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신유
이익정(李益炡)을 헌납으로 삼았다.
10월 2일 임술
임금이 반궁(泮宮)403) 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시사(試士)하였는데, 명륜 당명(明倫堂銘)을 출제(出題)로 내걸어 윤득경(尹得敬) 등 5인을 뽑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4일 갑자
밤에 번개가 쳤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10월 5일 을축
김약로(金若魯)를 승지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판부사 이의현(李宜顯)이 양주(楊州)에 있는데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진념(軫念)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말하지 않았다면 대신이 늠식(廩食)이 없을 뻔하였다. 이뒤로 대신이 외방에 있는 경우에는 해조(該曹)에서 전례에 의거하여 지방관으로 하여금 늠식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도적이 포졸(捕卒)을 살해하여 그 시체를 큰길 가운데 눕혀 놓았는데, 대신이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송언섭(宋彦燮)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옷을 벗어서 서로 주고 술잔을 들면서 진심을 나눈 사람은 이하택(李夏宅)이고, 사람을 보내어 맞이하여 오고 재삼 왕래한 사람은 이인좌(李麟佐)입니다. 서한(書翰)을 넣고 옷을 꿰매었으니, 결단코 미리 준비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그들 부자의 이름이 역적들의 공초에 낭자하였고 서쪽 변방에 귀양가서 있을 적에는 위문(慰問)이 답지했었으니, 신은 이명언(李明彦)의 부자를 나국(拿鞫)하라는 청에 대해 흔쾌히 윤허를 내리실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권경(權儆)이 일찍이 위원 군수(渭原郡守)가 되었을 적에 변방 백성들을 조발(調發)하여 이명언을 위해서 땅을 개간하여 옥토(沃土)를 만들어 주었는가 하면, 이하택의 사분(私憤)을 위하여 죄 없는 산승(山僧)을 때려 죽였으니,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조덕린(趙德隣)의 일에 대해 논하기를,
"소장 내용이 음참(陰慘)함은 정명(正名)이란 한 조항뿐만이 아닙니다. 배윤명(裵胤命)의 무리가 온갖 해괴한 짓을 계속 발생시켜 단서(端緖)와 맥락(脈絡)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근원을 구명해 보면 조덕린의 소장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하택·조덕린의 일에 대해 윤허와 처분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권경의 일은 과연 이렇게 했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먼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하라."
하였다.
성주(星州)를 강등시켜 성산현(星山縣)으로 삼았다. 이는 관장(官長)을 시해한 죄인 악덕(惡德)이 입적(入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6일 병인
밤에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0월 7일 정묘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야대를 행하고 선온(宣醞)를 내리면서 이르기를,
"낮에 수괘(需卦)를 강하고 밤에 법온(法醞)을 하사하는 것은 수괘의 먹고 마시면서 잔치를 베풀어 즐긴다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10월 8일 무진
밤에 유성이 성성(星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김취로(金取魯)를 예조 판서로, 김시형(金始炯)을 호조 참판으로, 조세후(趙世垕)를 장령으로, 유최기(兪最基)·박필균(朴弼均)을 수찬으로 윤급(尹汲)을 검상으로, 한사득(韓師得)을 대사간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발탁하여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10월 9일 기사
이기익(李箕翊)을 공조 판서로, 조명교(曺命敎)를 승지로 삼았다.
사간원 【정언 민택수(閔宅洙)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다. 조덕린(趙德隣)에 대한 일은 가중시켜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할 것을 청하였다. 또 심유의(沈游義)·박만보(朴萬普)·유득장(柳得章)을 복관(復官)시키라는 명을 도로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또 논하기를,
"공홍도(公洪道)의 전 수사 이의익(李義翼)이 금산(禁山)의 소나무를 베어 취하여 송판 1백여 부(部)를 만들어 자기의 집에다 운반해 두었습니다. 그 후임 수사인 조호신(趙虎臣)도 아울러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았다. 말단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헌부 【지평 이징규(李徵奎)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주천인(注薦人)404) 김범갑(金范甲)은 일찍이 위포(韋布)로 있었을 적에 유현(儒賢)을 무욕(誣辱)하였다가 호남으로 귀양을 갔었는데, 몰래 과장(科場)으로 달려와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술(代述)했었으니, 주천(注薦)에서 삭제시키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삼수 부사(三水府使) 정집(鄭檝)은 비루하고 패려하고 탐욕이 많으니, 파직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남부 참봉(南部參奉) 한명후(韓命垕)는 적간(摘奸)을 빙자하여 뇌물로 바치는 돈을 많이 거두어 들였으니, 태거(汰去)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범갑은 이미 지난 일인데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여 《명신록(名臣錄)》를 강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때에는 장돈(章惇)과 채경(蔡京)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렸으므로, 단정한 인사들이 거의 다 쫓겨났었다. 그래서 남조(南朝) 때에는 이시랑(李侍郞)405) 한 사람뿐이었고, 오국성(吳國城)406) 에 갈 때에는 건문(健文)407) 때의 정제(程濟)408) 만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하니, 참찬관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주변(朱弁)409) 등은 절의(節義)가 탁월하였으나, 모두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들이었습니다. 당시에 어찌 존대와 총애를 받고 있는 이들 가운데 위임(委任)할 만한 신하가 없었겠습니까마는 끝내 순절(殉節)한 사람은 곧 미천한 위포(韋布)에서 나왔습니다. 진실로 휘종과 흠종이 널리 초야에 묻혀 있는 어진 이들을 구하여 국사를 맡겼더라면, 거의 미연에 화(禍)를 없앨 수 있었을 것입니다. 평시에는 배척당하여 멀리 쫓겨나 있었으니, 화란(禍亂)이 일어나게 되면 한 번 죽기를 각오하는 사람은 모두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하니 임금이 용사(用捨)에 대해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집의 허옥(許沃)이 상소하여 김범갑(金范甲)을 삭천(削薦)시키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당동 벌이(黨同伐異)의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라고 아뢰니, 김범갑의 일은 어제 이미 유시(諭示)했다고 비답하였다.
10월 11일 신미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2일 임신
임금이 소대를 행하여 《송원강목(宋元綱目)》을 처음 강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송(宋)나라의 건국은 인후(仁厚)하고 정대(正大)하여 중문(重門)을 활짝 열어 놓은 것과 같다는 한 마디 말에서 태조(太祖)의 기상(氣象)이 염락(濂洛)410) 의 성대함을 계도(啓導)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하니, 시강관 심성진(沈星鎭)이 말하기를,
"군신 사이에 뜻이 잘 맞기로는 송 태조(宋太祖)와 조보(趙普) 같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조보는 심사가 매우 좋지 않았다. 두 태후(杜太后)의 병세가 위독했을 적에 신하로서 실제로 참여하여 들었으면서도 오로지 태종(太宗)에게 결납(結納)하려 했으니, 인신으로서 그렇게 한다면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하였다.
10월 13일 계유
정언 민택수(閔宅洙)가 상소하여 논하기를,
"통진 부사(通津府使) 유동무(柳東茂)는 배를 빼앗아 땔나무를 운반하여 뇌물로 바쳤으며, 영암 군수(靈巖郡守) 윤하(尹㵑)는 전에 호남의 두 고을을 맡았을 적에 1천여 결(結)을 재결(災結)로 만들어 도용(盜用)했으므로 남쪽 고을 사람들이 적쉬(賊倅)라고 지목하고 있으니, 모두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수령은 이미 치효(治效)가 있는 사람도 있으니,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였다.
김유경(金有慶)을 대사헌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10월 14일 갑술
응교 심성진(沈星鎭)이, 이판(吏判) 조상경(趙尙絅)이 윤봉조(尹鳳朝)를 아경(亞卿)과 도헌(都憲)에 잇따라 의망(擬望)한 것은 그릇된 일이라 하여 상소하여 공척하기를,
"죄를 진 것이 지극히 중하여 10년 동안 폐고(廢錮)된 사람을 한 전관(銓官)이 사사롭게 제멋대로 높은 자리에 서용하였으나, 대각(臺閣)에서는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으니, 한심스럽다고 할 만합니다. 청컨대 해당 전관은 파직하고, 말하지 않은 대관(臺官)에게도 아울러 견파(譴罷)를 가하소서."
하였는데, 이조 참의 정우량(鄭羽良)이 또 상소하여 도헌의 의망은 잘못이라고 논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비답을 내렸다.
소대를 행하였다.
이현보(李玄輔)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15일 을해
영부사 정호(鄭澔)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유하기를,
"선조(先朝) 때 기사(耆社)에 동참했던 사람이 홀로 장수(長壽)를 누렸었는데, 지금 졸서했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슬프기 그지없다. 예장(禮葬)을 내리고 3년 동안 녹봉(祿俸)을 줄 것이며, 그의 아들 정희하(鄭羲河)는 복제(服制)가 끝나기를 기다려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호는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손인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몸가짐이 강직하고 방정하였는데, 언론이 과격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위가 삼사(三事)411) 에 이르렀으나, 집에서는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한 적이 여러번이었다. 그 고장에 살면서 청신(淸愼)하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었다.
10월 16일 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달 지체하던 도목정(都目政)이 이제 한 달을 걸러서 있게 되었다. 지금 조용한 때에 풍랑을 일으킨 심성진(沈星鎭)의 소장의 대체(大體)는 옳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여 기관(機關)412) 을 만든다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하니, 김재로(金在魯)가 심성진의 소장은 그 의도가 전장(銓長)을 공격하여 제거시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왕성하게 말하고 나서 인하여 진달하기를,
"윤봉조(尹鳳朝)는 10년 동안 정폐(停廢)되었었는데, 한번 부망(副望)413) 에 주의한 것으로 인하여 전장을 문득 파직시킨다면, 신은 대총재(大冢宰)414) 가 이로부터 가벼워질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윤봉조는 막을 필요도 없고, 또한 구직(舊職)을 모두 회복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의 도(道)를 행하려 한다면 이것이 어찌 세도(世道)에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 심성진을 신구(伸救)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위에 있는데 그가 어떻게 그 도(道)를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최규서(崔奎瑞)의 시호(諡號)에 대한 일로 인하여 앙달(仰達)하기를,
"최규서는 곧 무신년415) 의 원공(元功)이었는데, 훈적(勳籍)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공의(公議)가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옛날 이자(李耔)는 제일 먼저 종계(宗系)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의논을 발의(發議)했었는데, 이자가 죽어서 광국훈(光國勳)에 기록되지 못하게 되자, 특별히 부조(不祧)416) 의 은전(恩典)을 내릴 것을 명했었습니다. 지금도 이 전례를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조 참판 조원명(趙遠命)과 참의 정우량(鄭羽良)을 체직시키고, 이덕수(李德壽)와 서명빈(徐命彬)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10월 17일 정축
크게 천둥하고 번개가 쳤는데, 정릉(靖陵)의 회목(檜木)이 벼락을 맞았다. 임금이 천둥의 이변 때문에 하교하여 자책하기를,
"아! 과인(寡人)이 부덕한 몸으로 어려운 세대(世代)에 군림(君臨)하게 되었는데, 덕은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기에 부족하고 도량은 사람들을 조화시키기에 부족하므로, 우리 백성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곤궁에 지치고 국가의 기강도 갈수록 더욱 해이해졌으니, 밤중에 일어나 생각하면 매양 한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니 인애(仁愛)하는 하늘이 어찌 칙려(飭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그 이유를 추구해 보면 진실로 과궁(寡躬)에 연유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부터 30일까지 감선(減膳)하겠다. 아! 지금의 시상(時象)을 돌아보건대, 잘 조화되었는가, 안 되었는가? 지금의 기강을 돌아보건대, 중시하고 있는가, 안하고 있는가? 대대로 녹(祿)을 먹고 있는 신하들은 각기 당여(黨與)를 편드는 마음을 품고 있고,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은 체통(體統)의 중함을 망각한 채 구습(舊習)을 답습하려 하면서 국법을 하찮게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제부터 이후로는 자신들의 마음을 정백(精白)하게 하여 나의 미치지 못한 점을 광보(匡輔)하고, 위로 하늘이 권면(眷勉)하는 뜻에 보답하여 대신과 승정원·옥당에서는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려 여덟 가지 조항을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건강을 보전하기 위한 절제(節制)에 더욱 유의하시고, 국가의 원대한 계모(計謨)에 유념하시어 기강을 진작시켜 온갖 법도를 엄숙하게 하고, 강덕(剛德)을 굳게 지켜서 음붕(淫朋)을 타파하소서. 그리고 편사(偏私)한 마음을 엄격하게 끊어 표준을 확립하고, 근습(近習)을 엄중히 단속하여 원망과 비방을 해소시키고, 인재 구하는 것을 시급히 여겨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을 강구하게 하고, 변방의 직임을 가려서 차임하여 환란을 방지하는 도구로 삼으소서."
하고, 인하여 전지(傳旨)를 내려 구언(求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부수찬 조상명(趙尙命)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천둥 번개의 재변은 호령이 사의(事宜)에 어긋난 데에서 연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방을 진정시키고 덕화(德化)를 베풀 천망(薦望)을 공의(公議)가 허락하지 않는데도 기필코 보내고야 말았으며,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할 신하가 교만하여 스스로 고상(高尙)한 체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벌을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조치가 올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임금을 무함(誣陷)한 역적이 원비(圓扉)417) 에서 편안히 누워 있는데도 언책(言責)을 맡은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며, 밤에 순경(巡更)하던 포졸(捕卒)이 큰길에서 칼을 맞고 죽었는데 포장(捕將)으로 있는 사람이 범인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있으니, 형법(刑法)이 제대로 행해진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섣달에 해야 할 도목정(都目政)을 여름에 행하고 여름에 해야 할 도목정을 겨울이 되도록 지체하며 게을리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 줄 모르고, 언책(言責)과 이목(耳目)의 책임을 맡은 관원들이 각기 사사로이 좋아하는 데 끌려 교묘한 방법으로 전계(前啓)를 회피하고 있으니, 어떻게 진작시키고 쇄신하기 위한 칙려(飭勵)가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도(道)를 논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신하들이 묘당(廟堂)에서 모유(謨猷)를 도모함에 있어 원대한 앞날을 내다보았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으며, 재능을 헤아려 관직을 제수하는 직임을 맡은 관원은 사의(私意)에 따라 멋대로 행하여 공도(公道)가 행해지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 어떻게 분발하여 확장할 것을 바라겠습니까? 탕평(蕩平)이란 제목은 실로 음붕(淫朋)을 타파시키기 위한 신묘한 관건(關鍵)인데도 양쪽을 참작하여 상대적으로 기용하는 정사(政事)는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한갓 시간만 허비한 채 물색(物色)에 대해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은 도리어 마음속에 깊어질 뿐입니다. 양역(良役)을 변통시키는 것은 실로 생민(生民)을 구제하기 위한 급무인데도 이에 대한 계책을 세울 때 서로 의견이 어긋나기 때문에 두려워하여 결정하지 못함에 따라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이 날로 극심해지고 있으니, 불행하게도 옛사람이 굶주릴 때 계획을 요리하였다가 죽은 다음에야 시행한다는 데 근사합니다.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고식적인 습성에 젖어서 세도(世道)·왕강(王綱)이 서산(西山)으로 지는 해와 같으니, 어찌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하여 이와 같이 면려하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10월 18일 무인
윤유(尹游)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19일 기묘
수찬 박필균(朴弼均)이 상소하여 하늘의 노여움에 대해 성실한 도리로 응종할 것을 면려하고, 조덕린(趙德隣)을 완전히 석방시킨 것의 잘못에 대해 대략 논하였다. 또 논하기를,
"심성진(沈星鎭)이 1년 동안 전관(銓官)을 두 번이나 축출하였고, 아울러 많은 대관(臺官)을 공척(攻斥)함으로써 대각(臺閣)을 텅 비게 하여 사후에 비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책을 세우고 있는데도 억재(抑裁)를 가하지 않고 있으니, 성덕(聖德)에 누를 끼침이 큽니다."
하니, 대략 비답하기를,
"진달하여 면려한 것이 이와 같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성진이 성급하게 총재(冢宰)418) 를 공척한 것이 잘못이라 하더라도 대의(大義)는 옳다. 지금 그대는 총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윤봉조(尹鳳朝)를 위한 것이니, 매우 무엄하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검토관 조상명(趙尙命)이, 송 태종(宋太宗)이 익왕(益王)의 유모(乳母)에게 곤장(棍杖)을 친 일에 대해 부연(敷衍)하여 면려할 것을 진달하였다. 참찬관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구준(寇準)이 진언(進言)하자 태종(太宗)이 노하여 금중(禁中)으로 들어간 것은 도량이 너그럽지 못한 듯하나, 깨닫고 나서는 곧 채용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신료들의 말에 대해 번번이 개납(開納)하는 기색을 보이시지만 전혀 받아들여 채용하는 효험은 없으니, 좋아하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이유는 따져보지 않는다는데 가깝습니다. 신은 이를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크게 반성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0월 20일 경진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진계(陳戒)하기를,
"재이(災異)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어찌하여 아직 구언(求言)하는 하교가 없으십니까? 전하께서는 사냥이나 여색(女色)에 대해서는 진실로 경계할 것이 없습니다만, 부족한 것은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폭넓은 기상(氣像)입니다. 붕당(朋黨)을 깨뜨리기 위한 조치가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말이 혹 중도를 어기기도 하고, 일이 궁금(宮禁)에 관계되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매양 대각(臺閣)에 대해 조그만한 일을 가혹하게 적발하여 마치 흔단을 찾는 듯이 하므로, 신료들이 말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왔으나, 근래에는 점점 해이해지고 있으니, 혹시 성인(聖人)의 혈기(血氣)가 때로 쇠약해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이어 차자를 올려 진달한 여덟 가지 조항에 대해 부연(敷衍)하여 아뢰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근습(近習)을 엄중히 단속해야 한다는 한 조항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은 본디 특별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방지(傍支)로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어받았으므로, 수하(手下)에서 생장(生長)한 경우와는 다른 점이 있다. 그래서 이들과는 친밀하게 지낸 적이 없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내관 가운데 호판에게 교만하게 말을 한 자가 있었는데, 윤유(尹游)가 곧 이직(移職)시켰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경용(經用)에 관계된 것은 준절(撙節)히 하기를 힘써야 하므로, 액속(掖屬)들의 비방은 형세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말이 유입(流入)되는 것도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결단코 총애하는 길을 열어 놓아 모멸받고 이들로 하여금 멋대로 날뛰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겠다. 이는 한(漢)·당(唐)의 중주(中主)도 하지 않던 짓인데, 내가 어찌 이렇게 하겠는가?"
하고, 이어 그런 내관은 사문(査問)하여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언로(言路)를 넓힐 것, 상벌(賞罰)을 분명히 할 것, 성궁(聖躬)을 보호할 것 등 세 조항에 대해 진계(陳戒)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자주 산실(産室)을 설치하니 은애(恩愛)를 받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아내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을 우순(虞舜)도 어렵게 여겼으니, 전하께서 어찌 쉽게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크게 포장(褒奬)하여 받아들였다. 사관(史官)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이런 가언(嘉言)은 마땅히 민몰(泯沒)시켜서는 안 된다."
하였다.
10월 21일 신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제 서로 번갈아 면려한 내용이 대의(大義)는 좋으나, 백성들에게 실제의 혜택이 미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니,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달리 백성들에게 실제의 혜택이 미치게 할 수 있는 방책이 없어서 삼남(三南)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의 누적된 포흠(逋欠)을 견감하고자 하였습니다마는, 멀리서는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제도(諸道)의 도신들로 하여금 비국에 논열(論烈)하여 보고하게 하고, 그것을 가지고 사의를 헤아려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실로 양역(良役)에 연유된 것입니다. 선조조(宣祖朝)에는 양정 어사(良丁御史)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이는 눈앞에 닥친 위급함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왕자(王者)가 형벌을 적용하는 것은 각기 적당한 시기가 있는 것이다. 율(律)에도 이미 추분(秋分) 이후라고 했으니, 어찌 한겨울을 기다릴 것인가? 11월이 지난 뒤에 추후 계복(啓覆)419) 을 설행하는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늘 그르게 여겨 왔었다. 11월이 시작되면 상순에 삼복(三覆)을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임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교리 유건기(兪健基)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가한 낮과 고요한 밤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토론하는 것은 삼대(三代)420) 와 방불하지만, 차대(次對)와 상참(常參)에서 수작(酬酌)하고 재결(裁決)하는 것은 겉치레를 따르는 것이 많으니, 이는 실행할 때가 끝내 말할 때만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은고(恩顧)가 척완(戚畹)421) 에게 치우치고, 총탁(寵擢)은 오로지 문벌(門閥)에서만 취하며, 출신(出身)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입곡(笠穀)422) 의 중직(重職)에 앉히고, 조정에 벼슬한 지 오래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초옥(貂玉)의 현반(顯班)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혹 구애받고 견제받아 과감하게 기용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한 머뭇거리면서 제거하지 못하기도 하며, 혹 지나친 속박(束縛)을 가하여 예(禮)로 부리는 도리를 어기기도 하고, 혹 너무 관대히 하여 자기의 편함만 도모하도록 맡겨 두기도 하니, 삼가 곽공(郭公)423) 의 비난이 다시 성명(聖明)의 세상에 발생될까 두렵습니다. 장리(贓吏)의 금법(禁法)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조절하여 금고(禁錮)시킨 것은 힘없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고 권세가 있는 자들은 구속받지 않고 있습니다. 전선(銓選)이 공평하지 못하여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하는 까닭에 팔도의 중요한 고을은 모두 왕도(王道)와 사안(謝安)424) 의 자제들에게 점유되어 있고, 큰 변방 고을의 대진(大鎭)들은 모두 윗사람을 잘 섬기는 용렬한 무변(武弁)들에게 예속되어 있습니다."
하고, 인하여 관서백(關西伯)에 대한 묘당의 천거가 상세하게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 둔 잘못에 대해 논하였다. 또 양역(良役)의 폐단에 대해 논하기를,
"조가(朝家)에서 궐역(闕役)이 된 양역을 채운 숫자의 다과(多寡)에 의거 수령의 능부(能否)를 결정하므로, 대신 정해 놓은 것도 헛된 장부(帳簿)만 있을 경우가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23일 계미
주강을 행하였다.
이정제(李廷濟)를 판의금으로, 박사정(朴師正)을 대사간으로, 윤취함(尹就咸)을 사간으로, 오언주(吳彦胄)를 헌납으로, 민원(閔瑗)을 장령으로, 이정보(李鼎輔)를 지평으로, 김한철(金漢喆)을 정언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부응교로, 이도원(李度遠)을 수찬으로, 김동필(金東弼)을 호조 판서로, 조하망(曹夏望)을 승지로, 임정(任珽)을 집의로 삼았다.
10월 26일 병술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에게 제수(祭需)를 내리고 그 봉사손(奉祀孫)은 나이가 들거든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이날이 바로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기신(忌辰)이었다.
10월 27일 정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양정 어사(良丁御史)를 품지(稟旨)하여 발송하려 하고 있는데, 외부의 의논은 소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기도 하니, 먼저 아주 심한 고을에만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이는 임금을 대신해서 여러 고을을 순행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성실하게 해야 하는 것이니, 기읍(畿邑) 가운데 풍덕(豐德)·김포(金浦)와 호서의 아주 심한 고을에 우선 먼저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두서너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어찌 수성(修省)하는 도리가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을 판의금으로, 윤순(尹淳)을 판윤으로, 김정윤(金廷潤)을 장령으로, 신치근(申致謹)을 교리로 삼았다.
사간 윤취함(尹就咸)이 상소하여 이희보(李喜報)를 효시(梟示)함으로써 공을 노려 재화(財貨)를 모손(耗損)시키고 백성을 침학(侵虐)하여 불법을 저지른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또 논하기를,
"정기안(鄭基安)은 내력이 깨끗하지 못하고, 윤지태(尹志泰)는 칭망(稱望)이 본디 미천하니, 주천(注薦)에서 삭제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희보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국사를 담당한 것이 어리석을망정 그의 마음은 알 수가 있다. 그밖의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은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해당되는 율이 있는데, 효시를 청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내력에 대한 경의 말은 사람을 공박하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야박한가? 윤지태는 일찍부터 그의 인품을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이 어찌 주천(注薦)에 합당하지 않단 말인가?"
하였다.
장령 민원(閔瑗)이 상소하여 심성진(沈星鎭)의 의도는 윤봉조(尹鳳朝)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전관(銓官)을 요동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하교하여 이기기를 힘쓴다고 책망하고, 특별히 조상경(趙尙絅)과 그때 죄파(罪罷)된 대관(臺官)들을 서용하게 하였다.
김상로(金尙魯)를 경기 어사로, 이철보(李喆輔)를 호서 어사로 삼고, 편의한 대로 종사(從事)하도록 명하였다.
팔도(八道)의 유생(儒生) 이광규(李光奎)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28일 무자
임금이 세 사은사(謝恩使)를 인견하고 초서모(貂鼠帽)를 하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피인(彼人)이 고친 책자(冊子)는 반드시 전본(全本)을 구입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청나라 사람들이 찬수(撰修)한 《명사(明史)》에 우리 나라 인조조(仁祖朝)의 일을 기재했는데, 너무도 사실과 어긋난 거짓된 것이었으므로 일찍이 고치기를 청하여 준허(準許)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서장관 서명형(徐命珩)이 청하기를,
"의주(義州)에서 수검(授檢)할 때 체포된 자는 효시(梟示)하고, 쇄마군(刷馬軍) 가운데 저들의 지경에 들어가서 저들의 물건을 훔친 자는 먼저 목을 베고 나서 아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형벌이란 형벌을 없앨 것을 기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니, 미리 계칙(戒飭)하여 그들로 하여금 범하지 않게 해야 된다."
하였다.
판부사 심수현(沈壽賢)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하면서 이르기를,
"심수현은 기구 대신(耆舊大臣)으로서 충직하고도 정성스런 성품(性稟)을 지녔으므로, 마음속으로 항상 존경하고 있었다.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항상 순묵(純默)하는 가운데 들어 있었고, 소신이 확고하여 부박(浮薄)한 시의(時議)에 동요되지 않았으니, 말속(末俗)에서 찾아보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나이는 비록 노쇠하였으나 의지는 오히려 확고하였다. 지난번 언자(言者)들이 그의 외모만 보고 그의 인품을 몰랐었기 때문에 정부(政府)의 수석(首席)을 오래도록 비웠는데, 내가 돈면(敦勉)하여 다시 나오게 하고 싶었다. 금방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어찌 갑자기 졸서(卒逝)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고,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고 이어 3년 동안 녹봉(祿俸)을 내려 주게 하였다.
10월 29일 기축
사간원 【 헌납 오언주(吳彦胄)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오언주(吳彦胄)가, 윤취함(尹就咸)이 이희보(李喜報)를 효시(梟示)할 것을 청한 것은 너무 지나치다는 것과, 윤지태(尹志泰)의 일을 논한 것은 상소하여 모순(矛盾)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논박하여 체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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