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기축
국청 죄인 김재형(金載衡)·일우(一雨), 소정(小貞)의 차남(次男)인 최석후(崔錫垕), 설화(雪花)·문학(文學)·용색(龍色)은 모두 방송(放送)하고 이사언(李思彦)은 그전의 배소(配所)로 돌려보냈다.
3월 2일 경인
임금이 비통(臂痛) 때문에 침을 맞았는데, 2품 이상이 문안(問安)하였다.
3월 3일 신묘
이선행(李善行)을 집의로, 권굉(權宏)을 장령으로, 이중진(李重震)을 헌납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침을 맞았다.
사간원 【정언 윤경주(尹敬周)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원경순(元景淳)은 자신이 사관(史官)으로서 연석(筵席)에서의 이야기를 손수 기록하면서 국수(鞫囚)의 문서(文書)도 기입(記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스스로 변해(卞解)하는 소장이 또 국사(鞫事)가 완결되기 전에 나왔으니, 과연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면 무엇을 통하여 사전에 알 수 있었겠습니까? 국사(鞫事)를 함부로 전한 사람은 죄주지 않을 수 없으니, 금오(金吾)의 당상(堂上) 이하에게 자백을 받고 나서 무겁게 감죄(勘罪)하소서. 영남(嶺南)은 웅번(雄藩)이어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곳인데, 새로 제수된 감사 오원(吳瑗)은 문학(文學)과 아망(雅望)이 있어 극선(極選)을 두루 역임했습니다만, 이사(吏事)에는 마침내 미숙하니, 체차(遞差)시키소서. 대선(臺選)이 외람되고 난잡된 것은 실로 고질적인 폐단인데, 소견이 좁은 이경석(李慶錫), 한미한 이태징(李台徵), 줏대없는 송수겸(宋守謙) 등도 요행히 외람되게 그 지위를 차지하였으니, 모두 대망(臺望)에서 삭제시키소서."
하고, 전계(前啓) 가운데 윤유(尹游)의 일은 정지하였다. 답하기를,
"방백(方伯) 가운데 주군(州郡)을 두루 역임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에는 많이 있었다. 더구나 오원 같은 사람은 북주(北州)를 역임한 적이 있었으니, 어찌 전혀 이력(履歷)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은 문학과 지망(地望)도 있지 않은가?"
하였다.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도내(道內)에 있는 인재들을 천거하기를,
"이광정(李光庭)의 문한(文翰)과 박몽징(朴夢徵)의 독학(篤學)으로 끝내 일명(一命)을 받지 못했으니, 전후 도신들의 천문(薦聞)이 문구(文具)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안(禮安)의 이수연(李守淵)은 곧 선정(先正) 이황(李滉)의 6세손(世孫)으로, 가훈(家訓)을 정성스럽게 지키고 학식의 조예도 뛰어났으므로 재랑(齋郞)에 제수된 적이 있었습니다만, 버리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안동(安東)의 김세열(金世烈)은 평소 지조(志操)가 있어 곤궁한 것을 견디고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영우(嶺右)에서는 하덕망(河德望)·강성화(姜聖和)가 대신의 천문(薦聞)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안(比安)의 권빈(權䎙)은 지조와 행실이 매우 확고하고 학행(學行)을 겸비하였으며, 안음(安陰)의 신수이(愼守彝)는 학문과 행실이 정밀하고 독실한데가 재능도 갖추고 있으며, 금산(金山)의 조세붕(曹世鵬)은 명신(名臣) 조위(曹偉)의 후손으로 효우(孝友)와 행실이 한 고장의 추중(推重)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도내의 명망이 있는 선비들이니, 모두 똑같이 수록(收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영남은 사부(士夫)의 기북(冀北)051) 인데, 오로지 우도(右道)는 근래에 와서 풍습이 더욱 변천해진데다가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무리가 나왔기 때문에 추로(鄒魯)의 고장을 도리어 촉인(蜀人)052) 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특별히 진작(振作)시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자포 자기하여 글을 읽는 종자(種子)들이 영원히 끊기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영인(嶺人)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또한 조정의 근심이기도 하므로, 신이 널리 수집한 것은 실로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합천(陜川)의 강지은(姜趾殷) 같은 사람은 문학이 구비되고 자기(姿氣)도 강명(剛明)하여 무신년053) 에 의병(義兵)을 창도하여 수립한 공이 매우 탁월했으며, 같은 고을의 정희운(鄭熙運)은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으로 재식(才識)과 의행(懿行)에 고가(故家)의 풍도가 있는데, 무신년 난리 때 본군(本郡)에 글을 올려 비분 강개한 마음으로 적도를 칠 것을 청했으며, 거창(居昌)의 이휘(李暉)는 지극한 효성이 있고 기절(氣節)과 학식(學識)이 있는데, 무신년 난리를 당하여는 달려가 신정모(申正模)를 길에서 막아 의리를 분발하여 면책(面責)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 또한 마땅히 권장해서 발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서 감동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함창(咸昌)의 고 사인(士人) 채지면(蔡之沔)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경주(慶州)의 고 사인 한여유(韓汝愈)는 《대학(大學)》의 혈구변(絜矩辯), 《중용(中庸)》의 흑문(或問), 논선천괘변도(論先天卦變圖) 등의 학설을 저술하였는데, 대부분 스승의 지도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깊은 조예를 쌓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아서 벼슬하여 뜻을 시행해 보지 못하였고 죽어서도 그대로 매몰(埋沒)되었으니, 마땅히 추증(追贈)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진달하기를,
"고 명신(名臣) 조위(曹偉), 선정신(先正臣)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일찍이 숙종조(肅宗道) 때 벼슬과 시호를 더 추증하게 하였으며, 고 명신 곽재우(郭再祐)와 조종도(趙宗道) 때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의 3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삼가 은명(恩命)을 받지 못했으니,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명하여 거행하게 하고, 또한 그 자손들도 녹용(錄用)함으로써 선조(先朝)의 총전(寵典)을 마무리 짓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전조(銓曹)에 신칙하게 하였다.
경상도 경산(慶山)에 사는 어떤 여인이 하나의 죽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두 개의 머리에 각기 눈, 코, 귀, 목과 네 개의 팔을 갖추었으나, 가슴 이하는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두 입의 윗잇몸에는 각기 두 개의 이가 나 있었는데, 모양은 말의 어금니와 같았다.
3월 4일 임진
임금이 내관(內關)·곡지혈(曲池穴)에 침을 맞고 이어 뜸을 떴다.
3월 5일 계사
지평 신수(申燧)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평 정광운(鄭廣運)은 지망(地望)이 미천하고, 최규태(崔逵泰)는 향곡(鄕曲)의 출신으로 본디 가성(家聲)이 부족한 인물인데, 어떻게 조금 문예(文藝)가 있다 하여 갑자기 삼자함(三字銜)의 선발에 참여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제교(知製敎)는 모두 개정(改正)해야 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침을 맞았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치무(治務)에 대해 상의하였다.
3월 6일 갑오
비변사에서 윤광신(尹光莘)을 추천하여 평안 병사로 삼았다.
대제학(大提學)의 권점(圈點)이 있었는데, 4점을 받은 사람은 이덕수(李德壽)·조현명(趙顯命)·이재(李縡)이고, 3점을 받은 사람은 이병상(李秉常)·윤순(尹淳)이고, 1점을 받은 사람은 오광운(吳光運)이었다.
이덕수(李德壽)를 대제학으로, 송진명(宋眞明)을 이조 판서로, 윤유(尹游)를 예조 판서로, 윤혜교(尹惠敎)를 대사헌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지평으로, 신택하(申宅夏)·이도원(李度遠)을 부교리로 삼았다.
문학(文學)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 숙종조(肅宗朝) 때 연신(筵臣)들이 선행(善行)이 있는 옛사람을 그림으로 그려서 춘궁(春宮)에 올리도록 건청(建請)하여, 고 판서 김진규(金鎭圭)가 궁관(宮官)으로서 병풍에 그려서 올렸었는데, 이는 황명(皇明)의 곽도(霍鞱)가 그린 성공도(聖功圖)와 그 규례가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양정도(養正圖)·성공도를 본떠서 하나의 책자(冊子)로 꾸며 동궁(東宮)에 올려 평상시에 늘 보게 한다면, 반드시 문의(文義)를 강설(講說)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몸소 가르치는 방도에 대해 면려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그대로 따랐다.
3월 7일 을미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수(申燧)의 소장을 보건대, 최규태(崔逵泰)가 삼자함(三字銜)에 합당하지 않다고 대단하게 말하면서 개정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듣건대, 옛날 대제학으로 있던 이식(李植)이 지제교(知製敎)를 초선(初選)할 적에 서울의 명족(名族)들은 다 버리고 단지 향곡(鄕曲)의 글을 잘하는 사람 5, 6인을 뽑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국가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다.’ 했습니다. 신은 매양 이식의 이 말을 외고 있으면서도 이식이 한 것처럼 극진히 하지 못하고 단지 향곡 사람인 최규태 1인만 뽑았을 뿐입니다. 최규태는 영남의 거족(巨族)으로 일찍이 대직(臺職)을 역임했었으니, 신수의 말이 또한 지나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인재를 아낀다는 뜻은 옳다. 경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데 더구나 위에 있는 사람이겠는가?"
하고, 특별히 개정하라고 한 명을 정지하였다.
3월 8일 병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3월 9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조석명(趙錫命)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10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형복(鄭亨復)을 수찬으로, 임정(任珽)을 교리로, 한익모(韓翼謨)를 지평으로, 김시혁(金始㷜)·유엄(柳儼)을 승지로, 이병상(李秉常)을 판윤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간 이윤신(李潤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각(臺閣)에서 일을 말할 때에는 악(惡)을 배척하고 선(善)을 권장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있으나, 군자(君子)가 사람을 논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상세히 살피고 신중을 기하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정광운(鄭廣運)은 납언(納言)의 후손인데도 한미하다는 지목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임경관(任鏡觀)은 방백(方伯)의 후손인데도 차망(次望)의 통의(通疑)에서 배척당하였습니다. 사람의 지벌(地閥)을 상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경솔하게 저알(沮遏)을 가하였으니, 개정하라는 명은 도로 정지함이 마땅합니다. 김범갑(金范甲)의 문화(文華)와 지망(地望)은 어디를 간들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전후에 저지하고 배격하는 것은 그가 벼슬하기 전에 올린 한 소장이 가증스럽기 때문이며, 황욱(黃昱)의 음로(蔭路)인 말단 관직에 이르러서도 그 여파(餘波)가 뒤섞여 파급되었습니다. 사문(斯文)에 대한 쟁변(爭辨)은 전하께서도 조정으로 올리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으시니, 엄중한 내용으로 통렬히 배척하여 세도(世道)를 진정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정광운(鄭廣運) 등에 관해 진달한 데 대해서 처분(處分)이 있어야 하겠으나, 어찌 계속 다시 임용할 수가 있겠는가? 김범갑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3월 10일 무술
이명언(李明彦)·이하택(李夏宅)을 절도(絶島)에 나누어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명언·이하택을 위원(渭原)에 정배했었는데, 현기(玄機)의 공초(供招)에 나오기에 이르러 본부(本部)에 명하여 잡아다가 추국(推鞫)하게 하였다. 이하택에게 신문하기를,
"네가 역적의 공초에 긴요하게 나온 것이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옷속에 서찰을 숨긴 것만으로도 단안(斷案)이 되기에 충분하다. 여러 사람들의 계사(啓辭)에서 네가 역적의 괴수가 된다고 지목하여 금방 윤허했다가 즉시 정지시키는 까닭에 대악인(大惡人)이 법망을 빠져 나가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해정(海正)의 공초에 옷을 주고 유숙(留宿)하게 하여 적진(賊陣)을 왕래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모두 근거가 있는 것이니,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도록 하라."
하니, 이하택이 공초하기를,
"신이 무신년에 무함을 받은 것은 이일좌(李日佐)의 공초에 그런 실상이 없음을 갖추 말했고,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통촉하셨으며, 옥안(獄案)이 모두 남아 있는데도 오히려 긴요하게 나왔다고 하니, 아! 또한 너무합니다. 옷 속에 서찰을 숨겼다는 일은 손수 참여하여 쓰고서 연명(聯名)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때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으나, 모두 의심스러운 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뒤 시기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의서(擬書)를 가지고 의심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옷을 주고 유숙(留宿)하게 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채지홍(蔡之洪)이 상소하기를, ‘2월 그믐 무렵의 새벽녘에 어떤 사람 2인이 신과 함께 유숙하였는데 옷을 벗어서 주었다.’고 하면서 신의 비부(婢夫)인 해정(海正)을 증인으로 세웠습니다만, 신의 집을 하동(河東)에서 철거하여 청우(淸寓)로 돌아온 것이 2월 27일이었고 달이 작어서 다음날이 끝이었습니다. 이 하루 사이에는 비록 지친(至親)일지라도 오히려 미처 알 수가 없는 상황인데 무슨 왕래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집은 물의 남쪽인 서촌(西村)에 있고, 해정의 집은 성밑 저자 거리에 있으므로 대낮에 왕래하는 사람도 분변하여 알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이른 새벽이겠습니까? 채지홍이 또 말하기를, ‘집에 편안히 앉아서 역적과 왕복하였다.’ 했습니다만, 신은 변란(變亂)이 발생하던 날 밤에 이일제(李日躋)의 집과 서로 이웃인 우사(寓舍)에서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이일제가 밤에 좀을 보내어 급히 부르기를, ‘성중(城中)에 적변(賊變)이 발생하였으므로 나는 지금 피하여 산으로 올라간다.’ 하므로, 신이 놀라 일어나 창문을 열고 보았더니, 화광(火光)이 충천하였고 온 성중이 물끓듯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잠결에 창황히 목주(木主)를 짊어지고 가족을 이끌고 짧은 홑옷을 입은 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일제와 거기서 서로 만나 두 집이 허둥지둥 오리(五里)쯤 달려가다가 서운사(棲雲寺)라는 작은 절을 찾아서 자취를 숨기게 되었고 목주(木主)는 절 뒤에 묻었습니다. 이어 이일제와 함께 낮에는 숨고 밤에는 가고 하면서 어렵게 연기(燕岐)의 산골에 당도했다가, 적변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함께 돌아왔습니다. 당시 난을 피하여 나갔던 증거는 이처럼 환합니다. 그리고 신의 고향 집에 상량(上樑)한 것이 곧 3월 16일이었습니다. 신이 만약 통모(通謀)한 일이 있었다면, 어찌 흉적이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상량(上樑)하는 날로 잡아놓고 밤중에 피하여 달아났겠습니까? 청주(淸州)는 본래 적당(賊黨)에 대해 준엄한 고장이므로, 신에게 의심스러운 자취가 있었다면 반드시 기화(奇貨)를 얻은 것같이 여겼을 것인데, 이에 4년이 지난 뒤 비로소 산림(山林)의 사람을 빌어서 헛된 말을 만들어 내어 입증(立證)할 계책을 세우겠습니까? 고 상신 오명항(吳命恒)이 청주에 왔다가 사정을 상세히 듣고서 신의 부자(父子)를 위해 남김없이 신폭(伸暴)했던 것은 성명(聖明)께서도 반드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였다. 이명언에게 신문하기를,
"너는 신하로서 섬기지 않을 마음을 품은 지 오래 되었다. 갑진년054) 에 올린 한 소장은 이미 너무도 흉참한 것이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거취를 같이하겠다고 한 말은 그 심중을 숨기기가 어렵다. 먼 변방에 귀양가 있다가 방면되었는데도 머뭇거리면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미 의심스러운 단서가 많았다. 그리고 오래 폐기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었는데도 으레 올리는 소장을 진달하지 않아서 뚜렷이 헤아릴 수 없는 의도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지난번 연신(筵臣)들이 신하의 절개가 없다는 의논을 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부자(父子)의 이름이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고, 오랑캐의 옷을 입고 거사(擧事)하겠다는 이야기는 원래 갑자기 만들어 낸 말이 아니었으며, 서찰을 넣고 옷을 꿰맨 계책은 진실로 급박한 사태에 임하여 면하기를 도모할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너의 부자가 난만(爛漫)하게 동참한 일이 없었다면, 역적의 공초에서 끌어들이는 것이 어찌하여 이렇게 낭자하겠는가? 그리고 조세추(曹世樞)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말을 바꾸지 않은 것이 더욱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지금 현기(玄機)의 공초 내용에 무신년에 법망에서 누락된 적승(賊僧) 최학(最學)이 현기의 사승(師僧) 법훈(法訓)과 금강암(金剛菴)에 함께 거처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또 약과(藥果)를 만들어 너의 적소(謫所)에 보냈다고 하였으며, 너의 종 석남(石男)이 너의 서찰을 가지고 4, 5차례 왔었으며, 학승(學僧)이 소주(燒酒)·건잠(乾蠶)·약환(藥丸) 세 개를 사서 보내면서 이어 석남과 함께 같이 위원(渭原)으로 갔었다고 했다. 이런 전후 정절(情節)에 대해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라."
하니, 이명언이 공초하기를,
"신하로서 섬기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무슨 일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말을 들으니 곧바로 가슴을 갈라서 밝히고 싶은 심정이나 할 수가 없습니다. 갑진년 겨울에 올린 한 소장은 스스로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하면서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에 붙인 데 불과합니다. 역적 김일경과 거취를 함께 하겠다고 한 말은 무신년 겨울 신이 공초에서 남김없이 변파(卞破)한 것이 국안(鞫案)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귀양에서 방면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은 것과 으레 올리는 소장을 진달하지 않은 일은 신이 정미년055) 가을에 다행히 은유(恩宥)를 받았으나 그때 대간이 상소하여 배척하기를, ‘3년 동안 찬적(竄謫)시킨 것으로는 속죄(贖罪)하기에 부족하다.’고 했으므로, 감히 갑자기 돌아오지 못하고 두어 달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동말(冬末)에 이르러 변무(卞誣) 때문에 부사(副使)로 특별히 서용하고 역말을 보내어 불렀을 적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의(私義)를 가지고 소장을 진달할 경우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친다는 의리가 아닐 듯하여 감히 소장을 진달하지 못하고, 일을 끝내고 돌아온 뒤를 기다리려 했었는데, 이것이 도리어 죄가 될 줄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연신(筵臣)이 신하의 절개가 없다고 한 말은 사람들이 전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신이 사진(仕進)하지 않은 한 조항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물러가게 해주기를 청한 것은 선조(先朝) 때 있었고, 갑진년056) 사복(嗣服)한 처음에는 신이 잇따라 도헌(都憲)으로 있었고, 또 산릉(山陵)의 역사(役事) 때문에 조정에 나아갔으며, 일을 끝마치고 복명(復命)하고서야 비로소 진소(陳疏)하고 물러갔었습니다만, 대계(臺啓)가 이미 뒤따라 발론(發論)되었던 것입니다. 부자(父子)가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에 나온 것은 또한 무신년의 공초에서 이미 상세히 변해하였습니다. 오랑캐의 옷을 입고 거사하겠다고 한 말은 당초 조세추가 공초하기를, ‘부사(副使) 이가(李哥)가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사성(李思晟)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같이 오기로 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평안도의 군사를 오랑캐의 옷으로 입혀 꾸며서 오려 했다.’ 하였는데, 이른바 오랑캐의 옷이란 곧 역적 이사성의 흉도(凶圖)를 가리킨 것으로 신과는 전혀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성상의 하교에 ‘옥하관(玉河館)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의주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했으니, 오랑캐 옷을 입혀 거사하려고 했다는 말이 과연 이치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금부 당상이 신을 잡아오기를 청했을 적에 입시했던 대신들이 말하기를, ‘이미 조세추에게 형신을 가하도록 명하여 그것이 무고(誣告)라는 공초를 받아내었으니, 이제 와서 잡아오기를 청하는 것은 국체(國體)에 어긋난 처사입니다.’ 하였고, 성상께서도 하교하기를, ‘진실로 그렇게 해야 거의 일세(一世)의 의혹을 모두 없애게 될 것이다.’ 했는데, 대신(臺臣)이 이에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근거하여 발론한 것입니까? 옷에 서찰을 넣고 꿰맸다고 한 일에 이르러서는 신의 아들 이하택 한 사람이 스스로 변해할 것이 아니니, 이미 연명(聯名)하여 이를 한 사람이 있고 또 중간에서 전한 사람이 있는 것은 물론, 당초에 의서(擬書)를 올린 날 성상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자, 모두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통렬히 변해하였습니다. 대신들도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의심스럽다고 할 수 없으니 잡아온 도사(都事)가 소홀히 하였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했습니다. 당시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의심스럽다고 하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말입니까? 이른바 현기(玄機)·법훈(法訓)·학수좌(學首座) 등 이러한 흉악한 중들에 대해 신은 그들이 어떠한 흉적(凶賊)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신의 노자(奴子)에는 원래 석남(石男)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없으므로, 도사(都事)가 신이 위원군(渭原郡)에 바친 호적(戶籍)을 조사하여 보고도 끝내 비슷한 명자(名字)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이에 대노(代奴)를 잡아가지고 온 것입니다. 국옥(鞫獄)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따라서 그 사람이 없으면 중지해야 옳은 것인데, 대노(代奴)를 대신 수금(囚禁)한 것은 진실로 이미 의혹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원인(援引)한 석남(石男)이라는 사람이 이미 죄명(罪名)을 벗어났으니, 이른바, ‘가죽이 없는데 털을 어디에 붙일 수 있겠느냐?’는 격이 된 것입니다. 지난번 대신(臺臣)이 신을 황진기(黃振起)의 족척(族戚)이기 때문에 압록강 일대의 지역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천청(天聽)을 공동(恐動)시키기를 거의 급서(急書)를 올리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만일 성명(聖明)께서 깊이 살피지 않으셨더라면 신은 이미 고문(拷問)에 의해 죽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이명언에게 신문하기를,
"앞의 공초에서 역적 김일경이 거취를 함께 하려 했다는 말을 무신년의 공초에서 남김없이 변파(卞破)했다고 하였으나, 공초한 내용이 모호하여 끝내 분명히 이해할 수가 없다. 갑진년에 올린 한 소장은 지의(旨意)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범연하게 말을 끝까지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사(意思)인가? 무신년에 이르러서는 정의련(鄭宜璉)·조세추(曹世樞)·이시훈(李時薰)의 공초에 너의 이름이 나온 것이 이렇게 낭자하였다. 이시훈은 장상(將相)과 여러 재신들을 무고한 것을 곧 자복했으나 너에 대해서는 끝내 내용을 바꾸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공초에서, ‘성상께서 형신을 가하여 무고(誣告)했다는 공초를 받아내라는 하교가 있었다.’고 했으나, 그때 조세추는 처음부터 무고임을 자복한 말이 없었으니, 이것은 모두 네가 억지로 꾸며서 만들어 낸 말이다.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라."
하니, 이명언이 공초하기를,
"신이 무함을 받은 것은 본디 본말(本末)이 있습니다. 신의 부자(父子)가 함께 대륙(大戮)의 지경에 빠지게 되자, 원한을 품고 있던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시기를 이용하여 돌을 던졌기 때문에 박멸당할 화(禍)가 단지 종이 한 장 사이였으나 남다른 은수(恩數)를 베풀어 억울함을 환히 씻어 주셨습니다. 기유년057) 에 작처(酌處)하셨을 적에 특별히 환배(還配)시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만, 유사(有司)가 극력 쟁론하였던 탓으로 억지로 윤허하는 것을 면치 못했습니다. 당일 성교(聖敎)에, ‘그 사이가 얼마쯤 되는가?’ 한 말이 있었으므로, 외간에서 망령되이 오래지 않아 마땅히 사유(赦宥)받을 것이라고 전하였기 때문에 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시기와 의심이 점점 깊어졌던 것입니다. 신처수(申處洙)가 다시 전계(前啓)를 발론하자, 소장을 잇따라 올려 구무(構誣)하여 마지않았습니다마는, 3년 동안 윤허를 아끼셨습니다. 따라서 천청(天廳)이 더욱 아득해졌기 때문에 시의(時議)가 특별한 안건을 얽어내었고 초야(草野)와 대각(臺閣)에서 농간을 부려 화응(和應)하여 해정(海正)을 3차에 걸쳐 엄중히 신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끝내 그런 사실(事實)이 없었습니다. 지난 을묘년058) 신의 부자에 대한 대계(臺啓)의 비답에 매양 정론(停論)하기를 바라는 뜻을 보였기 때문에, 이석신(李碩臣)이 또 근거 없는 말을 가지고 발계(發啓)하였으며, 흉악하고 간교한 중이 또한 시상(時象)을 알고서 또 급변(急變)을 올렸으니, 스스로 늙어서 죽지 못하고 이런 한없는 치욕을 받게 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역적 김일경이 거취를 함께 하겠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무신년의 공초에서 이미 환히 변해하였습니다. 신이 만부(灣府)059) 에 있었을 때 보내었던 서찰에서도 취미(臭味)가 같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혹 함께 요석(僚席)에 나란히 있기도 했었습니다만, 대소의 언의(言議)를 반드시 구차스럽게 함께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가 금당(禁堂)으로 있었을 적에 김시발(金時發)이 죄인의 여서(女婿)라는 것으로 멋대로 전지(傳旨)를 저지시키고 승복하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곧바로 먼저 처단하려 했으므로 신이 유사(有司)의 직책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환수(還收)할 것을 청했었습니다. 따라서 역적 김일경의 의논과는 아주 같지 않았습니다.
갑진년 대상(大喪) 때 산릉(山陵)을 정하면서 김일경은 신릉(新陵)을 주장하였고, 신은 영릉(寧陵)의 구강(舊岡)을 주장했었는데, 과연 미견(微見)을 빈전(殯殿)에서 진달했다가 마침내 엄중한 하교를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역적 김일경의 제사(第舍)가 굉장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보고 귀신이 고명(高明)을 엿본다는 말로 공척하였더니, 그도 겸손하게 사죄하였었습니다. 역적 김일경이 대각의 탄핵을 받았을 때 신이 가서 위로하였더니, 김일경이 윤순(尹淳) 형제와 서로 미워하여 말하기를, ‘이들이 장차 나를 죽이려 한다.’ 하므로, 신이 책망하기를, ‘같이 조정에 있으면서 서로 곤경에 밀어넣으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김일경은 안색이 변하여 노여움을 품기는 했으나 신이 조정을 떠나는 날에 이르러서는 급류(急流)에서 용기 있게 물러나는 것을 훌륭하게 여겨 사람들을 대할 적마다 칭도(稱道)하기를, ‘신의 소장에 일이 있으면 몸소 달려가겠다.’고 했다고 하였으므로, 역적 김일경의 소장 내용에 과연 거취를 함께 하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5월에 진소하여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고, 김일경은 가을에 탄핵을 받고 쫓겨났으니, 일의 이동(異同)과 시기의 선후(先後)가 이러하였습니다. 갑진년에 올린 한 소장은 단지 충성을 바치기를 원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나마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신이 을사년060) 에 찬적(竄謫)된 것은 대체로 여기에 연유된 것인데, 신의 성명이 불행하게도 세 역적의 공초에 나왔으나, 당시 대신의 이른바 여러 역적들이 같이 이인좌(李麟佐)의 말을 들었는데도 각기 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은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면서 송도 유수(松都留守) 심공(沈珙)을 만나보았더니, 그의 말이 사형(舍兄)과 영공(令公)이 함께 이시훈(李時薰)의 공초에 나왔었으나 끝에 가서 같이 청탈(淸脫)되었다가 이어 남을 무고(誣告)한 것 때문에 복법(伏法)되었다고 했습니다. 심위(沈瑋) 같은 경우에는 성명 하나만 거론하지 않았으나 함께 청탈되었는데, 이제는 신의 이름 하나만 점출(拈出)하지 않았다 하여 무고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또한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세추에게 형신을 가하여 무고임을 받아내라고 한 명은 신의 억설(臆說)이 아닙니다. 대신이 연석에서 아뢴 것을 직접 들은 것입니다. 성상께서 매양 의주(義州)의 오랑캐 옷에 대한 말을 가지고 전후 연석에서 하교하신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뒤에 현기(玄機)가 거짓임을 자복한 공초에서 이명언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일찍이 위원(渭原)의 고봉사(高鳳寺)에 갔더니, 이명언의 아들이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절하지 않은 것에 노하여 궁둥이에 장(杖) 열 대를 쳤기 때문에 원한을 품고 이런 말을 지어냈습니다."
하였다. 국청의 대신들이 청대(請對)하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현기가 비록 무고했다는 것으로 자복했습니다만, 황적(黃賊)에 대해서는 끝내 의심이 있으니, 이미 방송(放送)시킨 죄수들을 다시 잡아오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이하택에게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하택의 부자는 10년 동안 대계(臺啓)에 올랐는데도 스스로 해명한 적이 없었으므로 내가 이로 인하여 물어서 결단하려 했었다. 국청에서는 어긋난 단서가 있은 후에야 형신을 청해야 하는 것인데, 이하택의 공초에 어떤 어긋난 단서가 있는가? 내가 이명언을 임사(任使)한 지 오래 되지 않았고, 이하택은 더구나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모르고 있으나, 결단코 시의(時議)에 따라 죽이지는 않겠다. 그대로 가두어 두고 작처(酌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재로가 또 굳이 청하여 마지 않으니, 임금이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이르기를,
"내가 이 일로 인하여 채지홍(蔡之洪)을 잡아다 국문하려 한다. 이하택의 일을 대질시켜서 이하택이 굽힘을 당하면 마땅히 형신을 허락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채지홍은 들은 것으로 인하여 소장을 진달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하택은 곧 피고(被告)이고 채지홍은 곧 원고(原告)이다."
하였다.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에 말하기를,
"당시에 채지홍에게 묻지 않았으면 국체(鞫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하택이 장서(藏書)는 나라를 위해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방략(方略)이라고 일컬었으면서도 도리어 이를 죄장(罪贓)으로 삼고 있다. 무신년에 나유(羅煣)가 역적의 전령(傳令)을 받고 이를 관(官)에 정고(呈告)하려 할 즈음에 관군(官軍)에게 체포되었다고 핑계대었는데, 정고하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취신(取信)할 수 있기에 지난번 채지홍이 장두(狀頭)가 되어 신변(伸辨)하고 나섰는가? 채지홍은 하나인데 나유에 대해서는 영구(營救)하고 이하택에 대해서는 발고(發告)하는가? 해정(海正)을 끌어들여 국문한 것은 결코 유자(儒者)의 일이 아니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죄인 현기(玄機)는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했다는 것으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임금이 이명언·이하택은 당연히 전의 배소(配所)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니, 좌의정 김재로는 극력 저지하였고, 우의정 송인명은 임금의 뜻이 결단코 죽이지 않는 쪽으로 굳어진 것을 알고서 죽여야 한다고 의논하면서도 말에 불분명한 점이 많았다. 호조 참의 김약로(金若魯)가 이 점에 대해 자못 심하게 비난하니, 송인명은 사죄하기를 마지 않았다. 풍원군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은 항상 이명언 부자에 대해 그 죄가 경중(輕重)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명언이 임인년 무렵에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죄를 감싼 것에 대해서는 그 죄를 이루 다 셀 수 없고, 갑진년의 한 소장 또한 너무 흉패(凶悖)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신년 역적의 공초에 거론되었을 적에는 여기에서 쾌히 벗어났으므로 추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현기(玄機)가 끌어들인 까닭에 잡아다 국문했는데도 실상이 없다면, 또 전의 소장에 대한 일을 원인하여 장살(杖殺)하는 것은 형벌을 신중히 심의하는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하택의 일은 진실로 의심스런 단서가 많으니, 마땅히 해정(海正)의 공초와 같은 곳에서 참핵(參覈)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제 해정이 이미 죽었으므로 대질시킬 계제가 없으니, 형배(刑配)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갑진년의 소장 내용은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하겠는데, 왕년에 내가 시배(時輩)들에게 속았었기 때문에 이명언의 의도는 나에게 옹립(擁立)하는 일로써 덕으로 여기지 말라고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니, 이것은 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옛날의 임금은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경우가 많았는데, 내가 저사(儲嗣)로 들어온 날 이미 대략 이런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두었었다. 내가 반드시 이명언을 살리려는 것을 이명언은 반드시 모를 것이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인자(仁者)의 마음이겠는가? 내가 비록 현명하지는 못하지만, 오늘은 결코 경들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에 따르지 않겠다."
하였는데, 임금의 말과 안색에 자못 노기(怒氣)가 있었다. 이어 전교를 쓰기를 명하고서 이르기를,
"당초에 윤허하지 않은 것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현기가 무고했음을 이미 자복했으니, 일이 이미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갑진년에 올린 소장 내용이 비록 몹시 패려하였다 하더라도 그 몇 년의 일 때문에 찬배(竄配)를 겪었는데, 이제 또 극률(極律)을 시행한다면 어찌 왕정(王政)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국체(鞫體)는 막중한 것이므로 다만 원찬(遠竄)만 시행할 수가 없으니, 이명언을 해도(海島)에 정배하도록 하라."
하고, 또 전지(傳旨)하기를,
"죄인 이하택의 옷 속에 서찰을 넣고 꿰맸다는 일에 대해서는 무신년 친국(親鞫) 때 이미 하교하였었는데, 양사(兩司)에서 해를 넘기면서 쟁집(爭執)하고 있으나, 오히려 지금도 윤허하지 않는 것은 이 국사(鞫事)로 인하여 공사(供辭)를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공사에 또한 어긋난 단서가 없었다. 하지만 적중(賊中)에 전갈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수상한 데에 관계되니, 또한 해도(海島)에 정배하되, 대정현(大靜縣)·정의현(旌義縣)에 나누어 정배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이 근래에 듣건대, 춘궁(春宮)에 입견(入見)하는 의관(醫官)들 가운데 사여(賜予)를 청하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국조(國朝)의 예법은 매우 근엄한 것인데, 이 무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런 일이 없다. 단지 지난번 의관들에게 희롱삼아 낙죽(酪粥)을 준 일이 있었고, 의관들 또한 감귤의 하사를 청하여 그 대답을 살펴보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좋은 뜻이었다. 그러나 습관으로 굳어지기 쉬운 것이니,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수어사 조상경(趙尙絅)이 진백(陳白)하기를,
"본청(本廳)의 아병(牙兵) 가운데 호서(湖西)에 있는 사람들을 사천(私賤)으로 환정(換定)한 것이 많아서 양병(良兵)이 점차 감소되고 있으므로, 군제(軍制)가 모양을 이룰 수 없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송인명은 말하기를,
"수어청에 소속된 오영(五營) 이외에 호서의 경우는 본디 정군(正軍)이 아니므로 쌀을 거두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양군(良軍)은 12두(斗)를 거두고 사천(私賤)은 6두(斗)를 거두기 때문에, 갑인년061) 에 양정(良丁)을 감소시키기는 어렵다 하여 양군(良軍) 1천 명 대신 사천(私賤) 2천 명을 본영(本營)에 주었으니, 조금도 방해되는 것이 없습니다. 의당 버려두어야 합니다."
하고, 좌의정 김재로는 말하기를,
"양병(良兵)이 결국 사천(私賤)보다 낫습니다. 사천은 명수(名數)가 배나 되지만 한갓 군제(軍制)만 문란시킬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사천을 군사로 만들어 그 액수를 배로 증가시킨다면, 주인을 배반한 사노(私奴)도 모두 여기에 투속(投屬)할 것인데, 이런 무리를 장차 어디에다 쓰겠는가? 호서의 아병은 마땅히 혁파해야 한다면 혁파하고, 혁파하지 않아야 한다면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양군은 역시 사천으로 액수를 증가시켜서는 안된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호서에 아병을 둔 것은 고제(古制)가 아니고 곧 역적 김일경이 처음 만든 것이니, 마땅히 혁파해야 합니다. 더구나 군대는 정예로운 것이 귀한 것이요 많기를 힘쓸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역적 김일경이 처음 만들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처음 만든 일이 나라에 이로우면 어떻게 폐지할 수 있겠는가? 한신(韓信)은 군병은 많을수록 더욱 좋다고 했으니, 또한 많기를 힘쓰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특별히 판윤 유척기(兪拓基)를 경상도 관찰사로 보임(補任)하였다. 이는 유척기가 출사(出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월 11일 기해
사헌부 【지평 한익모(韓翼謨)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명언 부자의 마음은 길을 가는 사람도 알고 있는 것인데, 국가에 법이 없어서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처(酌處)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대저 현기(玄機)가 비록 무고했다고 자복하였습니다만, 조세추(趙世樞)의 무리의 공초(供招)에서는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갑진년에 올린 소장은 전혀 신하의 절개가 없는 것이었는데도 세월이 오래 되어 기억할 수 없다고 핑계대었고, 옷 속에 넣고 꿰맨 서찰은 이것이 간장(奸贓)임이 분명한데도 주머니를 차지 않았다고 한 말에서 더욱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옷을 증여한 한 조항은 완전히 숨길 수가 없으니,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그대로 엄중히 국문하여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3월 12일 경자
이종백(李宗白)을 대사간으로, 송질(宋瓆)·박이문(朴履文)을 장령으로, 송징계(宋徵啓)·민택수(閔宅洙)를 정언으로 삼았다.
3월 14일 임인
별시 전시(別試殿試)를 설행하여 교관(敎官) 홍계희(洪啓禧) 등 6인을 뽑았다. 이현필(李顯弼)이 그 가운데 들었는데, 뒤에 이현필은 삭과(削科)되었다.
3월 15일 계묘
임금이 숙빈묘(淑嬪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3월 17일 을사
음관(蔭官) 박사백(朴師伯)·이강중(李剛中)을 가주서(假注書)로 삼았다. 이는 문신(文臣)이 중시(重試)에 모두 응시하면 으레 음관 가운데 명칭(名稱)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임시로 차임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정언 민택수(閔宅洙)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명언 부자의 역절(逆節)은 이미 환히 드러났습니다. 역적 김일경이 거취를 함께 하겠다고 한 말과 이인좌(李麟佐)와 서로 왕복한 일만 가지고도 신문을 기다릴 것 없이 단안(斷案)을 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현기가 무고임을 자복했지만 그의 본죄(本罪)를 돌아본다면 그것은 진실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현기가 무고임을 자복한 일절(一節)에 대해서는 국수(鞫囚)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반문(盤問)하는 즈음에 갑자기 나왔으니, 그가 심복(心腹)들을 포열(布列)해 놓고 은밀히 옥정(獄情)을 탐지한 정상이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니다. 이명언·이하택을 도배(島配)하라는 명령을 도로 정지하고 그대로 엄중히 신문하여 왕법(王法)을 흔쾌히 바루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8일 병오
응교 윤심형(尹心衡) 등 8인이 모두 패초(牌招)를 어기니, 하교하여 책망하기를,
"홍경보(洪景輔)를 장차 중률(重律)로 다스린 뒤에야 사은(謝恩)하겠는가?"
하고, 모두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문신(文臣)의 중시(重試)를 설행하여 정자 이섭원(李燮元), 정랑 목시경(睦時敬), 교리 윤급(尹汲), 사간 유시모(柳時模), 사예 최익수(崔益秀), 교리 임정(任珽), 지평 권신(權賮), 현감 박성형(朴成珩) 등 8인을 뽑았다. 병년에는 으레 중시와 유생(儒生)의 별시를 설행하는 것인데, 작년에 경과(慶科)가 있었으므로 이때에 와서 물려서 거행한 것이었다.
3월 21일 기유
윤용(尹容)을 승지로, 김유경(金有慶)을 대사헌으로, 윤혜교(尹惠敎)를 공조 판서로, 심성진(沈星鎭)을 교리로, 오언주(吳彦胄)를 수찬으로,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을 주청 정사(奏請正使)로, 유엄(柳儼)을 부사로, 이철보(李喆輔)를 서장관으로, 이흡(李潝)을 전광 관찰사(全光觀察使)로 삼았다.
3월 22일 경술
이철보(李喆輔)를 사간으로, 신사경(申思冏)을 공홍 병사(公洪兵使)로 삼고, 전 교리 임정(任珽)·전 사간 유시모(柳時模)에게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3월 25일 계축
경기의 부평(富平) 등 16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 하였다.
3월 26일 갑인
임정(任珽)을 승지로, 홍창한(洪昌漢)을 지평으로, 조명겸(趙明謙)을 겸 문학으로 삼고, 윤급(尹汲)에게 통정 대부를 가자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급제(及第) 이현필(李顯弼)이 고관(考官)과 사사로운 친분이 있어 직언(直言)으로 반드시 합격할 계책을 세울 것을 바라고는 대책(對策)의 편두(篇頭)에서부터 전적으로 임금의 과실을 말하였는데, 말에 패만(悖慢)한 것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마음속으로 미워하였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신(群臣)을 대할 적마다 수심에 잠겨서 즐거운 빛이 없었으므로 조정이 두려워하여 어수선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나아가 아뢰기를,
"이번에 이현필이 대책(對策)에서 전적으로 성궁(聖躬)을 공척했는데, 예로부터 책규(策規)는 반드시 폐단에 근원하여 군덕(君德)을 논하면서 숨김없이 직절(直截)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그렇지 않고 편수(篇首)에서부터 종편(終篇)에 이르기까지 조목별로 궐실(闕失)을 논열(論列)했는데, 간혹 사실과 틀린 것도 있었고 억측에 관계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가리지 않고 썼는데, 고관(考官)이 이를 뽑은 것은 숨김이 없이 아뢴다는 문을 열려고 한 것에 불과하지만 신은 이 일로 인해 크게 뒷날의 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의 말이 그릇되고 망령된 것이야 성덕(盛德)에 무슨 손상이 있겠으며, 또한 어찌 연충(淵衷)에 개의(介意)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근일 성상의 사교(辭敎)가 화평함을 잃고 상하가 막혀 있으며 성의(聖意)에 맺힌 것이 있는데도 발설하지 않는 것 같은 점이 있으니, 뭇신하의 우민(憂悶)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분명한 하교를 내리소서."
하고, 우의정 송인명은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게 시사(試事)를 관장했었는데, 이에 이런 일이 있게 되었으니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신이 그의 글을 상세히 살펴보았더니 두 조항이 가장 눈에 걸렸습니다만, 어찌 털끝만큼이나마 성덕에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 하나는 봉작에 대한 일인데, 경술년062) 의 국휼(國恤)063) 이 경자년064) 과 달랐던 것은 군신의 복제에 불과했으니, 작품(爵品)을 전례에 의거하여 승배(陞拜)한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또 하나는 복성(卜姓)에 관한 일인데, 우리 조정은 본디 예의지방(禮義之邦)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만, 성이 같고 본관이 다른 경우의 혼인은 선배·명현들 사이에도 많이 있어 왔습니다. 신의 외조(外祖)인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은 시례(詩禮)의 대가로서 유현의 법도가 되었습니다만, 외조모도 성이 이(李)씨였으며, 고 상신 김우항(金宇杭)도 내외(內外)가 같은 성(姓)이었는데, 이밖에도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근래의 사대부들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점을 말하는 것을 힘써 명절(名節)로 삼고 있으므로 이 일이 연석(筵席)이나 소장(疏章)에서 여러 번 발론되었는데, 그 사람이 혹 다른 일로 인하여 성지(聖旨)에 거스름을 받으면 문득 성상께서 이 말을 들은 것을 싫어하는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나마 과감히 말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번 고관(考官)들 가운데 이현필(李顯弼)의 글을 뽑을 수가 없다고 한 이가 많았습니다만, 신이 문득 생각하건대, 이 글이 비록 척출(斥黜)된다 하더라도 사자(士子)들이 반드시 그 내용을 전파할 것이니, 차라리 선입(選入)하여 성상께서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덕을 드러내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 결국 선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번 한숨을 쉬면서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경들이 한 말은 가려운 곳을 긁은 것과 같다. 내가 일찍이 임금의 자리를 찬탈하려 하는 역적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여겼으니, 임금이 되면 무슨 즐거운 것이 있는가? 필부(匹夫)는 오욕을 받으면 반드시 이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남의 말을 듣고 스스로 변해하려고 하면, 문득 용납하여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니, 평일 원통한 마음을 눌러 삼킨 것이 임금 같은 경우가 없는 것이다. 나는 성품이 조급하여 실정 외의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견디지 못한다. 경들이 분명한 하교를 내릴 것을 청하고 있지만, 내가 말을 하면 반드시 변명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니,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 이번에 정문(庭問)한 것은 백성을 구제할 방책에 대해 듣고 싶었는데, 이에 이현필에게 욕을 당하였다. 무신년의 난(亂)을 겪은 뒤로 변괴 또한 고루 겪었기 때문에 마음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 한 사람이 붓으로 쓰는 것은 용이한 것이지만 뒷날의 폐단은 마땅히 어떤 지경에 이르겠는가? 현빈(賢嬪)을 간택할 적에 국가를 위하여 연장자(年長者)를 얻으려 했었고, 또 그 부형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풍릉(豐陵)의 집으로 정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자못 다행스럽게 여겼었다. 그리하여 송신(宋臣)이 아뢴 네 조항을 제목으로 걸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더니, 우생(優生)들 가운데 글을 짓지 않은 사람이 많았는데, 그 의도가 이상하였다. 경술년065) 옥사(獄事) 때 정순명(鄭順明)이란 자가 여러 번 해괴한 말을 했었는데, 그뒤 밤중에 내린 하교(下敎)를 여러 신하들이 상세히 듣지 못하고서 한바탕 광요(劻撓)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를 보면 세도(世道)를 알 수 있다. 지나간 해에 유언국(兪彦國)이 절일제(節日製)의 시권(試券)에, ‘부마(駙馬)의 혼례(婚禮) 때 그 동리(洞里)에 들어서니 이미 술과 고기의 냄새가 났다.’ 했는데, 그의 말이 지나치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발탁하여 급제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여 보니 거자(擧子)들이 위에서 하는 것을 보고 신기(新奇)하게 하기를 힘쓴다면, 뒷폐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정지했었다. 그러나 우상(右相) 풍원(豐原)이 이름 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면하지 못하겠으므로 이 글을 뽑았던 것이다.
신해년066) 의 정대(庭對)에서는 내가 직언(直言)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더니, 이광덕(李匡德)이 말하기를, ‘후궁(後宮)의 봉작(封爵)에 관한 일을 말했으나 떨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으며, 고 상신 이집(李㙫)은 단지 말하기를, 그 글은 격식에 어긋나서 빼버렸습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진실로 아름다웠다. 왕년에 이병태(李秉泰)가 유신으로 처음 연석(筵席)에 올라와서 이 일에 대해 말하기를, ‘이 뒤로는 복성(卜姓)하시기 바랍니다.’ 했는데, 내가 가납(嘉納)했었다. 이 봉조하(李奉朝賀)가 뒤에 그 말을 듣고 이병태를 명신(名臣)이라고 했으니, 내가 어찌 이 말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이제 방중(榜中)의 성씨를 살펴보건대, 이사관(李思觀)의 외조도 성이 이(李)씨이다. 봉작(封爵)한 일에 이르러서는 지금 바야흐로 종사(螽斯)067) 의 경사가 있기를 크게 바라고 있기 때문에 분만하기 전에 봉작한 것은 실로 종사(宗社)를 위해 연매(燕禖)068) 하는 뜻에서 나온 조처로서, 새로 선발된 후궁(後宮)에게 한 것과 같은 경우가 아니다. 내가 듣기 싫어했다면 이광덕(李匡德)을 또한 어찌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발탁해서 임명했겠는가? 다만 오늘날의 사체는 전과 다른 점이 있는데, 신하가 되어 어찌 다시 거론할 수가 있겠는가? 궁인(宮人)을 선발하여 들이는 것에 이르러서는 내가 본디 이런 일을 좋아하지 않는데, 지난번 자전(慈殿)께서 면전(面前)에서 부릴 사람을 초입(抄入)하라는 명이 있었고 대신의 말이 있었으므로, 내가 우러러 동조(東朝)께 핑계대고 싶지 않아서 곧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제 이현필이 이를 주차(周遮)069) 라고 하였으니, 곧 한낱 가소로운 일이다. 별군직(別軍職)에 사정(私情)을 썼다는 이야기는 더욱 무상(無狀)한 말이다. 나의 외친(外親)에 대해서는 경들도 응당 알고 있는데, 어찌 이 직임에 합당한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또한 임명한 적이 없다. 이밖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가? 이현궁(梨峴宮)에 대한 일은 탁지(度支)를 번거롭히지 않으려는 뜻으로 일찍이 하교한 적이 있었고, 예전대로 수보(修補)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는 사친(私親)을 깊이 생각하는 뜻에서 나온 조처인데, 이 일 또한 사의(私意)에 돌렸으므로 지금까지 마음에 맺혀 있다. 그런데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뒤로는 왕자(王子)·왕녀(王女)가 초사(草舍)나 토막(土幕)에서 살더라도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려 목이 메어 울며 말하기를,
"내가 평일에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으면 털어버리지 못하였으므로, 근일에 목구멍에 환약만한 담(痰)이 엉겨 있다. 임금 노릇하기가 참으로 또한 괴롭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고 난 다음 다시 입시한 승지 김응복(金應福)을 불러놓고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지금까지 참아 온 것은 불평을 가슴속에 쌓아 두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듣건대, 까마귀와 소리개가 상처를 받으면 봉황(鳳凰)이 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현필을 아껴서가 아니라 참으로 정직한 선비를 아끼고자 하는 것이다. 나 또한 어찌 이름 내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잠시 전에 대략 하교했지만 모호하고 빠뜨린 점이 있었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만일 이현필을 참으로 직언(直言)하는 선비로 여기고 나를 허물을 변명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도리어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다시 이렇게 하교하는 것이니, 기거주(起居注)는 그 일을 상세히 기록하도록 하라. 첫머리의 두 조항에 대해서 나는 소홀하게 여겼으나, 대신들은 자못 신중하게 보았다. 조신(朝臣)이 말하였으니 진실로 직언(直言)이 되겠지만, 이 말이 점차 옮겨져서 전파된다면 오히려 무궁한 근심이 있게 될 것이다. 이병태(李秉泰)의 말도 첫 번째는 옳았으나 두 번째는 옳지 않았었다. 더구나 지금의 사체는 전보다 크게 다른데 어떻게 감히 번번이 거론하여 언급할 수가 있겠는가? 아들 동(同)이 태어났다[子同生]'로 출제(出題)한 것은 곧 경솔한 것이었는데, 호남의 유생들은 오히려 깊이 살펴보고 직언하려 했으니, 어쩌면 지존(至尊)을 위하여 휘(諱)하는 의리가 그리도 없는가? 이들 무리가 반드시 옥하(屋下)에서 사사롭게 이야기하면서 항상 전설(傳說)했기 때문에 그러하였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실은 세도(世道)를 깊이 생각해서인 것이다.
사친(私親)의 궁(宮)에 대한 일은 선조 때 태조(太祖)의 어필을 봉진한 것이 있었는데, 이를 옹주(翁主)에게 하사하자, 상신 서종태(徐宗泰)가 이로 인하여 진계(陳戒)했으므로 여기에 감동되어 마침내 하교했던 것이다. 이는 사친의 궁이 세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이 또한 사친의 구궁(舊宮)이기 때문에 왕녀(王女)에게 하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속담에도 ‘노래가 아무리 좋아도 늘 들으면 싫증이 난다.’고 했는데, 이 일이 정대(庭對)하는 글에 오르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개연(慨然)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저 음식과 여색은 사람의 본성(本姓)이니,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내가 젊었을 적에 오랫동안 시탕(侍湯)하면서 궐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근래 광식(廣植)의 말에서도 감동을 받았다. 마침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고 봉작한 일이 있었는데, 6백 명의 궁인(宮人)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한 이야기는 진실로 나의 본심이 아니었다. 자전(慈殿)께서 혹 궁인을 초입(抄入)하게 하시면서도 매양 하교하시기를, ‘만세 후에는 마땅히 모두 방송하라.’고 하셨다. 이현필도 반드시 궁인이 어느 궁전으로 예속되었는가를 알았을 것인데, 오히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호판과 별군직에 대한 일을 마치 궁중에 사경(私徑)이 있는 것처럼 말하였으니, 진실로 통분스러운 일이다. 호판을 전조로 옮긴 것은 본래 특이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별군직에 제수된 자가 또한 많았는데, 그 가운데 이세기(李世琦) 같은 자가 있었던 것은 반드시 그의 성이 이(李)이기 때문에 후궁의 족속이 되는 것으로 의심했겠지만, 마침 그의 거주지를 물어보았더니, 곧 강상(江上)에 사는 사람이었다. 송(宋)나라 때 왕소(王素)는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은 이름을 모르는 사람으로 쓸 것을 청하였었다.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은 매우 엄중하여 전대(前代)보다 훨씬 뛰어난 때문에 원래 이런 폐단이 없었다. 내가 비록 부덕하다 하나,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향낭(香囊)에 대한 일 또한 가소로우니, 풍원(豊原)이 이름 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여항의 사람들은 의복이 아름답지 않으면 그 허물을 가모(家母)에게 돌리지만, 대내(大內)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각기 관장하는 곳이 따로 있기 때문에 중궁(中宮)은 알 바가 아니다. 더구나 향낭은 본래 상방(尙方)에서 직조(織造)하는 것이겠는가? 내가 처음에는 그 글을 향유(鄕儒)가 지은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개탁하여 보니 곧 이현필이 지은 것이었다. 이는 오로지 교묘한 방법으로 과제(科第)를 점유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심술(心術)을 볼 수가 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현필(李顯弼)이 송인명(宋寅明)에게 아첨하여 붙좇아 항상 야밤에 왕래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상문(相門)의 압객(押客)이라고 하였다. 송인명도 항상 말하기를, ‘익경(翊卿)070) 을 이조 참의로 삼는다면 나의 일은 성취된 것이다.’ 하였으니, 그들의 친밀함이 이러하였다. 장시관(掌試官)이 됨에 이르러서는 이현필의 시권(試券)이 서두에서 끝편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과실을 논하면서 작은 일까지 낱낱이 거론하였는데, 그는 본래 글재주가 없어서 그 내용의 구성이 비루하고 졸렬한데다가 간간이 패만(悖慢)한 것도 많아서 거의 여항(閭巷)의 사람들이 서로 꾸짖으면서 욕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고관(考官)들 가운데 뽑지 않으려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송인명이 유독 개연(慨然)한 작태를 지으면서 고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지위가 여기에 이르도록 하고 싶은 말을 아직도 감히 죄다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거인(擧人)이 이에 이렇게 하였으니, 어찌하여 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조현명(趙顯命)은 기괄(機括)이 숨겨져 있는 줄도 모르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상공(相公)의 말이 사람을 감복하게 합니다.’ 하고, 드디어 고제(高第)에 올리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감히 다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방방(放榜)하자 온 세상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현필이 시장(試場)에 들어가기에 임하여 밤을 틈타 정승의 집에 갔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글 가운데 송인명이 아뢴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매우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외인(外人)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의 송인명이 가르쳐 준 것으로 여겼다. 또 지부(地部)071) 의 하리(下吏)를 불러 묻기를, ‘성상께서 근래에 대내(大內)로 들여간 사재(私財)가 있는가?’ 하였는데, 반드시 이를 기록하여 주었을 것이다. 세상에 어찌 권세가 붙좇아 종처럼 굽실거리는 비굴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 정직한 도리로 임금을 섬겨 할 말을 다하여 극력 간(諫)하는 선비가 될 수 있겠는가? 그 글의 내용을 보면 오로지 한마디 말이라도 준엄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한 가지 잘못이라도 혹시 빠뜨릴까 염려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특이하게 드러내고자 안간힘을 썼으니, 비록 하고 싶은 것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믿는 데가 있지 않고서는 절대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 통분스러운 일이다. 이때를 당하여 이현필의 눈에는 단지 한 번 급제(及第)하는 것만 보였을 뿐이고 임금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송인명이 동류를 끌어들이기에 급급하여 은밀히 마음을 써서 직언(直言)을 칭탁하여 선발함으로써 일세(一世)의 입을 막은 것은 그 정상이 이현필보다 더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시론(時論)을 붙좇아 아첨하는 무리들이 앞다투어 일어나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어찌 직언한 것 때문에 죄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틈을 엿보고 있던 한편의 무리들은 날뛰며 서로 축하하면서 또 이를 이용하여 경알(傾軋)하려 하였으며, 또 일종의 향원(鄕愿)072) 들은 의논하기를, ‘이현필의 마음은 가증스럽지만, 만약 이로 인하여 죄를 받는다면 숨김 없이 다 말하게 하는 문을 여는 방법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과연 참으로 정직한 선비가 있다고 한다면, 어찌 권문의 압객(押客)이 등과(登科)를 훔치려다가 죄를 얻은 일 때문에 드디어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이 저지당할 것이겠는가? 더구나 인심이 날로 패멸되고 강상이 날로 무너지는 때를 당하여 진실로 분수를 범하는 일을 꺼리지 않고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성취시킨다면, 그것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상서롭지 못한 것이 되는 것이 진실로 무궁할 것이다. 그리고 임금의 마음속으로 장차 사대부들의 이른바 직언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욕망하는 것이 있어서 발설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간언을 올리는 길이 이 때문에 폐색(閉索)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국가의 폐해와 사대부들의 수욕(羞辱)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이현필에 대해서는 그 급제를 삭제시키고 죄줄 것을 청하는 것이 옳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43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정론(政論) / 가족(家族) / 군사(軍事) / 풍속-예속(禮俗) / 역사-사학(史學)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註 062] 경술년 : 1730 영조 6년.[註 063] 국휼(國恤) : 경종비 선의 왕후(宣懿王后)가 승하한 일을 말함.[註 064]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065] 경술년 : 1730 영조 6년.[註 066] 신해년 : 1731 영조 7년.[註 067] 종사(螽斯) : 《시경(詩經)》 주남편(周南篇)의 종사장(螽斯章)을 가리키는 것으로, 종사는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인데 한꺼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고 함. 곧 왕실 자손의 번영을 뜻하는 말임.[註 068] 연매(燕禖) : 매(禖)는 아들을 기구(祈求)하는 것이고, 연(燕)은 양(陽)을 가려서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니, 따라서 제비가 오는 날에 이를 행하는 것을 말함. 곧 아들을 구하는 말로 쓰임.[註 069] 주차(周遮) : 말이 많은 모양.[註 070] 익경(翊卿) : 이현필의 자(字)이다.[註 071] 지부(地部) : 호조(戶曹).[註 072] 향원(鄕愿) : 시골에서 군자(君子) 소리를 듣는 위선자.
사신은 말한다. "이현필(李顯弼)이 송인명(宋寅明)에게 아첨하여 붙좇아 항상 야밤에 왕래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상문(相門)의 압객(押客)이라고 하였다. 송인명도 항상 말하기를, ‘익경(翊卿)070) 을 이조 참의로 삼는다면 나의 일은 성취된 것이다.’ 하였으니, 그들의 친밀함이 이러하였다. 장시관(掌試官)이 됨에 이르러서는 이현필의 시권(試券)이 서두에서 끝편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과실을 논하면서 작은 일까지 낱낱이 거론하였는데, 그는 본래 글재주가 없어서 그 내용의 구성이 비루하고 졸렬한데다가 간간이 패만(悖慢)한 것도 많아서 거의 여항(閭巷)의 사람들이 서로 꾸짖으면서 욕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고관(考官)들 가운데 뽑지 않으려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송인명이 유독 개연(慨然)한 작태를 지으면서 고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지위가 여기에 이르도록 하고 싶은 말을 아직도 감히 죄다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거인(擧人)이 이에 이렇게 하였으니, 어찌하여 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조현명(趙顯命)은 기괄(機括)이 숨겨져 있는 줄도 모르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상공(相公)의 말이 사람을 감복하게 합니다.’ 하고, 드디어 고제(高第)에 올리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감히 다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방방(放榜)하자 온 세상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현필이 시장(試場)에 들어가기에 임하여 밤을 틈타 정승의 집에 갔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글 가운데 송인명이 아뢴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매우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외인(外人)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의 송인명이 가르쳐 준 것으로 여겼다. 또 지부(地部)071) 의 하리(下吏)를 불러 묻기를, ‘성상께서 근래에 대내(大內)로 들여간 사재(私財)가 있는가?’ 하였는데, 반드시 이를 기록하여 주었을 것이다. 세상에 어찌 권세가 붙좇아 종처럼 굽실거리는 비굴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 정직한 도리로 임금을 섬겨 할 말을 다하여 극력 간(諫)하는 선비가 될 수 있겠는가? 그 글의 내용을 보면 오로지 한마디 말이라도 준엄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한 가지 잘못이라도 혹시 빠뜨릴까 염려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특이하게 드러내고자 안간힘을 썼으니, 비록 하고 싶은 것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믿는 데가 있지 않고서는 절대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 통분스러운 일이다. 이때를 당하여 이현필의 눈에는 단지 한 번 급제(及第)하는 것만 보였을 뿐이고 임금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송인명이 동류를 끌어들이기에 급급하여 은밀히 마음을 써서 직언(直言)을 칭탁하여 선발함으로써 일세(一世)의 입을 막은 것은 그 정상이 이현필보다 더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시론(時論)을 붙좇아 아첨하는 무리들이 앞다투어 일어나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어찌 직언한 것 때문에 죄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틈을 엿보고 있던 한편의 무리들은 날뛰며 서로 축하하면서 또 이를 이용하여 경알(傾軋)하려 하였으며, 또 일종의 향원(鄕愿)072) 들은 의논하기를, ‘이현필의 마음은 가증스럽지만, 만약 이로 인하여 죄를 받는다면 숨김 없이 다 말하게 하는 문을 여는 방법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과연 참으로 정직한 선비가 있다고 한다면, 어찌 권문의 압객(押客)이 등과(登科)를 훔치려다가 죄를 얻은 일 때문에 드디어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이 저지당할 것이겠는가? 더구나 인심이 날로 패멸되고 강상이 날로 무너지는 때를 당하여 진실로 분수를 범하는 일을 꺼리지 않고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성취시킨다면, 그것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상서롭지 못한 것이 되는 것이 진실로 무궁할 것이다. 그리고 임금의 마음속으로 장차 사대부들의 이른바 직언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욕망하는 것이 있어서 발설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간언을 올리는 길이 이 때문에 폐색(閉索)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국가의 폐해와 사대부들의 수욕(羞辱)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이현필에 대해서는 그 급제를 삭제시키고 죄줄 것을 청하는 것이 옳다.
3월 27일 을묘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를 불러서 태학(太學)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민사홍(閔師弘)이 으뜸을 차지했는데, 급제(及第)를 내려 주었다.
3월 28일 병진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참의로, 오언주(吳彦胄)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전광도(全光道) 고부군(古阜郡)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 하였따.
3월 29일 정사
사관(史官)의 신천(新薦)이 있었는데, 이제원(李濟遠)·이종적(李宗迪)이 여기에 참여되었다.
조상명(趙尙命)을 교리로, 유최기(兪最基)를 수찬으로, 이중경(李重庚)을 집의로, 윤취함(尹就咸)을 사간으로, 박필간(朴弼榦)을 장령으로, 이유신(李裕身)을 지평으로, 조명겸(趙明謙)을 헌납으로, 윤급(尹汲)을 승지로, 김한철(金漢喆)을 정언으로, 임상원(林象元)을 겸 설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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