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4권, 영조 13년 1737년 5월

싸라리리 2025. 9. 1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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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무자

평안도 영원(寧遠)·맹산(孟山)에 눈이 한 자쯤 내렸다.

 

경기(京畿)·공홍도(公洪道)·강춘도(江春道) 3도의 유생 윤익동(尹翼東) 등이 상소하여 고(故) 상신(相臣) 정호(鄭澔)를 누암 서원(樓巖書院)에 배향(配享)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일 기축

생원(生員) 김숙명(金淑鳴)이 상소하여 이현필(李顯弼) 및 고관(考官)090)  의 죄를 성토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의는 홍성제(洪聖濟)의 상소와 같았다. 이어서 말하기를,
"홍성제의 상소 중에 ‘명색(名色)’ 두 글자는 표방(標榜)한 바가 있으니 열 손으로도 엄폐하기 어려우며, 추판(秋判)091)  의 금주(禁酒)에 대한 말과 지부(地部)092)  의 재정 절약에 대한 말은 진실로 고관(考官)의 사당(私黨)이 아니면 누가 기꺼이 아첨하기를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더구나 궁인(宮人)을 더 뽑으라고 한 일은 대신(大臣)이 경연(經筵)에서 주달한 지 10일도 채 안되었는데, 어찌 보통 과거 보러 간 이가 상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일을 가지고 과장(科場)의 엄숙한 표준 법식이 되는 과문(科文)에 썼으니, 물정이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김은 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새로 하토(下土)로부터 올라와 부로(父老)를 칭탁하고 그가 수령(守令)에게 과거에 나아갈 뜻을 드러내 보였으며, 밤에 기운이 청명할 때 속마음을 살펴보면 스스로 부끄러울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조덕린(趙德隣)의 흉악한 말인데 이현필이 답습하였습니다. 양단(兩端)을 끊어서 만들기를 두 입에서 나온 것 같이 하였으니, 이는 또 이석표(李錫杓)의 도리에 어그러진 말인데, 이현필이 그대로 모방을 하였습니다. 이런 등속의 표방(標榜)은 실로 삼척 동자라도 쉽게 알 수 있는 바인데 그로 하여금 입격(入格)을 시켰으니, 이것은 귀를 가리고 방울을 훔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삼사(三司)093)  와 태학(太學)094)  에서 말하지 않은 실수를 언급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처음에는 승정원(承政院)에 머물러 두라고 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하교하여 서로 투기하며 다투고 헐뜯는 것을 배척하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소를 불태우도록 하였다.

 

5월 3일 경인

도승지(都承旨) 이춘제(李春躋)가 입진(入診)한 자리에서 간략하게 김숙명(金淑鳴)의 상소를 불태우도록 한 과실을 진달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그러나 나의 이번 일도 역시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현필(李顯弼)의 죄는 진실로 주벌(誅伐)하여야 옳은데, 처음에는 모두 머뭇머뭇하면서 발설하지 않다가 끝에서야 임금의 마음을 헤아리고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 드러나게 의중을 떠보려는 흔적이 있었는데, 성주(聖主)가 서로 다투거나 헐뜯는다는 것으로 의심하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되겠는가? 그러나 포의(布衣)가 언사(言事)한 상소를 불태우게 한 것은 실로 뒷날에 폐단을 여는 것인데도 후사(喉司)095)  에서 서둘러서 받들어 시행하였으니, 윤허하는 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48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註 095] 후사(喉司) : 승정원.
사신은 말한다. 이현필(李顯弼)의 죄는 진실로 주벌(誅伐)하여야 옳은데, 처음에는 모두 머뭇머뭇하면서 발설하지 않다가 끝에서야 임금의 마음을 헤아리고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 드러나게 의중을 떠보려는 흔적이 있었는데, 성주(聖主)가 서로 다투거나 헐뜯는다는 것으로 의심하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되겠는가? 그러나 포의(布衣)가 언사(言事)한 상소를 불태우게 한 것은 실로 뒷날에 폐단을 여는 것인데도 후사(喉司)095)  에서 서둘러서 받들어 시행하였으니, 윤허하는 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5월 5일 임진

정언(正言) 유최기(兪最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이현필(李顯弼)의 사건에 대하여 그윽이 놀라고 통탄하였습니다. 공령(功令)096)  의 글은 스스로 표준이 되는 방식이 있으니, 비록 임금의 덕이 궐유(闕遺)함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력 말하고 의논을 다하는 자가 으레 조사(措辭)를 궁구하는 사이에 제목을 향하여 부연(敷演)한다 하여도 질서가 없이 도리에 어긋나는 거만한 말로 책문(策文)의 서두에 수식 나열하고 본래의 제목은 팽개친 채 방자한 뜻으로 말하기를 이현필과 같이 마음 쓰는 자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이현필로 하여금 과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어찌 조금이라도 표준 법식에 마음을 두고 힘써 충간(忠懇)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그 한 편(篇) 글의 정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 시골 부로(父老)의 말을 칭탁하고, 드러나게 고관(考官)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계책을 써서 스스로 많은 선비들의 글보다 겉으로 드러나게 다르기를 바랐으니, 3백 년 동안 과거를 설시해 온 후로 이같은 대책문(對策文)을 상등 급제로 이름하여 뽑은 일은 없었습니다. 이 어찌 세도(世道)의 일대 변괴(變怪)가 아니겠습니까? 그 마음을 논한다면 기만과 사기이며, 그 자취를 캐어 보면 방자하고, 그 글로 말한다면 전혀 윤리가 없으니, 그 과거의 법을 엄하게 하고 국가의 기강을 존중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결같이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그가 양양하게 직임에 돌아와 태연 자약하게 즐거워하고 있으니, 더욱 극도로 무엄(無嚴)합니다. 신은 청컨대, 이현필을 빨리 과방(科榜)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시고 엄중히 먼 지역으로 추방하는 법전을 베풀 것이며, 시험을 맡은 신하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그의 글이 법에 당연히 내쳐야 함을 알고서도 방자하게 선발하여 조금도 보류하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착각한 것이라 하여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모든 시관에게도 견책의 벌이 없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신이 또 속으로 근심하고 통탄함이 있는 것은 작고 변변치 못한 한낱 이현필에 대한 처치가 돌아보건대, 무엇이 성상의 생각을 번거롭게 할 만하기에 전후 경연의 자리에서 한갓 사기(辭氣)를 허비하여 대범[磊落]하고 너그러운 기상에 결함이 있으니, 대성인(大聖人)의 사물이 이르면 순응하는 도리는 아마도 이와 같이 하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부터 이목(耳目)097)  의 자리에 있는 자가 오직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며, 원방에 있는 한미한 무리와 미치광이들이 서로 잇달아 투소(投疏)하게 되었으니 신은 그윽이 개연스럽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비망기(備忘記)에 이미 깊이 생각한 것을 유시(諭示)하였다. 진달한 바의 이현필을 조목으로 열거한 것도 모두 옳다. 그리고 죄율을 따지는 것도 역시 실체를 얻었지만 그 다스리지 않은 것은 위에 말한 하교와 같다. 힘쓰도록 진달한 것도 옳으니,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는가? 대저 이현필이 과거를 도둑질한 것은 대개 명망이 뛰어난 데에서 말미암았고, 이목(耳目)의 관원들이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는 것도 명망이 뛰어난 데에서 연유한 것이며, 단지 잡술(雜術)을 품은 향유(鄕儒)와 고지식한 광생(狂生)들의 〈투소(投疏)만〉 있으니, 세도의 한심함을 볼 수 있다. 시관(試官)의 일은 벌써 하교를 하였거니와, 더구나 상고관(上考官)은 곧 대신이니, 일의 체모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였다.

 

5월 6일 계사

이광운(李光運)을 집의(執義)로, 신치근(申致謹)을 사간(司諫)으로, 민원(閔瑗)을 장령(掌令)으로, 오수채(吳遂采)를 교리(校理)로, 이정보(李鼎輔)를 부교리(副校理)로, 홍창한(洪昌漢)·김광세(金光世)를 수찬(修撰)으로, 이우하(李宇夏)를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5월 7일 갑오

반궁(泮宮)098)  의 유생들이 김숙명(金淑鳴)의 상소로 인혐(引嫌)하고 권당(捲堂)099)  하였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원명(趙遠命)이 모든 유생을 불러서 소회(所懷)를 써서 올리게 하였는데, 임금이 유시하기를,
"그 본래의 일을 경시하고 배척당한 것을 중시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군신의 의리는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 앞장서서 창도(唱導)한 유생은 과거를 정지하고 빨리 다시 성균관으로 들어가도록 권유하라."
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다시 소회를 올리기를,
"이현필의 무상(無狀)함은 신 등이 통렬하게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조정에서 스스로 처분이 있어야 당연하니, 반궁의 유생들이 간섭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미 김숙명이 침범해 꾸짖음을 당하였으니, 감히 편안하게 있을 수 없어서 상솔(相率)하여 권당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이란 경중이 있는 것이니, 이현필의 무상함이 중한가, 말을 하려다가 배척을 당하는 것이 중한가? 현관(賢關)100)  의 기상이 결단코 이와 같이 모호(糢糊)할 수가 없다. 지금 하교(下敎)를 한 뒤에 비로소 무상(無狀)하다고 하였는데, 과연 소회와 같다고 하면 비록 나라에 무장(無將)101)  의 신하가 있더라도 칭탁하기를 스스로 조정이 있다고 하여 역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니, 홀로 저 우뚝한 사현사(四賢祠)102)  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소회를 올린 반열의 우두머리는 다시 과거를 정지시키고 다른 유생은 들어가도록 권유하라."
하고, 임금이 인하여 탄식하기를,
"광생(狂生) 윤혁(尹㴒)을 아직도 태학생(太學生)이라 일컫는데, 태학생이 도리어 이와 같으니 그 역시 용렬하다. 이런 때에 사유(師儒)의 장(長)이 없을 수 없으니, 대사성(大司成) 김상성(金尙星)을 개차(改差)하고 구전(口傳)으로 의망(擬望)하여 김약로(金若魯)로써 대신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8일 을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피인(彼人)들을 접대하는 것은 스스로 정해진 규식이 있는데, 요즈음 연향(宴享) 등의 일을 상역(象譯)103)  의 무리들이 주선하여 감제(減除)하고 자신의 공으로 삼는다. 저들이 만약 스스로 감하였다면 가하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 스스로 감하기를 청하고 우리가 도리어 치사(致謝)한다면 일이 지극히 구차스럽다. 지금부터 연향에 접대하는 등의 절차를 감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이현필에 대해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다스리고자 하였으니, 나 역시 이름 얻기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다. 위에 있는 자가 아무리 진정시키려고 하여도 지금은 아마도 끝내 할 수 없을 듯하다. 그리고 유최기(兪最基)가 논죄하여 열거한 이현필의 세 가지 사건은 옳은 것이나, 고관(考官)에게 아첨을 했다는 등의 말은 시상(時象)을 면치 못한 것이다."
하니, 도제조(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그윽이 전후의 하교를 살펴보건대, 이 일이 끝내 아마도 너무 지나친 데 이른 듯하니, 마침내 어리석은 어린 아이의 이름을 이루는 데 거의 가깝지 않겠습니까? 유최기가 상소한 내용을 극력 참작하여 헤아려 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 말하기를,
"내가 깊이 개탄한 바는 태학생(太學生)의 일이다. 일찍이 미세한 일로 번번이 권당(捲堂)하였고, 지금의 경우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고 배척한 것을 못들은 척하다가 나중에는 곧 권당하여 이현필은 〈용서할〉 근거가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구차함이 심하지 않는가?"
하니, 김재로는 아뢰기를,
"이것은 전하께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관학(館學)은 마땅히 사기(士氣)를 보아야 하는데, 요즈음 경박(輕薄)한 무리가 많아 자주 당론으로 서로 싸우는데도 전하께서는 늘 그것을 진압하도록 하라고 하시며, 색목(色目)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재사(齋舍)에 있게 하였기 때문에 유생(儒生)의 액수(額數)는 항상 그 정수를 넘지만 사기는 떨어지고 매우 잔약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비의 풍습이 이와 같으니, 세도(世道)가 어떠하겠는가?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잘 인도해 거느리지 못한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하였다.

 

5월 9일 병신

병조 판서 윤유(尹游)가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서 임금이 특별히 하교를 내리고 슬퍼하였다. 윤유가 죽을 무렵에 상소하기를,
"오늘날 한없이 많은 일 중에 성궁(聖躬)을 보전해 아끼는 것보다 앞설 것은 없습니다. 성사(聖嗣)104)  를 가르치고 길러서 하늘에 기도하고 나라의 운명을 길게 할 근본을 삼고, 성지(聖志)를 강인하고 크게 하여 한갓 소절(小節)에 구구함이 없게 하시고, 성심(聖心)을 분발하시어 마침내 보합(保合)하고 크게 융화하도록 기약하시며, 내치어 은퇴한 신하를 불러들이고 유일(遺逸)의 선비를 맞아들여 등용하여 함께 협동하고 공경하는 성과를 책임지우소서."
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내리도록 명하였다. 윤유와 그의 아우 윤순(尹淳)은 동시에 임용(任用)되어 기력(氣力)과 간국(幹局)105)  으로써 일컬었으나, 성품이 호걸스럽고 사치하며 성색(聲色)을 좋아하였으니, 사람들이 이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조상경(趙尙絅)을 병조 판서로, 조원명(趙遠命)을 평안도 관찰사로, 심성희(沈聖希)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임상원(林象元)을 봉교(奉敎)로 삼았다.

 

5월 11일 무술

전광 감사(全光監司) 이흡(李潝)이 사폐(辭陛)하자, 임금이 인견하여 선유(宣諭)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호남(湖南) 사람은 습속(習俗)이 괴이한 짓을 숭상하니, 이것은 이단(異端)에 가깝다. 그러나 위력으로 금지할 수는 없으니, 모름지기 교도(敎導)할 바를 생각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건기(兪健基)를 응교로, 김성탁(金聖鐸)을 교리로, 조영국(趙榮國)을 부교리로 삼았다.

 

사헌부 【장령(掌令) 민원(閔瑗)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아뢰기를,
"이현필(李顯弼)의 정시(庭試) 대책(對策)의 글은 구사한 말이 너무 〈이치에〉 어긋나고 마음씀이 지극히 간사하여 처음부터 끝에 이르도록 오직 패만(悖慢)한 말씨로 방자하게 늘어놓았으니, 한마디의 말과 반구의 구절도 대책의 모양이 전혀 없었습니다. 군부(君父)를 업신여기고 핍박하여 엿보고 희롱하는 자료로 삼았으며, 제목 밖의 것을 주어 모아 특이한 계책을 삼으려 하였으니, 이미 지극히 음흉하고 교묘합니다. 그 중 두어 글귀가 하나는 억압해 누르고 하나는 무함하여 속였다고 하였으니, 더욱 신자로서 감히 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또 그 뜻을 보니 분의를 멸시하지 않음이 없으며, 그 말의 맥락을 살펴보니 대단히 불경하였습니다. 청컨대, 전 현감(縣監) 이현필은 빨리 과방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인하여 극변(極邊)에 안치(安置)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대책(對策) 시험의 시권(試券)을 고사(考査)하는 법규에 혹은 그 문사(文辭)가 화려(華麗)한 것을 뽑거나 혹은 그 의견의 절실한 것을 취택하는 수도 있으나, 지금 이현필의 책문은 제목 밖의 것을 주어 모았고 뜻을 씀이 교묘하였으며, 또 그 글은 법식에 어긋났고 정상을 궁구해 보았는데 임금에게 거만하였으니, 신하된 자라면 누구나 한번 글을 보고는 진실로 당연히 머리털이 일어서고 담이 찢어질 것입니다. 단지 시권만 내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오직 죄를 성토함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높은 급제에 발탁해 두었으니, 진정 털끝만큼의 엄숙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청컨대, 대신(大臣) 이외의 여러 시관(試官)을 모두 삭출(削黜)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학문의 공이 아무리 천박하다 하더라도 보잘것없는 이현필을 어찌 짐작하고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군신의 의리를 엄하게 하고 과장(科場)의 도리를 중하게 함에 있어서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벌써 나의 은미한 뜻을 보였었다. 두 건의 일은 계달한 대로 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현필은 벌써 과방에서 삭제하였으니, 극변에 투비(投畀)106)  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2일 기해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김상로(金尙魯)를 부교리로, 윤광의(尹光毅)를 부수찬으로, 권업(權𢢜)을 좌참찬으로, 유엄(柳儼)·송수형(宋秀衡)·유건기(兪健基)를 승지로, 구성임(具聖任)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박찬신(朴纉新)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박찬신은 흉당(凶黨)의 심복으로 을사년107)   후로 박태징(朴泰徵)과 함께 계달하여 귀양 보내기를 청한 자로서 또 그 자질과 명망이 모두 낮았는데, 특히 국사를 담당한 대신(大臣)의 집에서 부리던 사람으로 갑자기 장수의 직임을 제수하였으니, 물정이 놀라고 한탄하였다.

 

5월 13일 경자

집의(執義) 이광운(李光運)이 이현필(李顯弼)의 일로 장차 시험을 주관한 신하를 합사하여 논박하려고 백간(白簡)을 발부하였는데, 정언(正言) 유최기(兪最基)가 정세를 칭탁하고 근실(謹悉)을 쓰지 아니하므로 이광운이 인피(引避)하자, 사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5월 14일 신축

오원(吳瑗)을 승지로, 한익모(韓翼謨)를 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으로, 이덕중(李德重)을 부교리로, 신사건(申思建)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몽고(蒙古)는 종류가 가장 강성(强成)하여 실로 다른 날의 깊은 우려가 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옛날과 지금이 다르기 때문에 통역관이 몽고의 글을 읽어 익힌 자도 몽고 사람을 만나면 전혀 언어가 통하지 못합니다. 지난해 역관 이찬경(李纘庚)이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몽고 사람과 서로 언어를 질정하여 책을 만들어 가지고 왔고, 요즈음 다시 《청몽문감(淸蒙文鑑)》을 얻어 왔으니, 지금부터는 몽고의 학문을 통달하여 해득(解得)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역원(譯院)의 제학(諸學)의 예(例)에 의거하여 몽학 총민청(蒙學聰敏廳)을 설치하고 권과(權課)하여 강습하고 잡과(雜科)에서 시험하여 뽑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현필(李顯弼)의 사건은 대간(臺諫)의 의논이 벌써 발안되었고, 고관(考官)의 계달 역시 이미 윤허하여 따르셨지만, 계달한 내용의 조어(措語)가 짐작하여 헤아림이 모자란 듯합니다. 고관의 평일에 나라를 향한 정성이 전일하여 다른 마음이 없었음은 이미 성상의 하교가 있었으니, 지금 비록 죄벌을 주더라도 그 마음을 굽어살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전에 대략 은미한 뜻을 보인 것은 대개 태학생(太學生)을 격려하는 데 있었다. 이미 이현필을 죄주었을 경우 고관이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경(卿)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내가 헤아린 바가 있었으니, 생각건대 이는 당국(當局)한 자가 미혹(迷惑)한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후일의 폐단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한 번 성상의 뜻을 보이시어 정말로 충직(忠直)한 인사로 하여금 이것으로 경계를 삼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 혹시라도 이로 인하여 아첨하는 습관을 행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마땅히 사건에 따라 경계하고 신칙할 것이다."
하였다. 장령(掌令) 민원(閔瑗)이 인피(引避)하기를,
"오늘날 대신이, 신이 이현필 및 고관의 죄를 논한 것을 가지고 짐작해서 헤아리지 않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아! 이 사건이 나온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는데 대신이 한마디 말도 죄를 청함이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하고 보호하여 오직 혹시나 손상될까 두려워하였으니, 신이 통탄하는 바는 다른 사람이 이와 같은 악한 말로 대신과 중신에게 가하였다면 조정에서 죄를 청하는 의논이 반드시 이와 같이 고요한 데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지위가 낮고 사람됨이 미약하나 그 임무는 언책(言責)이니, 말한 바는 한 개인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곧 한 나라의 공의(公議)였습니다. 대신의 지위가 비록 높으나 어찌 힘으로 공의(公議)를 억제하고 곧 다시 이미 윤허한 대간의 말을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윽이 대신을 위하여 취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목(耳目)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용하였다는 의논은 이미 실체를 얻었다. 조어(措語)는 바르게 경계하여 깨우치는 데 지나지 않았는데 도리어 비난하고 조소하니, 이미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하였다.

 

5월 15일 임인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인혐(引嫌)하기를,
"지금 이현필(李顯弼)의 사건을 맨 먼저 통렬하게 미워하여 진열(陳列)한 자도 신이요, 삼사(三司)의 신하들을 기다려 확실히 의논하고 죄를 정하도록 청한 자도 신이니, 말류(末流)가 혹시 모람될까 두려워하고 후폐(後弊)가 혹시 불어날까 염려한 것 역시 성명(聖明)을 위하고 조정을 위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만약 이것으로 동료나 재상을 구원하고 비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간혹 근사(近似)하지만 이현필을 구원하고 비호한다고 말한 것은 어디에 의거하여 나온 것입니까? 더구나 신이 어제 진달한 바는 단지 장래를 우려한 것이요, 원래 이미 마감된 사건을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그 짐작해서 헤아리는 것이 모자란다고 이른 바는 대개 법률을 적용할 경우에는 극변(極邊)으로 하고 조어(措語)인 경우에는 일죄(一罪)108)  로 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신(臺臣)에게 무슨 노여워할 만한 것이기에 능멸하고 업신여기며 단속을 가하여 공의를 극력 억제한다는 말을 극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중도에 지나쳤다는 비난과 조소를 어찌 족히 개의(介意)할 것이 있는가? 사임하지 말고 바로 나와서 정사를 돌보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6일 계묘

양사(兩司) 【집의(執義) 이광운(李光運), 장령(掌令) 민원(閔瑗), 정언(正言) 신사건(申思建)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정권을 잡은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하여 밖으로는 탕평(蕩平)의 이름을 빌려 임금의 총명을 현혹시키고 안으로는 편벽되고 사사로운 계획을 품어 세도(世道)를 병들게 하니, 참으로 벌써부터 인심에 불평을 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투비(投畀)된 죄인 이현필(李顯弼)이 정시(庭試)의 책문(策文)에서 감히 임금을 업신여기는 말을 하였고, 몰래 교묘하게 중상하는 계책을 행하면서 꾸짖고 핍박한 무엄(無嚴)한 정상은 많은 사람이 보고 모두 놀랐으니, 준비하여 미리 얽어놓은 자취는 한 번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글은 이미 법식을 어겼으며 정리는 이미 도리에 어그러졌습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당연히 과거(科擧)의 법을 엄수하고 사사로운 뜻을 끊어 버려 단지 시권(試券)을 내치는 데 그칠 뿐만 아니라 진실로 죄를 성토하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극구 찬양하면서 고제(高第)에 뽑아 두고, 심지어는 우리들이 감히 말하지 못할 바를 감히 말한다고 하여 진정 바른말하고 극력 간하는 자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성상께서 통촉하고 여정(輿情)이 일제히 격렬하여지는 날에 이르자 들어가서는 황미(荒迷)하고 군색한 말로써 성상의 밝은 총명을 엄폐하며, 나와서는 영합(迎合)하고 순종하여 받드는 안목으로 여러 사람의 입을 겸제(鉗制)하였으니, 마음과 입이 서로 어긋나고 손과 발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아! 평일에 전하께서 대신을 돌아보고 도와줌이 어떠하였는데 대신이 나라를 저버리고 사심을 경영하여 방자한 뜻으로 농간을 자행함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 고시(考試)할 때를 당하여서는 중난하게 여기는 말을 쟁집(爭執)하여 일체 억누르고 선발을 담당하였는데 더구나 자구(字句)를 도말(塗抹)한 것이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 말의 뜻이 패만(悖慢)함을 처음부터 모르지 않았을 것이니, 결단코 그대로 두고 논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우의정 송인명을 우선 먼저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신사건(申思建)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문형(文衡)109)  은 고시(考試)의 책임자로서 다른 사람과는 특별히 구별이 있는데 이현필의 법식에 어긋나고 임금을 업신여긴 글을 뽑아 취택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고시(考試)에 참여한 여러 신하보다 더 중함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의가 함께 분발하던 날에 한 소장(疏狀)을 올리고는 전혀 인죄(引罪)하는 말 한마디도 없이 도리어 나쁜 줄 알면서도 하고 마는 계책을 행하여 은연중 정직한 과거(科擧)에 돌렸으니, 그 방자하고 무엄한 정상은 진실로 지극히 통탄하고 놀랄 일입니다. 청컨대, 당시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그리고 한 번 이현필의 과거의 책문(策文)이 나옴으로부터 인심이 놀라고 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는데 직책이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끝내 한마디 말도 없으니, 청컨대 전후로 말하지 않은 대간(臺諫)은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양사(兩司)에 답하기를,
"이현필의 무상함은 벌써 알았으나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다스리려 한 것은 기미를 이용하여 함부로 날뛰는 폐단을 진압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현필을 이미 처분하였고 다른 고관(考官)도 또한 삭직(削職)을 하였다면 명관(命官)110)  을 어찌 처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대신(大臣)은 사체(事體)가 다른 사람에게 비교할 것이 아니며, 이는 임시로 잘못을 저지른 데에 지나지 않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다시 사간원에 답하기를,
"앞서 대제학의 일은 비록 담당하지 않았다고 하나 그 역시 순박하고 정직한 것이니, 지금 죄율을 적용하면 역시 지나치지 않은가?"
하고,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이현필을 이미 처분했다면 그 때의 고관(考官)을 또한 어찌 처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시상(時象)이 우상(右相)에게 분노를 품어 감히 이 일로 인하여 뜻을 방자하게 하고 무함을 얽었는데 몇년을 쌓아 온 고심(苦心)이 어찌 이현필을 죄주는 것으로 인하여 풀릴 수 있겠는가? 엄중히 처분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으니, 오늘 대각(臺閣)에 나온 여러 신하를 먼저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하교하기를,
"무릇 일은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이 있으니, 고관의 경우는 뜰에 가득한 시권(試券)으로 총망(怱忙)한 가운데에서 무심히 한 일이요, 대신(臺臣)의 경우는 며칠 동안 사색(思索)해서 이현필의 일을 기회로 삼아 대신(大臣)을 임금을 배반하고 사사로운 데로 치우치는 죄과로 얽어 넣었으니, 이는 유심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대신(大臣)에게 그 누구를 속이려고 하는 것인가 하고 일렀는데, 이런 등속의 심정과 태도로써 역시 감히 누구를 속이려 드는가? 체차에 그치는 것은 옳지 못하니, 모든 대신(臺臣)을 함께 삭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양사(兩司)에서 송인명(宋寅明)을 논평한 계사는 머리말 두어 글귀에서 역시 그 정상을 엿보아 깨뜨렸으나, 그 성총(聖聰)을 현혹하고 세도(世道)를 병되게 한 죄를 논할 것 같으면 어찌 인심이 불평(不平)한 것에만 그치겠는가? 송인명이 국권을 잡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으나 한 사람도 감히 말하는 이가 없더니, 지금 이현필의 사건이 발단됨으로 인하여 비로소 임금의 뜻을 헤아리고 그 과실을 대충 말하였으니, 임금의 하교에서 기회를 틈타 원한을 갚으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을 진실로 스스로 해명할 수가 없다. 대저 이현필은 과거(科擧) 욕심에 급급하여 뜻을 씀이 음흉하고 간사한 데 지나지 않았으나, 고관(考官)의 경우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 도모해 갚을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당류를 구원해 빼내는 것으로 급무를 삼아 군부(君父)의 과실을 드러내 폭로하였으니, 그 죄가 진실로 이현필보다 훨씬 더함이 있다. 그러므로 임금이 그를 죄주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도리어 작은 혐의를 핑계대므로 능히 처분하지 못한 것이며, 대개 대각(臺閣)의 의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또 전후의 모순을 염려하고 좌우에서 부추기고 억제하여 과단성 있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통탄함을 견디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49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양사(兩司)에서 송인명(宋寅明)을 논평한 계사는 머리말 두어 글귀에서 역시 그 정상을 엿보아 깨뜨렸으나, 그 성총(聖聰)을 현혹하고 세도(世道)를 병되게 한 죄를 논할 것 같으면 어찌 인심이 불평(不平)한 것에만 그치겠는가? 송인명이 국권을 잡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으나 한 사람도 감히 말하는 이가 없더니, 지금 이현필의 사건이 발단됨으로 인하여 비로소 임금의 뜻을 헤아리고 그 과실을 대충 말하였으니, 임금의 하교에서 기회를 틈타 원한을 갚으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을 진실로 스스로 해명할 수가 없다. 대저 이현필은 과거(科擧) 욕심에 급급하여 뜻을 씀이 음흉하고 간사한 데 지나지 않았으나, 고관(考官)의 경우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 도모해 갚을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당류를 구원해 빼내는 것으로 급무를 삼아 군부(君父)의 과실을 드러내 폭로하였으니, 그 죄가 진실로 이현필보다 훨씬 더함이 있다. 그러므로 임금이 그를 죄주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도리어 작은 혐의를 핑계대므로 능히 처분하지 못한 것이며, 대개 대각(臺閣)의 의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또 전후의 모순을 염려하고 좌우에서 부추기고 억제하여 과단성 있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통탄함을 견디겠는가?

 

5월 17일 갑진

상소한 유생(儒生) 백상정(白尙鼎)·이정중(李廷重)을 도배(島配)하고, 조언국(趙彦國)의 상소는 되돌려 주었다. 백상정 등이 또 이현필(李顯弼)을 토죄하기를 청한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아! 통탄스럽습니다. 이현필의 죄를 어찌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정대(庭對)하는 글을 빌려 군부(君父)의 과실을 수죄(數罪)한 것이 자그마치 26조(條)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그 ‘독부(毒痡)’란 두 글자는 본래 출처가 있는데 은연중에 삽입하였으니, 그 마음의 자취를 궁구해 보면 곧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이 하늘을 꾸짖고 해를 나무라는 수단과 한 계통으로 전해온 것입니다. 무릇 전하를 위하는 신하라면 누가 〈그의〉 고기를 먹고 가죽을 깔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저 고관의 무리들은 청명(淸名)하고 직절(直節)한 선비를 만들어 가지고 유궤(劉簣)의 책문111)  에 비교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한다면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박규문(朴奎文)이 전한 바 윤유(尹游)의 말은 오늘날 나라가 망함을 형용한 것이니, 옛말에 이르기를, ‘그 형체를 보지 못하였거든 그 그림자를 살피기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권리와 기강을 총람(摠攬)하시어 군주의 위복(威福)을 아래로 옮겨 감이 없게 하시면, 전의 후승(前疑後承)과 좌보 우필(左輔右弼)의 사이에 제마음대로 우롱하는 습관은 거의 근절이 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태학생이 염치없이 다시 태학에 들어온 것과 대사성(大司成)이 상소의 내용을 가로막은 죄를 진달하였으며, 조언국(趙彦國)이 역시 소장을 진달하여 이현필의 머리를 베어 팔로(八路)112)  에 반포해 보이고 겸하여 고관(考官)에게는 먼 지역으로 추방하는 법전을 베풀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백상정·조언국 등을 조정으로 불러 그것을 짓고 쓴 자를 묻자, 백상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글을 지었으며 글씨를 쓴 사람은 이정중입니다."
하고, 조언국은 말하기를,
"이것은 신이 직접 지어서 직접 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그대의 마음대로 한 것인가, 누가 지시하여 사주(使嗾)함이 있던 것인가?"
하니, 조언국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아마도 실언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신이 방금 임금을 무함(誣陷)한 이현필을 성토한 것이 충성과 분노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지시하여 사주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와 같이 한 것은 이현필이 미워서인가, 고관(考官)이 미워서인가?"
하니, 조언국이 말하기를,
"사람이 그 부모를 욕보이는 자가 있으면 문득 그의 고기를 먹고 싶은 심정이 있는 것인데, 지금 이현필이 군상(君上)을 무욕(誣辱)하였으니 어찌 성토를 청하는 거조가 없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사람이 이를 벨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만, 단지 마음대로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손수 죽이지 못함을 한할 뿐입니다. 명관(命官)이 은혜를 입고 대우를 받은 바가 어떠했는데, 이에 도리어 임금을 모욕한 글을 뽑아 취한 것입니까? 신은 단지 임금이 모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는 의리만 알고 이 상소를 올렸습니다.
또 듣건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명균(徐命均)과 부원군(府院君) 어유귀(魚有龜)는 이현필의 일로써 다투어 힐난하였는데, 어유귀는 역적이라고 하였으나 서명균은 도리어 직절(直節)로 허여(許與)하였습니다. 이현필이 귀양을 갈 적에 서명균은 또 술과 음식을 대접하여 전송하였고, 윤득화(尹得和)는 전라 감사(全羅監司)로서 다담상(茶啖床)을 차려서 이현필을 관대(款待)하였는데, 그가 올린 장계(狀啓)에는 중도에서 병을 얻어 처음부터 부임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윤득화의 심장(心腸)은 서명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조언국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매우 기백이 있구나! 나의 처분이 그대의 무리들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하고, 소(疏)를 가지고 물러가도록 명하였으며, 다시 하교하기를,
"지금 처분을 한 뒤에 이시(羸豕)113)  의 무리가 어찌 감히 기미를 타고 다시 날뛰겠는가? 상소를 한 유생(儒生)이 명색은 비록 이현필을 성토한다고 하였으나, 마음은 조정의 진신(縉紳)을 얽어 무함하는 데 있었으니, 소두(疏頭) 백상정과 소를 쓴 이정중은 모두 도배(島配)의 율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니, 승지(承旨) 송수형(宋秀衡)이 그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고, 백상정은 고금도(古今島)에, 이정중은 지도(智島)에 유배하도록 하였다.

 

5월 18일 을사

임금이 팔이 아파서 침(鍼)을 맞았다. 조정(朝廷)에서 문안을 하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도록 명하고 물러갈 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승정원(承政院)의 계달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 간언(諫言)을 하지 않은 대간(臺諫)은 계달한 대로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정(柳綎)·임정(任珽)을 승지로, 신택하(申宅夏)를 응교로, 박필주(朴弼周)를 집의로, 권현(權賢)을 장령으로, 성범석(成範錫)을 정언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합계(合啓)의 요량(料量)한 것이 너무 부족하다고 하여 분명히 회유(誨諭)하고 책망을 내린 것은 불가하지 않습니다만, 많은 대간(臺諫)을 일체 아울러 삭직(削職)한 것은 끝내 중도(中道)에서 지나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진정(鎭定)시키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 요상(僚相)의 본심에 벌써 통촉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비록 중한 형벌을 당하더라도 진실로 한할 것이 없겠으나, ‘서용하지 말라[不敍]’는 두 글자를 대신(大臣)에게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옳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고관(考官)의 일은 다만 그 과실만을 논평하였는데, 무슨 불가한 일이 있어서 감히 늘 분노하고 한스러웠던 것을 갚기 위한 몇년 동안의 고심(苦心)을 막으려 하는가? 전(傳)에 ‘인(仁)한 자라야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고 이르지 않았던가? 공변된 마음으로 미워한다면 어찌 감히 거듭 격동을 하겠는가? 더구나 곧은 것을 들어 쓰고 굽은 것은 버리라는 말은 성인의 가르치심이니, 그 처분해야 할 바를 그만둘 수는 없다. 그리고 ‘서용하지 말라[不敍]’는 두 글자는 모두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것을 참작하고 헤아린 것이지만, 경(卿)이 차자(箚子)로 진달한 것을 보고 전례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왕자(王者)의 처분은 예(禮)로써 하는 것이 마땅하니, 전지(傳旨) 가운데 부표(付標)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도 고령현(高靈縣)에 민가의 여자가 한꺼번에 네 사내아이를 낳았다.

 

5월 19일 병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공홍도 감사(公洪道監司) 이주진(李周鎭)이 사폐(辭陛)하자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호서(湖西)는 창상(創傷)의 잔폐(殘廢)함을 겨우 겪어 민물(民物)이 소생되지 못하였고, 또 사대부가 많아서 경사(京師)114)  와 다름이 없으니, 도신(道臣)이 부축하고 억제하여 균평을 이룬 연후에야 바야흐로 진압할 수 있다. 경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주진이 청하기를,
"공산(公山)과 홍주(洪州) 두 고을에서 세금으로 내는 대동미(大同米) 중 봉납하지 않은 것은 본고을에 받아두고 그대로 조적(糶糴)115)  으로 만들도록 하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명예를 요구하는 폐단을 내가 일찍이 통탄스럽게 여겨 왔다. 경(卿)은 곧 선경(先卿)의 소박하고 정직함을 본받고 명예를 요구하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말며 반드시 양리(良吏)를 취하도록 하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는 가정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나의 말을 저버리는 것이다. 옛날 제왕(帝王)의 전조(田租)를 감해 준 것116)  도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니, 아랫사람이 감히 청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대동미(大同米)의 조세가 미수된 것을 구실삼아 번번이 조적으로 만든다면 이후로는 장차 유정지공(惟正之供)117)  이 없게 될 것이니, 사체가 매우 미안하다."
하였다.

 

유만중(柳萬重)을 승지로, 김상로(金尙魯)·이덕중(李德重)을 부교리로, 윤광의(尹光毅)를 부수찬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특별히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를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는데, 김재로가 들뜨고 시끄러운 무리를 잘 진압하여 복종하도록 하지 못한 것으로 인죄(引罪)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근일의 사건은 나라를 위해 기쁘고 경(卿)을 위해서도 기쁘다. 대체로 민원(閔瑗)과 두 유생(儒生)들의 괴이한 거조(擧措)는 정말 놀랄 만한데 경은 곧 그것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니,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현필의 사건은 신의 통렬하게 미워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뒤지지 않지만, 지난날 입시(入侍)하였을 적에는 일이 요상(僚相)에게 관계되어 함께 한자리에 부복(俯伏)하였기 때문에 진달한 말에 능히 다하지 못함이 있었고, 신의 본래의 뜻도 역시 대략만 진달하였습니다. 대저 이현필의 사건을 오늘 처분하는 것은 진실로 방해되지는 않으나, 만일 가율(加律)을 하는 거조가 있으면 이는 단연코 옳지 못합니다."
하닌, 임금이 말하기를,
"이현필에게는 비록 가율(加律)하더라도 가하지만, 대신(臺臣)들의 뜻이 오로지 이현필에게 있지 않으니, 역시 명분과 실상이 서로 혼동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처분을 이 정도에서 그치게 한다."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가 과천(果川)에 있으면서 전정(殿庭)의 문후(問候)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인구(引咎)하자,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하였다.

 

5월 20일 정미

임금이 침(鍼)을 맞았다.

 

이하원(李夏源)을 대사헌으로, 윤득화(尹得和)를 대사간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사간으로, 안성(安晟)을 장령으로, 임집(任)을 지평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정언으로, 김광세(金光世)를 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그리고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병으로 면직되고, 이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을 옮겨 제수하였는데, 대개 송진명이 오래도록 전임(銓任)118)  을 사양하였었다.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병으로 면직되었으므로 민응수(閔應洙)를 발탁하여 그를 대신하도록 하였으며, 김동필을 이조 판서로, 조상경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민응수는 사람됨이 아담하고 정숙하며 지위와 인망이 또한 넉넉하였으나, 차서를 뛰어 넘어 갑자기 발탁한 것은 대개 국사를 담당한 대신들이 추천하고 후원한 힘이었다.

 

함경도 남관(南關)에 황충(蝗蟲)이 밀·보리를 갉아 먹었고, 북관(北關)에는 비와 눈이 내렸다.

 

5월 21일 무신

임금이 침(鍼)을 맞았다.

 

5월 22일 기유

임금이 송인명(宋寅明)이 명(命)을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하교하기를,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도리가 어찌 직명(職名)의 있고 없는 데 구애되겠는가?"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도록 하였는데, 대개 특이한 은혜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가 오래지 않아서 다시 상신(相臣)으로 들어올 것을 알았다.

 

교리(校理) 김성탁(金聖鐸)을 잡아들여 국문(鞫問)하라고 명하였다. 김성탁은 지난해에 유생(儒生) 신헌(申𨯶) 등이 상소하여 그의 스승 이현일(李玄逸)을 욕하자, 사직하는 소를 올려 그 원통함을 호소하여 이르기를,
"이현일의 애매한 원통이 벌써 40여 년에 이르렀는데, 지금 또 이렇게 전에 없었던 후욕(詬辱)을 만났으니, 신이 생삼 사일(生三事一)119)  의 의리(義理)로써 어찌 차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현일이 아직도 죄인의 문적 중에 있는 것은 기사년120)   가을에 응지(應旨)한 상소 중 한 글귀의 말 때문인데, 그 글 전체의 본의(本意)로 볼 것 같으면 실제로 성모(聖母)121)  를 위해 존안(尊安)하는 도리를 이루고 선왕을 위해 처변(處變)하는 의리를 다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묘년122)  의 사환(賜環)123)  과 신사년124)  의 전석(全釋)과 신묘년125)  ·경자년126)  의 복관(復官)이 비록 혹은 실행이 되고 혹은 정지되기도 하였으나, 이미 임금께서 굽어 통촉하심을 받았으며, 또한 상신(相臣)이 평반(平反)127)  하였다면 그 본래 심정의 다름이 없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현일은 기사년 초두(初頭)에 멀리 시골에 있었고, 사업(司業)128)  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4월에 있었는데 광주(廣州)에 도착하여 곤궁(坤宮)129)  을 위해 소장을 진달하였으나 후원(喉院)130)  의 저지를 당하여 올려 보낼 수 없었으니, 이 흉론(凶論)을 주장했다고 이르는 것은 역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전하께서 기사년의 사건을 선천(先天)에 붙인 줄 압니다만, 그윽이 스스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신의 연고로써 욕이 사문(師門)에 미치므로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꺼리고 숨기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승정원(承政院)에 이르자 승지(承旨) 유엄(柳儼)·유정(柳綎)·유만중(柳萬重)·정필녕(鄭必寧)·송수형(宋秀衡)이 아뢰기를,
"이현일은 죄범(罪犯)이 지극히 중한데 어찌 감히 방자하게 신구(伸救)하여 변명하며, 선천(先天)에 붙였다는 등의 말은 더욱 극도로 흉패하여 윤기(倫紀)가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그 소를 받들어 들이니,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當上)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김성탁의 상소의 내용은 진실로 지극히 놀랍고 통탄스럽습니다. 대저 이현일의 죄는 감히 여덟 글자의 흉악한 말로 제목을 만들어 말하지 못할 자리에까지 논단하였고, 또 심지어는 그가 육례(六禮)로 맞이한 바라고 운운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신자(臣子)가 감히 말할 바이며, 말단(末端)에 방위(防衛)하고 규금(糾禁)한다는 말 역시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성모(聖母)께서 사제(私第)에 거처하였기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이 위태로운 말을 많이 만들어 의심하고 동요하도록 하는 계획을 삼았으며, 이현일이 처음 영남(嶺南)에 있을 적에는 글 읽은 사람으로 일컬었으나, 실제로는 식견(識見)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당시 무리들의 종용(慫慂)한 바가 되어서 이 상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피(彼)’ 자 이하가 더욱 극도로 사리에 어긋나고 완만하다는 것은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현일이 목숨을 보존하게 된 것도 실제로 괴이한 일인데, 갑술년131)  에 절도(絶島)에 천극(栫棘)132)  되었다가 여러 해 뒤에 비록 사면(赦免)으로 인하여 용서받고 집안에서 죽기는 하였으나 끝내 직첩(職牒)을 돌려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성탁이 방자하게 신구(伸救)를 하려고 혹은 욕이 사문(師門)에 미친다고 이르고 혹은 애매한 원통이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전하 앞에서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당론(黨論)에 가까운 것은 혹 선천(先天)에 붙이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김성탁이 곧 기사년133)  의 일로 비의(比擬)하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기고 윗사람을 무함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전하께서 이만유(李萬維)가 상소하여 두 선정(先正)을 논핵함을 인하여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선천(先天)에 붙이도록 하라고 이른 바는 곧 신축년134)   이후의 당론(黨論)을 지적한 것이다. 선조(先朝)에서 이미 결정한 처분을 그가 어찌 감치 추론(追論)을 하는가?’ 하시고 마침내 이만유를 귀양보내도록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일은 위로 선후(先后)에 관계되므로 이만유에게 비교하면 그 경중이 현격히 다르니, 처분을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성탁이 비록 영남에서 명망과 칭송은 조금 있으나 실제로 학문하는 유일(遺逸)의 선비가 아닌데, 전하께서 그를 대우하는 바가 너무 지나치므로 영남 사람들 역시 더러는 비웃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또 실제로 은혜를 믿고 무엄(無嚴)하게 구는 데 연유하여 이루어졌으니, 이시척촉(羸豕蹢躅)의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성탁이 갈(褐)옷을 벗고 처음 벼슬을 한 후로 내가 시(詩)를 내려 ‘내 금마문(金馬門)을 출입하는 문학의 신하가 되리로다.[爲我金門文學臣]’라는 글귀가 있었으니, 이는 대개 미리 홍문록(弘文錄)135)  에 오르도록 허락함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의 상소에 자못 기미(幾微)가 있기에 진실로 벌써 그를 의심하였더니, 소대(召對)할 때에 미쳐 아뢴 바 그 뜻이 더욱 깊기에 내가 일찍이 후회하였다. 이현일의 사건에 이르러서는 내가 후생(後生)으로서 어찌 능히 상세히 알겠는가마는 단지 성모(聖母)를 복위(復位)한 거조는 선왕(先王)의 처분이 빛남을 알았고 당시의 일을 차마 다시 들추어 낼 수가 없었으며, 역시 여러 아랫사람들에게 물어본 바도 아니기 때문에 일찍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비록 세초 단자(歲抄單子)136)  로 관찰하더라도 죄의 명목이 지극히 중대하며, 상소 중의 여덟 글자는 이미 극도로 흉악하고 참혹하여 ‘피(彼)’ 자 이하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하겠으니 극률(極律)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당시 대신(大臣)이 누구였던가?"
하자, 연신(筵臣)이 대답하기를,
"남구만(南九萬)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현일은 경자년137)   겨울 세초(歲抄)에 들었는데 그 당시 대계(臺啓)에 환수(還收)하라는 청이 있었고, 내가 마침 사정전(思政殿)월랑(月廊)138)  에 있으면서 들었는데, 내관(內官) 중에 저들을 두둔하는 자가 있어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것으로 비답하도록 청하였으니, 내가 지금까지 그것을 놀랍게 여긴다. 그러나 무신년139)   이후로 영남 사람이 오히려 근본에 밝지 않기 때문에 내가 늘 염려하였다. 김성탁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오늘의 처분이 만약 엄중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자못 진정시켜 복종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下敎)가 실로 깊고 먼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김성탁이 단지 이현일을 위하여 드러나게 호소할 뿐만이 아니라 감히 선천(先天)에 붙일 것을 말하였으니, 전하께서 만약 기사년의 일을 선천에 붙여 잊어버린다면 도리에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은 일이 성궁(聖躬)에 소속된 것과는 다르니, 처분을 반드시 엄절(嚴截)히 한 후에야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현일이 이미 극률(極律)에서 벗어났다면 김성탁에게 바로 대불경(大不敬)으로 죄를 주는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현일의 상소는 숙종(肅宗) 때에 나왔으니 당시에 사형을 용서한 것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에 방해되지 않았으나, 김성탁의 상소에 감히 성조(聖朝)에 대하여 진달한 것은 그 죄가 도리어 지나침이 있습니다. 비록 바로 극률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엄중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고 김성탁의 상소를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보이고 그 뜻을 진달하도록 하였는데, 이조 참판 정석오(鄭錫五)·공조 참판 김시형(金始炯) 등이 모두 엄중히 처리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전교(傳敎)를 쓰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아! 세속의 풍습(風習)이 날로 저하되어 인심이 이에 빠져드니, 만일 병이(秉彝)140)  의 마음이 있다면 인신(人臣)이 된 자가 어찌 감히 옛날의 일을 오늘날 장주(章奏)에 올려 쓰겠는가? 과궁(寡躬)이 비록 성효(誠孝)가 천박(淺薄)하나 역적을 징계하는 의(義)와 선대의 사업을 승계하는 도리는 본래 마음속에 정해져 있는데 그것을 엿보고 떠보려 하니 지극히 무엄(無嚴)하다. 아! 이현일의 기사년 상소는 음흉스럽고 매우 패만(悖慢)했으니,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요행히 왕법(王法)을 면한 것도 관대한 성은(聖恩)이 아님이 없으니, 아무리 평일에 이현일과 뜻이 합한 자라 하더라도 오직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감격하여 축하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한데, 감히 도리어 불만스러운 마음을 가슴에 품었으니 지금 김성탁에게서 더욱 알 수 있다. 이것은 윤상(倫常)에 관계되니, 이시(羸豕)의 조짐일 뿐만이 아니다. 항상 영남을 돌보고 추로(鄒魯)141)  의 고을로 대접한 것은 옛날 차별 없이 대우한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는 것이니, 영남 유생의 도리에 있어서는 당연히 옛날 것을 고치고 새것을 힘써서 크게 올바른 데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비록 이기기를 힘쓴다고 하더라도 윤의(倫義)가 크게 관계되는 곳에 오히려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그리고 김성탁으로서는 조금이라도 의리를 안다면 그가 음관(蔭官)으로부터 돌보고 대우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이런 무엄(無嚴)한 말로 감히 현혹하려 하는가? 이현일의 상소는 이미 악역(惡逆)을 범하였고, 지금 이 거조는 역시 난역(亂逆)을 보호하는 데로 돌아가게 되며, 더욱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맨끝 부분에 신이 안다는 등의 말이다. 난역을 비호하고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데는 스스로 그 죄율(罪律)이 있으며 그의 원래의 상소가 역시 결안(結案)하기에 충분하지만, 그 윤의(倫義)를 밝히고 국체(國體)를 엄하게 하며 이상(履霜)142)  을 경계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친히 문초하여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여 보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왕부(王府)143)  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본래 너그럽고 인자하시어 김성탁을 잡아다 국문(鞫問)한 뒤에 차마 죄율을 따져 적용하지 못하고 혹시나 앞서 조덕린(趙德隣)의 처분과 같이 한다면 도리어 국문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니, 난역을 징계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일은 비록 혹 이와 같이 하더라도 내가 기사년 일에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전하의 처분이 간혹 처음에는 엄절하나 나중에는 느슨한 일이 있으니, 어찌 우러러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함경북도 훈융진(訓戎鎭)의 강 건너편 후춘(後春)의 들에 청인(淸人)이 많이 와서 집단적으로 살았는데, 그 수효가 수천에 이르렀다. 혹은 도망온 오랑캐라고 하고 혹은 청나라 내지(內地)로부터 이사해 와서 산다고 하였는데, 왕래가 무상(無常)하여 사정을 추측하기 어려웠지만 변신(邊臣)이 그 즉시 아뢰지 않으므로 김재로가 경원(慶源)·온성(穩城)·훈융(訓戎)·미전(美錢) 등의 관원은 모두 잡아올려 조처하며,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변방을 방비하도록 엄하게 신칙하고 저들의 동정을 정탐하여 보고하도록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윤광신(尹光莘)이 사폐(辭陛)하고 입대(入對)하여 변금(邊禁)을 준엄하게 하여 범월(犯越)을 근절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와 저들이 모두 기강이 없으니, 그것이 범월하는 까닭이다.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격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이런 폐단이 있으니, 만약 다시 더 엄하게 한다면 한갓 강변만 소요하게 할 뿐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북쪽 오랑캐 땅으로 도망하지 않으면 남쪽 월(越)나라로 도망한다.’ 하였으니, 이것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안주(安州)는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에 해당하는데 성(城)이 좁아 지키기 어렵고, 성밖 남당촌(南塘村)은 사람과 재화(財貨)가 모이는 곳이라 변란(變亂)을 당하면 도적에게 약탈을 입기가 쉬우니, 다시 한 성(城)을 더 쌓아서 남당촌을 감싸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청컨대, 윤광신으로 하여금 그 편리한 여부(與否)를 상탁(商度)해서 보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金尙魯)를 교리로, 윤광의(尹光毅)를 수찬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부교리로 삼았다.

 

5월 24일 신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유엄(柳儼)이 고양이 가죽이 팔 아픈데 이롭다고 하여 임금에게 시험해 보도록 청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내 일찍이 여러 마리의 고양이가 궁궐 담장 사이를 왕래하는 것을 보았는데 차마 그 가죽으로 병을 치료하는 데 쓰지는 못하겠으니, 이 역시 포주(庖廚)를 멀리하는 마음이다."
하였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주청사(奏請使)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지금 이 주청문(奏請文)은 외의(外議)가 모두 간곡(懇曲)함을 위주(爲主)로 힘쓰라고 하였으니, 만약 동조(東朝)에서 기대(企待)한다는 뜻으로 말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주청(奏請)이 사체(事體)가 비록 중하더라도 피국(彼國)은 명나라[皇明]와 다르니, 어찌 이런 것으로 중함을 빙자(憑藉)하겠는가? 다만 내 나이가 점점 많아지므로 기망(企望)이 매우 간절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서명균이 또 청하기를,
"가까운 규례에 의하여 은 7만 냥을 가지고 갈 것이며, 또 들으니, ‘피국(彼國) 12왕(十二王)144)  이 총리 예부(摠理禮部)로서 우리 나라 일을 관할하는데, 지난번 역관 이추(李樞)가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12왕이 불러보고 약삼(藥蔘) 2근을 요구했다.’고 하니, 아울러 가지고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주문(奏文) 중에 동조(東朝)의 요청으로 중함을 빙자(憑藉)하는 것은 한갓 사신(使臣)의 일이 이루어지기만 바란 것이며, 사체(事體)상 감히 못할 것에는 전혀 어두웠으니, 아주 무식하다고 말할 만하다. 명나라와 다르다는 하교는 족히 대신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함이었다. 또한 근세(近歲)에 피중(彼中)에 일이 있으면 오로지 은화(銀貨)를 써서 일을 끝내는 바탕을 삼으니,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게 되면 시내와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울 수 없고 한정이 있는 재물이 장차 바닥이 날 것이니,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한두 역관[譯舌]이 재화를 가지고 내왕하여도 충분할 것인데, 어찌 전대(專對)145)  할 사람을 쓰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5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 의약(醫藥) / 무역(貿易)


[註 144] 12왕(十二王) : 열두 번째 되는 왕자.[註 145] 전대(專對) : 타국에 사신으로 가서 군명(君命)을 완수함.
사신은 논한다. 주문(奏文) 중에 동조(東朝)의 요청으로 중함을 빙자(憑藉)하는 것은 한갓 사신(使臣)의 일이 이루어지기만 바란 것이며, 사체(事體)상 감히 못할 것에는 전혀 어두웠으니, 아주 무식하다고 말할 만하다. 명나라와 다르다는 하교는 족히 대신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함이었다. 또한 근세(近歲)에 피중(彼中)에 일이 있으면 오로지 은화(銀貨)를 써서 일을 끝내는 바탕을 삼으니,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게 되면 시내와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울 수 없고 한정이 있는 재물이 장차 바닥이 날 것이니,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한두 역관[譯舌]이 재화를 가지고 내왕하여도 충분할 것인데, 어찌 전대(專對)145)  할 사람을 쓰겠는가?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副應敎)로, 조명리(趙明履)·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병상(李秉常)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김동필(金東弼)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삼았다.

 

5월 25일 임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제학(提學) 윤혜교(尹惠敎)가 바야흐로 죄로써 파직되었으므로 칙사(勅使)를 맞이할 교문(敎文)을 지어 올릴 사람이 없다고 하여 특별히 윤순(尹淳)의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게 하였고, 아울러 대신(臺臣)이 죄로써 파직된 자를 다시 서임(敍任)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경연(經筵)이 오래도록 정지되었으므로 옥당(玉堂)146)  에 엄중히 신칙(申飭)하고 즉시 나와서 사례하도록 하였으며, 이어서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김성탁(金聖鐸)을 잡아온 뒤에 처분을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현필(李顯弼)은 참으로 간사하고 음흉하며 사리에 어긋나지만, 세상에서 진실로 충직하다는 말이 있었다면, 어찌 마음을 비우고 아름답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이런 뜻을 사령(辭令)의 사이에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현필로 인하여 온 세상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품도록 하겠는가?"
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합계(合啓)한 대관(臺官)을 삭직(削職)하게 한 것은 끝내 너무 지나친 일입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제도로 다스리는 규모(規模)를 대신(臺臣)이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대개 시험을 보는 일로 인하여 그 평일의 일도 아울러 논평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물러갈 때가 임박하여서는 선온(宣醞)147)  하였다.

 

5월 26일 계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약로(金若魯)·신만(申晩)을 승지, 조명겸(趙明謙)을 응교로, 조명리(趙明履)를 교리로, 홍창한(洪昌漢)을 부수찬으로, 유언협(兪彦協)을 정언으로, 권집(權䌖)을 지평으로 삼았다.

 

5월 27일 갑인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지사 송진명(宋眞明)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칙사(勅使)를 맞이할 때의 나례(儺禮)에는 전례대로 음악을 사용하겠지만, 오리혀 군악(軍樂)을 쓰지 않는다고들 하니 매우 불가하다. 이런 일은 대개가 황화(皇華)148)  의 전해 내려온 의식을 모방한 것인데, 지금 사대(事大)의 예(禮)가 예전과 비교하여 점차로 줄어들었다. 대저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독경(篤敬)하면 만맥(蠻貊) 지방이라도 다닐 수 있다 하였으니, 모름지기 접대하는 예를 다해서 스스로 힘쓰는 도리로 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명겸(趙明謙)을 승지로, 윤혜교(尹惠敎)를 대사헌으로, 이광세(李匡世)를 대사간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사간으로, 신치근(申致謹)을 집의로, 송질(宋瓆)·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지평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정언으로, 김상로(金尙魯)를 헌납으로, 오원(吳瑗)을 대사성으로, 이덕중(李德重)을 부수찬으로, 오언주(吳彦胄)를 부교리로, 박필주(朴弼周)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5월 28일 을묘

밤에 유성(流星)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이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3척(尺) 가량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주역(周易)》의 대과괘(大過卦)를 강독(講讀)하다가 검토관(檢討官) 윤광의(尹光毅)가 세상을 피해 살면서 민망하게 여김이 없다는 뜻을 미루어 유일(遺逸)의 선비를 모아 등용하고 세도(世道)를 유익하게 돕도록 하자고 청하자, 임금이 탄식하기를,
"방정(方正)한 선비를 얻고자 하면 이현필(李顯弼)이 있고, 산림(山林)의 사람을 얻고자 하면 김성탁(金聖鐸)이 나올 것이니,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오직 성인(聖人)이라야 남보다 크게 뛰어난 업적을 이룩할 수 있는데, 나와 같은 자가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독서하는 사람은 식견이 세속 사람보다 나은 것인데, 지금은 독서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 피해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인군(人君)이 평일에 비록 요순(堯舜)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한다 하더라도 역시 중류의 임금됨을 면하지 못한다. 지금 성상께서 바로 이르기를, ‘오직 성인이라야 남보다 크게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다. 나 같은 자가 그것을 만회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정자(程子)로 하여금 이 말을 듣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사직(社稷)의 복이 아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52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인군(人君)이 평일에 비록 요순(堯舜)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한다 하더라도 역시 중류의 임금됨을 면하지 못한다. 지금 성상께서 바로 이르기를, ‘오직 성인이라야 남보다 크게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다. 나 같은 자가 그것을 만회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정자(程子)로 하여금 이 말을 듣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사직(社稷)의 복이 아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5월 28일 을묘

김성탁(金聖鐸)이 잡혀 왔는데,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히 국문(鞫問)하려고 하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지난번 비망기(備忘記)에는 사지(辭旨)가 엄정하였으니 보고 듣기에 흡연(翕然)하여 공경하여 우러러보았으나, 단지 그 사이에 오히려 위곡(委曲)된 하교(下敎)가 있어 대범하고 정중해야 할 체모에 심히 흠결(欠缺)이 되었습니다. 오늘 국문할 때에는 자질구레한 곡절(曲折)은 모두 버리고 단지 임금을 무함하고 업신여긴 죄만을 엄중히 문초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김성탁의 죄는 조금도 살릴 만한 도리가 없으니, 갑술년149)  의 처분은 크게 실착(失錯)된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리들이 선조(先朝)에서 관대하게 용서한 은혜는 알지 못하고 늘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무신년150)   간에는 이현일(李玄逸)의 아들이 학문이 있다고 말하고 별도로 천거하여 등용하도록 권장하였습니다. 이현일이 성모(聖母)를 무함하여 욕되게 한 죄가 윤상(倫常)에 관계되는데, 그 아들이 설사 학문이 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어떻게 직임(職任)에 제수하여 징소(徵召)할 수 있겠습니까? 김성탁이 성상께서 매우 지나치게 대우함으로써 감히 은혜를 믿고 시험하려는 뜻을 품어 곧 이러한 거조(擧措)가 있게 된 것이니, 반드시 엄중한 법으로 통쾌히 징계한 후에야 영남 사람이 거의 깨우칠 수 있게 되어 죄에 빠져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구두로 문목(問目)을 부르기를,
"이현일의 기사년151)   상소는 윤리(倫理)가 없고 매우 도리에 어긋났는데, 그 집에서 편안히 죽은 것도 관대한 성은(聖恩)이 아님이 없었다. 너도 또한 오늘날의 신자로서 어찌 감히 원통함을 호소한다고 칭탁하면서 심지어는 생삼 사일(生三事一)의 의리를 일컬었으니, 이미 극도로 놀라운 일이다. 상소의 끝에 감히 말하기를, ‘신은 전하께서 기사년의 사건을 선천(先天)에 붙임을 알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을 업신여기고 윗사람을 무함한 것일 뿐만 아니라 취지와 의도가 음흉하고 흉참함이 이현일보다 갑절도 더하다. 스승을 칭탁하여 난역을 비호하고 임금의 마음을 억측하여 업신여겼으니, 이것으로 죄안(罪案)을 결정하여도 정법(正法)152)  하기에 충분하다. 아! 무신년 난역(亂逆)의 연유한 바가 무엇인가? 나라에 대한 원망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그 난역을 이루게 되었으니, 앞서는 비록 미혹(迷惑)되었다 하더라도 뒤에는 깨우쳤어야 할 텐데 네가 또 이와 같이 하니 이번에 국문하는 것은 쌓인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김성탁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전후로 성상의 망극한 은혜를 받고 털끝만큼이라고 보답하려고 생각하였으니, 어찌 감히 임금을 업신여기고 윗사람을 무함할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이현일의 일은 비록 초야(草野)에 있었으나 신 역시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에 신헌(申𨯶)의 상소 중에 이현일을 논함이 지나친 말이 있었으니, 비록 이것이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눈앞의 일과 같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사년의 일은 선천(先天)에 붙인 것을 신이 어찌 알았겠습니까마는, 이만유(李萬維)가 상소하여 기사년 일을 논급(論及)하였는데 이에 대한 비지(批旨)에 이와 같은 하교가 있었던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벌써 지나간 일을 선천(先天)이라고 이르며, 눈앞에 닥친 일을 후천(後天)이라 이른다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이현일이 죄가 있고 없는 것은 하늘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고, 또 신이 젊었을 때 배움을 받아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일체(一體)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무신년의 사건은 곧 천지간에 지극한 변괴로서 신도 그것이 기사년의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나온 줄 아는데, 이현일이 과연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스승과 제자와의 의리가 아무리 중하다고 하지만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하였겠습니까? 이 일은 또 40년 전에 있었고 신의 나이 어려서 상세히 알지 못하였으나, 갑술년 이후로는 이현일을 혹은 완전히 석방도 하고 혹은 벼슬도 회복시켜 죄명(罪名)이 역률(逆律)에는 이르지 않은 듯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문목에 이르기를,
"이현일의 상소 중에 한 구절의 말은 지금 차마 끌어 내어 묻지는 못하겠으나, 아무리 너의 무상(無狀)한 마음으로 그 상소의 내용을 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감히 난역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인데, 바로 감히 애매하다고 하였으니, 그 공초를 보건대, 더욱 극도로 무상하다. 군부(君父)가 역란을 마음 아프게 여기는 마음이 어찌 햇수가 멀다고 소홀히 하겠으며 햇수가 가깝다고 절실하게 할 수 있겠는가? 무함하고 업신여기며 패역(悖逆)한 역적을 스승으로 부추겨 올리고 감히 원통하다고 하소연하였으며, 무신년의 난역(亂逆)이 근본은 기사년에 있었던 것인데 지금 감히 그것을 비호하려 드니, 그 누구를 속이려는가?"
하였다. 김성탁이 두 번째 공초하기를,
"이현일이 역률(逆律)을 범한 정상은 당시에 나이가 어려서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만,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무망(誣罔)할 마음이 있었다면 비록 바로 법에 처단(處斷)되었더라도 어찌 유감이나 원한이 있겠습니까? 허명(虛名)으로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불과하니, 오히려 무엇을 진달하겠습니까? 이현일이 그른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아랫 조항의 말은 본정(本情)을 혹시라도 하촉(下燭)153)  을 받지 못할 듯하여 감히 ‘대분(戴盆)’ 두 글자를 썼으며, 국가에서 법을 적용하는 도리 역시 연세(年歲)의 오래 되고 가까움에 차이가 없지는 않으며, 이현일을 혹은 완전히 석방하기도 하고 혹은 방귀 전리(放歸田里)154)  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과연 그렇게 운운함이 있었으나, ‘난역을 비호했다.[護送]’는 두 글자는 실로 천만번 원통합니다."
하였다. 다시 문목을 내자, 김성탁이 세 번째 공초하기를,
"난역을 비호했다는 하교는 천만번 원통합니다. 갑술년에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의 진달(陳達)에는 이현일의 상소한 내용이 해치기를 꾀하거나 침범하여 배척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고, 기해년 양이(量移)155)  할 적에 대신(大臣)들이 구해(救解)하려는 말이 있었으며, 당시의 하교에서도 죄명이 다른 사람과 다르니, 방면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석정(崔錫鼎)·이여(李畬)도 역시 이현일은 이미 분명한 죄상이 없으니, 결단코 모해(謀害)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의 생각에도 혹은 난역(亂逆)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를 들으니, 신의 상소는 사정(私情)에 구애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현일이 비록 크게 미안한 귀절의 내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아래의 말뜻은 그 때의 경재(卿宰)들도 침범하고 핍박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이 밖에는 진달할 바가 없습니다."
하고, 김성탁이 인하여 이현일이 올리지 못한 상소를 외우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단지 이 상소만 외우고 여덟 글자의 흉언(凶言)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현저하게 포용하여 비호하는 뜻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우(待遇)가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방사(放肆)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단지 그의 죄만이 아니라 조정과 나도 역시 스스로 반성해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김성탁이 말하기를,
"이현일에게 수학(受學)한 것은 그가 방귀 전리(放歸田里)된 뒤에 있었습니다. 이현일의 상소의 윗 조항 글귀의 말은 진실로 무상(無狀)하지만 아랫 조항은 성모(聖母)를 위해 존안(尊安)하는 도리는 이루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진실로 병이(秉彛)의 마음이 있다면 부모를 무함한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임금이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을 시켜 이현일의 국안(鞫案)을 가져오게 하여 보기를 마치고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으며, 이어서 말하기를,
"지금 국안을 보고 처음으로 적서(嫡庶)를 분명히 하자는 일이 있었음을 알았으니, 이것을 보고 놀라서 통탄스러움을 깨닫지 못하였다. 위로는 성모(聖母)에게 언급하고 아래로는 경종(景宗)과 나에게 언급하였으며, 임금의 마음이 서인(西人)을 등용하는 여부(與否)를 몰래 엿보고 탐지한 것은 더욱 극도로 놀랍고 분하다."
하고, 또 김성탁에게 말하기를,
"무신년 후로는 영남 사람이 의당 난역의 원두(源頭)였음을 환하게 알 터인데 너와 같은 자가 또 나왔으니, 지금 내가 친히 국문하는 것은 앞으로 엄중히 구문(究問)하여 통렬히 징계하고자 함이다. 내가 무신년의 사건으로 일찍이 극수재(克綏齋)에서 하교하였으니, 네가 당연히 기억할 것이다. 네가 감히 총영(寵榮)을 믿고 방자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반드시 정탐하여 시험할 계획이 있었음이다. 숨긴 실정을 정직하게 고(告)함이 마땅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의당 원소(原疏)로써 결안(結案)하도록 하겠다."
하니, 김성탁이 계속 애매(曖昧)하다고 일컫자, 임금이 또 이르기를,
"네가 이현일의 난역(亂逆)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난역이다. 감히 애매하다고 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묻자, 원임 대신(原任大臣) 서명균(徐命均)·김흥경(金興慶)은 모두 부생(傅生)의 의논156)  을 하였고, 김재로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윗사람을 무함하며 난역을 비호한 세 가지 큰 죄로써 바로 결안(結案)하도록 청하였다. 헌납(獻納)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김성탁을 만약 극형(極刑)으로 처치하지 않으면 영남 사람을 징계하여 두렵게 하기에 부족할 뿐만 아니라, 후세에 반드시 전하를 비난하는 의논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의 의논도 대략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무신년의 일로써 징계를 삼아 늘 생각하고 요량함이 있었으나, 관계가 중대한 곳에 이르러서는 어찌 엄중히 처치하지 않겠는가? 간신(諫臣)들의 말이 옳다. 내가 만약 통렬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 〈선왕을〉 뵙겠는가? 김성탁이 이현일과는 간격이 있으니, 만약 선조(先祖)에서 이현일을 주벌(誅罰)하지 아니한 뜻을 본받는다면 당연히 참작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1차 형신(刑訊)할 것을 명하자, 승지(承旨)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영남 사람은 본래 지독한 점이 있어서 곤장을 잘 참습니다."
하였는데, 김성탁이 말하기를,
"노모(老母)가 계시니, 살려 주시는 은덕을 입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으로 살려 달라고 비니 불충 불효(不忠不孝)하다고 이를 만하다."
하고, 본부(本府)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김성탁은 극률(極律)과 차율(次律)을 논할 것 없이 외로운 새새끼나 썩은 쥐새끼에 지나지 않으니 처치하기 무엇이 어렵겠는가마는, 나는 그가 영남 사람이므로 염려가 된다."
하였다. 김상로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유언휘(兪彦徽)를 도태시키는 일에 이르러서는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말한 것으로써 죄를 입는 것은 진실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일전에 양사(兩司)에서 합사(合辭)하여 아뢴 것은 여러 고관(考官)을 삭직(削職)한 뒤에 잇달아 발설한 의논에 불과한데, 곧 전하께서는 이미 그 계문(啓聞)으로 인하여 대신(大臣)의 관직을 파면하였고, 또 조어(措語)의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아울러 여러 대신(臺臣)을 죄주었는데, 사기(辭氣)가 지나치게 엄하고 처분이 중도를 잃었으니, 청컨대, 합계(合啓)한 대관(臺官)을 삭직(削職)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곧은 자를 들어 쓰고 굽은 자를 버리라는 것은 공성(孔聖)의 가르친 바인데, 어찌 중도를 지나쳤다고 말하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성탁의 소어(疏語)가 지극히 흉패(凶悖)하나 명색이 삼사(三司)의 벼슬을 하였고, 현도(縣道)를 좇아 올렸다면 도신(道臣)이 된 자가 비록 퇴각(退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글을 갖추어 싸서 올릴 즈음에 역시 한 말을 덧붙여 진달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데, 전례를 따라 올려 보냈으니, 번신(藩臣)의 체모에 너무나 흠결이 됩니다. 청컨대 경상 감사 유척기(兪拓基)를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울 밖에 관서를 설치하는 것이 사체(事體)가 동일하지 않으니, 지금 진달한 바가 합당한지 모르겠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의 일과 포교(捕校)157)   등의 일은 정계(停啓)하도록 하였다. 대개 이덕수의 자부(子婦)가 김상로에게는 질녀(姪女)가 되기 때문에 정계하였다고 한다.

 

5월 29일 병진

김상중(金尙重)을 교리로, 이정보(李鼎輔)을 부수찬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사간으로, 이중진(李重震)을 장령으로 삼고, 송진명(宋眞明)을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는데, 송진명이 별다른 재능은 없었으나 송인명(宋寅明)의 종형(從兄)으로서 총애를 받음이 지나치게 융숭하였다고 한다.

 

장태소(張泰紹)를 금군 별장(禁軍別將)으로 삼았는데, 장붕익(張鵬翼)의 아들이었다.

 

5월 30일 정사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그 마음이 다름이 없는 것은 벌써 환하게 알았다. 지난번의 처분은 사체(事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명관(命官) 송인명(宋寅明)은 서용(敍用)하고 그 나머지 고관(考官)들도 아울러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송징계(宋徵啓)를 헌납으로, 이덕중(李德重)을 지평으로, 송인명(宋寅明)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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