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2권, 영조 12년 1736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1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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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임진

수찬 유최기(兪最基)가 상소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을 진달하니, 개납(開納)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상참을 행하였다. 지평 이정보(李鼎輔)가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김범갑(金范甲)의 주서의 신천(新薦)을 삭제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김범갑은 일찍이 송시열(宋時烈)을 도봉 서원(道奉書院)에서 출향(黜享)시켜야 된다고 상소한 적이 있었는데, 내용이 매우 패려(悖戾)했습니다."
하고, 교리 유건기(兪健基)는 말하기를,
"사문(斯文)이 불행하게도 각립(角立)하여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만, 이 때문에 탄박(彈駁)한다면 어찌 완전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사문의 일 때문에 서로 다투는 즈음에 말을 혹 가리지 않은 것은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마는, 유신(儒臣)이 진달한 것도 의견이 있는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문의 일은 조정으로 끌어 올려서는 안 된다.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한 뒤 어느 편이든 그 가운데 윤기(倫紀)를 범한 것이 없는 사람을 기용하려고 했었다. 사문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어찌 사문에 죄를 얻은 자를 윤기에 죄를 얻은 자와 견줄 수 있겠는가? 저쪽과 이쪽을 막론하고 그 사람에 따라서 기용하려 한다."
하였다. 헌납 오언주(吳彦胄)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4일 계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금려(禁旅)425)  의 군기(軍器)가 허술한 것과 향군(鄕軍)의 유의(襦衣)가 두루 보급되지 못한 것으로써 하교하기를,
"병조에서 금군을 접제(接濟)하는 것이 근래에 너무 야박하다. 지난번 열무(閱武) 때 이미 칙려(飭勵)한 바 있는데, 군기에 허술한 점이 없지 않았다. 지금 적간(摘奸)한 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반쯤 남아 있는 통아(筒兒)를 가지고 장차 어떻게 쏠 수 있겠으며, 반쯤 남아 있는 편곤(鞭棍)을 가지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금려(禁旅)가 가지고 있는 것이 도리어 속오군(束伍軍)이 가지고 있는 호미만도 못한데, 열무 때 구차스럽게 충당시키고 있다. 지금 병판(兵判)은 임무를 맡은 지 얼마 안 되었으나 일찍이 사마(司馬)426)  를 역임한 적이 있다. 일이 명령을 내리기 전에 있었던 것이니, 문비(問備)427)  할 것은 없으나 전처럼 하지는 말도록 하라. 옛날 이윤(伊尹)428)  은 지위가 아래에 있었으나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은 것처럼 여겼는데, 더구나 지위가 임금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겠는가? 매년 겨울을 당하여 유의(襦衣)를 제급(題給)하는 것이 문득 겉치레가 되어 버려서 후하게 하기도 하고 박하게 하기도 하고, 제급하기도 하고 제급하지 않기도 한다. 백 명 가운데에서 하나를 빠뜨리는 것도 비록 작은 일이지만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입직한 기당(騎堂)429)  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낭관(郞官)은 파직시키도록 하라. 대궐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금직(禁直)하고 있는 군사들에게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데, 더구나 먼 외방의 가난한 소민(小民)들이겠는가? 또한 칙려(飭勵)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5일 갑오

밤에 달이 견우성(牽牛星)을 범하였다.

 

충원현(忠原縣)의 죄인 최하징(崔夏徵)을 삼성 추국(三省推鞫)하였다. 최하징은 충원의 창리(倉吏)인데, 관곡(官穀)을 많이 절취(竊取)하고는 읍쉬(邑倅)를 축출하기 위해 몰래 전패(殿牌)430)  를 가져다가 돼지 우리에 던져 버렸다. 이 일을 장문(狀聞)하자 나국(拿鞫)해서 승복받아 참형에 처하였다. 처음 진영(鎭營)에서 죄수를 신문할 적에 그의 종으로 하여금 그의 죄를 증거하여 옥안(獄案)을 완성시켰었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입시했다가 말하기를,
"아들에게 아버지의 죄를 증언하게 하고 종에게 주인의 죄를 증언하게 하는 것은 풍교(風敎)를 크게 손상시키는 처사입니다. 승복을 받는 데 급급하여 대체(大體)를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한없는 폐단을 열어 놓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제부터는 엄중히 계칙(戒飭)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지평 이정보(李鼎輔)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오언주(吳彦胄)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동경연 이덕수(李德壽)가 귀가 어두웠으므로 수작(酬酌)하기가 어려웠다. 임금이 주서를 시켜 써서 보이기를,
"비태(否泰)431)  가 서로 이어지는 것은 역대(歷代)의 연혁으로 보아 당연한 이치이니,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한(漢)나라와 당(唐)나라가 망한 것은 헌제(獻帝)와 소선제(昭宣帝)의 죄가 아니겠는가?"
하니, 이덕수가 말하기를,
"이치는 비록 그러하지만 인사(人事)는 극진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인하여 황예(荒穢)를 포용하되 과단성과 결단력이 있어야 하며, 먼 데 사람을 유기(遺棄)하여 붕비(朋比)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에 대해 부연하여 진달하기를,
"성상께서 근본 법칙을 세워 탕평(蕩平)하는 정치를 이루려 하신다면 이 일에 대해 더욱 체념하셔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먼 데 사람을 유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여러번 전관(銓官)에게 계칙하였지만, 각기와 친한 사람에게 사정(私情)을 두는 데 지나지 않고 있다."
하였다. 이덕수가 말하기를,
"한(漢)·당(唐)의 붕당(朋黨)은 군자와 소인이 각자 붕당을 만들었었으니, 임금이 그 사정(邪正)을 분변하기만 하면 되었으나, 지금은 이와 달라서 각기 족류(族類)로써 하나의 편당으로 나뉘어 서로 공척(攻斥)하고 있으니, 어찌 한편은 모두 군자이고 한편은 모두 소인일리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쪽이나 저쪽이나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들이 문호(門戶)를 나누어 위로는 임금을 잊고 아래로는 선조를 잊고 있으니, 금수(禽獸)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자, 참찬관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임금이 붕당을 타파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만일 그 명칭을 미워하여 군자까지도 아울러 공척한다면 그 해(害)가 클 것입니다. 오직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기용한다면 인물 됨됨이가 감형(鑑衡)을 벗어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수가 이어 진달하기를,
"고 판서 서문유(徐文𥙿)의 아내 이씨(李氏)는 남편이 죽자 병들었어도 약을 복용하지 않은 채 죽기에 이르렀으며, 조상명(趙尙命)의 딸인 유씨(柳氏)의 며느리는 남편이 죽자 나무를 쌓아 놓고 스스로 분사(焚死)했습니다. 비록 중도(中道)에 맞는 일이 아니지만, 굴원(屈原)432)  의 지나친 충성에 견줄 만하니, 마땅히 그들의 마을에 정표(旌表)해야 합니다."
하고, 유건기(兪建基)도 잇따라 진달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11월 6일 을미

경기 감사 이종성(李宗城)이 산협(山峽)에 가까운 일곱 고을은 다시 양전(量田)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이어 아뢰기를,
"지평 현감(砥平縣監) 이상백(李尙白)은 연소하여 수단이 서툴고, 연천 현감(漣川縣監) 이정익(李廷益)과 마전 군수(麻田郡守) 유면기(兪勉基)는 정사를 모두 너무 너그럽게 하고 있어 중요한 일을 책임지우기 어려우니,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11월 7일 병신

주강을 행하였다.

 

팔도의 유생 이진흥(李振興)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이정보(李鼎輔)가 상소했는데, 그 조목이 아홉 가지였다.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성실함을 힘쓰게 하는 데 대해 말하기를,
"학문을 강론하는 것이 그 실상이 없고 하늘에 응답하는 것을 성실하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다음으로 아랫사람을 인접(引接)함에 있어서 예(禮)로 하지 않는다는 데 대해 논하기를,
"속박하고 협박하며 뜻은 동쪽에 있으면서 서쪽으로 옮아가는가 하면, 사륜(絲綸)이 빈번하고 호령(號令)이 번다합니다. 그리고 일을 처리할 즈음에는 지나치게 혐의를 피하고, 말을 들을 때에는 고집하는 경향이 없지 않기 때문에 희노(喜怒)와 형정(刑政)이 모두 올바르게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궁금(宮禁)을 엄중히 하고 사경(私逕)을 막는 데 대해 말하기를,
"대소의 처분과 내외(內外)의 제배(除拜)가 반드시 먼저 외부로 전파되고 있으니, 외부의 말이 대궐 안으로 흘러 들어와서 현혹시키고 선동하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사람을 임용할 적에는 송(宋)나라의 신하인 왕소(王素)433)  의 말을 본보기로 삼으소서."
하고, 대각(臺閣)을 중히 여기고 언로(言路)를 여는 데 대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언관(言官)에 대해 종을 나무라고 짐승을 꾸짖듯이 꺾어 누르고 몰아대십니다. 그리하여 아뢴 말이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문득 당론(黨論)으로 의심하시어 작은 경우에는 견책을 가하거나 삭직(削職)시키고 큰 경우에는 찬축(竄逐)을 가하시니,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문 채 대각(臺閣)에 들어가는 것을 죽을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싫어하여 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충사(忠邪)가 구분되지 않았으나 아무도 감히 변별(辨別)하지 못하고, 의리(義理)가 확정되지 않았으나 아무도 감히 변론(辨論)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기탄없이 하는 말을 온화한 자세로 받아들여 우용(優容)하는 뜻을 보이시고,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들을 일제히 모두 용서하소서."
하고,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여 기강(紀綱)을 확립시켜야 한다는 데 대해 말하기를,
"흉격(凶檄)을 제창하여 일으킨 역적을 국문(鞫問)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무단히 용서하여 방송(放送)하였고, 당습(黨習)에 빠져 고질이 된 사람이 엄중한 성토(聲討)를 피하기 위해 대각에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한 번 남의 소장을 본 것이 무슨 큰 죄에 관계된다고 기필코 검의(檢擬)한 신하에게 죄를 주었고, 이미 지신사(知申事)에 제수한 것이 공의(公議)에 부합되는데도 도리어 잘못 낙점(落點)했다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역절(逆節)이 낭자하여 모두가 죽여야 한다는 역적은 아직도 천지 사이에서 편안히 누워 쉬고 있는데 화란(禍亂)에 임하여 충성을 다 바쳐 국사를 위해 죽은 방백(方伯)은 끝내 철권(鐵券)434)  에 참록(參錄)되지 않았으며, 충신의 아들은 중곤(重棍)을 맞다가 죽을 뻔했는데 공이 없는 무리들이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畫像)을 걸려고435)   도모하고 있습니다. 인심이 이로 말미암아 복종하지 않고 있으며, 기강이 이로 말미암아 확립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편당을 없애고 황극(皇極)을 확립하는 데 대해 말하기를,
"극(極)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이고 주간이 되는 것이며, 탕평(蕩平)이라고 하는 것은 말단이고 효험이 되는 것이므로, 위에서 황극을 확립하게 되면 아래에 탕평의 효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곧바로 관작(官爵)을 상대적으로 양쪽 똑같이 기용하고, 언론(言論)에 어느 쪽이 옳다는 것도 없고 어느쪽이 그르다는 것도 없게 하는 것을 조화(調和)시키는 방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받들어 순종하니, 정주(政注)436)  는 배포하여 구차스럽게 충당하는 폐단이 있게 되었고, 언론(言論)은 때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풍조가 많게 되었습니다. 죄진 자를 수용(收用)할 적에는 문득 성상께서 탕척(湯滌)시키는 뜻을 본받는 것이라고 하고, 혹 배척(排斥)하는 소장이 있으면 문득 성상께서 소융(消瀜)시키려 하는 뜻에 어긋난다고 하고 있으니, 이른바 탕평이라는 것은 한갓 시배(時輩)들이 당여를 끌어들이고 욕심을 성취하는 데 쓰이는 하나의 와굴(窩窟)이 되고 말았습니다. 염의(廉義)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관방(官方)이 이로 말미암아 난잡해지고, 명절(名節)이 이로 말미암아 땅에 떨어지고, 당직(讜直)이 이로 말미암아 없어져 버렸습니다. 색목(色目) 이외에 또 색목을 첨가함에 따라 나라를 병들게 하는 폐해가 원우(元祐)437)   때의 조정(調停)이라는 것과 원부(元符)438)   때의 건중(建中)이라는 것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정(自靖)하려는 사람은 그 사이에 기꺼이 자취를 오염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비록 엄명(嚴命)에 핍박되어 힘써 직무를 봉행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서로 원수와 같고 언론은 초(楚)·월(越)처럼 상반되니, 어떻게 마음을 함께 하여 같이 곧은 자세로 국사를 잘 이루어 가기를 요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그런 폐단을 힘써 진달하는 것은 한쪽을 나오게 하고 한쪽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유도하는 것이 아니고, 탕평책이 올바른 도리를 잃은 것에 대해 매우 개탄스러운 바가 있으므로, 근원을 거슬러 끝까지 논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황극(皇極)을 확립시킬 도리를 행하시어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현사(賢邪)를 분별하여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고, 크게 공정한 마음으로 포용하고 지극히 올바른 마음으로 임하신다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서 감동되어 황연(怳然)히 깨닫고 유연(悠然)히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탕탕 평평(蕩蕩平平)은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고, 사로(仕路)를 맑게 하여 명기(名器)를 중하게 하는 데 대해 말하기를,
"지금의 사대부들은 식견이 비루하여 풍절(風節)이 쓴 듯이 흔적조차 없어짐에 따라 청요(淸要)한 관직과 웅번(雄藩)의 풍요로운 고을을 얻기 위해 파리처럼 극성을 부리고 개처럼 구차스럽게 꼬리치면서 곡경(曲逕)을 통하여 얻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게도 비열하게 아첨하며 끌어들여 주기를 요구하기도 하고, 권귀(權貴)와 체결(締結)하여 이를 성세(聲勢)의 바탕으로 삼기도 하니, 명망이 가볍고 재능이 미미한 자들이 분수에 맞지 않은 자리를 많이 점유하고, 문벌과 덕망이 걸맞는 사람이 아랫자리에 있게 되는 수모를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헌초(軒軺)가 도로에 서로 잇닿아 있고 금옥(金玉)의 관자(貫子)가 시졸(厮卒)에게도 뒤섞여 가해지고 있으므로, 부엌에서 중랑(中郞)이 나온다[竈下中郞]439)  는 비난과 개 꼬리로 담비 꼬리를 잇는다[狗尾續貂]440)  는 비난이 불행하게도 근사합니다. 근래에 과제(科第)가 번다하게 자주 있는데, 무과(武科)의 폐단이 더욱 극심합니다. 이제부터 선발하는 액수(額數)를 점차 줄여서 각영(各營)의 별군관(別軍官)이나 호위 군관(扈衛軍官)의 사람들 가운데 한량(閑良)은 태거(汰去)시키고 출신(出身)으로 예속시킴으로써 소통시킬 바탕을 삼으소서."
하였고, 현재(賢才)를 얻어 책임을 전담시키는 데 대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작록(爵祿)을 굴레와 고삐로 만들어 신하들을 소나 말처럼 얽어매어 놓고 있으므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은 쉽게 여기는 사람들은 죄를 얻고, 영화를 탐하고 복록을 간구하는 자들은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모나게 행동하는 사람이 진실로 용렬한 사람이 아니며, 모나지 않은 사람이 곧 아첨하여 뜻을 잘 맞추는 부류이니, 어떻게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들이 만족하게 여겨 나오기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보상(輔相)이란 것은 임금의 팔다리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등극(登極)하신 지 1기(紀)441)  를 넘지 않았는데도 보상을 제배(除拜)한 것이 수십 번에 이르렀으므로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도 없이 해직(解職)되기 일쑤였습니다. 정부(政府)의 보상이 과연 현재(賢才)라면 자주 개체(改遞)시켜서는 안 되고, 과연 현재가 아니었다면 당초 어찌하여 경솔하게 제수하였습니까?"
하였고,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민력(民力)을 펴게 하는 데 대해 말하면서 백성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이 되었는데도 상하가 분수에 넘치게 사치스러운 폐단을 통렬하게 진달하고 청하기를,
"대수(代數)가 오래 된 제전(諸殿)에 공궤(供饋)하는 것, 후사(後嗣)가 없는 각궁(各宮)에서 절수(折受)한 것, 교묘하게 만든 명목(名目), 부화(浮華)한 미문(靡文) 등은 일체 혁파하여 백성들의 힘이 펴지게 하소서."
하고, 이어 양역(良役)의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호포(戶布)가 제일 행할 만한 법이라는 것으로 성의를 결단하여 능한 사람에게 맡긴 다음 조속히 거행하도록 명할 것을 청하였다. 관방(關防)을 튼튼하게 하고 군비(軍備)를 수보(修補)하는 데 대해 말하기를,
"수어사(守禦使)는 곧 군졸이 없는 장수인데, 둔전(屯田)·둔병(屯兵)을 설치하여 포(布)를 징수하고 세(稅)를 거두어 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산성(山城)의 군비(軍備)에 조금 보조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청속(廳屬)들이 먹어 치우는 수요(需要)에 들어가게 되니, 수어청을 혁파하고 기백(畿伯)으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소서. 그리고 계속해서 남한 산성(南漢山城)까지 통관(統管)하게 하되 둔전은 도로 민부(民部)442)  에 예속시키고 둔군은 각 고을에 획급(劃給)하는 것이 실로 양쪽이 다 잘 되는 길인 것입니다. 조령(鳥嶺)은 곧 왜로(倭路)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한 도의 중요한 관방(關防)인데, 안팎의 산성만이 우뚝 솟아 있는 한낱 빈 성곽(城郭)이니, 청컨대 문경 현감(聞慶縣監)에게 방어의 임무도 겸하게 하고, 관부(官府)를 초곡(草谷)의 근처에 옮겨서 산성을 주관하게 하소서. 호남(湖南)의 도민(島民)은 치우치게 바다 가운데 처해 있기 때문에 왕화(王化)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전후에 역적의 종자(種子)들을 제도(諸島)에 많이 정배(定配)하였으니, 해적들과 교통하는 걱정이 없을 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가운데 제일 큰 섬을 골라서 읍(邑)을 설치하거나 혹은 진(鎭)을 설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목별로 진달한 내용이 매우 가상하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과감히 간하는 기풍은 있으나 가슴속에는 시상(時象)이 가득한 것이 애석하다. 윤봉조(尹鳳朝)의 일에 이르러서는 관계되는 것이 어떠한데, 감히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양역(良役)에 대한 의논도 한 가지만 거론하여 청하였으니, 과연 참량(參量)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밖의 관방에 대한 것은 말은 옳지만 폐단이 없지는 않다. 그 글을 살펴보고 그 사람을 헤아려 보건대, 부억(扶抑)하는 것을 마음에 흔쾌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 병근(病根)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는가?"
하고, 원소(原疏)는 유중(留中)하게 하였다. 이때 대각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정보(李鼎輔)의 소장 내용이 명쾌하고도 절실하였다. 그가 탕평(蕩平)의 폐단에 대해 논한 것은 더욱 시휘(時諱)를 적중시킨 것이었기 때문에 사류(士流)가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김상성(金尙星)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호서의 양정 어사(良丁御史)인 이철보(李喆輔)를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여 면려하고 계칙하기를,
"책을 끼고 경연(經筵)에 나오는 것은 그래도 상법(常法)을 따른 것이지만, 왕정(王政)에 있어서 먼저 할 것은 백성을 위하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 때문에 여러번 유신을 어사에 기용한 것이니, 그 의도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번에 사정(査正)하는 것은 약간의 고을에 불과하지만 실제의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것은 오직 어사에게 달려 있다."
하였는데, 이철보가 아뢰기를,
"양정 어사라는 명칭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소요(騷擾)가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목(事目)을 가지고 말하건대, 사조(四祖)에 현관(顯官)이 없는 경우에는 모두 응당 예속시켜야 되는데, 일체 이 법을 적용한 현관(顯官)이 없는 경우에는 모두 응당 예속시켜야 되는데, 일체 이 법을 적용한다면 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결단코 행할 수가 없다."
하므로, 이철보가 아뢰기를,
"신은 마땅히 먼저 덕의(德意)를 선포하여 안집(安集)시키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비유하건대, 그물을 가지고 강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백성들이 어찌 이를 믿겠습니까? 대저 권세가의 서원(書院)이나 묘하(墓下)에 투탁(投托)하여 의지하고 있는 경우에는 관리들이 감히 묻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대부(士大夫)가 어찌 백성들을 모집하여, ‘너는 나의 종이니 나의 가적(家籍)에 예속시킨다.’고 한 적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인정(人情)이 종이라고 일컬어 예속되면 반드시 용납하여 숨겨주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 상신 남구만(南九萬)은 물러가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었을 적에 감사나 어사가 자기의 집을 찾아오면, 그때마다 자기 집에 투탁한 부류들을 기록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이들은 나의 종이 아니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오고 있으나, 지금의 사대부들이 어떻게 남구만과 같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수괄(搜括)함에 있어 만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압량률(壓良律)을 적용하려 하는데, 생원·진사 이하는 형추(刑推)하고 통적(通籍)443)   이상은 계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호서는 곧 사대부들의 굴혈(窟穴)이어서 향곡(鄕曲)에서 무단(武斷)해 온지 오래 되었으므로, 어사 보기를 곧 심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신이 앙품(仰稟)하는 것은 미리 이런 사실을 전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이철보가 또 간혹 임행하여 도망과 물고(物故)의 허실을 살피게 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편의대로 종사(從事)하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 상자를 열어 어사를 비방하는 글을 보여준 사례도 있으니, 호서 사대부들이 비방하는 말이 장독(章牘)에 많이 들어 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연소왕(燕昭王)이 악의(樂毅)444)  을 기용한 것과 같게 할 것이니, 우려하지 말고 뜻대로 하라."
하였다. 참찬관 조하망(曹夏望)이 말하기를,
"보내는 어사의 명칭을 양정(良丁)이라고 한 까닭에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끝에 가서 이해(利害)가 어떠한지는 모르고 먼저 스스로 놀라고 의심하여 반드시 새처럼 숨고 사슴처럼 놀라는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름을 빌어 양정이라는 호칭을 고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다른 이름을 빌어 고쳐 가지고 양정의 일을 거행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다. 임금이 되어서 백성을 속일 수 있겠는가? 미리 민간(民間)에 유시하여 장차 실제의 혜택이 미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낫다."
하였다. 인하여 하유(下諭)하기를,
"아! 왕자(王者)는 백성을 안식(安息)시키는 것을 중히 여기는 것인데, 어찌 차마 고요히 거처하고 있는 백성을 도리어 동요시킬 수 있겠는가? 민생의 폐단은 양역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고요한 밤 구중 궁궐에서 향민(鄕民)의 인족(隣族)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측은하고 슬픈 마음에 잠자는 것을 잊을 지경이다.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법령(法令)이 행해지지 않아서 도신과 수령들이 인순(因循)만 일삼았기 때문에 양정이 은닉(隱匿)되는 과구(菓臼)가 수만 가지나 되니, 이것이 어찌 백성들의 잘못이겠는가? 이는 곧 양역의 고통에 연유된 것이다. 저것도 2필(疋)이고 이것도 2필(疋)인데, 기필코 이것을 버리고 저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고헐(苦歇)이 현격하게 다른 때문이다. 아! 다 같은 나의 백성인데도 국역(國役)은 치우치게 고통스럽고 타역(他役)은 오히려 고통이 헐하니, 이것이 방백과 수령들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곧 내가 잘 도솔(導率)하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이번에 특별히 어사를 파견하는 것은 백성들의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을 안타깝게 여겨 몇 고을을 선정하여 먼저 시험해 보려는 것이니, 결단코 우리 백성들에게 도리어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 아! 백성은 나라의 적자(赤字)이니, 아버지가 10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데 그중 한 아들이 치우치게 고통을 당하고 있어서 고루 편안하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여러 아들들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이번의 이 일은 이쪽은 도와주고 저쪽은 억누르며 이쪽은 사랑하고 저쪽은 미워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아! 소민(小民)들은 모두 상도(常道)를 지니고 있으니, 이런 내용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소란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양역을 균일하게 하여 인족(隣族)을 침해하는 폐단을 제거한다면, 또한 어찌 고헐(苦歇)의 차이가 있겠는가? 내가 부덕하지만 백성을 구휼해야 한다는 뜻은 잊지 않고 있다. 아! 그대 어사는 먼저 이런 점을 효유(曉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8일 정유

임금의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일에 대해 아뢴 소장을 유중(留中)시키셨는데, 만일 신의 이름이 그 소장에 들어 있는데도 경연(經筵)에 나왔다면, 어찌 염우(廉隅)에 손상되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 등도 그 내용 가운데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였다. 지평        이정보(李鼎輔)를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서 이르기를,
"그대가 탕평(蕩平)에 있어서 양쪽을 상대적으로 기용하는 것은 그르다고 했는데, 그대가 소장에서 사람을 논한 것도 양쪽을 똑같이 거론하였다. 공이 있는 도신을 녹훈(錄勳)하지 않았다는 것은 황선(黃璿)을 가리킨 것 같은데, 기록할 만한 공이 없는데도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畫像)을 걸려고 도모하고 있다는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니, 이정보가 말하기를,
"한 사람을 지적한 것이 아닙니다. 무신년445)                  의 녹훈에 대해 상당한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대략 논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정보의 의중에는 가리킨 사람이 있었는데도 감히 직언(直言)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하문하기를,
"의지하여 신임하고 있는 중신(重臣)이 연석에서의 하교를 속여서 증언했다고 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이정보가 말하기를,
"판윤 윤순(尹淳)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소신(小臣)을 싸잡아 멋대로 부억(扶抑)을 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비록 학식(學識)이 없으나, 본래 중주(中主)가 될 것을 기약한 것이 아니고, 곧 탕평의 주인이 되기를 기약했었다. 이른바 의(衣)·관(冠)·대(帶)·선(扇)에 어떻게 탕평이란 이름이 붙을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탕평선(蕩平扇)이란 말은 혹 있었습니다만, 이른바 탕평의(蕩平衣)·탕평관(蕩平冠)·탕평대(蕩平帶)에 대한 말은 지금 듣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반드시 탕평을 싫어하는 자가 비난하여 조롱하는 말이고, 임금에게 고할 말이 아닌 것이다."
하니, 이정보가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털끝만큼인들 사의(私意)를 둘 수 있겠습니까? 의(衣)·관(冠)·대(帶)·선(扇)에 대한 것은 과연 이런 등등의 명색(名色)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인혐하면서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김한철(金漢喆)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하택(李夏宅)의 계사(啓辭)에 이르자, 김한철이 일어났다가 엎드리면서 또 소회를 진달하기를,
"오늘 대소 신료들이 모두 연석에 모여 있으니, 한 번 하문하신다면 여정(輿情)의 소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하택(李夏宅)은 역절(逆節)이 환히 드러났으니, 흔쾌하게 처단(處斷)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주달한 내용이 대체(大體)는 옳다. 그러나 나는 이하택이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대계(臺啓)가 전례에 따라 율(律)에 의거하여 처단하기를 청하고 있습니다만, 성상(聖上)께서 한결같이 윤허하지 않으시니, 이에 여정(輿情)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목전에 드러나지 않은 것을 곧바로 역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박해정(朴海正)이 죽기 전에 이미 대변(對辨)하지 않았으니, 대신(臺臣)들이 쟁집하는 것도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상의 말이 또 이러할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다. 박해정이 경폐(徑斃)한 것은 곧 그의 불행인 것이다."
하였다. 김한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하택에 대해 무슨 애석하게 여기실 것이 있기에 끝내 처분을 내리지 않고 계십니까? 정언섭(鄭彦燮)의 소장과 권경(權儆)의 공사(供辭)로써 논하여 보더라도 기세(氣勢)에 사역(使役)되었다는 것을 헤아려 알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지(田地)를 개간한 일로써 중을 살해하였으니, 외람되고 교활하고 방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 곳에 정배(定配)함이 가하다."
하였다. 김한철이 계속해서 전계를 진달하였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조덕린(趙德隣)의 계사에 이르러 김한철이 또 말하기를,
"이는 신이 처음 발계(發啓)한 것인데, 내려간 뒤에 사기(事機)가 갑자기 변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넓은 하늘 아래 왕토(王土)가 아닌 것이 없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영남(嶺南)만을 치우치게 사랑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처분한 데에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한 사람 조덕린에게 세 번의 처분을 내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한철이 또 아뢰기를,
"권경(權儆)을 잡아다가 처단하라는 명이 내린 뒤 거의 40일이 가까워서야 비로소 잡아왔으므로, 일이 매우 지체되어 물정(物情)이 의심하여 괴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문목(問目) 가운데 이 한 조항을 첨가하여 엄중히 핵실(覈實)한 다음 죄를 바루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경연의 체통이 엄중하지 못하여 공경하여, 삼가는 자세가 매우 부족하니, 대신과 국구(國舅)를 제외한 여러 신하들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소장에서 조목별로 열거한 대의(大意)가 진실로 좋았으니, 노하는 것이 아닌 하교에 대해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평        이정보는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팔도의 유생들이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예사 비답을 내렸다.

 

11월 10일 기해

임금이 각사(各司)의 구임(久任)한 낭관(郞官)들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근래 재정(財政)을 잘 다스린다고 일컫는 것은 으레 지급해야 할 것을 아끼는 것이라고 하는데, 응당 써야 될 것이 아닌 경우에만 낭비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고 상신 남구만(南九萬)이 허지(許墀)를 얻고 나서 병조(兵曹)에서 폐단을 소복(蘇復)시켰으므로, 지금도 미담(美談)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대들은 모쪼록 이런 뜻을 본받기 바란다."
하였다.

 

11월 11일 경자

임금이 윤대관(輪對官)과 경기 어사 김상로(金尙魯)를 불러서 접견하였다.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이 졸(卒)하였다.

 

11월 12일 신축

임금이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지평 이정보(李鼎輔)가 나아가 아뢰기를,
"중신이 졸서(卒逝)했다는 계사(啓辭)가 금방 들어왔는데도 삼복을 정지시키라는 명이 없으니, 아랫사람을 예우(禮遇)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정원(承政院)에 고사(故事)를 문의해 보았더니, 조시(朝市)를 정지했을 적에도 창방(唱榜)한 전례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창방에 견주어 보면 좀 중한 것이기 때문에 정지하지 않은 것이다."
하자, 좌상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결단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하지만, 이것은 곧 시사(視事)인 것이니 그대로 행하는 것은 미안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승지가 추안(推案)을 읽었는데, 사수(死囚) 8인 가운데 2인은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시켰다. 인하여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유하기를,
"아! 한(漢)·당(唐)이 삼대(三代)446)  보다 못하지만, 당나라 때에는 영오(囹圄)가 텅 비어서 까치가 나무에다 둥지를 튼 일도 있었다. 나는 부덕한 몸으로 즉위한 지 12년이 되었는데, 해마다 계복(啓覆)하는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으니, 교화가 행해지지 않음을 이에 미루어 알 수 있다. 형벌은 형벌을 없앨 것을 기필한다는 말은 뜻이 있는 말이다. 매양 율(律)에 의거하도록 명하였으나, 마음은 측은하고 슬펐다. 아! 그대 방백(方伯)·수령(守令)들을 각기 잘 도솔(導率)하여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방헌(邦憲)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하라. 더구나 여러 해를 적체되어 온 죄수가 자복하지 않으면 사유(赦宥)하지 않고 있으며, 죄를 범한 자는 오히려 법망을 피하는데 억울한 사람은 실정을 변명할 길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왕정(王政)에 있어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시기가 또 겨울을 당하였으니 잘 살펴서 구휼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김한철(金漢喆)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4일 계묘

소대를 행하였다.

 

11월 15일 갑진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11월 17일 병오

이재(李縡)를 이조 참판으로, 남태온(南泰溫)을 승지로, 신만(申晩)을 대사간으로, 황재(黃梓)를 사간으로, 이윤신(李潤身)을 헌납으로, 박사창(朴師昌)을 지평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정언으로 삼았다.

 

장령 김정윤(金廷潤)이 상소하기를,
"영남(嶺南)에는 경자년447)   개량(改量)으로 인하여 백징(白徵)하는 폐단이 많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희보(李喜報)가 범한 죄는 일을 그르치고 백성을 학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인부(印符)를 전하지 않은 것도 이미 변괴인 것입니다. 그런데 잡아오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도주한 지 20일 가까이 되었다고 하니, 금부 당상을 중추(重推)하고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수포(搜捕)하게 하소서. 새 첨사 남익엽(南益燁)은 즉시 인부(印符)를 찾지 않고 있으니, 그가 잔약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잡아다가 국문하여 엄중히 처단해야 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조 참의 서명빈(徐命彬)이 하루에 세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긴 것이 모두 몇 번이었습니까? 정세(情勢)가 없는데도 오만하게 어기는 것이라면 서명빈에게 죄가 있는 것이고, 정세가 있는데도 독촉하여 다그치는 것이라면 예우(禮遇)하여 부리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신은 삼가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이희보의 일은 해당 당상을 추고하여 조속히 잡아 가두게 하겠다. 이는 도적의 부류가 아니니 포청으로 하여금 기포(譏捕)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서명빈은 이미 금부(禁府)에서 추문하도록 명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주역(周易)》의 동인괘(同人卦)를 강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정전(程傳)에 의하면 군자와 소인은 모두 당이 있다고 했는데, 소인은 진실로 당이 있는 것이지만 군자도 당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시독관 유건기(兪健基)가 붕당론(朋黨論)을 인용하여 변해(辨解)하였다. 검토관 조상명(趙尙命)은 말하기를,
"사물(事物)의 선악(善惡)은 각기 동류(同類)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기 때문에 군자도 당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무편 무당(無偏無黨)’이라고 했는데, ‘당(黨)’자는 여기에서 나온 것 같다. 이것은 유(類)라고 했다면 폐단이 없었을 것 같다."
하였다. 동지사 이덕수(李德壽)는 말하기를,
"동인괘(同人卦)의 상(象)에 유족(類族)으로 사물을 분변한다고 한 것은 공자(孔子)께서 대동(大同)의 폐단이 혹시 분별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까 우려해서 한 말입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탕평(蕩平)을 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일에 대오(隊伍)를 달리했던 사람들도 근래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외모(外貌)로는 심하게 어긋나지 않았습니다만, 그 마음은 조금도 화협(和協)할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주(政注)하는 즈음에 대동(大同)의 도리를 쓰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피차가 미흡한 소치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 층만 더 진보해 가면 동인(同人)의 뜻에 접근해 갈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주역(周易)》의 주(註)에 이른바, ‘소인들은 자신들과 친한 사람은 하는 일이 옳지 않아도 찬동하고,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람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도 찬동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지금의 시상(時象)에 적중하는 말이다. 조신(朝臣)들이 시비(是非)를 일삼기 시작했으니, 서로 충신(忠臣)이니 역적(逆賊)이니 하며 지적하고 정주(政注)에도 상대적으로 기용하는 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것이다."
하였다. 특진관 홍상빈(洪尙賓)은 말하기를,
"이덕수(李德壽)가 시상에 견준 것은 반드시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선을 찬양하고 악을 징계하기 위해서는 무리지어 나뉘고 유(類)대로 모이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는 그에 대한 시비를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낱낱이 분변한다면 하나도 완전한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하였다. 이조 판서 윤유(尹游)는 말하기를,
"선조(先祖) 때에는 한쪽 사람이 나오면 한쪽 사람은 물러갔었습니다만, 지금은 아울러 임용하기 때문에 사람은 많고 벼슬자리는 적습니다. 그리하여 정경(正卿)으로 있던 사람이 복직(復職)되기를 요구해도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신이 끝내 도목정(都目政)을 행하게 된다면 마땅히 폐기된 사람들을 따로 기록하여 두었다가 품지(稟旨)하여 취사(取捨)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관작(官爵)은 공물(公物)이고, 총재(冢宰)는 중임인데, 어떻게 뜻을 굽혀 한쪽의 의견만 따를 수 있겠는가? 윤봉조(尹鳳朝)·신치운(申致雲) 같은 사람은 대략 서로 같으니 기필코 계속 저지시켜 발바닥에 박힌 못처럼 여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의천(李倚天)을 승지의 구망(舊望)에 주의하도록 허락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다."
하니,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신치운의 문학(文學)과 재화(才華)는 영구히 폐기시킬 수는 없습니다만, 이의천을 승지에 의망(擬望)하는 것을 어찌 경솔히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윤유가 이른바 대정(大政)에 임하여 품지하겠다고 한 것은 장차 성교(聖敎)를 빙자하여 사람들의 말을 막기 위한 것이니, 이는 전형(銓衡)의 체통에 어긋나는 처사이다."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25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윤유가 이른바 대정(大政)에 임하여 품지하겠다고 한 것은 장차 성교(聖敎)를 빙자하여 사람들의 말을 막기 위한 것이니, 이는 전형(銓衡)의 체통에 어긋나는 처사이다."

 

11월 18일 정미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우참찬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응교 심성진(沈星鎭)과 동료 당상인 정우량(鄭羽良)이 동시에 소장을 올려 신을 당비(黨比)의 죄과로 몰아넣었습니다. 윤봉조(尹鳳朝)의 지나간 해의 일에 대해서는 성명(聖明)께서 이미 그 정실(情實)을 살피셨으므로, 을사년448)   이후 청현직(淸顯職)에 의망하는 것을 본래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미년449)  에 귀양갔던 것은 또 새로 범한 죄가 아니었으니, 지금 와서 선발하여 서용한 뒤에 역임했던 구망(舊望)에 검의(檢擬)한 것은 본디 정사의 격례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을 책망하는 것은 한바탕 웃음거리도 못되는 것입니다. 동료 당상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더욱 의아스럽고 개탄스럽습니다. 윤봉조를 도헌(都憲)에 의망한 것을 동료 당상이 과연 몰랐겠습니까? 이를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지만 말하지 않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대 혼자서 모쪼록 비의(備擬)하라고 한 것은 누구의 말이었습니까? 오늘은 신에게 비의하라고 해 놓고 내일은 진소하여 공축(攻逐)하는 것을 어찌 상정(常情)으로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일을 칙려(飭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경의 본심은 알고 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이유(李瑜)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나라에서 믿고 있는 것은 오직 재능있는 사람뿐인데, 아! 병판(兵判)은 훈신(勳臣)의 손자로서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품은 도량은 곧 내가 알고 있는 바이다. 지난번 특별히 발탁하여 사마(司馬)에 제배했던 것은 뜻이 있는 것이었다. 나의 기대는 어찌 육경(六卿)에서 그치는 것일 뿐이었겠는가? 대관(大官)의 도량을 지니고 중신(重臣)의 벼슬로 있다가 졸서(卒逝)했으니, 어찌 내 마음만 슬플뿐이겠는가? 나라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모든 제반 상부(喪賻)를 전례보다 더 주어 나의 뜻을 표하게 하라."
사신은 말한다. "이유는 재주와 능력이 자못 있었지만, 성품이 부박(浮薄)하고 사휼(詐譎)한 데다가 무식(無識)한 것에 걸려 사리에 어긋난 일이 많았다. 심도(沁都)450)  에 머물러 있었을 적에 마침 도시(都試)를 거행했었는데, 그때 밀봉(密封) 한 장을 직접 임금 앞에 진달하게 하였다. 후사(喉司)451)  에서 처음에는 군무상의 기밀로 여겨 감히 펴보지 못했었는데, 임금이 열어보기에 이르러 바로 군교(軍校)들에게 상을 내리기를 청하면서 특지(特旨)를 내릴 것을 원한 것이었다. 이는 은혜를 임금에게로 돌린다는 뜻을 보여 총애와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진신(搢紳)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그러나 말을 잘하고 아첨하여 임금의 뜻을 잘 맞추었으므로, 최고의 총우(寵遇)를 받았고, 드디어 본병(本兵)에 발탁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졸하였다.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그의 죽음을 듣고서는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25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450] 심도(沁都) : 강화도(江華島).[註 451] 후사(喉司) : 승정원(承政院).
사신은 말한다. "이유는 재주와 능력이 자못 있었지만, 성품이 부박(浮薄)하고 사휼(詐譎)한 데다가 무식(無識)한 것에 걸려 사리에 어긋난 일이 많았다. 심도(沁都)450)  에 머물러 있었을 적에 마침 도시(都試)를 거행했었는데, 그때 밀봉(密封) 한 장을 직접 임금 앞에 진달하게 하였다. 후사(喉司)451)  에서 처음에는 군무상의 기밀로 여겨 감히 펴보지 못했었는데, 임금이 열어보기에 이르러 바로 군교(軍校)들에게 상을 내리기를 청하면서 특지(特旨)를 내릴 것을 원한 것이었다. 이는 은혜를 임금에게로 돌린다는 뜻을 보여 총애와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진신(搢紳)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그러나 말을 잘하고 아첨하여 임금의 뜻을 잘 맞추었으므로, 최고의 총우(寵遇)를 받았고, 드디어 본병(本兵)에 발탁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졸하였다.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그의 죽음을 듣고서는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였다."

 

11월 19일 무신

김취로(金取魯)를 병조 판서로, 유최기(兪最基)를 교리로, 오언주(吳彦胄)를 부수찬을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0일 기유

사헌부 【장령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상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장문(狀聞)하기를,
"강가의 15고을 가운데 물에 잠기는 곳은 변천(變遷)이 무상한데, 한 번 기경(起耕)하면 그대로 계속 세액(稅額)에 들어가므로, 백성들이 둘러보기만 할 뿐 감히 기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영영 버리는 땅이 되고 있으니, 등급을 낮추고 세금을 감하여 속전(續田)452)  으로 만들 것을 허락하여 주소서. 주인이 없는 곳은 백성들에게 점유하여 개간할 것을 허락하고 개간한 데에 따라 세금을 거두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에서 복계(覆啓)하니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11월 21일 경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근일 공경(公卿)들이 잇따라 졸서(卒逝)하였으니, 국운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심 판부사(沈判府事)453)  가 졸서했을 적에 나의 윤음(綸音)에 중복(重卜)454)  의 뜻을 보였었는데, 어찌 마음에 없으면서 입으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은 일을 당하여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 있었으므로,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李瑜)가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강도(江都)에서의 밀계(密啓)를 가지고 비난했었지만, 이 또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였다. 송인명이 유척기(兪拓基)와 정석오(鄭錫五)는 쓸 만한 사람임을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척기는 진실로 쓸 만한 사람인데, 그가 출사(出仕)하지 않는 것은 지나치다."
하고, 비국 당상에 차임하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또 김약로(金若魯)를 추천하기를,
"비국의 부제조(副提調)를 감당할 만한데, 친혐(親嫌)에 구애되어 차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 사람이 좌상(左相)의 종제(從第)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임금이 이르기를,
"여몽정(呂蒙正)도 여이간(呂夷簡)을 천거했었다.455) 좌규(左揆)456)  는 세태의 속성을 벗지 못했다."
하고, 판의금에 특차(特差)하라고 명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전에는 군작미(軍作米)에 대한 비국의 사목(事目)을 가지고 명령을 어겼을 경우 10년 동안 금고(禁錮)시켰었는데, 잇따라 나래(拿來)된 수령들의 공사(供辭)를 살펴보면, 창고에서 모축(耗縮)이 나기도 하고 감수(監守)하는 사람이 농간을 부리기도 한 것이므로 스스로 나이(那移)457)  을 범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에는 생사(生死)에 대한 것도 알기가 어려운 일인데, 일체 명령을 어긴 자들을 일례(一例)로 무겁게 감단(勘斷)한다는 것은 법의 본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한 다음 등급을 나누어야 한다는 의논에 따라 몸소 남용(濫用)을 범한 경우에는 금고(禁錮) 10년에 처하고, 아전들이 훔쳐가는 것을 살피지 못한 것과 준봉(準捧)하지 못한 경우에는 금고 5년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김정윤(金廷潤)이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상원 군수(祥原郡守) 이붕운(李鵬運)은 일찍이 국휼(國恤) 때 창기(娼妓)를 끼고 음악을 연주했다는 것으로 탄핵(彈劾)을 받아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을에 부임하자 자신을 살찌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침학을 가하고 있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윤대(輪對)한 제사(諸司)의 관원에서 소회(所懷)를 하문하였으나, 모두들 주달할 것이 없다고 앙대(仰對)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윤대는 옛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매일 상참(常參)하는 법규가 폐기되면서부터 10일에 한 번씩 윤대하는 법이 생겼는데, 이는 서료(庶僚)들로 하여금 모두 스스로 회포를 진달하여 상하의 뜻을 통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무익하지 않았으나, 점점 겉치레로 굳어져 혹은 거지(擧止)가 도리에 어긋나기도 하고 대답하는 것이 평범하여 적합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더욱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윤대관(輪對官)을 볼 적마다 빙긋이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25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윤대는 옛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매일 상참(常參)하는 법규가 폐기되면서부터 10일에 한 번씩 윤대하는 법이 생겼는데, 이는 서료(庶僚)들로 하여금 모두 스스로 회포를 진달하여 상하의 뜻을 통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무익하지 않았으나, 점점 겉치레로 굳어져 혹은 거지(擧止)가 도리에 어긋나기도 하고 대답하는 것이 평범하여 적합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더욱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윤대관(輪對官)을 볼 적마다 빙긋이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11월 22일 신해

김상성(金尙星)을 승지로, 조현명(趙顯命)을 예조 판서로, 조상경(趙尙絅)을 지경연으로, 홍경보(洪景輔)를 호조 참판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참의로, 오언주(吳彦胄)를 이조 정랑으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부응교 심성진(沈星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윤봉조(尹鳳朝)의 죄범이 관계되는 바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10년 동안 폐기시켜 오랫동안 거두어 서용할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서 성상께서 깊이 증오하고 통렬하게 배척하는 뜻을 우러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용하라는 명을 처음 내리자 전조(銓曹)에서 이에 감히 서둘러 거두어 서용하면서 청준(淸峻)한 자리에 천거하여 의망(擬望)했으니, 국법을 두려워하고 공의(公議)를 돌아보는 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각의 신하들은 마땅히 논박하여 바로잡아야 하는데, 여러 날 귀를 기울이고 있어도 고요하기만 한 채 들리는 말이 없었습니다. 신이 마침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으므로,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견파(譴罷)시킴으로써 칙려(飭勵)하는 뜻을 보이소서. 지금 신을 공격하는 의논에 이르기를, ‘서명(敍命)에 대해 쟁론하지 않고 전관을 공격하기에 급급하다.’고 하고, 또 ‘언관(言官)들을 아울러 축출시켜 뒤에 비평하는 길을 끊으려 했다.’ 하고 있습니다. 아! 무릇 일을 논하는 도리는 그 대체(大體)를 살펴보고 의리에 있어 진실로 말할 만하면 말하는 것일 뿐이니 어찌 조만(早晩)과 완급(緩急)을 계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사람들의 말대로 한다면, 근래에 있을 대정(大政)에 전관에게 논핵할 만한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뒤에야 옳은 것이 되겠습니까? 서명(敍命)이 내렸을 적에 대신(臺臣)이 능동적으로 쟁집(爭執)하지 못했는데, 신이 말하지 않았다면 한 가닥 공의(公議)마저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논박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는 일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갔다. 《주역(周易)》의 대유괘(大有卦)를 강했는데, 임금이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실로 이 괘(卦)에서 느끼는 점이 있다. 사람이 어찌 자신을 모르겠는가? 나는 지성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있으므로, 서로 미덥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스스로 부끄러울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은 위엄을 견지하는 기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강이 날로 퇴폐해지고 있으므로 비록 성심을 다하여 감화되는 바가 있기를 기대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은 당습(黨習)에 얽매여 뜻을 거스르며 받아들이기를 어렵게 여긴 채 모두 스스로, ‘나에게도 고집하는 것이 마음속에 있다.’고 여기고 있다. 나는 매양 ‘망(忘)’자로 스스로 면려하고 있고 또 여러 신하에게도 면려하고 있는데 여러 신하들은 이런 당습(黨習)을 버리려고 하지 않고 있다. 진실로 갑자기 버리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런 마음을 오래도록 지키게 된다면 효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손에 이르러서야 가능할 것이요 나의 몸에서는 보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시독관        유건기(兪健基)가 말하기를,
"시비(是非)를 분명히 하고 출척(黜陟)을 공정하게 하고, 혹시라도 감히 협잡(挾雜)을 부리려는 자가 있을 경우 엄격하게 호오(好惡)를 보인다면, 절로 평온한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은 물러가 거처하려는 사람이 많은데, 조용히 구습(舊習)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지척(指斥)하면 물러가기를 달갑게 여기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11월 23일 임자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이 이정보(李鼎輔)의 소장 내용에 공이 없다고 한 말을 이유로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의 감훈(勘勳)을 간략했다고 할 수는 있다. 따라서 잘 가리지 않았다는 말에 어찌 맞설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예조 판서 조현명(趙顯命)도 상소(上疏)하여 인혐하니 비답하기를,
"헌부의 소장은 진실로 의리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종정자(從征者)인 것이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각은 국가의 이목(耳目)의 부탁을 받았고 조정의 시비에 대한 권형(權衡)을 주관하는 곳이다. 따라서 분명히 말하고 드러나게 의논하여 장부(臧否)와 호오(好惡)의 분별을 사방에 환히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대각에서 일에 대해 논한 소장은 대부분 머리를 숨긴 은어(隱語)이어서 무함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폭백(暴白)할 길이 없게 만들고 죄가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숨기게 하고 있으니, 풍습(風習)이 날로 변하는 것은 오로지 여기에 연유한 것이었다. 당론(黨論)이 깊이 고질화되어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의란(疑亂)한 말을 많이 늘어 놓는가 하면, 제류(儕類)들에 대해 논할 때에는 항상 돌보아 감싸는 사심(私心)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머리를 숨기고 전말을 밝히지 않는 말이 있게 된 이유인 것이다. 지난해 이석표(李錫杓)의 소장은 언책(言責)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고 할 만하였지만, 그 가운데 은어(隱語)가 많았기 때문에 공척(攻斥)한 것은 반드시 지적하는 바가 있을 것인데도 어찌하여 공언(公言)으로, 항론(抗論)하여 성명(聖明)의 하문에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부끄러워 움츠리면서 호도(糊塗)함으로써 미봉하였으니, 또한 매우 구간(苟簡)한 일이었다. 이보혁(李普赫)의 훈봉(勳封)은 세상에서 비평하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이정필(李廷弼)과 공을 다툴 적에 이정보가 또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26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대각은 국가의 이목(耳目)의 부탁을 받았고 조정의 시비에 대한 권형(權衡)을 주관하는 곳이다. 따라서 분명히 말하고 드러나게 의논하여 장부(臧否)와 호오(好惡)의 분별을 사방에 환히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대각에서 일에 대해 논한 소장은 대부분 머리를 숨긴 은어(隱語)이어서 무함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폭백(暴白)할 길이 없게 만들고 죄가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숨기게 하고 있으니, 풍습(風習)이 날로 변하는 것은 오로지 여기에 연유한 것이었다. 당론(黨論)이 깊이 고질화되어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의란(疑亂)한 말을 많이 늘어 놓는가 하면, 제류(儕類)들에 대해 논할 때에는 항상 돌보아 감싸는 사심(私心)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머리를 숨기고 전말을 밝히지 않는 말이 있게 된 이유인 것이다. 지난해 이석표(李錫杓)의 소장은 언책(言責)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고 할 만하였지만, 그 가운데 은어(隱語)가 많았기 때문에 공척(攻斥)한 것은 반드시 지적하는 바가 있을 것인데도 어찌하여 공언(公言)으로, 항론(抗論)하여 성명(聖明)의 하문에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부끄러워 움츠리면서 호도(糊塗)함으로써 미봉하였으니, 또한 매우 구간(苟簡)한 일이었다. 이보혁(李普赫)의 훈봉(勳封)은 세상에서 비평하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이정필(李廷弼)과 공을 다툴 적에 이정보가 또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겸괘(謙卦)를 강하였는데, 동경연 이덕수(李德壽)가 말하기를,
"《주역(周易)》의 64괘(卦) 가운데 오직 겸괘의 육효(六爻)만이 모두 길(吉)하여 후회가 없으리라는 말이 있는데, 공자(孔子)가 겸손에 대해 찬양(贊揚)한 것이 더욱 지극합니다. 《서경(書經)》의, ‘오만하면 손해를 부르게 되고 겸손하면 이익을 받게 된다.’고 한 말은 임금의 도리는 자신을 폄손(貶損)하는 것을 겸손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궁실(宮室)·원유(苑囿)의 지나친 자봉(自奉)과 자녀(子女)·옥백(玉帛)을 누리는 즐거움과 스스로 위대하고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모두 이른바 겸손하지 못한 종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한 가지라도 있으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자신을 해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강과 바다는 수없이 흘러 들어오는 물을 받아 들이고 있는데도 범람하지 않는 것은 위치하고 있는 곳이 낮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덕경(道德經)》에도 이 의리에 대해 말했으니, 노씨(老氏)의 도(道)는 오로지 겸손을 숭상하고 있으며, 한 문제(漢文帝)는 이를 이용하여 후원(後元)458)  의 지치(至治)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사치하게 되기 때문에 겸손은 또한 검소와 직결됩니다. 일찍이 《예기(禮記)》의 ‘검(儉)’자로 인하여 겸도(謙道)에 대해 우러러 진달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겸괘(謙卦)에서도 또 ‘검(儉)’자의 뜻을 진달하게 되었습니다. 겸손과 검소는 천지와 인신(人神)이 행복하게 여기는 것이고 교만과 사치는 천지와 인신이 미워하는 것이니, 제왕이나 서민이나 모두 마땅히 면려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개납(開納)하였다. 특진관 홍상빈(洪尙賓)은 말하기를,
"노씨(老氏)의 말은 법강(法講)에서 진달해서는 안 됩니다만, 이덕수가 겸손의 뜻에 대해 설명한 것은 옳습니다."
하였다.

 

효자 박성창(朴聖昌)을 복호하라고 명하였다. 박성창은 공홍도(公洪道)의 백성인데 아버지의 원수를 찔러 죽이고 관(官)에 나아가 청명(請命)하였다. 관찰사        이종백(李宗白)이 논계(論啓)하였으므로 형조에 내렸는데, 형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이 박성창은 바로 주관(周官)에서 이른바 ‘사람을 살해하였으나 의로운 것이다.’라는 것에 해당이 됩니다. 경(經)에도 복수의 의리를 허여하였습니다만, 법에는 당연히 시행해야 할 율(律)이 있는 것입니다. 당(唐)나라의 신하인 한유(韓愈)의 복수장(復讐狀)에 이르기를, ‘무릇 아버지를 위해 원수를 갚은 경우에는 그 사건이 발각된 즉시 그 사건의 내용을 갖추어 상서성(尙書省)에 신보(申報)하고, 거기에서 의논을 모아 주문(奏聞)하여 사의(事宜)를 참작하여 처리한다.’고 했는데, 이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지금 박성창의 어미가 맹인(盲人)이어서 폐기된 사람이지만, 9년 동안 원수를 섬겼으니, 그 죄가 윤상(倫常)에 관계되므로 또한 가볍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모두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대저 박성창은 어린 나이에 변을 당하였으므로, 숨어서 떠돌아 다니다가 장성하자마자 통쾌하게 9년 전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일이 매우 기특하고 그 효성이 숭상할 만합니다. 도신이 인용한 주관(周官)의 의의가 진실로 윤당(允當)합니다. 그러나 관에 고하지 않고 멋대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장(杖) 60이라는 것이 율문(律文)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를 고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박성창의 어미 김씨(金氏)는 맹인인데다 힘이 약하여 흉포한 장년(壯年)의 남자를 항거할 수 없었던 것은 이세(理勢)가 진실로 그러하였습니다만, 자기 아들이 복수하겠다는 뜻이 있음을 알고는 기꺼이 따라서 도와 성공시켰으니, 이 또한 드러낼 만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누적되어 온 통분한 마음에 설사 의(義)를 자처하기에는 미진한 점이 있었습니다만, 폐질(廢疾)이 있는 몸이고, 죄가 사형(死刑)에는 이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법에도 논하지 말라는 조문이 있으니, 너그럽게 사면(赦免)하여 방송(放送)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고사를 상고하게 하였다. 옥당 유건기(兪健基)가 말하기를,
"옛날 장심소(張審素)의 아들 장황수(張璜琇)는 양왕(楊汪)이 자기 아비를 무함하여 살해한 것을 원통하게 여겨 영표(嶺表)에서 도망하여 돌아와서 양왕을 죽였습니다. 장구령(張九齡)459)                  은 이를 살리려고 했습니다만, 이임보(李林甫)가 쟁론하였으므로, 드디어 죽임을 당했는데, 사민(士民)들이 불쌍하게 여겨 그를 위해 애뢰(哀誄)를 지어 사당에 바쳤으며, 호씨(胡氏)460)                  의 의논도 장구령을 옳게 여겼습니다. 양(梁)나라 천감(天監)461)                   연간에 회양(淮陽) 사람이 그 태수(太守)        성안락(成安樂)을 죽이고 성(城)을 가지고 내부(內附)하자 무제(武帝)가 상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성경준(成京儁)이 사람을 사서 자기 아비를 살해한 자를 찔러 죽이자 무제는 이를 의롭게 여겨 석방하였습니다. 본조의 신용개(申用漑) 아비 신면(申㴐)이 함길도 관찰사로 있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도당에서 살해당하였는데, 신용개가 아비의 원수를 도심(都心)의 시가(市街)에서 칼로 베고서 대궐에 나아가 청명(請命)하였으나, 조가(朝家)에서 죄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박성창도 죄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판결하기를,
"다만 한유(韓愈)의 복수의(復讐議)뿐만이 아니라 왕첩(往牒)462)                  과 국조(國朝)의 고사에도 모두 원인(援引)할 만한 것이 있으니, 특별히 장형(杖刑)을 제하고 방송(放送)하도록 하라. 박성창은 그의 나이 9세의 어린 아이로서 아비의 원수를 기억하였다가 9년 뒤에 어미를 찾아서 대낮에 원수를 갚았으니, 옛사람에 견주어 특이하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관정(官庭)에 자수하여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니, 또한 옛날 왕세명(王世命)에 견주어 부끄러울 것이 없다. 특별히 복호를 제급하여 그의 효성을 표창하는 바이다. 그의 어미 김씨도 방송하여 박성창으로 하여금 보호하여 돌아가게 하도록 도신에게 유시(諭示)하라."
하였다.

 

삼수(三水)·갑산(甲山)의 백성들에게 소금과 솜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삼수·갑산은 지역이 궁벽하여 염장(鹽醬) 없이 밥을 먹고, 또 추위가 일찍 닥치는 지역인데도 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상소하기를,
"북도(北道) 백성에게 지급할 솜은 마땅히 영남의 사군목(射軍木) 3천 필(疋)을 획송(劃送)해야 하겠습니다만, 이는 한때의 혜택에 그칠 뿐입니다. 신이 삼가 고례(古例)를 조사해 보았더니, 영남의 목화(木花)로 북도의 곡식과 교환하여 매매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해마다 포항창(浦項倉)의 모곡(耗穀) 5, 6백 석(石)을 덜어내어 절기를 당하여 솜을 사가지고 10월에 돌아가는 배에 실어서 북청(北靑)에 도착하면, 포마(舖馬)로 삼수·갑산으로 운송시켜 발매(發賣)하게 할 경우 본곡(本穀)을 본래의 숫자대로 환수하는 것이 매우 쉬울 것입니다. 만일 삼수·갑산은 지역이 외져서 곡식을 저축하기에 폐단이 있다면, 혹 흉년을 당하였을 경우 이를 포목(布木)으로 바꾸어 그 해의 예방포(例防布)로 대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군목 4천 필을 획송하되, 아울러 비국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24일 계축

전 지중추부사 이의만(李宜晩)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기구신(耆舊臣)이라는 것으로 특별히 장제(葬祭)를 돌보아 도와주도록 명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11월 25일 갑인

이광덕(李匡德)을 예문 제학으로, 이철보(李喆輔)를 집의로, 유엄(柳儼)을 승지로, 권업(權𢢜)을 판윤으로, 유척기(兪拓基)를 동경연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장령으로, 박준(朴㻐)을 헌납으로, 신수(申燧)를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의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현록 대부(顯祿大夫)인 종신(宗臣)이 길에서 대신을 만났을 경우 옛날에는 손양(遜讓)하는 예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기하고 거행하지 않습니다. 대개 같은 품계라 하더라도 대신의 반차(班次)가 으레 현록 대부의 윗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길에서 만났을 경우 하위(下位) 대신이 우위(右位)의 대신을 대하는 준례를 따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군(大君)·왕자(王子)는 품계가 없지만 내가 일찍이 국구(國舅)를 만났을 때 교자(轎子)에서 내린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스스로 고도(古道)를 행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신(大臣)은 임금의 바로 아래이니, 몸을 굽혀 존대하는 것은 바로 조정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것이 된다. 아뢴 대로 기록하여 법령으로 만들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강춘(江春)의 감영(監營)에서 주사(籌司)463)  의 관문(關文)을 무시하고 선공감(繕工監)의 목물(木物)을 속공(屬公)시켰다 하여 감사 한현모(韓顯謨)를 파직할 것을 아뢰니,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공인(貢人)의 일로 인하여 도신을 잡아오기까지 하는 것은 도리어 사체를 손상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외방에서 비국을 무시한다면 장차 어떻게 조령(朝令)이 시행될 수 있겠는가? 당(唐)나라 때 번신(藩臣)들이 화(禍)가 있게 될까 두려워한 때문에 내가 작은 일로 인하여 나의 뜻을 보이려 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지사 이덕수(李德壽)에게 이르기를,
"경연(經筵)에서 잇따라 부주(敷奏)하는 것을 듣고 경이 역상(易象)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았다. 괘획(卦劃)과 단상(彖象)의 근원에 대해 상세히 진달하라."
하니, 이덕수가 사례(謝禮)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어찌 깊이 탐구했겠습니까? 일찍이 읽어 보았을 뿐입니다. 하도 낙서(河圖洛書)464)  에 대해서도 그 깊은 뜻을 탐구하여 보려고 했었습니다만, 끝내 통달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일찍이 손수 역의(易義)에 관한 수십 조항을 기록해 둔 것이 있었는데, 선유(先儒)들이 설파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주역(周易)》의 공부는 이것뿐입니다."
하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신이 연소했을 때에는 신선술(神仙術)을 매우 좋아하여 《참동계(參同契)》와 같은 여러 책들을 탐독하면서 여러 해 동안 골똘히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중년에는 우연히 불어(佛語)를 보았었는데, 인하여 그 심학(心學)을 사랑하게 되었고 때때로 영롱하게 통하는 곳이 있기도 했습니다. 만년에는 사서(四書)와 이경(二經)으로 되돌아 와서 이미 여러번 주독(周讀)했습니다만, 《역경(易經)》에 이르러서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 막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범람(汎濫)한 것이 그처럼 극도에 달했었으니, 천하의 서책 가운데 응당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간책(簡冊)이 매우 번다한데 신이 어떻게 다 열람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나이 18세 때 우연히 읽은 책을 계산하여 보니 3천 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 60이 넘었습니다만, 예전부터 좋아하던 것을 버리지 못하여 매양 좋은 책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등불을 돋우고 읽습니다. 그뒤 40년 동안 열람한 것을 계산하여 보면 7, 8천 권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이덕수(李德壽)는 젊어서부터 고문(古文)에 힘을 기울였는데, 늙어갈수록 더욱 줄어들지 않았다. 인품이 창울(蒼鬱)하고 혼후(渾厚)하며 기력(氣力)이 있었는데, 꾸미는 습성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때로는 질박[野]한 데 가깝기도 했다. 일찍이 귓병을 앓아 귀가 먹어서 총명이 내심(內心)에 전일(專一)될 수 있었다. 그런 때문에 널리 관통하여 제가(諸家)의 책을 마구 읽었으므로, 육예(六藝)465)  로부터 백가(百家)의 서책은 물론, 복서(卜筮)·상술(相術)·수학(數學)의 종류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깨우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더욱 노불(老佛)에 조예가 깊었다. 비록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데 대해 사람들이 떠나가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록(利祿)에 담박하여 상대와 다투는 것이 없었고,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저서(著書)할 때에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었고, 눈썹과 수염에 고색이 저절로 나타났으며, 말은 질박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진현(進見)할 때마다 임금이 흔연(欣然)히 예우(禮遇)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26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사상-유학(儒學)


[註 464] 하도 낙서(河圖洛書) : 하도(河圖)는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黃河)에서 길이 8척(尺)이 넘는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서, 《주역(周易)》의 팔괘(八卦)의 근원이 된 것이고, 낙서(洛書)는 하 우씨(夏禹氏)의 9년 치수(治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는 글로서, 《서경(書經)》 중의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임.[註 465] 육예(六藝) :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춘추(春秋)》·《예기(禮記)》·《악기(樂記)》를 말함.
사신은 말한다. "이덕수(李德壽)는 젊어서부터 고문(古文)에 힘을 기울였는데, 늙어갈수록 더욱 줄어들지 않았다. 인품이 창울(蒼鬱)하고 혼후(渾厚)하며 기력(氣力)이 있었는데, 꾸미는 습성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때로는 질박[野]한 데 가깝기도 했다. 일찍이 귓병을 앓아 귀가 먹어서 총명이 내심(內心)에 전일(專一)될 수 있었다. 그런 때문에 널리 관통하여 제가(諸家)의 책을 마구 읽었으므로, 육예(六藝)465)  로부터 백가(百家)의 서책은 물론, 복서(卜筮)·상술(相術)·수학(數學)의 종류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깨우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더욱 노불(老佛)에 조예가 깊었다. 비록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데 대해 사람들이 떠나가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록(利祿)에 담박하여 상대와 다투는 것이 없었고,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저서(著書)할 때에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었고, 눈썹과 수염에 고색이 저절로 나타났으며, 말은 질박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진현(進見)할 때마다 임금이 흔연(欣然)히 예우(禮遇)하였다."

 

11월 26일 을묘

주강을 행하였다.

 

11월 27일 병진

삼강(三江)의 유생(儒生) 이표(李杓) 등 30여 인이 상소하기를,
"구제(舊制)에 동몽 교관(童蒙敎官)은 8원(員) 외에 또 1원을 설치하여 가르쳤었습니다. 강교(江郊)의 동몽(童蒙)은 중년(中年)에 경관(京官)으로 되면서 반을 감하였으며, 강외(江外)의 교관(敎官)은 또 폐기시켜 버렸었습니다. 그뒤 숙종(肅宗)갑술년466)   무렵에 교유(郊儒)가 상소하여 청한 것으로 인하여 구규(舊規)대로 회복시키라고 명하였습니다. 민정보(閔鼎輔)가 제일 먼저 이 선발에 뽑혔고 이헌좌(李軒佐)·이구(李構)·이회(李薈)가 그뒤를 이었으며, 고두표(高斗杓)에 이르러서는 사만(仕滿)된 뒤에 산관(散官)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뒤에 드디어 폐기되었으니, 원컨대 구규를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향학(向學)하는 마음이 아름답기는 하나, 삼강(三江)도 경중이므로 본래부터 교관(敎官)이 있는데, 어떻게 따로 설치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11월 28일 정사

봉조하 민진원(閔鎭遠)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면서 하유하기를,
"민 봉조하는 휴척(休戚)을 함께 하는 신하로서, 고집하는 것은 막힌 점이 있으나 나라를 위하는 단심(丹心)은 변함이 없었으니, 내가 전후에 간격없이 대우했던 것은 그것 때문인 것이다. 몇 년 간 고심(苦心)하면서 조정하려 애썼던 두 봉조하의 뜻이 깊었었다. 아! 성후(聖后)의 동기로는 오직 이 사람이 있었을 뿐인데, 작년에 부부인(府夫人)이 입궐했을 적에 함께 자위(慈闈)를 모셨었다. 그 자리에서 그가 노쇠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인(家人)처럼 자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어찌 갑자기 졸서(卒逝)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녹봉(祿俸)은 3년 동안 그대로 지급하고, 시호(諡號)를 내리고 예장(禮葬)하는 것을 모두 준례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민진원은 성품이 집요(執拗)한데다가 당(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이었다. 그러나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훙서(薨逝)했을 적에 원임 대신(原任大臣)으로 입대(入對)하여 송 인종(宋仁宗) 때의 고사(故事)처럼 종신(宗臣)을 간택하여 양육할 것을 청하였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였다고 했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민진원은 폐부(肺腑)처럼 가까운 친척으로 시례(詩禮)467)  의 교훈을 받았으며, 조정에 벼슬하여서는 유독 풍재(風裁)를 지켰으므로 명망이 일시에 무거웠었습니다. 신축년468)  ·임인년469)  에 화환(禍患)이 일어났을 적엔 멀리 귀양갔었는데, 을사년470)  에 제일 먼저 정승에 임명되자, 수차(袖箚)를 올려 경종(景宗)에게 병환이 있었다는 것을 중외에 반시(頒示)하여 저사(儲嗣)를 세운 의리를 밝힐 것을 청하였다가, 한쪽 사람들에게 크게 공척(攻斥)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정미년471)   이후에는 마침내 조정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이광좌(李光佐)와 함께 동시에 치사(致仕)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서(卒逝)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신(史臣)이 집요한데다가 당에 대한 병통이 있다고 기록한 것에서도 이광좌의 무리들이 기필코 비난하여 헐뜯으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27면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정론-간쟁(諫諍) / 재정-국용(國用) / 역사-사학(史學)


[註 467] 시례(詩禮) : 가정 교육을 가리키는 말.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의 내용 가운데 공자(孔子)가 자기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詩)를 배웠느냐고 묻고 예(禮)를 배웠느냐고 물었다는 데서 온 말임.[註 46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469]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470]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471] 정미년 : 1727 영조 3년.
사신은 말한다. "민진원은 성품이 집요(執拗)한데다가 당(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이었다. 그러나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훙서(薨逝)했을 적에 원임 대신(原任大臣)으로 입대(入對)하여 송 인종(宋仁宗) 때의 고사(故事)처럼 종신(宗臣)을 간택하여 양육할 것을 청하였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였다고 했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민진원은 폐부(肺腑)처럼 가까운 친척으로 시례(詩禮)467)  의 교훈을 받았으며, 조정에 벼슬하여서는 유독 풍재(風裁)를 지켰으므로 명망이 일시에 무거웠었습니다. 신축년468)  ·임인년469)  에 화환(禍患)이 일어났을 적엔 멀리 귀양갔었는데, 을사년470)  에 제일 먼저 정승에 임명되자, 수차(袖箚)를 올려 경종(景宗)에게 병환이 있었다는 것을 중외에 반시(頒示)하여 저사(儲嗣)를 세운 의리를 밝힐 것을 청하였다가, 한쪽 사람들에게 크게 공척(攻斥)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정미년471)   이후에는 마침내 조정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이광좌(李光佐)와 함께 동시에 치사(致仕)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서(卒逝)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신(史臣)이 집요한데다가 당에 대한 병통이 있다고 기록한 것에서도 이광좌의 무리들이 기필코 비난하여 헐뜯으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월 29일 무오

전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을 나처(拿處)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왕제(王弟)인 연령군(延齡君) 이헌(李昍)의 소후자(所後子)472)  인 낙천군(洛川君) 이온(李縕)을 위하여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김치만의 딸과 혼사(婚事)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김치만이 대답하기를, ‘먼저 고 상신 홍치중(洪致中)의 죽은 아들의 유복자(遺腹子)와 약혼(約婚)했었는데, 지금 홍치중이 이미 죽었으나, 의리에 있어 약속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거듭 엄중한 하교를 내려 즉시 택일(擇日)하여 아뢰게 하고서 하교하기를,
"김치만뿐만 아니라 누구이든 그 아비가 군신(君臣)의 분의를 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김치만은 잡아오게 하고 종부시로 하여금 혼사를 주관하여 택일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낙천군의 혼인이 성상께서 친척과 친목하려는 뜻에서 나왔으나, 길사(吉事)는 핍박하여 다그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의 후손이 단지 세 사람 있을 뿐인데, 내가 동기의 아들을 성혼(成婚)시키지 못한다면, 뒷날 지하에 돌아가 무슨 말로 앙대(仰對)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신(史臣)도 나의 박덕(薄德)함을 기록할 것이다. 김치만이 처음에는 도혼(倒婚)473)  이라고 핑계대다가 끝에 가서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일컫고 있다. 만일 왕법(王法)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결단코 감히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남녀를 마땅히 그대로 둘 다 늙게 만들어야겠다."
하였다. 김치만이 수금(囚禁)되어서도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다. 수일이 지난 뒤 이에 하교하기를,
"인신(人臣)이 되어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인부(人父)가 되어 그 자식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이것이 불충(不忠)이요 불효(不孝)인 것이다. 이렇게 서로 버티는 것은 사체만을 손상시킬 뿐이요. 김희로(金希魯)를 우선 삭직(削職)시키라."
하니,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인구(引咎)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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