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4권, 영조 13년 1737년 7월

싸라리리 2025. 9. 1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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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정해

밤에 유성(流星)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 갔는데, 형상이 주먹과 같았으며 꼬리의 길이는 3,4척 가량이었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영남(嶺南) 사람을 대우하는 것을 다른 도와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만약 구별을 둔다면 어찌 형적(形迹)의 다름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어찌 합천(陜川)에 정희량(鄭希亮)이 있었다고 하여 합천 사람을 모두 버릴 것인가? 지금 한낱 김성탁(金聖鐸) 때문에 영남 사람을 모두 배척한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영남의 풍속이 벌써 한층 변하였습니다. 옛날의 경우는 모두 남인(南人)이었는데, 지금은 그 중에 더러 갈리어 나가 다른 자가 있으니, 비록 이름은 남인이라고 하나 기사년179)  의 일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세우는 자도 있었고, 비록 본래는 명류(名流)라고 일컬었으나 무신년180)   난역에 동참한 자도 있었으며, 또 더러는 함께 기사년의 일을 미워하여 무신년 난역에 들어가지 않은 자도 있었으니, 지금 한낱 김성탁 때문에 영남 사람 전부를 그르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옛부터 영남에 이름난 사람이 배출(輩出)되고 인재(人材)가 부쩍 일어났는데, 지금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몰라서 그럴 것이다. 재주는 다른 세대에서 빌려 오지 못하는 것이니, 지금인들 어찌 전혀 인재가 없겠는가? 침체(沈滯)된 정치를 소통시켜서 상하가 서로 힘쓰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좌도(左道)는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살았기 때문에 삼가고 신칙(申飭)하는 기풍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우도(右道)는 조식(曹植)이 살았기 때문에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풍습이 도리어 유폐(流弊)가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유신(儒臣)들이 늘 유학(儒學)의 설(說)을 진달하지만, 나는 항상 그 말류(末流)의 폐단을 염려한다. 조식은 기절이 높지 않음이 아니며 자품(姿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나, 말류의 폐단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지금의 유학이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과연 그런 폐단이 있었으니, 정인홍(鄭仁弘) 역시 조식의 제자입니다."
하였다. 장령(掌令) 권현(權賢)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요즈음 관방(官方)181)  이 외잡(猥雜)하니,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김세연(金世衍)의 미치광스럽고 혼미함과,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이형수(李衡秀)의 용렬하고 비루함 같은 것으로 사로(仕路)에 결점이 되거나 더럽힐 수 없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그리고 해유(解由)182)  로 월등(越等)183)  하는 것은 곧 금석(金石)의 법전인데, 울진 현령(蔚珍縣令) 남윤관(南胤寬)이 본자리를 선망(羨望)하고 은밀히 촉탁하여 〈외임(外任)으로〉 나갈 것을 도모하였으니, 청컨대, 잡아다 문초하도록 하고, 호조 낭관(戶曹郞官) 역시 파직(罷職)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평해 군수(平海郡守) 박건(朴鍵)은 일찍이 영장(營將)으로 재임 중 부모의 나이를 끌어올려서 체임(遞任)을 도모하였고, 본군에 제수됨에 미쳐서는 그의 아비가 그의 형 박횡(朴鐄)의 삼화(三和) 임소(任所)에 있어서 멀기가 천리일 뿐만이 아닌데, 염연(厭然)히 가리고 숨겼으니, 청컨대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7월 2일 무자

밤에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은 주먹과 같았으며 꼬리의 길이는 6,7척 가량이었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권혁(權爀)을 사간으로, 홍계유(洪啓裕)·정이검(鄭履儉)을 부수찬으로, 김상로(金尙魯)를 부교리로, 조영국(趙榮國)을 교리로, 오언주(吳彦胄)를 응교로, 이수항(李壽沆)을 도승지로 삼고, 특별히 김시형(金始炯)을 제수하여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3일 기축

밤에 유성(流星)이 미성(尾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은 주먹과 같았으며 꼬리의 길이는 4,5척쯤 되었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4일 경인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조정이 화평(和平)한 복은 없고, 무너지고 분열되는 형상만 있습니다. 어육(魚肉)이 도마와 칼 사이에 처하였는데 맵고 닮을 조제(調劑)해야 할 책임을 맡기시니, 본래 이런 이치가 없습니다."
하고, 바로 사직(辭職)을 하자,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돈유(敦諭)하도록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6일 임진

가뭄이 심하므로 3품관(三品官)을 보내어 목멱산(木覓山)184)  ·삼각산(三角山)·한강(漢江)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도록 하였다.

 

7월 7일 계사

임금이 기우(祈雨)하는 일로 국좌(鞫坐)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8일 갑오

소대를 행하였다.

 

7월 9일 을미

관원(官員)을 보내어 용산강(龍山江)·저자도(楮子島)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도록 하였다.

 

교리(校理) 조명리(趙明履)가 상소를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역경(易經)》의 학문은 반드시 먼저 계몽(啓蒙)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 무더위를 만나 오래도록 법강(法講)을 정지하였으니, 청컨대, 이런 시기에 때때로 이 글을 열람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10일 병신

함경도(咸鏡道)에 충재(蟲災)가 있었다.

 

7월 11일 정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2일 무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오랫동안 가물었기 때문에 내일은 몸소 사직(社稷)에 나아가 기도한다는 것을 명하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몸소 빌어야 반드시 비가 오고 대신이 대신 행하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자 할 뿐이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박필주(朴弼周)를 집의로, 심성진(沈星鎭)을 사간으로, 정희보(鄭熙普)를 헌납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정언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설서(說書)로, 이정보(李鼎輔)를 부교리로, 권영(權瑩)을 부수찬으로, 송진명(宋眞明)을 형조 판서로, 이종성(李宗城)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유건기(兪健基)를 승지로, 유최기(兪最基)를 수찬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병조 참판으로, 임상원(林象元)을 대교(待敎)로, 이제원(李濟遠)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7월 13일 기해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재실(齋室)에 들어갔다.

 

7월 14일 경자

임금이 단(壇)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고 승지(承旨)에게 형조(刑曹)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불러 감옥에 있는 죄수를 구별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7월 15일 신축

관서(關西) 지방에 얼음과 우박이 번갈아 내려 사람과 동물이 맞아 죽었다.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처음 이현필(李顯弼)의 글이 나왔을 적에 그 내용이 진실로 숨은 것을 들추어내고 무고함이 많아서 더러는 그가 광망(狂妄)하여 죽음을 아끼지 않는 자인가 의심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그를 취하여 성상(聖上)께서 담소(談笑)하면서 처리한다면, 그 사람은 망령된 사람으로 돌아가고 성상의 덕(德)은 크게 빛날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전하(殿下)께서 하루라도 연금 매골(涓金買骨)하는 일을 하여 천리마를 오도록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185)  , 마음이 늘 경경(耿耿)186)  하여 일을 따라 그 마음이 촉발되므로 격외(格外)의 글을 뽑아 취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본의(本意)를 따져 보면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또 신이 영남 사람을 천거하여 올린 것으로 책망을 당했으나, 일이 나라의 형벌과 정치에 관계가 있으므로 미세한 혐의에 구애되지 않고 한번 진달합니다. 김성탁(金聖鐸)이 망언으로 장차 죽음에 이르는 것은 진실로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실제의 경우는 이현일(李玄逸)이 근본이고 김성탁은 지엽(枝葉)인데, 근본인 이현일은 집안에서 편안히 죽게 하고 지엽인 김성탁은 형장(刑杖)에 의해 죽게 한다면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조정에서는 처음에 역률로써 이현일의 죄를 처단하지 않았는데, 난역을 비호했다는 것으로 김성탁을 책망한다면 거의 백성을 속이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금석(金石)의 법전은 스스로 절차와 차례가 있으니, 난역을 비호했다는 죄율을 가벼이 김성탁에게 시행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리고 선천(先天)의 설에 이르러서는 어찌 특별하게 숨겨진 실정이 있어 한사코 국문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의 명분론이 너무나 기승을 부리고 왕옥(王獄)의 죄정(罪情)에 대한 의논이 공평을 잃었으니, 애석합니다. 전하의 조정에 일찍이 한낱 장석지(張釋之)187)   같은 자가 없단 말입니까? 나라에 일이 있으면 가부를 논하여 서로 구제하는 것은 삼대(三代)188)  부터 벌써 그러하였습니다. 지금의 경우는 한 사람이 창도하면 만 사람이 함께 소리치며 호응하고, 외방에 있으면 더러 그 중도를 지나칠까 염려하다가 입대(入對)하면 모두 그를 죽여야 옳다고 말하여 마음과 입은 행동이 다르며 차마 눈앞에서도 거짓말을 잘합니다. 한낱 김성탁의 죽고 사는 것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이 없으나, 오늘날 사대부의 규모와 기상이 한심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한마디 말이 입에서 나오면 반드시 명의(名義)에 죄를 얻게 되어 신을 몰아대는 자가 있을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 만약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고 신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관계가 중한 곳에는 살피고 삼가함이 마땅한데, 윗 조항에 진달한 바는 이미 너무 한심스러운 데 관계된다. 김성탁에 이르러서는 관계가 어떠한데 끝내 장폐(杖斃)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마음에 만약 지나치다고 여겼다면 화락하고 조용하게 진달함이 오히려 혹 가하지만, 그 말한 바가 극도로 어긋난 데 관계되었다. 만약 이현일에게 법대로 다하지 않았다고 하여 난역을 비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춘추 필법(春秋筆法)으로 죄를 단정하는 데는 어떠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그 상소를 되돌려 주고 그 관직을 삭탈하도록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때 김성탁의 부생(傅生)의 의논을 감히 입에서 아무도 발언할 수 없었는데, 유독 조현명(趙顯命)이 강개(慷慨)하게 글로 진달하였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5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註 185] 연금 매골(涓金買骨)하는 일을 하여 천리마를 오도록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 춘추 전국 시대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현명한 이를 얻으려고 곽외(郭隗)에게, "훌륭한 사람을 얻어 같이 다스리면서 선왕(先王)이 제(齊)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하니, 선생이 그런 사람을 알려 주시오." 하자, 곽외가 말하기를, "옛날 어떤 임금이 연인(涓人:內侍)에게 천금을 주면서 천리마(千里馬)를 구해 오게 했더니, 그가 죽은 말의 뼈를 5백 금이나 주고 사서 돌아왔으므로 임금이 화를 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죽은 말도 사들이는데 더구나 산 것이겠습니까? 천리마가 곧 올 것입니다.’ 하였는데, 1년이 안되어 세 마리나 왔다고 합니다. 왕께서 꼭 현명한 사람을 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저부터 쓰시면 저보다 더 현명한 자가 어찌 천리를 멀다 하여 오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소왕이 곽외를 등용하여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로부터 훌륭한 사람들이 연나라를 찾아왔다는 고사(故事).[註 186] 경경(耿耿) :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모양.[註 187] 장석지(張釋之) : 한(漢)나라 도양(堵陽) 사람. 한(漢) 문제(文帝) 때 정위(廷尉)의 벼슬로, 고묘(高廟)에 옥환(玉環)을 훔친 자가 있어서 문제가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를 중벌(重罰)에 처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대노(大怒)하자, 장석지가 가령 어리석은 백성이 장릉(長陵:한 태조(漢太祖)의 능(陵))의 한줌 흙을 훔쳤다면 이것도 중벌에 처해야 하겠습니까?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하여 천하에 공신력(公信力)을 보여야 합니다." 하고 아뢴 고사가 있음.[註 188]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의 세 왕조.
사신은 말한다. 이때 김성탁의 부생(傅生)의 의논을 감히 입에서 아무도 발언할 수 없었는데, 유독 조현명(趙顯命)이 강개(慷慨)하게 글로 진달하였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임금이 몸소 기도해도 비가 오지 않으므로 내일 다시 태묘(太廟)에 나아가 기도한다고 명하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약원(藥院)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현기증 및 팔 부분에 환후(患候)가 있으니, 매일 계속 수고롭게 거동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섭행(攝行)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직(社稷)에 기도하여 비를 얻지 못하였다면 어찌 다시 종묘(宗廟)에 나아가 기도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사직에는 몸소 행하고 태묘(太廟)에는 섭행하게 한다면, 예의(禮儀)에 있어서 옳지 못하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조현명이 상소로 김성탁의 사건을 논한 것에 이미 죄정(罪情)에 대한 의논이 공평성을 잃었다고 하였고, 또 전후로 집법자(執法者)의 의논을 배척한 것은 그 말이 진실로 사리에 어긋납니다. 사람의 의견은 같지 않으니, 만약 단지 김성탁을 이현일에 비교하여 간격이 있다고 운운한다면 오히려 혹 가하겠지만, 지금 곧 이현일과 아울러서 분개하고 미워하는 뜻이 없다면, 일이 명의(名義)에 관계되는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엄중하게 책벌(責罰)을 더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원군(豐原君)189)  의 병통이 과격함에 있으니, 지금 글을 쓴 것이 너무 지나쳤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본래 어리석은 병통이 있으며, 그의 명론(名論)과 지망(地望)으로서 이 의논을 창도(倡道)하였으니, 실제로 세도(世道)에 깊은 우려가 됩니다. 이현필(李顯弼)에 이르러서 광망(狂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른 것은 장후(奬詡)190)  하는 듯함이 있으니, 그 폐단이 아마도 무궁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겨우 영남 사람의 일로써 죄를 받고서 지금 또 이 상소를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7월 16일 임인

임금이 바야흐로 태묘(太廟)에 나아가는데 하늘에서 비가 내려 어포(御袍)가 다 젖었으나 오히려 우산을 펴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태묘에 들어가자 이미 큰 비가 패연(霈然)히 쏟아져 내리므로 제학(提學)에게 제문(祭文)을 고쳐 짖도록 하고 보사(報謝)하는 글귀를 더 넣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7월 17일 계묘

친향(親享)의 예를 마치고 궁궐에 돌아와서 득우지희(得雨志喜)에 관한 시(詩) 1절(絶)을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해 올리도록 명하였다.

 

7월 18일 갑진

좌의정 김재로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조현명(趙顯命)의 상소로 인하여 비록 인혐(人嫌)하지 말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나, 끝내 감히 안연(晏然)하게만 있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만약 이현일(李玄逸)을 난역이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말할 것이 없거니와, 진실로 그가 난역임을 알았다면 어찌 애당초 형벌을 실수한 것 때문에 아울러 신구(伸救)를 한 자도 난역이 아니라고 이르겠습니까? 그윽이 보건대, 중신(重臣)의 말뜻은 이현일까지 아울러 깊이 분개하고 통쾌히 끊어버릴 생각은 적은 듯합니다. 설령 장희재(張希載)가 신사년191)   전에 먼저 죽었을 경우 역시 난역이 아닌 것으로 단정하여 비록 그를 신구(伸救)하는 자가 있더라도 난역을 비호했다고 말할 수 없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벌써 하교하였는데 경(卿)은 어찌해서 자기 주장만 고집하며 옥신각신하는가?"
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조상경(趙尙絅) 등이 역시 상소로 진달하여 옥사의 의논이 공평성을 잃었다는 내용으로 변론을 하자, 예사 비답을 내렸다.

 

7월 20일 병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은 장점과 단점이 서로 반반이니, 그를 훌륭한 재목을 만들려고 한다면 엄중하게 벌을 주었다가 다시 기용하는 것이 어찌 해롭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며칠 전의 처분은 지극히 온당하였다. 박사수(朴師洙) 등 여러 사람을 이미 이재(李栽)를 천거한 것으로 삭직하였다면, 김성탁(金聖鐸)을 신구(伸救)한 자들을 어찌 이보다 감하겠는가?"
하였다.

 

예조 참의(禮曹參議) 신만(申晩)이 조현명(趙顯命)의 상소를 논핵하기를,
"인심이 비록 함닉(陷溺)하였다 하더라도 죄상을 드러내어 소송하는 글이 다시 신구(伸救)의 대상인 조덕린(趙德隣)의 손에서 나왔으니, 김성탁을 위하는 처지로서는 관후(寬厚)하겠지마는, 유독 명의(名義)가 지극히 크다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중경(李重庚)·동부승지(同副承旨) 유건기(兪健基)가 조현명을 신구(伸救)하는 상소에 말하기를,
"조현명은 세상에 없는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암아(媕婀)192)  의 속습(俗習)을 깊이 부끄러워하여, 진실로 소회(所懷)가 있으면 모두 말하여 숨기지 않으며 좌우로 계산하고 헤아리기를 즐기지 않습니다. 지금 상소로 김성탁을 논한 뜻은 단지 성상께서 형살(刑殺)을 할 때에 살피고 삼가하시어 세쇄(細瑣)한 사이에도 비교하고 헤아리기를 바랐을 뿐이었습니다."
하니, 상소를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박사정(朴師正)을 이조 참의로, 조석명(趙錫命)을 경기 관찰사로, 윤혜교(尹惠敎)를 좌참찬으로, 정이검(鄭履儉)을 교리로, 서명신(徐命臣)을 부교리로, 홍창한(洪昌漢)을 부수찬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수찬으로, 이철보(李喆輔)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오원(吳瑗)을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삼았다.

 

7월 21일 정미

도승지(都承旨) 이수항(李壽沆) 등이 상소하여 조현명(趙顯命)을 삭직(削職)한 과실을 말하자, 임금이 벌써 하교했다는 것으로 비답을 내렸다.

 

7월 22일 무신

윤순(尹淳)을 예조 판서로, 서명형(徐命珩)을 사간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정언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장령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부교리로, 유최기(兪最基)를 수찬으로, 이성중(李成中)을 겸설서(兼說書)로, 이석신(李碩臣)을 문학(文學)으로, 정언섭(鄭彦燮)을 도승지로, 남태온(南泰溫)·조명겸(趙明謙)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3일 기유

수찬(修撰) 한익모(韓翼謨)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인심이 함닉(陷溺)하여 조현명(趙顯命) 같은 자는 김성탁(金聖鐸)을 비호하는데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니, 김성탁이 오늘날 함부로 날뛰도록 만든 것은 조현명의 무리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삭직(削職)의 벌이 너무 너그러운 데 실수된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2,3명의 승선(承宣)이 그 말을 전습(傳襲)하고 투소(投疏)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청컨대, 더 견책하여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중신(重臣)은 사정(事情)을 헤아리는 데 알맞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미 처분을 내렸는데도 지금 난역을 보호한다는 것으로 배척하니, 또한 협잡(挾雜)하는 뜻이 있다. 승선(承宣)은 그 직을 체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4일 경술

정언(正言) 이명곤(李命坤)이 상소하여 조현명(趙顯命)을 논핵하고 먼 변방(邊方)으로 내치도록 청하였고, 또 여러 승선(承宣)을 견책하여 내치도록 청하였으며, 교리(校理) 조명리(趙明履)·수찬(修撰) 홍창한(洪昌漢) 역시 상소하여 그를 논핵하고 또 빨리 국청(鞫廳)을 열도록 명할 것을 청하자, 아울러 상소를 도로 돌려주도록 명하였다가, 승정원(承政院)에서 도로 받아들이고 비답을 내리도록 계청(啓請)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5일 신해

주청사(奏請使) 서명균(徐命均) 등을 인견(引見)하고, 매사에 힘쓰도록 유시(諭示)하여 보냈다.

 

교리(校理) 정이검(鄭履儉)이 상소하여 조현명(趙顯命)을 신구(伸救)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성탁(金星鐸)이 드러나게 이현일(李玄逸)을 위해 변명을 한 것은 진실로 지극히 놀라우나, 필경 죄를 심리하여 처단할 것이 도리어 이현일보다 더함이 있었으니, 이에 조현명이 근본과 지엽의 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뜻이 어찌 일찍이 이현일이 처음에 죄가 없었으나 오늘날 시의(時議)의 억제하는 바와 같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그렇더라도 천하의 악(惡)은 일반(一般)이요, 천하의 호역(護逆)도 일반인데, 오늘날 조정 신하의 난역(亂逆)을 다스리고 명의(名義)를 중하게 여기는 자들이 어찌 사리에 어긋나서 서로 합심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아! 19일의 해와 별처럼 밝은 하교(下敎)193)  는 만세(萬世) 군신(君臣)의 기강을 세울 만하고, 임징하(任徵夏)를 성토하는 전형(典刑)은 백대 난역의 마음을 징계할 만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하를 섬기고 선조(先祖)에 은혜를 입은 자는 그 통렬히 미워하고 엄중히 끊기를 또한 반드시 오늘날 김성탁을 처치함과 같이 해야 하는데, 이름이 죄적[丹書]에 있는 자 【이건명·조태채를 가리킴.】 를 감히 대신(大臣)이라고 일컬으면서 힘껏 신설(伸雪)을 청하고, 몸소 역신(逆臣)을 신구(伸救)하는 무리는 연이어 청환(淸宦)의 자리에 의망(擬望)되어 공공연히 발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난역을 비호한 죄율 역시 경중(輕重)과 저앙(低昂)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비록 국수(鞫囚)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관후(李觀厚)의 두 글자 흉언(凶言)은 어떤 부도(不道)인데, 대계(臺啓)가 윤허를 받은 뒤에 서둘러서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니, 중앙과 지방에서 의심하고 미혹됨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습니다. 동일한 국수(鞫囚)인데도 하나는 엄중하게 하고 하나는 느슨하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상소를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7월 26일 임자

조덕린(趙德隣)이 강진현(康津縣)에 이르러서 죽었다.

 

부교리(副校理) 서명신(徐命臣)이 상소하기를,
"이현일(李玄逸)은 기사년194)   흉소(凶疏)이외에 갑술년195)   국옥(鞫獄) 때의 초사에도 성명(姓名)이 낭자(狼藉)하여 흉언(凶言)이 망측(罔測)하였으며, 그가 고(故) 판서(判書) 정경세(鄭經世)의 비문(碑文)을 찬술하기에 미쳐서는 잇달아 기록하면서 성모(聖母)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그속에 기록하지 않아 본가(本家)에서 지금까지 묻어 두었으니, 이것으로 말하더라도 난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조현명(趙顯命)이 두 사건으로 탄핵을 받았는데, 이현필(李顯弼)의 경우는 칭양(稱揚)하는 뜻이 있었고, 김성탁(金聖鐸)의 경우는 난역을 비호했다고 논하는데도, 조금도 꺾여져 사죄하거나 부끄럽게 여겨 굴복하는 말이 없으며, 드러나게 남을 능멸하고 스스로 자긍(自矜)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조현명이 붉은 깃발을 한 번 세우자 편을 드는 자가 반수가 넘었으니, 세도(世道)에 방해됨은 다른 사람에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간신(諫臣)과 유신(儒臣)의 상소를 따라서 엄중한 처분을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정이검(鄭履儉)은 조현명을 위해 변명하여 서로 관계되지 않은 일을 끌어대어 말하는 자를 위협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엄하게 죄벌(罪罰)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상소를 도로 돌려주도록 명하였고, 교리(校理) 조명리(趙明履) 역시 상소하여 조현명을 중형으로 다스리도록 청하였으나, 상소를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7월 27일 계축

밤에 유성(流星)이 실성(失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 갔는데, 형상이 바리때와 같았으며 꼬리의 길이가 4, 5척 가량이었고, 빛깔은 붉은색이었으며 광채가 땅에 비치고 소리가 있었다. 뒤에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유성(流星)의 크기가 주발 같았는데, 작은 별 6,7개가 따라 떨어졌고, 처음에는 7,8장(丈) 길이의 나무와 같았으나 나중에는 넓은 베[布]가 꼬불꼬불한 형상과 같았으며,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는데, 청대(靑臺)196)  에서 보고한 바가 지극히 소우(疏虞)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재앙을 만나 경동(警動)하는 경계를 진달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서명형(徐命珩)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계언(啓言)하기를,
"이현일(李玄逸)의 난역(亂逆)을 김성탁(金聖鐸)이 옳게 여겼고, 김성탁의 흉언(凶言)을 조현명(趙顯命)이 신구(伸救)하여 이현일을 위해 변명한 자는 국문(鞫問)하고 김성탁을 보호한 자는 삭직(削職)했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조현명을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현필(李顯弼)은 과거의 제술이 나온 후로는 모두가 무상(無狀)하다고 말하였으나 지평(持平) 이연덕(李延德)이 시골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이현필을 신구(伸救)하면서 현량 방직(賢良方直)한 선비가 말한 것으로 죄를 얻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소는 바로 상달(上達)해야 마땅한데, 혹은 본도(本道)에 올리고 혹은 가동(家僮)에게 대신 전하여 마침내 중간에서 유실(遺失)하는 데 이르렀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이연덕(李延德)의 상소는 빨리 가져다 보고 곧 핵실하여 처단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윤득징(尹得徵)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계언(啓言)하기를,
"정이검(鄭履儉)은 직책이 경연[經幄]에 있으면서 감히 조현명(趙顯命)을 영호(營護)하는 말을 진달하고 19일 하교(下敎)를 빙자하여 임금의 총명을 형혹(熒惑)하고 선류(善類)를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청컨대, 정이검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이연덕(李延德)의 상소는 받아들이도록 명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윤급(尹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이검의 상소는 명의(名義)에 죄지은 자를 두둔하여 말뜻이 방자하였으며, 그 중에도 이름이 죄적[丹書]에 실려 있는 자를 신설(伸雪)하도록 힘써 청했다는 등의 말을 홀연히 끌어들여 임금의 귀를 의심하고 어지럽게 하였으며, 선류(善類)를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그 또한 교묘하고 참혹합니다. 대저 양신(兩臣)197)  을 신설(伸雪)하는 의논이 진실로 대의를 밝히고 국시(國是)를 바로잡는 뜻에서 나왔다면, 돌아보건대, 오늘날 징토(懲討)하는 의논에 무슨 관계가 되기에 이에 감히 끌어다 말하여, 한편으로는 난역을 비호하는 상소를 곡진히 해명(解明)하고 한편으로는 조정에 있는 신하를 널리 무함하였는데, 양신(兩臣)을 죄주려는 것이 마침 대리(代理)198)  를 원수로 여기는 데로 돌아가기에 족하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무엄하고 절패(絶悖)한 정상은 생각건대, 성상의 밝은 감식(鑑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몇해 전에 진신(搢紳)들의 상소하는 말석에 따라서 참여하여 간략하게 억울함을 펴도록 하는 청을 진달하였는데, 어찌 그 말이 족히 분변할 것이 없다고 해서 스스로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상경(趙尙絅)·참의(參議) 박사정(朴師正)·승지 김응복(金應福)이 일찍이 진신들의 상소에 참여하였다고 하여 소를 올려 인혐(引嫌)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어제도 비답(批答)을 하지 않았다. 만약 즉시 계문하지 않았다면 그 어찌 이것으로써 지나치게 고집할 것이 있겠는가? 그 대거(對擧)한 바도 혹은 본사(本事)에 맞지 않아서 비답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자기 주장만 고집하는 것이겠는가?"
하고, 모두 도로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정이검(鄭履儉)이 상소한 것으로 인혐(引嫌)하자, 다시 무엇을 개의하며 집착하느냐는 것으로 비답을 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리가 아무리 어두워지고 인심이 아무리 함닉(陷溺)되었다 하더라도 그 크게 관계되는 곳에 있어서 지금 인신(人臣)이 된 자가 어찌 감히 기회로 삼아 서로 질투하고 헐뜯기를 일삼는가? 김성탁이 아무리 윤리(倫理)가 없어 감히 이현일(李玄逸)을 비호하였더라도 이런 경우에는 나라에서 그에 해당한 법이 있으니 스스로 의당 처분할 것이며, 조현명(趙顯命)은 명의(名義)가 중도를 지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명의에 어긋남을 범하는 데로 돌아갔으니, 그를 엄중히 처분하여 훌륭한 재목을 만들려는 것이다. 한익모(韓翼謨)는 다만 조현명만을 배척하면서 무슨 불가함이 있기에 지난해의 일을 끌어들여 감히 무한한 억탁(臆度)을 만들어 내는가? 정이검(鄭履儉)은 관계가 중한 곳에 언어(言語)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비답으로 신칙하였고 혹은 비답도 내리지 않은 것은 생각한 바가 있어서였는데 힘써 이기기를 일삼았으니, 이 무슨 분의(分義)인가? 아! 내가 비록 불초하나 선왕(先王)을 사모하는 마음은 어찌 힘써 진달하기를 기다리겠는가마는 이와 같은 즈음에 스스로 불효한 데로 돌아가게 되었다. 40년 전에 처분한 광명스러운 일을 다시 오늘에 제기시켜 시상(時象)의 파란을 일으켰으니, 내가 장차 무슨 낯으로 다른 날 지하에 돌아가 〈선왕을〉 뵙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아픔이 마음속까지 뻗친다. 아! 여러 신하들이여, 이 하교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기기를 힘쓰는 데 골몰한다면 임금을 무시하는 신하에게는 저절로 다스리는 법전(法典)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7월 28일 갑인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이검(鄭履儉)의 상소는 사당(私黨)을 비호하는 데 급급하여 천만 부당하게 서로 가깝지 않은 일을 끌어대고는 심지어 이름이 죄적[丹書]에 있는 자를 신설(伸雪)하도록 힘써 청했다고 하였으며, 곧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여러 신하를 성모(聖母)를 무욕(誣辱)한 흉적(凶賊)에 비교하고 언뜻언뜻 들락거리며 성총(聖聰)을 형혹(熒惑)하고 선류(善類)를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는 지반(地盤)으로 삼았으니, 어찌 그 무엄하고 윤리가 없음이 여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아! 저 분수를 범하고 의리를 어기는 무리들이 비록 명의(名義)를 원수로 여겼더라도 4,50년을 내려오면서 오히려 감히 손발을 노출시켜 공공연히 말하며 드러나게 변명하지 못한 것은 국법을 두려워해서 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이검이 곧 감히 앞장서서 투소(投疏)하고 이현일(李玄逸)·김성탁(金聖鐸)을 비호함에 달가운 마음으로 하여 오직 그 의논이 행하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함부로 제목(題目) 밖의 일을 끌어들여 서로 대거(對擧)하며 협지(脅持)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마음을 써서 계책을 세운 것이 진실로 지극히 교활하고 참람합니다. 이는 대개 일종의 당인(黨人)들이 무릇 명분과 의리에 관계되는 일에는 매양 배치(背馳)되었는데 그 연원(淵源)이 전해 내려오고 성기(聲氣)가 서로 감응(感應)하여 기사년199)  의 여론(餘論)에 스스로 물들여진 것이니, 그 건저(建儲)를 주장한 신하들을 원수같이 질시(嫉視)하여 이재후(李載厚)의 의논을 주어 모은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신 또한 진신(搢紳)의 소(疏) 중에 동참(同參)한 사람이니, 더욱 어찌 홀로 안연(晏然)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소를 도로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7월 29일 을묘

사간(司諫) 서명형(徐命珩)이 상소하여 하교(下敎) 중에, ‘불효로써 어떻게 다른 날 지하에 돌아가 〈선왕을〉 뵙겠는가?’ 하는 등의 글귀를 환수하도록 청하자, 또 상소를 도로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숭재(崇宰)와 삼사(三司)의 상소를 비답 없이 도로 내린 것은 진실로 이전에 없었던 과실이며, 위세와 존엄을 폄굴(貶屈)하여 문득 감히 듣지 못할 교지(敎旨)를 내린 데 이르러서는 왕언(王言)의 체모에 손상이 있으므로 진계(陳戒)합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30일 병진

부교리(副校理) 조영국(趙榮國)이 상소를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현명(趙顯命)을 귀양보내라는 청과 정이검(鄭履儉)을 삭직하여 내쫓으라는 계달은 그 용의 주도(用意周到)하게 구함(構陷)한 정상을 굽어 통촉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오히려 능히 통렬하게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윤급(尹汲)의 패소(悖疏) 중에 ‘대리를 원수로 여긴다.[讎代理]’의 3자는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오늘날 전하께서 주벌(誅罰)을 엄주히 하고 여러 아랫사람들이 성토하려는 바는 원래 대리(代理) 한 가지 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데, 그가 어찌 감히 이러한 말로써 한 세대에 화근을 전가(轉嫁)시키려는 계책을 행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그 윤의(倫義)를 밝히고 제방(隄防)을 엄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엄하게 견책하여 치죄(治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상소를 도로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문학(文學) 이석신(李碩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유엄(柳儼)과는 본래 조금도 마음에 걸리는 혐의나 원망도 없었는데, 무신년200)   5월에 오래도록 호서(湖西)에 머물면서 유엄이 성(城)에서 도망갈 때의 일을 매우 자세히 듣고 알았습니다. 대개 유엄이 홍주(洪州)에 있을 적에 갑자기 거짓 경보(警報)로 인하여 단신으로 도망쳐 나와 어미를 데리고 갈 여가도 없었으며, 두세 관속(官屬)을 의뢰(依賴)하여 각자가 한밤중 창졸(倉卒)한 즈음에 부호(扶護)하여 혹은 산사(山寺)에 투숙(投宿)하고 혹은 촌사(村舍)에서 걸식하기도 하였으니, 그 거조(擧措)의 조망(躁妄)함과 경상(景狀)의 해괴함은 많은 사람이 눈으로 목격한 바입니다. 더구나 그 일이 안정된 후에 공로(功勞)가 있는 여러 사람에게 상(賞)을 나누어 줄 적에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고 다과(多寡)가 현저하게 차이가 남을 모면하지 못하여, 저들 무리로 하여금 공을 다투며 관문(官門)이나 빈 시장 사이에서 싸움을 하였다 하니, 그 말은 더욱 놀랄만합니다.
그리고 대계(臺啓)가 한번 발단되자 도로 중상 모략을 당했으니, 유엄의 등등(騰騰)한 기세(氣勢)는 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더하였습니다. 호서(湖西)를 안찰(按察)할 때에 미쳐서는 더욱 방자하고 탐폭하여 호서 사람들이 오히려 모두가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하고 손가락질하여 지목하며 관장(官長)된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므로, 신의 논죄(論罪)한 바의 실정이 이와 같을 따름이었습니다. 단지 유엄의 인아 족척(姻婭族戚)으로서 현달(顯達)한 자가 조정에 널려 있어서 신의 계달이 한번 발단되자 덫과 함정을 사방에 펴서 동료 대간으로 당초에 신과 이론(異論)을 세우지 않은 자도 도리어 신이 두 번째 상소한 뒤로는 배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인(婚姻)을 언약한 납언(納言)201)  도 방금 발생한 의논을 정지시켰고, 아전(亞銓)202)  으로서 인숙(姻叔)203)  이 된 자는 심복(心腹)이 될 사람을 뽑아 모아서 백지(白地)에 신을 무함(誣陷)하고 유엄을 두둔하는 계책을 삼아, 위로는 천청(天聽)을 속이고 아래로는 사당(私黨)을 비호하며 신을 함정 속에 밀어 넣으려고 하였으니, 애석합니다. 백발이 된 유신(儒臣)은 어찌 자애(自愛)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친구를 팔아 영달(榮達)을 도모하였고 권세를 좇아 아첨하였으며, 진달하여 아뢸 즈음에 신은 무식하여 몹시 패악한 사람으로 논하고, 유엄은 마음을 닦아 자신을 삼갈 줄 아는 자로 포장하였으며, 요행으로 자계(資階)를 뛰어넘어 이조 낭관(吏曹郞官)의 자리를 차지하여서는 남들이 웃고 꾸짖는 것을 따라 하였으니, 그 역시 괴로웠을 것입니다. 비록 도신(道臣)의 폄목(貶目)으로 보더라도 창황 실조(蒼皇失措)하여 조소(嘲笑)를 끼쳤고, 적곡(糴穀)을 나누어 주면서도 고르게 하지 못하였다고 말했으니, 대저 창황 실조한 것과 적곡을 고루 분급하지 못했다는 것은 대개 유엄이 성(城)에서 도망친 것과 공 있는 자에게 상을 준 것 등의 일을 지적한 것인데, 이것은 곧 하나의 공안(公案)이었습니다.
아! 당시 머리를 감싸쥐고 쥐같이 숨었으며, 산사(山寺)의 중에게 기탁(寄托)한 자가 누구이며, 옷을 빌려 입고 갓을 빌려 쓰고 불쌍하게 창감(倉監)에게 걸식하던 자가 누구였습니까? 중이나 창감이 죽지 않았고 홍양(洪陽)204)  이 저기 있으니, 비록 스스로 엄폐하려고 하나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이 그 때에 아울러 이명언(李明彦)에 대한 계달을 발론하였는데, 이것은 실로 깊고 원대한 염려에서 나왔습니다. 대저 황적(黃賊)205)  은 이명언의 외족(外族)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았으며, 황적이 피중(彼中)에 들어갔다는 말은 장문(狀聞)을 올리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이명언이 오래도록 서변(西邊)에 머물러 있는 것을 사람들이 우려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신이 이른 바 이명언을 압록강 일대의 땅에 둘 수 없다는 것도 실로 이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흥경(金興慶)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김흥경이 정이검(鄭履儉)·조영국(趙榮國)의 상소로 인혐하고, 인하여 재신(宰臣)과 삼사(三司)의 상소에 비답이 없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진달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의 ‘광륜(光倫)206)  ’ 두 글자는 해와 달같이 밝음이 있는데, 지금 어찌 다시 그 때의 일을 제기하는가? 신축년207)   뒤에 조제(調劑)한 뜻을 이미 잘 이루지 못하였고, 또 지난해의 일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음 아프고 속상함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경종(景宗)의 마음도 꼭 나와 같았을 것이다. 여러 신하의 상소는 비답을 내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나, 수작하고 응답함을 그만두지 않으면 앞으로 풍랑이 그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글을 썼다가 도로 멈춘 적이 많았다. 그리고 윤급(尹汲)의 상소 중에 ‘대리(代理)’ 두 글자는 어찌 이것을 오늘날에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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