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1권, 영조 12년 1736년 5월

싸라리리 2025. 9. 18.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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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갑오

별시재(別試才)를 명하고 계사년201)  의 예(例)에 의하여 날짜를 가려 거행하게 하였으니, 나라에 경사가 있다고 하여 무사(武士)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소대를 행하였다.

 

5월 2일 을미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어 연해읍(沿海邑)의 패선(敗船)으로 인한 증렬미(拯劣米)202)  를 연수(年數)를 한정하여 탕감(蕩減)해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부수찬(副修撰) 이주진(李周鎭)이 아뢰기를,
"장령(掌令) 박준(朴㻐)이 홀연히 나가고 이어 들어오지 않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준은 늙고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데다 또 귀가 먹었었다. 이인지(李麟至)에 대한 논계를 정지하고서부터 시인(時人)들이 자신을 논의할까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좌의정[左相]이 다른 일을 아룀에 이르러 자기를 배척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마침내 대궐문을 달려나가 도포와 사모를 벗어버리고, 매우 급하게 말을 찾아 다려서 그의 집으로 돌아갔으므로 하리(下吏)들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파대(罷對)한 뒤에야 비로소 그 연유를 알고 온 세상이 서로 전해 가며 웃었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5월 3일 병신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날씨가 덥다고 하여 주강의 시각을 진정(辰正)203)  으로 당겨서 정하는 것을 규례로 삼도록 명하였다.

 

5월 4일 정유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당시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엄한 하교가 있었음을 듣고 도성에 들어와 의금부[金吾]의 문 밖에서 사모를 벗고 거적을 깐 채 종일토록 엎드려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들어와 면유(面諭)를 듣도록 재촉함이 4, 5차례에 이르렀으니, 끝내 명을 받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하교하여 크게 책망하고 특별히 그의 직임을 파면하도록 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나문(拿問)하게 하였는데, 며칠 전 좌의정과 우의정이 나문하도록 청한 것을 따른 것이었다. 그 이튿날 판의금(判義禁) 김취로(金取魯)가 아뢰기를,
"총재(冢宰)204)  는 대신(大臣)의 다음입니다. 가의(賈誼)205)  는 ‘〈총재를〉 묶거나 잡아 가두는 것은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신(重臣)의 사직(辭職)이 나처(拿處)하는 데 이른 것은 아마도 타당함을 얻은 것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는데, 5일 뒤에야 비로소 석방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5월 5일 무술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도승지(都承旨) 홍경보(洪景輔)가 상소하여 시호(諡號)를 회복하게 한 일을 논하기를,
"근일에 조정에서 시호를 회복시키게 한 일로써 하나의 큰 다툼질의 단서가 되었습니다만, 신이 우려하는 바는 여기에 있지 않고 성상의 의지가 성실하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양신(兩臣)을 충신으로 여겼다면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킬 때를 당하여 바로 시호를 회복시키는 것이 가하였고, 만일 충신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관작을 이미 회복시켰다고 하여 회복시키기에 부당한 시호를 아울러 회복시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충성과 불충은 저절로 정해진 바탕이 있으며 8년 동안 일찍이 보태진 것도 줄어진 것도 없는데, 당초에는 어찌하여 단지 그 관작만을 회복시켰다가 또 어찌하여 그 시호를 아울러 회복시키십니까? 기유년206)  에 처분을 내리던 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관작과 시호를 회복시키고 회복시키지 않는 분수(分數)를 헤아리신 것이 만약 단지 피차(彼此)를 진정시키기 위한 방도에서 나왔고 애당초 일정한 방안이 아니었다면, 이는 당일의 여러 신하들을 속인 것이니 성실하지 못하심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오늘날 시호를 회복시키는 때에 이르러 또 이미 관작을 회복하도록 허락하였고 또한 외람된 시호도 많은데 하필이면 절목(節目)간의 일을 가지고 지난(持難)할 것이 있겠느냐고 여기신다면, 이는 한편의 마음에 부응하려고 힘쓰는 데 불과하며 회복되는 자에게도 다행스러움이 될 수 없으니 역시 성실하지 못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온 세상의 주고 뺏는 권병(權炳)을 잡으셨고 백대(百代)의 시비(是非)의 책임을 맡으셨으니, 충신이면 충신이라고 하고 충신이 아니면 충신이 아니라고 하며, 회복시킬 만하면 회복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이 불가하면 회복시키지 않아서 오직 의리를 깊이 추구하고 처분을 분명히 결정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전후(前後)로 흔들려 빼앗기고 좌우(左右)에 끌려서 한갓 구차하게 미봉(彌縫)하는 데로 돌아가게 한 것만 보일 뿐, 깨끗하고 광명한 아름다움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전하께서 이와 같으시니, 대신이 전일의 의논을 기억하지 못하고 두 가지로 내렸다고 말하는 것 또한 무엇이 괴이하겠습니까? 신이 기유년에 한 차례 상소하여 전후의 처분이 성실하지 못했음을 낱낱이 논하였었는데, 전하께서 군부(君父)를 믿지 않는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뒤로 8년이나 오래 되도록 유지하기를 금석(金石)같이 하셨으므로, 신은 진실로 성상의 의지가 견고하게 정해졌음을 우러르면서 어리석은 신이 지나치게 염려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다시 이렇게 분운(紛紜)한 일이 있을 줄 헤아렸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전후의 처분이 그 뜻은 모두 같은 데 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힘쓰는 것이 옳으니, 더욱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6일 기해

송진명(宋眞明)을 이조 판서로, 이유(李瑜)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의 민가(民家)에 불이 나서 여섯 사람이 타 죽었으며, 박천군(博川郡)에 또 불이 나서 한 마을을 잇달아 태웠는데, 불이 타서 무너지거나 짓눌린 것이 1백 33가(家)였으며, 두 사람이 타 죽고 소·말·닭·개가 모두 타 죽었으므로, 본도(本道)로 하여금 고휼(顧恤)하여 주도록 하였다.

 

5월 7일 경자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명겸(趙明謙)이 아뢰기를,
"유엄(柳儼)이 비록 학문을 가지고 자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행검(行檢)207)  이 남보다 뛰어나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는데도, 이석신(李碩臣)이 지난번 무신년208)   난리에 그의 어미와 처를 버렸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니, 유엄이 벼슬하고 싶어하지 않음은 당연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엄은 정도를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유엄의 홍양(洪陽)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모두 전해져 왔는데도 조명겸이 차마 군부(君父)를 대하여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이익이 있는 곳에는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04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윤리-강상(綱常)


[註 207] 행검(行檢) : 점잖고 바른 품행.[註 20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사신은 말한다. "유엄의 홍양(洪陽)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모두 전해져 왔는데도 조명겸이 차마 군부(君父)를 대하여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이익이 있는 곳에는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정언(正言) 홍중일(洪重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즈음 시호(諡號)를 회복시키는 일로 조상(朝象)이 복작거리고 시끄러워서 머무를 기약이 없습니다. 아! 이 일에 대한 시비(是非)는 전하께서 분석하고 재량하여서 정안(定案)을 만드신 바이니, 많은 심력(心力)을 허비하면서 완급[弦韋]을 분명히 보이셨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8년 동안 조정 위에서는 다툼질하는 단서가 점점 종식되었고 진신(搢紳) 사이에서는 남을 해하려는 마음이 점점 평정이 되었으니, 그 효과를 길렀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하루아침에 흔들리고 빼앗겨서 쉽사리 변경되었으니, 전하께서는 매양 기관(機關) 만드는 것을 책망하셨고, 상신(相臣)은 또 우리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으로 죄를 삼아 왔는데,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오늘날의 기관을 연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갑자기 사단(事端)을 발설하여 금석(金石)과 같았던 우리 성상의 마음을 흔든 자가 열었겠습니까, 일에 따라 응변(應變)하면서 평소 잡고 있던 언의(言議)를 대략 진달한 자가 열었겠습니까? 양신(兩臣)이 세 번 변경하였다는 말은 오늘날 새로 만든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 이 세 번 변경하였다는 말에 대처하신 바는 일찍이 우의정[右相]과 중신(重臣)·재신(宰臣)의 말을 가납(嘉納)하신 것입니다. 또 기유년209)  에 처분을 내리실 때에도 단지 관작만 회복하도록 허락하고 그 시호는 회복시키지 않은 데서 성상의 마음에 분명히 한계를 세웠음을 볼 수 있었는데, 오늘날 다투는 것 역시 별다른 일이 아니고 삼가 듣건대, 연교(筵敎)에서 윤순(尹淳)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 것인 듯하니, 어찌 유독 심악(沈)이 부연해 말하여 취지는 동일하고 말만 상세히 한 것에 대하여만 견벌(譴罰)을 갑자기 더하면서 맨 먼저 일을 시끄럽게 야기시킨 상신(相臣)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가 혹시라도 다칠까 두려워하고 달가운 마음으로 화(禍)를 좋아하는 대신(臺臣)에게는 일찍이 가벼운 벌도 있지 않았습니까? 처분의 전도(顚倒)됨이 거의 소각(銷刻)210)  보다 심하고 돕고 억제함이 치우치게 얽매임은 연슬(淵膝)211)  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 이와 같이 하고도 국가의 정책이 정해지고 인심(人心)이 복종하였다는 것은 신의 들은 바가 아닙니다. 상신이 또 심악의 상소 가운데 양인(兩人)이란 한 귀절의 말을 가지고 겉으로는 따르고 속으로는 어긴다는 죄안[案]으로 삼았는데, 전하께서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심악의 죄로 삼으셨습니다. 상신이 전날의 차자(箚子)에서 이름이 단서(丹書)212)  에 기재되어 있는 사람을 뒤섞어 열거하면서 제대신(諸大臣)이라고 말하였는데도, 유독 심악에게만 양인이라 일컬었다는 것으로 죄를 성토(聲討)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하교한 뒤에는 이와 같이 이기기를 힘쓰는 것이 아니다. 심악이 관작을 회복시킨 대신(大臣)을 단지 양인(兩人)이라고만 호칭하였으니, 대신이 진달하는 것을 어떻게 그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심악을 돕고 대신을 비난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이튿날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상차(上箚)하여 대변(對辯)하기를,
"진실로 성명(聖明)께서 진정 시호를 회복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신다면, 역시 시호를 회복시킴이 당연한 것임을 분명히 말하여 온 세상으로 하여금 모두 성상의 뜻이 본래 정해졌음을 모두 알게 해서 다투는 자가 거의 마음을 놓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아 아직도 두 가지가 모두 옳다는 설(說)로 호도(糊塗)하고 미봉하여 의리(義理)가 돌아가 붙일 데가 없게 하고, 겹겹으로 생겨나는 의논들을 돌보며 저지할 데가 없도록 만들어서, 시끄러움이 그치기를 구한 것이 시끄러움을 불러들이기에 알맞게 하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성과는 없을 듯합니다. 신이 이 때문에 남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도 대체로 몇 차례였었습니다. 오늘날 대간(臺諫)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절(操切)함이 오로지 신에게 그 표적을 두면서, 신에게는 맨 먼저 일을 시끄럽게 야기시켰다고 책망하고 성상(聖上)께는 오히려 혹시라도 다칠까 두려워하셨다고 기롱하면서 은연중 죄를 청하는 뜻을 두었고, 또 신의 차자 가운데 ‘제대신(諸大臣)’이란 세 글자를 따다가 신의 죄로 삼으려 하니, 더욱 한 번의 웃음거리가 되기에도 부족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대신(大臣)과 이기기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군부(君父)와 이기기를 다투는 것이다. 지난번의 하교에서 환하게 유시하였다고 이를 만하니, 오늘날의 신하가 되어 당연히 늠연(澟然)해야 하거늘,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아무리 이기려고 힘쓴다 하더라도 그 임금이 있는데 어떻게 감히 제 뜻이 통쾌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5월 8일 신축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목(綱目)》을 강(講)하다가 우(牛)·이(李)가 분당(分黨)한 일213)  에 이르러 임금이 〈오늘의〉 조상(朝象)을 개탄(慨歎)하는 하교가 많았다. 시독관(侍讀官) 오언주(吳彦胄)가 아뢰기를,
"만약 우(牛)·이(李)의 무리가 있다면 둘 다 내쫓는 것이 마땅합니다. 근래에 이광제(李光躋)·이광운(李光運)·박필재(朴弼載)·이태징(李台徵)에게 서로 처분을 가한 것은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5월 9일 임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근일에 피차(彼此)가 분운(紛紜)하여 조상(朝象)이 아름답지 못하니 진정시키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조정의 신하들이 다시 지나간 일을 제기하는 것을 엄히 책망하고 심지어 말하기를,
"군부(君父)를 충신도 아니고 역적도 아닌 사이에다 두려고 하였기 때문에 무신년214)  의 역변(逆變)이 있게 되었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제기하기를 즐겨하는 것은 대체 무슨 마음에서인가? 외인(外人)이 만약 근일의 일을 보고 내가 나를 돕기 때문에 저들을 충신이라고 여긴다고들 말한다면, 장차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였다.

 

5월 10일 계묘

구택규(具宅奎)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5월 11일 갑진

홍중일(洪重一)이 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만약 대신(大臣)의 말과 같이 관례를 따라 응당 행해야 할 일을 하였다면, 관작이 회복된 8년 동안 대신이 어찌 한마디도 여기에 언급함이 없다가 갑자기 오늘날에 사단(事端)을 발설하였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곧바로 실제를 묘사하여 그 시끄러움을 야기시킨 것을 깊이 개탄한 까닭이니 대신은 스스로 반성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처음부터 끝까지 조절(操切)하면서 이기기를 다투고서야 그만두려 한다는 등의 말로써 언자(言者)를 위협하였으니, 의리로 이기려는 의논에 어찌 힘을 허비해 가며 다투고 화제(話題)에 알맞은 말에 어디에 조절(操切)함이 있었기에 사기(辭氣)를 지나치게 허비하여 여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은 그윽이 대신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하유(下諭)하기를,
"오늘날 신하된 자가 간측(墾惻)한 하교(下敎)를 듣고서도 이와 같이 단단하게 하니, 이는 무슨 분의(分義)인가?"
하고, 홍중일의 관직을 체임하고 그 소(疏)를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수항(李壽沆)이 상소하기를,
"이번의 시호(諡號) 회복에 대하여 언자(言者)의 말이 있음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관작을 회복시킬 때에 이미 그 시호를 아울러 회복시키지 아니하여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로 하여금 관작과 시호의 한계(限界)가 정해져 있음을 알게 하였는데, 지난번 연석(筵席)에서의 윤종(允從)이 이미 창졸간에 나왔고, 성상의 비답에 모람된 시호가 있음을 끌어서 하유한 것도 미봉에 관계된 것입니다. 오직 저 홍중일(洪重一)이 이미 간관(諫官)의 직위에 있으면서 그 소견을 부연해 진달한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상신(相臣)의 대장(對章)이 나오고서 성상의 비답이 엄절(嚴截)하였으니, 홍중일이 또 상소하여 자신의 견해를 편 것은 사세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신의 말은 한 사람의 간신(諫臣)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호의 회복이 있은 이래로 조정에는 다시 미봉할 기약이 없고, 시상(時象)이 다시 겹겹으로 격동할 염려가 있어서, 성상께서 10여 년간 지성(至誠)으로 성취해 놓은 것이 홀연히 여기에서 무너지려 합니다. 더구나 당동 벌이(黨同伐異)하기에 급급한 자는 심지어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심법(心法)이란 등의 말로 위협하는 자료를 삼으려고 하니, 이것 또한 성상께서 당연히 마음을 쓰셔야 할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밤중에 하교(下敎)한 뒤에도 여러 신하들이 감히 이와 같이 하니, 어찌 다만 단단한 처분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역시 이것은 말감(末勘)215)  한 것이다."
하였다.

 

5월 12일 을사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5월 13일 병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홍중일(洪重一)의 두 번째 상소와 이수항(李壽沆)의 상소로 인하여 또 상차(上箚)하기를,
"성상(聖上)의 기유년216)   처분은 용서하는 방편(方便)에서 나와, 처음에는 정성껏 하다가 중도에 그만둔 격이 되어 얼룩지고 구차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껏 한 떼의 사람들이 고집하여 말하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전날의 실착(失着)을 깊이 추구하고 오늘날 거조의 당연함을 분명히 말하여 분운(紛紜)하는 자로 하여금 진정하는 데 이르도록 해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지나치게 스스로 변명하면서 그 마음을 꺾으려고 한갓 차마 듣지 못할 준엄한 하교만 내려 억지로 그 입을 막으려고 하시니, 이것은 간장(諫長)217)  이 우려하고 신 또한 우려하는 바이나 다만 좇아서 우려하는 바가 각기 다를 뿐입니다. 기유년 이후로 신과 여러 신하들이 ‘이미 관작을 회복시키고도 시호(諡號)를 회복시키지 않음은 의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라고 우러러 진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간관(諫官)의 상소에서 이른바 ‘어찌 한마디도 없었겠습니까?’라고 한 것은 그 또한 어긋나는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조석명(趙錫命)을 승지(承旨)로, 김종태(金宗台)를 정언(正言)으로, 김취로(金取魯)를 좌빈객(左賓客)으로, 송진명(宋眞明)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오원(吳瑗)을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시경(詩經)》 〈주송편(周頌篇)의〉 신공장(臣工章)을 강(講)하다가 임금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농사를 권과(權課)하는 정책을 거듭 신칙(申飭)하도록 하유(下諭)하고, 제도(諸道)의 수령(守令)에게 명하여 비록 풍년을 만나더라도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하도록 하였다. 지경연(知經筵) 김취로(金取魯)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수령(守令)에 적합한 사람을 얻었기 때문에 비록 을해년218)  과 병자년219)  의 흉년에서도 간혹 연름(捐凛)220)  하여 백성을 구제해 살리고 번거롭게 조정에 청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요즈음은 흉년이 들면 번번이 진구(賑救)할 자료를 조정에다 책임을 지우니, 백성을 다스리도록 맡긴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의 방백(方伯)221)  은 옛날의 제후(諸侯)인데, 제후로서 백성 다스리는 임무를 맡은 자가 어찌 천자(天子)에게 번거롭게 할 수 있는가?"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보혁(李普赫)이 아뢰기를,
"해서(海西) 한 도는 백성들에게 중첩된 구실이 많습니다. 곡산(谷山)의 포보(砲保)222)  는 면포(綿布)를 징수하지 아니하고 명주 1필(疋)을 징수하는데, 이에 소비되는 돈이 9백을 밑돌지 않으므로 도망하는 자가 서로 잇닫게 되어 그 징수가 인족(隣族)에게 미치게 됩니다. 신이 재임하였을 적에 도신(道臣)에게 논보(論報)하고 장계(狀啓)를 올려 청하는 데 이르렀습니다만, 훈국(訓局)223)  에서 기치(旗幟)를 만드는 데 대비한다고 핑계대고 이를 막으면서 허락하지 않았었습니다. 기치는 채단(綵緞)을 사용하는 것이 많고 명주를 사용하는 것은 적으니, 즉시 변통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시종신(侍從臣)이 외직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민폐(民弊)를 앙달(仰達)하지만 기타 수령은 이미 주달할 길이 없으니, 소민(小民)의 질고를 어떻게 모두 알겠는가? 조금 전에 인평(仁平)224)  이 만약 훈신(勳臣)이 아니었다면 어찌 행이 되는데 윤대(輪對) 같은 데 이르러 음관(蔭官)의 말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시행이 안 될 뿐만 아니라 혹은 추고(推考)하도록 청하기도 한다. 또 먼 지역의 아주 조잔(彫殘)한 현(縣)에는 모두 시골 출신의 사람을 차임하고 조금 부유한 근읍(近邑)에는 반드시 서울 출신의 문관(文官)과 음관(蔭官)을 가려 차임하며, 비국(備局)에서는 또 그 사람의 문벌을 따라 그의 청을 따라 주기도 하고 어기기도 하는데, 이와 같이 할 즈음에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게 되니, 애처로운 나의 먼 지방의 백성들이 또한 유독 무슨 죄란 말인가? 지금부터 수령의 차임은 다시는 이와 같이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북악(北嶽)은 바로 도성(都城)의 주맥(主脈)인데 무뢰한 무리들이 몰래 산의 돌을 채취해다가 쌓아 두고 방매(放賣)하고 있으니, 해부(該部)의 관원 및 감역(監役)을 청컨대 나문(拿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시경(詩經)》 주송편(周頌篇)의〉 재현장(載見章)을 강하다가 제향(祭享)의 희생(犧牲)을 신칙(申飭)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청묘(淸廟)225)  의 제사에서 많은 복을 받은 아름다움이 있었는데, 선조(先祖)를 섬기는 예절에 어찌 보답을 받는 것으로 마음을 삼을 수 있겠는가마는, 진실로 정성을 다하지 못하면 그 흠격(歆格)226)  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내가 이미 스스로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여러 신하들을 책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매번 정성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 마음이 늘 늠연(澟然)하였다. 이 때문에 헌관(獻官)에게 신칙하노니, 교단(郊壇)의 제사[祀事]에서 만일 나이가 많은 이를 뽑아서 보낼 경우에는 헌관과 사헌부 관원[耳目之官]이 즉시 잘못을 적발해 내도록 하라. 영희전(永禧殿)은 비록 태묘(太廟)227)  와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수용(晬容)228)  을 봉안(奉安)하고 있어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한지라 정2품을 가려서 차임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시경》의 장(章)을 강하다가 느낀 바가 있으니, ‘섶에 많은 고기가 있다. [潛有多魚]’는 것으로 관찰한다면 오늘날의 민생(民生)은 물이 맑아 큰 고기가 없는 것과 같고, ‘내(來)함이 화목하다.[有來雝雝]’는 것으로 관찰한다면 ‘조신(朝臣)’이란 두 글자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하고, 인해서 근일 조신들의 분운(紛紜)함을 엄하게 책망하기를,
"나의 연교(筵敎)를 들은 뒤에는 피차(彼此)가 의당 감히 지나간 일을 가지고 이기기를 힘써서는 안된다. 삼척(三尺)229)  이 있으니, 마땅히 그 돕고 억제하는 자에 따라 시행할 뿐이다."
하였다.

 

5월 14일 정미

헌납(獻納) 서명형(徐命珩)이 상소하여 박준(朴㻐)이 이인지(李麟至)에 대한 계달을 정지하였다 하여 박준은 삭직(削職)하고 이인지는 극히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도록 청하고, 또 아뢰기를,
"심악(沈)의 무리가 시호(諡號)를 회복시키는 일로 서로 잇달아 상소하면서 마치 신절(臣節)을 세우는 것처럼 보이고 반드시 공의(公議)와 혈전(血戰)하고 군부(君父)와 이기기를 다툰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였고, 박필재(朴弼載)의 상소는 심악을 위하여 변명하면서 주석[註脚]을 달아 부연해 내었으며, 홍중일(洪重一)은 위로는 천청(天廳)을 공동(恐動)하고 아래로는 대의(臺議)를 억제시켰으니, 신은 생각하건대, 앞질러서 정계(停啓)한 이수항(李壽沆)과 성지(聖旨)를 이기려고 다툰 홍중일을 아울러 배척하여 쫓아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인지는 이미 헤아려서 처분하였다. 끝부분의 일은 피차(彼此)가 이와 같이 이기기를 힘쓰니, 사체(事體)가 한심스럽다. 다른 사람이 이기기를 다툰다고 배척하면서 스스로 그것이 같은 투식(套式)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 더구나 군신(君臣) 사이에 이기기를 다툰다는 등의 말은 아래에 있는 자가 경솔하게 먼저 붓을 댈 바가 아니다."
하였다. 서명형이 인피(引避)하자, 옥당(玉堂)의 심성진(沈星鎭)이 처치(處置)하여 체임시켰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무신년230)   이전에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거의 여지(餘地)가 없었었는데, 과연 역변(逆變)이 생겼습니다. 근일에도 점차로 우려할 만한 단서가 있으니, 모든 관원이 공무를 게을리하고 조상(朝象)도 어그러지고 분열되어 요사스럽고 간악한 사람이 가끔 다시 그 조짐이 나타나고 있으며, 어제 기백(畿伯)231)  이 한 건의 익명서를 얻었으므로 신이 즉시 태워 버리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기유년232)   처분을 내릴 때에 연차(聯箚)를 이미 구별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이 분분(紛紛)하겠는가? 대저 조정은 국가의 원기(元氣)인데, 원기가 이와 같으니 변괴의 출현은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하자, 송인명이 또 모든 일은 이치에 따라 순리대로 처리해야 하며 사물은 각기 그 사물에 따라 하도록 하되 사기(辭氣)를 지나치게 허비하는 데 이르지 말도록 힘써야 한다고 하고, 또 아뢰기를,
"시호를 회복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은 마침 소홀히 여겼었는데, 이와 같이 크게 관계되는 곳에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성상(聖上)께서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추탈(追奪)한 두 사람 가운데서도 당연히 완급[弦韋]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도 그렇게 여기고 또 이르기를,
"무신년의 일을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여기겠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프며, 매번 지나간 일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하였다. 판윤(判尹) 이정제(李廷濟)가 아뢰기를,
"경성(京城)의 네 산에 송충이가 매우 치성하니, 마땅히 군사를 징발하여 잡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조정의 원기가 화목함을 거스르고 있으니, 송충이의 재해가 나타나는 것 또한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 나도 의당 스스로 수성(修省)하는 도리에 힘쓸 터이니, 경(卿)들도 힘껏 원기를 도와서 그 화기(和氣)가 산천 초목(山川草木)에 미치도록 한다면, 이는 바로 근본이 되는 정치인 것이다. 당론(黨論)이 국맥(國脈)을 좀먹는 것이 송충이보다 심하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사대부(士大夫)로써 나라를 세웠는데, 말류(末流)의 폐단이 각기 붕당(朋黨)을 이루어 실로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는 엄수(閹竪)233)  와 번진(藩鎭)234)   때문에 망하였지만, 우리 나라는 반드시 사대부 때문에 망할 것이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더욱 대공 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 조정의 신하를 진정시키고 복종하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 또한 어렵다. 군부(君父)가 조금만 억제를 가하면 문득 망측(罔測)한 죄과로 몰아넣기 일쑤이다. 심악(沈)의 상소한 말은 중도(中道)를 지나침이 내가 기대했던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처분을 하였는데, 간관(諫官)의 계달 가운데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심법(心法)이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괴이하게 여길 만하다. 그리고 미원장(薇垣長)235)  의 정계(停啓)는 질실로 옳았었는데, 서명형(徐命珩)은 이에 군부(君父)에게 이기기를 다툰다고 말하였다. 이기기를 다툰다는 등의 말을 어떻게 군부에게 사용할 수 있겠는가? 더욱 잘못되었다."
하였다.

 

5월 16일 기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당시 문과(文科)의 일방(一榜)이 예문관(藝文館)의 간택(揀擇)하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대신(大臣)이 아뢰니, 임금이 신진(新進)이 거만하다는 것으로 책망하였는데, 검열(檢閱) 이성중(李成中)이 옛날의 규정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자신을 탄핵하는 소(疏)를 올렸다.

 

정언섭(鄭彦燮)을 승지(承旨)로, 오명신(吳命新)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심성진(沈星鎭)을 헌납(獻納)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지평(持平)으로, 이중경(李重庚)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5월 17일 경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시재(試才)하였다. 이때 문과(文科)·무과(武科)에 새로 합격하여 유가(遊街)하는 자들이 길에서 지영(祗迎)236)  하니, 반열을 이루어 앞에서 인도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대신(大臣) 송인명(宋寅明), 부수찬(副修撰) 이주진(李周鎭)이 상차(上箚)하여 바르게 경계하였으며, 대신 서명균(徐命均)·김재로(金在魯)도 그것이 장난에 가깝다고 말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경과(慶科)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튿날 무신년237)  의 예(例)에 의거하여 2시(矢) 이상을 뽑아 급제를 내리도록 명하고, 시재(試才)가 끝나자 경덕궁(慶德宮)으로 돌아왔다.

 

5월 19일 임자

이덕수(李德壽)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좌참찬(左參贊)으로, 남태량(南泰良)을 교리(校理)로, 유최기(兪最基)를 부수찬(副修撰)으로, 남태온(南泰溫)을 헌납(獻納)으로, 이정보(李鼎輔)를 정언(正言)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5월 21일 갑인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이 청대(請對)하자,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경기 감영[畿營]에서 얻은 익명서(匿名書)는 바로 봉산(鳳山)의 광인(狂人) 강문태(姜文泰)가 한 짓으로, 말이 미치광이의 헛소리 같아 놀라울 것이 못됩니다. 강문태가 이 글을 파발(擺撥)에 부쳐 장차 고양(高陽)으로 전하려 하였었는데, 경기 감영에서 벌써 강문태를 잡았으며 그가 즉시 자복(自服)하였으니, 도로 황해도 관찰사[海西道臣]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엄히 형신(刑訊)하여 중형(重刑)으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인해서 말하기를,
"이재(李縡)·김진상(金鎭商)은 염퇴(恬退)의 지조가 있으니, 마땅히 권장하여 발탁하는 은전을 가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부지런하고 삼가는 자를 발탁하여 쓰는 것은 바로 실질적인 일이나, 염퇴하는 이를 권장하여 나오게 하는 것은 마침내 형식[文具]에 가깝다. 이재는 몸은 비록 물러났다고 하지만 시의(時議)를 주장하니, 매우 불가하다."
하였다. 김재로가 극력 변명하였으나, 풀리게 할 수는 없었다. 김재로가 또 아뢰기를,
"홍봉조(洪鳳祚)·서명형(徐命珩)·홍용조(洪龍祚)·한덕전(韓德全)·이양신(李亮臣)은 모두 쓸 만한 사람인데도 성상께서 매번 낙점(落點)을 아끼시니, 매우 애석하게 여길 만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재로가 또 아뢰기를,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성제(李誠躋)가 임지(任地)에서 저녁을 먹고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처(妻)가 은(銀) 숟가락으로 입에다 시험하였더니 빛깔이 변했다고 언서(諺書)로 겸관(兼官)238)  에게 〈소장을〉 올렸으므로, 바야흐로 음식 맛을 감독한 아전을 가두었습니다. 명리(命吏)를 독살한 것은 비상한 데 관계되니, 청컨대 어사(御史)를 보내어 안핵(按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조영국(趙榮國)을 안핵 어사(按覈御史)로 삼았는데, 뒤에 과연 아노(衙奴)239)  ·관비(官婢)및 읍교(邑校)240) 배준구(裵俊九)가 독약을 넣은 상황을 알아내어 모두 법으로 조치하였다. 제주(濟州)의 백성 김하정(金夏鼎)이 개인 말 2백 필(匹)을 바치기를 원한다고 목사(牧使) 김정(金)이 계문(啓聞)하였는데, 김재로가 받도록 청하기를,
"이번에 만약 물리친다면, 아마도 먼 지방 사람의 정성을 저버릴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금군(禁軍)·훈영군(訓營軍)·어영군(御營軍)에게 나누어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5월 22일 을묘

저녁에 천둥이 크게 치고 큰 비가 내렸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23일 병진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서종옥(徐宗玉)이 한유(韓愈)241)  의 염철론(鹽鐵論)을 강하던 것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임진년242)   이후로 공사(公私)가 적빈(赤貧)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염철(鹽鐵)에 대한 이익을 많이 말하였습니다만, 선조[宣廟]께서 끝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번 신해년243)  과 임자년244)  의 흉년 때부터 염철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어나 영남(嶺南)·호남(湖南)·해서(海西)에서 모두 소금을 구웠었는데, 그때 신(臣)은 지위가 낮아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검토관(檢討官) 조명겸(趙明謙)이 아뢰기를,
"당(唐)나라의 염철은 의도가 국가를 이롭게 하는 데 있었으며, 우리 나라에서의 염철은 의도가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정언섭(鄭彦燮)도 아뢰기를,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느냐 여부는 오직 일을 주간하는 자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신이 그윽이 우려하는 것은 다른 날에 있으니, 이익이 국가에 돌아가게 되면 피해가 반드시 백성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의도가 〈국가에서〉 전매하는 데 있으면 잘못이고 의도가 백성에게 있으면 옳은데, 이것은 적당한 사람을 얻는데 달려 있다. 여태까지는 내가 영성(靈城)245)  을 믿고서 맡겼었다. 그러나 후세의 인군(人君)이 만약 영성과 같은 이를 얻지 못한다면 반드시 피해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서종옥이 강하다가 여러 도에서 상공(常貢) 외에는 진봉(進奉)할 수 없도록 한다는 말에 이르러 아뢰기를,
"탐라(耽羅)의 백성이 사사로이 마필(馬匹)을 바치는 것을 대신(大臣)이 받도록 청하였는데, 지금은 군사를 일으키는 때가 아니니 마침내 너무 명분이 없습니다. 인군의 한 거조(擧措)는 후세의 법이 되니, 간사한 백성의 사사로이 바치는 길이 열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뒤에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름은 비록 개인 말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것은 왕토(王土)에서 풀을 뜯어먹고 물을 마시며 저절로 태어나고 저절로 자랐으니 조정에서 곧바로 취하더라도 가한데, 바치는 것으로 인해서 받는 것이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바치는 것이 비록 가상하기는 하나 받을 명분이 없으니, 효유(曉諭)하여 보내고 받지 말게 하라."
하였다.

 

5월 24일 정사

소대를 행하였다.

 

5월 25일 무오

정언(正言) 이정보(李鼎輔)가 상소하여 전 대사간(大司諫) 이수항(李壽沆)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도록 청하고 또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구택규(具宅奎)는 본래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혈당(血黨)으로서 자기네들 가운데서도 막힘을 당했다가, 여러번 큰 고을을 맡기기는 하였지만 전혀 다스린 공적이 없으니, 개정(改正)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하교(下敎)한 뒤에도 이와 같이 이기기를 힘쓰니, 이것이 무슨 분의(分義)인가? 구택규가 고을을 다스린 공적은 이미 알고 있다. 지난날 서로 과격했던 자가 갑자기 이런 명목을 더한다면, 거기에 들어가지 않을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렇게 풍년이 들었을 때 공명첩(空名帖)으로 곡식을 바꾸어서 흉년에 대비하는 자료로 삼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래부(東萊府)는 변문(邊門)의 중진(重鎭)이니, 오래 비워 두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구택규가 이미 대간(臺諫)의 논박을 당하였으니, 체임을 허락하는 것이 가하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대간의 언론에서 구택규를 배척하면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혈당(血黨)이라고 한 것은 극히 원통합니다. 구택규가 젊었을 때의 언의(言議)는 진실로 하자[疵累]가 많았으므로 신 또한 취하지 않았었는데, 이재(吏才)246)  가 남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버리지 않는다[不棄尺朽]는 뜻으로 감히 천망(薦望)하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나간 때의 일은 나도 일찍이 그르게 여겼는데, 서장관(書狀官) 때에 보니 과연 체격이 크고 훌륭하였으며, 고을에 부임해서도 모두들 잘 다스렸다고 하였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구택규가 그전에는 자못 흉론(凶論)에 편을 들어 심지어 안옥(按獄)한 대신을 완옥(緩獄)한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최석항(崔錫恒)을 논박(論駁)한 것이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그가 언의(言議)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청환(淸宦)에의 의망(擬望)은 신도 막았습니다. 그러나 김일경·박필몽의 혈당이라고 이르는 것은 특히 애매(曖昧)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나 관방(關防)은 중대하니, 지금 우선 체임을 허락한다."
하였다.

 

임금이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청절(淸節)을 선양(宣揚)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유정(柳綎)을 승지(承旨)로, 정형익(鄭亨益)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부교리(副校理)로, 민형수(閔亨洙)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조호신(趙虎臣)을 북병사(北兵使)로 삼고, 중비(中批)247)  로 구택규(具宅奎)를 판결사(判決事)에 제수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문의(文義)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수성(守成)248)  하는 임금이 만약 그 선왕(先王)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걸(桀)·주(紂)와 유(幽)·려(厲)249)  가 있을 수 있겠으며, 세록(世祿)250)  의 신하가 만약 할아비와 그 아비를 생각하면서 당(黨)을 위해 죽으면서 나라를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조정의 신하를 조화[調劑]시킨 연후에야 돌아가서 배알(拜謁)할 낯이 있다고 여기는데, 조정 신하의 일문(一門)으로 창[戈戟]을 들이댄 자가 그 선묘(先廟)251)  에 들어가서는 어떠한 낯을 짓겠는가?"
하였다.

 

5월 26일 기미

오명서(吳命瑞)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고, 전경 문신(專經文臣) 한시태(韓時泰)에게 입시(入侍)하여 시강(試講)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이정보(李鼎輔)가 상소한 말을 가지고 상소하여 인혐(引嫌)하고 또 아뢰기를,
"구택규(具宅奎)를 승진시켜 발탁한 것은 거의 이기기를 힘쓰는 데 가까우며, 언관(言官)을 대우하는 바가 아니니, 후세에 법을 삼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구택규의 일은 조정에서 오직 그 재능을 쓴 것이니, 어찌 시상(時象)에 구애 되겠는가?"
하였다.

 

5월 27일 경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고, 전경 문신(專經文臣) 안정인(安正仁)에게 입시(入侍)하여 시강(試講)하도록 명하였다.

 

공홍도(公洪道) 유학(幼學) 임주후(林柱垕) 등이 상소하여 두 선정(先正)이 이인지(李麟至)에게 무함을 당한 상황을 분변하고, 인해서 문묘(文廟)에 배향[腏食]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판윤(判尹)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하여 〈도성(都城)〉 사산(四山)의 송충이를 잡도록 청하고, 또 아뢰기를,
"도성(都城) 백성들의 방역(坊役)252)  이 치우치게 고달프니, 청컨대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의 집에서 한 사람의 장정(壯丁)을 내게 하여 그 역(役)을 균일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송충이를 잡는 것은 한갓 폐단만 끼치게 되니 곤궁한 백성을 침해하지 말고, 그 역을 균일하게 하는 일은 청한 바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8일 신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고, 수의(繡衣)253)  로 초계(抄啓)된 사람 정이검(鄭履儉)을 불러 대면(對面)하여 봉서(封書)를 주고 암행(暗行)하면서 염문(廉問)254)  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조정은 사방의 표준(表準)이니, 조정이 바른 연후에야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조정이 화합한 연후에야 나라 일을 지을 수 있다. 돌아보건대, 지금의 조정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 조상(朝象)이 화합한가 화합하지 않은가? 대략 그 심한 것을 열거하건대, 기강(紀綱)이 떨어지는 것은 오로지 위패(違牌)255)  에 연유하는데,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이 집안에 있으면서 자신만 편하게 하고, 시상(時象)에 이르러서는 분의(分義)를 돌아보지 않고 이기기를 힘쓰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바로 나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먼저 스스로 경계하고 힘쓸 터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이런 풍습을 통렬히 혁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9일 임술

대사간(大司諫) 민형수(閔亨洙)가 상소하기를,
"신의 일단(一段)의 고충(苦衷)은 스스로 윤상(倫常)의 소중함과 의리(義理)의 엄절함에 따랐으니, 신으로 하여금 오늘날에 말을 하게 하더라도 이 한마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일을 좋아하는 구습(舊習) 때문이다."
하고, 그의 관직을 체임하도록 하였는데, 대체로 민형수가 일찍이 상소하여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를 공격하였었기 때문에 말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이광좌가 마침내 강교(江郊)로 물러나자,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심성진(沈星鎭)을 헌납(獻納)으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지평(持平)으로, 한사득(韓師得)을 승지(承旨)로 삼고, 양구 현감(楊口縣監) 이경기(李景琦)를 진구(賑救)를 잘하였다 하여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김상익(金尙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여러번 국시(國是)를 흔들리게 하여 전후로 두 동강이가 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저들이 만약 시호(諡號)의 회복만으로는 부족하게 여겨 다시 하고 싶어하는 바가 있을 경우 또한 어떻게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보장하겠습니까? 전후의 혹은 돕고 혹은 억제하심이 끝내는 한쪽의 의탁함을 면하지 못하시니, 저들이 만약 심악(沈)을 논하다가 부족해서 또 조정 절반의 여러 신하들을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심법(心法)이라고 몰아붙인다면 또한 어떻게 전하께서 의심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본래가 흔들린 것이 아니니 또 무엇을 흔들리며, 그것이 의심할 것이 없는데 또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처음 미원(薇垣)에 들어온 장관이 오히려 이와 같을진대, 다른 이에게 무엇을 유시하겠는가?"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256)   집에 지금 관모(官帽)를 쓴 이가 없어서 곤전(坤殿)257)  의 사친(私親)이 기한(饑寒)을 면하지 못합니다. 서인수(徐仁修)가 지난번에 감조(監造)한 공로로 당연히 승륙(陞六)258)  되어야 하는데도, 특별히 아직 정지하도록 명하셨으니, 이번 대정(大政)259)  에는 승륙을 허락하여 부부인(府夫人)을 봉양하게 하소서."
하고,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는 아뢰기를,
"이것은 바로 많은 신하들이 다 함께 자책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의 집안이 만약 겨우 지탱할 수가 있다면, 벼슬하는 것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그러나 국가에서 쓴다면 어찌 감히 부형(父兄)의 연고로 해서 벼슬하지 않겠는가? 나는 빈자리를 좇아 채우고 싶지는 않다. 참봉(參奉)은 풍릉(豐陵)260)  의 아룀으로 인해서 사은(謝恩)하자마자 체임되었고, 감조관(監造官)은 두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행공(行公)261)  하였으며, 과거(科擧) 또한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나의 괴로운 마음이다. 조금 전에 미원장(薇垣長)의 상소에서도 내가 전후로 흔들린다고 말하였는데, 나는 당연히 지켜야 할 곳에서는 지킨다."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미 감조(監造)하던 일을 마쳤으니, 상(賞)주는 일을 어찌 〈그에게만〉 홀로 정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의 말이 이와 같으니, 서인수를 이조(吏曹)로 하여금 수의(收擬)하게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동몽 교관(童蒙敎官)을 가려서 차임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윤순(尹淳)의 말이 당론(黨論)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 한쪽에서 지나치게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순이 결단코 떠난 것은 지나치지만, 지키는 바는 그르지 않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공인(貢人)으로 돈[錢] 6백을 받아야 할 자에게 쌀 1곡(斛)을 지급하는데, 쌀이 천하기가 흙과 같아 1곡을 돈으로 환산하면 2백도 차지 않습니다. 청컨대 관서(關西)의 돈 10만 민(緍)을 가져다가 공민(貢民)의 급박함을 느슨히 하소서. 강서(江西) 등 다섯 고을은 본래 저축한 곡식이 없으면 산읍(山邑)의 곡식 또한 운반하기가 어려우니, 해서(海西)의 칙사(勅使)를 지공(支供)하고 남은 쌀 10만 석(石)을 획급(劃給)하게 한다면, 서울 안에 전황(錢荒)262)  의 폐단도 없어지고 공민(貢民)도 지탱할 수 있으며 해서의 곡식은 붉게 변질될 탄식이 없어지고 관서의 저축은 쌓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大臣)과 경재(卿宰)에게 물었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뒷날에 계속하기가 어렵고 10만 민(緍)은 너무 많으니, 짐작해서 가져다 쓰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관서에 비치는 돈은 부비(浮費)263)  에 불과할 뿐이다. 도성(都城)의 백성들이 오로지 공시(貢市)264)  에만 의뢰하여 전황을 지탱하기 어려우니, 참으로 잗단 우려가 아니다. 경(卿)이 진달한 바는 그 근원을 깊이 안 것이니, 느슨히 하고 켕기는 것을 편리한 대로 하여, 소민(小民)으로 하여금 혜택을 입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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