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계사
날씨가 무덥다는 것으로 형조(刑曹)의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조명신(趙命臣)·정언섭(鄭彦燮)을 승지(承旨)로, 유건기(兪健基)를 교리(校理)로, 조상명(趙尙命)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이익정(李益炡)이 상소(上疏)하여 이관후(李觀厚)의 상소 내용을 점출(拈出)하여 논핵하기를,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은밀히 엿보아 몰래 저격(狙挌)하기 위하여 틈을 노리면서 기괄(機栝)을 설치하고 있는 가운데 또 기괄을 숨겨 놓고 있으니, 마땅히 삭직(削職)시켜야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2일 갑오
유최기(兪最基)를 부수찬으로, 박찬신(朴纘新)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직접 정벌(征伐)에 나섰던 일은 결단으로는 옳은 결단이었지만, 이로부터 스스로 만족해 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으니, 이는 경계해야 될 일이다."
하니, 참찬관(參贊官)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진실로 옳습니다. 후주의 세종은 오대(五代) 때의 뛰어난 임금에 불과하였습니다. 옛날의 성왕(聖王)들도 반드시 자만(自滿)을 경계로 삼았었습니다. 자만심이 한번 싹트게 되면 덕업(德業)이 향상되지 않고 언로(言路)가 폐쇄되어 버리니, 요순(堯舜)의 사업도 성인(聖人)이면서 스스로 성인이라고 여기지 않은 데 불과할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면려하소서."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스스로 만족한다는 것은 곧 퇴보(退步)하는 것이다. 성인도 늘 자신이 부족하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더구나 중인(中人)이겠는가?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 또한 자만에 대해 진계(陳戒)하였는데, 내가 스스로 기약하는 것은 이와 같지 않다. 인군(人君)은 혼자서 하는 일이 없으니 요순(堯舜) 같은 성인으로서도 오히려 팔원 팔개(八元八凱)317) 를 거용(擧用)하였다. 군신(君臣)은 서로 돕는 의리가 있는 것인데,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마음대로 혼자서 운용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7월 3일 을미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심성진(沈星鎭)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연원(連原)은 곧 호역(湖驛)으로서 문관(文官) 참하(參下)의 자리인데, 음관(蔭官)으로 차송(差送)하라는 명이 한때의 특은(特恩)에서 나온 뒤부터 그대로 이를 답습하여 차견하고 있습니다. 이는 관제(官制)에 어긋난 처사이니, 개차하소서. 시임 찰방 남도일(南圖逸)은 전의 법규대로 문관 참하로 선발하여 차견하소서. 근래 사로(仕路)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습니다.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 이윤기(李胤器)는 용렬하고 미련하고 아둔하며, 평시서 봉사(平市書奉事) 권진혁(權振爀)과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 김정하(金鼎夏)는 잡기로 외람되게 통망(通望)된 사람들이니, 모두 태거(汰去)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평 홍정명(洪廷命)은 납득할 만한 정세(情勢)가 없는데도 금방 나아왔다가 곧 들어가 버리는가 하면, 혹은 상소(上疏)하기도 하고 혹은 피혐(避嫌)하기도 하여 거조가 구간(苟簡)하니,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찰방에 대한 일과 홍정명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고, 세 음관(蔭官)에 대한 일은 상세히 살펴 다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강목(綱目)》의 강(講)하기를 마쳤다.
7월 4일 병신
오언주(吳彦胄)를 헌납을, 남위로(南渭老)를 지평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수찬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가 상소(上疏)하여 간절하게 진달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이관후(李觀厚)의 상소에서 질타가 사방에서 일어난다느니, 매우 사나운 노복(奴僕)이라느니 하는 등의 말은 근거없이 공동(恐動)시키는 것으로 어의(語義)가 지극히 음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본이 천감(天鑑)에 상달되기도 전에 죄벌이 먼저 대신(臺臣)에게 내려졌으니, 훗날의 폐단에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마땅히 입시할 적에 하교하겠다고 비답하였다. 뒤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또한 말하기를,
"이관후의 상소는 은연중에 군상(君上)을 위동(危動)시키려는 마음이 있으니, 곧 한 통의 급서(急書)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근일 우상과 풍원(豐原)318) 에 대해 앙갚음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7월 5일 정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정관빈(鄭觀賓)을 수용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정관빈은 무신년319) 에 고변(告變)한 사람으로, 공에 의거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었는데, 뒤에 또 이웃 사람을 무고(誣告)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반좌(反坐)320) 당하게 되었는데, 임금이 전일의 공로를 생각하여 단지 형배(刑配)만 시키라고 명하였다. 여러번의 사령(赦令)이 있은 뒤에 비로소 사유(赦宥)를 받았기 때문에 송진명이 이렇게 청한 것이었다. 대저 무고율은 매우 엄중한 것이므로 죽음을 용서받은 것도 이미 다행스러운데, 더구나 다시 사적(仕籍)에 끼게 할 수 있겠는가? 중신(重臣)이 청한 것은 사정(私情)을 따라 법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이 처음에는 법을 굽혔으나 마침내 수용하지 않았으니, 은혜와 형법이 둘 다 이제야 잘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대교(待敎) 김시찬(金時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 신치근(申致謹)이란 자는 본래 역적 이진유(李眞儒) 때문에 염피(厭避)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가 삭출당하는 벌을 받기까지 하였으며, 남태징(南泰徵)에게 말을 추급(推給)한 것과 같은 일에 이르러서는 역적을 위해 힘을 바치고도 오히려 방헌(邦憲)에서 피하였으니, 또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지절(志節)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더럽혀질까 염려하여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같은 원(院)에서 나란히 직숙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어찌 일찍이 당론(黨論)에 근사한 것이겠습니까? 도리어 비난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신의 일가(一家)의 대신을 인용하여 신이 마치 그를 위하여 사사로이 보복하고 있는 것처럼 하였는데, 참으로 그의 말과 같다면 조정의 절반에 해당되는 신하가 누군들 보복해야 될 사람이 아니겠기에, 어찌 유독 그에 대해서만 이렇게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칙려하는 전교를 돌아보지 않은 지난번의 거조도 이미 지극히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제 또 장황한 말을 늘어 놓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분의(分義)인가? 더구나 지난번 이 때문에 칙려했는데도 감히 대신(大臣)을 핑계대고 있으니, 매우 무엄한 일이다. 더구나 조정의 절반에 해당되는 신하가 누군들 보복해야 될 사람이 아니겠는가라고 한 것은 그 말이 놀랍고 패려할 뿐만이 아니다. 〈을묘년321) 2월 10일〉 한밤중의 하교가 있은 뒤에 그가 군부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 소장은 도로 출급(出給)하고 멀리 찬배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의금부에서 배소를 부안(扶安)으로 정하니, 삼수(三水)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뒤에 대신의 말로 인하여 또 고원(高原)으로 고쳤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야대(夜對)를 행하고 송(宋)나라의 《명신록(名臣錄)》을 강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저 신하는 올바른 임금을 만난 뒤에야 명신(名臣)이 될 수 있는 것이니, 이항(李沆)이 만약 송 태조(宋太祖)를 만나지 못했다면 반드시 명신이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몽정(呂蒙正)322) 의 말에,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깨끗하면 함께 일하는 무리가 없게 된다.’고 하였다. 소인의 정위(情僞)를 군자가 어찌 모르겠는가? 대도(大度)에 입각해서 아울러 수용한다면 모든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항이 중외(中外)의 이해에 대한 일을 일체 파기시키자, 유안세(劉安世)가 논하기를, ‘조종(祖宗) 때에는 변란을 겪은 것이 많았는데, 그것은 바로 노련한 의원(醫員)이 병을 치료한 경험이 매우 많기 때문에 약(藥)을 써도 맹랑하게 사람을 죽이는 경우에는 이르지 않는 것과 같았으니, 제정한 법도에 조그만 해로움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이것은 이로움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뒷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드디어 경솔하게 고치려고만 하니, 이것이 분분(紛紛)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송나라의 어진 정승으로 그 말이 다 좋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게 된다는 뜻으로 이미 여러번 하교하였는데, 이런 뜻을 본받는다면 백성들이 가혹하고 각박한 정치에 시달리는 걱정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대신들도 신법(新法)을 설행(設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개강(開講)하는 즈음에 두 어진 정승들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니, 다시 이 말로 묘당(廟堂)을 칙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욱 면려하게 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는데, 참찬관 조명신(趙命臣)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평일에 형상(刑賞)을 시행하실 적에 간혹 지나치게 처분하시는 바가 있으면 그때마다 즉시 고치셨는데, 큰 도량으로 널리 포용하시는 것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므로 신은 항상 흠앙(欽仰)하고 있었습니다. 김시찬(金時粲)을 멀리 귀양 보내라고 한 명은 사지(辭旨)가 매우 엄중하였습니다만, 의기가 날카로운 신진(新進)의 무리가 문자를 구성함에 있어 사어(辭語)를 알맞게 하지 못하여 과격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억제해야 하겠습니다만, 이에 대한 처분이 혹시 중도에 지나치면 형상이 도리어 공평성을 잃는 데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의 절반에 해당되는 사람에 대해 왕정(王庭)에서 사사로운 보복을 하려고 한다면, 군부의 하교에 대해서도 반드시 그들의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니, 신하의 분의(分義)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은연중에 자기의 족속(族屬)을 위하여 사사로운 보복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이는 진신(搢紳)을 장살(狀殺)하려는 계책인 것이다. 이는 이관후(李觀厚)에 견줄 정도가 아니니 멀리 귀양 보내게 한 벌도 오히려 참작한 것이다. 그가 사필(私筆)로 대신이라고 썼으니 이는 사적으로 복관(復官)시킨 것이다. 〈을묘년323) 2월 10일 한밤중의〉 통유(洞諭)가 있은 뒤에 만일 부호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국법을 적용해야 되는데 더구나 그의 족당(族黨)이겠는가? 한법(漢法)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스스로 해당되는 형률(刑律)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7월 6일 무술
이수항(李壽沆)을 도승지로, 김유(金濰)를 승지로, 이주진(李周鎭)을 대사간으로, 허옥(許沃)을 집의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승지 김유가 말하기를,
"이관후(李觀厚)의 상소(上疏)는 매우 위험스럽고도 망측한 것으로서, 말단(末端)의 기매(欺賣)라는 등의 말은 곧 하나의 무고(誣告)이니, 마땅히 엄중한 처분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관후는 결단코 이런 일을 판출할 수 없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은 것입니다."
하고, 옥당(玉堂) 조명겸(趙明謙)도 말하기를,
"이관후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준 서한(書翰)에, ‘평생 우상과 풍원(豐原)을 경모하여 왔으므로 이렇게 상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소장을 대충 보았는데 이제 승선의 말을 듣고 보니, 어렴풋이 깨닫는 것이 있다."
하였다.
7월 8일 경자
사조(辭朝)하는 수령(守令)을 인견하고 면유(勉諭)하여 보냈다.
이중협(李重協)·윤용(尹容)을 승지로, 김종태(金宗台)를 필선(弼善)으로, 조명겸(趙明謙)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송성명(宋成明)이 아뢰기를,
"안변부(安邊府)에 큰 비가 내려서 냇물이 창일(漲溢)하여 11인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영춘(永春)의 사인(社人) 신만화(申萬華)는 물에 뛰어들어 아비의 시체를 끌어 안고 같이 죽었으니, 마땅히 정표(旌表)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7월 9일 신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김시찬(金時粲)이 소장에서 대신이라고 일컬은 것은 진실로 착오인데, 이 때문에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은 이미 중도에 지나친 일입니다. 그리고 배소를 직접 고치신 것은 더욱 서옥(庶獄)을 간섭함이 없었다고 한 뜻에 어긋나며, 더구나 삼수(三水)는 곧 아주 먼 변방이니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도 이를 말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시찬은 뱃속에 시상(時象)이 가득 찼다고 할 수 있다. 〈계축년324) 〉 하교와 〈을묘년325) 2월 10일〉 한밤중의 하교가 있은 뒤에 다시 대신이라고 일컫는 자는 신하의 절개가 없는 사람인 것인데, 더구나 글에 쓸 수 있겠는가? 《춘추(春秋)》에는 무장(無將)326) 이 있고, 한(漢)나라의 법에 불경(不敬)이 있으니, 대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조정의 절반이 사사로운 보복의 대상이라고 한 등의 말은 어찌 무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무리들을 외방에 귀양 보내면, 반드시 당론으로 사람들을 교유(敎誘)할 것이니, 이것이 또 걱정스러운 일이다."
하고, 이어 북도의 먼 고을에 보내는 것으로 고치게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관후의 소장에 대해 연신(筵臣)이 아뢴 것은 의심이 너무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 사람만 죄주는 것이 옳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이관후는 본디 영남의 세족(世族)으로 승지가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의심케 하였는데, 이것이 참소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홀로 강연(講筵)에 올라서 번잡스럽게 이런 말을 진달하였으니, 승지는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심성진(沈星鎭)을 부응교로, 오언주(吳彦胄)를 부수찬으로, 이중경(李重庚)을 헌납으로 삼았다.
7월 11일 계묘
유엄(柳儼)·신만(申晩)을 승지로, 김상석(金像奭)을 부교리로 삼았다.
전광도(全光道)의 생원 유일상(柳一相)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 신치운(申致雲)·이인지(李麟至)에게 무함당한 정상에 대해 변해(辨解)하고, 이어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를 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피국(彼國)에서 보내 온 금단(錦緞)을 기영(畿營)에 하사하여 곡물(穀物)을 판비(辦備)하게 하였는데, 경기 감사 이진순(李眞淳)이 곡물 1천여 곡(斛)을 판비하였음을 아뢰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기고, 사치와 곡물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 중외에 경계를 내렸다.
헌납 이중경(李重庚)이 상소하기를,
"이관후의 소장은 먹은 마음과 계획한 뜻이 지극히 음험하여 곧 하나의 급서(急書)로서, 질차(叱嗟)하는 소리니, 드세고 사나운 노복(奴僕)이니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도로 흉참(凶慘)하였습니다. 이는 그 의도가 오로지 진신(搢紳)들을 경함(傾陷)하려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닙니다. 이관후가 ‘어(魚)’자와 ‘노(魯)’자를 분변하지 못하는 위인임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어떤 간휼(奸譎)한 인간이 이런 패만(悖慢)한 말을 지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삭직(削職)시킨 처벌은 너무 관대하다고 할 수 있으니, 변방에 정배(定配)시키는 형률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원소(原疏)가 상달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심각하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놀랍고 패만스럽고 망측한 정상에 대해서는 이미 통촉하고 있다."
하였다.
7월 12일 갑진
서종옥(徐宗玉)·이현보(李玄輔)·홍성보(洪聖輔)를 승지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13일 을사
약방 도제조 김흥경(金興慶) 등이 입진(入診)하여 날씨가 너무 무더우므로 알묘(斡廟)의 시기를 늦출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 【 헌납 이중경(李重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관후가 소장에서 전후에 포치(鋪置)한 내용이 지극히 교묘하고도 주밀했으며 인용한 문자는 대개 흉패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을 무함하려 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불경(不敬)·부도(不道)의 죄과(罪科)에 빠진 것입니다. 청컨대, 우선 절도(絶島)에 정배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하교하였다. 상달되지 않은 소장을 가지고 형률(刑律)을 가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7월 14일 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관후의 소장에 대해 처음에는 조신(朝臣)을 경함(傾陷)시키려는 계책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았으므로, 신의 차자에서도 대체(大體)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대계(臺啓)에서 곧 불경(不敬)·부도(不道)라고 했으니,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어 엄중히 처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도 이를 말하였다. 헌납 이중경(李重庚)이 앞으로 나아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불경·부도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하문하였는데, 이중경의 대답이 분명하지 못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질차(叱嗟)’라는 두 글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노중련전(魯仲連傳)에 있는 말이고, ‘드세고 사나운 노복[豪奴悍僕]’이란 네 글자는 소순(蘇洵)의 문집(文集)에 들어 있는 한고조론(漢高祖論)에 있는 말이니, 마땅히 이관후의 원소(原疏)를 가져다가 겸하여 이 두 책을 상고하여 보소서."
하니, 임금이 이관후의 집에 있는 원소를 가져오게 하고, 사마천의 《사기》와 소순의 문집을 옥당(玉堂)에서 가져오도록 명하였다. 다 보고 나서 이르기를,
"상세히 열람해 보니 매우 음참하다. 하단의 지의(旨意)는 더욱 망측한 것이었다."
하니, 이중경이 말하기를,
"이관후는 ‘어(魚)’자와 ‘노(魯)’자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대신(臺臣)이 죄주기를 계청하자, 비로소 스스로 부도죄(不道罪)에 빠진 줄 알고 배윤명(裵胤命)이 지어 주었다는 말을 경재(卿宰)의 집에서 창언(倡言)하였습니다. 배윤명은 본디 영남의 천얼(賤孽)로서 요사스런 유내(柳徠)의 압객(狎客)이었는데 대계(臺啓)로 인하여 먼 지방으로 쫓겨난 자입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이관후를 꾀어 은어(隱語)를 삽입하여 감히 패만한 말을 장주(章奏)에 올리게 했으니, 이런 요악한 무리는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윤명을 잡아다가 엄중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배윤명이 본래 영남 사람인가? 효경(梟獍) 같은 성품이어서 과연 교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하니, 이중경이 말하기를,
"그의 아우 배윤영(裵胤潁)도 일찍이 정사효(鄭思孝)의 옥사(獄事)에 관계되어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글의 앞뒤에 커다란 정신(精神)이 들어 있는데, 간간이 은어를 삽입하였으니, 지극히 교묘하고도 주밀했습니다. 마땅히 국문(鞫問)해야 하며, 대직(臺職)에 있다는 것 때문에 구애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임징하(任徵夏)의 일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무신년327) 의 일을 겪으면서도 동요된 적이 없었다. 이순관(李順觀)이 면전에서 흉언을 마구 떠들었어도 단지 법에 붙였을 뿐이었다. 내가 일찍이 한기(韓琦)328) 의 일을 매우 가상하게 여겼었는데, 인신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진실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신축년329) ·임인년330) 이후 세도가 괴이해진 것이 많아서 군부를 농락하여 핍박하고 모욕하는 변이 있기에 이르렀는데, 그 본원을 따져 본면 기사년331) 에 영남 사람들이 매양, ‘노론(老論)이 경종(景宗)에 대해 장심(將心)332) 이 있다.’라고 한 데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뒷사람이 한기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고, 이해(利害)에 동요됨을 면치 못하게 된 까닭일 뿐이다. 근래에 조정의 기상이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어서 내가 상당히 기뻐하였고, 효경(梟獍) 같은 무리도 감히 일을 꾸밀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이 소장을 보건대, 참으로 이른바 바람이 없는데도 물결이 일렁거린다는 격이어서 은연중 뒷날을 위한 계책을 세우고 있다. 이제 하단의 내용에 의거하여 엄중한 처분을 가한다면 마침내 그의 계책에 빠지는 것으로서 한갓 나라만 혼란시키게 할 뿐이다. 내가 후손들에게 유족(裕足)함을 전하는 도리에 있어서 다만 분명하게 살펴서 조처할 뿐이다. 질차(叱嗟)라고 말한 한 조항은 매우 음참한데 내가 실제로 불효하고 무상하여 이런 말이 있게 된 것이다. 과연 기강을 수립하고 왕법(王法)을 밝혔다면 이들 무리가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석효(李錫孝)의 일은 이제 다시 제기할 것은 없지만, ‘질차’라는 두 글자는 실로 대불경(大不敬)인 것이니, 당연히 이에 의거하여 정형(正刑)해야 할 것이다. 하단의 일은 지의가 마땅히 본말를 다 효유하겠다. 기사년 이래로 조신들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다가 완전히 전환되어 무신년의 변란이 야기되었는데, 그가 이를 빙자하여 기화로 삼으려고 하고 있지만, 위에 있는 사람이 어찌 이 때문에 살육(殺戮)하는 길을 열 수 있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마땅히 만전을 기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제 아랫조항은 버려두고 윗조항을 다스려야 하겠는데, 여러 신하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모두들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문자(文字) 때문에 옥사를 일으키는 것이 비록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가 이미 부도한 말을 써서 진달했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이관후가 만약 스스로 이 소장을 지었다면 곧바로 정형(正刑)에 처해야 하겠지만, 이미 배윤명에게서 나왔으니, 이관후를 정형하는 것은 왕법(王法)이 아닌 것이다."
하니, 판의금 김동필(金東弼) 등이 말하기를,
"두 사람을 마땅히 모두 국문해야만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계(臺啓)에 답하기를,
"모두 국문하게 하겠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려고 하자, 임금이 대신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유시(諭示)하기를,
"하단에 대해서 불문에 부치려 한 것은 곧 국운이 영구하기를 바라는 뜻이다. 옥사를 다스릴 즈음에 만연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하였다. 부수찬 오언주(吳彦胄)가 아뢰기를,
"춘천 부사 이익필(李益馝)은 바로 이관후의 아비이니,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들이 사주받은 것을 아비가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사체가 그러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죄인 이관후(李觀厚)·배윤명(裵胤命)이 나포(拿捕)되자,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7월 14일 병오
조명익(趙明翼)을 대사헌으로, 남태온(南泰溫)을 집의로, 이광부(李光簿)를 사간으로, 윤빈(尹彬)을 장령으로, 김상로(金尙魯)·윤득재(尹得載)를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5일 정미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였다.
어유룡(魚有龍)을 대사간으로, 정이검(鄭履儉)을 정언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으로, 임정(任珽)을 응교로, 박필균(朴弼均)을 교리로, 서종급(徐宗伋)을 지의금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동의금으로 삼았다.
한성 판윤 이정제(李廷濟)가 사치와 검소에 대해 칙려(飭勵)한 하유(下諭)로 인하여 상소(上疏)하여 그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죄인 배윤명을 다시 추국할 적에 송인명을 침욕(侵辱)하여 우러러 바라보며 공갈했는데, 마치 수죄(數罪)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 말에 이르기를,
"조가(趙哥)와 송가(宋哥)의 건곤(乾坤)이어서 온통 금(金)으로 장식(粧飾)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일국의 위권(威權)이 모두 그들에게 돌아갔으니, 장차 최충헌(崔忠獻)333) 의 화(禍)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송인명을 권흉(權凶)이요, 간신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외쳐대니, 온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으며, 송인명은 즉시 일어나 나갔다. 송씨(宋氏)의 여러 사람들과 조씨(趙氏)의 조현명(趙顯命)·조원명(趙遠命)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금오(金吾)의 문 밖에서 명을 기다렸다. 배윤명이 또 봉조하 이광좌(李光佐)를 끌어들였으므로, 다음날 이광좌가 고향에서 올라와 남문(南門) 밖에서 명을 기다렸는데, 임금이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명하고 사관을 보내어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7월 17일 기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친히 죄수를 국문하였다. 이관후를 신문하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이제 문서와 배윤명의 초사(招辭)를 살펴보았더니, 네가 배윤명이 지어 주기 전에 스스로 초안한 초본(草本)이 있다고 하였다. 네가 글을 모르는 것이 아니므로, ‘질차(叱嗟)’라는 두 글자를 경솔히 군부(君父)에게 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인데, 이에 감히 글을 올렸으니, 배윤명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배윤명의 공초에 의하면 장자(長者)의 말로 너에게 말해 주었다고 했는데, 말한 내용은 무엇이고 장자는 누구인지 모두 사실대로 공초하도록 하라."
하니, 이관후가 공초하기를,
"신은 본디 글을 몰라서 겨우 서찰(書札)로 뜻만 통할 뿐입니다. 지난해에 낭서(郞署)로 있었을 적에 어떤 사람이 신에게 조만간 대각(臺閣)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전하여 주었는데, 그렇게 되면 신의 6촌인 안복준(安復駿)과 동료가 될 것이므로 그의 손을 빌어 사직소(辭職疏)를 지어 놓게 했었습니다. 이번에 대직의 사직소를 봉입(捧入)하였을 적에 그 초본을 이용하여 윤흥무(尹興茂)에게 보내어 보였더니, 잘 지어서 칭찬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써서 바치려 했는데, 미처 바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배윤명이 찾아왔으므로, 그 소초(疏草)를 내어다가 1본을 등사하게 하여 소매 속에 넣어 두었었습니다만,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상소(上疏)한 의도는 실제로 풍원(豐原)을 위하여 고심한 바가 있습니다마는 신진(新進)들이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이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내용으로 배윤명에게 소장을 지어 오게 했었는데, 배윤명이 이러한 흉악한 문자를 썼던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의 의도는 실제로 진신(搢紳)들을 경함(傾陷)하려는 데 있었는데, 소장의 초안을 가지고 와서 보였을 적에는 단지 조경빈(趙景彬)의 일만 제론(提論)했다고 했을 뿐이었으며, 실제로 서로 의논한 일은 없었습니다. 17일 정소(呈疏)했다가 도로 가지고 왔고, 18일 패초를 어겼다는 것으로 파직되어 춘천(春川)으로 내려갔었습니다. 그뒤 조보(朝報)334) 를 보았었습니다. 삭직(削職)을 청하는 소장은 있었으나 질차(叱嗟) 등의 말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신도 그뒤 대소(臺疏)가 나왔다는 것을 몰랐는데, 친구(親舊)들의 의심과 비방이 또한 떠들썩하다고 하므로 서울에 들어와서 비방에 대해 변해(辨解)할 계책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모두 신의 소장을 가지고 조정을 참소하여 이간시키기 위한 계책이라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 신리(伸理)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신(臺臣)들이 변방에 정배시키기를 청하는 소장에서 또 ‘질차’라는 두 글자를 제출했으므로, 신은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는데 마침 이주진(李周鎭)의 집에 갔다가 그 말의 출처를 물어 보았더니 이주진이 책 하나를 내어 보였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이 망측한 말임을 알게 되었으며 낙담하여 돌아왔습니다. 배윤명이 마침 찾아왔으므로 신이 책망하기를, ‘내가 너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하니, 그도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말하기를, ‘나도 실은 아무 생각 없이 쓴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네가 지어 준 것이라고 가는 곳마다 창설(倡說)하면 나도 죽고 너도 죽게 될 것이다.’ 하고, 신이 또 아랫사람이 혹 윗사람을 비방한 말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배윤명이 《논어(論語)》로 대답했습니다. 배윤명이 전한 장자(長者)의 말이라는 것은 애당초 신에게 장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으니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아무리 미열(迷劣)하다 하더라도 배윤명이 만약 조가(趙哥)·송가(宋哥)의 건곤(乾坤)이라는 등의 말을 발론했다면, 신은 당연히 공척하여 절교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진소한 의도가 오로지 조씨·송씨 두 집안을 위해서였는데 어떻게 그의 손을 빌어 소장을 짓게 했겠습니까? 소장을 써서 올리려고 하던 날 신의 사돈인 허추(許錘)와 신의 족속인 이시희(李時熙)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소초를 전해 보였더니, 단지 ‘중신과 대신이 싫어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만 하였으나, 신은 배윤명이 반드시 두 신하의 집안을 해치려 하지 않을 것임을 전적으로 믿었던 까닭에 의심하지 않고 정소(呈疏)했던 것입니다. 이밖에 다시 진달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배윤명을 신문하라고 명하고서 이르기를,
"소장 내용의 용의(用意)를 끝내 사실대로 공초(供招)하지 않은 채 따로 간사한 계책을 내어 대신과 중신을 침해하여 무함하였다. 지금의 이 국문은 곧 윗 조항의 질차(叱嗟) 등에 대한 글귀와 정신(廷臣)에게 유감을 전가시킨 데 관한 것이니, 숨김없이 사실대로 공초하도록 하라."
하니, 배윤명이 공초하기를,
"‘질차(叱嗟)’라는 두 글자는 과연 부도한 말인데, 소견이 밝지 못해서 이를 썼습니다. 전일의 공초에서 봉조하 이광좌를 무인(誣引)한 일은 봉조하의 문벌과 인망이 당세에 제일이었기 때문에 과연 무인했었습니다. 그리고 조현명은 매양 신을 망측한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에 원망하여 해치려고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며, 우상(右相)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했습니다. 중신과 대신은 신이 지은 소장을 가지고 국청을 설치하려 한다고 했기 때문에 더욱 원망하여 해칠 마음을 품고 어제의 공초에서 과연 무인했습니다만, 모두 허황된 이야기였습니다. 조정을 경함(傾陷)하려는 계책이라는 것은 병들어 칩거(蟄居)하고 있는 사대부들 가운데 이병상(李秉常) 같은 사람이 뜻을 얻는다면 혹시 유리한 점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이 또한 어찌 그 사람이 권한 것이겠습니까? 금(金)으로 장식했다는 말은 신이 요악한 까닭에 모두 거짓말을 꾸미기 위한 계책에서 나왔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배윤명과 이관후를 면질시키니, 배윤명이 말하기를,
"너의 말이 모두 옳다. 나는 한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관후의 아비는 곧 대려(帶礪)335) 의 훈신(勳臣)이고, 배윤명은 바로 역적(逆賊) 유내(柳徠)의 심복인데, 이들이 사사로이 서로 친밀하다는 것은 이야말로 매우 수상한 일이다."
하니, 이관후가 또 공초하기를,
"신의 아비가 좋은 벼슬을 하고 있고 저도 청직(淸職)에 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감히 흉계(凶計)를 품겠습니까? 잘 생각하여 선처하라고 한 것은 단지 ‘질차(叱嗟)’라는 두 글자를 대수롭지 않게 본 탓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의심스런 마음을 지녔었다면 어찌 썼겠습니까?"
하고, 배윤명은 아뢰기를,
"신이 여러 해 동안 죄를 받아 폐기되어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나라를 원망하여 역적질을 할 마음을 품고서 은연중 ‘질차’라는 두 글자로 국가를 모욕했습니다. 조(趙)·송(宋) 두 집안을 폐쇄시키기 위해 이관후의 소장을 지어 주었으며, 봉조하 이광좌도 사사로운 원망 때문에 감히 무인할 계책을 세웠던 것입니다. 임금을 향한 부도한 마음은 실상 무신년336) 에 역적으로 몰려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발생된 것입니다. 을묘년337) 귀양지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 노론(老論)의 사람들이 원통함을 많이 일컬었으므로, 노론을 위해서 발론하려 했었습니다만, 노론 또한 어찌 신과 서로 친한 사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조신을 경함(傾陷)시킨다면, 서로 친한 사람으로 여겨 혹시 등양(謄楊)될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겼으며 봉조하 민진원(閔鎭遠)과도 친한 사이여서 한두 번 서로 만났었습니다. 성상의 의도는 반드시 신으로 하여금 남인(南人)들과 동모했다고 고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신은 허추(許錘)와 동모했습니다. 허추는 곧 유내의 외삼촌인데, 이관후와는 사돈간입니다. 충주(忠州)에 살고 있는데 소장을 지을 적에 이관후의 집에 모였었습니다. 허추의 의도도 조신들을 경함시키려고 했으므로 그 소장을 정직하다고 일컬었으며, 임금을 향한 ‘부도(不道)’ 두 글자와 ‘드세고 사나운 노복’이라는 등의 글귀를 모두 좋다고 일컬었습니다. 면질해도 반드시 굽힐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관후가 아뢰기를,
"배윤명이 남인들의 집을 왕래하였으므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인가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엿보아 살펴보았습니다만, 끝내 의심스러운 사람을 포착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본디 영남 사람인데, 무신년 이후 신의 아비가 논의(論議)에 참섭하지 못하도록 깊이 경계했기 때문에, 신은 한번 배윤명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 왕래한 뒤에 맞이하여 왔던 것입니다."
하고, 배윤명은 아뢰기를,
"듣건대, 신처수(申處洙)가 명소(名疏)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곧 중화(中和)에 사는 임성(林姓)을 가진 사람이 전하였습니다. 이번 일이 발생한 뒤 허추는 겁을 먹고 충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였다. 배윤명이 공초를 바칠 적에 전 참판 오광운(吳光運)·홍경보(洪景輔), 전 승지 홍상빈(洪尙賓), 홍상빈의 조카인 홍서(洪曙)를 뒤섞어 끌어들였고, 또 봉조하 민진원, 전 판서 이병상(李秉常), 전 집의 신택수(申宅洙)를 끌어들였다. 금으로 장식했다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좌상 김재로(金在魯)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하는 등 모두 당황하여 그가 꾸며댄 것이었으므로 곧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자복하였다. 이관후를 다시 배윤명과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이관후가 뜻을 같이 했으면서도 거짓으로 꾸며댄 정상이 상당히 발로(發露)되었다. 또 허추와 이시희를 끌어들였으므로 허추와 이시희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이관후는 형신을 가해도 자복하지 않았는데 아홉 번에 이르러서야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며, 배윤명은 부도(不道)한 일이었음을 자복하였으나 스무 번에 이르러서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모두 본부(本府)에 내려 가두게 하고, 죄인들을 잡아온 다음 본부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9일 뒤에 허추와 이시회를 잡아왔으므로 본부에서 국문하였다. 배윤명은 무고(誣告)임을 자복했는데도 가형(加刑)했으므로, 물고(物故)되었다. 좌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관후가 이미 배윤명의 손을 빌어 소장을 지었는데, ‘부도(不道)’라는 두 글자에 대해 그 자신은 전혀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소장을 지은 원범(元犯)이 이미 죽었고 이관후는 이미 실정을 모른다는 것으로 논단(論斷)했는데, 대소(臺疏) 때문에 형신을 가하는 것은 뒷날 구실이 될까 염려스러우니 신의 생각에는 생의(生議)에 붙이고 싶습니다. 허추와 이시희는 함께 유숙(留宿)하면서 상소할 적에 참섭했는데도 공초(供招)한 것이 또한 어긋나는 점이 많으니, 모두 정배(定配)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관후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상단의 부도(不道)에 대한 일은 내가 무신년·경술년338) 에 징계받은 바가 있기 때문에 앞질러 먼저 친국(親鞫)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말단의 일에 대해 친문(親問)한 것은 조(趙)·송(宋) 두 집안을 위해서인 것만은 아니었다. 형신(刑訊)을 아홉 번에서 정지시킨 것은 대개 장살(杖殺)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부도(不道)’란 두 글자를 이관후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조신(朝臣)을 경함시키려 했다는 죄는 또 옥사(獄事)를 성립시키기에 부족하였다. 만일 이것을 가지고 국청을 설치한다면 이관후보다 더한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대신 지어 준 자는 형신을 받다가 죽었는데, 소장을 써 바친 자가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나의 의도는 한 통의 상소 때문에 두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가 받은 형벌이 충분히 징려(懲勵)시킬 수 있을 것이니,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것이 신의 의견입니다."
하고, 판의금 김동필(金東弼)과 동의금 김시형(金始炯)은 아뢰기를,
"이관후는 끝내 실정을 숨기고 있고, 또 의심스런 단서가 많습니다. 당초에 사주한 사람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옥체(獄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수찬 조상명(趙尙命), 장령 이중경(李重庚), 헌납 윤득징(尹得徵)도 모두 쟁집(爭執)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법을 집행하는 사람의 말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지만, 왕자(王者)가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원정(原情)에 의거하여 정죄(定罪)해야 하는 것이다. 이관후를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허추의 공사(供辭)는 꾸며낸 말이 많으니 매우 간사하다. 그러나 부도한 말을 조신들도 모두 깨닫지 못했었는데, 어떻게 유독 허추만이 알았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가 말한 것에 대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노중련전(魯仲連傳)을 상고해 보았더니 ‘문자는 좋지 않다.’고 하였으니, 좋지 않은 문자를 쓰는 것은 인신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옥사를 성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배윤명이 이미 무함임을 자복했으니, 지금 국문하는 것은 지엽(枝葉) 가운데 지엽인 것이다. 허추를 방송(放送)시키도록 하라."
하였는데, 김재로가 말하기를,
"완전히 석방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국문하는 일을 이미 마무리 하였으니, 이시희도 마땅히 방송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는 종파(宗派)인데, 어떻게 남인(南人)·서인(西人)의 색목(色目) 가운데 부침(浮沈)할 수 있겠는가? 또 ‘스스로 돌이켜 보면 조심스럽고 걱정스럽다.[自反而惕慮]’라는 다섯 글자를 이관후의 소장 내용에서 지우고 고친 것은 극도로 음참한 일이었다. 이를 엄중히 조처하지 않는다면, 뒷날에 하는 짓이 반드시 이관후보다 더할 것이다."
하고, 특별히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국사(鞫事)에 의거 죄주지 않았는데, 종파라는 것 때문에 가죄(加罪)한다면 처분이 마땅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시희가 망측한 소장의 내용을 지우고 고쳐서 일세(一世)의 눈을 속이려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는가? 그러나 정배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하니 삭직(削職)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시형(金始炯)이 인하여 진계(進戒)하기를,
"배윤명이 감히 흉계를 품은 것은 실로 조정이 존엄하지 못한 소치이니, 상하(上下)가 마땅히 더욱 힘써 칙려(飭勵)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대사간 어유룡(魚有龍)이 패초(悖招)를 어기고, 사간 이광부(李光傅)도 궐문 밖에 이르러 진소(陳疎)하고 즉시 들어오지 않으니, 임금이 노하여 모두 삭출시키고 하리(下吏)를 형추하라고 명하였다. 대신이 그것은 중도에 지나친 것임을 아뢰니, 즉시 하리를 형추하라는 명을 거두고 어유룡은 파직시키라고 고쳐 명하고, 박사정(朴師正)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박사정이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조명익(趙明翼)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고, 이윤기(李胤器) 등의 일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이어 송(宋)·조(趙) 집안의 여러 사람들에게 모두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이 물러가서 진소하여 상직(相職)을 극력 사퇴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8일 경술
예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명을 기다리던 곳에서 소장을 올리고 시골로 내려가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위유(慰諭)하기를,
"경(卿)의 가문에서 나라를 위해 바친 단충(丹忠)은 상하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서캐처럼 못난 배윤명의 근거없는 황잡한 말을 어찌 입에 올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왕소(王素)가 왕덕용(王德用)이 여자 2인을 진헌한 것에 대해 간(諫)한 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당시의 사관(史官)이 송 인종(宋仁宗)에 대한 일을 잘 기록했기 때문에, 천 년 뒤에도 마치 눈으로 보는 것과 같다. 나도 어찌 과실로 인하여 후세에서 경계로 삼아야 될 것이 없겠는가? 사관은 숨김없이 사실대로 기록해야 된다."
하였다.
7월 19일 신해
이주진(李周鎭)을 승지로, 윤급(尹汲)을 집의로, 이광도(李廣道)를 사간으로, 오언주(吳彦胄)를 헌납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승지 이주진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랑(銓郞)에 대죄하여 대망(臺望)을 통의(通擬)하였을 적에 이관후(李觀厚)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는데, 단지 그가 친훈신(親勳臣)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한 지 오래 되었다는 것 때문에 마침내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거론하였음을 면치 못하였었습니다. 이제 와서 비록 손가락을 깨물고 눈을 뽑더라도 이미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를 청망(淸望)에 통의(通擬)한 것은 곧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그가 망측한 짓을 한 것이 그대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7월 20일 임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금(金)으로 장식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상직(相職)에서 해면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지금의 이 국사(鞫事)는 매우 요악한 것이어서 대신과 중신 가운데 침해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지난 무신년339) 에도 조신들이 역시 국초(鞫招)에서 무원(誣援)당한 사례가 많았는데, 역적이 무원임을 자복함에 따라 성상께서 위유한 뒤에는 어찌 뒤돌아보지 않은 채 떠난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번 풍원(豐原)과 이판이 차례로 고향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동료 정승들도 인입(引入)하고 있으니, 마땅히 엄중하게 회유와 질책을 가하여 불러서 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하교하겠다."
하였다.
봉조하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간절히 진달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를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이광좌가 들어오니 임금이 인견하였는데, 이광조가 편의한 대로 행동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7월 21일 계축
집의 윤급(尹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심악(沈)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지의(指意)가 매우 패려하여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편드는 의논을 초래하여 얼굴을 바꾸고 번갈아 나와서 뭇사람들의 화살이 하나의 과녁을 동시에 겨냥했으니 처음에는 박필재(朴弼載)에게 당했고 두 번째는 홍중일(洪重一)에게 당했고 세 번째는 김상익(金尙翼)에게 당했으며, 이 밖에도 소장에 의한 공격과 연석에서의 배척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지러웠습니다. 혹은 기회를 노려 살해하려 한다는 말이나 혹은 화(禍)를 즐긴다는 지목이 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것인데 대단한 기세로 변명한 것은 단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심법(心法)이라고 한 구어(句語)에 있었을 뿐입니다. 처음에 연차(聯箚)를 가지고 두 마음을 품은 것이라 하여 대신을 장해(狀害)한 자가 김일경·박필몽이 아니었습니까? 을사년340) 에 있었던 화변도 죄를 얽어 대신을 살해하기 위한 무안(誣案)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저 심악은 눈을 부릅뜨고 기세를 돋구어 기필코 연차를 몰아붙여 말하기를, ‘두 마음을 품었으나 계책을 잘못 쓴 것을 서운하게 여겼다.’ 하였는데, 이에서 또 무안(誣案)의 일변(一變)이 있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부호(傅護)한다는 지목을 면하려고 하였으나,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발계(發啓)가 있은 뒤에 이르러서는 심악을 편든 사람은 말하기를, ‘두 마음이라고 한 것은 감히 연차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단지 연차 밖의 심적(心迹)에 대해 논한 것이다.’ 하였는데, 신은 연차 이외에 다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여기에서 더욱 사리에 어긋난 피사(詖辭)·둔사(遁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리고, 소장은 도로 내주도록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유정(柳綎)·한사득(韓師得)을 승지로, 이기진(李箕鎭)을 대사헌으로, 유엄(柳儼)을 대사간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사간으로, 윤득징(尹得徵)을 헌납으로, 홍창한(洪昌漢)·송질(宋瓆)을 정언으로, 이중경(李重庚)을 장령으로, 이성효(李性孝)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22일 갑인
소대를 행하였다.
7월 23일 을묘
소대를 행하였다.
남태온(南泰溫)을 집의로,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문학으로, 임상원(林象元)을 설서로 삼았다.
7월 25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부산(釜山)의 왜관(倭館)에서 날마다 공급하게 되어 있는 숯을 잇대어 주지 않는다 하여 함부로 관문(館門)을 나왔으므로, 임금이 그 죄가 부산 첨사(釜山僉使)에게 있다 하여 좌수사에게 명하여 첨사를 잡아다가 곤장 50대를 치게 하고, 동래의 겸관(兼官)과 훈도(訓導)·별차(別差)·역관(譯官)들도 모두 나문(拿問)한 다음 정죄(定罪)하게 하였다. 이날 이관후(李觀厚)에 대해 작처(酌處)하였다. 장령 이중경(李重庚)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중경이 대각을 너그럽게 용납함으로써 언로를 넓히라는 뜻으로 진계(進戒)하고, 또 문자 때문에 사람을 죄주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헌납 윤득징(尹得徵)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득징이 전계(傳啓)하기를 마치고 소회를 진달하여 이관후를 감사(減死)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허추(許錘)는 완전히 석방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윤득징이 두 사람의 일에 대해 발계(拔啓)하지 않고 단지 소회만 진달했으니, 이미 대체(臺體)를 잃은 처사였다. 또 그의 거조와 언어에 실착(失錯)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이 조금 전에 면계(勉戒)하였으니, 내가 어찌 대각을 경시하겠는가? 그러나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또한 어찌 칙려(飭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득징은 크게 대체(臺體)를 어겼다."
하니, 윤득징이 드디어 인피(引避)하고 나갔다.
승지 정언섭(鄭彦燮)이 상소하여 허추(許錘)·이시희(李時熙)를 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으니, 따르지 않았다.
진향사(進香使) 함평군(咸平君) 이홍(李泓), 부사 정석오(鄭錫五), 서장관(書狀官) 임정(林珽)이 돌아왔는데, 임금이 인견하였다.
7월 27일 기미
사헌부 【집의 남태온(南泰溫)·장령 이중경(李重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고, 또 청하기를,
"이관후를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시고, 엄중히 국문하여 율에 의거하여 처단하소서. 허추·이시희는 먼 곳으로 정배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이성효(李性孝)가 상소하여 이관후를 다시 신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8일 경신
사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동필(金東弼)을 판윤으로, 서명형(徐命珩)을 헌납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정언으로 삼았다.
7월 29일 신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이 부스럼병을 앓았으므로 조정의 2품 이상의 관원들이 문안하였다. 의녀(醫女)가 입진(入診)하고 나서 침을 맞았다. 이로부터 삼제조(三提調)가 돌아가면서 숙직하였고 조정이 연일 뜰에서 문후하였다.
사헌부 【집의 남태온(南泰溫)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허추·이시희를 먼 곳에 정배시키는 일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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