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경인
임금이 하교하여 농사를 권장하고 팔도(八道)와 양도(兩道)에 효유(曉諭)하였다. 이어 공인(貢人)의 오래 된 포흠(逋欠)을 견면하도록 명하였다.
1월 2일 신묘
정형익(鄭亨益)을 좌참찬으로, 조명택(趙明澤)을 부응교로, 정형복(鄭亨復)을 부수찬으로, 이현보(李玄輔)를 승지로, 이형좌(李衡佐)를 가선 대부로, 윤경룡(尹敬龍)을 의주 부윤으로, 신치근(申致謹)을 집의로, 이우하(李宇夏)를 정언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지평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세수(歲首)에 금방 윤음(綸音)을 내렸는데, 특별히 승선(承宣)001) 을 불러 다시 여의(餘意) 다섯 가지를 유시하니, 아! 묘당(廟堂)과 방백(方伯)의 신하들은 각기 마음을 다하여 나의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
1. 조심스런 마음을 지니고 힘을 합쳐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참으로 힘을 합쳐 업무를 잘 수행하려면 구습(舊習)을 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구습을 잊으려면 국사에 부지런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아! 그대 공경(公卿)과 백집사(百執事)들이여, 그대의 할아비와 아버지들은 모두 여러 조정에서 세록(世祿)을 받은 신하였고 저 백성들 또한 여러 조정에서 사랑하여 구휼하던 적자(赤字)였다. 이는 서명(西銘)002) 에 이른바,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이고 만물은 나의 동류(同類)이다.’ 한 것과 같은 격인 것이다. 따라서 동포인 백성이 구학(溝壑)에 있을 경우 불쌍히 여겨 구제함에 있어 혹시라도 지체시킬까 두려워한다면, 국사는 면려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면려될 것이고, 구습은 잊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잊게 될 것이니, 각기 힘쓰기 바란다.
1. 생민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나라의 치란(治亂)은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는 것이므로, 임금이 전조(銓曹)의 신하를 계칙하고 전관(銓官)이 백성을 돌보는 관원을 가리는 것은 이것이 국가의 상전(常典)인 것이다. 계칙하고 면려하는 것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한갓 종이 위의 문구(文具)가 되고 있을 뿐이니, 이와 같은데 어떻게 실효(實效)를 거둘 수 있겠는가? 영장(營將)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백성을 돌보는 관원은 아니지만, 관계되는 것이 수령보다 중대한 것이다. 양전(兩銓)의 신하들은 이런 나의 뜻을 몸받아 비록 대정(大政)이 아니라 하더라도 수령의 자리 하나 영장의 자리 하나라도 살피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진실로 탐학한 사람이 있으면, 이는 전조(銓曹)에서 그렇게 만든 것이 되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 수령의 칠사(七事)003) 에 농상(農桑)이 첫번째에 있다. 그런데도 농사를 권장하는 하유(下諭)가 문구(文具)가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뽕나무를 심는 정사를 더욱 게을리하고 있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오묘(五畝)의 택지(宅地)에 뽕나무를 심으면 70세 된 사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 했는데, 수령으로 있는 사람들이 이 방도를 잘 수거(修擧)하고 있는가? 아! 도신(道臣)은 수령을 계칙하여 실효가 있게 할 것이며, 그 근만(勤慢)을 조사하여 세말(歲末)에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1. 내가 지금 자목관(字牧官)004) 에게 바라는 것은 곧 순리(循吏)인 것이다. 탐리(貪吏)의 폐단은 한때에 그치는 것이지만, 명예를 요구하는 폐단은 다른 백성에까지 파급되는 것이다. 실심(實心)으로 민폐(民弊)를 제거하고, 실심으로 조령(朝令)을 봉행하고, 실심으로 상전(常典)을 따라서 순수하게 한결같이 공심(公心)에 의거하여 조처한다면, 비록 혁혁한 성예(聲譽)가 없을지라도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면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 농정(農政)에 있어 중대한 것은 제언(堤堰)에 있는 것이다. 도신이나 수령들이 사조(辭朝)할 때 이미 특별한 하유가 있었으나, 이를 상례(常例)로 여기고 있다. 주관하는 당상(堂上)도 문구(文具)로 여겨 온 지 이제 몇 년인가? 근만(勤慢)을 알지 못한다면 종핵(綜覈)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제도(諸道)에 엄중히 계칙하여 춘수(春水)가 있을 때에 미쳐 힘을 다하여 보수하며 물을 모아 놓게 하고 또한 주관하는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염찰(廉察)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밤 초고(初鼓)에 임금이 승지에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가지고 입시(入侍)하고, 아울러 입직한 유신(儒臣)들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금중(禁中)에서 과세(過歲)했기 때문에 내가 만나보고 싶었고, 농정(農政)에 대해 《경국대전》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려 한다."
하고, 이어 농정의 급무(急務)와 민간의 질고(疾苦)에 대해 상의하였다. 승지 유엄(柳儼)이 인하여 말하기를,
"저궁(儲宮)의 위호(位號)를 정한 지 이미 1년이 되었으니, 의당 수시로 궁료(宮僚)들을 접견하여 덕성(德性)을 훈도(薰陶)하는 효험이 있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날씨가 화창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동궁의 성품이 서책(書冊)을 좋아하고 자못 글자의 뜻을 아는 능력이 있다. 처음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을 배울 적에 ‘왕(王)’ 자는 나를 가리켰고 ‘세자(世子)’ 자는 자신을 가리켰는데, 지식이 점점 통달하여져 가고 있다."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내시는 반드시 순후하고 근신한 사람을 가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내가 어렸을 적에 사친(私親)이 항상 조심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도 마음에 새겨 행하고 있다. 그래서 매양 자전(慈殿)을 모실 때마다 잠저(潛邸)에 있을 때처럼 하고 있다."
하였다. 유엄이 또 수의(繡衣)005) 를 파견하여 토호(土豪)에 의해 민호(民戶)에서 누락된 자들을 탐문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왕자(王者)는 시기에 따라 정사를 행하는 법인데, 지금은 호적(戶籍)을 만들 때가 아니므로, 하교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호에서 누락되는 폐단이 점차 허호(虛戶)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 근본을 궁구해 보면 참으로 측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저 가난하고 잔약한 백성들이 토호들에게 의탁하고 또 토호들은 그들을 부리는 것을 이롭게 여겨 끝내는 그들의 노복(奴僕)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엄중히 금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어 선온(宣醞)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몸소 ‘새해에 한결같이 마음을 쓸 것은 풍년들기를 비는 것[新歲一心祝有年]’이라는 글귀를 쓰고,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즉석에서 뒤이어 짓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각기 칠언 절구(七言絶句)를 지어서 올렸다. 임금이 필묵(筆墨)을 하사하여 총애하였다.
1월 4일 계사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땅거미질 때 달이 금성(金星)을 침식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5일 갑오
태백성이 낮게 나타났다.
조익명(趙翼命)·유만중(柳萬重)을 승지로, 유건기(兪健基)·오언주(吳彦胄)를 수찬으로 삼았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첫 번째 정사(呈辭)하니, 답하기를,
"경(卿)을 신임한 지 오래 되었고 경을 안 것도 익숙해졌다. 부박(浮薄)한 세태는 이로부터 진정될 것이다. 연소한 무리들에 대해서는 입에 올릴 것도 없는데, 하나의 하찮은 일로 인하여 어찌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아! 인심은 같지 않은 것이므로 서로 이기기를 힘쓰기 마련인 것이니, 대관(大官)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잘못일 경우에는 조정하고 옳을 경우에는 스스로 반성할 따름이다.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국사(國事)요 생민(生民)이다. 경이 고집하고 있는 것은 윤봉조(尹鳳朝)에 대한 하찮은 일인데, 이는 조용히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조제(調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토록 큰일을 돌보지 않는단 말인가? 이는 경에게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몸처럼 여기는 마음과 나의 의임(倚任)이 중한 경으로서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근신(近臣)을 보내어 이런 내용으로 효유하게 하니, 경은 내가 목마른 듯이 갈구하고 있는 뜻을 몸받고 옛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리를 돌아보아 나를 피곤하게 하지 말고 즉시 연석(筵席)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전광도(全光道) 금산군(錦山郡)에 병진년006) 12월 21일 크게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세초(歲初)의 하교는 성의(誠意)가 애연한데, 신은 삼사(三事)007) 의 자리에 있으면서 잘 솔선하여 인도하지 못했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좌상(左相)이 정사 단자(呈辭單子)를 올린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대관(大官)이 이렇게 하니, 내가 실로 개연(慨然)하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판부사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일전의 성변(星變)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인재(人才)·병력(兵力)과 관방(關防)에 대한 변방의 일 가운데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인심을 수습하고 인재를 선발해서 기용하는 것이 실로 급선무가 됩니다. 청컨대, 양전(兩銓)을 신칙하소서."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옛사람은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나를 잊었다고 여겼습니다. 이로 인하여 분발하는 단서를 삼는다면, 이것은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런 규모로는 인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구득하여 기용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근래에 모두 문구(文具)에 의거하여 기용하기 때문에 순서에 따라 승진하게 되어 사람마다 모두 대관(大官)이 될 수 있는데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묘천(廟薦)은 인망(人望)으로 순서에 따라 충선(充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이재(李縡)는 아경(亞卿)이 된 지 지금 수십 년이 되었다 하여 포장(褒奬)을 가하고 발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이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겠는가? 염퇴(恬退)에 대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물욕(物欲)에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염퇴해 있으면서도 시상(時象)을 한다면 어떻게 기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시위하고 있는 백관들에게 각기 소회를 진달하게 하였으나, 하나도 하교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수사 별제(內需司別提) 김시건(金時健)이 아뢰기를,
"추쇄(推刷)한 내노(內奴)에게 뇌물을 받고 공포(貢布)를 감면해 주고,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한 것은 한전(閑田)의 폐단 때문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승지 유엄이 아뢰기를,
"하찮은 액속(掖屬)에 대해 어찌 감히 번거롭게 진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비국(備局)에서 신칙해야 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인하여 개연(慨然)하게 여겨 하교하기를,
"전에는 봉산(鳳山)의 충의(忠義)도 소회를 진달했었는데, 지금은 오로지 내수사(內需司)의 관원 한 사람뿐이었다."
하였다.
1월 6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안상휘(安相徽)를 집의로, 윤빈(尹彬)을 장령으로, 김한철(金漢喆)을 지평으로, 홍경보(洪景輔)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지제교(知製敎) 윤급(尹汲) 등 32인을 선발했는데 강릉(江陵) 사람 최규태(崔逵泰) 안동(安東) 사람 김성탁(金聖鐸)이 문학(文學)이 있다는 것으로 여기에 참여하였다.
1월 7일 병신
좌의정 김재로가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경은 또한 스스로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의 너그럽고 포용하는 도량으로 어찌하여 마음속에 머물러 두고 있는 것인가?"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재이(災異)가 극심하다는 것으로 임금의 궐실(闕失)에 대해 연방(延訪)할 것을 청하고, 또 관방(關防)을 수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군비(軍備)는 정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관서(關西)의 영애(嶺阨)에 수목(樹木)을 길러야 한다는 것, 금군(禁軍)의 도시(都試)를 설행(說行)하도록 신칙할 것 등을 진달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인하여 말하기를,
"윤순(尹淳)이 지난번에 올린 소장(疏章)의 내용은 신 등과 조금 다른데, 성상께서는 그것이 준론(峻論)인가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축년008) ·임인년009) 이후 완론(緩論)을 제기해 왔던 사람이 어찌 오늘날에 와서 다시 준론(峻論)을 제기하겠습니까? 지난번에 연석(筵席)에서의 하교를 속였다고 말을 했는데, 이에 대해 신 등도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 등을 가리켜 옳다고 한 하교를 가리킨 것 같은데, 나도 기억할 수가 없다. 혹시 잘못 듣고 그런 것은 아닌가? 이정보(李鼎輔)의 말은 지나친 것이었으니, 나는 준론(峻論)이라고 의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고의로 이것을 가지고 거취(去就)를 결단하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1월 8일 정유
조상경(趙尙絅)을 예조 판서로, 조원명(趙遠命)을 예조 참판으로, 구성임(具聖任)을 좌윤으로, 김성응(金聖應)을 우윤으로, 이현보(李玄輔)를 대사간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조태언(趙泰彦)을 헌납으로, 신사관(申思觀)·김상적(金尙迪)을 정언으로, 유수원(柳壽垣)·이선행(李善行)을 지평으로, 이수항(李壽沆)을 도승지로, 김상성(金尙星)을 승지로, 조명겸(趙明謙)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지중추부사 이진망(李眞望)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하기를,
"문학(文學)과 아망(雅望)을 겸하였고, 스스로 청근(淸謹)한 몸가짐을 지켰고, 여러번의 파랑(波浪)에도 염연(恬然)하여 동요되지 않았으며, 소란한 말세의 습속에서 스스로 깨끗이 하여 물들지 않았다. 이는 내가 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온 조정에서 함께 알고 있는 것으로, 특별히 아조(雅操)를 이루었던 것은 의도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니 슬프고 아픈 마음이 배나 더하다."
하고, 상장(喪葬)에 드는 비용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이진망은 신축년·임인년에 당인(黨人)들이 용사(用事)할 때 자못 평완(平緩)한 의논을 주장하였는데, 정미년010) 에 개기(改紀)하기에 미쳐서는 제일 먼저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의 등급을 나눌 것을 청하였다. 임금은 그가 잠저(潛邸) 때 사부(師傅)였다 하여 정중하게 예우하고, 감반(甘盤)011) 의 구계(舊契)라고 일컬으면서 발탁하여 정경(正卿)에 제배하였으나, 이진망이 극력 한가로이 지내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다시는 직사(職事)를 책임지우지 않았다. 이진망은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고 소중하고 온후하였으므로, 명조(名祖)의 풍도를 실추시키지 않았다. 벼슬이 현달해지고 나서도 출탈할 때 타는 말이 없었고, 간혹 나막신을 신고 걸어다니기도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은 성품이 엄하고도 법도가 있어 자제(子弟)들이 과오를 범하면 가동(家僮)을 시켜 뜰에서 매를 때리게 했는데, 이는 때려서 가르치는 유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월 9일 무술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의금부 당상에게 명하여 본부에서 중 현기(玄機)를 국문하고, 현기가 끌어들인 여러 곳에 있는 자들을 발포(發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포청(捕廳)에 첩문(帖文)을 위조한 도둑이 있었는데, 중 현기가 여기에 사련(辭連)되어 호남(湖南)에서 체포되어 왔다. 현기가 스스로 말하기를,
"무신년012) 에 망명(亡命)한 역적 황진기(黃鎭紀)가 평안도에서 중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깊은 산속에서 내가 그의 제자가 되어 연좌(緣坐)된 여러 적(賊)들과 왕래하면서 교통(交通)했습니다."
하였다. 이는 무신년의 난리에 황진기의 아비 황부(黃溥)가 장폐(杖斃)되었는데, 그때 황진기가 선전관(宣傳官)으로서 몸을 빼어 도주했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그 실상을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에는 으레 그 방도로 속일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자산(子産)도 일찍이 교인(校人)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013) 이 일은 끝내 이치에 근사하지 못하니, 사수(死囚)가 시각을 연장시켜 보려는 계교가 아닌가?"
하였다. 이에 좌우 포장(左右捕將)으로 하여금 합좌(合坐)하여 철저히 신문하게 하였다. 포도 대장 박찬신(朴纘新)·김흡(金潝)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죄인의 공사(供辭)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하고, 인하여 추안(推案)을 올렸는데, 끌어들인 사람은 이사성(李思晟)의 서제(庶第)인 이사언(李思彦)과 전 맹산 현감(孟山縣監) 안명학(安鳴鶴)이었다. 또 이 참판(李參判)의 종신 석남(石男)이라 일컫는 자가 있었는데, 이 참판은 곧 이명언(李明彦)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 위원(渭原)에 귀양가 있다. 또 안음(安陰)의 정생(鄭生)과 청주(淸州)의 이생(李生)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는 곧 무신년의 적괴(賊魁)인 정희량(鄭希亮)·이인좌(李麟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또 관서(關西)와 압록강 가[江邊]의 토호(土豪)인 전(田)·신(申) 두 족속들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였으며 낭송한 시구(詩句)는 또 불도(不道)에 관계된 내용이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인하여 덕천(德川) 금강암(金剛菴)의 중 법훈(法訓)·최학(最學)·혜학(惠學)·일우(日雨)와 이사언(李思彦)·신차만(申次萬)·전만규(田萬圭)·전차규(田次圭)·이명언(李明彦)과 이명언의 종 석남(石男)과 김세채(金世采)와 김세채의 어미 소정(小貞)과 김재형(金載衡)을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법훈은 곧 현기가 말한 황진기(黃鎭紀)의 승명(僧名)인데, 이 암자(庵子)에 두 명의 법훈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체포되었다. 이 날부터 추국청을 설치하였는데, 2월 병인일(丙寅日)에 이르러 임금이 직접 국문하였고, 3월 기축일(己丑日)에 현기가 무고(誣告)하였음을 자복하였다.
중 현기를 국문하기를,
"네가 망명한 역적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이미 포청에 고하였다. 주무(綢繆)했던 정절(情節)을 일일이 직초(直招)하라."
하니, 현기가 공초(供招)하기를,
"희천(熙川)의 아전 김세채(金世采)의 어미는 소승의 5촌 고모(姑母)인데, 조카가 혈혈 단신 외롭게 된 것을 보고 꾀기를, ‘나와 절친한 중이 향산(香山)의 금강암(金剛菴)에 있는데 너의 스승이 될 만하다.’ 했습니다. 김세채도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환속(還俗)했었기 때문에 그의 스승이었던 중 신익(信益)을 통하여 법훈 대사(法訓大師)에게 말을 전하게 되었고, 기유년014) 12월에 머리를 깎고 그의 상좌(上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법훈(法訓)과 더불어 김세채의 집에서 같이 유숙(留宿)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승(師僧)의 근파(根派)에 대해 고모에게 물어 보았더니 대답하기를, ‘너의 스승은 바로 환국(換局) 때 이곳에 정배(定配)되었다가 그대로 중이 되었다. 그 사람은 글을 잘하니 네가 경서(經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서울에서의 사찰(伺察)이 없지 않지만 그가 불가(佛家)에 자취를 의탁하고 자비(慈悲)로 마음을 삼고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을 사지(死地)에 밀어넣기야 하겠는가? 너는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승(師僧)의 가속(家屬)들이 박창주(朴昌柱)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데, 고모의 집에서 과녁판 하나 세울 만큼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밤이 깊어진 뒤에 고모가 사승(師僧)을 인도하여 가서 그의 어미와 아내를 만나보았습니다. 다음해 2월에 안음(安陰)의 정생(鄭生)과 충청도의 두 이생(李生)이 와서 만났는데, 사승이 말하기를, ‘무신년015) 에 평안 병사(平安兵使)의 군대가 먼저 중화(中和)로 건너왔으니 하도(下道)에서 거사(擧事)했으면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런데 양가(梁哥)가 잘 주선하지 못하여 일이 성취되지 못한 것이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중만(金重萬)이 고변(告變)한 것은 통한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김중만이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있었을 적에 불을 지르기 위해 화약(火藥)을 가지고 가다가,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차를 끓이던 중 실화(失火)하여 그만 팔뚝을 데었다.’ 했고, 또 말하기를, ‘무신년에 궁성(宮城)을 호위하였을 때 내가 궁성의 담장을 뛰어넘어 오 판서(吳判書)의 집에서 보름 동안 유접(留接)하다가 변복(變服)하고 와서 향산(香山)의 중이 되었다.’ 했습니다. 또 각처에서 온 서간(書簡)이 매우 많았는데, 그 가운데 신덕하(申德夏)의 서간이 있었습니다. 사승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일 평안 병사가 되고 또 심양(瀋陽)의 오랑캐 3백 명을 얻을 수 있다면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했는데, 그 서간의 내용에, ‘방금 팔도에 행이(行移)하여 규포(窺捕)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조심하기 바란다.’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해와 달은 자주 차고 기울고,[天中日月缺盈頻] 바둑판 위의 산하는 번복되기가 쉽다.[枰上山河翻覆易]’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경술년016) 여름에 사승이 편지를 써 가지고 강계(江界) 사람 전만규(田萬圭)·신차만(申次萬)에게 인삼을 요구했었으며, 가을에는 전만규와 영원(寧遠)의 이철상(李哲尙) 집에서 만났습니다. 신해년017) 여름에 또 학승(學僧)과 함께 신차만의 집에 가서 만났는데, 이때는 30여 인이 자리를 함께 하였습니다. 또 오랑캐로서 마상선(馬尙船)을 타고 강을 건너와서 함께 모인 자가 40인이었습니다. 임자년018) ·계축년019) 무렵에 조정에서 매우 급하게 발포(發捕)하였으므로, 사승(師僧)이 이를 피하여 영원(寧遠)에 가서 있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갑인년020) 에 신차만의 아우가 잠상(潛商)을 하다가 일이 발각된 때문에 피하여 와서 사승에게 의지하여 있었을 때 사승이 신차만으로 하여금 붓을 잡고 서한을 쓰게 하여 심양(瀋陽)을 통관(通官)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마패(馬牌)에는 아직도 대명(大明)의 연호(年號)를 쓰고, 돈은 상평전(常平錢)을 쓰고 있는데, 강희(康熙)·옹정(雍正)의 연호를 쓰지 않고 있다.’고 했고, 또 무신년에 난이 발생하게 된 이유를 언급하고서 반드시 신덕하(申德夏)가 병사가 되기를 기다려 거사(擧事)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사승이 영변(寧變)에 귀양와 살고 있는 이생(李生)에게 왕래하였고, 또 위원(渭原)의 이 참판(李參判)에게도 왕래했는데, 이 참판이 노복 석남(石男)을 시켜 서한을 가지고 왕복하게 하고 약물(藥物)과 환약(丸藥)을 자주 보냈습니다. 정생(鄭生)은 항상 운산(雲山)의 최수방(崔壽邦) 집에 유접(留接)해 있었습니다."
하였다. 신덕하(申德夏)를 국문하니, 신덕하가 공초하기를,
"신이 정미년021) 에 영변 부사(寧邊府使)가 되었었는데, 이름을 아는 중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안음(安陰)의 정성(鄭姓)을 가진 사람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이 시(詩)를 읊을 줄 모른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글을 지었다는 일은 더욱 애매합니다."
하였다. 김재형(金載衡)을 국문하기를,
"현기(玄機)의 말에 의하면 그의 스승이 너와 친하기 때문에 너를 시켜 칼을 만들고 쇠를 녹여 소창(小鎗) 등의 물건을 만들게 했다고 하는데 숨김 없이 직초(直招)하라."
하니, 김재형이 공초하기를,
"신이 단철(鍛鐵)하기 위해 용문사(龍門寺)의 중 의량(義亮)의 거소(居所)에 갔었는데, 하나의 빈 전우(殿宇)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어떤 중이 있었는데 문자(文字)를 잘 해득하였으며, 이마가 넓고 턱이 뾰족한데, 나이는 40세쯤 되어 보였고, 얼굴에 흉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이름은 모릅니다. 야로(冶爐) 사이를 순심(巡審)하여 보니 야장(冶匠)들이 만들어 파는 것은 있었습니다만,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현기를 다시 형주(刑推)하니, 공사(供辭)를 올리기를,
"학승(學僧)이 스스로 말하기를, ‘교동 수사(喬桐水使) 한범석(韓範錫)과는 육촌(六寸)의 친척이 되기 때문에 김재형이 병영(兵營)에서 곤장(棍杖)을 맞게 되었을 적에 학승이 한범석에게 가서 주선(周旋)했다.’ 했습니다. 을묘년022) 에는 학승의 서한을 맹산 현감(孟山縣監) 안명학(安鳴鶴)에게 전하였는데, 그때 관리 안만주(安萬周)의 누이 동생 월매(月梅)로 인하여 관아(官衙)에 통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승(師僧)이 항상 칼 세 자루를 차고 다녔으므로 괴이하여 물어 보았더니, 답하기를, ‘내가 무신년에 궁성의 담장을 뛰어넘어 왔다. 만일 나를 체포하려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찔러 죽일 수 있다.’ 했습니다. 정생(鄭生)이 묻기를, ‘네가 오가(吳家)에 은신하여 있었는데, 어찌 위태롭지 않았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내가 오(吳)와 동모(同謀)했으니, 내가 족멸(族滅)되면 그도 족멸될 것이다. 무신년에 그가 원수(元帥)가 되어 스스로 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실상은 죄없는 사녀(士女)들을 죽인 것이요 원래 적군(賊軍)을 벤 일은 없었다.’ 했습니다. 뒤에 오원수(吳元帥)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한 팔뚝이 끊긴 것 같다고 했고, 또 《감란록(勘亂錄)》을 보고서는 손으로 발기발기 찢어버렸습니다."
하였다. 정생(鄭生)의 이름을 물으니, 현기가 말하기를,
"그 이름의 아랫 글자는 곧 양(亮)인데 윗글자는 잊었습니다."
하였다. 이때 국문하는 일을 엄중하고도 은밀하게 하였기 때문에 오명항(吳命恒)의 조카 오언주(吳彦胄)가 아무것도 모른 채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였다. 뒤에 하교하기를,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교악(巧惡)해져서 이런 무리가 달마다 발생하고 있다. 현기(玄機)는 먼 지방의 구걸승으로 우연히 체포되자 감히 현혹시킬 계책을 낸 것이다. 두 번의 공초 내용을 보면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법훈(法訓)이 과연 황적(黃賊)이라면 여러 해 동안 망명(亡命)하고 있는 역적이 어찌 경솔하게 연소한 구걸승에게 그런 사실을 누설하겠는가? 정희량(鄭希亮)의 이름자를 단지 양(亮)만을 일컫고 희(希)자는 잊었다고 했는데, 남문(南門)에서 그의 수괵(首馘)을 받았고 그의 이름이 제도(諸道)에 전파되었는데도 거짓 알지 못하는 듯이 한 것이다. 이는 무신년에 누락되어 달아난 역적이 아니면, 반드시 강변(江邊)의 잠상(潛商)으로서 망명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된 부류일 것이다. 법훈이 곧 며칠 안에 당도하면 저절로 탄로가 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엄중히 국문하여 기어이 직초(直招)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국체(鞫體)는 진실로 엄중하고도 은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니, 경솔히 성의(聖意)를 보일 수는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비록 명철하지는 못하지만 남문에서 수괵을 받고 맹단(盟壇)에서 서약(誓約)한 뒤 이런 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두었다면 구천(九泉)에 있는 사람이 어찌 원한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 어떻게 일국에 군림(君臨)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다시 현기를 추국하니, 또 용천 부사(龍川府使) 조국빈(趙國彬), 철산(鐵山)의 무인(武人) 정덕명(鄭德鳴)과 전임 벽동 군수(碧潼郡守)로서 지금은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있는 성성(成姓)인 사람을 끌어들이고 말하기를,
"사승(師僧)은 일찍이 이들이 만약 병사가 된다면 무신년에 했던 거사를 할 수 있다고 했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승(師僧)과 학승(學僧)이 간혹 용천(龍川)의 차성(車姓)을 가진 사람의 집에 가서 유숙하기도 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삼호(蔘胡)들과 전치준(田致峻)의 서당(書堂)에서 모의(謀議)했습니다."
하였다. 일우(日雨)와 법훈(法訓)을 잡아왔는데, 일우는 곧 현기(玄機) 스승의 스승이었다. 법훈과 현기를 면질시키니, 현기가 말하기를,
"나의 노사(老師)의 제자에 법훈이 두 명인데 이는 정성(丁姓)을 가진 법훈으로 나의 스승인 법훈이 아닙니다. 포청에 있었을 적에 이미 두 명의 법훈이 있다는 것을 말했었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포교(捕校)가 금강암(金剛菴)의 40리 지점에 이르러 눈이 내려 길이 막혔다고 핑계대고 끝내 가서 보지 않았고, 체포한 사람도 진짜가 아니니 포교를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하였다. 김세채(金世采)의 어미 소정(小貞)을 현기와 면질시키니, 현기를 향하여 말하기를,
"너의 아명(兒名)이 무엇인가?"
하니, 현기가 말하기를,
"김산대(金山臺)입니다."
하자, 소정이 말하기를,
"과연 나의 오촌(五寸) 조카이다. 그러나 나는 당초에 너를 꾀어 중이 되게 한 일이 없다. 만일 너는 중이 되라고 권하였다면 나의 혀가 반드시 갈라질 것이다."
하였다. 혜학(惠學)과 현기는 서로 상세히 모르는 사이었다. 전만규·전차규·신차중 등이 공초하기를,
"신 등은 깊은 두메에 살고 있으므로 다만 곡식 먹을 줄만 알 뿐입니다. 애초에 법훈·현기가 어떤 중인지도 모릅니다."
하였다. 기타 현기가 끌어들인 자들의 공초도 현기의 말과 모두 서로 어긋났다. 현기가 황진기라고 한 법훈을 잡아다가 취초(取招)하니, 법훈이 공초하기를,
"소승은 본래 영흥(永興)의 한익흥(韓益興)의 아들로 11세에 노덕사(老德寺)에서 중이 되었고, 19세에 향산(香山)의 진불사(眞佛寺)로 들어가 불경(佛經)을 읽었습니다. 소승은 실로 망명한 역적 황진기가 아닙니다."
하고, 또 예조에서 인급(印給)한 공첩(公牒)에 그로 하여금 영흥(永興)의 영정(影幀)을 이안(移安)한 구암(舊菴)의 중창(重創)을 맡게 한 것을 증거로 인용하여 변해(辨解)하였다.
당시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오랫동안 인입(引入)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추국하는 일 때문에 명을 받들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하찮은 중 하나가 번거롭게 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고, 이 일로 인하여 조정에 나오게 되었으니, 이는 국사에 있어 진실로 다행스런 일이다."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성교에 신을 제갈양(諸葛亮)이 부지런히 공격한 것처럼 하라는 말로 책구하셨습니다만, 만약 제갈양으로 하여금 신이 당한 일을 감당하게 하였더라도 반드시 자리에 있는 것을 불안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헌 홍경보(洪景輔)가 전계를 다시 아뢰니, 이명언(李明彦)·이하택(李夏宅)의 일만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명언이 신하 노릇 하지 않을 마음을 품은 지 오래 되었다. 갑진년023) 에 올린 한 소장은 이미 너무도 흉참(凶慘)하였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거취(去就)를 함께 하겠다고 한 말로 살펴보건대, 용의 주도하게 꾸민 음모(陰謀)와 마음을 서로 통한 정상이 환히 드러나서 숨길 수가 없다. 아! 먼 변방에서 귀양살다가 석방되면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인 것인데, 머뭇거리면서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이미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그리고 오랫동안 폐기되었다가 다시 기용되면 한마디 말을 하여 자송(自訟)하는 것이 사리에 있어 당연한 것인데, 으레 올리는 소장을 올리지 않았으니, 헤아릴 수 없는 의도가 있음이 현저하다. 이것이 연신(筵臣)들이 신하의 절개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더구나 그들 부자(父子)의 이름이 역적들의 공초에서 여러 차례 거론된 것이겠는가? 오랑캐들의 옷을 입고 거사한다는 이야기와 편지를 넣고 옷을 꿰매었다는 계책에 대한 말이 이토록 낭자하니, 이명언·이하택은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중히 형문(刑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0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보다 앞서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백치 첨사(白峙僉使)를 관리영(管理營)에 이속(移屬)시킬 것을 청하자, 해서(海西)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상의하여 장문하라고 명하였다. 황해 감사 이성룡(李聖龍)과 병사 이상성(李相晟)이 아뢰기를,
"본진(本鎭)의 형편이 본도(本道)에 있어서는 일조(一助)가 될 수 있지만 관리영에 있어서는 척후(斥候)하여 경보를 알리는 데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백치(白峙)의 토지와 민졸(民卒)이 모두 해서에 예속되어 있고 군역(軍役)과 조적(糶糴)024) 도 모두 해서에 계류되어 있는데도 유독 송도(松都)의 절제(節制)를 받게 하는 것은 실로 불편합니다."
하고, 비국에서 복주(覆奏)하니, 그대로 해서에 예속시켜 두도록 명하였다.
승지 남태온(南泰溫)이 국청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죄인의 형모(形貌)와 행동거지 및 끌어들인 사람들의 허실에 대해 하문하였는데, 남태온이 대답하기를,
"죄인이 물 흐르듯 거침없이 응대하면서 조금도 군색해 하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리고 끌어들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만연(蔓延)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경험한 것이 많아서 마음이 진실로 태연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그가 청나라와 교통했다는 것으로 마음이 동요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우려하는 것은 놀라서 소요하는 가운데 점차 적자(赤子)들이 사나운 적도로 변할까 하는 그것이다. 신(申)·전(田) 두 족속은 모두 변방의 토호들이니, 그 우려가 진실로 크다."
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배알하고 나서 재실(齋室)에서 걸어나와 망묘례(望廟禮)를 행하였는데, 난모(煖帽)를 쓰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날씨가 차다는 것으로 극력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1일 경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송인명(宋寅明)이 나아가 아뢰기를,
"성수(聖壽)가 또 한 살이 높아지셨으니 마땅히 보호하고 절섭(節攝)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셔야 됩니다. 어제 승지를 인접(引接)하시면서 거의 새벽녘에까지 이르렀고, 이어 또 동가(動駕)하셨으며 오늘 또 개강(開講)하시니, 구구한 걱정이 실로 깊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시간을 아끼는 도리가 어찌 나이가 많고 적은 데 따라 다르겠는가? 그러나 경의 말이 이러하니, 내일은 정강(停講)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월 12일 신축
이익정(李益炡)을 헌납으로, 조현명(趙顯命)을 형조 판서로, 이의풍(李義豐)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1월 13일 임인
소대를 행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승지 김상성(金尙星)이 입시하니, 임금이 옥정(獄情)에 대해 하문하였다. 대답하기를,
"그의 인품이 매우 괴악(怪惡)한데다가 한 말이 모두 조리가 있습니다. 요망한 자의 계교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문서(文書)를 보니 그의 말이 매우 요악(妖惡)하였는데, 배윤명(裵胤命)이 또 거론되었다. 만일 그의 말을 믿고 따를 경우에는 조정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여 정우량(鄭羽良)의 소장 내용을 변해(辨解)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명(聖明)께서 사람을 기용하는 권병(權柄)을 주시어 신으로 하여금 요석(僚席)을 따지지 말고 대망(臺望)에 중통(重通)시키라고 하셨는데, 그 때문에 요석에 있는 사람들이 소장을 올려 배척하게 되었으니, 이는 신이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단지 어제 이미 난만하게 수작(酬酌)하고 나서 오늘 갑자기 소장을 올려 공척(攻斥)하기를 마치 전혀 들어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하고 있으니, 너무도 정직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심지어 도정(都政)이 있은 뒤의 서찰을 가지고 협박하는 패병(霸柄)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이는 그때 붓대를 잡았던 낭관(郞官)과 정리(政吏)가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14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땅거미질 때 객성(客星)이 위성(危星)의 성좌 안에 나타났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승지 김상성(金尙星)이 본연의 마음을 다잡는 공부에 대해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본래 학문에 대한 공부가 없었고 기질(氣質) 또한 고상하지 못한데, 이제 나이 이미 44세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의지(意志)가 전일보다 조금도 나태한 적이 없다고 여기고 있으며, 또 조용한 곳에 당해 있을 때에는 매양 모든 일에 대해 더욱 진보된 효험이 없는 것 때문에 마음속으로 탄식하고 있다. 또 신료(臣僚)들을 인접할 때에 띠를 매고 정장하여 마음을 검속하는 것이 매우 유익했었다. 그래서 금년에 일찍 강연(講筵)을 여는 것은 진실로 뜻을 둔 데가 있는 것이었다."
하였다. 김상성이 또 아뢰기를,
"미세한 일 때문에 성념(聖念)을 근로시키는 것은 성궁을 보호하여 절섭(節攝)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이 어찌 자신을 모르겠는가? 내가 미세한 일에 힘을 쓰는 것이 진실로 병통이 되는 부분인데, 그 근본을 궁구해 보면 이 또한 방과(放過)함이 없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1월 15일 갑진
오시(午時)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임금이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는 전교(傳敎)를 내렸다.
상참을 행하였다. 이날 임금이 난모(煖帽)를 쓰지 않고 전상(殿上)에 올랐는데, 반항(班行)에는 이를 쓴 사람이 더러 있었다. 승지가 조사하여 현출(現出)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자수(自首)한 사람은 단지 80세의 노인인 재신(宰臣) 남취명(南就明) 한 사람뿐이었다. 집의 이선행(李善行)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신사관(申思觀)이 아뢰기를,
"공조 참의 이흡(李潝)은 자신이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피리의 혀같이 공교로운 말로 언자(言者)를 비난했었으니, 이미 지난 일이라 하여 버려둘 수 없습니다.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난 일을 가지고 의논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였다.
1월 16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땅거미질 무렵에 혜성(彗星)이 위수(危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한 자쯤 되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키고 있었고 백색(白色)이었다. 유성(流星)이 삼기성(參旗星) 아래에서 나왔고,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천재(天災)가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에 임금이 걱정하느라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여 옥음(玉音)이 상당히 정상을 잃고 있었다. 여러 신하들이 입시하고 조금 있다가 임금이 갑자기 현기증(眩氣症)을 일으켰으므로 잠시 물러가도록 하였다. 오시(午時)가 지나 다시 입시하라고 명하니, 대신 이하의 관원들이 교대로 나아가 아뢰기를,
"재이를 없애는 방도는 분발 면려하여 수성(修省)하는 데 있고, 또한 성궁(聖躬)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니, 지나치게 스스로 근심하지 마소서."
하였다.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지난번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의 상사(喪事) 때 중사(中使)에게 교지(敎旨)를 전하여 본조로 하여금 마포(麻布)·면포(綿布) 5백 필을 납입하게 하여 장차 각전(各殿)의 부의(賻儀)로 쓸 바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 길이 한번 열리면 폐단의 효시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내(大內)에서 과연 특별히 내리는 부의(賻儀)가 있었기 때문에 어의궁(於義弓)에서 가져다 쓰게 했는데, 중관(中官)이 탁지(度支)025) 에 잘못 전한 것으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하고, 중관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정언 김상적(金尙迪)이 나아가 아뢰기를,
"외간에 전해진 이야기에 의하면 혹은 내총(內寵)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임금의 한 몸은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것인데, 어떻게 스스로 여색(女色)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김상적이 또 말하기를,
"기강이 확립되지 않는 것은 모두 전하께서 잘 솔선하여 계도하지 않은 탓입니다. 전관(銓官)이 인입(引入)하면 문득 면유(面諭)했다가 금추(禁推)하여 출사(出仕)할 것을 독촉하니, 이는 기강을 확립시키려다가 도리어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김치만(金致萬)이 군명(君命)에 극력 항거한 것은 고집하는 것이 없지 않았으며, 김희로(金希魯)를 우선 삭직(削職)시킨 것은 벌을 가중시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좌상의 출사를 면려시키는 것 때문에 그대로 정지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우상이 처음 정승에 제배되었을 적에 비국 당상 가운데 참좌(參坐)하지 않은 사람을 감독 계칙하여 진발(振發)시킬 것같이 했습니다만, 근래에는 간혹 사사롭게 안면에 구애되어 아울러 칙려하는 것까지도 폐지하고 있습니다. 조현명(趙顯命)은 자호(自好)하는 것이 지나쳐 청요직(淸要職)을 사피(辭避)하면 장차 경연(經筵)을 맡게 될 것이라 여겨 사퇴하기도 하고 명령에 응하기도 하여 행동이 순일하지 못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신은 남몰래 실소(失笑)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성(修省)하는 방도는 인재를 얻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전하께서는 항상 알면서도 쓸 수가 없다고 하교하시니, 이는 참으로 나라를 망칠 말씀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1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피차 서로 용납하지 않아서 합치기 어려운 자들을 모두 등용하셨는데도 이미 알고 있는 인재를 오히려 기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궁벽한 시골에 있는 인재를 찾아서 기용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기용한 사람은 용렬하고 수치를 모르는 무리들에 불과하니, 이수해(李壽海) 같은 사람은 역적 이사성(李思晟)의 첩(妾)에게 고혹되었는데도 청현직(淸顯職)의 의망(擬望)에 다시 저지당하는 일이 없었고, 홍호인(洪好人)은 수의(繡衣)의 서계(書啓)에 비행이 낭자하게 거론되었는데도 금오(金吾)의 높은 품계에 구애없이 검의(檢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어떻게 사로(仕路)를 밝힐 수 있겠습니까?"
했는데, 그가 두루 논한 내용에 아주 적절한 것이 많았다.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신이 또한 대신(臺臣)에게 면대하여 배척받았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대간(臺諫)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고, 수찬 유건기(柳健基)는 말하기를,
"대간의 말은 과연 봉(鳳)이 조양(朝陽)에서 운 것026)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로 대간에 들어와서 한 말들이 시폐(時弊)에 절중(切中)한 것이었다. 내가 마땅히 깊이 반성하겠다."
하였다. 김상적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엊그제 난모(煖帽)를 쓴 사람은 스스로 현고(現告)하여도 가벼운 벌을 받는 데 불과한데도, 반항(班行)에 있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보았지만, 한 사람도 자수하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크게 기강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판 결사 이우신(李雨臣) 이하 10인은 파직시키고 아울러 압반 감찰(押班監察)은 태거(汰去)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집의 이선행(李善行)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7일 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해에 겹햇무리가 있었다. 혜성(彗星)이 실성(室星)의 도내(度內)로 옮겨서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2척이었고 빛깔은 흰색이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키고 있었다.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승정원과 옥당에서 모두 진계(陳戒)하니, 경척(警惕)하겠다는 내용으로 답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1월 18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실수(室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우림성(羽林星)의 동쪽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3척이었고 빛깔은 흰색이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키고 있었다.
임수적(任守迪)을 대사간으로, 유시모(柳時模)를 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정언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지평으로, 윤용(尹容)을 승지로, 윤순(尹淳)을 형조 판서로, 민응수(閔應洙)를 형조 참판으로, 김취로(金取魯)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청(淸)나라 사람들이 자문(咨文)을 보내어 중강 개시(中江開市)를 청하면서 내지(內地)의 상인(商人)들로 하여금 교역하게 할 것을 바라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이해(利害)에 크게 관계된 것이니, 약조(約條)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면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회자(回咨)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옥당(玉堂) 조명겸(趙明謙)이 나아가 아뢰기를,
"무신년027) 이후로 비·바람이 순조로웠고, 전하께서도 성심으로 학문에 뜻을 두시어 근로하고 면려하면서 다스려지기를 도모하여 왔으니, 어찌 천재(天災)에 대해 걱정하겠습니까? 단지 더욱 진작(振作)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고, 이어 윤봉조(尹鳳朝)가 오래도록 기용되지 못한 것과 이수해(李壽海)가 공척당한 것은 너무 심하다는 것을 진달하였다. 정언 김상적(金尙迪)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나아가 아뢰기를,
"조명겸이 논한 것은 한편은 아첨하는 것이고 한편은 당론(黨論)입니다. 이와같은 옥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했는데, 조명겸이 물러가 상소하여 이수해의 일에 대해 스스로 변해(卞解)하면서 유박(帷薄)028) 처럼 애매한 것으로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린다는 등의 말을 했으므로, 이를 본 사람들은 웃음거리로 전하였다.
1월 19일 무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서방(西方)의 엷은 구름 사이로 보였다.
1월 19일 무신
사간 유시모(柳時模)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0일 기유
혜성이 서방에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북두(北斗) 밑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조명신(趙命臣)을 승지로, 한익모(韓翼謨)를 사서로, 구성임(具聖任)을 총융사로 삼았다.
소대를 행하였다.
1월 21일 경술
사간원(司諫院) 【정언 서명신(徐命臣)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명언(李明彦) 부자가 진 죄가 어떠한 것입니까? 그리고 이하택(李夏宅)의 아들이 격고(擊鼓)하여 양사(兩司)에 송원(訟冤)하면서 쟁론(爭論)하던 날 그들이 마구 들어갈 적에 기성(騎省)029) 의 당상과 낭청이 이를 금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공사(供辭)를 바침에 이르러서는 추조(秋曹)030) 의 당상이 전례에 따라 봉입(捧入)하였으므로, 승정원에서 물리칠 것을 품하는 번거로움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병조 당상과 형조 당상을 모두 파직하소서. 국수(鞫囚)를 기포(譏捕)하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일전에 포청의 부장(部將)을 보내어 체포하게 했으나, 눈이 내려 길이 막혔다고 핑계대면서 끝내 뒤를 밟아 체포하지 않았으니, 부장을 국청에서 일체 아울러 잡아다가 국문하여 엄중히 처단하게 하소서. 이명언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렸을 적에 금부 도사 윤상통(尹尙通)이 차례를 뛰어넘어 나아가서는 눈이 내려 길이 막혔다고 핑계대면 또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잡아다 국문하여 엄중히 처단하소서. 이명언의 죄악은 단지 ‘신하의 절개가 없다[無臣節]’는 세 글자만 가지고 논하더라도 지금 전하에 대해 북면(北面)한 사람으로서 의당 성죄(聲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조 판서 윤유(尹游)는 사심(私心)에 끌리는 마음을 품고 감히 도정(道情) 등의 말을 드러나게 장주(章奏)에 올렸으니, 그가 공의(公議)를 배반하고 붕당을 위해 사력(死力)을 다하는 정상이 몹시 놀랍고 통분스럽습니다. 그리고 관계가 매우 귀중한 사람을 많이 끌어들여 힘써 사원(私援)을 심기에 이르렀으며, 당소(堂疏)031) 에서 드러내어 공척한 뒤에도 전혀 염치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강계(江界)는 본디 변경의 중요한 진보(鎭堡)인데 부사 민창기(閔昌基)를 박정(駁正)하는 의논이 논사(論思)하는 자리에서 발론되기에 이르렀는데도 듣지 못한 듯이 하면서 서둘러 무릅쓰고 부임하였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너무 지나친 데에 관계된다고 답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2일 신해
정언 서명신(徐命臣)이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심성진(沈星鎭)이 전장(銓長)을 공척한 것은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미 하교하였으며, 일 또한 지난 것이었다. 그런데 서명신이 문자(文字)를 들추어내어 대정(大政)에 대해 신칙하던 날 중신(重臣)을 축출시키려 함으로써 마치 서로 보복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러한 풍습을 어찌 감히 오늘날에 부리려 하는가?"
하였다.
비변사의 천주(薦奏)로 윤혜교(尹惠敎)를 이조 참판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이조 참의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가 대간의 논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월 23일 임자
혜성이 벽수(璧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철질성(鐵鑕星) 위로 옮겨서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3척이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키고 있었고 빛깔은 흰색이었다.
승지들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가지고 입시하여 구전(舊典)에 대한 몇 가지 일을 논하였다.
1월 24일 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벽수(璧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운우성(雲雨星) 동쪽으로 옮겨서 나타났다.
이정제(李廷濟)를 판의금으로, 이광운(李光雲)을 집의로, 조명택(趙明澤)을 사간으로, 김정윤(金廷潤)을 헌납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동경연으로, 정석오(鄭錫五)를 호조 참판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지평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정언으로 삼았다.
대사헌 홍경보(洪景輔)가 상소하기를,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시상(時象)을 어떠하다고 여기십니까?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편들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공격하는 습성이 비록 조정에서는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집에서는 잊을 수 없는 것이 실정이고, 살육(殺戮)의 화(禍)가 목전에서는 조금 금지된 것 같습니다만 그 마음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실정입니다. 따라서 시기를 틈타 이용하고 유언 비어로 교묘하게 참소하는 것이 그 사이에 느닷없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는데도 전하께서 바야흐로 피차를 조정(調停)하는 것을 온화하게 하셔서 형적(形跡)이 미봉(彌縫)된 것을 만족하게 여겨 이미 다스려지고 이미 평안해졌다고 스스로 생각하신다면 신은 그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비유하건대, 큰 병을 앓는 사람과 같이 복열(伏熱)이 심부(心腑)에 숨겨져 있어 보(補)와 사(瀉)에 모두 손을 대기가 어려워 우선 소소한 온평제(溫平劑)를 쓰면서 시일이 지나면 무사하겠지 하고 바라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발열(發熱)하여 장차 구료(救療)할 수 없게 된다면 어찌 두렵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믿고 유지(維持)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다만 대신뿐입니다만, 그들이 정백(精白)한 한마음으로 성지(聖志)를 우러러 본받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건백(建白)하는 것은 각기 사당(私黨)에 관계된 일이고 천인(薦引)하는 것도 각기 사당(私黨)의 사람들입니다. 영백(嶺伯)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당초 상대적으로 거용(擧用)하여서 모두 인망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침내 서로 다투게 되어, 조정의 체통을 크게 손상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 번수(藩帥)는 중임(重任)인데, 진실로 적임자를 얻었다면, 어찌 물아(物我)를 따지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피차를 가려 말하면서 마치 선혜청(宣惠廳)의 아전 자리를 다투어 차출하듯이 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이미 노성(老成)으로서 부끄러운 노릇입니다. 주당(籌堂)032) 에 차하(差下)된 사람이 거의 수십 인에 이르는데, 지난번 조명익(趙明翼)과 김성응(金聖應)이 부지런히 출사(出仕)하지 않았더라면, 비국(備局)의 좌기(坐起)가 거의 폐기될 뻔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여러 재신(宰臣)들을 동솔(董率)하고 백료(百僚)들을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양전(兩銓)의 정주(政注)에 대해 대신들이 옛날부터 분부(分付)했었던 전례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또한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분부하면 감히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수령(守令) 하나 찰방(察訪) 하나에 이르러서도 자리에 따라 분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분부하는 전례를 빙자하여 사사로운 청탁을 행하고 있는데, 동백(東伯)033) 의 부의(副擬)에 대해, ‘본래 마땅한 사람이 있다.’고 한 서한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관(銓官)들이 다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어 게을리하며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리(政吏)를 잡아가두고 다스리는 것이 거의 없는 날이 없게 되었고, 대신들의 체모는 점차 구풍(舊風)이 실추되고 있으니, 신은 삼가 그들의 자중(自重)하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대각(臺閣)에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므로, 뒤돌아보고 기휘(忌諱)하며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고지(故紙)에 있는 것만을 등사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이것이 수치스러운 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함(臺銜)을 받게 되자마자 곧바로 체직(遞職)되어 면하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위가 높은 사람은 옹용(雍容)한 자세로 진취(進取)하여 편의(便宜)한 자리를 스스로 점유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극력 외읍(外邑)을 요구하여 구복(口腹)을 채우고 있으므로, 풍습이 더럽혀져 올바른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간혹 한두 건의 논계(論啓)가 있었다 하더라도 대부분 구차하고 협잡(挾雜)한 것이어서 도리어 말하지 않는 것만도 못하니, 전하의 대각은 붕괴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임금의 덕을 성취시키는 것은 그 책임이 경연(經筵)에 달려 있는데, 오로지 나약한 사람만 입직(入直)시키고 시세에 따라 부침(浮沈)하면서 용납되기를 구하는 자들로 수효를 채워 강문(講文)에 응하게 하고 있으므로, 임금의 덕을 면려할 경우에는 천리(天理)를 정진(淨盡)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아 진신(搢紳)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명지(明旨)에 응할 경우에는 쓸데없는 잡된 말을 종이에 가득히 써서 착안점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요(龍繇)의 깊은 뜻을 말학(末學)에게 책임지울 수는 없겠습니다만, 목전의 훈주(訓註)도 이해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으니, 어떻게 성상의 마음을 계옥(啓沃)하고 성학(聖學)에 도움을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승선(承宣)의 직책은 왕명의 출납을 진실하게 하는 데 있는 것으로 그 책임이 매우 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봉환(封還)하여 박정(駁正)한 고사(古事)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근래에는 묘시(卯時)에 출근하여 신시(申時)에 퇴근하면서 문서(文書)만 봉행하는 데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는 두 세 명의 원리(院吏)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니, 또한 여섯 명의 대언(代言)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위로 묘당(廟堂)에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와 근밀(近密)에 이르기까지 담당하는 이가 하나도 없고 눈을 뜨고 해보려는 이도 하나도 없으며, 전하께서 하겠다는 의지(意志)도 3, 4년 전에 견주어 또한 8, 9분은 퇴보한 상태입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계축년034) 겨울 신이 승지로 입시(入侍)하였을 적에 손수 대고(大誥)를 써서 깊은 밤에 받들고 나가자 군료(君僚)들의 안색이 변하였고, 사방에서 시각을 고치고서 태평한 정치를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 옛날과 같이 인순(因循)하여 지금은 또한 다시 이런 뜻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구언(求言)하는 뜻을 내리셨으나 여러 날 귀를 기울이고 돌아보아도 후원(喉院)과 옥당(玉堂)에서 책임만 면하기 위해 올린 소장 이외에 봉사(奉事)를 공거(公車)035) 에 와서 올린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 전하의 말이 아직도 국인들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으니, 높고 높은 위에 있는 하늘을 어떻게 믿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혁연(赫然)히 다시 도모하여 몸소 스스로 분발하여 힘쓰시고, 인하여 여러 신하들을 신칙하여 각기 자기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게 하소서. 조정이 바로잡히면 사방도 모두 바로잡히게 될 것이고 인심이 화목하여지면 천기(天氣)도 저절로 온화하여지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려하여 진달한 내용은 모두 옳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신의 체면은 경재(卿宰)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닌데, 말을 하는 사이에 중도(中道)에 지나친 점이 없지 않으므로, 매우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교리 조상명(趙尙命), 수찬 유건기(兪健基) 등이 상소하기를,
"홍경보(洪景輔)의 상소는 전편(全篇)의 지의(指意)가 오로지 전하의 조정을 공허하게 만들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봉(餘鋒)의 독을 관중(館中)의 여러 동료들에게 두루 파급해서 감히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계교이었으니, 그 또한 교묘하고도 참혹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퇴(辭退)하지 말라."
하였다.
1월 25일 갑인
혜성이 규성(奎星)의 도내(度內)에 있는 천혼성(天溷星)의 서쪽에 옮겨서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2척쯤이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키고 있었고, 빛깔은 흰색이었다.
김취로(金取魯)를 판의금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우참찬으로, 심성희(沈聖希)를 응교로, 임정(任珽)을 교리로, 남태량(南泰良)을 수찬으로 삼았다.
사헌부 【집의 이광운(李光運)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금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이 감옥에 가득하여 국문하는 일이 바야흐로 급한데, 대사헌 홍경보(洪景輔)는 임금을 위하여 징토(懲討)하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은 채 이에 중대한 죄수를 잡아다가 추국하는 때에 서둘러 소장(疏章)을 올렸으니, 전편의 정신(精神)은 오로지 대신을 공격하여 축출함으로써 국옥(鞫獄)을 동요하며 괴패(壞敗)시키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비난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아울러 삼사(三司)까지 제거해서 기필코 조정을 공허하게 만들고야 말려고 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으니, 모의한 계교가 교묘하고도 주밀했습니다. 그가 마음을 기울여 옥사를 저지시키면서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홍경보는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열한 것이 중도에 지나쳤다. 대신 또한 어찌 이 때문에 지나치게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앞서지도 처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기척(譏斥)하면서 경멸과 모욕을 가하였으니,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운이 자신의 말이 중히 여김을 받지 못했다. 하여 인피(引避)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사간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국옥(鞫獄)이 바야흐로 한창이어서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이 감옥에 가득하기 때문에 잠시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 홍경보가 갑자기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들일 것을 도모하고 여러 차례 패초(牌招)를 어기던 끝에 중대한 죄수를 잡아오던 날 한 소장을 올려서 제일 먼저 옥사(獄事)를 안찰하는 두 대신에게 공격을 가했습니다. 그 자취에 근거하여 마음을 논하여 본다면 이는 조정을 괴란(壞亂)시키려는 것이 분명하니,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그가 어떻게 감히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국가의 무한한 근심이 목전의 옥사를 미루는 데 있을 뿐만이 아닐까 우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홍경보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죄를 성토한 것이 낭자했습니다. 생각건대, 신이 오랫동안 앉아서는 안 될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공의(公議)에 죄를 얻은 것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겠습니까마는, 이제 그가 신의 죄를 논한 것이 이처럼 잗단 것에 그쳤을 뿐이니, 또한 충후(忠厚)한 뜻에서 신이 스스로 자처(自處)할 것을 용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또 어떻게 감히 말을 허비하여 가면서 비교하여 변해(卞解)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26일 을묘
혜성이 규수(奎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외병성(外屛星)의 서쪽으로 옮겨서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2척쯤이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켰고 빛깔은 흰색이었다.
유척기(兪拓基)를 대사헌으로, 조한위(趙漢緯)를 대사간으로, 박필간(朴弼榦)·홍정명(洪廷命)을 지평으로, 이덕재(李德載)를 정언으로, 윤급(尹汲)을 부응교로, 신치근(申致謹)·유건기(兪健基)를 교리로, 신택하(申宅夏)를 수찬으로, 황재(黃榟)를 부교리로, 오언주(吳彦胄)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집의 이광운(李光運)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엊그제 헌장(憲長)이 상소하여 죄를 성토한 것 중 최대의 것은 규지(揆地)036) 에 있었는데 능멸하고 비난함에 있어 있는 힘을 다하였으므로 신은 실로 놀랍고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지난번의 일은 체통(體統)을 보존시키려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만, 마치 서로 비교하여 따진 것 같아서 부끄럽고 한스러움이 끝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지친(至親) 가운데 고을을 다스릴 수 있는 재능이 넉넉한데도 아직 수령으로 삼아 시험해 보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전관(銓官)에게 말하는 것을 면치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밖에는 폐단이 있는 고을이나 중요한 고을을 막론하고 한번도 분부(分付)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실로 신의 근신하는 옹졸한 본색(本色)인데, 도리어 이러한 공척(攻斥)을 받았으니, 진실로 또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동백(東伯)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이에 대해 대략을 진달하고자 합니다. 신이 평소 홍중주(洪重疇)가 방백(方伯)의 명망을 쌓아온 것을 안 지 오래 되었습니다마는, 음관(蔭官)을 번수(藩帥)에 임명함에 있어서는 대신에게 문의(問議)한 전례가 있었으므로, 신이 동료 정승들과 상의하여 전장(銓長)에게 이서(移書)하여 수망(首望)에 주의(注擬)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하망(下望)은 의망(擬望)할 사람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문관을 하망에 주의하는 것도 전례가 있다…’ 했었습니다. 뜻밖에도 사서(私書)를 몰래 보내 신의 형의 자지(資地)가 서로 비슷한 것으로 자구(字句)를 억지로 만들어 은연중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귀결시켰으니, 진실로 우스워서 변해(辨解)할 것도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월 27일 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규수(奎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천창성(天倉星)의 서쪽에 옮겨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2척쯤이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켰고 빛깔은 흰색이었다.
승지를 보내어 두 정승에게 하유하기를,
"아! 지난번 전석(前席)에서 경 등에게 마음을 합쳐 도와서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여 줄 것을 면유(勉諭)했었는데, 전 도헌(都憲)이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은 공교로운 시점에서의 소장을 마침 국사(鞫事)가 바야흐로 한창일 때 올렸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홍경보(洪景輔)가 풍헌(風憲)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교지(敎旨)에 응하여 숨김없이 말하려 했다면 승여(乘輿)나 대관(大官)을 어찌 돌아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경 등을 공척한 것도 공조(公朝)의 작은 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마음속으로 경 등의 일에 대해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경 등 또한 어찌 이 때문에 지나치게 버티겠느냐고 여겼기 때문에 소홀히 하여 미의(微意)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소장을 공교롭게도 좋지 못한 시기에 올려서 비난과 모멸을 가하였으나, 헌신이 아뢰고 난 뒤에는 신칙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령 홍경보가 무심히 범론(泛論)한 것이라면 경 등에게는 털끝만큼도 버텨야 할 단서가 없는 것이요, 설혹 유심히 공척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버틸 것 같으면 마침 시폐(時弊)에 적중된 것이 된다. 경 등의 밝은 마음으로 또한 어찌 이를 양지(諒知)하지 못한단 말인가? 아! 옛사람은 병을 무릅쓰고 수레에 올라 토적(討賊)을 하였다. 지금은 국수(鞫囚)가 감옥에 가득히 찼는데도 서로 버티기만을 일삼고 있으니, 대체(大體)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 등은 모쪼록 다시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즉시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홍경보가 공척한 것은 대체(大體)에 대한 것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날마다 개강(開講)하는 때를 당하여 경악(經幄)에 사람이 없는 것이겠는가? 이 뒤로는 이렇게 버티는 내용의 소장은 봉입(捧入)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우부승지 유엄(柳儼)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이번에 승정원에 들어오던 날 헌신(憲臣)이 바야흐로 장석(長席)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주선한 것이 거의 1개월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명의 출납을 합당하게 하지 못한 것이 이번의 소장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면, 이는 신의 부끄러움인 동시에 또한 헌신도 부끄럽게 여겨야 될 일입니다. 이제 헌신이 정원을 떠나 대간으로 옮겨가서는 박정(駁正)하는 소장을 갑자기 올렸는데,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헌신은 일찍이 직무를 잘 수행할 뜻을 두고 있었으나, 신처럼 용렬하고 못난 사람이 말단의 동료로 있어서 함께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그의 의도가 바야흐로 묘당(廟堂)과 삼사(三司)를 저지시키는 데에 쏠려 있기 때문에 아울러 후원(喉院)까지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까? 모두 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청국(淸國)의 예부(禮部)에서 중강 개시(中江開市)에 내지(內地)의 상인들로 하여금 무역(貿易)하게 하는 일을 그들의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이자(移咨)하기를,
"지난번 팔기대참(八旗臺站)의 관병(官兵)들은 매년 2월·8월에 화물(貨物)을 가지고 중강(中江)으로 가서 조선(朝鮮)과 무역을 해왔다. 생각건대, 기인(旗人)들은 모두 간수(看守)하고 순사(巡査)하는 책임이 있어 원래 무역할 겨를이 없는데, 그렇게 되면 먼 데 사람들이 변방에 왔다가 지체되고 수후(守候)에도 미편한 점이 많이 있을 듯하니, 뒤이어 내지(內地)의 상인들로 하여금 조선 사람들과 무역하게 하겠다. 그리고 즉시 중강의 세관(稅官)으로 하여금 실제로 힘써 조사하여 강제로 억매하거나 값을 불리는 일이 없게 함으로써 짐이 먼 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지극한 뜻을 보이겠다."
했는데, 즉시 재자관(䝴咨官) 오태열(吳泰說)을 보내어 회자(回咨)하기를,
"소방(小邦)이 대대로 대조(大朝)에서 보살펴주시는 은혜를 받아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살펴주지 않는 것이 없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 주셨으므로 온 나라의 신여(臣黎)들이 누군들 송축하면서 떠받들지 않겠습니까? 이제 또 변방에서 전례에 의거하여 개시(開市)하는 때를 당하여 특별히 먼 데 사람에게 폐단을 끼칠 것을 염려하여 크게 분명한 유시(諭示)를 내리시어 내지의 상인들과 무역하게 할 것을 허락하고, 또 공평 균일하게 교역(交易)하게 함으로써 외람된 일이 없도록 신칙하셨으므로, 이를 받들어 읽은 이래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마땅히 은지(恩旨)를 흠준(欠遵)하고 덕의(德意)를 우러러 따를 뿐입니다. 생각건대, 소방의 정실(情實)에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중강(中江)에서 봄·가을로 여는 개시(開市)는 순치(順治)037) 3년(1646)부터 삼가 호부(戶部)의 자회(咨會)에 의거하여 관(官)에서 농우(農牛)·가래·소금을 판비(辦備)하여 변경에 이르러 시장을 개설하면, 대참(臺站)의 군민(軍民)들이 소청포(小靑布)를 가지고 와서 화매(和買)하여 물종(物種)을 경작하는 데 쓸 밑천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는 이미 항정(恒定)에 관계된 것이고 개설하고 철폐하는 것도 일정한 기한이 있는 것이니, 전례를 따라서 준행하여 다른 폐단이 없게 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지난 강희(康熙)038) 39년(1700)에 북경(北京)의 호부에서 이자하여 많은 매매인(賣買人)으로 하여금 단포(緞布)·전모(揃帽)·면화(綿花)를 가지고 와서 소방에 시장을 열고 무역하게 하려고 했습니다만, 갑자기 곤란한 사상(事狀)을 가지고 자문을 올려 간곡하게 진달하니, 성조 인황제(聖朝仁皇帝)께서 특별히 청한 것을 준허(準許)하셨었습니다. 옹정(壅正)039) 13년(1735)에도 귀부(貴部)에서 또 소방에 이자하였으나, 자문에 대해 다시 전과 같이 해서 또 귀부의 준허를 받았습니다. 소방에서는 감싸주는 사은(私恩)을 우러러 받들어 일심(一心)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엄중히 금지하면서 외람되게 교조(敎條)를 정성을 다하여 지켜 지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의 이 은유(恩諭)는 또 가상하게 여기는 은혜로운 뜻을 미루어서 교시(交市)하는 길을 넓히기 위한 것이니, 소방을 위한 조처가 지극히 우악(優渥)한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구구하나마 사사롭게 우려하고 있는 것은 소방의 변민(邊民)들은 가난에 찌든 것이 너무 극심한 까닭에 변경에서 개시하여 무역할 때를 당하면, 목숨을 걸고 법을 어기면서 몰래 많은 재화(財貨)를 외상으로 거래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우리 나라에서 진 포부(逋負)가 산처럼 누적되어 수만 금(金)에 이르렀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해에 소방에서 이로 인하여 그 죄를 면치 못할 뻔했습니다만, 다행히도 세종 헌황제(世宗憲皇帝)께서 곡진히 용서하시어 특별히 면퇴(免退)시켜 주심을 받게 되었으므로, 지금까지 은혜에 감사하고 잘못을 자송(自訟)하면서 더욱 스스로 삼가면서 거듭 죄에 빠지는 데 이르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제 내지의 상민들이 나와서 무역한다면 그 사세가 자연히 대참(臺站)의 군민(軍民)들과는 다르므로, 반드시 잡화(雜貨)를 많이 가지고 오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항례(恒例)로 준비해 왔던 농우·가래·소금은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방의 간사한 백성들이 몰래 서로 매매하면서 마침내 외상으로 주고받게 될 것이므로 포흠이 누적되는 것은 한결같이 그전의 습관과 같은 데 불과할 것이니, 이는 내지의 상민들이 도리어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방에서 잘 금지하지 못한 죄를 또한 어떻게 감히 매양 곡진히 용서해 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혹 불쌍히 여겨 살펴주어 그전처럼 시행하게 해주신다면 성법(成法)에 의거하여 영원히 사랑하여 보호해 주시는 은혜에 의뢰할 수 있겠습니다. 번거롭게 귀부(貴部)에 요청하노니 하찮은 정성을 곡진히 양지하여 천청(天聽)에 전달(轉達)하여 소방으로 하여금 시종 한결같은 은혜를 받게 해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대신(臺臣)이 홍경보(洪景輔)가 고의로 옥사(獄事)를 저지시켰다고 하는데, 과연 어떠한가?"
하니, 도제조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그의 마음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진실로 대간(臺諫)의 말과 같습니다."
하고, 제조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홍경보는 기려지신(羈旅之臣)040) 으로서 국사를 담당하고 있는 대신을 논척(論斥)했는데, 논한 내용이 하찮은 일에 불과하니 대신에게 큰 허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국사에 있어서도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급하지도 않은 일을 기필코 이런 때에 진달한 것은 자못 의심스럽고도 괴이한 데에 관계되므로 옥사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또한 스스로 변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데도 갑자기 온비(溫批)를 내리고, 온비를 내리고 나서 곧바로 파직하였으니, 전도(顚倒)됨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억양(抑揚)이 있는 것에 가깝지만 대신의 일에 대해 논한 것은 옳다. 하지만 홍경보는 곧 기려지신으로서 교지(敎旨)에 응하여 진언(進言)하면서 대관을 논열하였으니, 주저하는 것보다는 낫다. 송(宋)나라 때에도 대신을 위안하고 언관(言官)을 죄주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항상 사체에 맞는 조처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광운(李光運)이 대신을 축출하려 한 것이라고 하기에 이르렀으므로, 홍경보에게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결코 다른 사람에게 동요되거나 사주받지 않을 사람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는 문구로 단정하였으니, 기려인(羈旅人)으로서 누가 와서 벼슬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두 대신에게 궐문(闕門)에 임하여 기다리고 있겠다는 하교로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저 홍경보는 먼 지방에 있는 소원한 기려지신으로 감히 심각하게 말하지 않고 단지 벼슬이 간관(諫官)이고 또 임금이 구언(求言)하는 때를 만나 사적으로 관사(官師)의 규계(規戒)하는 뜻을 붙여 대략 하루의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말한 것이 너무도 평범하여 그다지 도움이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말을 겨우 하자마자 위욕(危辱)이 잇따라 이르는가 하면, 드디어 국사(鞫事)를 저지시키려는 것이라고 지목하였다. 이번 옥사가 허망한 것이었음은 성감(聖鑑)이 이미 통촉하고 있었는데도 시의(時議)가 바야흐로 장황(張皇)하여 공동(恐動)하여 공갈하는 자료로 만들었으니, 이 무리들의 용심(用心)을 앉아서 알 수 있다. 저 홍경보가 이 옥사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대관(臺官)들이 죄를 얽어내고 승지들이 허물을 들추어내고 옥당이 호소하는 것이며, 심지어 공척받은 대신이 스스로 수세(手勢)를 범하면서까지 잇따라 나와서 비방하여 헐뜯으면서 기필코 죄를 주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언자(言者)들에게 말을 못하게 했다는 책임을 면하려 한다면 어려운 일이다. 조현명(趙顯命) 같은 이도 또 이런 의심스럽고 괴이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으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삼가 살피건대, 성의(誠意)는 옥사를 저지시키려 했다는 말이 절대로 사리에 맞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흉흉하므로 언자(言者)를 우대(優待)하는 뜻이 저지당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아! 비록 날마다 가엾고 딱하게 여기는 하교를 내리면서 올바른 말을 들을 것을 생각해도 누가 말하려고 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3책 43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3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註 040] 기려지신(羈旅之臣) : 타향에 우거(寓居)하는 신하.
사신은 말한다. "저 홍경보는 먼 지방에 있는 소원한 기려지신으로 감히 심각하게 말하지 않고 단지 벼슬이 간관(諫官)이고 또 임금이 구언(求言)하는 때를 만나 사적으로 관사(官師)의 규계(規戒)하는 뜻을 붙여 대략 하루의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말한 것이 너무도 평범하여 그다지 도움이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말을 겨우 하자마자 위욕(危辱)이 잇따라 이르는가 하면, 드디어 국사(鞫事)를 저지시키려는 것이라고 지목하였다. 이번 옥사가 허망한 것이었음은 성감(聖鑑)이 이미 통촉하고 있었는데도 시의(時議)가 바야흐로 장황(張皇)하여 공동(恐動)하여 공갈하는 자료로 만들었으니, 이 무리들의 용심(用心)을 앉아서 알 수 있다. 저 홍경보가 이 옥사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대관(臺官)들이 죄를 얽어내고 승지들이 허물을 들추어내고 옥당이 호소하는 것이며, 심지어 공척받은 대신이 스스로 수세(手勢)를 범하면서까지 잇따라 나와서 비방하여 헐뜯으면서 기필코 죄를 주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언자(言者)들에게 말을 못하게 했다는 책임을 면하려 한다면 어려운 일이다. 조현명(趙顯命) 같은 이도 또 이런 의심스럽고 괴이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으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삼가 살피건대, 성의(誠意)는 옥사를 저지시키려 했다는 말이 절대로 사리에 맞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흉흉하므로 언자(言者)를 우대(優待)하는 뜻이 저지당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아! 비록 날마다 가엾고 딱하게 여기는 하교를 내리면서 올바른 말을 들을 것을 생각해도 누가 말하려고 하겠는가?"
이날 밤 두 대신이 명을 받들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문언박(文彦博)의 일041) 을 인용하여 한참 동안 위유(慰諭)하니, 두 정승이 모두 사죄(謝罪)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무가 썩으면 벌레가 생기는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홍경보의 소장은 경 등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 아닌가? 이 소장이 경 등에게 있어서는 옥성(玉成)042) 하는 방도가 되는 것이다. 홍경보는 곧 기려지신(羈旅之臣)이기 때문에 내가 그를 위하여 힘쓴 것이 많다. 이제 도헌(都憲)이 되었으니 간진(干進)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을 한 것은 생각건대, 오광운(吳光運)과 거취(去就)를 함께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 일로 인하여 떠나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옥사를 저지시키려 했다는 공척에 이르러서는 끝내 그럴 리가 없다."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홍경보의 죄는 단지 먹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 것으로 일세(一世)가 의심스럽고 괴이하게 여기는 점은 있습니다. 신이 삼가 우러러 진계(陳戒)한 바가 있는데, 사람을 임용하는 도리는 진실로 그의 심지(心志)와 재학(才學)이 국사를 담당할 만한 사람이면 발탁 임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단지 목전의 작은 재주만을 사랑하여 매양 용서하는 안색을 보이시는 것은 임금의 마음을 우러러 헤아리려는 근심이 있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나의 마음을 깨우쳤다."
하였다.
1월 28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규성(奎星)의 도내(度內)에 있는 천창성(天倉星)의 서쪽에 나타났는데, 길이는 1척쯤이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켰고, 빛깔은 흰색이었다.
정형익(鄭亨益)을 우참찬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좌참찬으로, 이형좌(李衡佐)를 우윤으로, 윤득징(尹得徵)을 헌납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정언으로, 송진명(宋眞明)을 공조 판서로, 이덕수(李德壽)를 예조 참판으로 삼고, 조현명(趙顯命)을 특별히 발탁하여 판의금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9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규성(奎星)의 도내(度內)에 있는 천창성(天倉星)의 서쪽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6, 7촌이었으며 손방을 가리켰다.
국청(鞫廳)의 죄인 정재빈(鄭載彬)을 방송(放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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