄과(罪科)로 돌리려고 하였으며, 당일에 없었던 성상의 하교를 지어 내어 방자하게 상소한 가운데서 질언(質言)하였으니, 인신(人臣)의 분의(分義)로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중형으로 다스림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지평(持平) 박필재(朴弼載)가 상소하기를,
"사간원(司諫院)에서 새로 심악(沈)을 먼 곳에다 귀양 보내자는 아룀을 발론하였는데, 그 말의 뜻이 위험스럽고 끔찍함이 바로 하나의 변서(變書)196) 였습니다. 심악의 상소는 단지 윤순(尹淳)의 삼변(三變)의 설을 미루어 넓힌 것이니, 대저 삼변(三變)의 흔적을 이미 숨길 수 없다면 변함없는 순일한 절개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국론(國論)의 동일한 바입니다. 그러나 말한 사람은 그 흔적을 근거로 그 마음을 연차(聯箚) 밖에서 고찰한 것뿐이며 연차를 지적하여 발설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사간원에서 아뢴 것은 마치 전적으로 연차를 허물한 것같이 하면서 억지로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심법(心法)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옛날부터 남을 얽어매기에 급급한 자는 번번이 문자(文字)를 발라내어 사람을 해치는 자료와 무기로 삼기는 하지만, 본 일에 대하여 말한 의도 밖에서 죄를 구하여 남을 악역(惡逆)의 죄과로 몰아넣는 것과 같이 하는데 이르러서는 옛날에도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하였다. 당시 박필재와 이태징의 상소가 함께 들어가자, 임금이 그 상소를 모두 돌려주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전석(前席)에서의 하교(下敎)는 간측(懇惻)하다고 이를 만한데, 오늘날 신자(臣子)가 되어 어떻게 감히 서로 돕고 억제하는가? 매우 놀랍게 여길 만하다."
하고, 두 사람의 직임을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박필재(朴弼載)의 상소로 인해 상차(上箚)하여 인혐(引嫌)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특히 이기려고 힘쓰는 것뿐만이 아니고 분의(分義)에 있어 한심스럽다. 이미 처분하였는데, 무엇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수항(李壽沆)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지경연(知經筵)으로, 박준(朴㻐)을 장령(掌令)으로, 유최기(兪最基)를 지평(持平)으로, 이중신(李重新)을 함경 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로, 김후(金垕)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삼았다. 김후는 바로 수의(首醫) 김응삼(金應三)의 아비이다. 무릇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으로 지중추부사가 된 자는 반드시 공로가 있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김후처럼 모람된 것은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4월 27일 신묘
함경 감사(咸鏡監司) 송성명(宋成明)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소학(小學)》 책을 반사(頒賜)하여 먼 지방의 학자(學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용동(聳動)케 하는 것으로써 권과(勸課)하되, 도내(道內)의 문관 수령[文倅]은 모두 교양관(敎養官)을 겸임하도록 해서 그들로 하여금 인도하고 교육하는 행정을 관장하게 하고,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 차임하는 고을에도 역시 옛제도를 거듭 밝히게 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4월 29일 계사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이수항(李壽沆)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심악(沈)의 일은 정지시켰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박준(朴㻐)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인지(李麟至)의 일은 정지시켰다.
처음에 무과 전시(武科殿試)의 규정을 임금이 유엽전(柳葉箭)197) 은 2분(二分), 기추(騎芻)198) 는 2중(二中)으로 써서 내렸는데, 과장(科場)을 열고 날이 지난 뒤에 다시 유엽전 1중, 기추 1중을 뽑도록 명하자, 명관(命官)199) 송인명(宋寅明)이 여러 시관(試官)들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시기(試記)를 애당초 재록(載錄)하지 않아서 지금 뒤좇아 상고하기 어려우니, 이는 과제(科制)를 엄히 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인해서 아뢰기를,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은 이래로 기쁨을 함께 하려는 뜻이야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그 첫째의 의의(意義)는 민은(民隱)200) 을 부지런히 살펴서 덜어 주고 조정을 가지런하게 정돈하는 데 있으며, 그 다음은 조세(租稅)를 견감해 주어 백성으로 하여금 나라에 경사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대저 과거(科擧) 같은 것은 저절로 정식(定式)이 있으니, 널리 뽑는 것으로 일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이재(李縡)를 대사헌(大司憲)으로, 황재(黃梓)를 사간(司諫)으로, 이도겸(李道謙)을 헌납(獻納)으로, 김상신(金相紳)을 지평(持平)으로, 이현망(李顯望)을 정언(正言)으로, 정형익(鄭亨益)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윤유(尹游)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진사(進士) 이집(李楫)이 상소하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찬집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간행하도록 청하자,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가져다가 들여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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