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1권, 영조 12년 1736년 6월

싸라리리 2025. 9. 1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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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갑자

을묘년265)   12월의 도정(都政)을 이날 행하였으니, 전관(銓官)의 유고(有故) 때문이었다. 개정(開政)하기에 앞서 임금이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진명(宋眞明)·병조 판서(兵曹判書) 조상경(趙尙絅) 및 이방 승지(吏房承旨)·병방 승지(兵房承旨)을 불러 보고 면칙(面飭)하였다.

 

이진망(李眞望)을 세자 빈객(世子賓客)으로, 정수기(鄭壽期)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정언(正言)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광부(李光溥)를 사간(司諫)으로, 유시모(柳時模)를 집의(執義)로, 조명택(趙明澤)을 응교(應敎)로, 심성진(沈星鎭)을 부응교(副應敎)로, 윤광신(尹光莘)을 공홍도 병사(公洪道兵使)로, 조국빈(趙國彬)을 공홍도 수사(公弘道水使)로 삼았다.

 

강춘도(江春道) 영월(寧越)의 유학(幼學) 박현제(朴賢齊) 등이 상소하기를,
"고(故) 처사(處士) 김시습(金時習)은 미친 체하면서 중이 되어 떠돌아다니며 돌아오지 않았고, 처사 남효온(南孝溫)은 상서(上書)하여 소릉(昭陵)266)  을 복위하도록 청하였으나 회보를 하지 아니하자 죽을 때까지 과거에 나아가지 않아서 뒤에 연산군(燕山君)이 부관 참시(否棺斬屍)하였고, 직제학(直提學) 원호(元昊)는 문을 닫고 방문객을 사절하고, 앉을 때는 반드시 노릉(魯陵)267)  을 향하였으며, 교리(校理) 권절(權節)은 미친 체하고 벼슬하지 않다가 죽었고, 처사 조여(趙旅)는 일찍이 태학(太學)에 유학(游學)하다가 여러 유생들에게 읍(揖)을 하고 돌아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으며, 정언(正言) 이맹전(李孟專)은 두 눈이 사물을 보지 못한다고 핑계대고 30년간 문 밖을 나오지 않은 채 죽었고, 처사 정보(鄭保)는 육신(六臣)이 죽은 것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가 권신(權臣)들의 무함(誣陷)으로 거의 주륙(誅戮)당하게 되었었는데 세조(世祖)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임을 듣고 특별히 사형을 감(減)하도록 하였으며, 처사 성담수(成聃壽)는 관직에 제수하여도 배사(拜謝)하지 않고 낚시질하며 은둔하였는데, 뒤에 선왕(先王)께서 이 팔현(八賢)의 절개를 추가(追嘉)하여 혹은 관직을 추증(追贈)하기도 하고 혹은 시호(諡號)를 내리기도 하여, 정려(旌閭)하고 현포(顯褒)하는 도리가 실로 육신과 간격이 없었으나, 유독 침원(寢園) 곁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은전은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들이 이미 두어 칸의 집을 지어 8인의 신위(神位)를 차례로 모셨습니다. 바라건대, 두 자(字)의 은액(恩額)268)  을 내려 주소서."
하니, 임금이 하순(下詢)하여 처리하겠다고 답하였다.

 

6월 2일 을축

이종연(李宗延)을 정언(正言)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유척기(兪拓基)를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심택현(沈宅賢)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조명교(曺命敎)를 대사간(大司諫)으로, 남태온(南泰溫)을 집의(執義)로, 이광도(李廣道)를 사간(司諫)으로, 윤득징(尹得徵)을 헌납(獻納)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장령(掌令)으로, 이관후(李觀厚)를 지평(持平)으로, 허정(許晶)을 공홍도 수사(公洪道水使)로, 신만(申漫)을 전광도 수사(全光道水使)로, 이양신(李亮臣)을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이번 정사(政事)는 사람들의 말이 많았는데, 대각(臺閣)의 신통(新通)269)  은 더욱 외람되고 난잡함이 심하여, 국자 분관(國子分館)270)  에서 곧바로 지평[持憲]으로 통의(通擬)되기도 하고, 과거에 급제한 지 두 달 만에 갑자기 납언(納言)271)  으로 의망되기도 하는 등, 진실로 자기에게 아부하는 자에게는 정사의 격식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관후도 이 정사에서 신통(新通)되어 변괴(變怪)를 빚어내기도 하였다. 송익휘(宋翼輝)는 송진명(宋眞明)의 조카[從子]인데, 영록(瀛錄)272)  이 앞에 임박하여 기필코 6품으로 승진시키려 하였지만 춘방(春坊)이 아니면 의망할 수 없고 상피(相避)하여야 하기 때문에 여러번 사서(司書)인 조진세(趙鎭世)를 외직(外職)에 의망하고 빈자리를 만들어 송익휘를 맨 앞에 의망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글을 보내어 만류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렇게는 못하였다.

 

6월 3일 병인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비로소 《주역(周易)》을 강하였는데, 옥당(玉堂)의 관원이 문의(文義)를 잘 해석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하도(河圖)273)  가 변해서 팔괘(八卦)로 된 이치를 묻자 모두 모른다고 사양하고는, 이에 홍상빈(洪尙賓)·이춘제(李春躋)가 강경(講經)으로 과거에 올랐으니, 의당 《주역》을 알 것이라고 추천하고 그로 하여금 경연(經筵)에 출입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저 《주역》의 이치가 심오하여 입으로만 읽어서 강경(講經)을 한 자가 잘 알 바는 아니지만, 명색이 유신(儒臣)이 되어 경전을 잘 해석하지 못하고 이에 남을 추천하여 계옥(啓沃)274)  을 책임 지운단 말인가?"  영사(領事)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정배(定配)된 죄인으로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한 자가 있으면, 의당 돌아가서 장사지내도록 허락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王者)가 효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떻게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죄인은 바로 박경순(朴景淳)·이봉상(李鳳祥)이었다. 지평(持平) 이관후(李觀厚)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07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 풍속-예속(禮俗)


[註 273] 하도(河圖) : 옛날 중국의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黃河)에서 길이 8척(尺)이 넘는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 《주역(周易)》 팔괘(八卦)의 원리가 되었음.[註 274] 계옥(啓沃) :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열어 남의 마음속에 부음. 곧 흉금(胸襟)을 털어놓고 성심껏 인도함.
사신은 말한다. "대저 《주역》의 이치가 심오하여 입으로만 읽어서 강경(講經)을 한 자가 잘 알 바는 아니지만, 명색이 유신(儒臣)이 되어 경전을 잘 해석하지 못하고 이에 남을 추천하여 계옥(啓沃)274)  을 책임 지운단 말인가?"
영사(領事)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정배(定配)된 죄인으로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한 자가 있으면, 의당 돌아가서 장사지내도록 허락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王者)가 효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떻게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죄인은 바로 박경순(朴景淳)·이봉상(李鳳祥)이었다. 지평(持平) 이관후(李觀厚)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고, 홍문록(弘文錄)을 미루었다고 하여 특별히 수찬(修撰) 조명겸(趙明謙)의 관직을 파면하게 하였는데, 부제학(副提學) 서종옥(徐宗玉)이 구원해 변명하여 정지하였다. 이때에 장차 홍권(弘圈)275)  을 행하려 하는데 시배(時輩)가 이익으로 조명겸을 꾀어 함께 일하면서 하고 싶어하는 바를 쾌하게 하자고 하니, 조명겸이 기꺼이 응락하였다. 이에 송진명(宋眞明)이 이주진(李周鎭)으로 하여금 조명겸에게 다른 뜻이 없는가를 엿보게 하고 마침내 전랑(銓郞)으로 통망(通望)하게 하였는데 이튿날 권점(圈點)을 행할 때에 조명겸이 갑작스럽게 이의(異議)를 발생시켜 시간이 늦도록 결정을 못하자, 임금이 잇달아 재촉하고 그 상황을 묻고는 조명겸을 크게 책망하기를, ‘반드시 다른 사람의 충동하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하고는 그의 관직을 파면하도록 하였는데, 서종옥이 구원하여 그 일이 그치게 되었다. 대체로 조명겸의 계책은 전관(銓官)을 속여 낭청의 선발을 훔치고 홍권(弘圈)을 무너뜨려 자기 당(黨)을 기쁘게 하려고 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
사신은 말한다. "영록(瀛錄)은 바로 공정하게 선발해야 할 자리이며 이조 낭관[天郞]은 팔고 사는 물건이 아닌데도 조명겸을 꾀어 사사로이 영록을 이루려고 하였으니 마음씀이 이미 그릇되었으므로 팔림을 당한 것은 당연한데, 어찌 조명겸만 책망하겠는가? 조상(朝象)과 시풍(時風)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마음 아프게 여길만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07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275] 홍권(弘圈) : 홍문록(弘文錄)의 권점(圈點).
사신은 말한다. "영록(瀛錄)은 바로 공정하게 선발해야 할 자리이며 이조 낭관[天郞]은 팔고 사는 물건이 아닌데도 조명겸을 꾀어 사사로이 영록을 이루려고 하였으니 마음씀이 이미 그릇되었으므로 팔림을 당한 것은 당연한데, 어찌 조명겸만 책망하겠는가? 조상(朝象)과 시풍(時風)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마음 아프게 여길만한 것이다."

 

6월 4일 정묘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관후(李觀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강동 현감(江東縣監) 안성시(安聖時)는 공무(公務)를 오로지 그 아우에게 맡기는가 하면 사송(詞訟)은 오직 뇌물(賂物)을 보아 가며 하였으며, 문루(門樓)를 짓는다고 핑계대고 스스로 권선문(勸善文)을 지어 향품관(鄕品官)의 돈을 많이 거두어 들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종연(李宗延)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선천 부사(宣川府使) 민창기(閔昌基)는 일찍이 곤임(閫任)276)  을 맡았다가 이미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탄핵을 받았으며, 동읍(東邑)에 부임함에 이르러서는 또 가렴 주구(苛斂誅求)하여 백성을 괴롭혔다는 비난이 많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훈련원 정(訓鍊院正)은 바로 무반[武弁]의 당하관으로는 극도의 선발 자리인데, 새로 제수된 김후(金𣖔)는 이미 걸맞는 명망도 없는데다 또 이력(履歷)도 얕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5일 무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비국의 부제조는 재주와 명망을 저양(儲養)하는 자리인데, 김상성(金尙星)·김약로(金若魯)·민형수(閔亨洙)·서종옥(徐宗玉)·정우량(鄭羽良)이 모두 이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 유념하소서."
하고,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는 관동(關東)의 사상(私商)277)  이 몰래 나무를 베는 것을 엄히 금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성(都城) 안의 사가(私家)에서 사용하는 판재(板材) 및 가재(家材)는 모두 목상(木商)에게 의뢰하니, 일체 금지시키는 것은 불가하다. 만일 공무(公務)를 끼고 함부로 난잡하게 하는 폐단이 있으면, 본도(本道)로 하여금 장문(狀聞)하여 논죄(論罪)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이관후(李觀厚)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주사(籌司)278)  의 부당(副堂)279)  은 곧 극도의 선발이니 궐원(闕員)이 있으면 대신이 상의하여 차출(差出)하는 것이나 대체로 한 사람에 불과한데, 송인명이 손가락을 꼽아 가며 낱낱이 셈하기를 마치 은혜를 베풀고 좋은 평판을 널리 파급시키는 것같이 함이 있으니, 대신으로서의 체모를 잃었다고 하겠다.

 

유척기(兪拓基)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조명택(趙明澤)을 부응교(副應敎)로, 유최기(兪最基)를 교리(校理)로, 정형복(鄭亨復)을 수찬(修撰)으로, 조현명(趙顯命)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삼았다.

 

6월 6일 기사

심성진(沈星鎭)을 부응교(副應敎)로, 오언주(吳彦胄)를 부교리(副校理)로, 신택하(申宅夏)를 교리(校理)로, 조명겸(趙明謙)을 수찬(修撰)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관후(李觀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당하관(堂下官)으로 교자(轎子)를 탄 사람인 황산 찰방(黃山察訪) 김광악(金光岳)과 경차관(敬差官) 한시태(韓時泰)는 청컨대 아울러 나문(拿問)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9일 임신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봉령(李鳳齡)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윤학보(尹學輔)·김광국(金光國)은 모두 한미(寒微)한 신분으로 외람되게 괴원(槐院)280)  에 뽑혔으며,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이덕봉(李德鳳)은 고주 망태[酒妄]로 구검(拘檢)함이 전혀 없으니, 모두 도태시킴이 적당합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고 끝 부분의 일만 그대로 윤허하였다.

 

6월 10일 계유

김시혁(金始㷜)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주진(李周鎭)을 부응교(副應敎)로, 심성진(沈星鎭)을 교리(校理)로, 조명겸(趙明謙)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당시 오래도록 가물다가 비가 내렸으므로 대신이 앞으로 나아가 하례하니, 농사(農事)를 권장하고 제언(堤堰)을 수축하도록 하유(下諭)하고, 날씨가 덥다고 하여 승지(承旨)를 보내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무인(武人) 이선(李譔)이 말하기를, ‘안흥진(安興鎭) 해구(海口)에다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으면, 조선(漕船)의 취재(臭載)281)  를 면할 수 있고, 갯벌 가장자리의 진흙이 생기는 곳도 수전(水田)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자, 풍릉 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이 이를 믿고 그 논의를 극력 주장하여, 이선을 안흥 첨사(安興僉使)로 삼고 그 곳에 가서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는데, 5, 6년이 되어도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송진명(宋眞明)은 그래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보장하므로, 박문수(朴文秀)·이종성(李宗城)이 명을 받들고 가서 살펴보고는 그것은 이룰 수도 없으며 비록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국가에 이익이 없음을 극력 말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선이 군량[軍餉]을 사사로이 썼다하여 잡혀 오자, 우의정[右相] 송인명(宋寅明)은 빨리 결단하고 빨리 정지시켜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하고, 여러 신하들의 의논은 제각기 달랐다. 이에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가서 살펴보고 결정짓도록 청하고 이선을 편비(褊裨)282)  로 삼아 장차 떠나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조현명이 배윤명(裵胤命)의 일을 만나 마침내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선이 피혐(避嫌)은 하였으나 고치기를 꺼려하고 알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사람됨이 본래 허탄하고 망령되어 감히 큰소리를 쳐서 군상(君上)을 속였고, 역사가 오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이 자자(藉藉)하였다. 애당초 이미 〈고과(考課)에서〉 하고(下考)를 차지하여 체임되었고, 또 불법(不法)하였다 하여 어사(御史)에게 탄핵당하는 바가 되어, 역사는 저절로 그만두게 되었다. 조정에서 일을 시작함에 있어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거나 재물을 허비시키는 것을 살펴보지 않고서 사방에 웃음거리만 남겼으니, 비록 건의한 자를 주벌(誅罰)한다 하더라도 돌아보건대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6월 11일 갑술

윤대관(輪對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12일 을해

박필균(朴弼均)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수찬(修撰)으로, 임주국(林柱國)을 승지(承旨)로 삼고, 이주진(李周鎭)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종연(李宗延)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좌장(坐贓)283)  으로 폐고(廢錮)284)  된 자는 다시 자목(字牧)의 직임에 의망(擬望)하지 말도록 하소서. 그리고 훈련원 정(訓鍊院正) 김후(金𣖔)는 늙고 쇠약하여 분명하지 못하니, 개차(改差)함이 적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윗 부분의 일은 너무 지나치니,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다. 김후의 일은 그대로 윤허한다."
하였다.

 

6월 13일 병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관후(李觀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제천 현감(堤川縣監) 박필중(朴弼重)이 일찍이 경기(京畿) 고을에 임명되어 오로지 탐학(貪虐)만을 일삼았으며, 용안 현감(龍安縣監) 김계백(金啓白)은 잔열(孱劣)하여 비루하고 잗달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14일 정축

조석명(趙錫命)은 대사간(大司諫)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집의(執義)로, 윤득재(尹得載)를 정언(正言)으로, 조명익(趙明翼)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고, 승지(承旨) 이주진(李周鎭)에게 명하여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에게 가서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이광좌가 또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인하여 말하기를,
"소장에 대한 비답 외에 별도로 하교(下敎)하는 글 한 통(通)이 있으니, 가지고 가서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그 하교에 이르기를,
"당초에 휴치(休致)의 청을 특별히 허락한 것은 고심(苦心)함이 있어서이다. 이 봉조하(李奉朝賀)285)  와 민 봉조하(閔奉朝賀)286)  는 실로 한 세대의 영수(領袖)가 되는데, 내가 이른바 영수라는 것은 시상(時象)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그 지체와 명망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날 장전(帳殿)에서의 말은 모두가 과격하여 서로 풀지 못하였으며, 승선(承宣)의 선경(先卿)도 일찍이 개탄스럽게 여겼다. 풍릉(豐陵)287)  도 두 봉조하가 서울에 있은 연후에야 의뢰할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이 봉조하 혼자만 서울에 있지 않으니 나의 고심이 돌아보건대 어떻게 편안하겠는가? 유지를 잘 전하여 기필코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주진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광좌가 ‘이미 물러난 몸으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으로 진술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15일 무인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의 강을 마쳤다고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선온(宣醞)하도록 명하였다.

 

6월 16일 기묘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17일 경진

황해도(黃海道) 강령현(康翎縣)의 사노(私奴) 이자근노미(李者斤老味)가 딸 하나를 낳았는데, 두 팔이 없고 어깨뼈는 깎은 듯하다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지평(持平) 이관후(李觀厚)가 상소한 것을 승정원(承政院)에서 물리쳤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국가에 기강(紀綱)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혈맥(血脈)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그 기강이 섰을 적에는 임금이 그 신하를 잘 책려(策勵)하여 감히 탕화(湯火)의 고난 속에서도 회피하지 않으며, 아랫사람도 그 윗사람을 엄하고 두렵게 여겨 감히 비방하려는 뜻을 싹틔우지 못하다가, 기강이 무너짐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그 신하를 부릴 수 없고 거만한 풍습이 날로 자라서 아랫사람이 간혹 그 윗사람을 비방하면 꾸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납니다. 아! 오늘날의 기강은 여지(餘地)가 없다고 이를 만합니다. 문음 자제(門蔭子弟)가 권세를 차지하여 교만하고 방자하게 조정을 멸시함이 조경빈(趙景彬)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미관 말직[微末]의 음관(蔭官)이 국정을 담당한 대신(大臣)을 업신여겼으니 천고(千古)의 소인(小人)으로 지목되기에 합당한데, 그것을 글로 써서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전파하기를, ‘연배(年輩)도 서로 엇비슷하고 지체와 문벌도 서로 같으니, 내가 비록 모욕한다 하더라도 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는데도, 온 조정이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서 한 사람도 그 죄를 논하는 이가 없어서 업신여김을 당한 대신으로 하여금 몸소 수세(手勢)를 범하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인율(引律)하게 하여 대체(大體)가 무너지고 손상되었으니, 신은 그윽이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전형(銓衡)288)  은 중요한 자리이어서 본시 적합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데, 지난번 조현명(趙顯命)이 제수되었을 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은 말로 모두 ‘이 사람이 전형의 권한을 잡게 되면 거의 공정한 도리를 넓히고 요행을 바라는 부류를 억제시킬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전하(殿下)께서 그를 이 직임에다 발탁하여 배치한 것은 참으로 적합한 사람을 얻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중신(重臣)이 한사코 굳게 회피하니, 이는 진실로 무슨 마음에서입니까? 사람들이 간혹 ‘작록(爵祿)도 사양할 만하기에 이 사람이 있는 것이다.’라고 이르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이미 자신을 받들어 멀리 떠날 수도 없고 또 문을 닫고 스스로 폐(廢)할 수도 없다면, 이것은 참으로 쓰고 버리는 즈음에 비방이 사방에서 이르게 될 것이므로 사양하고 회피하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조현명은 그 처지(處地)가 자별(自別)하니, 진실로 국가에 이롭다면 어느 겨를에 그 자신을 염려하겠습니까? 전해 내려오는 풍속과 습관 또한 없애지 못해서이니, 조현명의 고심(苦心)과 향국지성(向國之誠)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달리 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인군(人君)이 신하를 부리는 것 또한 예(禮)로써 진출시키거나 물러나게 하는 것이 당연하며, 결단코 소나 말처럼 몰아붙여서 중신(重臣)을 구금[拘繫]하기를 마치 변방의 장수가 임지에 부임하지 않는 것처럼 보는 것은 불가합니다. 조현명이 전일의 견해를 굳게 지키고 스스로 대리(對吏)하는 것을 달갑게 여겨, 위로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를 잃게 하고 아래로는 〈윗사람에게〉 어기고 오만하게 구는 풍습을 더하게 하였으니, 신은 여기에서도 개연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유신(儒臣)이 패초(牌招)를 어긴 일로 보외(補外)되었을 적에는 모두 좋은 지역에다 임명하여 그들의 원하는 바에 딱 들어맞았으므로, 제목(除目)289)  이 내리자 거의 모두가 기뻐하고 흡족해 하며 스스로 계책을 얻은 것으로 여겨, 마치 새가 새장을 벗어나고 물고기가 구렁에서 놓여난 것같이 되었으니, 신은 또 전하의 처분이 단지 그들의 오만한 기질만 길러 주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얼굴빛과 말로 관대하게 용납하심이 간혹 총애하는 길을 열고 업신여김을 받아들이게 되는 우환이 없지 않으며, 은혜를 내리심이 잦게 되어서는 간혹 중도(中道)에 지나치거나 타당성을 상실하는 폐단이 없지 않아서, 귀근(貴近)의 신진(新進)들이 천심(淺深)을 엿보고 헤아려서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조금 풀어지고, 기환 자제(綺紈子弟)290)  들은 서로 돌려가며 모방하고 본받아서 그 교만하고 방자한 풍습이 점점 자라게 되니, 비유하건대, 인가(人家)의 성질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몹시 사나운 종이 목전(目前)에서는 대강 얽매일 수 있는 것 같이 하고는 다른 날에 가서 속이고 해침을 불러들여도 끝내 어떻게 할 수 없도록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이관후는 영남(嶺南) 사람으로, 분무 공신(奮武功臣) 전양군(全陽君) 이익필(李益馝)의 양자(養子)이다. 사람됨이 들뜨고 속이며 비루하고 미련하여 문자(文字)를 해독하지 못하면서도 이주진(李周鎭)의 압객(狎客)이 되었으며, 또한 민진원(閔鎭遠)의 문하(門下)에 왕래하여 외람되게 지평[持憲]에 통망(通望)되기도 하였다. 대정(大政) 이튿날 이익필이 몸소 전장(銓長) 송진명(宋眞明)의 문(門)에 나아가 절하며 사례하기를,
"소인(小人)의 자식이 다행스럽게 공(公)의 은덕을 입어 대간(臺諫)의 선발에 참여함을 얻었으니, 은혜가 실로 그지없습니다."
하였고, 이관후가 그 아비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제가 통청(通淸)한 것은 전적으로 이군(李君)의 힘에서 나왔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이 대간의 선발에 수치와 오욕이 여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상소가 승정원에 도달하였는데, 이주진이 그 내용에 조씨(趙氏)와 송씨(宋氏)를 핍박한 말을 보고는 정지시키고 올리지 않았다. 이관후는 본래 글을 잘못하였으므로 배윤명(裵胤命)에게 대신 짓도록 하였는데, 상소의 말이 음흉하게 속이고 사리에 어긋나며 문자(文字)에도 도리에 벗어난 것이 많았다. 뒤에 일이 발각되어 국문(鞫問)을 당하고 형벌을 받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진명(宋眞明)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그 끝에 이르기를,
"충의위(忠義衛)의 대궐 안에 입번(入番)한 자가 신이 연중(筵中)에서 말한 귀절을 가지고 혐의를 삼고는, 심지어 ‘정청(政廳)을 비우고 마음대로 나갔다.’고 하니, 신은 참으로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그날 말하는 사이에 우연히 ‘공신(功臣)의 자제(子弟)를 충의위로 삼아 점차 향암(鄕闇)291)  의 모람되고 잡된 부류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묘소(墓所)의 수직(守直)이 도리어 명문가(名門家)의 서얼(庶孽)을 차출(差出)하였을 때보다 못하다.……’고 언급하였었는데, 산선 차비군(繖扇差備軍)으로 입직(入直)해 있는 부류가 무슨 터럭만큼의 관계가 있기에, 감히 나열하여 문서를 올리면서 곧바로 신의 성명(姓名)을 거론하기를 조금도 돌아다보거나 꺼려함이 없었으니, 법(法)의 기강과 체통이 거의 여지(餘地)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애(撕捱)함이 너무 지나치다. 사임하지 말고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대신(大臣)의 말로 인해서 충의위의 입번(入番)한 자를 잡아다 가두고 형률을 적용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의 진신(搢紳)들 사이에는 지조를 지키는 절개가 너무 지나쳐 조금만 바르게 경계하는 일만 있으면 번번이 모두 인의(引義)하는 것이 이미 세도(世道)의 근심거리가 되어 있는데, 충의위와 같은 부류에 이르러서는 극도로 미천한데도 감히 전장(銓長)의 지난날 연주(筵奏)를 가지고 망령되게 자처(自處)하려고 하여, 심지어 ‘정청을 비우고 마음대로 나갔다.’고 하였으니, 중신(重臣)은 곧바로 법을 들어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이제야 떠들썩하게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마치 삼사(三司)와 서로 다투며 힐난하듯 하고 스스로 인피(引避)하며 체임을 바라는 데 이르렀으니, 기강과 체통이 땅을 쓴 듯 다 없어졌다."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0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정(軍政) / 신분(身分)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註 291] 향암(鄕闇) : 시골 구석에서 살아 온갖 사리에 어두움. 또는 그런 사람.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의 진신(搢紳)들 사이에는 지조를 지키는 절개가 너무 지나쳐 조금만 바르게 경계하는 일만 있으면 번번이 모두 인의(引義)하는 것이 이미 세도(世道)의 근심거리가 되어 있는데, 충의위와 같은 부류에 이르러서는 극도로 미천한데도 감히 전장(銓長)의 지난날 연주(筵奏)를 가지고 망령되게 자처(自處)하려고 하여, 심지어 ‘정청을 비우고 마음대로 나갔다.’고 하였으니, 중신(重臣)은 곧바로 법을 들어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이제야 떠들썩하게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마치 삼사(三司)와 서로 다투며 힐난하듯 하고 스스로 인피(引避)하며 체임을 바라는 데 이르렀으니, 기강과 체통이 땅을 쓴 듯 다 없어졌다."

 

6월 18일 신사

조현명(趙顯命)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수항(李壽沆)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최규태(崔奎泰)를 장령(掌令)으로, 이덕중(李德重)을 정언(正言)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부응교(副應敎)로, 유최기(兪最基)를 수찬(修撰)으로, 홍정명(洪廷命)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돈의문(敦義門)을 열라고 명하였으니, 정해년292)  의 예(例)에 의거한 것이었다.

 

여러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조명익(趙明翼)이 아뢰기를,
"감찰(監察)은 바로 옛날의 전중 어사(殿中御史)입니다. 《대전》에 그 직무(職務)와 분장(分掌)이 기재되어 있는데, ‘백사(百司)를 규찰(規察)하고, 풍속(風俗)을 바로잡으며, 원통하고 억울함을 펴게 하고, 외람되거나 속이는 일을 금지시킨다.’ 하였으니, 그 중요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이를 능히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향(祭享) 때를 당해서도 반열(班列)을 정제(整齊)하지 못하니, 대체로 인망(人望)이 가벼운 데서 연유하여 그리 된 것입니다. 그 선생안(先生案)293)  을 관찰하면 옛날에는 명환(名宦)294)  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또한 옛날의 예에 의거하여 가끔 명관(名官)을 임명한다면 모든 관료가 반드시 안색을 바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그 폐단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 개연하게 여기던 터였다. 정조(政曹)에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의 조정 신하들은 누워서 편히 쉬려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서 시골을 집으로 삼고는 개정(開政)이 잇대어 끊어지지 않는데 번번이 시골에 있다고 말을 하며, 서울[京華]의 세족(世族)의 부류도 뒷걸음쳐 관망(觀望)하면서 기꺼이 서울에 살려고 하지 아니하니, 어떻게 몸을 허락하여 임금을 섬기겠는가? 기강(紀綱)이 있는 곳에 신칙하고 격려하는 도리가 없지 않으니, 지금부터 옛날의 제도를 거듭 엄하게 하여 시종(侍從)의 신하는 비록 체직(遞職)이 되더라도 전례대로 군직(軍職)에 부치되, 제수함에 이르러 만약 시골에 있으면 곧바로 금추(禁推)295)  하는 전지(傳旨)를 받들게 하며, 이목(耳目)의 직임에 있는 자는 먼저 체직시키고 인해서 금추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9일 임오

김동필(金東弼)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승지(承旨)로, 심성진(沈星鎭)·오언주(吳彦胄)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6월 20일 계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일찍이 듣건대, 숙종조[肅廟朝]에 이재(吏才)를 순문(詢問)하자 고(故) 상신(相臣) 서문중(徐文重)으로 대답하는 이가 있어 금부 도사(禁府都事)에서 발탁되어 청도 군수(淸道郡守)가 되었고 오래 되지 않아서 상주 목사(尙州牧使)로서 급제하여 마침내 대임(大任)을 맡는 데 이르렀다 하니, 인군(人君)이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간혹 이와 같음이 있어야 바야흐로 인재(人才)를 용동(聳動)케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 또한 그것을 들었다. 그러나 선조(先朝)에서는 그 쓸 만하다는 것을 환하게 알았기 때문에 격외(格外)의 정사(政事)가 있었지만, 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밝지 않은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동당 형제(同黨兄弟)296)                  가 아울러 중임(重任)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조 판서[吏判]가 해임되려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김재로(金在魯)는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領相]이 되었을 적에 그의 아우 정치화(鄭致和)가 이조 판서의 의망(擬望)에 들지 못하였었는데, 임금이 그 연유를 관찰하고 영의정을 연중(筵中)에 머물도록 하고 다른 대신에게 물러가서 의망하여 올리도록 명하고 그대로 낙점(落點)하여 직무를 맡게 하였으며, 고 상신 이관명(李觀命)은 그의 아우가 정승이 되었을 때에 역시 이조 판서로서 양도정(兩都政)을 행하였습니다. 우의정[右相]은 영의정[首相]과 간격이 있고 종형제(從兄弟)와 친형제(親兄弟)는 차이가 있는데, 조정에서 어떻게 그의 인혐(引嫌)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세상의 도의가 날로 점점 위태로워져 정태화의 시대는 우뚝하여 미치기 어렵고, 이관명의 일 또한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국가의 체모가 이미 이와 같이 되는 것은 불가하며, 더구나 선조(先朝)의 고사(故事)가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무신년297)                   이후로 각사(各司)·궁방(宮房)의 차인(差人)이 외방 고을에서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일체 혁파하고 호조(戶曹)에서 거두어 바치게 하셨으니, 대단한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지금 전광도 도신(全光道道臣)이 보고한 것을 보니, 궁차(宮差)298)                  에 금령을 어기고 내려 보낸 자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하고, 김재로는 아뢰기를,
"이것은 절수(折受)299)                  를 모두 혁파하여 호조[地部]로 귀속하게 한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지하고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만, 일찍이 들으니, 외방 고을의 민폐가 차인(差人) 때보다 도리어 더 심하다고 합니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이 보상(輔相)의 직임을 욕되게 해 가면서 이미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구제하지 못하고 대궐에서 크게 계모(計謀)하는 것이 궁차(宮差)를 다시 보내는 데 불과하였다면,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 규식을 정할 때에 이광덕(李匡德)이 ‘성상께서 이 일을 쾌히 시행하시면 처음에 바라던 것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조현명(趙顯命)의 첩자(帖子)에 이르기를, ‘동짓날[至日]에 먼저 수발(垂綍)300)                  하셨으니 임금의 마음을 이미 알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이 두 사람은 외방 백성들의 고통이 궁차(宮差) 때문임을 깊이 알아서이다. 내가 비록 덕(德)이 적으나, 어찌 차인(差人) 무리의 명맥(命脈)을 돌보겠는가?"
하고, 인해서 내수사[內司]에서 차인을 보내도록 맨 먼저 주창한 자를 추국하여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6월 21일 갑신

총관(摠管)        해릉군(海陵君) 이관(李爟)이 그 근수(跟隨)301)                  가 저지를 당하였다고 하여 근장군(近仗軍)을 붙잡아 갔으므로 병조(兵曹)에서 추고(推考)하도록 계청(啓請)하니, 답하기를,
"병조(兵曹)와 도총부(都摠府)는 균등한 숙위(宿衛)이다."
하고, 함께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대신(大臣)의 아룀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미 소속된 관사(官司)가 아닌데 어떻게 추고하도록 청할 수 있는가? 이제부터 단지 하리(下吏)만을 추고해 다스리기를 청하면 위에서 의당 처분할 것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병조 참의(兵曹參議) 윤대영(尹大英)은 그전에 판결사(判決事)에게 논박을 당한 자인데도 맨 앞에 의망(擬望)하여 차임(差任)되었으니, 청컨대 윤대영은 체임(遞任)하고 전조(銓曹)의 당상관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소서."
하니,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며칠 전에 연중(筵中)에서 대신(大臣)이 윤대영을 기성 좌이(騎省佐貳)302)  로 옮겨서 임명한 일을 가지고 윤대영을 체임하도록 청하였는데, 신은 참으로 대단히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윤대영이 승자(陞資)된 뒤로 제사(諸司)의 좌이(佐貳)303)  에 두루 의망되었으며, 신이 5년 전에 추조(秋曹)304)  에 의망하였으니, 이는 갑작스레 처음 의망된 것이 아니며 조정(趙侹)이 논한 바는 실상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 6년 동안 상중[草土]에 있었던 나머지 지금까지 실직(實職)이 없었으므로 신이 마침내 천거하여 의망한 것인데, 대신이 이것을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사람을 쓰는 데 있어 문관(文官)과 음관(蔭官)을 논하지 않고 마치 정해진 숫자가 있는 것같이 하여 단지 그 가운데서만 돌아가며 비의(備擬)305)  하고 있으므로, 이에 신의 어리석은 성질로는 심하게 정체된 이를 명확히 구별하여 발탁하는 것을 자못 좋아하였으니 진실로 시규(時規)에는 적합하지 않음이 당연하나, 윤대영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 만약 기필코 당시의 걸출한 인물을 모두 기용한 뒤를 기다리게 한다면 이런 등류의 사람은 오직 늙어 죽는 일만 있을 뿐이니 어떻게 검의(檢擬)할 날이 있겠습니까? 설령 신이 한 바가 인망(人望) 밖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사람을 탄핵하는 것도 부족하여 신에게까지 단단하게 하기를 이와 같은 데 이르도록 합니까?"
하고, 인해서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참의(參議) 정우량(鄭羽良)이 참여해 들었다 하여 인혐(引嫌)하며 상소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6월 22일 을유

심성진(沈星鎭)을 부응교(副應敎)로, 박필재(朴弼載)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중경(李重庚)을 헌납(獻納)으로, 이현망(李顯望)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홍문록(弘文錄)의 권점(圈點)을 행하여 26인을 뽑았다. 당초 조명겸(趙明謙)이 이미 책망하는 하교를 받고 혹시라도 뜻을 거스려 소원하게 여김을 당할까 두려워 하자, 서종옥(徐宗玉) 등이 또 달래고 위협하여 이에 네 사람이 다시 모여 홍문록을 권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으며, 뽑은 인원의 많은 것도 그전에 없었던 바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번의 홍문관은 인망(人望)에 맞지 않으니, 정익하(鄭益河) 같은 경우는 일찍이 충원(忠原)306)                          을 맡아 재임하면서 탐오(貪汚)함이 낭자하였고, 또 오명항(吳命恒)을 참소하여 축출하였다가 조문명(趙文命)에게 저지당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 조카 오언주(吳彦胄)가 편안히 그 권점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이마에 땀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수해(李壽海) 같은 경우는 상소로 서명균(徐命均)을 공격하였다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출보(出輔) 되어서는 멋대로 불법을 행하고 역적 이사성(李思晟)의 총기(寵妓)에게 빠졌으므로 북쪽의 사람들이 웃음거리로 삼았는데, 이 두 사람이 모두 영선(瀛選)307)                          을 더렵혔으므로 물의가 떠들썩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09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註 306]              충원(忠原) : 충주의 강호(降號).[註 307]              영선(瀛選) : 홍문록의 선발.
사신은 말한다. "이번의 홍문관은 인망(人望)에 맞지 않으니, 정익하(鄭益河) 같은 경우는 일찍이 충원(忠原)306)                          을 맡아 재임하면서 탐오(貪汚)함이 낭자하였고, 또 오명항(吳命恒)을 참소하여 축출하였다가 조문명(趙文命)에게 저지당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 조카 오언주(吳彦胄)가 편안히 그 권점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이마에 땀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수해(李壽海) 같은 경우는 상소로 서명균(徐命均)을 공격하였다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출보(出輔) 되어서는 멋대로 불법을 행하고 역적 이사성(李思晟)의 총기(寵妓)에게 빠졌으므로 북쪽의 사람들이 웃음거리로 삼았는데, 이 두 사람이 모두 영선(瀛選)307)                          을 더렵혔으므로 물의가 떠들썩하였다."

 

6월 23일 병술

영녕전(永寧殿) 담장 밖의 큰 소나무가 풍우(風雨)에 넘어졌는데, 그 소리가 전(殿) 안에까지 들렸으므로, 위안제(慰安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조명겸(趙明謙)이 다시 들어와 완록(完錄)하였다 하여 면대하여 권장하는 유시를 더하였으며, 보외(補外)된 여러 유신(儒臣)들을 소환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하번 한림(下番翰林)이 상번 한림(上番翰林)이 바야흐로 죄로 파면되어 권점을 행할 수 없음을 우러러 아뢰니, 김시찬(金時粲)을 서용하여 직무를 맡기도록 명하여 권점을 완결지었다.

 

6월 24일 정해

김유경(金有慶)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집의(執義)로, 윤경룡(尹敬龍)을 교리(校理)로, 정형복(鄭亨復)을 수찬(修撰)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정언(正言)으로,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을 사은 겸동지 정사(謝恩兼冬至正使)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김상성(金尙星)이 아뢰기를,
"태평한 운수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으니, 더욱 분발하고 힘써서 잠시라도 해이함이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매양 몹시 더운 날을 당하게 되면 번번이 부옥(蔀屋)308)  의 처지를 생각하여 마음에 조금도 해이함이 없으며, 하루라도 강(講)을 빠뜨리게 되면 반드시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어찌하여 하루의 공부를 폐(廢)하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영명함으로도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 나중에는 게을리하게 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깊이 반성해야 마땅하다."
하자, 김상성이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는 많은 것을 탐(貪)하고 빨리 하려고 하는 병(病)을 모면하지 못하여 도리어 보색(保嗇)309)  의 도리에 해로움이 있으니, 끊임없는 공부에 뜻을 더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반 사람이 만약 스스로 편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면 쉽게 방일(放逸)하는 데 이르게 되니, 이는 마음은 바로 원숭이인데 뜻은 바로 말과 같은 것인지라, 〈마음이〉 해이해지면 방일하게 되고 방일해지면 유(流)하게 된다고 연전(年前)의 대고(大誥)에서도 유시한 바가 있는데, 쉬지도 않고 그만두지도 않는다는 말은 참으로 좋다."
하였다.

 

6월 25일 무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진하사(陳賀使)의 선래 군관(先來軍官)이 벌써 왔는데, 들으니, 상칙사(上勅使)를 중도(中道)에서부터 형구[枷桎]를 씌워서 갔으며 장차 엄히 감단(勘斷)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니, 저들의 처치(處置)가 적당함을 얻어서 기강(紀綱)이 있다고 이를 만하며, 이뒤로는 통사(通事) 무리들도 당연히 두렵게 여겨 〈전에 하던 일을〉 그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상칙사가 이미 은(銀)을 받은 것이 탄로가 났으니, 이뒤로는 칙사의 무리가 거둬 들이는 것은 거의 그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상칙사를 잡아가게 한 것은 틀림없이 부칙사(副勅使)가 먼저 유만권(劉萬權)을 보내어 그가 은(銀)을 받은 사실을 고해 바쳐 선수를 치는 계교로 삼은 것이다. 상칙사가 만약 고한 바가 있게 되면 반드시 부칙사도 감단할 터이니, 그 초정(初政)이 이미 볼 만한 것이 있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북평사(北評事) 이양신(李亮臣)은 전후(前後)의 엄한 하교가 비상(非常)하였으므로, 황공하고 위축되어 감히 속대(束帶)310)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으니, 자식이 비록 한때 아비에게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아비가 끝내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은 아뢰기를,
"이양신은 바로 신의 종형(從兄)입니다. 그러나 지난날 엄한 하교가 신을 연유하여 나와 종제(從弟)로 인하여 종형을 버리게 되었으니, 신이 어찌 불안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가 이 봉조하(李奉朝賀)311)  의 일을 말한 것은 그 소견이 좁고 막혔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다시 기용하면 반드시 또 일을 일으켜서 한갓 조정만 어지럽힐 것이다."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지난날의 엄한 하교 또한 10년이 되었으니, 설령 젊었을 적에 간혹 좁았던 소견도 이제는 응당 점차 줄었을 것이고, 더구나 그의 본성(本性)은 남을 다치게 하거나 사물을 해치는 마음이 없는 참으로 상서롭고 화목한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부의(副擬)312)  에 낙점(落點)한 것은 대체로 단지 이러한 등류의 곳에다 쓰려는 것이다. 분의(分義)와 도리에 어찌 감히 부임하지 않는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떠나 보내도록 재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경(卿)이 민형수(閔亨洙)의 일에 대해서는 역시 치우친 듯하다. 의리로 남을 책망하였는데도 당한 자가 안연(晏然)하다면 어떠한 사람이라 하겠는가? 경이 오활하게 보는 데도 앙금이 있는 듯하다."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민형수는 본래 기질이 있기 때문에 이종성(李宗城)과 서로 힐난하였습니다만, 지금은 연석(筵席)에서 화해(和解)한 뒤에 서로 풀렸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좌의정은 민형수의 상소를 지나치게 오활하게 보고 이 봉조하는 지나치게 심각하게 보니, 모두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다스리는 요체는 형벌과 포상을 명백히 하여 인심을 바로잡고 교화(敎化)를 닦아서 풍속을 가다듬는 데 지나는 것이 없습니다. 엊그제 보외(補外)된 여러 유신(儒臣)들을 소환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언사(言事)로써 죄를 얻은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석표(李錫杓)에 이르러서는 그 상소에 비록 지나친 곳이 많다 하더라도 그 말이 성상의 신변에 언급된 것 역시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바를 말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 일체 포용하여 받아들이시고 가볍게 견책을 베풀어 보외(補外)하셨으니, 이는 뭇신하들이 함께 흠탄(欽歎)하는 바입니다. 옛날 제갈양(諸葛亮)이 남을 시켜 빠뜨리거나 실수한 것을 부지런히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인신(人臣)은 그 임금에게 곧은 사람을 포용하고 바른말을 받아들이도록 권면할 뿐이며, 반대로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상하(上下)가 서로 힘쓰는 뜻이 아닙니다. 근래에 조정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서로 바로잡기 위해 경계하는 일이 있으면 번번이 모두들 화를 내므로 사람들도 말을 꺼리게 되니, 매우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성상께서 바른말을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여 온 세상을 부지런히 힘쓰도록 한다면 뭇신하들도 반드시 서로 사양하고 서로 바로잡아 이러한 습속이 고쳐질 것입니다. 이석표를 일체로 내천(內遷)하게 함이 어찌 곧은 이를 포용하는 덕(德)에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재로는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이석표가 부임한 것을 듣고 우선 내천(內遷)을 지연시켜 이사(吏事)를 익히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오래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일찍이 대간(臺諫)이 대신(大臣)을 공격하였다고 하여 말한 자를 버리거나 배척하지는 않았으니, 요상(僚相)이 제갈양의 일을 끌어댄 것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가 나이 젊은 신진(新進)으로 진언(進言)하는 데 꺼려하지 않은 것은 옳으나,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대신을 침범해 배척하면서 그 말이 잗단 것이 많았으며 조신(朝臣)을 논하는 말 또한 뒤섞인 것이 많았으니, 이것이 그릇되었다. 때문에 가볍게 견책을 베풀어 보외하면서 특별히 역마[馹]를 타도록 명한 것은 그가 곧게 진달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서이다 오래도록 외방 고을에 둘 수 없으니, 즉시 내직(內職)에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執義) 심성진(沈星鎭)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오대사(五代史)》를 강(講)하다가 검토관(檢討官) 조명겸(趙明謙)이 〈후주(後周)의〉 풍도(馮道)313)  를 대단하게 칭송하면서 ‘풍도가 아니었다면 오대(五代)의 백성들은 간뇌 도지(肝腦塗地)314)  가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어떤 임금을 섬긴들 나의 임금이 아니며 어떤 백성을 부린들 나의 백성이 아니랴?’ 하는 뜻으로서 스스로 이를 그때의 명인(名人)으로 여겼으며, 또 말하기를,
"세 번 쫓겨나도 유감(遺憾)이 없었으니, 탐(貪)하거나 연연(戀戀)해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도 엄히 배척하지 못하였는데, 승지(承旨) 김응복(金應福)이 파태(罷對)하고 사모[帽]를 벗어 땅에 던지며 분개하여 부르짖기를,
"풍도가 바로 명인이란 말인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조명겸의 이 말은 그의 심술(心術)을 단정하기에 충분하며, 감히 이 말을 연석(筵席)에서 진언(進言)하였으니, 소인(小人)으로서 꺼려함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김응복이 임금 앞에서 대면하여 배척하지 못하고 물러난 뒤에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그의 거조(擧措)를 관찰하면 역시 그가 소박하고 강직함을 볼 수 있다." 뒤에 임금이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풍도가 거란(契丹)의 태부(太傅)가 되는 데 이르렀으며 그가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늙어 갔으니, 참으로 역적이다." 하였는데, 듣는 이가 통쾌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10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정론(政論)


[註 313] 풍도(馮道) : 중국 오대(五代) 때 후주(後周)의 사람으로, 왕조가 다섯 번 바뀌었으나 사성(四姓) 십군(十君)의 임금을 섬기면서 20여 년 동안 상위(相位)에 있었으므로, 후세에서 비루하게 여겼음.[註 314] 간뇌 도지(肝腦塗地) : 참살(慘殺)을 당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진다는 뜻.
사신은 말한다. "조명겸의 이 말은 그의 심술(心術)을 단정하기에 충분하며, 감히 이 말을 연석(筵席)에서 진언(進言)하였으니, 소인(小人)으로서 꺼려함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김응복이 임금 앞에서 대면하여 배척하지 못하고 물러난 뒤에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그의 거조(擧措)를 관찰하면 역시 그가 소박하고 강직함을 볼 수 있다."
뒤에 임금이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풍도가 거란(契丹)의 태부(太傅)가 되는 데 이르렀으며 그가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늙어 갔으니, 참으로 역적이다."
하였는데, 듣는 이가 통쾌하게 여겼다.

 

6월 26일 기축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지평(持平) 이관후(李觀厚)의 상소가 승정원에 도달했다가 도로 가져 갔었는데, 조경빈(趙景彬)의 일을 가지고 신이 직접 수세(手勢)를 범하여 대체(大體)를 무너뜨리고 손상시켰다고 비난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등철(登徹)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염연(厭然)315)  히 뭇사람이 모두 우러러보는 지위에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인해서 생각하건대, 대신(臺臣)의 언사(言事)는 지극히 중대한 데 관계되는지라, 승정원에서는 한 시각도 지체함이 없어야 마땅한데도 무엇 때문에 대간(臺諫)의 상소를 입계(入啓)하지 않았으며 무엇을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갔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간의 체모를 소중히 여기고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승정원의 신하 역시 마땅히 칙려(飭勵)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箚子)로 진달한 것은 사체(事體)를 얻었다고 이를 만하나, 이런 등의 말이 어찌 입에 올릴 만한 것이 되겠는가? 승지는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동국(東國)의 군신(君臣)은 모두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머금으며 어쩔 수 없이 핍박당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 석경당(石敬瑭)316)  이 거란(契丹)에게 〈자신을〉 아황제(兒皇帝)라고 일컬은 일을 보니, 놀랍고 통탄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다. 《강목(綱目)》의 이 편(編)은 강하지 않는 것이 가하겠다."
하자, 강관(講官) 김상성(金尙星)이 아뢰기를,
"음(陰)과 양(陽)이 떨어져 나가거나 새로 생기는 것은 바로 이치의 상도(常道)인데, 우리 나라는 피인(彼人)에게 목숨을 붙이고 있으니 어찌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자강(自强)의 계책을 힘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근일의 유생(儒生)으로 〈문묘에〉 종향(從享)을 청하는 자가 효종[孝廟]께서 회복을 도모한 일을 많이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신중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6월 28일 신묘

밤에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쯤이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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