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3권, 영조 13년 1737년 2월

싸라리리 2025. 9. 1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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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경상도의 성산(星山)·대구(大丘)·풍기(豐基)·함창(咸昌)·금산(金山)·예천(醴泉)·개령(開寧)·용궁(龍宮)·상주(尙州)·문경(聞慶)·순흥(順興) 등의 고을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2월 2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규수(奎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천창성(天倉星)의 서쪽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촌이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켰고 빛깔은 흰색이었다.

 

강화 유수 조명익(趙明翼)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사노(私奴)로서 도중(島中)에 와서 거주하는 자는 추쇄(推刷)를 금하게 하고, 군민(軍民)들에게 관무(觀武)로 재예(才藝)를 시험하는 것을 즉시 다시 설행(設行)하게 하고, 강 언덕에 폐치(廢置)되어 있는 전선(戰船)은 모두 개비(改備)하게 할 것을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오위 장(五衛將) 김우태(金遇兌)가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민폐(民弊)에 대해 대략 진달하니, 임금이 초야(草野)의 진언(進言)이라 하여 가상히 여겨 불러서 접견하고, 하고 싶은 말을 진달하게 하였다. 김우태가 양정(良丁)을 수괄(搜括)하고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조적(糶糴)을 삼가고 복색(服色)을 바꾸는 등의 일을 조목별로 아뢰었으나 범용(泛庸)하여 채납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임금은 그래도 위유(慰諭)하고 권장하여 보냈다.

 

2월 3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규수(奎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천창성의 서쪽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촌이었으며, 손방을 가리켰고, 빛깔은 흰색이었다.

 

강춘 감사(江春監司) 이중협(李重恊)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선유(宣諭)하였다. 승지 조명신(趙命臣)이 말하기를,
"관동(關東)의 화전(火田)은 경작이 산등성이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숲을 잇따라 연소시키고 있어 삼출(蔘朮)043)  의 공납(貢納)이 거의 끊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택(川澤)을 막아 놓았기 때문에 뱃길이 통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산허리 이상에다 기경(起耕)하는 것은 금지시킴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이중협이 말하기를,
"삼가 엄중히 신칙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화전을 금지하는 것보다는 의당 맹자(孟子)의 이른바 산림(山林)에 부근(斧斤)을 가지고 들어가서 베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처럼 하는 것이 옳다. 근래 도신(道臣)이 당초에 들어가는 것을 잘 금지하지 않고 있다가 그들이 함부로 마구 베기에 이르러서는 이에 도리어 그것을 속공(屬公)하고 있으니, 공평한 정사가 아니다."
하였다.

 

2월 4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규수(奎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천창성(天倉星)의 서쪽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촌이었으며, 손방(巽方)을 가리켰고 빛깔은 흰색이었다.

 

우참찬 정형익(鄭亨益)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하고 전례에 의거하여 부의(賻儀)를 내렸다.

 

2월 5일 계해

부응교 윤급(尹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산림(山林)에 숨어서 경서(經書)를 공부한 사람으로 지금 두서너 명의 유신(儒臣)이 있는데, 10년 사이에 한 사람도 정초(旌招)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원진(韓元震) 같은 사람은 융숭한 권애(眷愛)에 감격하여 말을 함에 있어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난해에 올렸던 한 통의 소장(疏章)은 도설(塗說)을 잘못 듣고 스스로 광구(匡救)하는 정성에 덧붙인 것이었으니, 이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당시 옥당(玉堂)에 있던 자들이 교묘하게 공동(恐動)시키는 말을 진달하여 몰래 이간하는 계책을 부려서 성충(聖衷)을 격동하여 번뇌하게 함으로써 갑자기 엄중한 하교를 내리게 하였고, 드디어 여러 해 동안 기척(棄斥)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비록 연신(筵臣)이 현혹시킨 소치에 말미암았지만, 성덕(盛德)에 허물이 됨이 어찌 처음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못한다044)  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하니, 뜻을 둔 데가 있는 것이라 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답하였다.

 

헌납 윤득징(尹得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이명언(李明彦)을 잡아올 적에 금부 도사(禁府都事) 윤상통(尹尙通)이 앞장서서 가기를 청한 것도 이미 매우 의심스럽고 괴이한 것이었는데, 눈이 내려 길이 막혔다는 핑계를 대고 중도에서 지체함으로써 죄인으로 하여금 기일에 앞서 알게 하였으며, 따라서 관계되는 문서(文書)를 하나도 수탐(搜探)하지 못했습니다. 기영(箕營)045)  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해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으나, 오히려 유숙(留宿)하려 했으며, 도신(道臣)이 질책하자 비로소 출발했습니다. 그 사이의 정적(情跡)을 살펴보면 헤아릴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민창기(閔昌基)는 사람이 본디 사납고 난폭하여 변방의 직임에는 합당하지 않는데다가 거듭 대론(臺論)을 받았는데도 유체(留滯)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급속히 개차(改差)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상통과 민창기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處分)을 내렸다."
하였다.

 

판의금 김동필(金東弼)이 상소하기를,
"신이 탑전(榻前)에서 품지(稟旨)한 것을 초록(抄錄)하여 소매에 넣고 합문(閤門) 밖으로 나와서 여러 금오랑(金吾郞)들을 불러 모았더니 도착한 사람이 윤상통(尹尙通)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전례에 의거하여 정하여 보냈던 것입니다. 도사(都事)는 원래 가기를 청하는 법규가 없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인심이 의심하는 이가 많지만, 국수(鞫囚)를 발포(發捕)하는 일에 대해 누가 감히 그 사이에 다른 뜻을 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경기 양정 어사(京畿良丁御史) 김상로(金尙魯)도 함께 입시 하였다. 임금이 여아(女兒)를 군액(軍額)에 충당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한참 동안 경탄(驚歎)하고 그 수령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2월 6일 갑자

김우철(金遇喆)을 장령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정언으로, 김기석(金箕錫)을 사간으로, 조명겸(趙明謙)을 헌납으로, 남태온(南泰溫)·김응복(金應福)을 승지로, 조상명(趙尙命)·유건기(兪健基)를 교리로, 윤광의(尹光毅)를 사서로, 유경장(柳經章)을 강계 부사로, 정우량(鄭羽良)을 수원 부사로, 이조 참판 윤혜교(尹惠敎)를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2월 7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8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친히 국문하였다. 법훈(法訓)을 위로 올라오라고 명하고 시위 장사(侍衛將士) 가운데 황적(黃賊)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래에서 살펴보게 하니, 자못 그가 진짜가 아님을 알면서도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모두 아뢰기를,
"모양은 비슷한 것 같습니만, 형체는 전혀 달라서 변별(卞別)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기(玄機)와 대질시킬 것을 명하니, 현기가 또 머리를 숙이고, 미현(迷眩)한 형상을 지으면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어 장문(杖問)하니, 현기가 비로소 사람을 무함했다고 자복(自服)하였다. 그가 공초(供招)하기를,
"강화(江華)에 있는 전등사(傳燈寺)의 중 문학(文學)과 어보(御寶)를 위조하여 작첩(爵帖)을 훔쳐 팔다가 체포되었으므로, 이런 무고(誣告)하는 짓을 벌여 목숨을 연장시킬 계책을 세운 것인데, 모두 문학이 지시하여 가르친 것입니다. 고발한 판서 오명항(吳命恒)은 마침 《감란록(勘亂錄)》을 보고 그가 유명한 대신이라는 것을 알았고, 신덕하(申德夏)는 일찍이 영변(寧邊)에 부임하여 왔을 적에 승도(僧徒)들을 학대하여 부렸고, 이명언(李明彦)·한범석(韓範錫)·성은석(成殷錫)·정덕명(鄭德鳴)·조국빈(趙國彬)·안명학(安鳴鶴)은 혹은 이웃 고을에 부임하여 왔거나 혹은 거주하는 곳이 서로 가까워서 그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마구 발고(發告)했던 것입니다. 고발한 신덕하의 서한 가운데 있었다고 한 시구(詩句)는 곧 관서(關西)의 거자(擧子) 계덕해(桂德海)가 과거에 응시했을 적에 지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수록(囚錄)을 가져오라고 명하여 모두 방송하고 두서너 사람만 남겨두게 하였다. 한성(韓姓)을 가진 법훈(法訓)은 포청(捕廳)에 내려 다시 심리(審理)하게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법훈은 끝내 의심스러운 데에 관계된다 하여 다시 구핵(究覈)을 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이 옥사(獄事)에 대해 애초에 믿지 않았었는데, 경 등이 지나치게 의심함으로 인하여 직접 국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하여 겁을 먹고 진위(眞僞)를 분명히 말하려고 하지 않으니, 내가 시속(時俗)에 동요당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포청에 내리게 하였으나, 다시 신문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집의 이광운(李光運)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김상로(金尙魯)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운허하지 않았다. 병조와 형조의 당상·낭청을 파직하는 일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이 비록 지나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서로 버텨야 할 것이 아니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떤 이는 병을 칭탁하면서 패초(牌招)를 어기기도 하고, 어떤 이는 급박함에 임하여 정소(呈疏)하기도 하면서 전계(前啓)에 대해 규피(規避)한 자취를 숨기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전 장령 조세후(趙世垕)와 전 헌납 윤득징(尹得徵)은 파직하고는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공조 참의 심일희(沈一羲)는 지망(地望)과 자력(資歷)을 물정(物情)이 합당하게 여기지 않으니, 개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전계(前啓) 가운데 윤상통(尹尙通)·민창기(閔昌基)의 일은 정지하였다.

 

정석오(鄭錫五)를 이조 참판으로, 이춘제(李春躋)를 도승지로, 이현보(李玄輔)를 승지로 삼았다.

 

2월 10일 무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조상경(趙尙絅)을 우참찬으로, 송진명(宋眞命)을 예조 판서로, 김유경(金有慶)을 호조 참판으로, 조석명(趙錫明)을 병조 참판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대사성으로, 이중경(李重庚)을 사간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정언으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으로, 이정보(李鼎輔)·정광운(鄭廣運)을 지평으로, 조명택(趙明澤)을 부응교로, 송징계(宋徵啓)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11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중강 개시(中江開市)에 대한 일 때문에 청국(淸國)의 예부(禮部)에 복자(覆咨)를 보냈는데, 회자(回咨)가 도착되기도 전에 성경(盛京)의 예부에서 또 이자(移咨)해 왔기 때문에 또 회자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소방(小邦)에서 열조(列朝)의 은혜와 돌봄을 거듭 입어 왔는데, 우리 황상(皇上)께서 등극(登極)하심에 이르러서는 진휼(軫恤)이 더욱 두터웠으므로 동토(東土)의 백성으로 누군들 공경하기를 원치 않겠습니까? 이에 중강 개시(中江開市)의 일에 대해서도 특별히 먼 데 사람에게 폐단을 끼치게 될 것을 염려하시어 내지(內地)의 상민(商民)들과 무역(貿易)하게 할 것을 허락하셨고, 또 공평하게 교역(交易)하여 외람된 일이 없게 하라고 신칙하셨으니, 소방을 사랑하는 은혜가 보통에서 훨씬 뛰어났습니다. 따라서 황제의 자애(慈愛)를 받은 감축(感祝)이 더욱 간절하니, 의당 황제의 성지(聖旨)를 준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내지의 상민들과 호시(互市)하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소방의 처지에 실로 곤란한 단서가 많습니다. 두 번 행하려다가 두 번 다 파기했던 지난날의 일을 증험하여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전례를 어기는 일을 열어 놓아 드디어 교역(交易)하는 길을 만든다면, 변방 백성들의 간사한 습관만 전보다 더 극심해질 뿐만 아니라, 소방이 이로 인하여 끝내 죄려(罪戾)에 빠지게 될 것이며, 또한 내지의 상민들도 바람에 크게 어긋나게 되고 도리어 앞으로 끝없는 폐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미 윗 조항에 대한 정실(情實)을 해부(該部)의 자복(咨覆)에 개진(開陳)하여 천총(天聰)에 전달(轉達)시켜 주기를 바랐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원본(原本)에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시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번거롭게 귀부(貴部)에 청하니 일체로 상세히 조험(照驗)하여 시행하게 해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장령 윤빈(尹彬)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경보(洪景輔)를 삭출(削黜)하는 일에 대해 그 조어(措語)를 대략 고쳤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하교한 적이 있으니, 삭출은 지나치고 삭직(削職)이 가하다."
하였다. 정언 김상로(金尙魯)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홍경보에 대한 계사(啓辭)는 이것이 바로 거듭 일어난 의논인데, 윤빈(尹彬)이 조어(措語)를 산개(刪改)하고 단지 율명(律名)만 남겨 두었으니, 이는 정계(停啓)도 아니고 연계(連啓)도 아닌 외면만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구차한 습관은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수치를 느끼게 하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논열한 것이 지나친 것인 줄 알고 있으나, 지금 경솔하게 고친 것은 사체에 있어 수상하다. 아뢴 내용이 옳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2월 12일 경오

지평 이정보(李鼎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대직(臺職)에 있으면서 망령되게 시폐(時弊)를 진달했다가 거듭 시휘(時諱)를 저촉하여 비난과 질타가 세상에 넘쳐 나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도 이간하는 말에 동요됨이 없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탕평(蕩平)·의대(衣帶)의 이야기 때문에 여러번 미안한 하교를 내리셨으므로 신은 송구하여 위축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탕평책이 그 도리를 잃은 것에 대해 매우 개탄스러움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 폐단을 낱낱이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의복(衣服) 등의 이야기에 이르서는 옛날에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진달할 때 더러 한때의 풍요(風謠)를 채취하여 진달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신 또한 삼가 이런 뜻을 덧붙였던 것인데 다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근래 여항(閭巷) 사이에 흑백(黑白)이 오색(五色) 밖에서 나오고 함감(醎甘)이 오미(五味) 밖에서 나온 것을 보면 그때마다 이를 탕평으로 일컫고 있으니, 탕평이 하나의 속언(俗諺)이 되고 있음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가지고 이에 임금 앞에서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공이 없는 무리들로 하여금 앉아서 부귀를 누리게 한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신의 본의는 풍원(豐原)046)  등 몇몇 사람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는데, 지나치게 스스로 인구(引咎)하고 있으니, 신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윤봉조(尹鳳朝)의 일에 이르러서는 우연히 사람이 와서 소본(疏本)을 보여준 것으로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닌데, 저 대신(臺臣)이 사람을 공격하기에 급급하여 이에 도리어 ‘한 번 다른 사람의 소장을 보고[一見人疏]’라고 한 네 글자를 점출(拈出)하여 억지로 말을 만들었으니, 신은 적이 놀랍고 통분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13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조태언(趙泰彦)·송수겸(宋守謙)을 장령으로, 윤순(尹淳)을 공조 판서로, 이주진(李周鎭)을 공흥도 감사로, 오원(吳瑗)·조명택(趙明澤)을 승지로, 윤급(尹汲)을 부교리로, 오언주(吳彦胄)·이도원(李度遠)을 수찬으로, 송진명(宋眞明)·조상경(趙尙絅)을 좌우 빈객(左右賓客)으로 삼았다.

 

지평 이정보(李鼎輔)가 상소하기를,
"신이 문랑(問郞)으로 잇따라 국좌(鞫坐)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감히 우견(愚見)을 진달하겠습니다. 법훈(法訓)이 머리를 깎아 형체를 훼손하고 10년 동안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므로, 의용(儀容)이 이미 변하고 복색(服色)도 같지 않으니, 설흑 그가 황적(黃賊)임을 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극력 증언하려 하겠습니까? 한 명의 요승(妖僧)을 죽이는 것이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엄중히 장문(杖問)을 가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유경장(柳經章)은 막 대간의 탄핵을 받고 있는데도 갑자기 웅부(雄府)에 제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인품과 기국이 적합하지 않으므로 공의(公議)가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개차(改差)함이 마땅합니다. 일전에 국수(鞫囚) 최석후(崔錫垕)를 잡아올 적에 나졸(羅卒)이 이한필(李漢弼)의 집으로 가서 내정(內庭)에 돌입하여 낭자하게 수탈(搜奪)하며 부녀(婦女)들에게 욕설을 퍼부었으므로, 이한필의 어미가 놀라서 까무라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난동을 부린 나졸은 수금(囚禁)하여 과죄(科罪)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최석후는 곧 현기(玄機)의 당숙(堂叔)으로 이때 이한필의 낭하(廊下)에 있었는데, 나졸이 수색 체포했기 때문에 이정보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비답하기를,
"법훈에 대해서는 마땅히 결말이 어떻게 되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어떻게 경솔하게 먼저 신문(訊問)을 가할 수 있겠는가? 유경장의 일은 시의(時議)의 불만 때문에 저 사람도 체직하고 이 사람도 체직하려 하니, 어느 때에 합당하게 되겠는가? 국청에서 발포(發捕)하는 것은 사체가 엄중한 것인데, 혹은 엄중하고도 긴밀하게 하지 않았다 하여 바야흐로 도사(都事)를 다스리기도 하고, 혹은 엄중하고도 긴밀하게 했다 하여 도리어 나졸을 다스리려고 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자신이 대관(臺官)으로 있는 사람으로서 한 말이 매우 놀랍다."
하였다.

 

2월 14일 임신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서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어유룡(魚有龍)을 승지로, 이병상(李秉常)을 지춘추(知春秋)로, 유척기(兪拓基)를 동지춘추(同知春秋)로, 황재(黃梓)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는데, 비국(備局)에서 부윤으로 추천한 것이다. 이양신(李亮臣)을 말망(末望)에 의망(擬望)했는데, 임금이 이양신은 당습(黨習)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이므로 승진하여 임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여 다시 의망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진달하고, 인구(引咎)하기를,
"이양신(李亮臣)이 한 번 올린 소장에 좌죄(坐罪)되어 10년 동안 폐기되었으니, 진실로 너무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었던 것인데, 오래도록 발바닥에 못이 박힌 것임을 구애함이 없이 극선(極選)에 통망(通望)한다면 공의(公議)에 따른 조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도 차자를 올리기를,
"이양신은 곧 신의 표종형(表從兄)이므로 신의 사의(私議)에 있어서는 감히 망령되게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묘천(廟薦)을 도로 내려 보내어 다시 의망하게 하는 것은 실로 처음 보는 일입니다."
하니, 아울러 비답을 내리기를,
"조왕(措枉)047)  의 뜻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묘천(廟薦)은 이미 다시 의망하게 한 전례가 없으니, 어떻게 이런 일을 창립하여 체모(體貌)를 가볍게 할 수 있겠는가? 원단(原單)대로 이미 내려 보냈으니, 인구할 것이 없다."
하였다.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장계(狀啓)하기를,
"각영(各營)·각진(各鎭)·각읍(各邑)에 소속된 명색(名色)은 신해년048)  에 액수(額數)를 작정(酌定)한 뒤 은루(隱漏)되어 액수에 작정되지 않은 자들이 오히려 외람되게 많음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이 도(道)에 살고 있는데도 신역(身役)은 다른 도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을 모두 조사해 내어 현재 거처하고 있는 고을의 신역으로 옮겨 충자(充差)하게 하소서. 다른 도의 역(驛)에 소속되어 있는 시노비(寺奴婢)·교원 노비(校院奴婢)도 조사해 내어 그대로 둘 것은 두고 폐지할 것은 폐지하게 하소서. 안음현(安陰縣)의 훈국(訓局) 유황군(硫黃軍)은 황맥(黃脈)이 이미 끊겼으니 특별히 혁파하게 하소서. 만일 액수(額數) 이외에 더 정한 것이 있거나 혹 그 전대로 숨겨 두고 있는 경우에는 수신(帥臣) 이하를 적발해서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거짓 유학(幼學)이라고 기록된 것과 여러 가지로 모면(冒免)한 부류들은 이미 각읍의 사정(査正)에 붙였습니다. 승역(僧役)이 치우치게 무거운 것이 양역(良役)보다 더 심하니, 각영·각읍에 소속된 절은 일체 혁파하여 통틀어 역사(役事)가 균일하게 하소서. 청절사(淸節祠)에 소속된 세 개의 절도 혁파하게 하면 양정(良丁) 2만 3백 명과 사천(私賤) 7만 7백 명을 조사해서 얻을 수 있으니, 궐액(闕額)을 충보(充補)할 수가 있고, 군정(軍政)도 대략 이정(釐正)할 수가 있습니다."
했는데, 비변사에서 복주(覆奏)하여 법식을 삼아 시행하게 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약원(藥院)에 명하여 양정합(養正閤)에서 동궁(東宮)을 진찰하게 하였다. 임금이 당중(堂中)에 평좌(平坐)하니, 세자가 관복(冠服)을 갖추고 서안(書案) 아래에 시좌(侍坐)하였다. 이때 세자의 나이 3세였는데, 행동거지가 의젓하였다. 임금이 궁관(宮官)에게 책자를 올리도록 명하여 읽기를 권하니, 한참 있다가 《효경(孝經)》을 펴고 ‘문왕(文王)’이란 글자를 낭랑하게 송독(誦讀)하였다. 내시(內侍)가 지필(紙筆)을 내오니 큰 붓대를 잡고 ‘천지 왕춘(天地王春)’이란 글자를 썼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앞으로 나와서 하사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
하니, 세자가 도제조(都提調) 김흥경(金興慶)을 가리켰다. 임금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세자도 대신을 아는구나."
하였다.

 

민응수(閔應洙)를 부제학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교리로, 박필균(朴弼均)을 교리로, 이병상(李秉常)을 대사헌으로, 윤경주(尹敬周)를 지평으로, 김한철(金漢喆)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오래된 포흠(逋欠)의 징수를 독촉하는 것이 제일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비록 생존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당초에 이미 빈궁하였고 또 해마다 새로 납입해야 하는 것이 있으므로, 모두 판비(辦備)할 길이 없어서 도망하기에 이르고, 침탈이 인족(隣族)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전(舊典)에 연유된 것 이외에 각 아문(衙門)에서 해유(解由)049)  에 구애받는 것이 매우 많기 때문에, 수령들이 받아들이기를 독촉하여 그치지 않고 있어서 간혹 봄이 되도록 창고를 봉하지 않기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창고를 열어야 할 때까지 창고를 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백료(百僚)들이 모두 모여서 이미 이런 말을 들었으니,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적발되는 대로 논죄(論罪)하게 하라. 해유에 구애받는 것은 마땅히 너그럽게 해야 된다."
하였다.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6일 갑술

월식(月蝕)이 있었다. 4경(四更)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의 좌집법성(左執法星)을 범하였다.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민원(閔瑗)·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지평으로 삼았다.

 

낙천군(洛川君)050)  의 혼사(婚事)를 김치만(金致萬)이 극력 사양했으므로, 다시 서종수(徐宗秀)의 딸로 정했는데, 서종수도 또 명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종수를 가둔 다음 엄교(嚴敎)를 내리고 특별히 종부시(宗簿寺)에 명하여 날짜를 가려서 행례(行禮)하게 하였다. 서종수는 곧 서명신(徐命臣)의 아비이다.

 

2월 17일 을해

경상도 감사 이기진(李箕鎭)이 특교(特敎)로 인하여 사은(謝恩)하고서도 오랫동안 사조(辭朝)하지 않았으므로, 특별히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보임(補任)하고 당일로 사조하게 하였다. 전 목사(牧使) 홍성보(洪聖輔)는 사조하라고 칙려(飭勵)한 뒤에도 움직일 뜻이 없었으므로,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그곳으로 귀양보내었다.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이때 임금이 여러 날 동안 비통(臂痛)을 앓았는데, 도제조 이하가 황단(皇壇)에 친제(親祭)하겠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신기(神氣)의 상태를 살펴보겠다고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다. 뒤에 대신이 잇따라 간쟁하니, 그제야 섭행(攝行)하도록 허락하였다.

 

조상경(趙尙絅)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는데, 묘천(廟薦)에 의한 것이었다.

 

2월 18일 병자

사헌부 【장령 홍득후(洪得厚)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홍경보(洪景輔)가 옥사(獄事)를 저지시키기로 마음먹고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하였으니, 일시적으로 가볍게 감죄(勘罪)하여 징계해서는 안 됩니다.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각사(各司)의 선생(先生)에 대한 치부(致賦)는 무고(無故)한 선생이 죽었을 경우 이를 대우하려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권익관(權益寬)과 같이 왕장(王章)을 도피한 자와 김중기(金重器)같이 역적을 모의한 정상이 낭자한 자들에게 병조와 총융청에서 조금도 지난(持難)하지 않은 채 일례(一例)로 출급(出給)했으니, 방자하여 기탄없는 것이 누군들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병조의 당상과 총융사는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김범갑(金范甲)·황욱(黃昱)이 선정(先正)을 무함하고 비난한 것이 한정이 없었으니, 방금 선정의 철식(腏食)을 일제히 청하는 때를 당하여 선정을 비난한 무리들을 다시 인류(人類)에 끼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승문원 정자 김범갑과 상서원 직장 황욱은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병조 당상과 총융사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집의 이광운(李光運)이 상소하기를,
"이조 판서 윤혜교(尹惠敎)는 추조(秋曹)에 갑자기 발탁되었을 적에도 이미 물정(物情)이 비등했었는데, 갑자기 전석(銓席)의 장(長)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등급을 뛰어넘어 점차적이지 않으니, 개차(改差)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실로 적격자라면 비록 당품(堂品)이 아니라도 가(可)한 것이다. 더구나 일찍이 아전(亞銓)을 역임하여 승진 발탁된 사람이겠는가? 진달한 내용은 지나친 것이었다."
하였다.

 

2월 19일 정축

지평 김상중(金尙重)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살기(殺機)가 먼저 움직이고 의망(疑網)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데, 일종의 당의(黨議)를 달갑게 여기는 자들은 오로지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을 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세를 헤아려 경영(經營)하면서 지휘(指揮)하고 승수(承授)함에 있어서 조사(朝士)만으로 부족하여 무신(武臣)에게까지 이르고, 무신으로도 부족하여 사문(斯文)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천하의 일이란 과격하면 반드시 난상(難狀)에 이르게 되는 것이어서, 말류(末流)의 폐해가 거의 신축년·임인년과 을사년·병오년에 가깝습니다. 한 명의 전장(銓長)을 논하려고 할 경우에는 그의 사어(私語)를 들추어내는 것에 불과하고, 한 명의 전장(銓長)을 축출하려 할 경우에는 물의를 핑계하는 것에 불과하니, 이것이 누가 전한 것이고 누가 증명한 것이며, 누가 창도한 것이고 누가 화응한 것입니까? 대저 주좌(籌坐)에서 주고받은 말에 대해서는 이미 대신이 변해하여 진달한 것이 있는데, ‘도정(道情)’이란 두 글자는 한결같이 어쩌면 그리도 본지(本旨)를 변환(變幻)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승진하여 발탁한 것이 너무 빨랐으면 어찌하여 추조(秋曹)에 제배(除拜)할 때 논하지 않았으며, 만일 전임(銓任)은 어렵게 여겨 신중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면 어찌하여 아석(亞席)에서 행공(行公)할 적에 논하지 않았습니까? 신은 대총재(大冢宰)를 개차(改差)하라는 청이 예전에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이 우려하고 개탄하는 것은 전하의 춘추(春秋)가 점차 높아져 감에 따라 지기(志氣)가 해이해져 칙려(飭勵)가 사의에 맞지 않고 권징(勸懲)이 정당하게 되지 않은 그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판에 대한 일을 논한 것이 옳다."
하였다.

 

2월 20일 무인

신치근(申致謹)을 사간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지평으로 삼았다.

 

2월 21일 기묘

박필재(朴弼載)를 교리로, 허옥(許沃)을 집의로, 조태언(趙泰彦)을 장령으로, 오원(吳瑗)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왕세자(王世子)가 병을 앓았으므로, 2품 이상과 육조(六曹)에서 문안하였다.

 

2월 25일 계미

헌납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여 윤유(尹游)가 인피(引避)한 것에 대해 잇따라 아뢴 것 때문에 또 홍경보(洪景輔)를 공척하고 이기진(李箕鎭)을 구호(救護)하니, 비답하기를,
"홍경보에 대해서는 이미 참량(參量)하였다. 이목관(耳目官)이 도리어 도신(道臣)을 비호하니, 놀랍다."
하였다. 지평 정준일(鄭俊一)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채응복(蔡膺福)은 정중하지 못한 피사(避辭)를 올렸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총융청에서 치부(致負)함에 있어 현고(現告)를 잘못 받아들였으니, 해당 승지는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오언주(吳彦胄)를 헌납으로, 심성희(沈聖希)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기진(李箕鎭)은 병이 있어 부임하지 못하고 있으니, 고의로 조정의 명에 항거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기진이 벼슬하지 않는 데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차라리 외직에 보임시켜 홍주(洪州)를 소생시키게 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성조(聖朝)에서는 버리는 인물이 없는 것입니다. 이양신(李亮臣)은 죄를 얻은 지 이미 10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아주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지난 일은 깊이 책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로 하여금 개과 천선(改過遷善)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윤유(尹游)는 고사(故事)를 잘 알고 있는데, 오랫동안 외방에 방치하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생각하고 있다."
하였다.

 

2월 26일 갑신

윤급(尹汲)을 부응교로, 유건기(兪健基)를 교리로, 박필균(朴弼均)을 수찬으로, 송징계(宋徵啓)를 부교리로 삼았다.

 

2월 27일 을유

하교하기를,
"위에 있는 사람이 비록 학문을 게을리하더라도 아래 있는 사람은 마땅히 이를 개도(開導)해야 되는 것이다. 나는 만학(晩學)을 한 사람으로 뜻이 학문의 강토(講討)하는 데 있는데, 근일 봄볕이 점점 길어지고 있으나 옥서(玉署)의 문은 길이 잠겨져 있어 법강(法講)을 열 기약이 없다. 한가한 여가에 경사(經史)에 대해 문의하려다가 침묵하고 그만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지난 사첩(史牒)에서 찾아보아도 어찌 이런 때가 있었겠는가? 홍경보(洪景輔)가 입직(入直)한 옥당(玉堂)을 기척(譏斥)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의리가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서로 패초(牌招)를 어기면서 사체만 손상시키고 있다. 새로 제수한 유신(儒臣)은 승정원에서 신칙(申飭)하여 즉시 명에 응하여 경연(經筵)을 열게 하라."
하였다.

 

2월 29일 정해

윤취함(尹就咸)을 사간으로, 박준(朴㻐)·신겸제(申兼濟)를 장령으로, 신수(申𢢝)를 지평으로, 남태량(南泰良)·김상석(金相奭)을 부수찬으로, 윤순(尹淳)을 홍문관 제학으로, 구수훈(具樹勳)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2월 30일 무자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조태언(趙泰彦)을 헌납으로, 윤경주(尹敬周)·신사관(申思觀)을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로, 이도원(李度遠)을 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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