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무오
김성탁(金聖鐸)을 추국(推鞫)하였다.
홍계희(洪啓禧)를 지평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응교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수찬으로, 윤흥무(尹興茂)를 집의로, 김유경(金有慶)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이익필(李益馝)을 전양군(全陽君)으로, 이철보(李喆輔)를 주청사 서장관(奏請使書狀官)으로, 이종적(李宗迪)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전후로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영남 사람을 놓아 보낸 자가 많았고 또 이현일(李玄逸)의 아들을 수용(收用)하였기 때문에 영남 사람들이 늘 조정을 경시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졌으니, 엄중히 징계한 연후에야 두렵게 여겨 죄(罪)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지러운 세상에 성신(誠信)한 신하가 진실로 쉬운 것이 아니나, 난역을 하는 것 또한 어찌 항상 있겠는가? 변란이 있은 후로는 서로 충신·역적을 다투어서 사사로운 뜻에 견제(牽制)되었으므로 난역을 방지하는 데에 엄중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영남 사람들이 또한 바라는 바가 있어 그들의 일을 선천(先天)에 부쳐버렸다. 경(卿) 등이 만약 스스로 엄중하게 난역을 방지하였다면 영남 사람들도 당연히 징계되어 그만두었을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조상(朝象)이 안정되지 못하여 비록 난역이라느니 난역이 아니라느니 하며 시끄러웠으나, 이현일(李玄逸)·김성탁(金聖鐸)의 일과는 저절로 구별이 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또한 난역 같다느니 난역이 아니라느니 하고 논하는데, 나의 생각에는 그 중에서 난역이라고 하는 자를 마땅히 난역이라고 이르겠다."
하였다. 사간(司諫) 허옥(許沃)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일 기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을 인견(引見)하고 김성탁(金聖鐸)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김성탁이 이미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이 난역을 한 것은 알았으나,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를 밝히자는 설에 이르러서는 그 무리가 서로 숨겨서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니,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갑술년158) 의 처분이 엄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버릇이 되어 여기에 이르렀으니, 후일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은 말하기를,
"이현일이 이미 법에 복주(伏誅)되지 않았는데, 김성탁에게 극률(極律)을 더하는 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현일을 제집에서 편안히 죽게 한 것은 실로 관대한 성덕(盛德) 때문이며 이름이 세초(歲抄)에 오르게 된 것은 그에게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김성탁이 청현(淸顯)의 직을 빙자하여 감히 생삼 사일(生三事一)의 의리를 일컬었으니, 그 상소로도 죄안(罪案)을 결단하기에 충분하며 공초(供招)한 바 또한 두루 엄폐(掩蔽)한 것이 많았으니, 의리(義理)를 세우고 엄중히 난역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정법(正法)하기에 충분하다. 또 영남 사람들에게 윤강(倫綱)을 깨우치게 함에 있어서도 역시 그만둘 수 없으나, 그 사람됨을 살펴본즉 바로 어리석고 어두웠으니, 참작해야 할 도리가 없지 않다. 특별히 그의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천극(栫棘)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참작하여 처리하면 크게 물정(物情)에 어그러집니다. 죄를 성토함을 벌써 엄중히 하였는데, 죄율을 감정(勘定)함이 너무 가볍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죄는 정법(正法)을 해야 마땅한데, 너그러이 용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구차스러운 데 가까워졌다. 김성탁은 대계(臺啓)가 발할 것을 인하여 아직 본부(本府)에 가두어 두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司諫) 허옥(許沃)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김성탁을 절도에 천극(栫棘)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다시 더 엄중히 국문하도록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홍계희(洪啓禧)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김성탁을 절도에 천극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쾌히 나라의 형률로 바로잡도록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전후로 특별히 천거한 김성탁(金聖鐸)·이재(李栽) 등 여러 사람을 삭직(削職)하도록 청하였으니, 이재는 이현일의 아들이었다. 임금이 아들과 문도(門徒)는 경중(輕重)이 있다고 하여 이재를 천거한 자는 삭직하고 김성탁을 천거한 자는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또 법을 잘 집행하지 못한 것으로써 의금부(義禁府)의 여러 당상(堂上)을 파직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다만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슬퍼하면서 그의 청렴하고 아담하며 나라 위한 정성을 포장(褒奬)하고,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관을 만들 재목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김동필은 성품이 단정하고 선량하여 사람을 대할 때에 상서롭고 온화한 기운이 있었으며, 언의(言議)가 과격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 길사(吉士)로 허여(許與)하였다. 그러나 그가 촉탁(囑托)을 굳게 막지 못하였고, 사는 집이 매우 호화로운 데 가까우니, 사람들이 더러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
6월 3일 경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홍계희(洪啓禧)가 인피(引避)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김성탁(金聖鐸)의 죄는 어떤 범죄인데 옥관(獄官)이 근거 없는 말로 앙대(仰對)하여 현저하게 용납하여 비호하는 뜻을 두었고, 송진명(宋眞明)은 말하기를, ‘위에서부터 부생(傅生)의 의논을 하니 신 등은 힘써 다툴 필요가 없다.’ 하였고, 이진순(李眞淳)은 말하기를, ‘참작하는 도리는 오직 성상에게 달려 있다.’ 하였으며 이춘제(李春躋)·정내주(鄭來周)는 죽이고 살리는 가부(可否)의 사이에서 하나도 명백하게 분별하는 말이 없이 다만 이르기를, ‘간범(干犯)은 지극히 중하다.’고 하였으며, 대신(大臣)들은 김성탁이 이현일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으로 대답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임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명균(徐命均)이 대계(臺啓)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진달하자, 비답하기를,
"법을 집행하는 신하는 사체(事體)에 불과한데, 경(卿)은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4일 신유
강춘도(江春道)에 서리가 내렸다.
임금이 뜸을 시험하였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은 본래 규각(圭角)159) 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이현필(李顯弼)의 글을 취택하였으니, 그것을 오착(誤着)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으나 고의로 선발했다고 의심한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또 10년 제우(際遇)160) 는 옛날부터 어려운 일인데, 지금 애매한 죄로 인하여 본정(本情)을 드러내지 못하니, 진실로 애석하게 여길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비록 학식이 천박하나, 어찌 그 글을 고의로 뽑았다고 여기겠는가? 그러나 살피지 않은 점은 있었다."
하였다.
조상경(趙尙絅)을 이조 판서로, 윤순(尹淳)을 형조 판서로, 조정만(趙正萬)을 판윤(判尹)으로, 정형복(鄭亨復)을 문학(文學)으로, 허린(許繗)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6월 5일 임술
윤혜교(尹惠敎)를 예조 판서로, 이병상(李秉常)을 대사헌으로, 김취로(金取魯)를 호조 판서로, 서명형(徐命珩)을 사간으로, 신수(申𢢝)를 지평으로 삼았다.
6월 6일 계해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신수(申𢢝)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전후의 천주(薦主)를 삭직(削職)하고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을 파직(罷職)하는 일은 정지하였다.
6월 9일 병인
옹정(雍正)161) 을 부묘(袝廟)하는 칙사(勅使)가 나오니,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맞아들이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여 다례(茶禮)를 베풀었다. 가정(家丁) 한 사람이 길에서 미친 병이 발생하였다는 말을 듣고 의원을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약물(藥物)을 넉넉히 하사하니, 피인(彼人)들이 감격하였다.
사간(司諫) 서명형(徐命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성탁(金聖鐸)은 이현일(李玄逸)이 감싸 기른 자로서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쳤으며 망령되게 총권(寵眷)을 믿고 흉측한 소장(疏章)을 올렸고, 이현필(李顯弼)이 정대(庭對)한 수십 조항의 흉측한 말과 사리에 어긋나는 말은 불경(不敬)과 부도(不道)가 아닌 것이 없으니, 신은 생각하건대, 김성탁은 빨리 방형(邦刑)으로 처단하고 이현필은 절도(絶島)에 천극(栫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김성탁의 사건은 벌써 유시(諭示)하였고, 이현필의 일도 이미 참량(參量)하였다는 것으로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홍창한(洪昌漢)이 상소하여 김성탁을 정형(正刑)하도록 청하자, 예사 비답
을 내렸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석오(鄭錫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재(李栽)를 천거한 사람을 삭직(削職)하라는 명으로 인하여 신이 몸담고 있는 이조에서 그 문서(文書)를 가져다 고찰해 보니, 무신년162) 4월에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의 계달이 있었고, 기유년163) 2월에 특진관(特進官) 조현명(趙顯命)의 주달(奏達)이 있었으며, 4월에는 안핵사(按覈使) 오광운(吳光運)의 상소가 있었고, 윤7월에는 비국(備局)에서 별도의 천거가 있었는데, 대계(臺啓)에는 영외(嶺外)에 봉사(奉使)한 것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단지 두 사람의 현고(現告)를 취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物議)가 이재를 천거한 것을 죄를 삼을 경우 봉사(奉使)한 것과 서울에 있었던 것을 달리함은 옳지 않은데 망령되게 분별함이 있었다고 허물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신의 형 정석삼(鄭錫三)이 정미년164) 겨울 사이에 처음으로 천거하였다고 하니, 조가(朝家)에서 비록 이로써 추죄(追罪)하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신은 여기에서 더욱 마음이 상하고 가슴이 아파 스스로 해명할 수 없습니다. 지금 김성탁을 천거한 사람을 현고(現告)하게 하니 더욱 두 번의 과오(過誤)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헌신(憲臣)의 주청은 이미 봉사(奉使)를 지적하였고, 경(卿)의 형은 벌써 고인(故人)이 되었으니 더욱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종성(李宗城)이 바야흐로 칙사(勅使)를 맞이하려 길에 있으면서 글로 진달(陳達)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호족(豪族)을 다스리다가 이런 망측(罔測)한 일을 당하였으니, 사정(私情)이 은연히 통한스러워 입으로 차마 말하지 못하고 붓으로도 차마 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대개 길 옆에다 우인(偶人)165) 을 만들고 그의 아버지인 상신(相臣)166) 의 이름을 쓴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답하기를,
"조금 전에 대신(大臣)의 진달한 바를 들었는데, 인심이 몹시 해괴하다. 그 기강(紀綱)을 엄하게 해야 할 방도에 있어서 결단코 체임(遞任)을 허락할 수는 없다."
하고, 인하여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염탐해서 체포하도록 하였다.
6월 10일 정묘
임금이 남관(南館)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접견하였다.
사면(赦免)을 하였다.
윤순(尹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6월 11일 무진
김시형(金始炯)을 도승지로, 해흥군(海興君) 강(橿)을 진하사 겸 사은 정사(陳賀使兼謝恩正使)로, 김용경(金龍慶)을 부사(副使)로, 안상휘(安相徽)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송진명(宋眞明)을 형조 판서로, 윤혜교(尹惠敎)를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서명구(徐命九)를 전광도 관찰사(全光道觀察使)로, 조상명(趙尙命)을 부교리로, 송수형(宋秀衡)을 승지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12일 기사
안세복(安世福)을 국문(鞫問)하였는데, 안세복은 서울에 사는 백성이었다. 술에 만취하여 이웃 사람과 싸우면서 나라를 향해 불경(不敬)한 말을 하므로, 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 박찬신(朴纘新)이 면대(面對)를 구하여 주달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옥당(玉堂) 조명리(趙明履) 등이 모두 국청(鞫廳)을 설치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현필(李顯弼)·김성탁(金聖鐸)의 사건이 있은 후로 어찌 이런 등의 변괴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국청을 설치하여 문초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안세복(安世福)은 무식하고 술에 취한 놈이요, 국청을 설치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이다. 장신(將臣)이 이런 일로 면대를 구한 것이 벌써 옛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있는데, 대신(大臣)·유신(儒臣)이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모두 국청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여 당당한 왕부(王府)의 문초가 아래로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어 술에 취한 놈에게까지 미쳤으니, 그것이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고 듣는 이를 놀라게 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54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안세복(安世福)은 무식하고 술에 취한 놈이요, 국청을 설치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이다. 장신(將臣)이 이런 일로 면대를 구한 것이 벌써 옛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있는데, 대신(大臣)·유신(儒臣)이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모두 국청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여 당당한 왕부(王府)의 문초가 아래로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어 술에 취한 놈에게까지 미쳤으니, 그것이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고 듣는 이를 놀라게 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유학(幼學) 이덕신(李德臣)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김성탁이 오늘날에 흉악한 짓을 마음대로 한 것은 이현일(李玄逸)이 범한 바와 비교하여 더욱 중한데, 김성탁이 오늘날 죽음에서 모면하게 한 것은 이현일에게 형벌을 실수한 것과 비교하여 더욱 큽니다. 청커대, 장차 적신(賊臣) 김성탁에게 나라의 형벌을 통쾌히 바루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김성탁의 망령된 의논이 몹시 사리에 어긋남은 곧 상하가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이니, 어찌 여러 유생들이 상소하여 진달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특별히 친국(親鞫)하도록 명한 것은 대체로 그 사건을 엄중히 다루기 위한 것이며, 마침내의 처분은 실제로 옛날의 관대한 은혜를 체득(體得)하려 한 것이다. 여러 선비들이 사건에 대하여 진달한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아!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인심이 험악한 데로 빠져드니, 이현필(李顯弼)의 일이 있은 후로 벌써 진신(搢紳)을 경알(傾軋)하는 뜻이 있었다. 김성탁에게도 관계됨이 지극히 중대한데, 위에 있는 자가 또한 어찌 비호하겠는가? 그런데도 감히 포용하고 비호한다는 등의 말을 오늘에 진달하였으니, 스스로 그 무엄(無嚴)함을 깨닫지 못하겠다. 더구나 시상(時象)을 거듭 신칙하는 때에 감히 동지(同志)인 선비라고 일컫고 기회를 틈탈 마음을 싹틔우려고 하였으며, 또 선대를 계승한다는 명목(名目)이 어느 때에 있었는데 감히 오늘날에 인용하는가?"
하고, 원소(原疏)를 되돌려 주도록 하였다. 조금 후에 하교하기를,
"김성탁이 흉악한 상소를 올린 것은 왕법(王法)으로 논죄하면 어찌 국법(國法)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뜻은 벌써 하교를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건대, 관계가 이미 중대하여 결단코 그 사람의 어리석다는 것으로써 끝내 법을 집행하는 의논을 거역하기 어려우니, 내가 그를 베는 것이 아니라 곧 국법(國法)이 베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유생(儒生)의 상소에 대하여서도 유시(諭示)를 하였는데, 그 어찌 서로 버티는가? 부원(府院)의 아룀을 추종(追從)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명신(徐命臣)을 수찬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사간으로, 이연덕(李延德)을 지평으로, 오수채(吳遂采)를 교리로, 박필간(朴弼榦)을 장령으로, 이도겸(李道謙)을 헌납으로, 윤취함(尹就咸)을 집의로 삼았다.
다시 송인명(宋寅明)을 임명하여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보상(輔相)은 나라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니, 백성이 다 함께 우러러보는 바이다. 죄가 있다면 비록 용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미세한 잘못과 대수롭지 않은 실수로써 경솔하게 출척(黜陟)을 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송인명(宋寅明)이 10년간 국권을 잡고 탕평(蕩平)의 이름을 빌려서 간사함을 농락하며 나라를 병들게 하였으니, 이것을 죄로 삼는다면 그가 진실로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다. 한낱 이현필의 일로 인하여 잠깐 파직되었다가 도로 복관(復官)하기를 미관(微官)과 서료(庶僚)같이 하였으니, 정말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5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보상(輔相)은 나라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니, 백성이 다 함께 우러러보는 바이다. 죄가 있다면 비록 용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미세한 잘못과 대수롭지 않은 실수로써 경솔하게 출척(黜陟)을 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송인명(宋寅明)이 10년간 국권을 잡고 탕평(蕩平)의 이름을 빌려서 간사함을 농락하며 나라를 병들게 하였으니, 이것을 죄로 삼는다면 그가 진실로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다. 한낱 이현필의 일로 인하여 잠깐 파직되었다가 도로 복관(復官)하기를 미관(微官)과 서료(庶僚)같이 하였으니, 정말 애석하다.
6월 13일 경오
청(淸)나라 사신(使臣)이 돌아가자,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전송하였다. 피사(彼使)167) 가 별증(別贈)은 나라에서 금지한다고 하여 단지 증단(贈單)만 머물러 두게 하고 그 물건은 받지 않으므로, 임금이 그가 돌아가 이 일을 누설할까 매우 염려하였는데, 출발할 때에 이르러 피사(彼使)가 가져다가 임금 앞에 바쳤으니, 대개 그 주고받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함이었다. 이때 통역관[通官]의 무리들이 사사로이 양서(兩西)168) 에서 은(銀)을 구한 것이 많게는 1만 3천 4백여 냥(兩)에 이르렀는데, 칙사의 행차가 압록강을 건넘에 미쳐 통역관이 은을 의주(義州)에 유치(留置)해 두고 주청사(奏請使)의 사행을 기다려 봉성(鳳城)으로 수송(輸送)하도록 청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빈신(儐臣)·도신(道臣) 및 만윤(灣尹)169) 이 힘껏 막지 못하였으니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는 것이 마땅하며, 통역관 역시 법으로 다스리고 은(銀)은 그들의 청원을 따라 부쳐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순(尹淳)을 형조 판서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김정윤(金廷潤)을 헌납으로 삼았다.
6월 14일 신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즈음 혐의스러운 길이 매우 넓은데, 이제원(李濟遠)이 김시형(金始炯)에게 혐의를 꾸민 것은 지극히 잘못되었다. 이것이 어찌 이제원의 허물인가? 실은 그 아비 이재(李縡)의 가르친 바이다. 이재가 무신년170) 후에 처음으로 의리(義理)의 설(說)을 지었기 때문에 유생(儒生)의 무리들이 그것을 본받았고, 그 전해진 폐단이 맹수(猛獸)보다 더 심하였다171) ."
하니, 승지(承旨) 송수형(宋秀衡)이 말하기를,
"맹수보다 더 심하다는 하교는 단지 이재에 대해서만 통렬하게 핍박될 뿐만이 아닙니다. 대성인(大聖人)의 사령(辭令)이 박절한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이제원은 허물을 보고도 그의 인(仁)함을 알 수 있으며, 이재는 학문(學問)이 매우 해박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진상(金鎭商)은 말이 일찍이 시상(時象)에 미치지 않았으며, 이재 같은 이는 일찍이 의리(義理)가 어떤 일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나 역시 그가 편당을 하지 않았다고 믿었는데, 무신년 뒤에 비로소 그 시상(時象)이 됨을 알았다. 지위가 높은 자와 선비로 이름난 자가 시상(時象)이 되었다면, 그 피해가 더욱 큰 것이다. 옛날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선비를 업신여겼다고 하나, 만약 참된 선비를 만났다면 반드시 침상에서 내려오고 씻던 발도 걷어치웠을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정제(李廷濟)가 죽은 뒤에 그의 아내 정씨(鄭氏)가 거적을 깔고 자며, 벽을 향해 앉아 식음(食飮)을 끊어 마침내 같은 무덤에 들어가는 소원을 이루었으니, 그 마을에 정표(旌表)를 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두만강(豆瞞江) 건너편 후춘(後春)의 들에 호인(胡人) 5,6백 명이 머물러 산 지가 거의 한 달이 되었으며, 장막을 설치하고 함성(喊聲)을 지르니 훈융(訓戎)과 경원(慶源)에서는 성(城)에 올라가 요망(瞭望)하는 거조(擧措)가 있기에 이르렀는데도, 북병사(北兵使) 송징래(宋徵來)는 단지 사서(私書)로써 도신(道臣)에게만 통고하고 즉시 치계(馳啓)하지 않았으니, 일이 지극히 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신(帥臣)을 자주 체임(遞任)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니, 청컨대, 종중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집의(執義) 윤취함(尹就咸)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관후(李觀厚)를 엄중히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알아내고 왕법(王法)을 쾌히 바로잡도록 한 데 이르러서는 임금이 이르기를,
"윗 조항은 지극히 음험하고 참혹한 데 관계되지만 차술(借述)한 데 지나지 않으며, 참작한 것이 뜻이 있고 또한 서로 버틸 것이 아니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헌납(獻納) 김정윤(金廷潤)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덕린(趙德隣)을 천극(栫棘)한 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이르기를,
"그 당시 처분이 고집한 바가 없지 않으나, 다시 뒤에 살펴보니 의리가 어둡고 막혔으며 인심이 함닉(陷溺)되었으니, 그 엄중히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 역시 서로 버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이 가까운 국경에 모여 군사의 행동을 하기에 이르렀는데도 북병사 송징래가 치계(馳啓)를 지체하였으니, 파직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재(李縡)는 중세(中歲)에 결연히 물러나와 산림에 은거하면서 독서(讀書)하였으니, 진실로 유속(流俗)에서 한 등급 뛰어났다. 그러나 이재 역시 지금의 사람이니, 돌아보건대, 어찌 홀로 편당의 구덩이를 초월(超越)할 수 있었겠는가? 성상(聖上)께서 그 아들을 지나치게 혐의함으로 인하여 그 아비에게 맹수(猛獸)보다 심하다는 명목을 더한 것은 어찌 노여움을 옮기지 않으며 예(禮)로써 부리는 뜻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5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윤리-강상(綱常) / 외교(外交) / 군사(軍事)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註 170]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171] 맹수(猛獸)보다 더 심하였다 : 《맹자(孟子)》 등문공 하(藤文公下)에 의하면 "우왕(禹王)이 홍수를 막아 천하가 화평해졌고, 주공(周公)이 맹수를 몰아내어 백성이 편안해졌다."고 했는데, 그 주(註)에 "사설(邪說)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리는 것이 홍수나 맹수의 재앙보다 더하다."고 했음.
사신은 말한다. 이재(李縡)는 중세(中歲)에 결연히 물러나와 산림에 은거하면서 독서(讀書)하였으니, 진실로 유속(流俗)에서 한 등급 뛰어났다. 그러나 이재 역시 지금의 사람이니, 돌아보건대, 어찌 홀로 편당의 구덩이를 초월(超越)할 수 있었겠는가? 성상(聖上)께서 그 아들을 지나치게 혐의함으로 인하여 그 아비에게 맹수(猛獸)보다 심하다는 명목을 더한 것은 어찌 노여움을 옮기지 않으며 예(禮)로써 부리는 뜻이겠는가?
6월 15일 임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이관후(李觀厚)에게 다시 국문(鞫問)을 더하는 것은 마침내 너무 지나침이 된다는 것으로 더 재량(裁量)하여 처리하도록 청하자, 비답하기를,
"경(卿)의 차자(箚子)가 훌륭하구나! 보상(輔相)이 이와 같으니 미치지 못하는 것을 거의 보필하겠다."
하고, 인하여 전대로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관후(李觀厚)의 범죄한 바는 처음에 ‘질차(叱嗟)172) ’ 두 글자로써 그 출처를 구문(究問)한다면 진실로 부도(不道)한 죄과(罪科)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구(文句)를 지적해 내어 그 죄를 단련(鍛鍊)하여 만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세대의 일이겠는가? 대간(臺諫)을 국문한 것은 더구나 듣기 드문 일이다. 한 번도 이미 잘못되었는데 그것을 두 번 할 수 있겠는가? 김재로가 바로잡아 구원을 한 것은 진실로 그 체모를 얻었으니, 잘하였다는 포장(褒奬)을 받은 것이 마땅하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54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註 172] 질차(叱嗟) : 꾸짖음.
사신은 말한다. 이관후(李觀厚)의 범죄한 바는 처음에 ‘질차(叱嗟)172) ’ 두 글자로써 그 출처를 구문(究問)한다면 진실로 부도(不道)한 죄과(罪科)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구(文句)를 지적해 내어 그 죄를 단련(鍛鍊)하여 만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세대의 일이겠는가? 대간(臺諫)을 국문한 것은 더구나 듣기 드문 일이다. 한 번도 이미 잘못되었는데 그것을 두 번 할 수 있겠는가? 김재로가 바로잡아 구원을 한 것은 진실로 그 체모를 얻었으니, 잘하였다는 포장(褒奬)을 받은 것이 마땅하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정언섭(鄭彦燮)이 상소하기를,
"이현필(李顯弼)을 고시(考試)할 때에 취하느냐 버리느냐, 합격시키느냐 낙제시키느냐 하는 사이에 많은 쟁난(爭難)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정언섭이 일은 함께 하고서 혼자 모면하려는 흔적이 드러나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6월 16일 계유
조덕린(趙德隣)을 제주도(濟州道)에 안치(安置)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윤취함(尹就咸)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계청(啓請)하기를,
"이관후에 대하여 전대로 참작 처리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얻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논박당한 바가 대언(臺言)과 같다면, 나라를 저버리고 사사로움을 영위(營爲)하며 방자한 뜻으로 기만하고 농락했다는 배척과 은혜를 믿고 꺼려함이 없으며 알면서 고의로 선발했다는 말은 바로 흉악하고 교활하여 하지 못할 짓이 없는 극악 대죄(極惡大罪)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인신(人臣)이 이런 지목(指目)을 당하고도 양양(揚揚)하게 반열(班列)에 나아가 여러 관료의 위에서 얼굴을 들고 있다면, 개·돼지도 반드시 그가 남긴 것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장령(掌令) 박필간(朴弼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농사짓는 시기를 빼앗지 않는 것은 왕정(王政)에서 먼저 할 바입니다. 호남백(湖南伯)173) 의 체대(遞代) 시기가 앞으로 여름과 가을 즈음에 있으니, 부임(赴任)한 지 한 달도 채 못되어 맞이하고 보내면 도리어 민폐만 끼칩니다. 비록 잘못 천거한 죄를 받았다 하더라도 마땅히 백성을 번거롭게 하는 근심을 진념(軫念)하셔야 하니, 청컨대 그대로 유임하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또 이석표(李錫杓)를 특별히 파면한 것은 그윽이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그를 외직(外職)으로 보임(補任)할 때를 당하여 전하(殿下)께서 일찍이 그의 말을 정직하지 않다고는 아니하셨는데, 여러 차례 꾸짖음을 받은 뒤에 미쳐서 한 번의 소(疏)로 변명하여 아뢰자, 전하께서는 한 글귀의 말을 끄집어내어 죄를 씌우려는 뜻이 있는 듯하였으니, 사랑하고 미워함이 앞뒤가 판연히 달라졌습니다. 지금부터 정직한 선비가 무엇을 믿고서 감히 다시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호남백의 일은 역시 마음에 요량한 것이 있어서 보상(輔相)에게 묻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석표는 외면 수식(外面修飾)만 하는 경박한 무리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비호하기를 지나치게 하려 드는가?"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17일 갑술
안세복(安世福)을 국문(鞫問)하였다. 임금이, ‘인명(人命)이란 지극히 소중하니 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억울하게 죽게 할 수는 없다. 듣건대, 「이웃동네 선비가 그와 담을 사이에 두고 나는 소리를 듣고서 말을 보내어 엿보고 잡도록 하였다.」고 하니, 혹시라도 잘못 죄에 걸릴 것 같으면 이것도 죄없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라고 하며, 특별히 따져 묻고 다시 품신하도록 명하였다.
6월 18일 을해
국청(鞫廳)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김성탁(金聖鐸)을 그대로 신문(訊問)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가지고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명분과 의리에 관계되는 바이니,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 윤양래(尹陽來)는 몸소 기사년174) 의 일을 겪은 사람으로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정법(正法)하도록 힘써 청하자, 임금이 처음에는 참작하여 처리할 뜻을 약간 가지다가 곧 그전대로 신문(訊問)하도록 명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삼가 사전(赦典)을 보니, 윤득경(尹得敬)의 문외 출송(門外黜送)에 대한 일은 부첨(付籤)175) 하여 내리셨습니다. 신은 당시 윤득경의 계사는 올릴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마는, 이것은 유독 윤득경 한 사람의 의견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당시 반포한 교서(敎書)가 비록 장황(張皇)한 뜻이 있었으나 그 중에 반은 과연 반역이었으니, 그 반을 베어 버리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모두 가리려 하는 자가 있었다. 윤득경에 이르러서는 그 과명(科名)을 모두 발거(拔去)하려고 하였는데, 그 반이 이미 반역이라면 이름을 토역과(討逆科)로 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목호룡(睦虎龍)의 무고로 인하여 과거를 베풀었으니, 과거의 칭호를 고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이 착오하였다. 목호룡이 비록 역적이기는 하나 그 전에 벌써 역모(逆謀)를 한 자가 있었으니, 어찌하겠는가? 근래에 《송사(宋史)》를 보니, 고종(高宗)이 그 부형(父兄)의 원수를 잊어버렸는데, 나도 그것이 무슨 마음에서였는지를 모르겠다. 김성탁의 범죄(犯罪)는 관계가 지극히 중한 데 연유되었으니, 반드시 윤득경을 엄중히 다스린 뒤에야 영남(嶺南)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으며 역시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김성탁 같은 이를 죽인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김취로(金取魯)가 말하기를,
"이종연(李宗延)의 문외 출송에 대하여 석방(釋放)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방금 조덕린(趙德隣)을 논죄하여 감단(勘斷)하는 때에 정계(停啓)한 대신(臺臣)을 신이 감히 갑자기 방질(放秩)에 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덕린의 상소한 말이 아무리 무상(無狀)하다 하더라도 이미 난역으로 단정하지 않았다면, 이종연의 정계(停啓)가 비록 경솔하게 앞질러 했다고 하더라도 무슨 큰 죄가 되겠는가?"
하였다. 집의(執義) 윤취함(尹就咸)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일전에 이관후의 일을 연계(連啓)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대신(大臣)이 차자(箚子)로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성명(成命)을 도로 거둔 것을 신은 그윽이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청컨대 엄중히 국문하여 법을 바루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獻納) 김정윤(金廷潤)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9일 병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1일 무인
윤대관(輪對官)을 인견(引見)하였다.
6월 22일 기묘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검토관(檢討官)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동현주의(東賢奏議)》를 일찍이 이미 간행하여 올렸는데, 군덕(君德)의 궐실(闕失)과 시정(時政)의 이해(利害)에 대하여 볼 만한 것이 많이 있으니, 청컨대 조석으로 살펴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김응복(金應福)·이일제(李日躋)를 승지로,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김상로(金尙魯)·조명리(趙明履)를 교리로, 김광세(金光世)를 부교리로, 김상중(金尙重)을 수찬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윤순(尹淳)을 우참찬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서명빈(徐命彬)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어유기(魚有琦)를 북병사(北兵事)로 삼았다.
6월 24일 신사
집의(執義) 윤취함(尹就咸)이 상소하여 이관후(李觀厚)에게 다시 엄중하게 국문(鞫問)을 더하여 정법(正法)하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5일 임오
조태언(趙泰彦)을 집의로 권현(權賢)을 장령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응교로, 조정만(趙正萬)을 형조 판서로, 오원(吳瑗)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6일 계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람들의 말은 이미 한 꿰미에 꿴 것 같았는데, 성상(聖上)의 마음은 삼지(三至)176) 에도 동요되지 아니하여 비록 거취(去就)가 같지 않은 것으로 신을 책망하였으나 사수(死囚) 배윤명(裵胤命)이 무고였음을 자복(自服)하였으니, 진실로 논하지 않을 바입니다. 박규문(朴奎文)의 상소에 어찌 일찍이 권세를 두려워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까? 5,6년 동안을 손꼽아 보니 단지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만 날로 더욱 험한 데로 기울어질 뿐만 아니라, 신이 사사로운 은혜를 돌보며 추제(推擠)177) 해도 떠나지 않은 죄가 아님이 없는데, 대간의 말과 유생의 상소가 겨우 성지(聖旨)의 통렬한 배척을 당하였으나, 돌로 눌러도 죽순은 올라온다는 말이 오히려 시험보는 자리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에게서 나왔는데, 문구(文句)의 출처를 찾고 어의(語意)의 맥락을 추상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추운 때가 아닌데도 떨리게 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기를,
"이 마음의 굳음은 경(卿)이 작위를 떠나거나 처하는 데에 있지 않다. 항상 경을 미워하는 자가 처분에 울분한 마음을 품고 감히 보신(輔臣)에게 분풀이를 하여 다른 일에 협잡을 하니, 통탄스러움을 견디겠는가?"
하였다.
6월 28일 을유
이때에 유신(儒臣)을 소대(召對)함이 거의 거르는 날이 없었고 더러는 야분(夜分)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이 절제(節制)와 조섭(調攝)에 해로움이 있다는 것으로 진계(陳戒)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심한 추위와 한더위에도 폐강(廢講)함은 일찍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며, 또 들으니, 열성조(列聖朝)에서도 한겨울에 개강(開講)을 한 규례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성대한 뜻을 볼 수 있으므로 내가 우러러 본받으려고 할 뿐이다."
하였다. 날씨가 덥다는 것으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명하고, 도목 정사(都目政事)가 가까우니 금려(禁旅)178) 로 오래 근무한 사람을 먼저 수용(收用)하도록 하라고 신칙(申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일찍이 관무재(觀武才) 때 보니 쓸 만한 자가 없지 않았다. 우리 나라 사람은 옷을 잘 입고 밥을 잘 먹는 자는 모두 쓸 만하다고 하겠으나, 외모(外貌)가 피폐(疲弊)한 자는 진용(進用)을 바라기가 어렵다. 영남(嶺南) 사람으로 볼 것 같으면 지난날에 고관 대작(高官大爵)의 후손들이 더러 겸춘추(兼春秋)로 들어오는데 용모가 심히 피폐하였다. 이는 대개 거처와 양육(養育)이 넉넉지 못한 소치이니, 동인(東人)들의 풍속이 본래 스스로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이(李珥)가 유성룡(柳成龍)·이원익(李元翼)을 천거하여 발탁(拔擢)하였으니, 오로지 알고서 등용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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