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경신
임금이 상참을 행하였다. 대신이 봉조하 민진원(閔鎭遠)의 상(喪)을 위하여 애도(哀悼)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전의 하교에 나의 마음을 다 말하였다. 고집하는 것이 막힌 바가 있다고 말한 것은 추후에 제론(提論)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미 마음속으로 그가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떻게 가차(假借)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위한 단심(丹心)이란 말로 결론지은 것 또한 나의 충심에서 나온 말이다. 근래에 시법(諡法)이 모두 폐기되어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시호만을 얻으려 하고 있는데, 나의 이 말은 한편으로는 원로(元老)에게 성실함을 보이기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조정의 겉치레를 계칙하려는 것이었다. 엊그제 두 봉조하를 거론하여 유시(諭示)한 것에 대해서는 졸서한 사람이나 생존한 사람이나 모두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같은 날 함께 치사(致仕)를 허락한 것은 실로 내가 고심(苦心)하여 조정하기 위한 것에서 말미암았으니,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이 이런 뜻을 안다면 반드시 다시는 감히 시기하고 저해하는 것을 일삼지 못할 것이다. 진실로 나의 이런 뜻을 본받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아비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장령 이익정(李益炡)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동경연 이덕수(李德壽)가 말하기를,
"삼가 하교를 살펴보건대, 초초(草草)한 문의(文義)로 어떻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 계셨는데, 이는 실로 신하들의 죄이니, 감히 더욱 더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도 어려운 것을 행하시라고 권할 것이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1장(丈)을 말하는 것보다는 1척(尺)을 행하는 것이 낫고, 1척을 말하는 것보다는 1촌(寸)을 행하는 것이 낫다.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신 등이 진실로 계옥(啓沃)한 공은 없습니다만, 전후에 강하여 토론한 것 가운데 어찌 한두 가지도 행할 만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 행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니, 진언(進言)하는 사람들도 해체(解體)가 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마음을 넓혀 청납(聽納)하시어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신다면, 신처럼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어찌 진헌할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를 대제학으로 삼았다.
12월 2일 신유
지평 박사창(朴師昌)이 상소하여 안흥(安興)에 대한 일을 논하기를,
"신이 안흥에 보름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작은 배를 타고 물굽이를 따라 두루 살펴보았는데, 남북이 넓고 길어서 공력(功力)이 몹시 넓고 컸습니다. 따라서 온 도의 백성들의 인력과 거만(巨萬)의 재화가 아니고서는 결코 완축(完築)하기가 어렵습니다. 설령 완축을 한다 하더라도 또한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제언(堤堰)의 역사(役事)가 완료되면 앞바다가 좁아지고 앞바다가 좁아지면 들락거리는 조수(潮水)에 또한 진흙과 모래가 밀려와서 막혀 버리게 될 것이니, 모래를 파내는 이로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저 호남의 조운선(漕運船)은 고군산(古群山)에서 곡식을 싣고 첫 번째는 원산(元山)에 정박하고 두 번째는 안흥에 정박하는데, 바닷길이 멀고도 넓어서 풍파(風波)가 간혹 일어남에 따라 가끔 짐을 실은 배가 전복(顚覆)되는 일이 있으나, 이는 진실로 두 섬의 거리가 좀 먼 것에 연유한 것이지 안흥의 뱃길이 얕고도 좁은 것에 연유한 것은 아닙니다. 고 상신 조문명(趙文命)이 당초에 건의한 것은 그것이 나라를 위하여 원대한 앞일을 내다보는 염려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로 하여금 오늘날의 이해(利害)를 눈으로 직접 보게 했더라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서둘러 혁파할 것을 청했을 것입니다. 저 이희보(李喜報)의 계책은 한때 요행히 공명(功名)을 희망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역사를 시작한 지 5년이 되었으나 완축(完築)될 기약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 조정을 기만하면서 더욱 광탄(狂誕)한 짓을 멋대로 하고 있으니,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 법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법이 있다면 한 마디로, ‘용서 없이 죽여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빨리 엄중한 주벌(誅罰)을 가하여 한 진(鎭)의 사람들에게 사과하소서."
하니, 임금이 의율(擬律)이 지나치다고 비답하였다. 뒤에 이희보는 오언주(吳彦胄)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영남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장령 조세후(趙世垕)가 상소하여 청하기를,
"액수(額數) 외의 여정(餘丁)을 궐액(闕額)에 충정시키는 것을 혁파하고, 척박해서 묵혀 버린 토지를 낮추어 속전(續田)으로 만들게 하고, 신축년474) ·임인년475) 의 오래 된 포흠(逋欠)을 일체 모두 탕감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지난번 음월(陰月)476) 에 있었던 천둥의 변괴와 지금의 때아닌 장맛비는 모두 해이함에서 나타난 조짐인 것입니다. 지금은 온갖 법도가 해이해져 육경(六卿) 이하 한 사람도 국사를 담당하는 사람이 없으며, 간혹 있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비웃음을 받는 사례가 많습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한유(漢儒)들이 부회(傅會)한 것을 귀하게 여길 것은 못 되나,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한다고 하는 이치는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임금의 명을 존엄하게 여기지 않아서 지존(至尊)께서 혼자 수고로우신 까닭에 국사가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람의 일을 잘 듣고 있는 하늘이 재변(災變)을 보여 경칙(警飭)하는 것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때아닌 비가 이렇게 내리고 있으니 한유(漢儒)들의 말을 믿을 것은 못되나, 근일 조정의 기상이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은 태만하고 해이함을 우려하겠지만, 나는 진실로 마음을 졸이고 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열성조(列聖朝)에서는 모두 국사를 담당하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효종조(孝宗朝)에는 민정중(閔鼎重)·정태화(鄭太和), 현종조(顯宗朝)에는 김좌명(金佐明), 선조(先朝)에는 민진후(閔鎭厚) 같은 사람이 대대로 있어 왔습니다. 지금 조신(朝臣)으로서 선조(先朝)를 섬긴 이들 가운데에는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있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신진(新進)들은 모두 그렇지 않습니다. ‘탕평(蕩平)’이란 두 글자가 지금 크게 기휘(忌諱)하는 것이 되고는 있습니다만, 그것을 지향하는 사람도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관하는 무리들은 번번이 탕평으로 투입(投入)하는 것을 가리켜 비웃으면서 스스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는 것을 하나의 고상한 풍치(風致)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그들이 허명(虛名)이 있다는 것으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감별(鑑別)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이는 왕우칭(王禹偁)이 이른바 ‘지조 없이 함께 나아가고 함께 물러간다.’는 것으로서 취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약로(金若魯)를 부제조로 삼아서 묘모(廟謨)에 전념하게 해야 하니, 그를 비국의 주인(主人)으로 삼도록 하라. 이렇게 연소하고 근간(勤幹)한 사람은 마땅히 위임하여 성효(成効)를 요구해야 한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당론(黨論)이 사람과 국가에 화(禍)를 끼치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성상께서는 혁연(赫然)이 분발하시고 초연(超然)히 먼 앞날을 내다보시어 백 년 동안 내려온 음붕(淫朋)을 타파함으로써 일세(一世)의 고질적인 풍습을 씻어버리고자 하여 처음에로 탕평(蕩平)이라는 하교를 발표하였었다. 따라서 한때에 하교를 받들어 일하면서 주장(主張)했던 사람들이 드디어 탕평이라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탕평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징계되고 고심(苦心)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지만, 의리를 밝히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건극(建極)의 의리를 깊이 잘 살피지 못한 것에 연유되어 고식적인 정사로써 가차(假借)하는 일을 행하려고 하였었다. 대저 시비(是非)가운데 가장 큰 것은 충(忠)·역(逆)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어찌 여기에 건극(建極)함이 있어서 충·역에 대한 논쟁으로 조정에서 시끄럽게 다툴 수가 있겠는가? 처음 일을 한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권병(權柄)을 잡게 하였다 하더라도 사정(邪正)이 뒤섞이고 시비(是非)가 분명하지 않으면, 원두(源頭)가 올바르지 않게 되는 것이고 말류(末流)에 가서는 점점 더 혼란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형세가 반드시 의리를 변모(弁髦)처럼 여기고 염우(廉禹)를 파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날로 비하(卑下)되고 괴란(壞亂)되는 상황으로 빠져들게 되고야 말 것이다. 더구나 소인(小人)들이 그 틈새를 노리는 것이겠는가?" 상하가 서로 버티는 때를 당해서 서로 물고 늘어지는 형세의 이로움을 얻은 처지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 권병(權柄)을 잡게 되면, 한편은 주저하면서 돌아보고 피하느라고 이 편에서 목졸림을 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한편은 움츠리고 관망하느라고 이 편에서 머리를 굽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 편에서는 마음대로 손에 넣고 주무를 수 있게 되고 조종하고 억양(抑揚)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이쪽에 미운 사람이 있으면 저쪽의 힘을 빌어서 무함(誣陷)하고, 저쪽에서 권병을 침탈하려 하면 또 공의(公議)를 인용하여 밀어 배제(排擠)하게 된다. 은밀히 피차(彼此)의 당여들을 부려서 서로 시비를 다투도록 돋구고는 사람들을 서로 등지게 만들고 마니, 혼자 이록(利祿)을 독점하여 임금을 고뇌에 빠뜨리면서 의임(倚任)은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권세가 완성되고 위세가 확립된 데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처치(處置)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부억(扶抑)하는 것이라고 하여 임금의 위엄이 행해지지 못하게 하고, 아래에서 항론(抗論)하는 것이 있으면 경알(傾軋)하는 것이라고 하여 직언이 상문(上聞)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배척하려고 할 경우에는 당인(黨人)이라고 배격하고 자기가 나오게 하려고 할 경우에는 공평하다고 포장(褒奬)한다. 이리하여 위복(威福)의 권한이 임금에게서 나오지 못하게 됨에 따라 한때에 이익을 탐하여 간진(干進)하는 무리들이 파리처럼 이익을 경영하고 서캐처럼 붙좇아 형세를 얻어보려는 길목에서 분분하기 그지없다. 이리하여 이름을 아끼는 선비들은 모두 멀리 피할 것을 생각하면서 마치 자신의 몸이 더럽혀질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들은 이미 스스로 사류(士類)에게 비난받고 공의(公議)에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작게는 당론(黨論)으로 무함하고 크게는 역망(逆網)으로 중상하니, 사람들이 마음이 떨려서 감히 입을 열어 탕평(蕩平)에 대해 논급(論及)하지 못하고 조정에서는 말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배(時輩)들의 매나 개 노릇을 하면서 힘을 바치는 자가 아니고서는 1년 내내 백간(白簡)의 주달(奏達)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아! 우리 성상께서 혈성(血誠)을 기울여 당론을 제거하기 위해 위로 하늘에 맹세한 애타는 윤음(綸音)을 내렸는데, 이는 귀신을 울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자리에서 차마 면대하여 속임으로써 기탁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또 여러 당(黨) 외에 또 하나의 당을 세워 놓고서는 조정에 들어가서는 당을 타파시켜야 한다는 말을 꾸며서 하고, 나가서는 당을 튼튼하게 만들 계책을 강구하면서 천고(天古)에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고도 매양 당인(黨人)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 탕평을 유구(悠久)히 견지(堅持)해 가는 도리를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충동시켰기 때문에 충언(忠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들의 총우(寵遇)는 더욱 융숭해졌다. 우리 성상께서 10년 동안 붕당을 타파하려 한 정치가 그저 변변치 못한 무리가 이록(利祿)을 조종하는 마당이 되고 말았으니,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2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과학-천기(天氣)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註 476] 음월(陰月) : 음력 4월.
사신은 말한다. "당론(黨論)이 사람과 국가에 화(禍)를 끼치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성상께서는 혁연(赫然)이 분발하시고 초연(超然)히 먼 앞날을 내다보시어 백 년 동안 내려온 음붕(淫朋)을 타파함으로써 일세(一世)의 고질적인 풍습을 씻어버리고자 하여 처음에로 탕평(蕩平)이라는 하교를 발표하였었다. 따라서 한때에 하교를 받들어 일하면서 주장(主張)했던 사람들이 드디어 탕평이라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탕평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징계되고 고심(苦心)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지만, 의리를 밝히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건극(建極)의 의리를 깊이 잘 살피지 못한 것에 연유되어 고식적인 정사로써 가차(假借)하는 일을 행하려고 하였었다. 대저 시비(是非)가운데 가장 큰 것은 충(忠)·역(逆)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어찌 여기에 건극(建極)함이 있어서 충·역에 대한 논쟁으로 조정에서 시끄럽게 다툴 수가 있겠는가? 처음 일을 한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권병(權柄)을 잡게 하였다 하더라도 사정(邪正)이 뒤섞이고 시비(是非)가 분명하지 않으면, 원두(源頭)가 올바르지 않게 되는 것이고 말류(末流)에 가서는 점점 더 혼란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형세가 반드시 의리를 변모(弁髦)처럼 여기고 염우(廉禹)를 파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날로 비하(卑下)되고 괴란(壞亂)되는 상황으로 빠져들게 되고야 말 것이다. 더구나 소인(小人)들이 그 틈새를 노리는 것이겠는가?"
상하가 서로 버티는 때를 당해서 서로 물고 늘어지는 형세의 이로움을 얻은 처지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 권병(權柄)을 잡게 되면, 한편은 주저하면서 돌아보고 피하느라고 이 편에서 목졸림을 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한편은 움츠리고 관망하느라고 이 편에서 머리를 굽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 편에서는 마음대로 손에 넣고 주무를 수 있게 되고 조종하고 억양(抑揚)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이쪽에 미운 사람이 있으면 저쪽의 힘을 빌어서 무함(誣陷)하고, 저쪽에서 권병을 침탈하려 하면 또 공의(公議)를 인용하여 밀어 배제(排擠)하게 된다. 은밀히 피차(彼此)의 당여들을 부려서 서로 시비를 다투도록 돋구고는 사람들을 서로 등지게 만들고 마니, 혼자 이록(利祿)을 독점하여 임금을 고뇌에 빠뜨리면서 의임(倚任)은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권세가 완성되고 위세가 확립된 데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처치(處置)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부억(扶抑)하는 것이라고 하여 임금의 위엄이 행해지지 못하게 하고, 아래에서 항론(抗論)하는 것이 있으면 경알(傾軋)하는 것이라고 하여 직언이 상문(上聞)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배척하려고 할 경우에는 당인(黨人)이라고 배격하고 자기가 나오게 하려고 할 경우에는 공평하다고 포장(褒奬)한다. 이리하여 위복(威福)의 권한이 임금에게서 나오지 못하게 됨에 따라 한때에 이익을 탐하여 간진(干進)하는 무리들이 파리처럼 이익을 경영하고 서캐처럼 붙좇아 형세를 얻어보려는 길목에서 분분하기 그지없다. 이리하여 이름을 아끼는 선비들은 모두 멀리 피할 것을 생각하면서 마치 자신의 몸이 더럽혀질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들은 이미 스스로 사류(士類)에게 비난받고 공의(公議)에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작게는 당론(黨論)으로 무함하고 크게는 역망(逆網)으로 중상하니, 사람들이 마음이 떨려서 감히 입을 열어 탕평(蕩平)에 대해 논급(論及)하지 못하고 조정에서는 말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배(時輩)들의 매나 개 노릇을 하면서 힘을 바치는 자가 아니고서는 1년 내내 백간(白簡)의 주달(奏達)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아! 우리 성상께서 혈성(血誠)을 기울여 당론을 제거하기 위해 위로 하늘에 맹세한 애타는 윤음(綸音)을 내렸는데, 이는 귀신을 울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자리에서 차마 면대하여 속임으로써 기탁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또 여러 당(黨) 외에 또 하나의 당을 세워 놓고서는 조정에 들어가서는 당을 타파시켜야 한다는 말을 꾸며서 하고, 나가서는 당을 튼튼하게 만들 계책을 강구하면서 천고(天古)에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고도 매양 당인(黨人)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 탕평을 유구(悠久)히 견지(堅持)해 가는 도리를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충동시켰기 때문에 충언(忠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들의 총우(寵遇)는 더욱 융숭해졌다. 우리 성상께서 10년 동안 붕당을 타파하려 한 정치가 그저 변변치 못한 무리가 이록(利祿)을 조종하는 마당이 되고 말았으니,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고 영의정 서문중(徐文重)에게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좌찬성 박진(朴晋)에게는 의열(懿烈)이라는 시호를, 종신(宗臣) 임양군(臨陽君) 환(桓)에게는 의헌(懿憲)이라는 시호를, 화의군(和義君) 영(瓔)에게는 충경(忠景)이란 시호를 내렸다.
홍경보(洪景輔)를 도승지로, 한덕전(韓德全)을 승지로, 유척기(兪拓基)를 대사간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정언으로, 유건기(兪健基)를 교리로, 오원(吳瑗)을 대사성으로, 윤순(尹淳)을 판의금으로, 정찬술(鄭纘述)을 경기 수사로, 이행검(李行儉)을 공홍 수사로 삼았다.
12월 3일 임술
밤에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서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들에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가지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구전(舊典)을 수명(修明)할 것과 형옥(刑獄)·전곡(錢穀) 등의 일을 심찰(審察)하도록 신칙하였다.
12월 4일 계해
황해도 장연부(長淵府)에 11월 23일 크게 천둥하였고, 경기의 부평(富平)·인천(仁川)·김포(金浦)·양천(陽川) 등 고을에는 이달 초1일 오시(午時)에 햇빛이 어두침침하면서 크게 천둥하였다. 경상도의 영해부(寧海府)에는 10월 초5일 밤에 돌풍이 갑자기 일어나 노도(怒濤)가 하늘에 닿을 듯이 소용돌이쳐서 해변의 촌락이 물에 뒤덮인 곳이 많았으며 지진이 일어나고 천둥 벼락이 크게 쳤다. 영덕현(盈德縣)에는 10월 초6일에 천둥하며 벼락이 크게 쳤고, 사천현(泗川縣)에서는 10월 17일에 천둥하고 벼락이 크게 치면서 비가 내렸으며, 성산현(星山縣)에서는 11월 19일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는데 천둥 소리 같았다.
12월 5일 갑자
초저녁에 유성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다.
12월 7일 병인
중궁전(中宮殿)의 탄일(誕日)이어서 2품 이상의 관원과 육조(六曹)에서 문안하였다.
김성응(金聖應)을 훈련 대장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형정(刑政)이 수명(修明)한 뒤에야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자산(子産)477) 이 정(鄭)나라를 다스리고 제갈양(諸葛亮)이 촉한(蜀漢)을 다스리고 왕맹(王猛)이 진(秦)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모두 이것을 힘썼으니, 다스리는 방법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형법(刑法)이 밝지 못하여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상위(象魏)478) 에 법문을 내걸었던 뜻을 본받아 행용(行用)하고 있는 법조(法條) 가운데 절실히 필요한 것들을 초출(抄出)하여 수명(修明)하여 반행(頒行)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형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고 영상 홍치중(洪致中)과 풍릉 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지금의 좌상(左相)과 신에게 이 일은 구관(句管)하게 했었습니다만, 아직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으니, 비국 당상 2인을 가려서 형관(刑官)과 함께 수정(修整)하여 책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형법이 분명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없게 되는 것이다. 형관은 당초 이미 참여하여 들었으니 비국 당상 김약로(金若魯)와 함께 같이 의논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대신이 호서의 옛 포흠(逋欠)을 견감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조가(朝家)에서 혜택을 베푸는 데에 있어 어찌 중외(中外)를 달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성(都城) 백성들의 옛 포흠도 마땅히 차별 없이 똑같은 혜택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왕자(王者)가 백성을 사랑함에 있어서 마땅히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 미쳐 가게 하는 것이니, 대신은 물러가서 상의하여 연한(年限)을 정한 다음 품지(稟旨)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조(京兆)에서 시장 백성들을 위해 난전(亂廛)을 금하는 법을 설치하고, 난전을 벌일 경우 이를 속공(屬公)하는 법규가 있었으므로, 시골의 장사꾼들이 물건을 싣고 도하(都下)를 경유하는 경우 부례(府隷)들이 이 법을 빙자하여 빼앗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윤 조명익(趙明翼)이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난전을 벌이다 적발되었을 경우에는 의당 징치(懲治)하는 것에 불과하여야 하는 것이다. 속공(屬公)시키지 말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연석(筵席)에서 이야기한 것을 탑교(搨敎)로 반포할 경우에는 승지가 물러가서 정리하여 이를 써서 제출했었다. 승지 유엄(柳儼)이 연석에서 품지(稟旨)하여 쓰게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참찬관 유엄(柳儼), 시독관 유건기(兪健基) 조상명(趙尙命)이 아뢰기를,
"고 판서 이언강(李彦綱)의 아내 권씨(權氏)는 나이 70세의 명부(命婦)로서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였으니, 마땅히 정표(旌表)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12월 8일 정묘
조현명(趙顯命)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공홍도(公洪道)의 서천(舒川)·보령(保寧) 등지에 비와 눈이 섞여 내리면서 천둥하고 번개가 크게 쳤다.
12월 9일 무진
좌참찬 심택현(沈宅賢)이 졸(卒)하였다. 심택현은 성망(聲望)이 조금 모자랐으나, 을사년479) 이후 자못 당론(黨論)을 일삼아 드디어 전병(銓柄)의 관직을 두루 주관했었다. 그러다가 탕평론(蕩平論)이 일어나게 되자, 번임(藩任)에 많이 있었으며, 조정으로 들어와서는 한만(閑漫)한 관사의 직책에 보임되는 데 불과하였다. 게다가 연로(年老)하여 시세에 따라 부침(浮沈)하면서 장단(長短)을 논한 것이 없었으며, 주관 없이 추종하면서 벼슬자리만 채웠을 뿐이었다.
12월 10일 기사
어유귀(魚有龜)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풍원(豐原)은 지려(智慮)와 순충(純忠)이 있으므로, 나라를 위한 문무(文武)의 직임(職任)에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요직(要職)을 일체 사퇴하고 취임(就任)하지 않고 있으니, 차라리 장임(將任)에 임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조현명은 글을 읽어 처신을 삼가는 사람이므로, 보통 조용(調用)하는 재상(宰相)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기력도 있고 지려(智慮)도 있으므로 진실로 장재(將材)가 되는 사람입니다. 조가(朝家)에서 하나의 방도로써 기용하려 한다면, 마땅히 사원(詞苑)에 처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김재로 등이 인하여 아뢰기를,
"고 충신(忠臣) 이봉상(李鳳祥)·남연년(南延年)에게 시호(諡號)를 내린 지 이미 오래인데도 아직껏 포현(褒顯)하는 은전을 선사(宣賜)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오래도록 지연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그들의 아들에게 하나의 큰 고을을 제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연시(延諡)480) 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김재로가 또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시장(諡狀)을 청하지 말라고 유언(遺言)하였다는 것으로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의시(議諡)하게 해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최규서(崔奎瑞)·조태구(趙泰耉)이 두 정승은 큰 훈공(勳功)이 있었기 때문에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았었는데, 이것은 드물게 있는 일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의(遺意)가 이와 같다면 억지로 장청(狀請)하게 하는 것이 아랫사람을 대접하는 도리에 어긋난다. 고 상신의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또 청하기를,
"갑자 사화(甲子士禍) 때의 명현(明賢)인 조위(曹偉)·박한주(朴漢柱)와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조종도(趙宗道)에게도 시호를 내려야 하니, 기일을 정하여 전랑(銓郞)을 보내소서."
하고, 송인명은 청하기를,
"삼학사(三學士)481) 와 조헌(趙憲)의 자손도 녹용(錄用)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12월 11일 경오
감귤(柑橘)을 반궁(泮宮)482) 에 반사(頒賜)하였다.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유생(儒生)들을 시험하게 하였는데, 진사 이광의(李匡誼)가 으뜸을 차지했으므로 급제를 내렸다.
6월에 행했어야 할 도목정(都目政)을 친히 행하였는데, 이틀 만에 끝마쳤다. 이조 판서 윤유(尹游), 병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입시(入侍)하여 개정(開政)하였다. 오광운(吳光運)을 홍문관 제학으로, 오명서(吳命瑞)를 경상도 관찰사로, 이중협(李重協)을 강춘도 관찰사로 삼고, 묘천(廟薦)에 의거하여 조명익(趙明翼)을 강화 유수로, 한덕후(韓德厚)를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함경 감사 서종옥(徐宗玉)을 인견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근래에 무비(武備)가 허술해졌으니, 그 가운데 더욱 심한 수령은 일찍이 시종신(侍從臣)을 역임한 것을 논하지 말고 곤형(棍刑)을 집행해서 징계하여 면려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승지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무비가 비록 중하기는 합니다만, 시종신은 체모가 자별한데, 일개 도신(道臣)이 곤형을 집행할 것을 경솔하게 청하였으니, 서종옥은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곤형을 집행하는 것은 비록 대신일지라도 품청(稟請)해야 하는 것이지만, 군무(軍務)에 이르러서는 어찌 군법으로써 곤형을 집행할 수 없겠는가? 유엄을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2일 신미
구성익(具聖益)을 전광도 병사로 삼았다.
평안 감사 윤양래(尹陽來)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논척(論斥)을 받고 있는 처지이므로 감히 망령되게 수령들의 우열(優劣)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어 추동(秋冬)의 포폄(褒貶)을 궐(闕)하니, 하교하기를,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다시 사직할 수 있겠는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사직소(辭職疏)는 되돌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홍주(洪州) 고을 백성으로 금호문(金虎門)에 글을 내걸어 읍쉬(邑倅)을 욕한 자가 있었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주청(奏淸)하기를,
"체포하여 그 경내(境內)에서 효시(梟示)함으로써 백성들의 습관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아뢰기를,
"체포하기를 기다려 실정을 핵사해야 하며, 미리 율(律)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법에는 경중이 있는 것이다. 만일 읍쉬(邑倅)을 욕했다는 것으로 효시한다면 방백(方伯)을 욕한 경우에는 무슨 율을 적용할 것인가? 이는 바로 장석지(張釋之)483) 가 이른바 장릉(長陵)의 한 줌 흙을 훔쳤을 경우에는 무슨 죄를 가해야 하느냐고 한 격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수령에게 백성은 곧 군신의 의리가 있으니 방백에 비하여 더욱 중합니다."
하고, 교리 유건기가 말하기를,
"이는 바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조짐이니, 수포(搜捕)하여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읍리(邑吏) 박명채(朴鳴采)와 그를 따라갔던 사람인 이유제(李裕濟)를 체포하니, 감영(監營)으로 나송(拿送)하여 효시하게 하였다.
윤득경(尹得敬)을 정언으로, 이연덕(李延德)·이덕중(李德重)을 지평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수찬으로, 유건기(兪健基)를 교리로, 임정(任珽)을 부응교로, 임경관(任鏡觀)을 장령으로, 이형만(李衡萬)을 설서로 삼았다.
우의정 송인명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어제의 정사(政事)에서 변읍(邊邑)의 수령으로서 아직 반 년도 안 된 사람은 다른 관직으로 옮겨 천전(遷轉)시켰습니다. 자주 체직시키는 것은 폐단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6년의 만기에서 3년이 차지 않은 사람이거나 3년의 만기에서 1년이 차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천의(遷擬)하지 못하도록 항식(恒式)으로 만드소서."
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12월 13일 임신
승지 정우량(鄭羽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사사로이 주고받은 말이나 사사로운 서찰(書札)을 장주(章奏)에 올리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중신(重臣)이 이미 그것을 범하였으니, 신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전관(銓官)으로 있었을 적에 약원(藥院)에서 중신(重臣)을 만났었는데, 중신이 묻기를, ‘근일에 정사(政事)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무슨 까닭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병이 들어서 그랬는데 병이 들지 않았다면 공참(工參)484) 에 의망(擬望)하는 정사(政事)를 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이는 중신이 혼자서 정사를 하면서 윤봉조(尹鳳朝)를 공조 참판에 의망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중신이 말하기를, ‘난들 어찌 하고 싶어서 했겠는가? 그러나 한만한 관사(官司)에는 논하는 자들이 허락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못 들었습니다.’고 했습니다. 중신이 또 말하기를, ‘도헌(都憲)이 비어 있으니 송류(松留)485) 를 신통(新通)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송류는 이미 이조 참의를 거쳤으니, 도헌에 신통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때에 주고받은 말은 이런 내용에 불과하였습니다. 따라서 중신이 그 사람을 삽의(揷擬)할 기미를 조금이나마 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뒷날 한만한 관사의 자리에는 그가 혹 부의(浮議)에 동요되어 의망할 수도 있겠기에 신이 과연 미리 그처럼 절거(折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기강(紀綱)을 맡은 관사(官司)와 청준(淸峻)한 자리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비척(非斥)하는 것을 나는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12월 14일 계유
사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정언 윤득경(尹得敬)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경상 감사 오명서(吳命瑞)는 자급(資級)·경력(經歷)·성망(聲望)이 중요한 번임(藩任)에 합당하지 않으니, 체차시키소서. 계묘년486) 에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한 것은 이미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저술한 교문(敎文)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역적 김일경이 복법(伏法)된 뒤에 이 과거를 삭제시켜야 하는 것은 차례로 당연히 했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을사년487) 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즉시 삭제시킬 것을 윤허했었는데, 근자의 처분은 요탈(撓奪)됨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삭제시켰다가 곧이어 회복시키는 것은 의리에 관계가 되는 것이니, 이전의 성명(成命)에 따라 파방(罷榜)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먼저 윤득경을 체직시키고, 잇따라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아! 통탄스럽다. 인심이 함닉(陷溺)되고 의리가 회색(晦塞)된 것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교문(敎文)은 그대로 교문인 것이고 과거(科擧)는 그대로 과거인 것이다. 지난번 이미 과명(科名)에 구애되어 기용하지 않는 것을 계칙하면서 다시는 이것을 가지고 진달하는 일이 없게 하였었다. 더구나 이런 통유(洞諭)가 있은 뒤에 신하된 자가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윤득경은 새로 미원(薇垣)488) 에 들어왔으니, 마땅히 공심(公心)을 가지고 임금을 섬겨야 할 것인데, 감히 시습(時習)을 부리고 있다. 따라서 엄중히 처단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삭출(削黜)시키는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조현명(造顯命)이 상소하기를,
"유신(儒臣)이 고 판서 이언강(李彦綱)의 아내 권씨(權氏)에게 정표(旌表)하게 할 것을 진청(陳請)하였는데, 성상께서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본조(本曹)도 있고 정부(政府)도 있는데, 이에 한두 명의 신하가 아뢰는 것을 따라서 전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신은 나라의 중한 법전이 이로부터 가벼워질까 두렵습니다. 또 듣건대, 대신이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도 않고 의시(議諡)할 것으로 진청(陳請)하여 윤허를 받았다고 합니다. 고 대신은 폐부(肺腑)처럼 가까운 친척으로 충성스럽고 깨끗한 지조가 있었다 하여 전하께서 상격(常挌)과는 달리 대우하고 있으나, 특이한 은전을 아래에서 번거롭게 청하는 것이 진실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명명(明命)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윗 조항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아랫 조항의 민 봉조하에 대한 일은 다른 대신에게 견줄 수 없다. 어찌 시호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방(吏房)·병방(兵房)의 승지에게 각사(各司)와 각도(各道)의 전최(殿最)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친림(親臨)하여 개탁(開拆)하였다.
12월 15일 갑술
하교하기를,
"경중(京中)의 전최에 반드시 주(註)를 달게 한 것이 어찌 겉치레이겠는가? 뒷날 나가서 백리(百里)를 맡아 다스리게 될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근래에 경중의 전최를 살펴보건대, 모두 안면(顔面)에 구애되어 두루 아름다운 제목(題目)뿐이며, 비록 생민(生民)들이 폐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차마 붓을 들어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살펴보면 수령을 잘 가리지 못하는 것은 전관(銓官)의 잘못이 아니라, 곧 경중의 전최가 엄중하지 못한 탓인 것이다. 지금 이것도 각사(各司)에 한 사람도 하등(下等)에 있는 이가 없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양계(兩界)489) 의 감사 이외에 다른 도의 도백(道伯)은 본디 대신에게 의논하는 법규가 없었는데, 뒤에 양남(兩南)에 재황(災荒)이 들자, 특별히 문의(問議)하도록 명하니, 그대로 전례가 되었다. 영백(嶺伯)을 의천(議薦)할 때에 좌의정 김재로는 이흡(李潝)과 경주 부윤 김성운(金聖運)을 천거하였고, 우의정 송인명은 내백(萊伯)490) 오명서(吳命瑞)를 천거하였고, 이조 판서 윤유(尹游)는 김시혁(金始㷜)을 합당하다고 하였었다. 그런데 정석(政席)에 들어와서는 김재로가 극력 김성운을 부식하였으므로 송인명이 이조 판서에게 서찰을 보내서 자신이 천거한 사람이 임용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번뇌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윤유가 이흡을 수망(首望)에 주의(注擬)하고 김시혁과 오명서를 부망(副望)·말망(末望)에 주의하였는데, 오명서가 낙점(落點)받았다. 김재로는 김성운이 의망에서 빠졌다는 것을 이유로 차자를 올려 이조 판서를 추고하고, 오명서는 동래부(東萊府)에 잉임(仍任)시킬 것을 청하자, 송인명이 노하여 또한 차자를 올려 사면(辭免)하였으며, 이에 김재로도 차자를 진달하고 인구(引咎)하였다. 임금의 비답에 동료끼리 서로 승부를 다투고 있다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으며, 진신(搢紳)들도 이를 비웃었다.
12월 16일 을해
홍문관 제학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물러갈 것을 결심한 것은 붕당(朋黨)에 분개하여 격발된 것이고 득실(得失)에 미움이 복받쳐 격발된 것인데, 붕당과 득실의 다툼은 어찌하여 하늘에 닿을 듯이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만 가니, 이는 작록(爵祿)이 매개(媒介)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충담(忠膽)이 찢어질 듯한데, 오히려 무슨 마음으로 띠를 띠고 갓 끈을 매고서 영명(榮名)을 추구하는 장소에 달려가겠습니까? 지난번 추욕(醜辱)을 받은 것은 단지 신의 격정(激情)에 부딪쳐 이를 조장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이 만일 이 관문(關門)을 꿰뚫을 수 있다면 온 세상 사람들을 몰고 와서 비난하더라도 신의 마음은 유쾌할 것인데, 또 무엇을 돌아보겠습니까? 그래서 문을 닫고 사람을 물리쳐 교유(交遊)를 사절(謝絶)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비(聖批) 가운데, ‘경이 세상에 무엇을 구하겠으며 무엇을 경영하겠는가?’라고 하신 한 구절과 연교(筵敎) 가운데, ‘이 사람은 장벽(墻壁)이 없으므로 의지할 만하다.[比人無墻壁可依]’라고 하신 일곱 글자를 경건한 마음으로 써서 책상 위에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스스로 경책(警責)하기를, ‘너는 대성인(大聖人)께서 너에게 조유(詔諭)한 것을 잊었는가?’ 하였습니다. 살아서는 서인(西人)·남인(南人)·노론(老論)·소론(少論)의 국내(局內) 사람이 되지 않고 죽어서는 공명(功名)과 이록(利祿)을 구하는 장소 밖의 귀신이 된다면 신의 지극한 소원은 다한 것이 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문임(文任)이 경에게는 늦은 것이었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오광운은 훌륭한 문학(文學)이 있었으나 국중(局中)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청요직(淸要職)을 얻지 못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극력 추천하여 끌어들였기 때문에 비로소 문임(文任)에 통하게 된 것이다.
12월 17일 병자
사헌부 【장령 임경관(任鏡觀)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홍주(洪州)의 영장(營將) 성윤혁(成胤爀)은 일찍이 자산(慈山)에 부임했을 적에 읍기(邑妓)에게 고혹되어 거짓으로 속문(贖文)을 만들었으며, 북도(北道)의 고을에 임명되어서는 짐바리가 잇따랐었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남양 부사(南陽府使) 유세복(柳世復)은 결미(結米)의 숫자를 더 가산하여 외람되게 징수하였고, 시시(柴枾)를 독납(督納)하게 하고서는 점퇴(點退)하였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나처(羅處)하라고 명하였다.
종부시에서 임성군(臨城君) 이엽(李熀)의 서외손(庶外孫)인 신욱(申旭)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천(宣薦)에 들었는데도 본청(本廳)에서 서명(庶名)이 있다는 이유로 저지하고 있다는 것을 들어 이런 일을 엄금하고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을 잡아다가 감죄(勘罪)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8일 정축
이날 마땅히 차대(次對)를 행해야 하는데, 좌상과 우상이 영백(嶺伯)의 천망(薦望) 때문에 서로 소장을 올려 피혐하였으므로 품정(稟停)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승지를 불러서 하교하기를,
"아! 대신은 나라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니, 팔·다리가 불편하면 몸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연석(筵席)에서 복상(卜相)하여 경 등을 특별히 제배(除拜)한 변함 없는 마음을 경 등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함께 힘을 합하여 이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것이 경 등에 대한 나의 소망이었다. 정주(政注)에 대해 비록 칙려(飭勵)한 바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동료 정승에 대해 꺼려하며 핍박할 수 있겠으며, 문자(文字)가 혹 눈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지나치게 자기 주장만 고집할 수 있겠는가? 작은 일도 오히려 참지 못하는데 더구나 큰 일이겠는가? 대관(大官)들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소관(小官)을 계칙할 것인가? 묘당(廟黨)의 모책(謀策)이 지체되어 국사가 분열되고 있으므로, 특별히 와서 회의할 것을 명하였으나, 모두 병을 핑계대고 있다. 아!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491) 는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장군과 정승으로 기품(氣稟)이 같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나라를 위해 마음과 힘을 합쳐 국사를 다스렸었다. 경 등은 모두 대대로 봉록을 받은 신하로서 지우(知遇)도 다른 사람에 견줄 정도가 아닌데, 하찮은 작은 일 때문에 대체(大體)를 돌아보지 않고 있다. 지금의 기상(氣像)을 살펴보건대, 정석(鼎席)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있고, 홍문관에는 사람이 없어 학문을 강할 기약이 없으며, 개정(開政)한다는 명이 있어도 종일토록 패초(牌招)를 어기고 있으니, 밤중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특별히 승선(承宣)을 불러 마음속에 쌓인 깊은 뜻을 다 기울여 이르는 것이니, 경 등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빈청(賓廳)에 나와서 모이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즉시 가서 유지(諭旨)를 전하니, 김재로는 명을 받들어 들어왔으나 송인명은 병을 핑계대고 들어오지 않았다. 김재로가 물러가려 하자 특명(特命)으로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 일에 대해 경 등에게 개연(慨然)함을 느끼고 있다. 경 등이 정승에 제배되어 사명(謝命)하던 날 마음과 힘을 합쳐 일해 줄 것을 면려하면서 조풍릉(趙豐陵)과 홍영상(洪領相)을 동시에 정승에 제배했던 일은 인용했었다. 우상이 출사(出謝)할 때 내가 경과 뜻을 통할 수 있겠느냐고 하문하고서 그의 대답을 살펴보니 마치 경의 기품(氣稟)을 모르는 것처럼 하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나는 마음에 아무런 찌꺼기가 없는데, 경 등은 찌꺼기가 있음을 면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경이 일찍이 말하기를, ‘대신은 그저 가차(假借)만 일삼아서는 안 되지만, 만약 작은 일 때문에 최절(摧折)한다면 도리어 체모가 가벼워진다.’ 했었다. 오늘날의 일은 한 번 웃고 그만둘 일에 불과하니, 무슨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경 등이 서로 잘못한 것이며, 전관(銓官)도 고의로 일을 만들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대신이 이미 인혐하지 않았는데 전장이 어떻게 감히 다시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아침이 되거든 패초(牌招)하여 개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9일 무인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으로, 유건기(兪健基)·유최기(兪最基)를 수찬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지평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20일 기묘
사간원 【정언 송익휘(宋翼輝)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예양(禮讓)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사서(私書)를 증거로 제시하여 변해(辨解)하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일전에 중신(重臣)과 승선(承宣)이 상소하여 각기 질언(質言)하면서 서로 핍박하였는데, 이는 청조(淸朝)의 독후(篤厚)한 풍조가 아닌 것입니다. 우참찬 조상경(趙尙絅)과 승지 정우량(鄭羽良)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장령은 다같은 청중(淸重)한 직책인데, 한 등급을 낮추어 통의(通擬)한 것은 진실로 법규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의종(李義宗) 같이 내력을 알 수 없는 자가 또한 외람되게 통의되었으므로 물의(物議)가 지금껏 비웃고 있습니다. 지금 도목정(都目政)의 삼망(三望)은 모두가 다 용렬하고 잗단 사람들이니, 장령 임경관(任鏡觀)은 개정(改正)하소서. 아경(亞卿)이 금오(金吾)를 겸임하는 것은 이것이 화선(華選)이기 때문인데 근래 무음(武蔭)을 돌아가면서 차임하는 것은 이미 고제(古制)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참판을 역임하지 않았는데도 통의(通擬)되기에 이른 경우도 또한 있지 않았습니다. 동의금 김성응(金聖應)을 개차(改差)하소서. 괴원(槐院)492) 의 제거(提擧)도 또한 청현직(淸顯職)에 관계되는 자리입니다. 윤봉조(尹鳳朝)는 부범한 것이 어떠한데, 지난번에 그를 검의(檢擬)한 관원이 그 때문에 특별히 파직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또 다시 혼잡스럽게 천거하였으니, 개정하소서.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귀근(貴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근래에 야금(夜禁)에 대해 내린 칙령(飭令)이 지극히 엄중하였는데, 도위(都尉)의 겸종(傔從)이 금영(禁營)의 순라군(巡邏軍)에게 잡혀 이를 추치(推治)할 즈음 항거하면서 곤장(棍杖)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위가 도리어 성을 내어 영교(營校)의 정처(正妻)를 가두기까지 했으니, 이는 사체에 관계된 것이므로, 그대로 버려 두고 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어 계묘년493) 과거(科擧)를 파방(罷榜)하라는 것과 경상 감사 오명서(吳命瑞)를 체차시키라는 계사(啓辭)는 중지하였다.
어영 대장 조현명(趙顯命)이 여러번 소명(召命)을 어기자 임금이 특별히 표신(標信)494) 을 내려 불렀다. 승지 남태온(南泰溫)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평상시에는 습조(習操)의 표신도 오히려 경솔히 내려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까닭도 없이 이것을 가지고 대장(大將)의 집으로 간다면 어찌 인심을 경동(驚動)시킬 우려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다시 습조(習操)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1일 경진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어제 송익휘(宋翼輝)의 계사(啓辭)에는 비록 지나친 것이 있었지만, 이목(耳目)의 관원이 묵묵히 있는 이런 때에 자못 듣는 이들을 경동시키는 것이었다. 근래의 언관(言官)들이 모두 이럴 수 있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제왕(帝王)이 학문을 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경우와는 다른 점이 있다. 지금 《송사(宋史)》를 살펴보건대, 손변(孫抃)의 소장에 이르기를, ‘벼슬을 요구하기 위해 잘 섬기는 것을 정신(精神)이 있다고 하고, 남의 잘못을 잘 들추어내는 것을 풍채(風采)가 있다고 하고, 민첩하고 말 잘하는 것은 의논(議論)이 있다고 하고, 심각하게 하는 것을 정사(政事)를 잘 한다고 한다.’ 했는데, 이러한 폐습(弊習)은 지금 세상에도 또한 그러하여 마침내 독후(篤厚)한 기풍(氣風)이 부족하니,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마땅히 감계(監戒)해야 한다. 오중복(吳中復)을 천거하여 감찰 어사(監察御史)로 삼았으면서도 손변은 그의 얼굴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것은 더욱 기이한 일이다. 이런 내용으로 또한 전조(銓曹)를 신칙하도록 하라."
하니, 참찬관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심각한 것은 비록 불가한 일이지만 민첩하고 말 잘하는 것은 또한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것이니, 오로지 독후(篤厚)한 것만 일삼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승선의 말은 기품(氣稟)이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강유(剛柔)는 반드시 서로 도와서 일을 이루는 것이 귀한 것이요 각박하게 하는 것은 끝내 독후(篤厚)한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하였다.
흉년이 든 까닭에 삼남(三南)의 재읍(災邑)의 포곡(逋穀)을 감하게 하고 삼수(三水)·갑산(甲山)에 면포(綿布) 4천 필(疋)을 내렸는데, 도신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12월 22일 신사
지평 송창명(宋昌明)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한덕후(韓德厚)는 지망(地望)이 본디 가벼운데다가 별로 성적(聲績)도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한덕후를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이정제(李廷濟)를 좌참찬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우참찬으로, 이기진(李箕鎭)을 경상 감사로, 김동필(金東弼)을 판의금으로, 김시혁(金始㷜)을 승지로, 조태언(趙泰彦)을 장령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부수찬으로, 오언주(吳彦胄)를 교리로, 홍상빈(洪尙賓)을 동의금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집의로 삼았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괴원(槐院)의 제거(提擧)는 본디 문망(文望)의 직임(職任)에 관계되었으므로 선조조(宣祖朝) 때 최입(崔岦)은 벼슬이 동지(同知)에 불과했었지만, 오히려 차임되었습니다. 윤봉조(尹鳳朝)는 일찍이 제학(提學)을 역임하였고 문형(文衡)의 준점(準點)에 들었었으니, 굽혀서 괴원에 예차(例差)할 수가 없겠습니까? 이른바 죄를 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후 신변(申辨)한 적이 많았고, 찬축(竄逐)되고 파삭(罷削)당한 지 10여 년이 되었으니, 이제 탕척(蕩滌)할 수도 있는데, 발바닥에 박힌 못처럼 여겨 저지시키고도 부족하여 한만한 관사(官司)의 예직(例職)에까지도 검의(檢擬)하지 못하게 하면서 곧바로 개정을 청하고 있으니, 아! 심합니다. 이렇게 하고도 오히려 물정(物情)을 평온하게 하고 인심을 흔쾌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잘못 선발한 죄는 전관(銓官)과 그 율(律)이 같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사퇴할 이유가 아니다.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비로소 등대하여 말하기를,
"영남(嶺南)은 중번(重藩)이므로, 마땅히 상세히 살펴서 선택해야 됩니다. 김시혁(金始㷜)은 식견과 사려가 원대하고 평소 국가의 일을 잊지 않고 있으며, 오명서(吳命瑞)는 일을 함에 있어 기(氣)가 있어서 신이 쓸 만하다고 여겼으므로, 영상(領相)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말을 써주지 않고 취사(取捨)하면서 곧바로 이조로 하여금 배망(排望)하게 했기 때문에 신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성교(聖敎)를 듣건대, 신 등의 일을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의 일에 견주었다고 하였습니다만,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조정의 체통을 위한 것으로서 사사(私事)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염파와 인상여는 무부(武夫)인데도 오히려 그와 같이 했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경 등이 사사롭게 다툰 것을 견준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이 바야흐로 왕복하면서 서로 버티고 있는데 정망(政望)이 갑자기 나왔으므로, 신이 사체에 의거하여 전관(銓官)을 책망한 것이니, 이것이 요상(僚相)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전관이 추고받은 것은 말의(末擬)에 연유된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못났지만 삼사(三事)의 지위에 있는데, 장차 어떻게 백료(百僚)들을 동솔(董率)할 수 있겠습니까? 전관의 추고를 정지하지 않으면 신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판의 소장에 분노한 내용이 많이 있었는데, 신은 실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고를 청한 것은 조금이나마 사체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정지시킨들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좌상이 이미 말하였으니, 전관은 추고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내가 영백(嶺伯)의 수망(首望)에 대해서는 개연(慨然)하게 느끼고 있다. 일찍이 영남 어사가 되었을 적에 탐오한 관리를 살피지 않아서 역적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른바 역적이란 무신년495) 에 이미 결방(決放)했던 자들에 불과하였다. 지금 다시 본도를 맡게 한다면, 온 도가 반드시 소란스러워질 것이므로, 낙점(落點)하지 않은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어사에 대한 일은 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난리를 평정한 지 오래 되지 않았으므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대동법(大同法)을 창제(創制)한 처음에 각사(各司)의 상공(常供)에 관한 물종(物種)을 숫자를 헤아려 공납(貢納)하게 하였으므로, 1년의 수용(需用)이 원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4, 50년 이래 해마다 증가하기도 하고 감손하기도 했으므로, 원공(元貢)도 부족하고 물품마다 다 그런 실정입니다. 그래서 호조에서 특별히 사들이는 것이 원공의 배나 되는가 하면, 혹 잇따라 흉년이 들 경우에는 선혜청(宣惠廳)의 원공은 임시로 감면시키는 것이 많은데 진배(進排)는 감하는 것이 없으므로, 그 수용(需用)에 부족한 값을 호조로 하여금 대체해서 감당하게 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공납법을 만든 본의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한결같이 모두 복구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공(元貢) 가운데 급하지 않은 물종(物種)은 각사의 부족한 물종으로 바꾸어 진공(進供)하게 함으로써 호조에서 따로 사들이느라고 더 쓰는 숫자를 제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하문하였다. 우상과 좌상이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혜청에 임시로 감하여 준 것을 호조에서 대체하여 감당하는 것은 거의 자신의 살을 베어서 배를 채우는 것과 같다. 어공(御供)을 따로 사들인다는 것은 이웃 나라에 듣게 할 수 없는 일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허락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북관(北關)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으로 군포(軍布)·노공(奴貢)은 3분의 1을 감하게 하였다. 정언 송익휘(宋翼輝)가 인피(引避)하면서 말하기를,
"좌상의 차자에서 신이 윤봉조(尹鳳朝)에 대한 일을 논한 것 때문에 상당히 불평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윤봉조의 죄는 방만규(方萬規)가 상소하도록 교사(敎唆)한 데에 있는데, 아직도 의심스러운 것인지 믿을 만한 것인지가 분명히 결말이 나지 않은 안건(案件)이니, 신도 반드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질언(質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만규가 이미 복주(伏誅)되었는데, 여기에 참섭(參涉)했던 사람을 단지 햇수가 오래 되었다는 것 때문에 준례에 따라 수용(收用)한다면, 물정(物情)을 평온하게 하고 인심을 열복(悅服)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제 방만규의 죄를 신원(伸冤)하고 방만규의 벼슬을 회복시킨다면, 윤봉조의 일도 환히 씻길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못하여 어물어물 애매한 상황이 진실로 그대로 있는 실정입니다. 승문원 제거를 세심하게 간선(揀選)하지 않는 것이 대신의 말과 같다면, 지금의 경재 가운데 아무 사고 없이 이미 청현직(淸顯職)을 지냈는데도 아직 겸임하지 못한 사람이 또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들을 모두 차임하지 않고서 취사(取捨)하는 것이 있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새로 대각(臺閣)에 들어와서 머뭇거리는 기풍(氣風)을 시원스럽게 벗었으니,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정승의 차자는 지나치게 혐의할 것이 아니니,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송익휘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물러가서 차자를 진달하여 인구(引咎)하니, 임금이 위해(慰解)하는 내용의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유정무(柳鼎茂)가 지난번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서도 요행히 상명(償命)을 면하였는데 갑자기 기랑(騎郞)의 청선(淸選)에 의망(擬望)했다는 것을 이유로 이조 당상을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3일 임오
소대를 행하였다.
12월 25일 갑신
수찬 유최기(兪最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이미 12년이 되었고 성심으로 학문에 힘쓰셨으니, 마땅히 천리(天理)를 다 밝히고 사욕(私慾)을 물리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희노(喜怒)를 발하는 것이 절도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고, 윤득경(尹得敬)을 신구(伸救)하면서 인하여 말하기를,
"송익휘(宋翼輝)가 정계(停啓)한 것은 방자한 짓이고 윤봉조(尹鳳朝)를 괴원(槐院)에 의망한 것을 박정(駁正)한 것은 지나친 처사이며, 오광운(吳光運)을 문임(文任)에 차임한 것은 외람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책망하기를,
"윤득경이 처음 벼슬한 사람인가, 임금 앞에 새로 들어온 사람인가? 미원(薇垣)의 거조가 놀랍다. 말감(末減)으로 처분(處分)한 것은 또한 신진(新進)이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구해(救解)하는 것은 매우 한심한 처사이다. 이목(耳目)의 관원들이 묵묵히 있는 이런 때에 송익휘가 진달한 것은 공의(公議)를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도리어 그 사람을 공척(攻斥)한단 말인가? 오광운의 문재(文才)는 이 직임을 맡은 것이 늦은 편이다. 조가(朝家)에서 사람을 기용하는 것은 마땅히 그의 재능을 보아서 해야 하는 것이니, 어찌 세태(世態)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 여러 해 동안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익히 하교(下敎)를 들었을 것인데 오히려 아직도 이러하니, 그 마음이 진실로 감화되기 어렵겠다."
하였다. 뒤에 승지 홍경보(洪景輔)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송익휘의 계사(啓辭)는 자못 풍채(風采)가 있는 것이었는데, 다시 대원(臺垣)에 들어왔다가 갑자기 낭패를 당하였으니, 언관(言官)의 책임이 어렵다는 말이 사실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에서 세도(世道)가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유최기는 직책이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선유(先儒)들의 말을 잘못 인용하여 이에 천리(天理)를 다 밝혔다는 말을 장주(章奏)에 올렸으므로, 일세(一世)의 웃음거리로 전해졌다.
태묘(太廟)에서 납향(臘享)을 거행하였는데, 술잔을 올리려 할 때에 고양이가 갑자기 전중(殿中)으로 들어왔다. 헌관(獻官)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 등이 상소하여 아뢰니, 묘사(廟司)를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호서 어사(湖西御史) 이철보(李喆輔)가 대계(臺啓)에서 파방(罷榜)할 것을 청했다는 것으로 인의(引義)하여 업무를 폐기한 다음 감사(監司)에게 이문(移文)하였는데, 감사가 장문(狀聞)하니, 하유하기를,
"지난번 사조(辭朝)하였을 적에 악의(樂毅)의 일로 하교한 것은 호서가 다른 도에 견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윤득경(尹得敬)의 거조는 과거(科擧) 때문만 아니라 그의 정신(精神)은 있는 데가 있으니, 어찌 지나치게 혐의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정계(停啓)한 것이겠는가? 아직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처럼 발끈 성을 내어 원망하는 것인가?"
하고, 이철보를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또 상소하여 사퇴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 조상명(趙尙命)이 공흥 감사가 겨울에 천둥한 일 때문에 장계(狀啓)하여, 묘당(廟堂)에 신칙해서 민사(民事)를 강론하게 할 것을 청한 일로 인하여 구언(求言)하는 전교를 내려 궐실(闕失)에 대해 진달하게 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탄식하기를,
"외방에서 올린 소장의 내용이 어찌 모두 다 황잡(荒雜)하겠는가마는, 비국(備局)의 묵혀진 종이가 되는 데 불과하고 국가에서 일찍이 채용한 적이 없으니, 구언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예로부터 정치를 하는 방조는 미천한 사람들의 말까지도 널리 구하여 일득(一得)의 도움을 얻는 데 있는 것인데, 근일에는 초야(草野)의 말은 진실로 논할 것도 없고 삼사(三司)의 소장이라 하더라도 가상히 여긴다는 포장(褒奬)만 받을 뿐이고, 묘당(廟堂)에서는 이것을 고각(高閣)에다 묶어서 쌓아 놓는 것이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 아예 구언(求言)하지 않는다는 것은 목구멍이 막힌 것으로 인하여 밥을 먹지 않는다는 데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31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예로부터 정치를 하는 방조는 미천한 사람들의 말까지도 널리 구하여 일득(一得)의 도움을 얻는 데 있는 것인데, 근일에는 초야(草野)의 말은 진실로 논할 것도 없고 삼사(三司)의 소장이라 하더라도 가상히 여긴다는 포장(褒奬)만 받을 뿐이고, 묘당(廟堂)에서는 이것을 고각(高閣)에다 묶어서 쌓아 놓는 것이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 아예 구언(求言)하지 않는다는 것은 목구멍이 막힌 것으로 인하여 밥을 먹지 않는다는 데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12월 26일 을유
수찬 유건기(兪健基), 정언 정준일(鄭俊一) 등이 유최기(兪最基)가 윤봉조(尹鳳朝)를 신구(伸救)한 일로 인하여 교대로 소장을 올려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지나치다는 것으로 답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리기를,
"근일의 소차(疏箚)는 묘당(廟堂)에 관계된 것이 많은데, 요상(僚相)도 이 때문에 진소(陳疏)하였습니다. 신도 외람되게 동석(同席)에 있으니 어찌 인구(引咎)할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이는 깊이 인구할 일이 아니기에 우선 모두 소홀히 했었습니다. 그런데 일간에 소장을 교대로 올리고 있어 조짐이 점점 아름답지를 못합니다. 이는 국가의 중대한 일이 아닌데도 설왕 설래하는 사이에 저쪽과 이쪽이 점점 더 과격해져서 끝내는 조정이 조용하지 못한 상황에 이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조정하여 진정시킬 것을 성상(聖上)께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나의 의견도 경의 차자 내용과 같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 조상명(趙尙命)이 말하기를,
"소식(蘇軾)의 소장에 이른바 인심을 결속시키고 기강을 높여야 한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요무(要務)인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매양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선무(先務)로 삼으시어 격외(格外)의 혜택을 많이 시행하고 있으니, 은혜가 지극히 두렵지만 이는 한때에 행할 수는 있어도 계속해서 늘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긴요한 방법은 감사와 수령을 가려서 임명하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조가(朝家)에서 사람을 기용하는 길이 너무 좁습니다. 십수 년 이래로 방백의 선발이 6, 7인에 불과하였는데, 자리가 나는 대로 다시 제수하는 것을 마치 짧은 노끈의 고리를 맴돌 듯이 하였으니, 어떻게 인재를 널리 가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상고(上考)를 받아 포장한 수재(守宰)는 대정(大政)을 당하였을 때마다 빈번이 장용(奬用)할 것을 명했습니다만, 전혀 봉행하지 않은 채 사호(私好)만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데 어떻게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기강을 확립시키는 데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먼저 대관(大官)을 칙려(飭勵)한 후에야 소관(小官)이 절로 두려워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근일에 김치만(金致萬)의 일로 상하가 서로 버티었는데, 최후의 처분(處分)이 엄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정승의 차자(箚子)가 이르자 굴복하여 사과하는 기색을 드러내어 보였습니다. 우상(右相)이 인입(引入)하면서는 잘못이 나에게 있지 않다고 하였고, 특별히 하교하여 출사(出仕)하도록 면려하자 곧 행공(行公)하면서 이판(吏判)을 추고하는 것을 편안하기 어려운 단서로 끌어대면서 기필코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그것이 불가한 것인 줄 알면서도 힘써 따름으로써 전후에 내리신 처분이 전도되는 지경에 돌아가고, 기강이 많이 손상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예절에 의거하여 부리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국체(國體)는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조현명(趙顯命)이 이판이 되었는데도 전하께서 끝내 면려하여 출사시키지 못하였으니, 기강이 여기에 이르러 땅을 쓴 듯이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기탄없는 짓이고 분의를 모르는 처사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신은 전하께서 그렇게 계도(啓導)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조현명은 지조가 높은 선비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또 ‘고집하여 반드시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자고 자중(自高自重)하는 마음을 조장하는 것이니, 어찌 면려하여 출사시키는 도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내용이 옳다."
하였다.
12월 27일 병술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유최기(兪最基)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오광운(吳光運)을 문형(文衡)에 천거한 것을 강성하게 공척(攻斥)하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근세에서는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서 오로지 당색(黨色)에 의거하여 취사(取捨)하고 있는데, 신이 천거한 것은 재능이 있기 때문인 것이요 당색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신에게 명한 것도 그 재능을 천거하게 하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고, 진실로 당색을 구별하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최기의 의도는 오로지 당색에만 있고 그 재능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는 논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 옛사람의 말에 문장(文章)은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과 같은 것이므로 본디 정해진 값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재능이 있다고 하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재능이 없다고 하는데, 유최기의 이 말도 또한 습속(習俗)에 오염된 탓이니, 어찌 심각하게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교했다. 그대의 천거는 옳은 것이었다."
하였다.
12월 28일 정해
임금이 이판(吏判)·병판(兵判)이 인혐하면서 오래도록 출사하지 않는다 하여 특별히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하유(下諭)하여 책망한 다음 이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송 신종(宋神宗)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이르기를,
"당시에 군자·소인의 진퇴(進退)에 관한 기미가 있었다. 간책(簡冊)에 있는 경우에는 분변하기가 매우 쉽지만, 자신이 직접 당하면 잘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신종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아름다웠는데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참으로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이른바 당국자(當局者)는 깨닫기가 쉽지 않다는 그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왕안석(王安石)의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은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신종이 큰 일을 하려고 뜻을 품고 나라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는데, 이는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의 집요한 품성이 일을 완성시키려는 데에 급급하여 군자들과 길을 달리하고 소인들과 함께 일을 했던 것이며, 신종도 성공에 급급하였으므로, 전적으로 왕안석에게 맡겼던 것이다. 전하께서 만일 이 일에 대해 그 시종(始終)을 분명히 알아서 오늘날에 견주어 반성하여 보았다면, 은감(殷鑑)이 멀지 않았을 것이니, 신이 반복하여 신종에 대해 논한 하교를 두고 탄식을 하는 까닭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31면
【분류】사법(司法) / 인사(人事) /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왕안석(王安石)의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은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신종이 큰 일을 하려고 뜻을 품고 나라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는데, 이는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의 집요한 품성이 일을 완성시키려는 데에 급급하여 군자들과 길을 달리하고 소인들과 함께 일을 했던 것이며, 신종도 성공에 급급하였으므로, 전적으로 왕안석에게 맡겼던 것이다. 전하께서 만일 이 일에 대해 그 시종(始終)을 분명히 알아서 오늘날에 견주어 반성하여 보았다면, 은감(殷鑑)이 멀지 않았을 것이니, 신이 반복하여 신종에 대해 논한 하교를 두고 탄식을 하는 까닭인 것이다."
장령 조태언(趙泰彦)이 상소하기를,
"윤봉조(尹鳳朝)가 당초에 죄를 받게 된 것은 방만규(方萬規)의 소장을 한 번 보았다는 것에 불과한데, 그때 질책을 가하여 물리쳤었으니, 지금 귀양살이하면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겪은 끝에 추후하여 금고(禁錮)시키는 것은 이미 너무 심각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전지(銓地)에 오른 도목정(都目政)을 하루 앞두고 공격하여 제거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굽혀 따르셨으니, 중신(重臣)이 한 번 폭백(暴白)한 것은 정리에 있어 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증(對證)한 소장의 내용이 놀랍고도 패려하였는데, 괴당(槐黨)의 윤차(輪差)와 변쉬(邊倅)를 이배(移拜)한 데 이르러서는 공의(公議)를 알 수 있는데도 계사(啓辭)를 올리고 소장을 올려 풀지 않고 조절(操切)을 가함으로써 기필코 대신을 공격하여 축출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였습니다. 정준일(鄭俊一)의 소장은 구절(句節)이 진행될수록 더욱 심각하여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한마디 말을 하여 한 가지 일도 논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간신(諫臣)을 칭송하려 할 적에는 이에 도리어 묵말(墨抹)하는 수단을 기(氣)가 있어 숭상할 만하다고 하니, 이 또한 당론(黨論)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서로 이와 같이 하고 있으니, 매우 한심스러운 데에 관계된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윤봉조는 재신(宰臣)에 불과한데 국사에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송익휘가 진달한 것은 관방(官方)을 중히 여기는 것에 불과한 것이며, 대신(大臣)이 차자를 진달한 것은 염우(廉隅)를 펴려는 것에 불과한 일이다. 이렇게 서로 부억(扶抑)하는 경상(景象)은 잘못된 것이다. 어찌 윤봉조 때문에 시상(時象)을 혼란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를 서용하라고 한 전지(傳旨)에 그 이름을 부표(付標)하라. 그리고 이 뒤로는 윤봉조의 일로 진달하는 소장은 봉입(捧入)하지 말라."
하였다.
오명신(吳命新)을 승지로, 이정제(李廷濟)를 예조 판서로, 송성명(宋成明)을 공조 판서로, 유건기(兪健基)를 수찬으로, 윤취함(尹就咸)을 집의로, 이윤신(李潤身)을 헌납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부수찬으로, 신사건(申思建)을 정언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9일 무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유건기(兪健基) 등의 소장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하유하기를,
"연소배(年少輩)들의 정당하지 못한 말을 어찌 입에 올릴 것인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차대를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근래 세도(世道)가 점점 어려워져서 조짐이 아름답지 못한데, 하루아침에 무너져 분열된다면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대저 대신의 도리는 마땅히 치욕을 참고 미움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너무 지나친 의논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문원 제거의 계하(啓下)가 있었을 적에 신은 애당초 굳게 버티지 않았었습니다만, 연소한 사람들의 의논은 매양 과격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근래에 사람의 잘못을 논하는 경우 이를 한때 우연히 범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기필코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으려 하므로, 계속되는 논쟁이 그칠 때가 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연소배들의 의논도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유건기(兪健基)가 앞장서고 정준일(鄭俊一)이 그 뒤를 따르고 있으며, 유최기(兪最基)가 앞장서고 조태언(趙泰彦)이 뒤를 따르고 있으므로, 마치 도박(賭博)을 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나눈 것과 같아서 상대편보다 혹시라도 숫자가 부족할까만 걱정하고 있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 정준일이 윤봉조를 논할 적에 방만규(方萬規)의 소장을 본 것을 죄로 삼는다고 한 말은 옳지만 방만규보다 더하다고 한 것은 지나치며, 조태언이 이에 한 번 소장을 본 것이 무슨 해가 될 것이 있느냐고 한 말 또한 지나친 것이다. 만약 윤봉조의 국초(鞫招)와 같이 그 소장은 쓸 수 없다고 했다면, 이것으로도 넉넉히 스스로 벗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유건기가 서용하라는 명을 중지하라고 청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근래에 천망(薦望)을 저지시키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번번이 상대적으로 거론하기를 좋아하며 이쪽에서 윤봉조를 지지하면 저쪽에서 또 하나의 윤봉조를 내세워 대립시키고 있다."
하였다. 승지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죄를 진 것이 서용할 수 없는 경우라면 당초 상세히 살펴 신중을 기했어야 하고, 서용할 수 있는 경우라면 또한 굳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하교는 억제가 지나친 것이므로 조화(調和)시키는 방법이 아닌 듯하니, 한쪽 사람들이 반드시 불울(拂鬱)해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이 이판(吏判)으로 있었을 적에 신치운(申致雲)을 검의(檢擬)하지 않으면서 ‘어찌 한 사람을 위하여 조정의 파란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것이 괴로운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어제 정사(政事)에서 신치운이 이름을 보고서도 낙점(落點)하지 않았고, 오명신(吳命新)은 낙점하였다. 윤봉조는 하나의 재신(宰臣)에 불과한데 무슨 관계될 것이 있기에 불울해 한다는 것인가? 윤봉조가 이미 부도(不道)한 소장을 직접 보았으니, 이것도 부도한 일이다. 그의 겸종(傔從)의 말을 듣건대, 윤봉조가 평상시 방만규(方萬規)와 왕래한 적이 없었다고 했으므로, 이로 인하여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윤봉조가 을사년496) 초에 승지로 입시했었는데, 내가 그에게 삼사(三司)의 인원(人員)을 써서 올리게 하였더니, 감히 아무아무는 청직(淸職)에 통의(通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신축년497) ·임인년498) 에 살육(殺戮)이 있은 뒤에 오직 윤봉조 한 사람만 남았으므로, 내가 측은히 여기는 뜻을 보였더니, 이에 혼자 들어왔을 때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 볼 계책을 세웠었다. 이것이 어찌 군자의 일이겠는가? 방만규가 소장을 보인 것은 그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심(苦心)한 끝에 대략 오늘과 같은 상황을 이루어 놓았는데, 어떻게 한낱 윤봉조로 인하여 이를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당시에, ‘목·손·발에 형틀을 채우고 머리에 자루를 씌운 사람을 어떻게 이조 참의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 말이 옳았다. 오늘날의 조정은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암담한 사람을 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은 말하기를,
"윤봉조의 죄는 진실로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산직(散職)에 두는 것도 손상될 것이 없으므로, 신이 굳게 버티지 않았던 것입니다. 승지의 말도 윤봉조를 죄가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성심(聖心)을 굳게 정하시어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여 흔들리지 말고 고수(固守)한 후에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때그때에 따라 다시 고친다면, 나약함을 보이는 데에 가까운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봉조의 문한(文翰)은 비록 문형(文衡)에 두어도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버려 두고 그로 하여금 늙어서 깨닫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때 경기 감사 이종성(李宗城)이 말[馬]을 제급(題給)하는 일 때문에 낙창군(洛昌君) 탱(樘)과 서로 교대로 상소하여 쟁변(爭辨)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앙쪽의 말이 서로 다르니, 피차간에 반드시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는 체통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경 등에게 하문하여 조처하려고 한다."
하니, 대신이 구명(究明)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앙주(仰奏)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종신(宗臣)은 민형수(閔亨洙)의 구기(口氣)를 배우고 있다. 도신은 지위가 재상(宰相)의 반열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연소한 무리의 습성이 있어 하나의 낙창군을 얻어 정직하다는 이름을 얻으려 하고 있으니, 모두 가소로운 일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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