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3권, 영조 13년 1737년 4월

싸라리리 2025. 9. 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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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기미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청(淸)나라의 칙사(勅使)가 나온다는 기별이 있는데, 평안 감사 윤양래(尹陽來)는 병이 심하여 나가서 영접(迎接)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 제수한 병사(兵使)는 아직도 전임지인 공홍 병영(公洪兵營)에서 미처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대신 행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취로(金取魯)는 말하기를,
"칙사를 영접하는 것은 국가의 큰 일이니, 구병사(舊兵使)를 파직하였지만 대신 영접하게 함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였다. 집의 이중경(李重庚)과 정언 민택수(閔宅洙)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니,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도당록(都堂錄)073)  이 있었다. 조영국(趙榮國) 등 26인을 뽑았는데, 이조에서 이석표(李錫杓)·김상로(金尙魯)를 녹용(錄用)하였다.

 

4월 2일 경신

민선(閔墡)을 장령으로, 정옥(鄭玉)을 지평으로, 서명형(徐命珩)을 사간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부교리로, 이정보(李鼎輔)·오수채(吳遂采)를 부수찬으로, 심성진(沈星鎭)을 겸 필선으로 삼고, 오원(吳瑗)을 승문 제조(承文提調)에 단부(單付)074)  하였다.

 

4월 3일 신유

김상로(金尙魯)·조영국(趙榮國)을 교리로, 한익모(韓翼謨)를 수찬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설서로, 정이검(鄭履儉)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부교리 이석표(李錫杓)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간신(諫臣)이 신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위로는 피리의 혀 같은 공교한 말로 승여(乘輿)에까지 언급하기에 이르렀고, 아래로는 농락하는 계교를 부려 은밀히 흉역(凶逆)을 비호하였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그 죄를 이루 주참(誅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료(大僚)가 변명하는 소장을 올리는 것은 모두 위포(危怖)를 가하는 단서인데, 유독 신이 의혹되는 것은 신의 과명(科名)에 대해 대신이 불만스러운 마음이 있다면, 어찌하여 공좌(公座)에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이에 도리어 사실(私室)에서 은밀히 의논함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은밀히 혐의와 원한을 품게 하는 것을 대신(臺臣)이 말한 것과 같이 하는 것입니까? 이하택(李夏宅)을 영호(營護)했다고 한 지목에 대해서는 신이 이 계사(啓辭)는 한 번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알아낸 다음 이를 첨부하여 아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이에 자구(字句)를 주워모아 교묘하게 사람을 무함할 자료로 만든 것은 진실로 이미 너무도 참혹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곡영(谷永)075)  의 공척은 더욱 한 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 저 곡영이 왕봉(王鳳)에게 아부한 것은 바로 그가 왕실(王室)의 연척(聯戚)으로서 임금이 중요한 자리에 임용한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신에게 아부할 계책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이에 권세가 대단한 인귀(姻貴)의 대신을 버려두고 도리어 일개 이하택에게 아첨하겠습니까? 신의 한마디 말이 입에서 나가자마자 많은 화살이 신의 몸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당로자(當路者)의 주먹이 암암리에 모두 장치되어 있고 거실(巨室)의 어금니가 은밀한 곳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종적을 감추고 은거(隱居)하여 일신의 보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물러가는 것이 합당하니, 이를 허락하여 시종의 은혜를 잘 마무리하게 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 이후 처음 이 직책에 제배 되었으니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고자 한 것은 염우(廉隅)에 있어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감히 혁연(赫然)이라는 등의 말을 가지고 서로 다투기를 그치지 않으니, 분의에 있어 놀랍기 그지없다. 말단의 구어(句語)도 근거가 없는 데 관계되는 것이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판부사 김흥경(金興慶)이 차자를 올려 변해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그가 부정하게 과거(科擧)에 오른 것을 놀랍고 개연(慨然)하게 여겨 공좌(公座)나 사실(私室)에서 척언(斥言)한 것이 전후에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가 원한을 품고 노여워하는 것은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단의 한 전어(轉語)에 이르러서는 다른 사람의 소장에 대해 깊이 노여워하여 은밀히 도리어 꾸짖는 여봉(餘鋒)을 갈아서 날을 세우고, 전대(前代)의 외척(外戚) 가운데 있었던 권흉(權凶)을 은연중에 다른 사람에게 가하였습니다. 경상가(卿相家)의 자제 가운데 공주에게 장가든 경우가 예로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문득 ‘인귀(姻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협박할 패병(欛柄)으로 삼고 있으니, 아! 또한 두려운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때 임금의 견부(肩部)가 마비(痲痺)되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오래도록 낫지 않았으나,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직접 행하겠다는 명을 내리니,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고 극력 섭행(攝行)하게 할 것을 명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병이 비록 완쾌되지 않았으나, 충분히 제사를 거행할 수 있다. 전일에는 직접 기우제(祈雨祭)를 행한 적이 많았다. 그때 온몸을 목욕을 하고 장전(張殿)에 거처하면서 유숙했었는데, 한여름철이었으나 몸이 서늘함을 느껴 후들후들 떨렸었다. 태묘의 경우에는 온실(溫室)에 거처하는 것이고 더구나 오늘은 일기가 그다지 무덥지 않으니, 더욱 염려할 것이 없다."
하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평안 감사 윤양래(尹陽來)는 병 때문에 체직을 허락하고 특별히 윤순(尹淳)을 제수하여 대신하게 하였다. 윤순은 오래도록 향리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제수하는 명이 있었지만 한 번도 나와서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4월 4일 임술

밤에 유성(流星)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오수채(吳遂采)·이정보(李鼎輔)를 교리로, 김상로(金尙魯)·조영국(趙榮國)을 부교리로, 이덕중(李德重)·김한철(金漢喆)을 부수찬으로, 유건기(兪健基)를 응교 겸 보덕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부응교로, 이보욱(李普昱)·이중경(李重庚)을 승지로, 이재(李縡)를 예문관 제학으로, 윤혜교(尹惠敎)를 홍문관 제학으로, 유최기(兪最基)를 정언으로, 윤흥무(尹興茂)를 헌납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수찬으로, 서간세(徐幹世)를 전광 수사(全光水使)로 삼았는데, 이판 송진명(宋眞明)과 병판 김취로(金取魯)의 정사(政事)였다.

 

전교하기를,
"이석표(李錫杓)는 그 필두(筆頭)를 보건대 문재(文才)가 부박한 무리보다 나은 데 불과하니, 조금 억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자 일통(一筒)에 삼망(三望)을 하였으니, 한결같이 어쩌면 그리도 지나치게 하는가?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이기기를 힘쓰는 습관을 버리게 하라."
하였다. 일통에 삼망이란 것은 전랑(銓郞)이 으레 겸직(兼職)을 띠는 것을 말한다.

 

4월 5일 계해

전 호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졸(卒)하였다. 이정제는 숙종조(肅宗朝)의 명경(名卿)인 이세화(李世華)의 조카인데, 이세화가 기사년076)  에 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킨 것으로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나란히 일컬어지고 있다. 이정제는 일찍이 가성(家聲)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번임(藩任)을 역임하였고, 재주가 있다는 것으로 일컬어졌었다. 재화(財貨)를 관장하기에 이르러서는 정밀하고 상세하게 하여 일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을 힘썼다. 졸하자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4월 6일 갑자

밤에 화성(火星)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4월 8일 병인

임금이 태묘(太廟)로 나아가 재실(齋室)로 들어갔다.

 

4월 9일 정묘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었는데, 검은 곤복에 붉은 신을 신고 하향례(夏享禮)를 행하였다. 예를 끝내고 환궁(還宮)하였다.

 

동지사(冬至使)가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하고 위유(慰諭)하니, 부사(副使) 김시형(金始炯)이 나아와 말하기를,
"청(淸)나라의 일은 상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신주(新主)의 정령(政令)에는 큰 하자가 없는데, 어떤 이는 유약(柔弱)한 것이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변방에는 아직 우려할 일이 없으며, 각로(閣老) 장정옥(張廷玉)이 천하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는데, 노모(老母)가 있어 돌아가 봉양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장각로(張閣老)가 있으면 천하가 무사하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관서(關西)의 무인(武人) 백세걸(白世傑) 등 3인을 천거하자 임금이 전조에 명하여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사신(使臣)이 돌아오면 으레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먼저 갖춘 계문(啓聞)하게 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청주(淸主)가 즉위한 처음에 옹정(雍正)077)   때의 고사(故事)처럼 구경(九卿) 등을 불러서 일찍 건저(建儲)할 뜻을 하유(下諭)하고, 친서(親書)로 된 밀지(密旨)를 건청궁(乾淸宮)에 보관시킨 다음 중외(中外)에 선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명사(明史)》가 완성되어 간다는 것으로 태학사(太學士)와 구경(九卿) 등에게 조칙(調勅)을 내려 시호(諡號)를 의논하게 했는데, 건문 황제(建文皇帝)를 공민혜 황제(恭閔惠皇帝)라고 하였습니다. 서쪽 변방은 강희(康熙)078)   때부터 매양 침략을 받아왔는데, 옹정 때에 이르러서는 해마다 침략하여 왔다고 합니다. 합밀국(哈密國)은 옹정 황제가 요좌(遼左)079)  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공격하였는데, 10년 동안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뒤에 서적(西賊)이 먼저 사신을 보내어 화친(和親)을 청하였으므로 옹정 황제가 허락하고, 단지 1만여 명의 군병을 머물러 두어 방수(防戌)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4월 10일 무진

윤유(尹游)를 병조 판서로, 윤혜교(尹惠敎)를 형조 판서로, 조명겸(趙明謙)을 집의로, 김낙증(金樂曾)을 정언으로 삼았다.

 

전광도(全光道) 순천부(順天府)에 3월 26일에 크게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오리알만하였으며, 지붕의 기와가 깨지기도 하고 나뭇잎이 모두 떨어졌으며, 까마귀와 솔개도 여기에 맞아서 많이 죽었다.

 

4월 11일 기사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시강(試講)하였다.

 

이제원(李濟遠)을 검열로 삼았다.

 

4월 12일 경오

사간원 【정언 김낙증(金樂曾)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유경장(柳經章)은 이미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니 비록 부임을 재촉하는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마땅히 자처(自處)가 있었어야 하는데, 태연히 무릅쓰고 부임했습니다. 전 경기 도사(京畿都事) 송창명(宋昌明)은 수령과 상피(相避)080)  가 되니, 법에 있어서 마땅히 개체(改遞)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선 나아와 숙배(肅拜)하고서 이에 추후 정체(呈遞)하려 했으니, 자신이 명관(名官)이 되어 처사가 구차스러웠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소서. 지부(地部)의 낭청은 직임이 자별한 것이므로 이름이 문관(文官)이라 해서 구차스럽게 좌랑(佐郞)에 충차시켜서는 안됩니다. 강항(姜杭)은 지망(地望)이 매우 가벼우므로 물의(物議)가 시끄럽습니다. 정릉 참봉(貞陵參奉) 유언휘(兪彦徽)는 과거 신축년081)  에 장세량(張世良)을 아첨하여 섬겨 흉소(凶疏)를 사출(寫出)했다는 것으로 공의(公議)에 버림을 받았는데, 갑자기 사적(仕籍)에 통망(通望)되었으니, 모두 태거(汰去)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유경장에 대한 일은 너무 지나치다. 유언휘에 대한 일은 이러한 동등의 습관은 내가 취하지 않는 바이다. 송창명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4월 14일 임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16일 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개성부(開城府) 태평관(太平館)에 화재가 발생하여 민가(民家) 1백 21호가 연달아 불탔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병신년082)  의 전례에 의거하여 집집마다 곡물(穀物)을 지급하여 구활(救活)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왜인(倭人)의 서계(書契)083)  에 선조(宣祖)의 구휘(舊諱)를 범한 것이 있었는데, 김재로가 말하기를,
"천계(天啓)084)   이후의 서계(書契)에서 여러 번 이를 범하여 왔었는데도 쟁집(爭執)하지 말라는 조령(朝令)이 있었던 것은 초휘(初諱)는 정휘(正諱)보다 다르다는 것에 연유된 것 같습니다. 왜인은 반드시 그것을 몰랐을 것이니, 마땅히 전처럼 버려두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홍성보(洪聖輔)가 처음에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염피(厭避)한 것이 아니었는데, 전하께서 이기진(李箕鎭)을 재촉하여 보내려 하셨으므로, 홍성보를 꺾어 눌러 정배(定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듣건대, 그의 아들이 병이 들어 장차 숨이 끊어지려 하고 있다 하니, 참으로 불쌍하고 딱합니다. 전에 남태제(南泰齊)도 대신이 청하여 석방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고, 좌참찬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남태제는 실상 염피(厭避)하기 위해서 부모가 병들었다고 핑계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이와 같다면 경들은 어찌하여 그때 아뢰지 않았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굳이 청하니, 홍성보를 방송하라고 명하였다.

 

4월 17일 을해

이철보(李喆輔)를 사간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집의로, 남위로(南渭老)를 장령으로, 홍정명(洪廷命)을 지평으로, 윤득징(尹得徵)을 헌납으로, 정내주(鄭來周)를 병조 참판으로, 김성탁(金聖鐸)을 부수찬으로, 정이검(鄭履儉)을 교리로, 김유(金濰)·정필녕(鄭必寧)을 승지로, 김취로(金取魯)를 예조 판서로, 윤양래(尹陽來)를 공조 판서로, 여천군(驪川君) 증(增)을 주청사(奏請使)로 삼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4월 18일 병자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 좌탑(坐榻)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왼쪽 팔뚝의 담핵(痰核)이 갑자기 통증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강연(講筵)을 열었으니, 정지할 수는 없다. 약원(藥院)으로 하여금 승후(承候)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9일 정축

경상도 동래(東萊)의 민가(民家)에 암퇘지가 머리 하나에 눈이 셋 달린 새끼를 낳았는데, 눈 하나는 왼 눈과 왼 귀 사이에 있었으며 떴다 감았다 하였다. 진주(晋州)의 지리산(智異山)에 눈이 내렸다.

 

4월 20일 무인

조명신(趙命臣)을 승지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홍상빈(洪尙賓)을 형조 참판으로, 오언주(吳彦胄)를 교리로, 김상중(金尙重)을 수찬으로, 김우철(金遇喆)을 강계 부사로,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을 주청사로 삼았다.

 

강춘도(江春道) 양양(襄陽)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손상시켰다. 설악산(雪嶽山)에 눈이 겨울처럼 쌓였으므로, 초목이 모두 얼어 죽었다.

 

4월 21일 기묘

경기의 고양(高陽)·풍덕(豐德)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4월 22일 경진

2품 이상의 관원이 문안하였다.

 

서명균(徐命均)을 세자 책봉 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김취로(金取魯)를 판의금으로, 이성중(李成中)을 봉교(奉敎)로 삼았다.

 

장령 박이문(朴履文)이 상소하기를,
"성학(聖學)을 돈독히 하여 대본(大本)을 확립시키시고, 정사(正士)를 선발하여 원량(元良)을 보필하게 하며, 황극(皇極)을 세워 탕평(蕩平)을 이룩하여 상대적으로 임용하는 한갓 겉치레인 전정(銓政)을 하지 마시고, 대의(大義)를 밝혀 국시(國是)를 확정하여 혹시라도 사당(私黨)의 편언(偏言)에 동요됨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사령(辭令)은 간략히 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성심(聖心)의 천심(淺深)을 엿보지 못하게 하시고, 권강(權綱)을 총람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위복(威福)을 희롱하지 못하게 하며, 약삭빠르고 겉꾸밈새를 잘하는 자를 총애하지 말고 충후(忠厚)하고 노성(老成)한 사람을 숭장(崇奬)하며, 아첨하고 비위를 잘 맞추는 자를 친압하지 말고 정직하고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를 포장(褒奬)하소서. 신은 허묘(墟墓)에서 슬픔으로 경황이 없는 중이므로 단지 그 제목만 서술하였을 뿐 그에 대한 설명은 전개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4월 23일 신사

임금이 또 침을 맞았다. 정후(庭候)하는 반행(班行)이 매우 적었는데, 기전(幾甸) 가까이에 있는 신하들도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달라서 진퇴(進退)는 반드시 의리에 의해 하는 것이니, 간혹 정세(情勢)나 병고(病故)가 있을 경우에는 국가에 일이 있는 때라도 일일이 조정에 나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근세(近世) 이래로 위에서는 속박해서 다그치는 것을 일삼고 아래에서는 명을 받들어 추주(趨走)하는 것을 공손함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달려가지 않으면 번번이 견책을 가하는데, 이는 실로 군하(群下)가 스스로 취한 것이니,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3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4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 의약(醫藥) / 사법-탄핵(彈劾)
사신은 말한다.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달라서 진퇴(進退)는 반드시 의리에 의해 하는 것이니, 간혹 정세(情勢)나 병고(病故)가 있을 경우에는 국가에 일이 있는 때라도 일일이 조정에 나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근세(近世) 이래로 위에서는 속박해서 다그치는 것을 일삼고 아래에서는 명을 받들어 추주(趨走)하는 것을 공손함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달려가지 않으면 번번이 견책을 가하는데, 이는 실로 군하(群下)가 스스로 취한 것이니,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4월 24일 임오

황해도 서흥(瑞興)·봉산(鳳山)에 우박이 내렸다.

 

소유(疏儒) 홍성제(洪聖濟)를 진주(晉州)에 정배(定配)하였다. 홍성제가 상소하여 이현필(李顯弼)을 토죄할 것을 청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현필이 정대(庭對)하여 우리 임금에 대해서 너무도 무례하였으나, 여러 달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아도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하는 이가 아직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는 이현필의 성품이 본디 간교하고 교활하여 권문(權門)에 자취를 의탁하고 있기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대단한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친다는 의리를 전혀 망각한 처사였습니다. 시권(試券)은 첫머리에서 끝까지 임금을 마구 질책하는 흉언(凶言)이 아닌 것이 없었으니, 무신년의 여얼(餘孼)들이 어찌 이를 구실로 삼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전하의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이런 흉서(凶書)를 보고서 누군들 피눈물을 머금어 목욕하고 토죄(討罪)할 것085)  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저 고관(考官)들은 도리어 가장(嘉奬)하여 발탁하기를 마치 급장유(汲長孺)086)  와 위 정공(魏鄭公)087)  같은 인물이 오늘날에 다시 태어난 것처럼 하였으니, 이런 짓을 한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이현필의 글은 편언 반구(片言半句)도 양역(良役)이라는 제목과는 합치되는 것이 없으니, 이는 결단코 장중(場中)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간파하지 못하겠습니까? 특별히 첫머리에 시배(時輩)들을 위해 변해하는 말을 씀으로써 권세 있는 재상(宰相)에게 아첨하였으며, 시권(試券)을 고열(考閱)하는 주사(主司)는 임금을 공척(攻斥)한 것이 곡영(谷永)보다 백배나 더하였는데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높은 벼슬에 올라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차마 붓을 들어 임금을 욕한 문자(文字)에 등급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조경빈(趙景彬)은 단지 권세 있는 정승을 조롱하는 내용을 썼을 뿐인데도 끝내 찬배(竄配)되기에 이르렀고, 이희보(李喜報)는 사실(私室)에 대해 말한 것에 불과한데도 또한 나문(拿問)당했는데, 저 이현필은 어떤 사람이기에 다시 여지 없이 임금을 마구 비난했는데도 이에 도리어 의기 양양하게 출방(出榜)되고 기세좋게 벼슬하며 청명(淸明)·직절(直節)을 갖춘 선비라하여 권장하고 허여하는데도 감히 힐문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는 당당한 천승(千乘)의 임금인 전하께서 도리어 한 재상(宰相)의 권세만도 못한 것입니다. 삼가 군신의 의리가 이로부터 능이(陵夷)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오늘날 요로(要路)에 있는 자들은 문득 말하기를, ‘이현필을 공척하는 자는 아첨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음을 면할 수 없다.’ 하고, 이로써 일세(一世)의 사람들을 재갈을 물려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신은 어리석고 망령되어 단지 군신(君臣)의 대의(大義)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시배(時輩)들의 공갈(恐喝)이 있다는 것은 모릅니다. 청컨대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이현필의 대불경죄(大不敬罪)를 흔쾌히 바루고 겸하여 고관(考官)이 무엄한 마음을 주책(誅責)함으로써 팔도 신민(臣民)들의 울분을 풀게 해주소서."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니 임금이 입직(入直)한 승지에게 명하여 입시하게 하고, 이어 홍성제를 정하(庭下)로 부르게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이현필은 과제(科第)의 욕심에 끌려 이런 무상(無狀)한 말을 했으나, 그대의 소장은 나라를 위하여 분개한 데에서 나온 것인가?"
하니, 홍성제가 아뢰기를,
"이현필의 대책(對策)은 과규(科規)를 따르지 않고 제목(題目) 밖의 말로 승여(乘輿)를 지척(指斥)하여 군상(君上)을 능멸하였으니, 선비가 된 몸으로 분완(憤惋)을 금하지 못하여 상소하게 된 것입니다. 단지 국가를 위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가 이현필을 미워해서 이 일을 한 것인가, 아니면 시관(試官)을 미워해서 이 일을 한 것인가? 시관이 7인인데, 미워하는 데에도 천심(淺深)이 있는가?"
하니, 홍성제가 아뢰기를,
"신이 이현필과 시관에 대해 어찌 사사롭게 미워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현필을 과거에 발탁할 적에 여러 시관들도 반드시 모두 뽑을 만하다고 했기 때문에 뽑았을 것입니다. 진실로 한 사람이라도 불가하다고 했다면 어떻게 과거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모두 미워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가 국가를 위하여 분개했다면 이현필의 일만 논하면 되는 것이다. 비록 시관을 침범하여 언급한다 하더라도 또한 평온한 말로 시비를 말해야 하는 것인데, 아첨한다는 등의 말은 어떤 의사가 현저히 있으니 이는 시기를 틈타서 경알(傾軋)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드디어 승지에게 하문하기를,
"이 소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김유(金濰)가 아뢰기를,
"이현필의 뜻은 직언(直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제(科第)를 훔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진실로 무상(無狀)한 것입니다만, 홍성제의 소장 내용 또한 진신(縉紳)을 경함(傾陷)하려는 것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일의 성교(聖敎)에, ‘까마귀와 솔개가 다치지 않아야 봉황이 이르는 것이니, 이현필을 아껴서가 아니라 참으로 정직한 선비를 아껴서인 것이다.’ 했는데, 이는 훌륭한 왕언(王言)으로서 참으로 이른바 한마디 말이 나라를 흥기시킨다고 한 그것입니다. 우상(右相)과 풍원(豐原)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갚기를 도모해도 방법이 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일부러 허물을 들추어내는 글을 뽑아서 다른 사람이 보고 듣도록 할 뜻을 품었겠습니까? 성교(聖敎)에 이른바, ‘경 등이 이 글을 뽑지 않았다면 반드시 총명을 옹폐(壅蔽)하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한 것은 고관들의 마음을 통촉하여 이간시키려는 거조를 헤아린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장은 먼저 소문이 있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현필의 대책(對策)을 살펴 본다면, 또한 우리 임금의 성명(聖明)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현필이 과제(科第)의 욕심에 급급하여 감히 이런 말을 한 것은 천지(天地)의 포용(包容)하는 덕을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홍성제로 하여금 소장을 가지고 물러가게 하고, 하교하기를,
"아! 세도(世道)가 날로 비하(卑下)되어 분경(奔競)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는데, 이현필이 과거를 훔친 일에서 극도에 달하였다. 그런데도 시관(試官)이 억지로 뽑은 것은 문승(文勝)에서 온 소치에 불과한 것이다. 이현필의 처분에 대해서는 본디 조정에서 조처가 있을 것인데, 어찌 향유(鄕儒)의 진열(陳列)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홍성제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경알하려 했던 뜻은 헤아려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 일개 이현필 때문에 조정의 진신들을 무엄한 죄과(罪科)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그 내용에 주사(主司)에 아첨했다느니, 권문(權門)에 자취를 의탁했다느니 한 등의 말은 곧 진신(縉紳)을 기괄(機括)에 빠뜨리려는 것이었으며, 그 아래에 말한 은밀히 이현필이 지은 것을 알면서도 선발하여 뽑은 것같이 한 말들은 그의 용심(用心)을 여기서 또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 징계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이용하여 틈을 노리는 행위가 장차 어지럽게 일어날 것이니, 소유 홍성제(洪聖濟)에게 속히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승지에게 이르기를,
"속담에 물고기 한 마리가 온 못물을 흐리게 한다고 했는데, 이름 얻기를 좋아하는 폐단이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 유생의 말 또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내가 비록 마음이 편협하기는 하지만 이현필의 욕설을 어찌 개의(介意)하겠는가? 그 말에 ‘전하(殿下)가 물은 것인가, 아니면 집사(執事)기 물은 것인가? 음양(陰陽)이 개벽(開闢)한다.’고 한 말은 너무도 흉참(凶慘)한 것이었다. 내가 이미 과거(科擧)를 훔쳤다고 하교했으니, 그는 마땅히 황공하여 위축되어 인구(引咎)하고 감히 과명(科名)으로 자처할 수 없을 것인데, 사은(謝恩)하는 날 의기 양양하게 들어왔으니, 그가 진실로 스스로 직신(直臣)으로 자부하여 그러한 것이다. 이 소장에 대해 시관을 무엄하다고 하지만 실은 이현필이 무엄한 것이다. 내가 비록 과방(科榜)에서 빼버리지는 않았지만, 이미 제목 이외의 것으로 미리 지은 것이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당연히 공의(公議)가 있어야 할 것인데, 단지 나의 과실을 말한 것 때문에 반드시 아첨한다는 비난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김유가 말하기를,
"엊그제 진사 윤혁(尹㴒)이 또한 와서 한 소장을 바쳤는데, 그 대의(大意)는 홍성제의 것과 같았습니다. 윤혁은 본디 경망한 사람이므로 감히 입계(入啓)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혁이 비록 경망하기는 하지만 이현필의 잘못에 대해서 알 수 있으니, 오히려 그런 단점이 없는 이현필보다 낫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정(大庭)에서 선비에게 대책(對策)을 올리게 하는 것은 직언(直言)이 이르게 하려는 까닭이다. 진실로 이현필이 강직한 말을 했는데도 성덕(聖德)에 거슬린다는 혐의가 있었다면,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마땅히 널리 포용하는 마음으로 흡족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개도(開導)하고, 이현필을 죄주도록 청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글도 이미 격례(格例)에 어긋났고 말도 실제로는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을 범하여 조금도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고, 오로지 과거에 오를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말을 만들고 마음을 쓴 것이 매우 흉악하고 궤휼하였다 하나, 고관(考官)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출척(黜斥)시키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이에 도리어 발탁하여 권장하였으니, 그것도 또한 매우 무엄한 처사였다. 이현필은 곧 송인명(宋寅明)의 사인(私人)으로, 송인명의 연대(筵對) 가운데 궁인(宮人)에 대한 말이 들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이 이현필의 대책에 들어 있었으니, 그가 암암리에 사정(私情)을 행한 자취가 환하게 드러나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방출(榜出)된 지 달이 지나도록 한 사람도 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반드시 아첨한다는 말을 두려워한다는 하교가 그 실상을 분명히 안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3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46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註 085] 목욕하고 토죄(討罪)할 것 :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에 진성자(陳成子)가 제(齊)나라 간공(簡公)을 시해(弑害)하니, 공자(孔子)가 목욕(沐浴)하고 노(魯)나라 애공(哀公)에게 고하기를, "진항(陳恒)이 그 임금을 시해했으니, 토주(討誅)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한 것을 말함. 곧 악(惡)을 고발하여 시비(是非)를 가리는 정신을 견주어 말한 것임.[註 086] 급장유(汲長孺) : 한 무제(漢武帝) 때의 직신(直臣) 급암(汲黯)의 자(字).[註 087] 위 정공(魏鄭公) : 당 태종(唐太宗) 때의 직신(直臣) 위징(魏徵)의 봉호(封號).
사신은 말한다. "대정(大庭)에서 선비에게 대책(對策)을 올리게 하는 것은 직언(直言)이 이르게 하려는 까닭이다. 진실로 이현필이 강직한 말을 했는데도 성덕(聖德)에 거슬린다는 혐의가 있었다면,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마땅히 널리 포용하는 마음으로 흡족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개도(開導)하고, 이현필을 죄주도록 청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글도 이미 격례(格例)에 어긋났고 말도 실제로는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을 범하여 조금도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고, 오로지 과거에 오를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말을 만들고 마음을 쓴 것이 매우 흉악하고 궤휼하였다 하나, 고관(考官)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출척(黜斥)시키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이에 도리어 발탁하여 권장하였으니, 그것도 또한 매우 무엄한 처사였다. 이현필은 곧 송인명(宋寅明)의 사인(私人)으로, 송인명의 연대(筵對) 가운데 궁인(宮人)에 대한 말이 들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이 이현필의 대책에 들어 있었으니, 그가 암암리에 사정(私情)을 행한 자취가 환하게 드러나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방출(榜出)된 지 달이 지나도록 한 사람도 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반드시 아첨한다는 말을 두려워한다는 하교가 그 실상을 분명히 안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4월 25일 계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뜸뜨는 것을 중시하고 정후(庭候)를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        김재로가 요상(僚相)들을 돈면(敦勉)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이현필에 대한 일은 진실로 매우 근거가 없는 것인데, 시관(試官)을 죄주는 것은 지나칩니다. 이현필을 비척(非斥)한 말이 천심(淺深)의 차이가 있다 하나, 어찌 그것을 직언(直言)이라고 권장하여 허여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현필의 일은 진실로 말할 것도 없다. 내가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이름을 얻기 좋아하는 폐단인 것이다. 경은 이현필을 공척한 것에 천심의 차이가 있다고 했는데, 이현필과 사이가 소원하다 해서 준열하게 논한 것도 사의(私意)이고, 친근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용서하는 것도 사의인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현필의 과거(科擧)는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뒤로 거자(擧子)들이 이 글을 모방하면 과거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임금의 과실을 유취(類聚)하여 세세한 일까지 거론하여 진달하면서 분수를 범하고 의리에 어긋나는 말이 서로 잇따라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현필은 이미 온 세상에서 몹시 미움받고 있으니, 이 뒤로는 정대(庭對)에 있어서 반드시 지나치게 전의 일에 징계되어 애당초 직언(直言)이 없게 될 것이며, 이목(耳目)의 신하들로 의기가 저상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성상께서는 이 폐단을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당시의 시관들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뽑은 사람 또한 어찌 전하에게 불충(不忠)한 사람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이현필을 세도(世道)의 적(賊)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이관후(李觀厚)가 이것을 지었다면 발거(拔去)했을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는 권세가 많은 음관(蔭官)인데다가 박세당(朴世堂)의 외손(外孫)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무사한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현필의 과명(科名)은 발거(拔去)하는 것이 옳지만 이제 이미 온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발거한다 하여 또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뒤로 대수롭지 않게 듣는 사람은 혹시 정대(庭對)한 글이 거슬려서 발거하였다고 여긴다면 그 이름 또한 좋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글의 몇 개의 단락은 이를 거론하여 성죄(聲罪)한다면, 과명을 발거하는 데에서 그칠 뿐만이 아닌 것으로 그 일이 매우 중한 것이다. 내가 장외(場外)에서 미리 지었다고 한 등의 하교가 있었으니, 또한 이것으로 죄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목관(耳目官)들이 너무도 서둘지 않고 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신은 직도(直道)로 임금을 섬겨야 할 것인데, 김재로가 이현필의 일에 대해 이미 ‘발거해야 한다.’ 했다가 곧이어 ‘이제 이미 전파되었으니 발거한다하여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뒷날 대수롭지 않게 듣는 사람이 정대(庭對) 때문에 거슬려서 발거하였다고 한다면 그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였다. 송인명에 대해서는 단지 잘못 생각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극력 돈박(敦迫)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 말을 이리저리 묘하게 반복하면서 위로는 성심(聖心)에 거스르지 않게 하고 아래로는 동료의 환심을 잃지 않게 하니, 그 정태(情態)가 매우 가증스럽다. 대신이 이러하니, 국사를 알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3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46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대신은 직도(直道)로 임금을 섬겨야 할 것인데, 김재로가 이현필의 일에 대해 이미 ‘발거해야 한다.’ 했다가 곧이어 ‘이제 이미 전파되었으니 발거한다하여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뒷날 대수롭지 않게 듣는 사람이 정대(庭對) 때문에 거슬려서 발거하였다고 한다면 그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였다. 송인명에 대해서는 단지 잘못 생각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극력 돈박(敦迫)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 말을 이리저리 묘하게 반복하면서 위로는 성심(聖心)에 거스르지 않게 하고 아래로는 동료의 환심을 잃지 않게 하니, 그 정태(情態)가 매우 가증스럽다. 대신이 이러하니, 국사를 알 만하다."

 

4월 26일 갑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판윤 이병상(李秉常)이 고향에 있으면서 병상(病床)을 진달하니, 하교하기를,
"이병상이 고집하는 것이 비록 분의(分義)를 중히 여겨서라고 하지만, 또한 어찌 경솔히 도로 내려 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병상은 마음이 깨끗하고 행동이 단아하여 오랫동안 사림(士林)의 명망을 받고 있었는데, 정미년088)   이후 시골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매양 엄중한 하교를 내렸다.

 

좌참찬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시권(試券)의 고사(考査)를 상세하게 살피지 않은 것은 진실로 신이 스스로 지은 죄입니다. 다만 이 일만을 가지고 성죄(聲罪)한다면 주형(誅刑)·유형(流刑)·찬형(竄刑)·극형(極刑)으로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사피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이 ‘용권(用權)’이라는 두 글자는 인신(人臣)으로서 극죄(極罪)인 것입니다. 설령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본건의 일에 대한 시비(是非)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데, 공공연히 끌어다가 말을 하는 것은 이것이 과연 무슨 의도입니까? 그 전편(全篇)의 정신이 과연 이현필을 성토(聲討)하기 위한 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귀역(鬼蜮)과 같은 정상이 이미 천감(天鑑)에서 도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퇴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기를,
"홍성제(洪聖濟)의 소장이 나오고서 신 등의 죄명(罪名)이 낭자해졌습니다. 신처럼 재주도 부족하고 복도 적은 사람이 어떻게 오늘날의 낭패를 초래(招來)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지난 사첩(史牒)을 본 적이 있는데, 비방을 함용(含容)한 것은 흔히 성세(盛世)에 많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성명(聖明)께서 사유(赦宥)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신은 오직 오늘날이 성세인 줄만 알 뿐입니다. 망령된 생각에 전도되어 망령된 이러한 일 때문에 혹 폐기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식과 사려가 혼미하여 취사(取捨)가 정당함을 잃은 것은 모두 신의 죄인데, 더구나 직임이 문형(文衡)을 맡고 있으니, 모든 구책(咎責)에 있어 신이 우두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풍원(豊原)의 소장에 대한 비답에 유시하였다. 경은 지나치게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7일 을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여 자송(自訟)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상(無狀)한 몸으로 주시관(主試官)이 되어 사려가 잘못 들어갔으니, 언자(言者)들의 말은 요컨대 모두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경의 마음을 알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렇게 하는가? 염매(鹽梅)089)  하라는 하교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안심하고 다시 지나치게 겸양(謙讓)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8일 병술

밤에 유성(流星)이 고루성(庫樓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유건기(兪健基)를 집의로,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남위로(南渭老)를 장령으로, 오언주(吳彦胄)를 헌납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부응교로, 전 참의 정언섭(鄭彦燮)을 전일 동래(東萊)에서 성을 쌓은 공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정언섭은 인품이 아첨을 잘하여 임금의 좌우 신하를 잘 섬긴 탓으로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래부(東萊府)에 있었을 적에 성역(城役)을 빙자하여 탐오한 짓을 했다는 소문이 낭자했었으나, 방백(方伯)과 친밀했던 때문에 여러 해가 지나고 여러 관원이 바뀐 뒤에 거듭 상(賞)을 받으려 도모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광인(狂人) 윤혁(尹㴒)이 스스로 태학생(太學生)이라고 일컬으면서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삼가 이현필(李顯弼)이 유패(謬悖)한 요언(妖言)을 주장(譸張)한 것을 통분스럽게 여기며,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줏대없이 나약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비루한 습관을 통분스럽게 여깁니다. 이에 감히 목욕 재계하고 토죄(討罪)할 것을 청한 의리에 붙여 신자(臣子)의 절개를 펴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봉함(封緘)하여 궐하(闕下)에 엎드려 있었으나 후사(喉司)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분노하고 억울해 한 나머지 거의 광질(狂疾)이 일어나려 했었다. 임금이 승지를 불러 그의 얼굴 생김새와 행동 거지에 대해 하문하고 나서 이어 하교하기를,
"광생(狂生)이 상소한 것으로 사책(史冊)을 더럽힐 수가 없으니, 즉시 이를 버리게 하라."
하였다.

 

4월 29일 정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현필의 일은 언의(言議)가 갈수록 더욱 시끄럽습니다만, 이제 와서 때가 지난 뒤에 직접 정죄(定罪)하는 것은 불편한 점이 있으니, 마땅히 아래의 공론(公論)에 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신은 식견이 명석하지 못하니 뒷날 당상(堂上)들과 삼사(三司)에서 모두 입시하였을 때 상의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경력(經歷)한 일이 많은데 이현필의 일쯤은 말할 것도 없다. 선유(先儒)들의 말에, ‘부모(父母)의 하는 일은 옳게 여기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는데, 옳지 않은 곳을 본다는 것은 이것이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닌 것이다. 무신년과 신축년의 일이 어디서부터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은 모두 이륜(彛倫)을 크게 지키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임금의 거조(擧措)가 옳으면 기뻐하고 옳지 않으면 걱정하는 것은 진실로 아랫사람의 상정(常情)인 것이다. 내가 그르게 여기는 것은 대소 정신(廷臣)들이 면대해서 나의 잘못을 진달하려 하지 않고 물러가서 몰래 이를 시비(是非)하는 것이다. 포의(布衣)의 선비들도 무엇을 보면 일 만들기를 좋아하여 고담 준론(高談峻論)함으로써 스스로 명사(名士)인 양 여기는데 시골 사람들도 따라서 이를 본받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근일의 폐습(弊習)이다. 내가 비록 이현필을 용서하여 주더라도 여러 신하들이 이현필을 보는 시각은 의당 이관후(李觀厚)에게 한 것과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여 죄주려 한다면 가부(可否)를 의논하는 사이에 또 장차 허다한 갈등이 발생하게 될 것이니, 눈감아 주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동지사 김시형(金始炯)과 이조 판서 정석오(鄭錫五) 등도 이현필의 죄상을 대단하게 말하였는데, 김재로가 말하기를,
"방출(榜出)한 뒤 신이 조현명과 조용히 만났었는데, 그의 말이 곧바로 뉘우쳤으나 이미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제학의 소장에 단지 성세(盛世)라는 것만 있는 줄 알고 이 글을 선발하여 뽑았다고 한 것은 이 일에 대해서 매우 눈감아 준 것 같은데, 그의 말은 순실(純實)한 것이다."
하였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황재(黃梓)를 곧 그곳에 편배(編配)하였다. 황재는 명을 받고도 오랫동안 극력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엄중히 계칙하고 즉일(卽日)로 사조(辭朝)하게 하였는데, 황재가 그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황재는 스스로 네 정승이 신원(伸冤)되기 전에는 의리에 있어 함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으로 내외(內外)의 제수하는 명을 일체 굳게 사퇴하였으므로 논자(論者)들이 그의 조수(操守)를 훌륭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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