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2권, 영조 12년 1736년 8월

싸라리리 2025. 9. 1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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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갑자

대사헌 이기진(李箕鎭)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上疏)하여 고(故) 상신(相臣) 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의 시호(諡號)를 의논할 때 옥당(玉堂)에서 인혐(引嫌)하니, 연석(筵席)에서의 하교가 있은 뒤에도 오히려 출사(出仕)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으로 책망하는 비답을 내렸다.

 

이광세(李匡世)를 대사간으로, 정이검(鄭履儉)을 정언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대사성으로, 오언주(吳彦胄)를 교리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4일 을축

밤에 유성(流星)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尺)이었다.

 

8월 5일 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우상 송인명(宋寅明)을 돈면(敦勉)할 것을 청하고, 또 송진명(宋眞明)·조현명(趙顯命)을 무겁게 추고하여 올라오도록 재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무과(武科) 양소(兩所) 거자(擧子)들의 수효가 균일하지 못하다 하여 해서(海西)와 관동(關東)의 일소(一所)·이소(二所)를 환부(換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집의 남태온(南泰溫)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서명형(徐命珩)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판결사 심일희(沈一羲)는 인품이 미천하고 명망이 가벼우며, 대동 찰방(大同察訪) 이양(李瀁)은 본래 미천한 사람으로 그의 집이 도내(道內)에 있으니,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8월 6일 정묘

호서 어사 정이검(鄭履儉)이 복명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서계를 열람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수령이 어찌 반드시 혁혁한 성문(聲聞)이 있은 뒤에야 잘 다스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명예를 요구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책벌(責罰)을 가해야 하겠지만 백성들은 원망을 반드시 조정에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원망이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벌을 가하지 않게 되면 조정에서도 명예를 요구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 되니, 장차 어떻게 아랫사람을 책망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하였다. 온양 군수(溫陽郡守) 이시정(李時鼎)은 치행(治行)이 제일이라는 것으로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그 나머지 불법을 저지른 3인에 대해서는 엄중히 조사하여 무겁게 감죄(勘罪)하라고 명하였다. 정이검이 다음날 또 상소(上疏)하여 공주 판관(公州判官) 조언빈(趙彦彬), 보령 현감(保寧縣監) 권집(權䌖)이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진달하면서 파직시켜야 한다고 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8월 7일 무진

이형좌(李衡佐)를 판 결사로, 남태온(南泰溫)을 승지로, 정형복(鄭亨復)을 부수찬으로, 임정(任珽)을 집의로, 김정윤(金廷潤)을 장령으로 삼았다.

 

8월 9일 경오

대비전(大妃殿)의 환후가 평복(平復)되었으므로 상사(賞賜)가 있었는데, 제조 김흥경(金興慶)에게는 안장을 갖춘 내구마(內廐馬)를 면급(面給)하게 하였고 아들이나 사위 가운데 1인에게 관직을 제수하게 했으며, 제조 조상경(趙尙絅)과 부제조 이수항(李壽沆)에게는 가자하게 하였다. 주서 윤경주(尹敬周)는 6품으로 올리게 하고 의관(醫官) 6인은 가자하게 하였다. 하인(下人)과 의녀(醫女)에게는 미포(米布)를 차등 있게 반사하게 하였다. 또 입시했던 군수 김구연(金九衍)에게는 내구마를 면급하게 하고, 본전(本殿)의 승전 내관(承傳內官) 2인은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박필균(朴弼均)을 수찬으로 삼았다.

 

이날 임금이 봉조하 이광좌(李光佐)와 판부사 심수현(沈壽賢)을 인견하고 동궁(東宮)의 기후(氣候)에 대해 하문하였다. 임금이 임정(任珽)이 지은 춘첩시(春帖詩)의, ‘지금의 옷이 옛날 옷보다 길다.[今衣長昔衣]’라는 글귀를 읊으면서 이르기를,
"이제 점차 옷이 길어지는 것을 깨닫겠다."
하고, 두 신하에게 오는 11일에 봉조하 이광좌와 함께 동궁에 들어가 보도록 명하였다.

 

병조 참판 이보혁(李普赫)이 어버이의 병 때문에 진소(陳疏)하고 곧바로 나갔으므로, 승정원에서 추고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숙위(宿衛)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경솔히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니, 일이 금추(禁推)341)  에 해당된다. 그러나 어버이의 병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무겁게 추고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광도(全光道) 흥양현(興陽縣)에서 상선(商船)이 폭풍을 만났는데 18인이 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휼전(恤典)을 행하였다.

 

8월 10일 신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자전(慈殿)의 체후가 평복(平復)되었다 하여 진연(進宴)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자전께서 사양하기 때문에 주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예조에서 전례에 따라 진전(進箋)·방물(方物)·물선(物膳)에 대해 품지(稟旨)하니, 진전과 물선만을 허락하였다. 임금이 대전(大殿) 이하도 방물과 물선을 모두 정지하게 하였다.

 

사간원 【헌납(獻納) 서명형(徐命珩)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릉(思陵)의 어로(御路)를 범하여 개간한 백성들을 적발하여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황해도 서흥현(瑞興縣)의 민가에 암퇘지가 머리는 하나, 몸통이 둘, 발이 여덟, 꼬리가 둘인 새끼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곧 죽었다.

 

8월 11일 임신

이주진(李周鎭)을 승지로, 김상적(金尙迪)을 정언으로, 이경철(李景喆)을 경상 우수사로 삼았다.

 

임금이 봉조하 이광좌(李光佐)·이태좌(李台佐), 판부사 심수현(沈壽賢)을 인견했는데, 보덕 윤취함(尹就咸), 설서 송익휘(宋翼輝)가 따라서 들어왔다. 임금이 내관에게 명하여 동궁을 안고 오게 하였다. 동궁이 당관(唐冠)에 청사 도포(靑紗道袍), 홍대(紅帶)와 흑화(黑靴)를 갖추었는데, 임금이 직접 안고 동궁에게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이 네가 오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다."
하였는데, 이광좌 등이 보양(輔養)하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고, 윤취함·송익휘가 동궁으로 하여금 궁료를 자주 접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제(禮制)에 구애되어 자주 접견하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송(宋)나라 《명신록(名身錄)》의 유지(劉贄)의 일에 대해 강하였는데, 시독관 유건기(兪健基)가 말하기를,
"유지의 소장에서 이른바, ‘충후(忠厚)한 마음을 지닌 노성(老成)한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라고 배척하고, 젊고 호협(豪俠)하여 영리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은 쓸 만한 사람이라 하여 취하고, 도리를 지키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속물(俗物)이라고 하고 있다.’고 한 것이 매우 좋습니다. 오늘날 조정에서도 이것을 보고 경계로 삼는다면 반드시 보익(補益)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우찬성 세자 이사(世子貳師)인 정제두(鄭齊斗)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몹시 애도하여 슬퍼하는 윤음(綸音)을 내리고, 장제(葬祭)의 비용을 하사하였으며,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문강(文康)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제두는 자(字)가 사앙(士仰)으로서,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고, 고(故) 상신(相臣)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인데 타고난 자질이 영위(英偉)하고 명수(明粹)하였다. 일찍이 도(道)에 뜻을 두었으므로, 과거 공부를 폐기하고 정도와 진리를 지켰다. 그의 학문은 간이(簡易)함과 독실(篤實)함을 주로 하고 있는데, 정사(政事)에 미루어 치란(治亂)의 연혁을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환하였으며, 갑병(甲兵)과 전곡(錢穀), 백가(百家)의 술수(術數)까지도 널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화도(江華島)에 복거(卜居)하고 있었는데, 숙종조(肅宗朝) 때 천거에 의하여 곧바로 6품의 관직을 제수받았었다. 여러번 대성(臺省)과 방백(方伯)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간혹 군읍(郡邑)에는 부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특이한 치적을 남겼다. 성상께서 임어(臨御)함에 이르러서는 예우가 더욱 융숭하였고, 사림(士林)에서 존중하고 흠앙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88세이다. 세상에서는 하곡 선생(霞谷先生)이라고 불렀다. 정제두는 젊어서는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을 좋아했었는데 선배와 사우(士友)들이 서찰을 보내어 규책(規責)한 탓으로 마침내 정주(程朱)의 법문(法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평생 강설(講說)을 일삼지 않았고 논저(論著)를 즐겨하지 않았다고 한다.

 

8월 12일 계유

임금이 수서(手書)로 유시(諭示)하여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을 부르기를,
"아! 보상(輔像)의 직임은 임금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어떠한가? 과거의 사첩(史牒)을 살펴보면 임명하고서 의심한 경우도 있고 기용되어서 참소를 받은 경우도 있었으므로, 내가 일찍이 이에 대해 개연(慨然)하게 여기고 있었다. 지금 경이 무함받은 것은 그 까닭이 시상(時象)을 조정하려 한 데에 불과하였으니, 지난번 박규문(朴奎文)의 문자에서 이미 환하게 알았고, 근래에 배윤명(裵胤命)의 난초(亂招)가 있었으나 무함이었음을 자복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부질없이 나를 피곤하게 하기만을 일삼고 있는가? 글로는 뜻을 다 전달할 수 없으니, 즉시 사관과 함께 들어와서 나의 면유(面諭)를 듣도록 하라."
하니, 송인명이 비로소 명을 받들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신축년342)  ·임인년343)   무렵부터 이미 경은 쓸 만한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에 제갈양(諸葛亮)과 왕맹(王猛)344)  의 일을 인용하여 견주었던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송진명(宋眞明)과 조현명(趙顯命)이 아직도 명을 받들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독칙(督飭)을 가해야 합니다. 조현명은 일신의 명절(名節)만을 돌아보는 사람이므로 그의 형 조문명(趙文命)이 일편 단심 순국(殉國)한 것과는 다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거센 바람이 불어야 쓰러지지 않는 억센 풀을 알 수 있고, 나라가 혼란할 때를 당해서야 충성스런 신하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오로지 조현명이 여기에 해당이 된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금천 군수(金川郡守) 민형수(閔亨洙)는 신에게 혐의가 있다고 일컬으면서 역사(歷辭)345)  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정미년346)  에 대사간으로서 진소하였을 때 민진원(閔鎭遠)을 조금 핍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신년347)   이후에 비로소 민진원의 마음과 힘을 다한 지극한 정성에 감복하여 전석(前席)에서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민형수는 원래 혐의스러워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마땅히 나문(拿問)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공신과 충신의 후손은 적장(嫡長)을 제외하고는 혼동하여 녹용(錄用)하지 말라는 것은 일찍이 유척기(兪拓基)의 소장과 고(故) 상신 조문명(趙文命)의 아룀으로 인하여 정식(定式)한 바가 있었습니다. 지난번 도정(都政) 때 충신의 지손(支孫)으로서 초사(初仕)에 의망되어 낙점받은 사람이 2인이나 있었기 때문에 신이 정리(政吏)를 불러서 그들로 하여금 체직시켜 줄 것을 정장(呈狀)하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뒤 신이 인입(引入)함으로 인하여 결국 자처(自處)하지 않고 말았는데, 마땅히 모두 태직(汰職)시켜야 하며, 전관(銓官)도 추고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8월 14일 을해

이조 판서 송진명(宋眞明)과 예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도성 밖에 이르렀는데, 패초(牌招)를 어겼다가 임금이 들어와서 면유(面諭)를 들으라고 명하니, 송진명과 조현명이 명을 받들고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위유(慰諭)하니, 조현명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원컨대 이 한 목숨을 국가의 위급한 시기에 바치게 해주소서."
하니, 임금이 누누이 머물기를 권면하였다. 조현명이 권요직(權要職)을 해면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외방에 나가 있으면서 참언(讒言)을 피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에게 하문하여 보겠다."
하고, 이어 송진명의 전임(銓任)을 체차시키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례(賀禮)하는 의식(儀式)이 내일로 박두했는데 대신(臺臣)들 가운데 말미를 얻어 외방에 나가 있는 사람과 출숙(出肅)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이에 대해 품계하니, 모두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서종급(徐宗伋)을 대사간으로, 이선행(李善行)을 사간으로, 이덕중·박필재를 정언으로, 송질(宋瓆)을 지평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응교로 삼았다.

 

8월 15일 병자

자전(慈殿)의 체후(體候)가 평복되었다 하여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친히 임어하여 뭇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대신들과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국구(國舅) 어유귀(魚有龜), 종신(宗臣) 밀창군(密昌君) 직(樴) 등이 전상(殿上)에 올라가서 합사(合辭)하여 동조(東朝)께 진연(進宴)을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경 등의 요청에 따라 조용히 주달하여 보겠으나, 회청(回聽)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정언 박필재(朴弼載)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헌대(憲臺)를 더럽히고 있었을 적에 총총히 한마디 한 것은 마침 풍랑이 소용돌이 칠 때를 당하였으므로, 구구한 혈성(血誠)은 오로지 조정의 시상(時象)을 진정시키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갓 신을 신은 채 발바닥을 긁는 격이어서 쓸데없이 해치려고 하는 노여움만 불렀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전후 마구 공격하는 말과 원한을 품은 소장이 계속되고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뼈가 시리고 사무치는 근심을 품게 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지중추 윤순(尹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떠날 때에 한마디 말을 하여 기유년348)  에 있었던 연대(筵對)에서의 고심에 대해 대략 신리(紳理)했었습니다. 그런데 시의(時議)가 비등하여 성교에 없던 말을 창출하였다는 것으로 죄안을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성명께서 신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살피셨고 기주관(記注官)이 근거가 있음을 증언하였습니다마는, 신이 숨을 죽이고 엎드려 감죄(勘罪)를 기다리는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을 따름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결연히 떠나간 것은 지나친 일인 줄 알아야 한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경과 같다면, 누가 띠를 띠고 조정에서 벼슬하려 하겠으며, 나 또한 누구를 부릴 수 있겠는가? 다시 지나치게 사퇴하지 말고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조상경(趙尙絅)을 이조 판서로, 이유(李瑜)를 병조 판서로, 조명익(趙明翼)을 대사헌으로, 유시모(柳時模)를 사간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16일 정축

임금이 소대를 행하여 처음으로 《송사(宋史)》를 강하였다.

 

이날 정시(庭試)를 설행하려 했는데, 시관(試官)과 대신(臺臣) 가운데 패초를 어긴 사람이 많았다.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기강은 한심스럽다고 할 만하다. 임금은 앉아서 밤을 새우는데, 신하들은 오만하게 누워서 패초를 어기고 있다. 과일(科日)이 오늘인데 아직도 시장을 설치하지 않아서 문무의 거자들이 시소(試所)를 방황하고 있다. 이렇게 법전(法殿) 칙려(飭勵)를 심상하게 여기고 있으니, 대사간 서종급(徐宗伋)은 삭출(削黜)하여 징계시키도록 하라. 정언 박필재(朴弼載)는 겨우 문후(問候)하는 반열에 참여했다가 상소하고는 곧바로 돌아갔으니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신시(申時)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시장(試場)을 설치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인재를 잃을 염려가 없지 않으니, 시소에서 시권(試券)을 걷는 시각을 조금 늦추도록 하라."
하였다.

 

조석명(趙錫命)을 대사간으로, 송교명(宋敎明)을 정언으로, 윤순(尹淳)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8월 19일 경진

이정제(李廷濟)를 판의금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호조 참판으로, 정이검(鄭履儉)을 지평으로, 김상신(金相紳)을 정언으로, 조태언(趙泰彦)을 필선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부산 첨사 정양빈(鄭暘賓)은 무신년349)   영읍(嶺邑)에 있었을 적에 죄를 지었는데, 이번의 재배(除拜)는 너무 갑작스럽다는 것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그때의 감사(監司)였던 황선(黃璿)이 일의 상황을 두루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끝내 진군(進軍)하여 적을 소탕하고 섬멸하였으니, 공에 의거하여 죄를 절감해야 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추죄(追罪)한다면 이것이 어찌 법을 미덥게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였다. 송인명이 동래부(東萊府)의 장주(狀奏)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전일에 조현명(趙顯命)이 아뢴 바로 인하여 표류해 온 왜인(倭人)은 5일을 경과하여 체류하지 못하게 했었는데, 이는 비용을 아낀다는 의도에서 나온 조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닿을 듯한 풍파를 만났을 때에는 어떻게 회선(回船)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교린(交隣)의 도리에 있어 성급하게 핍박하는 것을 면치 못하니, 차라리 흔쾌하게 신의를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바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돌려 보내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면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새 법은 박절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은 기한을 넘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면 원망을 취하게 되고 또 경시당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어 회유(回諭)하기를,
"교린은 마땅히 신의를 앞세워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날짜를 정하여 식량을 지급하는 것은 훗날의 폐단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다. 저들이 이미 이런 것으로 우리를 대우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찌 도리어 이런 것으로 저들을 대우할 수가 있겠는가? 해도(海道)의 파랑(波浪)은 미리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일이 간섭하여 제지하는 것 같지만 어찌 소각(銷刻)350)  에 구애받아 흔쾌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제도(諸道)의 포폄(褒貶)에 관한 계본(啓本)을 근래 점하(點下)351)  한 것이 많은데다 이조에게 또 까다롭게 적발하여 계파(啓罷)한 경우도 많아서 자주 체직시키는 폐단을 초래하고 있으니 이는 잗단 일에 직접 간여하지 않는다는 뜻에 매우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포천 현감(抱川縣監) 김상열(金相說)은 아전들의 말을 따르기는 했으나, 또한 백성들의 칭예(稱譽)가 많다는 것으로 제목을 삼아 상고(上考)에 두었는데, 이조에서 계파(啓罷)했으므로 포천의 백성들이 떼 지어 비국에 호소하여 잉임(仍任)시켜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는 뒷폐단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이미 물리쳤으나, 이조에서 계파한 것은 전최(殿最)에 견주어 다른 점이 있으니, 잉임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조에서 개탁(開拆)하는 것도 하나의 전최이니 잉임시킬 수는 없다. 내가 수령들을 가리려고 했기 때문에 이에 앞서도 점하(點下)한 것이 상당히 있었고, 체역(遞易)시킨 것도 매우 많았었다. 그러나 또한 폐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근일에는 점차 드물게 하고 있다. 개탁할 때 까다롭게 적발하는 것은 그 의도가 자리를 만들려는 데 있는 것이니, 이조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0일 신사

김한철(金漢喆)을 정언으로, 심택현(沈宅賢)을 판의금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지평으로 삼았다.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헌(申櫶) 등이 상소(上疏)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고, 이어 이인지(李麟至)의 무욕(誣辱)에 대해 변해(卞解)하기를,
"이인지는 곧 고묘소(告廟疏)를 올린 소두(疏頭) 이재헌(李在憲)의 아들이고, 흉적 윤이익(尹以益)의 사위입니다. 김성탁(金聖鐸)에 이르러서는 이현일(李玄逸)의 문도(門徒)로서 전적으로 이인지의 의도를 답습하였는데, 한 사람이 기치를 세우자 온 도(道)가 그림자처럼 빠르게 뇌동(雷同)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현일은 기사년352)  의 흉론(凶論)을 주장하여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묘비(墓碑)를 찬술하면서 이에 감히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자손록(子孫錄)에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영남 사람들의 풍기(風氣)가 모두 바뀌어져서 지난해에 있었던 조덕린(趙德隣)의 한 소장은 사특한 궤변(詭辯)을 교묘히 늘어 놓은 것으로, 이러한 의논을 은밀히 전하여 암송하고 있으니 온 도의 인심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황간(黃澗)의 한천(寒泉)이란 곳에 송시열의 영령(英靈)을 모신 곳이 있는데, 이인지의 소하(疏下) 4, 5인이 갑자기 들이닥쳐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면사(面紗)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이뒤로 또 무슨 이변이 발생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유시(諭示)한 적이 있다. 돌아가서 학업을 연마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1일 임오

소대를 행하였는데, 《명신록(名臣錄)》을 강하였다.

 

8월 22일 계미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김동필(金東弼)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8월 23일 갑신

사헌부 【장령 송시함(宋時涵)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공홍 수사(公洪水使) 허정(許晶)은 늙어서 혼암하고 잔약하며, 구성 부사(龜城府使) 양빈(梁彬)은 늙고 혼암하여 일을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모두 개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 【정언 김한철(金漢喆)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덕린(趙德隣)이 지난해에 올린 한 통의 소장은 모두 요사하고 패려한 말이었는데, ‘정명(正名)’이란 두 글자를 거론한 것은 더욱 흉악하고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실로 흉적이 쓴 격서(檄書)의 효시(嚆矢)이고 괘서(掛書)의 근저(根柢)이었는데, 큰 역적이 법망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에 물정(物情)이 오래도록 놀라고 있으니, 절도(絶島)에 정배시키소서. 경상도의 전 수사 유경장(柳經章)은 부임하는 길에서 국기일(國忌日)을 당하였는데도 풍악(風樂)을 성대하게 울렸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하고, 또 기내(畿內)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에는 더 급재(給災)353)  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조덕린에 대한 일은 너무 지나치다. 유경장의 일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조처하게 하겠다. 말단의 일은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김한철이 드디어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영남(嶺南)에서 의리가 회색(晦塞)되어 변괴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덕린의 정명설(正名說)이 저절로 하나의 의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을사년354)  의 흉론(凶論)은 밖으로는 진계(陳戒)를 핑계대어 부도한 말을 삽입한 것이었으니, 이른바 당연한 법칙을 각기 극진히 행하여 타고난 천성을 굳게 지켜 보전해야 된다는 등의 말들은 진실로 이미 한없이 음특(陰慝)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북두성(北斗星)이 기울어지면 임금이 잠자리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데, 이런 때에 잃어버렸던 일을 시험삼아 다시 더듬어 보면 진성(眞性)이 그 가운데 있고 양심(良心)이 앞에 보이게 된다.’고 논하였으며, 끝으로 결론짓기를, ‘백세(百世) 전과 천세(千世) 뒤에 반드시 정명(正名)으로 실상을 구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인데, 지금 세상에 있어 실상에 의거하여 정명(正名)시킬 분은 우리 전하(殿下)에게 있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수미(首尾)가 서로 조응(照應)되고 지의(指擬)가 망측하기 그지없습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그의 소장을 가져다가 다시 열람하여 보신다면, 그것이 역적을 위한 격서(檄書)의 장본이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찬배시키라는 명을 내릴 적에는 단지 황옥(黃屋)355)  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지위를 요구할 뜻이 없었다 하지만, 창졸간에 눈물을 훔치고 즉위(卽位)하게 되었다는 등의 말로 죄안(罪案)을 만들었는데, 얼마 안 되어 곧 사면(赦免)시키고 제수(除授)하라는 명이 잇달았으므로, 풍지(風旨)를 받드는 무리들이 서로들 전파하여 의리를 만들어 내어 와언(訛言)으로 선동하였으며, 쓸리듯이 같은 궤도로 치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변(逆變)이 있은 뒤에는 마땅히 거괴(巨魁)를 섬멸하는 형률을 시행했어야 하는데, 아직껏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송교명(宋敎明)이 처치(處置)하기를,
"토죄(討罪)한 것이 이미 대체(臺體)에 맞는 것이었는데, 비답에서 윤허하지 않는 것을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였다.

 

8월 24일 을유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8월 26일 정해

소대를 행하였다.

 

8월 27일 무자

유척기(兪拓基)를 평안도 관찰사로, 이기익(李箕翊)을 지돈녕으로, 조원명(趙遠命)을 이조 참판으로, 최명주(崔命柱)를 공홍 수사로 삼았다.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영사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전 안흥 첨사(安興僉使) 이희보(李喜報)는 군향(軍餉)을 요리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곡식을 대여하여 주고는 배로 징수하였으니, 시종 가운데에서 공홍 도사(公洪都事)를 택차(擇差)하여 사정(査正)하게 한 다음 탕감(蕩減)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송수겸(宋守謙)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김한철(金漢喆)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덕린(趙德隣)의 계사(啓辭)에 이르러 임금이 송인명에게 하문하기를,
"대신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덕린의 소장을 신이 상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만, 고(故) 상신(相臣) 조문명(趙文命)이 항상 이 소장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으니, 이는 그 소장의 내용이 매우 음흉하지만, 또한 성죄(聲罪)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조문명이 말을 전해 보내어 그로 하여금 대죄(待罪)하게 했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조문명과 신이 전조(銓曹)에 들어가 있을 적에 조덕린을 승지의 의망에서 빼어서 저지하여 기용하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품은 글을 읽어 편안하게 분수를 지키므로, 도내(道內)에서의 명망이 무겁습니다. 대저 영남 사람들 가운데 인망이 두드러진 사람들은 모두 잘못 빠져들고 있고, 이들을 공척(功斥)하는 무리는 인망이 도리어 그만 못합니다."
하였다. 김한철이 또 기필코 처벌해야 한다고 극력 아뢰니, 임금이 을사년356)  의 《일기(日記)》를 들여오게 하여 승지 남태온(南泰溫)으로 하여금 그때의 하교를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조덕린의 일에 대해서는 미처 상세히 알지 못했었다. 이제 대신의 말을 듣건대, 풍릉(豐陵)357)  이 말을 전하여 보낸 것은 고심(苦心)한 끝에 나온 조처였는데도 이에 도리어 듣지 않았으니, 그의 마음이 의심스럽다."
하고, 드디어 사간원의 계청을 따랐다.

 

임금이 《여사서(女四書)》의 서문(序文)을 친히 지어서 내리고 나서 홍문 제학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8월 28일 기축

예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을 능행(陵行) 때 찬례(贊禮) 문제로 네 번 패초(牌招)하니, 비로소 명을 받들었다. 하루에 네 번 패초한 일이 전에는 없었다.

 

8월 29일 경인

임금이 사릉(思陵)에 나아가 예(禮)를 마치고 나서 능에 올라가 봉심(奉審)하였다. 그리고 참봉 정운희(鄭運熙)를 불러 본릉의 고사(故事)에 대해 하문하였다. 정운희는 복릉(復陵)되기 전의 봉사인(奉祀人)이었던 찬성 정미수(鄭眉壽)의 후손인데, 임금이 특명으로 본릉의 봉사(奉事)로 승차(陞差)시켰다. 승지를 보내어 대원군(大院君)358)  의 묘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예관을 보내어 연산군(燕山君)·광해군(光海君)의 묘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낙창군(洛昌君) 탱(樘)의 상소로 인하여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의 아버지인 판중추 정세호(鄭世虎)의 묘가 사릉(思陵)의 동구(洞口)에 있다는 것으로 똑같이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미리 금위군(禁衛軍)에게 주정소(晝停所)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오시(午時)에 환가(還駕)하여 막차(幕次)로 들어가 승상(繩床)으로 나아가니, 병조 판서 이유(李瑜)가 갑주(甲胄)를 갖추고 군례(軍禮)로 알현하였다. 경기 감사·광주 부윤·여주 목사를 인견하였으며, 밤 초고(初皷)에 환궁(還宮)하였다.

 

지중추 윤순(尹淳)이 길가에서 지영(祗迎)하니, 대가(大駕)를 수행하라고 명하였는데, 윤순이 소장을 올리고 곧바로 돌아갔으므로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8월 30일 신묘

기사관(記事官) 이성중(李成中)이 아뢰기를,
"일찍이 한추위와 한더위에는 경연(經筵)을 정지할 것을 품계한 일에 대해 《실록》을 상고하라고 명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포쇄(曝曬)할 때 상고하여 보았더니, 명종(明宗)병오년359)   여름 석 달 동안 잇따라 하루에 세 번 강석(講席)을 베풀었으므로 대신들이 옥체가 손상된다 하여 정강(停講)할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옥당(玉堂)에서는 폐지시켜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습니다. 선조조(宣祖朝) 때에는 여름과 겨울에 잇따라 경연을 설행하였고 만년(晩年)에 가서야 비로소 정지했습니다. 인조조(仁祖朝) 때에는 가끔 설행하다가 병자년360)   6월에야 비로소 탈품(頉稟)이 있었습니다. 선조(先朝) 때에는 임술년361)  ·계해년362)   무렵에 가끔 강연(講筵)을 설행했었는데, 오도일(吳道一)이 오랫동안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진소(陳疏)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추위와 한더위라고 해서 어떻게 시사(視事)의 정지를 품계할 수가 있겠는가? 선조(先朝)께서는 날마다 상참(常參)에 나가셨었다. 임금은 하루에 만기(萬機)를 보살펴 처리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루라도 시사를 폐지할 수 있겠는가? 시사라고 이름했는데도 춥거나 덥다 하여 행하지 않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뒷날 태만한 사람이 어찌 이를 핑계삼아 일을 폐지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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